팔만대장경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은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고전 문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생성형 AI 기술인 LLM의 발전으로 팔만대장경 프로젝트가 가능해졌습니다. LLM은 거의 전문가 수준의 매끄러운 번역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 누구나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OpenAI 의 GPT-4o, Anthropic의 Claude-3.5 Sonnet Google의 Gemini-1.5 Pro와 Gemini-1.5 Flash, Stable Diffusion 의 Stable Image Ultra 및 Microsoft의 Text 분석 기술을 MAIDEPOT의 AI 자동 융복합 기능으로 결합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사용된 도구와 프롬프트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 PDF 300페이지 번역 전문가 수준의 초벌 번역"
물론 LLM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특성상 일부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고전 서적을 번역하여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날 것의 상태로 프로젝트의 양과 질과 높이는 일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번역 또는 편집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contact@maidepot.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정보: 1881년에서 1882년 사이, 아르헨티나 외교관 미겔 까네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여행하며 남긴 기록. 여행 중 경험한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당시 남미 사회, 정치, 문화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통찰을 담고 있다. 장르는 여행기이며, 문체는 섬세하고 유려하며, 때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이 돋보인다.
번역 시 고려사항:
- 19세기 후반 스페인어 문체를 유지하면서도 현대 한국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자연스러운 번역이 필요하다.
- 원문에 등장하는 다양한 문학 작품, 역사적 사건, 인물들에 대한 주석을 추가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다.
-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지명, 문화, 음식 등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독자들에게 생소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 원문의 유머와 풍자를 살리면서도 지나치게 가볍거나 경박하지 않은 어조를 유지해야 한다.
-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유려한 문체를 살려 번역해야 한다.
-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다소 편향적일 수 있음을 감안하여,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 당시 남미 사회, 문화, 정치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추고 번역에 임해야 한다.
모든 등장인물 정보:
- 미겔 까네 (Miguel Cané) : 아르헨티나 외교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문학적 감각을 지닌 인물로,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풍경, 사건들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묘사한다.
- 에르네스토 께사다 (Ernesto Quesada) : 미겔 까네의 책에 대한 비평을 쓴 작가.
- 에밀리오 미트레 (Emilio Mitre) : 까네와 함께 대영 박물관을 관람한 친구. 박식하고 지적인 인물.
- 꼬모도로 (Comodoro) : 브라운호의 함장.
- 아바떼 마스델 (Abate Mazdel) : 빌 드 브레스트 호에서 열린 열대 세례식에 참여한 승객.
- 닥터 두브레일 (Dr. Dubreil) : 까네의 오랜 친구. 베네수엘라에서 만남.
- 까를로스 로엘 (Carlos R. Rohl) : 베네수엘라 주재 아르헨티나 총영사.
- 시몬 사라가 (Simon Zárraga) :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베네수엘라 출신 의사.
- 몽시 (Mounsey) : 영국 공사. 까네와 함께 콜롬비아를 여행함.
- 미미 (Mimí) : 몽시 공사의 6살 딸.
- 디지 (Dizzy) : 몽시 공사의 5살 딸.
- 리틀 조지 (Little Georgy) : 몽시 공사의 2살 아들.
- 셰프 (Chef) : 몽시 공사의 프랑스인 요리사.
- 마에뜨르 도텔 (Maitre d’hôtel) : 몽시 공사의 영국인 집사.
- 마담 마우리 (Madame Mauri) : 빌레따에서 까네에게 숙소를 제공한 친절한 여인.
- 소피아 (Soffia) : 콜롬비아 주재 칠레 공사. 시인이기도 함.
- 까를로스 사엔스 (Carlos Sáenz) : 콜롬비아 시인.
- 에밀리오 빠르도 (Emilio Pardo) : 까네와 함께 떼껜다마 폭포를 방문한 친구.
- 에우헤니오 우마냐 (Eugenio Umaña) : 떼껜다마 폭포 지역의 대지주. 음악 애호가.
- 에밀리오 델 페로호 (Emilio del Perojo) : 스페인 공사.
- 로베르또 수아레스 (Roberto Suárez) : 까네의 친구.
- 훌리오 마야리노 (Julio Mallarino) : 콜롬비아 전 대통령의 아들.
-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 (Martín García Mérou) : 까네의 비서이자 아르헨티나 시인.
- 호세 마리아 삼페르 (José María Samper) : 콜롬비아 작가. 다작으로 유명.
- 미겔 안또니오 까로 (Miguel Antonio Caro) : 콜롬비아 작가. 베르힐리우스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함.
- 루피노 꾸에르보 (Rufino Cuervo) : 콜롬비아 작가. ‘보고타 언어에 대한 비평적 고찰’의 저자.
- 앙헬 꾸에르보 (Ángel Cuervo) : 루피노 꾸에르보의 형제.
- 꼰 (Conn) : 바랑끼야 주재 아르헨티나 영사.
모든 중요 용어 번역어:
- La Cultura Argentina: 아르헨티나 문화 – 아르헨티나 문화를 대표하는 출판사 혹은 서점
- Avenida de Mayo: 마요 거리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요 도로
- Tijuca: 띠후까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국립공원
- Goroa: 고로아 – 세네갈에 있는 도시
- Dakar: 다카르 – 세네갈의 수도
- Gironde: 지롱드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강
- Paulliac: 뽈리악 –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있는 마을
- Quinquonces: 껭꽁스 –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공원
- Turena: 뚜렌 –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지역
- Louvre: 루브르 박물관 – 프랑스 파리에 있는 미술관
- Luxemburgo: 뤽상부르 박물관 – 프랑스 파리에 있는 미술관
- Merry England: 메리 잉글랜드 – 중세 영국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표현
- Covent-Garden: 코벤트 가든 – 영국 런던에 있는 오페라 극장
- Westminster: 웨스트민스터 사원 – 영국 런던에 있는 사원
- Merry England: 메리 잉글랜드 – 중세 영국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표현
- The British Museum: 대영 박물관 – 영국 런던에 있는 박물관
- Greenyde: 그리니치 – 영국 런던에 있는 지역
- Vendée: 방데 – 프랑스 서부에 위치한 지역
- Saint-Nazaire: 생나제르 – 프랑스 서부에 있는 항구 도시
- Ville de Brest: 빌 드 브레스트 – 프랑스 여객선
- Azores: 아소르스 제도 – 포르투갈령 제도
- Guadalupe: 과들루프 –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섬
- Pointe-à-Pitre: 푸앵따삐트르 – 과들루프의 도시
- Basse-Terre: 바스테르 – 과들루프의 도시
- Saint-Pierre: 생피에르 – 마르티니크의 도시
- Martinica: 마르티니크 –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령 섬
- Fort-de-France: 포르드프랑스 – 마르티니크의 수도
- Sabane: 사반 – 포르드프랑스에 있는 광장
- bamboula: 밤불라 – 마르티니크의 전통 춤
- cacholí: 까숄리 – 마르티니크의 전통주
- Costa-Firme: 코스타피르메 –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 지역을 지칭하는 옛 용어
- La Guayra: 라 과이라 – 베네수엘라의 항구 도시
- Avila: 아빌라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근처에 있는 산
- Hotel Neptuno: 네뚭노 호텔 – 라 과이라에 있는 호텔
- Macuto: 마꾸또 – 베네수엘라의 해안 마을
- Saint-Simon: 생시몽 – 프랑스 여객선
- Puerto Cabello: 뿌에르또 까베요 – 베네수엘라의 항구 도시
- Magdalena: 마그달레나 강 – 콜롬비아를 흐르는 강
- Salgar: 살가르 –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 Barranquilla: 바랑끼야 – 콜롬비아의 항구 도시
- brisa: 브리사 – 바랑끼야에서 부는 바람
- champanes: 짬빠네 – 마그달레나 강에서 사용되던 전통적인 카누
- Antioquía: 안띠오끼아 – 콜롬비아의 주
- Jupiter: 쥬피테르 – 로마 신화의 주신
- bogas: 보가 – 마그달레나 강에서 짬빠네를 젓는 사람들
- Samarios: 사마리오 – 산타 마르타 출신 사람들
- Cartageneros: 까르따헤네로 – 까르따헤나 출신 사람들
- Mompox: 몸뽁스 – 콜롬비아의 도시
- Magangé: 마간헤 – 콜롬비아의 도시
- Angostura: 앙고스뚜라 – 마그달레나 강의 좁은 구간
- Nare: 나레 – 콜롬비아의 마을
- Guaduas: 과두아스 – 콜롬비아의 마을
- Villeta: 빌레따 – 콜롬비아의 마을
- Chimbo: 침보 – 콜롬비아의 마을
- Agua Larga: 아구아 라르가 – 콜롬비아의 마을
- Alto del Roble: 알또 델 로블레 – 보고타 사바나로 들어가는 관문
- Facatativá: 파까따띠바 – 콜롬비아의 도시
- Bogotá: 보고타 – 콜롬비아의 수도
- Cauca: 까우까 – 콜롬비아를 흐르는 강
- Boyacá: 보야까 – 콜롬비아의 주
- Cundinamarca: 꾼디나마르까 – 콜롬비아의 주
- Magdalena: 마그달레나 – 콜롬비아의 주
- Panamá: 빠나마 – 콜롬비아의 주
- Santander: 산딴데르 – 콜롬비아의 주
- Tolima: 똘리마 – 콜롬비아의 주
- Medellín: 메데인 – 안띠오끼아 주의 수도
- Cartagena: 까르따헤나 – 볼리바르 주의 수도
- Tunja: 뚬하 – 보야까 주의 수도
- Popayán: 뽀빠얀 – 까우까 주의 수도
- Santa Marta: 산타 마르타 – 마그달레나 주의 수도
- Socorro: 소꼬로 – 산딴데르 주의 수도
- Neiva: 네이바 – 똘리마 주의 수도
- Altozano: 알또사노 – 보고타 대성당 앞 광장
- cachaco: 까차꼬 – 보고타의 멋쟁이 젊은이
- ruana: 루아나 – 콜롬비아 전통 망토
- zamarros: 사마로 – 콜롬비아 전통 바지
- suaza: 수아사 – 콜롬비아 전통 모자
- Soacha: 소아차 – 콜롬비아의 마을
- San Benito: 산 베니또 – 우마냐 가문 소유의 농장
- Tequendama: 떼껜다마 – 콜롬비아에 있는 폭포
- chibcha: 치브차 – 콜롬비아 원주민
- Bochica: 보치까 – 치브차 신화에 등장하는 신
- Neuquetheba: 네우께떼바 – 보치까의 다른 이름
- Zuhé: 수헤 – 보치까의 다른 이름
- Chia: 치아 – 치브차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 Yubecahiguava: 유베까히구아바 – 치아의 다른 이름
- Huitaca: 우이따까 – 치아의 다른 이름
- Funza: 푼사 – 보고타 강의 다른 이름
- Canoas: 까노아스 – 콜롬비아의 마을
- Idacanzas: 이다깐사스 – 보치까의 은둔 후 이름
- Iraca: 이라까 – 콜롬비아의 마을
- Tunja: 뚬하 – 보야까 주의 수도
- Chincha: 친차 – 우마냐 가문 소유의 농장
- Mesa: 메사 – 콜롬비아의 고원 지대
- San Antonio de Tena: 산 안또니오 데 떼나 – 콜롬비아의 마을
- Gregorio Gutiérrez González: 그레고리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 – 콜롬비아 시인
- Rafael Pombo: 라파엘 폼보 – 콜롬비아 시인
- Edda la Bogotana: 에따 라 보고따나 – 폼보의 여성 필명
- Diego Fallon: 디에고 파욘 – 콜롬비아 시인
- Ollendorff: 올렌도르프 – 외국어 학습 교재
- José M. Marroquín: 호세 마리아 마로낀 – 콜롬비아 작가
- Ricardo Carrasquilla: 리까르도 까라스끼야 – 콜롬비아 작가
- Mosaicos: 모사이꼬 – 보고타의 문학 살롱
- Cipaquirá: 씨빠끼라 – 콜롬비아의 마을
- Fusugasugá: 푸수가수가 – 콜롬비아의 마을
- Tocaima: 또까이마 – 콜롬비아의 마을
- tiple: 띠쁠레 – 콜롬비아 전통 악기
- bambuco: 밤부꼬 – 콜롬비아 전통 음악
- Pola: 뽈라 – 콜롬비아 독립 영웅 뽈리까르빠 살라바리에따의 애칭
- Inchacate: 인차까떼 – 페루의 마을
- Santa Ana: 산타 아나 – 페루의 마을
- Chinche: 친체 – 페루의 마을
-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 – 페루의 마을
- Chancamayo: 찬까마요 – 페루의 마을
- Huiro: 우이로 – 페루의 마을
- Paucartambo: 빠우까르땀보 – 페루의 마을
- chasqui: 차스끼 – 잉카 제국의 파발꾼
- Copiapó: 꼬삐아뽀 – 칠레의 도시
- Colón: 꼴론 – 빠나마의 도시
- Aspinwall: 아스핀월 – 꼴론의 옛 이름
- bar-room: 바 – 술집
- Ville de Paris: 빌 드 파리 – 프랑스 여객선
- Alene: 알렌 – 아틀라스 선박회사의 여객선
- turpial: 뚜르삐알 – 남미산 찌르레기
- Garibaldi: 가리발디 – 이탈리아 통일 영웅
- Southampton: 사우샘프턴 – 영국 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
- Brooklin: 브루클린 – 뉴욕의 자치구
- policemán: 경찰관
- Madison Square: 매디슨 스퀘어 – 뉴욕에 있는 공원
- Central-Park: 센트럴 파크 – 뉴욕에 있는 공원
- Broadway: 브로드웨이 – 뉴욕에 있는 거리
- Vanderbilt: 밴더빌트 – 미국 철도 재벌
- Stewart: 스튜어트 – 미국 백화점 재벌
- Yorkstown: 요크타운 –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도시
- Mount-Vernon: 마운트 버넌 – 미국 버지니아에 있는 도시
- Capitolio: 캐피톨 –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건물
- Patience: 페이션스 – 길버트와 설리번의 오페레타
- Mascotte: 마스코트 –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 Erin: 에린 – 아일랜드의 옛 이름
- Edwin Booth: 에드윈 부스 – 미국 배우
- Lincoln: 링컨 – 미국 대통령
- Berlín: 베를린 – 독일의 수도
- Rossi: 로씨 – 이탈리아 배우
- Salvini: 살비니 – 이탈리아 배우
- Delmónico: 델모니코 – 뉴욕에 있는 레스토랑
- Brunswich: 브런즈윅 – 뉴욕에 있는 레스토랑
- Bignon: 비뇽 – 파리에 있는 레스토랑
- London House: 런던 하우스 – 니스에 있는 레스토랑
- Bristol: 브리스톨 – 런던에 있는 레스토랑
- Mumm extra dry: 멈 엑스트라 드라이 – 샴페인 브랜드
- Hoffmann House: 호프만 하우스 – 뉴욕에 있는 바
- Erhard: 에르하르트 – 피아노 브랜드
- Chickering: 치커링 – 피아노 브랜드
- Bouguereau: 부그로 – 프랑스 화가
- City of Para: 시티 오브 파라 – 여객선
- Atlas: 아틀라스 – 선박회사
- Erye: 이리 – 철도회사
- Búffalo: 버펄로 –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도시
- Niágara Fall’s: 나이아가라 폭포 – 미국과 캐나다 국경에 있는 폭포
- Utica: 유티카 –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도시
- Burning Spring: 버닝 스프링 – 미국 뉴욕 주에 있는 관광 명소
- Labrador: 래브라도 – 여객선
- Havre: 르아브르 – 프랑스 북부에 있는 항구 도시
- Take the Erye Railroad!: 이리 철도를 타세요! – 이리 철도회사의 광고 문구
- High Bridge: 하이 브리지 – 뉴욕에 있는 다리
- Brooklyn: 브루클린 – 뉴욕에 있는 다리
- Pisa: 피사 – 이탈리아 도시
- Père-Lachaise: 페르 라셰즈 – 파리에 있는 묘지
- Webb: 웨브 – 영국 수영 선수
- Albany: 올버니 – 미국 뉴욕 주에 있는 도시
- Hudson: 허드슨 강 – 미국 뉴욕 주를 흐르는 강
“아르헨티나 문화”
미겔 까네
여행기
(1881-1882)
에르네스토 께사다의 비평을 곁들임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문화” – 마요 거리 646
1917
목차
미겔 까네
에르네스토 께사다의 비평
두 마디 말
서문
제1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르도까지
다시 바다에서. – 리우데자네이루 만. – 정박지와 도시. – 띠후까. – 아프리카 해안. – 자선 수녀. – 따호 강. – 지롱드 강에서의 검역. – 보르도.
제2장
파리에서
파리로 가는 길. – 볼리비아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노새를 타고. – 뚜렌. – 파리에서. – 루브르와 뤽상부르. – 박물관을 방문하는 법. – 하원: 감베타. – 상원: 시몽과 펠르땅. – 파리의 7월 14일. – 군사 열병식: 그레비 씨. – 밤의 광장과 거리. – 라 마르세예즈. – 연구소 연례 회의. – 르낭 씨.
제3장
런던에서 보낸 15일
파리에서 런던으로. – 메리 잉글랜드. – 도착 – 코벤트 가든에서의 인상. – 휴게실. – 내 옆자리 여인. – 웨스트민스터. – 하원. – 과거의 그림자들. – 마지막 로마인. – 연설가 글래드스턴. – 대영 박물관을 훑어보며. – 그리니치의 브라운.
제4장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
파리와의 작별. – 방데. – 생나제르. – “빌 드 브레스트”. – 아소르스 제도. – 열대 지방에서의 세례식. – 과들루프. – 푸앵따삐트르. – 열대 과일. – 바스테르와 생피에르. – 마르티니크. – 포르드프랑스. – 사반에서의 축제. – 흑인 여성들. – 흑단의 후리. – 석탄 선적. – 격려의 북소리. – 전기 불빛 아래의 밤불라. – 음란한 춤. – 마르티니크의 재앙. – 솔직한 의견. – 인종 간 적대감. – 슬픈 미래.
제5장
베네수엘라에서
작별 인사. – 코스타피르메. – 라 과이라. – 강제 정박. – 베네수엘라의 얼굴. – 라 과이라에서 카라카스까지. – 산. – 절대적 필요. – 베네수엘라 개관. – 그 상황과 생산품. – 식민 시대. – 독립 전쟁. – 트루히요 칙령. – 무정부 상태. – 평화의 사람들! – 과거의 교훈. – 카라카스 시. – 지진. – 엘 칼바리오. – 투우장. – 주권을 가진 국민. – 베네수엘라의 문화.
제6장
카리브해에서
나쁜 징조. – 아빌라. – 다시 라 과이라에서. – 네뚭노 호텔. – 먹고 자는 법. – 죽을 것 같은 5일. – 라 과이라 정박지. – 승선. – 마꾸또. – 오페라 극단. – “생시몽”. – 뿌에르또 까베요. – 요새. – 감옥. – 미란다 장군. – 볼리바르에 대한 그림자. – 마그달레나 강 어귀. – 콜롬비아의 환대.
제7장
마그달레나 강
살가르에서 바랑끼야까지. – 식물. – 만사니요. – 염소와 양키. – 열병. – 바랑끼야. – “브리사”. – 무기력한 대기. – 치명적인 지연. – 준비. – 마그달레나 강. – 그 항해. – 급류와 여울. – “짬빠네”. – 과거의 항해법. – “안띠오끼아”. – “쥬피테르는 광기를 보내고…” – 마그달레나 강의 증기선. – 의지. – 먹고 마시는 법. – 마그달레나의 보가들. – 사마리오와 까르따헤네로. – 땔감 선적. – “부로”. – 버려진 해안. – 몸뽁스. – 마간헤. – 콜롬비아와 라플라타.
제8장
여행 스케치
언어학적 가설! – 보가의 삶과 그 위험. – 여행의 시작. – 조언과 지시. – 증기선. – 오두막. – 자연의 모습. – 마그달레나의 저녁. – 절대적 평온. – 모기. – 침대 만들기. – 러시아식 목욕. – 수심 측정. – 끔찍한 날들. – 동행자들. – 증기선! – 실망. – 느린 고통. – 드디어! – 몬토야. – 악어들. – 그들의 습성. – 마그달레나의 재앙. – 전투. – 감성적인 어미들. – 악어와의 전쟁.
제9장
여행 스케치 (계속)
앙고스뚜라. – 야생적이고 웅장한 자연. – 처녀림. – 새와 원숭이. – 나레. – 전경. – 급류. – “과리노”. – 급류를 지나는 법. – 마알 선장. – 그의 이론. – “메수노”. – 상황이 급박해진다. – 육지로 밧줄을. – 통과했다. – 보고타 창고. – 노새 문제. – 따뜻한 환영. – 콜롬비아가 겪는 어려움. – 앙드레 씨의 모험.
제10장
꼰수엘로의 밤
길을 떠나며. – 행렬의 순서. – 미미와 디지. – 동행자들. – 리틀 조지. – 그들은 떠났다! – 밤이 내린다. – 위험들. – “꼰수엘로”. – 공동 침실. – 광경. – 비엔나와 파리. – 귀뚜라미. – 알파르가타. – 이웃의 닭. – 꼰수엘로의 밤. – 아침. – 자연. – 기온. – 과라포. – 과두아스 계곡. – 커피. – 짐을 나르는 원주민들. – 영원한 피아노. – 돼지 치는 사람. – 여행하는 원주민 여성들. – 치차.
제11장
마지막 여정
발예 호텔. – 과두아스에서 빌레따까지. – 힘든 여정. – 노새. – 빌레따 호텔. – 따뜻한 환대. – 원주민과의 대화. – 말을 구하다. – 침보. – 끝없는 오르막. – 실러의 회상. – 추위가 다가온다. – 작별. – 떠난 이에 대한 추억. – 아구아 라르가. – 포장도로. – “알또 델 로블레”. – 보고타 사바나. – 사과나무. – 파까따띠바. – 보고타에서.
제12장
콜롬비아 개관
국가 – 지형 – 강과 산맥 – 기후 – 정치적 구분 – 지적 수준 – 까우까 – 콜롬비아의 미래 – 정치 조직 – 수도 – 헌법 – 절대적 자유 – 언론 – 연설 – 상원 – 군부 – 독재 시도 – 볼리바르 – 멜로 – 정당들 – 보수주의자들 – 급진주의자들 – 독립파 – 극단적 사상 – 제헌의회
제13장
보고타
첫인상 – 산 빅또리노 광장 – 보고타 시장 – 세르반테스의 스페인 – 수로 – 위생 – 가마 – 세레나타 – 광장들 – 인구 – 코끼리 병 – 바르가스 박사 – 교회들 – 색채를 좋아하는 신부 – 국회의사당 – 종교적인 국민 – 종교 행렬 – 알또사노 – 정치인들 – 몇몇 이름들 – 사교계 소식 – 알또사노에 대한 향수
코린토, 수에즈, 파나마 – 옛 항로들 – 파나마의 지리적 중요성 – 운하의 경제적 효과 – 건설의 어려움 – 사망률 – 기후 – 유럽인, 중국인, 원주민 – 기계력 – 운하가 건설될까? – 미국의 반대 – 블레인 씨 – 그가 대표하는 것 – 클레이턴-불워 조약 – 보장 문제 – 콜롬비아의 의견 – 먼로 독트린 – 현재의 의미 – 유럽의 생각 – 남미의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 보장의 효과 – 아메리카의 집단 보장 – 우리의 이해관계 – 결론 – 파나마의 주요 무역 – 바나나 – 막대한 수치 – 미래
제20장
뉴욕에서
알렌 – 뚜르삐알 – 도선사 – 뉴욕 항 – 첫인상 – 뉴욕의 왕들 – 여성들 – 남성들 – 귀족적 허영심 – 산업과 예술 – 독특한 세계 – X 부인 – 언론 – 호프만 하우스 – 극장 – 호텔 – 사치 – 거리 – 유형 – 방탕한 생활 – 무덤 – 고백
제21장
나이아가라에서
의무적인 여행 – 고급 열차 – 여행 동반자 – 미국의 풍습 – 미국인의 의견 – 나이아가라 폭포 – 폭포 – 폭포 아래에서 – 나이아가라의 모독 – 나이아가라와 떼껜다마 – 귀환 – 허드슨 강 – 결론
미겔 까네
1851년 몬테비데오에서 망명 중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학교에서 공부했고 법학 학위를 받았다.
미겔 까네는 1872년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과학과 문학 분야에서 아르헨티나 문화가 본질적으로 쇄신되던 시기에 ’80년대 세대’라 불리는 선별된 정신의 그룹에 속했다.
그의 활동은 정치, 외교, 대학 생활 사이에서 번갈아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는 항상 세련된 아티시즘으로 문학에 충실했다. 그의 이름은 철학문학부의 첫 번째 학장직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으며, 이 자리와 그의 이름은 영원히 연결되었다.
그는 ‘라 트리부나’와 ‘엘 나시오날’에서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875년에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1880년에는 우편전신국 총국장을 지냈다. 1881년 이후에는 콜롬비아, 오스트리아, 독일, 스페인, 프랑스 주재 전권공사를 역임했다. 1892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이 되었고, 얼마 후 내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아르헨티나 문학사에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는 다음과 같은 책들을 출판했다: ‘에세이'(1877), ‘주베닐리아'(1882), ‘여행 중'(1884), ‘문학적 잡담'(1885), ‘헨리 4세’ 번역(1900), ‘메모와 인상'(1901), ‘가벼운 산문'(1903). 그는 이전 작품들만큼이나 흥미로운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는 많은 ‘글과 연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갈고닦은 뛰어난 비평 안목과 문체의 유연성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크로니쾨르’가 되었으며, 본질적으로 프랑스적인 이 장르의 훌륭한 모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보다는 미소 짓는 우아함에 더 관심을 가졌고, 무거운 강건함보다는 날렵한 선을 선호했다. 그의 취향에서 그는 파리의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1905년 9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망했다.
에르네스토 께사다의 비평
미겔 까네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 그 책은 그가 아르헨티나 공화국 주재 상주공사로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여행한 결과물이다. 오늘날 저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주재 아르헨티나 특명전권대사로 비엔나에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신보’가 그의 최근 책에 대해 침묵을 지킨 것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까네가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 이상하게도! –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를 단지 얼굴만 알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그의 성격, 자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글에 대해 열렬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연되었음을 밝힌다. 까네는 타고난 언론인으로서 경험상 언론이 얼마나 흡수력이 있는지,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신보’와 같은 기업에서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할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그루삭이 ‘엘 디아리오’에 발표한 재치 있는 글을 읽었다 – 그 또한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작가다. 프랑스식 풍자를 카스티야어의 재치로 위장한 그 글에 매료되었다. 그 글에서는 까네에게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지만 결국에는 마땅한 찬사로 마무리했다.
후에 같은 신문에 비판받은 저자의 편지가 게재되었는데, 그는 무한한 우아함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성경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교훈을 재치 있게 인용했다.
고발과 변론을 들었으니 이제 책의 가치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비평가와 비평 대상자는 몇몇 작은 결점들에 대해 동의하는 것 같고, 다른 점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 듯하며, 고전적인 시구를 기억하지 않으려 한 것 같다:
‘이런 과도한 명예도, 이런 모욕도 아니다’
까네는 완벽한 문체가다. 그는 편지에서 페드로 고예나가 자신의 문학적 계보를 찾으려 애썼다고 말하고, 그루삭은 공식적으로 그것을 테인에서 찾았다고 선언한다. 내 생각에는 완전히 잘못됐다. 만약 까네가 누군가로부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메리메이고, ‘콜롬바’의 작가는 이른바 ‘베일리즘’이라 불리는 것과 함께 이 점에서 영향을 미쳤다. 메리메가 자신의 예술적 개념에 맞추기 위해 같은 작품을 17번이나 다듬었다는 고상한 까다로움을 까네가 가졌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는 ‘적과 흑’의 저자의 경멸적인 철학에 젖어 있다. 그러나 ‘에세이’와 ‘여행 중’의 저자는 오히려 테오필 고티에, 폴 드 생빅토르, 그리고 – 왜 말하지 않겠는가? – 지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많은 환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작가 데 아미치스와 같은 계통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문체가다. 자연, 사물, 사건들이 단순히 어려운 기교를 펼치기 위한 주제일 뿐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까네가 그토록 선호하는 언어를 빌리자면). 아니다! 데 아미치스는 현대 이탈리아 문학에서 가장 균형 잡힌 재능이라고 말해졌다. 그의 사고는 다양하고 강렬한 색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관대하고 예의 바른 성향에 이끌려 그의 성격에 가장 잘 맞는 묘사를 선호한다. 그는 감동하고 감탄한다. 까네에게도 그런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히 감상주의가 그의 책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가 보고 행동하는 것을 판단하는 데 있어 – 너무 많은? – 냉소가 있다. 까네는 편지에서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반면에, 얼마나 쉽게 글을 쓰는가! 눈부신 묘사와 우아한 그림들이 그의 펜에서 어떻게 쏟아져 나오는가! 독자는 문체의 예술가 앞에 있음을 느끼고, 문장의 마법에 매료되어 저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저자가 원하는 바이며,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길 선호한다.
까네 씨의 성격이 유쾌하고 선량하며 솔직하다고 들었다. 그의 책에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회의주의를 과시하고 싶어 했고, 너무 자주 영원한 권태의 변함없는 음조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권태로워 보이고 싶어 하는 이 독특한 욕망에는 얼마나 쓰라린 모순이 담겨 있는가! 까네 씨가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자국의 최고 요직을 거치며 도처에서 미소를 받고 꽃길만 걸었는데, 운명의 여신의 총아인 그가 권태로워한다니! 이 겉으로 드러난 권태는 행복의 사치스러운 표현은 아닐까?
우리는 많이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여행자가 아닌 사람이 쓴 여행기를 마주하고 있다. 저자는 여행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물질적 불편을 견디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지만, 해상 여행의 권태와 기차 환승, 형편없는 호텔 등을 저주한다. 그는 얼어붙을 듯한 냉담함으로 자신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그 끔찍한 열정을 가진 척하는 사람들을 비웃기 위해 반회의적이고 반조롱적인 문체를 채택한다.
“얼마나 자주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살롱에서, 또는 우아하고 섬세한 식탁에서 교양 있고 세련되며 옷을 잘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는 여행에 대한 열정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얼굴은 멀리 떨어진 지평선의 전망 속에서 떠다니는 정신의 모호한 표정을 짓곤 했죠. 그때마다 나는 선실과 동료, 카드놀이, 파이프, 해상 생활의 모든 비참함을 떠올리며 그 시적인 여행자가 꿈꾸는 매력에 빠져보길 바랐습니다!”
아, 어떤 걱정도 없이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행하는 즐거움이란! 세상에 보고 알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큼 비교할 만한 것은 없다. 그 인상은 너무나 선명하고 진실하며 강렬해서 그것을 구현한 묘사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그 감각을 전달하고, 그 페이지들을 읽으면 마치 실제로 거기에 묘사된 지역을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감정의 생생함, 그 특별한 기쁨은 오직 진정한 여행자, 자신의 구석에 있을 때 여행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사람, 세계를 돌아다녔던 시절의 회고적이고 강렬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교양 있는 정신, 깨어 있는 지성, 불안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에게 여행에 대한 열정이라는 선물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 그 폭군 같은 친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포기해야 할 때 지평선이 얼마나 좁아 보이는지! 일상적이고 평온한 삶, 그 수많은 부르주아적 삶의 매력들의 분위기가 그를 질식시킨다. 그는 이국적인 나라들, 지역색, 사라져가는 관습들, 변화하는 도시들,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비교하며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깨어 있는 채로 꿈꾼다! 그리고 저주받은 현대의 세계주의는 그 평준화 광기로 어디에나 침투하여 그 영원한 껍데기, 그 끔찍한 의상, 무색무취한 관습의 표면성으로 인해 통신 수단의 발달 덕분에 자연스러운 것, 지역적인 것, 그의 역사와 관습을 가진 인간의 매력을 사라지게 한다.
여행의 즐거움은 신의 선물이다. 그것은 모든 길목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건들의 집합을 추종자들에게 요구하며, 그래서 일반적인 판단이나 부르주아적 평범함은 여행과 이주에서 어떤 즐거움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삶의 중단, 물질적 불편함만을 본다. 그들은 낯선 것들을 만나야 하고 그것이 그들을 짜증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성이 게을러서 이미 알고 있는 기계적인 작업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의 의미를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중의 삶을 산다. 그들은 잠시 눈을 감고 본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풍경은 우리가 처음 보았을 때의 순간으로 우리를 데려가 그때부터 지난 시간의 개념을 지워버리는 강렬한 생명력, 색채의 활기, 세부 사항의 정확성으로 되살아난다.
인생은 너무나 덧없어서 인상을 반복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행자의 삶에서 특정 장소에 대한 기억은 관찰자의 나이와 판단 기준이 부여하는 색채를 띤다. 시간이 흘러 돌아와 옛날의 인상을 실제로 되살리고 싶어 한다면 오직 환멸만 거두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월이 흐르고 판단 기준이 바뀌며 사물도 변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기억의 환상을 간직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한때 현실이었다. 그렇게 두 배로 살 수 있다.
까네 씨는 이런 삶에 대해 별로 호감이 없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관조적이라고 여기고 행동과 투쟁을 제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류다! 여행자는 자신의 기질이 투쟁으로 이끈다면 자신의 여행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에서 싸울 것이며, 아마도 더 나은 판단력과 더 정확한 무기로 그렇게 할 것이다!
‘여행 중’의 저자가 여행자의 ‘성스러운 불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랬다면 관찰과 여행 묘사에서 최고의 강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의 전반적인 어조와는 다른, 진정한 예외인 몇 단락을 옮기고 싶은 유혹을 참을 수 없다. 마르티니크의 포르드프랑스를 묘사한 부분이다.
“고야의 가장 대담한 환상, 포르투니나 디아스의 대담한 색채 사용도 그 기이한 광경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젊은 흑인 여성은”
나와 동행한 베네수엘라 화가는 자주 눈을 가리며 이 난폭한 명료함 때문에 오랫동안 색조와 빛의 미묘한 변화에 대한 인지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장에는 약 500명의 흑인 여성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젊었고 가장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간색, 분홍색, 흰색이었다. 모두 가슴이 파인 옷을 입고 있었고 강인한 팔을 드러냈다. 겨드랑이 밑에서 허리를 조이고 돌출된 가슴을 누르는 모습은 총재정부 시대의 멋쟁이들을 연상시켰다. 머리에는 비단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마 위로 두 끝을 당겨 작은 뿔 모양을 만들었다. 그 스카프들이 바로 눈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모두 다양한 색상이었지만, 항상 유럽에서 ‘베수비오의 용암’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강렬한 붉은 색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강렬한 노란색, 무지개빛 보라색 등이 있었다. 귀에는 파이프 오르간 모양의 두꺼운 금 귀걸이를 달고 있었는데, 뺨 중간까지 내려왔다. 드레스는 뒤로 길고 앞은 짧아서 발이 보였다… 항상 맨발이었다. 우리의 미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지만, 마르티니크 흑인 여성들의 타고난 우아함과 우아하고 야생적인 걸음걸이를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이 정말로 돋보이는 때는 그들이 화려한 옷을 벗고 짧고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널빤지 위에서 머리에 거대한 석탄 바구니를 이고 균형을 잡을 때이다… 배 아래와 해안가에서는 전기 랜턴의 파도에 비춰진 혼란스럽고 검은 군중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배에 석탄을 싣는 여자들이었는데, 짐을 실은 사람들은 경사진 널빤지를 올라가고, 짐을 내린 사람들은 옆의 다른 널빤지로 내려오면서 끝없이 줄지어 서로 교차하는 개미들 같은 효과를 냈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두가 같은 애절하고 거친, 끊어진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다. 땅에서는 늙은 흑인 남자가 석탄 덩어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황홀한 얼굴에 빛 한 줄기가 떨어졌고,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머리를 흔들며 다리 사이에 끼운 북의 가죽을 양손으로 현기증 나는 속도로 두들겼다. 그것은 영구적이고 단조로우며 동일한 리듬으로, 그 리듬에 맞춰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남자는 기쁨에 몸을 비틀며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내게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까네 씨는 ‘포르드프랑스’에 대한 묘사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그는 ‘밤불라’가 그에게 남긴 인상을 전한다:
“…석탄으로 뒤덮인 채, 누더기를 걸치고, 땀에 젖은 흑인들이 전기불 아래에서 열광적으로 춤추는 광경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북소리의 리듬이 약간 변화하며,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은 음란한 선율을 따라 노래를 부른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 서고, 각 커플은 음란한 몸짓과 물결처럼 흐르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머리는 고정된 채, 엉덩이는 거의 탈구될 듯 끊임없이 꿈틀거린다. 음악과 그들의 상상력이 그들을 취하게 만든다. 북을 치는 흑인은 더욱 격렬한 발작 상태에 빠진 듯 보이고, 여자들은 미쳐서 모든 수치심을 잃는다. 각각의 진동은 내가 평생 본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관능에 대한 초대이다. 그들은 파트너에게 다가가 몸을 밀착시키고 비빈다. 흑인들은 흥분한 동물처럼 머리를 공중으로 치켜들고 등을 뒤로 젖히며,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피로는 없다. 이 여자들이 10시간 동안 힘든 일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밤불라’가 그들을 변모시켰다. 그들은 소리 지르고, 으르렁거리고, 몸을 떨며, 때로는 이 야수들이 서로를 물어뜯을 것처럼 보인다. 이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축제이다. 그리스 축제의 가장 불결한 난잡함조차도 순화시켰던 요소, 바로 아름다움이 여기에는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 책의 모든 부분을 세세히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내가 형성한 의견을 솔직히 말했으니, 작가가 주목한 다양한 주제들 중 일부를 다루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까네의 파리 체류에 대한 장은 짧다. 아쉬운 일이다. 이 짧은 페이지들 속에는 두세 개의 정말 대가다운 묘사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너무 인색했다. 그의 펜은 거의 멈추지 않는다. 의회, 상원, 학술원, 이것들만이 그의 특별한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의회에 대한 단락들은 정말 아름답다. 감베타, 쥘 시몽, 펠르땅의 초상화는 완벽하게 그려졌다.
실제로 프랑스 의회의 토론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파리에서 공부하던 시절(1879-1880년), 가능한 한 자주 의회 토론에 참석하곤 했다.
당시에는 베르사유로 기차를 타고 가야만 했다. 입법부가 아직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주재 우리의 존경받는 공사인 발까르세의 변함없는 친절 덕분에 자주 외교관 전용석 입장권을 얻을 수 있었다. 까네 박사의 말대로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자리를 얻으려면 일찍 도착해야 했다”.
하원 회의장은 정말 호화로웠다. 루이 14세의 거대한 궁전의 일부였으며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의장은 외교관 전용석 맞은편에 있는 높은 책상에 앉았고, 같은 높이지만 등 뒤로 한쪽에는 여러 명의 서기가, 다른 쪽에는 여러 명의 경위가 있었다. 계단이 의장석으로 이어졌다. 그 아래에는 유명한 의회 연단이 있었고, 양쪽에서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 뒤와 양옆으로는 일련의 비서들이 앉아 글을 쓰거나 책이나 서류를 참고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했는지, 안건의 배경이 무엇인지, 또는 필요한 어떤 자료라도 의장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의회 연단 발치에는 속기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과 회의장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는 의원들과 경위들, 사무원들 등이 오가는 공간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반원형 원형극장 형태로 의원들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통로가 있었다. 각 의원은 빨간색 의자에 앉았고, 앞 의자 등받이에는 서류나 메모 등을 놓을 수 있는 작은 탁자가 튀어나와 있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우파는 소수였고, 중도와 좌파가 큰 다수를 차지했다.
속기사들 맞은편에는 장관들과 차관들의 자리가 있었다.
의회 교섭단체들은 완벽하게 조직되어 있었고, 검객들과 병사들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했다. 어떤 이들은 중앙에 더 가까이, 어떤 이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람은… 폴 드 까사냑이었다.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람은 위대한 연설가 클레망소였다. 우파의 결투사는 까사냑, 좌파의 결투사는 페랭이었다.
언론 전용석은 외교관 전용석 아래에 있었다. 같은 줄에 대통령, 하원의장과 상원의장, 의원들을 위한 전용석이 있었다. 모든 고위 인사들은 각자의 전용석이 있었다. 그 위에는 이른바 갤러리가 있었고, 특별 입장권이 있는 일반인들이 입장할 수 있었다.
회의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연설자가 말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말하고, 고함치고, 몸짓을 하고, 웃고, 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이런 난폭한 바다 앞에서 연설가는 재능뿐만 아니라 침착함, 순발력, 그리고 담대함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몸짓이 필수적이며, 목소리는 그 지옥 같은 소란을 압도할 만큼 우렁차고 힘차야 한다. 연설가는 생생하게 호소하고, 감동을 주고, 자신의 말을 들리게 해야 한다.
나는 매우 격렬했던 회의들에 참석한 적이 있다. 까사냑-고블레 사건, 브라메 질의, 그리고 79년 5월 파리를 뒤흔든 로크루아 질의 회의에 참석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내 기억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그 토론들을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말을 듣게 만들지 못하고 반대파의 야유와 동료들의 항의 속에 연단에서 내려온 연설가들을 보았다. 아니, 차라리 ‘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보나파르트주의자 브라메는 내무장관 르페르에 대한 열정적인 질의에서 소란을 제압했다. 르페르는 연단에서 15분 동안 우익의 무질서한 고함과 좌익의 박수와 지지 속에서 침묵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잠시 소란을 잠재웠고, 우익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고함을 지르고 소리를 질러라. 질의는 너희에게 소란과 외침의 구실일 뿐이니. 너희가 조용해질 때까지 연단에서 내려가지 않겠다!…”
얼마나 끔찍한 소란이었던가! 프랑스 법정과 의회의 노장 세나르가 의장을 맡고 있었지만, 나이가 많아 약한 목소리와 힘든 움직임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거대한 은종(보통의 종이 아니다)을 계속 흔들고 다른 손으로는 자로 책상을 두들겼다. 안내원들은 “조용히 해주십시오, 여러분 – 부탁드립니다, 조용히”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지만, 소란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우익은 고함을 지르며 발로 귀가 멍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좌익은 “징계하라, 징계!”를 외쳤다. 제국주의자 뒤푸르 남작을 엄중히 경고한 후에야 겨우 침묵이 찾아왔다…
장관이 연설을 마치자 질의자가 (말 그대로)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장관이 다시 대답하고, 질의자가 또다시 올라갔다… 이런 의회를 가진 장관의 삶이란 어떨까! 하루 종일 이런 의회 싸움에 시달리는데… 아마도 진짜 장관은 차관일 것이다.
너무나 애도되고 인기 있었던 연설가 감베타가 까사냑이 고블레 국무차관을 의회 한복판에서 도전했을 때 의장을 맡고 있었다. 그날 나는 참석했었다. 얼마나 큰 스캔들이었던가! 하지만 감베타는 소란을 제압하고, 까사냑을 연단에서 내려오게 하고, 그를 징계하고, 소동을 진정시켰다.
나는 급진파의 위대한 연설가 클레망소의 연설을 여러 번 들었다. 보르도에서 선출된 공산주의 죄수 블랑키를 옹호하는 그의 연설을 들었다. 그는 가장 훌륭하게 말하고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연설가 중 하나다. 반대파 중 한 사람(이 경우 좌파가 극좌파에 반대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이 “그만!”이라고 소리치자,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친애하는 동료여, 당신이 우리를 지루하게 할 때 우리는 인내심 있게 듣습니다. 내가 끝났는지 아닌지 판단할 사람은 나 자신뿐입니다.” 그리고 이 차분한 꾸짖음 후에 연설을 계속했다…! 이 질의는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르 루아예의 매우 강력한 답변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행정 조직도 훌륭하다. 의회는 매일 오후 2시부터 6시 30분까지 열리며, 속기사들은 속기 번역 원고를 저녁 8시까지 제출한다. 자정에는 인쇄 교정이 배포되고 다음날 아침 6시면 ‘온 파리’가 전날 오후 회의 전문을 관보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특별 계약도, 추가 비용도, 의회가 속기사들에게 특별 보상을 하는 일도 없이, 그리고 유럽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그런 과시도 없이 이루어진다. 1877년 우리나라에서 ‘꼬리엔떼스 문제’를 토론할 때 있었던 일을 기억하라. 라 뜨리부나가 다음날 회의 내용을 게재했을 때 모두가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의회 제도에서 의원들의 업무(상원의원들보다는 하원의원들의)는 매우 힘들지만, 연설가들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중앙집권화된 부처의 업무를 처리하고,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개혁을 구상하고, 법안을 연구하고, 질의에 답변하고, 연설을 준비하고 수정해야 하는 장관들은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에 정기적인 모임, 공식 무도회 등을 개최해야 하는 의무까지 더해진다. 이 어떤 삶인가! 이는 수많은 국무위원, 차관, 비서, 국장 등 장관과 함께 바뀌지 않고 부처에 소속된 사람들의 대군단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가!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장관들이 혼자다. 물론 존경할 만한 예외도 있지만, 직원들은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가 아니라 단순한 서기에 불과하다. 그런 의회 생활을 하는 나라의 장관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들이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처리하고, 대답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큰일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 * * * *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밝혔듯이 “무거운 짐 없이” 가볍게 이야기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이러한 의도 때문인지 그는 관찰한 것들을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고 표면만 스치듯 다루는 데 만족한 것 같다.
콜롬비아의 가장 특징적인 면 중 하나는 강력한 문학 전통이다. 콜롬비아인들은 문인과 학자, 언어의 깊이 있는 이해자들의 민족이다. 그곳에서 문학은 진정한 숭배의 대상이며, 오직 순수하고 세련되며 거의 완벽한 작품들만이 그 제단에 바쳐진다. 까네 씨는 “가볍고 자유로운 걸음으로 나아가겠다”는 불행한 의도와 진지하고 양심적인 연구에 대한 과장된 경멸로 인해 “오늘날 백과사전의 끈질긴 참조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의 문학적 측면을 다루고 싶은 욕구나 필요성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겸손하게 “지성”이라고 이름 붙인 24페이지 분량의 장을 요약했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현대 콜롬비아의 주요 문인들의 윤곽을 그리려 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마같이’ 자유로운 문체로 말이다.
그는 콜롬비아인들의 놀라울 정도로 쉬운 시적 재능에 대해 언급한다. 디에고 폼보, 구띠에레스 곤살레스, 디에고 파욘, 호세 마리아 마로낀, 리까르도 까라스끼야, 호세 마리아 삼페르, 미겔 안또니오 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피노 꾸에르보에 대해 다룬다. 이것이 이 장의 내용인데,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흥미롭지만 불완전하고 너무 피상적이다. 나는 이 책의 그 부분을 열심히 읽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특권을 가진 그 나라의 문인들 중 최고와 접촉했던 사람의 기억들, 그리고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우아한 세련미와 함께 빛나는 회의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과 어떤 안달루시아식 유머가 예고하는 매력적인 관찰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완전히 만족되지 않았다. 누에바 레비스타는 이미 (1881년) 호세 까이세도 로하스의 ‘아메리카의 서사시, 특히 콜롬비아의 서사시’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실었고, (1882년) 살바도르 까마초 롤단의 그레고리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에 대한 중요하고 박학다식한 ‘콜롬비아 시’에 대한 연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1883년) 아드리아노 빠에스의 호세 다비드 과린에 대한 주목할 만한 평론을 실었다. 이 글들에서 우리는 그 민족의 매우 풍부하고 다산적인 지적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수백 명의 시인, 문인, 역사가, 비평가 등이 독자의 놀란 눈앞을 지나간다. 놀라운 생산력, 신문, 정기간행물, 팸플릿, 책의 진정한 과잉 생산이 드러난다.
그리고 콜롬비아의 문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더라도, 그곳의 수많은 언론, 신문, 잡지, 문학 유파들을 알고 있다. 레퍼토리오 콜롬비아노와 라 빠뜨리아가 각각 이끄는 보수파와 자유파 사이의 투쟁도 알고 있다. 그리고 보고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무리 적다 해도, 곧 책상은 엘 빠사띠엠뽀, 엘 빠펠 뻬리오디꼬 일루스뜨라도 등으로 가득 차게 된다.
까네의 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언론인이면서도 언론을 잊었다. 그것도 콜롬비아의 언론이 특별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훌리오 아르볼레다, 호세 E. 까로, 마디에도, 라사로 마리아 페레스… 한 마디로 1844년과 1846년의 풍성한 세대에서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흔적을 헛되이 찾는다. 레스뜨레뽀와 그 밖의 많은 이들… 그리고 그 시대가 이미 너무 오래되어 잊혀진 것 같다면, 콜롬비아 문학이 크게 번창했던 1855년에서 1858년 사이의 시기가 있다. 이 시기에는 호세 호아낀 오르띠스, 까마초 롤단, 안씨사르, 리까르도 실바, 살가르, 베르가라와 그 밖의 많은 이들이 활동했다…! 물론 까네 씨는 “콜롬비아의 문학사를 요약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선언한다. 좋다. 하지만 한 나라의 ‘지성’에 대한 장을 쓸 때는 모든 측면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그 계보를 밝히고, 가장 유명한 대표자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여행 중’의 저자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만약 내가 몇몇 이름을 언급했고, 현재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들 중 일부에 대해 다루었다면, 그것은 내가 그들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이 내 기억의 그림 속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는 변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토록 풍부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더 자세히 살펴보지 않기로 한 것은 정말 안타깝다.
따라서 이 장에는 콜롬비아의 문학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은 고사하고 그 나라의 현재 문학 상황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보르다, 아리에타, 이사악스, 오베소와 같은 두각을 나타내는 많은 이들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아카데미와 그 작업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고, 무엇보다도 보고타의 저널리즘에 대한 설명 불가능한 침묵이 있다!
아마도 까네 씨는 이런 누락을 저지를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쓴 페이지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유머러스하게 – 이 번역 불가능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 그 모든 문학을 다루었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더욱 유감스럽다. 그러므로 그가 그려준 빠른 스케치들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까네 씨는 – 그 자신이 말한 대로 – ‘악마같은’ 문체로 자신의 선호에 이끌려 갔다. 그는 방금 “만날 기회가 있었던 인물들”에 대해서만 다룬다고 말했지만, 그의 열정은 그를 이끌어 장의 상당 부분을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에게 할애하게 했다. 그는 매우 주목할 만한 시인이었지만 1872년에 사망했다.
메데인, 1872년 7월 6일…
그는 라파엘 폼보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폼보는 ‘에따’라는 노래로 유명한 작가였다. 이 노래는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었고,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까를로스 기도 이 스빠노의 아름다운 답가를 받기도 했다. 까네 씨에 따르면 “폼보는 못생겼다. 끔찍하게 못생겼다. 작은 머리, 두꺼운 입술, 금발 콧수염과 턱수염, 큰 안경 뒤로 튀어나온 근시안 눈… 못생겼다. 아주 못생겼다. 그도 그걸 알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저자는 에두아르다 만시야 데 가르시아 부인과 폼보의 모험담을 재치 있고 적절하게 소개한다.
까네 씨는 라파엘 폼보가 친구들의 거듭된 간청과 출판사들의 유리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를 모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우리에게 꽤나 이상하게 들릴 만한 관찰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관행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여기 그 흥미로운 관찰이 있다. “시집 출판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많은 시인의 명성을 죽였는가. 그리고 어린 시절의 서툰 산문이나 시를 조급하게 모아 출판하는 유치한 허영심에 빠진 젊은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될 것인가…”
하지만 까네 씨는 진정 관찰력 있는 사람이다. ‘수에스까의 폐허에 부치는 노래’와 ‘달에게’라는 뛰어난 시를 쓴 디에고 파욘의 재치 넘치는 초상화를 보라. “반 다이크의 붓이 여러 번 그려낸 듯한 잘생긴 얼굴을 상상해 보라. 큰 검은 눈 두 개가 영혼 깊숙이 꿰뚫는다.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넘겼고, 코와 입술은 가늘다. 마른 체구는 늘 움직이며, 잠깐 쉴 때도 의자 위에서 펄쩍펄쩍 뛴다. 그의 말을 들어보라. 그와 대화하기란 어렵다. 그의 말을 듣는 행운을 얻은 바보나 그럴 생각을 하겠지. 시인의 수다 속에서 펼쳐지는 가장 놀라운 만화경을 지성의 눈으로 보게 될 테니… 그러다 시계가 울리면 몽상가, 시인, 비할 데 없는 색채의 마술사는 황금빛 구름에서 뛰어내려 왕이 될 뻔했던 자리를 떠나, 안타깝게도 올렌도르프를 들고 대학과 서너 개의 학교,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더 많은 곳에서 영어 수업을 하러 간다…”
이것을 쓴 사람은 단순한 문장가, 언어의 밴더빌트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그는 ‘유머리스트’이며, 스턴의 정통 제자이자 아마도 ‘트리스트럼 섄디’의 열렬한 독자일 것이다. 그 쉬운 아이러니, 그 끝없는 유머 감각, 그 뛰어난 풍자력은 때로 명랑하고, 미소 짓게 하고, 조롱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 빠른 인상과 항상 새로운 대조는 ‘유머리스트’의 비밀이다.”
그리고 ‘보고타 언어에 대한 비평적 고찰’의 박식한 저자인 루피노 꾸에르보를 묘사할 때, “그는 차분히 일하며, 맥주 한 상자를 처리하는 것 외에는 중단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꾸에르보는 다름 아닌 맥주 제조업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병에 담고 마개를 막았다고 루피노가 말했다”라고 까네 씨는 덧붙인다…
까를로스 올긴에 대해 말하면서 “이건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올긴은 보고타에서 가장 사랑받는 ‘까차꼬’ 중 한 명이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예전처럼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 ‘까차꼬’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저자가 설명해주는데, 아주 명확하게 한다. “‘까차꼬’는 상류층의 난봉꾼이다. 말재주가 있고, 전염성 있는 열정을 지녔으며, 이집트의 스핑크스 열 개를 춤추게 할 수 있을 정도다. 국경일에 광장에서 말을 타고 행렬을 조직하고, 미소를 얻기 위해 발코니까지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다. 도박을 즐기며, 내기에서 마지막 페소까지 걸 수 있고, 누군가 시비를 걸면 총격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다…” 이 초상화를 존경받는 올긴 씨에게 적용해보라!
호세 마리아 삼페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그는 6~8권의 역사서, 3~4권의 시집, 10~12권의 소설, 그만큼의 여행기, 연설문, 정치 연구, 회고록, 논쟁… 뭐 그런 걸 썼지! 당연히 그 많은 책에서 예술가의 세련됨이나 선과 색조의 정확성을 찾는 건 무의미할 거야. 그건 거대한 줄기, 나뭇가지, 부스러기, 모래, 바위를 휩쓸고 가는 아메리카의 강과 같아…”
결국, 저자의 이런 초상화들을 계속 따라가는 건 길어질 것이다. 그는 이 문학 장르에서 분명 두각을 나타낸다. 이 부분에서 멈춘 이유는 까네 씨의 재능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몇 줄 안에 한 인물을 사진처럼 묘사하는 재주가 있다. 초상화를 비추는 빛과 그림자, 명암을 보여주며 진지한 면과 우스운 면을 부각시킨다. 항상 대조의 효과를 노린다. 이것이 바로 그를 진정한 ‘유머리스트’라고 부르게 만드는 이유다.
‘유머’란 실제로 무엇인가? 한 유명한 비평가가 명확하게 정의했다. 그에 따르면 유머란 모든 것을 느끼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정신의 충동이다. 그것은 수사학자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함정인 여담을 우아하게 즐기는, 자유롭고 불규칙하며 대담한 사고의 움직임이다. 우연히 마음의 신비를 밝히거나, 우리 본성의 모순을 연구하거나, 경시된 진실을 드높일 기회를 발견했을 때 그렇게 한다. 그것은 비밀스러운 자기력으로 미지의 것에 이끌리는 사고이며, 가벼운 외양 아래 세상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파고드는 사고이다.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도 그는 자신이 창조하거나 재현하는 모든 것에 기발한 색채를 입힌다. 그리고 상상력의 힘으로 현실보다 더 변화무쌍한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자, 이제 까네 씨의 최근 저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많은 부분에서 이 묘사의 정확성이 확인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러한 경향에 가장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 부분에서 독자들이 가장 즐거워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문도 데 아미치스는 그의 몇몇 성공작에서 모든 작가가 쓰거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표작, 고전적인 작품, 놀라운 페이지에 대해 언급했다. 그렇게 해서 후세에 남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페이지의 예로 ‘스페인’이라는 책에서 ‘닭싸움’을 다룬 부분을 들 수 있다. 한 비평가는 그 5-6페이지에서 데 아미치스의 모든 자질이 4승까지 농축되어 있다고 말했다. 관찰자의 예리함, 색채의 강렬함, 문체가의 우아함,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언어의 다양성, 풍부함, 그리고 억만장자의 부를 방불케 하는 풍성함이 진정으로 뛰어나다.
이 바릴리의 말을 까네 씨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여행 중’의 저자가 이미 자신의 모든 자질을 응축했고, 가장 높은 음을 냈을까? 까네 씨는 책을 쓸 때마다 자신의 정신의 다른 면을 드러낸다. 이는 엄격한 비평가의 임무를 극도로 어렵게 만들고, 기껏해야 관대한 비평가의 임무를 쉽게 만든다. 칭찬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정한 비평은 – 까네 씨가 “가장 용서하기 어렵고, 아픈 곳을 때리는 매가 가장 아프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 이 경우에는 충실한 공정성을 가지고 훌륭한 유머 작가로서 자신을 드러낸 작가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문체가로서의 오랜 명성을 확인했다.
그렇게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까네 씨가 문학에서 단지 딜레탕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큰 유감이다. 그는 작가로서의 소명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차선책으로 글을 쓴다. 그는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났지만, 문학을 부수적인 것으로만 여겼고, 내 생각에 그는 문학적 허영심이 전혀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문학은 그에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연인과 같아서, 책임을 지지 않고 데리고 갔다가 버리며, 순간의 즐거움만을 요구할 뿐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기질과 가장 강렬한 성향은 그를 정치 생활과 행동으로 이끈다. 그는 타고난 국회의원이자 연설가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 장관이든 어떤 행정부의 수장이든 – 그에게 도취에 가까운 만족을 주는 것 같다. 그는 문학을 경멸하는 문인이며, 정치는 미노타우로스처럼 그를 무자비하게 삼켜버렸다. 그는 이따금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입가에 회의적인 미소를 띠고 귀족의 망나니짓처럼 그렇게 할 것이다.
정치는 미국 생활에서 가장 큰 죄인이다. 그것은 젊은 재능들을 매혹시키고, 유혹하여 차분하고 고상한 지적 생산을 위해 불임화시킨다. 그것은 그들을 덧없는 행동으로 취하게 하고, 소모시키며, 환멸에 빠뜨려 문학의 숭배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고, 공적 생활의 매력에 노예화시킨다. 그렇게 선택받은 영혼들은 진지하고 영속적인 영광을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영광과 맞바꾼다.
까네는 처음에 정치 언론에 유혹당해 화려한 재능을 전투적인 기사를 쓰는 데 낭비했다. 그것들은 현란한 불꽃놀이처럼 장미꽃이 피는 시간만큼만 살았다. 오늘날 누가 그것들을 기억하는가? 아마도 저자 자신조차 잊어버렸을 것이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조기 사망을 운명 지어진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격의 사람이 문학을 정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떻게 활발한 공적 생활을 외교적 은둔의 평온함과 맞바꿀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여행 중’의 저자의 다소 에피쿠로스적인 기질이 이러한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의회 생활, 정치 언론, 적극적인 정부 활동을 포기하고 외교적 은신처로 도피한다니, 그것도 한창 젊은 나이에,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았을 때, 활력과 야망과 끓어오르는 피로 가득 찬 때…! 신비롭다! 외교 생활에도 물론 고귀한 행동 영역이 있지만, 그런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덕적 자살과 같다. 외교적 기능이 여가 시간을 허용한다면 그것을 채워야 하고, 문학적 노동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너무 활동적인 기질은 카푸아의 잔을 끝까지 마시는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 그리고 그 잔은 치명적이다.
까네 씨는 나에게 프레보-파라돌이라는, 매우 비슷하고 호감 가는 프랑스 정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 또한 쉽게 가장 높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작가였다. 그는 재능, 준비, 야망,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성공은 항상 그에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는 문학을 정치를 위해 버렸고, 적극적인 투쟁을 외교적 안식으로 바꾸었다. 그 아름다운 재능은 완전히 메말랐다.
프레보-파라돌의 삶에서 한 가지 정말 인상적인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왜 의회 사상사를 쓰지 않으세요? 거기에 당신의 재능을 시험해볼 만한 흥미로운 책이 있을 텐데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도 책과 문장을 믿고 한가한 사람들의 시간을 보내는 그 쓸모없는 장난감에 애착을 갖다니 정말 행복하군요!…” 그리고 덧붙였다. “오직 권력만이 진실입니다. 사람들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들을 위대함으로 이끌며, 사건을 준비하고, 사실을 지배하며, 운명을 억지로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강한 의지와 고귀한 지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다!
외교관 까네는 이 말을 떠올리며 여러 번 우울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만약 쾌락주의로 인해 그가 치열한 싸움을 포기했다면, 그런 도덕적 비겁함에 대한 복수로 ‘여행 중’의 저자가 끊임없이 드러내는 권태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가 반응할 시간은 남아있다. 만약 외국인의 고립된 목소리가 충분한 예언이 될 수 있다면, 그가 이를 시골 무당의 말로 여기지 말고 그 유명한 시구를 정당화하지 않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그가 입은 갑옷은 그의 체구에 맞지 않았다.
기껏해야 전투 하루를 버틸 정도였고
그 날은 여름밤처럼 짧았다.
에르네스토 께사다
1884년 5월
여행 중
(1881-1882)
이 책의 재판을 고통의 순간에 있는 콜롬비아 국민에게 바치며,
존경과 애정의 표시로
미겔 까네
1903년 12월
서문
이 책의 페이지들은 내가 언급된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쓴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엄격하게 통일된 계획에 따른 작품을 제시하려는 의도는 없고, 단지 내 정신에 반영된 인상의 순간을 담은 연속적인 그림들을 보여주려 한다. 내 조국 정부가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정부에 대한 대표로 임명해 주는 영광을 안겨주었을 때, 나는 단순한 여행 이야기가 미국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흥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대개 유럽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보다는 스페인계 아메리카 수도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여행의 고통과 고난이 내가 볼 수 있었던 놀라운 풍경들로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연이 그들이 사는 땅의 특성으로 인해 고립시킨 문화적이고 교양 있는 사회들 속에서 경험한 순수한 지적 즐거움으로도 보상받았다. 그 고립은 그들이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모든 활동을 쏟도록 자극한다.
나는 가볍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여행기는 여행의 불가피한 불편함을 상쇄하기 위해 좋은 유머를 지니고, 균형 잡힌 발걸음으로 가볍게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에게 환대를 베푼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교양을 갖추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진실이라는 고정된 빛, 진실이라는 안내자 외에는 다른 것이 없어야 한다. 내 상황의 요구로 인해 특정 사실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때, 나는 사실을 내 상황의 요구에 맞추기보다는 생략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내 삶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든 여러 이유로 인해 이 페이지들을 채우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이 재판은 1883년 ‘여행 중’ 출간 이후 유일한 것으로, 첫 장들에서 상당 부분이 삭제되었고 지나가면서 그린 몇몇 윤곽만 보존되었다. 감베타, 글래드스톤, 르낭의 윤곽 같은 것들은 아직도 흥미로울 수 있다. 저자는 첫 번째 편집본에 한 단어도 추가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그 당시와 아메리카의 그 지역에서 저자가 느낀 인상들에 대한 판단을 시간이 인정했는지 아니면 수정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12월
서론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 보고타 시에 도착한 아르헨티나인의 총 수가 10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는 1881년 처음으로 볼리바르가 활동했던 사람들을 방문하러 간 공사관 직원들도 포함된다. 이 끔찍한 고립은 통신의 어려움 때문이며, 아마도 스페인계 아메리카가 최종적으로 조직되기 전 겪었던 슬픈 날들의 주요 원인일 것이다. 유럽은 우리의 불행한 대륙에 대해 아직도 무거운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유럽 국가들을 집단적 책임으로 묶고, 거의 균일한 정치적 음조를 유지하며, 시련의 순간에 흔들리는 자를 간접적으로 격려하고 지지하는 연대와 상호 인력이 부족했다. 사회 형성을 지배하는 역사적 법칙들은 우리의 광대한 지역에서 모든 엄격함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지적 집단의 노력은 수와 힘을 대표하는 야만적 대중에 맞서 오랫동안 무익하게 부딪쳤다. 자유의 씨앗을 감싸는 쓴 껍질인 무정부 상태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균일하게 지배했고, 각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과정으로 나타났다. 이는 근원적 원인이 같았기 때문이다. 일부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이 어두운 시기는 이제 악몽일 뿐이며, 그것을 만들어낸 병적 상태가 사라졌기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교양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에서 열병 같은 상업 활동과 예술의 모든 매력을 만나는 외국인이 1820년에 반야만적인 지도자들이 5월 광장의 쇠창살에 말을 묶어 두었다는 것을, 또는 1840년에 우리 어머니들이 교회에서 나올 때 비열하게 모욕당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룬 물질적 진보가 엄청나다면, 우리의 도덕적 발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내 눈에 아르헨티나 사회의 사상 발전은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지적 현상 중 하나다. 아르헨티나의 사상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전 아메리카의 사상을 언급하는 것이다. 비록 이 현상이 지리적 위치, 토양의 성격, 강력한 유럽 이민의 흐름 등에 대응하는 원인들로 인해 모든 곳에서 같은 강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라플라타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강도의 격렬함을 보였다.
