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은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고전 문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생성형 AI 기술인 LLM의 발전으로 팔만대장경 프로젝트가 가능해졌습니다. LLM은 거의 전문가 수준의 매끄러운 번역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 누구나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OpenAI 의 GPT-4o, Anthropic의 Claude-3.5 Sonnet Google의 Gemini-1.5 Pro와 Gemini-1.5 Flash, Stable Diffusion 의 Stable Image Ultra 및 Microsoft의 Text 분석 기술을 MAIDEPOT의 AI 자동 융복합 기능으로 결합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사용된 도구와 프롬프트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 PDF 300페이지 번역 전문가 수준의 초벌 번역"
물론 LLM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특성상 일부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고전 서적을 번역하여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날 것의 상태로 프로젝트의 양과 질과 높이는 일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번역 또는 편집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contact@maidepot.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정보: 이 텍스트는 1911년 출간된 하이람 빙엄(Hiram Bingham)의 남미 여행기 “Across South America”입니다. 작가는 1908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범미 과학 회의에 미국 정부와 예일 대학교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남미를 여행했습니다. 이 책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까지 포토시를 거쳐 이동하는 여정을 담고 있으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페루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장르는 여행기이며, 스타일은 객관적인 정보 전달과 주관적인 감상이 조화를 이루는 서술형입니다.
번역 시 고려사항:
1. 1910년대 초반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당시의 어휘와 문체를 살려 번역합니다.
2. 지명, 인명, 건축물, 역사적 사건 등 고유명사는 정확하게 번역하고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원어를 병기합니다.
3. 남미의 문화, 역사, 정치, 경제 등에 대한 배경지식을 활용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4. 작가의 유머와 풍자를 살려 번역합니다.
5. 측정 단위는 미터법으로 환산합니다.
6. ‘-했다.’와 같이 짧게 끝나는 문체를 사용하여 간결하고 명확하게 번역합니다.
7. 대화체는 각 인물의 성격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번역합니다.
모든 등장인물 정보:
– Hiram Bingham : 하이람 빙엄 – 미국의 탐험가이자 역사학자. 예일대 교수로, 객관적인 정보와 주관적인 감상을 섞어가며 냉철하지만 유머러스하게 여행을 서술한다.
– Huntington Smith, Jr. : 헌팅턴 스미스 주니어 – 빙엄과 함께 여행하는 동료.
– Don Santiago Hutcheon : 돈 산티아고 허천 – 볼리비아에서 마차 사업을 하는 스코틀랜드인.
– Mac : 맥 – 남아공 보어 전쟁 참전 후 아르헨티나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행운을 시험해보는 스코틀랜드인. 빙엄 일행의 아리에로(짐꾼)로 고용되지만, 실력이 부족하다.
– Fermin Chaile : 페르민 차일레 – 아르헨티나 출신 가우초. 맥 대신 빙엄 일행의 아리에로가 된다. 믿음직스럽고 유능하며 빙엄 일행을 잘 보살핀다.
– Dr. Moises Ascarrunz : 모이세스 아스카룬즈 박사 – 오루로의 지사. 친절하고 사교적이며, 빙엄 일행을 환대한다.
– Sr. Don Lino Velarde : 리노 벨라르데 씨 – 아레키파의 지사. 친절하고 배려심 깊게 빙엄 일행을 맞이한다.
– Honorable J. J. Nuñez : 호세 누녜스 각하 – 아푸리막 주의 지사. 온화하고 친절하며, 빙엄 일행에게 초케키라우 유적 탐험을 제안한다.
– Lieutenant Caceres : 카세레스 중위 – 페루 군 장교. 열정적이고 활기찬 성격으로, 빙엄 일행의 초케키라우 탐험을 안내한다.
– Castillo : 카스티요 – 빙엄 일행의 군 호위병. 대담하고 용감한 성격이다.
– Don Federico Martinelli : 돈 페데리코 마르티넬리 – 아우키밤바의 설탕 농장 주인.
– Don Gaspar Mauro Cacho : 돈 가스파르 마우로 카초 – 아야쿠초의 지사.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예의 바른 사람이다.
– Emilio Smith (or Schmidt) : 에밀리오 스미스 (혹은 슈미트) – 독일 뒤셀도르프 출신. 돈 없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까지 걸어서 횡단하려는 내기를 하고 여행 중 칭체로스에서 빙엄 일행을 만난다.
모든 중요 용어 번역어:
– ebook: 전자책
– The Project Gutenberg eBook: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전자책
– Across South America: 남미 횡단
– Pernambuco: 페르남부쿠 – 브라질의 북동부에 있는 주와 그 주도의 이름
– Bahia: 바이아 – 브라질의 동부에 있는 주와 그 주도의 이름
– Rio de Janeiro: 리우데자네이루 – 브라질의 남동부에 있는 주와 그 주도의 이름
– Santos: 산투스 – 브라질 상파울루주의 항구 도시
– Buenos Aires: 부에노스아이레스 – 아르헨티나의 수도
– Montevideo: 몬테비데오 – 우루과이의 수도
– Tucuman: 투쿠만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있는 주와 그 주도의 이름
– Gauchos: 가우초 –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남부의 초원 지대인 팜파스에 사는 목동
– Jujuy: 후후이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있는 주와 그 주도의 이름
– La Quiaca: 라 키아카 – 아르헨티나 북서부 후후이 주의 도시
– poste/tambo: 포스테/탐보 – 여행자를 위한 숙소 겸 마굿간
– arriero: 아리에로 – 짐을 운반하는 사람, 짐꾼
– Tupiza: 투피사 – 볼리비아 남부의 도시
– Uyuni: 우유니 – 볼리비아 남서부의 도시
– peso: 페소 – 볼리비아의 화폐 단위
– real: 레알 – 볼리비아의 보조 화폐 단위
– Quichuas: 케추아족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지역에 사는 원주민
– Aymarás: 아이마라족 – 볼리비아, 페루 남부, 칠레 북부에 걸쳐 안데스 고원 지대에 사는 원주민
– soroche/puna: 소로체/푸나 – 고산병
– Cerro: 세로 – 스페인어로 언덕, 산
– Potosí: 포토시 – 볼리비아 남부의 도시
– Casa Nacional de Moneda: 국립 조폐국
– Sucre: 수크레 – 볼리비아의 법적 수도
– Pilcomayo: 필코마요 – 볼리비아 남부를 흐르는 강
– chicha: 치차 – 남미에서 옥수수 등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술
– chola: 촐라 – 볼리비아의 전통 여성 의상을 입은 여성
– cebada: 세바다 – 보리 짚
– Challapata: 차야파타 – 볼리비아 서부의 도시
– Oruro: 오루로 – 볼리비아 서부의 도시
– Lake Poopo: 포오포 호 – 볼리비아 서부에 있는 염호
– Ferrocarril Antofagasta-Bolivia: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
– Antofagasta: 안토파가스타 – 칠레 북부의 항구 도시
– Valparaiso: 발파라이소 – 칠레 중부의 항구 도시
– Alameda de las Deliciosas: 알라메다 데 라스 델리시오사스 – 산티아고의 유명한 거리
– Santa Lucia: 산타 루시아 – 산티아고에 있는 언덕
– Pan-American Scientific Congress: 범미 과학 회의
– Club Santiago: 산티아고 클럽
– “Americano”: 아메리카노 – 산티아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인승 마차
– peso: 페소 – 칠레의 화폐 단위
– centavo: 센타보 – 칠레의 보조 화폐 단위
– Quinta Normal: 킨타 노르말 – 산티아고의 농업 학교 겸 공원
– Iquique: 이키케 – 칠레 북부의 항구 도시
– Combination: 콤비네이션 – 질산염 협회
– Arica: 아리카 – 칠레 북부의 항구 도시
– Mollendo: 모옌도 – 페루 남부의 항구 도시
– medanos: 메다노스 – 초승달 모양의 모래 언덕
– sol: 솔 – 페루의 화폐 단위
– Gran Hotel Marone: 마로네 그랜드 호텔 – 아레키파에 있는 호텔
– El Misti: 엘 미스티 – 아레키파 근처에 있는 화산
– Chachani: 차차니 – 아레키파 근처에 있는 화산
– finca: 핀카 – 농장, 농가
– Koropuna: 코로푸나 – 페루 남부의 화산
– Tiahuanaco: 티아우아나코 – 볼리비아 라파스 근처에 있는 고대 유적지
– Alto: 알토 – 고원 지대
– Viacha: 비아차 – 볼리비아 서부의 도시
– Crucero Alto: 크루세로 알토 – 볼리비아 철도의 역
– Saracocha: 사라코차 – 볼리비아 철도의 역
– Lake Titicaca: 티티카카 호 –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호수
– Juliaca: 훌리아카 – 페루 남부의 도시
– Puno: 푸노 – 페루 남동부의 도시
– Yavarí: 야바리 – 티티카카 호에서 운행하는 증기선
– Copacavana: 코파카바나 – 볼리비아 라파스 근처에 있는 도시
– Guaqui: 과키 – 볼리비아 라파스 근처에 있는 도시
– La Raya: 라 라야 – 페루 남부의 고개
– Sicuani: 시쿠아니 – 페루 남부의 도시
– Checcacupe: 체카쿠페 – 페루 남부의 도시
– Vilcanota: 빌카노타 – 페루 남부의 강
– Huatanay: 우아타나이 – 페루 남부의 강
– Oropeza: 오로페사 – 페루 남부의 도시
– San Geronimo: 산 헤로니모 – 페루 남부의 도시
– San Sebastian: 산 세바스티안 – 페루 남부의 도시
– Cuzco: 쿠스코 – 페루 남동부의 도시
– Alameda: 알라메다 – 가로수 길
– Santo Domingo: 산토 도밍고 – 쿠스코에 있는 수도원
– Sacsahuaman: 삭사이우아만 – 쿠스코 근처에 있는 고대 요새
– Hotel Comercio: 코메르시오 호텔 – 쿠스코에 있는 호텔
– La Merced: 라 메르세드 – 쿠스코에 있는 수도원
– San Francisco: 산 프란시스코 – 쿠스코에 있는 수도원
– Los Nazarenes: 로스 나사레노스 – 쿠스코에 있는 교회
– Rodadero: 로다데로 – 삭사이우아만 근처에 있는 언덕
– Urubamba: 우루밤바 – 페루 남부의 강
– Puquiura: 푸키우라 – 페루 남부의 마을
– Zurita: 수리타 – 페루 남부의 마을
– Challabamba: 차야밤바 – 페루 남부의 마을
– Limatambo: 리마탐보 – 페루 남부의 마을
– Mollepata: 모예파타 – 페루 남부의 마을
– Curahuasi: 쿠라우아시 – 페루 남부의 마을
– Trancapata: 트란카파타 – 페루 남부의 마을
– Sargantay: 사르간타이 – 페루 남부의 산
– Yllanya: 이야냐 – 페루 남부의 마을
– Pachachaca: 파차차카 – 페루 남부의 강
– Auquibamba: 아우키밤바 – 페루 남부의 마을
– Huancarama: 우안카라마 – 페루 남부의 마을
– Talavera: 탈라베라 – 페루 남부의 마을
– Tumusla: 투무슬라 – 페루 남부의 강
– Pincos: 핀코스 – 페루 남부의 강
– San Geronimo: 산 헤로니모 – 페루 남부의 마을
– Andahuaylas: 안다우아이라스 – 페루 남부의 도시
– Bombon: 봄본 – 페루 남부의 마을
– Pampas: 팜파스 – 페루 남부의 강
– Tambillo: 탐비요 – 페루 남부의 마을
– Ocros: 오크로스 – 페루 남부의 마을
– Matara: 마타라 – 페루 남부의 마을
– Marcas: 마르카스 – 페루 남부의 마을
– Acobamba: 아코밤바 – 페루 남부의 마을
– Urumyosi: 우루미요시 – 페루 남부의 마을
– Paucara: 파우카라 – 페루 남부의 마을
– Lircay: 리르카이 – 페루 남부의 강
– Mantaro: 만타로 – 페루 중부의 강
– Tablachaca: 타블라차카 – 페루 중부의 마을
– Yscuchaca: 이스쿠차카 – 페루 중부의 마을
– Huancavelica: 우안카벨리카 – 페루 중부의 도시
– Acostambo: 아코스탐보 – 페루 중부의 마을
– Pampas: 팜파스 – 페루 중부의 도시
– Jauja: 하우하 – 페루 중부의 도시
– Huancayo: 우안카요 – 페루 중부의 도시
– Oroya: 오로야 – 페루 중부의 도시
– Cerro de Pasco: 세로 데 파스코 – 페루 중부의 도시
– Lima: 리마 – 페루의 수도
– Callao: 카야오 – 페루의 항구 도시
– Hotel Maury: 마우리 호텔 – 리마에 있는 호텔
남미 횡단
[삽화: 코르코바도에서 바라본 리우]
남미
횡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포토시를 거쳐
리마까지의 여정 기록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페루에 대한 기록 포함
하이람 빙엄
예일 대학교
80개의 삽화와
지도 수록
[삽화: 로고]
보스턴과 뉴욕
호튼 미플린 컴퍼니
리버사이드 프레스 케임브리지
1911
저작권 1911, 하이람 빙엄
모든 권리 보유
2011년 4월 출간
이 책은
여섯 아들의
어머니에게
애정을 담아 바칩니다
서문
1908년 9월, 나는 미국 정부와 예일 대학교의 대표로 1908년 12월부터 1909년 1월까지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제1회 범미 과학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을 떠났다. 회의에 참석하기 전, 리우데자네이루와 브라질의 주요 해안 도시들을 방문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볼리비아 국경까지 아르헨티나를 횡단했으며, 남부 볼리비아를 말을 타고 여행하며 포토시와 수크레를 모두 방문했고, 오루로에서 안토파가스타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뒤 배를 타고 발파라이소로 갔다. 회의가 끝난 후 서해안, 아레키파, 티티카카 호를 거쳐 볼리비아로 돌아갔다. 오루로에서 다시 육로 여행을 시작해 볼리비아와 페루를 횡단했는데, 라파스, 티아우아나코, 쿠스코를 거쳐 오로야-리마 철도의 종착역인 우안카요까지 옛 잉카 도로를 따라 말을 타고 이동했다. 아반카이에서는 아푸리막 계곡에 있는 잉카 요새 초케키라우 유적을 탐험하기 위해 경로를 변경했다. 이 탐험은 아푸리막 주의 지사인 호세 누녜스 각하와 그의 열정적인 조수인 페루 육군의 카세레스 중위의 매우 관대한 도움이 없었다면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09년 3월 리마에 도착했다.
이 여행의 주된 관심사는 남미에서 가장 역사적인 고속도로, 즉 리마, 포토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잇는 옛 무역로를 탐험하는 것이었다. 이 도로의 더 어려운 구간들은 잉카와 그들의 정복자 피사로에 의해 사용되었고, 스페인 부왕들과 광산 소유주들, 상인들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아르헨티나의 해방군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마지막으로 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볼리바르와 수크레에 의해 행군과 역행군이 이루어졌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서의 이전 경험을 통해 반공식적인 자격으로 여행하는 특권이 남미 사람들, 그들의 역사, 정치, 경제,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여행의 주요 목적을 그렇게 삼았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수집하거나 확인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작업은 대부분 통계의 편집이 될 것이다. 일반적인 사실들은 워싱턴의 잘 조직된 범미국 사무국의 현재 출판물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 여행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일부 데이터는 포함시켰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유롭게 제공된 친절한 도움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볼리비아의 비야손 대통령, 고 몬트 칠레 대통령, 페루의 레기아 대통령, 현재 상원의원인 루트 장관과 외교 및 영사 서비스 관계자들, 로우 교수와 범미 과학 회의 대표단 동료들, 특히 J. 루이스 셰퍼 씨, W. S. 아이어 씨, 그리고 W. R. 그레이스 & 컴퍼니의 정중한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비즈니스 하우스가 과학자나 연구자의 길을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레이스 & 컴퍼니와 그들의 많은 지점의 관리자들과 직원들이 나뿐만 아니라 미국 대표단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보여준 모든 호의를 열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사리오 철도, 페루 공사, 볼리비아 철도 관계자들과 A. 데 페데르네이라스 대령, 아마랄 프랑코 씨, 돈 산티아고 허천, C. A. 노보아 씨, 아르투로 피노 토란소 씨, 알레한드로 아얄라 박사, 칠레 육군 루이스 메리노 대위, 돈 모이세스 바르가스, 로페스 차베스 씨, 찰스 L. 윌슨, A. G. 스나이더, U. S. 그랜트 스미스, J. B. 비즐리, D. S. 이글하트, 존 피어스 호프, 랭킨 존슨, 레아 한나 그리고 내 여행을 더욱 편리하고 유익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여행 초반에 나와 함께했던 헌팅턴 스미스와 후반부에 나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클래런스 헤이에게 셀 수 없는 친절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의 일부는 이미 “미국 인류학자”, “미국 정치 과학 리뷰”, “대중 과학 월간”에 실렸습니다.
“사이언스 먼슬리”, “미국 지리학회 회보”, “과거의 기록”, “예일 쿠런트” 편집자들에게 이 자료를 현재의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이람 빙엄
예일 대학교, 뉴헤이븐, 코네티컷
1910년 11월 20일
목차
페이지
I. 페르남부쿠와 바이아 3
II. 리우,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무역 16
III. 부에노스아이레스 29
IV.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연대 46
V. 투쿠만 급행 60
VI. 아르헨티나 고원 지대를 지나 69
VII.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 81
VIII. 투피사에서 코타가이타까지 92
IX. 에스카라에서 라하 탐보까지 104
X. 포토시 117
XI. 수크레, 볼리비아의 법적 수도 133
XII. 차야파타로 가는 길 148
XIII. 오루로에서 안토파가스타와 발파라이소까지 164
XIV. 산티아고와 제1회 범미 과학 회의 180
XV. 북부 칠레 198
XVI. 남부 페루 211
XVII. 라파스, 볼리비아의 실질적 수도 224
XVIII. 볼리비아 철도와 티아우아나코 241
XIX. 쿠스코 254
XX. 삭사이우아만 272
XXI. 아반카이로 가는 잉카 도로 280
XXII. 초케키라우로의 등반 296
XXIII. 초케키라우 307
XXIV. 아반카이에서 친체로스까지 324
XXV. 봄본에서 아야쿠초 전장까지 341
XXVI. 아야쿠초에서 리마까지 360
XXVII. 남미의 특성들 379
색인 393
삽화
페이지
코르코바도에서 바라본 리우 (21쪽) 표지
바이아 하부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 12
리우에서 바라본 코르코바도 20
산투스 항구 24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두 30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25일 대로 34
우스파야타 고개 50
라 키아카의 호텔을 떠나는 우리 마차 82
투피사의 협곡 86
투피사 북쪽 계곡의 기묘한 첨탑들 90
밭을 갈러 가는 케추아 가족 94
우리가 지나온 계곡 98
눈 덮인 볼리비아 산의 첫 모습 112
조폐국 지붕에서 바라본 세로 120
스페인 저수지에서 바라본 포토시의 세로 124
고대 케추아의 광석 분쇄기 124
포토시의 시장 128
더 푸르고 인구가 많은 계곡들 132
바르톨로의 그림 같은 옛 교회 134
양과 알파카를 위한 목초지 138
케브라다 온다에서 직물을 짜는 케추아 여인 138
거대한 필코마요 강 142
수크레의 우리 호텔 142
버려진 탐보 150
볼리비아 대고원의 첫 모습 150
친근한 새끼 라마 160
마지막 날 타고 간 내 노새 160
오루로의 관청과 광장 166
오루로의 독특한 옛 발코니 170
오루로의 한 모퉁이 170
산티아고 근처 마이포 전장 186
모옌도 212
아레키파의 대성당과 차차니 산 216
아레키파의 오래된 문 216
차차니와 미스티 216
티아우아나코의 일석상 228
라파스의 시장 232
티아우아나코의 놀라운 계단 232
티티카카 호의 과키 근처 발사 240
볼리비아 철도 근처의 오래된 교회 240
수 톤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석제 대 250
거대한 일석문의 일부 250
쿠스코의 라마들 258
삭사이우아만에서 바라본 쿠스코 258
삭사이우아만 266
쿠스코의 광장, 대성당과 예수회 교회 266
삭사이우아만 하부 테라스의 한 구역 274
쿠스코 출토 잉카 도자기 278
쿠스코 출토 의복과 장식된 노새 고삐 278
쿠라우아시의 군수와 그의 가족 288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협곡 298
경이로운 아푸리막 협곡 298
초케키라우에서의 일출 302
아푸리막 강을 가로지르는 허술한 작은 다리 302
진흙으로 쌓은 돌로 지은 1층 반 높이의 건물 308
지붕 꼭대기까지 올라간 파티션 벽 308
외벽 절벽 근처 건물들의 내부 312
거대한 계단의 위쪽 여섯 단 312
초케키라우에서 발견된 두개골 등 316
초케키라우의 한 건물 내부 316
파차차카 다리 위의 우리 일행 324
일부 양들은 매우 길고 구불구불한 뿔을 가졌다 334
친체로스의 클럽 338
아야쿠초의 큰 광장 342
팜파스 강 다리 342
아야쿠초 346
호텔 안마당 346
아야쿠초의 그림 같은 모퉁이 350
흔들리는 현수교로 폰고라 강 건너기 350
아야쿠초 전장 354
스페인군에게 보였던 전장의 모습 354
우아르파 다리 362
우루미요시 366
파우카라 근처의 오두막 366
타블라차카의 통행료 다리 368
우안카요의 일요일 아침 372
지도
저자의 남미 횡단 경로 3
페루 남부 81
볼리비아 남부 281
초케키라우와 그 주변 307
초케키라우 하층 광장 310
초케키라우 상층 광장 314
쿠스코와 인근 요새들 318
표지 그림과 20페이지의 삽화는 마르크 페레즈의 사진이다. 50, 216, 226, 232, 258, 298, 302, 324, 342, 346, 350, 354, 362페이지의 사진은 C. L. 헤이 씨의 것이며, 150, 160, 170페이지의 사진은 H. 스미스 씨의 것이다.
남미 횡단
남미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여행자는 뉴욕에서 매달 출발하는 직행 선박을 이용하거나, 내가 그랬듯이 배를 놓치고 시간에 쫓긴다면 사우샘프턴이나 셰르부르로 가서 매주 출발하는 우수한 증기선을 이용할 수 있다. 브라질로 가려면 유럽을 거쳐야 한다는 옛말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일부 관리들은 태평양 연안의 리마에서 아마존 강의 페루 항구인 이키토스로 갈 때 이 근거 없는 말을 여전히 고수한다. 그들은 세로 데 파스코를 경유하는 매우 불쾌한 육로 여행을 피하려 하면서도 파나마, 뉴욕, 파리를 거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 경로라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먼 길을 돌아가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로열 메일 라인의 매우 안락한 새 증기선에는 많은 브라질인과 아르헨티나인이 탑승할 것이고, 그들로부터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고 소통에 열려 있었으며, 외국 자본, 건전한 이민, 그리고 급속히 확장되는 철도 체계로 인한 ‘황금의 손길’을 받은 동부 해안의 현대인들의 관점을 훌륭히 소개해 주었다. 또한 나는 아라곤 호에서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프랑스인들을 많이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그들의 잘 계획된 노력으로 산업이 발전하여 스페인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고국을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처음 동부 해안을 방문하는 평균적인 북미인은 눈을 비비며 이 모든 철도 건설과 은행 합병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의아해한다. 배에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이 거의 없었던 것은 그들이 같은 시기에 대양을 건너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국 선사의 새 증기선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국기를 단 배를 타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페르남부쿠와 바이아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더 빠른 증기선들은 이제 이 항구들을 일정에서 제외한다.
브라질인들은 남미의 가장 동쪽 항구를 레시페(‘암초’)라고 부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페르남부쿠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유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여행자들 대부분은 열린 정박지에 1.6km 정도 떨어져 정박한 증기선 갑판에서 이 고풍스러운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을 선호한다. 동쪽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대양의 너울은 작은 서프 보트들을 위험해 보이게 흔든다. 미끄러운 승강계단을 내려가 당신을 놀라울 정도로 갑자기 들어 올렸다가 또 실망스럽게 멀어져 가는 그을린 피부의 뱃사공들의 강한 팔에 뛰어들 기회를 잡기 위해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라곤 호의 1등실 승객 300명 중 우리 다섯 명만이 육지로 모험을 감행했다. 미국인 셋, 프랑스인 하나, 스코틀랜드인 하나였다. 다른 승객들은 영국군 대표들을 포함해서 –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들은 나중에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 페르남부쿠의 매력이 ‘바다의 흰 말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고 방문한 것이 매우 보람 있었다고 전했다.
페르남부쿠는 의심할 여지없이 동부 해안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 중 하나다. 증기선에서 보이는 것은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길고 낮은 해안과 여기저기 흰 건물들, 그리고 등대 한두 개뿐이다. 북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언덕에는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세운 고대 도시 올린다가 있다. 헨리 허드슨이 맨해튼 섬에 발을 디딘 지 100년 전 일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매사추세츠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할 무렵,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미 이 지역에 설탕 공장을 여러 개 세웠다. 그 후 네덜란드 사람들이 와서 정복하고 페르남부쿠를 건설했으며, 25년 동안 이 해안을 지배하면서 북동부 브라질 식민지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 그들의 수도는 현재의 상업 중심지에서 6.4킬로미터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된 궁전들과 고대 수도원들이 있는 마을이 되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브라질 해안에 큰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설탕을 비롯한 귀중한 상품들을 많이 가져갔다. 이는 2세기 전 니우호프가 호화로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200년 전 니우호프가 그린 그림들은 여전히 생생하고 사실적이지만, 그 시대 이후 이 세계가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를 강조할 뿐이다.
이제 세 개의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이 이곳에 닿고, 여섯 개의 증기선 회사들이 정기적으로 기항한다. 옛 네덜란드 범선들은 거대한 자연 방파제인 암초 뒤에서 훌륭한 피난처를 찾곤 했다. 레시페 항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브라질 동해안 어느 곳도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는 없으며, 현대적 개선으로 입구가 깊어져 흘수 4.5미터 미만의 선박은 입항해 잔잔한 물에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형 원양 여객선은 여전히 외해에 정박해야 한다. 예인선이 화물을 실은 바지선을 끌고 나가지만, 승객들은 서프 보트의 자비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를 태운 보트를 6명의 어두운 피부의 노잡이가 힘차게 저어 암초의 북쪽 끝을 표시하는 등대를 지나 잔잔한 항구 안쪽으로 들어갔다. 검은 암초 위 등대에서 남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낡은 성채가 있다. 현대식 대포라면 금방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17세기 해적들로부터 항구를 방어하는 데는 훌륭히 그 목적을 다했다. 이 방파제 맞은편, 본토에서 조수 강으로 분리된 두세 개의 ‘해상 섬’에 페르남부쿠의 옛 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아주 거친 항해의 위험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미끄러운 돌계단을 기어올라 세관의 입국 심사장으로 쓰이는 2층짜리 8각형 건물로 들어갔다. 심사는 잠깐이면 끝났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이 고색창연한 열대 도시의 눈부신 햇살 아래로 나섰다. 그리고 관광을 시작했다.
바로 앞에는 3~4층짜리 창고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돌로 멋지게 지어져 있었다. 이 건물들은 항구에 안정감과 품격을 더해주고 있었다. 창고와 방파제 사이에는 나무가 심어진 돌 포장 광장이 있었는데, 이곳이 레시페의 리알토였다. 이곳에서는 말끔한 흰 정장 차림의 현지 상인들부터 수다스럽고 반쯤 취한 외국인 부랑자들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눴다. 방파제 너머로는 십여 척의 소형 원양 증기선이 방파제에 계류해 있었고, 그보다 작은 배들인 슬루프, 스쿠너, 브리간틴들은 세관 선착장이나 레시페를 본토와 분리하는 느릿한 베베리베 강에 정박해 있었다.
우리는 거리를 거닐며 증권 거래소, 해군 기지, 주요 상가를 지나치면서 여러 광경을 목격했다. 아프리카계와 포르투갈계가 뒤섞인 혈통의 가난한 브라질 사람이 작은 관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 아침 소나기로 포장된 인도에 고인 물웅덩이에 서 있는 맨발의 아이들, 어깨에 화려한 색상의 숄을 두른 맨머리의 여인들, 반짝이는 흰 리넨 정장을 입은 깔끔한 독일인 점원들, 허름한 옷차림의 뱃사람들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는 모습,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긴 낮은 수레에 설탕 자루를 가득 싣고 가는 모습이었다. 각 수레는 뿔이 앞쪽 나무틀에 묶인 한 마리의 인내심 강한 소가 끌고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두 마치 모든 일을 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듯이, 또 뉴욕 로어 맨해튼의 부산함과 소란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이 광경은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의 모습이었다. 여기서는 ‘스페인계 아메리카’라는 말을 조심해서 써야 한다. 브라질 사람들이 그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스페인 사람이 아니며 스페인어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언어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고 현지인들의 자부심도 그리 강하지 않아서, 당신이 무례하게도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도 그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르투갈어로 대답할 것이고, 그때는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친절을 베풀어 이해하는 척해야 할 차례다.
레시페 서쪽, 다른 섬과 본토에는 다른 공공 건물과 공원, 그리고 가장 좋은 주택들이 있었다. 노새가 끄는 원시적인 전차가 다리를 건너 교외로 향했는데, 그곳은 꽤 아름다웠지만 일부 집들은 온대 지방에서는 어울리지 않을 기이한 색채 효과를 내려고 했다. 이곳에는 꽤 괜찮은 호텔들이 있었고 영국인 거류민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백인이 번성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일일 기온 변화가 매우 작고, 우기와 건기의 평균 기온 차이도 3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페르남부쿠에서는 북쪽, 서쪽, 남쪽으로 3-4개의 철도가 뻗어 있었다. 어느 것도 320km를 넘지 않았지만, 모두 주변 지역의 풍부한 사탕수수와 면화 수확물을 모아 유럽과 미국의 공산품과 교환하기 위해 화물선으로 가져왔다. 세관의 규모와 그곳의 분주한 광경을 보면 이 항구의 사업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6대의 증기 크레인이 복잡한 브라질 관세를 내야 할 물품들을 쉴 새 없이 하역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계적인 활동과 현대식 세관 창고가 구시가의 좁고 악취 나는 거리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모습은 꽤나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부두가 건설되고 더욱 현대적인 방식이 도입되면 앞으로 더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지금도 이 도시에는 15만 명이 넘는 인구가 있었고, 상인들은 좋은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점원들은 느리게 움직이고 진취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열대 지방의 사업 방식을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곳이 안전하게 서두를 수 있는 기후가 아니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했다. 일을 천천히 해야 일하는 사람이 오래 갈 수 있다. 거칠고 열정적인 활력으로 가득 차 이곳에 온 외국 상인은 조심하지 않으면 곧 열병으로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이들은 태평한 사람들이었으며, 정치적, 상업적 변화가 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는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정부 상황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들의 즉흥적인 사업 방식은 그들의 환경에 잘 맞았다. 유럽인들은 미국인들보다 적응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본국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여기와 남미의 다른 지역의 현지 상황에 최선을 다해 적응해야만 했다. 반면에 미국인 동료는 아직 자신이 보기에 터무니없어 보이는 편견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브라질 무역을 상징하는 것이 레시페 어부들이 거대한 대양으로 과감히 나가는 원시적인 작은 카타마란이다. 이 연약한 작은 배들은 그저 그런 정도로 안전하며, 기껏해야 소량의 물고기만 가져올 수 있다. 매우 불편하고, 승선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배 위로 휘몰아치는 파도에 젖은 채로 보내야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증기선 승객들이 페르남부쿠에서 보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다. 모험을 감행하고 상륙해보지 않는 한 말이다.
육지로 내려가 레시페 맞은편에 있는 현대식 세관 부두를 볼 수 있고, 이곳의 상업적 가능성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오후에 페르남부쿠를 떠나 다음 날 아침 바이아 근처 해안의 초록 언덕에 도착했다. 증기선은 해안에 충분히 가까이 지나가 쌍안경으로 바이아의 부유한 시민들이 반도의 바다 쪽에 지은 해수욕장과 아름다운 작은 별장들을 볼 수 있었다. 곶 끝에는 바위와 파도 바로 위에 아름다운 하얀 등대 탑이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들어갈 때 항구 입구 근처의 위험한 모래톱에 좌초해 있던 멋진 독일 증기선을 구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천천히 낮은 곶의 남쪽 끝을 돌아가자 바이아 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큰 석조 창고들, 정원과 우아한 야자수로 뒤덮인 가파른 언덕으로 분리된 하부 도시, 수많은 교회와 공공 건물의 탑과 돔이 눈에 띄는 상부 도시가 보였다.
항구로 들어갈 때 왼쪽에는 흥미로운 이타파리카 섬이 솟아 있다. 영국은 한때 포르투갈에 빚진 빚을 갚는 대신 이 섬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이 섬은 여러모로 지브롤터와 닮았지만 영국의 요새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바이아 시민들의 인기 있는 휴양지로, “가난한 사람들의 유럽”이라 불린다. 대서양을 건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이곳의 쾌적한 기후를 즐기러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타파리카 섬을 왼쪽에 두고 지나가자 앞쪽과 북쪽으로 도시에 이름을 준 장관을 이루는 만이 펼쳐졌다. 리우를 유명하게 만드는 낭만적인 산은 없지만, 아름다운 푸른 바다에 여기저기 점점이 떠 있는 어선과 카타마란의 하얀 돛이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해안에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정박했고, 곧 항만 공무원들을 태운 증기 보트가 다가왔다. 만의 잔잔한 물에만 적합한 작은 배를 가진 현지 뱃사람들은 페르남부쿠의 튼튼한 서프 보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줄지어 서서 증기선으로 향할 수 있다는 신호를 기다렸다. 돛을 올리고 증기선을 향해 경주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보트 선원들의 함성으로 생기가 넘쳤다. 일부 보트에는 우리 삼등 승객들이 열심히 흥정하는 맛있는 열대 과일이 실려 있었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의 수확을 위해 가는 스페인 농부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우리를 육지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 늘 그렇듯 지체된 후, 우리는 한 뱃사공과 거래를 했다. 그는 게으른 녀석이어서 경쟁자들이 노를 저어 앞서가는 동안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려고 시간을 허비했다. 가는 길에 우리는 여섯 척의 증기선과 몇 척의 범선을 지나쳤고, 수많은 거대한 바지선과 수십 척의 작은 배 사이를 조심스럽게 조종했다. 페르남부쿠에서 본 강철 증기 크레인 대신 부두에는 수동으로 작동하는 많은 목재 크레인이 있었다.
우리는 미끄러운 나무 계단에 내려 뜨겁게 달아오른 거리의 포장도로를 서둘러 건너 하부 도시를 가득 메운 큰 창고와 도매점들의 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일부 간판은 매우 기괴했고, 현대 프랑스풍 포르투갈어 예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크게 소리치며 고객을 유치하려 했다. 페르남부쿠의 그림 같은 풍경은 없었고, 우리는 곧 톱니바퀴 철도 중 하나로 갔다. 몇 센트를 내고 우리는 나무로 된 허름한 객차에 올라탔고, 목적에 비해 너무 약해 보이는 케이블에 의해 가파른 경사면을 끌려 올라갔다.
일단 상부 도시에 오르니 좁은 상업 거리는 뒤로 하고 더 넓은 도로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야자수와 다른 열대 식물이 가득한 녹색 공원이 있었다. 사방에 교회가 있었고,
[그림: 바이아의 하부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경]
일부는 놀랍게 장식되어 있고 매우 매력적이었다. 바이아는 페르남부쿠만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16세기 중반에 건립되었다. 일찍이 포르투갈령 아메리카의 종교적, 지적 중심지가 되었고, 리우에 밀려났지만 여전히 문학과 문화로 유명하다.
눈부신 흰색 햇빛이 모든 것을 또렷이 드러내고 그림자를 유독 짙고 시원해 보이게 했다. 거리 모퉁이마다 맛있어 보이는 과자를 잔뜩 실은 작은 접이식 매대가 있었다. 주로 흰옷을 입은 맨발의 새까만 주인들이 미국 전차 시스템의 철제 기둥에 기대어 서서 반드시 올 것 같은 손님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사방에서 검은 얼굴들이 보였다.
사실 바이아는 때때로 “늙은 물라토 여인”이라고 애정을 담아 불리는데, 이는 20만 인구의 90% 이상이 아프리카계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바이아는 2세기 넘게 브라질의 노예 무역을 독점했다. 19세기 중반까지 바이아 상인들이 주로 흑인들을 수입했다. 한 해에 6만 명의 노예가 들어온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미국산 전차를 타고 곧 잘 포장된 거리를 따라 교외로 달렸다. 여기에는 제과점 쇼윈도에 있는 제빵사의 최고 웨딩케이크처럼 무섭고 신기하게 만들어진 별장들이 있어 로코코 양식의 사치를 좋아하는 현지인의 취향을 보여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주요 건물들은 잘 지어진 것 같았고, 종종 4-5층 높이였다.
바이아의 건축은 확실히 포르투갈 풍이다. 페르남부쿠보다 훨씬 더 그렇다. 페르남부쿠는 여전히 네덜란드 기원의 흔적을 보여주며 심지어 쿠라사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바이아의 일부 별장은 리스본의 것들과 놀랍도록 닮았다. 포르투갈의 수도와 브라질의 이 종교 수도 사이에는 다른 유사점도 있다. 둘 다 멋진 하구에 위치해 있어 바다에서 오는 여행자에게 멋진 광경을 선사한다. 둘 다 상부와 하부 도시가 있어 엘리베이터와 톱니바퀴 또는 케이블 철도를 이용해 연결해야 할 만큼 가파른 언덕이 있다. 각각의 상부 도시에서는 항구와 정박지, 주변 지역의 광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유사점은 끝난다. 리스본은 여러 언덕에 지어졌지만, 바이아는 웅장한 만을 보호하는 녹음이 우거진 단일 곶을 차지하고 있다.
바이아는 설탕과 면화, 카카오, 담배의 상당한 무역의 중심지다. 이것들은 육로와 수로로 항구로 운반되지만, 주로 산 프란시스코 강 북쪽과 주 서부 내륙으로 향하는 철도를 통해 운반된다. 이곳에는 많은 부의 증거가 있다.
도시에는 외국 무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기업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대규모 미국 상업 회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장비를 갖춘 전차 노선은 희망적인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거리와 상점에서 만나는 브라질 사람들은 미국인들에게 분명히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북아메리카 합중국’ 시민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으스대는’ 태도는 없다. 브라질인들은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가장 좋은 고객이라는 것을 아는 듯하며, 우리와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 제2장 리우, 산투스, 그리고 브라질 무역
바이아에서 이틀을 항해하자 리우데자네이루 만 입구를 알리는 놀라운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만 입구 남쪽을 지키는 듯한 유명한 슈가로프 산이었다. 그 뒤로는 더욱 낭만적인 지역이 있었는데, 꼭대기까지 푸르지만 경사가 너무 가파르고 봉우리가 너무 날카로워서 어떻게 식물이 자랄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의 더 높은 산들이 모여 있었다. 이 지역은 사실 절벽과 낭떠러지, 봉우리와 산정상이 너무나 다양하게 뒤섞여 있어서 개별적인 형태가 아름다운 언덕들의 혼돈 속에 묻혀 버렸다.
항구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들은 폭이 1.6킬로미터도 안 되는 통로를 만들었다. 슈가로프 산 기슭에서 우리는 거대한 바위 그림자 아래 낭만적으로 자리 잡은 요정 같은 하얀 도시를 보았다. 그곳은 새로운 브라질 국립 박람회장이었다.
화강암 장벽을 안전하게 통과하자 만이 펼쳐지며 수백 개의 섬이 점점이 박힌 내해가 되었다. 육지로 둘러싸인 이 분지에는 130제곱킬로미터의 깊은 물이 있었다.
만의 북쪽 해안에는 주도인 니테로이가 있다. 그 이름은 만의 옛 인디언 명칭인 ‘숨겨진 물’을 기념한다. 만 남쪽에 있는 공화국의 수도 이름은 이 만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큰 강의 입구로 오인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1월의 강이라는 뜻이다.
16세기 초부터 리우는 발견과 정복의 연대기에서 두드러졌다. 마젤란은 유명한 세계 일주 항해 중에 이곳에 들렀다. 그가 상륙한 곳은 지금 대형 병원과 의과대학이 있는 자리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위대한 콜리니 제독 시대에 이곳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다. 항구로 천천히 들어가면서 우리는 파크먼이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한 낭만적인 이야기의 무대인 역사적인 비예가뇽 섬 옆을 지났다.
나폴레옹의 분노를 피해 포르투갈 왕이 이곳으로 왔다. 세계가 본 가장 자비로운 군주 중 한 명인 훌륭한 돈 페드로 2세 황제가 이곳에 살았다. 그리고 이 바다로 곧 브라질의 새 드레드노트 전함들이 들어올 것이다. 전 세계가 이에 대해 추측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경제 발전의 필요성을 거의 잊을 정도로 군비 면에서 브라질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오랫동안 건설 중이던 정교한 새 부두 시스템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해안에서 1.6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정박했는데, 20여 척의 원양 증기선과 50여 척의 범선 근처였다. 닻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시끄러운 증기 발동선 함대에 둘러싸였고, 그들의 호각 소리가 지옥 같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20여 척의 이 시끄러운 배들이 동시에 우리 배의 승강구에 붙으려 했다. 게다가 50여 척의 노젓는 배들이 삼등실 승객들이 하선하려는 사다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입항하기 전에 이곳에 수백 건의 천연두 사례와 다른 전염병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적은 교통비만 지불할 수 있다면 육지에서 나와 우리 배에 승선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얼마나 시끄러운 수다와 비단 치마 소리, 거대한 모자의 깃털 흔들림이 있었는지! 귀국하는 시민들에게 얼마나 열광적인 인사를 했는지! 얼마나 초현대적인 파리 패션이었는지!
육지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리우의 특징을 발견했다. 전차, 세련된 자동차, 잘 포장된 도로, 전등, 쾌적한 호텔 등이 매우 두드러졌다. 한낮의 눈부신 햇빛만 아니었다면 쉽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찾아보면 현대적인 위생 개념에 따라 청소가 필요한 도시의 오래된 부분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도시의 유행하는 구역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새로 만든 멋진 도로를 빠른 자동차로 달리는 데 만족한다면, 리우가 건강에 해로운 항구라는 악명을 쉽게 잊을 수 있다.
리우 시는 큰 만 남쪽으로 뻗어 나온 넓은 반도에 펼쳐져 있다. 반도를 가로질러,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의 중심을 통과하여 브라질인들은 최근 아베니다 센트랄이라는 넓은 대로를 열었다. 마법처럼 멋진 현대식 상업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효과는 매우 화려하다. 넓은 대로는 그것을 가로지르는 매우 좁은 작은 거리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 중 하나인 루아 오우비도르는 리우의 재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여러 면에서 브라질에서 가장 흥미로운 거리다. 이곳에서 리우의 유명 인사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아베니다 센트랄의 한쪽 끝에는 몬로 궁전이 있다. 이 궁전은 한때 국제 박람회장으로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루트 장관이 참석한 제3차 범미 회의 개최지였다. 화려한 궁전 너머 동쪽으로는 몇 개의 작은 만이 있으며, 해안선을 따라 반원형으로 파인 곳이다. 최근 이곳에는 멋진 넓은 산책로가 만들어져 바닷바람을 즐기며 내해 너머로 산들을 바라보는 멋진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새 공원 산책로의 먼 끝에는 항상 존재감을 드러내는 슈가로프 산이 솟아 있으며, 그 기슭에는 국립 박람회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사이에 끼인 작은 지협에 위치해 있어 한쪽으로는 대양이, 다른 쪽으로는 아름다운 만이 펼쳐져 있는 놀라운 풍경을 자랑한다. 건물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며, 박람회와 연관 지을 수 있는 화려한 흰색 장식 스타일로 꾸며져 있다.
내가 본 군중들은 전적으로 브라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여러 번 이곳을 방문했으며 유행하는 저녁 만남의 장소로 여기는 듯했다. 브라질의 각 주에는 자체 제품을 전시하기 위한 건물이 있었고, 극장과 ‘미술관’ 건물, 제조업 전시관, 그리고 미드웨이를 흉내 낸 초라한 시도도 있었다. 한 건물 전체가 포르투갈의 제조업과 수출품 전시에 할애되었다. 다른 모든 건물은 브라질의 주나 산업에 할애되어 모국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두드러졌다.
리우의 대외 무역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가장 큰 수입 회사들은 프랑스와 영국 기업들이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사라졌고,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기업들에 의해 자리를 내주었다. 포르투갈산 제품에 대한 뚜렷한 선호는 매우 인상적이며 당연히 거스르기 어려웠다.
브라질은 최근 파리에 자국을 홍보하고 경제 확장을 돕기 위한 사무소를 설립했다. 이 사무소는 대부분 프랑스어로 된 상당한 양의 문헌을 발행하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과의 무역 증진과 브라질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민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부두의 완공은 상황을 크게 개선할 것이다.
하지만 리우는 새로운 부두 외에도 개혁된 세관 서비스가 필요하다. 리우에서 가장 성가신 것이 세관 공무원들의 태도라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그들은 봉급이 낮아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매우 나쁜 습관에 빠져서인지, 노골적으로 팁과 사례금을 받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리우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철저히 정직하지만 다소 짧은 성미를 가진 한 미국인 자연학자가 뻔뻔스러운 무례함을 당했다. 그는 뇌물을 주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화가 난 검사관들에 의해 개인 소지품이 더러운 창고 바닥에 무례하게 흩뿌려졌다. 그에게 과세 대상 물품이 있다는 의문은 전혀 없었다.
리우의 인구는 70만에서 80만 사이로 다양하게 추정되지만, 열정적인 시민들은 종종 이를 과장하여 100만 명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당연히 리우가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 인구가 적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꺼렸다.
리우의 교외는 매우 매력적이다. 아름다운 섬들이 점점이 박힌 거대한 만에는 그곳의 천혜의 아름다움을 이용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브라질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다양한 휴양지가 있다. 만의 여러 항구에서 철도가 모든 방향으로 뻗어 있어, 북쪽으로는 광산 지대의 중심부로, 서쪽으로는 커피 재배 지역을 지나 상파울루로 이어진다. 작은 관광 철도의 종착역은 근처에서 가장 높고 특이한 봉우리 중 하나인 코르코바도의 정상이다. 정상에서의 전망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훌륭하다. 만의 짙은 푸른 물, 열대 지방 특유의 솜털 구름에 반사되는 밝은 햇살, 초록으로 덮인 언덕들, 그리고 만 가장자리에 지도처럼 펼쳐진 하얀 도시가 어우러져 경이로운 광경을 만들어낸다.
아무리 짧은 리우에 대한 설명이라도 브라질의 대표적인 신문인 ‘조르날 두 코메르시우’에 대한 언급 없이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신문의 소유주이자 편집장인 J. C. 로드리게스 박사는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강력하고 능숙하게 편집된 신문을 통해 여론을 이끄는 것 외에도 여러 자선 사업과 브라질 관련 서적의 놀라운 도서관 수집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컬렉션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초기 브라질리아나에 관한 많은 이들이 찾는 책을 출판하면서 서지학자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다른 잘 편집된 신문은 ‘조르날 두 코메르시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아베니다 센트랄에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는 ‘오 파이스’다. 1년 구독료는 “3만 레이스”로 9달러를 조금 넘는다! 다른 남미 신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신문사의 사무실은 북미의 동시대 신문사들보다 훨씬 더 호화롭고 정교하다. 이 남부의 일간지들은 해외 전보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는데, 사실 우리 신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우리가 이웃들보다 더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세계 최대의 커피 항구이자 브라질에서 유일하게 적절한 접안 시설을 갖춘 도시, 산투스는 리우에서 하루 항해 거리에 있다. 이 도시는 구불구불한 바다 강이나 수로로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 주변의 습지와 평지, 그리고 여기서 볼 수 있는 범선들의 표백된 해골은 과거 산투스를 괴롭혔던 끔찍한 전염병을 충분히 상기시킨다. 커피를 싣기 위해 이곳에 온 배의 승무원 전체가 화물을 싣기도 전에 황열병으로 사망해 배가 정박지에서 썩어 없어졌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바뀌어 항구는 예상할 수 있는 만큼 건강해졌다.
그러나 도시는 매력적이지 않다. 페르남부쿠의 그림 같은 황소 마차도, 리우의 매력적인 주변 환경도 없다. 거리는 포장 상태가 나쁘고 진흙투성이다. 커다란 창고에서 부두로 커피 자루를 나르는 요란한 노새 팀은 우리 서부 도시의 수천 개와 똑같다. 같은 선로를 이용하는 허술한 교외 열차와 구식 전차는 지저분하지만 흥미롭지는 않다. 상점의 가격은 엄청나게 높다. 사실 모든 면에서 현대 상업의 혼란스러운 영향이 너무 많이 드러나 있다.
부두에 정박해 커피를 싣고 있는 긴 증기선 줄이 이곳의 특징적인 모습이며, 브라질의 자원을 광고하기 위해 최근 발행된 소책자의 표지에는 붉은 열매가 가득한 커피나무 가지가 그려져 있고, 그 뒤로는 거대한 원양 정기선의 사진이 있으며, 그 강철 선체로 커피 자루를 등에 진 하역 인부들의 끝없는 행렬이 행진하고 있다. 이는 브라질의 가장 큰 산업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산투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커피는 북쪽 산지에서 재배되며, 상파울루에서 산투스로 훌륭하게 갖춰진 영국제 철도를 통해 운송된다. 이 노선은 남미에서 가장 우수한 철도 중 하나다. 아름다운 열대 계곡을 따라 가파르게 상승하며, 대부분의 구간에서 케이블과 톱니바퀴의 사용이 필요할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노선을 따라 간격을 두고 배치된 발전소들은 청결함과 기계적 완벽함의 모범이다.
미국이 산투스 커피의 가장 큰 소비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지 기업의 대부분은 영국인의 손에 있다. 브라질에 대한 영국 자본의 투자는 엄청나다. 그 규모가 6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인들은 아직 브라질 무역의 가능성이나 미국과 브라질의 교역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브라질의 영토가 미국보다 크고, 브라질의 인구가 남미 전체의 나머지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으며, 브라질의 수출이 수입을 연간 1억 달러 이상 초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우리의 대외 무역을 발전시킬 기회를 이해할 수 있다.
브라질은 세계 커피 공급량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며, 엄청난 양의 고무도 생산한다. 원자재 생산 증대 가능성은 거의 계산할 수 없을 정도다. 이는 우리에게 딱 맞는 시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조품을 판매하고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것을 구매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분야를 개척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우리의 지식은 너무 자주 “브라질이 땅콩이 나오는 곳”이라고 알고 있는 유쾌한 사람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그림: 산투스 항구]
브라질의 주요 도시들을 분리하는 엄청난 거리와 교통의 어려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리우에서는 공화국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상파울루로 가는 수레길을 따라 자동차로 이동하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철도로는 약 12시간이 걸린다. 자동차 여행은 가장 힘든 3주가 걸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차들은 자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중부 브라질의 큰 해안 도시의 상인이 아마존과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시카고 상인이 호주와 연락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게다가 상황을 파악하려는 사람에게 화폐와 통화 제도는 처음에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처럼 보인다. 천 레이스(reis) 단위로 저녁 식사 청구서를 받는 것은 천 레이스가 약 30센트와 같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꽤 혼란스럽다.
또 다른 더욱 심각한 문제는 뉴욕과의 열악한 우편 서비스다. 남미 여행자에게 가장 짜증 나는 골칫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편물의 불안정성과 불규칙성이다. 라틴아메리카인의 마음은 이 점에서 우리와 다른 것 같다. 그는 서비스가 나쁘고, 느리고,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고, 끔찍할 정도로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하는 유일한 노력은 등기 우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중요한 것을 등기 우편에 맡긴다.
여기에 미국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직항 우편 증기선의 부족을 더하면, 브라질과의 무역 확대에 가장 심각한 장애물 중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브라질 시장의 두드러진 특징은 극도의 보수성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제품을 구매하는 데 익숙해진 브라질인들은 변화를 꺼린다. 미국 제품은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여유가 있는 브라질인은 로열 메일의 호화로운 증기선을 타고 여행하며, 그와 그의 친구들은 영국제 물품을 미국제보다 훨씬 더 유행하고 고급스럽다고 여긴다.
이는 우리가 브라질 해안 도시에서 누리는 상업적 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미국 은행이나 미국 증기선 회사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국기는 군함이나 구식 목조 범선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각에 이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국가 중 하나라고 주장하는 미국인들이 단순히 허풍을 떨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이러한 편견은 엄격한 사업적 관심으로만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 수출업자들은 아직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브라질에 보내는 대리인들은 포르투갈어를 거의 못하며, 유럽에서 온 언어 전문가들과 경쟁할 수 없다. 그들은 종종 판매하려는 상품 제조에 대한 기술적 훈련조차 부족하며, 이는 독일 경쟁자들에게 큰 이점을 준다.
브라질과 같은 나라에서는 상품을 매력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대리점을 설립하는 것이 상업 여행가보다 더 중요하다. 한 활동적인 수입업자는 미국인들이 해야 할 가장 필수적인 일은 상품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영구적인 창고나 전시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편물의 불안정성과 미국 은행이나 특송 회사의 부재로 인해 주문한 상품의 배달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현지 언어로 인쇄된 카탈로그를 사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효과가 적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남미로 상품을 발송하는 미국의 포장 방식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사실은 여러 출판물에서 자주 언급되어 더 이상의 비판이 불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반복된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선적업자들은 여기의 부두와 하역 시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유럽으로 보내는 것처럼 상품을 포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항구에서는 부선을 사용해야 한다. 이는 작은 석탄 바지선과 비슷하며, 상품은 선박 측면에서 이 부선으로 내려진다. 종종 다소 파도가 치고 있으며,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포장 상자의 내구성은 극한까지 시험받는다. 나는 타자기가 든 상자가 잡다한 상품 더미 위로 떨어져 바지선의 구석으로 구르고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다행히 이 특정 타자기는 그런 취급을 견딜 수 있도록 포장하는 법을 배운 미국 제조업체의 제품이었다. 그 결과 남미 전역에서 그 브랜드의 기계를 볼 수 있다.
리우의 미국 영사인 앤더슨 씨는 최근 몇 년간 브라질의 사업 상황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한 보고서를 북쪽으로 보내는 주목할 만한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별 요원인 링컨 허친슨 씨는 남미의 무역 상황에 대해 훌륭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있어 이 두 신사의 노고에 크게 빚지고 있다.
## 3장
## 부에노스아이레스
우리는 화요일 오후 늦게 산투스를 떠났고, 바다에서 두 번의 즐거운 날을 보낸 후 금요일 아침 몬테비데오 항구에 들어섰다. 항구는 모든 국가의 선박들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특히 세 척의 작은 증기선에서 미국 국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 기뻤다. 19세기 초에 남미 수역에서 특출했던 국기가 20세기에 다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 배들은 단지 등대 업무를 하는 정부 선박일 뿐이었다.
대서양 해안에서 태평양 해안으로 가는 등대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석탄을 보급했다. 몬테비데오는 마젤란 해협을 지나는 증기선들이 즐겨 들르는 기항지였다. 스페인의 제한적인 식민 정책에 저항하는 밀수업자들의 본거지였던 시절부터, 몬테비데오는 번영하는 무역 중심지였다. 오늘날 깨끗한 거리, 새 건물들, 전차, 멋진 상점들, 정교한 진열장, 잘 차려입은 사람들, 그리고 훌륭한 호텔들이 이곳이 현대적이고 편안한 도시임을 보여준다.
이곳이 “남미의 가장 격동적인 소규모 혁명 국가들 중 하나”인 우루과이의 수도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미국인들은 우루과이 금화나 지폐가 자국 화폐보다 2센트 더 비싸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영국인들은 ‘소버린’이 할인되는 것에 가장 불쾌해한다. 하지만 당혹감은 몬테비데오 사람들이 수입 사치품에 기꺼이 지불하는 높은 가격을 보면 솔직한 놀라움으로 바뀐다.
이 공화국은 작지만 황무지가 없고, 철도는 유럽 시장으로 향하는 많은 양의 양모와 식료품을 실어 나른다. 매년 3,000척 이상의 증기선이 이 항구에 입항한다. 대부분은 이곳에 기항하는 18개 영국 선사 소속이다. 이 도시가 부유하고 매력적인 상점과 대로를 갖추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아직 완공되지 않은 항만 시설 개선 공사는 가장 노골적인 정치적 부패로 크게 지연되었다. 하지만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미국의 어느 도시가 이 점에서 깨끗한 기록을 가지고 있겠는가?
우리의 폴 리버 보트와 비슷한 호화 증기선들이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를 매일 밤 왕복하며, 두 도시에서 사업을 하려는 늘어나는 사람들을 수용한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여행객은 도시에서 11-13km 떨어진 강에서 하선해야 했다. 얕은 물을 작은 보트로 건너 거대한 우차에 올라타 여정의 마지막 1-2km를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다. 그 후 수백만 달러가 들어간 놀라운 항만 개선 공사가 완료되어, 이제 대형 증기선들도 준설된 수로를 통해 도시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항구의 놀라운 성장으로 인해 웅장한 현대식 부두는 이미 혼잡했고, 화물 처리 속도는 매우 느려 짜증 나는 지연이 잦았다. 그래도 정기 여객선과 우편선은 신속한 서비스를 받았으며, 세관 검사 또한 빠르고 정중하게 이루어져 리우와는 대조적이었다. 앞으로 아르헨티나의 다른 두 중요 항구인 리오데라플라타 상류의 로사리오와 대서양 연안 남쪽의 바이아블랑카는 더 나은 접안 시설을 제공할 수 있어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특히 바이아블랑카는 아르헨티나 남부의 급속히 발전하는 농목 지역의 자연스러운 출구이기 때문에 훌륭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항상 정치적, 상업적 우위를 유지할 것이다. 이곳은 아르헨티나의 수도일 뿐 아니라, 5명의 아르헨티나인 중 적어도 1명은 이 좁은 거리의 주민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세계 제2의 라틴 도시로 순위를 매기고 있으며, 인구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호텔로 가는 길에 부두를 떠나자마자 이 거대한 도시의 상업적 힘에 감명을 받는다. 택시는 혼잡한 교통으로 진행이 더뎌진 거리를 천천히 지나는데, 이는 당신에게 이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외국 은행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은행들에 놀랄 기회를 준다. 견고한 건물들과 전반적인 견실함으로 보아 그들은 상황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국 은행이나 잘 알려진 월가 회사의 지점을 헛되이 찾는다. 미국 금융 기관들은 미국 상선들과 마찬가지로 눈에 띄게 없다. 보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는 앵글로색슨인들은 미국인이 아니라 깔끔하게 면도한, 발그스레한 뺨의 활기찬 영국인들이다.
영국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리오데라플라타’를 친숙하게 ‘B.A.’와 ‘리버 플레이트’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스페인어 단어를 쓰기를 꺼리며, 그들의 말을 들으면 자기네 소유물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데, 사실과 그리 멀지 않다. 멕시코가 미국 자본과 기업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리오데라플라타의 국가들과 도시들은 영국에 빚지고 있다. 영국 자본가들은 이 거대한 농업 지역의 가능성을 깨닫는 데 느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의 식량 생산 잠재력을 알고 있었고, 우리가 일리노이의 대초원과 캔자스의 평원을 덮은 것처럼 철도망으로 이곳을 덮었다. 아르헨티나에 투자된 12억 5천만 달러의 영국 자본 중 7억 달러 이상이 철도에 투자되었다. 이 엄청난 영국 자본의 지원을 받는 수천 명의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영국인들이 지난 세대 동안 아르헨티나가 이룬 놀라운 발전에 기여했다.