북미인들은 완전히 만들어진 도덕적 세계를 유산으로 받았다.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종교에서는 자유로운 탐구, 정치에서는 의회주의, 지방 조직에서는 자치제, 법률에서는 인신보호법과 배심제, 과학과 산업, 상업에서는… 영국의 천재성이었다. 남미에서는 우리가 반세기 동안 거부해야 했던 치명적인 유산이 있었다. 펠리페 2세의 신학과 그 현실적 적용, 카를로스 5세의 정치, 그리고 비옥한 아메리카 땅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스페인의 쇠퇴를 가져온 기이한 상업 체제였다. 그 유례없는 몰락은 두 개의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파비아에서 트로카데로까지였다. 따라서 1810년 아메리카가 일어났을 때, 단순히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모국 자체를 첫 번째 희생자로 만든 체제가 강요한 시체와 같은 부동성에 대항한 것이었다. 아메리카는 전통도 없고, 정부에 대한 잠재의식도 없었다. 이는 해방의 길을 앞서간 사람들의 행운이었다. 우리는 이미 북미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영국법에 근거하여 ‘영국식’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이 겪은 것보다 더 적은 억압 때문에 찰스 1세는 단두대에서 죽었고 윌리엄 3세는 1688년 왕위에 올랐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절대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스페인에 맞서 거대한 혁명을 시작하면서, 아마도 인류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갈 때, 선례가 있었고 전통에 기대었으며, ‘즐거운 입성’과 오래된 부르고뉴 헌장에 의지했다. 프랑스는 89년에 천 년의 국가 존재를 가지고 있었고, 비록 터무니없는 정치 체제를 파괴했지만 사회 조직의 기초는 보존했다. 93년은 열병의 순간이었다. 평온을 되찾자 획득한 자유는 전통적 질서에 기대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나? 오늘날 남미 사회의 지적 상황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우리에게는 군주제 전통이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하나의 이상, 하나의 존경, 실제 삶의 파괴적인 논쟁 위에 있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스페인 왕은 단 한 번도 아메리카 땅을 밟지 않아 신성한 권리의 상징, 화신된 형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우스꽝스럽고 탐욕스러운 부왕들은 때로는 왕조에 열광적인 국민들의 선봉에 설 용기조차 없어 아메리카인의 의식에서 바다 너머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통치하며 항상 금을 요구하고 노동의 자유조차 거부하는 전설적인 인물에 대한 마지막 경외심마저 지워버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국민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자유를 어떻게 조직하는지도 몰랐다. 더욱이 대중은 자유를 자연 상태로의 회귀, 세금의 폐지, 지적 문화의 폐지, 모든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열린 들판으로 생각했다. 옆에 있는 사람, 즉 적대자의 힘 외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아메리카 혁명은 동포들의 깊은 무지 속에서 벗어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중은 그들을 따라 파괴의 길을 걸었고, 받은 충동에 이끌려 모든 한계를 넘어섰다. 혁명이 끝난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대한 충동으로 일으킨 폭풍을 막을 힘이 없어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때 원시적인 정부, 힘, 위신, 대담함이 모든 권리를 주장하며 나타났다. 형식, 전통, 인간에 대한 존중? 키로가의 창, 시골 지휘관의 영향력, 로사스의 가우초 같은 교활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스타일과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플라타에서 카리브해까지 이어졌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 야만적이고 인구가 희박하며 합리적 조직의 징후조차 없는 세계를 맞이했다. 오늘날의 아메리카를 보라. 그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수십만 명의 외국인들을 세어보라. 우리의 산업, 우리의 부의 개발, 우리의 취향의 세련됨, 우리의 정치 조직의 확고한 형태를 보라. 그리고 반세기 만에 세계의 어느 부분이 이와 같은 진화를 이루었는지 말해보라!
이것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인가? 아! 아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달성된 성과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 성과들은 인간적인 방식을 결정하고, 그 탁월함은 이성에 의해 인정받고 공동의 복지에 의해 지지되어 영속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첫 번째 장애물은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것은 혁명의 역사와 지배적인 사상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었다) 공화정 정부의 본질, 그 실제적 적용이었다. 초기의 자유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은 정치 교육이 없고 권위를 순전히 헌병의 관점에서만 보는 데 익숙한 국민들의 폭발에 대항할 법적 수단이 없는 약한 정부의 구성을 초래했다. 이러한 약점은 무정부 상태를 낳았고, 거짓되고 해체적인 사상에 대한 반동과 끊임없는 내전에 대한 피로감에 힘입어 강력한 정부, 즉 독재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부분의 아메리카 국가들은 독재에서 무정부 상태로, 끊임없는 동요에서 음울한 무기력으로 살아왔다. 오늘날에야 비로소 정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국민의 의식에 스며들기 시작하여, 무정부 상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든 수단을 조직된 권력에 부여하면서도 독재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보장을 국민의 손에 남겨두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메리카는 이미 개선할 수 없는 길을 따라 확고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개인적 명성에 대한 오래된 취향과 매력적이지만 인간 본성의 긍정적 요구와 완전히 대립되는 이론에 기초한 정치 조직에 대한 관대하지만 덧없는 유토피아를 모두 포기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구원받고 정치 질서 안에서 진보를 확실히 할 수 있다.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황금시대의 도래를 꿈꾸고, 자신이 모르는 민족을 위해 서재에서 헌법을 쓴 클라크 학파의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이상을 제도에 반영하는 것은 단순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동일한 우리의 도덕적 유기체의 끊임없는 작용을 결정하는 법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뿐이다. 천천히 개혁하고, 갑작스럽고 경솔한 혁신의 충격을 피하며, 현대 정신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닌 한 모든 것을 보존하는 것, 이것이 아메리카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오늘날 옛 군주국의 재정 감독관이라는 슬픈 직책이 우리의 젊은 사회에서 정부의 제일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업의 필요를 연구하고, 산업 발전을 돕는 선견지명 있는 배려, 행정의 경제성과 청렴성이 오늘날 한 나라의 정치의 생생한 원천이다. “좋은 정치를 해주시면 제가 좋은 재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루이 남작이 나폴레옹에게 말했다. 현재 세계에서는 이 문구를 뒤집은 것이 진정한 정부의 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시점의 아메리카 상황에 대해 말하자면, 공공연히 진보의 길을 가고 있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 결과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비통한 전쟁이 에콰도르까지 태평양 연안에 황폐화를 가져왔다. 오늘날 올메도의 조국은 그 책임이 전체 아메리카에 연대적으로 떨어지는, 그런 끝없는 내전 중 하나의 무대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은 칠레가 지난 4년간 저지른 심각한 실수 중 첫 번째였다. 지금은 그 원인을 연구하거나 각자의 책임을 규명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안토파가스타에서 파나마에 이르는 해안을 따라 칠레의 저항할 수 없는 영향력, 그 상업과 산업의 점진적인 침투가 승리를 통해 얻은 것보다 더 확실하게 칠레의 번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79년에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이미 긴 분쟁을 시작한 나라들을 방문했다. 그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중 일부는 이미 출판되었는데, 사건들이 내 예측을 정당화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칠레의 승리를 예견했고 교전국들이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들의 우호적인 개입 외에는 싸움을 끝낼 다른 방법을 보지 못했다.
칠레는 요구 사항의 심각성으로 인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두 번의 좋은 기회를 놓쳤다. 아리카 점령 후와 리마 점령 후였다. 승리는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었다. 볼리비아는 사실상 전쟁에서 물러났고, 페루는 기진맥진하여 칠레의 발 아래에 있었으며, 해체되어 유기적인 형태도, 정부도 없었다. 요구된 분할, 위장된 속국 상태의 모욕, 승자의 엄격한 태도는 그러한 강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부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태도는 매우 중대한 의무를 수반한다. 그것을 실효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칠레가 처분할 수 없는 행동의 신속성과 자원의 양이 필요했다. 초리요스 전투 후에는 아레키파로 진군하여 페루 전체를 단단히 점령하는 것, 즉 프로이센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했다. 칠레는 그 물질적 불가능성에 부딪혔다. 칠레는 오직 자국 군인들이 밟고 있는 땅만을 지배하지만, 그 군인들의 수는 많지 않으며 매 전투마다 승리는 충실하지만 그 열은 희박해지고 있어 더 이상 손실을 메울 수 없다. 칠레에는 일하는 동안 자국민들이 싸울 수 있게 해주는 이민자들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칠레 농업과 광업, 즉 칠레 산업의 두 주요 부문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군사 요소의 창출, 그 해악이 아직 칠레에 알려지지 않은, 점령의 필요성으로 인한 거대한 관료제의 발전, 그것이 수반하는 엄청난 비용, 그러한 상황의 필연적 결과인 부패, 상업의 쇠퇴는 자국을 사랑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칠레인들을 걱정시키기에 충분한 이유들이다.
잘못 이해된 국민적 자존심에 고무된 칠레는 인도주의와 고도의 정치적 이유로 해결책을 준비하기 위해 선의의 중재를 제공하고자 했던 정부들의 행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는 실수였고, 지금 그 결과를 겪고 있다.
페루에 관해서는, 그 상황이 너무나 비참해서 싸움이 계속된다고 해서 더 악화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역사상 한 나라의 가시적 형태가 이렇게 완전히 사라진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이 길고 끔찍한 위기는 그 조직의 깊은 약점과 그것을 좀먹는 악덕들을 드러냈다. 평화가 이루어지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테지만, 페루는 천천히 무덤에서 나와 새로운 삶, 평화와 질서와 노동의 삶을 생각할 것이다. 구아노와 질산염의 황금 강물을 저주하고 오직 자신의 훌륭한 땅을 경작하는 데에만 전념할 것이다. 교훈은 피비린내 나는 것이었지만, 민족의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곧 페루인들에게 지나간 쓰라린 시간들은 번영의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일 것이다.
중재의 원칙을 불변의 행동 지침으로 삼아, 우리는 1865년 파라과이가 야만적으로 우리를 도발했던 전쟁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이 방식으로 해결했다. 나중에는 칠레와의 오랜 국경 분쟁이 직접적인 타협을 통해 해결되었는데, 이는 양국의 명예를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 무역에 마젤란 해협의 자유로운 항해와 중립성을 보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브라질과의 국경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 공개된 문서에서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미 상크리스토발 내각에 중재를 제안했다. 이 방법으로든 직접적인 타협으로든, 전쟁에 호소할 필요 없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할 권리가 있다. 전쟁의 결과는 분명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든 두 국가 중 하나에 치명적일 것이다.
내전의 시대도 아르헨티나 땅에서 막을 내렸다. 그 원인이 국가의 최종적인 조직으로 인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의 끝에서 볼리비아 국경까지, 라플라타 강변에서 안데스 산맥 기슭까지, 인간 산업의 고무적인 소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땅을 파고, 철로를 놓고, 운하를 만들고, 기계를 설치하고, 처녀지를 경작지로 바꾸는 변화무쌍한 모습만 보인다. 도시들은 자국민들의 눈앞에서 변모하고 있고, 그들은 그 현상을 놀라워한다. 공공 수입은 두 배가 되고 있다. 유럽의 황금이 물밀듯이 밀려와 진보의 사업으로 바뀌고 있다. 신용이 확대되고 확고해지고 있다. 이민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순수한 만족감을 느낄 이유가 있지만, 동시에 중대한 책임도 있다. 내부의 평화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하고 우리의 제도를 지속적인 진실로 만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계속 가야 한다.
현재 상황에서 평온, 현명한 신중함, 한마디로 말해서 브라질만큼 침착함이 필요한 아메리카 국가는 없다. 신하들의 사랑과 세계의 존경을 얻은 군주가 통치하는 브라질은 자국을 위협하는 심각한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를 내부에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재정 상황은 안심할 수 없다. 수입의 유사한 증가 없이 지출이 증가하고, 전쟁 물자 구입을 위한 연이은 차관, 그리고 행정 시스템의 고통스러운 결함이 확인되었다. 이것들이 곧 위험한 비율로 확대될 위기의 주요 원인이다. 한편, 브라질 헌법에서 노예제의 슬픈 그림자가 곧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정부의 예견 부족이든 농촌 지주들의 체계적인 맹목이든, 이 해방이 브라질의 명예가 될 것이지만, 노예 노동을 자유 노동으로 대체해야 할 때 브라질 산업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임금 문제의 출현, 파업, 이민의 미미함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하룻밤 사이에 자유를 되찾을 150만 명의 흑인들에 대한 어려운 경찰 감시, 그들 중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증오, 급진적인 변화의 모든 어려움이 엄청난 경제 위기를 야기할 것이다.
한편, 정치 상황은 불안을 예고하고 있다. 민주주의 정신이 매일 힘을 얻고 있으며, 멀지 않은 미래에 분리의 징후도 보이고 있다. 이 광대하고 인구가 희박한 영토에는 동질성이 부족하다. 북부, 중부, 남부 세 그룹의 열망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지 않다. 제국의 지방들을 뒤흔드는 조용한 동요가 있으며, 이 민족의 운명을 이끄는 매우 존경받는 황제 돈 페드로 2세에 의해 절대적으로 구현된 왕조는 신의 뜻으로 멀어지기를, 돈 페드로 2세의 사망일에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다.
만약 브라질이 현재 상황에서 불운하게도 아메리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결과와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을 바라는 당이 있다. 애국심에 반하는 이기심에 이끌려서든, 알렉산더의 방식으로 어려움의 매듭을 끊으려는 희망에서든 말이다. 그 작업에 필수적인 도구는 무엇보다도 마케도니아 영웅의 검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좋다.
브라질은 반복하지만, 솔직하고 평화로운 국제 정책, 재정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 그리고 의회 체제의 더 실용적이고 진실한 적용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의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 오로지 의회만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들은 우루과이의 발전을 환영할 것이지만,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으로 인한 어떠한 행동에도 철벽같은 장벽을 세울 것이다.
우루과이는 아직 어려운 시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군국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며, 자유를 확립하려는 노력 속에서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다. 놀라운 자연환경을 가진 그 땅의 운명은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리오델라플라타 부왕령의 옛 지방이었던 동방의 주민들은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누고 있으며, 같은 전통과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우리 옆에서 거인의 발걸음으로 진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사적 인력의 법칙은 양쪽 강둑에서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아르헨티나 정부는 결코 폭력적인 수단으로 이를 유도하지 않을 것이다. 동방인들이 의회의 목소리를 통해 위대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하는 날,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며, 아르헨티나인들과 피를 섞어 싸웠던 것처럼 진보의 행진에서도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때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에 병합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첫째, 우리의 연방 제도는 연방 주의 편입만을 허용하며, 둘째, 아르헨티나 정책은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을 불변의 기초로 삼고 있다. 결코 폭력으로 아르헨티나 영토를 한 뼘도 넓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고향 아메리카 땅을 세상의 어느 지역보다도 사랑한다. 내 조국의 들판이 그곳에 펼쳐져 있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 영혼은 그곳에 가까이 있으며 내 두뇌는 조국을 위해 열렬히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소진되고 있기 때문일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도덕적 집단에서 인격의 고결함, 삶에 대한 헌신, 충성심과 명예가 빛나는 것을 보기 때문일까? 나는 모른다. 하지만 쓰라린 의심의 순간에, 내가 공감하는 등대가 어두워질 때, 양키의 부패가 내 마음을 격분시키거나 파리의 거리의 데마고기가 내 영혼을 어둡게 할 때, 나는 평온한 확신 속에서 쉬며 남아메리카의 미래에 대한 부드러운 비전에 잠들게 된다. 그곳에서 젊어진 라틴 정신이 다시 빛날 것 같다. 그리스에서 예술을, 로마에서 통치를, 세상에서 위대한 일들을 많이 해낸 그 정신이 역사를 지치게 했던 그 정신 말이다!
만약 이것이 환상이라면 그 환상 속에서 견디며 그것이 자주 우리를 찾아오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오직 위대한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영혼은 그것들을 실행할 준비를 한다. 한 아메리카인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그의 민족의 영혼의 한 원자가 고동치는 곳에 이르러, 그것을 상담하고 그 힘찬 맥박을 확인한 후에, 정상에 이를 수 있는 모든 진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사상이 전부다. 지역의 다툼은 그것에 관여하는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불모화하는 하찮은 비참함이다. 더 높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미래이고, 우리 자녀들의 운명이며, 우리 인종의 명예다. 그러므로 일하자.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그 보호 아래에서 변화는 마치 신의 손에 의해 일어나는 것처럼 일어난다.
1883년 9월
제1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르도까지
다시 바다에서. – 리우데자네이루 만. – 항구와 도시. – 띠후까. – 아프리카 해안. – 자선 수녀. – 타호 강. – 지롱드 강에서의 검역. – 보르도.
다시 한 번 물위에, 다시 한 번!
(바이런, 칠드 해럴드의 순례 2권 3장)
영원히 아름다운 아메리카 대륙의 개선문이여! 바다가 저항할 수 없는 노래에 이끌려 그 만으로 끌려 들어온 것 같다. 열대의 나무들과 우아한 언덕의 윤곽을 반영하는 물결 위로 깊고 순수한 하늘을 배경으로 섬세한 선을 그리는 산들의 발치를 키스하며, 대양 자체가 미소 지으며 무장을 해제하고 험상궂은 표정을 잃고 주변의 조화 속에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이 광경을 감동 없이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광경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정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위대한 것들을 고상한 사상으로 표현하도록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그리스의 자연, 조화롭고 평온한 행성의 운행과 같은 산들, 푸르고 투명한 하늘, 만의 너그러운 물결, 그 품 속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물결은 그리스인들의 영혼에 그 이상을 표현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감정, 그들의 시인들의 운율에서 숨 쉬고 그들의 조각된 대리석의 선에서 떨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던졌다. 그러나 그리스의 땅은 온화하고 건강한 대기로 감싸여 있어, 마치 애정 어린 외투처럼 육체적 힘을 자극하고 두뇌에 활력을 준다. 리우데자네이루 만을 적시는 해안 위로, 태양은 수직으로 불타는 층을 떨어뜨리고, 공기는 뜨겁게 흐르며, 풍성한 식물의 잔해들이 쉬지 않고 발효하고, 생명의 수액은 동물의 유기체 속에서 약해진다.
그러니 배에서 내려 땅을 밟아보라. 당신은 코코넛 나무와 야자수, 바나나와 대추야자, 열대 특유의 모든 식물상을 보았고, 그것들이 새로운 세계의 감각을 눈으로 들어오게 했다. 당신은 도시에서 꽃과 향기의 분위기, 마치 뚜꾸만으로 가는 월계수와 오렌지 숲 사이를 지나갈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것, 또는 축복받은 타히티 섬의 땅을 밟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기 머물러라!
항구에 머물러라! 그 비할 데 없는 광경으로 눈을 채우고 빈약한 집들과 좁고 지저분한 거리, 구역질나는 냄새, 납빛 대기의 혼잡한 군집 속에서 환상을 잃지 마라! 서둘러 호수를 건너고 언덕을 오르세요. 페트로폴리스로 가세요. 아니면 띠후까로 가세요. 페트로폴리스는 더 웅장하고, 그 멋진 오르막길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스위스나 피레네 산맥에서도 견줄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두 산의 경사면에서 게으르게 서로의 품에 기대어 있는 그 한적한 곳, 띠후까를 더 좋아합니다. 그곳의 즐거운 고요함, 신선한 바람, 나무 사이로 노래하는 폭포, 그리고 갑자기 언덕 사이로 나타나는 그 빠른 전망들을 말이죠. 거기서는 거대한 디오라마처럼 짙푸른 파도를 가진 만 전체, 왼쪽 해안의 변덕스러운 연쇄, 푸르고 우아한 섬들, 그리고 고지대에서 바라보면 더없이 아름다운 도시 전체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곳에는 인간의 소음이 닿지 않고, 그 고요한 정적은 우리의 마음이 본능적으로 거기에 부족한 무언가를 찾게 합니다. 우리와 함께 즐거워할 마음이 맞는 영혼, 섬세한 음색으로 귀를 어루만질 목소리, 고독의 내밀한 우울함을 피해 우리 품에서 안식을 찾을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북으로 뱃머리를 돌려라, 북으로!
열대 지방 어느 아름다운 달밤. 고요한 바다가 작고 수많은 파도를 게으르게 밀어올린다. 수평선은 맑은 하늘 아래 넓어진다. 사방이 고독하고 크고 장엄한 침묵이 감돈다. 영원한 스크루와 지친 기계의 숨소리만이 이를 깨트린다. 선수에서는 선원들이 노래하고, 선미에서는 고립된 채 생각하고 고통받고 회상하는 몇몇 사람들이 밤과 이야기를 나누며, 열린 공간을 응시하고, 무의식적으로 멀리서 조용한 대양의 물속으로 잠기는 것처럼 보이는 비할 데 없이 빛나는 유성의 놀라운 궤적을 따라간다. 아래층 식당에서는 쉰 피아노 소리, 한 트럼프 게임 선수의 우렁차고 거친 웃음소리, 병을 따는 소리, 무미건조한 벌칙 게임의 소음이 들린다. 갑판 위에서는 젊은 당직 장교가 움직이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선원의 무한한 꿈에 젖어 있고 잠든 바람의 확실한 고요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갑자기 불타는 모닥불처럼 보이는 네 개의 파이프가 그 주인들과 함께 나타난다. 모두가 동시에 말한다. 가죽, 양모, 옷감 또는 기름… 매력은 깨졌다. 달이 애정 어린 빛으로 그들을 씻기고, 그 아름다움의 소박한 위엄 앞에서 품위를 지켜달라고 간청하듯 그들을 레이스로 감싼다. 하지만 외로운 공상에 작별을 고하고 지옥 같은 선실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 아프리카 해안이 있다. 고로아는 평범한 유럽풍 모습이다. 다카르는 참을 수 없이 반짝이는 모래사장, 빈약한 야자수, 무한한 비참함과 슬픔의 분위기, 원시적인 피라우를 타거나 배 주위에서 고래처럼 헤엄치는 꼬마 흑인들이 있다. 선상의 무리가 늘어난다. 이 모든 아프리카의 ‘개척자들’은 기진맥진하고 창백하며 탈진한 채 온다. 여자들은 투명하고 망가져 있으며, 가장 젊은 여자들조차 이른 죽음의 징후를 띠고 있다. 1874년에 그렇게 올라탔던 그 달콤하고 슬픈 생명, 세네갈 병원에서 복무 기간을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가던 20세의 그 자선 수녀를 기억한다. 조용하고 수줍어하던 그녀는 갑판을 밟자마자 혼자 걸으려 했지만, 힘이 빠져 비틀거렸고 배에 있던 모든 부인들이 그녀를 부축하러 달려갔다. 매일 그녀는 갑판으로 안내되어 숨을 쉬고 대양의 생기 넘치는 공기를 마셨다. 아이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의 발치에 앉아 조용히 있었고, 그녀는 이미 해방을 알리는 깊고 내밀한 메아리가 깃든 숨결처럼 약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떤 여자도 그 불행한 젊은이만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연민, 존경, 애정, 그녀를 그 고통의 길로 내몬 사람들에 대한 분노, 그 비참한 운명에 대한 격분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관심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눈물을 머금은 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시기를 신께 빌며 이야기했다… 고요한 저녁이 저물 무렵, 우리의 열망하는 눈앞에 지롱드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도착의 감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선상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방파제를 지나 뽈리악의 유쾌한 강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마지막 햇살에 씻긴 성들, 즐겁게 언덕을 오르는 포도밭들… 자선 수녀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십자가를 꼭 쥐며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고 지고한 무언의 기도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소식이 배 안에 퍼져 모든 소음을 잠재우고 모든 기쁨을 꺼뜨렸을 때,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내 눈은 우연히도 그 순간 막 읽은 디킨스의 책 구절에 떨어졌다. “하늘의 정의는 땅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천사 같은 영혼이 방금 너무 이른 비상을 한 세상과 비교해 이 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엄숙한 맹세로, 열정적으로, 그 시체 위에서 그를 다시 삶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말해 보라. 너희 중 누가 감히 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20명이 내린다. 각자 격리소에서 하루에 2페소를 지불할 것이다. 즉, 모두 10일 동안 2,000프랑을 낸다는 뜻이다. 우리는 300명 이상의 승객이 탑승해 있는데, 검역이 없다면 모두 내려 리스본에서 반나절과 하룻밤을 보내며 각자 평균 15페소를 호텔, 극장, 마차, 쇼핑 등에 쓸 것이다. 총 2만 프랑 정도로, 그중 5-6천 프랑은 세금, 관세, 영업세 등으로 국고에 들어갈 것이다. 포르투갈식 경제다.
포르투갈의 쇠락이 얼마나 빠르고 기이한가! 자연은 리스본을 유럽 전체의 아메리카 무역의 관문으로 지정한 것 같다. 그 땅은 놀랍도록 비옥하고 그 생산물은 전 세계가 찾는다. 전성기에는 태양이 항상 그들의 영토 위에 떠 있었다. 아시아에서의 그들의 업적은 영국에 도움이 되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영국인들을 위해 곶을 돌았고, 아프리카 해안을 식민지화하려는 노력도 같은 결과를 낳았다. 브라질의 독립은 결정타였고, 오늘날… 아무도 카몽이스를 읽지 않는다!
비스케이 만은 우리를 잘 맞이했고 지롱드 강은 옆구리를 흔들며 삐걱거리며 날아가 해가 지기 전에 뽈리악 앞에 닻을 내린다. 멀리 어둠에 싸인 강둑 사이로 두 척의 증기선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2시간 전부터 승객 절반이 가방을 손에 들고 높은 모자를 쓰고 서 있다. 한 달간의 휴가로 둥근 모양을 되찾은 모자는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이마에 붉은 잔인한 자국을 남긴다. 찰스 디킨스의 ‘돔비와 아들’에 나오는 유명한 커틀러 선장이 영원히 지니고 다녔던 것과 같은 자국 말이다. 한 척은 여행사 소속이다. 하지만 다른 한 척은? 우리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오, 리스본에 전보를 쳐서 그것을 요청했던 우리 말이다. 두 가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다. 첫째, 당신들 모두와 당신들의 거대한 트렁크, 앵무새, 파이프 등을 피하기 위해서, 둘째, 평범한 사람들보다 20시간 먼저 땅을 밟기 위해서다. 증기선의 선장이 이름을 외친다. 나는 대답하고 동료들을 모으고 몇몇 여성분들에게 내 배에 자리를 제안하지만 그들은 아쉬워하며 거절한다. 지롱드 호의 몇몇 장교들과 악수를 나누고 여정을 떠난다.
동물적인 감각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비물질적인 높은 차원에 살지 않는다. 그 넓고 광활한 침대, 부드럽고 시원한 린넨 시트, 거리의 고요함, 움직이지 않는 바닥은 나에게 섬세한 감각을 준다. 아침에 눈을 뜨자 비서가 들어온다. 그는 보르도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극장도 보고, 껭꽁스 공원도 올라가고, 탑도 올라가고, 지하실도 내려가 미라도 보고, 세관에도 가봤고, 모든 극장에서 그날 밤 어떤 공연이 있는지도 안다. 그동안 나는 잠을 잤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저녁에 나는 보르도에서 이틀 더 쉬겠다고 발표하고 그의 젊은 얼굴에 구름이 드리운다. 그는 파리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빠져나갈 것 같고, 늦을 것 같고, 그것이 거짓말이고 인류의 절반이 머리를 돌리기 위해 만들어낸 관습적인 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에게 그날 밤 몇몇 동료들과 함께 파리로 가서 거기서 나를 기다리라고 제안했을 때 그의 눈이 얼마나 빛났는지! 그는 잠시 망설인다. 밤에 가면 뚜렌 지방의 시골, 앙굴렘, 뿌아띠에, 블루아를 보지 못할 텐데, 하지만 파리!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유를 얻은 새처럼 활기차게, 그는 찬가로 가득 찬 영혼을 안고 떠난다!
제2장
파리에서
파리로 가는 여행. 볼리비아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노새를 타고. 뚜렌.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뤽상부르 박물관. 박물관을 둘러보는 방법. 하원: 감베타. 상원: 시몽과 펠르탕. 파리의 7월 14일. 군사 열병식: 그레비 씨. 밤의 광장과 거리들. 마르세예즈. 학사원 연례 회의. 르낭 씨.
나도 차례가 되어 아주 평온하게 어느 아름다운 아침에 기차를 탔고, 우리는 그 멋진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 미국 여행자들은 이미 프랑스, 파리, 그리고 해안의 큰 도시들 중 한두 곳을 알고 있다. 시골 생활은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다. 이는 철도의 단점 중 하나로, 그 속도와 편안함이 여행의 그림 같은 특성을 영원히 파괴해 버렸다. 내 아버지는 작은 마차를 타고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했는데, 역참에서 말을 조달했다.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지나가는 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풍습을 연구하고 매 순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인 것들 사이에서 낭만주의는 결코 익스프레스보다 노새를 선호할 수는 없다. 내 삼촌 중 한 분인 안토니오 까네 대령은 라바예 장군이 후후이에서 사망한 후, 라모스 메히아, 마데로, 프리아스 등과 함께 장군의 시신을 볼리비아 국경까지 호위했다. 그는 국경 마을 중 한 곳에서 병이 들었고, 동료들이 흩어져 어떤 이들은 볼리비아 군대에 입대하고 다른 이들은 칠레나 몬테비데오로 향할 때 그는 노새 한 마리를 타고 브라질로 향했다. 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브라질을 횡단하여 6~8개월 후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는데, 600레구아 이상을 여행했다. 후에 그의 처남인 플로렌시오 바렐라가 끊임없이 그에게 질문을 했는데, 여행자의 교육과 취향이 그의 인상을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까네는 그 놀라운 여행을 했는데, 따뜻한 환대를 받은 모든 곳에서… 그리고 예쁜 아가씨들이 있는 곳에서 머물렀다. 변덕이 지나가면 다시 노새에 올라타 그렇게 한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대서양 해안에 도착했다.
나는 감탄하지만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오를레앙 노선을 선호한다. 길의 양쪽으로 뚜렌의 빛나는 들판이 펼쳐지고 있는데, 멋지게 경작되어 있어 그 모습만으로도 프랑스의 놀라운 번영의 비밀을 보여준다. 관개용 수로들이 자연스러운 개천처럼 기묘하고 즐겁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갑자기 우리는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는데, 이 계곡은 나무로 덮인 두 개의 높은 언덕 사이를 구불구불 흐른다. 나무들 사이로 언덕 위에 봉건 시대의 성이 나타나는데, 거친 회색 돌로 되어 있어 그 특징적인 노후함이 그 그늘 아래에서 잠자는 소박한 아모의 하얀색과 대조를 이룬다. 전망은 끊임없이 바뀌고, 앙굴렘, 보아, 앙부아즈, 샤텔로, 푸아티에 등의 이름이 귓가에 들려오면 프랑스의 오래된 역사의 장엄한 장면들이 되살아난다…
이제 마을과 작은 도시들이 매 순간 늘어나고, 집중되고 가속화되며, 좁고 깨끗한 거리, 구운 벽돌집,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이 있다. 마차길은 넓고, 포장은 단단하고 조밀해서 무거운 짐마차가 지나갈 때 울린다. 장엄한 페르셰롱 말이 붉은 숫자가 새겨진 네 개의 큰 건축용 돌을 힘들이지 않고 끌고 간다. 그리고 터널, 다리, 고가도로, 넓고 통풍이 잘 되는 거리, 많은 노동자들, 움직임과 생명. 우리는 파리에 있다.
- * * * *
정오에 오래된 사랑하는 친구들을 방문한다. 그들은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 모나리자의 미소를 짓고, 수태고지의 빛나는 베일에 싸이거나, 옷을 벗고 루벤스의 눈부신 살결을 뽐낸다. 루브르로, 뤽상부르로. 하루는 대리석, 다른 날은 색채, 하루는 그리스로, 다른 날은 르네상스로, 또 다른 날은 우리의 멋진 세기로. 하지만 천천히, 친구들이여.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메두사의 뗏목’으로 시작해서 르쉐르의 ‘수도사들’로 끝내고 망막이 피로해져서 박물관을 나오면서 스페인 화가가 성모를 그렸는지, 무리요가 전투를 그렸는지, 라파엘이 풍경을 그렸는지, 미켈란젤로가 전원 풍경을 그렸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는 것처럼 하지 마세요. 달콤하고 부드럽게.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아무도 당신을 재촉하지 않아요. 그 선과 색채에 당신의 눈을 관능적으로 빠뜨리는 것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안내인이 강요하는 광란의 소란스러운 질주보다 더 즐거울 거예요. 카탈로그는 손에 들고 있지만 닫혀 있어요. 천천히 전시실 중앙을 걸어가세요. 갑자기 천사 같은 얼굴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거예요. 천천히 바라보세요. 그녀는 금발이고 그 향기가 느껴질 것 같아요. 눈은 맑고 깊어서 바닥에서 조화로운 영혼의 고요한 박동이 보여요. 만약 그녀가 당신을 붙잡는다면 머물러요. 작가에 대해, 그가 그 천상의 인물을 그릴 때의 정신 상태에 대해, 그의 시대의 떠다니는 이상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나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희미한 유사성의 보호 아래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고 성가시게 할까 봐 완전히 일어서지 않는 수줍은 기억들을 일깨워요. 그런 다음 그림, 예술을 잊고 눈이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배회하는 동안 바다를 건너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상상력에 자유를 주고, 부와 영광이나 권력을 꿈꾸고, 마지막 키스의 떨림을 입술에서 느끼고, 유령과 이야기를 나누세요. 오직 그렇게 해야만 회화가 음악의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오직 그렇게 해야만 조각적인 선들이 인간 형태의 비교할 수 없는 정교함 속에서 물결치며, 여인의 목의 윤곽에서, 곡선에서
순수하고, 그리스인들은 정숙한, 가슴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처녀의 윤곽 잡힌 어깨나 청년의 조화로운 강건함에서;
오직 그렇게만 돌이 리듬과 멜로디의 즐거움을 준다. 당연히,
원인의 물질성이 영역을 제한한다. 티치아노의 초상화, 루벤스의
바카날레, 렘브란트의 실내화, 수르바란의 수도사는
화폭의 주제와 연관된 일련의 분명한 인상을 줄 것이다. 이것이
대리석과 화폭이 음악보다 열등한 이유다. 음악은 무한한
지평을 열고, 중세의 성당을 그리고, 별빛의 하얀 구름으로 덮고, 보이지 않는
파도에 꿈꾸던 아름다움의 여인들을 실어 나르고, 당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눈에
눈물을 가져오고, 뇌에 평온한 생각을 주고, 결국 상상력의
무한하고 완전한 음계를 달린다…
머리를 들고 소란스러운 파도를 바라보며, 규칙을 탁자에 내려치고 5분 동안 종을 울린다. 분노에 찬 표정을 짓고 일어서서 외친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요!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그러고는 극장 쌍안경을 들어 부인들로 가득 찬 객석을 둘러본다. 손으로 인사를 건네고, 스무 통의 편지를 받고, 마흔 명의 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읽고, 보고, 말하고, 쓰거나 하품하는 동안, 쉴 새 없이 지칠 줄 모르는 규칙을 탁자에 흔들고, 때때로 양심의 만족을 위해 “들어주십시오, 여러분!”을 되뇌인다.
안내원들은 메아리처럼 반원형의 네 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그 사이, 아래에서는 완벽한 희극의 장면이 펼쳐진다. 완고한 라스파일은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감베타는 그에게 목소리를 아끼기 위해 연단 가까이로 오라고 권한다. 보드리-다송, 우파의 무능한 자는 왼쪽 자락이 앙제 주교의 손에 쥐어진 채, 끊임없이 멘토의 끌어당김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욕설을 퍼붓는다. 연설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견딜 수 없는 개인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장관들은 중앙 의석에서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연단에서 격렬하고 개인적인 추궁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소란, 움직임, 격분, 웃음, 외침, 욕설 위로, 침묵하고 엄숙하며 완벽한 품위를 지킨 채 움직이지 않는 객석이 있다.
상원에서는 사르미엔토의 이상이 현실이 된다. 높은 객석에서 보면, 의회는 눈 덮인 들판처럼 보인다. 도처에 하얀 머리가 눈에 띈다. 레옹 세이가 귀에 거슬리는 고음의 콧소리로 의장을 맡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 들어오는 노인들의 이름이 객석을 떠돈다. 그들은 문학, 예술, 산업, 과학, 정치 분야의 프랑스의 오래된 거장들이다. 노인들도 시끄럽다. 세월이 흘러도 그들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수는 없다. 의장의 규칙과 종은 계속 움직인다. 관객은 “이 나이에 그러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아무도 연설자의 말을 듣지 않다가, 하원에서 수정된 언론법 검토가 의사일정에 오르자 귀를 기울인다. 한 조항에 의해 공무원에 대한 명예훼손 고소가 강제된다. 쥘 시몽이 연단으로 향한다. 매우 우아한 노인의 모습, 지적인 얼굴, 약한 목소리와 놀라운 의회 처리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조항의 정신에 항의한다. 그의 견해로는, 공무원들은 명예훼손 당할 권리가 있다. 그들의 유일한 행동, 그들이 호소해야 할 유일한 방어는 흠 없고 그림자 없는 그들의 행동이다. 그는 언론 문제에 있어 자유를 방종까지 원한다. 그의 말을 주의 깊고 존경스럽게 듣는다. 하지만 현 상황의 공화당원들은 그가 감베타의 반대파 목적은 법의 선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보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보수층에게 미움을 사려고 한다. 시몬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있다. 며칠 전 교육법 심의 때는 한 조항 말미에 ‘신’이란 단어를 강제로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지금 그는 철의 논리를 펼치며 대담하게 반대파의 입장을 차지해 자신의 깃발을 더욱 힘차게 휘날린다. 우익은 박수치며 그에게 투표한다.
수염이 반쯤 하얗게 센 엄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저명한 철학자 뒤를 이어 연단에 선다. 뻬예땅이다. 제정 시대의 강경한 반대자로 입법의회에서 시몬의 동료였으며, ’19세기의 신앙 고백’, ‘세계는 전진한다’ 등 격렬한 팸플릿의 저자다. 그는 연설하지 않고 설교한다. 논증하지 않고 웅변한다. 삼각대 위에서 몸부림치듯 움직이며 그의 말은 예언자의 어조로 끌려가거나 울려 퍼진다. 하지만 시몬의 궤변을 무너뜨리고 그의 의도를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제어장치도 없는 언론의 혼란을 보여준다. 투표 결과 그가 승리한다.
저기 국가 고위 인사들이 있다. 그레비 씨의 모습은 라브뤼예르의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분명 이를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군주의 진중함을 좋아한다.” 저 얼굴은 돌같다. 이목구비는 우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눈은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며 늘 멀리 응시한다. 입술은 색도 표정도 없다. 빙하같이 차갑고 기계적으로 딱딱한 움직임이지만 과장되지는 않다. 루이 14세가 화려한 군주적 진중함의 전형이었다면 그는 엄격한 공화정의 진중함을 대표한다. 포사다스 총재는 1814년에 말했다. “우리가 친숙해질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는 한 우리는 평화롭고 질서 있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심오한 진리다. 권력은 외형적으로 엄숙하고 침착해야 하며 그것을 행사하는 자는 왕실의 현란한 위엄은 아니더라도 대중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품위를 갖춰야 한다. 그레비 씨는 오늘날 모든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정파들, 심지어 구체제의 성급한 공작 부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한다.
거의 비만에 가까운 홍안의 반백 머리 감베타가 그를 수행하고 있다. 레옹 세와 장관들도 함께다. 모든 망원경이 일행을 향하지만 첫 번째 시선은 감베타를 향한다. 권력의 위신은 사람을 끌어당기고 매혹시킨다. 인기의 도취적인 분위기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강인한 사람들이여!
밤이 온다. 주요 도로의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 골목길로 개선문 근처까지 가서 내린다. 좋은 시가에 불을 붙이고 공공도덕을 위해 시계를 숨겨 애국자들의 유혹을 피한다. 기념물 앞에 서서 아름다운 굴곡을 그리며 문자 그대로 사람들로 가득 찬 샹젤리제 거리를 바라본다. 수천 개의 가스등과 전기 불빛으로 낮처럼 밝다. 군중 속으로 걸어간다. 숲 쪽에서는 하늘이 색색의 불빛으로 뒤덮여 있다. 로켓과 폭죽이 하늘 높이 터지고 보라색, 붉은색, 파란색, 하얀색, 주황색 불꽃이 비처럼 쏟아진다. 앞쪽 끝에서는 군중이 꿈틀대는 거리 너머로 콩코드 광장이 불타는 듯하다. 내 옆으로, 앞으로, 뒤로 고티에가 파리 부르주아 모노그래프에서 감탄했던 그 변함없는 무리가 끊임없이 재현된다. 아버지는 열성적으로 한 팔로 아내를 끌고 다른 팔에는 가끔씩 땅에 발이 닿는 아이를 매달고 있다. 엄마는 배를 끄는 프리깃함처럼 또 다른 아이를 끌고 간다. 그들은 넋을 잃고 입을 벌리고 아이들을 꾸짖고 찌푸린 얼굴로 코코넛 장수와 진저브레드 장수를 쫓아낸다. 그들은 아이들의 코앞에서 물건을 흔들며 필사적으로 유혹한다. 앞쪽에서 움직임이 일어난다. 파란 블라우스에 모자를 비스듬히 쓴 노동자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줄을 지어 행진한다. 그들은 합창으로 마르세예즈를 부른다. 일부는 모자나 손에 국기를 들고 있다. 그들은 군인 무리와 마주친다. 군인들은 더 신중하지만 마르세예즈를 부르고 있다.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주먹다짐, 몽둥이질, 발차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애를 나누고 포옹하며 공화국 만세를 외친다. 다시 마르세예즈다. 더 앞쪽에서는 흰 블라우스를 입은 노동자들이 둘씩 짝지어 팔짱을 끼고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행진한다.
파란 셔츠를 입은 사람들 옆을 지나갔다. 몇몇 버스와 마차가 옆길에서 나왔다. 깃발을 들지 않은 마부는 ‘나쁜 시민’, ‘반동’ 등의 욕설과 함께 호통을 듣는다. 나는 마부가 으깨어질 것을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나무 밑에 멈춰 선다. 그것은 파리의 모든 비열한 마부들에 대한 작은 복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마부는 일류 입담꾼이었다. 술 취한 목소리로 군중에게 말하며 천박한 파리 깡패의 가장 순수한 은어로 수많은 무례한 농담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세예즈를 부른다. 군중은 점점 더 밀집되어 숨쉬기가 힘들어진다. 콩코르드 광장에 도착했다. 광경은 놀랍다. 전면에는 루아얄 거리가 눈부시게 빛난다. 마들렌 교회 모퉁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전기 불빛이 물결치듯 비춘다. 오른쪽으로는 툴레리 정원이 대낮처럼 밝다. 분수와 조각상들이 반사광 아래 생기를 띤 듯 보인다. 한 소년이 다가와 말한다. “선생님, 1수로 새로운 절과 함께 마르세예즈를 사시겠습니까?” 나는 종이를 사서 첫 번째 시의적절한 절을 읽고는 혐오감에 던져버린다. 나중에 또 다른 것을 사고 또 산다. 모두 음란한 시구들이다. “불르바르디에, 20상팀입니다!” 나는 불르바르디에를 산다. 마빌과 숲속의 ‘그 부인들’의 모험담이 이름과 성, 주소와 번호, 특히 바론 당쥬 부인의 행동과 몸짓까지 실려 있다… 저열하고 천박하다! 잠시 정원으로 들어간다. 걸을 수가 없다! 돌아와서 천천히 불르바르 방향으로 간다. 같은 활기, 같은 군중이지만 더 시끄럽다. 카페들이 테이블을 거리 한가운데까지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마르세예즈가 공기를 뒤흔든다. 열정으로 가득 찬 이 전쟁가에 대한 내 열정이여, 안녕! 인간 무리의 가장 깊은 격동의 상징이여! 그것이 나를 쫓고, 귀를 멍멍하게 하고, 스며들어 절망시킨다! 나는 첫 번째 옆길로 들어가 10분 동안 빠르게 걸었다. 소음이 멀어지고 평온이 돌아온다. 숨 막히는 더위지만 침묵 속에서 자유롭게 숨을 쉰다. 한 시간을 보낸다.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 내 방은 불르바르에 면해 있다! 마침내 결심하고 소란으로 돌아간다. 자정이 울렸고 몽마르트르 불르바르에서 오페라 광장까지 넓은 보도에는 몇몇 지각생 무리와 창백하고 야윈 비참한 그림자들만이 남아 벽을 따라 달리며 거짓된 미소로 당신을 멈추게 한다… 모든 것이 지나갔다. 민중은 즐겼고 프뤼돔 씨는 야간모를 쓰며 아내에게 말한다. “프뤼돔 부인, 뭐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쇠퇴기에 있어요. 루이 필립 국왕 시절에는…!”
두세 씨의 길고 정중한 연설이 끝나자 노인은 너무 낮은 목소리로 읽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큰 동요가 일어났다가 곧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강하고 약간 거친 목소리가 이렇게 시작했다. “신사 여러분, 일 년에 하루, 미덕이 보상받는 날이 있습니다.” 르낭 씨가 말하고 있었다.
기억의 모호한 떼가 내 마음속에 몰려와 가슴을 뛰게 한다.
그 사람이 내 젊은 시절의 사상에 끼친 영향, 그의 놀라운 책들로 인해 나의 문학적 이상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의 고요하고 빛나는 산문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음악, 샤토브리앙의 찬양서 ‘순교자들’보다 더 많은 기독교 시를 담고 있는 파괴적인 책 ‘예수의 생애’, 그의 역사 이야기들, 그의 환상, 그의 철학적 담론, 그의 모든 거대한 작업이 내 상상 속에 특징적인 물리적 유형을 만들어냈다. 수천 개의 설교단에서 수천 명의 수도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토록 미움 받는 그 사람은 단테가 라벤나의 거리를 고독하고 음울하게 가로지르는 모습처럼 사탄의 모습을 띠고 있어야 했다. 키가 크고 마르며, 심각하고 엄격하며, 강렬한 시선을 지닌 눈, 끊임없는 지적 흥분으로 소모된 몸… 15세기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의자는 그 거대한 팔다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비만하고 산문적인 몸통, 거대한 배, 판타그뤼엘 같은… 그리고 프랑수아 라블레의 웃음, 솔직하고 소리 나는 웃음이 온몸을 흔든다. 넓은 얼굴, 수염 없이, 튼튼한 목 위에 놓여 있고, 세 겹의 턱, 생생하고 장난기 어린 눈빛, 자유롭고 편안한 몸짓. 얼마나 재치 있고, 번뜩이는지! 그는 두 시간 동안 덕에 대해 간단하고 즐겁게, 때로는 고양되고, 때로는 저항할 수 없는 웅변으로 말했다. 그러나 10분마다 장난기 어린 그의 머리가 웃음거리를 내밀었다. 그는 본보기를 보였고, 원고를 내려놓고 미소 짓기 시작했다. 줄리오 시몽을 바라보며, 그는 가까운 벤치에서 특히 농담이 정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르낭의 거대한 몸 전체가 마치 모무스가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흔들렸다. 우리 모두 함께 웃었고 문지기들조차 즐거운 합창에 동참했다. 그가 끝마치며 이런 기온 속에서 우리를 들으러 온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을 때, 이는 진정한 덕행의 행위라고 말했을 때, 세 번의 우렁찬 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내가 거리에 나섰을 때 나는 여전히 귀에 즐거운 목소리를, 눈에는 그 배의 격렬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웃음의 숨결과 함께 흔들렸고, 뫼동의 사제의 자랑이었으며, 호메로스의 신들의 꺼지지 않는 웃음보다 더 솔직하고 전염성이 있었다.
제3장
런던에서의 15일
파리에서 런던으로. – 메리 잉글랜드. – 도착. – 코벤트 가든에서의 인상. – 포이어. – 내 옆 사람. – 웨스트민스터. – 하원. – 과거의 그림자들. – 마지막 로마인. – 연설가 글래드스톤. – 대영 박물관을 훑어보며. – 그리니치의 브라운.
오, 놀라운 유럽 생활의 편안함이여! 그 후 호텔로 돌아가 잠시 독서실에 들러 타임스를 집어 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전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안데스 철도 회사의 최종 조직에 대한 좋은 소식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곧 사랑하는 멘도사가 철로로 라플라타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신문을 내려놓기 전에 극장 광고를 한 번 훑어보았다. 코벤트 가든: 토요일, 루빈스타인의 ‘악마’의 마지막 공연, 알바니, 라살 등 출연; 월요일, ‘돈 주앙’; 수요일, ‘디노라’; 금요일, 파티 출연의 ‘북극성’. 미국행 증기선을 타기 전에 15일의 자유 시간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광고를 읽었고, 음악이 너무나 그리웠다. 파리는 견딜 수 없었다… 런던에 있는 친구에게 좌석을 예약해달라는 전보를 보내고 다음날 아침 칼레 방향 북부 열차를 타고 떠났다. 객차에 유일한 동행자는 마르세유 출신의 신혼부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런던에서 일주일을 보내러 가는 중이었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고, 런던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머물 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안내인의 예정된 희생양들이었고, 그들의 미래가 두려웠다. 우리는 칼레에 도착했다. 1870년 도버와 오스텐드 사이의 긴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뱃멀미를 경험하게 했던 그 악명 높은 바다는 마치 스위스의 호수 같았다. 나는 기차에서 만난 친구들을 안내했고, 우리는 훌륭한 증기선을 타고 1시간 45분 만에 해협을 건넜으며, 다시 도버에서 기차를 탔다. 메리 잉글랜드라 불렸던 좋은 시절의 아름다운 시골, 초서의 유쾌한 이야기들이 그 찬란한 반영을 보여주는 시대, 청교도들의 얼음 같은 분위기 아래 영원히 사라져버린 그 시대의 시골이 정말 아름다웠다. 채텀 주변은 감탄스러웠고, 도시는 강둑에 우아하게 누워 에메랄드 물결 위로 신선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모든 들판이 경작되어 있었다. 숲, 언덕, 운하. 노르망디의 시골보다 더 밝은 초록색. 우리는 매 걸음마다 역을 지나쳤고, 번개처럼 지나가면서 그 정면을 스치듯 지나갈 때 소음으로만 그 존재를 알아차렸을 뿐 형체를 구분할 수 없었다. 기차가 굽이치고 곡선을 따라 우리는 멀리 불투명한 연기로 덮인 거대한 덩어리를 보았다. 우리는 런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미 그 안에 있었지만 기관차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우리 발 아래로 수천 채의 집들, 똑같이 붉은색을 띤 집들이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는 기차를 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달리는 고가 철도 아래로 포효하며 지나갔다. 또 다른 기차가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다. 모두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계속 달렸고, 강을 건넜다가 한 역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다른 다리를 통해 같은 강을 다시 건넜다. 프랑스 소녀는 놀라서 남편에게 바싹 붙었고, 남편 역시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는 불가피하고…
런던이 주는 첫인상은 바로 거대함이었다. 소음과 혼잡함은 사막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첫 순간에는 차갑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홀로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채링크로스! 마침내 도착했다. 일행들과 작별하고 역에서 기다리던 친구와 포옹을 나누었다. 캡에 올라타자마자 화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마차들 사이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가며 200개의 거리를 지났다. 지나가면서 워털루 광장에 인사를 건넸고, 불쌍한 넬슨이 여전히 기둥 꼭대기에서 저 한심한 밧줄 뭉치를 들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애매모호해 보였다. 리젠트 거리로 들어섰고, 옥스퍼드 코너의 변함없는 모닝하우스를 보며 방향을 잡았다. 잠시 후 랭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오후 6시 30분이었다. 7시 30분에 코벤트 가든의 막이 오른다.
시즌 절정기에 코벤트 가든은 특별한 모습을 보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름, 재능, 혹은 부로 사회 상류층에 속했다. 런던의 4백만 인구 중 엄선된 2천 명과 전 세계에서 온 백여 명의 저명한 외국인들이 관객이었다. 비할 데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상류 사회의 절제된 활기가 영국인 특유의 예의범절로 더욱 절제되어 있었다. 라틴계 사람들의 시끄러운 표현이 없는 차분한 예의와 ‘적절한 자리에 있다’는 고요한 자의식이 느껴졌다. 이름보다는 인생의 정상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알리는 빠른 시선들이 객석을 돌아다녔다. 오른쪽 특별석에는 웨일스 공주가 섬세하고 사색적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에 영국의 위대한 이름들이 보였다. 그 이름들은 귀에 들리는 순간 지적, 행동적 투쟁에서 유명했던 과거 세대들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소리도 다른 소리보다 크지 않았다. 박수는 진심이지만 좋은 취향으로 절제되어 있었다. 객석의 모습은 훌륭했다. 절반 이상이 여성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의 색색의 드레스가 대륙의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지루한 검은 정장의 단조로움을 깨뜨렸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고 멈추게 하는 것은 그 매력적인 여성들의 머리였다. 아직 얼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얼굴은 아름답거나 불규칙할 수 있다. 나는 머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느슨하게, 자유롭게, 가운데로 갈라져 두 개의 풍성한 물결로 떨어져 목 뒤에서 모아진다. 결코 매끄럽지 않다. 독일 처녀들의 긴 목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금발이든 갈색이든 검은색이든 머리카락은 매혹적인 광택을 띠었다. 한 올 한 올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매 순간 변하는 사소하고 변덕스러운 원에서 벗어난 엄격하고 우아한 단순함의 머리 스타일은 예술의 영역이 창조된 것에 한계가 없음을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휴게실에 있었다. 30분 동안의 이 광경이 훌륭한 연주로 들려오는 음악의 매력보다 더 가치 있을까? 이 구석에 머물러 놀라운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여성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자. 그들은 확신에 찬 걸음으로 걸었다. 키가 크고 최고의 품위를 지녔으며 드레스는 절묘하고 단순한 취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얼굴의 비할 데 없는 색감이 돋보였다. 마치 ‘햇빛이 녹아든 듯한’ 피부를 가진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평온하게 지나가는가. 곡선 진 어깨, 단단한 가슴, 흰 살결의 팔, 평온한 눈빛, 장밋빛 입술, 습기 있고 다소 오만한 입의 신선함을 보여주며. 내 옆 좌석에 앉은 한 여성이 음악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그녀는 30세쯤 되어 보이고 옆에 앉은 점잖은 신사는 분명 그녀의 남편일 것이다. 그들은 밤새 짧지만 애정 어린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무대를 향해 망원경을 고정시켰지만… 눈은 내 옆 여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길고 하얗고 투명한, 곡선의 장밋빛 손톱을 가진 손이다. 그녀는 무릎 위에 아름답게 제본된 작은 ‘돈 주앙’ 악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끊임없이 읽고 있었고, 그녀의 긴 검은 속눈썹은 아래 눈꺼풀에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호가니 색조를 띤 짙은 금발로, 눈으로 보기만 해도 향기가 느껴졌다… 파티가 마제토와의 이중창을 마쳤다. 우리 모두 박수를 쳤고, 내 옆 여인도 ‘돈 주앙’을 떨어뜨렸다. 그녀와 동시에 집으려고 몸을 숙이다 내 입술이 거의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을 뻔했다… 나는 책을 집어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 대가로 조용한 미소를 받았다. 코토니가 세레나데를 무한한 달콤함으로 부르고 있고, 오케스트라에서는 바이올린이 숲속 요정들처럼 반쯤 낮은 목소리로 웃고 있다… 하지만 내 옆 여인과 함께 있는 영국인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시 휴게실에 왔다. 이것이 최고의 귀족 사회의 아름답고 비할 데 없는 면모다. 귀족 사회가 최고의 품위, 아름다움, 교양의 동의어일 때 말이다. 정신과 형식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이 섬세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가문의 전통, 수세기에 걸친 선별, 흠잡을 데 없이 유지해야 하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의식, 몸과 마음을 시들게 하는 작은 불행들을 멀리하게 해주는 재산, 이것들이 내 눈앞을 지나가는 여성들과 어제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감탄했던 강건하고 날씬하며 점잖은 남성들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귀족 사회는 자연의 우아함이다.
인도의 베다 사원 유적에 들어선 여행자가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 그 웅장한 모습에
사끄까라나 불라끄의 유물들을 볼 때보다, 심지어 로마의 콜로세움 유적을 방문할 때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든다. 경건함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느낌, 말하자면 순수하게 객관적인 감각이랄까. 우리의 도덕성은 그 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세계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현재의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둥근 천장 아래를 걸을 때는 그렇지 않다. 하원의 방청석에 조용히 올라가 자리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곳의 벽은 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입에서 나온 가장 관대하고 고귀한 말들의 메아리를 간직하고 있다. 감정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소용없다. 기억이 가슴속에서 되살아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영국의 역사가 영국의 이기심을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되뇌어봐도 소용없다. 그토록 값비싸게 쟁취한 공적 자유가 오직 영국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봐도 마찬가지다. 수세기 동안 그 자유는 영국 섬에 갇혀 있었고 유럽과 세계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사고는 그런 편협한 기준을 단호히 떨쳐내고 세부사항을 제쳐두고 전체를 바라본다. 그제서야 자유로운 제도가 서서히 만들어지는 과정이 저 공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빛의 말씀이 정확한 순간에 그곳에서 나와 모든 인류를 밝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유리 천장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방은 좁고 불편하며 사원과 학교가 뒤섞인 듯한 분위기다. 의원들은 앞에 책상도 없이 좁고 긴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장은 몽골 신상이 빛나는 감실과 비슷한 곳에 앉아 있다. 그의 오른쪽 첫 번째 의자에 장관들이 앉아 있다… 나는 그 초라한 의자를 주의 깊게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모든 시대에 걸쳐 그곳에 앉았던가! 얼마나 많은 강력하고, 불안정하고, 예리하고, 교활한 정신들이 그곳에서 빛났던가! 월폴의 냉소적인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그의 음흉한 눈으로 타락시켜 지배하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볼링브룩의 우아한 자태, 채텀의 연극적인 위엄, 애딩턴의 불안과 부족함, 노스의 상류층다운 무관심, 피트의 생각에 잠기고 지친 얼굴, 폭스의 고귀한 용모, 퍼시벌이나 캐슬레이의 엄격함, 캐닝의 남성적인 모습, 필의 정직하고 엄숙한 얼굴, 팔머스턴의 섬세하고 대담한 얼굴, 디즈레일리의 교활한 얼굴,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들의 모습이 각자의 추종자들과 함께 떠오른다. 저 다른 의자에는 버크가 앉아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폭풍이 해협을 건너 두 연설가를 맺어주던 신성한 우정의 끈을 영원히 끊어버린 그 암울한 날, 폭스에게는 암울했던 그날 말이다. 저기에서 셰리던이 쓰러졌다. 방탕한 생활로 창백해진 얼굴에 흐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피트에게 외쳤다. 그의 얼굴을 채찍으로 때리듯 이 문장을 외쳤다. “그렇습니다, 키베롱에서 영국인의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영국의 명예는 모든 구멍에서 흘렀습니다!” 저기에 윌버포스가 있고, 저쪽에 매킨토시가 있다… 어떻게 모두를 기억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곳에 있다. 그들의 영혼이 이 사람들의 모임 위에 떠돌고 있다. 그리고 이런 광경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은 아직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믿는다. 장관석에는 글래드스턴, 브라이트, 포스터가 있다… 하지만 마지막 로마인이 모두를 압도한다. 지금으로서는 그를 끝으로 영국의 위대한 정치인들의 긴 계보가 끝난다. 비컨스필드의 유산은 아직 토리당에서 계승자를 찾지 못했다. 이미 무덤 위로 기울어가는 노 글래드스턴의 갑옷을 입을 휘그당원은 누구인가? 그 무거운 검을 들 팔은 누구의 것인가? 영국 땅에는 없다. 마치 브런즈윅 가문에 플랜태저넷의 방패를 들 수 있는 왕자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국은 이를 알고 있기에 그 비할 데 없는 강렬함을 지닌 정신의 마지막 몇 년, 마지막 번쩍임을, 자연이 정한 한계를 뛰어넘은 그 비범한 지성의 마지막 노력을 열정적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가 저기 있다. 12시간 동안 사무실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 재정, 대외 정책을 다루며 아시아 내륙을 주시했다. 그곳에서 영국의 보호를 받던 자가 지금 강력한 경쟁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다. 아프리카 남부 끝에서는 거칠게 살아가는 네덜란드 농부들이 다시 한 번 영국의 힘에 도전하고 있다. 식사 시간 한 시간 뒤 의회로 향했다. 그의 독수리 같은 머리가 가슴에 기대어 있다. 휴식을 취하고 있나? 명상에 잠겼나? 아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작품, 정치적 유언을 비난하는 반대파의 연설을 듣고 있다. 3세기 동안의 고통과 비통함으로 불어난 급류를 막으려는 “아일랜드 법안”을 듣고 있다. 하루 만에 이미 굳어버린 체제를 바꾸려는 법안을 말이다. 마치 관대한 튀르고가 “지방 의회”로 프랑스의 구체제를 바꾸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갑자기 그의 몸이 떨린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 뒤 연설자가 끝나자마자 빨리 일어설 수 있도록 몸을 기울인다. 신경질적인 떨림이 의회를 감싼다. “들어보시오, 들어보시오! 글래드스턴!” 글래드스턴 씨, 의장이 말한다. 수상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선다. 아무도 모자를 쓰지 않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일어선다. 아일랜드인들이 왼쪽에 있는 작은 무리에 몰려든다! 비거의 작은 모습이 눈에 띈다. 일종의 포프처럼 보이는데, 그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파넬도 거기 있다. 그는 이미 연설을 마쳤다. 오코넬의 정치적 유산이 무겁다면, 그의 웅변의 전통은 더욱 무겁다… 글래드스턴의 말을 들어보자. 무엇보다도 저 사람의 반박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 그의 말
의회에 관해 이야기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급진주의자, 무소속, 아일랜드인 등 모두가 그를 경청했다. 그는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서두는 그리스식 형식을 띠었고, 풍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의 암울한 쓰라림 속에 감춰져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의 천장 아래에서 방금 전 그의 귀를 아프게 한 말들이 들리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점차 그의 어조가 낮아지더니 마침내 적수와 일대일로 맞붙었다. 그는 적수를 몰아세우고 압박하며 손으로 주물러 기형적이고 허약한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을 다루듯 의회의 조롱거리로 내놓았다. 희생양은 발버둥쳤다. 날카로운 풍자로 끼어들었다. 글래드스톤은 그 방해를 허락한다는 뜻으로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화살이 마치 늙은 프리아모스의 지친 손에서 던져진 것처럼 자신의 발치에 떨어지는 것을 보자, 이번에는 그가 그것을 집어 들고 아킬레우스의 팔로 그를 향해 던졌다.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꼼짝 못하고 꽂혀 있었다. 아! 말이여! 인간의 힘을 드러내는 숭고한 표현이여, 땅의 먼지 위에서 인간의 무리를 흔들고 인도하고 열광시킬 수 있는 유일한 요소여! 그것은 시의 조화, 음악적 리듬의 침투력, 예술적 대리석의 형태, 신성한 그림의 색채를 지녔다. 그리고 그 빛의 급류 속에서, 멜로디의 물결 속에서, 그리스 운율처럼 조화로운 형태 속에서 유베날리스의 풍자, 마르티알리스의 화살, 스위프트의 날카로운 펜촉, 혹은 숭고한 익명의 유니우스의 결정타가 흘러나왔다!
파리와 런던의 사회생활과 도시 풍경 사이에는 리마와 테헤란 사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다. 한 시간 반의 항해, 한 사람이 수영으로 건널 수 있는 거리로 이렇게 완벽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파리의 거리에서 나와 10시간 후 런던의 거리로 들어가 템스 강의 도덕적 생리를 관찰하고 나서, 몇 시간 전 센 강의 움직임을 연구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리오스토의 히포그리프를 타고 대척점의 지역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런던 거리에서의 산책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정치적, 사회적 조직에 대해 이보다 더 웅변적이고 교훈적인 책은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기억이 떠오르는 대로 페이지가 이어지고 있고, 이제 유럽을 떠나 열대 지방의 먼 지역으로 들어가고 싶어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밀리오 미트레와 함께 대영 박물관을 빠르게 둘러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3-4시간을 보냈는데, 그의 뛰어난 교양과 고상한 지성은 그를 훌륭한 여행 동반자로 만들었다. 우리의 싸움이란! 서로를 상대로,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한 싸움이었다. 니네베와 바빌론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한편으로는 이집트가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돌 스핑크스의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엄숙히 바라보거나 엘긴 경의 대리석에서 파르테논의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램세스나 세나케립의 영광스러운 행적을 화려한 문체로 기록한 웅장한 비문뿐만 아니라, 15,000년 또는 20,000년 전 한 평범한 아시리아인이 쐐기 문자로 어떤 매매 계약의 조항이나 저당 증서를 기록한 붉은 벽돌들이 주는 인상이란! 우리와는 다른 두개골 구조를 가졌고, 따라서 우리와는 다른 분위기 속에서 정신을 움직였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세부사항들이, 학자들이 니네베의 오래된 벽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발견한 홍수 이야기보다 우리의 관심을 더 끌었다.
그리고 비길 데 없는 그리스, 그 안의 비길 데 없는 피디아스. 아래에는 파르테논의 웅장한 조각들이, 위에는 타나그라에서 발견된 공중을 떠도는 듯한 테라코타 소상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높이가 10-12cm에 불과했지만, 얼마나 완벽하고 섬세한지! 베스타 성녀의 망토처럼 그들을 덮고 있는 베일 아래에서 몸의 조화로운 움직임이 보이고 느껴졌다. 웅크린 자세, 걸어가는 자세, 그리고 그것들… 에밀리오, 우리를 감싼 크리오요 기운을 기억하나? …타바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한 매혹적인 작은 조각상이 작은 뼈의 회전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고, 그 파트너는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타바가 ‘운’이 아닌 ‘수’를 던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필 원고들은? 그것들을 담고 있는 유리 진열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위대한 사람들의 생생한 초상화, 그들의 손이 아직도 그 일정치 않지만 힘찬 선들 속에서 고동치는 듯한 그 조각들에서 눈을 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경이로운 박물관, 시간과 공간 속 인간 정신의 중심, 핵심, 파노라마! 이러한 예술적, 과학적 보물들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고귀한 감동의 원천은 없다. 물론 우리의 지적 준비가 부족해 대리석이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깊은 절망감이 영혼을 스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이와 같은 세계를 방문할 때마다 지성의 지평이 넓어진다.
템스 강의 그리니치 높이에서 당당하게 흔들리고 있는 브라운호를 방문했다. 영국을 방문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이 위대한 아르헨티나 함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함미에 펄럭이는 국기를 보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고, 품위 있는 코모도로를 선두로 한 아르헨티나 장교들의 따뜻한 환대로 그 감동은 더욱 커졌다. 우리는 배의 구석구석을 둘러보았고, 그들은 배의 놀라운 점들을 설명해 주었으며, 이 배가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로운 건조물을 바라보며 그 강력한 함포들, 철갑 장식된 옆면, 어뢰발사관, 기관총들, 그리고 그 모든 야만적인 파괴 요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떠올렸다. 수년 전부터 아르헨티나 군함들이 바다를 항해하고 있지만, 우리의 염원이자 재산인 평화가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을. 브라운호의 운명도 그와 같기를! 훈련일 외에는 그 함포들이 울리지 않기를, 모든 나라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 국기가 전쟁을 위해 돛대에 오르지 않기를. 만약 공격으로 인해 전쟁이 불가피해진다면, 그 함선을 지휘하는 사람들의 가슴이 철갑만큼이나 강하기를! 청백색 국기를 내리느니 차라리 대양 속으로 침몰하기를!
제4장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
파리에 작별을 고했다. 방데를 지나 생나제르에 도착했다. ‘빌 드 브레스트’호에 승선했다. 아소르스 제도를 지났다. 열대 지방에서 세례식을 치렀다. 과들루프에 도착했다. 푸앵따삐트르에 도착했다. 열대 과일들. 바스테르와 생피에르. 마르티니크. 포르드프랑스. 사반에서의 축제. 흑인 여성들. 흑단 같은 미녀들. 석탄 선적. 격려의 북소리. 전기 불빛 아래에서의 밤불라 춤. 음란한 춤. 마르티니크의 재앙. 솔직한 의견. 인종 간 적대감. 암울한 미래.
파리에서 며칠을 보냈다. 긴 항해를 준비하고 그 삶에 작별을 고했다. 한 번 맛보면 그 모든 지적인 섬세함과 물질적인 편안함으로 인해 지상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인 삶으로 보이는 그 삶에. 파리를 그 야만적이고 쇠약하게 만드는 쾌락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오류, 얼마나 슬픈 오류인가! 그 중심지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고상하고 순수한 분위기, 정신이 고지대의 활기찬 공기를 마시는 그 분위기다. 과학, 예술, 문학이 그곳에 가장 고귀한 대표자들을 두고 있으며, 소르본 대학, 프랑스 대학, 고등사범학교에서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한 달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우리의 지적 교육에 더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는 방데의 들판을 날듯이 지나갔다. 라로슈푸코와 델베, 카두달과 스토플레의 고향, 슈앙들의 땅, 마르소가 첫 무공을 세우고 오슈가 영광으로 뒤덮인 곳을. 두세 번 기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이는 우리의 기분을 최악으로 만들었고, 아침에 낭트에 도착했다. 기차가 천천히 도시를 통과한다. 저기 특유의 하얀 모자를 쓴 브르타뉴 시골 여인들이 있다. 그들의 허리는 두껍다. 저기 유명한 강이 있다. 캐리어의 ‘노야드’가 벌어진 무대, 시간이 지나도 공포스러운 기억. 우리는 그저 지나가는 새일 뿐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낭트에 이틀 정도 시간을 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그냥 지나쳤을 뿐이니 지루한 안내서에서 정보를 찾느라 고생하지 않고 프랑스의 과이라라고 비서가 부른 싫증 나는 생나제르 항구에 서둘러 도착했다. 그는 카리브해 연안에서 그 비유를 알게 되었다. 오를레앙 노선이었다면 새벽 5시에 도착했을 것이다. 서부 노선에서는 지루한 여행 끝에 10시에 도착했다. 짐을 찾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렸고, 마침내 모든 것이 준비되자 우리는 ‘빌 드 브레스트’호로 옮겨갔다. 그 배는 부두에 묶여 있었고 보일러에 불이 지펴져 있어 출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동부 아메리카의 바다에서 만나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그토록 이질적이고 복잡한 선상 세계를 기억하며 여전히 즐거움을 느낀다.
항해는 길었다. 생나제르에서 과들루프의 푸앵따삐트르까지 15일이 걸렸다. 하지만 그 2주 동안 ‘빌 드 브레스트’호의 분위기는 한순간도 가라앉지 않았고, 좋은 기분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형편없는 음식조차 농담거리로 삼았다.
저기 아소르스 제도가 있다. 포르투갈의 옛 찬란한 왕관에 남은 마지막 흔들리는 진주들. 선장은 친절하게도 항로를 약간 벗어나 배를 두 섬 사이로 보냈다. 그 푸르고 즐거운 모습이 단조로운 대양의 풍경을 깨뜨리며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들뜨게 한다. 두 섬 모두 정성스럽게 경작되어 있으며, 인간의 노력이 산의 모든 경사면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식물의 향기로 가득한 공기를 잠시 즐겁게 들이마셨고, 그 후 섬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환상처럼 흐려졌다.
우리는 열대 지방에 있었다. 열기가 숨 막힐 듯 맹렬해지기 시작했고,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 사이의 긴 시간들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승객들, 심지어 마르티니크의 새 총독까지도 처음으로 바다를 건넜고, 선원들은 선장의 허락을 받아 전통적인 열대 세례식을 준비했다.
그 특유의 축제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일부는 콜럼버스가 동요된 동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쨌든 항해의 단조로움에 지친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이다. 열대의 아버지의 사자가 밧줄 위에 올라가 선장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부터, 다음날 그 인물이 등장하여 구부러진 두 선원의 등 위에 올라탄 채 나타나는 순간까지. 그들은 소가죽으로 덮여 있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자세를 유지한다. 연설은 독창적이며 거친 프랑스식 유머로 가득 차 있다. 그 다음에는 세례식이 있는데, 이는 고무로 만든 거대한 욕조에서 퍼 올린 물을 머리에 뿌리고 면도 시늉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고 나면 갑판은 곧 우리의 옛 카니발 노래들로 가득 찬다. 물은 폭포수처럼 흐르고, 타격이 연이어 이어지며, 소란은 절정에 달했다. 노련한 선원으로서 나는 완전히 자제하고 아바떼 마스델에게 내 권한을 위임했다. 그는 아주 얇은 옷을 입고 구두약으로 그린 커다란 콧수염을 한 채 무수한 공격자들과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그에게 물과 밀가루를 퍼부었다. 함장은 종소리로 축제가 끝났다는 신호를 보낼 때까지 배의 지휘권을 되찾지 못했다. 마법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버지 열대’, ‘아버지 넵튠’ 등 환상적인 인물들은 기괴한 복장을 벗고 체념한 듯 갑판을 씻고 놋쇠를 닦기 시작했다.
기아나로 가는 승객들은 이미 우리를 떠났고, 우리는 상륙할지 말지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열병이 있는지 물었고, 비밀리에 부정적인 대답을 바랐다. 하지만 치명적인 질병이 포르드프랑스를 휩쓸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선하기로 결심했다. 37도의 열기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땅에 붙어있는 배가 전염을 피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새 총독은 2시간 전에 화려하게 하선했다.
우리가 약간의 경사를 올라 그곳에 들어섰을 때 광장, 그들이 부르는 사반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하층민, 주권을 가진 민중이 총독 환영식 때문에 모여 있었다. 그 순간 총독이 정장 차림으로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그의 옆에는 슬픔처럼 검은 관리가, 앞에는 그보다 금발이지 않은 다른 관리가 앉아 있었다. 그가 내게 보낸 그 눈빛, 그 정중하지만 깊은 절망으로 가득 찬 인사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나는 모자를 벗고 파리의 살롱에서 나와 열대의 섬을 다스리러 온 그 순교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고야의 가장 대담한 상상력, 포르투니나 디아스의 대담한 색채도 그 기묘한 광경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간 젊은 베네수엘라 화가는 자주 눈을 가렸고, 그 잔인한 선명함에 눈이 부셔서 한동안 중간 색조와 빛의 미묘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광장에는 500명 정도의 흑인 여성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젊었고 가장 요란한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강, 분홍, 흰색이었다. 모두 어깨와 팔뚝을 드러낸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었다. 액실라 아래에 고정된 허리는 불룩 튀어나온 가슴을 압박하고 있어, 총재정부 시대의 메르베이유즈들을 연상시켰다. 머리에는 비단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마 위로 가져온 두 끝이 마치 작은 뿔처럼 보였다. 바로 이 스카프들이 눈에 거슬렸다. 모두 다양한 색상이었지만, 항상 유럽에서 ‘베수비오 용암’이라 불리는 것보다 더 강렬한 진홍색이 지배적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울부짖는 듯한 노란색, 무지개빛 보라색 등이 있었다. 귀에는 오르간 파이프 모양의 큰 금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볼 중간까지 늘어졌다. 드레스는 뒤로 길게 끌리고 앞은 짧아서 발이 보였다… 항상 맨발이었다.
우리의 미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는 종종 발걸음을 멈추고 마르티니크 흑인 여성들의 타고난 우아함과 야성적이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를 감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이 정말로 돋보이는 때는 그들이 화려한 옷을 벗고 짧고 더러운 작업복을 입은 채, 머리에 거대한 석탄 바구니를 이고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널빤지 위에서 몸을 흔들 때였다… 우리가 포르드프랑스에 머물렀던 어느 날 밤, 호텔 침대가 너무나 불편해서 – 아니 너무나 편했던 탓에 – 조용히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다. 길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증기선을 향해 걸어갔다. 파리 대로의 오페라 거리에서 밤 11시에, 또는 런던의 크리테리움 인도에서 11시에서 12시 사이에 겪어야 하는 공격보다 더 심한 공격을 어두운 밤 그 길에서 견뎌야 했음을 고백한다. 아프리카의 후리들이 줄지어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프랑스어로 시랏 다리를 건너자고 유혹한다. 넘어가지 않으려면 율리시스의 방법을 기억하고 귀가 아닌 코를 막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들은 사방에서 우글거리며 나타나 결국 폭력적으로 밀어내야 했다. 마침내 전기등이 다리 위에 설치되어 있어 그 빛을 따라 배에 도착했다… 올라가자마자 경비 장교가 나를 불러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광경을 보여주었다. 배 아래와 강둑에는 혼란스럽고 검은 군중이 전기 랜턴의 파도에 비춰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 석탄을 싣는 여자들이었다. 짐을 실은 사람들은 경사진 널빤지를 올라가고, 짐을 내린 사람들은 옆의 다른 판자를 따라 내려가는데,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개미 행렬이 조용히 교차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모두가 같은 구슬픈 노래, 거친 노래, 끊어진 멜로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땅에서는 노인 흑인이 탄광 조각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황홀경에 빠진 얼굴에 빛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빠진 듯 머리를 흔들며 다리 사이에 끼워 넣은 북의 가죽을 양손으로 어지러울 정도로 두드리고 있었다. 그것은 영구적이고 단조롭고 동일한 리듬이었고, 그 박자에 맞춰 일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기쁨에 몸을 비틀며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그저 우리와 같은 회사 직원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월급을 받죠.”라고 젊은 장교가 말했다. “그는 4시간 동안 연주해 왔고 아침까지 아주 짧은 휴식을 취하며 계속 연주할 겁니다. 한번은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그날 평소의 절반도 일을 하지 못했죠. 그리고 당신도 곧 알게 될 겁니다.” 그는 선원을 불러 지시를 내렸고, 선원은 북 치는 흑인을 향해 내려갔다. “저 움직임, 저 흑인 여성들이 일하는 열정을 보세요? 특히 저 여자를 보세요. 18살인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만하고 싸움꾼으로 통합니다. 올라갈 때 음란하게 엉덩이를 흔드는 걸 보세요. 까숄리를 조금 마셨지만, 그녀를 가장 취하게 하는 건 자신의 노래예요. 영원한 북소리에 맞춰서요.” 이때 침묵이 흘렀다. 흑인 여성들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노래가 그들의 입술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바구니를 땅에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다리를 꼬고 마치 향수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 판자 위를 오가는 개미들이 드물어졌다. 갑판의 구멍 중 하나에서 땀에 젖고 검게 그을린 갑판장 중 한 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램프를 높이 들고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석탄이다, 제기랄! 이 게으른 놈아, 네 기계를 돌려라!” 장교는 웃었고, 북소리가 다시 들렸으며, 일은 이전의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30분간의 휴식 신호가 울렸다. 장교의 제안에 따라 나는 북 치는 흑인에게 동전을 던지며 외쳤다. “자, 친구들, 악마적인 밤불라 한 판 어때?” 그 특징적인 광경을 잊기는 어려울 것이다. 석탄으로 뒤덮이고 누더기를 걸친 채 땀에 젖은 흑인들이 전기불 아래에서 열광적으로 춤추는 모습을. 북은 리듬을 살짝 바꾸었고, 춤추지 않는 사람들은 음탕한 멜로디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 서고 각 커플은 음란한 몸짓, 파도치는 듯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머리는 움직이지 않은 채 뱀처럼 꿈틀거렸다. 음악과 춤은
그들의 열정적인 춤은 그들을 황홀경에 빠뜨렸다. 북을 치는 흑인은 더욱 격렬한 광기에 사로잡힌 듯 몸을 흔들었고, 여자들은 정신을 잃은 듯 모든 수치심을 잊었다.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는 내가 평생 본 것 중 가장 노골적인 관능을 드러냈다. 그들은 파트너에게 바싹 다가가 몸을 밀착시키고 비벼댔다. 흥분한 동물처럼 흑인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뒤로 젖히며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피로는 찾아볼 수 없었다. 10시간의 고된 노동 후에도 이 여자들이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밤불라*는 그들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그들은 소리 지르고 으르렁거리며 몸을 떨었고, 때로는 마치 야수가 서로를 물어뜯을 듯했다. 아름다움이라는 요소가 그리스 축제의 가장 추잡한 난잡함조차 정화시켰던 것과 달리,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짐승 같은 흥청거림이었다. 나는 땀에 젖은 이 흑인들보다 더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정욕에 미친 오랑우탄 같았다…
마침내 감독관의 새로운 고함 소리에 춤이 멈추었고, 마법에 걸린 듯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 개미들은 다시 무거운 바구니를 짊어지고 열심히 널빤지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검은 몸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빛줄기 아래에서 희미하게 드리워진 바닥 위로 드리워졌다.
흑인들! 이들이 마르티니크의 끔찍한 재앙이다. 과거의 용감한 개척자들에 의해 개발된 이곳은 다른 모든 안틸레스 제도와 두 아메리카 대륙처럼 곧 동물성 흑단 거래의 주요 시장이 되었다. 세네감비아, 기니, 케이프 해안은 16, 17, 18세기의 끝없는 전쟁 동안 대담한 해적들에게 풍부한 노예를 공급했다. 이들은 약탈할 것이 없을 때면 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려 검은 상품으로 가득 찬 선창을 싣고 돌아왔다… 나는 어느 날 밤 빌 드 브레스트호에서 파나마 운하 공사의 의료 서비스에 계약된 한 의사와 대화를 나눈 것을 기억한다. 그는 절대적인 회의론자였고, 확고하고 타협할 수 없는 이론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노예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도덕의 최고 영역으로 올라가지 않고 단순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나에게 주는 미학적 혐오감을 표현했다. 그의 대답은 특징적이었다. 그는 종교 철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판단한다면 나에게 반박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확신에 찬 실증주의자라면, 끊임없는 진화를 믿고 따라서 조직된 존재들의 연쇄를 믿는다면, 흑인이 말이나 소나 새처럼 우리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정당하게 그들을 우리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흑인을 먹는 관행까지 받아들이겠군요!” “아니오, 소고기가 더 맛있고 소는 사탕수수를 자르거나 담배를 수확할 수 없으니까요!” 그 사람은 절대적인 사회주의자였고 그의 입에서는 인류의 지상 행복을 위한 개혁 계획만이 쏟아져 나왔다!…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당시 식민지 국장이었고 현재 종신 상원의원인 M. 셸더의 노력으로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의 흑인들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소수의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진정한 적대감, 끔찍한 투쟁은 1870년 9월 4일 혁명으로 보통선거가 프랑스의 새로운 정치 체제의 기반으로 확립되었을 때 폭발했다. 과거의 봉건 영주들의 후손인 백인들은 수도, 초기 세력, 문화의 소유자로서 어두운 대중을 이끌고 우리 팜파스에서 목장주가 가우초들을 정치적으로 대하는 것과 비슷하게 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뮬라토, 삼보, 쿠아르테론이라는 끔찍한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두 인종의 나쁜 본능을 물려받았고, 학교에서 무지한 광신적인 청중들 앞에서 공공 광장에서 옛 주인들의 멸망을 선동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겉치레를 습득했다. 현재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기아나의 프랑스 의회 의원들은 모두 뮬라토다. 그러나 사회적 투쟁은 마르티니크에 국한되어 있다. 그것은 사투다. 백인들은 본국에서 파견된 군대와 자신들의 개인적 용기 외에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10년 전부터 백인들은 섬의 유일한 토지 소유자이자 유일한 산업가이자 유일한 진보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투표소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뉴욕 선거구에서 20년 동안 정직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발언권도 투표권도 없다. 그들은 과도한 오만과 자존심으로 복수한다. 안틸레스 해군 기지 함장 중 한 명은 완벽한 신사이자 존경받고 지적이며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유색인이었다. 그는 포르드프랑스나 생피에르의 살롱에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같은 프랑스 장교가 아바나*에 있을 때 카페에서 백인 전용 구역에서 쫓겨났다. 그의 장교들이 그의 편을 들었고 유감스러운 충돌이 일어날 뻔했다…
진보적인 사람들과 그 방향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결코 할 수 없을 인종 사이의 적대감이 마르티니크의 현재 쇠퇴의 주요 원인이다. 프랑스 의회에서 지금까지 면제되었던 식민지에 의무 군복무를 부과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마르티니크의 백인들은 그곳에서 모집된 부대가 섬의 수비대로 배치될 경우, 유럽 병사들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보증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런데 흑인이 아닌 성직자가 없듯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흑인도 없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는 날, 백인들의 재산에 대한 침략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진압되든 말든 분명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이런 전망 때문에 대농장주들은 농장을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원래 농장주가 가진 가치의 3배나 4배에 달하는 자본금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따라서 농장이 이전의 3배에 달하는 이자를 내야 하기 때문에 임금이 그만큼 줄어들 뿐만 아니라 공공의 부도 줄어든다.
이것이 그 오래되고 부유한 식민지의 상황이다.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편을 초래하는 원인의 성격을 고려할 때, 오늘날 프랑스를 지배하는 절대적 평등 사상에 반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제5장
베네수엘라에서
작별 인사. – 코스타피르메. – 라 과이라. – 강제 체류. – 베네수엘라의 얼굴. – 라 과이라에서 카라카스까지. – 산. – 절대적 필요. – 베네수엘라 개관. – 위치와 생산품. – 식민 통치. – 독립 전쟁. – 트루히요 칙령. – 무정부 상태. – 평화로운 사람들! – 과거의 교훈. – 카라카스 시. – 지진. – 엘 칼바리오. – 투우장. – 주권을 가진 국민. – 베네수엘라의 문화.
우리는 마르티니크에서 3일을 보냈다. 땅을 밟고 배에서와는 다른 공기를 마시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렸다. 황열병이 만연했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경험에서 얻은 건전한 조언을 무시하고 과일도 먹고 3일 내내 술과 얼음 음료를 마셨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마침내 8월 21일 저녁, 닻을 올렸다. 총독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아름다운 언덕 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국기를 흔들며 환송했다. 우리는 포격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코스타피르메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밤, 다음날 하루 종일, 그리고 셋째 날 아침에 항해했다. 곧 땅의 검은 선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라 과이라 항구 앞에 정박했다. 라 과이라는 산의 마지막 경사면에 기대어 있는 작은 도시로, 멀리서 보면 야자수와 다양한 종려나무가 있어 눈길을 끄는 모습이다.
거기서 여행을 마친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옛 친구인 두브레일 박사가 베네수엘라 주재 아르헨티나 총영사인 까를로스 R. 롤과 함께 배에 올랐다. 롤은 만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청년 중 한 명이다.
낯선 사회생활을 상상할 수 없는 지역에서 아는 얼굴을 보는 기쁨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단 하나의 얼굴만으로도 수많은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그들에게 사바니야까지 여행을 계속한 다음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타로 가서 임무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일제히 그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마그달레나 강의 수위가 너무 낮아서 말이다. 여행을 계속한다면 강 어귀의 바랑끼야에서 되돌아와야 하거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지옥 같은 더위와 5분 만에 열병을 일으키는 모기 떼 속에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시간 동안 강에 갇힐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라 과이라에 내려 카라카스에서 임무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바다는 기름을 부은 듯 잔잔했다. 이는 그런 고요함에 익숙하지 않은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악명 높은 정박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우리는 내렸고, 일단 땅을 밟자 바다에서 보았던 도시의 환상적인 매력은 모두 사라지고 우울한 인상만 남았다. “베네수엘라는 얼굴이 매우 못생겼어요.”라고 한 카라카스 사람이 말했다. 그는 산과 바다 사이에 갇힌 좁은 거리에 빽빽이 들어선 집들의 음산하고 지저분하며 슬프고 죽은 듯한 모습을 가리켰다.
더위는 참을 수 없었다. 라 과이라는 마치 태양 광선이 녹아내려 떨어지는 솥 같았다. 우리는 그 악명 높은 네뚭노 호텔에서 문자 그대로 숨이 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분노를 억누르고 있지만, 그때가 오면 아끼지 않을 것이다. 모든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나와 함께 분노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 확신한다.
오후 2시에 마차를 타고 라 과이라에서 몇 블록 떨어진 해변 마을인 마이케티아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6시간이 걸리는 이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산의 변함없는 모습이지만, 여기서는 식물이 그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커피 농장이 비탈을 뒤덮고 있었고, 잉카 제국 시대 페루 원주민들의 흥미로운 시스템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계단이 경작을 위해 산에 파여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오르면서 매 순간 새로운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라 과이라에서 카라카스로 가는 이 길 전체가 베네수엘라인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일부는 긴 독립 전쟁에서 흘렸지만, 대부분은 이 아름다운 나라를 황폐화시키고 그 놀라운 토지의 부에 걸맞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한 끔찍한 내전에서 흘렸다.
올라갈수록 온도 변화가 느껴지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었다. 우리는 열대 지방에서 오면서 숨 막히는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라 과이라에서 거의 백열 상태가 된 뜨거운 공기와는 달랐다. 산에서는 맑은 공기가 매 순간 우리를 상쾌하게 했고, 이런 훌륭한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 폐는 아침에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듯 기쁨에 차서 빠르게 숨을 쉬었다.
마차 여행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비와 잦은 통행으로 길이 계속 파괴되어 끊임없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철도 노선을 만들기 위해 진행 중인 작업을 보며 부러운 마음으로 미래를 바라보았다. 이 철도가 완성될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것은 베네수엘라의 집단적 열망이었다. 왜냐하면 이 철도와 다른 몇 개의 짧은 노선들이 이 나라의 변화를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밤 8시 30분, 우리는 마침내 볼리바르의 요람이자 무덤인 고귀한 도시 카라카스가 자리 잡은 그 아름다운 계곡에 도착했다. 이 계곡은 수없이 피로 물들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내가 밟은 이 놀라운 나라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이곳은 특별한 여러 환경으로 인해 미국 대륙에서 가장 혜택받은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해안은 광활한 거리에 걸쳐 대양이 씻어내고 있으며, 그 내부는 오리노코 강, 메타 강과 그 지류들 같은 거대한 강들이 관통하고 있다. 이 강들은 정복자들이 엘도라도의 전설적인 광맥에서 찾던 것보다 더 많은 금을 품고 있는 과야나 같은 영토를 가로지른다.
인간의 필요가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 생산물 중 이 열대의 태양으로 비옥해진 땅에서 풍부하게 자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커피, 카카오, 인디고, 담배, 바닐라, 모든 종류의 곡물, 그리고 우리 팜파스만큼 넓은 평원에서 자라는 가축들. 여기에 인류 진보의 마지막 두 중심지인 미국과 유럽에 가까이 있다는 섭리적인 이점, 푸에르토 카베요와 미래의 카레네로 같은 훌륭한 천연 항구들을 더해보라. 그러면 여행자의 놀라움으로 이 나라의 현재 쇠퇴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자연의 강력한 힘의 작용을 이 정도로 방해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은 다시 한 번 우리 평원의 겉보기에는 척박한 모습,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방치된 상태, 우리가 수세기 동안 살았던 완전한 고립을 축복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적이고 가난하지만 활동적이며, 겸손하지만 근면한 사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미의 모든 국가 중에서 우리는 17세기 청교도들이 세운 북부 식민지들과 먼 유사점을 가진 유일한 나라다. 그곳에도 금은 없었고 일상 생활은 매일 꾸준한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페루(그 관할권은 아르헨티나 북부 지방까지 미쳤다), 키토, 산타페 부왕령, 베네수엘라 총독령은 스페인 국왕들의 거대한 탐욕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장면들의 무대였다. 그들의 대리인들은 이를 잔인하게 실행에 옮겼다.
베네수엘라의 운명은 페루보다 더 비참했다. 카를로스 5세가 돈이 급히 필요해 이 지역을 독일 회사에 팔아넘겼을 때, 알핑거, 자일러, 스피라, 페더만, 우레 같은 야만적인 게르만인들이 아메리카 땅에 나타났다. 그들은 꿈꾸던 대로 금덩어리를 발견하지 못하자 인디언들을 노예로 팔아 쿠바와 코스타리카로 보냈다. 알핑거는 심지어 불쌍한 원주민의 살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4년에서 5년 동안 지속된 이 야만적인 습격에서, 카리브해 연안에서 안데스 고원에 이르기까지 정복자들의 행진은 화재와 피의 흔적으로 새겨졌다. 현대의 여행자가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원정 중 하나에서, 페더만은 마라카이보를 출발해 오늘날에도 치명적인 쿠쿠타와 카사나레 평원을 지나 해발 2,700미터의 보고타 평원 높은 곳에 나타났다. 동시에 키토를 출발한 베날카사르가 평원의 반대편에 진을 치고,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 강과 고원 사이에 솟아있는 세 개의 거대한 단을 소수의 병력과 함께 올라간 께사다가 삼각형을 만들었다. 세 명의 정복자들은 페루만큼 발달한 농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치프차 원주민들로 가득한 놀라운 평원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끔찍한 기억의 쿠마나 해안, 베네수엘라에서 라스 카사스의 목소리가 가장 깊은 인류애로 가득 차 울려 퍼졌다. 복음서에 대한 가장 고귀한 해설인 그 숭고한 수사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메리카의 어떤 민족도 그곳 사람들만큼 고통받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중에는 독립이 왔지만, 그것은 상부 페루 방식의 독립이었다. 간헐적인 황폐화, 고예네체, 코차밤바, 빠디야와 와르네스 등의 처형대가 있었다.
여기서 투쟁은 가장 음울하고 야만적인 특성을 띠었다. 몬테베르데, 보베스, 그 놀라운 보베스, 불굴의 용기와 철의 의지, 전대미문의 잔인함이 뒤섞인 그 인물, 모랄레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리바르의 라이벌인 무리요가 성경의 장면처럼 마을과 들판을 휩쓸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칼로 베어 넘겼다. 여기서 해방자는 트루히요 포고령, 즉 무자비하고 항복도 없고 법도 없는 죽음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역사를 읽는 것은 현기증이 난다. 파에스, 피아르, 세데뇨와 수많은 다른 이들의 창이 빛나는 각 전투는 호메로스의 노래와 같다.
도시에 입성하는 것은 모세의 한 페이지다. 카라카스는 여러 차례 약탈당하고, 싸움의 한가운데서 1812년 지진의 타격으로 스스로 무너진다. 가장 선별된 자식들은 군대에 있거나 무덤 속에 있다. 산 마테오 정상에서 불멸의 영광을 얻은 이들 중 소수만이 카라보보의 영광스러운 날을 볼 수 있었다.
독립 전쟁이 내전이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때가 있다면, 그것은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언급할 때다. 보베스와 모랄레스의 무리뿐만 아니라 파에스와 사라사의 무리도 야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추진력은 동일하고, 저항도 똑같다. 규율과 전쟁 장비는 스페인 측에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열정 외에도 험한 생활 습관과 볼리바르, 피아르, 우르다네타, 파에스, 그리고 나중에는 수크레, 산탄데르 등과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잔인함? 우리가 싫어하지만 그것 또한 똑같았다. 학살에는 학살로 대응했고, 드물게 자비에는 드물게 자비로 대응했다. 끊임없는 전투, 피를 보는 광경, 무기력한 채로 죽은 형제에 대한 분노는 그들의 도덕적 본성을 광기의 경지까지 고조시켰다. 볼리바르는 세 차례의 전설적인 원정을 하고 노새를 타고 베네수엘라를 모든 방향으로 횡단하며, 카라카스에서 보고타로, 보고타에서 키토로, 페루로, 볼리비아의 경계까지 여러 차례 여행했다! 그는 이미 전투에서, 때로는 암살자의 팔에서 스무 번이나 죽음을 목격했다. 파에스는 파에스가 싸웠던 것처럼 최전선에서 싸웠고, 113번의 전투에서 창을 붉게 물들였다! 시저나 나폴레옹의 어떤 병사가 이만큼 말할 수 있겠는가?…
- * * * *
이와 같은 전쟁의 결과로, 다소 완전했지만 결국 제도였던 모든 식민지 제도의 파괴, 농업과 목축업의 완전한 포기, 인구의 희소화, 공공 기록 보관소의 파괴, 개인 재산의 소멸, 모든 사회적 힘의 심각한 약화가 일어났다. 우리의 독립 전쟁을 기억해 보라. 스페인 군대가 투쿠만 남쪽으로 한 번도 넘어온 적이 없었다. 우리 영토에서 왕당파가 사람들을 모집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전투 중에도 전쟁법이 준수되었고, 우리의 패배 후에도 승리 후에도 패배자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신성한 법이었다. 아르헨티나 땅에서는 몬테베르데와 보베스의 학살도, 트루히요 법령의 불길한 빛도 볼 수 없었다.
그 후… 무정부 상태의 슬픈 밤이 우리에게 내려앉았다. 모든 공포를 동반한 내전, 아르티가스, 카레라스, 라미레스, 로페스, 나중에는 키로가, 로사스, 오리베가 우리를 완전히 짓밟았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역시 독립 국가들의 쓰라린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리의 고통은 1852년에 끝났고, 이후 반세기를 움직임과 생명으로 채워 문명 국가들의 행렬에 당당히 합류할 수 있었다. 1870년까지 베네수엘라는 내분의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전쟁들이 있었던가! 독립 전쟁이 그 악몽의 서막을 열었다. 형제간의 분쟁 속에서 당파들은 적의 재산을 탐했고, 결국 공공의 재산 전체가 피와 불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졌다. 베네수엘라 시골의 어느 집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려라. 당신에게 대답하는 목소리에서 여전히 막연하고 은밀한 불안의 떨림을 느낄 것이며, 문은 당신이 차분한 목소리로 “평화의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때만 열릴 것이다.
평화의 사람들! 이것이 바로 베네수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꿈은 아직 처녀지와 같다. 산들은 여전히 금으로 가득 차 있고, 계곡은 강한 수액으로 젖어 있으며, 언덕 기슭에는 바나나와 코코넛 나무가 즐비하고, 경사면에는 노란 옥수수가, 정상에는 튼튼한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평화의 사람들! 국민은 근면하고 온순하며 순종적이고 관용적이며 정직하다.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라. 대포나 칼로 그들을 죽이지 말라. 유럽에 호감을 주어 이민자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그들과 섞여 산업을 가르치고 그들의 피를 강화하게 하라!
미국의 모든 나라들을 위한 평화의 사람들! 그 시대는 지났다. 정복도 지났고, 독립도 지났으며, 오늘날 미국과 스페인은 자유와 진보를 향해 같은 길을 가며 바다를 건너 서로에게 팔을 뻗고 있다. 나는 벨로의 ‘소론집’에서 정복에 대한 첫 번째 문구와 독립에 대한 두 번째 문구를 인용한다. 이 두 문구는 내 생각에 이 두 가지 중대한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명상하는 미국인들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판단을 구체화하고 공식화하고 있다.
“우리는 정복을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잔인했든 아니든, 우리는 정복 덕분에 우리의 권리와 존재의 기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스페인의 편견과 압제의 체를 통과할 수 있었던 유럽 문명의 일부가 우리 땅에 왔다.”
“깊이 타락한 민족이 애국자들의 전투를 빛낸 위대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철학적인 눈으로 우리의 본국과의 투쟁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은 우리가 그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한 것이 바로 이베리아적 요소라는 것을 쉽게 인식할 것이다. 대서양 건너편 이베리아의 장군들과 베테랑 군단들은 또 다른 젊은 이베리아의 지도자들과 즉흥적으로 모인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이 젊은 이베리아는 이름을 버렸지만 옛 이베리아의 불굴의 정신을 보존했다. 스페인의 끈기는 자기 자신과 맞서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스페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방식이다. 본국의 압제에 대한 과장된 수사와 과대망상적인 비난을 버리고,
그들의 터무니없는 무역 체제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우리보다 그들에게 더 해로웠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연대 위에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과거는 영원한 원한의 근원이 아닌 교훈일 뿐이다.
카라카스 시는 같은 이름을 가진 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이 계곡은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후 아래, 자연은 너무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띠어 아빌라 산봉우리에 도착한 여행자는 언제나 영원한 봄의 품속에 있다고 느낀다. 넓은 사탕수수 밭의 선명하고 밝은 초록색은 고지대에서 자라는 커피 농장의 짙은 색조와 대비된다. 두세 개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좁은 평원을 가로지르고, 지평선 위로 보이는 산의 윤곽이 다소 단조롭긴 하지만, 산비탈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아래쪽 식물들은 빽빽하고 울창해서 눈길은 언제나 이 풍경 속에서 새롭고 즐거운 감흥을 느낀다.
도시는 스페인 사람들이 건설한 모든 아메리카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좁고 직사각형 모양의 거리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산티아고 데 칠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건물들은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격변이 물질적 발전을 저해했을 뿐만 아니라, 산맥의 혈관을 뒤흔드는 폭풍우마다 땅이 흔들리기 때문에 크고 견고한 건축물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마처럼 모든 것이 가볍고, 집들의 내부, 얇은 벽, 가는 칸막이는 끊임없이 지진의 위협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라카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인간이 결코 익숙해질 수 없고, 가장 강인한 마음조차 떨게 만드는 현상 중 하나를 목격할 기회를 얻었다. 내 사무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가르시아 메로우가 책의 한 구절을 보여주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책이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았고, 동시에 온몸에 이상한 전율을 느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지붕이 무너져 우리를 납작하게 만들었을 시간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먼저 정원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거리로 나갔고, 모든 사람들이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공포에 질린 얼굴들, 뛰어다니는 사람들, 무릎 꿇은 여인들, 대기 속에 퍼지는 무모한 공포. 우리 집의 벽 한두 개가 갈라졌지만, 우리에게는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현상이 반복될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카라카스는 지적인 문화로 유명했고,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가장 빛나는 사교계 중 하나로 꼽혔다. 그 유명한 대학교는 베네수엘라의 국경을 넘어 뛰어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오늘날에도 저명한 문인, 역사가, 시인, 법률가들이 있지만, 불행히도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국을 떠나 있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의 업적이 조국에 영광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매우 세련되었다. 나는 카라카스 사회의 오랜 명예로운 전통을 지키고 있는 몇몇 가정에서 받은 관대한 환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인으로서 감사의 빚을 갚고자 한다. 내 조국의 이름은 사랑받고 존경받았으며, 그것이 내가 받은 따뜻한 환대의 원인이었다. 멀리 있는 조국에 대한 애정과 존경만큼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
제6장
카리브해에서
불길한 징조 – 아빌라 산 – 다시 라 과이라에서 – 네뚭노 호텔 –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자는가 – 고통스러운 5일 – 라 과이라의 정박지 – 승선 – 마꾸또 – 오페라단 – 생시몽호 – 뿌에르또 까베요 – 요새 – 지하감옥 – 미란다 장군 – 볼리바르에 대한 그림자 – 마그달레나 강 하구 – 살가르 – 콜롬비아의 환대
나는 12월 13일 화요일에 카라카스를 떠났다. 그 날짜와 요일은 불길할 수 없을 정도로 불길했다. 하지만 일주일의 각 날과 한 달의 각 날에 쓰라린 순간을 겪었기 때문에, 화요일에 여행을 떠나거나 13일에 무언가를 시작하지 말라는 미신적인 생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녀의 존재를 다시 믿을 뻔했다. 길에서 마주친 어려움들이 너무나 많고 반복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빌라 산을 넘어 불규칙하고 가파르며 방향이 제각각인 산비탈과 좁고 깊은 계곡을 지나 바다를 향해 갔다. 철도 공사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활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거대한 사업이었고, 나는 웰라이트가 산티아고 데 칠레와 발파라이소를 연결하려 했던 노력, 메이그스가 오로야까지 오르려 했던 노력,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안데스 산맥을 횡단해 멘도사와 산타로사를 연결하려는 기술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노력들이 생각났다. 내 생각에 라 과이라에서 카라카스까지의 철도와 뿌에르또 까베요의 멋진 만에서 발렌시아까지의 철도는 베네수엘라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이 두 노선은 스스로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므로, 국가 전체가 빚을 내서라도 이 사업들을 완성해야 한다.
마침내 우리는 6시간 동안의 정말 힘든 마차 여행 끝에 라 과이라에 도착했다. 계속되는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도로 상태가 형편없어서 정말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정박지가 보이자마자 프랑스 증기선을 찾아 열심히 눈을 돌렸다. 그 배는 우리를 유럽으로 데려다줄 예정이었다.
사바니야로 우리를 데려가기로 되어 있었고 13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기가 들었다. 기다리던 생시몽 호가 보이지 않자 네뚭노 호텔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라 과이라에는 그곳 말고 다른 호텔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불운한 운명이 우리를 그곳으로 밀어넣었고, 우리는 5일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그곳의 공기를 마시던 순간처럼 나의 횡격막을 자극한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베네수엘라의 얼굴이 매우 추하다고 말한다. 외국인이 라 과이라에 상륙할 때 받는 인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그 작은 마을의 가난함과 불결함, 견딜 수 없는 더위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태양이 산에 반사되어 물에 비치고 수직으로 내리쬐어 기온을 36도에서 38도까지 올리고, 완전히 방치된 상태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 것은 진정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라 과이라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단 네뚭노 호텔만 빼고.
나는 호텔과 여관에 대해 풍부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뉴욕의 호텔 궁전부터 아르헨티나 사막의 초라한 오두막까지 모두 경험해 봤다. 우리나라 시골 호텔의 방에서는 밤새 미세하고 육식성인 동물들이 찬가를 부르곤 했다. 칠레로 가는 길목의 안데스 산맥 한가운데에서는 주인이 나의 젊음을 불쌍히 여겨 방 대신 야외에서 자라고 조언했다. 비야 메르세데스와 멘도사 사이의 긴 여정에 있는 역참에서 몇 밤을 보냈다. 보고타로 가는 길에 꼰수엘로에서 자고, 빌레따에서 저녁을 먹고, 침베에서 아침을 먹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지옥의 세력이 복수심에 불타 라 과이라의 음울한 곳에 박아 넣은 네뚭노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곳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졸라의 위장보다는 펜이 더 필요할 것이다. 내 이야기와 비교하면 ‘나나’의 마지막 장은 오렌지 꽃 향기가 날 것이다. 각 방의 가구는 대야(베네수엘라에서는 뽄체라라고 부른다)를 올려놓은 장치와 바닥에 뒤집어 놓은 반쪽 오렌지만한 때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의자 하나, 마지막으로 침대 하나. 하지만 그것은 매트리스도, 시트도, 담요도 없는 맨 침대다. 베개는 급할 때 편지를 봉하는 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바닥은 모래로 덮여 있다. 그 하얗고 부드러운 모래를 생각하지 마라. 독일과 플랑드르 마을의 방을 덮고 있는 완벽하게 관리된 모래, 파우스트가 마르가리타의 방에 살그머니 들어갈 때 발자국이 찍혔던 바닥, 헤르만과 도로테아가 밟았던 바닥 말이다. 아니다. 검고 미세하고 풍부한 모래다. 우리 옷의 주름과 머리카락 속에 재빨리 자리 잡고, 눈꺼풀이 들리기를 기다렸다가 전쟁을 선포하듯 동공을 자극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 잠을 잔다. 식당은 길고 거대한 홀로, 한 개의 테이블만 있고 형용할 수 없는 식탁보로 덮여 있다. 용서가 내 마음속에 들어온다면 그 식탁보를 색깔이 뒤섞여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 색조를 띤 잘못 그려진 지도에 비유할 수 있겠지만, 용서할 수 없기에 진실을 말하겠다. 희미한 붉은색 와인 얼룩이 소스 자국과 번갈아 나타나고, 기름 반점이 기름기 있는 흔적과 이어진다… 그만하자. 그 테이블 위에는 많은 접시가 놓여 있다. 다양한 형태의 소금에 절인 고기, 야나로식 고기, 삶은 고기와 플라타노, 튀긴 플라타노, 구운 플라타노, 삶은 플라타노, 썬 플라타노, 속을 채운 플라타노, 수프, 볶음, 디저트용 플라타노. 이 모든 것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후, 모든 것이 식을 때까지 경건하게 기다린다. 모든 것이 대기의 온도와 같아졌을 때, 종을 울리고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먹는다.
우리는 5일을 이렇게 보냈다. 높은 곳에서 신호로 증기선의 접근을 알리는 감시인에게 눈을 고정한 채. 갑자기 3일째 되는 날, 경보 종이 울렸다. 증기선이 보인다! 동쪽에서 온다! 프랑스 배다! 얼마나 환하게 웃었는지! 얼마나 손을 꽉 잡았는지! 이미 가득 찬 가방에 모든 물건을 억지로 집어넣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호텔 앞의 저주받은 담벼락이 바다 전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배가 정박하려는 순간에야 볼 수 있었다… 우리 배가 아니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부두에서 시간을 보냈다. 투우 경기를 보는 것처럼 짜릿한 느낌을 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라 과이라 항구는 항구라고 할 수 없다. 파도가 맹렬하게 치는 개방된 정박지다. 파도는 해안의 얕은 바닥에 도달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차고 강해진다. 배를 탈 수 없는 날이 매우 자주 있어서 해상 교통이 중단된다. 보통은 승선할 때 항상 위험이 따른다. 긴 방파제를 건설했지만 소용없었다. 파도는 자유로운 방향을 택해 거침없이 전진한다. 부두와 돌담 사이 공간으로 들어오거나 나가는 보트나 카누가 파도에 휩쓸리면 비참하다! 물의 흐름이 의식 있고 자유로운 정신에 의해 인도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기묘한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어떤 힘이 그 파도를 만들고, 추진하고, 인도하는지.
파도의 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평원을 휩쓸고 지나가는 액체 띠의 기계적인 움직임, 모래에 가까워지면서 축을 중심으로 원통처럼 회전하는 모습은 경이로운 광경이다. 파도가 부서질 때 그 정점에서 거품 바다가 떨어져 나와 폭포수처럼 요란하고 소용돌이치며 쏟아진다. 그 순간 파도 위에 배가 떠 있다면 어김없이 가라앉고 말 것이다. 우리는 며칠 동안 강인한 어부들이 위험을 무릅쓴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다 해안에 닿으려는 순간 전복되는 가슴 아픈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재난의 규모를 깨닫자마자 바다로 뛰어들어 힘차게 육지를 향해 헤엄쳤다. 그 해안에 흔한 상어와 청상아리를 피해 달아났다. 승객들의 승선은 더욱 끔찍했다. 부두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연이은 거대한 파도 뒤에 잠시 고요한 순간을 알리고 출항하려는 이들에게 격려의 함성을 보내며 용기를 북돋워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활처럼 팽팽하게 노를 당기며 뒤쫓아오는 파도를 피해 달아나는 강인한 선원들을 볼 때면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하지만 소용없었다. 파도가 그들을 덮치고 배를 높이 들어올려 미친 듯이 흔들다 뒤집어놓고는 으르렁거리며 바위에 부서져 힘을 잃고 만다.
라과이라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마꾸또 마을에 대한 추억을 남긴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 숨어 있고 근처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 소리에 잠든 마을이다. 카라카스 사람들이 목욕을 하러 오는 휴양지지만 자연 경관 말고는 볼 것이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리마, 산티아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화로운 별장은 아직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에 들어서지 않았다. 이런 물질적 진보의 부재를 마주할 때마다 자연이 주는 어려움뿐 아니라 얼마 전까지 이 불행한 나라들을 괴롭혔던 끔찍하고 끝없는 내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5일째 되는 날 동쪽 수평선에 다시 증기선이 나타났다고 망루에서 알렸다. 이번에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시몽호는 다음 날까지 출항하지 않을 예정이어서 우리는 거의 모든 라과이라 주민들과 함께 카라카스의 아름다운 극장에서 공연할 오페라단의 하선을 구경하며 오후를 보냈다. 바다가 거칠었고, 해변의 노련한 선원들의 표현대로 ‘물이 많이 들어온’ 상태였다. 이국적인 꾀꼬리들을 태운 배를 조종하는 사공들은 그들의 기량을 시험받게 될 참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파도가 배를 바위나 부두에 부딪혀 박살낼 것이고, 세상은 몇 천 개의 베모올을 잃게 될 터였다. 첫 번째 배 바닥에서 나는 키가 큰 사내를 보았다. 루나 백작이 죽은 자들이 언제부터 땅으로 돌아오느냐고 묻는 자세로 서 있었다. 틀림없이 바리톤이었다. 그의 옆에는 금발의 미인이 강아지를 가슴에 꼭 안은 채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강아지라고? 콘트랄토다. 두 번째 배에는 프리마 돈나가 타고 있었다. 뚱뚱하고 넓적한 체구에 비극적인 코, 스위스 농부 같은 허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프리모 돈노’, 아마도 그녀의 남편이나 그와 비슷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흥정하며 숙소를 찾고 디바에게 유명 단골손님들을 소개하는 그런 유용한 가구 말이다. 마지막으로 돈 조반니의 마지막 장면에서 레포렐로 같은 모습을 한 우람한 베이스 뒤에 테너, 그 숭고한 테너가 있었다. 카라카스 신문에 발표한 대로 사업가가 엄청난 돈을 들여 마드리드 왕립극장에서 데려온 테너 말이다. 그 사업가가 그의 옆에 서서 배가 흔들릴 때마다 그를 붙잡아주며 그의 화음 가득한 몸과 부주의한 물 사이에 끼어들어 감기의 전령을 막아서고 있었다. 옛 친구 아브루녜도 테너를 알아보고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일 출항할 생시몽호를 기쁘게 바라보았다. 나중에 불쌍한 그들이 네뚭노 호텔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변화무쌍한 바나나, 유카, 얌, 그리고 토착 음식들이 그들의 주의를 끌었고, 이탈리아 베이스는 무대 뒤에서 석탄 운반인 같은 재치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 사이 카라카스에서 온 젊은이들이 우연히 그곳에 있다가 콘트랄토의 윤곽을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나 덜 과학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세심함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조르주 상드의 멋진 소설 ‘피에르 끼 룰’을 떠올렸다. 그 비할 데 없는 예술가가 유랑 극단의 방랑 생활과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 소설 말이다. 그리고 내 양심의 이런 가벼운 암시에 멈추었다. 방랑자라… 말이다!
다음날 마침내 우리는 승선 절차를 밟았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앞에서 출항 적기를 노리던 보트 중 하나가 부두의 ‘물이 온다!’는 외침을 듣지 못하고 출항하려다 파도에 휩쓸려 기둥에 세게 부딪혔다. 다행히 보트는 견뎌냈지만, 안에 탄 부인들과 아이들의 공포에 찬 비명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걱정 마세요, 선생님.” 내 뱃사공 중 한 명인 늙은 흑인이 말했다. 그는 동료들이 노를 젓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늘 그 관찰에 대한 유치한 분노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 아마도 그에게 그 분노를 표현하는 데 지나쳤던 것 같다.
불쌍한 흑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선구자들보다 더 행복했고, 카리브해의 해안을 적시는 먼 나라들로 순례를 계속할 배에 행복하게 도착했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연민을 찾을 수 있을까? 젊은 비서와 함께 생시몽호에 앉아 눈처럼 하얀 냅킨을 받고, 만족스러운 눈으로 승객 수가 적어 완벽했던 정교한 메뉴를 살펴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면 말이다. 긴 여행 중 처음으로 여정이 조금 더 길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선상의 승무원들은 품위 있었고, 키니네가 열병에 효과가 없다고 믿는 젊은 의사는 마그달레나 강의 말라리아에 대한 예방책을 알려주었는데, 그 치료법보다는 차라리 병에 걸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마르티니크 출신의 신사는 앞서 언급했던 섬의 사회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고, 그의 아름답고 친절한 부인도 함께 있었다. 마지막으로 22세의 스위스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콜롬비아 정부와 계약을 맺고 보고타에서 세계사 강의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는 스페인어를 하지 못해 우리가 여행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말에 기쁨에 얼굴을 붉혔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로 가는 대서양 횡단 회사의 감독관들, 과테말라인들, 코스타리카인들, 페루인들,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북쪽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알아주지 않고, 우리도 그들에게 종교적인 호혜로 갚고 있었다.
라 과이라를 출발한 다음날 아침, 우리는 뿌에르또 까베요에 도착했다. 그곳의 정박지를 보고 나는 부러움에 한숨을 쉬었다. 바다가 땅 깊숙이 만을 형성하고 있어 대형 선박들이 해안가에 정박할 수 있었다. 상업에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는 이 항구는 발렌시아라는 내륙 도시를 성장시킬 뿐만 아니라, 라 과이라가 카라카스에, 카야오가 리마에 그러한 것처럼, 곧 베네수엘라 부의 주요 중심지가 될 운명이다. 뿌에르또 까베요를 통해 수출되는 커피와 카카오의 양은 이미 엄청나며, 카라보보 주와 인근 지역에서 재배가 확산되면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항구 앞에는 거대한 요새가 있다. 식민지 시대와 독립 투쟁, 그리고 그 이후 모든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석조 사각형 건물이다. 라 과이라의 요새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둥근 천장 감옥에서 많은 관대한 사람들, 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곳에서 미란다 장군이 늙고 병들어 쇠약해진 채로 나왔다. 그는 흥미로운 역사적 인물로, 우리는 그가 카타리나 2세의 궁정에서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 여제는 그의 늠름한 자태에 감동받아 그가 떠날 때 유럽의 모든 궁정에 그를 추천했다. 우리는 그가 대륙의 주요 정치인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했고, 1789년의 원칙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그를 보았다. 그는 프랑스에 칼을 바쳤고, 듀무리에 군대의 우익을 지휘하여 네르빈데의 불운한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결과 벨기에를 잃고 북부 국경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그를 다시 피고인석에서 만났다. 푸키에-텡빌이 기소하고 쿠스틴과 우다르, 호슈트의 승리자의 목을 방금 자른 그 무시무시한 재판소 앞에서 말이다. 놀라운 침착함으로 미란다는 무죄 선고를 받았다(당시 장군들 중 유일하게, 호슈는 13 벤데미에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의 독특한 방어 전략은 각 혐의에 대해 별도의 재판을 만들고, 판사들의 마음속에서 이전 혐의의 중요성을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새로운 혐의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구출된 미란다는 프랑스를 떠났지만, 이미 아메리카 독립의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었다. 1810년까지 그는 유럽 정치의 변화로 스페인과 대립하게 된 모든 정부에 접근했다. 미국은 그를 격려했지만, 그들의 지원은 약속에 그쳤다. 영국은 바젤 평화 이후 그를 열렬히 맞이했고, 아미앵 평화 이후에는 무관심하게 대하다가, 평화가 깨지자 다시 그의 말을 듣는다. 지칠 줄 모르는 미란다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자신의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안틸레스 제도에서 베네수엘라를 향한 두세 차례의 원정을 조직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마침내 카라카스가 독립을 선언하자 그는 조국으로 날아가 환영받으며 애국군의 수장이 되었다. 미란다는 결코 성공한 군인이 아니었다. 세월이 그의 능력을 약화시켰고, 내부 갈등으로 쓰라린 경험을 했다. 이 투쟁에서 그의 역할은 한탄스러웠고, 패배하고 버림받은 그는 스페인군의 포로가 되어 뿌에르또 까베요에 갇혔다가 스페인으로 이송되었는데, 볼리바르가 그를 넘겼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해방자의 검은 페이지 중 하나로, 그는 결코 그 헌신적인 사람의 봉사와 불운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미란다는 카디스 앞 카라카 감옥에서 죽었고, 베네수엘라 정부가 그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영원한 안식처인 국립묘지에 안장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되었다…
하지만 내가 미란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배는 계속 전진했고, 마침내 뿌에르또 까베요를 떠난 지 이틀 후, 우리는 카리브해의 녹색 투명한 물이 마그달레나강이 모래와 나무 줄기, 잎사귀, 온갖 종류의 부스러기를 수백 리그에 걸쳐 끌고 와 대양에 격렬하게 쏟아 붓는 탁하고 흙빛 물로 변한 것을 알아챘다. 마침내 우리는 살가르라는 작은 선착장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육지로 가야 했다. 더 이상
살가르에는 철도역을 포함해 네다섯 채의 집밖에 없었다. 그 철도는 우리를 바랑끼야로 데려갈 것이다. 빅토리아호가 한 시간 내에 마그달레나 상류의 혼다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생시몽호의 지연이 내게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 깨달았다. 나는 이미 라 과이라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냈었다. 모두가 살가르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내 마음속에서는 콜롬비아 땅에 대한 감사의 찬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7장
마그달레나강
살가르에서 바랑끼야까지. – 식물. – 만사니요 나무. – 염소와 양키. – 열병. – 바랑끼야. – ‘브리사’. – 무기력하게 만드는 대기. – 치명적인 지연. – 준비. – 마그달레나강. – 강의 항해. – 물살이 센 구간과 급류. – ‘짬빠네’. – 과거의 항해 방식. – ‘안띠오끼아’호. – ‘쥬피테르가 미치게 하려 할 때…’ – 마그달레나강의 증기선. – 의지. – 먹고 마시는 방법. – 마그달레나강의 보가들. – 사마리오와 까르따헤네로. – 나무 실어 나르기. – ‘당나귀’. – 황량한 해안. – 몸뽁스. – 마간헤. – 콜롬비아와 라플라타.
살가르와 바랑끼야를 잇는 짧은 철도(20여 마일)가 있다. 좁은 궤도의 이 철도를 보니 아르헨티나의 철도가 떠올랐다. 코르도바에서 출발해 남아메리카 내륙을 향해 나아가는 그 철도는 곧 볼리비아에 도달할 것이고, 우리가 늙었을 때는 페루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살가르에서 바랑끼야까지의 짧은 여정은 매우 아름답다. 바다가 대담하게 내륙으로 파고들어 호수를 만드는 예상치 못한 광경 때문만은 아니다. 그 호수는 얕아서 상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지역의 식물상 때문이기도 하다. 철로 양쪽으로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고, 그 나무들의 더 큰 모습은 나중에 마그달레나 강의 경이로운 강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흔한 종은 만사니요 나무다. 자연은 모든 동물의 생명을 지극히 아끼는 마음에서 바다 가까이에 이 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독과 해독제가 나란히 있게 되었다. 만사니요는 동양의 전설 속 독나무와 같은 것으로, 그 치명적인 영향력은 유럽 세계에서 스크라이브의 터무니없는 시가 주제가 되었다. 메이어베어는 그의 강력한 영감으로 이를 장식해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했다. 나는 이 사랑스러운 태양의 땅을 밟는 순간부터 아프리카의 소리가 끊임없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고 말해야겠다. 때로는 살인 나무 아래에서 셀리카의 한탄으로, 때로는 그녀의 졸음 유발 노래로, 때로는 태양이 대지를 빛나게 하는 신성한 인도스탄의 화려한 모습으로 말이다.
만사니요가 사람에게 치명적인 특성을 지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열매는 향기로운 냄새로 사람을 유혹하고, 꽃은 공기를 향기롭게 만든다. 그 그늘은 시원하고 향기로워서 휴식을 취하고 싶게 만든다. 마치 오디세이에 나오는 방랑자들을 매혹시키는 사이렌처럼 말이다. 동물들, 특히 염소들은 거의 항상 이 달콤하고 나른한 매력에 저항하지 못한다. 그들은 빽빽한 잎사귀가 주는 부드러운 애정에 몸을 맡기고 향기로운 열매를 먹는다. 그곳에서 잠이 들고, 깨어나 독의 첫 효과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 힘을 모아 바다로 기어가 갈증나는 듯이 짠 물을 들이켜 생명을 되찾는다. 살가르에서 바랑끼야까지 걸어가기로 한 젊은 미국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곳의 태양은 뜨겁고 만사니요는 관능적인 그늘로 유혹한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젊은 양키들은 그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그 치명적인 효과를 모르고, 또 어떤 이들은 실용적인 사람들답게 그 나무의 평판이 순전히 전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그늘에서 잠을 잤을 뿐만 아니라 꽃의 향기를 맡고 덜 익은 열매를 먹었다. 그들은 완전히 중독된 채로 바랑끼야에 도착했고,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지만 오랫동안 끈질긴 간헐열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 싸워야 하는 적이다. 바로 열병이다. 불타는 태양 아래 숲의 무한한 식물 잔해를 발효시키는 해안의 식물의 풍요로움, 서양인의 위가 익숙하지 않은 열대 과일의 풍성함, 급격한 온도 변화, 불가피한 부주의, 온화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발한으로 인한 끝없는 갈증, 외국인의 자연스러운 무모함, 이 모든 것이 마그달레나 강 연안의 끔찍한 말라리아열에 걸릴 확률을 높이는 요소들이다. 가장 슬픈 것은 그 기후에서 모든 예방책이 참을 수 없는 금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과일, 물, 차가운 음료, 그 모든 것이 그 끔찍한 대기에서 녹아내리는 불쌍한 사람에게 즐거울 수 있는 것들이지만, 현지인의 친절한 조언에 따라 엄격히 금지된다.
우리는 바랑끼야에 도착했다. 이곳은 2만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도시로, 마그달레나 강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강의 지류나 수로 중 하나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랑끼야는 최근에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 바다와 연결되는 철도가 건설된 이후 대서양을 통해 콜롬비아로 들어가는 필수 경로가 되어 오래된 식민지 도시 까르따헤나와 산타 마르타에서 모든 상업과 교통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건축물은 특별할 것이 없다. 대부분, 거의 모든 집이 짚으로 지붕을 덮었고
우리 땅에서 목장이라고 부르는 토담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마을이 콜롬비아 전체와 함께 발전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모든 거리는 매우 고운 모래로 덮여 있었고, 그곳에서 ‘바다의 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소용돌이치며 일으키는 모래먼지는 종종 진짜 폭풍의 규모로 커지곤 했다. 기온은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세계일주』지에 콜롬비아 여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썼던 프랑스인 앙드리외 씨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바랑끼야의 거리에서는 개와 이집트에서 살라만더라는 별명을 얻은 프랑스인 몇 명 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는 다소 과장된 말이지만, 사실 절박한 필요나 어린아이 같은 경솔함이 아니고서는 그 뜨거운 태양 아래로 모험을 감행하기 어려웠다. 태양은 하얗고 뜨거운 모래에 반사되어 눈을 태우고, 피부를 그을리며, 뇌에 납을 부어넣는 듯했다. 사람들은 먼지구름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바람을 기다렸다. 모두가 외출해야 할 때는 마차를 탔고, 서민들은 운송 수단으로 아주 작은 당나귀를 이용했다. 기수는 발을 당나귀 목에 올려놓고 앉아 있었고, 끝이 살짝 뾰족한 작은 막대기로 말을 재촉했는데, 그 끝은 자주 야윈 네 발 달린 용감하고 인내심 강한 짐승의 엉덩이에 찔리곤 했다.
도시의 모습은 아프리카 해안의 유럽 식민지와 비슷했다. 정신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압도하는 영향력이 느껴졌고,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콜롬비아의 해안을 밟은 이후로 문명의 중심지를 안데스 고원, 바다에서 300리그나 떨어진 곳에 집중시킨 것이 얼마나 이례적인 일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이 마그달레나 강 유역과 카리브해와 태평양이 적시는 해안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12월 20일 오후 3시 30분에 바랑끼야에 도착했을 때, 마그달레나 강을 운항하는 최고의 증기선인 빅토리아호가 상류로 출발하려는 참이었다. 그때 생시몽호의 4일간의 지연과 라과이라에서의 체류로 인한 모든 피해를 깨달았다. 특히 앞으로 겪게 될 고난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을 라과이라에서의 체류는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생시몽호가 일정대로 살가르에 도착했다면, 바랑끼야에서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빅토리아호에 승선하여 마그달레나 강에서 겪은 고통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준비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우선 아주 얇은 옷을 준비해야 했다. 또한 상당량의 와인과 식료품도 필요했는데, 강의 황량한 강변에는 어떤 종류의 자원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페타테와 모기장이었다. 페타테는 매트를 의미하는데, 이 가구의 목적은 첫째로 침대의 캔버스 위에 놓아 시원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둘째로 모기장의 네 면을 그 아래에 고정하여 모기와 흡혈 곤충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다.
빅토리아호를 놓치고 나니 다음 정기 우편선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30일에야 출발했다. 즉, 바랑끼야에서 10일을 무의미하게 보내야 했다. 그때 24일에 특별 증기선이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배의 상태 때문에 여행객들은 두려워했다. 마그달레나 강 항해가 어떤 것인지 간단히 설명해야 독자들이 필요한 예방 조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책을 쓰거나 과학적인 여행기를 쓰려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이 가벼운 페이지에 내 기억과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 유일하고 독점적인 목적이므로, 마그달레나 강과 카우카 강이 남아메리카의 4대 하천 체계 중 하나를 형성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이 체계는 안데스 산맥의 여러 갈래에 의해 결정된다. 다른 세 개는 오리노코 강과 그 지류들, 아마존 강과 그 지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루과이 강과 파라나 강이 흘러드는 라플라타 강이다. 다른 모든 체계는 부차적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함께 태어나 광대하고 비옥한 지역을 적시기 위해 갈라졌다가 바다에 도달하기 직전에 다시 합류하여 혼합된 물을 바치는 두 강을 발견했을 때, 복음서에 나오는 두 자매를 기념하여 마르타와 마그달레나라고 불렀다. 두 번째 이름만 우세했고, 첫 번째는 인디언들이 붙인 아름답고 발음하기 좋은 카우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둘 중 마그달레나 강이 더 항해하기 쉽다. 그러나 수량이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큰 비가 올 때만 어려움 없이 항해할 수 있다. 강바닥의 모래와 유동적인 특성으로 인해 놀라운 속도로 모래톱이 형성되는데, 이는 강이 흐르면서 강둑을 침식하여 떠내려온 거대한 나무 줄기 위에 쌓인다. 일부 지점에서는 강폭이 매우 넓어져 물이 소위 ‘관개지’라고 불리는 곳으로 퍼지는데, 이곳은 깊이가 거의 없어 4피트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 앞서 언급한 모래의 움직임으로 인해 수로의 방향이 끊임없이 변한다. 급류는 ‘급류’라고 불리며, 이곳에서 해류는 14-15마일에 이른다. 이것들이 주요한 것들이며, 마그달레나 강의 정기적인 항해를 확립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들 중 일부만을 언급했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짬빠네’를 이용했다. 이것은 갈대로 만든 지붕이 있는 커다란 카누로, 검은 피부의 보가들이 긴 장대 위에 가슴을 대고 누워 소리를 지르며 배를 강변을 따라 밀어 올렸다.