어떤 면에서 이곳은 영국 식민지다. 상업 지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를 하지 않고, 영국인은 여기에 허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를 하나로 묶는 것은 그의 철도다. 그의 사업이 이 나라의 수천 제곱킬로미터를 개척했고, 비록 1세기 전 그의 선조들의 어리석음으로 이 “자주색 땅”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잃었지만, 더 최근 선조들의 에너지로 그는 훌륭한 유산을 얻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미래를 크게 믿은 영국 주주들에게 큰 배당금을 지불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토착 아르헨티나인들을 상상을 초월하는 부자로 만들었다. 부모님이 옷 한 벌 제대로 없었던 토지 소유자들이 이제는 몇 대의 자동차를 주문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후원으로 플로리다 거리와 칸가요 거리에 화려한 전시를 하는 멋진 상점들이 유지된다. 이 거리들은 너무 좁아서 차량은 한 방향으로만 통행할 수 있지만, 상점들은 모든 면에서 일류이며 파리의 최신 모자 작품에서 최신 과학 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포함한다. 멋진 서점들, 큰 백화점들, 화려한 레스토랑들, 마지막 한 푼까지 비싼 곳들이 상류층의 부와 사치를 강조한다.
거리에서는 모든 유럽 언어를 들을 수 있다. 비즈니스 지구에서는 스페인어만큼이나 영어를 들을 가능성이 크고, 가난한 지역에서는 이탈리아어가 날로 흔해지고 있다. 서민들의 언어는 명목상 스페인어, 아주 나쁜 스페인어다. 사실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인도어 단어와 억양이 뒤섞여 아름다운 카스티야어를 훼손시킨 혼종어다.
리우가 아베니다 센트랄을 비즈니스 지구 중심부를 관통해 내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베니다 25 데 마요를 염두에 두었다. 전형적인 파리 대로를 모방한 것으로, 얼마 전 교통 편의와 도시 미화를 위해 개통되었다. 리우와 마찬가지로 아베니다에는 주요 신문사가 호화로운 사옥을 두고 있다.
‘라 프렌사’와 그 훌륭한 시설을 갖춘 건물은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곳에서는 유명 외국인을 접대하고, 강연을 열며, 온갖 광고 수법을 선보인다. ‘라 프렌사’는 태프트 대통령 당선 소식을 뉴욕보다 2분 빨리 알아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 중 상당수는 ‘라 프렌사’의 지면이 너무 선정적이고 경영 방식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시온’의 더 품위 있는 지면을 선호한다.
아베니다의 호텔들은 좁은 거리의 세 호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사실 그랜드나 팰리스보다 더 편안한 숙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곳 최초의 고층 건물 중 하나인 새 피닉스 호텔은 더 큰 편의를 약속하며 영국인 사회의 집결지가 될 전망이다.
극장이 많고 6월부터 화려한 시즌을 맞는다. 쾌락을 즐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최고의 좌석에 비싼 값을 기꺼이 지불하고, 매니저들은 최고의 배우들을 유럽에서 데려오기 위해 높은 출연료를 제안할 수 있다. 버라이어티 쇼가 인기 있는데, 미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극단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일부는 파리의 의심스러운 공연을 조잡하게 모방한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사로잡은 활동사진만큼 나쁘지는 않다. 남부 수도의 여론은 놀랍도록 느슨하다.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충격적인 외설 공연이 묵인된다. 이 점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도덕성이 훨씬 높은 산티아고 데 칠레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영향력을 잃은 것 같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종교를 잊었을 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조상들의 우아한 매너도 잃어버린 듯하다. 나는 8개 남미 수도를 다녀봤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만큼 매너가 나쁜 곳은 없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무례하게 밀치는 일이 없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오만한 행동과 나쁜 취향을 보지 못했다. 산티아고, 리마, 보고타, 카라카스는 다른 문명권에 속한 것 같다. 물론 그 어느 곳도 이처럼 부유하고 번영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모든 곳에서 상류 사회는 이 과대 성장한 젊은 대도시보다 훨씬 오래된 관심사다.
이곳에서는 신흥 부자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각과 본능이 지배하는 것 같다. 일요일 오후면 모든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경마장으로 달려가 도박 열정을 마음껏 발산한다. 조키 클럽 구역에는 도시의 젊음과 미모, 부와 패션이 모여든다. 그러나 여성들은 인위적인 치장을 너무나 과도하게 해서 그들이 상류 사회가 아니라 고급 매춘부에 속한다고 착각할 정도다. 내가 참석한 경마에는 3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 한 경주의 1등 상금이 1만 5천 달러에 달했다. 말들은 우리 것들보다 체구가 좀 더 큰 것 같았지만 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도박 시설은 정교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북메이커는 없었고, 유럽에서 흔히 그렇듯 배당률은 전적으로 대중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입장료 수입과 ‘수수료’ 수익이 엄청나 조키 클럽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클럽하우스 중 하나를 지을 수 있었다.
경마가 끝난 후 수백 대의 자동차와 마차가 사교계가 만남의 장소로 정한 공원 도로를 천천히 오가며 행진한다. 여기서 놀라운 화장과 분칠이 눈에 띈다. 모든 숙녀들이 화사한 얼굴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한 유행에 열중한 신도들의 얼굴을 밝히고 있다. 그 효과는 매우 불쾌하다. 이는 현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생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세월 확립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부유한 가문이 거의 없다. 교양과 세련됨은 평가 절하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인위성을 어떤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요란한 일요일 행렬은 크레올 숙녀들이 우아한 검은 레이스 만티야를 입고 조용히 교회를 오갔던 옛날과는 정반대다. 대부분의 남미 도시에서는 아직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부의 흔한 증거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파리와 뉴욕에서도 주목받을 만한 호화로운 저택들, 리오 데 라 플라타 강변에 아름답게 조성된 매력적인 공원들, 최신 유행의 파리 모자를 한가득 실은 수천 대의 호화로운 자동차들이 그것이다.
이곳이 전차와 전화, 택시의 도시라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 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도시의 특징적이고 놀라운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수입 순종 가축의 중앙 집하장이다. 거대한 은행과 철도 사무실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커다란 마구간들이 있다. 그곳에서는 대서양을 건너 뛰어난 혈통 기록을 가지고 온 화려한 혈통의 말과 소, 양, 돼지들이 판매되며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이 상설 가축 품평회는 부유한 목장주와 사육업자들이 모이는 자연스러운 장소였다. 그들은 도시에 머무는 동안 반드시 이곳을 방문했다. 목장을 구입하려는 외국인들과 내륙 소식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축 박람회는 현대 아르헨티나인들의 부와 목축업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팜파스에는 1억 마리가 넘는 양이 있었고, 소와 말도 수백만 마리에 달했다.
아르헨티나의 농업과 축산업 문제는 대토지 소유주들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주제였다. 그들은 이미 생산물의 품질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무는 동안 인근 도시의 농업 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25주년 기념일 축하 행사였다. 축제는 전형적인 스페인-아메리카 방식이었다. 나무가 늘어선 거리에 기념일 날짜로 이름을 붙이는 명명식이 있었고, 각 나무에는 폭죽 다발이 매달려 있었다. 거리 시작과 끝에는 이름이 새겨진 새 표지판이 세워졌다.
치즈 천으로 가려져 있던 표지판은 학교 관계자들과 학교가 속해 있는 라플라타 국립대학교 관계자들, 동문들과 방문객들로 이루어진 행렬이 적절한 연설을 들은 후 학교 건물에서 출발하여 새로 만든 가로수길을 따라 행진하면서 공개되었다. 행진하는 동안 폭죽을 터뜨렸다. 가로수길 끝에 있는 유칼립투스 숲에서 간식을 먹었고, 학교 소유의 훌륭한 말과 소들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학교는 넓은 부지를 갖고 있었고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 국가의 필요를 실용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축산업에 의존하는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는 충분히 보상받을 만했다. 아르헨티나의 냉동육 수출액은 연간 거의 2천만 달러에 달했다. 최근에는 시카고의 유명 정육 공장 중 하나가 이곳에 대규모 공장을 열고 현지 가축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아르헨티나는 매년 수백만 마리의 양과 소 도체를 유럽으로 보내고 있었고, 수백만 부셸의 밀과 옥수수도 수출하고 있었다. 사실, 이는 우리보다 더 많은 양이었다. 남미 공화국 중에서 아르헨티나는 우리의 가장 큰 자연적 경쟁자였고,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철, 석탄, 목재, 수력 자원이 부족하여 높은 보호관세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제품에서 경쟁력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보다 1인당 3배 이상 수출하고 있었고, 필요한 제조품 수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이는 또한 아르헨티나가 식료품을 판매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 항상 유리할 것임을 의미했다. 브라질은 우리가 자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원자재를 무제한으로 보낼 수 있었지만, 현재 아르헨티나는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아르헨티나의 양모와 가죽을 사고 있었고, 머지않아 영국이 수년간 해왔듯이 아르헨티나의 쇠고기와 양고기를 먹게 될 것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은행들은 매우 보수적인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이 도시는 미국에서 도망친 은행 출납원들이 즐겨 찾는 도피처였다. 소개장 없이 왔지만 돈을 펑펑 쓰는 잘 차려입은 미국인들이 때때로 이곳에 와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가 바람직하지 않은 지인으로 판명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졌다. 우리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기는 영국식 은행 방식이 여기서는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미리 은행에 신용장을 남미에서 사용할 것이라고 통보했더라도 신용장으로 돈을 인출하는 데 두 시간이나 걸리곤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미 전역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수표가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내륙에서는 잘 소개받지 않으면 더 어려웠다. 하지만 소개장의 필요성은 대륙 전체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었다. ‘신분증을 갖추지 않은’ 낯선 사람들은 종종 정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로 판명되었다.
칠레에서도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이한 점은 많은 시민들이 ‘미국인’이라는 호칭을 독점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능한 한 우리를 ‘A’ 대신 ‘N’ 아래에 분류했다. 그들은 또한 우리를 ‘북미인’ 또는 ‘양키’라고 부르며, 멕시코와 캐나다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우리 대사를 ‘북미 대사’라고 불렀다.
남미와의 무역 증대를 원하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남미인들을 달래고 싶어 하는 일부 미국인들은 실용적인 면을 간과하고 현지의 편견에 동조하여 자신들을 북미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편지를 ‘북미 합중국’으로 보내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남미인들이 우리를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 간접적인 칭찬이다. ‘미국인’이라는 단어는 주로 미국 시민들의 근면함과 지성 덕분에 칭찬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50년 전 저명한 외국인들이 그 형용사를 특히 모욕적인 말로 사용하던 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칭찬의 의미가 강해졌다. 이 용어의 의미가 변화하면서 남미인들도 당연히 이를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우리만큼이나 이 용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국 공화국의 법적 명칭에 시민들을 편리하고 듣기 좋게 특징짓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잊는다. 브라질 연방 공화국 국민은 브라질인이고, 멕시코 합중국 국민은 멕시코인인 것처럼 미국 합중국 국민은 미국인인 것이다. 물론 세계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를 미국이라고 생각하며,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여러 공화국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다. 이 두 단어 중 하나 또는 둘 모두에서 듣기 좋은 호칭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멕시코인과 캐나다인이 우리와 공통으로 가진 ‘북미인’이라는 정당한 호칭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북미인’이라고 구별할 수 없다. 이웃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우리가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는 큰 문제는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서 칠레와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자연스러운 성장으로 그 시민들이 칠레인 또는 아르헨티나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게 되어 우리의 유일하고 적절한 호칭을 시기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본다.
정치적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는 토박이들의 통제 하에 있다. 그들은 정치를 하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더 진지한 비즈니스 세계보다 정치를 훨씬 더 선호한다. 그들은 이를 기꺼이 외국인에게 맡긴다.
그들은 또한 더 많은 이민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인구 밀도는 평방마일당 겨우 5명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전체 인구의 너무 많은 부분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와 주에 집중되어 있어 이보다 훨씬 적다. 따라서 그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건장한 이민자들이 오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민자들이 오고 있다. 내가 탄 배는 천 명을 실어 날랐다. 다른 배들은 1908년에 30만 명 이상을 실어 날랐다. 아르헨티나는 정체되어 있지 않다. 또한 ‘미국의 기업’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1908년 동안 2천 척이 넘는 선박이 공화국의 항구에 입항했다. 그 중 4척만이 미국 국기를 달고 있었다.
제4장
아르헨티나 독립과 스페인계 미국의 결속
1910년 5월 25일, 아르헨티나 국민 전체,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독립 100주년을 적절한 의식으로 기념했다. 이 중요한 행사를 적절히 대표할 수 있는 축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6세기에 건설된 이후 25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스페인 왕실은 리오 데 라 플라타가 배수하는 광활한 초원지대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곳에는 금이나 은 광산이 없었고, 스페인은 본국의 농부들과 경쟁할 옥수수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 식민지를 먼 아메리카로 보내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세상의 끝으로 여겨졌다. 스페인에서 이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과 합법적 상품은 파나마와 페루를 거쳐 안데스 산맥을 넘어 남미 대륙을 횡단한 후에야 합법적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브라질 남부에 번성하는 포르투갈 밀수업자 집단이 생겨났다. 또 다른 결과는 스페인인들이 가능하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회는 리마, 산티아고, 보고타와 같은 유행하는 스페인계 미국 수도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18세기 말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깨닫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개항했다. 영국인들은 이곳이 남미에서 가장 좋은 상업적 위치 중 하나이며, 스페인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세상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남미의 큰 부분의 부가 통과해야 할 자연스러운 중심지라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미와의 영국 무역 발전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위대한 피트 씨는 아마도 군사 원정대의 뒤를 이어 영국 제조품을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방어가 너무 취약해 소규모 결의에 찬 군대로도 쉽게 점령할 수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그에 따라 1806년 6월 공격이 시작되었다. 부왕은 반복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방어할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쉽게 점령당했다. 런던에서는 승리 소식에 크게 기뻐했지만, 곧 치욕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 소식에 당황했다. 영국의 갑작스러운 패배는 주로 리니에르스라는 현지 영웅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는 포르테뇨들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교묘히 이용했다.
이 사건의 의미는 포르테뇨들에게 스페인의 권력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그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독립을 쟁취하고 지킬 용기와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영국의 포격으로 인한 피해에서 도시가 회복되기도 전에 전 스페인 제국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사건들이
남아메리카는 스페인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반도 전역의 전쟁을 시작했고, 세계는 스페인 국왕이 프랑스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1809년 7월, 나폴레옹과 싸우던 스페인 의회가 임명한 새 총독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정권을 잡았다. 1810년 초, 나폴레옹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서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스페인의 완전한 정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5월 18일, 불행한 총독은 스페인의 소식이 도시에 알려지는 것을 허용했다. 곧바로 대중적 토론의 열기가 일어났다. 벨그라노와 다른 자유주의적 크리오요 청년들의 주도로 시민들은 영국군을 물리쳤듯이 나폴레옹과 그의 꼭두각시 스페인 왕을 물리치기로 결정했다. 5월 25일, 겁에 질린 총독은 권력을 내놓았고, 광장을 가득 메운 대규모 민중 집회는 그를 대신할 위원회를 임명했다.
그래서 1810년 5월 25일이 아르헨티나 독립의 실질적인 생일이 되었다. 비록 민중 정부의 행위가 6년 동안 폐위된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독립 선언은 1816년에야 아르헨티나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말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프랑스 제1공화국처럼 적극적인 무장 선전을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다른 도시들은 강제로 독립의 이점을 깨닫게 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군대는 현재의 남부 볼리비아로 북상했다. 그들의 목표는 스페인 군대를 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수세기 동안 사용해 온 옛 교역로를 따라 볼리비아와 페루의 고원을 지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로 가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계산했다.
우선, 그 고지대 건조 지역의 원주민들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누가 그들의 주인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의 땅은 군사 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해발 3,000~3,600미터의 건조한 사막 고원이 수백 평방 킬로미터에 걸쳐 있었고, 이 지역은 매우 신중한 관개 시스템으로만 소수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 끔찍한 산길로 인해 적절한 보급 기지와 단절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큰 장애물이었다. 그들의 소규모 군대는 쉽게 격퇴되었다. 반면 왕당파 군대가 고원에서 내려와 애국자들을 공격하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사실 볼리비아 남부와 아르헨티나 북부는 이웃을 성공적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집에 머물며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훨씬 쉬운 지역이었다. 군대는 이동하면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없었고, 보급품을 공급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를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호세 산 마르틴이었다.
산 마르틴이 남미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볼리바르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고, 때로는 ‘남미의 워싱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조사를 견디지 못한다. 누구도 그의 동기가 스페인계 남미의 주요 공화국인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독립을 이끈 위대한 장군만큼 이타적이거나 그의 목표가 그만큼 고상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산 마르틴은 현재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의 국경 근처에서 스페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뢰받는 스페인 관리였다. 그의 어머니는 놀라운 용기와 선견지명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의 부모는 어린 나이에 그를 스페인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군인의 본능이 곧 그를 군대로 이끌었고, 그는 아프리카와 이후 반도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며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전쟁의 교훈과 잘 훈련된 병사들의 가치를 철저히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스페인에 있을 때 아르헨티나의 민중 봉기 소식을 접했고, 곧 동포들의 독립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12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고, 그의 이타적인 열정과 지성은 그를 곧 비범한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그의 지휘 아래 있던 군대는 남미에서 가장 잘 훈련된 애국자 부대가 되었다.
산 마르틴은 볼리비아 고원을 통해 페루의 스페인 군대를 몰아내려는 애국자들의 헛된 시도를 목격한 후, 서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그들의 스페인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그는 안데스 산맥의 여러 고개를 통해 칠레를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 서부의 멘도사에 본부를 설립했다. 그는 이곳에서 2년 동안 머물며 지방을 훌륭히 통치하고, 효율적인 군대를 양성하고, 칠레에서 멘도사로 도망온 난민들을 조직하고,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든 적절한 정부를 위협하는 파벌 싸움에서 벗어나 있었다. 1817년 1월, 그의 군대가 준비를 마쳤다. 그는 스페인군이 그가 안데스 산맥을 어디로든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그는 주력군을 가장 실용적인 경로인 우스파야타 고개를 통해 이동시킬 수 있었다.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1818년 산 마르틴은 마이포에서 스페인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칠레의 독립을 확실히 하는 만족을 얻었다. 놀라운 용병 토마스 코크런 (던도널드 백작)과 흥미로운 앵글로색슨 선원들의 도움으로 산 마르틴은 스페인군을 서해안에서 몰아내고 리마 시를 점령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칠레가 그에게 제공한 지원으로는 내륙의 거대한 안데스 산맥을 뚫고 마지막 스페인 군대를 완전히 격파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볼리바르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오만한 해방자는 오직 최고 사령관으로서만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산 마르틴은 독립의 대의를 위해 전례 없는 자기 희생으로 자신의 잘 훈련된 베테랑들을 볼리바르와 수크레에게 넘겨주고 조용히 아르헨티나의 소박한 집으로 물러났다. 정치적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리는 그의 태도, 원대한 정치가적 면모, 위엄 있는 태도는 그의 동포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고, 그는 조국에서 추방되어 유럽에서 말년을 보내야 했다.
산마르틴의 모습은 능력 있는 군인이자 현명한 정치가, 그리고 이타적인 애국자로 뚜렷이 드러난다. 그의 업적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들의 업적과 함께 기억될 만하다. 그의 인품은 남미가 배출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그에 견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오랫동안 그는 동료 애국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들이 순수한 민주주의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는 믿음을 공공연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 이후 많은 남미인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남미인들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비판은 정치적 결속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국경 지방들은 중앙 정부의 명령에 끊임없이 반발한다. 게다가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들은 연합하지 않거나 연합했다 하더라도 곧 분열되었다. 이러한 단결력 부족의 원인은 히스패닉 민족의 역사와 남미 대륙의 지리적 여건에서 찾을 수 있다.
남미인들의 사고방식과 정치적 성향을 비판할 때는 한 민족의 영혼을 형성하는 도덕적, 지적 특성이 그들의 전체 역사를 통해 발전되어 왔으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행동 동기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히스패닉 민족은 협력적 행동보다는 개인주의적 행동을 발전시키도록 유도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작용한 힘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었다. 소수의 용감한 산악 주민들만이 무어인 정복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스페인의 기독교 재정복 과정은 너무나 더뎌서 코바동가의 외로운 바위 요새에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기독교 왕국 연합으로 성장하는 데 거의 8세기가 걸렸다. 아메리카 정복에 앞선 이 800년 동안 스페인인들은 늘 존재하는 적과 거의 끊임없이 싸웠다. 이로 인해 강한 도시 정신이 발달했다. 국경 지대의 도시들은 무어인의 공격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어서 상당한 권력을 부여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스페인의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면서 새로운 도시들이 국경 전초 기지가 되었지만, 옛 도시들은 이전에 얻은 권력과 반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다.
그 결과 주로 자신의 도시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도시가 속한 지방이나 왕국에는 이차적으로 충성했고, 지리적, 언어적 단위로서의 스페인에는 부수적으로만 충성했다. 이러한 민족적 성향은 남미 공화국들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특징인, 큰 국가적 이익보다 사소한 지역 이익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조국의 핵심으로서 도시라는 개념이 문명 발전의 관점에서는 항상 효과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국가 발전에는 재앙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로 그 도시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스 제국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무어인 이교도들과의 800년에 걸친 기독교 전쟁의 또 다른 결과는 소수의 정복자들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게 한 도덕적, 육체적 자질의 발달이었다. 용감하고 독선적이며 용기 있고, 지속적인 적대 행위에 익숙하고,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대의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며,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그들이었기에 남미인들의 조상들이 16세기 초에 그토록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직 활기차고 성장하는 국가만이 당시 이루어진 아메리카 탐험, 정복, 식민의 위대한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결혼으로 이전에는 분리된 소국들의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 개인적 유대로 하나가 되었다. 이 나라들은 각자 고유한 법률과 독특한 관습, 별도의 행정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부 지방은 다른 혈통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통일 과정은 아메리카 정복 및 식민화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들 중 하나가 될 운명의 나라였지만, 스페인은 식민지 개척 초기에 부적절한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의 인종적 통일과 종교적 단일성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복자들의 유럽 조상들은 스페인 전체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민으로서, 또는 소국의 봉신으로서 싸웠다. 국민들이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중앙집권화되고 통일된 정부의 정신은 그들의 피 속에 흐르지 않았다. 그들은 파편화되고 초기 단계에 있는 국가 집단에 속해 있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를 획득하기 훨씬 전에 중앙집권화 정책을 채택했지만, 그러한 통치 방식의 변화가 대중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만큼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사이 남미는 인종적 통일성이 없고 정치적 협력 행동의 성향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식민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후손인 독립 전쟁의 영웅들이 하나의 정부 아래 단결하는 것을 쉽거나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별도의 정치 체제를 형성한 것은 그들 민족의 역사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또한 식민지 간의 교류를 금지하고 공동의 이익을 전혀 장려하지 않았던 스페인의 식민 정책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엄청난 자연적 장애물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더라도 남미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한 후 단결할 이유가 거의 없었다.
아마존, 라플라타, 오리노코 강 유역이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수로를 제공했지만, 유량이 너무 많고 불규칙해서 증기선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통제할 수 없었다. 안데스 산맥 동쪽의 거대한 계곡에서는 토양의 비옥함이 너무 넘쳐서 광활한 삼림 지대가 끝없이 펼쳐졌고, 이 거대한 식물 덩어리는 수세기 동안의 개간과 도로 건설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 울창한 삼림과 인구 희박 지역은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사이의 교류를 사막이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미국의 어느 주와 다른 주를 가르는 것 중 안데스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과 동쪽 경사면에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진 뚫을 수 없는 정글에 비견될 만한 것은 없었다. 이 문제를 더 자세히 살펴볼수록, 자연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해도 교류를 가로막는 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놓을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스페인 영토의 중심지인 리마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여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뉴욕에서 찰스턴까지의 여행은 단순한 유람에 불과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충분히 어려운 여정이었지만!
영국 식민지 어디에도 그런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북부 칠레와 남부 페루의 사막, 콜롬비아 동부와 베네수엘라 서부의 늪지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숲, 또는 수천 킬로미터에 걸쳐 가장 낮은 지점이 해발 3,000미터인 안데스 산맥과 같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영국의 13개 식민지 건설자들은 인종적 통일성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섭리적으로 짧은 해안선에 정착했고 단일 스페인 식민지보다 크지 않은 동질적인 국가를 차지했다. 그들의 연합은 당연한 결과였다.
남아메리카는 전혀 달랐다. 이 인종의 성향이 연방보다는 개별 공동체를 구축하는 쪽이었고, 식민지 간 교역과 여행을 금지하는 법률이 연합을 충분히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던 것처럼, 산, 강, 사막, 늪, 심지어 바람까지 자연의 모든 힘이 새로운 공화국들의 고립을 촉진했다. 13개 영국 식민지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은 스페인 식민지들을 분리했던 높은 산맥의 가장 낮은 지점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를 연결하는 우스파야타 고개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우리가 남미인들이 하나의 큰 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든 부분이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지역을 자연으로부터 받았다. 영국 식민지들이 연합한 것이 라틴아메리카인들이 그러지 못한 것보다 더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니다. 두 경우 모두, 식민 통치의 다양한 정책에 의해 뒷받침된 인종적 특성이 성장의 토대를 만들었고, 이는 놀랍게도 모든 면에서 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의해 유리하게 작용했다.
영국 식민지들은 독립을 얻으면서 수 세대에 걸쳐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함께 싸웠고, 결혼을 통해 연결되었으며, 사회적 경제적 유대를 쌓았다. 그들은 본국에 대표를 보내고 각 식민지의 지도자들이 서로의 바람과 열망을 알게 되는 회의에 대표를 보내는 일에 협력했다. 칠레의 해안선보다도 짧은 해안 지대에 운명적으로 자리 잡아 바다와 육지를 통해 소통할 수 있었고, 사막이나 높은 산으로 분리되지 않았던 그들이 자연스럽게 전통을 따라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이상한가? 남미 식민지들이 이러한 예를 따르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엄청났다. 광활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자연이 만든 가장 큰 장벽들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그들 역시 인종의 전통을 따라 연방을 형성하기보다는 지방 정부를 세우는 것이 당연했다.
연합의 형성을 막은 역사적, 지리적 이유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의 수립도 방해했다. 시민들은 여전히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도시의 일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앙 정부보다 지역 수장에게 충성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보이고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자본가들의 에너지와 기업가 정신이 자연이 의사소통을 가로막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있다.
때가 되면 증기와 전기를 이용한 교통 시스템의 도움으로 일부 남부 공화국들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실현되기 전에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교통 시설의 발달로 강력한 국가 의식의 성장이 가능해지고 국가의 분열을 막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는 분명히 혁명을 덜 빈번하게 만들고 안정을 가져와 미국 자본을 유치하고 유럽 이민을 크게 증가시킬 것이다.
제5장
투쿠만 급행열차
거의 3세기 동안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포토시 은광을 거쳐 리마로 이어지는 육로였다. 여행객과 화물을 위한 체계적인 운송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1773년에는 “엘 라사리요”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맹인의 안내서”라는 뜻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까지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세한 여정과 “노새를 이용해 무역을 하는 새로운 상인들을 위한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이 책에는 역참, 노새 교체소, 사람과 동물을 위한 편의 시설을 갖춘 도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구 2만 2천 명의 도시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99명은 고아이고 68명은 감옥에 있다!”고 한다.
나는 “맹인의 안내서”를 따라 전 구간의 역참을 하나하나 방문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도 시대 이후로 “여행자들에게 좋은 숙박 시설”을 제공하던 많은 역참들이 사라졌고,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기차를 타야만 한다. 기차가 있을 때는 말이다.
1908년 11월 13일, 헌팅턴 스미스 주니어와 함께 나는 볼리비아로 가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났다. 첫 번째 구간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철도 중 하나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사리오 철도를 이용해 투쿠만까지 가는 1,160km였다. 우리 열차는 전체가 침대칸과 식당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등석 승객들 중에는 새로 도착한 스페인 상점 점원과 프랑스 외판원이 있었다. 나는 서해안이나 북부 국가들보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서 더 많은 프랑스인들을 보았다. 특히 대도시에서는 독일인들, 영국인들과 함께 프랑스인들이 지역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처음 24km 동안 우리는 넓은 땅 한가운데 서 있는 주인의 유칼립투스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들을 많이 보았다. 시장 원예와 일반 농업의 증거가 상당히 있었다. 기차에서 볼 수 있는 한, 도로는 매우 나빴고 소달구지로 이 평원을 횡단해야 했던 불운한 여행자들의 시대 이후로 개선되지 않았다.
1825년 포토시, 라파스 & 페루 광업 협회의 경쾌한 비서 에드먼드 템플이 볼리비아로 가는 길에 아르헨티나를 횡단했을 때, 그는 팜파스에서 마주친 엄청난 수의 “메뚜기”에 놀랐다. 그는 메뚜기들이 수 마일에 걸쳐 도로와 주변 지역을 뒤덮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목초지가 풍부했고 경작지는 드물었기 때문에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작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메뚜기 떼를 큰 해충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와 싸우는 데 수십만 달러를 썼다. 그들은 이제 메뚜기를 막기 위해 수백만 달러가 들어가는 아연 판금 울타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부
현대 여행객들은 메뚜기 떼로 인해 기차가 지연되는 경험을 했지만, 우리는 비교적 적은 수의 메뚜기만을 보았다.
우리의 첫 정차지는 교외 도시들이었다. 이 평평한 나라에서 예상 외로 매력적인 곳들이었다. 그중 한 곳인 티그레 강변에서는 영국인 정착민들이 헨리 축제와 같은 행사를 열며 보트 타기를 유행시켰다. 오전 중에 소나기가 내렸지만, 우리가 지나온 지역은 꽤 건조해 보였다.
팜파스의 특징적인 모습은 강철 프레임의 현대식 풍차들이다. 대부분 미국산인데, 우리가 일부 분야에서는 뒤처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에 풍차를 공급하는 데 특별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 특정 사업을 거의 독점했다. 다행히도 우리 제조업체들은 소형 저가 모터 생산에도 뛰어난 것 같다. 이는 노동력 확보가 극도로 어려운 농장과 목장에서 특히 필요로 하는 것으로, 노동 절약형 기계의 훌륭한 시장이 되고 있다. 이런 고무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100만 달러어치의 상품에 대해 유럽에서는 600만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많은 내륙 도시들이 자체 전기 조명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독일 제조업체의 대리인들은 새로운 사업권을 확보하고 독일 기계 설치를 위한 대형 계약을 따내는 데 선견지명이 있었다. 전기 조명 시설 하나의 가치는 풍차 여러 개와 맞먹는다.
우리 기차는 아르헨티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로사리오에서 잠시 정차했다. 파라나 강 굽이에 위치한 유리한 입지 덕분에 매우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4.9m 흘수의 선박이 연중 접근 가능하여, 유럽의 공산품을 가져와 밀과 소를 교환하는 많은 대서양 횡단 노선의 종착점이 되었다. 볼리비아에서 온 일부 광석도 여기서 선적된다. 우리가 볼리비아 남부를 노새를 타고 여행할 때 “로사리오 경유”라고 표시된 유럽에서 온 거대한 포장 상자를 실은 수백 마리의 동물들을 보았다.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중요한 신항은 바이아 블랑카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져 있으며 북부 파타고니아의 새로 개척된 지역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좋은 농지가 부족하지 않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우리 서부 주들처럼 개별 농부들의 이익을 위해 잘 관리된다면, 아르헨티나가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이민자들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회는 정말로 훌륭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거주자들로부터 불쾌한 점들이 많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사실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정치 권력을 자신들의 손에 너무 많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헌 민주주의 정부가 의미하는 바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가 봤듯이 그들의 인종적 역사가 그들에게 다른 유산과 편견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배우고 있다.
로사리오를 떠나 우리는 거대한 농업 및 목축 지역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더위와 먼지가 꽤 고통스러웠다. 습도는 상당히 높아서 우리 객차에서 약 80%였다. 사실, 우리는 중간 속도의 기차를 타고 서부 평원을 횡단할 때 겪는 모든 종류의 불편함을 경험했다. 이 투쿠만 급행열차가 “아메리카에서 가장 좋은 열차”라고 들었었다. 우리 증기선에 탔던 일부 젊은 영국인들은 이에 대해 매우 열광적이었고 미국에는 이런 좋은 것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15년 전 서부 열차의 수준보다 편안함이 더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소 실망했다.
그러나 “B. A. and R.” 철도가 대부분의 미국 철도보다 앞서 있는 한 가지가 있다. 각 역에는 매우 큰 표지판이 한두 개씩 편리하게 설치되어 있어 낯선 사람도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노선을 따라 영국식 철도 방식으로 철저히 훈련받은 철도 관리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작은 것들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철도는 대부분 영국이 소유하고 있으며 주요 임원들도 앵글로색슨계다.
아르헨티나는 약 20개 회사가 운영하는 20,921킬로미터의 철도를 가지고 있다. 2,736킬로미터는 정부 소유지만, 철도 시스템의 대부분은 영국 자본가들이 통제하고 있다. 철로의 절반 조금 넘는 부분이 매우 넓은 1.68미터 궤간이다. 나머지는 1미터 이하다. 세 가지 궤간으로 인해 화물과 승객의 상당한 환승이 필요하다.
아르헨티나를 부유하지만 개발되지 않은 지역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5만 대의 화물차와 2천 대의 객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매년 3천만 명의 승객과 3천만 톤의 화물을 운송하는데, 그중 약 3분의 1이 곡물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1906년 한 해 동안 여객 운송 수입은 1,800만 달러 이상이었고, 화물 운송 수입은 5,500만 달러를 약간 넘었다. 통계는 우리가 작게 생각했던 상황에 대한 눈을 뜨게 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건조하고 재미없다. 아르헨티나 철도의 극도로 빠른 성장은 1884년에 투자 자본이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7억 달러 이상이 된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르헨티나 철도가 우리의 기록에 미치지 못하지만, 꽤 잘하고 있다. 1905년에는 총 218명을, 1906년에는 250명을 죽였다. 이는 미국보다 운송 승객 대비 더 높은 비율이다.
저녁 무렵 우리는 농경지를 떠나 황폐한 지역으로 들어갔다. 완벽하게 평평한 넓은 땅이 펼쳐져 있어, 관개만 된다면 훌륭한 결과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먼지가 더 심해졌고, 우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는 스페인 상단을 따라 2주를 보내는 대신 산타페와 산티아고델에스테로의 이 건조한 팜파스를 하룻밤 동안 열차로 끌려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음날 아침 차창 밖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햇빛 속에서 매력적으로 흔들리는 사탕수수 밭, 소나 노새가 끄는 큰 바퀴의 수레들이 시끄럽게 움직이고, 날씬한 기수들이 작고 강한 조랑말을 타고 마른 덤불 사이를 달리는 모습이 팜파스의 끝없는 초원에서 북서부의 고원 지대로 풍경을 바꿔놓았다. 사탕수수 밭 너머의 언덕들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북서쪽과 북쪽으로는 꼭대기까지 숲으로 덮인 듯한 초록 산들이 솟아 있었다. 일부 나무들은 화려한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건조하고 황폐한 팜파스와 투쿠만의 푸른 사탕수수 밭 사이의 대조는 너무나 강렬해서 아르헨티나 작가들은
후자에 대해서는 지극히 과장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여행 경험이 많은 사르미엔토도 이곳을 “아메리카의 에덴”이라 부르며 “자연이 가장 화려한 위엄을 뽐내는 곳”이라고 했다. 사실 투쿠만은 매우 비옥하고 잘 경작된 평원에 훌륭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중요한 사탕수수 재배 지역의 중심지다. 우리는 그 주변에서 제당 공장의 높다란 굴뚝 12개를 셀 수 있었다.
우리는 오전 10시경에 도시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월터 롤리 경이 엘도라도를 찾아다니던 무렵에 건설되었다. 1816년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의회가 독립 선언을 통과시켰다. 벨그라노는 이곳에서 페루에서 내려온 아르헨티나 애국자들을 진압하려던 스페인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투쿠만 역은 크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는데, 플랫폼에 널려 있는 짐들의 독특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의자와 간이 침대, 냄비와 프라이팬, 스프링 매트리스, 닭장 등은 이곳이 아직 새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있는 신생 국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철도 회사는 현명하게도 사람들이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여행하기 쉽게 해주었다. 우리나라처럼 “저속 화물”이나 탐욕스러운 운송 회사에 맡기는 대신, 모든 것을 당연히 수하물로 취급해 수하물칸에 실어주었다.
이민자들 대부분은 제노바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온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일부는 스페인에서 가장 강인한 농민들의 고향인 갈리시아에서 왔다. 이민자들이나 거주민들 모두 특이한 의상을 입지 않았다. 심지어 가우초들도 문명화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우리가 상상하던 남미 원주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옷차림이 발전을 방해할 정도로 진보적인 나라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에 관한 정보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데도, 평균적인 미국인들이 남반구 최대의 대도시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놀랍다. 우리는 서부 주들이 야만적인 인디언들과 무법자들로 넘쳐난다고 상상하는 영국 사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또 그들이 린치와 “강도 행위”에 대한 빈번한 보도를 보고 우리를 미개하고 무법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도 아르헨티나인을 똑같이 성급하게 판단한다. 우리는 그들의 물질적 진보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불안정한 정부”를 가지고 있다며 자주 비방한다. “혁명”이나 정권 장악을 위한 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며 해외에 과장되게 보도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아르헨티나처럼 철도망으로 잘 연결된 나라에서는 정부가 신속하게 군대를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는 습관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교통이 느리고 어려워서 인기 있는 지도자가 상당한 수의 추종자를 모아 정부가 그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수도로 진군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봉기는 필연적으로 며칠이나 몇 주가 걸리는 일이며, 성공적으로 수행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가 더 안정되었다는 증거로,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베어링 브라더스의 파산 당시 받은 타격에서 어떻게 회복했는지 보여주는 예로, 1895년과 1905년 사이 10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외 무역이 두 배 이상 증가해 연간 5억 달러를 넘어섰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제6장
아르헨티나 고원을 가로질러
투쿠만에서 우리는 영국이 건설한 부에노스아이레스-로사리오 철도의 광궤를 떠나 아르헨티나 정부가 운영하는 북부 중앙 철도의 협궤로 갈아탔다. 이 철도는 후후이까지 달리며 최근 볼리비아 국경의 라 키아카까지 연장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라 키아카까지의 거리는 1,150마일(약 1,850km)이다. 우리는 이 중 700마일(약 1,125km)을 첫 24시간 동안 달렸다. 남은 450마일(약 725km)은 또 다른 24시간이 걸렸는데, 북부 중앙 철도에는 침대차가 없어서 이를 두 번의 주간 운행으로 나누어 했다. 이 구간에서 고도는 400m에서 3,600m로 올라가며, 여정은 전적으로 아르헨티나 고원을 지나간다.
우리 열차는 여객과 화물이 섞인 혼합열차였다. 기관차는 “볼드윈” 제품이었고 객차들은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또한 16명을 수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식당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일반적인 스페인식으로 정식 식사를 제공했다. 그러나 3등 승객들은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납작한 빵, 삶은 달걀, 현지 음료를 파는 기업가적인 여성들을 이용했다.
투쿠만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터널을 지났는데, 이는 800마일(약 1,285km) 만의 첫 터널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카라카스에서 발렌시아로 가는 여정에서 1시간 동안 65개의 터널을 지났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풀은 점점 희소해지고 선인장과 미모사 나무가 흔해졌다. 작은 염소 떼를 지나쳤다. 먼지와 모래가 구름처럼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높이 솟은 회오리바람을 지나쳤지만, 다행히 우리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습도가 40% 미만으로 훨씬 낮았다. 개울은 매우 낮아 보였다. 메뚜기 몇 마리를 보았다.
많은 역에서 노새 세 마리를 나란히 매단 마차를 볼 수 있었는데, 이 구릉 지대의 특징인 느슨한 밧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좀 더 부유한 사람들의 집은 주름진 철판과 나무로 지어졌지만, 대부분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건기였기 때문에 간이 침대들은 보통 야외에 있었다.
루이스 데 로스 야노스에서 볼 수 있는 번영의 증거는 매력적인 구조의 새로운 스튜코 건물들이었다. 이 건물들은 앞쪽에 아케이드가 있고 내부에 안뜰이 있어 옛 스페인 건축 양식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다른 건물들도 완공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는 께브라초 벌목꾼들에게 빵과 식료품을 공급하는 제과점과 식료품점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쪽과 북동쪽의 그란 차코 평원에는 거대한 께브라초 숲이 있다. 이 나무는 매우 단단해서 철도 침목으로 매우 유용하다. 이 나무를 자르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도끼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지역의 주요 수출품이다. 나무껍질은 캘리포니아까지 먼 곳의 제혁소로 보내진다.
또 다른 중요한 역인 마탄에는 역 근처에 ‘코스모폴리타’라는 깨끗해 보이는 스페인식 여관이 새로 생겼다.
근처에는 배에 실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거대한 케브라초 통나무들이 놓여 있었다. 언덕은 숲이 우거져 있었고, 용설란 식물과 미모사 나무도 여러 그루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무가 없는 팜파스 지역으로 장작을 보낸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독특한 패션의 승마 부츠를 보았다. 주름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아코디언’이라고 불렀다. 이런 부츠는 볼리비아 남부에서도 유행하고 있었다.
리오 피에드라스에서 많은 바구니와 보따리를 든 3등석 승객 십여 명이 내렸고, 우리는 제재소의 익숙한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선로 근처에는 더 많은 케브라초 통나무들이 있었다. 투쿠만에서 합류했던 건장한 승객 한 명이 이곳에서 내렸다. 그는 긴 말 타기를 준비해 옷을 미리 갈아입고 있었다. 큰 챙이 달린 모자, 헐렁한 흰색 점퍼, 크고 헐렁한 흰색 면바지, 그리고 ‘아코디언’ 부츠를 신고 있어 거의 그림 같았다. 그는 흥미로운 작은 보따리들이 가득 든 면으로 된 안장가방을 어깨에 메고 말안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이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기차에서 멀어져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새로 도착한 미국산 농기계들을 보았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미국에서 수입하는 가장 큰 품목 중 하나다.
오후가 되자 우리는 언덕에서 빠져나와 동쪽으로 평원을 멀리 바라볼 수 있었다. 이곳에는 식물이 더 많았고 옥수수도 자라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울퉁불퉁한 언덕과 산들이 있었다. 오후 4시경 객차 안의 온도는 화씨 85도(섭씨 29.4도)였다. 우리의 고도는 약 2,500피트(762미터)였다.
우리가 북쪽으로 뜨겁고 먼지 나는 계곡을 지나 안데스 산맥의 구릉지대로 올라갈수록, 역에서 배회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국제적인 모습을 잃어갔다. 우리는 팜파스의 원주민과 대담한 스페인 목동들의 후손인 전형적인 가우초를 더 많이 보았다. 키가 크고 강건한 체격에 거무스름한 피부를 가진 그는 강인한 인내심을 지녔으며 다루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의 성향은 빠르게 사라져가는 미국의 ‘카우보이’와 비슷했지만,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태도와 은 박차와 화려한 색상의 판초로 표현되는 과도한 허영심을 물려받은 단점이 있었다. 그의 영역은 근면한 이탈리아인들에 의해 빠르게 침범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더 믿을 만하기 때문에 더 바람직했다.
후라멘토 근처에서 지형은 더욱 건조하고 황폐해졌다. 철도 기술자들의 하얀 텐트를 보호하는 듯한 몇 그루의 야위고 볼품없는 미모사 나무들은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았다.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구에메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투쿠만에서 온 직통 열차는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살타로 서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9시가 조금 지나 후후이에 도착했다. 20대의 낡은 차량들이 우리를 1마일(1.6km) 정도 떨어진 마을의 세 호텔 중 하나로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브리스톨 호텔로 갔고 스페인-아메리카식 기준으로는 꽤 편안했다. 즉, 화장실 시설이 없고, 방에는 타일 바닥이 깔려 있으며, 침대와 의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침에 우리는 라 키아카행 주 2회 운행하는 기차를 타기 전에 마을을 잠깐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일찍 일어났다.
후후이는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하기 한 세대 전에 스페인 정착민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여전히 옛 스페인-아메리카 도시의 흰 벽과 붉은 기와 지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해발 1,219미터가 조금 넘는 쾌적하고 물이 풍부한 평원에 위치한 이 도시는 높은 언덕들에 둘러싸여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 너머로 우리는 안데스 산맥의 높고 메마른 봉우리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근처의 계곡은 푸르렀고, 건기에도 약간의 강우가 있었다. 후후이는 많은 아열대 과일을 생산하지만, 실제로는 볼리비아로 가는 오래된 무역로의 전략적 위치 덕분에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곳은 건강한 환경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중요한 도시이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육로 여행자들의 자연스러운 휴식처였다.
사실 아르헨티나의 이 북서부 고원 지대인 후후이와 투쿠만은 처음에 지금은 볼리비아라고 불리는 상부 페루의 산악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정착되었다. 이들은 남쪽으로 확장된 지역이었다. 그들의 정치적, 상업적 관계는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는 포토시와 리마와 더 밀접했다. 고원 지대 광산 지역의 큰 번영은 반건조 관개 계곡의 농업 가능성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식량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소고기와 기타 식료품은 투쿠만과 후후이 근처의 비옥한 계곡에서 가장 쉽게 공급될 수 있었다. 화물뿐만 아니라 승객도 운반할 수 있는 더 나은 동물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사육된 말과 노새에 대한 수요가 생겼다. 이 동물들은 이곳으로 옮겨져 산악 여행에 적합하도록 조련되었고, 초기 시장의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철도가 들어왔을 때, 후후이는 수년간 북쪽 종착역이었다. 이는 도시의 중요성을 더욱 높였고, 연례 시장의 명성을 높였다. 그러나 라 키아카까지 연장 구간이 건설되면서 그 중요성은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항상 티베트와 같은 기후의 혹독함을 피해 도피처를 찾는 볼리비아인들의 인기 있는 휴양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남부 볼리비아에서 한때 겨울을 이곳에서 보냈던 많은 가족들을 만났다.
브리스톨 호텔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간신히 달걀과 커피를 얻을 수 있었다. 기차가 7시에 출발할 예정이었고, 평균적인 스페인-아메리카 여행자들은 10시나 11시경에 실질적인 것을 먹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긴 하루 여행을 심지어 커피 한 잔 없이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큰 혼란의 장면을 목격했다. 이 노선은 몇 달 전에 개통되었고, 많은 예비 승객들이 철도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다. 한 관리와 그의 세 식구는 가방, 새장, 보따리, 말린 것들, 화분 등으로 차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많은 좌석을 짐으로 채워서 몇몇 승객들이 서 있어야 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그의 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다면, 그것들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크게 폐를 끼쳤는지는 하루가 끝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후후이에서 기차는 멋진 거대한 산들이 보이는 계곡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1,829미터 고도에서 초목은 사라졌고, 풀은 갈색으로 변했으며, 메마른 산에는 양과 염소 몇 마리만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아가베 식물과 미모사 나무 몇 그루를 보았다.
생계를 꾸려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철도는 초반부 구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고전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한동안 톱니바퀴식 철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183km 구간에서 선로는 해발 3,660m가 넘는 고도까지 2,440m를 오른다.
철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경사가 가파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훌륭한 소형 식당차를 가지고 다녔다. 라 키아카에 도착하기 전 두 끼의 훌륭한 식사를 제공받았다.
톱니바퀴식 철도는 해발 1,615m의 레온에서 시작하여 볼칸까지 계속된다. 13km 거리에서 457m를 오른다. 볼칸에는 진흙 화산이 있다고 하지만, 몇 년 전 ‘지리학 저널’에서 오드리스콜 씨가 지적했듯이 실제로는 화산이 전혀 없다. 그것은 단순히 비정상적으로 많은 비가 온 뒤 급격히 붕괴되는 언덕에서 내려오는 진흙 사태일 뿐이다.
화산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자들에게는 어려운 과제다. 이미 1.6km 내지 3.2km의 선로를 한 번 이상 완전히 덮어버린 적이 있다.
이는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이어지는 범미 철도의 노선 상에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1950년의 뉴욕 사람이 이곳에서 진흙 사태로 인해 지연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진흙 사태로 그가 여행하려던 선로가 60센티미터에서 90센티미터 가량 지하에 묻힐 것이다. 그가 에드먼드 템플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포토시로 가는 여정 중 머물렀던 현지 여관에 묵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템플은 한밤중에 침대 밑에서 들려오는 두 동물이 싸우는 듯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의 놀라움(그리고 그의 매력적인 책을 읽는 독자의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달빛에 의해 고양이가 방금 제압한 독사의 머리를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흔한 일이라고 들었으며, 뱀이 아무리 독이 있더라도 고양이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한다!”
볼칸 역 주변의 모래가 많고 바위투성이인 땅에 나무를 몇 그루 심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나무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처 목장에서는 관개를 통해 꽤 큰 유칼립투스 숲을 성공적으로 키웠다. 주변 산들은 매우 황량했고, 침식으로 인해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산 정상들은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볼칸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마이마라가 있다. 그곳에서도 계곡에 관개의 흔적이 더 있었다. 나무들과 푸른 과일들이 황량한 산비탈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가 오르막길로 이어지면서 지역은 점점 더 건조해졌다. 선인장이 흔했다. 때로는 울타리로 사용되고, 다른 때는 진흙 담장 위에 심어져 가시철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양쪽의 큰 황량한 산들이 킬로미터 후 킬로미터로 계속 이어졌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선인장과 나무들의 북쪽 방향 기울기로 판단하건대, 주된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았다.
계곡의 일부는 관개되었지만 어디에도 생명의 징후가 거의 없었다. 관개 없이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여행자들과 화물 운송업자들에게 밤 숙소를 제공하는 역참 근처에서 알팔파와 다른 동물 사료를 재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이 사업은 지난 몇 달 동안 크게 줄어들었지만, 우마우아카에 도착하기 직전 우키아에 들렀을 때 여전히 건초를 묶어 북쪽의 황량한 고원으로 보내는 것이 가치 있을 만큼 충분히 재배되고 있었다.
오후 늦게 우리는 라마 무리를 보았지만, 이 지역에서는 전혀 흔하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692킬로미터 떨어진 트레스 크루세스에서 우리는 3,660미터가 넘는 최고 고도에 도달했다. 황량한 산들, 철도 선로를 끝없이 따라가는 두 개의 철조망, 그리고 진흙 벽으로 된 철도역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이었다. 작은 ‘호텔’은 아리조나의 버려진 어도비 주택처럼 보였고, 이 지역은 우리의 새로운 남서부 지역 중 관개되지 않은 부분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침식은 산비탈을 얕은 협곡과 반원통형 경사면의 흥미로운 단면으로 잘라냈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초록색 물체는 세이지브러시와 비슷한 덤불 뭉치들뿐이었다.
여기서 라 키아카까지 96킬로미터 동안 우리는 거의 같은 고도를 유지했다. 라 키아카 자체는 트레스 크루세스보다 152미터 낮다. 실제로 우리는 안데스 산맥의 거대한 고원을 넘어섰다. 우리 남쪽으로는 아타카마 사막이 있고, 북쪽으로는 볼리비아 남부의 건조한 계곡들과 볼리비아 고원이 있다. 동쪽으로는 많은 중간 산맥들과 동부 안데스 산맥의 가파른 경사 너머로 볼리비아의 그란 차코와 야생 인디언 부족들, 열대 우림이 있는 하류 필코마요 계곡이 있다. 서쪽으로는 여전히 더 높은 안데스 산맥의 거대한 코르디예라가 있으며, 그 봉우리들 중 일부는 이 지점에서 6,096미터의 고도에 이른다. 이러한 흥미로운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 황량한 지역의 극도의 황폐함은 사람의 열정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9시 직전에 라 키아카에 도착했다. 철도 사무실은 여전히 미완성이었는데, 선로가 개통된 지 한두 달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도역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옛 라 키아카 마을은 작은 진흙 벽 마을로, 철도 종착역 근처에 생겨나는 번창하는 새 정착지를 위해 곧 버려질 운명이다. ‘호텔’이 두 곳 있다. 우리가 묵은 25 데 마요는 방금 문을 열었다. 사실 외벽은 아직 적절한 회반죽과 석회 칠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하루 종일 매우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을 여행했다. 이 지역은 너무 건조하고 높으며 살기 힘들어서 이 철도가 많은 교통량을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노선은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 부분의 공화국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볼리비아 남부의 광산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건설했다. 이는 볼리비아에서 식료품 시장을 확보하고 그 대가로 파라나 강 항구들에서 유럽으로 수출할 광석을 가져옴으로써 아르헨티나의 대외 무역을 발전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는 협정을 맺어 볼리비아는 오루로에서 포토시를 거쳐 아르헨티나 국경에서 80km 북쪽의 투피사까지 국영 철도 시스템을 남동쪽으로 연장하기로 했다. 아르헨티나 측은 그들의 철도를 후후이에서 투피사까지 북쪽으로 연장했다. 그러나 라 키아카에 도착했을 때, 부유한 오루로-안토파가스타 노선을 소유한 영국 회사가 제안된 계획이 자신들의 이익을 방해할까 우려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리비아 정부는 계획을 변경하여 아르헨티나 노선과 연결하는 대신 안토파가스타 노선과 연결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비아인들의 이러한 결정은 당연히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남부 볼리비아인들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칠레 해안보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좋은 연결망을 갖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아르헨티나인들은 내가 방문했을 당시 국경을 넘어 철도를 연장하지 않았다. 그 결과 라 키아카는 남부 볼리비아 도시들로 향하는 상품을 실은 노새 행렬의 출발지가 되었다.
주 1회 투피사까지 운행하는 역마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 노선은 안토파가스타 노선의 우유니와 포토시로 가는 역마차와 연결된다. 이 역마차 노선은 볼리비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 라파스와 오루로 사이에서 역마차를 운영하던 열정적인 스코틀랜드인 돈 산티아고 허천이 소유하고 운영했다. 매우 운 좋게도 우리는 그가 자신의 역마차를 타고 그날 라 키아카에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 제7장 볼리비아 국경을 넘어
1908년 11월 15일 오후 9시경 라 키아카에 도착한 직후, 우리는 험악하게 생긴 두 명의 앵글로색슨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볼리비아 도로의 위험에 대해 소름 돋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법과 질서의 힘에 밀려 미국에서 쫓겨난 강도들이 핑커턴 탐정들에게 전 세계에서 쫓기다가 자신들의 직업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쾌적한 휴식처를 찾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에게 정보를 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 강도 일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우리가 그의 ‘동료들’을 충분히 관대하게 여겨 볼리비아에 우리가 있어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훔칠 만한 것이 없다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우리는 볼리비아 어디를 다니든 평화롭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여행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미국에서는 평화롭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저 내버려두기만 바랄 뿐이며, 그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여행자들을 괴롭힐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전적으로 광산의 월급날 현금을 운반하는 무장 호위대를 제압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것을 공정한 싸움에서 얻은 정당한 전리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손에 고통받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뿐이라고 했다. 이것을 우리에게 설명한 후,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한 집단이며 그들의 범죄가 얼마나 유명한지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모두 매우 괜찮은 사람들이고 꽤 pleasant한 동료라고 우리에게 확신시켰다. 역마차 주인이자 마부로서 수십만 달러의 현금을 무방비 상태의 볼리비아 도로에서 운반해야 했던 돈 산티아고는 우리에게 자신은 이 강도들을 어떤 식으로도 귀찮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번도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무기를 휴대하거나 그들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퍼뜨리지 않았다고 했다. 만약 볼리비아의 강도들이 우리에게 그날 밤 묘사된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나쁘다면, 돈 산티아고는 분명 부적을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와 그의 역마차들은 확실히 기업가적인 무법자들에게 쉬운 표적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 라 키아카의 모래투성이 광장 너머로 우리 호텔에서 바라본 풍경은 전혀 고무적이지 않았다. 이 고원은 너무 높고 건조해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의 유명한 파익스 피크보다 실제로 더 높은 산봉우리들도 낮은 모래 언덕처럼 왜소해 보인다. 라 키아카의 새롭게 태어난 상업 생활의 요구를 점차 충족시키고 있는 미완성된 흙벽돌 집들이 모든 것을 더욱 황량하고 쓸쓸해 보이게 만들었다.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더 머물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6시가 조금 지나 문 앞에 덜커덕거리며 도착한 돈 산티아고와 그의 8마리 노새 팀을 간절히 환영했다.
마을에서 400미터쯤 북쪽으로 가니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에 들어섰다. 그 후 4시간 동안 여정의 단조로움을 깨뜨릴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역마차 여행에 익숙한 사람들이 잘 알듯이, 돌이나 모래로 된 험한 길을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덜컹거리며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양옆으로 갈색의 나무 없는 완만한 고원 외에는 볼 것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덕을 오르내리며 8마리의 노새를 움직이게 하는 과정은 결코 완전히 지루하지 않았다. 마부가 긴 채찍으로 맨 앞의 노새들에게 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폐활량이 좋은 소년을 고용해 노새들 옆에서 달리게 했다. 소년은 돌을 던지고, 스페인어로 욕설을 퍼붓고, 짧은 자루의 채찍으로 노새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노새들은 소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겁에 질려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곤 했고, 때로는 역마차를 도로에서 1~2미터 정도 벗어나게 끌고 갔다.
외국인이라면 거의 죽을 것 같은 희박한 공기 속에서도, 인디언 소년은 역마차의 발판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심지어 그때도 그는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노새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킬 만큼 숨이 남아 있었다. 만약 그가 이 끊임없는 소란을 멈추면 마부에게서 확실한 말로 타박을 들었다. 그 결과, 원시적인 수레길임에도 불구하고 역마차는 라 키아카와 투피사 사이 96킬로미터를 12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물론 두 번의 노새 교체가 있었고 짐은 별도의 마차로 운반되었다. 하지만 도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최악이었다. 도로의 상당 부분이 하천 바닥을 따라 있어서 역마차는 건기인 5월부터 11월까지만 운행할 수 있다. 우기에는 도로가 범람한 강 아래로 사라져 말과 짐승에 의존해야 한다.
이 극도로 건조한 지역에서 노새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강우량이 매우 적었다. 관개를 통해서만 사료가 자랄 수 있었다. 땅이 불모지는 아니었지만 너무 건조하고 메말라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케추아족으로, 그들의 옛 지배자인 잉카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야심이 적고 욕구가 적은 인내심 많은 민족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가 노새를 위해 알팔파나 보리 짚을 사려고 할 때 교통이 견딜 수 있는 만큼 모든 요금을 청구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돈 산티아고는 한번은 8마리 노새 팀에게 적절한 점심을 줄 만큼의 사료를 위해 40달러의 금화를 지불해야 했다고 말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운송비는 비쌌다. 라 키아카에서 투피사까지의 마차 요금은 10달러로, 1마일당 약 16센트였다. 짐에 대해서는 1파운드당 2센트의 요금이 부과되었다. 무료로 운반되는 짐은 없었다.
우리의 첫 정차지는 모호로, 노새를 갈아타고 관례적인 양고기와 감자로 구성된 ‘아침 식사’를 먹었다. 1826년 에드먼드 템플이 이곳에 들렀을 때처럼 “훌륭하게 구운 기니피그가 추가로 제공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기니피그는 여전히 이 지역에서 흔했고 우리는 길에서 여러 마리를 보았다.