일과 용기를 북돋우는 욕설과 음담패설을 내뱉곤 했다. 이렇게 여행은 보통 3개월이 걸렸고, 그 끝에 승객은 온두라스에 도착했다. 체중은 30파운드나 줄고, 모기에 물어뜯긴 채, 배고픔에 시달리며, 아스텍 우상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어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내가 아는 가장 존경받는 노인 중 한 분인 사라가 장군은 아르헨티나를 제2의 조국으로 삼은 시몬 사라가 박사의 아버지인데, 카라카스에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1826년, 그가 볼리바르의 부관이었을 때 해방자가 그를 해안으로 보내 외교 사절로 온 두 프랑스인을 보고타로 안내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은 유명한 몽테벨로 공작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짬빠네에 올라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 2-3개월을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는 한 외교관이 강하게 반발했는데, 몽테벨로가 의무와 필요성을 상기시켜 겨우 설득했다고 한다. 그 여행을 경험한 뒤로는, 노인들이 젊었을 때 짬빠네로 그 여행을 여러 번 했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1831년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마론첼리가 의족을 한 채 거리를 지나가거나 창백한 실비오 펠리코가 10년간의 슈필베르크 감옥 생활의 흔적을 이마에 새긴 채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와 같은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
이제 모험을 감행할 증기선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좌초되지 않으려면 흘수가 얕아야 하고, 급류를 이겨내려면 힘이 세야 한다. 빅토리아호는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24일에 출발하는 배는 다름 아닌 안티오키아호였다. 강에서 가장 무겁고 크며 흘수가 깊은 배였다. 모두가 그 배를 타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호가 4일 동안만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승객들은 작고 빠른 로베르토 칼릭스토호로 갈아타 정상적인 여행 기간인 8-9일 만에 온두라스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사업가가 그걇을 보장했다. 게다가 빅토리아호도 온두라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데리러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30일 배를 기다리느라 5일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에 고무되어 나는 용감하게 안티오키아호 승선을 결심했다. 쥬피테르가 나를 파멸시키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그 순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단 두 명의 승객만이 우리를 따라왔다. 보고타에서 온 젊은이와 아메리카에서의 첫 경험을 이렇게 기묘하게 시작한 스위스인 교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항해 가능한 강이 깊기 때문에 마그달레나 강의 증기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의 배와는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선, 밑바닥이 평평하고 용골이 없어 카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으로 지지된 3층 구조로 사방이 뚫려 있다. 첫 번째 층이 실제 갑판으로, 배의 모든 장비가 있는 곳이다. 기관실, 주방, 승무원 숙소, 그리고 무엇보다 장작이 있다. 위층은 승객 공간으로 객실, 식당 등이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 옆 야외에서 자는 것을 피하려고 객실에서 찜통더위를 견딘다. 이 구역 지붕 위에는 사방을 볼 수 있는 선장실이 있고, 맨 꼭대기에는 우리 국경 지대의 망루처럼, 포플러 나무 꼭대기의 둥지처럼 조타수 오두막이 있다. 거기서 조타수는 물살의 주름을 읽어 수심을 짐작하며 배를 조종하고 승객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 모든 장치는 프로펠러나 옆바퀴와는 다른 추진 장치로 움직인다. 바퀴는 배 뒤쪽에서 선미에서 1미터 떨어진 고정축에 달려 회전한다. 따라서 배 뒷부분은 물과 수직을 이루는 매끈한 벽으로 되어 있어, 강력한 날개가 물을 휘저을 때 시끄럽게 부딪힌다.
안티오키아호는 앞서 말한 단점 외에도 옆바퀴를 달고 있었다. 이 바퀴들은 마치 움직이는 폭포 속을 항해하는 것 같은 소음을 낼 뿐만 아니라, 어려운 구간에서 배가 흔들려 모래톱 위로 미끄러지는 것을 방해했다. 게다가 거대한 보일러의 절반이 승객 갑판까지 올라와 있었고, 식당은 화로 바로 위에 있었다. 또한 이 배는 화물선이라 승객 서비스가 형편없었고 목욕 시설도 없었다. 이런 매력적인 배가 바랑끼야 운하를 빠져나와 넓은 마그달레나 강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명예로운 예언자의 심장처럼, 햄릿이 말했듯이, 첫인상에서 이미 어두운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평온하고 끈기 있는 의지가 어떤 나약함도 허용하지 않으려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는 운하를 빠져나와 강의 주 지류로 들어서자마자 대리점의 마지막 지시를 기다리며 강변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6-7시간 동안 머무는 동안, 나는 위장에 자물쇠를 채우고 미식가적 취향을 잊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 증기선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콜롬비아인에게도 좋지 않지만, 외국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우선, 수프를 포함해 모든 음식이 한 번에 나온다. 보통 소금에 절인 고기 한 접시, 신선한 고기라도 하마 가죽처럼 질긴 고기 한 접시, 렌틸콩이나 콩, 바나나를 삶고, 굽고, 튀기고, 썰어서… 네뚭노 호텔을 보라. 모든 것이 식었을 때, 종이 식사를 알리면 그때부터 동물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생존 경쟁이 시작된다. 한편으로는 먹어야 한다는 절박하고 잔인한 필요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애원하고 몸부림치는 위장이 있다. 여기에 가마솥의 열기가 더해져 온도를 높이니 그 공기를 가로지르는 새는 구워질 지경이다. 하인들은 물에서 막 나온 듯 젖어 있고, 바로 옆에 있는 바퀴들은 말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지옥 같은 소음을 낸다. 타는 듯한 갈증은 미지근한 물이나 더 뜨거운 포도주로만 달랠 수 있다… 불가능하다! 포기하고 말지만, 위장에 경련이 일기 시작할 때 브랜디에 의지한다. 순간적으로 효과가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찾게 된다.
거기서 나는 마그달레나 강의 보가들의 독특한 조직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증기선에서 선원 역할을 하며 매 여행마다 특별히 계약된다. 대부분 흑인이나 물라토지만 백인들도 있다. 그들의 구리빛 피부는 그 태양 아래에서 그을려 우리 가우초들보다 더 어둡다. 승선하면 사마리오와 까르따헤네로, 즉 산타 마르타와 까르따헤나 출신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자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원양선에서 내부 업무를 위해 선원들을 좌현과 우현으로 나누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 기후에서 그들에게 부과되는 힘든 일, 특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식생활, 갑판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는 모습, 그들을 덮고 있는 수많은 모기에도 둔감한 모습, 끊임없는 즐거움, 일에 대한 자발성은 내게 점점 더 큰 감탄을 자아냈다. 그들의 가장 힘든 일은 장작을 싣는 것이다. 마그달레나 강의 증기선은 석탄을 쓰지 않는다. 강변의 광대한 숲이 30년 동안 풍부한 연료를 제공해 왔고, 그 광산은 아직 고갈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작은 사람이 없는 강변에 쌓여 있다. 배가 다가와 해안에 정박하고 필요한 만큼의 ‘부로’를 싣는다. 부로는 측정 단위로, 한 사람 키 높이의 나무 기둥으로 70개 정도의 0.75센티미터 길이의 나무 조각을 담고 있다. 각 부로가 1페소나 한다는 점이 내 눈길을 끌었는데, 나무가 아무 가치가 없는 곳에서 이렇게 터무니없이 비싼 이유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열대 지방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꿈꾸었던 모든 것을 풍성하게 뿜어내는 이 웅장한 땅은, 알피에리의 문구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가장 나약하고 희소하게 태어나는 땅’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강 전체를 따라 작고 비참한 마을들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열린 오두막에서 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바나나 나무 한 그루, 모든 필수 도구를 제공하는 과일인 일종의 호리병박 나무인 토투마 한 그루, 그리고 한두 그루의 코코넛 나무가 전부다. 아이들은 벌거벗은 채로 흙을 먹는 습관 때문에 배가 불룩하다. 물고기는 희귀하고, 사나운 악어들 때문에 목욕은 알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유럽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이다. 해안에서 본 몇 안 되는 백인들은 창백하고 흙빛 같은 피부에 걸어다니는 유령처럼 보인다. 열병이 그들을 갉아먹었다. 강변의 마을들, 심지어 가장 중요한 곳들조차 – 식민지 시대와 독립 투쟁에서 유명했던 몸뽁스, 그 명성이 멀리까지 퍼진 유명한 장터가 있는 마간헤 – 영원히 정체되어 있으며, 그들이 의지하는 땅을 강이 잠식해가고 있다. 그 놀라운 비옥함이 무슨 소용인가, 기후가 그것을 개발해야 할 인류의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내 눈이 그 눈부신 땅의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는 동안, 정신은 그 위대함이 열대의 수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슬프게 관찰한다. 그래서 콜롬비아는 높은 곳으로, 바다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접근을 어렵게 하는 험준한 절벽 너머로 피신하여 그곳에 문명의 중심을 만들려 한다. 세계의 마지막 지질학적 형성 순간에 시가 그곳을 빛으로 적셨지만, 라플라타가 적시는 땅은 마치 머큐리의 지팡이 아래에서 솟아난 것 같다. 거기에는 평원, 온화한 기후, 바다와의 근접성, 문명의 중심지와의 거의 직접적인 접촉이 있다. 여기에는 해안의 죽음, 고지대의 고립이 있다. 아메리카의 분배에서 우리에게 그토록 유익했던 운명에 감사하자. 그것은 우리에게 태양이 커피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사탕수수 섬유를 적시는 따뜻한 지역, 밀이 튼튼하고 풍성하게 자라는 들판, 포도나무가 장난스럽고 힘차게 기어오르는 안데스 산맥 기슭, 금맥과 대리석살을 가진 언덕,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의 가장 남쪽 끝까지 뻗어있는 비옥한 팜파스를 주었다. 이 행운에 감사하자. 하지만 우리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 그 화려하고 무서운 야만적 처녀를 물리치며 그것을 이루려는 북쪽 형제들의 관대한 노력을 깊은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것을 막지 않게 하자.
제8장
여행 풍경
언어학적 가설 하나! – 보가의 삶과 그 위험 – 여행의 시작 – 조언과 지시 –
증기선들. — 오두막들. — 자연의 모습. — 마그달레나의 저녁들. — 절대적인 고요. — 모기들. — 침대 만들기. — 러시아식 목욕. — 측심. — 끔찍한 나날들. — 함께 탄 사람들. — 증기선 한 척! — 실망. — 서서히 죽어감. — 드디어! — 몬토야호. — 악어들. — 그들의 습관. — 마그달레나의 재앙. — 전투. — 감수성 있는 어미들. — 악어와의 전쟁.
나는 장작 측정 단위로 쓰이는 ‘부로’라는 이름이 처음에는 그 귀여운 동물들이 실을 수 있는 양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부로라 불리는 양을 실을 수 있는 당나귀는 없을 것이다.
마그달레나 강의 아무 증기선이나 하루에 40에서 50부로의 장작을 소비한다. 안티오키아호는 두 배를 소비하지만 대신 다른 배들보다 절반밖에 가지 못한다. 따라서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증기선 안에서 선원들의 삶은 매우 고달프다. 배는 2시간마다 강가에 접안하여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탐욕스럽게 장작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 작업이 상쾌한 아침 시간에 이뤄질 때 가엾은 보가들은 기쁨에 넘친다. 하지만 하루 종일 자주 반복되면, 우리 지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타는 듯한 대기와 태양 아래에서 그것은 진정한 고문이 된다. 긴 널빤지가 다리 역할을 하며 배와 강둑을 연결한다. 반라의 선원들은 머리에 자루를 달아 등에 커다란 두건처럼 늘어뜨리고 땅으로 내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장작 조각을 목과 왼쪽 어깨, 팔 사이에 끼운다. 그들은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리며 배로 올라가 화로 옆에 짐을 내려놓는다. 화로에 땔감을 넣는 사람들은 재미있게도 ‘촛대’라고 불린다.
때때로 강물이 불어나 장작 더미가 물에 잠기면 보가들은 몸의 절반이 물에 잠긴 채 일해야 했다. 육지에서 일할 때는 장작 사이에 숨어 있는 매우 독성이 강한 뱀들을 죽이느라 작업이 중단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장작이 물에 잠겨 있을 때는 방어할 수 없어 가오리에 쏘일 위험에 노출되었다.
마침내 준비가 끝나고 우리는 출발했다. 힘든 여행이 시작되었다. 청소년기의 시험을 앞둔 불안, 청년기의 결투를 앞둔 긴장, 모든 나이에 오래 기다려온 순간을 앞둔 초조함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선 강렬하고 열정적인 호기심, 그리고 매 시간 조국에서 세 시간씩 멀어진다는 생각, 그리고 육체적 고통의 예감 위에 떠오르는 나의 공식적인 위치와 관련된 중대한 걱정들이 이 사적인 페이지들과는 무관했다.
우리의 위치와 목적지를 알게 된 몇몇 승객들은 가까운 곳으로 가는 이들이었는데, 나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 어린 연민을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인 교양 있고 예의 바른 콜롬비아 신사(내가 만난 모든 이들이 그랬듯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마그달레나 강 항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지, 그리고 안티오키아호에 승선한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알고 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말이오.”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바랑끼야에서 온다까지 운항하는 각 증기선은 나름의 평판과 특성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소. 그래서 나는 절대로 안티오키아호나 모스께라호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지 않을 거요. 그런 여행을 위해서는 빅토리아호, 몬토야호, 이네스 클라크호, 스테펀슨 클라크호(그 기적 소리 때문에 ‘끼-끼리-끼’라는 별명을 얻었지), 로베르또 깔릭스또호 등이 있소. 그 배들은 흘수가 얕아서 가장 위험한 여울도 항상 통과하고, 급류에서는 간단한 케이블로 건너편으로 갈 수 있소. 당신에게 약속한 환승에 대해서는 솔직히 기대하지 않소. 여기서는 관리들이 제안하고 강이 결정하니까. 이미 당신은 승선했고 돌이킬 수 없소. 매우 힘든 날들을 보낼 준비를 하시오. 순수한 물을 마시지 마시오. 과일을 먹지 마시오. 브랜디를 남용하지 마시오. 그리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시오.”
특히 내 유일한 양식인 브랜디를 멀리하라는 마지막 권고와 정신적 평정을 유지하라는 조언은 실행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미래에 대비했고 내 모든 에너지를 동원했다.
처음 3일 동안 증기선이 멈춘 지점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지치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장작을 싣기 위해서든,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서든 말이다. 이미 말했듯이 마그달레나 강 유역은 본질적으로 원시적인 모습을 보인다. 거기서 만나는 작은 마을들은 문명화된 삶의 가장 작은 흔적도 주지 않는다. 모든 바람에 열려 있는 오두막에서 부모, 자녀, 여자, 남자, 때로는 동물들까지 함께 뒤섞여 산다. 강가를 따라 뛰어다니는 완전히 벗은 아이들은 야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곳에는 어떤 자원도 없다. 여러 번 내려가 신선한 달걀을 보고 어떤 가격에도 구매하고 싶어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관심하고 무기력하게 그들은 대답한다. “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욕구가 없기 때문에 돈의 매력이 없어 모든 저항을 포기해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전진함에 따라 서서히 변한다. 처음에는 강이 넓고 장엄하게 짙은 초록색 강둑 사이로 흐른다. 식물은 빽빽하고 풍성하지만 우리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는 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왼쪽으로는 마그달레나 주를 가로지르며 바다 근처에서 끝나는 시에라 네바다의 비할 데 없는 광경이 보인다. 석양이 질 무렵 순백의 봉우리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함을 지닌 분홍빛 구름에 휩싸인다. 서쪽으로는 산이 없는 공간을 통해 내 평생 본 것 중 가장 놀라운 일몰을 볼 수 있다. 불타는 듯한 빛줄기와 희미한 황금빛 배경을 가진 채 지평선 위에 움직이지 않고 서서히 형태와 색을 바꾸는 그 빛나는 구름 무리를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무지개의 모든 색조가 거기서 나타난다. 진한 보라색이 투명한 노란색 위에 과감하게 색을 던지는 것부터 강렬한 푸른 하늘의 평온함을 깨뜨리며 동공을 자극하는 흰색까지. 다시 말하지만, 그토록 위엄 있는 아름다움을 지닌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대양에서 태양이 지는 것을 따라가며 샤토브리앙의 영광스러운 삼각형 꼭짓점 중 하나를 형성할 때도, 안데스 산맥의 협곡 사이에서 밤이 놀라운 속도로 내려앉고 인접한 봉우리들이 우리 반구에 작별 인사를 하기에는 아직 멀리 있는 태양 빛 아래 빛나는 동안 그림자에 휩싸일 때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 장엄한 순간 이후에 찾아오는 놀라운 고요함이여! 자연은 평온한 꿈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 잠잠해지는 듯하다. 강은 계속해서 조용히 흐른다. 배가 방금 정박한 강변의 울창한 숲에서는 동료를 부르는 뚜르삐알의 규칙적인 낮은 휘파람 소리만 들린다. 심지어 무지개빛 깃털을 가진 거대하고 화려한 앵무새들도 조용히 다가와 거대한 까라꼴리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둥지를 찾는다. 그 둥지는 덩굴들이 흔들어대고 있다. 때때로 숲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 소리가 들리고, 그러고 나면 다시 침묵이 모든 창조물 위에 그 영역을 펼친다…
부드럽고 즐거운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군대가 조용히 다가오고, 잠시 후 옷을 통해서도 손과 얼굴, 온몸에 강렬한 따끔거림을 느낀다. 마그달레나의 무시무시한 모기들이 출현한 것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그 동물들을 피해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분 안에 열병으로 쓰러질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중 하나다. 갑판에 침대를 펴고 그 위에 두꺼운 모기장을 씌운다. 모기장 가장자리는 매트리스 역할을 하는 돗자리에 고정시킨다. 그런 다음 무한한 주의를 기울여 그 화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돗자리와 가벼운 보호용 천 사이의 영역에 유일한 거주자가 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서 암발레마산 순수 담배로 만든 빠네뗄라에 불을 붙인다. 이 담배는 빨대 모양이며 하바나산 담배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훌륭한 담배로 만든다. 거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러시아식 목욕이 시작된다. 숨 막히고 무거우며 치명적인 열기가 잠을 쫓아내고 상상력이 불면증을 보상하곤 하는 그 놀라운 여행을 막는다. 거기서는 밤의 아름답고 고요한 위엄이 그런 여행을 부추긴다.
“증기선이다, 증기선이다!” 한 소년이 흥분해서 외쳤다. 그는 강의 굽이 뒤에서 투명한 하늘에 희미하게 그려진 연기 기둥을 가리켰다. 배 안은 난리가 났다. 내가 스위스인을 말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가 기다리던 배가 온다고 해도 화물을 옮기는 데 하루 반이나 이틀은 걸릴 거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스위스인은 선실로 뛰어들어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증기선이 나타났다. 하지만 모든 배들이 비슷한 모양이어서 기적 소리를 들어야만 구별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호일까? 칼릭스토호일까? 둘 중 하나라면 우리는 구원받은 것이다. 감기에 걸린 거인의 기침 소리 같은, 새끼를 빼앗긴 물개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우리 귀에 들렸고, 배의 모든 소년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몬토야호다!” 몬토야호가 같은 회사 소속이고 우리가 후미에 깃발을 반쯤 내린 것을 보고 멈춰 달라고 요청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환승을 기대하며 기뻐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몬토야호가 물살을 타고 시속 15-16마일의 속도로 미끄러지듯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엔진을 가동한 채 통신을 시작했다. 환승은 불가능했다. 키나 포대로 가득 차 있었다. 빅토리아호가 뒤따라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출발했다. 강의 첫 번째 굽이에서 사라지며 내 귀에 비웃음 같은 그 역겨운 기적 소리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얼굴에 이토록 깊은 절망이 새겨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날들의 고통을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살면서 다시는 겪지 않을 그런 날들이었다. 우리는 2주 동안 안티오키아호에 갇혀 있었고, 변함없이 북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같은 감기 걸린 거인의 기침 소리, 같은 절망에 빠진 물개의 울음소리가 남쪽에서 들려왔다. 몬토야호였다. 바랑끼야 근처까지 갔다가 화물을 내리고 안티오키아호의 운명을 두려워하며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는 콘피안사호의 승객들을 태우고 왔다. 이번에는 우리가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한 시간 뒤 우리는 몬토야호의 갑판에 있었다. 그 중앙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고 소총, 산탄총, 레밍턴 소총, 망원경이 놓여 있었으며 편안한 의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가장 세련된 사치의 품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큰 고난은 지나갔다. 몬토야호는 작은 증기선이었지만 깨끗했고 안티오키아호보다 시원했다. 엄청난 수의 승객 때문에 우리는 선실을 가질 수 없었다. 즉, 씻고 옷을 갈아입을 장소가 없었지만,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 너무나 컸기에 야외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씻어야 하는 불편함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승객들은 다양했고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다. 국회 개원을 위해 보고타로 가는 상원의원들과 하원의원들, 안티오키아의 철도 공사 현장으로 가는 젊은 미국인 기술자들(그중 한 명은 건장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여행 중 말라리아에 걸려 허리가 굽어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 상인들,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국 공사의 가족 전체가 있었다. 부인과 세 아이들, 두 명의 젊은 영국인 하녀들, 요리사, 집사 등이 있었다. 화합과 좋은 우정이 빠르게 형성되었고, 그제서야 나는 정말로 그 놀라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악어들과 전쟁을 벌였다. 나는 아직 마그달레나 강의 이 특징적인 손님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호에 있는 동안 그들에게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나일강의 악어이자 인도의 일부 강에 사는 악어이며, 우리 강의 야카레지만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프랑스 여행가 앙드레 씨가 일부 악어의 길이를 5-6미터로 기술한 것이 과장으로 여겨졌지만, 수천 마리의 악어를 관찰한 후 실제로 그 정도의 거대한 크기에 도달하는 악어들이 적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몇몇이 천천히 강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바다에서 상어나 청상아리가 다가올 때처럼 항상 물 밖으로 뛰어오르는 물고기 떼에 선행된다. 하지만 대개 그들은 강이 줄어들 때 드러나는 모래사장에서만 볼 수 있다.
그들은 많은 수로 누워있다. 나는 100제곱미터 정도 되는 작은 모래사장에서 60마리까지 세어 본 적이 있다. 마치 이집트 사원의 처마에서 떨어져 나온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위를 향해 있는 자세를 취한다. 그 자세에서 입은 반 미터가 넘는 변을 가진 각을 이룬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역겨운 숨결이 모기를 끌어들이고, 모기들은 수백만 마리씩 혀 위에 모여든다. 한 무리가 가득 차면 악어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순진한 방문객들을 삼킨 다음, 다시 그 무시무시하고 더러운 각을 하늘을 향해 벌린다.
악어는 마그달레나 강의 재앙이다. 불행한 보가가 실수로
목욕을 하거나 카누에서 떨어져 괴물들 중 하나가 인육의 향기를 맛볼 기회를 얻으면, 그 지역 전체가 포식한 카이만 앞에서 떨게 된다. 양서류인 카이만은 해변으로 뛰어올라 모래사장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데, 그 비늘 피부는 모래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나 여자를 노리며 몇 시간 동안 기다린다. 마그달레나 강에서 내게 들려준 카이만과의 치열한 싸움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 꼬리엔떼스 인디오들과 비슷한 보가들의 야만적인 용기에 대해서도! 그들은 칼 하나만 들고 강으로 뛰어들어 맨몸으로 카이만과 싸워 이긴다!
카이만도 때로는 해변에서 낮잠을 자다가 인근 숲속의 호랑이와 퓨마에게 기습을 당하곤 한다. 그때 놀라운 싸움이 벌어진다. 마치 로마인들, 즉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즐거움을 누린 사람들이 원형 경기장에서 구경했던 그런 싸움과 같다. 카이만은 대개 승리를 거둔다. 코끼리 같은 두꺼운 가죽 때문에 공격하는 발톱과 이빨에 상처를 입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랑이가 할 수 없는 일을 소나 황소가 해낸다. 그들이 마그달레나 강 하류에서 볼리바르 주에서 강 이름을 딴 주로, 또는 그 반대로 헤엄쳐 건널 때 카이만이 공격하면, 몸의 앞부분을 약간 들어 올리고 뿔로 된 발굽으로 공격자에게 ‘주먹질’을 퍼붓듯 비를 내리게 한다. 이는 카이만을 멈추게 하고 기절시키며 결국 도망가게 만든다…
대구의 암컷들이 매년 낳는 모든 알들이 살아남는다면, 북미와 유럽 사이의 대서양 전체 구역이 단단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다. 마그달레나 강의 카이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이만은 알을 낳는 동물이다. 암컷은 엄청난 양의 알을 낳는데, 그 알은 돌처럼 크고 단단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는다. 적절한 시기가 되면, 감성적인 어미는 알들이 묻힌 자리 옆에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자리를 잡는다. 이미 껍질을 깬 새끼들은 그들을 덮고 있던 모래가 걷히면서 뛰어오른다. 일부는 곧장 강으로 뛰어들지만, 다른 어리석은 녀석들은 종족의 관습을 모른 채 어미의 거대한 입 쪽으로 뛰어든다. 어미는 그들을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삼켜버린다. 어미 카이만이 자신의 자식들 절반을 먹어치운다고 추정된다. 그 후 모성애가 어미를 사로잡고, 고대의 니오베처럼 너무 일찍 죽은 자식들을 위해 두 방울의 눈물을 흘린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살아남은 새끼들을 모아 이보다 더 다정한 어미는 없을 정도로 자애롭게 돌본다!
카이만에 대한 증오심이 얼마나 컸던가! 숙련된 눈으로 멀리 모래톱 위에 있는 악어 무리를 발견한 보가 선원들이 우리에게 경고의 소리를 지를 때 얼마나 기뻤던가! 각자 총을 들고 표적을 고른 뒤 동시에 사격을 한다. 사용되는 무기는 레밍턴, 스펜서, 윈체스터 등의 소총이다. 총알을 맞은 카이만은 입을 더 크게 벌리고(모기를 잡을 때보다 더 크게 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머리를 들어 올리고 미친 듯이 흔든다. 그리고 느린 움직임 때문에 여러 번 발사할 수 있어 종종 죽어가며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물속이나 신비로운 동굴로 기어가 죽는다.
제9장
여행의 그림들 (계속)
앙고스뚜라. – 야생의 장엄한 자연. – 처녀림. – 새와 원숭이들. – 나레. – 경관들. – 급류들. – ‘과리노’. – 급류를 어떻게 통과하는가. – 마알 선장. – 그의 이론. – ‘메수노’. – 사태가 급박해진다. – 육지로 밧줄을. – 통과했다. – 보고타 창고들. – 노새 문제. – 따뜻한 환영. – 콜롬비아가 겪는 어려움들. – 앙드레 씨의 모험.
얼마나 멋진 광경인가! 우리는 앙고스뚜라라고 불리는 강 구간으로 들어섰다. 이전에는 넓은 범람원으로 퍼져 있던 거대한 물줄기가 이제 양쪽 강둑이 가까워지면서 조용하고 빠르게 흐른다. 강둑을 장식하는 나무들의 떠다니는 머리카락이 그 향기를 섞으려는 듯하다. 시인이 말한 ‘에메랄드 틀 사이로 흐르는 은빛 거울’이 이보다 더 화려한 반영을 가진 적은 없었다. 여행의 피로도 잊고 카이만도 잊은 채, 점점 덜 강렬해지는 기온을 즐기며 몸이 기뻐하는 동안 영혼이 흡수하는 그 놀라운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강둑 위, 거의 물 표면에 닿을 듯 거대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열대 지방의 땅에서 아편의 작용 하에 있는 두뇌 속에서 혼란스러운 생각과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것과 같은 풍성함으로 솟아나는 거대한 줄기, 기생식물, 덩굴, 넝쿨 등 이름 모를 세계의 짜임새를 상상하려면, 파라과이나 아르헨티나 북부의 오래된 숲이나 영원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인도조차도 아니라, 오렐라나의 동료들이 인간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반영처럼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그 놀라운 아마존 강변을 떠올려야 한다.
안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수세기 된 삼나무, 까라꼴리, 꼿꼿하고 느릿느릿한 야자수들이 유연한 줄기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과두아에 자리를 내주려 몸을 숙이는 그 장막 뒤에서 어떤 신비롭고 활발한 삶이 전개되고 있을까? 꽃으로 뒤덮인 가는 덩굴들이 얽혀 있는 그 결혼식 장막 아래에서 숲의 은밀한 사랑이 어떻게 이뤄질까! 어두운 직물 위로 갑자기 꼿꼿이 솟아오르는 우아한 갈기…
야자수의 뾰족한 잎들 사이로 열매들이 꼭대기에 빽빽하게 매달려 있었다. 태양의 빛을 받아 익어가는 망고는 둥글고 넓은 잎으로 마메이에게 그늘을 드리웠다. 도처에 다양한 모양의 선인장들이 자라고 있었다. 대담한 덩굴 식물이 거목에 매달려 장난치듯 뻗어나갔고, 천 개의 가느다란 섬유들이 숲속 모든 식물들을 사랑의 매듭으로 묶어주었다. 노란 호박과 타구아를 주는 작은 야자수도 있었다. 타구아는 경이로운 식물성 상아로, 인도 정글의 왕이 지닌 거대한 상아만큼이나 하얗고 단단하며 무거웠다!
마침내 정복 시대부터 시인들의 시구를 향기롭게 하고 북방의 꿈꾸는 자들의 상상력을 고조시켰던 아메리카의 처녀림이 저기 있었다! 그곳에서 모든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자이노, 타피르, 파푸아레 등이 때때로 전쟁의 외침이나 사랑의 신음 소리를 내곤 했다. 강변을 따라 원숭이 무리가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녔고, 꼬리를 휘어 불가능해 보이는 자세로 매달린 채 작고 빛나는 눈으로 힘겹게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증기선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살아있는 모자이크들이 가득했다. 앵무새, 큰 앵무새, 비둘기, 뚜르삐알, 그리고 이름이 지역마다 바뀌는 크고 화려한 새들이었다. 모두 시끄럽고 유쾌하며 평화로웠고, 자신들의 불가침의 독립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광경 앞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산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강렬한 감동과는 달랐다. 기후, 물, 끊임없는 녹음, 나무들의 부드러운 흔들림이 주는 관능적이고 나른하며 은밀한 기운은 마치 여름밤의 환상 속에서 지상의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반쯤 감긴 눈꺼풀을 어루만질 때 느껴지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안티오키아 주의 수도인 메데인으로 향하는 여행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작은 마을인 나레에 도착했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그들을 마그달레나 강의 지류인 아름다운 나레 강을 몇 블록 거슬러 올라가 보데가스라는 곳에 내려놓은 뒤 작별 인사를 했다. 그들은 리볼버로 공중에 총을 쏘며 우리에게 인사했고, 이어서 목적지까지 가는 데 필요한 8일간의 노새 여행을 생각하며 조용히 언덕을 올라갔다.
자연의 모습이 눈에 띄게 변하며 우리가 산악 지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강둑의 절벽에서 붉거나 회색빛을 띤 화산암의 윤곽이 드러났고, 식물들은 더욱 거칠어졌다. 강둑이 서서히 높아지더니 곧 깊게 파인 협곡을 따라 항해하게 되었고, 물살의 놀라운 속도로 보아 바다를 향해 경사진 평면 위로 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급류 지역에 들어선 것이다.
상승의 어려움을 이해하려면 마그달레나 강 왼쪽 기슭에 위치한 온다 시가 해발 210미터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온다에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강바닥의 경사도는 일정하지 않아서 우리가 있는 지점에서는 물살이 너무나 빨라 때로는 시속 16-18마일에 이르기도 했다.
여기 가장 위험한 급류인 과리노가 있다. 선상에서 준비가 시작되고, 우리의 친절한 선장인 마알 선장은 가능한 한 활동을 배가했다. 그는 쿠라사오 출신의 노련한 선원으로, 30년간 마그달레나 강을 항해해 왔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고 항상 유쾌한 기분이었다.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고 모든 이에게 친절한 말을 건넸으며, 땅에 내려 장작 선적을 서두르고, 새벽에는 조타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모든 이를 격려하고 자신의 행운을 믿었으며 초보자들의 공포의 대상인 급류와 기타 장애물을 조금은 비웃기도 했다.
“과리노다! 과리노!” 우리는 모두 배의 뱃머리로 달려갔다. 물살이 배 앞쪽에서 요란하게 부서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동안 물살이 덜 거센 곳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했다. 배의 느린 속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외부 현상은 없었다.
“흥! 증기압을 30-40파운드만 더 올리면 돼!” 선장이 말했다.
나는 기관실로 갔다. 보일러가 울부짖기 시작했고 안전 밸브에서는 이미 불안한 증기 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합법적인 범위 내인가요?” 나는 계기판에서 눈을 떼지 않는 젊은 기관사에게 물었다.
“무모한 짓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아직 50파운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마알 선장은 육지에 줄을 매는 것을 싫어하고 기계의 힘만으로 통과하려고 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날카로운 종을 울려 연료실에 더 많은 장작을 요구했다. 불때는 사람들(깐델레로)의 수가 두 배로 늘었고 그곳은 말 그대로 지옥 같은 열기였다.
갑판으로 올라갔다. 해안의 한 지점과 배의 한 지점을 기준으로 삼아 보니 배가 시계의 분침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전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전진하고 있었고, 그것이 중요했다. 높은 곳에서 마알 선장이 더 많은 증기를 요구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승객들이 창백해져 있었고 배가 증기 엔진의 가쁜 박동 아래에서 떨리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약간 불안해 보였다… 갑자기 모든 가슴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30분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무시무시한 급류를 이겨내고 순조롭게 전진하고 있었다.
선장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그를 축하했다.
“선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몬토야호를 마치 밀가루나 타구아를 실은 짬빠네처럼 육지에서 끌어당기는 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증기선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고, 배의 본질은 물 위에 있는 것이지 땅 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고 계시군요. 게다가 제 생각에 밧줄은 도움이 될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관사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죠.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과리노 강이 이렇게 잔잔할 때면 메수노 강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증기압을 조금만 더 올린다면!…”
“폭발할 위험은 없나요?”
“누가 그런 걸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나는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좋은 선장이 몬토야호 보일러의 저항력에 대해 기술자들이 보증한 것보다 훨씬 높은 이상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 메수노 강에 도착했다. 생기를 되찾았던 승객들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배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고, 기관사가 땔감을 요구하는 날카로운 종소리가 다시 들렸으며, 마알이 다시 높은 곳에서 증기, 증기, 더 많은 증기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소용없었다. 우리는 전진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는 가장 심각한 위험을 의미했다. 만약 물살이 배를 가로로 돌리면 확실히 강 기슭의 바위에 부딪힐 것이기 때문이다.
“조타수 두 명 더 붙여라! 증기, 증기!”
나는 빠르게 생각했다. ‘이게 폭발한다면, 갑판 위에 있든 기관실 옆에 있든 그 유쾌한 현상을 겪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더 빨리 끝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얼굴에 너무나 역겨운 공포가 서려 있어서 호기심에 굴복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전진하지는 못하지만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지옥 같은 곳으로 내려갔다.
화로는 붉게 달아올랐고 보일러는 땅 밑의 엔켈라도스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기관사는 더 높은 압력을 가하기를 거부했고, 바퀴는 엄청난 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을 때, 살타에서 자신의 검을 항복하는 트리스탄의 장교처럼 절망적인 목소리로 마알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밧줄!”
나는 마알의 옆으로 올라갔다. 그는 몇몇 승객들의 요구와 기관사의 신중함 때문에 자신이 요구한 만큼의 증기를 얻지 못해 슬프게 굴복해야 했다. 나는 그와 함께 분개했다. 오, 허영심이여! 하지만 10명에서 12명의 보가들이 거대한 밧줄(마알이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지적했던 새것)을 들고 육지로 뛰어내리는 것을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지켜봤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강둑의 험한 지형을 염소처럼 올라가 결국 1쿼드라 떨어진 곳에서 웅장한 까라꼴리 나무 줄기에 밧줄을 묶었다. 그때 증기로 움직이는 강력한 윈치(이것을 마알에게 위안으로 지적했다)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세 명의 남자가 쉬지 않고 마찰로 불이 붙지 않도록 거대한 밧줄에 물을 뿌렸다.
밧줄의 작용 때문인지(나는 그렇게 믿었지만 선장의 반대 의견에 공개적으로 동조했다), 아니면 선장이 믿었던 대로 단순히 기관의 노력으로 우리가 곤경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페리코와 같은 모든 부차적인 급류를 지나 혼다 직전 까라꼴리 맞은편 강 오른쪽 기슭에 위치한 두세 채의 집이 있는 보데가스 데 보고타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이 우리 해상 여행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 * * * *
1882년 1월 8일 오후 2시였고, 우리는 바랑끼야에서 출발한 지 15일 만에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증기선이 정박한 강가에서 매우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면 두세 채의 집으로 이루어진 보데가스라는 곳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어떤 자원도 없어서 미리 준비하지 않은 불행한 사람은 매우 슬픈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나의 경우, 카라카스에서부터 편지로 노새를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마그달레나 강가에 있는 뿌에르또 나시오날에 도착했을 때 보고타로 가는 전신이 시작되는 곳에서 짐승들을 혼다로 즉시 보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우리가 보데가스에 도착해서 내 운송 수단에 대해 물어보았을 때, 아마도 리오 세코의 목초지에 있을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강가에는 그들을 먹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즉시 사람을 보냈고, 두 시간 후에 그 사람이 돌아와 “각하”를 위한 노새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노새를 찾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몰리에르가 말했듯이 “장작과 장작 사이에는 차이가 있듯이” 노새와 노새 사이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노새들은 한 친구에게 부탁한 것으로,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노새를 보냈다고 확신시킨 한 마부에게 속았던 것이었다. 그 노새들은 엄선된 짐승들로 걸음이 좋고, 자유분방하며, 안전한 노새들이어야 했다. 반면에 혼다에서 구할 수 있는 노새들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고, 이런 경우 미지수는 대개 형편없는 방식으로 해결되곤 한다.
곧 혼다에서 온 세네 명의 신사들이 증기선에 도착했다. 할람 씨, 몬테로 씨,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즉시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이 글이 그들의 눈에 띄어 행운을 얻기를 바라며 여기서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한다.
한편, 여기서 내가 백 번은 더 반복해야 할 말을 하겠다. 콜롬비아 땅에서는 지형이 만들어내는 모든 장애물들을
그 나라는 여행자에게 온갖 불편함을 주지만,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친절함 덕분에 그 불편함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교양 있는 사람들부터 가난한 원주민에 이르기까지, 길 한가운데서 나의 지친 노새를 대신할 말을 제공해주고도 나를 이용하려 하지 않고 보수는 내 마음대로 하게 해주었다. 고통을 겪긴 했지만, 그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환경 때문이었다. 콜롬비아는 어제 태어나 거칠고 변덕스럽고 풍요롭지만 야만적인 자연의 무한한 어려움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며 성장하고 있다. 산악 지역에서는 1마일의 비포장도로가 우리 평원의 1마일 철도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할램 씨의 호의 덕분에 나는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약속된 노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불같은 온도 속에서 고통스러운 기대감으로 보낸 그날 하루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많은 승객들이 여행 준비로 분주했다. 어떤 이들은 노새를 직접 끌고 오고, 또 어떤 이들은 노새 주인들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안드레 씨가 ‘세계일주’에 발표한 같은 여행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떠올렸다. 그는 노새를 빌려준 사람에게 속았거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여행 기록을 쓰면서 그는 그 사람을 저주하며 그의 이름을 인류의 저주 대상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그토록 가혹하게 취급받은 그 신사는 명예로운 사람이었고, 유럽으로의 첫 여행을 이용해 안드레 씨로부터 완전한 설명을 받아냈다. 그 설명은 모욕의 오만함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영국 공사는 많은 가족과 하인들과 함께 다음 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여행할 계획이었다. 나는 반대로 산을 날듯이 빨리 건너고 싶었기에 아침에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은 다르게 흘러갔다.
제10장
위안의 밤
출발. 행렬의 순서. 미미와 디지. 동행자들. 리틀 조지. 그들은 떠났다! 밤이 내린다. 위험들. “콘수엘로”. 공동 침실. 그림. 비엔나와 파리. 귀뚜라미. 알파르가타. 이웃의 수탉. 위안의 밤. 아침. 자연. 기온. 과라포. 과두아스 계곡. 커피. 원주민 짐꾼들. 영원한 피아노. 돼지치기. 여행하는 원주민 여성들. 치차.
아침 첫 시간과 두 번째, 세 번째 시간이 지나도록 노새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기독교인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듯한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의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곧 안장을 얹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출발했다. 영국 공사의 두 딸 미미(6세)와 디지(5세)가 행렬의 선두를 이끌었다. 그들은 시인이 영국을 ‘백조의 둥지’라고 칭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상적인 아이들이었다. 하얗고 순수한 얼굴, 하늘처럼 깊고 맑은 파란 눈, 물결치듯 흐르는 금발, 우아하고 순결한 입술이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작고 귀여운 이빨들. 그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한 것은 없었다. 항상 즐겁고 순종적이었다. 그 섬세한 이마에 입맞출 때마다 조국에 남겨둔 사랑하는 내 아이들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들은 내 몸에서는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내 마음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미미와 디지는 커다란 밀짚모자와 분홍색 면 드레스를 입고 들것 모양의 의자에 앉아 네 명의 원주민들이 어깨에 메고 가는 모습이 마치 제단 위의 두 천사 같았다. 짐꾼들의 힘찬 걸음으로 그들은 앞서 나갔고 우리는 곧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공사의 부인이 왔다. 젊고 우아하며 아직 빈의 귀족적 분위기를 간직한 채, 남편의 마지막 외교 관저였던 곳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본 여성들 중 가장 용감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고, 가장 침착한 사람조차 평정심을 잃게 만드는 순간에도 항상 살짝 미소를 짓거나 격려의 말을 건넸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콘수엘로에 도착할 무렵, 우리는 메테르니히 공주의 특징적인 일화 중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영국 공사가 리틀 조지를 안고 평온하고 침착하게, 교양 있고 체념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리틀 조지는 2살밖에 안 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다운 끈기로 자신에게 제안된 모든 현지식 운송 수단을 거부했다. 걸어가는 원주민의 팔, 노새 한쪽에 매달린 바구니(반대쪽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한 돌을 넣음), 보모와 함께 탈 수 있는 들것, 집사의 팔 등 모두 거부했다. 리틀 조지는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어 했고, 거의 전 여정을 아버지와 함께 갔다. 아버지는 선하고 친절해서 아이에게 한 마디 거친 말도 하지 않았다. 리틀 조지는 잠시 내 멘도사 판초에 매료되어 나와 함께 가기로 했지만, 그것도 우리가 고지대에 도착했을 때뿐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하인들이 왔다. 영국인 집사는 내 귀에 “마르고 1868년산”이라고 속삭일 때만큼이나 노새 위에서 뻣뻣했고, 프랑스인 요리사는 웃으며 바위들이 동정심에 몸서리칠 정도로 넘어지곤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도 말을 타본 적 없는 두 명의 불쌍한 영국 소녀들이 공포에 질린 채 미래를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걸었을 것이다. 끔찍하게 험한 길을 따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산을 따라 거의 수직으로 내려갔다. 노새들이 균형을 잡기 위해 놀라운 재주를 부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속도로는 꼰수엘로에 도착하기는커녕 보고타에도 결코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깨달았다. 내 개인적인 동료들은 이미 앞서 나갔다. 나는 영국 영사와 함께 있는 내 동료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안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작별 인사를 하고 노새에 박차를 가해 혼자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30분쯤 달려 길모퉁이를 돌자 미미와 디지가 탄 가마가 보였다. 가마는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고, 두 귀여운 아이들은 가마 안에서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아이들을 안으며 운반인들이 어디 갔는지 물었다. 아이들은 그저 “갔어요!”라고만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술집처럼 보이는 오두막이 있었다. 인디언들은 과라포를 마시러 그곳에 아이들을 버려두고 갔던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 아이들 위로 내리쬐고 있었고, 아이들의 눈은 열병으로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노새를 묶고 불쌍한 아이들을 화덕에서 튀어나온 바위 그늘 아래에 눕혔다. 그리고 채찍을 들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최소한의 항의에도 그 깡패들에게 채찍질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는 겸손한 태도와 나를 바라보는 놀란 눈빛을 보고, 나는 그들이 아이들을 평생 태양 아래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며 내가 화난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나는 논쟁을 피하고 그들을 나오게 했다. 내 작은 천사들을 가마에 태우고 행진을 명령하며, 미미와 디지를 혼자 두느니 차라리 길 옆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장소에서 멈춰 서서 우리는 멀리 뒤처진 일행이 합류하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밤이 오기 시작했고, 나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프로그램대로 과두아스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친구들이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전했다. 영국 영사는 이미 떠났고, 우리는 합의하에 가능한 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곧 어둠이 완전히 내렸고 길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더욱 가파르고 험해져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노새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을 내딛으며 신중하게 걸어갔지만, 때때로 우리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바위에 무릎을 부딪치곤 했다. 영국 공사는 아들이 위험하다며 말에서 내리려고 했다. 나는 노새의 다리가 그의 다리보다 더 안전하다고 지적했고 그는 내리지 않았다. 나는 한 사람을 부인의 말고삐를 잡게 하고 직접 가마에 탄 내 작은 친구들을 돌보았다. 뒤에서 가벼운 소리와 몇 번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고, 나는 셰프가 행운이 있어 무사히 넘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 팜파를 걸을 때 우리 가우초들의 조언을 기억하고 나는 먼시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고 특히 성냥을 켜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밤 9시까지 그렇게 행진했다. 어둠 속에서 일하던 노새들이 지치기 시작했고, 낙마의 위험은 순간순간 더 임박해졌다. 우리는 몇백 피트 올라갔을 것이다. 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배고픔도 결코 그 권리를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상황이 너무 견디기 힘들어져서 나는 내 이기심 깊은 곳에서 희생에 대한 희미하고 낮은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그때 가마를 메고 가던 사람들 중 한 명의 목소리가 피로에 지친 침묵 속에서 들려왔다. “여기가 꼰수엘로입니다!”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인간의 귀에 들어온 적이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모두가 한꺼번에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높은 목소리의 합창은 우리에게 미친 듯이 짖어대는 거대한 개에 의해 압도되었다. 나는 그 개를 달래려 좋은 말을 건넬지 아니면 총을 쏠지 고민했다. 우리는 말에서 내렸고, 어둠 속에서 문을 찾아 두드려 열게 한 뒤 모두 약간의 촛불로 희미하게 밝혀진 사각형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아직 음식이 없는 식탁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무리는 집주인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그는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큰 방은 오른쪽으로 선술집 같은 곳과 통해 있었는데, 거기서 한 여자가 최선을 다해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술을 따르고 있었다. 왼쪽에는 2미터 너비에 3미터 길이의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급습해 이미 그곳에 있던 두세 명의 여행자들을 쫓아냈다. 그들은 친절하게 양보했고 우리는 마운시 부인과 세 아이들, 그리고 두 명의 하녀를 그곳에 안착시켰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저녁 식사를 찾아보려 했다. 달걀과 초콜릿이 있었고, 로스트비프가 더 좋았겠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천상의 맛이었다. 유로타스의 소스로 맛을 냈기 때문이다.
부인과 어린 아이들을 정착시킨 후 우리는 잠시 우리 자신을 생각했다. 우리가 차지한 방 외에는 다른 방이 없었고, 그 안에서 음식과 담배 연기로 가득 찬 공기 속에서 20명 이상이 잠을 자야 했다. 나는 먼시와 함께 두 개의 간이침대를 구했고, 우리는 그것으로 작은 방의 문을 막았다. 우리는 엄청나게 큰 술 한 잔을 마시고…
브랜디를 한 잔 마시고, 담요를 두르고, 넥타이도 풀지 않은 채 울퉁불퉁하고 딱딱한 돗자리 위에 누웠다.
여기서부터 그 잊을 수 없는 밤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밤을 항상 ‘위안의 밤’이라는 아이러니한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 밤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싶은 이유는 그것들이 항상 내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며, 그것도 결코 불쾌한 방식으로가 아니다.
그 광경은 특징적이었다. 방 안의 동거인들은 모든 사회 계층을 망라했다. 여행 동료들, 상인들, 국회의원들, 짐꾼들, 하인들, 요리사들, 장관들, 외교관들 등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바닥에, 어떤 이들은 간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두세 개의 해먹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여기에는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고, 저기에는 돌처럼 이미 깊이 잠든 행복한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은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밤 준비를 길게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 촛불이 꺼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선술집 문 너머로는 우리의 짐꾼들과 하인들이 밤을 즐겁게 보내려고 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먼시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출발하기 전에 어디서 살았습니까?” 그가 물었다.
“파리의 그랜드 호텔에서요.”
“마지막으로 어디서 저녁을 드셨죠?”
“비뇽, 오페라 거리에서요.”
“메뉴가 어땠는지 좀 들려주시죠.”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이 정교한 작은 저녁 식사 중 하나를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보복으로, 나는 그에게 비엔나의 어느 대사 저택에서의 소아레에 대해 들려달라고 했다.
마침내 어둠이 찾아왔고, 우리는 서로 굿나잇 인사를 했다. 모든 것이 조용해졌고,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보이지 않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정신은 먼 세상을 떠돌며 추억하고, 기대하고, 공상을 펼치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사람들의 특징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공상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다.
바로 그때, 먼시의 침대 아래에서 – 내 침대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 내가 평생 들어본 가장 고음의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끔찍하고 단조로운 가성은 내 영혼을 짜증나게 했다. 우리는 5분간 참았다. 하지만 그 비열한 것이 밤새도록 계속할 작정이라는 것을 그 용감한 음색으로 알렸기에, 우리는 결과 없는 사냥을 조직했다. 한 이웃이 자신이 전문가라고 선언하며 한 수 거들어도 좋겠냐고 허락을 구했다. 그는 촛불을 들고, 완전히 실패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데스 산맥의 여관에서 돈키호테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침대를 떠나 야윈 모습으로 방안을 배회하며 갈라오르의 유명한 무용담을 읽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주인이 선술집 문을 살짝 열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런 작은 사건들에 익숙한 사람처럼 태연히 돌아서서 카운터에서 술을 파는 여자에게 말했다.
“루페르타, 그 짚신 좀 줘.”
만약 그 사람이 “짚신 하나 줘”라고 했다면, 나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라는 말, 종의 특정 개체를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그 표현이 나를 침대에서 일어나 반쯤 열린 문으로 보게 만들었다. 루페르타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구석으로 가서 못에 걸려 있는 납작한 물건을 내렸는데, 나중에 가볍게 살펴보니 그것은 짚신,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짚신이었다.
주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촛불을 들고 먼시의 침대로 곧장 와서 귀를 기울였다. 그 악랄한 귀뚜라미는 천재의 직관이라고 불리는 우연으로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첫 울음소리에 주인은 관중 앞에서 계산을 하는 암산가처럼 빠르고 단호하게, 망설임 없이 한 방에 그것을 벽에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루페르타가 ‘그’ 짚신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에 들린 콜레옵테라에게 치명적인 그 살인 도구는 다시 전통적인 못에 걸려 쉬게 되었다.
시간은 불면증 속에서 피로를 이기지 못한 채 천천히 흘렀다. 문을 통해 아이들의 순수하고 고요한 숨소리가 들렸고, 멀리서 노새 목에 달린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 협곡에서 보낸 그 밤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조국을 떠나 정신을 자극하는 천 가지 상황 속에서 이와 비슷한 밤을 보냈다면, 그것이 삶에서 불면증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아닌 유일한 순간 중 하나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가! 그것들은 얼마나 빠르고 매력적으로 지나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상상력은 영혼과 육체를 조용히 어루만진다. 마치 자신이 지키는 아이들의 순진한 놀이에 감동한 간수가 그들의 조화로운 춤을 바라보며 깨어있기를 받아들이듯이…
마침내 깊은 피로가 승리했다. 잠의 손길이 눈꺼풀 위로 내려오기 시작할 때, 침대 바로 발치에서, 거의 내 귀에 대고, 이 땅에서 들어본 가장 히스테리하고 귀가 찢어질 듯한 닭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 짚신으로는 이런 적에게 무력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3분 후, 가능하다면 더 거칠게, 새로운 버전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잠시 방향을 가늠한 뒤, 그 저주받은 동물의 목과 부딪히길 바라며 팔을 어둠 속으로 뻗었다. 그러면 내 손가락을 교수대로 만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뭘 찾으시나요, 박사님?” 내 왼쪽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행 동료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쉿!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이 저주받은 닭을 잡아 목을 비틀려고요.”
“천 번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지만 잘못은 제 하인에게 있습니다. 어젯밤에 닭을 안전한 곳에 두라고 시켰는데, 그 녀석이 여기로 가져왔습니다.”
“아, 그렇다면 당신 것인가요?”
“네, 매우 귀중한 닭입니다, 선생님. 파나마에서 가져왔고 보고타의 닭싸움장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웃의 이익을 위해 우리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새벽을 기다렸고, 마침내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콘수엘로의 밤’이었다.
제11장
마지막 여정
과두아스에서 빌레따까지 – 힘든 여정 – 노새 – 빌레따의 숙소 – 따뜻한 환대 – 원주민과의 대화 – 말을 구하다 – 침베 – 끝없는 오르막길 – 쉴러의 추억 – 추위가 다가오다 – 작별 – 떠난 이에 대한 추억 – 아구아 라르가 – 포장도로 – ‘알또 델 로블레’ – 보고타 사바나 – 사과나무 – 파까따띠바 – 보고타에서
아침이 되자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으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노새부터 짐을 나르는 원주민들까지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날은 부인들과 아이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짧은 여정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7살 난 파나마 출신의 어린 소녀가 기억에 남는다. 한 신사가 그녀의 부모에게 데려다주기 위해 보고타로 데려가고 있었다. 조용히, 늘 미소를 지으며, 변덕스러운 노새에 올라탄 채 그 아이는 조금의 피로도 보이지 않고 여정을 마쳤다. 머리에는 좁은 챙의 밀짚모자만 쓰고 있었다. 정오의 가장 뜨거운 순간, 헬멧으로 보호된 내 두개골이 타들어 가는 듯할 때 나는 종종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떠세요, 꼬마 아가씨?” “아주 좋아요, 선생님.” “피곤하지 않나요? 양산이 필요하지 않아요?” “아니요, 선생님. 괜찮아요.” “노새가 잘 걷네요.” 그리고 나는 그 불쌍한 아이가 노새의 끔찍한 걸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인생의 고난이 이 아이에게 닥칠 수 있겠지만,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콘수엘로를 떠나면서 우리는 우리가 있던 곳과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우리의 밤 숙소는 보고타로 가는 첫 번째 산맥의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 사방으로 깊은 계곡이 보였고, 우리 발밑에서 흔들리는 안개를 통해 그 바닥을 엿볼 수 있었다. 뒤로는 마그달레나 강의 넓고 빛나는 리본이 시야가 닿는 곳까지 펼쳐져 있었다. 앞으로는 위압적이고 어두운 산맥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거대한 언덕들을 넘어갈 때마다, 멀리 더 높은 산들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내 노새를 바라보았다. 그 느린 동물이 나를 독수리의 영역으로 데려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천천히 움직였다. 산비탈을 따라 장엄하게 펼쳐진 식물들의 교향곡에서 눈을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나무들은 무엇일까? 린네의 분류법에서 그들의 줄기를 감싸고 태양으로부터 보호하며 영원한 신선함을 유지해주는 무수한 섬유질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릴까? 좁은 길 위로 기울어져 여행자의 이마 위에서 꽃송이를 흔드는 그 수많은 꽃들은 어떻게 부르지? 나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폭풍의 장엄한 모습을 즐기기 위해 그것을 결정짓는 물리적 법칙을 알 필요가 있을까? 그것은 알프스의 강렬한 식물과 열대의 풍성한 꽃들이 뒤섞인 것 같았다.
우리는 산비탈을 따라 좁은 길로 산을 돌아갔다. 왼쪽으로는 눈으로 보기보다는 이성으로 짐작되는 깊은 협곡이 있었다. 저 아래 깊은 곳에 뿌리를 박은 나무들이 우리에게까지 그 꼭대기를 뻗어 올려 서로 얽혀 넓고 단단한 차양을 만들었다. 때때로 장난기 어린 폭포가 산에서 내려와 계곡에서 꿈틀거리는 보이지 않는 물줄기를 먹여 살렸다. 이 구간의 길은 아마도 가장 편안할 것이다. 노새 위에서 매우 불편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몇 군데의 매우 가파른 경사를 제외하면 말이다. 대부분의 길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태양이 우리를 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짐승들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고, 시야는 먼 곳의 지속적인 반사로 피로해졌으며,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우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길에서 만난 한두 채의 오두막집에 접근했지만, 그곳의 친절한 여인들은 우리가 요청한 물이 해로울 수 있다며 마시지 말라고 권했다. 그때 우리는 과라포, 약간 발효된 사탕수수 주스를 찾았다. 이것은 건강에 좋고 활력을 주는 음료였다.
오후 1시 30분, 우리는 아침부터 올라오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내가 여행 중 만난 가장 아름다운 과두아스(사탕수수)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그 중심에는 같은 이름의 마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콜롬비아에서 커피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 중 하나다. 우리를 둘러싼 넓은 커피 농장에서 짙은 녹색 잎사귀 사이로 빨간 커피 열매가 돋보이며 풍경에 생기를 더했다. 과두아스의 커피는 다른 유명한 콜롬비아 산지의 커피와 마찬가지로 시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받는 브랜드들보다 훨씬 우수하다. 윤가스와 마찬가지로 비교할 수 없는 맛이 특징이지만, 모카만큼의 향기는 없다. 과두아스 3, 모카 1의 비율로 섞으면 볼테르를 무덤에서 일으킬 만한 음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곡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이름을 붙여준 갈대다. 일부는 높이가 수 미터에 달하고 지름이 20~25센티미터나 된다. 원주민들은 이 갈대가 가볍고 튼튼해서 피아노, 거울, 기계, 가구 등 노새로는 운반할 수 없는 것들을 어깨에 메고 나르는 들것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우리는 가는 길마다 영원한 피아노를 나르는 원주민 운반인 무리를 만났다. 보고타에서 가장 가난한 집을 포함해 피아노가 없는 집을 찾기 힘들다. 가족들은 온갖 희생을 감수하고 피아노를 산다. 다른 곳보다 세 배나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이다. 피아노에 붙는 운송료를 상상해 보라. 공장에서 생나제르까지, 거기서 바랑끼야까지 20~30일, 그곳에서 온다까지 15~20일(마그달레나 강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나서 8~10명이 2~3주 동안 어깨에 메고 가는 일정! 휴식할 때 피아노를 받치는 데 쓰는 큰 지팡이에 의지해 땀을 흘리며 구부정한 자세로, 그 불쌍한 원주민들은 노새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경사를 올라간다. 이런 경우 무게가 뒤쪽 네 명에게 쏠리기 때문에 5분마다 교대해야 한다. 때로는 힘이 다해 피아노가 땅에 떨어져 길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놓인 고정식 엔진용 보일러, 무거운 가구 등을 보았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이렇게 일반인의 신의에 맡겨진 물건이 하나라도 분실된 예는 없다.
우리는 종종 돼지 떼를 몰고 앞으로 나아가는 돼지 몰이꾼의 목쉰 소리를 들었다. 그는 모든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흥미로운 점은 대개 맨발이지만 허리춤에 단검처럼 새 알파르가타스 한 켤레를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또한 옆구리에는 우리 가우초들의 파콘처럼 길고 납작하고 날카로운 날의 영원한 빼이니야를 차고 있다. 먼지와 땀으로 뒤덮이고 반쯤 벗은 채 머리를 산발한 이 사람들의 모습은 쉰 목소리로 거칠고 강렬한 소리를 계속 내뱉으며 정말 야만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겸손하고 인내심이 있다. “안녕하세요, 친구.” “안녕하세요, 나리.” “어디서 오셨나요?” “똘리마(또는 안띠오끼아)에서 왔습니다.” “며칠이나 걸렸나요?” “30일(또는 40일) 걸렸습니다.” “마그달레나 강은 어디서 건넜나요?” “암발레마(또는 나레) 앞에서 건넜습니다.” 등등. 그는 결코 꽈르띠요를 요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일단 받으면 그것은 즉시 치차나 과라뽀, 특히 치차(콜롬비아의 재앙)로 바뀌어 다음 정거장에서 소비된다.
우리는 등에 진흙으로 만든 냄비, 물동이, 화로 등을 지고 허리가 굽은 채 걸어가는 원주민 여성 수백 명을 만났다. 그들은 혼자서 돼지 몰이꾼보다도 더 먼 곳에서 오며, 2~3개월을 걸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고작 2페소의 이익을 얻을 뿐이다! 거칠고 근면하며 인내심 있는 이 민족은 아랍인보다도 더 강렬하고 조용한 운명론을 지니고 있어, 유럽의 산업이 그들의 땅에 도입되는 날 콜롬비아의 빠른 발전을 위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원주민들에게서 치차 습관을 뿌리 뽑아야 한다. 이 치명적인 옥수수 발효주를 계속 마시면 결국 뇌가 위축된다. 보고타에서 나는 거리의 까치포(장난꾼 아이들)들의 반짝이는 생기에 놀랐다. 그들의 대답은 불르바르의 가맹의 재치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성인 아이들은 죽은 듯한 표정에 정신이 무뎌져 있다. 치차의 피해는 특히 여성들에게 끔찍하다. 그들은 항상 이 치명적인 음료를 파는 더러운 가게 문 앞에 몰려 있다. 부어오르고 더럽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아주 젊은 여성들조차 조기 노화의 모습을 보인다.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압생트는 적어도 일종의 인위적인 흥분을 준다. 하지만 치차는 아편처럼 사람을 바보로 만들 뿐이다…
마침내 우리는 과두아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아름다운 발예 호텔에 도착했다. 온다에서 보고타로 가는 길에 있는 유일한 괜찮은 숙소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 적은 것에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여행 동료들과 헤어지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날 하루를 그곳에서 보냈다. 이제 미미와 디지와 좋은 친구가 되었고, 리틀 조지는 나에게 작은 팔을 뻗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작하는 셋째 날의 여정은 언제나처럼 아침 8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6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번에도 매우 짧은 여정이 될 것이다. 오후 3시쯤 빌레따에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힘든 여정이었다. 과두아스에서는 날씨가 좋았지만 빌레따가 위치한 깔때기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기온이 계속 올랐기 때문이다. 파괴된 돌길로 인해 불가능해진 길을 따라 끝없이 내려가는 동안, 수직으로 내리쬐는 태양, 지친 노새가 흩어진 자갈 끝에 천천히 발을 디디는 모습,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열병에 걸리게 했다. 게다가 우리는 아래 계곡 바닥에서 빌레따를 볼 수 있었다. 원근법 효과 때문에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였지만, 우리가 전진할수록 마을은 멀어지는 것 같았다.
길이 좁아 대화를 나눌 여유조차 없다. 한 줄로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뒤에 있다가 앞에 있다가, 어디에 있어도 불편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노새는 보이지 않는다. 하늘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순례의 여정을 알고 있겠지만, 결코 내 의지로 다시 노새에 올라타지는 않을 것이다. 긴 기차 여행을 하면서 20시간이나 30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자세를 바꿀 수 없게 되고, 모두가 아는 그 짜증나는 기분이 들게 된다. 그때 나는 노새만 떠올리면 다시 상쾌해지고 즐거워지며 활력을 되찾는다. 당시 내가 타고 있던 노새는 정말 형편없었다. 고집이 세고 느릿느릿했으며 악마같이 절뚝거렸다. 게다가 아주 짜증나는 습관까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길이 좁기 때문에 짐을 실은 노새 떼가 반대 방향에서 오면 무릎이 짐에 긁히거나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무한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내 노새는 마주치는 동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밀착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계속 꾸짖었지만 결국 피해를 입은 건 나였다. 팔다리가 삐끗거렸다. 짐을 실은 노새들은 힘든 오르막길을 오른 뒤 노새 몰이꾼들이 멈추라고 소리치면 즉시 바닥에 주저앉는다. 노새 몰이꾼들은 걸어가며 고함을 지르곤 한다. 그래서 콜롬비아 주재 칠레 대사인 내 친구 시인 소피아가 온다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거구를 보고 안전을 위해 튼튼한 짐노새를 태웠는데, 그 노새는 도자기 상자와 외교관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수가 멈추기만 하면 바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는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지 않았다.
빌레따의 지방 관리들과 몇몇 친절한 주민들이 우리를 맞이하여 호텔로 안내했다. 호텔이라니! 보고타 사람들은 빌레따의 호텔 이름만 들어도 창백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행히 나에게는 한 친구가 개인 집에 숙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알려왔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마우리 부인으로부터 가장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빌레따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은 온천수와 광장의 거대한 나무, 그리고 마우리 부인뿐이라고 보고타의 악담꾼들은 말한다. 그 작은 방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들판처럼 깨끗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침대도 있었다! 베개와 시트, 담요가 있는 침대였다! 한 달 동안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그 상냥한 노부인은 내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관심을 보여주었고, 먼 고향과 그녀처럼 백발의 또 다른 분을 떠올리게 했다. 그분 역시 이 땅에서 선행을 베풀고 계신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상쾌하고 목욕을 마친 데다 기분까지 좋았다. 내 영국인 동료들은 사나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들은 지옥 같은 밤을 보냈다. 알지도 못하는 온갖 벌레들과 침대를 공유했고, 예방 차원에서 뿌려둔 2~3통의 살충제 가루는 오히려 그 벌레들의 식욕만 돋웠을 뿐이었다!