모호는 400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었다. 여기에는 볼리비아 세관 서비스의 작은 지점이 있어 여행자와 그들의 짐을 살펴보게 되어 있었다. 남부 볼리비아의 주요 세관은 투피사에 있었는데, 이곳은 관리들의 거주지로 훨씬 더 쾌적한 장소였고 이 지역의 자연스러운 유통 중심지였다.
모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급격한 내리막길을 시작했다. 한 곳에서는 언덕이 너무 가파라서 도로가 제대로 회전할 수 없어서 우리 모두 내려서 마차를 “스위치백” 주위로 들어 올리는 것을 도와야 했다. 이 구불구불한 지그재그 길을 지나 우리는 넓은 평원에 도착했고, 어려움 없이 수이파차 강변까지 지나갔다.
물이 낮았고 마차 길은 상류로 곧장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줄어든 물줄기가 모래 강바닥을 굽이굽이 흐르고 있어서, 우리는 3~4분마다 강을 건너야 했다. 이는 끊임없는 어려움을 초래했다. 선두 노새들은 물에 들어서면 반드시 걸어가려고 멈추는 반면, 다른 노새들은 활기차게 뛰어들어 전체 팀을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잘못은 내게 있었을 것이다. 나는 8두의 노새를 모는 첫 경험을 하고 있었고, 고삐를 잡기 힘든 노새들은 내게 힘든 시간을 주는 것을 특히 즐기는 것 같았다.
우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시에 수이파차에 도착했고 노새를 갈아타기 위해 멈췄다.
이 계곡은 미국 독립 전쟁 초기인 1810년에 애국자들의 초기 승리 중 하나가 있었던 곳이었다. 최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성대하게 기념한 5월 25일 이후,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상페루 지방을 스페인의 통제에서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수이파차 승리의 결과로 볼리비아 사람들이 일어나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함께 억압자들에 대항하게 되었다. 애국자 군대는 고원을 가로질러 기쁘게 북진했지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추위와 고도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티티카카 호의 남쪽 끝에 도달했을 때, 수백 명의 순종적인 케추아인들로 증강된 스페인 군대가 애국자들을 공격하여 사실상 전멸시켰다.
수이파차 자체는 강변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이 건조한 지역의 다른 모든 작은 마을들과 비슷해 보였다. 모래와 돌이 많고, 몇 개의 진흙벽 오두막, 가시 덤불, 곳곳에 관개 수로와 녹색 들판, 그리고 사방으로 불모의 산들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울타리 형태는 선인장이나 가시 미모사 나뭇가지로 장식된 어도비 블록 벽이었다.
수이파차는 600명의 주민이 있다고 하지만 모호보다 더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는 길은 볼리비아 남동부의 중요한 도시인 타리하로 이어졌다. 타리하는 쾌적하고 비옥한 도시로 매력적인 기후를 즐기며, 황량한 팜파스에서의 실패한 혁명 후 탈출한 패배한 아르헨티나 정치인들에게 자주 피난처 역할을 했다.
투피사로 가는 길은 북서쪽으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수이파차 강 또는 에스타르카 강과 그 지류 중 하나를 따라갔다. 계곡에는 여러 농장 또는 이 지역에서 말하는 핀카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관개를 통해 소규모 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수이파차에서 투피사로 가는 길 중간쯤에 우리는 투피사의 협곡이라 불리는 웅장한 바위 관문을 통과했다. 강 양쪽으로 150미터 높이의 절벽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건기에도 도로를 위한 공간이 간신히 남아 있었다. 약 21미터 거리 동안 폭은 9미터 미만이었다. 관문 너머로 산들이 넓은 원형 극장을 형성했다. 11월부터 3월까지의 우기 동안에는 좋은 안장 노새를 타고도 이 협곡을 통과하는 것이 자주 불가능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비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우리는 어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6시에 약 2천 명의 주민이 사는 도시인 투피사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발 약 3천 미터로, 라 키아카보다 거의 600미터 낮았고, 주변의 사막과 대조적으로 이 지역에서는 비옥하다고 할 수 있는 1.6킬로미터 미만 넓이의 평원에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시내의 물을 잘 활용하여 주변에 많은 경작지와 나무들이 있었다.
광장은 황무지 속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었고 관목과 버드나무들이 이곳을 즐거운 장소로 만들었다. 광장 주변에는 석조 기초 위에 세워진 나무 기둥 꼭대기에 몇 개의 석유 가로등이 있었다. 새 교회의 하얀 탑이 나무들 위로 솟아 있어 좋은 이정표가 되었다. 근처에는 볼리비아 정부 소유의 큰 2층 창고가 있어 우체국과 세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880년대 초 안토파가스타 철도가 건설되기 전에는 남부 볼리비아의 대부분의 상업이 투피사를 통과했고 세관은 지금보다 더 중요했다. 오늘날 그곳의 사업은 예전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라 키아카까지의 철도 완공과 투피사로의 연장 계획으로 지역 세수는 증가할 것이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1908년 11월)에도 세관 앞 거리는 라 키아카에서 최근 도착한 수많은 포대와 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검사를 받고 나서 노새 등에 실려 북쪽 포토시로 운송될 예정이었다.
광장 맞은편에는 볼리비아 국립은행 지점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볼리비아 달러 또는 페소가 우리 돈으로 약 40센트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인 통화는 1페소에서 20페소 사이의 지폐들이었다. 이 지폐들의 가치는 전적으로 발행 은행의 지급 능력에 달려 있었다. 몇몇 은행들이 파산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어떤 지폐를 받아들일지 매우 까다롭게 따졌다. 그들은 주변에 대리점이 없는 은행의 지폐를 싫어했고 프란시스코 아르곤다뇨 국립은행의 지폐를 선호했다.
보조 주화인 니켈 동전은 대개 진짜였고 수요가 많았지만, 더 작은 은화는 위조된 경우가 잦거나 품질이 좋지 않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길에서 주로 거래하는 인디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거스름돈을 줄 수 없을 때는 지폐를 둘로 찢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온전한 지폐가 점점 희귀해지고 있었고 은행들은 새 지폐 발행 비용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들 은행 지점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꿀 때 몇 번이나 반쪽 지폐만으로 지급받았다. 이 반쪽 지폐들은 볼리비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었지만 라파스에서는 할인되어 받아들여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받지 않았다.
보조 화폐의 부족과 위조 화폐의 빈번함은 원주민들이 부정한 관리들과 약탈적인 군인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실제 가치가 있는 모든 동전을 땅에 묻는 습관 때문이라고 들었다. 예로부터 인디언들은 엄청난 양의 귀금속 제품들을 땅에 묻어왔다.
투피사는 1819년 무력한 볼리비아 애국자들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무의미한 소규모 전투 중 하나가 벌어졌던 곳이었다. 사실 팜파스에서 포토시로 이어지는 이 오래된 교역로는 독립 전쟁 당시 수많은 교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투피사에는 두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하나는 국경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주둔한 볼리비아 군대의 본부였다. 다른 하나는 여행자들이 더 자주 찾는 곳이었다. 우리가 묵은 그랜드 호텔 테르미누스는 한때 백색이었던 길고 낮은 건물로, 조약돌이 깔린 안뜰과 안뜰로 열린 몇 개의 침실이 있었다. 이곳은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주장하는 호감 가는 사기꾼이 운영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는 외국인에게 정상 요금의 두 배를 청구하는 부류에 속했다. “구운 닭 한 마리에 2달러, 비시 한 병에 1.25달러, 독일 맥주 한 병에 1달러, 아폴리나리스 반 파인트에 40센트.” 우리는 어떤 할인도 받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길 바라며 돈 산티아고에게 이 문제를 넘겼다. 그는 이 호텔에 살면서 사무실을 두고 있었고 호텔 주인에게 여러 가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우리의 요청은 당연히 그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고,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요금이 정상적인 것 같다는 것뿐이었다. 주인은 대부분의 시간 술에 취해 있는 것 같았지만, 미국인 손님들에게 모든 술값을 청구하기에는 충분히 정신이 말짱했다.
이곳에는 클럽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그다지 번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는 2주 전에 있었던 애국적인 축하 행사 때문이었을 수 있다. 당시 1810년 첫 번째 독립 투쟁을 기념하는 작은 시극이 클럽 방에서 공연되었다. 이 극은 지역 시인이 쓴 것으로, 투피사의 후원자이자 볼리비아 남부 최고 부유층 가문의 일원이며 여러 개의 은광과 대형 수입창고를 소유한 아라마요 씨에게 헌정되었다.
투피사의 상점들은 유럽산 물건들을 꽤 많이 갖추고 있었지만 조명이 밝지는 않았다. 이들이 겨냥하는 고객은 화물을 세관에서 검사받는 동안 이곳에 모여드는 짐꾼들, 즉 아리에로들이었다. 주변 인디언들은 관개수로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겨우 살아가기 때문에 쓸 돈이 거의 없었다.
투피사에는 두 개의 신문이 있었다. 하나는 3년째 발행되는 주 2회 신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시극의 작가가 최근에 시작한 주간 문예지였다. 주간지는 축하 행사를 가장 아첨적인 용어로 언급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투피사의 사회생활은 이제 그 결점과 부족한 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할 만큼 성장했다. 이러한 문제들은 적절한 열정과 선의만 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투피사는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있었던 그토록 가치 있는 연극 공연을 아직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8장
투피사에서 코타가이타까지
우리는 볼리비아 정부가 최근 투피사에서 안토파가스타 철도의 우유니까지 주간 역마차 노선과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포토시까지 다른 노선에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토시까지의 요금은 22달러였고 여정은 단 4일이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역마차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에 지쳤고, 말을 타고 가면 더 잘 볼 수 있고 더 자유로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가 도착하기 2주 전, 한 쌍의 강도들이 대형 광산의 노동자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 위해 운반 중이던 2만 달러가 든 수레를 습격했다. 그 중 한 명은 핑커턴 탐정들에 의해 아리조나에서 쫓겨난 자였다. 부유한 볼리비아인 광산주들은 즉시 강도들의 생사 여부와 상관없이 체포에 대한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이는 강도들과 그들의 친구들(20명 이상이나 되는 것 같았다)이 강도들을 추적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러나 이는 광산주들을 저지하지 못했고, 50명의 볼리비아 군인들이 강도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인디언 오두막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강도들을 발견했다. 강도들은 부주의하게도 오두막 문에서 몇 야드 떨어진 곳에 노새와 소총을 두고 있어서 도망칠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져 3-4명의 군인들이 사망하고 그만큼 더 부상을 입은 후, 오두막의 짚 지붕에 불이 붙었고 강도들은 결국 야외로 쫓겨나 쓰러졌다.
각자 몸에 여섯 발씩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의 노새는 붙잡혀 돈 산티아고에게 팔렸고, 그는 내 여행을 위해 그중 한 마리를 내게 주었다. 그 노새는 매우 훌륭한 안장 노새로 판명됐다. 이전 주인이 그 노새의 빠른 다리와 뛰어난 폐활량의 혜택을 누렸을 때는 볼리비아 군인들이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안데스 산맥의 일반적인 무역로를 따라가는 그 지역에서는 네 가지 여행 방식이 있었다. 첫째, 자신의 동물을 구입하고 관리할 하인을 고용한 뒤 여행이 끝날 때 헐값에 파는 것이었다. 이는 가장 비용이 많이 들지만 가장 만족스럽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단, 믿을 만하고 평판 좋은 아리에로를 구하는 데 성공해야 했다. 부주의한 아리에로는 곧 절망에 빠뜨릴 것이며 노새들이 반쯤 굶주리고 등에 상처가 나 쓸모없게 되도록 할 것이다. 둘째, 전문 운송업자를 고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정해진 금액을 받고 동물을 제공하고 동행하며 먹이를 주고 관리하여 가능한 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주었다. 속도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 방법이 첫 번째보다 더 확실했다. 포스테에서 사료값이 비싸기 때문에 계약자는 가능한 한 빨리 행렬을 전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가장 비용이 적게 들고 가장 번거로우며 가장 불확실한 방법이었다. 이는 포스테에 여행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노새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행 중 이 마지막 방법에 의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며 자주 즐거워했다. 우리가 도착한 포스테에는 노새를 전혀 볼 수 없거나, 있다 해도 두세 마리뿐이었고 그마저도 우울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어 보통 짐조차 느린 걸음으로밖에 나르지 못할 것 같았다. 포스테 노새에 의존하는 여행자는 풍경이나 그 지역의 특성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주된 인상은 해가 지기 전에 다음 포스테에 도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맞는 불행한 노새들뿐일 것이다. 넷째, 우리가 선택한 방법으로, 평판 좋은 계약자로부터 그의 최고의 노새 몇 마리와 가장 신뢰할 만한 아리에로 한 명을 하루 단위로 고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원하는 속도 이상으로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노새들이 잘 관리될 것이며, 산악 여행의 불편함이 최소화된다. 긴 여행이 아니라면 자신의 동물을 구입하는 것만큼 비용이 들지 않으며 덜 위험하다.
돈 산티아고의 노력 덕분에 필요한 노새와 물자가 이틀 만에 준비됐다. 그의 제안으로 우리는 아리에로로 맥이라는 떠돌이 스코틀랜드인을 데려갔다. 그는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아르헨티나로 흘러들어왔고 지금은 볼리비아 남부에서 운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는 좋은 부관이 될 것 같았고, 우리는 그의 서비스를 확보한 것이 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과거 경험을 믿고 우리는 그에게 앞으로 5일 동안 필요한 식량을 구매하라고 했다. 그는 삶은 달걀 4다스와 구운 닭 3마리를 샀다. 그는 이것들을 내 가죽 안장가방에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이노스 과일염 한 병과 함께 대충 넣었다. 예상대로 달걀은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가 되었고, 과일염 병은 깨져 내용물이 닭에 잘 문질러져 우리의 다음 2-3일간의 식사는 평범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맑고 화창한 아침에 투피사를 떠나 북쪽으로 달렸다. 우리는 계속해서 유타와 남부 콜로라도를 떠올리게 하는 반건조 지역을 지났다. 2리그 동안 우리는 집 한 채도 보지 못했고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계곡 바닥은 넓고 평평했으며, 모래와 자갈로 덮여 있었고 작은 관개 수로들이 간간이 가로질렀다. 거의 유일한 녹색 식물은 선인장과 미모사 나무였다. 양쪽으로 빠르게 무너져 내리는 듯한 황량한 언덕들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침식된 언덕 경사면이 굴뚝, 폐허가 된 공장, 심지어 요새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침식으로 인해 환상적인 첨탑이 생겼고, 종종 버팀벽이 있는 언덕들은 대성당처럼 보였다.
9시경 우리는 케추아족 가족을 만났다. 아내는 아기를 업고 실을 잣고 있었고, 남자는 나무 쟁기를 어깨에 메고 봄 갈이를 하려는 관개된 밭으로 소들을 몰고 가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형편이 닿는 한 많은 화려한 색상의 페티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것이 이 지방의 유행이었다.
관개 수로 중 하나 근처, 협곡의 버팀벽 같은 벽 그늘 아래에서 우리는 100마리의 노새를 만났다. 그중 일부는 인내심 많은 노새의 몸 전체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포장 상자들을 나르고 있었다. 물론 적절히 잘라내고 끝 부분을 줄이면 말이다. 일반적으로 짐 노새들은 136kg의 짐을 나를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동물들이었다. 이런 대열에는 12명의 아리에로들이 동행한다. 그들은 매일 새벽 3시 전에 일어나 끝없는 안장 씌우기와 짐 싣기 작업을 시작한다.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은 그동안 한 사람이 준비한 든든한 아침 식사를 하고 8시간 행군을 시작한다. 오후 5시경이나 그 전에 적당한 야영지에 도착하면 대열은 멈추고 짐을 내리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겨우 다음날 과정을 반복하기 전 몇 시간의 수면을 취할 수 있을 만큼 끝나게 된다.
다행히도 이 상품 상자들 대부분은 독일에서 포장되었다. 그들은 남미 산악 여행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큰 나무 상자들이 길가의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히고 하루가 끝날 때 안장 밧줄을 풀면 쿵 하고 떨어지기도 했지만, 내용물은 사실상 목적지에 좋은 상태로 도착할 것이 거의 확실했다.
정오 무렵, 우리는 새하얗게 칠해진 어도비 벽돌로 지어진 농장 건물 무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부재 지주의 소유였다. 여기서 우리는 노새를 위한 신선한 사료와 우리를 위한 뜨겁게 끓인 수프와 차를 점심으로 먹을 수 있었다. 건물 중 하나에는 6~8명의 학생이 다니는 지역 학교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큰 소리로 공부하고 있었다. 그 소음은 신경질적인 뉴잉글랜드 출신 “여교사”의 귀에는 상당히 거슬렸겠지만, 선량한 볼리비아 교사는 자신에게 신경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고, 단지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같은 건조한 계곡을 따라 계속 걸었다. 염소 떼가 미모사 나무의 아래쪽 가지에서 먹이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고, 좀 더 대담한 염소들은 심지어 나무 위로 올라가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오후 중반, 우리는 한 계곡을 벗어나 다른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고개에서 우리가 지나온 계곡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전반적인 색조는 갈색이었고, 여기저기 먼지 낀 초록색이 희미하게 보였다. 주변에는 황량한 언덕과 메마른 산들이 뒤섞여 있었고, 사람이 사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유일한 생명의 징후는 그날 일찍 지나쳤던 노새 대열의 긴 행렬뿐이었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살기에 너무나 부적합하여 남부 볼리비아의 이 풍경과 대부분의 풍경은 답답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물의 눈”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샘에 도착했다. 이 샘은 길가에서 솟아나 조심스럽게 보호된 관개 수로로 흘러갔다. 예상대로 근처에 작은 인디언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케추아족으로, 작은 펠트 모자와 허름한 셔츠, 그리고 수제 천으로 만든 듯한 짧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천은 꽤 매력적으로 보였고, 인디언들이 직접 만든 것이라는 로맨틱한 느낌에 우리는 구매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모조품”이며 영국 맨체스터에서 대량 생산된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접었다. 이 케추아족은 겸손한 사람들로, 서로를 만날 때마다 모자를 벗으며 지나치게 공손했다. 남녀 모두 등 뒤로 긴 머리를 땋아 내렸다.
이 작은 마을은 우기에 이 계곡을 가끔 휩쓰는 홍수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협곡 측면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오두막에서는 일종의 봄 축제가 적당한 음주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엄숙한 노래와 원시적인 북의 단조로운 소리만이 유일한 흥겨움의 징후였다. 몇 송이의 밝은 꽃을 머리에 꽂은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았고 마을에는 늘 있는 오물과 벌레가 있어서, 우리는 건조한 개울바닥에 접이식 침대를 설치했다. 고도는 약 3,000미터였다. 별들은 매우 선명했다. 밤은 서늘했고, 최저 기온은 8.3℃로 오후의 최고 기온에서 22℃나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차가운 닭고기와 이노스 과일염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이것이 우리의 보어 전쟁 참전 용사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토라에 도착했다. 이곳은 전형적인 볼리비아의 포스테 또는 탐보였다. 그것은 창문 없는 6개의 낮은 흙벽 오두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울타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에는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팔기 위한 알팔파 사료가 보관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포스테의 관리인과 그의 가족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는 또한 화로가 있어서 사람들을 위한 유일한 편의 시설인 뜨거운 물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또 다른 곳에는 위가 평평한 잘 구운 흙더미 2~3개가 침대 역할을 했다. 지붕, 흙바닥, 나무문이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다른 편의 시설이었다.
이런 포스테들은 다소 더럽고 불편하지만, 보통 남부 볼리비아의 잘 다니는 도로에서 24~40킬로미터 간격으로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은 그림 같지는 않지만, 그 황량한 지역을 여행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알팔파가 자라는 초록 반점이 한두 개 있을 수 있는 작은 흙벽 오두막 모음을 완벽한 휴식처로 반기게 된다. 물론 먹을 것이라고는 당신이 가져온 음식뿐이지만, 항상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고, 당신의 아리에로(보어 전쟁 참전 용사가 아니라면)가 도착 20분 이내에 훌륭한 차 한 잔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토토라에서 출발한 길은 계속해서 계곡의 바위 바닥을 따라 이어졌다. 때때로 작은 물줄기나 관개 수로가 나타났다가 알팔파나 키노아 밭으로 사라졌다. 건기에는 마차가 이 길을 이용하려 하고, 우리는 북쪽으로 가는 열두 대의 마차를 추월했다. 각 마차는 여섯 마리의 노새가 끌었는데, 마차에서 가장 가까운 노새에 마부가 기수처럼 탄 채로 3마리씩 나란히 모는 방식이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우리는 이 계곡을 벗어나 동쪽으로 흘러 거대한 필코마요 강과 합류하는 코타가이타 강이 흐르는 바위투성이의 모래 평원으로 내려갔다. 11월 말인 이 시기에 강은 넓고 얕아서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물이 빠져나간 모래톱에는 짐 노새와 마차의 대열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그 너머로 코타가이타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1816년 아르헨티나 애국자들이 크게 패배한 곳이다.
이곳은 어떤 면에서 남부 볼리비아의 교차로이며 돈 산티아고의 역마차 노선의 주요 정거장 중 하나다. 안토파가스타 철도의 우유니는 여기서 서쪽으로 185km 떨어져 있으며, 마차로 3-4일 거리다. 포토시 광산은 북쪽으로 거의 같은 거리에 있다. 신티 주의 주도인 카마르고는 정확히 동쪽으로 며칠 거리에 있고, 투피사는 정남으로 87km 떨어져 있다. 투피사에서 우유니로 가는 노선은 여러 개지만 가장 중요하고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코타가이타를 경유하는 것이다. 이 길은 새로 만들어졌고 매우 불편하다고 한다. 여행자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몇몇 광산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다. 멀지 않은 곳에 초롤케라는 유명한 은광이 있는데, 해발 5,200미터가 넘는 고도에 위치해 있다.
코타가이타 마을은 전형적인 광장, 몇 그루의 나무, 중앙의 분수, 한쪽의 교회가 있는 오래된 스페인 정착지다. 구운 흙으로 지은 1층짜리 흰색 회칠한 집들, 직각으로 교차하는 좁은 거리들은 중앙을 향해 경사진 돌 포장이 되어 있고 하수구 역할을 하는 도랑이 있다. 몇몇 인디언들과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몇 개의 상점이 있다. 인구는 1,200명이라고 하지만 나는 의심스럽다. 고도는 조금 더 낮다.
투피사.
우리는 점심 식사 후 코타가이타를 떠났다. 에스카라의 탐보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길 바랐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우리의 스코틀랜드인 아리에로 맥은 돈 산티아고가 투피사에서 우리를 위해 골라준 짐 나귀들이 포토시까지 갈 만큼 충분히 튼튼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의 마차 대리인에게 더 좋은 동물 두 마리를 요청했다. 대리인은 우리의 베테랑이 마구간에 가서 마음에 드는 노새를 골라가도록 허락했다. 보어 전쟁에 대한 지식은 풍부했지만 볼리비아 노새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던 그는 강해 보이는 짐승 두 마리를 골랐다. 그것들은 마차를 끌어본 적은 있었지만 짐을 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눈가리개를 씌운 후 어렵사리 안장을 얹었고, 출발하려는 찰나 그중 한 마리의 왼쪽 뒷발에 편자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술에 취해 덩치 큰 인디언 대장장이를 불렀다. 그는 새 편자와 못, 망치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맥이 눈가리개를 씌운 노새를 붙잡고 있는 동안 한 인디언이 편자를 박을 발을 노새의 꼬리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대장장이가 작업을 시작했다. 편자를 맞추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고, 두 번째 못을 박을 때 노새가 너무 거세게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쳐서 세 사람과 함께 도로 한가운데로 나뒹굴었다. 마침내 많은 고초 끝에 편자를 단단히 박았고, 군중들의 환호 속에 우리는 포토시를 향해 힘차게 출발했다.
새로 들인 짐 노새들은 길 감각이 전혀 없었고 고삐도 없어서 곧바로 도망쳤다. 한 마리는 큰 어려움 없이 잡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언덕을 올라 어린 미모사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은 가시 달린 가지로 짐을 붙잡으려 했지만 일부만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노새는 계속 내달렸고 결국 짐이 완전히 뒤집혀 넘어지면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더플백은 새 것이어서 큰 피해는 없었다. 맥은 이 노새를 다른 노새만큼 잘 다룰 수 있다고 고집했다.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불쌍한 마차용 노새에 다시 짐을 실었다. 그리고 우리 넷은 한 시간 넘게 이 두 마리의 불쌍한 동물들이 제대로 짐을 지고 짐 나귀처럼 길을 따라가게 만들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거부했고, 우리는 할 수 없이 그들의 짐을 풀어 코타가이타로 돌려보냈다.
한편 맥은 점심때 신중하게 버렸던 두 마리 노새를 다시 고용했다. 이 일은 맥이 우리보다 짐 꾸리는 법을 더 모르고 비상시에 완전히 쓸모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용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돈 산티아고의 훌륭한 동생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다음날 아침 새 아리에로와 함께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열심히 말을 몰아 날이 어두워진 지 한 시간 만에 에스카라의 작은 탐보에 도착했고, 들어가는 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다. 이 나라에서는 악의가 없다면 밤에 여행할 일이 없다.
## 제9장
## 에스카라에서 라하 탐보까지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들어왔던 볼리비아의 삶의 한 단면을 목격했다. 남쪽으로 여행 중이던 볼리비아 군 장교와 병사 두 명이 에스카라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신속히 출발하기를 원했다. 포스테는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대신 여행하는 정부 관리들에게 노새와 사람을 제공해야 한다. 각 포스테에는 3-4명의 포스티욘이라 불리는 안내인들이 있다. 이날 아침 장교의 마음에 들 만큼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그가 출발하고 싶어 할 때 노새들이 준비되지 않았고 온순한 케추아족 포스티욘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설명 중에 장교는 화를 잃고 튼튼한 승마용 채찍을 들어 반쯤 옷을 벗은 가련한 인디언의 얼굴과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후자는 몇 분 동안 무표정하게 견디다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고, 장교는 그를 쫓아가며 계속해서 빠르게 채찍질을 가했다. 마침내 포스티욘이 달아나자 장교는 그를 쫓아가며 숨이 차 멈출 때까지 때리고 저주했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가장 이상한 점은 인디언이 매를 맞으면서도 보인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분노나 짜증의 기색조차 전혀 없었다. 채찍 자국으로 피가 나서 얼굴과 옆구리로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늦게 다른 포스테인 키르베에서 우리는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인디언이 도망가지도 않았다. 주인의 아들인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6피트 남짓한 덩치 큰 사내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포스티욘 중 한 명을 나무라며 피가 흐를 때까지 소가죽 채찍으로 얼굴과 가슴을 때렸다. 다른 인디언처럼 그의 얼굴도 완전히 무표정했고, 분노나 짜증의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에 장교에게 화가 났었고 이번 광경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볼리비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브라이스 씨가 탁월하게 표현했듯이, “약한 인종과 함께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결점이 어떤 종류의 짜증을 유발하는지, 가혹하거나 독단적인 행동을 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 어떻게 기질과 자제력이 시험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 철학자의 미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성인의 온화함이 있어야 후진 인종의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의와 존중을 유지할 수 있다.” 케추아족이 후진 인종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장 이른 역사 시대부터 이 불쌍한 인디언들은 사실상 노예였다. 예속이 자신들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그들은 이를 신의 섭리로 여긴다. 잉카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잘 대우했고, 관개 시설과 산악 지대의 보도, 격류를 가로지르는 현수교, 여행자들을 위한 탐보 등을 모두 좋은 상태로 유지하도록 신경 썼다. 반면에 금을 찾아 헤매던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광산의 강제 노동자로 그들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 외에는 예속된 케추아족에게 관심이 없었다. 현대 볼리비아인들은 그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두 인디언이 가혹한 매질을 그토록 온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본 후 피사로가 단호한 스페인 군인 소수만으로 페루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와, 1781년 불운한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의 압제에 맞서 인디오들을 봉기시키려 했을 때 거의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졌다. 그는 6만 명의 병력을 거느렸지만, 스페인 장군은 겨우 2만 명으로 그를 쉽게 물리쳤다. 그중 스페인인은 몇백 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우호적인 인디오들이었다.
이 건조한 고원에서 만연한 극도로 가혹한 생활 조건이 이 민족의 기상을 꺾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관개 수로에 생계를 의존하는 민족은 쉽게 정복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침략군이 해야 할 일은 댐을 파괴하고 농작물을 망치고 주민들을 기아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케추아인들은 우리가 보통 산악민족과 연관 짓는 특징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쉽게 생계를 꾸리거나 사색할 시간을 주기에는 너무나 황량하다. 그들은 거의 항상 반쯤 굶주린 상태였다. 그들의 유일한 위안은 코카 잎을 씹는 것에서 왔다. 코카는 우리가 코카인을 추출하는 식물이다. 케추아인들은 코카만 충분히 있으면 며칠 동안 음식 없이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는 이 코카인 습관이 그들의 지성에 미친 영향을 밝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범죄로 가혹한 처벌을 받으면서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심지어 압제자에 대해 어떤 원한도 품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코카 습관이 이런 매우 불만족스러운 상황의 상당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코카는 그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디게 만들었다. 그를 멍청하게 만들고, 거의 모든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게 만들었으며, 모든 야망을 잃게 하고, 우리가 인간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여기는 것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들었다.
볼리비아와 페루를 여행하면서, 나는 케추아인들이 돈을 받고 음식이나 숙소를 팔려 하지 않는 경우가 반복해서 있음을 발견했다. 코카 잎과 담배를 선물로 주면 받아들였다. 후한 금액을 제안해도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근 마을에서 많은 필수품이나 편의품을 구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개 그는 자신의 동물을 빌려주거나 치즈나 계란, 또는 다른 어떤 것도 팔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케추아어 단어이자, 생활필수품의 존재 여부를 묻는 모든 질문에 가장 흔히 듣는 대답은 “마나 칸카”, 즉 “없다”이다.
이런 상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템플이 1825년 볼리비아를 여행했을 때, 그는 만연한 “노 아이 나다”(전혀 아무것도 없다)에 충격을 받았다. 가난, 결핍, 비참함, 그리고 무관심이 이 우울한 구절이 말해주는 이야기다. 사실 케추아인들은 야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당신이나 그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겨우 몸과 영혼을 붙일 만큼만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신경 쓰기를 그만두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케추아인들은 볼리비아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에스카라에서 우리 길은 계속해서 반건조 계곡을 따라갔다. 우리는 포토시와 수크레로 향하는 노새 수레 행렬과 마주쳤다. 한 수레에는 똑바로 세워진 피아노가 있었고, 다른 수레에는 광산 기계 부품들이 있었으며, 또 다른 수레들에는 수크레의 새 수도 시설을 위한 주철 파이프들이 실려 있었다. 거의 모든 수레들은 아르헨티나산 건초 뭉치를 실었는데, 이 지역이 너무 건조해서 동물들의 사료를 구하기가 극도로 어렵고, 보리나 알팔파도 구할 수 있을 때는 종종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날씨는 계속 좋았다. 32킬로미터의 뜨겁고 먼지 나는 길을 달린 후, 우리는 키르베의 포스테에서 멈췄다.
키르베에 도착하기 직전, 우리는 투무슬라 강을 건넜다. 이곳은 볼리비아 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824년 아야쿠초에서 수크레가 대승을 거둔 후,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정복되지 않은 스페인 군대는 카야오의 수비대와 남부 볼리비아의 오야네타 장군 휘하의 소규모 부대뿐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아야쿠초 전투 소식에 크게 사기가 꺾였고, 이 전략적 요충지의 작은 수비대를 지휘하던 한 장교가 공개적으로 애국 진영에 가담했다. 오야네타는 헛되이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1825년 4월 1일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스페인 장군은 패배하여 전사했다. 카야오의 수비대는 몇 달 더 버텼지만, 이것이 실질적인 전투의 끝이었다.
우리는 키르베의 탐보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나 짐승을 위한 피난처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온 주간 포토시 역마차가 오후 6시경 한 명의 승객을 태우고 도착했다. 그는 곧 마차 밑에 침대를 펴고 편안하게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포토시에서 온 짐은 짐승에 실려 아르헨티나 가우초인 페르민 차일레가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맥 대신 고용했고, 맥을 떠나보내게 되어 다행이었다. 페르민은 가우초답게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어깨가 굽고 다리가 휘었다. 거무스름한 몽골인 같은 얼굴에 거친 검은 머리가 관을 씌운 듯했다. 그는 우리에게 신의 선물과 같았다. 대부분의 아리에로가 감당할 수 없는 갈색 코듀로이 천으로 만든 헐렁한 옷은 그가 절제하고 근면하며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보다 더 좋은 노새몰이꾼은 없었다. 1907년 야노스를 가로질러 내 수레를 안내했던 충실한 베네수엘라 농부 라파엘 리바스처럼, 그는 노새들을 훌륭히 돌보면서도 그들의 인내력의 한계까지 몰았고, 우리에게 헌신적이었으며, 신뢰할 수 있고 주의 깊은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그는 평원 사람으로, 우리가 지나가는 나라의 비참한 산악민들과는 정신과 업적 면에서 마치 다른 대륙 출신인 것처럼 달랐다.
키르베에서 북쪽으로 계속 가면서 계곡은 좁아졌고, 우리 길은 계속해서 마른 강바닥을 따라갔다. 보이는 물은 모두 작은 도랑에 모아져 강바닥에서 4.5미터에서 6미터 높이의 언덕 비탈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 계곡의 언덕 중 일부에는 옥수수, 키노아, 감자, 심지어 포도까지 재배하는 계단식 밭이나 안디네스가 있었는데, 이는 많은 노력을 들여 만든 것이었다. 이런 계단식 밭은 더 북쪽으로 가면 흔했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처음 본 것이었다. 인디언들의 주식은 추뇨라고 하는 작은 감자인데, 자연적인 맛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얼리는 과정을 거친다. 이 시기의 주요 요리 중 하나는 선인장 열매다. 모든 사람이 넓은 잎의 식용 종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아리조나와 뉴멕시코에서 가시 없는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계곡을 더 올라가면서 나는 가파른 절벽을 따라 관개수로를 만든 독창성에 감명받았다. 수많은 작은 터널과 작은 고가수로로 연결된 작은 물줄기가 4.8~6.4킬로미터를 흘러 수위선보다 충분히 높은 평평한 공간에 도달하여 작은 밭을 일굴 수 있게 했다. 노새와 말, 염소, 돼지, 개, 그리고 매우 적은 수의 새들 외에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은 끝없는 갈색 언덕과 비슷한 색의 작은 야생 기니피그였다. 나는 라마를 보지 못한 것에 놀랐다.
키르베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토로팔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모든 면에서 기니피그만큼이나 갈색이고 먼지투성이었다. 사실, 그것은 기니피그들처럼 풍경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정오쯤 우리는 또 다른 언덕 마을인 사로팔카에 도착했는데, 가파른 경사면에 집들이 서로 바로 위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거대한 계단처럼 보였다. 우리는 불규칙한 좁은 길을 따라 마을을 올라가다가 초라한 작은 탐보를 발견했고, 거기서 알팔파 묶음 몇 개와 수프 한 그릇을 샀다.
노새를 위한 알팔파와 우리를 위한 뜨거운 추페 한 그릇, 그리고 차를 위한 뜨거운 물을 구할 수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포스테가 “생활의 모든 필수품”을 잘 갖추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었다. 추페는 얼린 감자와 질긴 양고기나 라마 고기로 만든 일종의 스튜 또는 걸쭉한 수프다. 원래 상태에서도 맛이 좋지 않지만, 현지인들의 취향에 맞게 제공될 때는 붉은 고추로 너무 강하게 양념되어 외국인의 입맛에는 너무 매웠다.
오후에 계곡이 좁아져 협곡이 되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무거운 짐을 실은 노새 수레들이 최대한의 어려움을 겪으며 지나가는 것을 더 많이 보았다. 협곡을 지나자 유황 온천과 유황 퇴적층이 있었다. 뜨거운 온천 하나가 길가 바로 옆에서 솟아나왔다. 18세기의 배덱커인 “엘 라사리요”에 따르면 한때 여기에 포토시에서 온 목욕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소박한 온천 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가 끝날 무렵 우리는 카이사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거의 64킬로미터를 이동한 후였다. 카이사는 오래된 스페인 도시였는데, 다른 도시들과 똑같아 보였다. 1층짜리 집들, 좁고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거리들, 광장으로 비워둔 한 블록, 한쪽에는 교회와 신부의 집, 다른 세 면에는 우리가 갓 구운 뜨거운 빵과 맥주, 치즈, 양초를 산 가게들이 몇 개 있었다. ‘라 리베르타드’라는 간판이 붙은 여관에는 ‘무이 바라토'(매우 저렴함)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요금을 부과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짐작했고, 사실 그랬다. 실제로 우리는 다음날 아침 여주인과 매우 불쾌한 언쟁을 벌였다. 페르민은 그녀가 일반적인 가격의 3배를 요구했다며 분개했다.
카이사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수크레로 가는 길이 오른쪽으로 갈라져 북쪽으로 푸나와 요탈라로 향하는데, 거기서 포토시에서 수크레로 가는 길과 만난다.
11월 22일 카이사를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가다가 곧 눈 덮인 볼리비아 산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눈이 그리 깊지 않았는데, 밤사이에 내렸고 정오가 되기 전에 모두 녹았기 때문이다. 우리 길은 여러 능선을 넘어 부분적으로 경작된 계곡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는 오래된 은광과 쿠추 인헤니오라고 불리는 제련소가 있었다. 이곳의 길은 유난히 좋았다. 심지어 1773년의 “장님의 안내서”에서도 이곳이 “말을 빨리 달리거나 질주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협곡을 올라가다가 나는 위에서 떨어지는 수정같이 맑은 작은 폭포에 끌렸고, 그 시원하고 맛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던 투피사 출신의 볼리비아 사람이 이 고도에서 찬물을 마시는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지역에서는 아무도 찬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고, 나는 술에 대한 자연스러운 선호 때문에 찬물에 대한 보편적인 편견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찬물 한 잔을 즐기고 그것이 해롭지 않을 거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한 시간 후 우리는 포토시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고원 가장자리에 홀로 서 있는 라하 탐보라는 비참한 작은 포스테에 도착했다. 고도는 약 3,962미터였다. 태양이 매우 따뜻했고, 여관 마당의 거친 돌바닥에 내린 직후 나는 햇빛과 그늘의 온도 차이를 테스트하기 위해 온도계를 설치했다. 정오의 햇빛 아래 온도는 섭씨 29.4도였다. 그늘에서는 섭씨 8.9도였다. 온도를 읽자마자 나는 오한을 느끼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와 뜨거운 수프, 그리고 더 뜨거운 브랜디와 물을 마셨지만 따뜻해지지 않았다. 가방을 풀고 두꺼운 스웨터를 두 벌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지럽고 따뜻해지고 싶은 비참한 느낌에 마당의 따뜻한 돌 위에 누웠다.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었고, 곧 소로체, 푸나 또는 고산병의 일반적인 증상을 겪게 되었다. 구토와 설사, 오한의 조합도 나빴지만, 가장 가까운 의사로부터 32킬로미터 떨어진 이 황량한 포스테에서 볼리비아 탐보의 일반적인 부속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아프게 될 것이라는 전망은 훨씬 더 나빴다. 어떻게든 나는 페르민을 설득해 동물들에게 안장을 씌우고 짐을 싣게 한 다음 내 노새에 태웠고, 나는 포토시에 도착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탐보를 떠나기 전에 해야 할 마지막 일은 계산서를 지불하는 것이었고, 나는 투피사에서 구입한 볼리비아 지폐로 지불하려 했다. 아아, 지폐 중 하나가 라파스에서 15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은행권이었는데, 실제로 포스티욘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은행이었다. 자존심 강한 케추아족 포스티욘이 양호한 화폐를 거부한다는 생각에 몹시 화가 났고, 소로체 때문에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그에게 받아들이게 하려 했다.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는 지갑에서 다른 지폐를 찾아야 했다. 아마도 추위나 흥분 때문에 손이 약간 떨렸을 것이다. 지폐를 꺼내다 일부를 찢어버렸다.
찢어진 부분이 중간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한쪽 끝에 가까웠기에 원주민은 받기를 거부했다. 다른 소액권이 없어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 사이 페르민과 짐 나귀들은 이미 탐보를 떠나 포토시로 향하고 있었고, 스미스 씨는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원주민이 거절한 온전한 지폐를 둘둘 말아 그에게 주고, 그가 살펴보는 동안 길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가 너무 빨랐고 내 말고삐를 잡았다. 극도로 화가 나 그를 탐보 벽으로 밀어붙여 잠시 놓게 만들어 도망갈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불법적인 행동이었지만, 그 은행권은 완벽히 유효한 것이었다. 그가 돌이나 더 심한 것으로 우리를 쫓아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는 단지 케추아족일 뿐이라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였고 우리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았다.
매서운 찬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라하 탐보와 유명한 포토시 시 사이에 있는 32킬로미터의 고원을 횡단했다. 평원에는 먹이를 찾는 라마 떼가 있었지만, 우리의 관심을 끈 것은 앞에 보이는 원뿔 모양의 언덕이었다. 그것은 포토시의 세로로, 250년 동안 세계의 경이로 여겨졌던 언덕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어떤 이야기도, 미다스의 꿈도 이 낭만적인 원뿔에서 흘러나온 부를 능가하지 못했다. 20억 온스의 은이 채굴된 기록이 있으며 아직도 그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산의 동쪽 어깨를 돌아 우리는 몇 개의 큰 제련소를 지나쳤는데, 그 중 일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근처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광산에서 일하도록 수천 명씩 끌고 온 가련한 원주민들을 가두기 위해 지었다는 건물의 폐허가 있었다. 길은 작은 계곡을 따라 내려가 1.6킬로미터 정도 이어지며 수백 채의 건물 폐허를 지나간다. 18세기에 포토시는 15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했다. 지금은 겨우 1만 5천 명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도시 부분은 옛 광장과 조폐국, 시장 근처에 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르고 돌이 많은 거리를 시끄럽게 내려가 콜론 호텔 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주의 깊은 오스트리아인 주인이 우리를 환영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분명히 아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이 후진 포토시의 시민이 미국 호텔 주인보다 병든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포장된 안뜰은 작았지만 2층의 방들은 넓었고, 라하 탐보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초라한 흙벽돌 벽들보다 훨씬 좋아서 하루 이틀 정도는 적극적인 탐험을 그만두고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잘 훈련된 볼리비아 의사의 손에 맡겨졌고, 그의 도움과 페르민과 스미스 씨의 친절한 간호 덕분에 곧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근처에는 ‘대학’이 있었는데, 가난한 소년들이 축축한 흙벽돌 의자에 앉아 빛도 잘 들지 않고 악취가 나는 방에서 2류 중등교육을 받고 있었다. 한때는 수도원이었지만, 부속 교회는 오래전에 극장으로 바뀌었다. ‘대학’에서 유일하게 매력적인 것은 희귀한 옛 꽃들이 여전히 피어나려 애쓰는 아름다운 옛 수도원 정원이었다.
‘대학’ 맞은편에는 클럽이 있었다. 당구대(남미 전역의 오지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당구대를 볼 수 있다)와 바가 있었다. 각 음료에 작은 펠트 매트를 함께 내는 관습이 있었고, 한 회원이 대접하고 싶을 때는 주변의 모든 매트를 모아 바에 가져가 자신의 돈이나 최근에 딴 돈으로 정산했다. 바는 손님이 많았다. 남미에서 가장 나쁜 기후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포토시는 열대 지방에 있지만, 그늘에서 기록된 최고 기온은 섭씨 15도에 불과했다. 도시는 해발 약 4,100미터에 위치해 있어 파익스 피크만큼이나 높았다. 매일 오후 차가운 바람이 거리를 쓸고 지나가 뼛속까지 한기가 들었다. 섭씨 -5.5도까지 내려가기도 했지만, 집에는 난로나 (수프를 제외한) 떨고 있는 주민들을 데울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 실내 온도가 대체로 섭씨 10도 아래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실내에서도 실외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코트와 모자를 착용했다. 이 고도에서는 한두 블록만 빠르게 걸어도 꽤 더워지고 한낮에는 햇볕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매력적인 도시를 어디로 돌아다녀도 눈은 계속 남쪽의 세로로 향했다. 도시에서 450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아름다운 색의 원뿔 모양 산이었다. 서쪽 안데스 산맥 너머로 해가 질 때 그 색깔의 아름다움과 놀랍게 변화하는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기란 불가능했다. 언젠가 위대한 화가가 와서 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덕의 놀라운 색조를 캔버스에 담아내길 바랐다. 분홍, 보라, 라벤더, 갈색, 회색, 노란색 줄무늬가 마치 신들이 우주를 다 칠하고 남은 안료를 여기에 쏟아부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 현재의 다채로운 모습에는 인간의 손길이 크게 작용했다. 지난 300년 동안 산을 뒤집어엎느라 바쁘게 일해왔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색의 물질 대부분은 산 깊숙한 곳에서 긴 터널을 통해 고통스럽게 끌어올려졌는데, 이는 내부에 있는 풍부한 은과 주석 광맥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 때문이었다.
[조폐국 지붕에서 본 세로의 전경]
포토시의 은 발견은 16세기 중반 한 라마 목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곧 산에 극도로 풍부한 광맥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잉카의 금이 모두 수집되어 처분된 후, 포토시는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가진 모든 식민지 중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다. 17세기 초, 뉴욕과 보스턴이 아직 상상도 못할 때 포토시는 이미 크고 극도로 부유한 도시였다. 수백 명의 스페인 모험가들을 끌어들였고 많은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 대규모 광산 캠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사치의 징후를 보였다. 호화로운 의복을 입은 귀족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말을 타고 돌로 된 거리를 오르내리며, 새로 얻은 부로 구입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의상을 입은 매력적인 여성들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축제일, 특히 국왕의 생일과 같은 큰 국경일에는 정교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오락이 제공되었다.
광대한 폐허와 매우 많은 수의 교회가 없었다면, 오늘날 이곳이 한 세기 이상 서반구 최대의 도시였다는 것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볼리비아 고원으로 향하는 루트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간선도로가 되었다. 돈이 물보다 더 자유롭게 흘렀다. 사실, 스페인 사람들은 건기에 광석을 씻고 대규모 인구의 일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그들은 도시 위의 언덕으로 올라가 많은 비용을 들여 20개의 댐을 건설해 우기에 내리는 물을 저장하고 건기를 위해 보존했다.
독립 전쟁과 그에 따른 외국 자본의 유입 직후, 런던 자본가들 사이에 광산 열풍이 불었다. 탐욕스럽고 무지한 이사들은 영국 대중의 욕심을 이용해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포토시 광산을 불균형적으로 비싼 시설로 운영했다. 대중들은 포토시 주식을 사는 데 너무나 열광한 나머지, 처음에 75나 80에 거래되던 주식이 6주 만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일부는 5,000 이상으로 올랐다. 예상대로 이 투기 열풍은 주주들뿐만 아니라 에드먼드 템플과 같이 엉터리 회사에 고용되어 포토시로 간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런던에서 그들의 어음을 인정해준 남미인들을 파산시키는 공황으로 이어졌다.
그 후 오랜 침체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철도가 가까워지고 마차길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운송비가 저렴해져 새로운 사업들이 생겨났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한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 산비탈에 광산을 파는 것이 허용되었다. 기록을 보면 세로가 처음 발견된 이후 5천 개 이상의 광산에 대한 허가가 발급되었다고 한다. 그 다채로운 경사면 아래에 얼마나 거대한 지하 미로가 존재하는지 상상하기 쉬웠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구는 산 위쪽 광산에서 나온 폐석의 눈사태로 막혀 있었다.
어느 날 나는 칠레 회사가 최근에 개장한 몇몇 새 광산을 방문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한 광산에서는 해발 약 4,500미터 높이에서 새로 발견된 은광맥을 보기 위해 500미터를 기어들어가기로 했다. 그 고도에서
고도가 엄청났지만, 광부들은 그것을 별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두꺼운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머리를 부딪침으로부터 보호하고 떨어지는 돌로부터 막아주었다. 무릎은 튼튼한 가죽 보호대로 감싸져 있었다. 그들은 발에 거대한 모카신을 신었다. 광석을 운반하는 사람들은 등에 가죽 앞치마를 묶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지저분하고 거칠어 보이는 무리였지만, 매우 좋은 임금을 받을 만했다. 얼마 전 주석 가격이 지금보다 높았을 때, 많은 새로운 광산이 문을 열었고 노동력에 대해 전례 없는 높은 가격이 지불되었다. 이제 주석 가격이 떨어져 인디언들이 더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새 광산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옛날에는 열성적인 스페인 광부들이 은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주석을 버렸다. 하지만 이제 더 풍부한 은맥이 고갈되었고, 일부는 여전히 채굴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활동은 주석 광석에 집중되어 있다. 원뿔 꼭대기에는 엄청난 양의 주석이 있다. 유일한 문제는 그것을 언덕과 도시 사이의 계곡에 있는 제련소로 어떻게 운반하느냐였다.
이 계곡에는 언덕 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가 흐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제련소들이 작은 협곡의 이쪽저쪽에 자리 잡았다. 인디언들이 매우 원시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는 수많은 작은 인헤니오가 있다. 그 중 일부는 거의 가족 단위의 사업에 불과하다. 이 외에도 28개의 대형 제련소가 있는데, 모두 은보다는 주석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 중 볼리비아인이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몇 개는 영국 자본가들이 소유하고 있고, 더 많은 수는 칠레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가장 큰 제련소는 프랑스인의 소유로 산비탈 높은 곳에서 광석을 자신의 용광로로 가져오기 위해 공중 철도를 건설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철제 버킷 줄이 그 위를 지나는 폐허에 기묘하게 현대적인 느낌을 더한다. 광석은 또한 당나귀와 라마의 등에 실려 내려온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키추아족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분명히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들에게 소중한 금속을 산에서 캐내도록 강요했을 때와 똑같은 변발과 짧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조용히 집에 있었다면 더 늦게 죽고 더 늦게 천국에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떤 보상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제련소의 생산품은 순수한 주석 주괴와 고도로 농축되고 정제된 광석 두 가지 형태로 출하된다.
계곡에서 가장 그림 같은 모습은 연기를 뿜어내는 작은 굴뚝이었다. 그것은 굴뚝이 달린 작은 화산처럼 맞은편 언덕 높은 곳에 홀로 서 있었다. 용광로의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해 연기는 돌로 만든 육교를 통해 개울을 건너 언덕으로 들어가 수직 샤프트를 따라 약 45.7미터 올라간 다음 굴뚝을 통해 약 9.1미터 더 공중으로 올라간다. 이 터널은 마치 약 61미터 높이의 현대식 벽돌 굴뚝처럼 통풍 효과를 내지만, 그 모습은 적어도 기묘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콜론 호텔의 투숙객들 중에서 매우 친근한 젊은 페루와 칠레 출신 광산 기사들의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자발적인 망명 생활을 최대한 활용했고, 비록 그 누구도 끔찍한 기후 조건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유쾌한 대화, 생일 파티, 사교 모임 등으로 주변 환경을 꽤 견딜 만하게 만들었다.
호텔의 안마당은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좋은 예였다. 지붕은 아름다운 큰 빨간 기와로 덮여 있었는데, 그 무게 때문에 서까래가 곳곳에서 무너져 물결 모양의 효과를 냈다. 한편 안마당을 둘러싸고 2층 방들을 연결하는 낡고 불안정한 발코니는 골판지 조각으로 비를 막고 있었다!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돌 포장 파티오는 저렴한 오일클로스를 모방한 끔찍한 널빤지 장식으로 훼손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이른 출발이 필요한 아리에로들이 호텔 직원들을 방해하지 않고 차를 끓일 수 있는 작은 구식 난로가 있었다. 2층의 가장 좋은 침실 밑으로 난 아치형 통로는 거리로 이어졌다. 또 다른 아치형 통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과 냄새 속에서 우리가 먹을 6코스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더러운 뒷마당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달력에 나오는 모든 병에 걸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호텔 맞은편에는 훌륭하게 조각된 석조 출입구와 2층의 각 창문에서 돌 받침대로 튀어나온 매력적인 철제 발코니가 있는 멋진 옛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현재 볼리비아 최대 수입업자 중 한 명의 주거지이자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한때는 스페인 후작의 저택이었다. 정교하게 마감된 외관은 건축가의 뛰어난 취향과 한때 포토시에서 넘쳐났던 부와 사치를 증명한다.
예수회 교회의 아름다운 탑들도 마찬가지다. 교회 자체는 사라졌지만, 견고하게 지어진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 탑들은 남아메리카에서 문명의 발전을 가장 많이 이끈 기독교 교단의 힘을 보여주는 조용한 증인으로 남아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토시에서 가장 그림 같은 곳은 시장과 그 주변 거리들이다.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힘들게 번 돈을 쓰러 이곳에 온다. 여기서는 모든 토착 사치품을 구입할 수 있다. 코카, 추페, 얼린 감자, 볶은 옥수수, 치차(손에 잡히는 대로 만든 토착 사과주) 등이다. 거리에는 작은 상인들이 줄지어 있어 건물 벽에 기대어 상품을 쌓아둔다. 마차도 없고 말을 탄 사람도 거의 없어서, 케추아 상인들의 그림 같은 가판대에 의해 인도에서 밀려나도 개의치 않는다.
거리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인디언들이 몰고 가는 라마 떼가 독특한 풍미를 더하며 쉽게 잊히지 않는다. 라마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며 서로 작은 꿀꿀거리는 소리로만 대화를 나눈다. 꽤 오만하지만 동시에 매우 겁이 많아서, 50마리 정도의 무리도 작은 인디언 둘이 쉽게 이끌 수 있다.
이 우스꽝스러운 동물들이 천천히 걸어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보는 모습은 계속해서 올리버 허포드의 시를 떠올리게 했다. 보스턴의 그 사람에 대한 시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오만한 절망의 표정으로
매우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교 모임에서 짓는 표정을 지었다.”
시장 주변에서는 거리의 양쪽에 있는 모든 공간을 소상인들이 사용했다. 그들은 햇빛과 비를 막기 위해 차양을 설치할 수 있었고, 전체적인 모습은 카이로의 거리와 비슷했다. 한쪽 구석에는 외국 천 뭉치들이 쌓여 있었고, 주인들은 그 앞 보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다른 구석에는 하얗게 회칠한 건물 벽에 기대어 토착 약방이 있었다. 작은 천 주머니에 담긴 각종 약초와 약들이 교묘하게 쌓여 있어 내용물을 보여주면서도 섞이지 않게 했다. 가장 눈에 띄는 판매 품목은 코카였는데, 이는 케추아족에게 담배보다 더 중요했다.
시장 자체는 불규칙한 돌 블록으로 대충 포장되어 있었고, 주변에는 아케이드가 있어 더 상하기 쉬운 유럽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원주민 상인들은 돌바닥 여기저기에 쪼그리고 앉아 달걀이든 도자기든, 감자든 샌들이든 자신들의 상품을 펼쳐 놓았다.
옥수수와 감자를 작은 더미로 쌓아놓는 것이 관례였다. 각 더미는 1레알, 즉 우리 돈으로 약 4센트의 가치가 있었고, 이는 시장의 가치 기준이었다. 우산 모양의 차양 아래에는 음식과 음료 판매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추페 냄비 주변에는 쪼그리고 앉은 원주민들이 둘러싸여 있어 동시에 몸을 데우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케추아족의 의복은 모든 색상이 가능했지만, 빨간색이 주를 이뤘다. 여성들은 여러 겹의 다채로운 치마를 입고 따뜻하고 무거운 색깔 있는 숄을 어깨에 둘러 두 개의 큰 핀으로 고정했다. 이 핀들은 가끔 정교한 세공품이었지만, 대개는 숟가락 모양이었다. 보통 여성들은 평범한 펠트 모자를 쓰는 것에 만족했지만, 때때로 다른 디자인의 모자를 쓰기도 했다. 그 모자의 주재료는 검은 벨벳이었고, 빨간 모사와 색깔 있는 구슬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보통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가죽 샌들을 신었지만, 여유가 있을 때는 특이한 신발을 신었다. 그것은 3.8센티미터 높이의 프랑스식 굽이 달린 샌들로, 말발굽과 비슷한 가죽 장치가 밑창에 달려 있었다.
시장 근처에는 흥미로운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쌍둥이 탑은 아직도 상태가 좋았다. 이곳에서는 예배가 거의 열리지 않았고, 우리는 간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마침내 큰 열쇠를 가져와 두 개의 예배당 벽에 걸린 역사적인 그림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그림들은 상당히 흥미로웠고 16세기의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큰 그림 한 점이 최근에 제거된 것에 대해 언급했고, 어떤 외국 백만장자가 고위 성직자에게 뇌물을 주고 그 귀중한 유물을 사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8세기에 포토시에는 60개의 교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절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다. 도시의 폐허가 된 부분은 주로 동쪽과 남쪽에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 사이에 튼튼하게 지어진 몇몇 교회나 교회 탑들이 아직 서 있었다.
하지만 몇몇 옛 수녀원과 수도원은 아직도 번창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이 소장한 훌륭한 옛 그림들과 아름다운 꽃들이었다. 이 산악 사막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녹색 정원을 거닐어 보는 것만큼 상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주요 관심사는 카사 나시오날 데 모네다, 즉 거대한 조폐국이었다. 이곳은 식민지 시대에 시작되어 스페인인들이 원주민 노예들의 강제 노동을 통해 산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받아들이던 곳이었다. 이 건물은 두 개의 시가를 차지하고 있었고, 실제로는 여러 건물들이 거대한 지붕 아래 모여 있는 형태였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정면은 인상적이었다. 지붕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장례식 항아리 모양의 작은 돌 장식들이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창문들은 철창으로 단단히 보호되어 있었다. 정교하게 장식된 이층 현관 양쪽에는 큰 붉은 타일로 덮인 무거운 목조 지붕이 돌출된 나무 발코니가 있었다.
거리에서 이 거대한 건물로 들어가 무거운 문을 지나 큰 안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두 번째 안뜰로 이어지는 아치형 통로 위에서 침입자를 내려다보는 지름 1.2미터의 거대한 얼굴이었다. 이 거대한 얼굴은 악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바쿠스와 분명한 유사점이 있었다. 누가 이것을 여기에 둔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많은 케추아족들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 안뜰에 와서 얼굴에 경의를 표하고, 잉카 시대에 떠오르는 태양에게 했던 것처럼 코카 잎 한 움큼을 앞에 던져놓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안뜰은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는 2층 발코니의 조각된 나무 난간이 있었다. 두 번째 안뜰도 잘 다듬어진 돌로 포장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보물실에서 주조기로 은괴를 운반하는 데 사용되는 좁은 궤도의 작은 철도가 있었다. 한 건물에는 물리 실험실이 있었다. 다른 건물에는 작은 체육관이 있었다. 또 다른 건물에는 광물 표본 전시관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미국의 노트르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똑똑한 젊은 볼리비아 기술자의 능숙한 지휘 아래 세워지고 있는 광산학교의 시작을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 한 오래된 건물에는 예전에 은을 두들겨 펴는 데 사용되던 거대한 나무 기계들이 아직도 서 있었다. 다른 건물의 2층에 있는 큰 방에는 조폐국의 양피지로 된 기록들과 지난 200년 동안 사용된 모든 주조용 금형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식민지 시대에 이곳에서 생산된 은의 가치는 약 10억 달러에 달했다. 대부분의 주조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볼리비아 정부는 두세 개의 건물을 정리하고 미국에서 수입한 현대식 기계를 설치했다.
조폐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는 지붕을 지지하는 거대한 목재들의 크기와 상태였다. 200년 전 차코의 먼 숲에서 산을 넘어 무한한 노력으로 운반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 목재들은 튼튼했다.
지붕 위에는 여러 개의 작은 초소들이 있었고, 이들은 작은 길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건물의 모든 부분으로 이어졌다. 옛날에는 “돈의 집”을 외부의 가능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이 밤에 다락방에서 자고 있을 때 도망치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여러 다락방을 기어다녔는데, 영양실조에 걸린 인디언조차 똑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지붕은 바닥에서 겨우 1.2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구석에는 거친 화로가 있어 말린 라마 배설물을 연료로 수프를 끓였던 것 같았다. 한낮에도 방은 어두웠다. 창문 구실을 하는 작은 구멍으로는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숙소였다.
지붕에서 바라본 전망은 매우 흥미로웠다. 성당의 우아한 탑 너머로 은산의 낭만적인 원뿔 모양이 남쪽으로 솟아있었다. 그 동쪽으로는 스페인 사람들이 유명한 저수지를 건설한 언덕들이 있었다. 더 동쪽으로는 볼리비아를 황폐화시킨 무익한 내전에서 수차례 유혈 충돌이 벌어졌던 더 높은 언덕들이 있었다. 여기 카리 카리 전장에서는 수백 명의 불운한 인디언들이 동정심을 거의 갖지 않은 혁명 지도자들을 위해 싸우다가 투표 대신 무기에 호소하는 불행한 관행의 희생양이 되었다.
우리 북쪽 전경에는 그림 같은 시장이 있고, 북서쪽 멀리로는 오루로와 리마로 가는 옛 길이 황량한 언덕을 지나 사라졌다. 서쪽으로는 다채로운 언덕과 산맥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이 보였다. 주변에는 태평양의 거대한 파도처럼 굽이치는 독특한 아치형 지붕들이 좁은 거리, 붉은 기와집, 고대 도시의 무너진 탑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11장 볼리비아의 법적 수도 수크레
포토시는 수천 명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었지만, 끔찍한 기후와 높은 고도, 차가운 바람, 냉기 어린 비로 인해 여유 있는 사람들은 동쪽으로 며칠 거리에 있는 더 살기 좋은 계곡으로 떠났다. 그곳에는 해발 2,440미터에 풍부한 수자원이 있어 매력적인 별장들이 생겨났고, 현재는 수크레의 교외가 되었다.
최근 꽤 괜찮은 마차길이 완공되어 두 도시 간에 주간 정기 마차가 우편물과 승객을 운송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타고 가는 것을 선호했고 옛길을 따라갔다. 새 길은 160킬로미터 정도였지만 옛길은 120킬로미터에 불과했다. 좋은 말을 타고 가면 이틀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고 3일에 걸쳐 가기로 했다.
우리가 지나간 계곡은 처음엔 메마르고 황량했지만 점차 초록빛이 짙어지고 사람들이 많아졌다. 전망은 종종 매우 아름답고 광활했으며 눈 덮인 산도 몇 개 보였다. 겨울 한가운데인 6월과 7월에는 눈이 자주 모든 것을 덮었다. 지금 11월 29일에는 누르스름한 갈색이 주된 색이었다.
길에서 우리는 감자, 옥수수, 포도주, 신선한 채소와 과일 등 포토시에 공급되는 농산물을 싣고 동쪽의 비옥한 계곡에서 오는 라마, 당나귀, 노새의 긴 행렬을 만났다.
이 길을 끊임없이 오가는 짐꾼들의 수와 교통량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자주 보이는 작은 술집들이었다. 이 초라한 오두막들은 돌과 진흙으로 지어져 햇볕에 말린 뒤 풀이나 관목으로 지붕을 덮었는데, 여기서 한 잔에 1페니 하는 치차를 살 수 있었다.
한 술집 앞 맨땅에서는 한 여자가 수공 베틀의 틀을 말뚝으로 고정해 놓고 판초를 짜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녀 근처에서는 가족의 저녁 식사인 수프가 세 개의 돌 위에 놓인 커다란 토기 냄비에서 가시나무와 라마 배설물로 만든 작은 불 위에서 끓고 있었다. 손님들을 기다리는 치차가 담긴 다른 그림 같은 항아리들도 있었다.
우리는 바이데커가 “원시적인 온천 시설”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따뜻한 유황수에서 호화롭게 목욕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어 포토시 수입상들의 독일인 직원들이 주말마다 즐겨 찾는 곳이었다. 사실상 남부 볼리비아에서 뜨거운 욕조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온천의 주인은 태평양에서 “비치콤버”라고 불리는 영국인 부랑자 유형으로, 우리를 위해 반쯤 굶주린 인디언들에게 적당한 식사를 준비하라고 떠들어대며 요란을 떨었다. 그의 열정에 기대가 한껏 부풀었지만 음식의 질은 일반적인 원주민 여관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두 번째 숙박지는 바르톨로였다. 인구 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로 대부분 케추아 인디언들이었고, 돌로 만든 아치형 담장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우리는 일요일 저녁에 도착했는데 여관이 이미 여행객들로 가득 차 우리와 말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포토시의 지사가 우리에게 준 편지에는 여정 중 모든 역참의 주인들에게 “여행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숙소나 사료가 부족한 경우처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역참 주인이 다른 마을로 볼 일을 보러 갔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편지에는 마을 장들에게도 부탁하는 내용이 있었기에 우리는 바르톨로의 지사 집으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그 훌륭한 신사가 일요일 방문객들과 함께 브랜디와 치차를 마시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무례한 태도를 보이려 했고, 비교적 큰 집이 있음에도 우리를 위한 방이 없다며 여관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상황이 밤 동안의 쉼터를 얻기 위해 힘을 써야 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친절한 손님 한 명이 가우초인 페르민으로부터 우리가 특사라는 것을 듣고 여관에서 가장 큰 방을 사용하던 중이었는데 그 방을 우리에게 내주고 자신은 마을의 지인들에게 숙소를 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는 동안 취한 지사의 가족들이 그를 충분히 진정시켜 정부 여권을 가진 사람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게 했고, 그는 여관으로 와서 환대를 과하게 제안했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이른 아침에 바르톨로를 떠났다. 밤사이 천둥을 동반한 소나기로 먼지가 씻겨나갔고 상쾌한 산악 공기가 정말 기분 좋았다. 가끔 수크레와 포토시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거친 돌무더기 유적을 지나쳤다. 페르민은 포토시 너머로는 가본 적이 없어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안내인이나 ‘포스티욘’의 서비스에 의지해야 했다. 그들은 한 ‘포스테’에서 다른 곳으로만 데려다줄 수 있는데, 보통 6리그 또는 32킬로미터 정도였다. 그들은 리그당 4센트의 정규 요금과 약간의 팁을 받았다.
1.6킬로미터당 1센트 조금 넘는 헐값을 받고, 그들은 동물을 잡아 안장을 씌우는 것을 돕고, 짐을 싣는 동안 짐꾸러미를 잡고 있었다. 짐을 실은 동물이 달리는 옆에서 뛰어가며 짐이 느슨해지면 도와주고, 항상 가까이에서 ‘아리에로’의 자발적인 노예이자 여행자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 대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식량 자루로 만든 것 같은 규정된 케추아식 작은 옷을 입은 그들은 쾌활하게 행진하거나 달리면서 때때로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표시로 어깨에 걸친 소 뿔 나팔을 힘차게 불었다.
‘포스티욘’들은 요금을 선불로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수세기에 걸친 경험을 통해 그들은 튼튼한 채찍을 든 여행자가 좋은 동물을 타고 정부의 권한을 등에 업고 있으면 요금을 지불한 후에는 그들을 필요한 거리만큼 가게 할 수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해 더 이상 그들의 서비스가 필요 없게 되면 여행자에게 지불을 강요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포스티욘’은 우리의 ‘아리에로’가 이 지역에 낯설고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작은 행렬보다 훨씬 앞서 달려가 메마른 언덕의 가시덤불 사이로 사라지려 했다. 우리는 말을 타고 그를 쫓아가 위협적으로 자리로 돌아오라고 명령해야 했다. 다음 ‘포스티욘’은 좋은 친구였고 하루 종일 대부분 먼지를 뒤집어쓰면서도 일을 잘 해냈다.
이날 아침 우리는 커다란 털 개처럼 보이는 알파카들이 풀을 뜯고 있는 들판을 지났다. 듬성듬성한 식물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숄과 폰초를 입은 작은 아이들이 지키는 수많은 양 떼를 만났다. 아이들은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바위 뒤로 달아나 숨었다.
오전 중반쯤 우리는 고원의 가장자리에 도달해 필코마요 강으로 빠르게 흘러내리는 물이 있는 비옥한 계곡들의 멋진 광경을 즐겼다. 볼리비아의 풍경이 갈색 외에 다른 색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다. 이제 우리의 하산은 빨라졌고, 작은 우박을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기온이 따뜻해졌다.
1900년대 초반 볼리비아에 상당한 어려움을 안겼던 호전적인 정치인 카마초 장군의 실패한 혁명 전투 현장을 지나, 우리는 급한 경사의 작은 계곡에서 솟아오르는 포효하는 산간 급류가 있는 케브라다 온다라는 허름한 여관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멈췄다. 탐보 앞 땅바닥에는 케추아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밝은 색의 폰초를 짜고 있었다.
오후에 우리는 원시적인 거처들을 지났는데, 그것들은 거대한 평평한 바위 밑을 파내고 모서리에 돌무더기로 일부를 받친 것이었다. 이 방법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지지대로는 너무 무거운 지붕이 땅에 닿아 있었다.
오후 5시경 우리는 팜파 탐보의 ‘포스테’에 도착했다. 우리는 ‘포스티욘’이 관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스테’의 주인은 늘 그렇듯 “부재중”이었다. ‘포스티욘’은 사료 값을 정규 요금의 3배로 청구하기로 결정했고 페르민이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겨우 1달러 정도의 문제였지만, 나는 포토시 지사의 편지가 그의 태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공식 인장을 보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고집하면 곤경에 처할 거라는 단호한 위협을 하자, 그는 점차 가격을 낮추어 정규 요금에서 2~3센트 정도 차이 나는 수준까지 내렸다.
우리가 분쟁을 해결하자마자 격렬한 뇌우가 몰아쳤다. 이날은 11월의 마지막 날이었고 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거의 매일 오후에 소나기를 만났다.
저녁에 외국인 일행이 도착했는데, 파리에서 돌아오는 길의 부유한 프랑코-볼리비아노와 그의 두 아들이었다. 그들은 음료와 먹을 것을 공급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작은 알코올 스토브들이 뜨거운 토디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돌아갔고, 수많은 음료들이 곧 매우 졸린 일행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했고, 팜파 탐보를 떠난 지 한 시간 만에 프랑스 탐험가 크레보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거대한 필코마요 강이 보였다. 필코마요 강은 포토시 서쪽에서 발원해 포토시의 제련소를 지나온 탁한 물을 받아 동쪽으로, 그다음 남동쪽으로 파라과이를 향해 흐르다가 결국 아순시온 바로 위에서 파라과이 강과 합류한다. 약 80킬로미터에 걸쳐 그 진로를 가로막는 거대한 늪지대인 에스테로 파티뇨만 없었다면, 이 강은 볼리비아의 광산 지역과 라플라타 강 사이의 편리한 교통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진로는 그란 차코를 통과하는데, 이곳은 아직 부분적으로만 탐험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땅이다.
안데스 산맥 동쪽, 필코마요 강의 지류들이 아마존 분지와 파라나 분지 사이의 분수령에 있는 마모레 강의 지류들과 거의 얽혀 있는 곳에는 개발 가능성이 높아 볼리비아 사람들의 관심을 강하게 끄는 풍부한 열대 우림 지역이 있다. 이곳의 환경은 열대성이고 토양은 비옥하며 강우량이 풍부하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야생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어 외부인의 진입을 원하지 않는다. 교통 또한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필코마요 강 위에 가장 좁고 깊은 지점을 가로질러 현수교가 건설되어 있음을 발견했지만, 우기가 늦게 시작되어 우리는 강 아래쪽에서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우회로를 피할 수 있었다.
몇 마일을 가서 강을 건너 마른 협곡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관개 수로를 이용해 석류와 복숭아를 재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에서 한 시간 정도 달려 칼레라에 도착했다. 원주민 오두막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었고 매우 원시적인 여행자 숙소가 있었다. 우리는 한낮에 여기서 쉬려고 했지만 사람이나 동물이 먹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우리 물품을 내려 풀 수는 있었지만 노새가 먹을 게 없는데 우리만 먹을 순 없었다. 그래서 19킬로미터를 더 가서 요탈라 마을로 향했다.
우리 길은 척박한 낮은 언덕을 지나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300미터 정도 내려가 카치마요 강에 이르렀다. 강은 어렵지 않게 건넜다. 이 작은 계곡에서 많은 멋진 농장들을 발견했다. 수크레 부유층의 핀카, 즉 시골 별장들이었다. 광범위한 관개로 계곡 바닥이 주변의 황폐한 지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낙원 같은 모습으로 변모했다.
요탈라는 옛 스페인 마을로 거의 죽어가는 도시였다.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여관이 있었지만 우리 중 누구에게도 먹을 것은 전혀 없었다. 페르민이 마침내 가난한 과부를 찾아냈는데, 그녀는 약간의 사료를 팔고 뒷마당에서 노새들이 그것을 먹게 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통조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여기가 어디서나 32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포스테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곳은 수천 명이 사는 도시였다. 우리는 광장의 돌 위에 작은 점심을 펼쳐 놓고 두 그루 나무 아래에서 먹었다.
정오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태양이 상당히 맹렬히 내리쬐었다. 곧 허름한 옷차림의 관리가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우리가 보살펴야 할 귀빈인지 아니면 쫓아내야 할 부랑자인지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했다. 그는 우리가 프랑스 상인인지 물었다. 부정적인 대답을 듣자 그는 안도한 듯 자기 집 그늘로 물러갔다. 물론 우리가 ‘미국 대표단’이라는 마법의 말을 속삭였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것이다.
노새들이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남은 10킬로미터를 달려 수크레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많은 대형 핀카들을 지났다. 그중 하나는 멀리서 보기에 유원지와 비슷해 보였다. 사람과 동물 조각상들, 정자들, 탑들, 그리고 변장한 작은 자동차가 가짜 기관차 역할을 하는 소형 철도가 이곳에 축제 분위기를 더했다. 하나 둘의 첨탑과 다른 환상적인 탑들로 더욱 화려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글로리에타 공작과 공작부인의 저택인 라 글로리에타였다. 수크레의 한 친절한 노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수장이자 수크레의 대표적인 은행가가 공화국의 소박함에 싫증이 나 교황에게 거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얼마 후 그의 큰 관용에 대한 보답으로 ‘글로리에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불행히도 우리가 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 이 볼리비아 왕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글로리에타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소유주들이 팸플릿으로 출판했고, 내가 들은 바로는 글로리에타가 코니아일랜드와 먼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
글로리에타를 지나 작은 협곡을 건넜다. 깊은 협곡 측면을 올라가다 갑자기 도시 관문에 도착했다.
수크레의 인구는 2만 명으로, 50명의 흑인과 2-3백 명의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다. 외국인 중 많은 수가 상업에 종사하는 스페인인들이다. 이곳에는 2-3개의 호텔이 있었고, 우리는 어느 곳이 가장 좋은 환대를 제공할지 고민했다. 지사를 찾아 조언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호텔 콜론에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2층에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넓고 편안한 방을 구했다. 주인은 매우 공손하고 친절했다. 우리가 유일하게 불평할 만한 점은 그가 계속 침을 뱉는다는 것이었다. 침통이 없고 자신의 카펫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전혀 막지 못했다. 아마도 가구를 임대했나 보다.
뒷마당으로 가기 위해 지나쳐야 했던 주방의 불결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이라면 기니피그가 엄청나게 많이 돌아다닌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메뉴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수크레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 덕분에 중요한 도시다. 평균 기온은 섭씨 13도다. 세계 최악의 기후에 익숙한 볼리비아 사람들은 수크레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기후”라고 말한다. 즉, 꽤 견딜 만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팅턴과 나는 이 낮은 고도에 있는 것이 매우 기분 좋았다. 1845년 동부 평원에서 올라온 카스텔노가 수크레를 매우 ‘슬프다’고 생각한 것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몇 달 동안 브라질의 따뜻한 지역에 있었기에 “추위와 고도의 영향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로체로 심하게 고통받았지만, 요즘은 3,600미터 미만의 고도에서는 고통받는 경우가 거의 없고 수크레는 2,700미터 조금 넘는 곳에 있다.
광부들이 카스텔노처럼 느꼈다면 옛 원주민 도시 추키사카는 결코 상부 페루의 사회적, 문학적 수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포토시에서 흘러나온 은의 물줄기를 인정하여 그 이름이 라 플라타로 바뀌었다. 이곳에 중요한 주교가 거주하며 안데스 고원과 동부 정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원주민들의 영혼을 돌보았다. 추키사카, 즉 라 플라타 시민들은 곧 부와 지성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페루의 아테네”라 불렀고, 여기에 대학을 설립하여 지금도 법학과 의학을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 있다.
1824년 12월, 수크레 장군이 남미 대륙 최후의 스페인 군대를 물리친 기념비적인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상부 페루는 독립 공화국으로 수립되었다. 위대한 볼리바르 장군의 이름을 따 국명을 지었고 수도의 이름을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 지었다.
수크레 대통령은 1826년 에드먼드 템플이 이곳에 왔을 때 수도에 살고 있었다. 그 재미있는 작가는 수크레를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온화하고 호감 가는 태도와 소심한 말투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템플은 볼리비아에서 거의 1년간 살았고 수크레 장군이 “새로운 볼리비아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라는 힘들고 번거롭고 보람 없는 직책”을 맡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템플은 의회 회의에 참석했는데, 토론 내내 앉아 있는 관습과 끊임없이 침을 뱉는 행위에 불쾌한 인상을 받았다. “어떤 영국인도 참을 수 없는 비신사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여관 주인은 틀림없이 국회의원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의회가 이곳에 있는 동안 대표자들은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었고 당연히 수도의 귀족 사회의 영향을 받았다. 수크레의 부유한 정치인들은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그들의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호화로운 공공 시설을 짓는 데 전용하면서 라파스의 정당한 요구는 무시했다. 인구가 훨씬 더 많고 상업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위치에 있던 라파스는 간과되었다. 공공 수입의 일부만이 그곳으로 갔다. 결국 라파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공공 자금과 공직의 분배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출했다. 당시 대통령은 수크레에 정부군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도시로 진군했다. 그는 라파스 근처에서 큰 손실을 입고 패배했고, 호전적인 라파스의 아이마라족은 승리를 쫓아 혐오스럽고 야만적이며 거의 식인에 가까운 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수크레는 대법원과 수도라는 명목을 유지했지만, 라파스가 실질적인 정부 소재지가 되었고, 소수의 외국 외교관만이 수크레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인 차야파타까지 5일간의 힘든 여행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리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수크레에 산다. 그들은 매우 귀족적이고 극도로 배타적이며, 라파스가 실제로 수크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라파스 시민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우월하다고 느낀다. 대지주들은 이곳에 국내 최대 은행들의 본부를 설립했다.
가장 큰 볼리비아 국립 은행에서 나는 신용장으로 돈을 인출했다. 내가 순진하게 받은 동전 중 7-8개가 나중에 위조품으로 판명되었다. 인디언들은 항상 동전을 울려 보고 받는다. 결국 나는 영리한 은행 출납원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 동전들은 아마도 위조품은 아니었을 것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특히 ‘반 페소’ 동전에 너무 많은 ‘합금’을 섞어 가치가 없는 ‘은’ 동전을 발행하는 일도 있었다.
이 가치가 떨어진 반달러 동전들은 오랫동안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이웃 페루인들에게도 골칫거리였다. 클레멘츠 마크햄 경은 1859년 페루 방문 당시, 동부 페루에서 친코나 식물을 인도로 옮기는 유명한 임무를 수행할 때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전쟁 위기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원인 중 하나는 볼리비아 정부가 계속해서 가치가 떨어진 반달러 동전을 주조해 페루에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이 불길한 닭들은 확실히 둥지로 돌아왔다. 지금은 페루에서 그것들을 볼 수 없고 여기서는 너무 자주 보인다. 아마도 그것이 이곳 은행들이 유난히 견고하게 지어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입법궁’이라는 거창한 건물도 있고, 내가 방문했을 때는 큰 극장이 건설 중이었다. 독립 전쟁 시작 100주년 기념식에 맞춰 완공하기를 바랐다.
시장은 포토시의 시장만큼 흥미롭거나 그림 같지는 않았다. 일부 남자들은 앞뒤로 작은 차양이 달린 독특한 투구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것이 이 지역의 원래 모자인지 아니면 16세기 갑옷을 입은 스페인 정복자들의 머리 장식을 모방한 것인지 알아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여자들의 모자는 남자들 것의 두 배 크기였지만 앞뒤로 챙이 같은 방식으로 접혀 있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토산 펠트모를 쓰고, 여러 가지 색깔의 작은 무늬 천으로 장식된 흰색 면 코트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두꺼운 모직 치마를 입고 있었다. 대다수는 양말 없이 거친 가죽 샌들을 신었지만 일부는 정교한 무늬의 뜨개 양말을 신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상당한 양의 초콜릿이 생산되며, 콜롬비아 산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초콜릿 없이는 식사가 완전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보다 음료를 가능한 한 가볍고 공기가 많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의 장점을 더 잘 알고 있어서, 항상 나무 스핀들을 냄비에 넣고 손바닥 사이에서 빠르게 회전시켜 가볍게 거품을 낸다.
포토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여러 인디언 은세공인들이 있어 섬세한 세공품, 숟가락, 단순한 은그릇 등을 만든다. 포토시 조폐국장은 17세기의 사치스러운 시절부터 내려온 순수한 은제 가족 유물들을 자주 제안받는다고 말했다. 당시 부유한 집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도구가 은으로 만들어졌다.
수크레의 또 다른 특산품은 가는 철사, 레이스, 반짝이로 만든 작은 인형이다. 크기는 10cm에서 1.3cm까지 다양하다. 때로는 토착 의상을 모방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대부분 완전히 환상적이거나 카니발에나 어울릴 법한 옷을 입힌다. 비슷한 인형들이 멕시코 중남부에서도 만들어진다.
제12장
차야파타로 가는 길
우리는 수크레를 떠날 때가 되어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한 지방 정치적 중요성을 가진 내륙 지방 도시들이 특히 지방 사람들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바지를 입은 외국인들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서부 주의 주도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고 들었다. 나도 콜롬비아 보야카 주의 주도인 툰하에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 수크레에서도 그랬다. 우리가 공공 건물들을 살펴보거나 시장을 방문하며 거리를 걸을 때마다, 우리를 낯선 사람과 외국인으로 인식한 남자들과 소년들이 우리를 온갖 농담의 대상으로 삼아 상당히 성가시게 했다.
도시를 떠난 지 한 시간 후 뒤돌아보니 서쪽에서 바라본 풍경이 꽤 매력적이었다. 전경에는 메마른 협곡들이 있었고, 거친 돌투성이 언덕과 이따금 보이는 초가지붕을 얹은 진흙집들이 있었다. 멀리서 언덕들이 너무나 가파르게 내려가 우리와 도시 사이에 있는 협곡의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너머에는 동쪽 교외를 넘어 솟아오른 쌍봉을 가진 산이 수크레의 하얀 벽들을 그늘지게 했다. 이곳이 우리가 이제 향하는 광활한 건조 고원 주변의 마지막 비옥한 지역임을 상기시키는 푸른빛이 조금 보였다.
수크레와 철도를 잇는 길이 볼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중 하나이기 때문에 4-5리그마다 포스테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가 처음 도착한 곳은 수크레에서 4리그 떨어진 푸니야 포스테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내인뿐이었지만,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포스티용은 발이 아주 아팠다. 그가 신은 원시적인 생가죽 샌들로는 돌투성이 길에서 발을 거의 보호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꽤 즐겁게 동행했다.
수크레와 차야파타 사이의 포스테들은 볼리비아 남부의 것들보다 크다. 이들은 페루와 볼리비아 고원 지대의 자주 다니는 길에 있던 잉카의 탐보를 본떠 만들었다. 돌이나 어도비로 지은 낮은 창문 없는 건물들이 안뜰을 완전히 둘러싸거나 세 면만 둘러싼 형태로, 몇 개의 방이 있고 그중 한 방에는 거칠고 아주 흔들거리는 탁자와 침대로 쓰이는 3-4개의 어도비 평상이 있다. 건물이 지어진 이래 온갖 종류의 먼지와 더러움이 쌓인 흙바닥,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서는 짚 조각과 흙먼지가 가끔 떨어져 우리가 통조림 식사를 차린 탁자 위나 잠들려는 찰나의 우리 얼굴 위로 떨어졌다.
길에서 만난 짐승 대열은 라마든 당나귀든 노새든 모두 철도에서 화물을 가져오고 있었다. 대부분 비누 상자, 통조림, 와인과 맥주 상자, 연유, 그리고 잡화 소포들이었다.
다음 포스테인 피스쿨코는 푸니야에서 6.4km 떨어진 곳으로, 반건조한 언덕들 사이로 굽이치는 좋은 길을 따라 있었다. 이곳은 매우 원시적인 곳이었다. 포스테 주인과 모든 포스티용들이 “부재중”이었지만, 우리는 한 꼬마 아이의 도움을 받았다. 그 아이는 용감하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뿔피리를 어깨에 걸치고는 돈을 받고 우리의 안내자이자 호위병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곧 뒤처졌고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갈색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허름한 옷과 피부색이 땅과 거의 같아서 그를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리는 안내인 없이도 이렇게 잘 다니는 길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계속 나아갔다.
불행히도 길이 갈라졌고, 우리는 더 많이 다닌 쪽을 택했다가 라마 짐꾼들의 발자국을 따라 지름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밤에 야외에서 야영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로모로로 가는 길을 놓쳤고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 위험천만한 1.6km의 미끄러운 바위를 내려간 끝에 우리는 버려진 차요마 탐보에 도착했는데, 그곳의 유일한 거주자는 한 노파와 그녀의 돼지들뿐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도착하자 크게 놀라 날카로운 목소리로 우리가 길에서 4.8km나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고 우리는 64km를 힘들게 달려왔기에, 이 오래된 포스테의 새는 지붕 아래서 쉬기로 했다.
차요마를 지나 길은 협곡과 얕은 개울을 건넜고 마침내 평평한 땅들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난 우기에 남은 마른 풀을 뜯어먹는 당나귀와 라마 몇 마리를 보았다.
그런 평원 한가운데 다음 포스테인 카라카라가 사막의 요새처럼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사각형 건물에는 세 개의 문밖에 없었다. 모퉁이 근처 박공 끝에 높이 난 창살 문, 술과 성냥, 초, 담배를 살 수 있는 작은 술집으로 이어지는 문, 그리고 짐을 실은 동물들과 여행자들이 안뜰로 들어가는 작은 아치형 입구였다. 볼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이나 우리를 위한 음식은 전혀 없었다.
카라카라를 떠난 후 우리는 바위 그늘에서 피어난 분홍 장미 몇 송이를 지나쳤다. 그것들은 이 티베트 같은 황무지에서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다가오는 봄과 우기의 징조였다. 오후에는 천둥을 동반한 소나기가 몇 차례 내렸다. 지난 며칠간의 소나기로 인해 제라늄이나 작은 고사리가 간간이 자라나기도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로운 갈색 황무지를 달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리그를 거듭해 우리는 복잡한 산악 지대를 서쪽으로 계속 행군했다. 볼리비아 남부에서는 남북으로 뻗은 긴 계곡을 따라갔지만, 여기서는 계곡을 가로질러 갔다. 때로는 몇 리그 동안 마차 길을 따라가다가 가파른 언덕배기로 지름길을 택했다. 포스테들 사이 19-22km를 가는 동안 단 한 채의 오두막도 보지 못할 때가 있었다. 남쪽 지역만큼 모래가 많고 황폐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극도로 살기 힘들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둘째 날 저녁, 우리는 수크레에서 128km 떨어진 오쿠리에 도착했다. 마을 바로 밖에서 우리는 소와 말, 돼지들이 위험한 늪지대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매우 습한 평원을 건넜다.
오쿠리는 아마도 2천 명 정도가 사는 작은 원주민 마을로, 햇볕에 말린 벽돌집과 초가지붕이 산비탈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어느 정도 막아주는 봉우리 아래였다. 포토시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 똑같이 춥고 우울한 기후였다. 이곳 역시 은과 주석 광산 덕분에 존재했다. 마을 바로 밖에 작은 제련소 몇 개가 있었다.
포스테에서는 먹을 것을 전혀 구할 수 없었지만, 근처에서 하숙집 같은 곳을 운영하는 친절해 보이는 메스티소 여인이 우리에게 스테이크와 달걀 프라이로 저녁을 대접해주었다. 우리가 주로 먹던 통조림 음식과는 달라 반가웠다.
마을의 주요 거리에는 국내산과 수입 상품들을 다양하게 판매하는 작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력적인 진열창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스미스 씨가 용기를 내어 작은 아이마라 꼬마들과 취한 아리에로들의 누워있는 모습 주변에서 놀고 있는 사나운 볼리비아 개들을 넘어 가보았을 때, 그는 먼지 쌓인 가게의 어두운 구석에 숨겨진 다양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담배, 양파, 달걀, 빵, 통조림 연어, 정어리, 수제 양모 판초, 수입 면직물, 양초, 저렴한 국산 도자기, 밀짚모자, 신발, 벨트, 장갑, 연유 등이었다. 볼리비아에서 작은 스위스 연유 통을 살 수 없는 곳은 매우 가난한 곳이다. 연유는 일반적으로 유일하게 좋은 물건이다.
오쿠리에서 우리는 아이마라족의 영역, 일종의 전초 기지 도시에 들어섰다.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첫 번째 증거는 탐보의 포스티욘들이 우리 노새의 짐을 매우 부주의하게 내리면서 가방들을 쿵하고 땅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가능한 한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큰 농담거리로 여기는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오루로, 라파스, 티티카카 호까지 아이마라족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페루의 케추아족과 볼리비아 남부의 케추아족 사이에 쐐기처럼 끼어 있는 것 같다.
케추아족은 온순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아이마라족은 체격이 더 크고, 거친 외모에 전체적으로 더 활기차 보이며, 태도가 잔인할 정도로 무례하고 행동이 제멋대로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이 특정 상황에서 식인 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말들의 진실을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케추아족이나 아이마라족 모두 전혀 검소하지 않았고, 우리는 도처에서 그들의 극심한 빈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의 옷은 대개 누더기에 불과했고 음식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빈약했다. 코카와 치차(즉, 코카인과 알코올)가 그들의 삶의 시작과 끝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이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지만, 가끔 자신의 책임하에 있는 노새를 데리고 포스테로 돌아가는 포스티욘을 만나곤 했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투표나 정치에 관여하고 싶어 하는 의지를 거의 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점유해 온 토지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매우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선점자 주권에 대한 생각은 때때로 국가의 자원 개발 의지와 충돌하기도 한다.
좋은 공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출석을 강제하려는 노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이러한 노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인디언들이 자녀 교육을 확보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보다는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아마도 인구의 15% 미만만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들은 야망이 부족하고, 농산물을 재배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외국인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고, 여행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통과하는 것을 돕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닭과 양이 많이 있더라도 좋은 값을 제시해도 대개 판매를 거부한다. 달래고 코카를 주면 성공할 수도 있다. 때로는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척하며 모든 질문에 구토음이 섞인 케추아어나 아이마라어로 대답한다.
인구의 대다수가 인디언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백인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며 관직을 갖고 싶어 한다. 모든 선거는 단순히 집권당이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거치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주민의 대다수는 공화국의 시민이 될 자격이 전혀 없다. 이론적인 자유 애호가들이 볼리비아가 실제로는 과두제라는 사실을 한탄할지 모르지만,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주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공화국의 형태를 흉내 내려는 시도의 유일한 가능한 결과가 그것뿐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멕시코는 인디언과 스페인 군주제 후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훌륭한 예를 보여주었다. 디아스 대통령이 이제 한 세대가 넘도록 보여준 자비로운 독재는 놀라운 일을 해냈다. 위대한 산 마르틴은 과두제나 군주제의 이점을 예견했고 남미의 스페인 식민지들이 독립을 쟁취했을 때 그와 같은 것을 옹호했다. 불행히도 그의 선견지명 있는 정치적 수완은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한 교육받지 못한 크리올들이 가진 과장된 “자유” 관념과 충돌했고, 그 결과 공화국이 탄생했다. 볼리비아 전역의 극도로 어려운 통신 상황은 혁명의 길을 상대적으로 쉽게 만들었다. 정부가 충분한 군대를 보내 소요를 진압하기 전에 전체 주가 정부에 대항해 봉기할 수 있다.
우리가 포스테에서 일찍 출발할 때마다, 얼마 가지 않아 야마 캠프를 만나곤 했다. 운전사들은 천천히 풀을 뜯고 있는 짐승들을 모으고 하루 더 일할 수 있도록 짐을 받아들이게 하느라 바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짐들은 그저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땅에 쌓아 올려 놓는다. 소나기가 올 것 같으면 판초와 방수포를 상품 더미 위에 던져 덮는다.
많은 야마 운전사들이 원시적인 악기를 가지고 다녔다. 가장 흔한 형태는 여섯 개의 구멍이 뚫린 대나무 피리, 즉 플라졸렛이었다. 인디언들은 이 악기로 단순한 선율을 환상적으로 반복하면서 연주했고, 가끔 높고 날카로운 음을 내는 이상한 단조로운 곡을 연주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운전사들은 매우 원시적인 구조의 작은 기타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단조롭게 퉁겼다. 어떤 이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여자들은 거의 항상 나무 물레로 실을 잣고 있었는데, 전문 곡예사의 솜씨처럼 능숙했다. 보통 60~70마리의 야마 무리에 2~3명의 남자와 한두 명의 소년이 동행했다. 각 운전사는 야마 털로 짠 투석기를 들고 다녔고, 무리를 몰거나 길을 잃은 동물을 되돌리기 위한 탄환을 길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무리를 만날 때마다 즐거워했다. 선두 야마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목을 길게 뻗고 마치 겁 많고 근시안인 귀부인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전진할지 후퇴할지 거의 알지 못했다. 운전사들의 투석기에서 날아오는 돌멩이 몇 개와 격려의 외침이 뒤따르면 대개 선두 야마들이 전진하기로 결심했지만, 일부는 너무나 명백하게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이어서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아남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때때로 수크레에서 초콜릿이나 설탕을 싣고 동쪽으로 향하는 무리가 철도에서 온 외국 상품을 싣고 있는 무리와 마주쳤다. 이로 인해 늘 큰 혼란과 고함이 일어났다. 라마들은 너무 멍청해 보여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빠져나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의아했다. 길이 거대하고 흩어진 바위들 사이로 거의 사라진 한 지점에서 우리는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은 큰 무리를 만났다. 운전사들이 동물들의 머리를 같은 방향으로 돌리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짐승들은 마치 원심력에 휩싸인 듯 각자 이웃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거대한 바위들 때문에 가엾은 생물들은 서로를 볼 수도, 운전사를 볼 수도 없었다.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라마의 부드러운 발자국과 어색한 걸음걸이, 큰 순진한 눈, 호기심 어린 귀에는 매우 재미있는 무언가가 있다. 많은 라마들의 귀 끝에는 색색의 털실 장식이 달려 있었다. 매우 정교한 머리 장식을 한 두 마리를 보았다. 그들은 인디언 운전사들처럼 결코 서두르는 것 같지 않았고, 내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온순하고 공격적이지 않은 성격이었다.
오쿠리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나는 각각 15cm 정도 길이의 뚱뚱한 도마뱀 몇 마리를 보았다. 당시 고도는 약 4,300m로, 내가 들은 바로는 도마뱀의 기록적인 높이였다.
곧이어 우리는 북쪽으로 콜케차카 근처의 뾰족한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콜케차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중 하나로, 많은 볼리비아 도시들처럼 인근의 풍부한 은광 때문에 존재했다.
우리는 오쿠리에서 48km를 뜨겁게 달린 끝에 3일째 되는 날 정오에 마차에 도착했다.
마차는 또 다른 먼지투성이 갈색의 인디언 마을로 큰 계곡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근처에서 우리는 약간의 경작 흔적을 보았다. 밭은 말린 진흙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콜롬비아의 소가모소 계곡을 떠올리게 하는 큰 흙벽돌 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은 이곳보다 훨씬 더 푸르고 비옥해서 문과 울타리에서 유사점이 끝났다. 여기는 우기가 막 시작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계곡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차야파타에서 수크레로 가는 6두 마차를 만났다. 먼지와 눈부심으로부터 승객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면의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그들의 전망은 꽤 제한적이었다. 400m 앞에서 우리는 두 명의 기마 포스티욘이 관리하는 교대용 마차 노새 무리를 만났다.
수크레에서 차야파타까지는 340km의 꽤 괜찮은 마차길이 있다. 마차는 날씨가 좋으면 2주에 한 번씩 운행되며, 여정에 5일이 걸린다. 개인적으로 나는 볼리비아 마차에 갇혀 이 거친 먼지투성이 길을 질주하는 것보다 차라리 다른 무엇이든 선호할 것 같지만, 우리가 선택한 것처럼 하루에 64km씩 노새를 타고 가는 것보다 그것을 더 즐기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점심 후 마차를 떠났지만, 1.6km도 가지 못해 구슬만한 크기의 우박을 동반한 강렬한 뇌우에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노새들은 수크레를 떠난 이후 빠르게 행군했고, 매우 피곤해 보였다. 계곡을 벗어나는 길은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정상에 도달했을 때 폭풍이 다시 맹위를 떨쳤고, 우리는 모두 아침의 타는 듯한 더위와 대조적으로 추위에 떨었다. 이 고도에서는 햇빛이 비칠 때마다 눈부심이 심하고 실제로 불편할 정도로 덥다. 그러나 태양이 구름 뒤로 사라지는 순간 겨울의 모든 추위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해 질 무렵 외롭고 고립된 아콘카와 포스테에 도착했다. 아이마라 포스티욘들은 가능한 한 비협조적이었다. 4~5명의 볼리비아 여행자들이 우리보다 먼저 포스테에 도착하여 유일하게 남은 침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밤은 몹시 춥고 습했다. 고도는 4,000미터가 넘었다. 어렵사리 우리는 세바다 또는 보리 짚을 저장하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디언들은 우리가 짚 위에서 자면서 짚을 손상시킬까 봐 너무 두려워해서 짚을 쓸어 모아 방 한쪽에 최대한 높이 쌓았고, 그 과정에서 미세한 먼지 구름이 일었다. 먼지는 몇 시간 동안 가라앉지 않았고, 우리가 잠을 청하려 할 때 천식을 유발했다. 아콘카와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르민의 날카로운 눈이 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세 마리의 비쿠냐를 발견했다. 나는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겨우 그들을 볼 수 있었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가우초가 아니었다면 전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볼리비아 남부 전체 여정에서 우리가 본 유일한 야생 비쿠냐였다는 점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50년 전 여행자들은 산의 더 황량한 지역에서 그들을 자주 만났다고 말한다. 비쿠냐 러그에 대한 큰 수요가 생기기 전에는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생물들이 연갈색 털을 가진 채 볼리비아와 페루 산의 외로운 고원 목초지를 여행하는 가장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였다.
비쿠냐들 근처의 작은 평원에는 몇 개의 물웅덩이가 있어 비둘기 몇 마리와 티티카카 갈매기처럼 보이는 새들의 먹이터인 것 같았다. 가끔 흙빛 기니피그가 보이는 것 외에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야생 동물은 거의 없었다.
비쿠냐를 본 직후 우리는 지그재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 이번 여정의 가장 높은 지점인 해발 4,600미터의 리비추코 능선에 도착했다. 노새나 라마는 이 고도를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매우 춥고 불쾌하게 느껴져서 주변의 바위투성이 언덕들을 넓게 조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내려가기로 했다. 우리가 리오델라플라타 강 유역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나 광활한 파노라마에 대해 열광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는 너무나 춥고, 황량하고, 위협적이어서 유일한 효과는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노새를 몰고 전진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가벼운 우박과 눈 폭풍을 겪었지만, 산들은 눈으로 덮여 있지 않았다. 이는 특히 오후에 그러했다.
[도표: 친근한 라마 새끼]
[도표: 마지막 날 타기의 내 노새]
아침은 대체로 맑고 쾌청했다. 우리가 서쪽으로 갈수록 계곡은 더 넓어졌다. 때때로 6.4~8킬로미터 너비의 평원을 지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분수령을 넘어 라플라타 강과 그 지류의 유역을 벗어나 포오포 호와 볼리비아 고원 지대로 들어섰다.
내려가면서 우리는 많은 수의 라마와 알파카, 양을 먹여 살릴 만한 충분한 풀이 있는 계곡들을 만났다. 이 지역은 라마의 주요 번식지인 듯했고, 우리는 여러 마리의 새끼 라마를 보았다. 그중 한 마리는 몸과 다리가 거의 온통 검은색이었고, 귀는 카니발의 악마 뿔 같았으며, 가면처럼 보이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새끼 라마는 내가 사진을 찍으려는 것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어미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내 노새에서 2.4미터 거리까지 다가왔다.
찬 바람과 구름 낀 하늘로 인해 따뜻한 햇살을 받지 못해 리비추코의 포스테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볼리비아 여행객들이 또다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독차지했다. 이 형편없는 탐보의 빈약한 시설로는 양쪽 일행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없었다. 포스티욘들이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곤 달걀 몇 개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썩은 것으로 판명되어 그들의 음식 판매 의지는 고마움을 받지 못했다.
아침은 흐리고 춥고 불쾌했지만, 오후는 더 심했다. 먼지 구름과 천둥소리가 평소의 폭풍우를 알렸다. 하지만 우리의 길은 지난 며칠만큼 바위가 많거나 험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몇 개의 넓은 평원을 지나 포토시-차야파타 길과 합류했고, 독립 전쟁의 또 다른 전장인 빌카푸히오 근처를 지나갔다. 181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군인들이 다시 볼리비아를 침공해 상부 페루의 독립군을 돕고자 했다. 그들은 무사히 포토시에 도착했고, 오루로로 북상하던 중 이곳 갈림길에서 스페인군과 마주쳐 패배했다. 며칠 후 마차 근처에서 아요마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볼리비아의 독립 대의는 일시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나흘째 저녁 안카카토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불쾌한 경험을 했다. 볼리비아 여행객들이 전과 마찬가지로 이용 가능한 모든 방을 차지해 버려서 우리는 포스테의 주인을 설득해 머물 수 있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탐보에서 약 5km 떨어진 곳에 옛 인디언 마을인 안카카토가 있었다. 현재는 갈색빛으로 황폐해 보이는 계곡 바닥에 펼쳐져 있지만, 우기에는 경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인디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안카카토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큰 교회의 탑이었다. 마을의 나머지 부분은 언덕의 색깔과 거의 같은 갈색 오두막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유럽 상품이 담긴 작은 상자들을 운반하며 차야파타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유난히 많은 수의 라마들과 마주쳤다. 이날 아침의 단조로운 여정은 말을 탄 인디언이 “맥”처럼 그런 일에 전혀 익숙하지 않고 길을 가려 하지 않는 짐 노새를 몰려고 애쓰는 광경으로 생기를 얻었다. 길과 주변 지역을 구분하는 울타리나 벽이 없어서 활동적인 짐승은 마음대로 언덕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짐승들은 너무 지쳐있거나, 너무 길들여져 있거나, 뒤따르는 벌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장난을 시도하지 않았지만, 이 녀석은 그 일이 처음이라 주인을 끌고 무시무시한 바위 비탈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른 개울 바닥을 가로질러 신나게 쏘다녔다. “어디든 가고 싶은 대로”가 이 녀석의 좌우명인 듯했다.
짧은 한 시간 여행으로 우리는 프라일레스 산맥을 넘어 거대한 고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우리 뒤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의 지평선이 바다처럼 평평해 보였다. 멀리 남서쪽으로 차야파타와 철도역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두운 선들과 점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차야파타는 오래된 인디언 마을이지만, 그로부터 약간 떨어진 철도 근처에 작은 현대식 정착지가 생겼다. 그곳에는 흰색으로 회칠한 창고와 호텔, 상점, 전신국이 있어 더 오래된 도시의 갈색 흙집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인구는 2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 대다수는 스페인어를 거의 또는 전혀 하지 못하는 아이마라족이다. 새 마을의 거리는 넓고 모래투성이며, 우리나라 서부 마을들처럼 뜨겁고 눈부셨다. 우리는 호텔이 지난 몇 주간의 경험에 비하면 매우 편안하고 심지어 호화롭다고 생각했지만, 반대 방향에서 온 여행자라면 그 원시적인 시설에 코웃음을 칠 것 같았다.
오루로에는 편안한 호텔 두 곳과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훌륭한 유니온 클럽이 있다. 최근에는 독일 클럽도 생겼다. 문명 세계의 반대편에서 접근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오루로의 또 다른 특징은 꽤 호화로운 공공 당구장 또는 카지노다. 이곳에는 10~15개의 좋은 당구대와 화려한 바가 있어 매일 밤 외국인 기술자, 사무원, 회계사들이 모여든다.
오루로의 기후는 춥고 험악하다. 그늘의 기온은 보통 화씨 50도(섭씨 10도)다. 우기는 11월에 시작해 3월까지 계속되며, 1월과 2월이 가장 비가 많이 온다. 우리의 여름 동안 이곳의 날씨는 매우 춥고 눈보라도 자주 분다. 도시의 서쪽과 남쪽에는 불모의 언덕이 있고 전반적으로 나무가 없어 이곳을 꽤 우울하게 만든다. 무이 트리스테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지사가 거주하고 사무실을 둔 크고 멋진 정부 건물로 갔다. 현 지사인 모이세스 아스카룬즈 박사는 매우 친절하고 세심했다. 그는 우리를 격식을 차려 맞이하고 샴페인을 열어 우리의 건강을 기원한 후 관용 마차로 우리를 사격장으로 데려갔다. 휴일이어서 현지 스포츠 클럽이 경기를 하고 있었다.
지사는 이 클럽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후원 하에 번창했다. 소총 연습을 위한 시설은 훌륭했고, 우리는 멋진 사격을 목격했다. 쾌적한 작은 클럽하우스에서 가벼운 맥주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은 후, 지사는 우리에게 도시의 명소들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막 인쇄된 그의 연례 보고서에서 그는 수크레에서 차야파타로 가는 길의 포스테들의 열악한 상태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우리는 그의 비판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어느 날, 정부의 포고문이 평소와 같은 방식으로 선포되었다. 현지 보병 연대가 주요 거리를 행진하며 중요한 모퉁이에서 멈춰 섰고, 대령이 큰 소리로 포고문을 읽었다. 대령은 매우 건강하고 강해 보여서 몇 주 후 오루로로 돌아왔을 때 그가 이 고도의 갑작스러운 폐 열병에 걸려 24시간도 안 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뉴욕의 대형 상사의 현지 대리점을 맡고 있는 친절한 독일계 미국인은 저녁 파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한을 느끼고 다음날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전혀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이 고도(4,000m)에서는 공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모든 폐 용량이 필요한 것 같다. 울혈성 오한 이후 산소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위험할 정도로 떨어져 환자가 곧 쓰러져 사망한다는 것이다.
오루로의 상점들은 몇 년 동안 철도와 증기선으로 외부 세계와 연결된 광산 도시답게 다양한 수입 상품을 갖추고 있다. 스페인인이 소유한 한 상점은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 제품만을 취급한다. 독일인이 소유한 또 다른 상점에는 ‘독일제’ 상품이 무한히 다양하게 있다. 두세 개의 서점에는 수천 권의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문학, 법률, 의학 서적이 있다. 작은 공공 도서관과 열람실도 있으며, 도시는 가까운 미래에 더 많은 책을 들여올 예정이다.
나는 현지 의사 한 명을 찾아갔다. 진료를 받으러 간 것이 아니라 그가 소장하고 있다는 놀라운 볼리비아 팸플릿과 필사본 컬렉션 때문이었다. 남미에서는 무질서와 불결함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매디슨 애비뉴에서도 어울릴 법한 반짝이는 흰색 가구와 현대적인 수술 기구가 가득한 무균 유리 케이스가 있는 진료실을 보고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과 의사는 볼리비아 출신이지만 산티아고의 칠레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필사본과 인쇄물 컬렉션은 정말 놀라웠지만, 고백하건대 그의 최신식 전문적 방법이 그의 광범위한 서지학적 지식보다 더 흥미롭고 놀라웠다. 내 ‘일지’의 독자들이 기억하겠지만,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주요 병원에서 파리와 뉴욕에서 교육을 받은 외과 의사들이 “수술 중에는 테이블 근처에 서 있지 말고 침을 뱉으시기 바랍니다”라는 모토가 적힌 수술실에서 일하는 것을 목격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산티아고 같은 도시 외의 남미 외과에 대한 내 견해는 지금까지 매우 비판적이었다.
오루로는 인근의 귀중한 은광과 주석광 때문에 중요하다. 도시 외곽에는 몇 개의 대형 제련소가 있고, 여러 중요한 광산 회사의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오루로의 일부 지역은 산책하기에 좋지 않은 곳이다. 사실, 내가 평생 가장 불편했던 때는 혼자 탐험을 나갔다가 모든 국적의 반쯤 취한 광부들이 몰려 있는 술집 문 앞에서 겪은 일이었다. 그들의 무서워할 것 없는 뻔뻔한 눈빛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이마라족의 표정도 술에 마지막 한 푼까지 쏟아부은 체격 좋은 앵글로색슨계 광부 서너 명의 위협적인 눈초리 못지않게 불쾌했다.
은광은 대부분 폐광되었고 주요 산업은 주석 광상과 연관되어 있다. 이곳의 광산은 포토시보다 수년 후에야 발견되어 은 생산량은 포토시만 못했지만, 식민지 시대에는 쉽게 2위를 차지했다.
오루로는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 섬에 상륙할 무렵에 건설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이미 인구가 76,000명에 달했다. 18세기에는 부와 중요성 면에서 포토시 다음으로 손꼽히는 도시였다.
일부 교회에는 오루로의 전성기 때 장식된 우아함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훌륭한 건물의 유적은 거의 없다. 실제로 1773년 “엘 라사리요”는 “이 큰 도시에서 지난 200년간 과도한 행진, 쇼, 게임, 연회에 쏟아부은 엄청난 재산에 조금이라도 걸맞은 건물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몇 년 전 주석 가격이 오르자 오루로는 호황을 누렸다. 오래된 건물들이 헐리고 화려한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주석 가격이 떨어지고 호황이 끝나자 일부는 완공되지 못했다. 현재 인구는 약 16,000명이지만, 호황기에는 20,000명을 넘었고 그중 5,000명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상당수는 칠레인들이었다.
광업 중심지로서의 중요성 외에도 오루로는 한동안 철도 종착역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에서 포토시까지 철도 노선이 계획되어 있다. 오루로의 식량 공급원인 비옥한 계곡이 있는 코차밤바까지의 노선도 건설 중이다. 볼리비아 철도의 라파스 노선이 최근 완공되었다. 안토파가스타까지의 철도는 1892년부터 운행되고 있다.
오루로는 안토파가스타에서 약 965km 떨어져 있으며, 예전에는 열차가 낮에만 저속으로 운행되어 3일이나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철로 폭은 넓어지지 않았지만 노반이 개선되어 2인용 침대칸과 식당차가 있는 연결 차량으로 오루로에서 안토파가스타까지 이틀 밤과 하루 낮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오전에 출발한 볼리비아 철도 열차가 일주일에 세 번 오후 늦게 오루로에 도착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 열차가 도착한 직후 안토파가스타행 새 연결 열차가 출발한다. 볼리비아 철도는 궤간이 1m인 반면 안토파가스타 노선은 75cm에 불과해 직통 서비스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철도 회사들 간의 불행한 다툼으로 역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여행객은 알아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
안토파가스타 노선이 완공되자 오루로의 인구는 급증했고, 감탄한 볼리비아인들은 이 도시를 “볼리비아의 시카고”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유일한 유사점은 이 강제 환승뿐이었다. 한 역에서 다른 역으로 가는 동안 건너야 하는 오루로의 거리는 포장되어 있지 않아, 우기에 도로가 60cm 깊이의 진흙탕이 될 때 여행하는 사람은 여기가 시카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안토파가스타행 주간 열차의 출발은 하와이 제도나 서인도 제도의 항구에서 주간 증기선 출발만큼이나 오루로에서 큰 행사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역으로 내려오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식당차에 몰려들어 음료를 주문하고 카리브해 항구의 주민들이 우편 증기선이 정박할 때처럼 얼음 음료를 즐긴다.
우리는 뉴욕의 친구들로부터 이 철도는 광석 운반용으로만 만들어졌고 승객이 몇 명 죽든 상관없어 하니 이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다. 폭 71cm밖에 안 되는 레일 위에 무거운 침대차가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단선 철도를 타는 것 같았고, 침대차의 한쪽 침대가 먼저 채워지면 차가 전복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분명 차량 제작자들도 이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침대를 모두 차량 중앙, 레일 바로 위에 배치한 독특한 설계였다!
우리는 해 질 무렵 오루로를 출발해 밤사이 우리 노새 여행의 종착지였던 차야파타와 돈 산티아고의 마차가 포토시, 투피사, 코타가이타를 거쳐 라 키아카로 출발하는 우유니를 지났다.
이른 아침의 풍경은 인상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해발 6,000m가 넘는 거대한 화산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오야우에 화산은 정상의 만년설에 누런 얼룩을 남기는 작은 유황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우리는 곧 볼리비아의 거대한 모래 고원, 그야말로 티베트의 사하라를 뒤로하고 서부 안데스 산맥을 통과해 대고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한 정거장에서 애완동물로 키운 어린 비쿠냐를 칠레의 신사에게 팔러 가는 인디오가 기차에 올랐다.
정오쯤 우리는 국경을 넘었다. 두 명의 관리가 우리 열차에 탑승했다. 한 명은 볼리비아인으로, 출국하는 승객들이 금을 반출하여 황금 수출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지 않는지 확인했다. 다른 한 명은 예의 바른 칠레 세관원이었다. 그들의 수하물 검사는 매우 피상적이었다. 오후에 해발 4,000m가 넘는 고개를 넘은 후 아스코탄에서 하산을 시작했고, 곧 이 지역을 유명하게 만든 눈부신 하얀 붕소 바다의 강둑에 도착했다.
산들은 장엄하고 영감을 주었지만, 우리는 메마른 갈색 언덕들을 너무 오래 보아 푸른 것을 갈망했다. 그러나 갈수록 풍경은 더욱 황량해졌다. 우리는 남미 서해안을 따라 3,200km나 뻗어 있는 거대한 사막의 일부인 질산염 지대에 들어섰다.
저녁에 우리는 작은 마을이지만, 칼라마에서 잠시 머물렀다.
질산염 중심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은 적당히 좋은 급수 시설이 있어 주변의 절대적인 불모지와 대조적으로 매력적인 초록빛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몇몇 은광, 금광, 구리 광산이 있었다.
칼라마는 1891년 발마세다에 대한 혁명 당시 약간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지만, 이곳의 주된 명성은 1879년 칠레, 볼리비아, 페루 간의 전쟁에서 벌어진 전투에 있었다. 이 전투에서 볼리비아는 항구를 잃었고, 칠레는 두 북방 이웃국의 희생으로 영토를 크게 늘렸다. 전쟁이 선포된 후 칠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방어가 없는 볼리비아의 항구 안토파가스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안토파가스타 인구의 대다수는 칠레인들이었고, 작은 수비대는 칠레 침략자들에게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기에 볼리비아 당국은 즉시 칼라마로 후퇴했다. 칠레군은 그곳으로 600명을 보내 140명을 공격했다. 볼리비아군이 강한 진지를 점령했음에도 칠레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사건은 볼리비아가 해안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잃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중요하지 않았다.
밤새 우리는 질산염 지대의 수많은 작은 역들을 지나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철도 여행의 마지막 30분 동안 태평양의 아름다운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가파른 경사를 따라 신나는 하강이 이어졌다. 끝없는 갈색만 보다가 이렇게 넓은 푸른 바다를 보니 눈이 엄청나게 시원해졌다. 물론 이 근처에서 초록을 기대할 순 없었다. 하지만 푸른색만으로도 충분했다.
철도는 종착역에 들어가기 전까지 도시 뒤편으로 해안과 평행하게 한동안 달렸다. 우리는 목요일 오후 6시 30분에 오루로를 출발해 금요일 밤 9시경 칼라마에 도착했고, 토요일 아침 7시가 조금 지나 안토파가스타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태평양 증기 항해 회사의 멕시코호가 그날 아침 발파라이소로 출항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안토파가스타의 모래투성이 거리와 잘 갖춰진 상점들을 둘러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것이 6-7일 만에 처음 출항하는 증기선이었고, 다음 배까지 일주일이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추한 아연 도금 작업장과 창고가 있는 이 현대적인 항구에는 우리를 유혹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멕시코호에 승선하기로 했다.
항구는 보트와 바지선들로 붐볐다. 몇 척의 증기선과 범선들이 정박해 있었는데, 주로 질산염과 구리 같은 광물 화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토파가스타는 상당히 중요한 항구로, 볼리비아와 북부 칠레의 많은 지역을 위한 관문이었다. 하지만 모옌도와 함께 남미 서해안에서 가장 나쁜 항구라는 평판을 갖고 있었다. 서풍과 남풍을 막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날씨가 잔잔할 때조차 선착장에는 상당한 너울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 보트에 오르자 우리는 호기심 많은 바다사자들의 재주에 매료됐다. 그들은 보트에서 비스킷을 던지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코를 물 밖으로 내밀었다. 반대편에서는 큰 무리의 새들이 물고기 떼를 찾아 원을 그리며 날아다녔다. 물고기 떼를 발견하면 새 무리 전체가 잠시 멈췄다가 번개같은 속도로 공중에서 파도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얀 물보라만이 그들이 들어간 곳을 보여주었다. 잠시 후 그들은 수면으로 올라와 몸을 털고 날개를 퍼덕이더니 다시 날아올라 조금 뒤에 또 다른 멋진 잠수를 즐겼다.
서해안의 증기선 여행의 끔찍함에 대해 많이 들었었다. 최근에 경험한 승객들은 그것이 정말 끔찍하다고 단언했다. 우리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멕시코호는 아주 편안했고, 이 지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만큼 좋았다. 물론 대서양 횡단 여객선만큼 크거나 호화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배는 사치를 좋아하는 여행객들을 3,000마일이나 되는 거친 바다를 건너 일주일 동안 즐겁고 만족스럽게 먹여 살릴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배의 임무는 매일 오후 정박하고, 나쁜 피난처나 개방된 정박지에 정박해 승객과 상품, 가축을 보트와 바지선에 내리고, 가죽이나 커피, 식료품 화물을 싣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2,000마일에 달하는 이 사막 지역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순회 청과상 역할도 했다. 게다가 이 배는 열대 태평양의 비교적 잔잔한 바다를 항해하고, 영원한 봄과 여름 기후를 여행하는 승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을 멕시코호는 훌륭히 해냈다.