나는 침베에서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혼자 먼저 출발했다. 한 시간쯤 갔을 때 노새가 완전히 지쳐버렸다. 채찍질도 박차질도 소용없었다. 나는 낯선 땅에서 말도 안 되게 가파른 언덕 아래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무 그늘을 찾아 누워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철학적으로 기다렸다. 주변에서는 귀뚜라미가 울었고 태양은 깊고 순수한 하늘에서 불덩이처럼 뜨겁게 떠올랐다. 15분 후 작은 돌들이 굴러가는 소리로 누군가 언덕을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른 다리에 근육질의 작은 밤색 말을 탄 원주민 한 명이 나타났다. 나는 길 한가운데 서서 그를 기다렸고, 2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그 사람은 의아해하며 멈춰 섰다. 틀림없이 이 곳에서는 이국적으로 보이는 내 복장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 콜롬비아 여행복을 입지 않았다. 나중에 편의상 그렇게 했지만 말이다. 영국 장교들이 인도에서 쓰는 헬멧, 긴 과나코 판초(멘도사에서 칠레까지 동행했던 다정한 친구, 지금은 기차에서 담요로 쓰이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리고 긴 부츠가 당시의 내 차림새였다. 그 원주민은 스페인어를 또박또박 말하는 소리가 그 기이한 모습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바란 건 그의 싱싱한 말과 내 지친 노새를 바꾸는 것이었다. 만약 그 사람이 거절했다면 나는 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원주민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에서 내려 안장을 바꾸고 아구아 라르가에 있는 아무개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하인이 뒤에 오고 있었고, 그는 녀석들 중 한 명을 태우고 있는 노새를 끌고 왔다. 그는 내 지친 짐승을 맡기로 했다. “자, 이제 대여료를 정합시다.” 그는 밀짚모자를 만지작거리며 허리춤에서 새 알파르가타스를 꺼내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밤색 말이 산악 지대에서는 드물게 빠른 걸음걸이를 가진 말이라며 한참을 떠들었다. 마침내 그가 말을 꺼냈다. “3페소를 주십시오!” 오, 순진한 원주민이여! 에스파냐 사람에게 한 줌의 금을 주고 유리구슬을 받던 조상의 후손이로구나! 나는 관대하게 5페소를 주었고, 그 대가로 밤색 말의 걸음을 재촉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마침내 나는 산과 산을 넘어 침베에 도착했다. 한 봉우리를 넘으면 더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고,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자문했다. 이게 장난인가? 저 거대한 산들 너머, 구름 속에 잠긴 저 봉우리들 위에 사람들이 살고, 도시가 있고, 문명사회가 존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오직 영원한 피아노만이 내 옆을 지나갔고, 그것은 10명의 헐떡이는 원주민들의 아픈 어깨 위에 실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올라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자식들 중 누구라도, 평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이런 여정을 겪어봤을까?
팜파의 광경에 늘 익숙해진 우리가 산악 지대를 처음 여행하게 되면 나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즉, 좁은 계곡과 가파른 경사면에 우리와 비슷한 사회 조직을 가진 정착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스위스를 처음 여행할 때(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왔을 때) 내가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추운 불모지인 바위에 애착을 가질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그곳은 인간의 노동에 저항하는 땅이었다. 왜 비옥하고 관대한 땅에 정착하지 않는 것일까? 그곳에서는 괭이질만 해도 땅속으로 쉽게 들어갈 텐데 말이다. 그날 밤, 쉴러가 텔과 그의 아들 사이의 멋진 대화를 통해 내 질문에 답해주었다.
발터가 반베르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버지, 저 산에 있는 나무들이 도끼로 찍으면 피를 흘린다는 게 사실인가요?”
텔이 대답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니?”
“목동이 그러던데요. 마법에 걸린 나무라고 해요. 누군가 그 나무를 해치면 죽은 뒤에 무덤에서 손이 튀어나온대요.”
“그 나무들에는 확실히 마법이 있단다. 저기 멀리 보이는 하얀 봉우리들이 하늘까지 솟아있는 높은 산들이 보이니?”
“밤에 천둥소리를 내고 눈사태가 떨어지는 만년설 산이요.”
“그렇단다. 오래전부터 눈사태가 알트도르프 마을을 묻어버렸을 거야.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저 숲이 방벽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발터가 물었다. “아버지, 산이 없는 지역도 있나요?”
“우리 산에서 내려가 계속 강을 따라가다 보면 넓게 열린 땅에 도착하게 된단다. 거기선 시냇물이 거품을 일으키며 흐르지 않고, 강물이 느리고 조용하게 흐른단다. 사방에서 밀이 자유롭게 자라고, 그 땅은 정원처럼 아름답단다.”
“아버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서둘러 그 아름다운 땅으로 내려가지 않나요? 여기서 고통과 불안 속에 살기보다는요.”
“그 땅은 하늘처럼 좋고 아름답단다. 하지만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의 수확을 즐기지 못한단다.”
텔은 아들에게 자유란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콜롬비아에는 자유가 부족하지 않다.
오늘날 나는 산악인들이 고향에 대해 가진 완고하고 강한 애정을 이해한다! 그곳에는 분명 인간과 자연 사이에 더 친밀하고 지속적인 교감이 있다. 우리의 광활하고 장엄하며 단조로운 팜파와는 달리 말이다. 팜파는 새벽에는 활기차고, 정오에는 눈부시며, 해질녘에는 슬프지만, 결코 친밀하거나 소통적이지 않다. 산은 때로 미소 짓고 위로한다. 팜파는 우리와 함께 울지만, 거대하고 장엄한 슬픔으로 우리의 작은 인간적 고통을 초월한다. 산은 형태와 색채를 지니고 있어 회화, 조각, 건축의 즐거움을 준다. 항상 구체적이다. 반면 팜파는 영혼을 무한하지만 형태 없는 음악의 감각에 빠뜨린다! 평원도 사랑받는다. 거기서도, 오 시인이여, 자유의 나무는 생생하고 왕성한 뿌리를 내린다!
침베는 길가에 두세 채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중 한 집은 일종의 여인숙인데, 주인과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감자가 딱딱하고 국물이 맹한 수프와 작고 질긴 소금에 절인 고기 조각으로 이루어진 점심을 얻을 수 있었다. 이곳은 커피 재배에 적합한 또 다른 지역이다. 기온은 이제 위도가 아닌 고도에 의해 결정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땀이 멈추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대기압이 낮아져 따뜻한 지역의 농축된 공기에 익숙한 폐로는 호흡이 약간 곤란해진다.
그곳에서 나는 영국 공사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아구아 라르가에서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고, 나는 내 밤색 말 덕분에 사바나에 도착해 파카타티바까지 가서 전날부터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차를 탈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그 강건한 사람의 손을 애정을 담아 꼭 잡았고, 그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내 손을 잡아주었다. 3개월 후 그가 내 팔에 안겨 죽음을 맞이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차가운 바람 한 줄기가 그의 폐를 마비시켜 생명을 앗아갔던 것이다. 나는 그 젊고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의 깊고 조용한 절망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승진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지만, 이제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서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슬픈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남편의 시신은 멀리 높은 곳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 시신 앞에서 우울한 마음으로 서 있었다. 각자 멀리 떨어진 조국과 가정, 그리고 이 방랑 생활의 변천을 생각했다… 그 친구는 자국민의 눈물을 자국민의 눈물과 섞은 환대하는 국민의 품에서 안식을 취한다. 소피아의 아름다운 말대로 영국 땅에서 그의 유해를 덮었을 하늘이 콜롬비아 땅에서도 그의 유해를 덮고 있다!
나는 출발했다. 말을 탄 소년 한 명을 데리고 갔다. 침베에서 도보로 따라오던 하인을 보냈는데, 여행 중 그의 효용은 꽤 의문스러웠다. 짐은 앞서 보냈고, 내 계산으로는 이미 보고타에 도착했을 것이다. 나는 서류와 귀중품이 든 작은 가방만 가지고 있었다.
아구아 라르가까지 오르막길은 매력적이다. 내 밤색 말은 고귀하게 걸어갔다. 노새처럼 확실하게 오르지만 노새의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지옥 같았다. 오후 4시쯤 아구아 라르가에 도착했다. 그곳은 사바나까지 이어지는 훌륭한 포장도로의 시작점이었고, 마차도 다닐 수 있었다. 내 마차에 대한 소식도, 마차도 찾을 수 없어서 어린 수행원에게 만사노스로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만사노스는 사바나의 첫 번째 마을이었다. 나는 나를 맞이하러 온 그 지역의 몇몇 신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을 계속하자 매서운 추위가 느껴졌다. 아구아 라르가는 산에서 가장 추운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고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변 언덕들의 틈새로 휘파람을 불며 들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다. 넓은 도로를 따라 말을 달리는 즐거움이란! 노새를 타고 지쳐 온 사람에게는 비할 데 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내 소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따라잡았어야 했다. 땅이 그를 삼켜버린 걸까?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내게 중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여기저기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정말 걱정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원주민이 그 녀석이 아래쪽 지름길을 택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안심하고 계속 갔다. 계속 올라갔다. 끝없는 오르막길이 언제 끝나고 약속의 땅이 나타날지 다시 의문이 들었다. 자연 경관이 바뀌어 지금은 내 시야에 다양한 소나무들로 우거진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앞쪽으로는 접근하기 힘들어 보이는 높은 봉우리들이 보였다. 그것들도 넘어야 할까? 갑자기 놀란 외침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한 굽이를 돌자 햇살이 비치는 넓고 평평한 땅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알또 델 로블레에 도착한 것이다. 보고타 사바나로 들어가는 웅장한 관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넘어온 산들이 층층이 보였다. 해발 2700미터에 있었다!
자연의 어떤 변덕이 저 고지대에 이런 평원을 펼쳐놓은 것일까? 가장 무지한 눈으로 보아도 저것이 태고적에 거대한 고산 호수의 바닥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조 때문에 받는 인상이 깊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어도 실제 모습은 모든 기대를 뛰어넘었다.
사바나는 입구에서 보면 낮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형처럼 보였다. 그림 같은 매력은 없는 평원이었고, 들어서면서 내가 뒤에 두고 온 매혹적인 풍경들과 작별해야 했다.
만사노스에서 내 마차에 대해 물어보려고 여관에 다가갔을 때 보았다… 내 가엾은 짐들이 복도 아래 버려져 있는 것을! 짐꾼들에게 다음 마을인 파까따띠바까지 짐을 옮겨달라고 간청하다시피 해야 했다. 늦게 도착했을 때 이틀이나 앞서 갔음에도 보고타로 갈 마차를 구하지 못한 비서가 여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덤처럼 춥고 형편없는 여관에서 밤을 보냈고, 다음날 사바나를 5시간 동안 달린 끝에 마침내 콜롬비아 합중국의 수도에 들어섰다.
1882년 1월 13일이었고, 까라까스를 출발한 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난 날이었다.
비엔나에서 파리까지는 28시간이면 간다! 물론 내가 열 살 때는 가족과 함께 플로레스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2개의 늪지대를 하루 종일 걸려 갔었다. 그래도… 내가 열 살이었던 게 꽤 오래 전 일이긴 하다!
적도에서 시작해 안데스 산맥이 세 갈래로 나뉘면서 콜롬비아의 산악 체계를 결정짓고, 세 개의 넓은 계곡을 형성한다. 마그달레나 계곡, 아뜨라또 계곡, 까우까 계곡이다. 각 계곡에는 같은 이름의 강이 흐른다. 기후는 저지대, 특히 강 유역에서는 덥고 건강에 해롭지만, 고지대에서는 서늘하고 건강에 좋다.
콜롬비아의 지리적 설명을 상세히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내용은 어느 교과서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다.
비코, 몽테스키외, 헤르더의 역사 법칙을 입증하는 우연의 일치로,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콜롬비아의 지형적 특성을 살펴보면 각 지역 주민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마그달레나 계곡 주민들은 불안정하고 방랑벽이 있으며 모험을 좋아한다. 아뜨라또 계곡 주민들은 정착을 선호하고 노동에 강하며 절약하고 끈기 있다. 까우까 계곡 주민들은 음울하고 의심이 많으며 우울하다. 까우까 계곡에서는 시인, 몽상가, 정열적인 사람들이 많다. 보고타에서는 교양 있고 박식하며 말재주가 있고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콜롬비아인은 베네수엘라나 에콰도르 사람들과 구별되는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러시아인과 페르시아인의 차이보다 더 크다.
그 수천 리그의 땅에는 무엇이 있을까? 알려진 부분만 해도 가장 야심 찬 상상력이 땅의 표면에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열대의 가장 귀중한 산물부터 온대 지방의 과일까지 있다. 까우까 계곡은 우리의 차코와 비슷할 정도로 신비롭고 어두운 지역이다. 까우까 계곡은 북서쪽으로 파나마 지협과 접하고 남동쪽으로는 브라질 사막과 접하는데, 태평양과 평행한 부분만 알려져 있고 그것도 전부는 아니다. 남쪽의 광대하고 모호한 영토는 너무나 비옥해서 드물게 방문한 여행자들이 가져온 부족한 정보는 전설 같다. 그곳은 오랫동안 미지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콜롬비아의 미래는 거대하지만 안타깝게도 먼 미래의 일이다. 유럽의 과잉 인구가 먼저 기후가 비슷하고 교통이 편리해 이민을 끌어들이는 미개척 미주 지역을 채우고, 호주와 북아프리카까지 채워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콜롬비아로 향할 것이다. 북미의 서부나 광활한 아르헨티나 팜파스가 채워지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까? 하지만 그 미래가 최종적인 변화라는 의미에서 멀다고 해도, 그것을 앞당길 즉각적인 진보라는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콜롬비아는 오랜 유혈 투쟁 끝에 이제 평화를 갈망하고 있으며, 그 감정이 국민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미 국가의 부를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채로 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기적인 교통 체계를 갖추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현재 정치 조직은 매우 결함이 많다. 이는 내가 신중한 연구 끝에 내린 의견이며, 이 페이지들에 그 세부 사항을 모두 담지는 않겠지만, 오늘날 많은 교양 있는 콜롬비아인들도 이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 공화제, 대의제, 연방제가 그곳에서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각 주는 국가적 발전과 양립할 수 없는 법적 자치권을 가진 주권 국가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아르헨티나 국민만이 주권자이고, 주지사들은 행정부의 자연스러운 대리인이며, 의회의 권위가 헌법이 정한 제한 내에서 최고이고, 시민들은 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반면, 콜롬비아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각 주가 주권 국가이며, 일종의 원로원 역할을 하는 상원에 두 명의 전권 대사를 파견하여 중앙 정부에 참여한다. 의회의 법안은 주 의회 과반수의 비준을 받아야 집행력을 갖는다. 연방 대통령의 임기는 2년에 불과한 반면, 일부 주의 대통령 임기는 그보다 훨씬 길다. 그토록 광대한 조직의 여러 부분이 항상 단절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국가 정서가 발전하고 뿌리내릴 수 있을지 말해보라.
게다가 연방의 수도로, 국가 통합의 살아있는 상징으로, 전국에 빛을 비추는 수도가 없다. 보고타는 콜롬비아와 꾼디나마르까 주의 수도로, 지방 정부와 국가 정부를 함께 맞이한다. 그런 상황의 불편함과 위험성을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그들은 주지사의 소화 불량만으로도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보고타에서는 의회가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돌팔매질 당했다… 그리고 처벌받지 않았다. 우리도 그런 슬프고 비슷한 기억이 있다!
콜롬비아 주들 간의 주권과 절대적 자치를 둘러싼 경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보고타가 수도로 받아들여지고 선호되는 이유를 이해한다. 그것은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영향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형적 위치라는 단점은 어렵지만 가능한 철도로 극복할 수 있다. 보고타는 콜롬비아 같은 나라의 수도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기후가 있고, 정복 시대의 전통이 있으며, 교양과 지적 광채가 있다. 하지만 까우까와 보야까 출신들은 그곳에서 손님일 뿐이다. 국가에는 국가적 중심지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콜롬비아가 영원한 문명의 수단인 바다 연안에 수도를 세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구름 속에 갇혀 세상과 접촉도 없고 집단적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수도를 두는 대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불가능할 것이기에, 콜롬비아인들은 국가적 정서에 힘과 결속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일종의 동맹이 아니라, 애국심에 대한 동일한 개념을 가진 단단하고 응집력 있는 인간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지난 30년간 아르헨티나인들의 노력이었고, 서로 다른 정당에서 나온 모든 통치자들이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 국가적 진보, 과거에는 그토록 강렬했던 지방주의적 열정의 소멸은 우리나라를 지칭할 때 ‘아르헨티나 연방’이라는 명칭을 거의 완전히 포기한 것에서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이라고 말하고, 곧 칠레인들과 페루인들이 하듯이 아르헨티나라고 말할 것이다.
즉, 하나됨, 조국, 단일 민족이다. 연방제는 행정 분권화, 지역 발전에 대한 용이성, 기후, 성격, 전통, 관습에 맞는 경로를 제시하고, 정치 권력의 지속적인 균형을 이루는 등 장점이 많다. 하지만 콜롬비아에서 이해되는 방식으로는 이것이 죽음의 씨앗이라고 선언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다. 연방제는 상업 회사처럼 청산할 수 있는 민사 계약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국제 관행에서처럼 계약 당사자 중 한 쪽의 통보만으로 종료될 수 있는 조약도 아니다. 이는 사실이며, 유일하고 엄숙한 사실로, 두세 집단의 의지가 아닌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콜롬비아는 아르헨티나처럼 언제나 연방제로 통치될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쉼 없이 이 체제의 과도함을 억제하고, 그들의 자녀들이 내 생각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콜롬비아 연방’이라고 말하는 대신 ‘콜롬비아’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콜롬비아 헌법을 읽으면 꿈을 꾸게 된다. 인간의 정신이 이보다 더 이상적으로 관대한 작품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시인들과 철학자들, 정치학자들과 연설가들이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열망했던 모든 것이 거기에 명시되어 있고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사형 제도는 없으며, 판사들이 범죄자에게 선고할 수 있는 최장 징역형은 8년이다. 집회의 자유는 절대적이며 문자와 구두로 표현의 자유도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고? 이해하겠는가? 내일 누군가가 내가 공무원이나 군 장성으로서 금고의 돈을 빼돌렸거나 적에게 국가 군사력의 상태를 팔아넘겼다고 말한다면, 혹은 전단지나 신문에서 내가 형제를 살해했거나 자식들에게 식량을 주지 않는다고 고발한다면, 법은 나를 그렇게 중상모략하는 자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게 한다. 언론법이 없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과도함은 그 자체로 해결책을 가져왔고, 오늘날 콜롬비아의 언론이 프랑스나 미국, 또는 우리나라의 언론보다 더 혹은 덜 교양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문제가 법정으로 가서 절차에 얽매이거나 배심원 앞에서 끝없는 수사적 연설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피해자가 리볼버를 주머니에 넣고 스스로 정의를 실현할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체제를 옹호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단지 개인의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이 신중함과 교양을 일반화시켰다는 사실을 언급할 뿐이다.
보고타의 벽들이 말해주는 것들이란! 노동자, 학생, 경찰에게 복수해야 하는 길거리의 아이들, 대통령이나 장관에게 복수하려는 지망생들은 벽에 자유로운 언론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철자가 틀리기도 하고, 글씨체에서 거친 민중의 손길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표현의 사치, 얼마나 많은 모욕들인가! 대통령은 도둑이고, 살인자이며, 부도덕하고, 비겁하며,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저급한 것들이라고 한다… 옆에는 똑같이 강력하고 확신에 찬 글씨로 같은 공직자가 미덕의 표본이라고 적혀 있다. 때때로 경찰들이 이런 민중의 창의적 표현들을 지우지만, 그것은 단지 익명의 화가들을 위해 새로운 캔버스를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쨌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파리에서 밤에 대로변에서 감베타의 암살이나 그레비 씨의 출산 소식을 담은 호외를 팔며 소리치는 아이들의 무리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보고타에서는 “누구누구가 나에 대해 전단을 뿌렸다”는 말을 듣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즉, 누군가가 나에 대해 글을 써서 인쇄해 길모퉁이에 붙였다는 뜻이다. 심각한 모욕이 담겨 있다면 그 처리 방법은 끔찍하다. 그렇지 않다면 피해자는 상대방에게 똑같이 전단을 뿌리는 것으로 만족한다. 인쇄업자들은 좋은 수익을 올리고, 한가한 사람들은 거리 모퉁이에서 코를 하늘로 향한 채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한다. 언론의 자유에는 제한이 없으며, 의회에서조차 경제적 제약인 의사규칙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의장의 역할은 발언권을 요청한 사람에게 그것을 주고, 회의를 개회하고 폐회하며, 의사록에 서명하고, 때때로 우리의 사촌과도 같은 방청객을 퇴장시키는 것에 국한된다. 그 외에는 질문이나 질서를 요구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스핑크스일 뿐이다.
콜롬비아인은 웅변가이다. 문장은 우아하게, 활기차게, 움직임과 매력 가득하게 나온다. 더 넓은 무대라면 에스게라, 베세라, 갈린도, 아로세메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유창함과 풍부함은 따라할 수 없다. 그들은 상승하여 웅변의 높은 곳에 머물며 그곳에서 구름 속 독수리처럼 쉽게 움직인다… 말하는 것이 즐거움인 이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무제한의 권리를 어떻게 사용할지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여러 차례 전권대사 상원 회의에 참석했는데, 3시간 동안 발언권을 가진 시민의 말을 들었지만 회의가 끝날 때까지도 무슨 안건이 논의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각 연설자는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보야카에 대장간을 설립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렉산더의 전투를 설명할 권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듣는 것은 즐겁지만 일반적인 관심사를 처리하는 데 낭비되는 시간이 아쉽다.
이러한 사실들의 확인과 내가 하는 비판은 콜롬비아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나의 시민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고타에서 저명한 인사들이 여러 차례 공유한 의견이었는데, 그들은 나보다 더 명확하게 이런 악습의 폐해를 보았다.
그러나 이런 불규칙한 관행들은 건전하고 유익한 사상의 극단적인 결과일 뿐이니 잠시 제쳐두고, 우리는 콜롬비아가 매우 자유주의적인 제도 아래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군부 지도자들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그리스의 자유로운 시대를 연상케 하는 관행이 있는데, 바로 상원이 매년 일정 수의 시민들을 선출하고 대통령이 그중에서 군 지휘관으로 필요한 장군들을 임명하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장군이 되었다가 1년 동안 장군 자리에 있는 나라에서는, 장군들이 공공의 자유를 위협할 만한 위신을 갖지 못한다.
물론 트루히요, 살가르, 까마르고, 사르미엔또 장군 등 경력 있는 군인들이 있고, 이들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도 헌법을 가장 먼저 존중했다. 하지만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골칫거리인 동네 장군, 계급장을 단 촌장 같은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독재자들은 보통 콜롬비아에서 건강이 좋지 않다. 볼리바르도 그랬다… 아니면 그러려 했다. 지금도 보고타 정부 궁에는 그가 뛰어내린 발코니가 있다. 당시 브루투스 시대의 로마인들처럼 자유에 광적이었던 젊은이들이 폭군을 죽이는 것이 신성한 행위라 믿고 그를 죽이려 했을 때 그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그 젊은이들 중에는 플로렌티노 곤살레스도 있었는데, 지금 그의 유해는 아르헨티나 땅에 안치되어 있다. 볼리바르의 애인이었던 당당한 마누엘라가 몸으로 음모자들의 길을 막았고,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그들의 기사도 정신 덕분에 해방자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볼리바르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면 역겨움을 느낀다. 특히 그가 밤새 그 초라한 다리 밑에서 진흙과 오물 속에 몸을 숨기고 아침에 창백하고 초췌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차라리 피사로의 웅장한 모습이 낫다. 그는 조급한 마음에 쇠사슬 고리가 맞지 않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암살자들을 맞이해 마지막 숨결까지 싸우다 자신의 피로 바닥에 십자가를 그리며 죽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아마 구원의 다리를 찾아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볼리바르가 아니다. 내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면 나는 단순한 피크윅 씨처럼 그 뒤를 쫓아간다. 나폴레옹이 바람에 날아가 먼지 묻은 삼각 모자를 쫓아 달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영웅의 역할에는 지켜야 할 요구 사항이 있다.
콜롬비아의 두 번째 독재 시도는 멜로 장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공동 노력으로 곧 패배했는데, 이는 이 두 극단적 정당의 사상을 알면 자유에 대한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콜롬비아의 근본적인 정치적 분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독립파가 그것이다. 독립파는 새로운 정당으로, 건전하고 온건한 사상을 내세워 지지자들을 모으려고 애쓰고 있다. 콜롬비아 정당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얻으려면 1852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르헨티나 정당의 전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극단주의자는 콜롬비아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분류되고, 아르헨티나의 보수주의자는 콜롬비아 보수파에게는 공산주의자로 여겨진다.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원칙들, 충돌하는 의견들, 상반되는 신념들이 서로 맞서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1860년까지 권력을 잡고 있다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유주의 혁명으로 쫓겨난 보수당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콜롬비아 인구의 4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선거에 접근이 거부되었을 때 자주 자유주의 군대에게 패배한 전장에서도 승리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사상이 지나치게 진보를 절대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자유에 대한 열망, 인간 양심의 해방에 대한 폭력적인 열망이 그들의 적들에게 주는 힘과 추진력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릎 꿇고 읽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르낭이 성경 해석에 대해 말했듯이, 우리는 “무릎 꿇고 싸우면 제대로 싸울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콜롬비아의 순수 보수주의자들은 (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들의 선언에 호소한다) 마치 루이 18세처럼 16세기 이후로 아무것도 배우지도 잊지도 않은 것 같다. 종교 문제에 있어 광신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그들은 정치적으로 군주제를 선호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심지어 의회 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군주제에도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고타에서 교회의 사소한 축제를 위해 열린 보잘것없는 행렬을 여러 번 보았다. 깃발은 항상 보수당의 저명한 인사들, 즉 좋은 시절의 전통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 역사와도 연관된 성씨를 가진 이들이 들고 있었다. 말라리노, 아르볼레다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 성경의 말씀은 시간이 바꿀 수 없고 바꿔서도 안 되는 선고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들은 교회의 품 안에서 살며, 자신들의 희생으로 교회를 관대하게 지원하고, 종교 의식을 이행함으로써 교회를 영화롭게 한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수하고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콜롬비아 성직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만약 보수당이 집권하게 된다면 현재의 사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권력은 원칙의 논리에 위험한 시험대다. 하지만 야당도 원칙이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가는 경사면을 제시한다는 단점이 있다. 논쟁의 요구사항, 콜롬비아의 양측이 보여준 재능, 상호 간의 선의는 보수주의자들을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체제의 가장 강압적인 결과를 받아들이고, 양측 모두 선언을 하게 되었다. 한쪽은 절대주의로, 다른 한쪽은 무정부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오늘날 문명 세계에서 통용되는 좋은 정부 원칙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었다.
과거에 뿌리박힌 보수주의의 중력에 밀려, 자유주의자들은 미래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그들은 국가와 교회의 분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는 국가와 교회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적으로 무신론자다. 나는 그들의 적들의 무자비한 논리가 그들을 어떤 극단으로 몰아갔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충성스럽고 완강하게 받아들였는지를 놀라움과 슬픔으로 여러 번 확인했다.
이렇게 상반된 군대가 싸우는 전장의 중앙에서, 독립파들은 과거 자유주의자들로서 대중에서 분리되어 온건한 사상의 보호 아래에서 집단을 위한 합리적인 생존 방식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온건한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그들은 공개적으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존중을 표현하고, 정치적으로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를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규제를 도입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현재 콜롬비아에서 독립당은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일부 구성원들의 실제로 뛰어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권위가 부족하다. 신생 정당으로서 제공되는 모든 요소를 활용해야 했다. 양을 추구할 때 질에 대한 인식이 무뎌진다.
자주 이 세 단체의 투쟁을 지켜보면서, 1790년 프랑스 입법 의회가 떠올랐다. 한쪽에는 봉건적 귀족과 성직자 계급이 대표하는 구체제의 타협하지 않는 태도, 다른 한쪽에는 루소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무서운 청원서를 든 혁신가들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정부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는 평범한 지방 변호사들로, 오직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운명만을 지니고 있었다. 중앙에는 미라보, 바르나브, 라메트 형제들, 라파예트, 랄리-톨랑달 등이 있었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를 화해의 포옹으로 묶으려 하고, 자유를 통해 왕정을 재생시키려 하며, 왕정 제도를 통해 자유의 균형을 잡으려 했다.
이러한 콜롬비아 정당들의 역학 관계가 인류 사회가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지속적인 발걸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는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데 열정적이고 활기찬 국민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보고타
첫인상 — 산 빅토리노 광장 — 보고타의 시장 — 세르반테스의 스페인 — 수로 — 위생 — 가마 — 세레나타 — 광장들 — 인구 — 코끼리병 — 바르가스 박사 — 교회들 — 색채를 사랑하는 신부 — 국회의사당 — 종교적인 국민 — 종교 행렬 — 알또사노 — 정치인들 — 몇몇 이름들 — 사회면 기사 — 알또사노에 대한 향수
보고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불쾌함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물론 해발 수백 리그 높이의 그곳에서 일류 도시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나는 모든 대조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기이함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새로운 삶에서 직면할 불편함을 용기 있게 감수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차가 도시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자, 내 마음속에는 흥미로운 변화와 함께 귀국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뒤에는 힘든 노새 여행, 마그달레나 강의 숨 막히는 나날들, 그리고 지난 해상 여행이 남아 있었다. 그 긴 여정을 다시 해야 한다니! 그 생각에 나는 기운이 빠졌음을 고백한다.
마차가 간신히 전진하던 거리는 말 그대로 원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방금 산 빅토리노 광장을 지나쳤는데, 그곳에서 본 광경은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광장 중앙에는 투박한 분수대가 있었고, 여러 개의 관을 통해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수대 위에는 많은 서민 여성들이 속이 빈 갈대를 들고 있었다. 갈대 끝에는 물이 흐르는 관에 맞추어 놓은 뿔 조각이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관을 통해 물이 흘러 거친 테라코타 항아리에 담겼다. 이 모든 여성들의 얼굴에는 인디언의 특징이 뚜렷했다. 그들의 복장은 어깨와 팔을 드러낸 셔츠와 거친 어두운 천으로 만든 치마였다. 머리에는 작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두 맨발이었다.
마차의 통행을 방해할 정도로 많은 인디언들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을 보면 모두를 본 것과 같았다. 영원한 밀짚모자, 허리까지 오는 짧은 판초, 무릎까지 오는 넓은 바지, 그리고 맨발. 일부는 이미 언급한 새 알파르가타스 한 쌍을 허리에 매고 있었다. 과일과 채소를 실은 수많은 작은 당나귀들…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와 의심스러운 향기.
보고타 사람들은 내가 나중에 입성 당시의 인상을 이야기했을 때 웃었고,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금요일에 도착했는데, 그날은 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장은 일주일 내내 열려 있지만, 목요일과 금요일에 사바나의 농부들, 열대 지방과 보고타를 감싸고 있는 산맥 너머의 작은 계곡에서 온 농부들이 자신들의 상품을 가지고 수도로 온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보고타의 시장에 대해 몇 마디 하겠다. 이곳은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제품의 다양성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무이할 것이다. 온대 지방의 과일인 오렌지, 복숭아, 사과와 함께 바나나가 나란히 놓여 있다.
배, 포도, 멜론, 수박, 살구, 그리고 열대 과일의 무한한 다양성, 과나바나, 망고, 아보카도, 치리모야, 그라미야, 바나나… 그리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200가지가 넘는 과일들이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사바나와 높은 계곡에서 자란다. 그곳의 일정한 온도(섭씨 13-15도)는 유럽과 우리나라의 온도와 비슷하다. 두 번째 종류는 뜨거운 땅에서 자란다. 사바나에서 몇 시간만 내려가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 이렇게 지구상의 모든 과일이 동시에 제공되며, 모두 신선하고 맛있으며 거의 무료나 다름없다. 이것이 세계에서 유일한 현상이 아닐까? 사바나의 원주민은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이 엄청난 비용을 들여야만 누릴 수 있는 사치를 자신의 식사에서 즐길 수 있다. 그것도 더 완벽하게 말이다…
마침내 내가 조키 클럽에 보관해 두었던 물건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 텅 빈 방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얽힌 수많은 추억이 있다. 콜롬비아 땅에서의 삶을 그토록 즐겁게 만들어 준 이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 없이는 그 방을 기억할 수 없다.
도시… 펜이 손에서 춤을 추며 거짓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거짓말을 하고 나서 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가서 직접 보시오!’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보고타에 대한 애정을 극복하고 그곳의 모든 나쁜 점들, 특히 기이한 점들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세르반테스 시대의 스페인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좁고 곧은 거리는 다른 모든 아메리카 도시들과 마찬가지다. 낮은 기와집들에는 우리 꼬르도바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나무 발코니가 있다. 발코니들은 벽에서 돌출되어 있지만, 많은 경우 리마에 있는 또레따글레 후작의 저택처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문은 거칠게 깎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기로, 안쪽에서 돌이 끈 끝에 매달려 있는 장치로 닫혀 있다. 거리의 포장은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있다. 개울은 산에서 흘러내려 도시를 가로질러 영원히 단조롭고 슬프며 졸음을 유발하는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는 그 쓸쓸한 개울 때문에 여러 번 우울해졌다. 마치 귀에 대고 소라껍질을 갖다 대었을 때 들리는 공기의 소리와 같은 지속적인 불평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깊이는 얕지만, 그 개울로 인해 보고타 거리에서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동시에 개울은 치클로(페루의 갈리나소)와 함께 공공 청소와 위생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시의회는 이를 한심할 정도로 방치하고 있다. 일시적인 막힘으로 (불행히도 자주 발생한다) 개울이 한 거리에서 흐르지 않게 되는 날, 그 거리에 사는 가족들 사이에 경보가 퍼진다. 관대한 물이 쓸어가던 모든 가정 쓰레기가 쌓이고, 태양 아래에서 분해되며, 그 평온한 발효 과정은 영원히 부재하는 시의 개입으로 방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보고타 주민은 아메리카와 일부 유럽 도시의 모든 주민들처럼 청소를 위해 많은 세금을 낸다. 그 금액은 15만 페소 이상으로, 보고타를 최상의 위생 상태로 유지하기에 충분한 액수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 고귀한 스페인의 후손들 사이에서 지방세가 그 징수 목적에 맞게 사용된 적이 있었는가? 얼마 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정직한 주민이 포장, 조명, 치안을 위해 세금을 냈지만, 주머니에 한 푼도 없이, 어둠 속에서 넘어지고, 무릎까지 진흙에 빠진 채 집에 도착할 권리를 얻지 않았는가?
그래, 17세기의 스페인… 모퉁이마다 밧줄이 양쪽으로 걸려 있어 밤에는 희미한 불빛의 등불을 지탱하고, 낮에는 돌로 대체된다. 해질 무렵이 되면 야경꾼이 등불에 불을 붙이고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그 슬픈 교수형 자리에 놓는다. 어둠이 땅을 덮을 때면 얼마나 자주 거리를 배회하곤 했던가! 절대적인 침묵, 마치 곤돌리에의 자연스럽고 단조로운 경고음도 없는 베네치아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때때로 멀리서 등불 하나가 보인다. 그 반사광이 땅에 기이한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비추고 있다. 그것은 가마를 밝히고 앞서간다… 가마는 그것을 운반하는 어깨의 걸음에 맞춰 리듬감 있게 흔들린다. 축제에 가는 여인이다. 나는 멈춰 서서 환상 속에서 횃불을 든 시종이나 행렬을 마감하는 무장한 호위병을 찾는다. 가마는 지나갔다. 내 눈은 무의식적으로 멀어져 가는 등불을 따라간다. 그 불확실한 광채는 여전히 흔들리다가 줄어들고 사라진다… 한 그림자, 내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무언가가 내 옆을 지나간다. 벽에 바짝 붙어서 맨발이 두려움에 떨며 보도를 치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만약 그것을 멈춰 세운다면 항상 약국에 급히 가는 중이라고 말할 것이다. 부인이나 사촌이 아프다고… 그림자 속에서 지나가는 이 새들, 사람들은 그것들이 빗자루를 타고 사바트로 가는지 보려고 주의 깊게 살펴본다. 보고타에서는 이들을 ‘노체라’라고 부른다. 단테는 잃어버린 영혼들의 어두운 나그네를 ‘노치에로’라고 불렀다… 먼 곳에서 소리가 들린다. 침묵에 잠긴 중얼거림, 돌에 부딪히는 나무의 가벼운 소리. 앞으로 나아가자. 모퉁이를 돌자 15-20명의 남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어둠에 싸인 집의 텅 빈 발코니 앞에 오케스트라 보면대를 설치하느라 바쁘다. 그들은 조용히 이야기한다. 한 남자가 젊음이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단단하고 우뚝 선 모습으로 지시를 내린다.
마지막 지시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발코니를 응시하는 그의 눈앞에서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그를 따라 하며 지켜보았다.
첫 화음의 깊고 감미로운 효과여! 그 음들은 얼마나 달콤하게 잠자는 소녀를 어루만지며 깨어나게 할 것인가. 그녀는 꿈속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하늘의 억양으로 지상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을 듣고 있었다고 믿겠지.
무엇을 연주하는 걸까? 오, 보고타 사람들은 정말 취향이 좋군.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최고의 방법을 아는 신성한 거장들을 잘 알고 있어! 슈베르트의 ‘작별’이나 ‘세레나데’, ‘라 트라비아타’의 전주곡이다. 고요 속에서 희미하고 어렴풋한 멜로디로 솟아오르며 감탄스러운 효과를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우리 초원의 방랑 음악, 슬프고 절망적인 콜롬비아 밤부코의 모든 시가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화려한 슈트라우스 왈츠로 장식한다. 의심할 여지 없이 빠른 회전 속에서 몸이 하나로 밀착되고 팔이 엉켜 있을 때 귓가에 속삭인 시의 첫 구절을 음악이 해석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겠지… 처음에는 집이 고요했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자 발코니의 빈 공간에서 셔터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열렸고, 어둑한 정면에서 솟아오른 희미한 빛줄기가 귀 기울이는 사람과 떨리는 가슴이 있음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음악가들은 떠났고, 끌려온 구경꾼들도 멀어졌다. 침묵과 그림자가 다시 지배권을 되찾았고, 그곳에는 세레나데를 즐긴 야간 경비원만이 남아 아마도 따뜻한 보금자리를 생각하며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스페인이 아닌가? 전기 불빛 아래에서, 수천 명의 행인들 사이에서, 전차 경적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세레나데를 해보시라!
내 보고타 친구 중 한 명이 다음 날 밤 세레나데를 조직하고 싶어 해서 전문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불러 견적을 요청했다. 그는 상당한 금액을 제시했는데, 백 페소 정도였다. 내 친구는 너무 비싸다고, 그렇게 하면 자주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술가는 대로변 구두 수선공이 고집 센 손님에게 “밑창을 보세요”라고 말하듯이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내가 하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인간을 그런 비참한 상태에 묶어두는 삶에 대한 애착심. 바르가스 박사의 불굴의 의지가 그를 구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벗어났을 때, 청춘은 이미 지나갔고 영혼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언제나 프로메테우스처럼 속박된 사슬과 자신을 삼키는 독수리를 지닌 채 정신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저 유명한 콜롬비아 작가를 최고의 존경심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고독 속에서 온 세상의 지적 삶을 누리며, 영원히 시들어버린 육체와는 달리 지성의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삶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나병이여, 축복받으라!
내가 말했듯이 콜롬비아 정부는 국가의 미래를 위협하는 이 질병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과학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진행이 멈추고 결국에는 사라지기를 기대해 본다.
내가 아는 남미 수도들 중에서 (키토만 가보지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 식민 시대의 성당 건축 측면에서 가장 열악하다. 산프란시스코 성당과 산토도밍고 성당은 한심하기 짝이 없고, 우리의 대성당은 최근의 개조에도 불구하고 의사 그리스식 정면을 붙인 기차역 창고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또한 요즘 지어지는 교회들이 왜 그렇게 무겁고, 위엄도 우아함도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 불운한 막시밀리안이 자신의 이름을 연결 지은 비엔나의 경이로운 서약 교회 같은 모델이 있는데도 말이다.
보고타의 교회들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건축 양식에서는 우리의 같은 시대 교회들보다 우수하다. 대성당은 엄숙하고 우아하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옆에 있는 작은 예배당의 정면이 으뜸이다. 단순하고 거의 장식이 없으며, 높은 곳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종탑이 전체의 조화를 완벽하게 만들어낸다. 라스 니에베스로 가는 길에 있는 한 교회가 있는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부가 모두 조각된 나무로 덮여 있다. 베루게테가 자신의 놀라운 조각칼로 거친 나무를 조각하여 대리석이나 청동처럼 표현력 있고 생동감 있게 만든 부르고스 대성당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그곳에 한 번 갔다가 화가 나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나왔다. 상상해 보라. 그들이 그 훌륭한 천장의 목조 세공을 파란색으로 칠해버렸다!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한 사람이 수년간 그 나무를 조각하는 데 보냈고, 시간이 애정 어린 손길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모방할 수 없는 고풍스럽고 광택 나는 색조를 부여했는데… 그런데 바보 같고 색을 좋아하는 신부가 제의실 구석에서 발견한 희석된 남빛 물감 한 통을 그 위에 부어버린 것이다!
보고타에서는 과격한 자유주의자이자 무신론자이며 거의 무정부주의자인 신사가 자신의 자녀들을 카라스키야나 마야리노의 학교에 보내는 것을 아는 것이 드물지 않다. 이 두 학교는 펠리페 2세 수준의 보수주의자들이다. “어쩔 수 없어요! 여자들 때문에…”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조금은 그들 자신 때문이기도 하다고 덧붙이겠다. 하늘과 좋은 관계에 있는 친구들을 두는 것은 언제나 좋다. 왜냐하면… 만약 우연히 그 모든 허튼소리가 사실이라면? 이 못된 세상에서는 온갖 일이 다 일어나니까!
서민들은 광신적이다. 큰 축제일에는 대성당 문 앞에 거대한 군중이 참을성 없이 파도치며 모여든다. 마침내 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밀치고 팔꿈치질하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가장 힘센 사람들이 설교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갈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옛 행렬의 그로테스크한 세부 사항들이 많이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수난의 장면들을 표현한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님, 슬픔에 잠긴 성인들… 그리고 악독한 유대인은 로마인 복장에 구부러진 코, 좁은 이마, 풍성한 머리카락과 사나운 눈을 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군중들이 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고, 뾰족한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린 성 형제회의 참회자들 같은 복장의 경비병들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고타 사람들은 산책을 하지 않나요? 클럽이나 좋아하는 거리, 불르바르 같은 만남의 장소가 없나요? 우리의 플로리다 거리나 비엔나의 링,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로마의 코르소, 뉴욕의 브로드웨이, 런던의 파크 코너 같은 곳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죠. 바로 알또사노입니다. 알또사노는 대성당 앞뜰을 가리키는 보고타식 표현입니다. 볼리바르 광장의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으며, 5-6개의 계단 위에 있고 너비는 10-15미터 정도 됩니다. 그곳에서 아침에는 해를 쬐면서 (고도로 인한 서늘한 공기가 그 열기를 완화시킵니다), 저녁에는 식사 후 6시부터 7시까지 (보고타 사람들은 4시에 식사를 합니다) 정치, 문학, 사회적 지위 등 도시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매일 모입니다.
신문은 주기적으로 발행되지만, 보고타의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생활에서는 기사거리가 많지 않습니다. 종종 마그달레나 강이 지체되어 증기선들이 좌초되고, 2-3주 동안 세상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그 순간의 소식, 떠도는 소문, 있을 법한 정치적 변화, 알바레스가 대통령 누녜스를 맹렬히 비난하고 베세라가 용기 있게 변호한 상원 회의에 대한 논평을 들을 수 있을까요? 레스트레포가 진심으로 안띠오끼아의 독립파와 함께 있는지, 윌체스가 산딴데르에서 무엇을 할 계획인지는 어디서 알 수 있을까요? 알또사노에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닙니다. 저기 정치인들의 무리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공공안전위원회(급진적 성향의 정치 단체)가 오후에 모였고, 격렬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펠리페 사파타가 파나마 철도 수입을 저당 잡힌 최근 차관에 대해 맹렬한 비난의 팸플릿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녜스가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까요? 뽀빠얀에서는 정부에 만족하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반대로 깔리가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씨빠끼라는 어떤가요? 소금광산 일꾼들이 동요하고 있다고 하네요…
지나갑시다. 저기 알또사노를 서둘러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원히 시계를 보며, 실크 해트를 뒤통수에 걸치고, 마른 체격에 갈색 피부, 석탄처럼 빛나는 눈을 가졌고, 모든 사람에게 인사하고 모든 사람에게 애정 어린 인사를 받는 사람 말입니다. 나는 애정과 존경의 눈길로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두개골 속에는 미대륙에서 피어난 가장 강력한 시적 재능 중 하나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디에고 파욘입니다. 모호하고 신비로운 달의 비할 데 없는 시인으로,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영어 수업을 하러 가는 중입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시간은 금입니다. 저기 무리 속에서 누가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을까요? 호세 마리아 삼페르입니다. 그는 한 권의 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집에 들어가자마자 또 다른 책을 쓰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저기 마른 몸에, 금발 콧수염과 턱수염, 그리고 안경 한 쌍만 보이는 얼굴의 사람이 오고 있습니다… 그는 몇 개의 격정적인 시구로 모든 미대륙 여성들의 꿈을 사로잡은 사람입니다… 그는 라파엘 폼보입니다. 그리고 까마초 롤단, 사파타, 마누엘 A. 까로, 실바, 까라스끼야, 마로낀, 살가르, 뜨루히요, 에스게라, 에스꼬바르… 정치, 문학, 군사 분야에서 도시의 모든 유명 인사들이 있습니다. 저 멀리에는 젊은이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비엔나 표현을 빌리자면 ‘크림 오브 더 크림’이죠. 오늘 밤 계획이 있나요? 그리고 사교계의 천 가지 이야기들, 플로리안 거리나 레알 거리에서 하루 동안 말하고 행동한 것들의 최신 소식, 주식 시세는 어떤지, 사바나의 어떤 목장이 정말 팔리는지, 누구누구가 푸수가수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왔다는 것, 누구누구가 내일 또까이마에서 한 달을 보내러 간다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일지, 페드로가 그에 대해 배포된 전단지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 디에고의 짓이라고들 하더라는 것, 내일 어디에서 제비뽑기가 있다는 것, 알베르또 우르다네따의 최근 만화가 정말 좋았다는 것, X가 독립 영웅들의 전기를 언제쯤 다 쓸지, 살또로 남녀가 함께 소풍을 가는 게 조직되고 있다는 것, 누가 주최하는지, 누구누구의 망신당한 이야기 들었냐는 것 등등…
증권거래소, 문학 서클, 아레오파고스, 파당, 독신남들의 살롱, 극장의 무대 뒤, 포럼, 보고타의 모든 활동이 100평방미터에 모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알또사노입니다. 만약 그 교회의 침묵하는 벽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식민지 시대의 재판관들과 주교들의 선례와 예의에 관한 다툼부터, 보고타의 ‘카르네로’ 연대기, 최근의 음모와 봉기에 이르기까지 콜롬비아의 역사를 얼마나 잘 들려줄 수 있을까요! 또한 그 돌바닥은 여러 번 피로 물들었고, 여러 번 야만적인 싸움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보고타 사람들은 자신들의 알또사노에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재치 있는 말을 음미하고 사방으로 퍼뜨릴 수 있는 천 개의 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페의 마담 드 스탈은 파리의 더러운 개울을 그리워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몽마르뜨의 거리 시내 개울이나 베네치아에서 부르조아 거리를 꿈꾸는 프루프루도 고향을 멀리 떠난 보고타인보다, 특히 알또사노를 그리워하는 그들보다 더 불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14장
사회
친절함 – 첫 번째 식사 – 젊은이들 – 그들의 지적 수준 – 보고타의 까차꼬 – 집의 내외부 – 사회생활 – “습격” – 아메리카 여성들 – 보고타 여성들 – 수아레스 씨 집에서 – 음악 – 까이세도 로하스와 딴꼬 가의 젊은 아가씨들 – 밤부꼬 – 국민성 – 아메리카의 결투 – 무장 충돌 – 치명적인 사건들 – 남성성 – 리까르도 베세라와 까를로스 올긴 – 올긴의 대답 – 요약
일반적으로 여행자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머무는 사회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럽 전체를 여행하면서도 (예외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우리가 지나가는 나라들의 극장, 호텔, 거리의 의심스러운 세계 이상을 알지 못하고 돌아왔는가! 그들이 형성하는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그 나라 작가들 스스로가 가장 혐오스러운 색채로 사회를 그리는 임무를 맡는다. 만약 졸라의 ‘냄비’에 나오는 사회상이 정확하다면,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조국을 비방하고 비난하며 그리는 부패의 모델이라면, 누가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프랑스에 가려 하겠는가?
아메리카에서는 문이 더 쉽게 열린다.
도착 후 이삼일이 지나, 많은 신사들의 방문을 받고 공식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환영식에서 내 나라에 대한 생생한 애정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벅차올랐을 때, 까를로스 사엔스 씨의 정중한 식사 초대를 받았다. 그 첫 번째이자 잊을 수 없는 식사에서 보고타 사회가 어떤 것인지 알기 시작했다.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모임은 엄선된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각자는 친절함과 즐거움 속에서 나를 환영하려 노력했다. 그곳에는 콜롬비아의 젊은이들이 잘 대표되어 있었다. 그들은 교양 있고, 완벽한 사회적 예의를 갖추었으며, 자유롭고 우아한 태도를 지녔다.
젊은 보고타인의 지적 특성은 독특하다. 우선, 놀라울 정도로 빠른 지각력을 가진 예리한 지성이 있다. 게다가 탄탄한 교양을 갖추었고,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 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택을 지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속한 당의 극단적인 생각 속에서 떠다니며, 정치에 대해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머러스한 토론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당파 간 분열은 투쟁 중에는 끔찍하고 야만적이지만, 다음 날이면 사라지고 결코 사회생활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과 한 보수주의자가 나에게 자신의 친한 친구인 한 급진주의자를 소개하는 방식, 그 급진주의자가 차분히 듣고 있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면 보수주의자들을 자신의 열정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얼마나 놀라운지! 대화에서 재치가 반짝인다. 식탁은 끊임없는 불꽃놀이다. 농담, 재치 있는 말, 섬세한 관찰, 즉흥적인 4행시, 메뉴 뒷면에 쓰인 10행시, 한 마디로 어떤 인물을 매장시키는 말, 놀라운 언변… 이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아메리카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보고타인은 본질적으로 회의적이다. 모든 열정에 빠질 수 있지만, 거리의 애국적 선동에 대해서는 세련된 사람다운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콜롬비아인은 영웅들에 대한 토론, 볼리바르가 이것을 했는지 산딴데르가 저것을 했는지, 라까우르떼가 산 마떼오에서 어떻게 했는지 등, 결국 아메리카의 영원한 주사위인 독립, 스페인의 멍에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때 신경이 곤두선다. 그는 이에 대해 훌륭한 말들을 한다. 어느 날 밤 무도회에서의 만찬 후, 포크를 바쁘게 움직이던 한 부인을 그녀의 자리로 안내했는데, 그녀는 그곳에서 아주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음미하며 편안히 자리 잡았다. “부인, 편안하십니까?” “아주 좋아요. 우리 아버지들이 이를 위해 싸웠죠!” 공화국은 순수한 보고타식이다.
회의주의의 바탕은 종교 문제도 포함한다. 좋은 사회의 보고타인이 수도사들에 대한 비난 등으로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은 지적으로 민감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어떤 형태의 나쁜 취향도 그들을 자극한다. 하지만 동시에 과장되고, 극단적이며, 모든 면에서 극단적이다. 반감이 있나? 때로는 그것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불쌍한 사람은 “악당, 깡패, 도둑, 살인자…” 욕설 사전 전체가 된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어요. 우리의 의견이 다르다는 거죠.”라고 P. L. 꾸리에가 말했을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과 우리가 깔라베라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타에서는 까차꼬라고 한다. 까차꼬는 좋은 태도를 가진 깔라베라로, 유쾌하고 말을 잘하며, 전염성 있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 이집트의 스핑크스 10개를 원형으로 춤추게 할 수 있고, 국경일에 광장에서 말을 타고 하는 사열의 조직자이며, 미소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말을 발코니에 올라가게 할 수 있고, 돈이 걸린 내기에서 마지막 페소까지 걸 수 있는 대담한 도박꾼이며, 누군가 그를 찾으면 총격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고,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며… 보통 유럽으로 한두 번 여행을 다녀온 후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사바나의 어떤 농장에서 끝을 맺는데, 그곳에서 보고타에 드문드문 모습을 보인다. 까차꼬는 호감 가는 유형으로, 인기 있고, 좋은 가문 출신이며 (모든 공화국에서 그렇듯이 여기에도 계급에 대한 많은 편견이 있다), 약간의 오만함이 있지만 손과 마음이 열려 있다. 하지만 까차꼬는 사라지고 있다. 현 세대의 까차꼬들도 이미 자신들이 많이 퇴색했음을 인정한다.
그들의 부모 시대의 전통적인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들은 뒤따르는 세대가 자신들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사교계는 파티 면에서 그리 활발하지 않다. 간헐적으로 열린다. 갑자기 뚜렷한 이유 없이 다섯 여섯 가정이 접대의 날을 정하고, 그곳에서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밤을 보낸다. 때때로 유럽의 수도나 우리나라에서처럼 화려하고 호화로운 큰 무도회가 열린다. 이런 종류의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방문을 할 때 내 첫 인상은 정말 흥미로웠다. 허름하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의 집 앞에 도착하면, 거리는 포장 상태가 나빴고 중앙에는 늘 도랑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문지방을 넘어서면 얼마나 큰 변화인가! 호화로운 가구, 두꺼운 양탄자, 에르하르트나 치커링의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벽을 뒤덮은 화려한 금장 액자의 거대한 거울들을 보면서, 나는 온다에서 보고타로 가는 길, 짐을 나르는 원주민들, 산속에 방치된 짐들, 비바람을 맞으며 이 모든 깨지기 쉬운 물건들이 노출된 위험을 생각했다. 보고타에서 거울을 구하려면 액자 하나에 네 개의 유리를 주문해야 하는데, 그중 하나만 온전히 도착한다. 사회적 교양으로 인해 편안함에 대한 요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가족들이 이러한 설비에 드는 희생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임에서는 모방할 수 없는 상류층의 우아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세상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미국 여성들의 우아함으로 춤을 잘 춘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춤을 더 잘 춘다. 그들은 나에게 야자수처럼 유연하고, 빛나는 눈과 황홀한 몸짓을 가진 리마 여인들을 떠올리게 했다. 모임이 친밀할 때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띠쁠레(일종의 기타지만 더 날카로운 소리가 나는)를 들고, 세 네 명이 둘러서서 화음을 맞추고, 한숨 섞인 속삭임처럼 밤부꼬의 슬픈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젊은이들이 이렇게 즐거운 파티를 포기하기 싫어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용한 시기가 오면(연중 기온 변화가 거의 없어 계절이 눈에 띄게 바뀌지 않아 그 시기가 왜 오는지 모르지만), 완고한 귀족을 설득해 살롱을 열게 하려고 얼마나 기발한 계략을 짜내는지! 음모는 플로리안 거리에서 시작되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X씨 집의 모임에 초대받았는지 묻는다. 알또사노 시간이 되면 모든 까차꼬들이 그 얘기만 한다. 결국 소문이 선택된 희생자의 귀에 들어가고, 그가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보낸다.
이 방법이 효과가 없으면 대형 포대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습격이 조직된다. 믿을 만한 집을 선택해 열두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우연히 같은 시간에 방문한다. 집주인이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동안, 한 사람은 피아노를 열고, 다른 이들은 가운데 탁자를 치우고, 누군가는 의자에 올라가 샹들리에의 초에 불을 붙인다. 곧 왈츠 음악이 울려 퍼지고 흥이 돋아오른다. 집주인이 실바나 조키에서 열린 트레시요 게임에서 돌아오면,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며 자신도 모르게 베푼 즐거운 파티에 대해 감사를 전한다. 최근에는 습격 방식에 약간의 개선이 있었다. 지정된 집의 주인이나 부인에게 두 시간 전에 통보한다. 이는 방어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사치를 위해서다. 샴페인을 차갑게 하고 샌드위치를 신선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제 나는 왜 외국인들이 카리브해에서 라플라타에 이르는 우리 아메리카 여성들에게 미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유럽 여성과는 다른 존재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프랑스 여성의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 뉴욕이나 빈 출신의 그리스풍 조각상 같은 몸매, 스페인의 우아함, 이탈리아의 정열적인 영혼, 영국 여성의 단정한 용모… 하지만 그들은 특유의 말할 수 없는 정신적 활력, 목소리의 도취시키는 음악성,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억양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할 때는 과거를 잊고, 미래에 대한 최고의 무관심으로, 그들을 고양시키는 장엄한 사랑에 흡수되고 융합되어 자신을 내어준다! 하이네의 리트의 영향 아래 상상력이 만들어낸 황홀한 세계에서 어렴풋이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멘델스존의 멜로디에 영혼이 젖어들 때 꿈꾸었던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떨리며, 지상에서 육체를 끌어당기는 변함없는 사랑의 법칙 아래 성스러운 관능을 발산하는 모습을 보며 독일인의 심장을 신비롭고 강렬하게 고동치게 하는 그 흥분은 얼마나 대단할까!
인류 중에서 우리를 구별 짓는 이러한 특성들, 그리고 언젠가 아메리카가 지구상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세상 앞에 빛날 그 특성들, 즉 고결함, 무사무욕, 용기, 희생을 위해 확고히 발을 내딛는 태도, 비열하고 천박한 것들에 대한 깊은 경멸, 이 모든 것은 아메리카 여성으로부터 온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싹으로 주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그녀의 맑은 눈빛으로 그 모든 것을 발전시킨다. 그녀에게 돈 이야기를 하지 마라. 지위의 헛된 광채로 그녀를 현혹시키려 하지 마라.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다면 영혼의 길을 찾아라. 고귀하고 관대하고 용감해져라… 그렇게 해야만 신전의 문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릴 때 눈을 감고 그 순간 죽음을 청하라. 왜냐하면 당신은 초인적인 분위기를 마셨고, 삶이 당신에게 준비한 다른 모든 것들은 그 기억 앞에서 보잘것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고타 여성들은 확실히 다른 아메리카 여성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작은 키에 균형 잡힌 체형을 가졌고, 순수한 피부색으로 매력적이며,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말하는 방식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우리 북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덜 두드러진 리듬감 있는 음악성이 있다. 한편 우리와는 매우 다른 어법과 표현을 사용하는 언어가 그 신선한 입술에서 나올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상을 준다. 그들 중에는 완벽한 미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아함이 주된 특징이며, 부드러운 눈빛, 우아한 머리의 움직임, 계속되는 활기와 생동감이 작은 응접실을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만든다.
거의 모든 주요 가문들이 여행을 다녀왔고, 살롱에 들어가 파리의 유명 모딘 가게에서 전날 나온 듯한 의상들을 보면 아무도 아메리카 오지에 있는 산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디에고 수아레스의 집에서 먹었던 그 맛있는 식사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의 환대 깊은 가정이 나에게 그토록 애정을 담아 열려 있었다. 우리는 항상 15명에서 20명 정도였고, 첫 번째 요리부터 식탁은 참석자들의 재치를 위한 무대가 되었다. 얼마나 활기찼던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농담들이 오갔던가! 또한 보고타에서 수아레스 씨의 와인 저장고와 같은 걸작을 발견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가 유럽에서 직접 선별한 와인들은 긴 여정으로 가치가 세 배나 올랐고, 우리가 그것을 맛볼 때면 그 재치 넘치는 분위기 때문에 그 중요한 일에 필요한 진지함을 갖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디저트가 나오면 모두가 서둘러 식탁을 떠났다. 우리가 응접실에 도착할 때쯤이면 한 젊은 여성이 이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 누가 음악을 하지 않겠는가?) 열린 발코니는 우리를 초대해 사바나의 시원하고 고요한 저녁 풍경을 즐기게 했고, 그룹들이 형성되었으며, 친밀하고 즐거운 대화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리면 즉흥적인 춤이 시작되고, 합창으로 부르는 밤부꼬, 좋은 음악, 모든 사교적 즐거움이 정감 있고 품위 있는 분위기 속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벤고에체아, 레스트레포, 탄코, 코펠, 소피아, 미에르, 삼페르 등의 집에서의 모임들도 잊지 못할 것이다!
보고타에 음악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다는 점을 이미 말했다. 거의 모든 소녀들이 피아노를 잘 치며, 그중에서도 내가 평생 만난 가장 깊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두 명을 기억한다. 그들은 세계 어디서나 주목받았을 것이다. 그 중 한 명인 까이세도 로하스 양은 위대한 대가들에 대한 놀라운 직관력을 가지고 있다.
직관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보고타를 떠난 적이 없어서 고전 음악 해석에 대한 유럽 음악원의 전통을 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렇다. 소리의 고전 시인들의 작품 스타일의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려면 타고난 음악적 감각이 필요하다. 베토벤을 얼마나 장엄하고 위엄 있게 연주했던가! 모차르트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작품을 연주할 때 그녀의 손은 얼마나 우아하고 섬세해졌던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마브 여왕이 마차를 끄는 것처럼! 슈베르트와 함께 흐느끼고, 멘델스존과 함께 노래하고 꿈꾸며, 쇼팽과 함께 빛나고 탄식하고, 루빈스타인과 함께 진동하고 열광하면서도 항상 그녀만의 표현적 개성을 유지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사해 준 이 부드럽고 겸손한 아가씨가 이 글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마그달레나 강에서 만난 나의 매력적인 동행자였던 테레사 탄코 양은 내가 여러 번 그녀의 눈에서 읽은 것, 즉 보고타 사람들이 그녀의 정신, 고귀한 성품, 비할 데 없는 음악적 재능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는 것을 이 글에서 반복한다면 용서해 주겠는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바이올린 활을 켜면서, 오보에를 울리거나 하프나 띠쁠레의 현을 튕기면서, 섬세하고 정확한 목소리로 밤부꼬를 부르면서, ‘알바’와 같은 진주 같은 작품을 작곡하면서, 그녀는 항상 예술의 최고 영역에 있다.
콜롬비아의 밤부꼬를 탄코 자매들이 듀엣으로 부르는 것을 듣지 않은 사람은 우리 아메리카의 자연이 지닌 소박하고 내밀한 시를 알지 못한다.
밤부꼬는 우리 시골의 ‘트리스테’와 같지만, 더 음악적이고 예술적이다. 같은 원시적인 멜로디, 같은 슬픔과 한탄의 어조를 가지고 있다. 음악은 모든 사회 계층에서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는 영원한 위안자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실증주의의 철의 발 아래에서 사라져가는 이상의 반영을 얻기 위해 교양 있는 사회는 음악에 의지하고, 들판과 산의 주민들은 자신의 단순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에 의지한다.
여기에 두 개의 밤부꼬를 옮겨 적는다. 보다시피 시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것을 반주하는 음악, 그것을 말하는 표현이 그 모든 가치를 만든다. 우리 시골의 가난한 오두막에서 깊은 감동으로 들었던 어떤 ‘트리스테’도 교향곡의 주제로 옮기려는 시도를 견디지 못한다.
이런 시도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내 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꽃,
푸른 하늘의
아름다운 샛별,
내 사랑의
귀중한 상징,
더 나은 시간의
소중한 전령…
그대가 바로 그런 존재.
둥지를 떠나
울부짖는 새,
태어난 숲에서
멀리 떨어진 새,
어둠에 놀라
길 잃고 헤매는
방황하는 새…
바로 그런 존재가 나.
어둡고 외로운
길을 걷는다,
그대의 새벽 빛의
한 줄기를 나에게 주오.
나는 시든 나무,
신선함이 필요하다,
나는 불행한 자,
행복이 필요하다…
그것을 나에게 주오.
보다시피, 이는 단순한 민요로, 우울하고 슬픈 메아리를 담고 있다. 마치 이런 영혼의 색조가 모든 기후와 위도에서 인류를 구별짓는 유일한 특징인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매력은 음악과 그것을 부를 때의 부드러운 표현에 있다.
밤에는 민중들이 모이는 교외의 장소에서 합창으로 부르는 밤부꼬를 자주 들을 수 있다. 투박한 목소리로 부르지만 꿈꾸게 만드는 슬픔의 억양을 담고 있다. 이미 언급한 치차의 끔찍한 영향만 없다면, 콜롬비아 민중 – 여기서 말하는 것은 떠돌아다니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이다 – 은 그들의 놀라운 예술적 자질로 문명의 사다리를 빠르게 올라갈 것이다. 토착 인종으로서, 나는 그들을 우리 인종보다 우수하다고 본다. 우리 인종은 야만성과 지적 위축에서 첫 번째다. 또한 페루 인종보다도 우수한데, 페루 인종은 콜롬비아 인종을 특징짓는 존엄성의 본능이 없다. 특히 산악 지역에 사는 콜롬비아 인디오들의 용맹함은 – 불길같은 대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을 쇠약하게 만드는 열대 지방의 끔찍한 기후와는 달리 – 오늘날 아메리카의 그 지역에서 전설이 되었다. 독립 전쟁에서, 그리고 1876년까지 계속된 길고 잔인한 내전에서, 각각의 전투는 대학살이었다. 최근의 전투 중 하나에서는 현대식 살상 무기로 하루 종일 싸운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각 군대는 병력의 50% 이상을 잃었다.