객실은 갑판 산책로로 연결되었다. 잘 갖춰진 소설 도서관도 있었는데, 네 가지 언어로 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칠레인 선원들은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전반적으로 불평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음식이 좀 더 나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육지를 바라보며 시간이 흘러가도 계속되는 황량한 사막 해안과 그 뒤의 산악 지대에 더 큰 사막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음식이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서해안 출신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식단이 꽤 호화로워 보였다. 남부 볼리비아의 포스테에서 온 우리에게는 식탁이 풍성함으로 가득했다. 파나마에서 리마로 가는 길에 이 서해안 증기선에서 처음으로 남미 음식을 접하는 여행자라면 음식이 지독히 나쁘고 배가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쉽게 믿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규율이 느슨하고 서비스가 형편없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였다.
남미를 여행하려면 이런 종류의 일들을 많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배들이 세계의 다른 지역의 배들만큼 안전하고 편안하며, 남미의 6-7개 도시를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더 나은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안토파가스타를 떠난 지 하루 만에 우리는 칼데라에 도착했다. 둘째 날 우리는 코킴보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번창하는 항구 도시로 보였다. 물론 부두는 없었지만, 만은 꽤 잘 보호되어 있었고 증기선들은 접안시설에서 1.2킬로미터 이내에 정박할 수 있었다. 만 남쪽 끝 언덕에 건설 중인 새 별장들은 이곳 주요 사업가 두 명의 번영을 보여준다.
코킴보는 상업에 전념해 왔지만, 건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최근에야 광장의 모습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 나는 지역 사진을 구하고자 두 서점을 방문했는데, 최근 출판된 코킴보 시인 선집을 발견했다! 책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남미 서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프랑스 소설, 프랑스 교과서, 몇 권의 스페인 소설, 현지 법률 해설서와 법전 등이었다.
코킴보에서 발파라이소까지는 증기선으로 하룻밤 거리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기온이 훨씬 낮았고, 발파라이소에 가까워질수록 더 추워졌다. 물론 발파라이소는 적도 남쪽으로 샌프란시스코가 북쪽에 있는 만큼 떨어져 있어 비슷한 기후 조건을 보인다.
아름다운 발파라이소의 만과 항구는 오랫동안 열광적인 방문객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묘사되어 왔다. 1906년의 끔찍한 지진 이후 도시는 많은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많은 건물들이 복구되었고 사업은 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항구에는 15-20척의 원양 증기선들이 정박해 있었고, 두세 척의 칠레 군함과 서해안 상선들을 수용할 수 있는 두 개의 대형 부유식 건선거도 있었다.
해군 건선거는 탈카우아노에 있다. 발파라이소가 서해안 최대의 항구이지만 부두는 없다. 상업 지구는 옛 해변과 테라스 위에 지어졌다. 언덕들이 이 좁은 평지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고 주거 지역은 언덕 위에 있다. 엘리베이터와 전차 노선이 상부와 하부 도시를 연결한다. 철도역은 선착장 바로 근처에 있다.
철도 요금은 매우 저렴했고 철도 관계자들은 우리에게 꽤 친절하고 협조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머무는 동안 한 지역 신문에서 칠레 철도 관계자들이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무례하고 비협조적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 세계 여행자의 편지를 읽었다. 칠레 철도는 지난 14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했다. 1892년 발마세다에 대한 혁명 당시에는 겨우 1,120킬로미터에 불과했지만, 과학 회의 때는 선로가 4,800킬로미터로 늘어났고 그 중 절반은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했다. 더 많은 노선이 건설 중이다.
발파라이소는 칠레의 상업 수도이며 증권거래소가 환율을 결정한다. 발파라이소의 상점들은 앵글로색슨인들의 취향에 맞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이곳에 대규모 영국인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반가워한 것은 매력적인 영어 서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어 신문들과 구할 수 있는 모든 최신 그림 주간지와 잡지들을 구입했다.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풍경 구경에 지쳐서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 사이 4시간의 기차 여행 동안 주변 환경에 큰 인상을 받지 못했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칠레의 정치적, 사회적 수도에 들어섰다.
산티아고 클럽의 안뜰에 있는 정원과 분수는 마치 천국처럼 보였다. 작은 탁자에 앉아 예의 바른 웨이터들의 시중을 받으며 깨끗한 린넨과 최고의 음식과 음료를 즐기는 것은 충분히 새롭고 매력적이었지만, 나무의 상쾌한 녹음과 분수의 즐거운 물소리만큼 반갑지는 않았다.
우리는 곧 산티아고를 둘러보는 가장 시원하고 쉬운 방법이 전차 2층에서 보는 것임을 알았다. 특히 윗층 좌석에 지붕이 있을 때 그랬다. 지붕 위 요금은 2등 승객의 주머니를 위한 것으로 단 5센타보(1센트의 4분의 1!)에 불과해 걸어가는 것보다 전차를 타는 게 더 저렴했다. 안타깝게도 산티아고의 삶의 즐거움을 위해 패션은 아래층을 탈 여유가 있는데도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눈살 찌푸리며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 친구들은 우리가 아래층을 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대신 여기서 ‘아메리카노’라고 불리는 일종의 ‘해크’에 우리를 태웠다. 몇 세대 전 한 미국인 거주자가 산티아고에 특별히 적합하다고 생각한 마차를 도입했다고 한다. 이것은 2인승 록어웨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차량은 곧 유행이 되어 지금은 해크니 마차의 정착된 스타일이 되었다. 주요 광장에서 빅토리아 마차를 빌릴 수 있지만 요금이 터무니없이 비싼 반면 ‘아메리카노’의 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그래야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이용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것들은 스프링도, 청결함도, 일반적인 편의 시설도 없는 것 같다. 벼룩과 다른 곤충은 있다. 이 구식 차량을 타고 산티아고의 자갈길을 덜컹거리며 지나가다 보면 칠레인의 유명한 미국인 혐오가 ‘아메리카노’에서 겪은 불편함 때문에 강화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칠레 청중의 반응은 다음 날 아침 신문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른 모든 공화국 대표들의 연설은 전문이 실렸지만, 박식한 브라질 대표의 연설은 요약조차 실리지 않았다. 브라질 대표단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고, 또한 간결하고 우정으로 가득 찬 아르헨티나 대표의 연설에 대한 환호에 대해서도 불만을 드러냈다. 멕시코 대표와 마찬가지로, 그는 필연적으로 다른 17개의 연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5분간의 따뜻한 인사가 50분간의 박식한 정보보다 더 나은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 한 달 후 브라질 대표단이 귀국길에 올랐을 때,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발 신문 보도에서 브라질인들이 칠레인들이 브라질의 자연스러운 경쟁자인 아르헨티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다고 느꼈다는 내용을 읽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평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불운한 실수 때문이었고, 결코 칠레가 브라질과의 오랜 우정을 훼손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공식 개회식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페루 대표가 가장 열렬하고 뜨거운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키며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거나 이해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페루인들은 칠레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칠레가 계속해서 페루의 최남단 주인 타크나와 아리카를 점령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느꼈다. 따라서 그들은 칠레의 모든 제안을 매우 못마땅하게 받아들였고, 멋진 말보다는 더 많은 친절한 행동이 있었다면 훨씬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칠레인들이 갈등을 해소하고 과거의 일을 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페루인들은 그 시위가 칠레가 전혀 할 의도가 없는 타크나와 아리카 주의 희생을 통해서만 줄 수 있는 본질적인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다.
회의 내내 페루 대표들은 다소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칠레의 환대를 받는 것을 얼마나 즐기지 않는지 보여주는 일정한 품위를 유지하며 행사에 참여했다. 칠레인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우호적인 제안이 냉담하게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불쾌해했다. 이것이 나중에 언급할 라 코로나 사건에 대한 칠레의 흥분에 적지 않게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회의 시간의 대부분은 리셉션과 차,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 포도원 방문, 공공 시설과 전시회, 군사 대회, 소풍, 무도회 등에 할애됐다.
우리가 호텔에 자리를 잡자마자 초대장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곧 친절한 칠레인들이 우리가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우리를 친절함으로 압도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도시도 국제 회의를 더 정성껏, 더 우아하게 환대한 적이 없었다. 3주 동안 화려한 행사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우아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무도회에는 남미에서 가장 귀족적인 사회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최신 유행의 옷을 입고 참석했으며, 세계 다른 지역의 사교계와 똑같이 행동했다. 산티아고 클럽은 그 화려함이 남미를 아프리카 정글과 같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그 선량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을 연회가 여러 차례 열렸던 장소였다.
대부분의 야외 축제는 경마장에서 열렸는데, 이곳에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고 멋진 관람석이 아름다운 경기장과 웅장한 만년설로 덮인 안데스 산맥을 마주보고 있다. 여기서 화창한 오후에 산티아고 사교계는 자선을 위한 꽃 싸움을 벌였다. 관람석 앞 테라스에 서 있거나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를 타고 지나가는 참가자들은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행사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산티아고의 자원 소방대원들을 위한 행사가 열렸다. 퍼레이드에 이어 용기와 근속 연수에 대한 포상이 있었다. 유급 소방서가 없기 때문에 도시는 화재 방지를 위해 이 자원봉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최고의 소방대에 소속되는 것은 항상 유행이었다.
300년 이상 산티아고는 명망 있는 스페인 가문들의 고향이었다. 그들의 수입은 호화로운 과시를 유혹할 만큼 많지도 않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소소한 일을 하도록 강요할 만큼 적지도 않았다.
화려한 호텔, 고급 레스토랑, 호화로운 클럽, 화려한 자동차 등의 면에서 산티아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쉽게 자리를 양보한다. 칠레에서는 아르헨티나가 목격한 것과 비교할 만한 큰 붐이 없었다. 게다가 지진과 화재가 천연 자원이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국가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 물론 칠레 북부의 거대한 질산염 매장지 덕분에 정부는 인구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도 수백만 달러를 추종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었다. 질산염 수출 관세로 돈이 너무 쉽게 들어와서 어떤 재무장관도 예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산티아고는 부에노스아이레스만큼 많은 부의 증거를 자랑할 수는 없지만, 남미의 어느 도시보다 더 높이 평가받을 자격이 있는 다른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우위다.
지난 세대 동안 산티아고는 남미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뛰어난 작가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호세 토리비오 메디나로, 그의 끈기 있는 노력과 서지학적 천재성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헌신적인 아내의 도움을 받아 그는 남미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많은 학술 작품을 만들어냈고, 서반구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일급 서지학 작품을 출판했다. 타고난 수집가였던 그는 여러 해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외딴 곳에서 희귀 서적을 구입하고 위대한 도서관의 구매 불가능한 책들을 기록하여 거의 비할 데 없는 초기 아메리카나의 훌륭한 컬렉션을 구축했다.
그의 소박한 집은 흥미로 가득 차 있다. 세 개의 큰 방에는 천장에서 바닥까지 그의 보물들이 가득했다. 한 방은 거의 전적으로 초기 멕시코 인쇄물에 할애되어 있었다. 멕시코가 독립을 얻기 전에 인쇄된 1만 권의 팸플릿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일부 오래된 작가들로부터 물려받은 스페인의 학문에 대한 불관용에 대한 개념을 다소 수정하게 된다. 물론 팸플릿들은 대부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들이 담고 있는 교리에 얼마나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을 출판한 사람들의 의도가 지역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수준을 높이는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메디나 씨의 집 뒤쪽에는 ‘엘제비어’ 출판사의 방들이 있었다. 여기서 모든 도서관장의 부러움과 평균적인 학자의 절망의 대상인 그 호화로운 서지학 4절판들이 인쇄되었다. 메디나 씨는 원래 인쇄공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책을 활자로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현대 세계에서 한 지붕 아래에서 책을 만드는 전 과정이 존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여기에 자료가 있고, 여기에 그것들을 아는 학자가 살고 있으며, 여기서 그는 그것들의 정수를 추출하고, 이 같은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조사 결과를 인쇄하고 제본하여 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세상에 내보낸다.
대표단을 위해 마련된 행사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군사 훈련 시범이었다. 칠레 기병은 매우 대담한 기수들이었다. 스페인과 아라우카노의 혈통이 섞여 시각적으로 인상적이고 용기를 자아내는 자질을 갖추었다. 아마도 가장 놀라운 장면은 기병 대대가 불타는 장애물을 뛰어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석유를 흠뻑 적신 덤불 울타리를 관중석 앞에 세우고 불을 붙였다. 바람을 등지고 출발한 기병 대대는 화염을 뛰어넘어 연기 속으로 돌진했다가, 강한 바람이 연기와 불꽃을 말들의 얼굴로 날려도 돌아서서 완벽한 대형으로 불타는 장애물을 다시 뛰어넘었다. 마치 평화로운 시골 울타리를 넘는 것처럼 쉽고 우아하게 해냈다. 훈련의 성과를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시범이었다.
카스티야어는 우아하고 멜로디컬했다. 우루과이 사람의 말은 몬테비데오의 거친 방언이었고 귀에 거슬렸으며, 목소리에서 포르투갈어와 비슷한 거친 느낌이 났다.
그날 저녁 북미인의 말만큼 아름다운 발음을 가진 연설은 콜롬비아 대표 우리베 우리베 장군의 연설뿐이었다. 그는 콜롬비아가 아메리카에서 가장 훌륭한 카스티야어를 구사한다는 평판을 잘 입증했다. 원어민이 아닌 사람이 귀로 들었을 때의 효과로 판단할 수 있는 한, 콜롬비아와 페루 사람들이 가장 좋은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리오 델라 플라타 국가들의 사람들이 대륙에서 가장 나쁘고 불순한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이러한 불순함은 브라질 남부의 포르투갈인들과 오랫동안 교류한 결과이며, 스페인어와 매우 비슷해 쉽게 변질시키는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식민지 시대에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보고타나 리마처럼 스페인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잘 알려진 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밀수와 기타 불법 거래로 돈을 버는 꽤 거친 상인들이 가득했다. 우리가 인도 무역을 규제하는 스페인 무역법의 부당함으로 인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더라도, 밀수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우아하거나 문법 규칙에 주의를 기울여 모국어를 구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반면 리마와 보고타에서는 관리 계급이 사회를 지배했고, 우리가 아메리카를 통치하기 위해 왕이 보낸 이 자랑스러운 스페인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더라도, 그들이 아름다운 카스티야어를 가능한 한 완벽하게 구사했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미국인들이 스페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우아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남미에서는 영국인과 미국인들이 부드러운 카스티야어를 망친다는 속담이 흔하다. 그래서 북미인이 남미인보다 회의 공식 언어를 더 잘 구사하는 것을 듣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스페인계 미국 대표들이 즉시 우리에게 이러한 성과를 축하해준 것은 그들의 예의였다.
영국 상인들이 발파라이소를 장악하고 있다. 영국과의 무역이 너무 중요해서 영어가 사실상 상업 언어가 되었다. 교육받은 남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랑스어를 읽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대도시 밖에서는 영어를 이해하는 남미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더욱 주목할 만하다. 칠레 밖에서 독일어를 아는 사람을 한두 명 만난 것 외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영어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으로 미국이나 영국에 다녀온 사람들과 영국 상인들과 큰 거래를 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어는 칠레의 많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는 영어 연습을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칠레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영국은 용감한 토머스 코크런 제독이 이끄는 상선들이 칠레 독립 전쟁 때 칠레 해군을 창설하여 서해안에서 스페인 함대를 소탕한 이후로 항상 칠레를 우호적으로 생각했다. 칠레 해군 덕분에 산 마르틴의 군대가 페루에 도착하여 남미에서 스페인의 마지막 거점을 공격할 수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배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 장교들이 지휘했다. 해군의 경향은 여전히 영국적이며, 이는 장교와 생도들의 제복에까지 미친다. 한마디로 해군은 육군이 독일적인 만큼이나 영국적이다. 더욱이 오랫동안 남미 해군 중 최고의 위치를 유지해왔다. 브라질이 계약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받으면 이러한 우위는 일시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칠레 증기선 리마리호에 올랐을 때, 승객 중에는 해안 어딘가에서 훈련함에 합류할 예정인 귀여운 얼굴의 해군 생도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웠고 선상에서의 행동이 특별히 좋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비슷한 상황의 미국 학생들보다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동료 승객들은 확실히 휴 드 보넬리가 1850년 파나마에서 리마로 가는 여행에서 만났던, 그의 재미있는 책 ‘볼리비아 여행기’에서 묘사한 생도들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객실 한쪽 구석에는 노신사와 처녀가
귀부인과 그녀의 오빠와 여동생이 앵무새들과 원숭이 한 마리,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추한 작은 개 세 마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이 동물들을 번갈아 가며 입맞춤하고 안았다.
16세의 두 젊은 생도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을 연기 속에 파묻은 것 같았다. 그들이 내뿜는 연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젊은이들은 그 좋은 사람들의 불편을 샀다. 젊은이 중 한 명이 몰래 불 붙인 시가를 원숭이에게 던졌다. 원숭이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동물은 그것을 집어 들어 불 붙은 쪽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비명을 지르며 재잘거리고 울부짖었다. 원숭이는 놀란 나머지 기절한 노부인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노신사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신사의 가발을 꽉 물고 있었다!
우리는 리마리호가 승객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코킴보, 안토파가스타, 이키케로 가는 칠레인들이었다. 철도가 없어 일주일에 두 번 운항하는 증기선이 이 사막 해안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심한 혼잡으로 인한 불편을 겪고 북부 칠레 항구들에서 많은 승객들이 내리면서 느낀 안도감을 경험하고 나서야 칠레인들이 해양력 장악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충분히 깨달았다. 그들은 해안선과 평행하게 달리는 종단 철도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해군력 우위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발파라이소를 떠난 다음날 우리는 코킴보에 도착했다. 전보로 저명한 승객들이 탑승했다는 사실을 당국에 알렸고, 마을의 유력 인사들이 나와 대표단을 육지로 초대했다. 그들은 우리를 코킴보에서 옛 스페인 정착지인 라 세레나까지 해변을 따라 즐거운 드라이브에 데려갔다. 후자에서 우리는 클럽에서 환대를 받았다. 거기서 칵테일과 샴페인의 도움을 받아 비공식 리셉션이 열렸다.
칼데라에서 우리는 공식적인 환영을 받지 않아 다행이었고, 마을 뒤 모래 언덕에서 도마뱀을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안토파가스타에 도착했다. 대표단의 몇몇 사람들이 한 달 전 내가 나왔던 노선을 따라 볼리비아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여기서 내렸다. 바다사자들과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새들이 내가 이 항구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항구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산티아고의 푸른 공원들 속에서 몇 주를 보내고 며칠간 푸른 대양을 즐긴 후라 그 효과는 볼리비아 고원의 황량하고 갈색인 사막에서 왔을 때만큼 인상적이지 않았다.
4일째 아침 우리는 이키케에 도착했다. 이곳은 한때 페루 질산염 산업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발파라이소에 버금가는 칠레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많은 범선들이 귀중한 비료를 싣기 위해 정박해 있었다. 실제로 성조기를 휘날리는 몇 척의 배를 보는 것은 기뻤다! 서해안은 목재 공급을 크게 오리건과 퓨젯 사운드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세 돛대 미국 범선들은 목재를 가져와 질산염을 싣고 돌아가는 유익한 무역을 하고 있다. 리마리호의 화물은 주로 마젤란 해협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서 온 상품들이었다. 이들을 하역하는 동안 우리는 도시를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몇 달 전 질산염 공장의 파업 노동자들이 잘 훈련된 정부군에 의해 진압당했던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헤나 영사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열정적인 미국인으로, 칠레인들이 통제하고 있지만 페루 클럽이 상류 사회의 중심인 도시에서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도시 남쪽 끝에는 좋은 해수욕장이 있다. 더불어 질산염 사무실의 지친 직원들을 유혹하는 파빌리온과 맥주 정원도 있다. 잘 정비된 경마 클럽 부지는 사교와 폴로, 테니스를 즐길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키케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콤비네이션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질산염 협회의 중앙 사무소로, 주로 영국 회사들이 가격과 생산량을 조정하고 효율적인 홍보국을 유지하기 위해 연합한 곳이다.
사람들은 종종 칠레 질산염과 구아노를 혼동한다. 하나는 광물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성 생산물이다. 질산염 광상이 원래 구아노 퇴적물이 아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나는 이 생각이 폐기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규모 질산염 사막의 실제 기원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다.
질산염에 대해 무거운 수출세가 부과되기 때문에, 칠레는 공급이 지속되는 한 외국인들이 자국 세금의 대부분을 내도록 하는 매우 부러운 위치에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지질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현 세대와 다음 세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양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아무도 생산량을 억제하거나 수출세 수입을 미래 납세자들의 필요를 위해 투자해야 할 절박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쉽게 수입을 확보하는 방식의 당연한 결과는 칠레 예산의 낭비 경향과 신중한 감독의 부재다. 돈이 국가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지 신경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치학자들은 유권자가 매우 가벼운 세금 부담을 지고 있을 때, 정부의 돈이 낭비되거나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부유해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고 말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상황이 칠레인의 성격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행히도 인종을 위해, 질산염 광상은 아마도 지속적인 해를 끼치기 전에 고갈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페루의 경험을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페루는 오랫동안 친차 섬의 구아노 산출량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 귀중한 생산물의 고갈은 쉽게 얻은 수입이 정치인들과 금융인들을 부패시키기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더 나쁜 상태로 국가를 남겼다.
우리는 그날 밤늦게 이키케를 떠났고 다음날 아침 일찍 피사구아에 도착했다. 이곳은 질산염 지대의 북쪽 끝이다. 발파라이소를 떠난 이후 우리가 들른 다른 모든 항구들처럼, 이곳도 내륙으로 몇 마일 들어가는 작은 철도의 종착역이다. 이 철도는 이런저런 광물을 운반해 온다. 때로는 구리 광석, 대개는 질산염, 더 드물게는 주석과 은이다.
오후에 우리는 아리카에 도착했다. 만의 남쪽은 지브롤터와 비슷한 절벽이 지키고 있었다. 이는
페루 역사에서 아리카는 칠레와의 전쟁에서 일어난 기억할 만한 전투의 장소로 유명하다. 위기의 순간 페루 수비대 지휘관은 승리한 칠레군에 잡히느니 말을 타고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바위와 파도 사이에서 산산조각 났다. 앵글로색슨의 관점에서는 먼저 가능한 한 많은 칠레군을 죽이고 전선에서 전사하는 편이 더 명예로운 죽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더 극적인 죽음이 라틴 기질에 강하게 어필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지 않고 자살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스페인 영웅들의 특징은 아니었다. 이 용감한 군인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케추아 조상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프레스콧의 ‘페루 정복사’를 읽은 사람들은 피사로 형제 중 한 명이 쿠스코를 공격했을 때, 잉카 군에서 크게 활약한 한 케추아 귀족이 대의가 돌이킬 수 없이 패배했음을 깨닫고 삭사이우아만 언덕 남쪽의 절벽에서 뛰어내려 먼저 스페인 군을 몇 명이나 죽일 수 있는지 보는 대신 산산조각 나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또한 태평양의 먼 조상들로부터 그러한 성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쿠사이 섬에는 전설에 따르면 두 젊은 추장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절벽에서 뛰어내려 아래의 끓는 물웅덩이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는 아름다운 폭포가 있다. 적에게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는 대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습관은 캐롤라인 제도와 하와이 제도 모두에서 태평양 민족들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리카는 미국인들에게 특별히 흥미로운데, 1868년 대해일 때 미국 군함 워터리호가 이곳에서 내륙으로 밀려갔기 때문이다. 이 항구는 지진과 해일뿐만 아니라 화재로도 황폐화되었다. 현재는 매우 허름한 모습이다. 1871년 모옌도에서 푸노까지 이어지는 남부 페루 철도가 완공되기 전까지 아리카는 볼리비아의 중요한 관문 항구였다. 칠레가 타크나 뒤편의 산을 넘어 이 항구와 라파스를 연결하는 철도를 완공하면 그 중요성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칠레와 페루 간의 전쟁이 끝난 후 체결된 앙콘 평화 조약은 타크나와 아리카 지방의 영토를 1883년부터 1893년까지 10년 동안 칠레가 점유하도록 규정했다. 조약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기한이 만료되면 국민투표를 통해 이 지방들의 영토가 칠레의 영구적인 지배와 주권 하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페루의 영토의 일부를 구성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타크나와 아리카 지방이 편입되는 쪽의 정부는 다른 쪽에 1천만 칠레 은화 페소 또는 동일한 순도와 무게의 페루 솔을 지불해야 한다. 본 조약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될 특별 의정서가 국민투표 실시 형식과 1천만 달러 지불 조건을 규정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국민투표 실시 형식을 규정하는 특별 의정서는 결코 합의되지 않았다. 주된 장애물은 1883년 이후 많은 수의 칠레인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그렇지 않게 이 지방들에 정착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민투표에서 칠레에 유리한 표를 던질 만큼 충분한 수였다. 칠레 정부는 현재의 모든 거주자들이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루인들은 국민투표 유권자가 전쟁 종결 당시 이 지방들의 거주자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칠레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가 본질적으로 페루에 대한 선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투표가 실시되기로 한 지 이제 17년이 지났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다. 그러나 최근 볼리비아와의 조약에서 칠레가 아리카에서 라파스까지 철도를 자비로 건설하겠다고 약속하고, 이후 신뢰할 만한 회사와 그 철도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칠레가 국민투표가 실시되지 않았음에도 이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떤 국가도 이웃 국가의 소유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여기는 지방에 수백만 달러를 들여 철도를 건설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페루인들은 칠레인들이 태연하게 타크나와 아리카를 영구적인 칠레 영토로 여기는 태도를 간과하지 않았지만, 그런 결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들의 전투력은 칠레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며 그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이 전체 문제는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라 코로나 사건’으로 알려진 작은 국제적 에피소드로 인해 생생하게 부각되었다. 페루는 칠레와의 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는 웅장한 기념비를 세웠다. 관례대로 적절하게, 리마 주재 여러 외국 공관 대표들은 정부 간 우호의 표현으로 기념비 아래에 공식 화환을 헌납하겠다고 요청했다. 칠레 외교관도 다른 이들에 뒤지지 않았고,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조화가 행사를 위해 준비되었을 때 거부되었다. 이에 그는 크게 분개하여 여권을 요구하고 귀국했다. 그가 산티아고에 도착하자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일부 대중은 정부가 페루의 ‘모욕’에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대응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즉, 타크나와 아리카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다른 칠레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국회에 대표를 소환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분쟁 지역을 공식적으로 합병하고 국가 영토의 확정적인 일부로 최종 인정하는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위가 있을 당시 페루 내륙을 여행 중이었고, 페루 신문의 보도가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칠레 정부가 대중의 요구에 응해 타크나와 아리카를 공식적으로 합병하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실을 많은 페루인들과 일부 칠레인들이 리마 항구에 마침 강력한 미국 전함 전대가 정박해 있었던 사실과 연관 지은 것은 당연했다. 오랜 우호 관계
미국과 페루 간의 관계, 그리고 발마세다 몰락과 “볼티모어” 사건 당시 미국과 칠레 간의 활발한 적대 관계는 페루인들에게 칠레가 영토 분쟁을 강압적으로 종결하려 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의도가 있다는 충분한 보증으로 여겨졌다.
워싱턴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의사를 표명했는지, 또는 어떤 의견을 표현했는지, 그리고 이 시기에 우리 전함 함대가 서해안 해역에 있었던 것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순전히 우연이었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항이며 실제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칠레와의 갈등을 피한 페루인들이 미국에 감사하고 있고, 칠레인들은 그들의 정부가 양키의 영향력으로 공공연한 행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상응하는 짜증을 내고 있다. 열렬한 칠레인이자 강력한 “반미주의자”인 한 사람이 나중에 내게 말하길,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때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발파라이소의 정치인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해 알아보려 했다고 한다. 모든 경우에 대한 답변은 “미국을 자극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아리카를 떠난 후 우리의 다음 정박지는 페루의 최남단 항구인 일로였다. 이는 승객 명단이 현저히 줄어든 사실로 강조되었다. 칠레인들 중 페루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증오하는 경쟁국의 “오염된” 항구에서 왔기 때문에 리마리호는 철저한 소독을 받았다. 이는 거의 모든 페루 항구에 실제로 페스트와 천연두 환자가 있었고 칠레 항구에는 전염병이 없었기에 더욱 불필요하고 불쾌한 과정이었다.
우리는 1월 14일 오후, 발파라이소를 떠난 지 꼭 7일 만에 모옌도에 도착했다.
제16장
페루 남부
모옌도는 자연이 인간이 살도록 의도하지 않은 곳 중 하나다. 본래의 항구이자 수세기 동안 사용되었던 곳은 몇 마일 북쪽에 있는 이슬라이 만이다. 사실 이곳이 페루 남부 철도의 종착역이자 티티카카 호 지역 상업의 출구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슬라이의 부동산 소유주들은 “인생의 기회의 물결이 밀려와 행운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에 차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철도 회사에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토지와 해안선을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이슬라이는 절정의 기회를 놓쳤고 철도 기술자들은 사막 해안을 깎아 지금의 모옌도 항구를 만들었다.
이곳은 서해안에서 가장 나쁜 항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최근 남미에 관한 책을 쓴 한 저자는 이곳에서의 하선의 공포에 너무나 감명받아 그의 책 세 개의 장에 걸쳐 상세히 묘사했다! 내가 상륙할 당시 꽤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 과정의 단조로움에 매우 실망했다. 그 존경받는 저자는 내게 “파도가 치는 착륙장 – 거대한 너울에 엄청난 흔들림과 튀어오름”을 기대하게 했다. 심지어 날씨가 좋을 때도 보트는 “조개껍데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지금은 파도 정상에서 하늘로 던져졌다가 곧 골짜기로 떨어진다. 거무스름한 페루인 노꾼들이 노를 저으며, 배와 부두 사이의 날카로운 바위를 간발의 차이로 피한다!” 등등.
이런 말로는 바쁜 작은 분지와 6~7대의 증기 크레인이 큰 화물 바지선을 싣고 내리는 부두에 대한 인상을 거의 얻을 수 없다. 페루 남부의 주요 항구라는 사실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부두는 온갖 종류의 상자와 짐뭉치로 가득 차 있었다. 때때로 8~10척의 화물선이 외항에 정박해 있고, 많은 수의 부선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바쁘게 움직인다. 새로운 방파제가 거대한 콘크리트 큐브로 건설되고 있는데, 이는 빠르게 붕괴되는 이 지역의 자연 암석보다 파도의 작용을 더 잘 견딜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상륙 무대 뒤 가파른 절벽 면을 15~18미터(약 50~60피트) 올라가면 지역 세관의 작은 플랫폼과 문에 도착한다. 우리의 도착은 관리들의 예상 밖이었고, 우리는 칠레에서 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통상적인 냉담한 시선을 받았다. 모옌도는 전쟁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의 징수관에게 _델레가도_라는 신비한 단어 한 마디면 우리의 모든 짐이 검사 절차도 없이 정중하게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페루 땅에 상륙한 후 우리의 다음 난관은 칠레 돈을 받아주고 그 대신 이 나라의 화폐를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처음에 지역 은행은 단호히 거절했다. 페루에서 칠레로 가는 사람이 너무 적어 칠레 돈에 대한 수요가 없으며, 발파라이소나 안토파가스타로 우편을 통해 보내지 않고는 우리의 칠레 통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한 일이라 그들은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_델레가도_라고 말할 필요가 있었다. 예상대로 친절한 출납원은 이제 우리의 모든 칠레 돈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미국의 은행 출납원 중 몇이나 외국인에게 은행 규정을 설명한 후, 그 외국인이 과학 회의 공식 대표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규정을 깨려 할까? 우리는 “과학”에 대한 인식에서 남미 이웃들에게 뒤처져 있는 것 같다!
모옌도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흥미로운 것은 옆길에서 열리는 닭싸움이었다. 50~60명의 선원들과 그들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관중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갈길에서 벌어지는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어느 닭이 가장 오래 버틸지에 대해 은화 솔을 걸고 있었다. 싸움이 종반으로 갈수록 흥분은 빠르고 맹렬해졌고, 한 마리의 불쌍한 피 흘리는 수탉이 거의 완전히 눈이 멀고 죽어가면서 자신도 피를 흘리고 있는 승리한 상대로부터 마지막 몇 번의 쪼임을 받았다. 나는 가끔 이런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닭싸움을 지켜보며 스페인 혈통을 가진 관중들이 왜 그토록 흥분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현재 닭싸움이 국민 오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외에는, 남미의 스포츠이며, 미국의 야구와 영국의 크리켓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데, 나는 그 광적인 관심의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마도 페루인들도 야구 경기장에서 “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지루해했을 것이다.
우리는 몰렌도에서 하룻밤을 묵을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서해안 항구들이 흔히 그렇듯 전염병 환자들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레키파행 일일 열차가 이미 떠났고 다음 열차는 다음날 정오에나 있어서, 우리는 할 수 없이 페로 카릴 호텔에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기로 했다. 이 호텔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벽이 너무 얇다는 것이었다. 우리 옆방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이 묵고 있었는데, 저녁에 이곳에 사는 동포가 찾아와 “황열병, 페스트, 천연두”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생생하게 설명하며 겁을 주려 했다. “장의사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병자 없는 집이 거의 없다!!” “온전한 가족이 하나도 없다!!!” 등등. 이런 말들이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상륙한 대표단 중 몇몇에게 적잖은 불안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다음날 아레키파행 열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나섰다.
그날 아침 몰렌도를 떠나려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공간이 충분치 않아서 첫 한 시간 정도는 매우 혼잡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 것은 유행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1월이 마을을 떠나 시골에서 잠깐 휴가를 즐기는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열차는 약 13킬로미터 정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달려 메히아 만과 해변에 도착했다. 이곳은 많은 몰렌도 가족들이 작은 별장을 지은 여름 휴양지였다. 여기서부터 철도는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천천히 고도를 높여갔다. 탐보 강 계곡의 아름다운 초록 풍경과 작은 시골집들, 사탕수수 농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고도를 높이며 열차는 거의 정북 방향으로 이슬라이 평원, 즉 아레키파 사막으로 알려진 모래 평원을 가로질렀다. 철로 양쪽으로 눈이 닿는 한 푸른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동물이나 식물은 없었지만, 이곳에 생명체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곳은 메다노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메다노스는 사막 바닥의 단단한 지면 위를 남서풍에 밀려 이동하는 기이한 초승달 모양의 모래 언덕이다. 각 언덕은 완벽한 초승달 모양으로, 바람을 등진 북쪽으로 가느다란 뿔 모양으로 뻗어 있다. 이것들은 철도에 끊임없는 문제를 일으킨다. 메다노스가 철로에 다가오면 어떻게든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초승달 뿔이 철로를 침범할 때 그것을 삽으로 파내봤자 소용없다. 약 6미터 높이에 약 18미터 이상 너비의 주 언덕 부분이 그대로 전진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심 직후 모옌도를 출발했지만, 16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2,286미터를 올라가는 데 7시간이나 걸려 아레키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역 맞은편에는 노새가 끄는 전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중 하나는 마로네 그랜드 호텔 투숙객을 위해 예약되어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과 수하물을 전차들에 옮기느라 시간이 좀 걸린 후에야 우리는 출발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삐걱거리며 어둑한 거리를 지나갔다. 1층짜리 집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아름답게 조각된 석조 현관들은 과거 스페인 귀족들의 저택이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그 벽들은 아레키파의 지진들을 견뎌냈다.
대지진을 경험해본 사람에게는 그 단어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이곳 하버드 천문대의 한 천문학자는 우리가 4일간 머무는 동안 지진계가 세 번의 지진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사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한 번 이상의 지진이 일어난다. 다행히도 우리와 아레키파에게 천문대의 정밀 기계가 충실히 기록하는 이 일상적인 지진들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발파라이소, 그리고 미주 서해안의 많은 다른 도시들처럼 아레키파도 한 세기에 한두 번 심각한 지진을 겪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우 튼튼한 구조가 아니라면 2층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는 마로네 호텔의 숙박 시설에 매우 기분 좋게 놀랐다. 남미의 수도 외에서 이렇게 쾌적한 곳을 찾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훌륭한 호텔과 서해안 증기선 서비스의 개선으로 아레키파는 틀림없이 여행자들의 성지가 될 것이다. 매력적인 위치, 쾌적한 기후, 그림 같은 거리, 놀라운 교회와 수도원을 갖춘 이곳은 많은 즐거운 여행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추가적인 매력도 있다. 산악인들과 산악 풍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해발 5,791미터의 활화산 엘 미스티와 6,096미터 이상의 고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눈 덮인 차차니 봉우리에 끌릴 것이다. 아레키파는 페루 남부의 유통 중심지로, 여러 은행과 대형 수입 회사들의 창고가 있다. 대륙 내부로 탐험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는 장비의 일부를 구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은 데밀하우-피바디 박물관의 상부 아마존 탐험대의 기지였다. 내가 방문했을 때, 영국 창고 중 한 곳에서 우수한 통조림 식품을 완벽하게 구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접이식 침대와 카라카스 초콜릿 같은 사치품까지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반델리에 교수는 가장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분위기는 마치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했다. 모든 것이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성구실에서 우리는 16세기 어느 화가의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상을 발견했다. 수도사들은 그것을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그 얼굴이 내가 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상냥한 얼굴의 수다스러운 한 수도사는 수도원 생활의 단조로움을 깨뜨릴 수 있게 되어 기쁜 듯했다. 그는 우리를 정원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포도나무 아래 스페인 시대의 오래된 맷돌로 만든 투박한 의자가 있었다. 거기서 그는 우리를 과수원의 여러 나무로 안내하며 자신이 정성껏 재배한 배, 복숭아, 자두를 맛보라고 권했다. 우리는 도서관도 방문할 수 있었는데, 희귀하고 아름답게 인쇄된 오래된 책들이 많이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은 신학과 종교 철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뷔퐁의 멋진 전집을 포함해 자연사에 관한 구식 서적들이 들어있는 구역도 있었다. 도서관 문에는 수도사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경건에 관한 책을,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신학 서적을,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기타 종교 서적을 볼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자연사 서적을 볼 수 있는 날을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남미의 종교 시설들에 만연한 타락한 상태에 대해 많은 글이 쓰여 왔다. 여기와 산티아고에서 우리가 방문한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그런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산티아고의 수도원에는 전기 발전기로 구동되는 현대식 인쇄기가 있어 종교 정보를 보급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 놀라운 환영 행사를 목격한 그날 저녁, 우리끼리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연말 전에 페루에서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쉬운 예언이었고, 그것이 빨리 실현되어도 놀라지 않았다. 실제로 6개월도 안 되어 리마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한때는 우리가 목격했던 잘못된 관용을 베푼 정부를 전복시킬 것 같았다. 대통령과 외무장관이 붙잡혀 거리를 끌려다녔고, 혁명군과 정부군 사이의 충돌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이전의 많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리마 시가 뉴욕 시장에 채권을 팔려고 하던 때에 일어나 8% 이율의 시 채권에 관심을 보이던 투자자들에게 효과적인 경고가 되었다.
제17장
사실상의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아레키파에서 푸노 선착장까지는 12시간 기차 여행이다. 거기서 티티카카 호를 건너는 증기선을 탄다. 거리는 350km에 불과하지만, 15~20번 정도 정차하고 서두르지 않는다.
우리 열차는 혼합 여객-화물 열차였고, 1등석 객차 하나면 모든 승객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다.
10시가 조금 지나 우리는 초라한 철도 여관에 들렀다. 우리는 식욕도 좋고 현지 음식에도 익숙했지만, 음식이 유난히 형편없어 보였고 일부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곧 몇몇 승객들이 고산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레키파는 해발 2,300m에 있지만, 오후 2시 30분경 도착한 크루세로 알토의 급수탑 정거장은 해발 4,470m에 있어 고산 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원의 동쪽 끝에서 사라코차와 카치파스카나 호수 두 개를 만났다. 풍경에 초록색은 없었지만, 호수를 둘러싼 눈 덮인 산들이 황량한 풍경에 낭만과 매력을 더했다.
계속 동쪽으로 가면서 열차는 2,000m를 빠르게 내려왔고, 가끔 작은 원주민 마을에 정차하다가 중요한 철도 분기점인 훌리아카에 도착했다. 여기서 쿠스코행 승객들이 내렸고, 우리는 황혼 속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30km의 평탄한 길을 서둘러 달렸다. 푸노 선착장에 도착해보니 오늘 밤 티티카카 호를 건널 예정이던 증기선이 티티카카 호에서 운행하는 가장 작고 오래된 야바리호여서 당황스러웠다. 해발 3,800m에서 첫 증기 추진 선박이었다. 이미 화물을 가득 싣고 있었고, 갑판은 볼리비아 새 철도 시스템용으로 오리건주에서 가져온 철도 침목으로 덮여 있었다. 승객과 짐을 기차에서 증기선으로 옮기는 데는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고,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큰 수역을 헤치고 항해하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별들이 놀라울 정도로 밝게 빛나 갑판에서 저녁을 보내고 싶었지만, 현지인들이 답답한 식당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별빛을 즐기기에는 춥고 습하다는 데 동의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의 잠은 작은 야바리호를 코르크 마개처럼 흔드는 무시무시한 뇌우로 방해받았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우리는 창을 닫아야 했다. 물론 이 튼튼한 작은 배가 겪은 첫 폭풍도, 최악의 폭풍도 아니었지만, 그 나이를 고려하면 이 호수의 물에서 헤엄치는 불쾌한 꿈을 꾸게 되었다. 호숫가에 사는 원주민들이나 그들의 엉성한 뗏목을 타고 항해하는 사람들 중 아무도 수영을 배운 적이 없을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 티티카카 섬과 코아티 섬, 그리고 고원의 옛 문명 중심지인 코파카바나 곶을 보았다. 아직도 많은 독특한 원주민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고대의 계단식 밭에서는 여전히 느린 윤작으로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쪽 해안에서 튀어나온 타라코 반도 가까이를 지나갔는데, 인구가 조밀했다. 사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호숫가의 모든 쓸 만한 땅은 최대한 경작되고 있었다.
반델리에르 씨는 정서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지금 이곳의 원주민 수가 정복 이전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기는 놀랍도록 맑았고, 망원경으로 보니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아름다운 작은 교회를 드나들고, 가축을 풀밭으로 몰고 가고, 작물을 돌보고, 당나귀와 소들이 보리를 밟아 탈곡하는 원시적인 타작마당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때때로 신기루가 해안을 호수에서 들어 올려 새로운 마을들을 볼 수 있게 해주어 효과가 더해졌다. 멀리 눈 덮인 산들이 풍경의 매력을 더했다.
늪지대에서는 어부들이 그들의 발사스를 타고 출항하기 시작했다. 발사스는 갈대 다발을 묶어 만든 기묘한 카누로, 새것일 때는 꽤 편안하지만 물에 젖으면 아주 불쾌해진다. 한
우리는 호수에 떠 있는 40마리의 새들을 셀 수 있었다. 호수 수면 위를 뛰어다니는 야생 오리나 잠수새들 또한 흥미로웠다. 그들은 증기선의 항로를 따라 헤엄치다가 갑자기 놀라 날개를 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수면 위를 달렸다.
호수를 건넌 여행자들이 많고 접근이 쉬움에도 불구하고, 반델리에르 씨는 이렇게 기술했다. “티티카카 호는 대부분의 특징이 아프리카 내륙의 가장 덜 방문된 호수들만큼이나 알려지지 않았다.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고 지형이 복잡해서 완전한 조사를 위해서는 최소한 1년간의 연안 항해가 필요할 것이다.”
서쪽의 코파카바나 반도와 동쪽의 산 페드로 반도 사이에는 좁은 수로만 있어서 티키나 해협을 지나면 티티카카의 광활한 수면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실제로는 남쪽 끝의 작은 호수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이 호수를 건너는 데도 몇 시간이 걸렸고, 정오가 되어서야 과키의 작은 인공 항구에 도착했다. 유일하게 수익을 내는 호수 운송은 화물이며, 배들은 자주 다니지만 불규칙적으로 운행되며 화물 적재가 완료되는 대로 출발한다. 안내서에는 정기 일정이 있다고 나와 있지만, 현지인들은 증기선이 언제 출발할지 절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보통 철도 관계자들로부터 하루나 이틀 전에 출항 시간과 날짜를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직후 매일 운행하는 기차가 출발했다. 첫 번째 정차역은 유명한 티아우아나코 마을이었다. 기차에서 볼 수 있는 경이로운 유적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몇몇 소년들이 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들을 팔려고 하면서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티아우아나코를 지나면 볼리비아의 거대한 고원 지대인 이 지역은 돌무더기와 드문드문 자라는 키 작은 관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단조로움을 깨는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고원 지대에서는 나무를 거의 볼 수 없다. 평평한 평원을 3시간 달린 끝에 우리는 알토 데 라파스에 도착했다.
라파스에 접근하면서 받은 나의 인상은 1828년 포토시에서 이곳을 방문한 우리의 오랜 친구 에드먼드 템플의 그것과 매우 비슷해서, 그의 독특하고 생생한 묘사를 그대로 인용하겠다. “벤티야에서 라파스까지의 거리를 12, 13마일,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마일을 여행한 후에도, 이렇게 평평한 평원에서 마을의 존재를 알리는 어떤 물체도 보이지 않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사업의 소란 속에서 오가는 인디언들의 무리, 짐을 실은 노새들, 라마들, 당나귀들의 무리는 보였지만, 어떤 건물이나 거주지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나 수도원의 첨탑, 둥근 지붕, 첨탑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종소리가 가끔 희미하게 귀에 들려왔다. 거대하고 황량하며 풍화된 바위들과 눈 덮인 산들이 바로 눈앞에 솟아 있어 통행할 수 없는 장벽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 마을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혼란 속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쓰며 계속 말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가파르고 거대한 절벽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그 아래로 축소된 원근법으로 거대하고 인구가 많은 라파스 시가 보였다… 이 동화 같은 마을을 통해 은빛 실처럼 가늘게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간간이 끊어지며 흐르고 있었고 거품 같은 흰 점들로 표시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바위에서 바위로 뛰어내리며 계곡을 가로질러 흐르는 산간 급류였다. 시선을 더 멀리 돌리면 유럽인에게는 아마도 이 흥미로운 광경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 초록색과 노란색의 모든 색조를 띤 사각형과 조각들이 보인다. 옥수수와 과일, 채소, 그리고 모든 종류의 작물이 파종에서부터 수확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푸르른 보리밭이 있고, 저기에는 인디언들이 바쁘게 수확하는 완전히 익은 밭이 있으며, 그 옆에는 막 땅 위로 올라온 작물이 있다. 더 멀리에는 절반쯤 자란 작물이 있고, 그 너머에는 한 남자가 쟁기 대신 뾰족한 막대기를 이끄는 한 쌍의 소를 인도하고 있으며, 다른 남자는 그 뒤를 따라가며 씨앗을 고랑에 뿌리고 있다. 과일을 맺고 있으면서 동시에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나무들이 이 풍요로운 에덴의 모습을 완성한다… 하지만 이 결실 풍성한 에덴의 품에서 눈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자연의 영역에서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볼 수 있다. 벽처럼 솟은 절벽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고, 그 위로는 격렬한 폭풍에 시달리는 산들이 불모의 황폐함 속에 우뚝 서 있으며, 더 높이 올라가면 영원한 눈의 영역에 자리 잡은 다른 산들의 정상이 열대의 태양 아래에서도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다.”
나는 이렇게 놀랍도록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며 절벽 가장자리에서 몇 분 동안 서 있었다. 사실 내 말도 스스로 첫 번째 멈춤을 했는데, 목을 쭉 뻗고 귀를 세우며 자주 콧김을 내뿜으며 아래의 깊은 협곡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묻는 것 같았다. 도로는 갑자기 꺾여 절벽의 면을 따라 돌아가기 때문에 처음에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내가 처음 마을을 발견한 고지에서 ‘비스킷을 던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계산된 거리는 짧은 4.8킬로미터였고, 교외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려가는 데 45분이 꽉 찼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놀란 것은, 고지에서 보았을 때 평지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마을이 실제로는 언덕 위에 지어져 있고 일부 거리가 매우 가파르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라파스 시가 위치한 계곡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템플의 생생한 필치가 이 광경을 그토록 능숙하게 묘사한 이후로 유일한 변화는 잘 건설된 전기 철도가 서쪽 절벽의 면을 따라 마을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숙소를 찾아 탐보에서 탐보로 가야 했지만 모두 만원이어서 그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오늘날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남아메리카인들이 자주 제안하던 서비스와 호의를 시험해볼 기회를 그에게 주었다.
지나가는 첫 번째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근처에 있는 큰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곳이 품위 있고 훌륭한 사람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을 소개하고 숙소를 요청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집주인의 부인에게 다소 퉁명스럽게 대접받았다. 그녀는 “내가 정중하게 준비한 인사말을 들으며 한동안 소금 기둥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곤경을 설명하자 곧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로 바뀌었다.
다행히 우리는 볼리비아의 유명한 환대를 시험해볼 필요가 없었다. 역에서 W. R. Grace & Co.의 친절한 대표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내가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그 회사에 지고 있던 감사의 빚을 더욱 크게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우리를 위해 수쿠르살에 안락한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수쿠르살은 원래 수도원으로 지어진 거대한 3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지금은 주요 호텔의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거리를 탐험하며 스페인계 아메리카에서 가장 그림 같은 원주민 도시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라틴 아메리카 수도의 전형적인 특징들도 있었다. 영국, 독일, 미국 기업들이 소유한 상품이 가득한 창고들, 프록코트와 실크해트를 착용한 분명한 현지 정치인들이 정부 청사 근처 중앙 광장의 벤치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400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전화회사, 유럽계 후손들이 소유하고 거주하는 그늘진 가로수길의 고급 저택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라파스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원주민 도시라는 것이었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쿠스코와 포토시의 케추아족이나 보고타의 치브차족과는 다르다. 그들은 아이마라족이다.
6만 명의 인구를 가진 라파스에 3만 명의 아이마라족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말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거리와 시장에서의 경험으로 판단해보면,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훨씬 더 높아 보였다. 물건을 팔고 싶어 하는 사람들조차도 스페인어로 숫자를 세는 법을 아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이 스페인어나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결과, 거리의 모습이 훨씬 더 그림 같아졌다. 화려한 색상들은 포토시에 대한 내 인상을 완전히 압도했다. 라파스의 시장과 그 주변 거리와 광장에서 본 것처럼 화려한 판초와 만화경 같은 효과는 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멀리 갈 것도 없다. 안데스의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원주민들이 이곳처럼 강력하지 않다. 라파스가 정치적 우위를 점하고 현재 대통령과 의회를 보유하게 된 것은 아이마라족의 전투력 덕분이다. 그들은 온순한 사촌인 케추아족과는 달리 탐욕, 저급한 교활함, 야만적인 잔인함을 지닌 미개한 민족이다. 정부의 총애와 우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힘과 중요성을 느끼게 된 그들은 뻔뻔스럽게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며 야만적인 취향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을 즐긴다.
당연한 결과로 도시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야만적인 광채의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보고타, 쿠스코, 포토시 같은 도시들에서는 원주민들이 백인들보다 훨씬 더 많지만, 후자가 절대적으로 지배적이고 원주민들이 온순하고 겸손해서 원주민 의상의 더 그림 같은 특징들을 조롱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라파스에서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소년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건장한 아이마라족 짐꾼을 그가 어떤 옷을 입었든 조롱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아이마라족의 태도는 브라이스 씨의 격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농노들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얻게 되면, 자신들이 처한 법적 또는 사회적 열등함에 분개하게 된다. 불만이 생기고 사회적 마찰이 심화되는데, 이는 마찰의 기회가 더 빈번해질 뿐만 아니라 각 인종의 기질이 더 화나고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크레에서 차야파타로 가는 길의 오쿠리 마을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무례한 태도를 알아챘다. 가엾은 반델리에 씨는 그들과 많은 불쾌한 경험을 했다.
라파스의 거리는 언제나 그림 같지만, 특히 일요일, 그중에서도 어린이 주일에 그렇다. 1909년에는 그 날이 1월 24일이었는데, 우리가 라파스에 온 지 거의 일주일이 되었을 때였다.
그날 열린 시장은 특별히 흥미로웠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 중반까지 광장과 거리는 화려한 옷을 입은 수천 명의 아이마라족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즐기러 나왔고, 세 개의 주요 광장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거리의 모든 공간을 차지한 수백 명의 행상인들이 진열한 장난감과 잡동사니를 구매하고 있었다. 이 시장의 특징적인 면모는 판매되는 장난감의 수와 아이마라족이 사용하고 입는 모든 것들의 축소 모형이었지만, 아이마라족의 취향에 맞는 모든 종류의 물건을 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보도 가장자리와 거리 한가운데에 펼쳐진 판초 위에는 크고 작은 도자기, 실용적이고 장식적인 것들, 양철제품, 목재품, 그릇, 여성과 소녀, 인형을 위한 드레스, 40달러짜리 비쿠냐 판초부터 2-3달러짜리 가장 저렴한 라마 판초에 이르기까지 모든 등급과 종류의 판초, 악기들이 있었다. 볼리비아 아르마딜로의 단단한 껍질로 만든 작은 기타, 아이마라족의 대나무 피리와 플라우트, 독일제 북과 뿔피리, 프랑스제 인형 등 원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도 그들의 지갑 사정에 맞는 모든 것들이 있었다.
몇 페소를 모은 반쯤 취한 아이마라족 짐꾼이 하고 싶어 하는, 그리고 가장 인기 있어 보이는 일은 20-25센티미터 크기의 통통한 꼽추 광대 인형을 사서 화려한 옷을 입히고 작은 브랜디병, 코카 지갑, 치차 주전자 모형 등 그것이 원할 법한 모든 것을 잔뜩 달아주는 것이었다. 결과물은 무거운 짐을 진 산타클로스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인형의 얼굴은 우리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자애로운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추악하고 방탕한 부랑자의 얼굴이었다.
판매되는 물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이마라족의 모습을 본뜬 작은 석고 모형들이었다. 빨간 니트 모자를 쓰고 손에 밧줄 조각을 든 채 짐을 나르려고 달리는 짐꾼, 바닥에 앉아 작은 베틀로 화려한 색의 판초를 짜기 시작한 여인, 하얀 밀짚모자와 노란 술이 달린 숄을 두르고 목에 보석을 단 채 몸에 꼭 맞는 상의와 화려한 치마, 하이힐을 신은 촐라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원주민 의상을 입은 조악한 천 인형과 나무 인형, 리마와 소, 새, 신화 속 동물을 본뜬 점토 모형, 티티카카 호의 배를 그대로 본떠 만든 38센티미터 길이의 작은 발사, 동쪽의 따뜻한 계곡에서 안데스를 넘어 당나귀가 운반해오는 꾸러미와 똑같이 삼베로 싸인 작은 코카 잎 꾸러미, 코라코라에서 만든 작은 구리 주전자, 작은 점토 요리 도구와 물주전자 모형, 그리고 겨우 2.5센티미터 길이에 불과하지만 아이마라족의 투박한 신발을 그대로 본뜬 작은 생가죽 샌들 등이 있었다.
작은 광장 하나는 거의 전부 행운 게임으로 가득했다.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은 일종의 주사위 놀이였다. 주사위에는 보통의 점 대신 괴상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각 게임마다 그림이 달랐지만, 대개 한 면에는 술 취한 사람, 다른 면에는 꼬리와 뿔이 달린 악마, 또 다른 면에는 태양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 면에는 사자, 호랑이, 재규어 같은 야생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곤 했다. 주사위를 세 개씩 던졌기 때문에, 운 좋게 자신이 걸은 그림이 세 개 다 나오면 3배의 돈을 딸 수 있었다. 도박 부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 4센트 정도 가치의 니켈 동전인 레알로 배팅을 했다. 이 광장 중앙의 포장된 바닥에서는 여러 개의 로또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게임은 내가 어릴 적 도박과 관련된 모든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을 때 즐겨 했던 것이다. 라파스의 게임은 보통때처럼 원반과 카드를 사용했다. 우리 게임의 숫자 대신 각 원반에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각 카드에는 여러 개의 그림과 선이 그려져 있었다. 인디언 소년이 기름때 묻은 천 가방에서 원반을 꺼내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림의 이름을 외치면, 해당하는 괴상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덮는 식이었다. 자신의 카드에 있는 모든 그림을 가장 먼저 덮은 사람이 상금을 받았는데, 여기서 은행의 수수료를 제했다. 나도 게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전부 아이마라어로 진행되어 카드에 그려진 여러 사람과 동물의 이름을 배우기가 너무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또 다른 행운 게임은 10개의 번호를 각각 1레알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번호가 뽑히면 5레알을 받고 나머지 5레알은 은행이 가져갔다. 이 게임의 유일한 특이점은 추첨 방식이었다. 1.5m 높이의 작은 기둥 꼭대기에는 바퀴살처럼 10개의 나무 팔이 뻗어 있었다. 각 팔 끝에는 사자, 라마, 개, 소 등 작은 점토 동물 인형이 매달려 있었고, 여기에 번호가 붙어 있었다. 스프링 장치로 작동하는 나무 원숭이가 손에 갈고리가 달린 막대를 들고 기둥을 오르게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번호가 매겨진 동물 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다가 원숭이 인형이 갈고리로 찍어 점토 동물 하나를 떼어내면 그것으로 당첨 번호가 결정되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나는 2레알을 주고 두 개의 번호를 샀다. 곧 나머지 번호들도 군중 속에서 팔려나갔다. 원숭이가 힘겹게 막대를 타고 올라갔는데, 기계 장치에 문제가 있어 한 번에 점토 인형을 두 개나 떼어냈다. 우연히도 그 둘 다 내가 산 번호였지만, 내가 외국인이고 원숭이가 규칙대로 게임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형들을 다시 정리하고 스프링을 재설정했다. 그러자 내 운이 바뀌어 아이마라족들이 매우 기뻐했다.
볼리비아 백만장자들의 고향이자 볼리비아 자본의 중심지는 수크레지만, 라파스에도 9개의 발권 은행이 있었다. 여기에는 볼리비아 남부에 지점이 없고 지폐가 지역에서만 유통되는 몇몇 작은 은행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은행들은 볼리비아에서 자주 쓰이는 방식대로 지폐를 반으로 찢어 잔돈으로 사용하는 것을 더 이상 액면가로 받아주지 않는다는 새로운 규정을 시행했다. 우리에겐 당연하고 적절해 보였지만, 소상인들은 크게 동요했고 잔돈이 부족해 상당한 불편을 겪을 것 같았다.
방문 기간 내내 정부 관리들이 매우 정중하게 대해줬기에 라파스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심각한 비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립 교도소의 야만적인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 시설은 이 규모의 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현대적 수도의 수치라 할 만하다. 죄수들은 경범죄 혐의로 구금된 사람이든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든 구분 없이 한데 갇혀 있었다.
모든 죄수들이 그렇게 인도적으로 대우받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만족을 위해 간수는 한 감방의 문을 열어주었다. 높이 1.8m, 폭 90cm, 깊이 45cm의 감방이었다. 문이 열리자 감방에 있던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져 나왔다. 그는 정복 차림의 경찰관으로, 어떤 잘못으로 24시간 동안 이 고문실 같은 곳에 갇혀 있었다. 여기서는 서 있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더 이상의 비판은 하지 않겠다. 거의 모든 나라의 여행자들이 그곳의 처벌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분위기에서 온 사람들에겐 현지인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이 끔찍해 보이고, 실제로 그곳 죄수들에겐 외국인들이 느끼는 것만큼 가혹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의 감옥 방문 요청을 정중하게 그러나 유감스럽게 수락한 저명한 볼리비아 정치인은 우리가 감옥을 본 것을 매우 유감스러워하며 “곧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여행 일정이나 색다른 경로를 찾는 여행자들은 친절한 영국인들과 미국인들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게 될 것이다.