[이미지: 까스따 빨로마 악보 –
까스따 빨로마, 고요한 샘물, 내 사랑의 빛줄기, 빛나는 광채.
부유한 환경의 달콤한 향기,
하얀 백합, 순진한 소녀.
그대는 바로 그런 존재.
둥지에서 멀리 떨어져 울부짖는 새, 태어난 숲에서 멀리 떨어진 새,
놀란 듯 방황하는 새.
어둠 속에서 길 잃고 헤매는 새.
그게 바로 나야,
그게 바로 나.
평원을 달리며
바위를 뛰어넘으며.
덤불 위로 올라가며
하얀 손을 뻗어 나를 부르던 그녀.
그녀가 내 발 앞에서
내 마음의 평온을 빼앗아 갔으니
나를 잊을 권리는 없어.]
만약 콜롬비아의 독립이 위협받거나 명예가 훼손된다면, 그들은 10만 명이 넘는 용감하고 인내심 있으며 열정적인 군대로 자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아메리카의 모든 국가 중에서 오직 라플라타 강 유역에서만 결투라는 사회적 제도가 발전하고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칠레와 페루에서는 개인 간 만남이 너무나 드물어서,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례들을 기억하고 언급한다. 프랑스 문학의 영향으로 우리 사이에 결투 관행이 지속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런 관행이 어떤 민족지학적 압력에 의한 것일까? 우리 시골에서 가우초들에게 피할 수 없는 법칙이 된 것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우리는 분명 열정적인 피를 가졌고,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예민한 명예심을 지녔으며, 용기에 대한 허영심이 열정의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다른 아메리카 민족들도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콜롬비아에서는 결투가 칠레나 페루보다는 더 흔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대신 불행하게도 콜롬비아인들 스스로도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내 모든 애정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명예나 평판을 모욕당한 사람은 적에게 정정당당하게 무장하라고 말한다. 어디서 만나든 공격하겠다고 한다. 보고타에서는 특정 사회 계층의 사람들(안타깝게도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일어나는 곳은 상류 사회다)은 낮에는 플로리안 거리나 레알 거리에서, 아침과 저녁에는 알또사노에서만 만난다. 나는 직접 첫 번째로 언급한 거리에서 오후 4시경,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보고타 최상류 사회에 속한 두 남자 사이의 이런 종류의 만남을 목격했다. 그들은 리볼버를 들고 배수로로만 떨어져 있었고, 서로에게 거의 모든 총알을 발사하며 격렬하게 공격했다. 어떻게 서로를 맞추지 못했을까? 자연스러운 흥분과 상호 움직임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내가 주목한 것은 구경꾼들 중 누구도 (사실 대부분은 신중하고 급히 퇴각했지만) 총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총알들은 싸우는 사람들 양쪽의 벽에 사람 키 높이로 박혔다. 결국 그들은 맨손으로 싸우다가 몇몇 사람들에 의해 떼어졌다.
불행히도 이런 종류의 사건이 그렇게 행복하게 끝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뛰어난 젊은이들,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이런 싸움에서 죽었다. 물론 배신이나 불시 습격은 절대 없기에 공정하다고 할 수 있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야만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사례들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보고타에서 누가 그 끔찍한 노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겠는가? 그는 젊고 깊은 열정을 가진 남자를 실수로 모욕했고,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했으며, 대결을 피하기 위해 대주교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한마디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모든 것이 헛되었고 어느 날 노인은 교회 현관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는 적의 끊임없는 총격을 받으며 곧바로 적에게 다가갔고, 그를 한 발의 총알로 쓰러뜨린 뒤 심장에 단검을 손잡이까지 꽂았다… 끝!
그 노인의 백발과 허약한 모습, 그리고 순수한 믿음과 헌신을 보고 그에게 돌을 던지려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적의 발 앞에 이마를 숙이고 엎드려 굴욕을 겪었고, 매 순간 위험이 도사리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 노인은 아직 살아있으며 사회의 존경을 정당하게 받고 있지만, 그의 입술에서 미소는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유발한 싸움에서 자신을 몸으로 막아서려는 한 헌신적인 여인의 품에 안겨 죽어갔다. 그의 무자비한 살인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 광장에서 하찮은 폭동의 첫 총성에 쓰러졌다.
그렇다, 이것은 야만적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 속에서 다른 시대의 전통이 아직도 현상처럼 남아있다는 것은. 야만적이지만, 이는 그 민족의 남성다움을 보여준다. 결투에 필요한 용기는 매우 평범하고 흔한 것이지만, 매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모든 그림자에서 위험을,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서 적을 감지하며 야수처럼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그런 지속적인 감각의 과잉 자극과 모든 순간의 기대는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요약하자면, 교양 있고 지적이며 교육받은 독특한 사회다. 나는 이전에 콜롬비아 사람들이 해안의 고된 삶을 피해 고지대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물질적 진보의 완전한 부재를 비교할 수 없는 지적 문화로 보상받았다. 산속의 오솔길을 따라 노새를 타고 가다가 중세 여관에서 잠을 자고 나서, 정제된 문학적 취향과 세련된 사회적 예의를 갖춘 도시에 도착하는 것은 확실히 흥미롭다. 그곳에서는 유럽의 학술원에서처럼 과학의 최신 진보에 대해 이야기한다. 스페인에서 까로나 꾸에르보의 위대한 작품들을 무조건 칭찬할 때, 그들의 저자들이 콘도르의 영역에서, 아메리카의 심장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때로는 며칠 동안 문명 세계와 단절된 채 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외국인은 특히 체류 기간이 짧을 때 보고타에서 불편하게 산다. 호텔은 형편없고 그럴 수밖에 없다. 보고타는 어디로도 가는 경유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하는 사람은 보고타에 오기 위해 오는 것이고, 보고타에 오는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좋은 시설을 유지할 만큼 많지 않다.
하지만 그 호감 가고 환대하는 문화의 품 안에서 삶의 물질적 어려움들이 얼마나 쉽게 해결되는가! 그 지적이고 남성적이며 개방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팔과 마음을 열어주는지! 나는 보고타에서 6개월을 보냈다. 다시 한 번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노새의 단조로운 걸음으로 안데스 산맥을 횡단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이 나에게 그 새로운 순례를 예비해두었다면, 나는 언제나 기쁘게 사랑하는 도시로 가는 길의 지점들을 볼 것이다. 그 도시의 기억은 내 영혼의 감사함으로 빛나고 있다!
제15장
떼껜다마 폭포
출발 – 동행자들 – 사바나의 말들 – 여행 복장 – 로사 – 소아차 – 산 베니또 농장 – 고통스러운 밤 – 떼껜다마의 전설 – 치브차 신화 – 훔볼트 – 네우께떼바의 팔 – 푼사 강 – 폭포의 형성 – 친차 농장 – 풍경 – 정면에서 본 폭포 – 평온한 인상 – 다른 모습을 찾아서 – 폭포와 마주하다 – 급류 – 격렬한 인상 – 그 모습 아래의 죽음 – 볼리바르의 위업 – 폭포의 높이 – 훔볼트의 의견 – 토론 – 폭포 아래에서 – 꾸에르보 박사 – 귀환
마침내 콜롬비아의 고전적인 소풍, 지구의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자연의 경이로움인 떼껜다마 폭포 방문의 날이 왔다. 안데스 고원에 발을 디딘 이후로 나는 폭포를 꿈꾸어 왔고, 내 노새의 지친 걸음으로 로블레 고개라 불리는 그 놀라운 지점에 도착했을 때, 내 놀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사바나를 보며 이미 “떼껜다마의 깊은 울림”을 들은 것 같았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날씨는 맑고 고요해서 폭포 가장자리에서 투명한 대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오후 3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덟 명의 친구들로, 건강하고 행복하며 젊었다. 들판의 공기를 즐겁게 들이마시며, 그 순간 삶을 장밋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깊은 우정이 넘쳐났고, 다음 날의 깊은 감동을 기대하며 나아갔다. 에밀리오 빠르도는 교양 있고 유쾌하며 매력적이었다. 에우헤니오 우마냐는 떼껜다마의 영주로, 우리가 하룻밤 묵을 농장 중 하나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신사적이며 유럽적인 세련됨을 지니고 있었고,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유럽 생활의 모든 세련됨을 갖추고 있었으며, 뛰어난 음악가였다. 에밀리오 델 페로호는 스페인 공사로, 말을 잘 타고 말솜씨가 좋으며 모든 모험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철의 육체를 가져 피로를 모르는 듯했다. 로베르또 수아레스는 남자답고 이상주의적이며, 항상 극단에 서 있었다. 그는 과장되고 독특한 성격으로, 삶을 그 단조롭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열정적이고 지적이며 교양 있었다. 까를로스 사엔스는 뛰어난 우아함과 눈부신 재능을 지닌 시인으로, 재치 있고 침착했으며, 구름 없는 하늘처럼 성격이 평온했다. 훌리오 마야리노는 콜롬비아의 전 대통령이었던 존경받는 정치인의 아들로, 영리하고 능숙하며 진취적이었고, 여가 시간에는 문학을 즐겼다.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는 폭포에 대한 의무적인 송시를 구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정신이 가장 좋은 순간 중 하나였다. 깊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고, 출발 직전에 받은 고국에서 온 좋은 소식들과 함께 삶의 작은 성공들이 주는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다.
우리는 넓게 펼쳐진 사바나를 날듯이 달렸다. 불과 피로 만들어진 듯한 말을 타고 들판을 질주할 때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육체적 즐거움을 만끽했다. 말은 기수의 작은 동작에도 즉시 반응했고, 입에는 거품을 물고 목을 구부린 채 자유롭게 달리고 싶어 했다. 마치 새처럼 공중을 날아오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내 인생에서 내 친구 J. M. 데 프란시스코가 내 집 문 앞으로 보내준 그 멋진 적갈색 말만큼 고귀하고 관대한 동물을 탄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오레혼 스타일, 즉 가우초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실 보고타 사바나의 말은 특별했다. 그들은 모두 승마용이었고, 그 편안한 걸음걸이는 말이 가장 흥분한 순간에도 유지되었다. 그들은 칠레 말들의 우스꽝스러운 발걸음과는 달랐다. 그들의 우아한 기백은 비할 데 없었다. 고개를 구부리고 가슴을 들어 올리며, 단단한 발굽으로 돌을 깨뜨릴 듯한 힘으로 땅을 밟았다. 그들은 기수의 팔을 피로하게 만들었고,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 했다. 박차나 채찍은 필요 없었다. 몸을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말이 뛰어오르고 고삐를 당기라고 요구했다. 우리 동포들이 말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 종일 그렇게 달렸다. 16리그나 되는 거리를 격렬하게 달리고, 뛰어오르고, 달린 후에도 나는 팔이 아프고 말을 거의 제어할 수 없는 상태로 보고타에 들어갔다. 말은 포장된 거리를 달리며 발굽 소리에 도취되어 더욱 기백을 높이고, 마치 서커스에서처럼 개울을 뛰어넘으며 발코니에 오르고 싶어 하는 듯한 명백한 징후를 보였다. 우리가 탄 모든 말들이 그러했다. 소아차로 가는 평평한 길에서는 먼지 구름만이 우리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길을 날듯이 달렸고, 말들은 서로를 자극하며 미친 듯이 재갈을 씹었다. 어떤 기수가 말을 낮은 흙벽이나 도랑으로 몰았을 때, 말들은 말할 수 없는 우아함으로 장애물을 넘었다.
우리가 입은 옷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모든 콜롬비아인이 여행할 때 입는 옷이었다. 머리에는 거대한 수아사 모자를 썼는데, 이는 짚으로 만들어져 있고 넓은 챙이 있어 햇빛을 막아주며, 높은 모자 윗부분이 두개골을 시원하게 유지해 주었다. 목에는 넓은 실크 스카프를 둘러 사바나의 차가운 공기로부터 목을 보호했다. 그리고 우리의 루아나, 즉 콜롬비아식 판초를 입었는데, 이는 파란색 방수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짧아서 양쪽으로 허리까지만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국민 사마로를 입었는데, 이것 없이는 아무도 말을 타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이것을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발명한 가장 쓸모없는 장치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명예롭게 의견을 바꿨다. 사마로는 두 개의 바지 다리로, 폭이 반 바라 정도이고 길이로 봉합되어 있지만 연결 부분은 열려 있어 다리만 보호한다. 모리스코 식 발걸이에 넣은 발 위로 떨어져 기수에게 우아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을 준다. 일반적으로 고무로 만들어지지만, 진짜 오레혼들, 즉 시골 사람들은 단순히 문질러 부드럽게 만든 소가죽으로 된 것을 사용한다. 이 지역에서는 1년 중 4분의 3 동안 폭우가 지속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예방 조치가 산악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젖는 것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기후에서 말이다.
곧 우리는 보사에 도착했다. 보사는 보고타 주의 지구로, 아주 오래된 치브차 마을이었다. 보고타 건설 이전에 곤살로 히메네스 데 께사다의 본부였고, 솔리스 부왕이 오리 사냥에 대한 열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었던 휴양지였다.
한 시간 후 우리는 소아차의 죽은 듯한 거리를 시끌벅적하게 지나갔다. 이곳은 2,5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주민 한 명당 해발 1미터의 고도를 가지고 있다. 소아차 근처, 해발 2,660미터에서 훔볼트는 말했다. “이것은 매스토돈의 뼈였다. 사라진 세계의 흔적이 독일인 여행자의 발에 밟히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그곳에 누워있었음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관광객들은 소아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른 아침에 출발해 안개가 폭포를 가리기 전에 도착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지역의 영주와 함께 갔다. 떼껜다마 지역은 200여 년 전 스페인 왕의 승인으로 우마냐 가문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광대한 영지 중 하나인 산 베니또 농장으로 향했고, 밤이 내리고 사바나의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해 루아나와 사마로가 그리워질 무렵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를 진정한 놀라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이 차려준 호화로운 식탁에는 카페 앙글레에 버금가는 메뉴와 로스차일드의 와인 창고에 어울릴 만한 와인, 특히 오래된 포트와인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정확히 말하면 파르도와 페로호, 그리고 나처럼 식사 후 산책을 나갔던 사람들만 그랬다. 우리는 건초더미 비탈에 누워 고국을 그리며 사바나를 바라보았다. 밤의 어스름한 빛과 주변 작은 산들의 기묘한 능선이 사바나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때 집 안에서 혼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격렬한 전투의 소음, 승리의 함성, 저주, 찬가 등이었다. 2시간 후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모스크바, 에일라우, 세단의 전장은 우리 눈앞의 광경에 비하면 목가에 불과했다. 아직도 그 베개가 기억난다. 전투의 열기로 칼이 꼬부라진 것처럼, 베개는 양쪽으로 찢어져 솜이 넓은 상처에서 빠져나오고 있었고, 얇은 천 조각이 본래의 모양을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쓰러진 탁자들, 망가진 의자들, 방 한가운데와 구석에 놓인 외로운 부츠들, 어지러운 침대 위에 기진맥진한 전사들. 외교관 방은 무사했고, 우리는 위험을 모면한 듯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폭포로 출발해야 하니 이제 그 형성 과정을 설명할 때가 되었다. 먼저 치브차 신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보자. 하늘과 가까운 이 고지대에서 원시 아메리카인들의 상상력은 멕시코와 페루의 기원 설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더욱 강렬하고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다.
1535년 세 방향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했을 때 오늘날 콜롬비아라 불리는 고원 지대에 살던 주요 종족인 치브차 족의 신화를 모두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께사다가 주요 전설들을 수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원고는 사라졌다. 다행히 누에바 그라나다 왕국의 초기 역사가들이 그것들을 보존해 잊혀지지 않게 했다.
훔볼트는 떼껜다마 폭포의 기원에 대한 원주민들의 종교적 전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 달이 지구를 동반하기 전, 보고타 고원의 주민들은 야만인처럼 살았다. 벌거벗은 채 농사도 짓지 않고, 법도 없고, 종교도 없었다. 무이스카 또는 모스카 인디언들의 신화에 따르면, 갑자기 친가사 산맥 동쪽 평원에서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의 긴 수염으로 보아 원주민과는 다른 인종이었다. 이 노인은 보치카, 네우께떼바, 수헤라는 세 가지 이름으로 알려졌고, 만코 카팍과 비슷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옷 입는 법, 오두막 짓는 법, 땅을 경작하는 법, 사회를 이루는 법을 가르쳤다. 그의 곁에는 치아, 유베까히구아바, 우이따까라는 세 가지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만 극도로 사악해서 남편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방해했다. 그녀의 마법으로 푼사 강물이 불어나 보고타 계곡을 모두 침수시켜 대부분의 주민이 익사했고, 소수만이 주변 산꼭대기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노인은 분노해 그 아름다운 우이따까를 땅에서 쫓아냈고, 그녀는 달이 되어 밤에 우리 행성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후 보치까는 사람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강력한 손으로 까노아스와 떼껜다마 쪽의 바위를 깨뜨려 계곡을 막고 있던 물을 빼냈다. 그는 보고타 계곡에 사람들을 다시 모아 도시를 세우고 태양 숭배를 도입했으며, 두 수장을 임명해 종교권과 세속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다깐사스라는 이름으로 뚬하 근처 이라까의 성스러운 계곡으로 은거해 2000년 동안 가장 엄격한 고행을 하며 살았다.”
신들과의 싸움에서 타이탄들의 팔에 너무 무거워 그대로 남겨진 듯한 거대한 바위들이 길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거품을 내며 격렬하게 흐르는 푼사 강이 산을 뚫고 들어가는 그 틈새를 보면, 치브차 족의 신화를 그 모든 가치로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자연의 영원하고 깊은 보살핌이 순진한 원주민에 의해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의인화된 흔적이 있다. 그런 존재들은 모든 민족의 여명기에 나타난다.
토착 신화를 신의 직접적인 발현으로 여겼다.
아침은 아름다웠고, 들판의 신선하고 맑은 공기는 우리를 사바나로 데려가는 동물들의 활력을 북돋웠다. 곧 산기슭에 위치한 떼껜다마 농장에 도착했다. 그곳의 위치는 매우 그림 같았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지나쳐 협곡으로 들어갔고, 곧 푼사 강을 따라갔다. 그 강은 마치 그리스 처녀의 실처럼 우리를 바위와 거대한 돌, 협곡과 절벽의 미로 사이로 안내했다.
푼사 강, 혹은 보고타 강은 같은 이름의 사바나에서 산의 계곡에서 시작된다. 강은 수많은 지류에서 물을 받아들여 곧 엄청난 양의 물을 품게 된다. 폰띠본과 씨빠끼라 마을을 지나 까노아스에 가까워지면 강폭은 44미터에 이른다. 하지만 폭포에 가까워질수록 강은 좁아져 폭이 12미터에서 10미터로 줄어든다. 사바나를 벗어나면 강은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흐르며 마치 강을 멈추고 저 아래 두려운 낭떠러지가 있음을 경고하려는 듯 앞을 가로막는 바위와 자갈에 부딪힌다. 강은 분노한 듯 속도를 높이고, 으르렁거리며 강둑을 때리다가 갑자기 거대한 물덩어리가 스스로를 감싸 안으며 빈 공간으로 격렬하게 떨어져 멀리 뻗은 평야의 200미터 아래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떼껜다마 폭포의 모습이다.
반시간 동안 강을 따라가며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다양하고 장엄한 경치를 즐긴 후, 우리는 길에서 벗어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분명히 들을 수 있게 된 폭포 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폭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우마냐의 새로운 친절함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먼저 순수하게 예술적이고 이상적으로 아름다운 측면에서 이 경이로움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나중에 우리를 비할 데 없는 광경이 일으키는 부드러운 조화의 감정이 영혼을 흔들고, 거기에 고정되어 오랫동안 지속되는 깊은 공포의 인상에 자리를 내주는 지점으로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오, 오랫동안! 내 눈과 영혼이 그 놀라운 광경을 바라본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밤중에 현기증 나는 감각과 함께 깨어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갑자기 높은 곳에 시적인 친차 농장이 나타났다. 거기서 아름다운 전망이 펼쳐졌다. 왼쪽으로는 뜨거운 땅 위에 솟아오른 메사라 불리는 독특한 고원이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사슴이 뛰어노는 초록빛 매끄러운 산비탈이 있는 까노아스가 보였다. 아래로는 평원의 그림자와 빛나는 태양 파도 사이에 반쯤 숨겨진 산 안또니오 데 떼나가 보였다. 이 모든 것을 숲의 틈새와 말이 떨며 멈추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닥칠 강렬한 감동을 위해 영혼을 품위 있게 준비시켰다.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온이 섭씨 13도인 차가운 땅의 왕성한 식물 사이로 내려갔다. 곧 말에서 내려 도보로 계속 갔다. 두세 명의 농장 소년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들은 티롤의 산양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바위와 땅에 누운 거대한 나무 줄기 위를 뛰어다니며 덩굴과 기생 식물로 막힌 길을 안내했다.
우리는 15분 동안 그렇게 걸었다. 이미 멀리서 들리는 깊고 장엄하고 위압적인 소리에 감동받았다. 그것은 무거운 단조로운 찬가였다.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바위 아래에서 무력한 거인들이 패배한 자의 영혼을 위로하려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친구여!”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말은 겸손하게 생각에 굴복하여 침묵 속으로 숨었다. 그 침묵은 불가피하고 풍부했다. 왜냐하면 그 보호 아래 영혼은 조용한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땅에서 멀리, 세상에서 멀리, 의식 없이 지나가고 기억 없이 돌아오는 저 모호하고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날아갔기 때문이다.
어떻게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릴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땅 위에 비할 데 없는 그 위대함의 감각을 전할 수 있을까?
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이 광경의 환기 아래 일어난 이 감정의 세계를 번역할 수 없고, 번역할 줄 모르는 이 창백하고 차가운 페이지들을 몇 번이나 찢어버리고 싶었던가!
거의 완전한 거대한 반원을 상상해 보라. 그 양쪽은 폭포 선으로 이루어진 현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반대편 꼭대기에 있었고, 따라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180미터 높이의 화강암 벽은 수직으로 잘려 있고,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다양한 층으로 인해 천 가지 다른 색을 자랑한다. 그 틈새에서 폭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증기 덩어리의 자연적인 샘과 응결로 형성된 물줄기가 솟아나며,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평온한 고요함으로 심연 위에서 자란다. 높이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안데스 지역의 모든 식물들이 있고, 아래 바닥에는 저 멀리 현기증 나는 곳에서 보이는 계곡에 열대 지방의 풍성한 식물, 뜨거운 땅의 관대한 수액, 야자수, 사탕수수가 있다. 그리고 구름을 내려다보는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우리 주변의 공기에서 앵무새와 금강앵무 무리들이 무지개 빛 증기 사이를 장난치며 날아다니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며 이 거대한 자연의 조화에 화려한 색채의 활기를 더한다.
따뜻한 지방을 추운 지방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상.
몽블랑 정상에서 바라보는 영원한 얼음바다가 마치 죽은 물의 수의처럼 보이듯이, 갑자기 열대의 계곡이 웃고 있는 듯하고, 호화롭고 관능적인 모습으로 엄숙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변함없는 자연과 마주하고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폭포를 거기서 없애고 싶다면 없애보라. 신화를 없애보라. 네우께떼바의 강력한 팔을 쉬게 해보라. 그래도 여전히 깊고 수직인 절벽들, 현기증을 일으키는 채워지지 않는 심연, 눈으로 바라보는 평원과 정신이 계속 허구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들, 그 광경은 언제나 신이 지구의 껍질 위에 만든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제 주변의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라. 그리고 앞을 강하게, 탐욕스럽게 바라보라. 미래에 그 광경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 모습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맑고 밝은 아침이 우리에게 유리했고, 태양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위엄 있게 솟아올라 한때 태양을 숭배했던 이들의 땅에 황금빛 장막을 드리우고 있다. 폭포의 무서운 안개가 태양 앞에서 사라지고 순백의 안개가 생생하고 화려한 무지개의 무한한 변화 속에서 무지개빛으로 물들고 있다. 폭포의 물은 멀리서, 우리가 있는 높은 곳에서 계곡 깊숙이 펼쳐진 곳까지 순결하고 만질 수 없는 듯한 넓은 띠처럼 떨어진다. 모든 것이 증기와 순백의 거품이다. 색의 순수함, 햇빛의 황금빛 반사 앞에서 한순간 장난치는 눈꽃송이의 지고한 우아함에는 천상의 조화가 있다. 그리고 나서 그것들은 투명하고 가벼운 증기 속에 녹아들어 공중으로 올라가 무지개를 품에 안고 높은 곳에서 꿈처럼 사라진다. 마침내 아래에서 거품이 부딪혀 형성된 구름에서 강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강은 기쁘고 웃는 듯하며, 모험을 즐기는 듯이 자신에게 낯선 땅을 변덕스럽게 지나가며 비옥하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는 차가운 물의 거칠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온화한 대기 속에서 일어난다.
아래로 떨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폭력으로 부딪히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깊은 심연으로 떨어진다.
폭포 바로 위에는 매끄럽고 경사진 바위가 있어 쉽게 오를 수 있다. 그 위에 몸을 기대고 머리를 가장자리로 내밀면 된다. 그렇게 하면 강과 폭포, 떨어지는 물줄기의 상당 부분, 아래의 깊은 계곡, 그리고 다시 야자수 사이로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푼사 강이 온화한 온대 지방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대하고 조용한 회랑을 하늘에 빛이 없고 땅에 움직임이 없는 그런 우울한 날에 들어서는 사람은 적어도 그 강도에 있어서는 새로운 감정이 천천히 영혼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허무와 인간의 작음에 대한 감정으로, 그 거대한 벽과 공간을 품은 듯한 돔이 세상에 나타내는 웅장한 생각 옆에서 느끼는 것이다. 나는 이제 인간의 손으로 만든 어떤 사원이나 건축물도, 우리 종을 빛나게 하는 그런 두뇌들이 고안해 낸 것들 중 어느 것도 자연의 이런 장관들과 비교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슬프게도 신앙의 말할 수 없는 혜택으로부터 멀어져 살면서 쓰라린 시간에 막연한 종교적 감정의 품 안으로 피신하는 우리들에게, 이런 깊은 감동은 기도의 성격을 띤다.
얼마나 엄청난 경악인가! 도덕적 존재의 깊은 곳에서 얼마나 커져가는 동요인가! 한편으로 몸은 전율하고 떨며 아무 말 없이 고통스럽게 심연의 매혹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물은 생명을 얻는다. 단 한 번이라도 강의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포효하며 내려오는 물을 보고, 스스로 휘감기고, 고통받고 광란에 빠져 거대한 계단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 그리고 거기서 심연으로 뛰어들어 산에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와 함께 조용히 산을 넘는 여행자의 귀를 울리는 것을 본 사람은 그 광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비록 다시 평온한 평원, 미소 짓는 들판, 꽃으로 가득한 계곡으로 돌아간다 해도 말이다.
파도는 서로 위로 달려들어 이미 하얗고 안개 같아진다. 공중으로 떨어질 때 변화는 완전하다. 가볍고 만질 수 없는 구름이 솟아오르고, 무지개가 그것을 장식한다. 잠시 빛나다가 다시 다른 구름이, 기이한 형태로, 떨어지는 고통을 베일처럼 가리며 그것을 대신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것도 사라진다.
내 말이 얼마나 슬프게 창백한가!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의 좌절감이여! 나는 전체 그림을, 살아 있고 고동치는 모습을, 바로 내 눈앞에서 본다. 영혼으로 그 순간의 감각으로 돌아간다. 나를 엄습한 모호한 공포, 호기심에 차서 심연을 들여다보던 아이에게 위협과 애원의 외침으로 물러나게 했던 순간으로. 그 아이는 내 고뇌도, 자신의 위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저 아래 깊고 깊은 계곡이 보인다. 아직도 평원의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들린다. 인간의 눈이 결코 관찰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무지개 빛 증기의 투명한 구름에 싸여 신비롭게 펼쳐진다. 거대한 화강암 벽이 보인다. 그 엄숙한 부동성, 거대한 꽃들, 그 포화된 내장에서 격렬한 분출로 터져 나오는 물, 마치 넓은 상처에서 솟구치는 피처럼… 그리고 나는 이 하찮은 창조물의 일부에서 우리가 알도록 허락된 이 비할 데 없는 광경을 그리기 위해 무력하게 몸부림친다!
우리가 부드러운 경사의 바위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이미 준비된 점심 주변에 모였을 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이 창백하고 숨이 가쁜 것을 발견했다. 무거운 권태가 우리를 엄습했고, 땅에 쓰러져 오랫동안 잠을 자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들었다. 이는 모든 깊은 감정 후에 나타나는 일정한 현상으로, 소모된 엄청난 양의 힘을 회복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자연의 조언이다.
점심은 조용하고 거의 엄숙했다. 시끄러운 형태의 즐거움은 사라졌고, 불안한 엄숙함 같은 것이 정신을 지배했다. 때때로 동료 중 한 명이 와인 한 잔을 마시고 조용히 일어나 다시 바위 위에 누워 묵묵히 명상에 잠기곤 했다.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다. 내 뒤에서 들리는 인간의 목소리가 그 순간 끔찍했을 고독감을 떨쳐내게 해주었다.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인간들만이 신경 체계가 완전히 무감각하고, 상상력을 완전히 통제하며, 머리가 그토록 단단해서 폭포 옆에서 태연하게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로서는 진심을 다해 고백하건대,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음 날 아침 세상에는 미치광이가 한 명 더 늘어날 것이다…
“정복자들이 보고타 평원을 밟은 이래로 오늘날까지,” 로베르또 수아레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근방에서 자살한 사람들이 만 명은 족히 될 겁니다.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무수한 이유들 중에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광기로 몰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오만한 사탄의 절규를 지르며 이 바위에서 심연으로 뛰어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총알로 머리를 날리든 이렇게 죽든 죽음은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하지만 폭포 앞에 서서, 그 분위기 속에 살며, 그 장엄한 위대함을 바라볼 때, 우리는 총알 한 발로 자신의 머리를 날리거나 가슴에 칼을 꽂는 데 필요한 용기의 양이 융프라우 산 정상에서 만프레드를 움직였다가 사라지게 한 그 고귀하고 냉정한 결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원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의 위대한 평온함을 그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바이런의 시에 담긴 깊은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만프레드가 이미 한 발을 공허 속에 내딛었을 때 그를 멈추게 하는 사냥꾼은 육체의 비참한 본능이다. 우리의 본성에 내재된 나약함이다. 영혼이 높고 강렬한 영감 아래 천상의 고향을 갈망하는 순간에도 우리를 이 세상의 진흙에 붙들어 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내 눈에 그보다 더 위대한 영웅은 없을 것이다. 고요하고 의식적으로 벼랑 끝에 서서 발밑으로 펼쳐진 공허를 한순간 어지럼 없이 바라보고, 그리고 나서…
“여러분 중 누가 볼리바르의 위업을 되풀이하시겠습니까, 친구 여러분?” 한 목소리가 말했다.
해방자는 살토를 방문했을 때 많은 일행과 함께 있었는데, 우리가 있던 곳 맞은편 폭포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 “장군님, 스페인군이 온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볼리바르는 “여기로!” 하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심지어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그는 뛰어올라 절벽 끝에 섰다. 2제곱미터 정도 되는 바위 위에 서서 바로 옆으로 거대한 물줄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물줄기는 0.5초 후에 공중으로 떨어졌다.
그 바위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반대편 강둑에서 그 바위까지 뛰어오르는 것은 특별히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은 아니다. 평지에 1피트 너비의 길을 그어놓으면 누구나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0미터 높이에 같은 너비의 판자를 놓고 걸어보라고 한다면…
짧은 토론 끝에 우리 모두는 진심으로 그런 행동을 하려면 특별한 체질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신경이 없거나 물질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는 볼리바르 같은 사람은 드물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우리 중 누구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빼놓은 책임을 지울 만한 그럴듯한 이유는 없었다.
살토의 높이 문제는 아직 확실히 해결되지 않았다. 강 아래 계곡과 물이 강바닥을 떠나 공중으로 떨어지는 지점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가 어렵고, 그 측정값을 제시한 과학자들의 권위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첫 번째 치수는 선량한 피에드라히타 주교의 것이다. 그는 이미 훔볼트를 통해 전사한 보치카 전설을 이야기한 후, 정복 시대의 바르코 데 센테네라의 M. 프뤼돔을 방불케 하는 진실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세계의 경이로 꼽히는 떼껜다마 폭포는 푼사 강이 반 리그 높이의 두 바위 사이로 흐르다 그 아래의 다른 바위들로 떨어지면서 만들어진다. 그 흐름이 너무 거세서 7리그 떨어진 곳에서도 그 충격음을 들을 수 있다.”
볼테르가 엘도라도에서 아메리카 여행자들의 불길한 과장을 비판한 것이 옳았다. 그들은 폭포에서 금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과장해서 불쌍한 원주민들에게 온갖 잔인한 행위로 이어지는 실망감을 낳았다. 반 리그는 터무니없이 긴 거리다. 그랬다면 물이 완전히 증발해 아래쪽 강이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7리그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도 없다. 그랬다면 폭포 바로 근처에서는 인간의 고막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인용해야 할 훔볼트는 강이 175미터 깊이로 떨어진다고 말하며 설명을 마친다.
“밀과 보리가 풍성한 경작지를 막 떠나왔는데, 사방에 아랄리아, 알스토니아 테오포르미스, 베고니아, 친초나 코르디폴리아가 보이고 참나무와 포플러, 그리고 유럽의 식물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식물들이 있다. 그리고 갑자기 높은 곳에서 발아래로 아름다운 땅이 펼쳐진다. 거기에는 야자수와 바나나, 사탕수수가 자란다. 보고타 강이 떨어지는 협곡이 따뜻한 땅과 연결되어 있어서 야자수 몇 그루가 폭포 바로 앞까지 자라난다. 이런 이유로 산타페 주민들은 떼껜다마 폭포가 너무 높아서 물이 차가운 땅에서 따뜻한 땅으로 뛰어내린다고 말한다. 175미터의 높이 차이가 공기의 온도에 눈에 띄는 영향을 미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저명한 여행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아래 계곡에 야자수와 바나나, 사탕수수가 있다고 말하고, 야자수 몇 그루가 협곡 바로 앞까지 자란다고 말한다. 이 식물들은 따뜻한 기후를 대표하는 식물 아닌가? 이 식물들이 자라고 그 주변을 날아다니는 앵무새와 큰부리새들이 살려면 25도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지 않은가? 175미터의 높이 차이로는 이런 기후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잔인하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있으므로, 남은 방법은 남작님이 측정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고 믿는 것뿐이다. 자연과학자 중 가장 위대한 분의 의견에 대해 이런 대담한 말씀을 드려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상식에는 요구사항이 있고 그것을 충족시켜야 한다.
오르티스가 인용한 도밍고 에스키아키 공학자는 폭포를 측량줄과 기압계로 측정했는데, 강 수면에서 물을 받아내는 바위까지의 높이가 264 카스티야 바라, 즉 792피트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훔볼트의 수치보다 3분의 1이나 더 높은 과학적 의견을 갖게 되었다.
에스게라 씨는 폭포의 수직 높이가 139미터라고 말한다.
페레스(펠리페) 씨는 146미터라고 한다. 둘 다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
사바나에서 내려와 산 안또니오 데 떼나를 통해 푼사 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들어가면 폭포 기슭까지 갈 수 있고, 나이아가라나 스위스의 피센바흐 폭포처럼 거대한 물줄기 뒤에서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힘든 여행을 계획했지만, 그곳 사정을 잘 아는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다. 그들은 물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수증기로 인해 땅이 매우 축축하고 질퍽거려서 우리가 빠질 위험이 있거나 적어도 원하는 지점까지 가지 못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떼껜다마 폭포와 관련된 전설 중에는 꾸에르보 박사의 놀라운 침착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는 케이블 끝에 묶인 채 도르래로 낭떠러지로 내려가 폭포 수면보다 60미터 아래에 병과 문서를 남기고, 장대한 광경을 한참 동안 즐긴 뒤 무사히 다시 올라왔다고 한다. 폭포 가장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은밀한 공포감에 눈을 감았고 꾸에르보 씨에 대해 반감을 느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동료들을 모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갈 시간이 되어 극도로 지친 채 귀로에 올랐다. 몇 시간 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강렬한 감각과 여전히 때때로 영혼을 뒤흔드는 깊은 경이로움으로 인해 우리는 매우 지쳐 있었다. 떼껜다마 농장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려 현관에 있던 가죽 위에 누워 거의 즉시 잠들어버렸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후 길을 나섰고, 해질 무렵 보고타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방금 본 장엄한 광경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제16장
지성
지적 발전 – 시의 땅 – 그레고리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 – 재능 – 즉흥시 – 라파엘 폼보 – 에따 라 보고따나 – 즉흥시 – 트레시요 – 씁쓸한 경험 – 시집 – 디에고 파욘 – 그의 대화 – 쉬운 시 – 달빛 – ‘달에게’ 시 – 호세 M. 마로낀 – 까라스끼야 – 호세 M. 삼페르 – 모사이꼬 – 미겔 A. 까로 – 그의 베르힐리우스 번역 – 과거 – 루피노 꾸에르보 – 그의 사전 – 요약
나는 이미 보고타 사회의 지적 발전이 탁월하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서 콜롬비아 문학의 역사적 개요를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콜롬비아 문학은 아메리카에서 잘 알려져 있고 모국의 가장 박식한 비평가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다. 콜롬비아는 독립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우아한 시인들, 사상가인 산문 작가들, 과학자들을 배출해왔고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곳에는 지적 수준에 대한 큰 존경심이 있다. 오늘날에도 콜롬비아인이 스페인의 잔혹함과 독립 전쟁의 공포에 대해 첫 번째로 제기하는 불만이 식민 지배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칼다스의 죽음이다. 자원도, 수단도, 안내자도, 모델도 없이 조국의 무한한 동식물을 분류하고 수많은 별들로 뒤덮인 하늘을 탐구하는 거대한 작업을 시작했던 현명한 칼다스, 그 아메리카의 훔볼트의 죽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곳은 시의 땅이다.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부터 정치인, 군인, 심지어 겸손한 농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입에 시구를 달고 산다. 모두가 대중적인 시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다. 그중에서도 ‘안띠오끼아의 달콤한 백조’ 구띠에레스 곤살레스가 으뜸이다. 삶의 첫 감정에 눈을 뜨는 사람들은 그의 시에서 자신의 막연한 열망을 표현하는 공식을 찾는다. 그의 시에는 상상력을 고조시키고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며 인간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따뜻한 밤의 우울하고 깊은 음색이 울린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며, 외국인은 그 사람에 대한 한 민족의 차분한 숭배를 보며 가장 친밀한 것들의 조화로운 해석자에 대한 존경심을 깊이 느낀다… 프랑스가 라마르틴의 첫 명상을 암송했듯이, 스코틀랜드 가정에서는 여전히 번즈의 부드러운 메아리가 울려 퍼진다… 아메리카 땅에서 태어나 우리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대부분의 시인들을 어둡게 만드는 치명적인 향수로 고통받으면서 우리 언어로 노래하는 그를 두고, 콜롬비아인들이 구띠에레스 곤살레스가 오직 그들만의 위대한 시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 세대 이전 세대가 마르몰의 로사스에 대한 비난을 유베날이나 위고에 버금가는 것으로 여기거나 인다르테의 정교한 시구에 도취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그 시를 읽을 때 리듬의 단조로움, 이미지의 격렬함, 지속적인 과장, 그리고 우리의 세련된 지성과 충돌하는 어떤 순진함에 놀라며 우리 아버지들의 열정을 이해하고 단순히 상황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그의 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즐겁게 읽힌다. 그는 감성적이고 현실적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비할 데 없는 선명함으로 보고 행복하고 쉽고 조화로운 시구로 반영한다.
쉽다!… 이것이 콜롬비아인들의 지적 특징이다. 그들의 자발성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놀랍고 혼란스럽다.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가 생각을 활발하게 만들 때
지성과 공통의 즐거움이 뇌를 자극하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행시, 십행시, 오행시가 쏟아져 나왔다. 강제로 운을 맞추고 기이한 단어를 선택하면 항상 모순된 대구가 생겨났다. 행을 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면 재치 있고 시의적절한 작품이 완성되었다. 한 사람이 낭송을 마치면 다른 사람이 일어나 강제된 운을 반대 순서로 사용해 자신의 작품을 시작했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비서인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에게 의지했다. 그는 당대 아르헨티나 젊은 시인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그의 뛰어난 재능은 우리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전혀 할 줄 모르는 운율을 맞춰 그 폭풍 같은 상황에 맞서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시도했다. 강제된 운을 받아들이고 메뉴 뒷면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첫 행을 완성하기도 전에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완성된 십행시를 들어 올렸다. “불가능해. 저들은 야만인들이야!”라고 마르띤이 말했다.
곧 연필을 치우고 즉흥적인 구두 시가 시작되었다. 빠르고 끝없이 이어졌다. 결국 모두가 운을 맞춰 말하기 시작했고, 리듬과 운을 맞추는 능력이 놀라웠다. 나는 까를로스 사엔스가 15분 동안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시를 읊는 것을 들었다. 대부분 무의미한 말이었지만, 절대 운율이 맞지 않거나 빈약한 운을 쓰지 않았다. 대체로 재치가 넘쳤다. 한 단어, 한 문장이 멋진 즉흥시의 발판이 되었다.
그것이 일반적인 수준이라면 위대한 콜롬비아 시인들의 수준은 얼마나 높을지 상상하기 쉽다. 과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지만, 존경과 애정을 담아 손을 잡았던 두 사람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라파엘 폼보와 디에고 파욘이다.
어느 날 뉴욕의 한 살롱에서 한 아르헨티나 여성이 남미 사람들을 많이 초대해 모임을 열었다. 그녀는 우리나라에서 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라파엘 폼보도 그곳에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영사로 갔다가 정권이 바뀌어 직장을 잃었다고 한다. 그것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는데,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되는 사상이 지배하는 콜롬비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시인이 뉴욕에서 살아간다니! 까를로스 기도가 맨체스터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폼보는 기도처럼 사업 감각이 전혀 없었고, 나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카운터 뒤에서 재산을 모아 삶의 독립을 이루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굳건한 존경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글로 생계를 꾸렸다. 신문 기자나 특파원으로가 아니다. 베네수엘라의 뛰어난 시인 페레스 보날데보다는 운이 좋았다. 그는 하이네를 스페인어로 가장 훌륭하게 번역한 유일한 사람으로, 지금은 뉴욕에서 람만과 켐프 사의 광고를 7개 국어로 편집하고 있다. 폼보는 애플턴 출판사와 연락을 취했다. 그들은 당시 미국 전역의 아이들이 읽는 도덕적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을 출판하고 있었다. 보고타에 가기 전에는 4살 난 내 딸이 외우던 재미있고 순진한 동화 “먹을 게 하나도 없는 할머니 이야기”가 “나이아가라!”를 쓴 불멸의 시인의 작품이라고는 전혀 몰랐다. 지나가다 그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작품들의 놀라운 유창함에 감탄했고,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을 밝게 만드는 그 달콤하고 친근한 무명 시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애정이 있을지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폼보였다. 스페인어로 글을 쓴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이었다.
폼보는 다른 뉴욕 거주 남미인들처럼 자주 우리 동포의 집에 가서 우아하고 박학한 대화를 즐겼다. 그녀는 가장 어려운 문학적 주제도 능숙하게 다뤘다. 어느 날 밤 그녀는 폼보에게 에따 라 보고따나라는 이름의 알려지지 않은 여류 시인에 대해 물었다. 그녀의 시는 깊고 모든 것을 삼키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포의 모방할 수 없는 억양을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영혼의 충동과 육체의 떨림으로 꿈과 욕망의 사내를 부르고 있었다.
“내 삶은 캄캄한 공허였고
내 마음은 메마른 무였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보았고, 내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시선이 나에게 우주를 창조했네…”
“이 시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폼보가 말했다.
“열정 넘치는 영혼이 떨리는 이 시, 여자다운 이 시, 산타 테레사의 신비로운 숭배로 둘러싸인 이 시 말인가요?… 이것이 바로 남자들이지! 당신들 중 누가 이런 시를 쓸 수 있겠어요?”
“에따는 지금 뉴욕에 있습니다. 만나고 싶으시다면…”
“만나고 싶냐고요?” 우리 동포가 특유의 열정으로 말했다. “당장 그녀가 어디 사는지, 이름이 뭔지 말해주세요. 내일 당장 찾아갈 거예요. 그녀에게 입맞춤을 퍼부을 거예요!”
“그럼 시작하세요, 부인… 에따는… 바로 접니다!”
만약 바이런이 오늘날 레이디 블레싱턴이 베네치아에서 본 것처럼 좁은 아마포 옷에 각반을 차고 녹색 안경을 쓰고 거리를 걸어간다면, 우리 동포가 느낀 실망감보다 더 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에따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폼보의 뺨을 톡 치는 것으로…
폼보는 추하다. 끔찍하게 추하다. 작은 머리, 두꺼운 입술, 금발 콧수염과 턱수염, 커다란 안경 뒤로 튀어나온 근시안 눈… 추하다, 매우 추하다. 그는 그걸 알고 있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뇌 속에서 영원하고 비교할 수 없는 지적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어서 마치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리까르도 구띠에레스는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그의 외투 재단을 비판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속으로는 멋쟁이야.”
폼보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의 정신의 숭고함과 성격의 온화함 때문이다.
저기 영감 넘치는 보고타 여인이 있다. 그녀의 시를 온 아메리카가 외우고 있다. 폼보가 에따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은 변덕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에따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나는 종종 웃으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멕시코까지 에따에게 바쳐진 모든 사랑의 노래, 공감의 메아리, 고통 속 동지애의 외침을 한 권의 책으로 모으면 꽤 두꺼운 책이 될 거예요. 그걸 출판하고 싶어요… 내 얼굴 사진을 표지에 넣어서 말이에요!”
어느 날 오후 플로리안 거리에서 폼보를 만났다. 대화 중에 내가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말하자, 고도의 공기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내 친구 게라 씨도 그런 증상이 있었는데 치료했어요… 뭘로 치료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내일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내 그림들을 보러 오기로 약속하셨죠, 잊지 마세요.” 다음날 집에 들어가 보니 폼보가 막 다녀간 참이었다. 책상 위에 낱장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내 옛 메모지였는데 이런 시구가 적혀 있었다.
친구여, 약속을 지켰소.
당신도 나처럼 지키시오.
라몬 게라는 나았다네
염소 젖을 마시고서.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보고타 스타일이다. 시의 유창함, 정확성, 유연성… 예를 들어, 트레시요를 아는 사람들은 왕들의 게임이자 게임의 왕인 이 게임의 놀라운 정확성을 알아볼 것이다. 다음은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의 ‘방문’이라는 작품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는 이 금 솔로를 잃었네
가장 큰 솔로였지
네 개의 마타도르에 여섯 장
컵의 왕, 네 장, 세 장
그러니까 두 번의 실패…
“하지만 이봐, 그럴 리가 없잖아!”
“잃었냐고?…” “잃었어.”
“잘못 쳤나?” “아마도!”
내가 실패한 두 번에
트럼프를 써버렸지
작은 패들이 들어왔고
왕이 실패했어.
그리고 무덤 파는 사람이 그녀를 데려간 후의 이 그래픽한 토론은 어떤가?
………내가 그의 3을
피할 수 있었다면!
“아니, 당신이 가진
내 트럼프 중 하나로는 안 돼요!”
“아니면 당신이 바스토스를 내놓으면!”
“아니면 그가 다시 금패를 내지 않으면!”…
“내기예요!” “코디요를 걸겠어요!”
“더 컸어요!” “안드레스가 주는군요.”
트레시요 얘기가 나왔으니 여담을 하나 하자면, 이것은 보고타의 인기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페루와 달리 남자들만 즐긴다. 리마에서는 매일 밤 이 집 저 집에서 로캄볼(트레시요) 고전 파티가 열린다. 여성들도 참여한다. 번영의 시기에는 초리요스에서 목욕하는 계절 동안… 중국인 한 명당 피차를 걸기도 했다. 3-4년 계약한 중국인 한 명은 300-400페소의 가치가 있었다. 지는 사람은 대개 대지주였는데, 다음날 전날 밤 잃은 피차-중국인 수만큼을 승자의 농장으로 보냈다… 보고타에서는 그렇게 크게 하지 않는다… 페루에서도 그런 시절은 지나갔다. 하지만 보고타 사람들은 트레시요 실력으로 유명하다. 마르틴, 올긴, 데 프란시스코… 그들은 라이벌이 없다. 까를로스 올긴은 스페인에 체류하는 동안 빨로스 클럽의 가장 강한 검객들을 놀라게 했다… 나는 콜롬비아에서 가장 현명하고 고귀한 사람 중 한 명인 까마초 롤단 씨의 훌륭한 연구에서 시인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에 대해 처음 인용한 트레시요 시구에 대한 이 특징적인 논평을 발견하고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게임 설명이 너무 명확하고 패배를 결정지은 우연의 설명이 너무 완벽해서, 이 신성한 예술의 미켈란젤로가 아니더라도 아무 애호가나 즉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발(pie)이 컵의 기사와 7을 가지고 있어서 4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마노(mano)는 왕의 실패로 패배했으며, 솔로를 건 사람은 가로질러 갔다.”
이것은 대가가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구띠에레스 곤살레스의 그 재능은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그의 친구 비센테 X가 한밤중에 그를 발견했다. 그는 수로 위로 몸을 굽히고 있었는데, 방금 만찬에서 나온 후 수많은 술을 마신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시를 즉흥적으로 짓기에 가장 적합하지 않은 순간이라는 것을 안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하지만 그를 알아본 친구가 다가와 당연히 이렇게 묻는다.
“그레고리오, 뭐 하고 있어?”
“제발 날 내버려 둬, 비센테.
지금 나는 연옥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고치기 힘든 시인이 즉시 대답한다.
라파엘 폼보는 친구들의 반복된 요청과 출판사들의 유리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를 모아 출판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대중을 두려워하며, 작품 전체를 분석했을 때 견딜 수 있는 시인이 거의 없다고 믿는다.
반면에 디에고 파욘은 방금 한 권의 책으로 시를 출판했다(보고타, 1882). 얼마나 많은 시가 있는지 아는가? 두 편이다! ‘수에스까의 폐허’에 대한 노래 하나와 ‘달’에 대한 다른 하나. 이것이 그의 대작들의 전부다.
반 다이크의 붓이 여러 번 재현한 그런 얼굴을 상상해보라. 깔끔한 머리, 큰 검은 눈 두 개, “영혼까지 이어지는 두 개의 구멍”, 검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긴, 섬세한 코와 입술. 마른 몸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잠깐 쉬는 순간에도 의자 위에서 펄쩍펄쩍 뛴다. 그의 말을 들어보라.
그와 대화하기는 어렵다.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시인의 담화 속에서 펼쳐지는 가장 놀라운 만화경을 지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비할 데 없는 행운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 그리고 햄릿이 호레이쇼에게 말했던 그 이상의 것들, 오직 시인들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말한다.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한가! 나는 그 악마 같은 사내가 어떤 눈으로 삶의 모습들을 보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지적하는 기이하고 아름답거나 그로테스크한 면모를 누구도 관찰한 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지적인 향연이고, 급류이며, 눈사태이다… 시계가 어떤 시각을 알릴 때까지. 그러면 그 환상가, 시인, 비할 데 없는 색채화가는 황금 구름에서 한순간 자신을 왕이라고 믿을 뻔했던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불쌍하게도 올렌도르프를 집어 들고 대학과 세 네 개의 학교, 그리고 또 어디에선가 영어 수업을 하러 간다. 파욘은 영국인의 아들이며 영국에서 공학도로 교육받았다!
그 방탕아, 그 라틴 정신의 낭비자는 일생 동안 단 두 편의 작품만을 썼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무능력 때문인가? 하루 종일 운문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게으름 때문인가?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기 위해서는 시 한 편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정신적 활동이 필요하다. 아니다. 예술에 대한 지극히 높고 경건한 관념, 시인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의 경지까지 작품을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욘은 4행시 하나를 완성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4행 안에 하나의 생각을 담고 싶었는데, 운율이 그것을 왜곡하거나 시행이 터져 버렸다. 그래서 마침내 마지막 끌 자국으로 조각상이 순수하게, 장인이 꿈꾸었던 그대로 나타났을 때, 얼마나 내밀한 기쁨과, 얼마나 솔직하고 열린 환희가 있었던가!
자발성, 형식의 용이함이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시이다. 태어날 때부터 음악적 귀를 가진 사람이 있고, 보통 사람의 눈보다 더 깊이 볼 수 있는 망막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러한 특권을 가진 이들은 15세까지는 천재이지만, 25세까지는 평범해지고, 그 후에는 무(無)가 된다. 쉬운 작업은 아름다움, 완성도, 진실성과 표현력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우아하고 세련되게 펼쳐지는 것을 보는 바이런의 어떤 연은 얼마나 많은 밤을 들였는지! 마치 그리스의 미네르바처럼 한 덩어리로 태어난 것 같아 보이지만 말이다. 괴테나 실러의 원고를 보면 경외심이 생긴다. 표현하지 않고, 표현하려 들지 않는 반항적인 형식과 맞서 싸운 노력과 끈기가 얼마나 대단했던가! 자발성의 대표적인 스승, 보클뤼즈의 가수, 신성한 페트라르카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소네트를 썼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지오베르티가 청동을 다루듯 시행을 다듬었다니! 뮈세와 위고 자신은 어떠한가? 그리고 만조니와 레오파르디… 그리고 가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남는 모든 것은? … 베랑제가 투옥된 지 15일이 되었을 때 그를 방문한 한 친구가 그 기간 동안 몇 곡의 노래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아직 첫 번째도 끝내지 못했소. 노래 한 곡이 서사시처럼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시나요?”
평범한 산문은 보통 빵처럼 삼킬 수 있다. 그러나 맛없는 ‘크렘 푸에테’는… 안 된다. 나는 나쁜 시를 혐오하며, 아무런 고민이나 동요를 남기지 않는 그 운율 가득한 책들을 읽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나는 파욘의 두 작품을 스페인과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인쇄기를 신음하게 만든 대부분의 두꺼운 시집들보다 선호한다…
우리 중 누가 고요한 밤, 달빛 아래에서 느낀 황홀한 감각을 기억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았겠는가? 마음이 평온하고, 그 조용한 시간의 평화로운 영향 아래, 숲과 들판과 언덕 사이로 달빛을 따라가며, 뒤러의 신비로운 붓 아래 베들레헴의 요람 위 빛줄기처럼, 그것을 희미하고 떠다니는 환영들, 꿈과 추억들로 채우지 않았던가?… 창조할 능력이 없어 예술에 반영을 구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때로는 음악에서 찾기도 하지만, 시나 색채로 달밤의 풍경과 영혼 사이의 그 내밀한 대화를 찾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것이 내가 파욘의 달콤한 시를 선호하는 이유다.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그처럼 나 자신의 내면을 더 분명히 읽게 해주지 않았고, 열정의 나날에 고요한 달빛이 내 영혼에서 솟아나게 했던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들에 형태와 생명을 부여하지 않았다… 들어보시라, 몇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 편안한 안락의자에 머리를 기대세요. 그곳, 현관 아래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살짝 움직이는 나무들 앞에서, 시골 밤의 그 깊고 친밀한 침묵 속에서, 추억들이 떠오르고 희망들이 노래하게 하세요… 그러나 졸음 속에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로 풍경을 보세요…
이미 동방의 깊은 경계에서
달이 안개 장막을 걷어 올리고
깊이 잠든 세상 위에 살며시
순결한 발을 처녀의 수줍음으로 디딘다…
거기서 넋을 잃고 무한을 맞이하며,
겸손한 얼굴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깊은 푸른빛은 말없는 웅변으로 그 시선에 끝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단 하나의 새벽별만을 안내자로 삼고 장송곡으로는 거룩한 침묵을, 유일한 길로는 텅 빈 지역을 그리고 망토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고독을.
- * * * *
거기서 너의 조용한 빛이 내려와 은빛 천으로 펼쳐진다. 눈 덮인 산맥의 정상을 따라 그리고 울창한 계곡의 품속으로. 비스듬한 광선으로 어두운 비탈을 따라 간간이 나뭇잎을 어루만지고, 너의 하얀 광채는 높은 곳에서 벗겨진 바위를 대리석으로 바꾼다.
- * * * *
그리고 나는 너의 빛에 녹아들어, 오 달이여! 나는 외로운 황야를 지나 먼 계곡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늘진 숲과 높은 바위에 둘러싸인 사막의 호수가 고요히 빛나고 있다. 잠들어 있는 듯 맑고 평온한 호수는 기슭의 산들과 가슴속의 하늘의 화려함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오! 이곳이 바로 당신의 신비로운 지역이다. 인간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곳. 숲과 바위로 이루어진 미로에서 당신의 빛줄기가 그림자와 싸우고 있다.
그림자들은 당신의 시선을 싫어한다. 혼돈의 자식들이자 세상을 떠도는 자들. 옛 무(無)의 표류하는 잔해들이 빛의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다.
- * * * *
당신의 시선에 바람이 멈추고 사막의 나무와 꽃도 움직이지 않는다. 존재들 사이에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세상의 심장은 고동치지 않는다…
죽음의 파수꾼이 다가오고 있다! 침묵이 여기 있다! 오직 그의 존재 앞에서만 영혼은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양심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명상한다. 침묵의 헤아릴 수 없는 고요함이 무덤의 소름 끼치는 외침이라고. 육체는 듣지 못하지만 영혼을 전율케 하는!
- * * * *
높은 산에 눈을 입히고 오래된 숲에 어둠을 드리우며 극지방에 얼음을, 대지에 푸르름을, 하늘과 바다에 푸른 깊이를 입힌 이가 당신의 얼굴에도 베일을 드리웠다. 인간이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도록 당신의 광채를 누그러뜨린 것이다. 신 앞에 떨며 그의 힘에 경탄하도록.
나는 광활한 창공을 헤매다 다시 내 안으로 돌아와 내 생각은 또다시 내 존재의 심연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내 정신을 공포에 빠뜨리는 망상을 느낀다. 저 멀리 검은 옷을 입은 안데스 산맥이 이미 심판받은 세계들의 재가 묻힌 무덤 같다고 생각한다…
- * * * *
동쪽 하늘에 마지막 새벽별이 나타나 슬프게 당신의 이별을 슬퍼한다. 당신 왕관의 그 다이아몬드가 떨어져 이제 여명의 이마를 장식할 것이다.
오, 달이여 안녕! 나는 절망 속에서 인간의 천한 언어를 저주하고 싶다. 가슴속에 이토록 많은 감정이 솟아나게 하면서도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내 영혼은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 몸부림치며 신음한다. 당신을 보며 자신의 숭고한 사명을 기억하고 연약한 먼지를 털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먼지에서 자유로워져 날아오른다 해도, 내가 느끼는 이 신의 형상인 영혼이 날개를 펴려 해도 하늘의 무한한 심연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저 별들, 그 빛이 영혼의 빛 앞에서는 희미해지는 별들도 미래의 날개짓을 위해 펼쳐진 바다의 모래알에 불과할 뿐이니!…
호세 마리아 삼페르는 6~8권의 역사서, 3~4권의 시집, 10~12권의 소설, 그만큼의 여행기, 연설문, 정치 연구, 회고록, 논쟁… 뭐가 더 있을까! 그의 지치지 않는 활동력에 놀라울 정도의 능력 중 하나다. 정신에 한순간의 휴식도 없다. 펜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혀가 움직인다. 3시간 동안 연설한 의회에서 나와 알또사노에서 밤이 될 때까지 연설을 이어가다가 집으로 가서 새벽까지 글을 쓴다. 그리고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매일같이 이어졌다. 그는 페루에서 언론인이었고, 유럽 전역을 여행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했다… 그리고 아직도 젊고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활력이 넘친다. 당연히 그 많은 책들 속에서 예술가의 세련됨과 형태와 음조의 정확함을 찾는 것은 소용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리우스 또뺑이 늙은 뒤마를 두고 한 말처럼 통나무와 잔해, 모래와 바위를 휩쓸어 가면서도 금 입자도 함께 떠내려가는 거친 아메리카의 강과 같다.
보고타에서는 모사이꼬라고 부르는 문학의 밤 행사가 매우 인기가 있다. 아마도 다루는 주제의 다양성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보고타의 젊은이들은 모사이꼬를 문 닫힌 클래식 음악회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런 축제 소식만 들어도 말을 타고 농장으로 달아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곳의 젊은이들은 운율의 달콤함조차 믿지 않는 완고한 회의론자들이다. 나로서는 그런 모임에 참석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칠레 공사 소피아가 매우 어려운 십오음절 운문으로 모사이꼬에 초대장을 보냈다고 한다.
조급하면서도 압도적인 직무였다. 다음날, 그는 동일한 각운으로 초대에 응하는 40개의 소네트를 만들어냈다. 낭독회가 모자이크를 이루어야 했다. 삼페르는 각각 한 음절씩 줄어드는 4개의 소네트를 보냈다! 콜롬비아는 젊지만 학식 있고 박식한 문인으로 명성이 자국을 넘어 스페인 본토까지 퍼진 두 사람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첫 번째는 영감 넘치는 시인 호세 E. 까로의 아들인 미겔 안또니오 까로다. 그의 고귀한 시 ‘마지막 잉카의 입을 통해’는 모든 아메리카인들에게 알려져 있다.
M. A. 까로는 스페인어로 된 베르힐리우스의 뛰어난 번역본 저자다. 그 정확성은 소름 끼칠 정도다. 풍부한 베르힐리우스 라틴어의 각 구절을 상응하는 스페인어로 옮기는 데 필요했던 끈질긴 노력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그래서 까로의 번역을 읽는 이들은 만투아의 백조의 서정시에서 풍기는 것과 같은 감미로운 향취, 같은 힘, 그리고 베르힐리우스를 라틴 시인들의 왕자로 만든 그 비할 데 없는 우아함을 발견한다. 이 작업은 이미 스페인의 저명한 비평가들에 의해 평가받았고, 오늘날 왕립 아카데미에서는 그의 이름이 가장 위대한 본토 출신들과 같은 존경심으로 언급된다.
삐에드라이따의 ‘일반 역사’와 베요의 ‘시집’ 등에 대한 까로의 서문은 그저 걸작이다. 우리 아메리카에서는 흔치 않은 언어의 풍부함과 우아함과 더불어, 현대 세계에서 이 새로운 과학의 진보를 하나도 모르지 않는 언어학자의 방대하고 견고한 박식함이 발견된다.
까로의 작업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진심 어린 최고의 찬사 후에, 바로 그 감정의 이름으로, 그의 몇몇 페이지가 내게 남긴 불쾌한 인상을 기록하고 싶다.
까로는 정치, 종교, 문학에서 그 단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의미를 담은 보수주의자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다. 콜롬비아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나 그의 양심의 매우 존경스러운 영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그의 무한한 열정, 스페인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 현재의 모든 열망에 대한 반대, 심지어 스페인 현재의 열망에 대한 반대까지도 비판의 영역에 속한다. 마치 우연히 까로의 육체가 콜롬비아 땅에서 인류의 대열을 늘리게 되었다면, 그의 정신은 16세기 마드리드에서 태어나고 형성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숨을 쉬고, 자신의 동료들을 알아보고, 열정을 느끼고 논쟁한다. 역사의 한 순간에 멈춰 자신의 선호, 거의 말하자면 편집증에 의해 정해진 한계를 결코 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읽지 않고 다시 읽을 뿐이라고 로예 꼴라르가 말했다. 그들에게는 그 열정적인 고집이 용서될 수 있다. 그들은 그 세계만을 알고 있기에 현재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까로는 30년의 지적 생활 동안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었다. 그의 뛰어난 지성은 현대 문학을 깊이 파고들었고, 지난 100년 동안 세계에서 과학과 문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그처럼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현재와의 이 화해할 수 없는 다툼은 그런 수준의 정신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며, 그러한 사상의 영향이 형식에 대한 존중에 국한되고 사물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까로가 끼느따나의 관대하고 인간적인 외침에 대해 분노의 말을 찾는 것을 보라. 끼느따나는 정복의 잔혹함을 인정하면서 한 세계의 저주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멀리하고 그 책임을 시대에 돌리고자 했다. 스페인 궁정의 발베르데에 사로잡힌 광신적인 수도사도 더 격렬하고 원한에 찬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해한다. 그리고 나는 25년 동안 아메리카 문학에 활력 없는 양분을 제공해 온 정복에 대한 무익한 비난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까로를 따르는 첫 번째 사람이다. 하지만 과거를 신성시하는 것, 종교 재판소와 식민 체제를 포함하여 신성시하는 것은 그 고귀한 지성의 자연스러운 빛과 화해할 수 없는 회고적 집착으로 보인다…
싯구의 냉정함과 정확성, 그리고 우아함은 문장을 조각하듯 다듬게 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3시간 동안 거칠고 부정확하게 악마처럼 글을 쓴 후 펜을 짜증스럽게 내려놓는다면, 꾸에르보의 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채워야 할 하얀 종이 기둥이 악몽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면 어떨까? … 그리고 이 작품들이 어디서 구상되고, 숙고되고, 쓰여졌는지 아십니까? 맥주 양조장에서입니다. 루피노와 앙헬 꾸에르보는 콜롬비아 대통령을 지낸 저명한 정치인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산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정치에 관여하거나, 법정에서 속임수를 쓰거나, 배심원들 앞에서 허풍을 떨며 굶어 죽기라도 할까요? … 푸아! 그들은 보고타에 맥주 양조장을 세웠습니다. 자금도 없고, 재료도 없고, 더 나쁜 것은 성공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이 선호하는 치차와 경쟁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병에 맥주를 채우고 마개를 막았다”고 루피노가 내게 말했습니다. “6년 동안 일요일에도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앙헬이 말했습니다. 10년 만에 그들은 재산과 독립을 얻었습니다. … 무엇을 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파리에서 살면서 카페와 부두아르에서 지적 활력을 낭비하며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 아닙니다. 단지 맥주 상자를 보내는 일을 제외하고는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래된 인폴리오를 보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시력이 나빠질 것 같은 책들 위에서 말입니다! …
하지만 루피노 꾸에르보의 작품은 그의 조국과 우리 민족의 영예가 될 것입니다.