라파스의 미국인 거류지에서 무엇을 할지 정확히 결정하지 못했다면, 라파스를 기점으로 할 수 있는 많은 매력적인 여행에 어리둥절해질 수 있다. 라파스에는 여러 광산 회사와 탐사 회사의 주요 사무소가 있다. 베니 계곡에서 금광 채굴에 종사하는 한 회사의 총지배인은 내가 계획했던 라파스에서 리마까지의 육로 여행을 포기하고 산을 넘어 베니로, 그리고 아마존을 거쳐 귀국하는 여정을 택하도록 거의 설득할 뻔했다. 시간이 더 필요하고 이 시기에는 다소 불확실한 모험이 아니었다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직 많은 여행자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무역로를 따라 남미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계획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받은 여정을 그대로 소개한다. 이 일정은 연결편을 놓치는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다.
라파스에서 소라타까지 마차나 말을 타고 2일.
소라타에서 과나이까지 말을 타고 힘든 여행 7일.
과나이에서 베니 강 위의 루레나바케까지 뗏목으로 4일.
(우기인 1월부터 4월까지는 뗏목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때는 소라타에서 루레나바케까지 직접 가야 하는데, 흥미롭지만 다소 어려운 여행으로 말을 타고 14일이 걸린다.)
루레나바케에서 베니 강과 마드레 데 디오스 강이 만나는 알토 강까지 증기선으로 4일, 또는 보트로 18일.
알토 강에서 산안토니오 항구까지 보트로 6일.
산안토니오 항구에서 아마존 강의 마나오스까지 증기선으로 5일.
총 소요 시간: 라파스에서 마나오스까지 연결편을 놓치는 시간을 제외하고 28일에서 45일.
[티티카카 호의 과키 근처의 발사스 그림]
[볼리비아 철도 근처의 오래된 교회 그림]
**제18장 볼리비아 철도와 티아우아나코**
과학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마로 가는 여행을 중단하고 오루로에 안장과 짐을 두고 왔다. 이제 그곳으로 돌아가 육로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라파스를 떠나 알토행 전기 열차를 타고, 과키 열차를 타고 볼리비아 철도의 북쪽 종점인 비아차까지 갔다.
이 철도는 미국 신디케이트가 볼리비아 정부의 주문으로 건설한 것으로, 우리는 미국산 기관차와 객차를 갖추고 미국인 철도원들이 운영하는 것을 발견했다. 대부분 멕시코에서 경험이 있어 인디언 노동자를 다루는 어려움과 스페인어의 사용(그리고 남용)에 익숙했다. 그들 중 누구도 이 나라의 전망에 대해 특별히 열광적이지 않았고, 모두 계약 조건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갈 휴가 시간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 지대를 가로지르는 이 철도의 건설은 코르디예라를 횡단하는 철도에서 마주치는 큰 공학적 어려움은 없었다. 가장 가파른 경사도 10%를 넘지 않으며 터널도 없다. 하지만 이런 이점을 상쇄하는 것은 자갈을 구하기 어렵고 선로 양쪽에서 파낸 흙이 응집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궤간은 1미터다. 침목은 캘리포니아 레드우드와 오리건 소나무로 만들었다. 레일과 침목의 높은 비용과 운반 거리 때문에 철도 건설 비용이 많이 들었다. 노선의 가장 높은 지점과 가장 낮은 지점의 고도 차이는 249미터에 불과하지만, 201킬로미터의 건설에 225만 달러가 들어 1.6킬로미터당 14만4천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볼리비아 철도는 계약 체결 후 신속하게 건설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1906년 5월 22일 뉴욕 내셔널 시티 뱅크와 스페이어 앤 컴퍼니는 비아치에서 오루로까지의 노선 건설에 합의했다. 7개월 후 공사가 시작되었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개통되었다.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공사의 신속한 완료는 담당 미국 기술자들에게 큰 공로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다른 면도 있다. 몬테스 볼리비아 대통령을 기쁘게 하기 위해 철도 개통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공사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열차 운행을 시작했고, 비판을 피하기 위해 서비스를 계속해야 했다. 남미인은 북미인만큼 인내심이 없고 철도 관리에서 완벽함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격렬하고 분노에 찬 항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실제 진전에 만족하지 않고 철도 건설과 유지보수의 어려움에 대한 실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철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와 부족한 점이 최고 책임자들의 중대한 태만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열차가 지연될 때마다 정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놓칠 친구와 이웃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영진을 비난하고 배신했다고 비난한다. 정치인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노반을 제대로 정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도 600명의 인디언 노동자들이 여전히 선로에 제대로 자갈을 깔고 있었다. 그들의 임금은 하루 평균 50센트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매 여행마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저 흔한 과장된 비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장에게 물어보니 그는 바퀴가 보통 하루에 한 번은 탈선한다고 인정했다. 한 시간 정도 아무 일도 없었고, 진흙빛 마을과 고대 무덤이 점점이 박힌 풍경에 빠져 있느라 다가오는 위험의 즐거운 감각을 잊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덜컹거리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급정거했다. 앞쪽 객차 하나가 선로를 벗어나 침목 위를 한동안 달렸다. 이런 일에 익숙한 열차 승무원들은 곧 문제의 객차를 다시 선로 위에 올려놓았고, 사고의 여파도 없이 우리는 다시 30분 동안 즐겁게 남쪽으로 달렸다. 그러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멈췄다. 이번에는 탄수차의 바퀴가 노반의 약한 부분을 발견한 것이었다. 승무원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는 최소 4~5시간 지연될 것 같았다. 입찰자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엔진의 무게와 연결부의 강도 덕분에 완전히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0~15분 만에 일일 훈련으로 단련된 승무원들이 좌현 바퀴를 다시 레일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우현 바퀴는 여전히 레일 위 12~15cm 공중에 떠 있었다. 물탱크가 방금 채워져 무게중심이 너무 높아 입찰자가 정상 위치로 돌아갈 수 없었고, 여러 사람이 올라타도 내려가지 않았다. 기관사는 400m도 안 되는 곳에 있는 곡선 구간이 “해결책”이 될 거라고 제안했고, 그래서 그 구간까지 끌고 가도록 허락했다. 이 말썽꾸러기 입찰자가 한 개의 레일 위에서 즐겁게 달리는 모습은 놀랍도록 재주 있는 곡예 같았다. 기관사의 예상대로 바퀴가 변화된 트랙 각도를 느끼자마자 입찰자가 반대쪽으로 거의 뒤집힐 정도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20분도 안 돼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미국 동부의 일반 열차 승무원들이 몇 시간이나 걸려 할 일을 이 사람들은 몇 분 만에 해냈다는 점에서 경험 많은 정비공들을 만난 것에 감사했다.
두 번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9시간 여행 끝에 저녁 5시경 정시에 오루로에 도착했다.
정부 청사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곧 한 보병 중대가 막사에서 행진해 나와 안뜰에 자리 잡았다. 이는 6주 전 거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던 소령이 24시간 만에 병으로 사망한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내가 라파스로 돌아가기 위해 오루로를 떠날 때 기차역의 풍경은 특징적이었다. 현지 연대가 소령의 유해를 청사에서 호위해 온 뒤 열차 앞에 정렬해 있었다. 수백 명의 시민들이 플랫폼에 몰려들어 객차에 밀어닥쳤다. 고인의 친구들과 가족들, 남녀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울었고, 일부 여성들은 날카로운 비명과 격한 울음소리를 냈다. 전체적으로 꽤나 힘든 상황이었다.
여정의 상당 부분 동안 우리가 지나간 평원은 매우 평평하고 나무 한 그루 없이 작고 덤불 같은 식물만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한 역에서는 30~40명의 원주민들이 인근 산에서 가져온 잔가지 다발을 맞이했다. 그들은 이것들을 평평한 화물차에 쌓아 올려 철로 옆에 새로 생긴 정착지로 운반했다. 이 정착지들은 연료와 생수 모두 열차에 의존했다. 생수는 기름처럼 탱크차로 운반되었다.
주요 역에서는 십여 명의 아이마라 여성들이 땅바닥에 길게 앉아 치차, 케이크, 빵, 그리고 동쪽 멀리 있는 비옥한 계곡에서 가져온 작은 배들을 팔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구간은 데사과데로강의 지류인 비스카차니강 근처였다. 아요아요 근처에는 철로 동쪽으로 고대 무덤들이 여러 개 있었다. 철도 직원들이 일부를 파헤쳐 인위적으로 납작하게 만든 두개골을 발견했다고 한다. 철도 직원들은 노선을 건설할 때 많은 비쿠냐와 비스카차를 보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흙벽돌 건물과 물결 모양 철판 지붕이 철도 개발을 말해주는 작은 역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멈췄다. 식당은 친절한 미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모든 손님을 만족시키려고 애썼지만 주로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철도 “소년들”을 위해 더욱 애썼다. 오루로로 내려갈 때는 기차 승무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는 행운을 얻었지만, 이번에는 내 옆 두 자리를 볼리비아 군 장교들이 차지했는데, 그들은 최대한 무례하고 비열하게 굴었다. 내가 정부 대표라고 소개했다면 그들은 정중함의 극치를 보였을 것이다. 정부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친절한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미국인 여행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식당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했고, 내가 그들이 남긴 것에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 그런 사람들이 보이는 과도한 관심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안도감도 있었다. 이를 통해 공식 소개장을 가진 저명한 외국 방문객들이 친절한 친구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체 체류 기간 동안 겪는 경험과, 공식 소개장 없이 여행하는 일반 여행객들이 겪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주요 관심 지역만 방문하고자 하는 사람이 빨간 리본으로 묶이고 큰 도장이 찍힌 중요해 보이는 서류 없이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를 하면 적어도 11개의 라틴 아메리카 공화국에서 매우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황량한 고원 지대를 따라 대규모 교통량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철도는 오루로와 안토파가스타 항구를 통해 라파스로 오는 외국 상품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경쟁자인 몰렌도에서 푸노까지 가는 페루 남부 철도보다 더 긴 운송 거리를 가지고 있어 이마저도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현재 건설 중인 아리카 항구에서 라파스까지 직통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칠레 정부 철도가 있다. 그것이 완공되면 오루로에서 라파스까지의 노선이 어떻게 비용을 충당할 만큼의 화물을 확보할 수 있을지 말하기 어렵다. 항상 어느 정도의 승객 교통량은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일주일에 세 번 운행하는 한 편의 열차로도 충분하다.
볼리비아 철도의 한 지선이 현재 오루로에서 코차밤바까지 건설 중인데, 이는 라파스에 서리가 내리지 않고 비가 풍부한 수크레 동북쪽의 따뜻한 계곡에서 재배되는 식량과 코카를 공급할 것이다. 고원 지대 전역에서 코카에 대한 절대적인 수요가 있지만 이곳에서는 재배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코카는 오래 보관할 수 없어 4~5개월이 지나면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동부 계곡에서 신선한 공급품을 계속 가져와야 한다.
이는 볼리비아 철도의 가장 확실한 수입원 중 하나로 여겨지는 중요한 상품이 되었다.
비아차에 도착하기 직전 우리는 절단된 언덕인 판 데 수크레를 지나쳤다. 이곳은 혁명 전쟁 때 자주 야영지로 이용되었다. 방어하기 쉽고 정상이 꽤 넓어서 상당수의 군대가 피난할 수 있었다. 서쪽 언덕에는 거의 접근할 수 없는 봉우리에 낭만적으로 자리 잡은 작은 교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예배를 드린다. 동쪽으로는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의 웅장한 설산 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눈 덮인 산봉우리가 400킬로미터 넘게 이어지는 코르디예라 레알의 장엄함을 적절히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렵다. 해발 6,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줄지어 있었다. 직접 보아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래도 서 마틴 콘웨이 경의 흥미진진한 책 ‘볼리비아 안데스 등반과 탐험’을 통해 생생한 인상을 얻을 수 있다.
오루로에서 돌아온 다음 날, 랭킨 존슨 씨의 호의로 티티카카 호수 남쪽 평원에 있는 티아우아나코 마을과 유적을 방문할 수 있었다. 아침 8시에 라파스를 출발해 마을과 주변을 6시간 동안 둘러보고 같은 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숙소도 없고 작은 마을 상점에서는 먹을 만한 게 거의 없어서 도시락을 챙겨가야 했다. 티아우아나코 역은 가장 흥미로운 유적에서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철도 선로는 세 개의 석상과 한 개의 석문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갔다.
역에서 우리는 역장이 유능한 안내자라고 보증한, 화려한 옷을 입은 나이 든 아이마라인의 안내를 받았다. 그는 우리를 먼지 풀린 평원을 가로질러, 한때 계단식 구조물과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큰 언덕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흔히 ‘요새’로 불린다. 원래 길이 180미터, 폭 120미터, 높이 15미터의 잘린 피라미드 모양이었으나, 보물 사냥꾼들이 ‘잉카의 숨겨진 보물’을 찾으려고 측면에 큰 구멍을 파고 정상 일부를 발굴했다. 요새 외에도 ‘신전’과 ‘궁전’으로 보이는 흔적도 있었다. ‘신전’은 거친 석괴로 대략적인 윤곽을 드러냈고, 면적이 거의 1.6헥타르에 달했다. 대부분의 돌들은 높이가 1.8~3미터, 두께가 90센티미터였다. 내부에는 아직도 계단식 구조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동쪽에서 특이한 계단이 이어졌다. 언덕과 평원 전체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직사각형 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보물 사냥꾼들이 무자비하게 원래 위치에서 옮겨놓아 형용할 수 없는 혼란 상태였다. 많은 석괴들이 강력한 금속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고 ‘T’자 모양의 고정쇠를 끼웠던 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유적은 평원의 넓고 평평한 곳에 있었고, 땅은 단단하고 건조했다. 유적은 거칠게 다듬은 직립 거석들의 열, 기초부의 일부, 거대한 계단의 일부, 돌문들(일부는 저부조 조각이 있음), 석상들, 그리고 사방에 흩어진 수많은 작은 석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 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재 플랫폼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것들을 옮겨올 만한 가까운 채석장은 보이지 않았다. 가장 자연스러운 추측은 이곳에 노출된 암반에서 채석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길이 6미터, 폭 3미터, 두께 1.2미터의 돌덩이를 선사 시대 사람들이 원시적인 방법으로 먼 거리를 운반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1875년 미국의 고고학자 E. G. 스키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유적의 상태가 훨씬 더 온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페루에 관한 그의 책에 유적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남겼다. 아쉽게도 그의 그림은 많은 기념물의 크기에 대해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가 묘사한 것보다 실제로는 크지 않았다. 스키어는 지하 저장고나 통로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더 운이 좋았다. 라파스의 존 피어스 호프가 탐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활동한 덕분에 우리 방문 직전에 작은 지하 저장고가 발견되어 들어가 살펴볼 수 있었다. 크기는 약 1.8미터 정방형에 깊이도 1.8미터였고, 아름답게 다듬어진 돌들을 정확히 맞춰 만들었다. 저장고에서는 가치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아마도 스키어의 방문 이전에 폰 추디가 언급했던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모래 평원을 스치는 바람이 곧 저장고를 다시 채우고 덮어버릴 것이고, 미래의 여행자가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장 큰 석문은 지금은 부서졌지만, 중앙아메리카의 기념물과 유사한 모습의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여기나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어떤 것과도 매우 달랐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이 문은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누가 언제 이 문을 세웠는지, 그리고 결국 문이 두 동강 나게 된 균열이 언제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남쪽의 더 큰 부분은 균형을 잃고 곧 바닥에 눕게 될 것이다. 우연의 일치로, 이 문의 조각을 세심하게 사진 찍은 바버 씨는 나중에 리마 근처 파차카막의 한 무덤에서 비슷한 문양으로 장식된 직물을 구했다.
고대 티아우아나코 유적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스페인 사람들이 라파스와 과키의 교회를 짓는 데 수레로 실어 나른 것은 물론이고, 최근 10년 동안 현대의 과키-라파스 철도가 다리와 창고를 짓는 데 500량 이상의 열차로 돌을 실어 날랐다. 철도 관리자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지속 가능한 결과를 얻어야 하는 것이 업무이니, 선로 바로 옆에 잘 다듬어진 돌과 ‘오래된 돌담’이 잔뜩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겠는가! 아, 이 시대여! 아, 이 풍속이여!
제19장
쿠스코
우리는 1909년 1월 26일 오전 8시 30분에 라파스를 떠났다. 과키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탈 증기선이 전에 탔던 낡은 야바리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푸노에서 도착이 늦어졌고, 오후에는 화물을 내리느라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날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출항했다.
밤은 춥고 습했다. 천둥 번개와 돌풍으로 호수가 꽤 거칠어졌고 우리는 평소와 같은 불편을 겪었다. 폭풍우와 늦은 출발로 인해 우리는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푸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기 열차는 이미 떠났지만, 아레키파 승객들을 위해 특별 열차가 편성되어 우리는 오후 1시에 훌리아카에 도착했다. 여기서 나는 마지막 대표단과 작별 인사를 하고 쿠스코행 열차를 물었다. “몇 시간 전에 떠났고 다음 열차는 모레 출발 예정입니다!”
하지만 철도 관계자들의 호의로, 몇 대의 화물차와 작은 객차로 구성된 특별 열차가 나를 체카쿠페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편성되었다.
내 처분에 맡겨진 객차는 낡고 아주 작았는데, 크기가 고풍스러운 짧은 마차 정도였다. 게다가 이미 나처럼 정기 열차를 놓친 십여 명의 현지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그들은 가방과 보따리, 상자들을 끝없이 가지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요금을 냈고 나는 무임승차권으로 타고 있었으니 분명 그들이 나보다 열차에 탈 권리가 더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객차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기관차의 화부석에 앉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주변 경치를 볼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오후 2시가 조금 지나 훌리아카를 출발해 티티카카 호 북쪽의 평원을 달렸다. 여기서 처음으로 말뚝에 묶인 라마를 보았다. 볼리비아에서 본 수천 마리의 라마 중 묶여 있는 것은 본 적이 없었는데, 곧 이것이 쿠스코 주변의 관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관차가 물을 보충하는 동안 우리 열차를 구경하러 모여든 호기심 많은 원주민들은 온순한 케추아족이었다. 푸노는 아이마라족의 북쪽 경계다. 이 지역의 케추아 여성들은 벨벳으로 덮고 반짝이로 장식한 넓은 챙의 검은 모자를 썼다.
우리는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아야바리에 도착했고, 푸카라 강 상류 계곡에 접어들어 빌카노타 산맥을 오르기 시작할 때는 이미 어두워졌다. 밤공기가 매우 춥게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이때쯤 대부분의 현지 승객들이 열차에서 내려 나는 객차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철도의 가장 높은 역인 라 라야는 해발 4,313미터다. 여기서부터 시쿠아니까지 762미터를 급격히 내려간다. 시쿠아니는 오랫동안 철도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여기서 저녁을 찾아 나는 열차 승무원들과 함께 어두운 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 더러운 작은 인디언 치차 주점에 갔다. 거기서 반쯤 취한 도적과 그의 술에 절은 아내가 우리에게 뜨거운 차와 맥주, 딱딱한 빵을 주도록 설득했다. 열차 차장은 내가 시쿠아니에서 밤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명령이 내려와 내가 북쪽으로 가는 아침 열차를 탈 수 있도록 즉시 25마일을 더 가서 체카쿠페까지 가라고 했다. 기관사는 시쿠아니에서 체카쿠페까지가 매우 위험한 구간이라며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작은 객차로 돌아가자마자 침낭을 꺼내 열차와 빌카노타 강에 빠질 위험에 대해 곧바로 잊어버렸다. 다음에 알아차린 것은 체카쿠페 역장이 내 얼굴에 등을 비추며 이 시간(새벽 1시)에는 여기가 가장 좋은 곳이니 아침까지 가만히 누워 있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다시 잠들었는데, 내 짐가방들 사이 작은 객차 바닥에서 뭔가 동물이 긁적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쿠스코행 열차를 만드는 기차 승무원들의 외침에 깨어났을 때, 내 방문객이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7살 정도의 케추아족 거리의 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는 가능한 한 분명하게 영원히 내 노예가 되겠다며 나와 함께 여행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내 아침 식사의 일부를 주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특히 클래런스 헤이 씨가 쿠스코에서 리마까지 육로로 동행하기로 친절히 동의했기에 더욱 그랬다. 스미스 씨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뉴헤이븐으로 돌아갔다.
헌팅턴 스미스와 나는 곧 쿠스코행 열차에 탑승했다. 이미 한참을 달리고 있을 때, 정중한 페루인 차장이 웃으며 2등 객차에 나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는 소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꼬마를 내리게 하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꾀 많은 녀석이어서 우리가 쿠스코에 도착하기 전 어느 역에서 열차에서 빠져나가 사라졌다. 안데스에서는 아이들이 일찍 성숙해진다.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쿠스코 철도는 겨우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완료되었다. 열차는 가파른 계곡 옆으로 달렸다. 그 계곡은 불쑥 산사태를 일으키는 불편한 습관이 있어서, 여정은 다소 느리고 불확실했다. 현지인들은 그 불규칙성을 과장하기 좋아해서 며칠이나 걸릴 거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들의 불길한 예언에도 불구하고 제시간에 쿠스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빌카노타 계곡은 내려갈수록 급격히 좁아지고, 강은 포효하는 급류가 되었다. 기후는 매우 쾌적해서 이탈리아와 비교되곤 했다. 토양은 매우 비옥해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생산했다.
도로는 빌카노타 강의 서쪽 제방을 따라 우아타나이 강과 만날 때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갑자기 왼쪽으로 꺾어 잉카 제국의 심장부였던 아름다운 지역으로 들어섰다. 우아타나이 계곡은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지금도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 열차는 오로페사, 산 헤로니모, 산 세바스티안이라는 큰 원주민 도시들을 연이어 지나갔다. 갑자기 우리는 들판에서 멈춰 섰고, 가장 가까운 역까지 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붉은 플란넬 천을 흔들어대던 웃음 짓는 페루 신사들 무리를 태웠다. 이 철도의 즐거움 중 하나는 누구나 원할 때 열차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습관은 시간표에 다소 지장을 주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철도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그리고 열차를 세우고 올라타는 것이 개인에게 큰 중요감을 준다. 몇 분 후 우리는 임시 쿠스코 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도시 남쪽으로 400미터 떨어진 평지에 있는 작은 함석 건물들이었다.
가장 쾌적한 접근로는 알라메다를 통해서였다. 이곳은 우아타나이 강 서쪽 제방에 있는 오리나무 두 줄이 심어진 관리가 소홀한 가로수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동쪽 협곡 너머로 고대 태양신전이었던 산토 도밍고 수도원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알라메다 서쪽에는 현지 사격 클럽의 새 사격장이 있었다. 가로수길은 최고급 주택가의 주요 도로 중 하나로 이어졌는데, 그곳에서는 스페인식 가옥들이 잉카 시대의 흔적을 거의 완전히 지워버렸다. 도시 중심부에 도착하자마자, 시멘트 없이 정교하게 다듬어 꼭 맞게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석벽들이 이곳이 바로 피사로,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그리고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의 쿠스코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쿠스코를 미주의 다른 도시들과 구별 짓는 유일한 특징은 이 길고 어둡고 침울한 벽들의 만연이다. 건물을 멀리서 보면 붉은 기와 지붕, 나무 발코니, 회칠한 어도비 벽을 가진 평범한 2층 스페인식 가옥으로 보인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벽 아랫부분의 회칠이 벗겨진 것처럼 보이지만, 더 가까이 가면 그 부분이 여전히 신선하고 매력적인 잉카 석조 건축임을 알 수 있다.
쿠스코에서 가장 인상적인 벽은 잉카 로카의 궁전이라고 전해지는 건물의 벽으로, 매우 크고 불규칙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며, 어떤 것은 12개의 각을 가졌지만 모두 완벽하게 맞물려 있다. 대부분의 고대 궁전과 신전에 사용된 돌들은 좀 더 직사각형에 가깝다. 건물의 모서리 돌들은 종종 둥글게 처리되었지만, 쿠스코에는 원형 벽이 거의 없다. 주요한 예외는 도미니크 수도원으로, 한때 태양신전이었던 이곳의 한 건물 끝부분이 교회의 내진처럼 둥글게 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쿠스코에서 가장 뛰어난 석공 기술일 것이며, 도미니크 수사들은 이를 큰 열정으로 보여준다. 한동안 수도원에 머물며 이 벽들을 자세히 조사한 E. G. 스키어는 각 돌의 접촉면이 이중 원의 진정한 반지름이며, 벽의 전체적인 경사선이 모든 블록에서 완벽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 벽에서는 돌의 외부 표면이 완전히 평평하지만, 대개는 약간 볼록하다. 블록의 길이는 몇 인치에서 몇 피트까지 다양하지만, 5피트가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모두 놀라운 정밀도로 쌓여 있으며, 언뜻 보기에는 완전히 직사각형인 것처럼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 벽에 절대적인 직각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블록은 약간 불규칙하지만, 이 불규칙성이 다음 블록과 정확히 맞아떨어져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이러한 세심한 작업과 어두운 색 돌의 사용이 결합되어 매우 인상적인 위엄과 견고함을 만들어낸다.
잉카 건축의 특징은 부분적으로 고대 이집트 유적과 같다. 매우 큰 개별 블록,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문, 그리고 꼭대기보다 밑부분이 현저히 넓어 경사진 전면이 뚜렷한 특징인 벽 등이다. 아마도 이집트인들이 손으로 들어 올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거대한 돌기둥을 배치하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들이 잉카인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4.5미터 높이의 벽 위에 수 톤의 무게를 가진 바위를 주의 깊게 맞춰 놓는 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쿠스코를 나눠 가진 피사로의 부하들은 잉카 궁전의 거대한 벽 위에 자신들의 집을 지었다. 때로는 잉카 벽을 1.8~2.1미터 높이로 남겨두기도 했다. 다른 경우에는 여전히 4.5~6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잉카인들이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랬다면 스페인인들이 고대 궁전들을 파괴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고, 오늘날 학자들과 여행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더 많은 것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충실한 제자들이 잉카 궁전들을 무너뜨리고 그 재료를 스페인에서 가져온 교회 건축 아이디어에 따라 사용하여 아름다운 사원과 탑을 세우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많은 여행자들이 쿠스코를 연구했지만, 누구도 스키어만큼 세심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그의 저서 “페루”에서 방들의 많은 도면과 설계도를 찾아볼 수 있다.
30년 전 그가 이곳에 왔을 때는 여관이 없었고, 현지 관리들의 친절과 환대에 의지해야 했다. 수도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넓은 코메르시오 호텔이 있어서 꽤 괜찮은 식사와 적당한 침실 덕분에 매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수도 시설’은 없었고, 아레키파의 마로네 호텔만큼 호화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심지어 잉카인들도 특별히 청결하지는 않았으니, 15세기의 대도시에서 20세기의 편의시설을 너무 많이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쿠스코는 오래전부터 아메리카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 중 하나로 악명 높았다. 그리고 그 평판은 정당했다. 거리의 돌 포장은 매우 울퉁불퉁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웠다. 오물을 더하자면, 하수구는 좁은 거리 한가운데를 지나는 개방된 수로였다. 우기에는 폭우로 인해 하수구가 씻겨 내려갔다. 건기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대 건축물을 조사하는 동안 발을 디딜 곳을 매우 조심해야 했다. 현재 주민들은 그들의 선조들보다 청결하거나 위생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장한 옛 건물들의 벽을 둘러싼 더러움과 빈곤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우리는 거리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을 거의 잊지 않았지만, 그것은 곧 습관이 되어 케추아족의 화려한 색채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수제 판초와 숄은 포토시와 달리 핀 두 개 대신 하나로 고정되어 있었고, 토종 양모와 면으로 짜여 있었다. 하지만 소재가 알파카, 비쿠냐, 라마 털처럼 희귀하고 특별할지라도 그 선명한 색조는 명백히 아닐린 염료였다. 실제로 안데스의 거의 모든 도시의 시장에서 독일산 염료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현지 행상을 볼 수 있었다.
쿠스코 케추아족 복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팬케이크 모자였다. 이것은 가역적이었는데, 중앙에 천으로 덮인 구멍이 있는 짚 원반으로 만들어졌다. 한쪽 면은 비 올 때를 대비해 거친 빨간 플란넬이나 다른 모직물로 안감을 대었지만, 건조한 날씨용 면은 검은 벨벳 위에 화려하게 금박을 입혔다. 마찬가지로 중앙의 구멍을 덮는 헐렁한 천은 맑은 날씨용 면은 벨벳으로, 비 올 때는 거친 모직물로 안감을 대었다. 남자들의 모자가 여자들의 것보다 약간 더 컸지만, 그 외에는 양성 모두 같은 유행을 따르는 것 같았다.
우리 호텔 맞은편에는 라 메르세드 교회와 수도원이 있었다. 이곳의 회랑은 아름다운 옛 그림들과 정교하게 조각된 석조 기둥과 아치로 유명했다. 정원에는 희귀한 꽃과 관목들이 가득했다. 제단 아래 지하실에는 피사로의 동료인 알마그로와 그의 아들이 묻혔다고 한다. 우리에게 수도원을 보여준 친절한 수사는 그런 전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라 메르세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스코 최고의 상인인 로멜리니 씨의 창고가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신사였고, 광범위한 사업을 구축하면서도 잉카 문명 연구에 헌신했다. 그는 가능한 한 잉카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창고 입구는 멋진 옛 잉카 문이었고, 삭사이우아만 중턱에 있는 그의 집은 한때 첫 번째 유명한 잉카인 만코 카팍의 궁전이 있던 자리였다. 그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정교하게 조각된 청동 조각상이나 우상 몇 점을 보여주었는데, 이것들은 수세기 동안 왕실 묘지의 흙 속에 묻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독일제’였다. 나중에 리마에서 비슷한 표본들을 발견했는데, 한 ‘골동품 상인’은 뻔뻔스럽게도 색상만 다른 똑같은 모양의 조각상 세 개를 같은 진열장에 전시해 놓고 팔고 있었다.
로멜리니 씨의 창고 서쪽에는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과 광장이 있었다. 이 광장은 주로 매주 토요일 저녁에 열리는 거지 장터로 유명했다. 쿠스코에는 전당포가 거의 없었지만, 이 장터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현지인들에게는 그럴지 모르지만, 우리는 즉시 ‘돈 많은 외국인’으로 낙인찍혀 모든 물건의 가격이 가능한 한 최고로 올라갔고 그대로 유지되었다. 녹슨 못, 깨진 도자기 조각, 낡은 중고 옷 등 전당포에서 거의 볼 수 없는 것들과 고물상에서나 1페니를 내놓을 법한 수많은 물건들이 있어 놀랐다. 하지만 장관으로서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광장은 연기 나는 횃불로 밝혀졌고, 물건 뒤에 앉아있는 상인들의 긴 줄을 따라 시끄럽게 오가는 흥정꾼들로 북적였다.
안데스의 거의 모든 장터는 일요일 아침에 열린다. 시장은 보통 저녁에는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 장터에서는 버려진 가재도구를 대낮에 노출시키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을 횃불 빛으로만 볼 수 있을 때 판매 기회가 더 크다는 것뿐만 아니라, 가재도구를 이곳에 가져와야 하는 새로 가난해진 사람이 새로 부자가 된 이웃들의 눈을 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횃불 위로 솟아오른 프란치스코 교회의 높은 탑이 이 장면에 엄숙함을 더했다. 어느 오후 우리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성가대석의 아름다운 목조 조각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모든 프란치스코회 시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교단의 규율이 엄격히 시행되고 있었고 정원은 잘 관리되고 있었다. 교단이 전성기를 지났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비판할 만한 점은 거의 없었다.
한때 지금보다 훨씬 컸고 많은 잉카 축제의 장소였던 쿠스코의 대광장은 여전히 매우 매력적이었다. 동쪽에는 거대한 대성당과 그 부속 예배당이 서 있었는데, 이는 근처의 잉카 궁전에서 가져온 돌로만 지어졌다고 한다.
남쪽에는 한때 예수회 교회였던 곳의 아름답게 조각된 석조 탑들이 있었다. 이들 옆으로는 빨간 기와 지붕과 기둥과 아치 열로 지지되는 돌출된 나무 발코니가 있는 그림 같은 2층 건물들이 있었다. 아케이드에는 수많은 소상인들이 물건을 진열하고 있었다. 광장의 서쪽과 북쪽에는 아케이드가 있는 2층 집들이 더 있었는데, 흥미로운 작은 가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와 광장의 돌 위에는 옷 상인들이
영국과 유럽 대륙, 북미와 남미에서 자신들의 물건을 가져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근처에서 만든 도자기와 케추아 장난감을 파는 상인들, 옥수수와 감자를 가져온 시장 상인들,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물건을 파는 행상인들도 있었다. 일부는 “49년 시대”의 대초원 마차 위에서 떼어낸 것처럼 보이는 천막으로 비를 피했고, 다른 이들은 거친 포장도로에 웅크리고 앉아 양이나 라마의 가죽 위에 물건을 펼쳐놓고 바람과 비에 노출된 채 팔고 있었다.
이 광장은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날은 투팍 아마루가 처형된 날이었을 것이다. 1781년 5월 18일 아침, 잉카는 옛 예수회 교회에서 처형장으로 끌려나왔다. 그가 시작한 인디오 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 스페인 당국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가장 악랄한 고문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아내는 높은 단상에 올려져 혀가 잘렸고, 쇠 나사로 목을 조르려 했다. 목이 너무 가늘어서 이런 방식으로는 목을 조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집행인들은 밧줄을 그녀의 목에 감고 당겨 죽였다. 아내의 죽음을 목격한 후, 잉카는 광장 중앙으로 끌려가 혀가 잘렸고, 그의 시신은 네 마리의 말에 의해 찢겨졌다.
그의 혁명의 즉각적인 결과로 원주민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인디오들에게 민족 관습을 포기하고 모든 악기를 파괴하라는 법률이 공포되었다. 다행히도 이 법들은 시행되지 않았다. 사실, 케추아어는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삭사이우아만
대성당 – 예수회 교회 – 광장 – 쿠스코
클레멘트 마크햄 경과 50년 전 다른 여행자들은 고대 방언이 계속 변질되고 스페인식 표현이 도입되어 잉카의 언어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가장 큰 도시의 시장에서 노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열 명 중 아홉 명의 인디오들이 스페인어로 대화할 수 없거나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통 군중 속에 통역을 해줄 인디오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모두가 케추아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스코의 지사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내내 그의 부관을 우리에게 붙여주었다. 그는 매우 유용하고 친절했다. 그의 한마디면 수도원과 교회의 문이 열렸고, 그의 가격 지식 덕분에 우리는 정상가보다 훨씬 더 많이 지불하지 않고도 케추아 수공예품을 구할 수 있었다. 쇼핑을 하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인디오 장난감과 장신구를 모으게 되면, 부관은 다음 경찰관을 불러 우리의 짐꾼 역할을 하도록 했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브로드웨이의 경찰관이 과학 회의에 참석한 외국 대표를 위해 꾸러미를 들고 머레이 힐을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라파스 감옥에서의 경험 후, 나는 쿠스코의 감옥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우리의 친절한 안내인은 기꺼이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동의했다. 감옥은 큰 안마당을 중심으로 지어진 옛 스페인식 저택이다. 이 울타리 안에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든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이든 모든 종류의 죄수들이 구분 없이 수용되어 있었다. 감방은 없는 것 같았고, 40~50명의 죄수들은 18세기 영국 감옥의 수감자들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있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식량에는 사치품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죄수들은 돈을 벌어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강제 노동은 없었고 남자들은 완전히 자신의 능력에 맡겨져 있었다. 몇몇은 판초를 만드는 수직기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기꺼이 팔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뿔로 만든 컵을 조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마침 자고 있던 한 불운한 사람은 호텔로 화려하게 채색된 장신구를 보내며 우리가 좋은 가격에 사주기를 바란다는 쪽지를 보냈다. 그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건물은 낡고 허술하며 우리의 기준으로는 매우 부적절했지만, 죄수들은 즐거워 보였고 잔인함의 흔적은 없었다. 케추아족은 매우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서 간수들이 라파스에서 까다로운 아이마라족을 다루는 것처럼 그들을 가혹하게 처벌할 이유가 없었다.
역사적인 광장의 남쪽, 예수회 교회 옆에는 쿠스코 대학이 있다. 교회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아름다운 석조 회랑이 있다. 1598년에 설립되었는데, 이는 하버드 대학보다 38년이나 앞선다. 나는 대학의 저명한 총장인 박식한 변호사를 매우 유쾌하게 방문했다. 현재 대학의 주요 업무는 법률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총장의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1907년 한 해 동안 대학은 4명의 후보자에게 철학문학 학사 학위를, 2명에게 법학사 학위를, 2명에게 정치학 학사 학위를, 그리고 4명에게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8명의 교수진이 있다. 그들은 월 35달러의 급여를 받고 평균적으로 1년에 135번의 강의를 한다. 문과대학은 3년 과정에 33명의 학생이 있다. 법학대학은 5년 과정에 46명의 학생이 있다. 정치학대학은 3년 과정에 24명의 학생이 있다. 자연과학과는 3년 과정에 9명의 학생이 있다. 1년 총 수입은 약 1만 달러 정도다. 이 중 정부가 5,500달러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충당된다. 1907년 수입의 한 항목은 “수업에 불참하고 기타 행위”로 인해 교수진에게 부과된 40달러의 벌금이었다!
남미 젊은이들의 교육 문제는 흥미로운 주제다. 대다수 영국 주민들의 의견은 최근 한 영국인 광산 기술자가 잘 표현했다. 그는 페루에 관한 책을 썼는데,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스페인계 미국인 청년은 행복한 결과물이 아니다. 런던이야말로 그들의 성격에 맞는 세련된 국제성을 갖춘 진정한 고향이다”!
남미의 교육기관들은 미국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많은 수의 남미 학생들이 미국 대학으로 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더 많은 학생들이 오도록 장려해야 할까?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는 스페인계 미국인들은 주로 공학과 치의학에 주력하고 있다. 극소수의 남미인들만이 우리의 학부 과정이나 이와 유사한 과정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는 그들의 관습적인 교육 체계와 전혀 맞지 않는다. 평균적인 남미인에게 ‘대학’이란 학생들이 졸업 후 바로 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일종의 고등학교를 의미한다. 얼핏 보면 김나지움 과정을 마치고 바로 대학에서 전문 과정을 시작하는 익숙한 독일식 개념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나지움과 콜레히오의 교과 과정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둘 다에게 불공평할 것이다.
남미의 많은 의사들은 파리에서 공부했다고 주장한다. 치과의사들은 보통 필라델피아나 뉴욕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광고한다. 변호사들은 거의 항상 지역 대학에서만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 반면 많은 비율의 현지 토목기사들이 지역 공과대학에서 훈련을 받긴 하지만, 상당수가 해외에서 공부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제외한 남미에서는 최고의 기술자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나는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을 위한 미국식 교육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런던의 “세련된 국제성”보다는 미국식 교육이 그들의 효율성을 더 높였다고 믿는다.
## 제20장
## 삭사이우아만
북쪽에서 오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쿠스코를 방어하기 위해 잉카인들은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거대한 요새를 지었다. 그곳에 가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노새를 타고 쿠스코의 좁은 거리를 지나 협곡을 따라 올라가 언덕 동쪽에 있는 고대의 관문으로 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걸어가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요새가 도시보다 겨우 180미터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스코의 해발고도가 3,500미터나 되기 때문에 이 고도에서 언덕을 오르는 것은 노새를 타고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지사가 친절하게 노새와 호위병을 제공해 주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로스 나사레노스 교회를 지났는데, 이 교회의 상부 구조는 돌에 많은 뱀들이 조각된 것으로 유명한 고대 벽 위에 지어졌다. 라파스 거리에서 내가 산 조잡한 도자기 접시 중 하나도 이와 같은 작은 꿈틀거리는 뱀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로스 나사레노스를 지나자 거리가 좁아져 이내 바위 협곡의 한 길이 되었다. 협곡에 들어서자 처음에는 볼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다 가장 좁고 방어하기 쉬운 부분에서 우리는 갑자기 거칠게 다듬어진 거대한 바위 더미와 마주쳤다. 5-6미터 높이의 커다란 돌 덩어리들이 약간 둥글게 깎여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고, 이것들이 3.6미터 높이의 관문을 이루어 큰 바위로 만든 벽으로 방어된 통로로 이어졌다. 이 통로는 언덕 꼭대기로 통했다. 도시 쪽으로는 경사가 거의 수직에 가까웠지만, 정상 부근에서는 각각 3.6-4.2미터 높이의 3단 계단식 테라스로 접근이 더욱 어렵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상에는 여기서 보이는 쿠스코의 아름다운 전망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언덕의 바로 앞면은 상부 테라스 아래에서 매우 가파르다. 도시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쯤에서 능선이 넓어지고 평평해진다. 첫 번째 잉카가 그곳에 궁전을 지었다. 이 능선의 아래쪽 연장선상에 두 개의 작은 개울 사이로 후대 잉카들의 궁전과 신전들이 지어졌다.
삭사이우아만의 북쪽, 즉 쿠스코에서 멀어지는 쪽이 가장 큰 관심거리다. 이쪽은 경사가 매우 완만해 인공적으로 요새화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쪽에서 공격이 예상되었는데, 아마존 밀림의 야만인들뿐만 아니라 에콰도르의 카라족을 포함한 안데스 고원의 적대적 부족들로부터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잉카인들은 이곳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최고의 기술을 발휘했다.
요새는 언덕 뒤쪽을 가로질러 0.5킬로미터 정도 뻗어 있으며, 양쪽 끝은 가파른 계곡으로 막혀 있다. 요새는 지그재그 모양의 3줄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테라스는 거대한 바위들로 만든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일부는 직경이 3.6미터에 달한다. 가장 아래 테라스의 평균 높이는 약 7.6미터이고, 중간과 위쪽 테라스는 1.8미터 정도 낮다. 세계에서 이 거대한 벽들보다 더 인상적인 광경은 거의 없다.
잉카인들은 큰 테라스를 만드는 데 익숙했고 나는 페루 여러 곳에서 그것들을 보았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경우에 테라스 벽은 직선이거나 거의 직선에 가까웠다. 여기서는 벽이 평행하긴 하지만 지그재그 모양이며 전체 길이에 걸쳐 돌출부와 오목부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쪽 벽의 각 돌출부 끝은 보통 7.6미터 높이에 3-3.6미터 두께의 눈에 띄게 큰 돌로 이루어져 있다.
벽의 크기와 강도, 그리고 요새의 전면을 측면 사격으로 방어할 수 있게 해주는 돌출부의 사용 – 이는 심지어 유럽의 십자군들도 모르던 방식이다 – 은 잉카 요새를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활과 화살, 투석기, 창과 같은 원시적인 무기만을 가진 인디언 공격자들의 공격으로부터는 확실히 안전했다.
건축가들이 아래쪽 벽에 사용한 돌의 거대한 크기 다음으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돌을 시멘트 없이 서로 맞물리게 하여 수세기 동안 서 있을 수 있도록 한 세심함이다.
작은 돌들의 대부분은 도시의 건축 자재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아메리카에서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인간의 작품이다. 사진은 절대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몇 개의 바위, 벽의 작은 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요새 전체를 보여주기 위해 멀리서 찍으면 눈에 익숙한 크기의 돌보다 훨씬 큰 돌들 때문에 돌 단위의 크기감을 모두 잃게 된다.
16세기의 잉카 작가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이렇게 썼다.
삭사이우아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잉카의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중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그 위대함은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믿기 힘들 정도다…. 어떻게 이렇게 많고 거대한 돌들을 칼끝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맞출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더욱 놀라운 점은 돌을 맞추기 위한 직각자나 수평계도 없었다는 것이다. 완벽한 이음새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자주 돌을 들었다 놓았을까! 게다가 크레인이나 도르래, 그 외 어떤 기계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돌의 크기와, 그것을 옮기고 맞추는 데 들인 엄청난 노력이다.”
이를 최근 캐롤라인 제도의 레레 섬 근처에 있는 거대한 석조 유적을 묘사한 글과 비교해보자. “셀 수 없이 많은 세대의 비와 햇빛으로 깎이고 갈라진 단단한 윤곽을 보면, 이 원시 공학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고 다루기 힘든 바위 덩어리를 옮기고 들어 올려 현재의 위치에 놓았는지 그 독창성과 기술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숲 속에 가려진 이 강력한 구조물들은 시간의 변화와 열대의 기후를 견뎌내고 있다.”
쿡 선장의 ‘항해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석단은 매우 큰 다듬은 돌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어떤 시멘트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음새가 매우 촘촘하고 돌들이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있었다. 측벽은 수직이 아니라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이는 삭사이우아만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하지만 쿡 선장은 페루 고원에 온 적이 없고 아마 이 벽의 사진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스터 섬의 석조 유적을 설명하고 있다.
페루 고원과 이스터 섬, 캐롤라인 제도 유적 사이의 유사성은 민족학적 추측을 위한 흥미로운 주제를 제공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삭사이우아만 건설자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지 못했다.
요새 건설이 스페인 정복 200년 전 잉카 비라코차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전통이 잘 근거한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클레멘츠 마크햄 경이 지적했듯이, ‘비라코차’라는 이름이 단순히 강력한 인물을 가리키는 용어, 즉 영어의 ‘신사’에 해당하는 존경의 표현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누가 건설했든 간에, 이는 분명 영웅적인 과업이었다. 많은 돌들이 분명 근처에서 채석되었을 것이다. 운반 방법에 대해서는, 잉카인들이 중앙 페루의 많은 협곡을 가로지르는 현수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튼튼한 케이블 제작 기술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케이블과 나무 굴대를 이용하면 매우 큰 돌을 상당한 거리까지 경사면을 따라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짐을 나르는 데만 익숙한 라마 외에 가축은 없었지만, 그들에겐 수천 명의 인내심 강한 케추아인들이 있었다. 긴 케이블 줄을 따라 늘어선 이들의 합동 노력이면 이 거대한 돌덩이들을 충분히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 8~10톤에 달하는 두 개의 불규칙한 바위를 맞추는 작업을 생각하면, 이 옛 건축가들의 기술에 대한 경탄을 금할 수 없다.
현대 페루인들은 잉카인들이 돌을 이렇게 완벽하게 맞출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해 추측하기를 좋아한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는 잉카인들이 어떤 식물의 즙을 알고 있어서, 이 즙을 바르면 돌의 표면이 부드러워져 마법같은 식물 즙으로 돌을 몇 분 동안 문질러 놀라운 맞춤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토론과 추측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두 가지 결론은 내릴 수 있다. 잉카인들에게는 무제한의 노동력이 있었고,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들은 석공 기술을 즐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요새에서 로다데로 언덕의 바위들과 계단식 밭을 가르는 작은 초원을 가로질러 말을 탔다. 그 정상에는 단단한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이 있었는데, 잉카인들이 여기 앉아 삭사이우아만의 웅장한 벽을 짓는 인내심 강한 일꾼들을 지켜보곤 했다고 한다. 언덕 북쪽에서는 물에 의해 바위가 홈을 이루고 여러 세대의 즐거움을 찾는 이들의 판초에 의해 반들반들해졌는데, 이 특이한 형태를 ‘토보간 슬라이드’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 안내인들은 이 언덕을 판초를 깔고 미끄러 내려오는 습관이 잉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이는 여전히 인기 있는 일요일 오락거리다.
로다데로 북쪽의 구릉 지대에는 단순히 석공 기술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에 의해 환상적인 좌석, 구석, 틈새 등으로 조각된 바위와 절벽들이 많이 있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벽감과 선반, 좌석과 받침대의 미로를 달리 설명하기는 어렵다. 저술가들은 페루 산에서 발견되는 모든 돌 좌석을 ‘잉카의 왕좌’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여기 절벽들은 너무나 불규칙하게 조각되어 상상력마저 혼란스럽게 한다.
1.6킬로미터 떨어진 북동쪽에서 우리는 큰 원형극장의 희미한 윤곽을 발견했다. 잉카인들은 초원 비탈에 모여 경기와 종교 축제를 관람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완전히 간과된 것 같아 발굴하기에 매력적인 장소다.
도시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첫 번째 잉카 황제 만코 카팍의 정원에 지어진 로멜리니 씨의 시골집에서 쉬어가도록 초대받았다. 입구는 고대 바깥 계단식 밭의 벽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간다. 집 근처에 궁전 벽의 일부가 서 있는데, 길이가 9미터이고 높이가 3미터이며 오목한 문과 창문이 있다. 바깥 계단식 밭에서는 돌의 모양이 불규칙하지만 이 벽에서는 거의 직사각형이다. 로멜리니 씨는 집에 잉카인들의 도자기 예술품 중 매우 흥미로운 표본들을 몇 점 모아두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기 그려진 작은 것과 모양과 무늬가 비슷한 매우 큰 항아리 두 개다. 이것은 높이가 15센티미터에 불과하지만, 저것들은 거의 90센티미터나 된다.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는 불완전한 표본이 꽤 많이 있다.
정원사가 우리에게 장미 한 줌을 건넨 후, 우리는 고대 잉카의 영역을 떠나 거친 자갈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갔다. 아래로는 현대 쿠스코의 그림 같은 풍경과 불쾌한 냄새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1909년 2월 1일 아침에 쿠스코를 떠났다. 그날은 좋지 않은 징조를 보였다.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전날 우리는 여러 지역 유지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들은 모두 아침에 와서 우리를 마을 밖까지 에스코트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폭우가 그들의 약속을 무산시켰다. 심지어 지사의 정중한 부관조차도 호텔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까지 우리와 동행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스럽다는 우리의 암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사는 우리의 안전에 대해 매우 염려했고, 우리가 군대 호위 없이 여행하기를 원한다고 거듭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할 구역에 있는 한 최소한 한 명의 하사관과 병사가 우리와 동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나는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 위험은 없었고 페루에서 강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는 대표단이 배고픈 케추아 족이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마을에서 굶주릴까 봐 걱정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호위 없이 여행하는 것이 품위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의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좋은 뜻이었고 부패와는 관련이 없었다. 군인들은 정부 비용으로 우리와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서쪽으로 출발했고 삭사이우아만을 오른쪽에 두고 지나갔다. 쿠스코 계곡을 벗어나 점차 내려가자 잉카 전쟁의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유명한 안타 평원이 나타났다. 우리는 고대 잉카 도로를 따라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것은 너비가 1.5~1.8미터인 돌길로, 양쪽에는 도랑과 늪지가 있었다. 페루인들은 이 길이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두었고, 대부분의 구간이 사라져버렸다. 정오에 우리는 티아우아나코의 광장과 매우 비슷한 광장이 있는 푸키우라 마을에 도착했다. 오후 3시 30분, 우리는 늪지와 연못을 피하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야 했다.
우기에는 직통 도로가 물에 잠겨 우리는 작은 돌다리를 건너 우아로콘도라는 옛 인디언 마을의 음산한 광장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우루밤바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져 있으며, 스키어가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흥미로운 오얀타이탐보 유적도 근처에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곳을 방문할 시간이 없어 대신 남서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안타 평원 북쪽의 언덕을 따라가며 우리는 길이가 500미터가 넘고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계단식 밭을 여러 개 지나쳤고, 저녁 무렵 수리타라는 작은 인디언 마을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우리는 환대하는 마을 장의 집으로 안내받았는데, 두 명의 페루 여행자가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 지역의 다른 좋은 집들과 마찬가지로, 입구는 큰 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문 맞은편에는 2층 건물이 있었고, 2층 전체에 발코니가 있었다. 마당의 다른 쪽에는 작은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는 넓은 돌 베란다가 있어 아리에로들과 군인들이 안장과 가방을 쌓아두고 담요를 깔아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불쌍한 앵무새 두 마리가 춥고 병들어 초라한 모습으로 베란다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지 한 시간 후, 은색 끝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있는 네 명의 인디언 알칼데와 테니엔테들이 마을 장의 소환에 응해 마당에 나타났다. 마을 장이 발코니에 나타나자 그들은 공손히 모자를 벗고 우리 노새들의 먹이로 쓸 싱싱한 보리짚 다발을 얼마나 가져와야 하는지 듣기 위해 조용히 서 있었다. 한 시간 후 그들은 다른 인디언들과 함께 돌아와 그들의 명령에 따라 세바다를 가져왔다. 대화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케추아어로 이루어졌지만, 마을 장은 알칼데들이 먹이 값으로 1솔, 즉 48센트 상당의 페루 은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기꺼이 그에게 돈을 주었고,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 솔을 주머니에 넣고 솔의 절반 가치도 안 되는 작은 동전 몇 개를 꺼내 마당으로 던졌다. 알칼데들은 그것을 감사히 주워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마을 장과 동료 투숙객들과 함께 수리타를 떠났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말을 타고 있었다. 이 지역의 기마병들은 스페인 전쟁마의 장식을 연상시키는 마구를 즐겨 사용했다. 말 궁둥이에는 V자 모양의 단단한 가죽 조각이 정교하게 찍혀 있었다. 거기서 엉덩이 끈이 늘어져 매우 느슨한 뒷가슴대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이는 거의 비계까지 늘어져 실제로 말의 뒷다리 힘줄에 걸쳐 있었다. 전혀 쓸모가 없고 오히려 말의 움직임을 방해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꽤 그림같았다.
아리에로와 짐 노새들은 군 호위병의 감독 하에 뒤따르게 하고,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정오에 우리는 우루밤바 강과 아푸리막 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차야밤바에 도착했다. 우리가 방금 올라온 안타의 초원 같은 나무 없는 평원과는 달리, 우리 앞에는 짙은 녹색의 울창한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산간 급류와 비슷한 바위투성이 계단길을 따라 우리는 빠르게 따뜻한 열대 지방으로 내려갔다. 울창한 숲과 얽힌 덩굴은 황량한 고원 지대를 지나온 후라 더욱 반가웠다. 아름다운 노란 꽃브리 꽃이 만발했다. 공기는 헬리오트로프 향기로 가득했다. 다양한 색의 란타나가 용설란과 매달린 덩굴 사이를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 리마탐보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흥미로운 계단식 밭과 잉카 요새의 흔적들이 있었다. 리마탐보 강 계곡은 이곳에서 매우 좁아져 서쪽과 북쪽에서 쿠스코를 향해 오는 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리마탐보 강은 상당히 불어나 있었다. 여울목은 완전히 지나갈 수 없어서 우리는 임시로 만든 허술한 다리를 이용해야 했다. 우리 노새들은 다리가 무게로 휘어지자 의심스럽게 냄새를 맡으며 매우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곧이어 우리는 블랑코 강을 건넜고, 스키어가 “허름한 오두막들이 모여 있는 산비탈 마을로, 허술한 교회와 우체국을 겸하고 있는 오두막을 겸한 술에 찌든 군수, 그리고 군수만큼이나 방탕한 사제가 있는… 페루에서 악명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곳”이라고 묘사한 모예파타 인디언 마을로 가는 옛 길을 떠났다. 다행히도 스키어의 방문 이후, 한 진취적인 페루인이 라 에스트레야에 있는 산비탈의 무성한 숲을 개간해 설탕 농장을 만들었다. 농장 주인인 몬테스 씨는 집에 없었지만 – 그의 환대는 쿠스코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 우리는 매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우리의 군 호위대는 거의 3시간이나 늦게 도착했고, 형편없는 동물들과 아슬아슬한 탈출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라 에스트레야에서 상태가 꽤 괜찮은 훌륭한 피아노를 발견하고 상당히 놀랐다. 그것은 케추아 짐꾼들의 어깨에 실려 쿠스코에서 운반되어 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지만, 철도가 생기기 전에는 피아노를 태평양 연안에서 쿠스코까지 인디언들이 운반하곤 했다. 다음에 내가 뉴헤이븐에서 다섯 명의 건장한 아일랜드 트럭 운전사들이 트럭에서 50피트 떨어진 집까지 업라이트 피아노를 운반하며 신음하고 떨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14,000피트 높이의 산을 넘어 해수면에서 피아노를 운반할 수 있는 반쯤 굶주린 인디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라 에스트레야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통키누아즈’와 ‘캉 라무르 뫼르’의 선율을 듣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것이 바로 남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다. 페루나 볼리비아의 중심부에 피아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곳이 포토시건 아레키파건 상관없이 이 곡들이 끊임없이 우리 귀에 들려왔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라 에스트레야의 사탕수수 밭에서 매우 가파른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실은 노새들이 발을 헛디뎌 아래 450미터 아래로 흐르는 격렬한 아푸리막 강으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침내 우리는 훌륭한 현대식 다리에 도착했고, 실제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도 건널 수 있었다. 이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페루의 다리들.
옛날에는 인디언들이 페루식으로 만든 아주 높은 현수교가 이 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스키어의 “페루”, 마크햄의 “쿠스코와 리마”, 그리고 기번 중위의 “아마존 계곡 탐험”에는 이 다리에 대한 생생한 그림들이 실려 있는데,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들 모두 다리의 수면 위 높이와 길이에 대해 의견이 다르지만, 모두 다리가 가로지르는 놀라운 협곡에 크게 감명받았다. 기번은 “다리는 짙은 녹색 물 위로 45미터 높이에 있었다”고 말한다. 2년 후 다리를 건넌 클레멘츠 마크햄 경은 “다리가 강 위로 90미터 높이에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협곡을 가로질렀다”고 말한다. 그가 건넌 것은 3월 중순 우기가 끝날 무렵이어서 물이 많이 불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기번 중위는 8월 건기 중반에 건넜을 때 강물이 매우 낮았을 것이므로, 그들이 추정한 다리의 높이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안타깝게도 이 다리는 사라져버려 여행자들이 더 이상 그 크기를 놓고 논쟁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거대한 녹색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가파른 산비탈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폭포가 줄무늬처럼 흐르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녹색 앵무새들이 날아다니고 발밑에는 노란 붓꽃이 피어 있어 경치에 색채를 더했다. 우리의 기쁨을 더해주듯 하루 종일 해가 비쳤다. 가파르지만 잘 다듬어진 산길을 비교적 쉽게 여행하여 쿠라우아시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호위 임무를 맡은 카세레스 중위를 만났다. 그는 매우 명랑하고 유난히 활기찬 젊은 페루인으로 오래되고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
쿠라우아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지역 전신국으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카세레스는 “귀빈들”의 접근을 알리는 중요한 전보를 보냈다. 그가 전보를 쓰는 동안 기다리는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흑맥주 병이 열렸고 엄숙히 건배가 제의되었다. 우리는 마을에서 밤을 보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어하는 지사가 아반카이로 가는 길목의 트란카파타에 있는 계곡 위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저택은 허름했지만 깊은 협곡 가장자리에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었다. 식당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오래된 베란다였고, 우리는 그 별장에 현대적 편의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던 것처럼 경치와 후한 대접을 즐겼다.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이토록 따뜻한 환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주를 떠나기 전에 온화한 아푸리막 주 지사의 지배를 받는 거의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 이러한 친절이 특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마침내 정중한 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을 때, 그는 깊은 계곡을 따라 먼 거리를 우리와 동행했다. 밝은 햇살 아래 언덕을 오르자 우리 뒤로 멋진 풍경이 펼쳐졌고, 멀리 사르간타이 산의 눈 덮인 봉우리가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곧 무성한 식물이 우거진 지역을 벗어나 란타나와 선인장, 열대 식물들이 있는 곳을 지나 해발 4,000미터 고지에서 쌀쌀한 이슬비를 만났다. 그리고 내려가면서 비를 벗어나 파란 샐비어와 분홍 베고니아가 가득한 길을 따라 즐거운 승마를 즐겼다.
마침내 우리는 페루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아반카이의 사탕수수 밭을 보기 시작했다. 하와이의 광활한 사탕수수 밭이나 쿠바와 푸에르토리코의 거대한 농장을 본 사람에게는 이 작은 지역의 명성이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페루의 황량한 고원을 지나고 산악 기후의 추위를 경험한 후에는, 해발 2,400미터의 따뜻하고 비옥한 계곡에서 쉽게 사탕수수를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이 크게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매우 나쁜 길을 따라 길게 내려가자 매력적인 지역이 나타났다. 아반카이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부지사와 십여 명의 사탕수수 농장주들, 그리고 신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말에 안장을 얹고 나와 우리를 적절히 맞이하려고 애쓴 것이었다.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즐겁게 마을로 들어갔고 곧바로 지사 관저로 안내되었다. 거기서 호세 누녜스 각하가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어 지사 관저에서 적당한 숙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사과했다. 대신 그는 지역 클럽 전체를 우리가 마음대로 쓰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기쁘게 수락했다. 클럽의 두 개의 쾌적한 방은 작은 광장이 내려다보이고 고풍스러운 교회와 그 너머의 가파른 언덕들이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 숙소에 자리를 잡자마자 지사가 공식 방문을 왔다. 그는 곧바로 초케키라우 유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에게 그곳을 방문해 달라고 간청했다.
케추아어, 즉 잉카의 언어로 초케키라우는 “황금 요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로맨틱한 이름과 마지막 방어자들에 대한 모든 확실한 지식의 부재에 이끌려, 지난 세기 동안 여러 차례 이 유적을 탐험하고 잉카인들이 아타우알파의 몸값으로 피사로에게 넘기는 대신 여기에 숨겼다고 추정되는 보물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유적지에 접근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서 잉카인들이 아푸리막 강 위 1,800미터 높이의 산비탈에 한때 15,000명 이상의 주민이 살았던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이 전설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가끔 유적의 일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대담한 등산가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우리는 그곳에 처음 도달한 사람이 혼자 갔다 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가 본 것이라고는 늦은 오후에 지치고 식량도 없는 상태로 도착한 돌담 하나뿐이었다. 그는 그 벽의 보호 아래서 잠을 잤고, 자신이 거기 다녀갔다는 증거로 총을 남겨두고 이른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기에 급급했다. 한 세대 후 모험가들의 작은 무리가 이틀치 식량을 가지고 유적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묻힌 보물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두세 개의 구멍을 파고 고통의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이야기는
누구나 그들의 예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성한 열대 식물 아래 무너져가는 “궁전, 포장된 광장, 사원, 감옥, 욕실”에 대한 보고를 가져왔다. 그러자 한 지방 관리가 엄청난 부를 꿈꾸며 초케키라우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인디오 운반인들의 운송 서비스를 유지하며 작업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면서 체계적으로 “황금의 요람”을 발굴하려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군인 한 부대와 많은 인디오들을 동원할 수 있었고, 탐험에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다고 한다. 그는 강 위 3,660m, 초케키라우 위 1,830m 높이의 능선 정상에 도달했지만 유적을 둘러싼 절벽을 오르지 못했고,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도 그가 만든 길을 이용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아푸리막 주의 현 지사인 호세 누녜스 각하가 취임하여 지역의 전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후원 아래 보물 탐색대가 결성되었고, 수천 달러가 모금되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첫 번째 어려움은 아푸리막 강의 무시무시한 급류를 건너는 다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모든 노력이 실패했다. 소용돌이치는 급류에 목숨을 걸려는 페루인은 한 명도 없었다. 마침내 30년간 페루의 산악 지대를 누빈 “돈 마리아노”라는 나이 든 중국인 행상이 허리에 줄을 매고 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전신주 전선 6가닥을 확보했고, 거기에 짧은 섬유 밧줄을 매달아 폭 60cm의 갈대 매트를 엮어 허술한 현수교의 발판으로 삼았다.
일단 강을 건너자 일행은 20년 전에 만들어진 길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강에서 초케키라우까지 가는 길에 놓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3개월이나 걸렸다. 열정적인 지사와 그의 보좌관인 카세레스 중위의 격려에 힘입어 400년간 모든 도전자를 물리쳤던 과업이 마침내 완수되었다. 인디오 짐꾼들이 이용할 수 있는 19km의 길이 울창한 산림을 뚫고 급류와 절벽을 넘어 협곡을 가로질러 강에서 유적지까지 만들어졌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보물 회사 사장과 우리 친구인 지사를 비롯한 현지 골동품 수집가들에게서 하나둘씩 들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된 방문에 필요한 일주일을 도저히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새로운 잉카 유적을 찾고 있지도 않았고, 초케키라우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사와 그의 친구들의 열정을 이기지 못했다. 지사는 외국인이 초케키라우를 방문한 적이 없다며 추가 유인책을 내세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마침내 그는 레기아 페루 대통령이 우리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걸 알고, 우리가 원래 상태의 유적을 볼 기회를 갖도록 작업을 중단해달라고 회사에 요청했다고 말했다. 요컨대 지사의 주장이 워낙 강력했고, 우리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여 결국 가서 그의 노력으로 발굴된 것을 보기로 동의했다.
그날 밤 그는 현지 유력 인사 15명을 초대해 우리를 위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저녁 식사 후 우리는 초케키라우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보았는데, 고대 숄 핀 몇 개와 몇 가지 정체불명의 금속 물건들이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길이 38cm, 지름 5cm 정도의 무거운 곤봉으로,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모양이었고 하와이인들이 타파를 두들길 때 쓰는 나무 곤봉과 비슷했다. 노란빛을 띠어 순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안타깝게도 분석할 방법이 없었지만, 아마도 고대 잉카의 도끼처럼 주석으로 경화된 구리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음날 오후, 우리는 통조림 식품, 안장, 담요, 옷가지들이 뒤섞인 잡동사니 속에서 짐을 꾸렸고, 귀빈들을 맞이했다. 찾아온 사람들 거의 모두가 내일 우리와 동행하겠다고 말해서, 우리는 아반카이에서 대이동이 벌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한 설탕 농장에서 성대한 만찬을 대접받았다. 이 저녁 식사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참석했다. 아반카이의 농장주들은 훌륭한 신사들로, 환대를 아끼지 않고 예의 바르며 지적이었고, 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친절했으며 서로의 일에도 관심을 가졌고 외부 세계 소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1-2년마다 리마에서 시간을 보냈고, 몇몇은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우리 주인 중 한 명은 최근에 초케키라우로 원정을 다녀왔는데 “죽을 뻔했다”고 했다. 그는 노새 한 마리를 잃었는데 절벽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고 했다. 다른 노새 한 마리도 심하게 다쳤다. 전반적으로 친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일 우리와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한 사람은 아반카이에 남기로 한 셈이다!
제22장
초케키라우로의 등반
다음날 아침, 우리는 대규모 기마대와 함께 초케키라우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를 호위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1-2km 정도만 동행하다가, 우리에게 행운을 빌며 아반카이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유난히 많은 비로 인해 길 상태가 끔찍했다. 거의 통과할 수 없는 진흙탕, 불어난 급류, 바위와 나무의 산사태, 그리고 페루 산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우리의 여정을 더욱 힘들게 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직후 우리는 특히 위험한 급류를 건너야 했다. 노새들은 거품이 이는 물살 속에서 간신히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건넌 후 우리는 쉬면서 우리와 동행하기로 한 군인 중 한 명인 카스티요가 강을 건너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노새는 험한 길 때문에 지쳐 쉬고 있었다. 노새는 다른 동물들과 함께 강을 건넜고 이제 우리 옆에 서서 군인이 바위에서 바위로 위험하게 뛰어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실수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카스티요가 간신히 우리 쪽 강둑에 도착하자마자 노새는 아반카이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듯 위험한 여울을 다시 건너기 시작했다. 카스티요는 분노의 고함을 지르며 노새를 쫓아갔다.
병사는 다시 한 번 도강을 시도해 급류를 건넌 뒤 노새를 쫓아갔다. 노새는 충분히 쉬고 나서 활기차게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2.4킬로미터를 쫓아간 카스티요의 기분은 좋지 않았고, 그날 나머지 시간 동안 노새를 쉬게 하지 않았다. 정오에 우리는 카초라 마을에 잠시 들렀다. 지사가 “적당한 점심”을 준비하라고 주지사에게 지시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주지사는 변명만 늘어놓았고, 우리는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삶은 달걀 서너 개로 때워야 했다.
하루 종일 비와 짙은 안개 속에서 우리는 미끄러운 길을 달렸다. 안개가 걷힐 때마다 놀랍도록 짙푸른 계곡과 진귀한 꽃으로 뒤덮인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은 시간이 갈수록 더 위험하고 어려워졌다. 그날 밤 아푸리막 강변의 작은 야영지에 도착하기 위해 우리는 서둘러 전진했다. 하지만 수만 제곱미터에 걸쳐 핀 장관을 이루는 분홍색 베고니아와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펼쳐진 푸른 루핀 꽃밭에 자주 발길을 멈추곤 했다. 오후 5시경 우리는 2,100미터 아래 협곡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강물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아푸리막 강은 아레키파 근처의 작은 호수에서 발원해 우카얄리 강을 거쳐 아마존 강으로 흘러든다. 아마존 강 하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이 강을 아마존의 본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지역에 이르면 아푸리막 강은 폭 75미터의 격류가 되어 이 시기에는 수심이 24미터에 이른다. 그 우렁찬 목소리는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어 케추아 족은 이 강을 ‘위대한 연설가’라는 뜻의 ‘아푸리막’이라 부른다.
우리의 안내인인 열정적인 카세레스는 이제 충분히 왔다고 선언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앞으로의 길이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험난하다”며 근처의 버려진 오두막에서 하룻밤 야영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처음으로 모험을 경험하는 아반카이 출신 젊은이 두 명은 그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다. 하지만 두 양키는 가능하다면 강까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세레스는 마침내 동의했고, 대담한 카스티요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위험하고 굽이진 내리막길을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자 우리는 길을 완전히 막은 거대한 나무와 마주쳤다. 오두막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30분간 작업한 끝에 이 장애물을 지나갈 수 있었지만, 최근 산사태가 일어난 비탈에 도달했다. 여기서는 노새와 말들도 공포에 떨며 흔들렸다. 우리는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흙과 돌무더기 위를 그들을 이끌고 건넜다. 불과 2주 전에 두 마리의 노새가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건너다 산사태가 다시 일어나 불쌍한 동물들을 휩쓸어갔던 것이다.
어둠이 내린 지 한 시간 후 우리는 평평한 지대에 도착했다. 강물 소리가 너무 커서 카세레스가 외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났고 “나머지는 평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농담에 불과했다. 우리는 여전히 강에서 300미터나 높은 곳에 있었고, 절벽 면을 따라 깎아 만든 길을 지나야 했다. 대낮이었다면 우리는 결코 평지에서 강변으로 내려가는 이 구불구불한 길을 말을 타고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깜깜해서 위험을 전혀 모른 채 우리는 안내인의 밝은 목소리를 따라 내려갔다. 이 길은 소위 나선형 길이라 불리는 것으로, 각각 6미터 길이의 짧은 회전을 반복하며 협곡 벽면을 따라 내려갔다. 각 회전의 한쪽 끝에는 절벽이 있고, 다른 쪽 끝에는 200미터 높이에서 곧장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있는 협곡이 있었다.
중간쯤 내려왔을 때 내 노새가 멈춰 서서 떨었다. 내가 내려보니 노새가 어둠 속에서 길에서 벗어나 절벽 아래 돌출된 바위로 미끄러져 내려간 것이었다. 노새를 다시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을 뒤로 가게 하는 것은 어렵고, 노새를 돌릴 공간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기에 안전하게 길로 돌아온 후 나는 나머지 길은 걸어가기로 하고 노새를 앞서 보냈다. 필요하다면 노새 혼자 절벽에서 떨어지게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강의 3분의 2 지점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이 찾아왔다. 이곳에서 길은 좁은 협곡을 가로질러 폭포 바로 앞을 지나며 물보라를 맞았다. 다리는 없었다. 폭포 높이는 1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어둡게 가려져 있었다. 협곡 건너편이 보이지 않아 혼자서는 뛰어넘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노새에 올라타 숨을 멈추고 양쪽 옆구리를 걷어찼다. 노새는 무사히 뛰어넘었다.
10분 후 우리는 강 바로 위 아래쪽 평지에 있는 미모사 나무숲을 지나 우리를 안내하러 나온 야영지 책임자의 환영하는 불빛을 보았다.
야영지는 갈대로 만든 2미터 x 2미터 크기의 오두막 두 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불편한 밤을 보냈다. 헤이 씨가 일기에 그 다음 몇 시간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기에, 그의 허락을 받아 그의 기록을 인용하겠다.
“접이식 침대를 포함한 우리 짐은 그날 밤 늦게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대나무 막대기로 만든 의자에서 부츠를 신은 채로 지붕만 있는 개방형 오두막에서 잤다. 밤중에 지사의 비서인 언론인이 산을 안전하게 내려온 것에 대한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의 경험으로 긴장이 풀린 탓인지, 혹은 그저 건방진 녀석이어서인지 세 번이나 권총을 발사했다. 다행히 총알은 매번 지붕을 뚫고 날아갔다. 나는 너무 깊이 잠들어 한 번의 총성만 들었지만, 그 ‘젊은 아이디어’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결국 그런 장난에 싫증이 났는지 조용해졌고, 새벽 3시까지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 시각에 우리 머리 위 기둥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수탉이 새벽이 오고 있다고 결정했는지, 아니면
그는 우리에게 건강한 깃털 달린 폐가 희박한 대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손이 닿을 만한 거리에 있었지만, 나는 때를 기다렸다. 그의 마음에 들 만큼 경보음에 충분한 주목이 가해지지 않았고, 나는 Sr. Chanticlerio의 가슴이 최후의 노력을 위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일어서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커지는 음량으로 노래가 쏟아져 나왔고, 마지막 절정에 이르러 그가 터질 것 같아 보일 때 나는 일어나 손날로 가장 필요한 곳을 내리쳤다. 그는 3시간 후 도전적인 작은 울음소리를 한 번 낼 용기를 냈다. 하지만 그의 기세는 꺾였고, 이제 깨어난 신문기자가 권총으로 그를 향해 발포하자 그의 스타일도 위축되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나가서 다리의 사진을 찍고 측정을 했다. 다리는 길이가 83미터, 폭이 81센티미터였고 강은 폭이 76미터였다. 다리를 지은 “돈 마리아노”는 공사를 시작했을 때 물이 다리에서 24미터 아래에 있었지만 현재는 강물이 불어나 7.6미터 아래까지 올라왔다고 말했다. 수심이 15미터나 늘어난 것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이 가파른 강둑 사이로 굉음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수심이 30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물이 마치 강 중간에 거대한 바위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솟구치며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인디언 짐꾼들을 우리 짐을 가지고 먼저 보냈다. 짐승들은 강 건너편의 길을 도저히 이용할 수 없었고 다리도 그들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인디언들이 중국인의 용기와 재주로 만든 이 가느다란 다리를 매우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짐과 보급품을 강 건너편으로 운반하면서 손과 무릎으로 조심스럽게 기어갔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이보다 훨씬 약한 현수교를 사용해 왔지만, 철사의 강도에 익숙하지 않았고 우리가 이렇게 작은 ‘밧줄’에 목숨을 맡기려 한다는 것이 그들에겐 경솔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현수교를 만드는 데 사용된 훨씬 더 굵은 섬유 로프는 이 6개의 전신줄만큼의 장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묽은 수프와 삶은 고구마로 아침을 먹은 후 우리는 등반을 위해 채비를 갖추었다. 이 지점에서 강은 해발 약 1,524미터에 있었다. 우리는 몇 달 동안 말을 타고 다니는 것 외에는 등산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3,352미터를 더 올라 해발 3,352미터까지 오르는 것은 꽤나 심각한 일로 보였다. 경험 많은 등산가들에게는 시시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인내심 많고 고생을 많이 한 케추아족 짐꾼들은 유럽군의 행군에만 주목해온 군사사학자들에게는 믿기 힘들 정도로 긴 거리를 행군하는 습관이 있는 고산 지대의 종족 출신으로, 매우 기꺼이 짐을 날랐다. 동시에 그들은 상황을 고려할 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극심한 피로의 징후를 자주 보였다.
등반 중 한 사건에 대해 빙엄은 이렇게 적었다. “일행 대부분이 두 ‘양키’보다 훨씬 일찍 출발했지만, 30분 만에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인디언 짐꾼을 붙들고 나무 아래서 맥주와 다른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페루에서 인디언에 대한 최고의 관대함의 예를 목격했다. 그것은 그가 온종일 다른 것들과 함께 음료수를 나르게 한 다음, 맥주를 마시고 병을 돌려주는 것이었다. 인디언은 많은 감사 인사와 함께 병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쳐 함께 계속 올라갔다. 불행히도 역사를 위해서는 좋지만 우리의 신경을 위해서는 다행스럽게도, 신문기자는 곧 지쳐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초케키라우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외국인의 펜에서만 나와야 하나? 1분도 아니다! 신문기자는 항상 정신적으로 우리와 함께 있었고, 리마 저널을 위한 보고서는 단순한 경험보다는 상상력의 손길 속에서 훨씬 더 잘 다뤄졌다.”
열정적인 카세레스는 계속해서 “용기!”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는 그의 좋은 기분의 증거이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려는 노력이었다. 두 양키는 힘든 시간을 보냈고 거의 15미터마다 멈추고 쉬어야 했다.
때때로 길은 너무 가파라서 똑바로 서 있으려고 하는 것보다 네 발로 기어가는 것이 더 쉬웠다. 때로는 미끄러운 통나무나 위험한 작은 다리를 건너 폭포 앞을 지나갔다. 다른 때는 바위 절벽의 표면에 매달려 있거나 거칠게 만든 사다리를 이용해 한 고도에서 다른 고도로 올라갔다. 비록 산비탈이 너무 가파라서 많은 숲이 자랄 수 없었지만, 길을 만드는 데 들인 노력의 상당 부분은 빽빽한 덤불을 베어내는 작업이었다.
우리가 오를수록 계곡의 전망은 점점 더 장엄해졌다. 나는 여기서 보여지는 것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하얀 급류가 우리 아래 1,829미터의 협곡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절벽이 너무 가파르지 않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곳에서는 가파른 경사면이 푸른 잎과 화려한 꽃으로 덮여 있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언덕 꼭대기에서 다른 경사면들이 우리 위로 1,829미터 더 올라가 사르간타이 산과 소라이 산의 빙하와 눈 덮인 정상으로 이어졌다. 멀리 우리가 볼 수 있는 곳까지 언덕, 계곡, 열대 정글, 눈 덮인 봉우리들의 미로가 마치 주문에 걸린 듯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작은 길 옆에서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을 때 이것이 우리의 보상이었다.
숨을 고른 후, 우리는 서쪽으로 길을 따라 더 많은 절벽을 따라 가고 다른 급류를 건너며 계속 갔다. 약 오후 2시경, 우리는 한 곶을 돌아 강 위 1,829미터에 있는 대담한 산봉우리 경사면에 있는 초케키라우 유적의 첫 모습을 보았다. 바깥쪽 언덕 꼭대기와 눈 덮인 산들과 연결된 능선 사이에 있는 움푹 들어간 부분이나 안장 부분이 테라스로 만들어지고 평평해져 잉카 요새의 더 중요한 건물들을 위한 공간을 남겼다.
오후 3시경 우리는 장엄한 폭포에 도착했다. 아마도 소라이 빙하에서 흘러나온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우리의 머리를 식히고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제 동료들을 멀리 뒤에 두고 정글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오후 4시 직전 가까운 곳에서 계단식 농경지가 보였다. 우리가 초케키라우에 혼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뜨려 하는 순간, 카세레스와 카스티요가 우리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인디오 짐꾼들과 다른 모험가들에게 더 많은 ‘용기’를 주려고 뒤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은 다음날 아침에야 도착했다. 우리가 식량과 담요를 의지하던 케추아 짐꾼들조차도 그랬다.
도착 직후 우리는 전망을 즐기기 위해 작은 평지로 힘겹게 올라갔다. 이곳은 분명 잉카인들이 한때 작물을 재배하던 곳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거대한 콘도르 한 마리에게 발견되었고, 그 콘도르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우아하게 점점 좁아지는 원을 그리며 내려왔다. 우리는 그의 잔인한 부리와 거대한 발톱뿐만 아니라 눈의 흰자위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겐 총도 없었고 공격을 막을 막대기조차 없었다. 날개 끝에서 끝까지 적어도 3.6미터는 되는 콘도르였기에 두려움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12미터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 우리를 방해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했고, 깃털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카세레스와 카스티요는 나중에 자신들이 이곳에서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콘도르들 때문에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짐꾼들이 나타나지 않아 우리는 작업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지은 작은 짚 오두막 중 가장 작은 것에서 불편한 밤을 보냈다. 그곳은 높이가 겨우 90센티미터, 길이가 1.8미터, 너비가 1.2미터 정도였다. 날씨가 따뜻했기에 등반을 최대한 쉽게 하려고 모든 따뜻한 옷을 벗어두었다. 텐트를 내려 따뜻함을 위해 둘러쌌고 마른 풀을 우리 주변에 쌓아올렸지만, 밤새 추위와 습기 때문에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다.
우리가 산에서 보낸 4일 동안 습도는 거의 100퍼센트에 달했다. 그 결과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짙은 안개나 비 속에서 보냈다.
[그림:
초케키라우 및 주변 지역, 페루
C. W. 드라이스데일 작성
1909년 2월 7, 8, 9, 10일
하이람 빙엄 박사와 클래런스 헤이 씨가
측정 및 촬영한 자료를 바탕으로
]
제23장
초케키라우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곧바로 측정을 시작하고 가능한 한 많은 사진을 찍었다. 유적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계단식 농경지와 자연 선반 위에 모여 있었고, 구불구불한 길이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부 건물은 길고 좁은 1층짜리였고, 다른 건물들은 1층 반에 높은 박공지붕을 가진 형태였다. 건물들은 가용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서로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땅은 경작되었을 것이다.
웅장한 절벽이 사방에서 유적을 지키고 있어 적들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엔지니어들이 열어두기로 결정한 곳을 제외한 모든 오르막길은 막혀 있었고, 모든 전략적 요충지는 정교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대담한 등산가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곳마다 잉카인들은 잘 다듬어진 석벽을 쌓아 모험적인 공격자가 의지할 곳을 없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계단식 농경지는 군사 방어와 가파른 언덕에서 토양이 농장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을 막는 이중 목적을 달성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유적은 세 개의 뚜렷한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건물은 수세기 동안의 고독 속에서 나무와 덩굴에 의해 크고 작게 가려져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를 위해 보물을 찾는 회사가 더 중요한 건물들을 덮고 있던 엉킨 식물들을 제거하는 훌륭한 작업을 해놓았다. 또한 보물이 묻혀 있을 만한 여러 곳에서 다이너마이트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작업자들은 금을 찾지 못했고, 우리가 아반카이에서 본 물건들 외에도 몇 개의 점토 항아리와 현재 안데스의 이 지역과 파나마 북부까지 사용되는 유형의 맷돌 2-3개 정도의 흥미로운 물건만을 발견했다.
남쪽 가장자리 절벽 꼭대기에는 강 바로 위 1,768미터 지점에 난간과 창문 없는 두 건물의 벽이 서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아푸리막 계곡의 위아래 전망은 언어로 적절히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장엄하다. 사진은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의 가장 희미한 아이디어만을 제공할 뿐이다. 거대한 협곡 아래로 멀리 아푸리막 강의 작은 모습이 보인다. 거리 때문에 좁아져 단순한 개울처럼 보이는 하얀 물줄기가 보호자 같은 산들 사이에 갇혀 있다. 계곡 곳곳에 놀라운 폭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높이가 610미터로 305미터 이상을 곧바로 떨어진다. 사방의 파노라마는 다양성, 대조, 아름다움, 장엄함에서 놀랍다.
이 외곽 건물군 북쪽에는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만든 언덕이 있다. 아마도 이 평평한 언덕 꼭대기에서는 계곡을 따라 위아래로 장엄한 전망이 펼쳐질 것이다. 이곳에서 신호용 불을 피워 아마존 밀림에서 접근하는 적들의 움직임을 쿠스코가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에 전달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언덕 꼭대기에서 작은 돌들이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을 따라 지면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무늬를 만들려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부분이 풀로 덮여 있어서 우리가 가진 시간 안에 그것을 스케치할 기회는 없었다.
전망대 북쪽, 그리고 그것과 주 능선 사이의 안부에 주요 유적군이 위치해 있다. 4.6미터 높이의 거친 요새가 작은 능선을 가로질러 한 쪽 절벽에서 다른 쪽 절벽까지 뻗어 있다. 용도가 불분명한 긴 단층 건물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묘하게 조각된 돌 고리들이 벽에 박혀 있어 아마도 포로를 가두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큰 홀이나 회의장 용도였을 것 같은 긴 단층 건물도 있는데, 그 벽에는 많은 벽감들이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박공 지붕이 아직도 서 있는 1층 반 높이의 집들도 있다. 박공 지붕의 사용은 잉카 제국의 중부와 남부 지역에서 거의 보편적이었다.
이 쌍둥이 건물들은 일반적인 건물 배열과 수직으로 서 있으며, 중앙 또는 칸막이 벽이 박공을 정확히 이등분한다. 이 벽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한때 서까래 상단을 지지했을 것이다. 이 건물들은 스퀴어가 설명한 오얀타이탐보의 잉카 건물 중 하나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층 반 높이로, 거친 돌을 진흙으로 쌓아 올리고 원래는 회반죽을 발랐으며, 중앙 벽이 박공 꼭대기까지 올라가 건물을 크기가 같은 두 개의 방으로 나누고 있다… 내부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는 없었던 것 같고, 박공 중 하나를 통해 위층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두 개 있다. 거기에는 평평하게 돌출된 돌 네 개가 있어 일종의 발코니나 플랫폼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사다리를 통해 접근했을 것이다.” 이 설명은 이 건물들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초케키라우와 스퀴어가 방문하고 묘사한 잉카 요새들 사이에는 다른 유사점들도 있다. 사실, 그의 피삭과 오얀타이탐보에 대한 설명 중 많은 문장들이 초케키라우와 그 주변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오얀타이탐보의 건물들처럼, 이곳의 건물들도 지붕만 없을 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2층 건물들의 외부 크기는 12.8m x 11.6m였다. 티티카카 호 북쪽의 비라코차 신전 근처에서 스퀴어가 측정한 유사한 건물들 역시 두 개의 동일한 크기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크기는 14m x 11.6m였다. 각 건물의 정면에는 두 개의 입구가 있으며, 모든 방의 내부는 불규칙한 벽감으로 장식되어 있고 일부에는 회반죽이 여전히 남아있다. 벽은 불규칙하지만 보통 두께가 0.9m이며, 다듬지 않은 용암 조각들을 단단한 점토로 접착해 만들어졌다.
전반적으로 모든 벽은 완전히 돌과 점토로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쿠스코의 잉카 궁전들과 비교하면 건축 방식이 매우 조악하고 거칠며, 어떤 두 개의 벽감이나 문도 정확히 같지 않다. 때때로 문의 상인방은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건축자들이 그 목적에 맞는 충분히 넓은 돌을 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인방 하나가 아직 서 있었는데, 목재는 매우 단단한 질감이었다.
아마도 오늘날의 유적은 짚으로 된 지붕으로 덮여 있을 때보다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잉카 건축의 특징적이고 일관된 요소인 장식용 벽감은 초케키라우의 모든 건물 내부와 일부 외부에서 볼 수 있다. 외부의 일부는 안쪽으로 들어간 형태다. 내부의 것들은 두 종류가 있다. 더 큰 것들은 높이가 약 1.5m로 방 바닥까지 내려오며, 문이 없는 단순한 벽장 같은 모양이다. 바닥은 약 86cm로 천장보다 약간 넓고, 천장은 약 71cm이며, 깊이는 33cm에서 41cm로 다양하다. 두 번째 종류의 더 작은 벽감들은 바닥까지 내려오지 않으며, 여러 건물에서 발견된다. 일부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되었고 아마도 색을 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좋은 증거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직에서 약간 밀려난 한 벽의 경우, 여러 벽감이 거의 완전히 회반죽 코팅을 유지하고 있었고, 벽의 더 보호된 부분들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존재하는 벽감 외에 집들이 가진 거의 유일한 장식은 지상 2.1m 높이에서 각 벽감 사이에 벽에서 30-36cm 정도 돌출된 직경 약 7.6cm의 원통형 돌 블록들이었다.
벽감 하나에서 나는 방추차의 작은 돌 회전추를 발견했는데, 크기와 모양이 오늘날 안데스 전역에서 인디언 여성들이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것과 비슷했다. 이 간단한 방적 도구는 새끼손가락 정도 크기의 막대기로, 길이가 25-30cm이다. 아래쪽 끝에는 나무로 된 회전추가 달려 있어 엄지와 검지로 윗부분을 잡고 돌릴 때 적절한 회전력을 준다. 이는 콜롬비아 안데스에서 칠레 안데스까지 인디언 여성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며, 양을 치거나 길을 걸으면서 이 오래된 물레를 사용하지 않는 여성을 보기 드물다. 리마 근처 파차카막의 무덤에서는 이와 유사한 돌 회전추가 달린 물레들이 발견되었다.
세 번째 건물군은 언덕 위쪽으로 더 올라가 있으며, 두 번째 그룹보다 30미터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 아래 광장에서 위쪽 광장으로 가는 길 근처에는 작은 수로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말랐지만 평평한 돌로 안을 댔다. 세 번째 그룹의 남동쪽 모서리에는 높이 6미터, 지름 3.7-4.6미터의 거대한 돌출 바위가 있다. 그 옆에는 동쪽 경사면을 향해 거대한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14개의 큰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략적으로 만들어졌고 크기가 다양했다. 평균 폭은 약 4.6미터이고, 단 높이는 1.4미터, 깊이는 약 2미터였다. 거대한 단의 한쪽 끝이나 다른 쪽에 세워진 작은 돌 계단을 이용해 이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양쪽에 0.6미터 너비의 벽이 난간 역할을 했다. 이 구조물의 특이한 점은 각 단의 높이 중앙에 거대한 평평한 돌을 배치한 것이다. 이 계단에서 동쪽으로의 전망이 특히 아름다웠다. 아마도 잉카의 주신인 떠오르는 태양을 여기서 숭배했을 것이다.
계단 너머에는 테라스, 골목길, 벽, 그리고 벽감과 창문이 있는 1층 반 높이의 집들이 있었다. 첫 번째 테라스의 길이는 61미터가 조금 넘고 높이는 3.7미터였다. 그 위의 두 번째 테라스는 높이가 3미터이고 길이는 39미터였다. 이 위에는 벽에 벽감이 있고 테라스를 내려다보는 창문이 있는 두 개의 긴 골목이나 홀이 있었다. 이 홀들의 폭은 1.5미터였다. 이들 뒤에는 아래 그룹의 건물들과 구조가 비슷한 건물들이 있었다. 이 건물들 역시 불규칙한 벽감과 원통형 돌 돌출부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이 집들 아래에는 폭 30센티미터, 깊이 25센티미터의 작은 통로나 배수로가 있었다. 이 두 채의 집은 거칠게 지어졌지만 가능한 한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그 사이로는 뒤쪽 골목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이 통로는 두께 1.3센티미터의 슬레이트 판으로 특이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정면에 창문이 있고 뒤쪽 언덕 쪽에 벽감이 있는 1.7미터 너비의 또 다른 홀이 있었다.
상부 그룹의 박공지붕은 하부 그룹보다 더 가파르고 실제로 네덜란드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 뾰족했다. 상부 그룹의 두 박공 건물은 경사면에 서 있어서 가파른 쪽에는 박공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 건물들은 아래 이중 주택의 절반 크기였다.
이 집들은 거의 모두 2~3개의 작고 조악한 창문이 있었다. 좁은 돌계단이 뒷골목에서 위쪽 테라스로 이어졌다. 이 테라스는 서쪽 절벽을 내려다보는 여러 건물이 있는 상부 광장으로 열려 있었다. 두 집에는 창문이 없었고 그중 하나에는 3개의 방이 있었다. 페루 사람들은 이곳이 죄수를 가두는 데 사용되었다고 말했다. 더 가능성 있는 것은 창고였을 것이다. 광장 북쪽에는 세심하게 지어진 작은 구조물이 있었는데 많은 벽감과 구석이 있었다. 이곳은 ‘태양의 처녀’를 가두는 곳이었거나 잉카의 법에 따라 절벽에서 떨어뜨려질 운명의 범죄자들이 운명을 기다리는 장소였을 수 있다. 평면도를 보면 불규칙한 구조를 잘 알 수 있다.
그 위로 언덕 경사면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능선 정상을 따라 작은 수로가 있었다. 우리는 이를 따라가다 가파른 언덕 기슭의 울창한 열대 정글로 들어갔다. 이제는 말라버린 이 작은 수로의 물은 능선을 따라 곧장 내려와 테라스를 지나 광장 북쪽의 잘 포장된 두 개의 저수조로 흘렀다. 거기서 광장을 가로질러 남쪽의 작은 저수조나 욕실로 흘러갔다. 이 욕실은 길이 3미터, 너비 1.5미터였고 높이가 1.5미터를 넘지 않는 낮은 벽이 있었다. 북쪽에는 60센티미터 x 90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석조 욕조가 바닥에 파여 있어 벽 가장자리로 흐르는 물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욕조 끝에는 작은 배수구가 있어 물이 욕실이나 저수조 바닥 밑으로 흘러 아래쪽 건물들로 내려가는 능선을 따라 계속 흐를 수 있었다.
초케키라우 능선의 서쪽 경사면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그쪽에는 거의 요새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쪽 경사면은 그만큼 가파르지 않았다. 이쪽에는 길이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테라스를 만들어야 했고, 그 앞면에는 수직 벽을 3.6미터 두께로 쌓았다. 두 개의 좁은 포장 계단이 한 테라스에서 다른 테라스로 이어졌다.
테라스 근처에서 나는 내 주먹만한 크기의 볼라나 망치돌을 주웠다.
맨 아래 테라스 바로 밑의 정글에서는 절벽과 거대한 바위 밑에 작은 동굴을 파서 시신의 뼈를 안치했다. 나는 뼈들이 작은 더미로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마치 안치하기 전에 깨끗이 씻은 것 같았다. 뼈 위에 흙을 덮지는 않았지만, 한 무덤의 작은 뼈무덤 위에서 지름 2.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손잡이는 없었고 윗부분은 열려 있었지만, 지름 6밀리미터의 구멍에 특별히 잘 만든 구멍 뚜껑이 끼워져 있었다. 항아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매장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똑바로 서 있었다. 동굴의 자연스러운 입구는 안쪽에서 쐐기 모양의 돌로 막아 앞에서 들어가기 매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나는 거대한 바위 한쪽을 조금 파내면 무덤 파는 사람이 뼈를 안치한 후 놓아둔 돌을 쉽게 치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인부들은 십여 개의 돌출된 절벽 밑을 발굴했고 매번 뼈와 때때로 도자기 조각을 발견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죽은 자가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음을 나타내는 가치 있는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들은 평범한 병사와 하인들이었을 것이다. 만약 수비대의 장교나 잉카 귀족이 이 근처에 매장되었다면, 그들의 무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오래전에 도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
테라스 아래의 눈에 띄게 큰 바위들은 모두 무덤을 덮고 있었다. 두개골은 단독으로 발견되지 않고 항상 나머지 골격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큰 뼈들은 꽤 좋은 상태였지만 가장 작은 뼈들은 완전히 분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비뼈는 자주 발견되었다. 일부 큰 뼈들은 손가락으로 부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부패했지만, 다른 것들은 매우 단단하고 잘 보존된 것 같았다. 두개골도 마찬가지여서 일부는 부패해 손가락으로 쉽게 부술 수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하얗고 단단했다. 우리가 발견한 모든 것은 성인의 것이었지만, 그중 한두 개는 20세를 겨우 넘긴 것처럼 보였다. 관찰한 바로는 유해 위에 흙을 덮지는 않았다.
케추아 원주민 짐꾼과 인부들은 우리의 작업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지만, 우리가 뼈를 주의 깊게 측정하고 조사하기 시작하자 겁에 질렸다. 그들은 그때까지 우리 탐험의 목적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지만, 이제 모든 의심이 사라졌고 우리가 떠난 잉카의 영혼들과 교감하러 왔다고 결론지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표본에서 두개골 변형의 증거는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뒤쪽이 많이 편평했고 다른 하나는 앞쪽이 극도로 편평했다. 두개골이나 뼈의 어느 부분에서도 천공이나 장식 패턴의 흔적은 없었다. 내가 여기서 발견한 다른 물건들과 함께 세 개의 두개골은 현재 뉴헤이븐의 피바디 박물관에 있다.
테라스와 무덤 남동쪽의 가파른 언덕에서 우리는 숲에 완전히 덮인 덜 중요한 많은 유적을 발견했다. 만약
아무리 다이너마이트를 써도 초케키라우에서 ‘황금 요람’이나 귀한 물건들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은 사원이나 보물 창고가 아니라 힘겨운 삶이 있었던 요새였다. 이곳 수비대 장교들은 금 장식이나 귀중품을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고, 가난한 잉카인들은 말년에 그런 장신구를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황금 요람’이라 불렸을까? 한 가지 답은 초케키라우가 있는 산등성이나 돌출부가 멀리서 보면 해먹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석양에 종종 황금빛으로 물들고 낭만적인 잉카인들은 그들이 아는 유일한 요람과 닮았다고 해서 초케키라우라고 이름 붙였을 수 있다. 다른 답은 내가 아는 한 어떤 연대기에도 나오지 않는 이 이름이 현대의 창작이라는 것이다. 한 건물에서 우리는 방문객들이 이름을 새긴 몇 개의 슬레이트 판을 발견했다. 이 명단에 따르면 초케키라우는 1834년에 프랑스 탐험가 유진 드 사르티주가 방문했고, 1834년 7월에는 두 명의 페루인 호세 마리아 데 테하다와 마르셀리노 레온이 방문했는데, 이들은 드 사르티주와 함께 왔을 수도 있다.
샤를 비네는 그의 매우 신뢰성 없지만 흥미로운 책 ‘페루와 볼리비아’(파리, 1880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294페이지 각주). “초케키라우는 또 다른 프랑스인 앙그랑 씨가 방문했는데, 그의 원고와 도면, 그림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나는 그것들이 단지 대충 그린 스케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1847년 9월 30일자로 된 경로 지도다. 앙그랑의 이름은 어떤 슬레이트에도 나오지 않는다.
드 사르티주와 앞서 언급한 두 페루인 외에도, 슬레이트 기록에 따르면 1861년 11월 10일에 호세 베니그노 사마네스(“카스티야 대통령을 위해”), 후안 마누엘 리바스 플라타, 마리아노 시스네로스가 유적에 도착했다. 또한 1885년 7월 4일에는 루이스 E. 알만사, J. 안토니오 알만사, 에밀리아노 알만사, 피오 모그로베호와 일꾼들이 매장된 보물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상이 이전 방문자들에 대한 현존하는 증거다.
드 사르티주는 E. 드 라반데라는 필명으로 1850년 6월 ‘르뷰 데 되 몽드’지에 그의 방문 기록을 게재했다. 당시 그가 택한 유일한 경로는 매우 우회적이었다. 라 에스트레야 사탕수수 농장 근처의 마을인 모예파타에서 출발해 사르간타이 산과 소라이 산 사이의 높은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가서 우루밤바 강에 이르러 유아트키니아(와드키냐[?])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초케키라우까지 길을 내기 위해 원주민들을 고용했다. 3주 후 그는 길을 내는 일이 너무 어려워서 최소한 2개월은 더 걸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와 일행은 4일 동안 정글과 절벽을 따라 최선을 다해 나아갔다. 5일째 되는 날 그들은 유적에 도착했다. 탐험 계획을 세울 때 그는 수세기 동안 잉카 문명의 흔적을 덮어온 열대 식물을 고려하지 않았고, 초케키라우에 2-3일밖에 머물 수 없어서 가장 흥미로운 유적 중 일부를 보지 못했다. 거대한 계단과 상부 광장의 건물들은 그의 주의를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그는 하부 광장 남쪽의 요새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를 ‘승리의 벽’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 벽 뒤에서 보물을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는 이곳에서 8일을 보낼 계획이었지만, 도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그곳은 매우 컸고 식량은 너무 부족해서 그는 하층 광장의 건물들과 낮은 단의 계단식 밭, 그리고 한두 개의 무덤만 보고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그의 추정으로는 한때 1만 5천 명이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 궁금하다.
사르티게스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보물 탐사단의 노고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들이 정글을 뚫고 들어가 건물들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몬디에 따르면 1862년 페루의 여행가 후안 가스텔루가 아야쿠초를 떠나 카누를 타고 아푸리막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요새에 도달하려 했다고 한다. 7일간의 위험한 항해 끝에 그는 요새 부근에 도달하기도 전에 포기했다.
흥미로운 의문이 남는다. 이곳이 마지막 잉카의 최후 피난처였을까?
정복자들의 분노를 피해 도망친 마지막 황제 만코 카팍이 ‘빌카밤바’라는 곳에 피신했다는 것은 상당히 확실하다. 초케키라우에서 산을 넘어 2-3일 거리에 그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는데, 우루밤바 강의 지류인 빌카밤바 강변에 있다. 내가 아는 한 그곳은 아직 탐사되지 않았다.
파스 솔단과 위대한 지리학자 라이몬디 같은 페루 작가들은 만코 카팍의 ‘빌카밤바’가 사실은 초케키라우였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1566년 아우구스티누스 수사 마르코스 가르시아가 불쌍한 만코 카팍이 피난처를 찾은 ‘빌카밤바’에 침투하려 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카란차 신부는 그의 여행을 설명하면서 “산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도덕적 연대기, 제3권 24장과 42장”에서 가르시아가 푸쿠라에 교회를 세웠다고 말한다. 푸쿠라는 “빌카밤바에서 이틀 길”이라고 한다. 라이몬디는 푸쿠라가 현재의 ‘빌카밤바’ 마을에서 겨우 2리그(약 8km) 떨어져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카란차 신부가 실수로 ‘_일 여정_’ 대신 ‘_리그_’라고 썼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푸쿠라에서 실제로 이틀 거리인 초케키라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적어도 매우 우회적인 추론 방식이다.
라이몬디의 견해가 옳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현재의 빌카밤바 마을과 그 주변을 탐사하기 전까지는 초케키라우는 단순한 요새였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 * * * *
위의 글을 쓴 후 하버드 대학의 롤란드 딕슨 교수의 호의로 저명한 페루 역사학자 카를로스 A. 로메로의 “초케키라우의 유적”이라는 제목의 팸플릿 사본을 받았다. 이 팸플릿은 초케키라우에 대해 언급한 모든 작가들의 저작을 꼼꼼히 조사한 결과를 담고 있지만, 유적의 초기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실제 지식을 더해주지는 않는다.
제24장
아반카이에서 친체로스까지
우리가 초케키라우 방문을 결정한 조건 중 하나는 지사가 우리가 돌아오는 대로 출발할 수 있도록 동물들을 준비해두고, 도로변의 관리들이 우리의 여정을 최대한 편하게 해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의 명예를 위해 말하자면, 그는 남미인은 좀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모든 책의 규칙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아반카이로 돌아온 다음날, 우리는 짐을 다시 정리하고 아야쿠초로 빠르게 이동할 준비를 했다. 지사는 초케키라우 유적에 대한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라틴 아메리카인이 아닌 나로서는 한 시간 반 만에 “철저하고 만족스러운 공식 보고서”를 써낼 수 없었고, 현장 노트의 데이터와 120장의 네거티브에서 계획을 그리는 데 며칠, 심지어 몇 주가 걸릴 것이라고 설명해야 했다.
다음 날 우리는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여정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20여 명의 열정적인 친구들이 마을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그들은 관례적인 “예의의 1마일”을 12마일(약 19km) 이상으로 연장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축하 전보를 보내 우리의 여정을 격려했다.
우리 일행은 비가 오지 않는 상쾌한 아침에 신나게 마을을 빠져나갔다. 이얀야에서 잠시 멈춰 지난주에 우리에게 즐거운 연회를 베풀어준 레토나 가족에게 인사를 드렸다. 젊은 주인이 즉시 말에 안장을 얹고 자신의 사탕수수 밭을 지나는 지름길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고집했다. 밭은 꽤 번성해 보였지만, 방금 나타난 메뚜기 떼를 가리키며 작물이 크게 걱정된다고 했다.
10시에 우리는 아푸리막의 첫 번째 큰 지류인 파차차카 강에 도착했다. 250년 전 예수회 건축가의 지휘 아래 세워진 웅장한 단일 아치의 돌다리를 건넜다. 안데스에서 가장 긴 경간 중 하나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잔씩 마시며 경치를 즐겼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양쪽의 푸른 산들 사이로 사탕수수 밭이 펼쳐진 계곡이 있고, 그 가운데로 우렁찬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이 계곡을 따라 몇 마일 더 올라가면 수크레 장군이 아야쿠초 전투 몇 주 전에 본부를 두었던 작은 인디오 마을들이 있다.
한 시간을 힘차게 달려 아우키밤바에 도착했다. 이곳은 돈 페데리코 마르티넬리가 소유한 설탕 공장과 농장이다. 그는 불행히도 병상에 누워 있어 우리를 만날 수 없었지만, 그의 기술자와 관리인이 매우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예상보다 12명이나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러운 점심이 준비되는 동안 우리의 식욕을 달래기 위해 맛있는 오렌지가 한가득 나왔다.
점심 후 우리는 모두 즉시 말에 올랐다. 이 고도 2100m에서는 낮잠을 자는 습관이 없는 것 같다. 모두가 말에 올랐을 때 정감 어린 작별 인사를 해야 했고, 일부 말들이 예민해서 불안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수들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스페인 특유의 열정으로 떠나는 손님들을 환송하는 데 성공했다.
아우키밤바에서 출발한 우리 일행의 길은 매력적인 풍경이 이어졌다. 점차 계곡을 벗어나 해발 3,566m의 고개를 넘었다. 그곳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지만 열대 식물은 보이지 않았다.
리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노새와 말, 당나귀가 아구아르디엔테 술통과 설탕을 나르고 외국 상품을 들여오는 짐승들이었다. 우기 덕분에 들판은 꽃으로 뒤덮였다. 우리 집 정원에 심은 많은 품종의 꽃들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큰 베고니아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컸다. 루핀과 코스모스 등 다양한 꽃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고, 끔찍한 도로 상태를 어느 정도 만회해 주었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모든 사람들은 이 시기에 여행을 하는 우리에게 놀라워했다. 모든 페루 사람들이 집에 머무를 때 우리는 길을 나선 것이다. 도로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폭우로 인해 매일 흠뻑 젖게 된다. 아주 두꺼운 고무 판초로 보호받지 않는 한 말이다. 현지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양모 판초에 의존한다. 가장 좋고 비싼 비쿠냐 판초는 아름답고 촘촘하게 짜여 있어 보통의 소나기는 막아낼 수 있지만, 2-3시간 타고 나면 흠뻑 젖게 된다.
오후 4시 30분에 우리는 아름다운 우안카라마 계곡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은 가파르고 길은 미끄러웠다. 우리는 내려가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해서 계곡을 달려 올라오는 8명의 기병 무리를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사가 친절한 도지사의 연락을 받고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친구 여섯 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그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작은 흙벽돌 오두막이었지만 정중하게 대접받았다. 마을 사제와 유력 인사 두 명에게 우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라고 권했고, 그들은 흔쾌히 응했다. 식사 후 우리는 진흙탕 거리를 지나 광장으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정부 용도로 사용되는 방 한 칸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다음날 아침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도지사가 제공한 짐승 중 하나가 초케키라우 원정을 위해 도 장관에게 빌려준 것이라며 더 이상 가져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친구 중 한 명”이 그날 우리에게 빌려줄 수 있는 훌륭한 말이 있다고 했다. 도지사는 단호했고, 이미 그 짐승을 목초지로 보냈기에 법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그의 “친구의 말”을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도지사와 그의 “친구” 사이에 어떤 약속이 있는 것 같았다. 꽤 괜찮아 보이는 말이 도지사의 뒷마당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친구”가 아마도 부패의 공모자이거나 실제로는 하인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하루 동안 그 말을 빌리는 데 5달러를 요구했다. 분명 우리를 “호구”로 여긴 것 같았다. 우리는 호위병으로 보내진 군인에게 호소했지만, 그는 슬프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지사에게 그 가격은 터무니없으며, 차라리 우안카라마에 정착해서 그의 비용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이런 끔찍한 대안에 직면한 그는 하인을 다른 “친구”에게 보내 다른 짐승을 데려오라고 했다. 이번에는 1달러만 요구했고, 군인은 그것도 정상 가격의 두 배라고 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지체되는 것보다는 그 돈을 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왔다.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합법적인 착취” 시도가 실패해서 실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도지사는 친구들을 모아 우리를 배웅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16명의 기병대에게 진심 어린 이별의 인사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 인사는 두세 번 하면 자발성과 진정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도로 상태는 전날과 다를 바 없었다. 비와 진눈깨비를 맞으며 오랫동안 올라가고, 구름 속을 지나 핀코스 강 계곡으로 오래 내려갔다. 강의 요란한 소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장관을 실감하게 했다. 잠깐 초록 들판이 보이더니, 허름한 마을과 낡은 다리가 나타났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마침내 황량한 고원에 도착했다. 차가운 바람과 폭우로 우리는 불편함의 극치를 경험했다.
오후 4시 직전, 우리는 제법 큰 마을을 보고 기뻐했다. 목적지인 안다우아이라스일 거라 기대했지만 호위병은 그저 안다우아이라스의 외곽인 산 헤로니모라고 했다. 전형적인 인구 밀집 원주민 마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마을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20명의 기병대가 우리를 에워쌌다. 안다우아이라스의 부지사와 도 서기,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온 것이다. 그들의 예의와 가져온 음료에 감사했지만, 우리는 말에서 내려 군인들이 우리 안장을 새 말에 옮기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했다. 폭우가 그쳐서인지, 아니면 지친 말 때문에 모든 감각을 잃어서인지, 혹은 정말로 그 두 마리가 페루 최고의 말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둘 다 안다우아이라스까지 남은 1마일을 그토록 즐겁게 탄 적이 없다고 동의했다. 그 말들은 청동상이나 역사화에서 볼 법한 볼리바르 장군의 고삐 높은 군마와 흡사했다.
안다우아이라스의 친절한 사람들은 전보로 아반카이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진 만찬” 소식과 도지사가 초케키라우에서 돌아온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뒤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그들의 열정에 불을 지필 만한 추가적인 이유가 필요했다면, 그날의 신문 보도가 그 역할을 했다. 보도에 따르면 칠레는 타크나와 아리카 지역을 영구히 점령하겠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페루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1883년 칠레 정복자들의 잔혹한 채찍질을 경험하고 리마 도서관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으며 칠레 군마들이 페루 교회에 마구간을 차리는 것을 본 구세대 페루인들의 생각으로는 분쟁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희망도, 또 다른 전쟁을 벌일 의지도 없는 듯했다. 그들의 유일한 생각은 공정성을 사랑하는 미국이 칠레가 페루의 약점을 이용해 남부 지역을 강탈하지 못하도록 막아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유일하게 눈에 띄는 미국인이었고, 우리 주변에 관리들의 후광이 감돌았기에 우리는 외교관처럼 대우받았다. 사실 그들도 잘 알듯이 우리는 과학 회의에 참석한 대표와 그의 ‘비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아반카이의 영광을 능가하는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식탁은 45명분이 차려졌고 안다우아일라스의 주요 인사들 대부분이 참석했을 것이다.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작은 성조기가 페루 국기와 엑스자로 교차되어 벽에 걸려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레기아 대통령의 초상화가 적절하게 액자에 담겨 우리 바로 뒤 벽을 장식했다. 치이우아 눈산에서 라마 등에 실어온 눈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메뉴에 포함되었다. 음식과 술은 새벽 2시 30분까지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일찍 자리를 떠야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받은 ‘접대’로 완전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인들은 다음날 아침 늦게 방문했고 꽤 우울해 보였다. 이는 비가 쏟아지는 탓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부지사는 매우 친절했고, 우리가 모든 식사를 그의 집에서 하도록 했다. 그의 집은 대형 안뜰을 중심으로 1층과 2층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림 같은 옛 건물이었다. 무거운 구식 미션 타일로 된 지붕은 오래 전에 직선이란 걸 잃어버렸다. 게다가 비와 햇빛, 이끼가 더해져 온갖 색깔을 띠고 있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안뜰 한쪽에서는 인디언 하인과 어린 소녀가 초케키라우 건설자들이 사용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돌을 이용해 같은 방식으로 한 돌을 다른 돌 위에 굴려 곡식을 갈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우리 친구들의 기분이 좀 나아졌고, 비도 잠시 그쳐서 우리는 마을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아반카이 다리를 지은 것과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균형 잡힌 석조 교회는 250년 전 예수회가 이 나라에 가르친 뛰어난 기술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광장의 일부 가게는 매우 그림 같았는데, 판매용 색색의 상품들이 우산 모양의 차양 아래 놓여 있었다. 이 차양들은 낡은 막대기들로 대충 만들어 바랜 판초나 털이 붙은 채 말린 동물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누군가가 미루나무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강 건너편 언덕에서 본 마을 전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북쪽 산비탈에는 많은 농장이 있었다. 울타리로 구분된 옥수수밭들이 매우 아름다운 배경을 만들었고, 작은 강의 포효하는 여울이 전경을 이뤘으며, 중간 거리에는 붉은 기와 지붕과 하얀 벽, 미루나무들, 그리고 아름다운 옛 석조 교회가 매력적인 그림을 만들어냈다.
부지사와 그의 비서는 자신의 매우 편안한 숙소를 우리에게 내어준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며 최근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두 개의 새 산책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진보의 징후들을 기억하는 것도 좋지만, 산책로를 떠난 후 지나야 했던 작은 옛 거리도 기억난다. 새 보도만큼 넓지도 않은 이 옛 거리에는 보행자를 위한 편의 시설이 전혀 없었다. 최근의 폭우로 인해 일부가 연못으로 변해 있어서, 우리는 재미있고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마른 발로 건너려고 애썼다.
우리 친구들은 모두 다음날 아침 우리를 배웅하러 나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 없다고 거듭 말했다. 그들이 깨어나 보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어서 우리 말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부지사는 폭우를 뚫고 작별 인사를 하러 왔지만, 여전히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며 말을 타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의 명령으로 안다우아일라스를 떠난 지 30분 만에 지나간 인근 탈라베라 마을의 군수가 우리와 동행했다.
탈라베라는 최고급 비쿠냐 판초 제작으로 유명했다. 스키어들은 이곳에 대한 나쁜 평판을 듣고 주민들의 험악한 표정에 놀랐지만, 우리는 내륙의 다른 붐비는 작은 마을들과 달라 보이는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가능한 곳은 어디든 땅이 점유되어 있었다. 사실 스페인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 페루에 훨씬 더 많은 인구가 살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일부 관개용 수로가 파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지역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페루 인디언들이 “2세기 만에 3천만 명 이상에서 3백만 명으로 줄었다”고 믿는 작가들은 스페인 연대기의 과장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나라는 실제로 오늘날 그 자원이 허용하는 만큼 인구가 많다. 사실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항상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인카 법과 관습으로 그들의 거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며 광범위한 경작을 강요했을 때조차도, 이 황량한 고원에서 두 배는커녕 열 배나 많은 인디언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위 글을 쓴 후 반델리에 교수의 훌륭한 책 “티티카카와 코아티 섬들”을 읽었는데, 그가 27쪽에서 말한 내용을 보니 기뻤다. “적어도 그 지역(추쿠이토)의 인디언 인구는 스페인 식민 초기 이후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증가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페루 원주민들을 절멸시켰다는 야단법석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페루와 볼리비아 전역에서 이와 같은 예를 쉽게 더 들 수 있을 것이다.”
내 아마추어적인 의견이 이렇게 뜻밖에 그리고 이렇게 높은 권위로부터 입증되어 기뻤다.
모든 집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장미 꽃잎을 뿌렸다. 우리가 광장에 들어서자 길모퉁이를 돌 때부터 울리기 시작한 교회 종소리가 더욱 요란해졌고, 함성은 더욱 커졌으며, 우리는 거의 군중들의 어깨에 실려 말에서 내려졌다. 우리는 우리의 도착을 축하하는 분위기를 완벽히 이해했고, 그것이 단순히 우리가 그 위대한 나라의 공식적인 화신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미국에 대한 진심 어린 선의의 표현임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겨우 얼굴을 똑바로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마침내 작은 지역 클럽에 속한 편안한 방에 자리를 잡은 후에야 군중이 흩어질 줄 알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중 한 명이 연설을 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 연설은 아무리 허약하게 전달되었다 해도 큰 열광으로 받아들여졌다. 더 많은 장미 꽃잎이 뿌려졌고, 종은 다시 울렸으며, 깃발은 흔들렸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우리는 개선 장군이 되어 “정복자 영웅이 돌아왔다!”라는 노래를 듣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알게 되었다.
클럽을 설립한 작은 친체레뇨 그룹은 그날 저녁 우리에게 만찬을 베풀었다. 그들은 아반카이와 안다우아이라스에서 열린 축하 행사를 능가하기로 결심했지만, 바깥에서의 축하는 완전히 자발적이었고 인디오들이 클럽에서 계획한 것을 스스로 개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날 저녁 만찬 후에는 불꽃놀이가 있었는데, 한 가난한 인디오가 들고 있는 막대기에 고정된 세트 장치로 이루어졌다. 그는 사방으로 떨어지는 불꽃 세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의 위험을 연장하기 위해 비가 계속해서 도화선을 꺼뜨려 여섯 일곱 번이나 다시 불을 붙여야 했다. 하지만 그가 고통을 느꼈다면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오히려 관심의 중심이 된 것에 너무나 기뻐하는 것 같았다.