콜롬비아의 문학사를 요약하거나 (이곳이 적절한 장소도 아닙니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인물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내 목적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만약 몇몇 이름을 언급했다면, 만약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들 중 일부를 소개했다면, 그것은 그들을 만날 행운이 있었기에 내 기억의 그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내가 말한 것만으로도 콜롬비아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그리고 미주 전체에서 그 명성이 정당한지를 이해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자유의 나라, 관용의 나라, 교양 있는 나라인 콜롬비아는 다행히도 지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역사가 부과한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주도권과 끈기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공감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독립 전쟁의 기억이다. 우리는 모두 옛 리마에서 벌어진 기사도적인 경쟁을 알고 있다. 보야카 전투의 승리자들과 차카부코 전투의 승리자들, 콜롬비아 장교들과 아르헨티나 장교들 사이의 경쟁 말이다. 영웅들의 대립, 15세기 무기 전령이 말했을 법한 예의의 전투였다. 콜롬비아인들은 볼리바르를 대장으로 삼았고, 아르헨티나인들은 산 마르틴을 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두가 이 두 영광이 대륙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콜롬비아인들은 베네수엘라 평원과 그라나다 산맥에서 스페인의 힘과 오만, 용기에 맞서 오랜 전투를 치르며 얻은 상처의 흔적을 살과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지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콘도르가 사는 높은 곳에서 불멸의 전투를 벌인 안데스 산맥 횡단이라는 비할 데 없는 위업을 기억했다. 양측 모두 페루를 정복한 땅, 자신들의 것으로 여겼고, 양측 모두 왕들의 도시 거리를 승리자의 오만함으로, 그리고 아마도 방금 해방시킨 이들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박차 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한쪽에는 수크레, 코르도바… 다른 쪽에는 라바예, 네코체아… 서로 마주 보는 번개를 품은 구름들이었다! 번개는 터지지 않았지만, 번쩍임이 한 번 이상 남자다운 얼굴들을 비추었다.
볼리바르의 장교들과 산 마르틴의 장교들은 모두 콜롬비아와 라플라타의 가장 높은 계급 출신이었다. 타고난 오만함에 카스티야 식의 용맹한 자랑이 더해졌다. 순간순간 목숨을 걸고, 미주에서의 놀라운 명성 덕분에 사랑에서 쉽게 승리하는 데 익숙해진 그들의 대립은 군사적 명성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모든 형태를 띠었다.
리마 여인이 부채 뒤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를 빛내던 연단에서는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그곳에서 군대의 규율을 상징하는 청동 같은 목소리가 여러 번 울려 퍼져야 했다. 살롱에서 오가던 빠른 풍자의 말들이 거리에서 칼날의 번쩍임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벼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의 대립이었다. 독립 전쟁의 장교들은 모두 그랬다. 골수까지 귀족적이면서도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대의를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받아들였다. 전투에 들떠 있었고 30년 전쟁 때 발렌슈타인 장군 휘하의 장교처럼 맹목적인 고집으로 지휘관의 깃발을 따랐다. 오랜 조국과의 이별, 끈질긴 투쟁의 지속, 잦은 점령과 해방으로 조국이 전장과 야영지로 축소되는 상황, 마지막으로 장기화된 군 생활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장교들은 생각과 행동이 가벼운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화려하게 살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갔고, 용기로 값을 치른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자금이 고갈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결국 한 사람이 물러났다. 가장 애국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을까? 과야킬 회담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갔다. 일부 역사가들은 독립 운동의 모든 것을 비극적 톤으로 해석하려 들면서 이를 신비한 베일로 덮고 위대한 역사적 문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에콰도르 북쪽에서 산 마르틴의 행동은 단지 경쟁자의 천재성과 권리에 대한 존경스러운 인정일 뿐이었다. 남쪽에서는 위대한 심장의 최고의 자기희생, 미국의 대의를 위해 자신을 관대하게 희생한 애국심의 영감으로 여겨졌다. 내 눈에는 (이렇게 위대하고 권위 있는 목소리들 이후에 이런 말을 하기엔 매우 대담하다고 생각하지만) 산 마르틴 장군의 은퇴에 개인적 희생은 없었다. 모든 것은 도덕적 구조의 문제다. 볼리바르가 은퇴해 개인 생활을 하거나 산 마르틴이 피와 불로 페루에서 우위를 지키는 것은 논리에서 벗어난, 그들의 성격에 반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드라마에서 맡은 서로 다른 역할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볼리바르를… 볼리바르가 아르헨티나 땅에서 태어나 라우타로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거기서 알베아르는 자신의 스승을 만났을 것이다.) 산 로렌소에서 승리하고, 북부 군대의 임시 사령관이 되고, 마침내 안데스 군대의 조직자가 되었다고 말이다. 론도 정부 하의 국내 상황에서 그의 태도는 어땠을까? 산 마르틴처럼 명령을 거부하고 산을 넘어 새로운 조국의 고뇌와 무정부 상태에 등을 돌린 채 페루를 해방시키러 갔을까? 페루에서 승리한 후 북쪽에서 오는 산 마르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배를 타고 떠나 조국의 해안 앞에서 내전으로 황폐해진 땅을 밟기를 거부한 채 명상에 잠긴 평범한 시민의 삶으로 빛나는 경력을 마무리했을까? 그리고 거기 브뤼셀 변두리의 작은 집에서 1830년, 한 민족이 문을 두드리며 스페인인만큼 증오받는 압제자에 대항하는 반란의 선봉에 서달라고 요청했을 때… 볼리바르가 산 마르틴의 건조한 논리로 벨기에인들에게 대답했을까? 내 판단으로는 아메리카 역사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추측에 빠져들지만, 이 두 사람의 성격 연구를 통해 동일한 환경에서도 그들의 행동이 달랐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볼리바르는 군사적 영광 이상의 것을 열망했다. 그것이 산 마르틴에게는 전부였다. (두 해방자의 애국심이 아닌 야망을 말하는 것이다.) 볼리바르는 더 높고 멀리 보았지만, 산 마르틴은 더 똑바로 보았다. 한 사람은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고, 다른 사람은 승리하기 위해 태어났다. 볼리바르는 게르마니아 깊숙한 곳이나 히스파니아의 산악에서 군단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로마 장군들의 기질을 가졌다. 산 마르틴은 공화국 시대의 장군이었다. 승리 후에 기꺼이 땅을 갈았을 것이다. 볼리바르에게 임무는 전투 후에 시작되었다. 산 마르틴에게는 끝났다. 1826년 볼리바르는 여전히 브라질에 대항하는 아메리카 연합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 제안했다… 최고 사령관직을 준다면 말이다. 산 마르틴은 불로뉴에서 조용히 지냈다.
한 사람은 기질적으로, 지적 활력으로, 피의 격렬한 흐름으로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은 냉정하고 침착하며 이성의 압도적이고 냉철한 힘으로 평온했다. 첫 번째 사람은 지도자, 연설가, 때로는 동네 우두머리, 때로는 고급 외교관이었다. 두 번째 사람은 군인이었다. 군인, 의무의 종교를 가진 자. 첫 번째 사람은 현대적이고 정확한 개념에 따른 규율 하의 군인이었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분명 도덕적 기질, 목적, 야망, 인생의 이상에서 군인이었다. 그의 인생은 대포알의 궤적처럼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런 사람이 승리 후 페루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독립은 이미 사실이었고, 그 최종적 확립은 후닌, 아야쿠초에서 며칠 문제였다. 그 다음은? 페루의 독재자가 되고, 자만심에서 볼리비아라는 부조리를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사실상의 독재자가 되어 음모가 다가오는 어느 날 밤 창문으로 뛰어내려 연인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비참한 다리 밑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창백한 얼굴과 더러워진 옷을 한 채 나오는 것? … 아니, 산 마르틴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임무는 끝났다.
게다가 그를 깊은 환멸감이 사로잡았을까, 목표에 도달한 이들의 깊은 환멸감이?
그리고 거기서, 영혼이 차갑게 식은 채, 시편 작가의 슬픈 신음을 되풀이하는가? 아마도…
그러나 실상은 그가 이미 끝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조국으로 돌아가 벨그라노의 헛된 희생에 빠져들어 투쿠만의 승리자처럼 자신의 월계관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자신을 이기는 보잘것없는 가우초들과 싸우거나… 아니면 군사 평의회에서 몰데스나 도레고 같은 오만하고 성급하며 회의적인 자들, 작은 볼리바르들, 권력에 오르려고 소란을 피우며 무자비한 자들에게 조롱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겠는가? 그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고 다시 말하겠다. 다행히도 그의 영광을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내 생각에, 산 마르틴이 카야오에서 과야킬행 배에 오르고 볼리바르 옆 소파에 앉아 그의 큰 키로 볼리바르를 압도했을 때,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던 것 같다. 신비도, 가슴 아픈 희생도 없었다. 그들은 주제에 대해 15분, 자신들에 대해 한 시간 정도 이야기했고…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생리학자라면 산 마르틴의 은퇴를 예견했을 것이다. 마치 천문학자가 어떤 혜성의 귀환을 예측하듯이 말이다. 둘 다 자연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하늘에서나 인간의 소우주에서나 그 법칙은 변함이 없다…
산 마르틴이 떠난 후, 콜롬비아인들과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심해졌다. 서로에 대한 오만함은 아레키토의 슬픈 사건을 낳았지만, 이는 후에 후닌과 아야쿠초 전장에서 그라나다인들과 라플라타 사람들의 영웅적 행동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귀국의 시간이 왔을 때, 대부분 어두운 내전에서 죽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갔고, 이투사인고에서 영광스러운 무덤을 찾은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전투에서 늘 빛나던 그 남자다운 손들이 어떻게 뻗어 꼭 잡았는지, 그 눈에 어떻게 눈물이 고였는지!
영광의 가파른 길을 오르며 그들은 동시에 정상에 도달했고, 거기서 험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히메네스 데 케사다와 벨알카사르가 긴 고난의 시간을 거쳐 한 명은 북쪽에서, 다른 한 명은 남쪽에서 와 보고타 평원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말이다… 후에 콜롬비아인들은 자식들에게 독립 전쟁의 힘든 싸움을 이야기했다. 네코체아, 아르헨티나의 뮈라가 스페인 벽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아르헨티나인들, 독재 시대의 길고 슬픈 저녁 시간을 견뎌낸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과거의 영웅담을 들려주었다. 코르도바가 전설적인 영웅처럼 “승리자의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때를. 그리고 아메리카에 자유를 주고 전장에서 피를 섞었던 두 나라는 다음 세대에 그 애정의 유산, 콜롬비아가 아르헨티나에 대해, 아르헨티나가 콜롬비아에 대해 가진 호의적인 존경의 유산을 남겼다.
우리는 역사의 길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다. 우리 자신과 씨름하느라 너무 바빴다. 마치 조국의 땅을 우리 핏줄의 즙으로 비옥하게 하려는 듯 탈진할 때까지 서로의 피를 흘리며 말이다. 세월이 흘렀고, 어느 날, 나에게는 행운의 날이었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과거를 잊지 않았으며 더 이상 전투가 아닌 평화와 진보 속에서 함께 나아가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고 콜롬비아에 전하러 가게 되었다. 그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운명이 우리를 그런 순간에 외국에서 조국을 대표하도록 부를 때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숙하고 깊은 감동을 잊지 못할 것이다.
떠나야 할 시간이다. 마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사바나 끝까지 나를 배웅해 줄 좋은 친구들이 준비를 마쳤다. 마차가 좁은 거리를 달린다. 우리는 산 빅또리노 광장을 지나고, 도시의 마지막 집들에서 나는 작별의 눈길을 보낸다. 나는 항상 어딘가를 떠날 때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보고타는!
우리가 만사노스에 도착하는 데 걸린 5시간은 나에게 슬픔의 시간이었다. 로베르또 수아레스, 까를로스 사엔스, 훌리오 마야리노의 활기차고 재치 있는 대화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이 나를 배웅해 주었다. 우리가 밤을 보내야 할 여관에 도착하자 우리는 라블레가 말하는 ‘코 밑의 복원’에 관심을 가졌다. 마야리노는 만사노스에 와인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보고타에서 와인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식탁에 앉자 우리는 꾸에르보의 맥주(나는 그를 언어학자로, 학자로, 모든 면에서 존경하지만 맥주 제조업자로는 존경하지 않는다)와… 샴페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친구들아, 그게 무슨 샴페인인지! 수아레스는 그것이 마야리노 집안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야리노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콜롬비아에는 그런 게 없다는 걸 잊은 듯했다. 결국 우리는 파라오의 소처럼 여윈 침대에 누웠는데, 곧 마른 벌레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조용히 내 노새에 안장을 얹었다. 온다에서 사업을 하는 호감 가고 존경할 만한 신사인 내 여행 동반자도 같은 일을 했다. 출발하기 전, 나는 친구들의 방에 들어가 작별 인사를 하려 했다. 그들은 자고 있었고 나는 그들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내려가보니 사엔스가 있어서 그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는 내 사마로를 정리해 주고 그가 선물한 반 야드짜리 오레곤 박차를 달아주었다. 나는 루아나를 잘 둘러싸고, 마지막으로 그 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하늘만이 아는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우리는 출발했다. 아침 6시 30분이었다.
우리가 탄 짐승들이 삐끼요의 것이라고 하면 그 우수한 품질을 말한 것이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앙드레 씨가 ‘세계일주’에서 온다에서 노새를 빌려준 사람을 온 세상의 저주를 받게 했듯이, 나 또한 인도주의적 충동과 정의를 실천하는 마음에서 그쪽 세상으로 떠나는 모든 이에게 삐끼요의 노새를 이용하라고 권한다. 용감한 작은 노새들은 가파른 비탈길을 작지만 지칠 줄 모르는 발걸음으로 올라가며 우리의 여행을 즐겁게 만들었다. 아침 첫 시간에 산을 오르는 것,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좋은 말을 타고, 천천히 변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 있는 것, 이는 내가 아는 가장 즐거운 감각 중 하나다.
로블레스 고개에 도착해서 우리는 잠시 멈췄고, 나는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사바나를 오래도록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아침 구름 사이로 보이는 몬세라트, 그 발치에서 보고타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우리는 사바나에서 더운 지방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저기 아구아 라르가가 있다. 지나가며 한 번 쳐다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길 양쪽으로 산비탈을 덮은 무성한 초목 사이로, 그리고 우리가 지그재그로 내려가는 깊은 계곡 아래로, 열대 지방 특유의 교향곡이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귀는 고지대에서 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귀뚜라미, 매미, 더운 땅의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서 태양을 향해 노래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부족들의 이름을 나는 모른다! 외투가 무거워지고 – 내게 주의를 준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 귀가 살짝 윙윙거리기 시작했다. 급격한 온도 변화의 영향인 것 같지만 곧 지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인 폼보의 형제가 우리와 합류했다. 보고타의 서점 주인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인 그는 길가의 풀들을 오래된 지인처럼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침베로 가는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우리를 따라오기 힘들어했다. 우리의 작은 노새들이 길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른 걸음으로 내려가고 올라가며, 나를 놀라게 하는 속도로 계속 전진했다. 우리는 그들을 아끼지 않았다. 올 때보다 더 신중해져서 나와 동행자는 비예따에 교체용 짐승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화로를 빨리 지나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웠다.
저기 침베가 보인다. 우리에게 유명한 아침 식사를 제공했던 곳이다. 저기 내가 지친 노새 고삐를 잡고 누워 있을 때 황갈색 말을 탄 인디오의 모습으로 나타난 섭리의 나무가 있다. 그리고 저 아래 영원한 움푹 파인 곳에 비예따가 있다. 떠날 때는 달콤했지. 폼보가 우리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 우리는 시계를 본다. 겨우 11시다. 우리는 우편물보다 더 빨리 이동했다. 우리는 동행자가 아는 작은 마을에 잠시 멈춰 비예따에 들르지 않고도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협상한다. 그 식욕이란! 맛있는 감자 수프와 딱딱한 소금에 절인 고기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누가 우리에게 나중에 뉴욕이나 파리에서 그런 식욕으로 델모니코나 비뇽, 또는 유명한 요리사들의 음식을 대접했더라면!
B… 아니면 S… 부인의 집이었던 것 같다! 다시 길을 나섰다. 빌레따에 도착하기 직전, 우리는 피키요의 집이었을 것 같은 곳에서 멈췄다. 거기서 말을 갈아탔다… 우리의 질주 같은 여정을 따라오려 했던 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잊고 있었다. 우리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은 하인답게 말을 타고 있었다. 내 하인은 금발에 외눈이 멀었고, 사바나 출신임을 그의 외모가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일종의 간판 같았다. 나중에 나는 그에게서 그의 운명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나를 잃어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내 하인은 키가 작고 야윈 노새를 타고 있었다. 그 노새는 성질 나쁘고 비열했다. 그리고 사바나 출신 하인은 박차도 차지 않았다! 그가 끊임없이 발꿈치로 노새를 차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내가 올 때 겪었던 고난을 떠올리게 했고, 나 자신이 헬무트처럼 구아나코 판초를 입고 말 타기를 거부하며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는 하인들을 뒤에 두고 가기로 했다. 빌레따를 폭풍처럼 지나쳤다. 나는 산악 지형에 익숙한 훌륭한 말을 받았고, 동료는 잘 고른 노새를 타고 있었다. 평평한 길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말이 숨이 차거나 내리막길에서 목이 부러질 것 같은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을 달렸다.
빌레따의 깊은 계곡에서 빠져나와 그 주변의 산을 넘기 위한 그 오르막길이란! 날개 없이는 불가능해 보였다. 길은 최악이었다.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의 멘도사에서 우스팔라타로 가는 우리 길과 비슷했다. 하지만 대신에 울창한 식물들이 시야를 즐겁게 했고, 꽃과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풍경을 생기있게 만들었다. 동물들의 걸음걸이가 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5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때 동료가 재빨리 다가와 경고의 목소리를 내며 조금 전까지 맑고 눈부신 반사판 같았던 하늘을 뒤덮는 짙은 구름을 가리켰다. 우리는 등 뒤에 말린 채 가지고 다니던 거대한 고무 망토를 펼쳐 둘러쓸 시간밖에 없었다. 후드를 쓰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원시 세계를 휩쓸었던 무시무시한 대홍수를 연상케 하는 열대 지방의 폭우였다.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말들은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우리는 말없이 말의 목덜미에 엎드려 있었다. 비에 얼굴이 때려지듯 젖었고, 나무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귀가 멍했다. 빗방울이 아니라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줄기였다. 길가의 돌들은 씻겨 반들반들해져 미끄러웠고 말들은 무한한 조심성을 가지고 걸었다. 폭우는 15분간 지속되었다. 갑자기 태양이 다시 빛났고, 나무들은 머리카락에 매달린 마지막 진주를 떨어뜨렸다. 하늘은 더욱 짙은 푸른색을 띠었고, 벌레들의 합창이 영원한 교향곡을 다 카포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 15분, 우리는 과두아스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직도 계곡의 가장 고귀한 딸인 뽈라의 동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올 때 이틀이나 걸렸던 길을 반나절 만에 왔다. 사실 우리는 ‘차스끼’처럼 달려왔고, 만사노스에서 출발한 시간을 알려준 사람들은 우리 말을 믿지 않았다. 동료는 사바나에서 온다까지 하루 만에 가는 위업을 이루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여행은 전설이 될 터였다. 나는 순전히 경솔함에서 수락했다. 사실 하루 늦게 마그달레나에 도착해 즉시 증기선을 타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러면 보데가스 데 보고타에서의 밤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밤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한 줄로 걸어가는 수많은 행렬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내가 이미 언급한 꾸에르보 씨들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증기선을 타러 가고 있었다. 과두아스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게다가 발레 호텔, 길에 있는 모든 호텔 중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문 앞에서 유럽으로 가는 땅꼬 아가씨들을 보았다. 좋은 친구들과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다는 전망에, 나는 그날 온다에 도착하려는 쓸데없고 돈키호테 같은 목표를 포기했다. 가족과 재회하러 가던 내 동료는 고집을 부리며 여행을 계속했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는 마그달레나 강 근처의 오두막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어둠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날이 저물고 밤이 왔다. 하지만 내 중요한 가방을 가지고 있던 금발의 외눈박이 하인, 내 사바나 출신 하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모두가 일어나 휴식을 취한 밤 이후 말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저주받은 외눈박이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노와 함께 확인했다. 되돌아가는 것은 소용없다고 판단해 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길에서 그가 나보다 앞서 갔는지 물어보고, 온다에 도착하면 전보를 보내기로 했다.
우리가 험한 절벽을 따라 가는 동안, 나는 모든 편안함에 익숙한 저 세 명의 연약한 생명체들이 내 옆에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결단력과 의지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참을 수 없는 노새의 움직임을 견디고 있었다. 땅꼬 씨는 미소 지으며 젊은 시절에는 해안으로 나가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다고 말했다. 우리가 온다에서 타게 될 증기선 대신, 그 당시에는 높이가 반 바라밖에 되지 않는 짬빠네의 짚 지붕 밑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했다.
수평 자세를 허용했다. 반나체의 거친 흑인 뱃사공들이 그 위를 달렸다. 그들의 풍습은 야만적이었다… 특히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이런 생활이 몇 달씩 계속되었다!
15분마다 길가의 오두막에 들러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금발 청년이 황갈색 노새를 타고 지나가는 걸 보셨나요?” 한 번은 친절한 여인이 전날 오후에 한쪽 눈이 먼 목동이 지친 노새를 타고 지나갔다고 대답했다. 틀림없이 내가 찾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내 모든 돈과 서류가 들어 있는 가방을 하인이 가져가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어) 혼자 앞서 가기로 했다. 말에 박차를 가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작열했고, 마그달레나 계곡에 가까워지자 더위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우수한 말이었음에도 지치기 시작해 나무 그늘 아래서 15분간 쉬었다. 거기서 콜롬비아 시골의 장례 행렬을 보았는데, 그 광경은 아직도 내게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신은 덮개도 없이 얼굴을 햇볕에 드러낸 채 널빤지 위에 놓여 네 명의 원주민이 어깨에 메고 가고 있었다. 보고타에서 이미 어린아이들의 장례를 같은 상태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광경은 음울하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 기분 좋은 그늘 아래서 쉬는 김에 아르헨티나 안데스에서의 추억 하나를 들려주겠다. 유명한 돈 살바도르 우체부의 이야기다. 좀 길더라도 산속에서 천천히 가다 보면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하다.
안데스 산맥을 여행하고 있었다. 문명의 흔적과 3일째 떨어져 있었고, 나의 노새를 타고 있었다. 노새는 발걸음이 고르고 확실했으며,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피로를 모르는 듯했다. 아르헨티나 안데스의 협곡 사이를 전진했다. 때로는 바람이 거세게 부는 고개 정상을 오르고, 때로는 눈 녹은 물로 홍수가 나기를 기다리는 메마른 강바닥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길은 하나뿐이었고 틀릴 리 없었다. 호기심에 자주 나침반을 확인했지만, 길의 방향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노새는 때로는 북쪽으로, 때로는 남쪽으로 갔고, 목적지인 서쪽으로는 거의 가지 않았다. 우리는 우회하며 전진했다. 캠프를 떠날 때 날이 밝기도 전에 나의 노새가 항상 먼저 준비가 되어 앞장섰고, 안내인과 짐꾼이 짐을 꾸리는 동안 나는 혼자 앞서 갔다. 그렇게 하루의 절반을 혼자 걸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때로는 놀라운 광경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태양 아래 금속판처럼 빛나는 날씬하고 벌거숭이 언덕, 산의 심장을 단검으로 찌른 듯한 좁고 어두운 협곡, 우아함도 위엄도 없이 엄청난 높이에서 단숨에 떨어지는 폭포의 거친 모습, 나의 발 아래 100미터 깊이로 과거의 급류에 의해 괴롭힘 받은 듯한 기괴한 강둑 사이로 조용히 자유롭게 흐르는 강, 또는 식물도 관목도 메아리도 없는 차갑고 죽은 계곡. 더위가 견딜 수 없을 때면 우리를 위협하듯 돌출된 바위 그늘에 멈춰 서서 짐꾼들을 기다렸다. 한 시간 후 멀리서 짐 노새의 방울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방금 넘어온 이웃 봉우리 정상에 나타났다. 거기서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체념한 듯이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점심이 준비되었다. 말린 고기와 찬 음식, 멘도사의 좋은 포도주가 나왔고, 마테차가 디저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 지나면 오후 행군을 시작했다. 안내인들은 말이 없었다. 가끔 어떤 노새가 늙어간다거나 짐꾼 노새의 안장을 고치는 상담 정도였다. 때때로 구슬픈 단조로운 노래, 슬픈 비달리타가 들렸지만 대개는 완전한 침묵이 흘렀다.
어느 날 오후, 해가 산봉우리 뒤로 막 사라질 때였다. 비록 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깊은 계곡으로 그림자가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때까지 칠레에서 오는 단 한 명의 여행자도 만나지 못했기에,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언덕 꼭대기에 갑옷을 입은 듯 반짝이는 사람이 빛나는 말을 타고 나타났을 때 무척 기뻤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그 순간 높은 곳에서 쉬며 그를 비추는 태양 빛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나의 눈에는 생생한 환상으로 보였다. 가능한 한 말의 속도를 높여 예상치 못한 계약 위반에 놀라면서도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식을 줄 여행자와 하루빨리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산은 멀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내려오고 있었다. 발을 단단히 디디며 길의 견고함을 확인하는 신중한 노새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내려왔다. 산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태우고 가는 노새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노새의 노력과 경계심이 인간의 허영심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기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노새가 셰익스피어의 선원처럼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날의 여정 끝에 도착했고 안내인이 밤을 보내기로 정한 장소에 이르렀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하루 일정을 합의했었다.
나는 벌레가 들끓는 추악한 오두막을 피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오두막은 안데스 산맥에서 여관으로 불리곤 했다. 어쨌든 길은 하나뿐이었기에 내 칠레 사람은 반드시 이 길을 지나야 했다. 먼저 내 안내인들이 도착해 짐승들의 짐을 내리고 안전하게 묶어두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다 먹어치운 식료품 상자의 널빤지로 좋은 모닥불을 피웠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려 했다. 나는 일꾼들과 좀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겸손함을 이기지 못해 내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저녁을 먹지 못했다. 그때 모퉁이를 돌아 불타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짐꾼들이 즉시 일어나 새로 온 사람을 돈 살바도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를 맞이했다. 별다른 인사는 없었다. 그들은 가우초 방식으로 간단히 악수를 했다. 손을 거의 누르지 않고 순간적인 접촉만으로 만족했다. 돈 살바도르의 눈빛을 보니 안내인이 나를 소개하고 자신이 내 주요 동행자가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막 말에서 내린 돈 살바도르를 관찰했다. 그는 여전히 말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노새 고삐를 손에 쥐고 있었다. 노새는 작고 강했으며 거의 검은색이었다. 산봉우리에서 잠시 빛났던 후 이제 평범한 종으로 돌아온 듯했다. 돈 살바도르는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수염은 모두 희었고 50세쯤으로 보였다. 이는 그의 나이를 10년에서 15년 정도 적게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의 눈은 크고 맑았다. 그의 복장은 안데스 산맥의 짐꾼들이 일반적으로 입는 것이었다. 튼튼한 판초, 장화, 목에 두른 스카프, 얼굴 일부를 가리는 또 다른 스카프, 그 위에 밀짚모자를 썼다.
그는 내게 다가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가 아는 모든 소식을 전해주었고, 자신은 멘도사와 산타 로사 데 로스 안데스를 오가는 배달부라고 말했다. 안데스 산맥의 혹독한 겨울마다 그들의 대열을 흩뜨리는 용감한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급여는 형편없었고, 지금까지 단 한 번의 부정직한 행동으로 고발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보통 가방에 중요한 가치물을 가지고 다녔다. 안데스 산맥이 눈으로 막혀있는 긴 겨울 동안, 그들은 걸어서 여행을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15일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지친 목소리로, 말도 못하고, 너덜너덜해지고 벌거벗은 채로. 그들은 끈질긴 인내로 길을 뚫는다. 인간의 가장 높은 자질인 자연에 대항하는 고독한 용기를 발휘하며, 눈사태를 피하고, 바위 뒤에 숨어 으르렁거리며 떨어지는 눈사태를 피한다. 때로는 눈 속에서 밤을 보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창백한 산봉우리에 묻히고, 첫 해빙이 오면 동료들이 경건하게 그들의 유해를 묻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슬픈 여정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돈 살바도르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 있어 얼음 속에서 끔찍한 밤을 보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와 함께 저녁을 먹고 밤을 보내자고 초대했다. 그의 여정도 끝났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우리는 헤어질 것이고 나는 그에게 내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를 줄 것이었다. 그는 기꺼이 수락했다. 그는 노새의 안장을 풀고 우리 짐승들과 함께 묶어두었다. 그는 안전한 곳에 가방을 두고 그 옆에 침대를 폈다. 그리고 모닥불 옆으로 와서 돌 위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는 주의 깊게 불을 지켜보았다.
한편, 내 야영용 침대도 준비되었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늘 하던 대로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좋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문명의 섬세함이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안데스 산맥이나 모든 야생 장소에서 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정신적 세계를 떠돌았다. 그것은 나를 덮고 있는 하늘보다 더 큰 세계였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을 기억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평온의 기적이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엄숙한 침묵은 때때로 멀리서 들려오는 산의 신비로운 소리로만 깨졌다. 부드러운 메아리가 그 소리를 희미한 탄식으로 바꾸어놓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물줄기가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로 흐르고 있었다. 별들은 엄청나게 밝았고, 눈은 그들의 빠르고 순간적인 반짝임에 도취되어 멈추었다. 기억들이 떠올랐고 잠은 멀어져갔다…
안내인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잠이 안 오십니까, 선생님?” “아니, 하지만 아쉽지 않아. 밤이 무척 아름답군.” “돈 살바도르에게 이야기를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는 반 세계를 알고 있는 노인이에요. 리쿠르고보다 더 많이 알고 있죠. 칠레, 볼리비아, 페루를 다녀봤고 지금 군대들이 싸우고 있을 지역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어요.”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큰 소리로 말했다. “돈 살바도르, 잠이 많이 오시지 않으면 이쪽으로 좀 와주시겠어요? 마테차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 나눕시다.” 돈 살바도르는 즉시 일어나 앉아 있던 돌을 내 쪽으로 굴려와 다시 앉았다.
“돈 살바도르, 3일 동안 산속에서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혼자 걸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항상 뒤처지더군요.”
“우리는 그런 일에 익숙하죠. 하지만 저도 오래전에 긴 여행을 하면서 혼자 걷는 게 너무 지루해서 동료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때 일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도둑이었나요?”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어떤 일이었는지 말씀드리죠.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세요. 물론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맹세코 사실입니다. 믿기 어려우시다면 페루에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당신이 페루에 간다고 하던데요.”
그때 돈 살바도르가 내게 기이한 모험을 들려주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내 평범하고 단순한 문체로 글을 썼다. 화자가 이야기를 장식했던 특별하고 화려한 언어를 모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돈 살바도르는 산후안 출신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품팔이로 일하며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노새를 끌고 다니며 거의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그는 살타에 도착해 늙고 유명한 짐꾼의 일을 돕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년간 머물렀고,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며 페루로 갔다. 그는 작은 재산을 모았지만 곧 도박으로 날려버렸다. 일터로 돌아가야 했을 때, 그는 차스끼 또는 전령이 되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말타기 실력, 더 정확히 말하면 노새 타기 실력이 그 일에 적합했다. 하지만 그 일은 인디언이 짐승보다 더 빨리 달리고 짐승이 감히 가지 못하는 곳도 갈 수 있는 땅에서는 확실히 수지맞는 일이 아니었다. 내 목적은 돈 살바도르의 삶의 우여곡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페루 내륙에서 해안으로 갔는지, 나중에 어떻게 꼬삐아뽀에서 광부가 되었는지, 다시 아르헨티나 공화국으로 돌아와 마침내 10년 동안 맡아온 명예로운 우편 배달부 직책을 맡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가 차스끼로 일할 때 그가 언급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꾸스꼬 주에 있었고 인차까떼라는 작은 마을에서 북쪽으로 후닌 경계 근처로 돌아오고 있었다. 길은 오래된 잉카의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대체로 고르지 않지만 어떤 종류의 어려움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덕을 오르고, 계곡으로 내려가고, 높은 산을 따라가는 좁고 이어진 길이다. 건너야 할 강과 급류가 거의 없다. 기후는 온화하고 자연은 그 오래된 종족의 선호하는 지역에서 풍요롭다.
어느 날 아침, 새벽이 밝아올 무렵, 돈 살바도르는 산타 아나와 친체 사이에서 밤을 보낸 후, 찬까마요 근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작은 마을을 왼쪽에 두고 떠났다. 그는 그 마을이 그에게 뽀르떼뇨들을 생각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분 좋게, 휴식을 취한 노새를 타고, 아구아르디엔테 한 잔으로 속을 달궈 다시 길을 나섰다. 돈 살바도르는 휘파람을 불고 비달리타를 노래했지만 지루했다. 돈 살바도르는 사교적인 사람이었고 수다 떠는 것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침 8시쯤, 그는 멀리 약 1리그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노새를 타고 언덕을 오르는 여행자를 발견한 것 같았다. 비록 그 낯선 이가 빠른 걸음으로 가고 꽤 앞서 있었지만, 돈 살바도르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목적으로 자신의 작은 노새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여행자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중에 다시 나타났는데, 이는 길의 불규칙함 때문이었고, 돈 살바도르는 눈에 띄게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는 그의 사람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정오에 멈춰 쉬었다. 오직 미친 사람만이 그 타는 듯한 태양 아래에서 계속 여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시경 그는 다시 길을 나섰고, 낯선 이가 휴식을 더 오래 취했거나 그의 노새가 지치기 시작했는지, 5시가 조금 지나 계곡으로 내려갈 때 그 여행자를 자신으로부터 약 2쿠아드라 앞에서 보았다. 돈 살바도르는 목소리를 높이고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외쳤다. “친구여, 멈추시오!” 그 친구는 계속해서 태연히 걸어갔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돈 살바도르는 소리 지르고 휘파람을 불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아무리 귀가 먹었다 해도 등 뒤에서 나는 소동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돈 살바도르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소리 지르는 것을 그만두고 거만한 여행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는 밤색 노새에 낡은 안장을 얹은 채 타고 있었고, 노새는 묵묵히 걸으며 머리를 거의 앞다리 사이에 넣고 있었다. 돈 살바도르는 그 기수를 뒤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그는 키가 매우 크고 꼿꼿한 사람이었다. 그는 짙은 파란색 판초를 두르고 있었는데, 판초는 몸 전체를 덮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다. 머리는 펠트 모자와 넓은 챙이 늘어진 모자를 쓴 데다 빨간 손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큰 부츠가 그의 차림을 완성했다.
돈 살바도르는 밤색 노새가 상당히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그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거의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치 자신을 숨기려는 사람처럼. 비록 돈 살바도르는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쓸데없이 목이 쉰 것에 화가 나서 그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하나님께서 좋은 저녁을 주시기를. 당신은 귀머거리였군요.” 여행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야 합니다.”라고 돈 살바도르가 덧붙였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문제를 일으킬지 아니면 조용히 여행을 계속할지 고민했다. 그가 말한 대로 ‘좋은 감각’이 이겼고, 그는 지나가면서 여행자에게 풍자적인 말을 던지며 노새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밤이 되자 그는 우이로라는 초라한 마을에 도착했고, 마을 입구에 있는 늙고 잘생긴 인디언이 운영하는 매우 가난한 여관에 머물렀다.
노새의 안장을 푼 후, 그는 문 앞에 인디언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 조용한 여행자가 약 1쿠아드라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저기 밤색 노새를 탄 돈 후안이 오고 있군요.”라고 늙은 인디언이 말했다.
“그 돈 후안이 누구요?”라고 돈 살바도르가 호기심과 조소가 섞인 어조로 물었다.
“돈 후안 아마치, 제 대부님이세요. 뽀우까르땀보의 늙은 인디언이시죠. 저기에 집이 있어요.”
“그의 가족은 북쪽으로 갈 때마다 항상 그의 집에서 묵는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훌륭하고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죠.”
돈 살바도르는 콧수염을 씹으며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돈 후안이 그때 도착했기 때문이다. 지친 노새가 문 앞에 멈추자 인디오 주인이 그를 맞으러 나갔다.
여행자 옆으로 다가가 말을 걸고 그를 만진 후 돌아서서 돈 살바도르에게 담담히 말했다.
“불쌍한 돈 후안, 죽어서 오셨네요!”
나중에 페루에서 돈 살바도르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륙 도로에서 시체를 싣고 가는 노새들을 볼 수 있었다. 길은 하나뿐이고 노새는 제 맘대로 가고 다른 운송 수단도 없었다. 잉카 제국 시대에 봉건 농노처럼 같은 땅에서 살다 죽던 인디오들은 전통에 따라 죽으면 충실한 노새에 몸을 맡겨 고향으로 돌아가 안식을 취하게 했다.
돈 살바도르는 다시 노새에 안장을 얹고 지체 없이 출발했다. 그 이후로 그는 결코 앞서가는 여행자들을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는다.
꼰수엘로와 보데가스 사이의 여정은 올라갈 때만큼이나 힘겨웠다. 열기가 숨 막힐 듯했고, 태양은 너무나 강렬하게 빛났다. 3일 동안 노새에 묶여 행군하던 불쌍한 장교 포로가 절망의 순간에 태양을 보며 한 말이 떠올랐다. “저걸 닦는 것 같아!” 분명 하늘의 등불을 관리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려갈수록 그 힘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열기를 겪어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다. 바위는 불타는 듯했고, 붉은 땅은 공기를 달구어 얼굴을 태우고 눈을 자극하며 뇌를 어지럽혔다. 절망적인 갈증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았다. 마그달레나 강이 발 아래 손에 닿을 듯 보였지만, 길은 끝없이 꼬여 멀어져 갔다.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빠른 속도와 숨 막히는 공기에 지쳐버렸다. 마침내 오후 3시, 녹초가 되어 보데가스의 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쓰러지듯 내려와 짐승의 운명은 내버려두고 물을 달라고 했다. 더 많은 물을 달라고 했다. 여주인은 빠넬라를 마시게 했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있게 느껴졌다.
내 앞에는 얼굴이 양귀비꽃처럼 붉은, 눈을 치켜뜬 영국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영국 대사 가족의 유모나 하인 같았다. 그녀는 즉시 나와 대화를 시작했고, 비록 나는 그 순간 짜증나고 화가 나서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보고타에서 보데가스까지 혼자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행한 짐꾼들이 신뢰보다는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길에 있는 모든 술집에서 치차나 과라포를 마시라고 돈을 주어 그들을 보냈고, 결국 그들은 길에 쓰러져 버렸다고 했다.
조금 휴식을 취한 후 강가로 가서 어떤 증기선이 있는지 보았다. 내 첫 번째 만남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내 외눈박이 사바네로가 우울하게 돌 위에 앉아 내 가방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른 자갈로 강에서 오리새끼를 만들고 있었다.
오, 거룩한 인내심이여! 그대는 인생의 험난한 길을 오르게 하고, 장애물을 제거하며, 성공을 가까이 하고, 투쟁을 지탱하며, 승리를 결실 맺게 하고, 낙담 시 위로하며… 그리고 큰 강가에서 오리새끼를 만드는 외눈박이 사바네로들의 목숨을 구한다!
그 불쌍한 자가 한밤중에 노새를 거의 들쳐 메다시피 하고 어떻게 보데가스에 도착했는지 들어보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 부주의로 열린 가방을 보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는 내게 10페소를 더 달라고 했다…
한 장의 종이도, 한 푼도 빠진 게 없다는 사실이 나를 온화하게 만들었다.
오후가 돼서야 탄코 가족과 꾸에르보 씨 가족이 도착했다. 젊은 여성들은 그 뜨거운 태양을 견딜 수 없어서 몇 시간 동안 나무 그늘 아래 피신해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깊은 절망감에 빠져 노새에서 내렸는지! 유럽에서의 즐거운 경험들이 이 고통의 시간들을 보상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달콤한 보금자리는 파리의 소음 속 바다 건너에 있는 게 아니라, 뒤편의 넓은 사바나, 몬세라트 산기슭에 있었다.
마그달레나 강의 증기선 중 가장 빠른 꼰피안사호가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그날 오후에 모두 배에 올랐다. 승객은 20명에서 30명 정도였고, 대부분 서로 아는 사람들이었다.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어서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마그달레나 강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꼰피안사호를 타고 강물이 많은 시기에 내려가면 4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반면에 내가 올 때는 15일이나 16일이 걸렸다. 빠른 속도로 인해 생기는 공기의 흐름이 화로 같은 기온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바랑끼야로 돌아가는 보가들은 기분이 좋아 더욱 활기차게 움직였고, 장작도 순식간에 실었다. 내려갈 때는 좌초될 경우 올라갈 때보다 더 위험하지만, 그때는 수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쁨의 절정은 강변에 정박해 있는 밤은 단 두 밤뿐이어서 모기들이 마지막 밤에만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강 끝에서는 더 이상 노새가 아니라 편안한 대서양 횡단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유럽이 있었다! 자, 이제 상황이 견딜 만해졌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배가 출발할 때 모두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오직 한 쌍의 눈만이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눈은 꼰피안사호에서 막 떨어져 나가는 작은 카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누에는 한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그의 마음도 눈물 어린 그 눈에 담긴 마음만큼이나 평온하지 않았다. 마지막 눈길을 주고받으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지키며, 반대편 반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생명의 위대한 분배자들과의 영원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오후의 달콤한 고요 속에서 육체가 굴복하고 영혼이 열망하며 따르는 그 강렬한 감각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환상의 정의할 수 없는 영역을 열어주어 꿈속에서 모든 위대함과 경이로운 운명의 개념 속에서 인격이 거대해지기 때문이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오후였다! 옆에 있는 거대한 숲은 바람이 부드럽게 스치는 거대한 에올리안 하프였다. 그 현을 치며 깊고 불확실한 선율을 만들어 내는데, 영혼의 귀에 조화로운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투쟁의 거친 음과 사랑의 죽어가는 선율이 있었다. 숲은 우리 옆으로 펼쳐졌고, 배에 탄 모든 이들, 조국을 뒤로 하고 떠나는 이부터 조국을 향해 가는 이, 숲속에서 신음하는 짐승처럼 최고의 무관심 속에 사는 뱃사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루의 쓰라린 근심이 잠잠해지고 천상의 추억들의 행렬이 지나가는 장엄한 시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빠져들었다!
우리가 배를 해안에 정박하고 보낸 첫 밤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모기들이 두려운 모습을 드러내는 마그달레나 지역에 도착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희미하게 대양의 냄새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선한 미풍이 강물 위로 불어와 그 표면을 스치며 달빛 아래 하얗게 반짝이는 강물과 장난을 치고 있었다. 부드러운 소리 없는 물살은 거대한 나무 기둥들을 떠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며 보이지 않는 물결에 흔들리다가 빛나는 띠를 빠르게 가로질러 강판 위를 지나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에 앞서 가는 방랑자들이었다. 우리는 갑판 위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낮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마치 우리가 자연과 사물들을 보는 영혼의 프리즘을 깨뜨릴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중 한 사람이 거의 속삭이듯이 그 순간 비할 데 없이 순수한 하늘 아래에서 떠오르는 달에 바치는 팔론의 멜로디를 낭송했다. 달콤한 시인의 시구들이 시의 매력에 대해 더 열린, 더 무방비한 마음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끝나자 한 마디의 논평도 없었고, 단지 음악적 화음의 수줍은 떨림만이 있었다. 곧 두 개의 섬세한 목소리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하게, 뒤에 남겨둔 조국에 대한 추억을 담은 밤부꼬를 불렀다. 그것은 또한 내 영혼에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떠돌이 음악의 음표를 가져왔다. 그리고 또 다른 노래, 열 개의 노래가 더 불렸고, 귀에 가장 친숙한 위대한 대가들의 멜로디와 마지막으로 기타의 슬픈 현을 어루만지는 예술가의 손길이 시적으로 방황하며… 그리고 밤은 깊어갔고, 숲의 침묵은 더욱 깊어졌으며, 별들은 창백해졌지만, 우리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디서, 어디서 인간의 예술의 정상에서조차, 이 쉼 없는 삶 속에서 자연이 그 베일을 그리스의 디아나처럼 발치에 떨어뜨리고 모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순간의 지고한 인상과 동등한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온다에서 바랑끼야까지 단 4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이틀 동안 열기가 매우 심해졌지만, 상승 때만큼은 아니었다. 빠른 진행 속도 자체가 바다와의 접촉으로 여전히 신선한 공기의 흐름을 활기차게 했기 때문이다.
해안에 도착했을 때, 내 침구, 베개, 모기장을 배의 소년들 중 한 명에게 후하게 선물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산행 여행복을 포장하게 한 같은 방수 천에, 나는 콜롬비아 안데스에서의 힘든 여정 동안 나와 함께했던 수아사, 루아나, 사마로를 경건하게 보관했다. 나는 보고타에서 임명되어 비엔나에 나를 보러 온 젊은 외교관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 콜롬비아 안데스에서 필수적인 이 장비들을 보여주었을 때 말이다. 그는 특히 사마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로르뇽을 고정시켰는데, 마치 방금 지하 무덤에서 나온 미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그것을 신어보았지만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말을 탔을 때 그것의 유용성을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네, 하지만 당신은 미국인이잖아요!”라고 그는 대답했는데, 아마도 속으로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 계획은 바랑끼야에서 마르께스 데 깜뽀의 스페인 증기선을 타고 아바나를 거쳐 뉴욕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쿠바에서 끔찍한 날들을 예고하는 계절의 진전과 빠나마 지협을 방문하고 싶은 욕구로 인해 계획을 포기했다. 게다가 오후에 도착해서 다음 날 아침 살가르에서 꼴론으로 가는 프랑스 대서양 횡단선 라 빌 드 파리가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나는 나중에 유럽에서 만날 동료들과 작별 인사를 했고, 바랑끼야의 훌륭한 아르헨티나 영사 꼰 씨와 함께 살가르로 향했다. 곧 살가르에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올랐는데, 마침 까르따헤나의 새 주교가 하선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시아 깊숙한 곳에서 온 고위 성직자에게 순례자로서 정중히 인사를 건넸고, 곧 그리 좋지 않은 이 배는 스페인 함선들이 태평양 연안이 스페인을 황폐화시키며 그 자녀들을 황금의 자석으로 끌어들이던 시절에 그토록 자주 횡단했던 경로를 따라 카리브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배에 탑승객이 적어 식사가 좋다는 변함없는 징조였다. 나는 프랑스 요리사들이 이유 있게 시각적 식욕 자극제라고 부르는 수많은 전채 요리들로 덮인 하얀 식탁보 앞에 앉았을 때 느낀 생생한 만족감을 숨길 수 없었다. 과야낄과 코스타리카로 가는 상인들, 외판원들, 무엇보다도 파나마 운하 공사 인부들이었다. 그들이 선상의 세계였다. 프랑스 여자 셋이나 넷이 7등급 부감독과 기술자들과 몰래 결혼하고 용감하게 운을 시험하러 지협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도 죽음만을 맞이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갔다. 나는 하루 종일 노래하고 밤에는 바카라에 열중하는 그 쾌활한 여자들을 보며 진심 어린 동정심을 느꼈다. 그들이 파나마의 지옥으로 가는 이유는 돈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그들의 애인들에게 돈이 있었다면 프랑스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운하 수석 기술자인 블랑셰 씨가 얼마 전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남자들에 대한 애정에 이끌려 갔다. 남자들은 때때로 그들을 거칠게 대했는데, 아마도 그것이 그 불쌍한 여자들이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오늘날 그들 중 많은 이가 운하 회사 묘지에서 영원한 잠에 들어 있겠지만, 25살에 열병으로 죽는 것과 40살에 병원 침대에서 죽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우리는 살가르에서 꼴론까지 36시간이 걸렸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늦어 다음 날 아침까지 하선을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다음날 10시가 조금 지나 나는 지협의 땅을, 더 정확히 말하면 지협의 진흙을 밟았다.
16세기 동방의 두 세계 무역이 집중되던 도시들이 어땠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 상하이의 하층 지역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혼란스럽고, 사방에서 모여든 인종들이 밀집해 있으며, 수많은 언어가 가장 저속한 표현들로 뒤섞여 있고, 동양의 악덕과 서양의 악덕이 서로 맞닥뜨려 그 유사성에 놀라며, 긴 항해의 감금 생활에서 벗어나 10일 만에 보상받으려는 사람들의 야만적인 삶, 그곳에 온 모든 방향의 남자들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천한 여자들… 이것이 내가 받은 꼴론의 인상이었다.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은 지도와 지리학 저서에서 이 곳을 아스핀월이라고 부른다. 마치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한 그 평범한 양키가 위대한 제노바 인의 이름을 가릴 수 있고 사후의 영광에 더 큰 권리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꼴론은 질서나 계획 없이 지어진 집들의 무질서한 덩어리다. 그 모습만 봐도 지리적 필요에 의해 그곳에 세워진 임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자체로는 어떤 미래도 없다. 기후는 유럽인에게 치명적이어서 꼴론에서 파나마까지 전 구간에 걸쳐 고여 있는 물에서 뜨거운 태양이 계속해서 발산시키는 말라리아성 열병을 피하기 어렵다. 이 마을은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 건설 중에 형성되었다. 양키들은 돈을 마구 뿌렸지만, 오늘날의 프랑스인들처럼 그들도 묘지를 채웠다. 첫눈에 주민들의 의도, 빠른 이익에 대한 욕망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 사람들은 모두 필요에 의해 그곳에 살고 있으며, 땅에 대한 애착 없이, 대부분 습관에 의해 붙들려 있다. 습관은 무디어지게 만들고 인간을 감옥에까지 묶어둘 수 있다.
꼴론과 파나마는 함부르크나 트리에스테처럼 자유항이다. 이곳을 통해 콜롬비아 서해안, 페루, 에콰도르, 칠레, 캘리포니아, 그리고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로 향하는 거대한 환적 무역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곳으로 칠레와 캘리포니아의 광물, 페루의 설탕, 구아노, 질산염, 에콰도르의 타구아, 부에나벤투라를 통해 수출되는 소량의 콜롬비아 상품들이 돌아온다. 지협의 양쪽에는 돛대 숲이 있다. 배들이 밀집해 있어 서로 부딪치고 있다. 세계 사방에서 온 그들의 선원들은 처음에는 적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배의 칼날이 자주 번쩍이고 결국에는 저급하고 더러운 집단 생활에 섞여든다.
혼자서 아무도 모르는 채 그 역병 같은 분위기 속에서 땅에 내렸을 때의 인상은 내 모든 여행 중 가장 불쾌한 것이었다. 10분 만에 배로 돌아가 다시 객실에 자리를 잡고 며칠 후 유럽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를 가까이에서 연구하고 보고해야 할 의무를 상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개의 거주 가능한 거리만 있었다. 두 걸음마다 미국식 술집이 있었고, 주석 카운터, 맥주 꼭지, 병, 각양각색의 유리잔, 짚으로 만든 빨대 다발, 그리고 양키들이 발명한 얼음 음료의 끝없는 목록이 있었다. 이 모든 집들은 취한 선원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무례하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여기 호텔이 하나 있다. 들어가서 잠시 후 질식할 것 같아 거리로 뛰쳐나왔다.
앞으로 나아가자 꼴론에서 가장 좋다는 곳이 나왔다. 아래층 전체를 차지하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셔츠 차림에 담배를 씹고 있는 선원들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 휘스키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얼굴이 천박해 보이는 혼혈아에게 방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 비열한 잠보는 입에서 담배를 빼지도 않고 파나마 사람임에도 영어로 대답했다. 위층에 주인이 있으니 그녀와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녀를 찾아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거의 벌거벗은 채 더러운 늙은 흑인 여자가 나를 불쌍히 여겨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이 어떤 방이었는지! 유일한 창문은 늪지대로 나 있었다.
역겨웠다. 문을 닫았다. 침대에는 차갑고 눅눅한 시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시트는 극도로 역겨웠다. 방에 들어온 지 5분 만에 견딜 수 없는 가려움과 불쾌감을 느꼈다… 자, 용기를 내자. 네가 원한 거야, 조르주 당댕! 더 나쁜 상황도 겪어봤고 하늘이 아시듯 앞으로도 더 나쁜 상황을 겪게 될 거야. 점심을 먹자. 예의상 메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제 어쩌지? 정오인데 뭘 해야 하지? 꼴론 주재 아르헨티나 영사인 세스페데스씨는 불행히도 병상에 누워 있다.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용기로 자신의 재산을 일궈내고 있다. 뭘 해야 하지? 도시를 구경할까? 20분이면 끝난다. 진흙과 목조 가옥뿐이다. 아무것도 없다. 책을 읽을까… 내 방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나는 이렇게 호텔 바의 테이블에 앉아 형식적으로 칵테일을 앞에 두고 6시간 동안 당구를 치는 선원들과 바에 온 손님들을 관찰했다. 그중 한 명인 미국 상선 선장은 1시경에 약간 취한 채 들어와 설탕을 태워 잔 가장자리에 바른 음료를 반 잔 마셨다. 4시간 동안 그 양키는 20분마다 규칙적으로 들어와 똑같은 양의 음료를 들이켰다. 참을 수 없는 더위와 내부에서 폭발 직전인 알코올 증기와 싸우면서, 양키의 눈은 충혈되어 튀어나올 듯했다… 오후 4시에 그는 만취해서 쓰러졌다. 두 명의 선원이 그를 구석으로 끌고 가 그대로 뉘어 두었다.
방 한쪽 구석에 1.5제곱미터 정도의 공간을 차지하고 젊은 스위스인이 유리 진열장과 시계공 작업대를 설치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있었다. 30분 동안 그는 천으로 시계 용수철을 문질렀다. 그러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고, 하루가 끝날 무렵 그를 관찰했을 때(단 한 명의 손님도 오지 않았다!) 그의 뺨으로 두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불쌍한 시계공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나 역시 너무나 신경질적이고 짜증나 있어서 결국 내 앞에 있는 불쌍한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여행을 해보지 않았거나 유럽의 대도시에서만 여행해본 사람들은 내가 처한 상황과 같은 심리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그 고통이 무기한 지속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매 순간 용기를 내기 위해 지갑을 확인하고(그곳에서만큼 지갑을 조심스럽게 다룬 적이 없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 증기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유 의지로 계획하고 결심해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되뇌어야 했다.
마침내 밤이 왔고, 그때를 회상하면 그 독특하고 특징적인 광경을 목격한 것에 대해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미 말했듯이 콜론은 거의 대부분이 한 개의 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거리를 따라 잦은 비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아케이드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잊었다. 첫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그 아케이드 아래를 거닐고 있었는데, 각 호텔과 바, 그리고 모든 문 앞에서 한 사람이 작은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 그 앞에 앉아 등불을 켜고, 은화 수십 개를 예술적인 반원 모양으로 정렬한 뒤, 커다란 주사위 컵을 요란하게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강가에 정박해 있던 배에서 7시가 되자 선원들과 장교들, 갑판장들이 구름처럼 쏟아져 나와 곧 거리를 가득 메우며 각 테이블 앞에 빽빽한 무리를 이루었다. 마치 숨결이 진흙을 불어 여자의 몸을 만든 것처럼, 순식간에 수백 명의 흑인 여자들과 물라토 여자들, 창백한 혼혈 여자들이 땅에서 솟아났다. 대부분 맨발이었고 만취 상태였으며, 더러웠다. 그들 역시 도박의 매력에 이끌려 테이블 주위로 몰려들었고, 잃을 때마다 이를 갈며 비틀거리는 선원들에게 달려가 미국인들이 ‘다임’이라고 부르는 25센트짜리 동전을 달라고 영어도, 프랑스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알 수 없는 언어로 애원했다.
술집들은 가득 찼다. 자메이카 흑인들의 거칠고 목쉰 목소리, 영국 선원들의 끊임없는 욕설, 몇몇 가디스 출신들의 상스러운 말투만 들렸다. 그들은 나와서 첫 번째 테이블에 동전을 던지고, 그다음 다른 테이블로, 돈이 떨어지면 이웃을 공격했고, 칼이 번쩍였다.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진흙 속으로 굴러떨어졌고, 취한 여자 두세 명이 순교자 얼굴을 한 이탈리아인이 광란의 캉캉을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숨 막히는 더위와 소음, 저주, 비웃음, 끊임없는 싸움, 손님들이 더 취할수록 더 빨리 움직이는 딜러와의 영원한 다툼… 그리고 나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이 모든 광경이 꿈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이 현대판 사바트 한가운데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아해하며 주머니를 만져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콜론이다. 모든 악덕과 인간의 타락을 위한 절대적인 자유와 허가증이다. 작은 세금만 내면 누구나 공공장소에 도박판을 벌일 수 있다. 그것도 어떤 도박판인가! 무지하기 짝이 없는 선원들을 상대로 가장 노골적인 착취와 스캔들한 강도 행위를 벌이는 것이다. 폭풍우 속에서 목숨을 걸고 1년간 일해 번 돈을 술에 취해 하룻밤 새 날려버리는 선원들 말이다. 그 여자들, 특히 그 여자들, 역겨운 마녀들, 까맣고 뾰족한, 주변에 그들의 타고난 냄새와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키는 파촐리 향을 흩뿌리는 자들! 푸아!…
내 방에 도착해서 숨이 막혀 침대가 역겹다는 생각에 옷도 벗지 못한 채 안락의자에 앉아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나는 10일간 이스트무스에 머물기로 결심했고, 그날 지정된 기간에 뉴욕으로 떠나는 시티 오브 파라 호의 승선권을 거의 예약해둔 상태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엄숙히 콜론을 떠나 파나마와 운하, 그리고 전 세계를 포기하고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첫 번째로 출항하는 배를 타겠다고 맹세했다.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새벽에 일어나 나는 바로 행동에 나섰고, 이틀 후 아틀라스 회사의 알렌 호가 뉴욕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즉시 티켓을 구입하고 짐을 배로 옮겼다. 운하 근처 역 중 한 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공사 진행 상황과 사업의 미래를 평가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나는 그 저주받은 물라토 소년에게 계산서를 지불했고, 작고 불편한 증기선에 올랐을 때 장엄하게 천국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제19장
파나마 운하.
코린토, 수에즈, 파나마 – 오래된 항로들 – 파나마의 지리적 중요성 – 운하의 경제적 결과 – 건설의 어려움 – 사망률 – 기후 – 유럽인, 중국인, 현지인들 – 기계적 힘 – 운하가 완성될 것인가? – 북미의 반대 – 블레인 씨 – 그가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 클레이턴-불워 조약 – 보증 문제 – 콜롬비아의 의견 – 먼로 독트린 – 현재 의미하는 바 – 유럽의 생각들 – 남미의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 보증의 효과 – 미주 공동 보증 – 우리의 이해관계 – 결론 – 파나마의 주요 무역 – 바나나 – 엄청난 수치 – 미래
지구의 지리적 지도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지질학적 형성 당시 자연의 변덕을 바로잡으려는 생각이 인간의 정신에서 싹텄다. 코린토, 수에즈, 파나마 지협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순차적으로 인류의 복지 증진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이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요소를 의인화하도록 이끄는 종교적 관념 때문에 알려진 세계의 모습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를 신성모독으로 여겼고, 에스킬로스는 크세르크세스의 재앙을 그가 헬레스폰트를 오만하게 대했기 때문에 일어난 신의 복수로 귀결시켰다. 로마인들은 항해에 능숙하지 않아 수에즈 지협에 주목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군단은 전 세계를 행진으로 횡단하는 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의 놀라운 상업적 발전으로 인해 새롭고 경제적인 해상 경로를 여는 꿈이 현실이 되었다. 동방으로 가는 오래된 육로는 바스코 다 가마가 폭풍의 곶을 돌았을 때 버려졌고, 차례로 그 유명한 포르투갈인의 항로는 ‘위대한 프랑스인’이라 불리는 레셉스 씨에 의해 훌륭하게 구현된 현대적 창의성이 그린 경로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사람의 업적에서 존경을 자아내는 것은 아이디어의 구상이 아니다. 그 생각은 이미 수년간 지적 영역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대중의 정신이 그토록 규모의 사업을 차분히, 긍정적인 사업의 용이하고 빠른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습관들이게 한 그의 끈기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이 위태롭다고 믿는 영국에 대항한 그의 투쟁의 끈질김이다. 수에즈의 경험은 영국의 냉혹한 저항에 무뎌졌고, 10년 후에는 영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도버 해협 터널의 개통이 그들의 독립에 위험이 된다고 선언한 책을 읽을 때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날 스티븐슨이 그의 기관차로 시속 20마일을 달리겠다고 주장했을 때 타임즈의 풍자적인 기사를 보는 것이다!
파나마 지협은 콘스탄티노플처럼 모든 시대에 중요성을 지닌 지리적 지점 중 하나다. 두 대륙의 중심점이자 유럽과 5-6개 아메리카 국가 간 무역의 필수 통로인 만큼 위대한 굴착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은 지협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하고 지상에서 가장 약탈적인 요금을 책정함으로써 운하 굴착이 불필요하다고 믿었고, 영국인의 합당한 자손답게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레셉스의 끈기는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고, 새로운 항로는 기본적인 윤곽을 그렸다.
파나마 운하의 경제적 결과는 무엇일까? 우선, 운송비 절감으로 인해 베링 해협에서 칠레에 이르는 태평양 연안의 모든 땅이 유럽의 주요 중심지와 가까워질 것이다. 마젤란의 항로는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가 버려진 것과 같은 이유로 버려질 것이며, 거의 남미 최남단에 전쟁을 일으킬 뻔했던 그 해협의 상업적 중요성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에도 페루의 모든 무역과 승객 이동은 파나마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철도 환승의 불편함과 지연, 그리고 지협 철도의 엄청난 운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칠레인들조차 종종 이 노선을 선호하는데, 이는 남쪽의 험한 바다와 그 단조로운 항해의 피로를 피할 수 있고, 북쪽 노선은 잔잔한 바다와 여행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빈번한 정박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운하가 일단 개통되면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배는 드물 것이다.
마젤란 해협을 통해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보라고 했다.
칠레인들과 어쩌면 페루인들에게도, 파나마 운하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칠레를 연결하는 철도가 될 것이다. 그것이 태평양 연안의 대부분 미국인들이 유럽으로 가는 필수 노선이 될 것이다. 더 짧고, 더 빠르고, 더 쾌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운하가 승인된 예산과 레셉스 씨의 계획에 명시된 기간 내에 완공될 수 있을까? 나는 깊은 확신을 가지고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여기서 문제는, 레셉스 씨도 이미 깨닫기 시작했듯이, 수에즈 운하와 같은 공사가 아니다. 케디브도 없고, 공사 중에 죽어가던 수십만 명의 펠라힌도 없다. 그들의 조상들이 4천 년 전 피라미드를 세울 때처럼 모래 위에 서 있는 인간 대량 학살의 기념비로 남아있는 그 펠라힌 말이다.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승객은 단조로운 모래와 전신주 풍경을 보며 하품을 하면서도, 그 건조한 제방을 따라 누워있는 시체들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감상에 빠져 피를 들끓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펠라힌이었고, 목소리도 권리도 없는 노예였으며, 아무도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나마에는 케디브도 펠라힌도 없으며, 수에즈보다 더 열악한 위생 상태였다. ‘기독교인 살해자’와 같은 정복 시대부터 이어져 온 일부 지역의 이름만 들어도 그 지역의 쾌적한 기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럽인은 두개골을 불태우는 듯한 뜨거운 태양을 견딜 수 없었고, 파헤쳐진 습하고 늪지대 같은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 가스와 싸울 수 없었다. 사업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약된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까? 유럽 주주들의 소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런 것들을 숨기는 공식 통계에서 찾지 말라. 묘지의 십자가, 가득 찬 공동묘지를 보고 그 작은 노동자 군대의 사상자 수를 짐작해 보라. 주요 책임자를 포함한 많은 엔지니어들이 개인위생이 예방책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나마 열병으로 쓰러진 첫 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을 기억하라.
유럽인들의 흐름은 이미 멈췄고, 잠시 중국인들을 고용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힘보다는 재주가 뛰어나고,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계획을 포기한 것 같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모든 대규모 사업에서 노동자들의 돈의 4분의 3은 현장에 설치된 수많은 식당과 각종 물품 공급처를 통해 다시 회사 금고로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아 회사에 그다지 호감을 주지 않았다.
결국 현지인들을 고용했다. 즉, 기후에 적응되어 견딜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파나마인, 사마리오, 카르타헤네로, 코스타리카인들을 고용했고, 인근 안틸레스 제도에서까지 신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람들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하루를 바나나 한 개로 살아가는 데 익숙했으며, 강하지도 않고 근면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규모의 회사에 필수적인 군대식 규율에도 순응하지 않았다.
인력이 부족해지자 레셉스 씨는 산업에 의지했고 미국에서 거대한 굴착기를 주문했다. 그 쇠 이빨이 인간의 팔을 대신해야 했다. 이 괴물들이 작동하는 것을 보면 기계의 힘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필라델피아 만국박람회에서 무수한 도르래를 움직이던 고정 모터를 만든 엔지니어는 만약 세상 밖에 자신의 기계를 놓을 지점이 있다면 지구를 궤도에서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옳았다.
하지만 파나마에서는 1년 중 9개월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계속되는 폭우와 싸울 수 있는 기계는 없었다. 노선의 어느 지점에서든 3~4미터 깊이로 구덩이를 파면 폭우가 와서 그것을 채우고 조금 전에 힘들게 파낸 흙을 그 안으로 무너뜨렸다.
그것을 퍼내는 것은 소용없었다. 5분 후면 다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태양이 나와 불타는 듯이 뜨겁게 빛나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진흙을 파내야 했고, 유독한 미아즈마가 대기를 감염시켰다.
운하가 만들어질까? 의심할 여지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불가능한 작업이 아니며 오늘날 인류 산업이 가진 자원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어려움들을 볼 때, 그리고 작업의 일반적인 윤곽을 그릴 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이러한 어려움들을 고려할 때, 나는 현장을 방문한 모든 공정한 관찰자들의 의견에 동의하여 운하가 10년 이내에 전 세계 무역에 개방되지 않을 것이며, 예산(6억 프랑)의 두 배 이상을 소비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셉스 씨만이 그토록 훌륭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이 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위대한 노인의 날들을 그 자신의 영광과 전 세계의 이익을 위해 연장해주기를!
파나마 운하 사업에 대한 미국의 반대, 워싱턴 의회에서의 열띤 논쟁, 그리고 니카라과를 통해 대양 간 운하를 건설하려는 경쟁 프로젝트를 지원하려는 순간적인 생각은 잘 알려져 있다. 레셉스 씨의 강인함과 끈기는 새로운 장애물에 대해 다시 한 번 승리했다. 그러나 미국은 패배를 선언하기는커녕 외교적 형태로 문제를 다시 제기했고, 이 글을 쓰는 순간 기억에 남을 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내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M. 블레인은 연방 정부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퇴임 후 그의 평판은 적들에 의해 가차 없이 훼손되었다. 그들에게 M. 블레인은 단순히 모험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으로, 1세기 동안 연방을 순조롭게 이끌어온 국제 정세의 흐름을 바꾸려 했다. 태평양 문제, 고통받는 국민에 대한 변명의 여지 없는 기만, 페루비안 구아노 회사의 미스터리, 산티아고 데 칠레에서의 트레스코트와 블레인의 수치스러운 번복 등은 가필드 대통령의 수석 장관에 대한 고발 요소를 적지 않게 제공했다. 하지만 공정한 외국인이 현재 미국 국민을 조금만 살펴봐도 M. 블레인에 대한 당시의 판단이 10년 후 여론에 의해 뒤집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다. 오늘날 미국에는 고립주의 정책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 흐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고립주의는 미국 체제의 기반이었고 아마도 번영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애국적 꿈과 야망,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중심에는 항상 심각한 이해관계의 균형, 빠르고 쉬운 이익 등이 M. 블레인이 정부에서 반향을 일으킨 선전의 시작을 결정지었다. 5천만 명이 넘는 강력한 국가로, 유럽의 최고 국가들과 적어도 동등한 부, 재능, 문화의 요소를 갖춘 나라는 유럽 정치에 무관심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선, 아메리카의 모든 문제는 그들의 배타적인 영역이어야 하며, 그들의 중요성이 부여하는 정당한 패권을 행사해야 한다. 혼 곶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워싱턴에서 울리는 목소리 외에 다른 영향력이나 목소리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기본 아이디어로, 곧 생명력을 갖고 한 정당의 기치가 될 것이며, M. 블레인이 추락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두에 설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집단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커서, 이로 인해 M. 프렐링후이젠이 전임자와 같은 끈기로 지지하고 있는 먼로 독트린의 최근 재발이 일어났다. 로드 그렌빌과 M. 블레인 사이에 시작된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양측 중 어느 쪽도 양보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클레이튼-불워 조약의 역사를 되짚지는 않겠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만 이는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 해안에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충돌 없이 병행하여 확장될 수 있도록 한 타협, 더 정확히 말하면 ‘잠정 협정’이었음을 상기시키겠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작은 상업 시설이나 작은 섬들에 관해서는 이 조약이 편리하다고 여겼지만, 향후 파나마 운하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교묘하게 조약을 폐기하며 운하의 자유 항행과 중립성에 대한 독점적 보장을 요구했다. 영국인들은 당연히 이 폐기를 거부하고 독점적 보장 대신 미국과 함께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보장하는 안을 제안했다. 이것이 현재 쟁점이다. 아직 긍정적인 진전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외교 문서가 오갔다.
그러는 동안 영토 주권과 직접적인 관할권을 가진 콜롬비아의 의견은 무엇일까? 콜롬비아도 의견을 낼 권리가 있지 않을까? 우선, 콜롬비아가 파나마 지협의 대서양 연안에서 미국의 전진에 대해 여러 차례 심각한 항의를 제기해야 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유럽에서 들리도록 매우 큰 소리로 외쳐야 했고, 그래야만 미국인들이 클레이튼-불워 조약을 무시하고 사자의 권리로 빼앗은 전리품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유럽으로 가던 한 콜롬비아 장관이 워싱턴에 주재하지도 않으면서 미국 정부와 의정서를 체결했는데, 이를 통해 콜롬비아는 미국의 독점적 보장에 만족한다고 선언했다. 이 협약은 보고타에서 엄숙히 거부되었다. 하지만 콜롬비아는 내 생각에 자신의 이익을 잘 이해하며 ‘판에서 손을 떼고’ 영국과 연방을 마주 보게 했다. 한편 언론과 의회 연설을 통해 영국이 제안한 공동 보장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지지를 표명했다.
본질적으로 먼로 독트린은 단지 의견, 희망사항, 한 국민의 일반적 이익을 표현하는 열망일 뿐이다. 하지만 이 의견을 공법의 원칙으로 전환하는 데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도 멀다. 또한 우리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법적 원칙이 사실상의 문제 해결에 매우 약하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은 먼로 독트린이 보편적 동의를 얻었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먼로 대통령 이래 시간이 지나며 변형된 이 독트린을 표명한 모든 대통령에 대해 영국, 그리고 많은 경우 유럽이 항의해왔다. 불쌍한 먼로는 우화 속 늑대 역할을 많이 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멕시코 원정 때도, 스페인 함포가 성조기를 단 배들 바로 위로 지나갈 때 발파라이소 폭격 때도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이제 아무도 그 허수아비를 믿지 않는다.
영국은 태평양에 분명한 이해관계가 있고 파나마 운하가 인도로 가는 노선이므로 보장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고 답한다. 그렇다면 나도 내 몫을 요구한다.
미국도 수에즈 운하의 보장에 답했다.
영국은 미소 짓고… 고집한다.
블레인 씨가 1882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이던 미주 회의를 소집한 의도는 미주 국가들 간의 전쟁을 방지할 방법을 찾는다는 구실로 파나마 지협 보장 문제를 논의하고, 아마도 양보하지 않는 영국 앞에서 자국의 배타적 보장 대신 아메리카 대륙 전체 국가들의 보장을 제안하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들 국가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인식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 유럽은 이런 제안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나씩 살펴보자. 잠시 이 책의 전반적인 톤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에서 보고 느낀 것만을 기록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첫째로 콜롬비아와 관련이 있어 내 그림에 들어맞고, 둘째로 일시적인 관심사가 아닌 미주 정책의 지속적인 흐름과 관련되어 있어 여기에 내가 면밀히 연구한 결과 가장 건전하고 모두에게 유익하다고 여기는 생각들을 기록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미국인을 위한 미국”; 이것이 먼로의 정확하고 분명한 공식이다. 이것이 유럽은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왕실에서 독립한 지역에서 영원히 모든 정치적 우위를 포기해야 하며, 공개 조약뿐만 아니라 미주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지 표현도 영원히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라면, 그리고 그것이 이 교리의 범위라면, 우리는 완전히 동의하며 우리 세계에서 태어난 어떤 사람도 먼로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미국인을 위한 미국”이라고 반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인가? 오늘날 어떤 유럽 정부가 진지하게 옛 식민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가? 아무리 환상에 빠진 스페인 정치인이라도 옛 부왕령과 총독령을 재건하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있는가?
영국이 1776년에 독립한 식민지를 다시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는가? 포르투갈이라는 난쟁이가 거인인 브라질을 흡수할 수 있는가? 솔직하고 현실적이 되어 미국의 독립이 사실이자 권리일 뿐만 아니라 누구도 기정사실에 도전할 생각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자. 스페인은 재건 중이며 16세기의 중요성의 그림자라도 회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프랑스는 갈기갈기 찢겨 라인 강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프리카 영토와… 심지어 유럽 국경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영국은 불안하게 인도의 성장, 캐나다의 발전, 그리고 해체의 위협으로 여기는 민주주의의 조용한 전진을 지켜보고 있다. 독일은 형성 중이며 기초를 다지고 있고, 오스트리아는 옛 유럽의 위신을 잃고 불행의 경험 속에서 동방, ‘병든 사람’의 머리맡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위대함의 길임을 깨닫고 있다. 포르투갈은!… 진지해지자. 아무도 미국의 독립을 위협하지 않으며, 가장 무모한 모험가나 환상가들에게도 자신의 기사도적 정신으로는 알지 못했던 부적절한 사업에 목숨을 바친 막시밀리안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미국은 대륙 전쟁에 휩싸여 유럽의 중요한 이익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태평양의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유럽은 병력 한 명, 예비함 한 척도 파견하지 않을 것이다. 라플라타나 멕시코에서의 영국-프랑스 개입 시대는 지났고, 이제 유럽은 먼로의 공식을 바꾸어 “유럽인을 위한 유럽!”이라고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유명한 교리는 어떤 실제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가? 단순히 이것이다. 유럽의 영향력 대신 북미의 영향력, 유럽 무역 대신 미국 무역, 유럽 산업 대신 미국 산업. 이것이 정당한 욕구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국가적 열망일 뿐이며, 애국심에 있어서는 이기적이고 야망에 있어서는 배타적이지만, 내가 전에 말했듯이 전체 미국에 강요될 수 있는 정의와 자연권의 원칙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5년 내에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놀라운 발전, 넘치는 산업, 토지의 무궁무진한 자원이 우리 정치인들에게 아르헨티나 국민의 이익을 위해 먼로 독트린을 부활시키라고 영감을 준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때 발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더 나아가 지리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영향권 밖에 있는 미주 국가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미국에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대답해야 하는 것, 미주 회의 테이블에서든 외교 채널을 통해서든 이것이다. “우리는 현재 정치적 의미가 없는 이론의 이익을 위해 유럽과 단절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롭지도 않다. 유럽으로부터 지적 생활과 물질적 생활이 온다. 유럽만이 우리의 사막을 채우고, 우리 상품을 사고 소비하며, 우리 산업의 부족함을 메우고, 돈과 재능과 과학을 빌려준다. 한마디로 유럽은 우리 발전의 장인이다. 반면에 당신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받는가? 제도적 판례인데, 그 장점 중에는 우리의 모든 제도적 갈등의 근원이 있다. 우리가 분별없이 모방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압도적인 대중의 균형으로 인해 사라지는 나쁜 결과가 우리를 불균형으로 몰아넣고 치명적인 길로 인도한다. 산업에 관해서는? 소나무 목재와 면화 뭉치. 우리 양모와 가죽을 사러 오십시오. 유럽보다 싼 값에 직물과 공예품을 팔아주세요. 당신들의 화폐 시장을 우리에게 개방하세요. 철도와 운하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세요.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구세계와 유지하고 있는 상업적, 지적 교류를 설립하고, 이런! 국가 경제를 지배하는 법칙 아래에서 그것을 몰아내고, 그러면… 아! 그러면 우리나 당신들이나 ‘미국은 미국인의 것’이라고 외치며 목청을 높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공식은 사물의 힘에 의해 파괴할 수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가볍게 관찰해 보면 떠오르는 생각이다. 아주 작은 일탈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부당한 길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멕시코 형제들(이웃이지만)에게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게 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계획한 회의 소집이나 어떤 적절한 기회가 있을 때, 진정한 남미 정책은 유럽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는 것이다. 동시에 미주의 이해관계를 다루는 모든 회의에서 겸손한 자리를 요구하며 일반적인 협력 관계에 참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카부르 백작은 크림 반도에 1만 5천 명의 군대를 투입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의 신생 국가들은 오늘날 그처럼 중요한 목표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전반적인 접근 방식과 강대국들과의 연대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제 이 마지막 페이지들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여정의 끝이 다가오고 곧 헤어질 시간이기에, 지루한 사람의 마지막 문단을 듣는 것처럼 막연한 희망으로 가득 찬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주길 바란다. 한 손에는 모자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 말이다.
다음날 아침 출발할 알렌 호로 향했을 때, 기차가 증기선 옆에 막 내려놓은 50여 대의 화물차에서 수많은 남녀가 하역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나나였다! 그렇게 많은 양의 바나나를 본 적이 없었다. 수천, 수백만 송이의 바나나가 동시에 세 척의 증기선의 넓은 선창에 쌓이고 있었다. 이스무스에서 이 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바나나 운송을 전문으로 하는 증기선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후에 뉴욕에서 이 놀라운 소비량을 이해하게 되었다. 거리마다 과일 행상인들이 가득하고, 지나가는 양키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한 쌍의 바나나를 사서 이빨로 껍질을 벗기고 체조 같은 걸음을 늦추지 않고 삼킨다. 상황이 심각해져서 바나나 껍질을 거리에 버리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는 경찰 조례가 필요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불행한 사람들이 머리를 깨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자, 1881년 콜론 항을 통한 바나나 수출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120만 페소 푸에르테, 즉 6백만 프랑이나 3천만 페소 (부에노스아이레스 화폐)에 달했다. 여러 화폐 단위로 수치를 제시하는 이유는 그 엄청난 규모가 오류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엄청난 금액에 도달하기 위해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 바나나 송이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수출업자 중 한 명이자 이 아이디어의 선구자는 2년 안에 수출량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아직 부드러운 과일을 맛보지 못한 미국 중부 지역 전체에 바나나를 익숙하게 만들어서 말이다. 이는
빠나마산 바나나가 세계 최고인데 연중 내내 생산된다는 것을 알려두면 좋겠다. 하지만 처음에는 수출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기존 농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농장주들은 거대한 규모의 농장을 계약했고, 지금은 콜론에서 빠나마로 가는 철도를 따라 바나나로 가득 찬 농장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나나는 푸른 상태로 선적되어 4-5일 후에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뉴욕에 완전히 익은 상태로 도착해 엄청난 소비량 앞에서 빠르게 사라진다.
만약 예상대로 5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뉴욕 사람들과 해안 지역 사람들처럼 바나나를 먹는 습관을 들인다면, 빠나마의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열대의 수액이 즐겁게 야자수를 타고 올라가 황금빛 과일을 부풀리게 하면, 이 주는 콜롬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주가 될 수 있다.
제20장
뉴욕에서
알렌호. – 뚜르삐알. – 도선사. – 뉴욕 항구. – 첫인상. – 뉴욕의 왕들. – 여자들. – 남자들. – 귀족적 허세. – 산업과 예술. – 독특한 세계. – X 부인. – 언론. – 호프만 하우스. – 극장들. – 호텔들. – 사치. – 거리. – 전형적인 인물들. – 화려한 생활. – 한 무덤. – 고백.
알렌호는 글래스고에서 건조된 작고 튼튼하며 항해에 적합한 증기선이었다. 배에서 나는 뉴욕으로 향하는 몇몇 콜롬비아 가족들과 캘리포니아나 남미 태평양 연안 항구에서 온 많은 미국인들과 영국인들을 만났다. 우리는 쿠바 섬을 지나치며 바라보았고, 바하마 제도 앞을 지났으며, 바베이도스 제도의 한 섬에 석탄을 싣기 위해 정박했다. 이것이 여행의 모든 사건이었다. 배에서 내 유일한 즐거움은 콜롬비아에서 온 한 소녀가 데리고 온 뚜르삐알을 돌보는 것이었다. 그 아름다운 새는 우울하고 깊은 울음소리로 내 관심에 보답했다. 뚜르삐알의 목소리는 나이팅게일이나 카나리아의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지 않다. 민첩함은 그에게 낯설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균일하고 단조로우며, 언제나 새로운 감정을 일으키는 섬세한 음악 같았다… 나는 결국 뚜르삐알에 진정한 애정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나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우리가 정박했을 때, 갑판 위로 튀어나온 보일러 부분에 우리를 성가시게 여긴 선원이 그만 우리를 올려놓았다. 육지로 내릴 때, 그 불쌍한 소녀는 도착의 기쁨에 들떠 내 손을 잡고 뛰어와 뚜르삐알을 찾았다… 불쌍한 새는 죽어가고 있었다. 보일러의 열기에 반쯤 구워져 매일 아침 우리에 넣어두던 물그릇 안으로 피신한 본능이 있었다. 배에 탄 두 명의 의사부터 마지막 승객까지 모두가 스무 가지의 다른 치료법을 제안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불쌍한 새는 잠시 후 죽었다. 소녀는 위로할 수 없이 울었고 뚜르삐알을 가슴에 꼭 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 마치 자신의 생명을 주려는 듯이… 나는 바보처럼 갑판을 왔다 갔다 하며 나 자신과 내 어리석은 감상주의를 저주했다. 매년 수많은 새들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내 개인적인 용도로 죽이면서도 한 마리 뚜르삐알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를 두겠다. 비록 새는 아니지만. 2년 전부터 나는 거북이를 먹지 않는다. 이유는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마그달레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가들이 거대한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등껍질의 길이가 반 미터는 되었다. 우연히 주방에 내려갔다가 요리사 보조가 거북이를 죽이려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야만인은 도끼와 칼로 거북이의 몸을 등껍질에서 분리하려고만 했을 뿐, 먼저 불쌍한 동물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북이의 머리는 축 늘어져 있었고 도끼가 내리칠 때마다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의 손에서 거북이를 빼앗아 즉시 죽이도록 했지만, 그 후로 거북이를 먹지 않고 있다!
“가리발디가 죽었소.” 이렇게 해서 나는 산 안토니오의 영웅이 죽었다는 첫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 자체보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방식이 나를 더 깊이 감동시켰는지 모르겠다. 1870년, 사우샘프턴 항구로 우리를 안내할 도선사가 승선했을 때, 그는 새 소식을 물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찰스 디킨스가 죽었소.” 1871년 귀국길에 한 경유지 항구에서 만난 도선사를 통해 알렉상드르 뒤마의 죽음 소식도 들었다. 이런 이상한 우연의 일치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동시켰고, 그때부터 나는 도선사들을 불길한 징조를 가져오는 새로 여기게 되었다.
자, 이제 선장 다음으로 누가 뉴욕 헤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심각한 문제였다. 그 늑대 같은 자는 자기 선실에 틀어박혀 그 비열한 자식, 광고란까지 읽었을 뿐만 아니라 오타까지 고쳤을 것이다. 우리가 신문을 손에 넣었을 때는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철도망이 그렇게 광대한데도 열차 충돌 사고가 그렇게 적고, 우리의 사랑스러운 종족의 조건을 고려할 때 끔찍한 범죄가 그렇게 드문 것을 보면 인간사가 그토록 단조롭게 진행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자, 드디어 유명한 뉴욕 항구다. 분명히 언덕으로 둘러싸인 이 깊은 만은 기이한 언덕들과 반짝이는 별장, 마을, 현대식 성들이 점점이 박혀 있어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니다. 이곳은 열대 지방의 자랑인 리우데자네이루 만이 아니다. 그곳의 하늘은 물과 같이 짙은 파란색이며, 산과 야자수 숲, 코코넛 나무, 미소 짓는 섬들이 있다. 또한 이곳은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반영된 나폴리 만의 시적이고 평화로운 고요함도 아니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하늘같이 평온한 광경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사실, 뉴욕 만은 인간 삶의 긍정적인 면과 산업의 놀라운 광경만을 보려고 마음먹고 이 위대한 미국 국가의 땅을 밟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려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새롭고 싱싱하고 화려하다. 우아한 별장의 지붕과 벽은 매일 아침 청소한 것처럼 빛난다. 옛 건물을 모방한 석조 건물에서 오래되어 보이려고 애쓰는 짙은 회색 페인트는 무대에서 머리카락을 하얗게 염색하고 피부의 싱싱함은 유지하면서 나이 든 척하는 젊은 배우들처럼 우리 눈을 속이지 못한다… 멀리 도시의 흐릿한 윤곽 속에서 안개 속에 거의 사라진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사이로 뻗어 있는 거대한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이 브루클린 다리다. 하지만 갈망하는 눈은 고풍스러운 탑이나 기념비, 기둥, 과거를 말해주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 민족은 세 가지 역사적 시대를 하나로 혼동했다. 이 해안에서 예술을 찾지 말고 그곳에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만은 정말 아름답다. 수많은 증기선이 모든 방향으로 가로지르고 있으며, 그들의 우아하지 않은 떠다니는 궁전의 모습은 ‘아메리카’호와 그 배가 침몰한 비극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옥스퍼드 거리, 시티, 불라바르, 오페라 광장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격렬한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려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 매 순간 런던, 파리, 비엔나의 신문들은 차량에 치인 아이들의 사고 소식을 전한다. 뉴욕에서 아이들은 신성하다. 아이들을 위해 나무가 우거지고 잔디가 깔린 넓은 공원이 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아이들이 위험 없이 뛰어놀고 힘을 기르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을 위해 모퉁이마다 광장이 있어서, 유모들이 즐거운 무리와 함께 자리를 잡는다. 아이들은 막대기와 곡괭이, 삽으로 무장하고 모래를 파고 도랑과 성벽을 만들며 눈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움직이고 흔들리며 놀이를 한다. 이는 아이들의 삶이며, 새들에게 날갯짓이 삶인 것과 같다.
매디슨 스퀘어나 끝없이 펼쳐진 센트럴 파크를 지나면서, 수많은 금발의 장미빛 얼굴을 한 아이들이 생기 넘치는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모든 아이들의 놀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 집안 네 벽에 갇혀 온실 꽃처럼 창백하게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슬픈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장난꾸러기 발이 메마르고 목마른 잔디를 밟는 순간 경찰관에게 꾸중 듣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우리 아이들 말이다! 권리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힘을 믿는 자신감을 주는 보장과 안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체육 교육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놀라운 번영의 주된 비결임이 틀림없다. 신체가 가진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고, 정신은 양키들의 특징인 침착함과 균형을 갖추게 되어, 성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오래전부터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에 관해서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토록 존중받지 못한다. 우리 라틴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최근에는 양키들 자신에게도 걱정거리가 되기 시작한 여성의 독립적인 관습은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을 떠받치는 평온한 자신감을 만들어냈다. 뉴욕의 도덕성이 유럽의 어느 중심지보다 더 엄격하거나 관대하지는 않지만,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밤중에도 브로드웨이나 18번가, 3번 애비뉴의 큰 흐름 속에서 파리의 불라바르나 런던의 특정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혐오스러운 유혹이 눈에 띄지 않아 가족들이 접근하기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프랑스에서 특징적으로 ‘수평녀’라고 불리는 업소에 속한 여성임을 경험 많은 눈에는 어렴풋이 드러내 보이는 여성들조차도 그 행실은 언제나 바르고 품위 있다. 집 문을 나서면 가면이 벗겨질 테지만, 누구나 아내나 딸과 함께 산책을 할 수 있으며 추잡한 광경을 목격할 걱정은 없다.
뉴욕의 번화가에서 만날 수 있는 사교계는 우아한 시간대에 더없이 화려하다.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놀랍다. 영국의 단정한 선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아함으로 부드러워졌고, 의상의 우아함과 그것을 입는 자유롭고 편안한 태도는 뉴욕 여성을 특별한 유형으로 만든다. 오랫동안 그 사회에서 살았던 이들은 외모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 정신의 매력과 마음의 감미로운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모르겠다. 잠시 머무는 이방인으로서 5번가와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자신이 머무는 호텔 문에 서 있는 손님의 멍청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매혹적인 광경에 눈을 즐겁게 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나를 매혹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반적인 유형은 압도적으로 평범하다. 그들에게는 긍정적인 삶에 대한 걱정 외의 것들과 오랫동안 교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교양 있는 형식, 최종적인 세련미가 부족해 보인다. 양키식 문명을 비판하거나 칭찬하지는 않겠다. 다만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으로 가든 고상한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높은 사상을 자극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넓고 편리하며 매우 아름다운 거리들, 브로드웨이나 3번가 같은 거리들, 웅장한 공원들, 모든 알려진 양식의 기념비적인 교회들(하지만 새것이고 갓 상자에서 꺼낸 듯하다), 장엄하고 규칙적인 건물들, 현대 도시 계획의 모든 발전, 작지만 우아한 극장들,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철도와 전차… 하지만 결코 파리나 비엔나, 이탈리아 도시들의 교차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튀어나온 오래된 발코니가 시선을 사로잡거나, 시간이 검게 만든 대리석이 그 선의 조화로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런 곳은 없다.
3층에서 3층으로 거리 전체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달리는 고가 철도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이 있을까? 아래에는 영원한 해의 치맛자락, 끊임없는 황혼이 있다. 거기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여! 하지만 더 빨리 간다!! 어떤 유럽의 경찰도 고가 열차에 승객들이 타는 방식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각자가 자신을 돌본다. 사고가 나면 회사가 배상한다. 민주적인 교통수단, 완벽한 평등의 상징이라고 인정한다. 한편 귀족적인 3번가에는 고가 철도도, 전차도 없다. 센트럴 파크에는 우리가 불루뉴 숲에서 보던 초라한 마차들이 들어가지 못한다. 이 조치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리의 결여를 지적하고 싶다. 이 땅위에 허영심에 뿌리를 둔 인간의 편견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민족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모든 공화국은 닮았지만, 어느 나라도 이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양키들의 고귀한 면이다. 그들 사이의 귀족주의적 열망은 흥미롭다. 남부에 여전히 존재하는 혈통 귀족주의의 전통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북부, 즉 금융인, 산업인, 상인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귀족 작위가 갖는 영향력은 놀랍다. 요크타운 백주년 기념식에서 프랑스 대표단 구성원들, 거의 모두가 작위를 가진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이의 면밀한 관찰 대상이 되었다. 리본 하나, 훈장 하나, 연미복 단추 구멍을 꾸밀 수 있는 여러 색의 작은 단추 하나가 그들의 끊임없는 꿈이다. 이것에는 순진한 유치함이 있다. 아, 친구들이여! 귀족주의가 구별, 섬세함, 절묘한 품격, 삶의 관계에서 미묘한 점을 감지할 수 있는 지적 준비, 실용주의를 초월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의미한다면, 정숙한 주인이 미국 땅에 내려오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세기가 지나야 할 것이다! 정복한 몫에 만족하라. 인간 중에 너희를 구별짓는 그 훌륭한 실용적 감각에 만족하라. 시카고의 상품과 목화 더미를 늘려라. 너희를 다스리는 헌법의 보호 아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라. 번영하고, 건설하고, 새로운 길을 닦아라. 하지만 피디아스의 조각상을 아테네에서 로마로 운반하는 책임자들을 위협하던 로마 장군을 절대 잊지 마라. 그는 만약 그들이 조각상을 파괴한다면 다시 만들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북미 사람들이 이해하는 삶의 개념은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큰 물질적 행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사람과 같아서 역사상 비할 데 없이 빛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임신으로 가슴을 찢어야 한다.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실용과 대립되는 지적, 서정적, 환상적인 활동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꿈과 현실 사이의 치명적인 혼란을 가져오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16세기 이탈리아의 소용돌이, 또는 89년의 괴물 같은 충격을 결정짓는다. 루소는 미국에서 가능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 나라 사람들은 황금 송아지를 최고의 목표로 보여주는 사람을 따를 것이다. 문체, 이론, 감정의 열기, 가장 높은 형태의 예술은 결코 전통적인 교육으로 무디어진 그 냉담한 대중을 흔들지 못할 것이다.
북미에서의 내 체류는 매우 짧았다.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대공화국에 바치려고 생각했던 시간을 줄여야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빨리 방문한 나라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배적인 인상은 우리가 살아오던 세계와는 다른 새롭고 낯선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교양 있고 세련된 사회에서 살아온 라틴계 사람에게는 거칠고 이기적인 양키의 생활 방식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다. 돈에 대한 집착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대중은 신문의 공개를 통해 거의 매일 밴더빌트나 스튜어트의 재산 상태, 그들이 식탁에서 쓰는 돈, 가장 사소하거나 특징적인 가정용품의 재료를 알고 있다. 남미나 프랑스에서의 언론 폐해에 대해 한탄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예를 들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한 사회 전체의 얼굴에 던져진 그토록 혹독한 모욕을 본 적이 없다. 내게 보여준 한 만화가 있었다. 뉴욕의 포부르 생제르맹이라 할 수 있는 3번가에 있는 화려한 궁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명한 산파가 지은 것이었다. 그녀의 능력과 신중함으로 그토록 부유한 고객을 얻었던 것이다. 악의에 찬 사람들은 미시스 X의 비밀 시술이 뉴욕 인구의 증가를 상당히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 부인이 죽자 한 만화 신문이 3번가를 가득 채운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노는 그림을 실었다. 그 밑에는 이런 설명이 있었다. “미시스 X가 죽은 지 2년 후의 3번가”.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만화가의 갈비뼈가 성한 채로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지라르댕의 언론의 무력함에 대한 격언이 어디에서든 적용된다면 그곳은 북미일 것이다. 신문은 수십만 부씩 발행되며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산업 중 하나다. 하지만 광고와 정보가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지 정치적 의견이 아니다. 양키에게 신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무슨 상관인가? 그는 신문을 사서 전보와 광고를 읽는다.
사실 오늘날 세계의 언론은 그런 성격을 띠는 경향이 있다. 타임스의 가치와 중요성은 여론을 이끌려고 하기보다는 모든 변덕과 변화를 포함해 여론을 반영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있다.
내가 본 가장 전형적인 양키 시설 중 하나는 매디슨 스퀘어 맞은편에 있는 호화로운 바인 호프만 하우스다. 소유주가 질투심에 사람을 죽여 10년간 교도소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의 아이디어를 숙성시킬 시간이 충분했고, 실제로 그것은 훌륭했다. 그 호화로운 홀을 짓는 데 엄청난 돈을 썼을 것이다. 벽은 현대 회화의 걸작들로 장식되어 있다. 부게로의 “요정들이 사티로스에게 놀란 장면”만 해도 1만 달러가 들었고, “파우스트의 환상”과 다른 뛰어난 작품들도 거의 그만큼 들었다. 조각상, 흉상, 자동인형, 인간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독서실, 통신실, 우편, 전신, 그리고 특별한 현관에는 정치 소식, 주식 시장 동향, 곡물과 면화 가격의 변동을 분 단위로 기록한 종이 테이프를 끊임없이 풀어내는 놀라운 자동 전신기 세 대가 있다. 바의 안쪽에는 거대한 카운터가 있고, 그 위에는 정교한 점심을 즐기려는 미식가가 원할 만한 모든 것이 있다.
맛있는 음식들이 있었다. 그곳에 공공장소에 들어가듯 들어가 신문과 전보를 읽고, 편지를 쓰고, 배가 고프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주문하면 바로 정중하게 서빙해 준다. 모든 것이 완전히 무료였다. ‘그럼 이익은 어디서 나는 거지?’ 하고 물을 것이다. 단순히 음료에서다. 주문할 의무는 없고 다른 곳보다 더 비싸지도 않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어 각 위스키 칵테일이나 맥주 한 잔에서 나오는 작은 이익이 무료로 제공되는 음식 비용을 충당할 뿐만 아니라 하루가 끝날 때는 상당한 수익을 남긴다. 그 시설의 관리자 중 한 명에게 하층민들이 몰려와 매일 공짜로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러 오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호프만 씨가 인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고급스럽고 화려한 곳에서는 상류층 사람들만이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면 도덕적으로 칵테일 세 잔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들은 꽤나 쉽게 그 희생을 감내한다고 했다.
라틴계 여행자들이여, 뉴욕에서 절대로 아메리칸 플랜이라 불리는 호텔, 즉 방값과 식사를 함께 지불해야 하는 호텔에 묵지 마라. 시설은 좋고, 객실은 편안하고 깨끗하며,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수도꼭지가 여러 개 있고, 전기 벨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음식이 형편없다. 삶은 연어와 생고기 로스트비프, 이게 전부다.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로스트비프를 먹고 나중에 연어를 먹으면 된다. 아니면 영원한 디저트로 행진을 마감하는 콤포트를 먼저 먹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그것이 수프 계열인지 디저트 계열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대신 델모니코나 브런즈윅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곳들은 파리의 비뇽, 니스의 런던 하우스, 런던의 브리스톨에 뒤지지 않는다. 델모니코는 항상 만석이고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다. 주인들이 가격을 내리려고 했지만 미국인 고객들이 코틀렛 한 개가 1달러 이하로, 혹은 멈 엑스트라 드라이 샴페인 한 병이 10달러 이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가게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법에 따라 유색 인종을 전차와 공원에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민주주의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벽은 지갑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이 점에서 미국인들에게 정당한 평가를 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씀씀이가 크고, 관대하고, 개방적인 곳은 없다. 황금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유럽에서 가장 비싼 것들, 최고급 와인, 보석, 다이아몬드,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을 모두 가져온다. 사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어느 곳에서도 가난의 인상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취향이 좋고 유럽의 섬세함에 익숙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즉시 어떤 특별한 분위기를 감지할 것이다. 즉 신흥 부자의 분위기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세련된 사람이 갖춰야 할 어려운 교육을 완성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일본 청동과 중국 청동을 한눈에 구별하고, 세브르 도자기와 작센 도자기를 구분하며, 오래된 태피스트리와 현대 태피스트리를 구별할 줄 안다. 가장 좋은 곳에서조차 설명할 수 없는 로코코 풍이 있다. 연봉 3만 프랑의 프랑스 상류층은 연봉 20만 프랑의 미국인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해낸다.
거리는 부조화의 예술 박물관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인물들이 태연하고 당당하게 활보하고 있다! 체격이 좋고 키가 큰 사람들,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들, 여자들은 예쁘고 자유분방하다. 차림새는 현란하고 화려하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피라미드형 모자, 거대한 무덤처럼 넓은 모자, 어떤 것들은 보이지 않고, 또 어떤 것들은 기적적인 균형으로 뾰족한 두개골 위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넥타이들이란! 그런 넥타이를 매는 민족은 결코 천재적인 색채화가를 배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혈통에는 색맹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보는 빨간색은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색조일 리 없다. 초록색이 그들을 유혹한다. 앵무새 떼 속에서 1년을 살아야 저런 말도 안 되는 플라스트롱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상류층 무리는 영국 상류 사회에 버금가는 우아함으로 옷을 입는다. 브로드웨이의 멋쟁이들은 하이드 파크 코너의 멋쟁이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발목까지 오는 하바나색 체크무늬 바지가 지나가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재킷이 처마처럼 달려 있어 당신을 가장 깊은 절망에 빠뜨린다. 대체로 남자들은 여행 가는 길에 기차역으로 가는 중인 것 같고, 기차를 놓칠까 봐 어렴풋이 두려워하는 것 같다. 각자 구입한 것을 들고 다닌다. 바나나 한 다발, 토끼 한 마리, 연어 한 마리, 과일 바구니, 그림 한 점 또는 좌욕기 하나. ‘실례합니다’라는 말은 영국에서보다도 더 드물다. 그들은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다. 당신을 밀치고 떠밀어도 당신이 그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평온함으로 견딘다.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리가 없는 전차에 여성이 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여성을 모욕하거나 어린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모든 무관심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세련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일단 친구가 되면 악수를 나눈 영국인만큼이나 그들을 믿을 수 있다.
도덕성?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뉴욕의 화려한 생활은 이 슬픈 세상에서 그러한 숭배가 많은 추종자를 가진 것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샴페인을 많이 마시는 나라는 풍속의 순수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많이 부족하다. 그런데 북아메리카만큼 샴페인을 많이 마시는 곳은 없다. 셰르부르에서 멘톤까지, 바욘에서 벨포르까지 프랑스 전체를 포도밭으로 뒤덮어도 1년 소비량을 채우기에 부족할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를 제외하면 샴페인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서 판매되는 음료만큼 환상적인 것은 없다.
그렇다, 그들은 영국인들이 일요일에도 즐기는 것처럼 여자를 좋아한다. 사무실 문을 닫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심하면 종종… 라틴 민족의 폭발적인 열정에 비하면 목가적인 수준의 일들을 벌이곤 한다. 젊고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극장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욕의 식물상에 대한 기여는 보온 온실에서 자란 프랑스 제품에서부터 마자르인의 땅에서만 자라는 강인한 장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이다.
상류 사회에서는 플러트, 역겨운 플러트가 판을 친다. 기질이 없는 어느 미국 여성이 발명한 것으로, 큐피드로 위장한 허영심이며, 쾌락 대신 우스꽝스러움이며, 열정 대신 허세다. 플러트는 이탈리아의 옛 파티티즘과 영국의 캔트가 혼합된 것으로, 사회적 바보짓의 체조이며, 자연의 왜곡이며, 신성한 노래의 우스꽝스러운 번역이다. 플러트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스탕달의 신처럼 대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은 그렇게 시작되는데, 어쨌든 시작은 해야 하니까. 하지만 곧 자연이 목소리를 내고, 몰래 손을 잡아당기는 손, 새틴 구두를 스치는 발… 그것들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과 같아서, 그것들을 대체할 과일보다 먼저 삶 속에 나타난다.
그들은 양키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놀라운 선구적인 작품들. 하이 브리지는 로마의 작품을 연상시키고 브루클린의 현수교는 아라비안나이트의 환상 같다. 브루클린 공동묘지는 내가 평생 본 것 중 가장 호화로운 공동묘지다. 예술성으로는 피사에 미치지 못하고, 페르 라셰즈처럼 당신이 지나갈 때 영광의 행렬과 함께 죽은 자들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공공 모금으로 세워진 단순한 기념비 하나가 지구상의 모든 위대한 무덤들보다 내 심장을 더 빨리 뛰게 했다. 그것은 소방관의 무덤이다. 나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영혼에는 신성한 반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불꽃이 순간 빛났다. 끔찍한 화재 속에서 4층 방에 혼자 남겨진 노동자의 4살 난 아들이 있었다. 소방관은 사다리를 가져와 믿을 수 없는 노력 끝에 반쯤 타면서 공포에 질려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가 있는 창문에 도달했다. 하지만 불이 사다리를 태워버렸다. 소방관은 아이를 팔에 안고 사방을 불안하게 둘러보았다. 불꽃이 이미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가슴이 조여오는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 앞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영혼처럼 신성한 빛이 그 사람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팔에 안은 채 들어 올린 뒤, 창문 가장자리에 서서 40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다. 그의 몸은 돌바닥에 부딪혔다. 그의 팔에 안겨 있던 아이는 바닥에 닿지도 않았는데 구경꾼들이 받아냈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아름다운 죽음은 없었고, 이보다 더 깊은 경외심으로 고개를 숙여야 할 무덤도 없을 것이다.
대충 엮어 만든 이 글을 마치면서 고백 하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뉴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게 된 미국 전체에 해당된다. 내 인상은 수집한 자료로 형성된 환상보다 더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가까이서 보면 북미 조직은 가장 오래된 유럽 사회와 동일한 질병 증상을 보인다. 그들의 정치 체제는 진보의 원천이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다. 하지만 공화주의 이념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순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행정부의 부패는 어느 정도 조직화된 유럽이나 남미 국가들보다도 심하다. 선거 부정은 영국조차도 놀랄 만한 수준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현재 세계에서 보통선거가 진실에 가장 가까운 프랑스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종파주의와 종교적 무정부 상태는 정부의 경계 밖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
한마디로 말해, 내가 세상에서 정치적 이상을 찾는다면 아직도 그것을 쫓아다녀야 할 것이다.
생산에 열중하는 5천만 명의 인구는 매우 인상적인 규모여서, 잘못된 조직의 악덕에 의해 위험 없이 공격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는 겨우 1세기를 조금 넘었을 뿐이며, 이는 국가의 삶에서 순간에 불과하다. 미래는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아마도 괴물 같은 강대국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온 인류에 밝은 빛을 비출 등불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멀지 않은 시기에 미국 제국의 분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법칙이 실패할 것이다. 그때가 시험의 순간이 될 것이다. 자유에 관해 말하자면, 오늘날 인간 삶에 대한 개념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므로 양키식 방식이 사라진다고 해서 위험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등대가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웨스트민스터의 아치 아래에 있으며 영국의 이기심이 그 최고의 수호자다.
제21장
나이아가라에서
의무적인 여행 – 팰리스 카 – 여행 동반자 – 미국의 관습 – 양키의 의견 – 나이아가라 폭포 – 폭포 – 폭포 아래에서 – 나이아가라의 모독 – 나이아가라와 떼껜다마 – 귀환 – 허드슨 – 결론
나는 여행을 생각할 수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미국 땅을 밟는 모든 이에게 도덕적으로 강요되는 여행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이아가라 방문이다.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거대한 폭포를 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었지만,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권태의 혼합으로 인해 다른 시기에는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즐기기 위해 수백 리를 달리게 했던 열정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떼껜다마의 급류가 내 기억 속에 살아있었고, 내 영혼은 그것에 충실했다. 나이아가라는 한편으로 그 유명세와 쉬운 접근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인정으로 인해 고전 문학의 상투적 표현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찬미받다가 결국에는 후렴구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하룻밤 거리에 있었고 아직 5-6일의 여유가 있었기에 길을 나섰다. 버펄로와 나이아가라 폭포로 가는 이리 노선을 타고 가서 캐나다 국경을 따라 올버니까지 달린 다음, 거기서 허드슨을 타고 뉴욕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저녁 7시 30분에 미국 노선에서만 볼 수 있는 호화로운 팰리스 카에 올라 미리 예약해둔 칸을 차지했다. 미국의 슬리핑카는 유럽의 것보다 더 호화롭게 꾸며져 있고 의심할 여지없이 더 편안하다. 중앙에 복도가 있고 양쪽으로 커튼과 가벼운 칸막이로 쉽게 격리할 수 있는 작은 구획들이 있다. 침대는 객차의 길이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넓고 깨끗하며 따뜻하다. 각 칸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는데, 하나는 아래쪽에 하나는 위쪽에 있다. 하지만 침대를 펴기 전에는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소파에 네 명이 앉을 수 있다. 나는 아래쪽 침대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내게 할당된 칸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흰 수염을 기른 60세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20살의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가진 소녀였다. 기차 출발까지 15분이 남아있었고, 만약 객실 배정에 오류가 있었다면 나를 기다리는 밤이 어떨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라고 서투른 영어로 말했다. “이 칸에는 침대가 두 개뿐인데, 저는 그중 하나의 티켓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바로잡는 게 좋겠습니다.”
“아닙니다.”라고 양키가 대답했다. “저는 내립니다. 제 딸은 유티카까지 혼자 갑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와 딸은 내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가정사, 건강에 대한 조언, 가족에 대한 기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돌아다닌 사람이라면 쉽게 속지 않는다. 이 소녀는 순수하고 정직했다. 두 번의 강한 키스, 긴 포옹, 나를 향한 인사, 그리고 아버지는 내렸다.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미국 노선에서만 볼 수 있는 현기증 나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밤이 내렸고, 잠자는 칸을 차지한 20-30명의 사람들 각자가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다. 책을 읽을 수 없어서 자연스럽게 내 여행 동반자가 될 소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뻤다. 큰 갈색 눈, 밤색 머리카락, 잘 빚어진 몸매, 그리고 드레스 아래로 살짝 보이는 가늘고 잘 신은 발이 있었다. 나는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다. 유럽에서라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이고 미국에서… 뭐, 그래!
그녀의 여정표가 떨어졌다. 구실은 찾았다. ‘여기서 내 영어 실력을 발휘해야지’라고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방금 내리신 신사분, 아마 아버님이시겠죠, 말씀을 듣자 하니 아가씨께서 이 칸에 있는 두 침대 중 하나의 티켓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래쪽 침대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모로 아래쪽이 더 편해서 말이죠, 혹시 제안 하나 드려도 될까요? 아가씨께서 쉬고 싶으실 때, 제가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약속하건대 – 웃으며 덧붙였다 – 가능한 한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차 차장이 제 아버지에게 자리가 남아있으면 아래쪽 침대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친절한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잠이 편안해서 당신도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서 악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내 목적을 달성하기엔 충분했고, 나는 계속했다.
“제 형편없는 억양을 들으시면 제가 외국인이라는 걸 오래전에 알아채셨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한두 시간 동안 좋은 친구처럼 이야기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미국 풍습을 조금 알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지 않아 보여서 익숙해지기 힘듭니다. 당신은 이렇게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 바른 사람일 수도 무례한 사람일 수도 있는 이들과 함께 이 공용 침실에서, 각자의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한마디로, 두렵지 않으세요?”
“두려워요? 뭐가요?”
“혼자 여행하는 것 말입니다. 무례한 사람이 당신에게 실례를 할 수도 있잖아요.”
“혼자요? (놀란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저 신사들 중 한 명이 제게 무례하게 군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제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겠어요?”
“물론이죠.”
“그럼 안심하세요. 제가 소리를 지르면 객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달려와 그 겁쟁이를 혼내줄 거예요. 여성을 모욕한 놈을!”
“완벽합니다. 하지만 저를 놀라게 하는 건 본능을 이성으로 완벽하게 극복한 것입니다. 여성들은 원래 겁이 많고 소심하죠.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만큼 용감해질 수 있을 겁니다. 때로는 의지만으로 심각한 위험에 맞서기도 하죠.”
“교육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당신들 유럽인들은 (그녀는 제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들을 잘못 교육시킵니다. 미국의 관습은…”
그리고 여기서 여성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모든 알려진 주장들이 나왔는데, 이는 그런 종류의 논쟁이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질서정연함을 보였다. 그런 다음 그녀는 유럽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고, 차장이 와서 내 맞은편 칸의 아래쪽 침대가 그녀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알려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칸은 1야드 폭의 복도로 내 칸과 분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하고 기차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걸어갔다. 다리를 펴고 경치 변화로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이 편리함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그 괴물이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마치 지구가 그 질주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일 정도였다. 마지막 객차에서 바라본 철로는 아찔했다. 밤의 맑은 하늘 덕분에 경작된 평원, 숲과 언덕, 하얗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풍경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보고타에서 말하는 ‘공상에 빠지기’를 하다가 내 침대로 돌아왔다.
내 이웃은 막 그녀의 커튼 뒤로 사라졌다. 내 발소리를 듣고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이번엔 약간 장난기 있어 보이는 “안녕히 주무세요,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어떤 여자가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혈관 속에 퍼진 약간의 악의를 갖고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녀가 옷을 입은 채로 간단히 누울 거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틀렸다. 잠시 후 커튼이 다시 열리고 한 손이 나타나 길고 가는 두 개의 부츠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다음엔 한두 번 뒤척이더니 고요해졌고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중에 뉴욕에서 이 모험담을 내 미국인 친구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 좋은 양키는 슬프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동행이 정숙한 여성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당신은 그저 아무나, 낯선 사람이었죠. 만약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대담한 청년이 당신의… 자리를 예약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상황이 똑같이 진행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특별한 순간에 국가적 관습과 관행이 그것에 얼마나 적은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50년 전에는 우리의 여성 독립 풍습이 완벽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믿어주세요, 매일 우리 사이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유럽식 생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는 연극 공연들, 지금은 열렬히 읽히는 프랑스 소설들, 재판 기사들, 삽화가 있는 경찰 잡지들이 미국 여성들의 정신에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늘날 여성의 사회적 독립이 우리나라 풍습의 자랑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덕적 수준의 하락 원인이라고 봅니다. 결코 남용되지 않는다고 동의하는 것은 매우 편리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체제의 가장 완고한 지지자들조차 낙담시키기 시작합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내 양키 친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 경우엔… 개인적인 증거는 없었다.
오랫동안 기차를 타지 않았기 때문인지, 객차 동료들의 왔다 갔다 하는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결국 상식과 그저… 감각 사이의 영원한 싸움이 내 머리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인지, 어쨌든 잠은 나를 피해갔다. 나는 담요에 싸여 옷을 입은 채로 유리창을 가리는 커튼을 걷었다. 달빛이 내 작은 방을 가득 채웠고, 급히 마련한 펀치와 일련의 담배들과 함께 나는 평온히 아침을 기다렸다.
오전 5시에 내 이웃은 일어나 작은 스펀지에 물을 적셔 얼굴을 상쾌하게 했다. 그리고 시계를 꺼내 여행 일정표를 확인하고 가방을 정리했다. 내가 그때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는 손을 내밀며
나는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했다. 우리는 플랫폼으로 나갔다.
30분 후(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기차가 유티카에 멈췄다. 내 동행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마도 이생에서는 마지막일 것이다. 그녀는 마치 온 가족이 함께 있는 것처럼 굳건하고 차분한 발걸음으로 한적한 역에서 내렸다. 기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객실로 돌아갔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폭포의 매력만으로 존재하는 마을이다. 폭포의 우렁찬 소리에 영원히 흔들리는 듯한 이곳은, 만약 전능한 손이 잠시라도 물줄기를 멈춘다면 그 적막함에 죽은 자들조차 무덤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멀리서 들려오는 거대한 폭포 소리가 들렸다. 마치 끊임없이 재현되는 최후의 재앙을 메아리치는 듯했다. 내 마음 상태로는 온 세상을 주고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폭포의 끊임없는 신음 소리만을 안내자 삼아 폭포에 도착해, 자연 한가운데서 홀로 멈춰 서서 진정으로 그 감동에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20대, 40대의 마차들이 역 앞에 줄지어 서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이 터져라 자신들의 호텔 이름을 외치며 전망대와 독점적인 파노라마 뷰, 저렴한 가격을 자랑했다! 5~6명의 직원들이 내 수하물 표를 요구했고, 다른 이들은 상점 명함을 건넸으며, 한 사람은 버닝 스프링을 잊지 말라고, 또 다른 이는 급류를 보라고 했다. 여기저기 굴뚝과 공장의 지친 활기, 도처의 상업 활동, 잡화점들, 술집들, 현대적인 거리와 그 거대한 광고판들, 간판들, 선전 문구들, “이리 철도를 타세요!”라는 거대한 나무 간판, 이윤을 좇는 인간들의 개미굴… 그리고 멀리서 포효하는 나이아가라 폭포!
오, 내 장엄한 떼껜다마여, 어디 있느냐? 접근하기 어려운 그곳, 처녀림과 험준한 오솔길, 야생의 바위들과 함께!
나는 평범한 호텔, 폭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안내서와 기억을 참고해 계획을 세웠다. 거리로 나가 한 시간 후를 위해 마차를 계약했다. 마부들의 집요한 권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나는 포효 소리를 따라 걸어갔고, 갑자기 폭포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넋을 잃었는가?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거대하고 전례 없는 것이었다.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실제의 모습을 그려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차분하고 느린 관찰을 통해 정신이 그 광경의 아름다움에 푹 빠질 시간이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수백 개의 동굴과 수천 권의 책에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그 형성 과정, 기원, 운명, 수량, 낙하 지점에서의 분기 등. 나는 그것을 다시 설명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내 목적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내 인상을 전할 뿐이다. 만약 내가 떼껜다마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했다면,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 깊숙한 곳에 숨겨진 그 거대한 폭포에 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매 순간, 관찰할 때마다 나의 경이로움과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커져갔다. 웅장함에 있어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약간 기울어진 평면을 따라 포효하며 흐르는 그 거대한 물줄기가 넓고 깊은 두 갈래의 급류로 합쳐져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장엄함으로 아래쪽 수로로 떨어지는 모습은 창조된 질서의 전반적인 붕괴를 연상시킨다. 인상적인 것은 낙하의 높이(80에서 100피트)가 아니라 물의 양, 폭포 가장자리에 형성되는 거대한 곡선의 티타닉한 두께다. 캐나다 쪽에서 – 강이 미국과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 폭포는 강 전체 너비로 펼쳐져 중앙이 오목한 말발굽 모양을 이룬다. 미국 쪽 지류는 훨씬 좁고, 폭포는 캐나다 쪽만큼 압도적인 장엄함은 없지만 나름의 우아한 매력과 시선을 사로잡는 형태의 조화를 지니고 있다.
물이 떨어질 때 형성되는 곡선은 수평면에서 부러지며, 매끄럽고 두꺼운 일종의 커튼처럼 바위의 수직 절단면을 영원히 덮고 있다고 말했다. 추천되는 관점 중 하나는 폭포 아래, 바위 기반과 떨어지는 물기둥 사이에 존재하는 어둡고 소란스러운 심연이다.
나는 하늘 아래에서 야생의 힘을 펼치는 폭포의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을 천 배는 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봐야 했고, 그래서 열정도, 확신도 없이 미국 쪽 폭포 밑으로 인도하는 수력 철도를 탔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이아가라를 둘러싼 공원에 들어갈 때 이미 돈을 냈고, 이쪽저쪽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티켓과 영수증을 든 직원들이 나타났다. 얼마나 기꺼이 이 작고 연속적인 성가심 대신 한 번에 더 큰 금액을 지불했을까!
일단 바닥에 도착해 낙하 후 형성되는 강가에 서니, 그 물은 마치 최근의 재난에 아직도 충격받은 듯 고요했다. 나는 내 소망을 표현했고, 그들은 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젖지 않도록 발, 몸, 머리를 고무로 만든 신발, 옷, 모자로 감싸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숨이 막혔고, 포기할 뻔했다. 그때 내 모르는 동행(가이드는 두 사람을 한 손에 하나씩 잡고 간다)이 가벼운 수영복 차림으로 방에서 나왔다. 그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나도 물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갈망하게 될 정도로 옷을 갈아입었다. 우리는 서로 정중히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다.
바위 밑에 도달하려면 그 순간 태양 아래에서 천 가지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액체 태피스트리 뒤로 가야 했다. 페르시아나 중국의 가장 호화로운 천조차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돌을 밟고 건너거나 자주 무너지는 작은 나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우리는 아직 폭포에서 백 바라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물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소음이 귀를 멍멍하게 했다. 안내인이 소리쳐 말했지만,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꽉 잡고 있을 뿐이었다. 한 걸음 내딜 때마다 걷기가 더 힘들어졌다. 하지만 수증기와 물거품, 그리고 번개처럼 빠르게 변하는 프리즘 빛에 눈이 멀지 않을 때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 거대한 물덩어리가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 하얀 소용돌이가 솟구치는 모습, 끊임없는 천둥소리는 힘든 걸음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우리는 잠시 독일인 동료와 함께 멈추기로 했다. 폭포에 등을 돌리고 잠깐 쉬었지만 불안한 마음으로 계속 전진했다. 우리는 물 뒤에 있었다. 귀를 찢는 소음이 들렸다. 마치 백만 문의 대포가 동시에 쉴 새 없이 발사되는 것 같았고, 짙고 깊은 어둠이 나를 둘러쌌다. 독일인은 고전적인 ‘도너베터!’를 계속 반복했고, 다른 욕설들은 ‘토이펠!’로 시작하거나 끝났다. 나는 눈을 뜨려고 애썼다. 노력 끝에 십분의 일 초 동안 빛줄기로 얼룩진 깊은 액체 벽을 보았다. 조금만 더 있었다면 질식했을 것이다. 출구에서 얼마나 기쁘게 숨을 쉬었는지! 우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우리는 기쁘게 강의 잔잔한 물결 사이에 누워 몸을 쉬게 하고 자연의 가장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았다.
뉴욕에서 일주일을 더 머물렀고, 마침내 라브라도 호에 탑승하여 즐거운 여행 끝에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남미 대륙 북부 해안을 향해 생나제르에서 출항한 지 정확히 1년 만에 유럽 땅을 밟았다.
내 긴 이야기에서 나는 국가들, 관습들, 그리고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내 작품의 가치는 비평가들의 평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내 이야기에 다른 확고하고 일관된 지침이 없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콜롬비아 여행에 대한 특징적인 묘사는 다른 나라를 다룬다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라나다 사람들의 명석하고 고귀한 지성은 내가 받은 인상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외국 땅에서 느낀 것 중 가장 즐거운 것이었다.
이 글을 마치며 여기까지 함께해 준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우리가 또 다른 여행을 함께 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내 운명은 천의 다양한 조합으로 인해 끊임없는 움직임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리고 펜에 대한 나의 열정은 고칠 수 없다.
탤러 그라피코 L. J. 로쏘 이 씨아
벨그라노 475 – 부에노스아이레스
- * * * *
“라 꿀뚜라 아르헨띠나”
도서관 대형판: 2 페소
마리아노 모레노 – 정치경제 저작집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인종의 갈등과 화합
후안 M. 구띠에레스 – 고등 공교육의 기원과 발전
플로렌띠노 아메기노 – 계통발생학
호세 M. 라모스 메히아 – 유명 인사들의 신경증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 – 알베르디-비평적 에세이
바르똘로메 미트레 – 운문집
아만시오 알꼬르따 – 중등교육
비센떼 피델 로뻬스 – 아르헨티나 역사 편람
후안 B. 알베르디 – 경제학 연구
호세 마리아 빠스 장군 – 독립 전쟁 – 유고록 – 제1부
호세 마리아 빠스 장군 – 내전 – 유고록 – 제2부
도서관 소형판: 1 페소
에스떼반 에체베리아 – 사회주의 교리와 경제 계획
베르나르도 몬떼아구도 – 정치 저작집
후안 B. 알베르디 – 전쟁의 범죄
후안 B. 알베르디 – 기초
후안 B. 알베르디 – 낮의 빛
후안 B. 알베르디 – 끼요따나스 서신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파꾼도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고향의 추억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아크로폴리스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101편의 글
안드레스 라마스 – 리바다비아
올레가리오 V. 안드라데 – 시 전집
루시오 V. 로뻬스 – 여행 회상록
리까르도 구띠에레스 – 서사시집
리까르도 구띠에레스 – 서정시집
에르난데스, 아스까수비, 델 깜뽀 – 마르띤 피에로, 산또스 베가, 파우스또
니꼴라스 아베야네다 – 문학 저작집
프란시스꼬 라모스 메히아 – 아르헨티나 연방주의
플로렌띠노 아메기노 – 학설과 발견
아구스띤 알바레스 – 도덕 세계의 창조
아구스띤 알바레스 –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아구스띤 알바레스 – 정치병리학 편람
비센떼 G. 께사다 – 아르헨티나 식민지 역사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 – 문학 회상록
마르띤 가르시아 메로우 – 아메리카 연구
J. M. 데 고리띠 – 성찰
후안 끄루스 바렐라 – 시 전집
프란시스꼬 J. 무니스 – 과학 저작집
라껠 까마냐 – 사회교육학
플로렌시오 산체스 – 내리막길 – 죽은 자들
에스떼반 에체베리아 – 포로 여인 – 기타 – 엘비라
미겔 까네 – 청춘 – 가벼운 산문
호세 마르몰 – 화음
호세 마누엘 에스뜨라다 – 로사스 독재 하의 자유주의 정책
미겔 까네 – 문학 담소
에바리스또 까리에고 – 이교도 미사 – 동네의 노래
아구스띤 알바레스 – 도덕 교육 – 세 번의 종
미겔 까네 – 여행 중 (1881-1882)
주문:
까사 바까로 – 마요 대로 646번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석:
[1] 제1집 제3권 350-377쪽 참조.
[2] 제1집 제4권 225-290쪽 참조.
[3] 제1집 제6권 161-181쪽 참조.
[4] 까를로스 3세와 그의 신하들이 아메리카의 발전을 위해 제도를 마련하려 한 관대한 시도는 위대한 군주의 사망과 함께 사라졌다. 까를로스 4세 치하에서 아메리카와 스페인 자체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시대의 비참한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비센떼 F. 로뻬스 박사는 “아르헨티나 역사”의 훌륭한 서문에서 까를로스 3세 치하의 아란다와 플로리다블랑카의 고귀한 정책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반박할 수 없는 권위로, 우리를 지배하던 법이 단순한 행정 메커니즘이었고 그 영향력이 도시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또한 유명한 “인텐단트 칙령”과 같이 실행 불가능한 실패작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나의 의도는 스페인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스페인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었다. “에스킬라체 폭동”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시대의 한 장면 같은데, 이는 지난 세기 말 스페인 민중의 지적 수준을 보여준다. 아메리카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식민지의 상황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
[5] 이 책이 인쇄에 들어가는 시점에 라 과이라에서 까라까스로 가는 철도가 개통된다. 구스만 블랑꼬 장군의 결단과 활동력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가 동포들의 감사를 받을 가장 작은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 철도는 까라까스를 아메리카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중 하나로 변모시킬 것이다. (1883년)
[6] 20년 전 베네수엘라의 과거를 반영하여 쓴 이 글은 슬프게도 현재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903년)
[7] “아메리카 레퍼토리” 제3권 191쪽. 이 인용문과 다음 인용문은 아메리카 문학의 영광인 마누엘 A. 까로가 삐에드라이따 주교의 “누에바 그라나다 왕국 정복의 일반사”에 쓴 훌륭한 서문에서 가져왔다. 보고타 1881년판.
[8] 베요, “소책자”.
[9] “빠넬라”는 정제하지 않은 설탕으로, 검은 덩어리 형태이며 우리의 “마사꼬떼”와 비슷하다. 해안 지역의 주요 식품 중 하나이다.
[10] 이는 현지의 전설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11] 실러, “빌헬름 텔”, 3막 3장.
[12] 이 책이 출판된 후 20년 동안 콜롬비아의 헌법은 깊고 빈번하게 수정되었으며, 내전으로 인해 국가는 피로 물들고 황폐화되었다. 마지막 타격이자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것은 빠나마의 분리였는데, 이는 콜롬비아 정부의 무모한 정책과 워싱턴 정부의 폭력적인 압제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이 판이 인쇄되는 시점에서 아직 측정할 수 없지만,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의 모든 지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03년 12월)
[13] ‘팔란’이라고 발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4] 라플라타를 제외한 모든 스페인계 아메리카에서 공통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우리의 문법에 맞지 않는 “~에서”를 대체한다.
[15] 이 두 “밤부꼬”의 전사는 콜롬비아에서 문서로 찾기 불가능한데, 테레사 탄코 양의 친절함과 재능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16] 순수한 원주민을 말한다.
[17] 보고타의 신사들은 사자 가죽으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
[18] 뒤에서 볼 수 있듯이, 이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
[19] “1826년, 볼리바르 장군은 이 장엄한 광경에 열광하여 참을 수 없었고, 무시무시한 심연의 입구에 이빨처럼 솟아 있는 2제곱미터 크기의 바위로 뛰어올랐다. 나도 내 탐험 중 하나에서 같은 바위로 뛰어올랐지만, 차이점이 있었다. 해방자는 굽에 쇠못이 박힌 부츠를 신고 있었고, 나는 미리 신발을 벗는 주의를 기울였다. 나는 18세의 전성기였고, 이는 부분적으로 내 무모함을 변명할 수 있다. 잘못된 발걸음, 미끄러짐만으로도 내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때때로 그 무모함을 생각하면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 후안 프란시스코 오르티스”
[20] 삐에드라이따. “누에보 그라나다 왕국 정복의 일반사”, 2권, 1장, 13쪽. 1881년 판.
[21] 콜롬비아 지리 사전.
[22] 꾼디나마르까의 자연 및 정치 지리학.
[23] S. 롤단의 그레고리오 구띠에레스 곤살레스. (콜롬비아 문학 선집)
[24] “신의 도움으로 이 소네트를 9월 10일 새벽, 아침 기도 후에 시작했다. 이 두 행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노래하면서 순서를 바꿔야겠다. – 10월 19일 오전 3시. – 이게 마음에 든다, 10월 30일 오전 10시. – 아니, 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 12월 20일 오후. – 이것을 다시 봐야겠다. 식사하러 부르는구나. – 2월 18일 오전 9시경: 이제 좋아졌다. 다시 한 번 봐야겠다… (페트라르카의 수고, J. 클라츠코가 인용. – “플로렌스의 대화”)
[25] 메넨데스 펠라요는 그의 저서 “아에네이스의 번역가들”에서 까로의 번역을 “스페인어로 된 최고의 번역”이라고 평가했다. 마드리드, 1879.
[26] 뽈리까르빠 살라바리에따.
[27] 템페스트. 1막 1장.
[28] 콜론에서 빠나마까지의 노선은 75킬로미터이며 1등석 요금은 5파운드 스털링이다! 운하 회사는 철도 주식의 대부분을 인수해야 했고, 이를 통해 발굴 자재와 인력 운송에 80%의 할인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29] 미국의 빠나마 운하에 대한 정책과 여론은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오기 위해 남미 남단을 돌아야 하는 지연으로 인해 국제 분쟁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니카라과를 통한 대양 간 운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더해져 최근 이스트무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1883년에 미국인들은 수에즈 운하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영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빠나마 운하에 반대했다.
[30] 미국은 조약을 통해 콜롬비아의 영토 보전을 보장했다! (1903)
[31] 오늘날 이 무역은 10배 더 크다.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