이 축하 행사에는 이상한 목격자가 있었다. 다리 근처에서 우리를 환영한 군중 속에는 독일인 특징을 가진 초췌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영어로 “미국 만세!”라고 외쳤다. 그는 곧 우리를 방문해 꽤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에밀리오 스미스(또는 슈미트)이며 고향은 라인강의 뒤셀도르프라고 말했다. 세 명의 동료와 함께 그는 뉴욕에서 돈도 없고 구걸도 하지 않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 대륙을 가로질러 뉴욕시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내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뉴욕 헤럴드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프렌사가 그들이 그 위업을 달성하면 5천 달러의 상금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를 횡단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지만, 볼리비아에 도착한 직후 투피사에서 그들 중 한 명이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세 명은 우리가 투피사에서 포토시까지 따랐던 길과 거의 같은 길을 따라 안토파가스타 철도까지 직접 갔다. 각 장소에서 그들은 말을 타지 않고 구걸하지도 않았다는 공식 증인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들은 공정하게 육로 여행을 했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강연과 공연을 열어 돈을 모았고, 자주 친절한 원주민들에게서 식사와 숙소를 제공받았지만 무례한 대접을 받은 적도 많았다. 그들은 티티카카 호수를 일주하고 쿠스코에 도착했으며, 리마로 가는 옛 길을 따라 해안을 따라 올라가 에콰도르의 적도 우림 지대까지 들어갔다가 재난을 맞았다. 수개월간의 노출로 허약해진 그들은 열대 열병을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모두 곧 쓰러졌다. 그중 두 명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에콰도르에 묻혔다. 혼자 남은 스미스는 뉴욕 헤럴드 신문사에 전보를 보내 혼자서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하고 자금도 없다고 하며 지시를 요청했다. 답신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가라.”였다. 그는 에콰도르와 콜롬비아에서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낙담했지만, 지나온 길이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때 헤럴드와 프렌사 신문사가 그의 무모한 여행에 대해 보상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발걸음을 되돌려 정오에 칭체로스에 도착했다. 오후에 더 가려고 했지만 두 명의 미국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만찬에 초대받아 머물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울했지만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자신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였다. 유일한 슬픔은 친구들을 잃은 것과 우리가 그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뭐라고요? 저에 대해 모르세요? 저는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뉴욕까지 갑니다. 거기까지는 못 갔지만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갑니다. 저에 대해 못 들어보셨다고요? 걸어서 여행하는 에밀리오 스미스를 모른다고요? 정말 이상하군요. 아반카이의 지사는요? 그는 좋은 사람인데. 저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요? 제 사진을 보여주지 않았나요? 저와 제 두 친구의 사진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정말로 아반카이에 가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가엾은 사람, 수개월 동안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주며 살아왔는데, 그가 몇 달 전에 지나간 길을 따라온 유일한 미국인들이 그의 육로 여행에 대해 전혀 언급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걸어서 여행했다. 원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걸어서 여행하지 않는다. 가난이나 방랑벽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한 누군가가 도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방랑자들은 너무 흔해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그에 대해 다시 듣지 못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25장
봄본에서 아야쿠초 전투장까지
다음날 아침 우리는 친절한 주인들로부터 신선한 말을 제공받았고, 그들 중 5-6명과 함께 아름다운 칭체로스 계곡을 벗어나 팜파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봄본 고지로 올라갔다. 1824년, 리마로 가는 이 길을 따라 행군하던 수크레 장군 휘하의 애국군이 라 세르나 휘하의 왕당파와 마주쳤다. 각 군대의 전위대가 11월 20일 봄본 고지에서 만났다. 왕당파는 계곡으로 밀려 팜파스 강을 건넜다.
강 수준에 도달한 후 우리의 길은 팜파스를 따라 북쪽으로 한동안 미모사 나무와 선인장 숲 사이로 이어졌다. 이곳은 모기가 유명한 곳이며 주변에 말라리아가 많다고 한다. 고도는 약 1,830미터다.
팜파스 계곡에 대한 내 관심은 나무와 선인장에 붙어 있는 흰 육지 달팽이를 발견하면서 크게 높아졌다. 그중 일부는 내가 소년 시절 오아후 섬의 아름다운 계곡에서 모았던 나무 달팽이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주머니를 가득 채웠고, 나중에 저녁 시간에 주인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달팽이 껍질을 청소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내 수고는 충분히 보상받았다. 달팽이들 중에는 미국 국립 박물관 연체동물부의 큐레이터인 달 박사가 이름을 붙이고 설명한 세 가지 새로운 종이 있었다.
팜파스 강의 다리는 오랫동안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수직 절벽 아래에서 다리로 접근한다. 주변 경관은 아푸리막만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장관이다. 다리 길이는 약 45미터이며, 1909년 2월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강 위로 15미터 높이에 있었다. 스키어의 책에는 옛 다리의 사진이 두 장 있는데, 비록 잉카인들이 용설란 섬유로 만든 옛 케이블은 와이어 로프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노새들 입장에서는 이 길의 가장 반갑지 않은 부분이다.
우리 노새 중 한 마리는 도저히 다리를 건너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밀고 당기고 때리고 소리를 질러도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가리고 앞다리 각각에 줄을 묶었다. 뒷다리는 걷어차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었고, 앞다리에 묶은 줄을 번갈아 당겨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강제로 다리에 올라 3분의 1 지점까지 끌고 갔다. 그런 다음 줄을 풀고 눈가리개를 벗겼다.
우리는 그가 돌아서서 가까운 쪽으로 도망갈 줄 알았지만 너무 겁에 질려 그런 짓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순종적이 되어 평화롭게 여행을 마쳤다.
다리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칭체로스의 신부는 그날 아침 방문 성직자가 도착해 우리와 동행하지 못하다가 여기서 우리를 따라잡았다. 그는 건장한 원주민이었지만 다소 뚱뚱했고 자신의 노새를 누군가에게 맡겨 건너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원주민 짐꾼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리는 구조물을 건너기를 선호했다.
다리 반대편에서 우리는 가파른 절벽을 좁은 굽이진 길로 올라가 높은 단구에 도착했다.
진취적인 파로디 형제들이 출렁이는 사탕수수 밭을 일구어놓았다.
여기서 우리는 탐비요의 군수와 파로디 형제들을 만났다. 그들은 우리를 파호날의 제당 공장으로 안내했다. 절벽 아래 계곡에 자리 잡은 매력적인 농장이었다. 우리의 주인들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에너지와 기술을 물려받았다. 그의 노력 덕분에 좋은 관개 수로가 건설되어 사탕수수 밭에 풍부한 물을 공급했다. 집들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번영의 징후를 보였다. 이 황량한 지역에서 이런 진취성과 활력의 증거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한 형제는 보통 리마에서 의술을 행하는데, 여기 방문 중이었다. 다른 형제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파호날을 떠났다. 탐비요의 군수가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는 독일계 페루인으로 매우 호감 가는 사람이었다. 파호날에서 길은 작은 계곡을 오르다가 산비탈을 타고 오크로스 마을에 이른다.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이곳은 매우 황폐하고 비참한 곳이었다.
친체로스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어도비 벽돌로 지어진 교회가 광장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고, 주위에는 새로 어도비 벽돌 담장을 둘렀다. 이 담장을 만들기 위한 흙은 광장에서 바로 퍼간 것 같았다. 남겨진 거대한 구멍들을 메우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오크로스에서 어느 정도 관리가 되고 있는 듯한 유일한 건물은 지역 전신국이었다. 우리와 동행한 아야쿠초 출신 장교가 지사에게 전보를 보내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도중에 우리는 이 나라의 특이한 전선 설치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전선공들은 한 언덕 꼭대기에 기둥 세 개를 함께 세우고 다음 세 개는 400미터도 더 떨어진 다른 언덕 꼭대기에 세워 그 사이를 공중에 전선을 매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기둥을 아낄 수 있을 때마다 그렇게 했다. 전선에 가해지는 장력이 엄청났을 것이다. 우리는 “서비스가 자주 중단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크로스에서 올라가는 길은 우리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최악의 길이었다. 사실상 산간 개울 바닥이었고 우리 동물들은 바위와 돌덩이 사이를 헤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이 정말 쿠스코와 리마를 잇는 대로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도로”는 점점 더 나빠져 해발 4,000미터의 황량한 고원에 이르렀다. 거기서 강풍에 실려 얼굴로 날아오는 눈과 우박, 진눈깨비가 우리의 불편함을 더했다. 산맥 반대편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는 길은 우리 동물들의 인내심을 크게 시험했다. 땅은 딱딱한 점토 같아서 발을 디딜 곳이 없었고 동물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때로는 2~3미터씩 멈출 수 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타라라 불리는 초라한 오두막 무리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사실 이곳에서 유일하게 건조한 오두막을 관리하는 인디언은 정문을 잠그고 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책임 하에 있는 외국인을 환대하지 않는 인디언을 용납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활기찬 카세레스와 달리, 아야쿠초에서 온 장교는 불운을 한탄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소심한 영혼이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이 초가지붕 오두막 앞의 일종의 현관에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불편한 밤을 보냈고, 스페인 부왕에 맞선 마지막 전투에서 애국군을 도왔던 영국 군인들이 바로 이 지역에서 겪었을 고난을 조금이나마 경험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 길은 콜파우아요 강을 먹여 살리는 여섯 개의 깊은 협곡을 가로질렀다. 그 중 한 곳에서 나는 운 좋게도 최근 폭우로 심하게 씻겨나간 길가의 자갈톱에서 도넛 모양의 고대 잉카 석제 전투 곤봉 일부를 발견했다.
길은 계속해서 매우 미끄러웠고 거의 멈추지 않는 비로 인해 상태가 더 나빠졌다. 오후 2시 30분에 우리는 탐비요에 도착했다. 여기서 우리는 군수의 상냥한 아내의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앞서 가서 좋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게 한 사이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아야쿠초 시와 콘도르칸키 고지, 그리고 유명한 전장을 포함하는 웅장한 전경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또 다른 협곡을 건넜는데, 그 위험한 비탈길 때문에 우리 노새들이 여러 번 심하게 넘어졌다. 로스 네케스 마을에서 우리는 아야쿠초 지사의 매우 예의 바른 사절을 만났는데, 그는 호텔 주인으로 밝혀졌다. 그는 우리를 맞이할 위원회가 없는 것에 대해 사과하고 유력 인사들이 말을 타고 나와 우리를 기다리다가 악천후 때문에 돌아갔다고 설명하기 위해 비를 무릅쓰고 나왔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매우 감사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공복에 브랜디를 더 마시며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 로스 네케스에서 인디언들은 곧 다가올 카니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100여 명의 남녀가 한 오래된 집의 안마당에 모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빨간 천으로 만든 가림막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노인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팝콘과 볶은 옥수수, 숙코타시 접시들이 흩어져 있었다. 다른 남녀들은 바닥에 앉아 숙코타시 접시와 치차 그릇을 앞에 두고 있었다. 우리가 지켜보는 동안에는 모두 조용하고 질서 있게 행동했다. 다만 바이올린과 원시적인 고대 하프를 든 두 연주자가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마자 우리는 폭우 속에서 아야쿠초 묘지의 높은 담을 지나 좁은 거리의 자갈길을 따라 달려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화려하게 석조 아치를 지나 호텔 안마당으로 안내되었다. 지사의 지시에 따라 호텔 주인은 우리를 위해 40명 이상이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거대한 응접실과 거의 같은 크기의 큰 침실을 예약해 두었다. 침실에는 4개의 큰 침대가 있었다. 호텔 침대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충실하게 나를 섬긴 작은 “골드 메달” 접이식 침대를 사용하기로 했다.
수주일 동안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접어 올렸다가 잠들 때까지 펴지 않은 내 담요는 벼룩 등이 없어 안심할 수 있었다.
아야쿠초의 광장은 석조 기둥으로 지지된 아케이드가 있는 개인 주택들로 둘러싸여 있다. 1층은 상점이고 아케이드 위의 발코니는 주택의 주요 방들로 통한다. 우리 호텔은 이 마을의 주요 가문 중 하나가 살던 곳으로 옛 스페인 건축 양식의 좋은 예였다. 큰 중정이 있었고 거기서 돌계단이 회랑으로 이어졌다. 화분과 새장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가 방을 살펴보자마자 지사인 돈 가스파르 마우로 카초가 방문했다. 그는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체격의 페루인으로 뛰어난 유머 감각과 끝없는 예의를 지녔다. 다음 날 그는 우리에게 마을의 명소들을 보여주었다. 웅장한 대성당, 깨끗하고 잘 관리된 큰 공설 시장, 그림 같은 옛 교회들, 그리고 관청이 있었다. 관청은 큰 2중 사각형 건물로 주 정부 사무실, 주둔 중인 소수 병력의 병영, 그와 가족을 위한 방들이 있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몇 달 전 리마에서 도착했는데, 육로 여행의 공포가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의 부인은 정부가 여행 중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했음에도 아야쿠초에 살아 도착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안내인’ 중 한 명이 길을 잃어 버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땔감도 없는 버려진 탐보에서 묵어야 했다. 평생 리마에서만 살아온 그들은 불편함을 크게 느꼈다. 지사의 가족조차 적당한 수준의 편안함으로 여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도로 사정에 대한 흥미로운 논평이었다.
페루에서 관리의 삶은 가난한 인디언들의 삶만큼이나 편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그 의견을 바꿔야 했다. 지사들은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고 그에게만 책임을 지지만, 시민들이 선출하지만 제한된 권한을 행사하는 지방 관리들에게는 골칫거리로 여겨지기 쉽다. 지사의 명령을 직접 받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없다면 그는 종종 위태로운 입장에 처할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통치해야 하지만,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면 그의 처지는 전혀 쉽지 않다. 아레키파, 아반카이, 아야쿠초에서 만난 지사들 같은 사람들이 있어 중앙 정부는 그들에게 위임한 권력이 확고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마찰 없이 사용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 다행이다.
페루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이곳은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사방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 하지만 이 산악 도로를 통해 외국 상품을 들여오기가 매우 어려워 중요한 상점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현지인들이 소유한 것 같았다. 거리는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거친 돌로 포장되어 있고 우리와 달리 중앙이 아닌 가장자리로 경사져 있어, 한가운데에는 항상 도랑이 있었는데 사실상 노천 하수구였다. 보도를 걷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랑이 거리 중앙에 있는 것이 분명 더 편했다.
카니발 때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기대하며, 인디언 여인들이 커다란 추페 냄비와 거대한 치차 항아리를 들고 밤새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거리 한복판이나 장사가 잘될 만한 분주한 모퉁이에 자리 잡았다. 여인들의 두건 모양이 매우 특이했다. 마치 숄이 너무 더워서 벗어 네모나게 접어 편의상 머리에 이고 다니는 듯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점토 항아리에 이끌려 낡은 아치를 지나갔는데, 화가들이 좋아할 만한 뒤뜰에 들어섰다. 모든 화가는 아니겠지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그림 같은 폐허, 여기저기 널브러진 멋진 옛 항아리들, 더럽고 너무 큰 모자와 판초를 입은 지저분한 인디언 아이들, 고양이, 그리고 항아리 사이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갈증을 달래줄 치차가 든 항아리를 찾는 긴 다리의 돼지를 좋아하는 화가들 말이다.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의 탑에서 우리는 도시와 주변 지역의 멋진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아야쿠초 최후의 전투가 있기 전 주에 수크레와 라 세르나의 군대가 점령했던 거의 모든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야쿠초의 옛 이름은 과망가였다. 이는 잉카 비라코차의 군대에 의해 이 지역의 호전적인 부족이 패배하고 거의 전멸된 후 일어난 사건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전투 후 군대에 식량을 나눠주던 잉카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매에게 고기 한 조각을 던지며 “우아만카(잡아라, 매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과망가 마을은 피사로가 가장 먼저 세운 마을 중 하나였고, 나중에는 정통 부왕 바카 데 카스트로와 피사로를 암살한 젊은 알마그로와 그의 추종자들 사이의 유혈 충돌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야쿠초라는 이름은 1824년 12월 9일 북쪽 13마일(약 21km) 떨어진 키누아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유명한 전투 이후 이 마을에 붙여졌다. “아야쿠초”는 “죽은 사람들의 모퉁이(또는 무더기)”라는 뜻으로, 이 전투와 잉카 정복 및 스페인의 페루 정복 당시 이전에 있었던 전투들의 유혈성을 가리킨다.
2월 21일, 3일간의 카니발이 시작되었다. 페루에서는 이 축제 기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글을 자주 읽었지만, 나는 친절한 지사를 설득하여 21킬로미터 떨어진 키누아로 말을 타고 갈 수 있게 해줄 동물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전장을 하루 정도 조사해보라고 했다. 그는 우리를 말리려 했지만, 우리가 아야쿠초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곧 모든 준비를 마쳤다. 키누아의 지사에게는 우리의 안내자 역할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와 도의 비서, 그리고 작은 군 호위대를 동반하여 우리는 호텔을 떠나 북서쪽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이 교외에 도착했을 때는 좁고 상태가 좋지 않은 거리 때문에 한 블록 이상 늘어서 있었다. 갑자기 우리 안내자들의 말들이 뒤로 돌아 달아나려 해서 겨우 길에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원인은 누군가의 전형적인 부주의였다. 최근에 말 한 마리가 죽었는데, 구두쇠 주인이 가죽을 아끼려고 즉시 가죽을 벗기고 끔찍한 시체를 좁은 길 한가운데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우리 말들 중 어느 것도 그 역겨운 광경의 15미터 안에는 가려 하지 않아서 인근 들판을 크게 우회해야만 했다.
처음 3킬로미터 동안 우리는 리마와 북쪽으로 가는 일반 도로를 따라갔다. 퐁고라 강을 건너는 여울에 도착하자 갈라져 나와 몇 개의 작은 농장을 지나고 두 개의 포도원 근처를 지났다. 그리고 유카에스 강을 새로 만든 현수교로 건너 지그재그 길을 따라 가파른 절벽 면을 올랐다. 우리는 좋은 말들을 타고 있었고 편안한 속보로 계속 달려 아야쿠초를 떠난 지 3시간 반 만에 키누아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키누아의 광장은 세 면이 집과 폐허로 둘러싸여 있고, 네 번째 면은 교회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다른 집들처럼 이곳의 집들도 돌과 흙으로 지어져 있고 붉은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많은 지붕이 파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전투 후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스페인 장군이 수크레 장군에게 항복했다고 전해지는 집은 지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작은 흙벽돌 오두막인 여관에서 우리를 위해 급히 점심을 차렸고, 가능한 한 빨리 다시 말에 올라탔다. 우리는 북쪽으로 800미터 정도 작은 언덕을 올라가 남미 독립 전쟁의 마지막 대전투가 벌어졌던 평원에 도착했다. 일종의 석고로 만들어진 듯한 기념비가 평원 중앙을 표시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매우 훼손된 상태였다. 근처에는 말들을 위한 일종의 헛간이나 대피소가 있었고,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기념 예배당의 벽이 있었다. 평원 북쪽으로는 콘도르칸키 고지가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최근에 그 너머의 따뜻한 계곡으로 가는 새 도로가 건설되었지만, 스페인군이 애국군을 공격할 때 내려온 옛 길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전장의 해발고도는 거의 3,350미터에 달했고, 낭만적으로 기울어진 작가들은 가끔 이를 “구름 위의 전투”라고 불렀다. 사실, 우리는 콘도르칸키의 정상에서 계속 내려오는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사진 촬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비가 계속 내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장관을 이루는 전망을 볼 수 있는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거의 없었다. 전장의 모든 곳에서 동쪽, 남쪽, 서쪽으로 아야쿠초 계곡 전체를 아우르는 장엄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오후 내내 전장을 돌아본 후 우리는 작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은 매우 즐겁게 흘러갔고 카니발을 축하하는 인디언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와서 볶은 옥수수, 팝콘, 치차를 가져왔다.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우리가 그들의 유명한 전장을 보러 먼 곳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마을은 세 구역으로 나뉜 것 같았고, 각 구역의 알칼데는 우리가 다른 구역에서 먹고 마신 만큼 자신의 구역에서도 먹고 마시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만족했고 매우 즐거워 보였다. 나는 인디언들이 이렇게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이 유흥의 마지막으로 두 명의 인디언 여성이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의 공연은 크고 높은 소리로 시작해 강력한 크레셴도로 귀가 찢어질 듯한 가성 음까지 올라갔다가 점차 내려와 바람 새는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 소리처럼 쇳소리를 내며 끝나는 2중창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전장의 여러 부분을 사진 찍고 수크레의 승리 이유를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가 위치를 선택한 솜씨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 작은 평원, 사실상 고원은 문자 그대로 협곡으로 둘러싸였다. 수크레가 7,000~8,000명의 병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딱 충분한 크기였다. 그를 공격하는 적은 어느 쪽에서 오든 언덕을 올라와야만 했다. 콘도르칸키에서 내려오는 스페인군이 약간의 이점을 가졌을 것 같지만, 그들은 평원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포화를 받았고, 평원에 도달하기 직전에 작은 협곡에 빠져 수비대와 같은 높이에 오르기 위해 불리한 상황에서 기어 올라가야 했다. 라 세르나는 수크레의 진지의 강점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무능한 장군이 아니었다. 사실 밀러 장군이 지적했듯이, 부왕의 공격 실수는 자신의 판단과 달리 병사들의 조급함에 설득당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인내심은 끝없어 보이는 끔찍한 행군으로 바닥나 있었다. 전투 며칠 전, 부왕과 그의 수석 장군의 텐트에는 그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풍자 글이 붙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판단과 달리 행동하도록 강요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야쿠초 전투는 최후의 전투일 뿐만 아니라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 중 하나였다. 양측의 군대는 모두 잘 훈련된 베테랑들이었다. 지휘하는 장군들은 긴 전쟁을 통해 발전한 가장 유능한 인물들이었다. 모든 병사가 용감하게 싸웠다. 애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열정과 퇴로가 없다는 인식으로 그것을 만회했다. 그들은 지형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과는 가장 결연한 용기와 영웅적인 대담함 덕분이었으며 이는 페루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기쁨을 줄 것이다.
우리는 오후 중반에 도시로 돌아왔고 곧바로 거리를 산책하다 보면 작은 카니발 풍선들이 쏟아지듯 날아왔다. 향기 나는 물을 담은 풍선과 색분을 채운 달걀 껍질, 그리고 사순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여러 발사체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2층 창가의 유리한 위치를 점령한 부인들과 아이들은 거리를 지나는 모든 사람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리는 완전히 젖고 온갖 색으로 물들지 않기 위해 재빨리 피해 다녀야 했다.
저녁에는 폭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야쿠초 사교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대주교와 지사를 비롯해 50-60명의 친구들이 참석했는데, 음식과 술의 다양함으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샴페인을 포함해 7종류의 와인과 14가지 요리가 나왔다. 만찬 후 연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지금까지 우리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잃어버린 도시 초케키라우를 방문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초케키라우가 별 의미가 없었다. 아야쿠초 전쟁터가 모든 것이었고, 우리가 칠레가 골칫거리가 될 경우 페루가 도움을 바라는 나라의 대표단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했다. 이 만찬에서였는지 아니면 지난 3주간 있었던 다른 만찬에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칠레와 또다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미국에 항복하고 보호령이 되겠다는 의견이 한 번 이상 표명되었다. 이는 국민 정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페루 내륙의 정서와 칠레와의 또 다른 전쟁 가능성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칠레인과 페루인 사이의 증오 대부분은 그들의 원주민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칠레인에게는 아라우카인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 페루인에게는 케추아족의 피가 그만큼 섞여 있다. 아라우카인은 케추아족의 세습적 적이다. 수세기 동안 그들 사이에 평화는 없었다. 잉카는 케추아족 군대를 최대한 남쪽으로 밀어붙였지만, 아라우카인이 돌아다니던 땅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모든 것을 정복한 스페인 군인들조차 남부 칠레에서 막혔다. 여기서 아라우카니아 전쟁과 라우타로와 그의 친족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한 긴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잉카와 케추아족이 소수의 스페인 모험가들에 의해 쉽게 정복된 것과는 달리, 아라우카인은 수세기 동안 스페인인들을 막아냈고 사실상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아라우카인과 케추아족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인종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아라우카인은 엄밀히 말해 국가를 이루지 않았고, 각각 독립적인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어떤 지배자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외부인이 자신들의 민족 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극도로 독립적인 민족이었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족장조차 권위를 갖지 못했다. 농노나 노예도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잘못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오늘날 칠레인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칠레인의 스페인계 조상들은 간섭을 용납하지 않았고 중앙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아라우카인계 조상들은 개인의 자유를 더욱 열렬히 사랑했다. 스페인계 조상들은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16세기 유럽에 그들보다 뛰어난 군인은 없었다. 아라우카인은 더욱 호전적이었으며, 침략자들에게 처음 몇 번 패배한 후에는 성공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스페인 마을을 습격하고 소와 말을 약탈했다. 그들은 기병대를 조직했고, 그들의 조상들이 들어본 적도 없는, 케추아족이 지금도 좀처럼 감히 타지 못하는 동물을 다루는 데 능숙해졌다. 아라우카인 전체 민족은 피사로가 성공적으로 공격했을 때 아타우알파를 둘러싸고 있던 케추아족 군대보다 수가 적었지만, 그들은 대륙의 나머지 전체를 정복하는 데 쓰러진 것보다 더 많은 스페인 군인을 죽였다. 이런 조상을 둔 칠레인들이 오늘날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로 알려진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유산을 페루인의 것과 비교해 보라.
케추아족은 지금도 그렇지만 겁이 많고 평화로운 민족이었으며, 위엄이 부족했고, 무력보다는 교활함과 거짓말로 자신을 방어했다. 노예근성이 케추아족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는 이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지만, 자유나 독립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다. 케추아족은 아라우카인보다 더 높은 문화 수준에 도달했지만, 그들의 남성적 특성은 훨씬 덜 발달했다. 사실, 스페인의 정복 당시 그들은 이미 쇠퇴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피를 가진 페루인들이 칠레인들에게 쉽게 패배하고, 나라가 유린되고 굴욕을 당하며, 귀중한 질산염 광산을 빼앗기고, 세대를 거쳐도 뿌리 뽑히지 않을 강렬한 민족적 증오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26장
아야쿠초에서 리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카니발이 끝난 후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야 아야쿠초를 떠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약간 향수병에 걸렸는지, 아니면 그렇게 단호하게 불가능하다고 확언받았기 때문인지, 카니발에 할애된 3일 중 마지막 날에 아야쿠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우리와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두 병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준비되면 노새를 제공하고 떠나야 한다고 통보받은 아리에로에게도 잔인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아침 내내 노새와 우리와 함께 얼마나 멀리 갈 것인가에 대해 큰 싸움이 벌어졌고, 취한 인디언 여인들이 남편이나 동물들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다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지사가 우리를 돕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우리는 마침내 정오에 출발했다. 지사와 그의 친구들 14명이 도시 밖 1리그(약 4km)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정겨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가능한 한 일반 시민처럼 여행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우리에겐 작은 군사 호위대가 있었다. 그들 없이는 전혀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는 키누아로 가는 길과 같은 도로를 따라 처음 두 리그(약 8km)를 이동했다. 그러다 강을 건너는 대신 왼쪽 강둑을 따라 가다 흔들거리는 현수교에 도착했다. 다리 바닥은 헐거운 널빤지로 되어 있어 노새들이 쉽게 밟아 움직였다. 헤이는 자신이 강에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지나간 후 모든 널빤지를 다시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길에서 우리는 카니발을 축하하는 많은 원주민을 만났다. 그들은 즐겁게 행진하며 원시적인 작은 북을 치고 대나무 피리를 불었다. 거의 모든 집에 들러 소리를 지르고 떠들썩하게 굴며 치차를 몇 잔씩 마셨다.
우리가 작은 개울의 바위투성이 바닥을 건너고 있을 때 떠돌이 음악가를 만났다. 그는 앞을 못 보는 하프 연주자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 건너고 있었다. 그의 하프는 매우 기이했다. 나무 상자를 원뿔 반쪽 모양으로 만들어 밑바닥에 나무다리 두 개를 박아 넣고, 평평한 쪽에 구멍 두 개를 뚫어 놓아 꼬마 동물 같아 보였다. 우리는 그에게 개울의 마른 바닥에 하프를 세우고 연주를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진을 찍으려는 우리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그 불쌍한 장님 음악가는 겁을 먹은 듯했다. 그는 스페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기에, 개울 둑에서 소풍을 즐기던 친절한 메스티소 가족이 우리의 서툰 스페인어를 케추아어로 통역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패했을 것이다.
저녁에 우안타에 도착했다. 이 작은 역사적인 마을에서는 아마존 밀림의 야만적인 인디오 부족들이 페루 군대와 자주 충돌했다. 우리는 몰래 마을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1.6킬로미터 전부터 주지사를 비롯한 십여 명의 환대하는 신사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지난 2~3일 동안 ‘축하’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기에 페루를 횡단하느라 너무 지쳐 있어서 지금까지 우리를 맞이해 준 환영 위원회들에게 기대되는 만큼 예의 바르게 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솔직히 말해서 주지사가 매우 취해 있어서 오히려 더 친근해졌고, 우리가 ‘아메리카의 두 왕자’라며 우리가 묵은 그의 집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아내와 딸들은 훌륭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우리가 이 계절에 모든 남자들이 술을 마시는 것이 관례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듯했다. 동시에 그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가족의 남자들이 가능한 한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은 슬픈 상황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잠자리에 든 우리의 훌륭한 병사들이 없었다면 우리 주인들을 설득해 떠나게 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주지사는 극도로 짜증이 나 있었다. 그는 우리의 왕족 혈통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생각나는 모든 것에 대해 세 배의 요금을 청구하는 것만 기억했다. 우리는 새벽 5시에 일어났지만, 안내자로 고용할 만큼 술이 깬 인디오를 몇 시간 동안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우안타를 떠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다.
주지사의 아들만이 전날 밤의 주연에서 회복할 만큼의 기력이 있어 우리를 마을 밖까지 에스코트할 수 있었다. 쿠스코를 떠난 이후 이것이 우리 여행의 정기적인 특징이 되어서 우리는 항상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하며 기대했다. 이 젊은이는 매우 예의 바르게 지역 공동묘지 입구까지 우리와 동행했다. 공동묘지는 기괴한 흰색 회칠한 아도비 문으로, 빨간 기와로 된 작은 지붕이 날씨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었다. 그가 공동묘지 문에서 작별 인사를 한 것은 예언적인 면이 있었다. 그가 페루에서 우리의 마지막 명예 에스코트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길은 인구 밀집 지역을 지나갔다. 길가 여기저기에 전날 밤 집에 도착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불운한 사람들이, 남녀 모두 카니발의 여파로 잠들어 있었다. 보통 페루에서는 술 취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지만, 이번은 확실히 예외였다.
작은 마을들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우아르파 강 계곡으로 내려가 잘 지어진 유료 다리를 건넜다. 다리가 너무 길고 강물 위로 높이 솟아 있어서 내 노새는 동쪽 강둑에 머물기로 결심한 듯했다. 우리의 합동 노력 끝에 노새는 마지못해 건넜지만, 많이 맞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제 우리는 팜파스 강 유역과 비슷한 선인장과 미모사 나무가 있는 반건조 지역을 지나 극도로 가파른 협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차례 길을 잃었고, 곳곳에서 비로 인해 길이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위기의 순간은 1.5미터 높이의 작은 폭포에서 왔다.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바위 표면이 너무 매끄러워서 우리의 발 디딜 곳 없는 동물들이 위쪽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우리는 거친 돌계단을 만들어야 했고, 그들은 기꺼이 올라가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발버둥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3시간 동안 길은 가능한 한 가파르게 꼬불꼬불 올라갔고, 마르카스 근처의 황량한 고원에 도달했다.
우리 앞에는 장관이 펼쳐졌다. 전경에는 짚으로 지붕을 이은 오두막과 양과 소가 풀을 뜯는 들판이 있는 언덕이 있었다. 중간 거리에는 강들이 우리 시야에서 벗어난 협곡으로 길을 내려간 깊은 계곡들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눈과 구름으로 덮인 웅장한 산맥이 보였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나 우리는 마르카스라는 그림 같은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바위 그늘 아래나 길가에 흩어져 있는 스무 채 남짓한 오두막이 있었다. 우리가 혼자였다면 음식과 숙소를 모두 거절당했을 법한 그런 마을이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우리의 진전을 방해하는 가난한 인디오들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열정적인 병장이 동행했기에, 다른 집들보다 더럽거나 불편하지 않은 오두막 하나가 곧 우리에게 배정되었고, 병장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 자체 식량으로 좋은 저녁 식사를 제공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짐을 실은 동물들은 끔찍하게 힘든 하루를 보냈고, 우리 군인들은 우리가 주간 기차를 타려면
우안카요까지는 짐을 편하게 실을 수 있는 노새 두 마리면 충분했으나, 하루에 64킬로미터를 가려면 짐승을 하루씩 쉬게 해야 했다. 그래서 마르카스의 인디언 알칼데에게 노새 한 마리를 더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여기엔 노새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말이라도 구해달라고 하니 “네, 늙은 말 한 마리가 있으니 내일 아침에 준비해 놓겠습니다.”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늙은 백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울면서 따라온 인디언 여자는 돈을 받고 싶어 하지 않았고 말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다음 마을까지만 말을 데려가기로 했다. 거기서 다른 짐승으로 바꾸고 이 말은 우리와 함께 마을에서 마을로 안내하던 알칼데 중 한 명이 돌려보내기로 했다.
새 말 덕분에 우리는 속도를 내어 아코밤바라는 깔끔한 작은 마을을 왼쪽으로 멀리 두고 높은 산맥의 경사면을 따라 이동했다. 아코밤바는 인구가 꽤 밀집한 비옥해 보이는 리르카이 계곡에 있었다. 오후 중반에 우리는 우루미요시에 도착했다. 그곳엔 각설탕 모양의 거대한 바위들이 있었다. 부드러운 사암이라 쉽게 가공할 수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바위 아래에 여러 개의 동굴을 파 놓았다. 길고 추운 열 시간의 말 타기 끝에 우리는 파우카라라는 진흙빛 마을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오랫동안 악명이 높았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해보려 하지 않았다. 병사는 마을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 주인을 설득해 우리를 하룻밤 묵게 했다. 이웃 중 한 명이 노새용 보리짚을 갓 베어 가져왔고, 또 한 명은 달걀 열두 개를 가져왔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과 조리 도구로 훌륭한 식사를 했다.
밤은 습기가 많고 몹시 추웠다. 열대 지방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추위였다. 해가 지면 기온이 22도나 떨어지고 얼음같은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스웨터 두세 개와 판초 두 장을 급히 걸쳐도 소용없었다. 열대의 추위만큼 혹독한 추위는 없다. 게다가 최근에 도살한 양 시체가 오두막 안에 걸려 있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은 젖고 질퍽거렸으며 창문도 없고 문도 작았다. 우리는 텐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멋진 시골 집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서 인디언들은 실제로 여섯 시 전에 일어나 출발했다. 우리는 전날 밤 아침 식사용으로 달걀 네 개를 남겨뒀다. 짐을 꾸려 모든 물건을 안전하게 보낸 후 주인 아내에게 달걀과 차를 주며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전날 밤 요리하느라 1.6킬로미터 반경 안의 땔감을 다 써버렸고 물을 끓일 방법이 없었다. 아침 식사로 준비된 건 날달걀뿐이었다. 우리 앞에는 험한 지형을 64킬로미터나 달려야 했고 일부 구간은 해발 4,300미터에 달했다. 서둘러 달걀을 삼키고 열두 시간 동안 말을 타야 한다는 생각에 출발했다.
처음엔 리르카이 계곡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마침내 언덕 끝을 넘어 수백 마리의 라마가 풀을 뜯고 있는 거대하고 황량한 고원에 도착했다. 라마 목장에 오면 해발고도가 파이크스 피크 정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 앞이 15센티미터 이상 보이지 않는 눈보라, 지친 노새, 배고픈 탑승자, 길을 잃었는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더해보라. 그러면 그날 오후 우리가 겪은 잊지 못할 곤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 일행은 기쁘게도 황량한 고원과 작은 산악 호수에서 벗어나 수천 피트 아래로 오두막과 경작지가 보이는 거대한 계곡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곡 중턱을 따라 이동하면서 인디언 마을로 내려가는 매력적인 작은 길들은 피했다. 계속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침내 능선을 돌아 아푸리막 강과 합류하기 위해 페루의 이 지역을 관통해 깊은 협곡을 만든 거대한 만타로 강의 멋진 전경이 펼쳐졌다. 600미터를 구불구불 내려가 타블라차카의 새 유료 다리를 건너 훌륭한 길에 들어섰다. 물론 이것은 바퀴 달린 차량이 다닐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지역에는 마차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단지 폭 1.2-1.5미터 정도의 길에 바위와 구멍이 적당히 없어서 노새가 시속 8킬로미터로 조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고원을 지나느라 너무 느리게 이동한 탓에 이스쿠차카의 그림 같은 옛 석조 다리를 건너고 만타로 강을 다시 건너 이 잘 지어진 작은 마을의 조약돌 위를 달가닥거리며 지나갈 때는 해가 많이 져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가 온다는 걸 모를 거라 착각해서 공식 환영식과 소화기에 가해질 모든 공격을 피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숙소를 구하는 데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려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스쿠차카의 주지사는 마을에서 1.6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시골 저택에 살고 있었다. 마침내 마을에 ‘저명한 외국인’ 두 명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를 보내 우리를 환영했다. 그는 마을 집의 방 하나를 내주고 노새에게 풀밭을 제공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일반 요금의 세 배를 청구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주지사가 없는 틈을 타 관리인에게 병사가 말해준 정당한 가격만 지불하고 떠났다. 관리인은 얼마 전 이곳을 지나간 미국 토목 기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지 못해 의아해했다. 그 기사들은 페루 중앙 철도 확장을 위해 측량하러 왔었다.
현재 그 철도는 오래 전에 착공되어 리마에서 오로야까지 연결되고, 거기서 남쪽으로 우안카요까지 이어진다. 우안카요는 이스쿠차카에서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제 우안카요에서 이스쿠차카까지 철도를 연장하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우안카벨리카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우안카벨리카에는 수은과 구리 광산이 있다. 결국 이 철도는 범미 철도 체인의 한 고리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우리 노새들도 꽤 지쳐 있었고 우리도 그랬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구간이라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우리는 5시 전에 일어났다. 우리 길은 먼저 만타로 강을 건넜고, 몇 킬로미터 동안 강의 왼쪽 기슭을 따라 올라갔으며, 여러 개의 광천을 지나 점점 좁아지는 협곡을 벗어나 아코스탐보 마을 쪽으로 올라갔다. 한 곳에서 도로가 화석층처럼 보이는 곳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나는 운 좋게도 그 자리에서 화석 이매패를 발견했다. 예일 대학교의 찰스 슈처트 교수가 친절하게도 이를 ‘알로리스마 서브쿠네아타’로 동정해주었다. 이 화석은 브라질에서도 발견되었다. 상부 석탄기에 속하는 이 지층은 남미에 널리 분포하며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화석의 위치로 보아 이 지역에 석탄층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만약 석탄이 발견된다면, 이는 언젠가 이 계곡을 지나갈 것으로 기대되는 철도뿐만 아니라 주변의 구리 제련소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페루는 동력을 위해 석탄이 필요하지 않다. 만타로, 팜파스, 아푸리막과 같은 크고 빠르게 흐르는 강들은 풍부한 수력을 제공하며, 이를 전기로 변환하면 페루에 들어설 수 있는 모든 철도와 공장을 가동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나라에 증기 기관차를 도입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가파른 경사를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있고, 건설 비용이 예상되는 교통량에 비해 필연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페루의 미래가 수력 발전의 개발과 광산 생산품을 경제적으로 운반하고 승객을 수송할 수 있는 경량 전기 철도의 건설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만약 이 지역이 대규모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고 많은 양의 중량 화물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전기 견인력을 개발하는 것이 자본 투자에 더 안전하고 정부가 해야 할 더 실용적인 사업이라고 믿는다.
약 2,000명의 주민이 사는 아코스탐보에서 우리는 점심으로 먹을 것을 사려고 했지만, 찬 재에 ‘익힌’ 반죽 케이크 외에는 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두세 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 마르카바예 산맥을 넘자 팜파스로 가는 잘 다듬어진 도로가 나왔다. 우리 앞에는 하우하의 비옥하고 인구 밀집한 계곡이 장관을 이루며 펼쳐졌다. 상류 만타로 강과 그 지류들이 흐르는 이 풍요로운 평원에는 50개가 넘는 마을과 도시들이 모여 있다. 바로 앞에는 거의 직선으로 10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네 개의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푸카라에서 잠시 멈춰 저녁으로 볶은 옥수수와 갓 구운 돼지고기를 샀고, 그 다음으로 사파야우가, 푼타, 우안카요가 있었다. 어제 대부분을 황량한 지역에서 보냈던 것과는 달리, 이제 우리는 페루에서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에 있었고 문명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우안카요의 긴 거리를 달그락거리며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마침내 오후 9시에 도시의 중심가에 도착해 친절한 오스트리아인 호텔 주인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기까지 한 세월이 지난 것 같았다.
우리는 거의 14시간을 말 안장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2주 만에 처음으로 오로야행 기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모든 것은 잊혀졌다.
우안카요발 기차가 보통 일요일에 출발한다고 들었기에, 우리는 토요일 밤까지 우안카요에 도착하면 군인들에게 각각 1파운드를 주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느리게 움직이는 짐 동물들과 함께 가야 했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야 도착했고, 약속한 보상을 받지 못할까 봐 약간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우리가 기차를 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약속한 금화와 남은 주방 용품, 식료품을 받자 그들의 기쁨은 끝이 없었고, 진정한 동양식으로 우리를 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우안카요의 일요일 아침은 대단한 행사다. 일출 전부터 수천 명의 원주민들이 주변 마을에서 주간 장터를 위해 모여든다. 두 개의 큰 광장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상품을 파는 상인들로 가득 찬다. 근처에서 기른 소와 노새, ‘독일제’ 장난감, 우안카요에서 만든 도자기와 판초, 밀워키에서 만든 맥주 등이다. 붐비는 광장에서 넘쳐나 장터는 도시의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거의 1킬로미터까지 뻗어 있다. 화려한 색상의 판초를 입은 그림 같은 원주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물건을 사고팔며 북적대는 모습은 리마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구경거리다.
커컴 씨가 그의 예술적인 ‘멕시코 트레일’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멕시코 원주민들처럼, 군중 속에는 “닭을 팔고, 나중에 솜브레로를 흥정하고, 곧이어 저기 교회에 들어가 촛불을 들고 무릎을 꿇고, 마지막으로는 길가에 누워 풀케에 취해 이 세상이고 저 세상이고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유형은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의 안데스 산맥에서 일요일에 볼 수 있는 모습이 똑같다. 다만 여기서는 풀케 대신 치차가 즐겨 마시는 음료일 뿐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차는 정오에 도착했고, “곧 출발할 예정”이라는 안내가 있었다. 플랫폼과 작은 철판 지붕의 역사 근처에 새로 지어진 부스들은 예정된 승객들과 도착할 친구들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수 시간 동안 북적였다. 하지만 늦은 오후, 사실상 거의 어두워질 무렵에야 지체된 작은 기차가 역에 들어섰고, 세 곳의 우안카요 호텔에서 온 호객꾼들이 ‘친구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차가 다음날 아침 6시 전에는 출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편안한 작은 호텔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이른 아침 밝은 기분으로 기차가 역을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해 제 시간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그것은 거짓 경보였고, 기차는 곧 플랫폼으로 다시 후진하여 45분 동안 탑승 예정 승객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차장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결정하고, 6시 40분에 우리는 출발했다. 그때 부지사와 그의 친구들이 도착했는데, 기차에 탄 한 젊은 정치인이 부지사가 리마에 가려 한다고 생각하고 벨 줄을 세게 당겼다. 기관사는 그런 방식으로 기차를 멈추는 데 익숙해져 기관차에서 줄을 분리해 놓았기 때문에, 부지사의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몇 야드의 줄을 뒤쪽 객차로 끌어당기는 것뿐이었다. 꽤 특징적으로, 기차가 정시에 출발할 준비가 되어 6시에 도착한 단 네 명의 사람들은 모두 미국인이었다. 우리 둘 외에 다른 두 명은 세로 데 파스코의 큰 구리 광산에서 일주일 휴가를 즐기는 기술자들이었다.
하우하는 본선에서 역사적인 옛 도시로 1.6킬로미터 이상 뻗어 있는 지선이 있었는데, 이 도시는 스페인 정복과 독립 전쟁의 역사에서 유명했다. 아직 철도 열차 서비스의 필요한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하우하의 선량한 사람들은 떠나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가능한 한 오래 대화를 나누기 위해 기차에 몰려들었다. 기관차의 비명과 차장의 외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떠날 의도가 전혀 없는 20명 이상의 부인들이 기차가 역을 떠날 때까지 여전히 타고 있었다. 차장은 그들을 2.4킬로미터 떨어진 본선까지 데려갔다. 그런 다음 그들이 걸어서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히 인상 깊지 않을 것 같아, 그는 각자에게 짧은 승차 요금을 지불하게 했다. 차장이 선로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 줄 세워 놓고 짧은 승차 요금을 받은 수다스러운 부인들보다 더 당황스러워 보이는 20명의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11시에 우리는 유실된 곳에 도착해 급하게 만들어진 미완성 새 철교 위에 놓인 널빤지를 건너 오로야 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에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주 짧은 지연으로 모든 승객과 짐이 안전하게 운반되어 우리는 그날 오후 4시 전에 오로야에 도착했다.
이 지역에 부유한 광산들이 있고 미국 자본으로 건설된 새 노선의 종착역인 세로 데 파스코 제련소로 가는 노선의 종점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야는 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도”의 종착역으로 유명했고, 우리는 내일의 여정을 기대하며 관심을 가졌다.
자주 사진으로 찍혀 예전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철도 교량 중 하나로 알려졌던 웅장한 큰 고가교는 얼마 전 비극적인 방식으로 무너졌다. 다리 보수 작업 중이던 교량 위에 몇 명의 미국인 기술자들이 탄 교량 건설 자재를 실은 차량이 서 있었다. 폭주하던 기관차가 경사로를 따라 날아와 차량을 들이받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연약한 고가교 위로 떨어져, 결국 67미터 아래 협곡으로 사람과 금속의 뒤엉킨 덩어리가 추락하게 했다.
이 사고로 많은 지연이 발생했는데, 모든 승객과 화물을 노새로 또는 도보로 협곡 아래로 옮겨 반대편으로 올라가 리마행 열차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오로야에서 리마까지의 여정은 많은 여행자들에 의해 자주 묘사되었고, 해발 4,775미터의 정상 터널에서 해수면 바로 위에 있는 리마 역까지 내려가는 흥분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여기서 내 인상을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흥분은 다리 사고 외에도 며칠 전에 기관차가 선로를 이탈해 제방 아래로 굴러떨어진 또 다른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고조되었다고 말하겠다.
이러한 사고들로 인해 우리 열차에는 보일러가 너무 누수가 심한 매우 오래된 기관차가 배정되어 오로야에서 분수령까지 오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는 여러 번 멈춰 섰다. 한번은 45분 동안 멈춰 서서 커브를 돌 수 있을 만큼의 증기가 모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하지 않았다. 경치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경사면을 가진 거대한 바위 절벽들은 이곳이 정말로 대륙의 지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정상 터널에 들어가기 직전, 기차가 다시 멈췄고 우리는 눈 덮인 산들의 장관을 즐길 수 있었다.
두 명의 작업자를 태운 수동 차가 우리 열차 바로 앞으로 보내져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리마에서 이 길을 올라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상에 도달하기 전에 소로체로 크게 고통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려갈 때는 대부분의 승객들이 고지대에 잘 적응해 있어서 하우하와 오로야에서 온 페루 부인 세 네 명을 제외하고는 영향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그들의 문제는 고도보다는 차멀미와 환기 부족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는 3월 2일 저녁 8시 30분경 리마에 도착했다. 훌륭한 마우리 호텔에서의 첫 몇 시간 동안의 편안함과 호사를 누가 설명할 수 있을까?
다음 날 내 첫 번째 임무는 레기아 대통령을 방문해 초케키라우에서 본 것을 보고하고 내륙의 도시들에서 얼마나 환대를 받았는지 말하는 것이었다. 그와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페루의 지사들과 부지사들이 우리에게 그토록 예의 바르게 대한 이유를 더 이상 의아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장이 바로 예의의 화신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많이 했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훈련된 사업가인 그는 소설 독자들과 연극 관람객들에게 익숙한 남미 대통령의 전형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일이 어떻게 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페루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문지기는 장군의 품위를 갖춘 멋진, 키가 큰, 회색 머리의 군인이었다. 처음에는 우리를 약간 의심스러워했지만, 우리의 명함을 가지고 들어간 후 거의 즉시 돌아와 웅장한 인사와 정중한 손짓으로 우리를 곧바로 안쪽 접견실로 안내했다. 이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한동안 금빛 살롱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몇몇 거만하고 땀을 흘리는 정치인들의 불쾌감을 크게 자아냈다. 우리는 오래 머물지 않았고, 나가는 길에 다시 한번 웅장한 인사를 받았다.
예의바른 노 준장의 친절한 호의가 돋보였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몇 달 후에 아레키파 장에서 언급한 실패한 혁명에서, 대통령실과 대통령 본인, 그리고 외무장관을 장악하며 시작된 혁명에서 혁명군들이 무자비하게 노 문지기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리마를 방문하는 모든 여행객들처럼 우리도 대성당에 들어가 페루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미라화된 유해를 보았다. 그리고 재빠른 작은 말들이 끄는 2인승 마차를 타고 공원과 대로를 둘러보았다. 우리는 기념물과 새로운 공공 건물들을 보았고, 미국 대사를 방문했는데 그는 매력적인 남부 신사로 외교관 일에 매우 적합해 보였다. 우리는 견실한 외국계 은행들과 상업 건물들을 감탄하며 보았고, 리마의 옛 식민지 시대 풍경이 칠레와의 전쟁과 최근의 경제 호황으로 인해 많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전기 조명과 전차, 그리고 풍부한 외국 자본으로 인해 내륙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그 매력적인 특징들을 보존하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한 내 육로 여행이 완성되었다. 나는 이 길고 지루한 길을 두 번이나 걸어서 횡단했을 가난한 ‘도보 여행자’만큼 이 길을 잘 알고 친밀하게 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리마가 화려한 수도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단순한 변방 전초기지에 불과했던 식민지 시대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여행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리마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에 교감이 거의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횡단했던 여행과 마찬가지로, 이번 여행은 남미 문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엄청난 장애물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독립 전쟁의 영웅들이 14년 동안이나 이 길을 오르내리며 마지막 외국 군대의 흔적까지 몰아내기까지 보여준 용기와 결의를 크게 존경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의 남부 이웃들에게서 발견되는 단점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도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들에게 본질적으로 잘못된 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몫이 아니다.
남미에서 공식적인 예의범절의 영역을 벗어나면 가장 먼저 듣게 되고, 또 가장 먼저 하게 되는 비평은 일반적인 남미인들의 매너가 매우 나쁘다는 것이다. 여행자들이 이런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1855년 찰스 디킨스가 우리와 우리의 방식에 대해 쓴 글을 읽어보게 하라. 그것은 미국 생활의 특정 양상을 충실히 묘사한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남미에서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미의 호텔과 식당의 서비스에 대해 불평하기 쉬운 여행자들은 디킨스가 묘사한 뉴욕의 한 하숙집 식당을 즐겁게 읽어볼 것이다. “이 연회장의 더 먼 쪽에는 양쪽에 커다란 황동 가래침 통이 놓인 난로가 있었다. … 그 앞에서 큰 신사 한 명이 모자를 쓴 채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채 난로 오른쪽의 가래침 통과 왼쪽의 가래침 통에 번갈아 가며 침을 뱉고는 같은 순서로 다시 돌아오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더러운 흰 재킷을 입은 흑인 소년이 바쁘게 식탁 위에 나이프와 포크 두 줄을 놓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물주전자를 놓았다. 그는 이 축제의 식탁 한쪽을 따라 내려오면서 더러운 손으로 아침 식사 이후로 치우지 않은 더러운 식탁보를 바로잡았다.”
우리가 평균적인 남미인의 식탁 예절을 간과하기란 정말 어렵다. 하지만 북미인들 모두가 ‘하지 마세요! 좋은 매너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암기한 지 얼마나 됐을까? 우리가 모든 가능한 (그리고 불가능한) 음식에 포크를 의식적으로 사용하며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낀 지 25년도 채 되지 않았다.
남미인들의 무리가 음식을 처리하는 속도를 비판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나는 디킨스가 묘사한 미국 하숙집 식탁을 추천한다. 그곳에서는 “매우 적은 말만이 오갔고, 모두가 마치 내일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기근이 닥칠 것처럼 자기방어를 위해 최대한 많이 먹는 듯했다. 굴은 조리되거나 절인 채로 그들의 넓은 입 속으로 수십 개씩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장 매운 피클도 사라졌고, 오이 한 개가 한 입에 사탕처럼 들어갔지만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대한 소화불량 덩어리들이 태양 앞의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를 보는 것은 엄숙하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소화불량 환자들은 음식을 쐐기 모양으로 삼켰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그들 안에 항상 대기하고 있는 악몽의 무리를 먹이고 있었다. 마른 사람들은 딱딱하고 굳은 볼을 한 채 무거운 접시들을 파괴하고 나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듯 빠져나와 달콤한 음식들을 경계하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우리는 또한 낯선 사람들을 쳐다보고 지나가는 여성들에 대해 들리게 언급하는 남미인의 습관을 매우 싫어한다. 안타깝게도 이는 바꾸기 어려운 라틴 민족의 습관이다. 남미인은 이런 관습을 다르게 볼 인종적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적 습관 중 일부가 우리 관점에서 불쾌하고 심지어 역겹다면, 우리도 그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무례한 말투, 사회적 교제의 예의를 참을성 없이 무시하는 태도, 친구를 만날 때마다 그의 건강과 가족의 안부를 길게 묻는 것을 꺼리는 태도,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 발을 높이 들고 종종 구부정한 자세로 앉는 습관 등은 그에게 매우 불쾌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그의 언어를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구사하려 노력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와 우리 인종, 언어, 제조품의 ‘타고난 우월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은 모두 그의 눈에는 우리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는 외모에 너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는 그에게 무례해 보인다. 우리가 그만큼 자주 목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는 우리가 길에서 만날 때 모자를 벗어 적절한 존중을 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사업 청렴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우리는 너무 교활하다. 우리의 명예 기준이 그에게는 낮아 보인다. 사실 미국식 비즈니스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 남미에서 직면해야 하는 실질적인 장애물은 개인의 신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개인의 재정 상태에 대한 문의가 감성적인 라틴 기질에는 개인의 정직성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여겨진다. 남미인은 빚을 갚는 것을 우리보다 더 명예와 관련된 문제로 여기는 것 같다. 그는 장기 신용을 받는 데 익숙하고, 언젠가는 꼭 갚으려는 진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대개 어렵지 않게 할부금을 마련한다. 그러나 법정에서 강하게 압박을 받으면 자신에 대해 내려진 판결을 의도적인 모욕으로 여기고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사례에서는,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판결을 집행하기 위해 보안관과 함께 온다면 잘 무장하고 와야 할 것이라고 알렸다. 그런 용무로 그의 가게 문을 넘는 첫 번째 사람과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법 무시로 비판한다. 남미인에게 법은 그의 명예로운 빚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그를 유죄로 판결함으로써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안타깝게도 남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결점을 대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종종 지적되는 일종의 맹목이다. 이는 비슷한 원인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하며 자국민의 결점을 지적할 만큼 충분히 보았던 남미 작가들은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남미인은 칭찬을 좋아하지만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찰스 디킨스가 처음 방문했을 때 미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로 입에 거품을 물게 된다. 그래서 매사추세츠 출신의 온화한 얼굴의 신사인 베반 씨가 젊은 마틴 처즐윗에게 말했다. “우리 문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신다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우리 국민의 어리석음을 이 정당이나 저 정당이 아닌 국민 전체의 것으로 해부하고도 가장 더럽고 잔인한 비방과 가장 극심한 증오, 가장 참을 수 없는 추적을 피한 사람의 이름을 말씀해 주신다면, 그것은 제 귀에 매우 생소한 이름일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몇몇 경우에는, 한 토박이 작가가 우리의 악덕이나 결점에 대해 가장 무해하고 선의의 풍자를 감행했을 때, 2판에서는 해당 구절이 삭제되었거나 수정되었거나 설명이 덧붙여졌거나 칭찬으로 바뀌었다고 발표해야 했습니다.”
칠레의 산티아고에는 현지 관용어를 연구하기 위해 얼마간 머물렀던 한 젊은 미국 학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가 뉴욕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그가 본 대로 그 가장 귀족적인 남미 공화국의 사회에 대해 정직하지만 다소 날카로운 비평을 출판하려 했다. 그 결과, 그가 왔던 대학은 칠레에서 악명을 얻었고 그의 방문은 매우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그가 다시 돌아간다면 결코 친절한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편협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가 몇 달간 미국에 머물며 유럽 대중을 위해 진실하지만 신랄한 비평을 쓴 외국인들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국인의 민감함은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아마도 우리에게서 그것이 줄어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남미의 민감함은 오늘날 50년 전 우리의 민감함보다 더하지 않다.
나는 미국인이 어느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든 심각한 부정적 비평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 자신의 결점들이 외국인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많은 경우 우울할 정도로 일치된 견해로 지적되어 왔기에, 우리는 남미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남미인들이 우리에게 없는 특정한 우아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사회적 교류에서 더 격식을 차리며, 일상생활의 기제에서 우리보다 더 많은 정중한 말의 윤활유를 사용한다.
기후 조건과 빠른 교통의 어려움이 남미 공화국들의 낙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학의 발전, 교통 시설의 대폭적인 증가, 그리고 열대 질병에 대한 성공적인 전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한다.
우리가 더 큰 공화국의 정치 상황이 우리 신문과 소설을 읽는 대중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린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지난 세대에 우리의 가장 큰 미국 도시들 중 일부가 목격한 것과 같은 심각한 폭동은 그들에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흔하지 않다. 라틴 기질이 법의 위엄에 굴복하고 정부 법령에 우아하게 따르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파리가 목격한 혁명과 폭동이 프랑스와의 사업을 늘리려는 우리의 진지한 노력을 막지 않았다. 우리가 집에서 너무나 익숙해진 파업자들이 일으키는 폭동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를 지닌 가끔의 정치적 폭동은 우리가 남미 시장을 차지하려는 노력을 두려워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미국 제조업자와 수출업자가 지적인 끈기와 결단력으로 이를 잡으려 할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큰 기회가 있다는 점에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 남미는 우리가 그들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을 가질 준비가 되면 매우 큰 양의 미국 상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링컨 허친슨 씨가 적절히 말했듯이: “빠르고 쉬운 해결책은 없다. 돈을 써야 하고, 철저하게 훈련된 수출 관리자들을 고용해야 하며, 남미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수출 회사를 설립해야 하고, 효율적인 여행자들을 보내야 하며, 기술 전문가를 고용해야 하고, 대리점을 설립해야 하며, 신용을 제공해야 하고, 주문의 세부 사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국내 시장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무역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경쟁자들과 맞서 성공하려면 말이다. 중간 정도의 조치로는 거의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일시적일 뿐이다.”
독일은 젊은 사업가들에게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고 현장에서 상황을 배우도록 보낸다. 미국 대학들은 오래 전에 독일의 철저한 과학 연구 방법을 채택하는 이점을 배웠다. 미국 사업가들은 지금까지 해외 무역을 발전시키는 독일의 철저한 방법을 채택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비실용적인” 대학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미의 역사, 정치 또는 지리에 관한 정보를 찾는 이들에게 주의의 말을 전한다. 아랍인, 무어인 또는 모하메드인의 지배가 스페인 반도의 일부 또는 전체를 7세기 동안 지배한 가장 불행한 결과는 스페인인과 스페인계 미국인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또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진정으로 동양적인 태도이다.
동양을 연구하는 학생은 터키인과 중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사실과 일치해야 한다는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게다가 그들은 공허함에 대한 큰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면 무작위로 대답하며, 무지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을 선호한다. 알고 있고 알고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이유가 없다면 사실을 말한다. 사실이 없을 때는 다른 것을 제공한다. 그들은 질문자를 속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도 속인다.
같은 일이 어느 정도 남미인들에게도 사실이다. 때로는 그들이 실제로 “모른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예의 바르다고 생각했다.
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미에서도 아는 사람들에게 도달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실제로 현장에서 사실과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정말로 알지 못한다. 신중한 관찰자는 일차적이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증거를 피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남미인들에 대한 비난으로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내가 거의 보편적으로 사실이라고 발견한 조건으로 진술한다. 남미인들에 관한 한, 이는 유전된 특성이며 그들이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앵글로색슨 조상들로부터 우리의 라틴 이웃들에게 불쾌하고 그들이 우리를 다룰 때 감수해야 하는 특성을 물려받은 것처럼, 그들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오늘날 내가 보는 남미인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비평을 제시하면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란다. 당연히 규칙에는 많은 예외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기서 남미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귀속된 특성을 전혀 갖지 않은 많은 개인을 알고 있다. 나는 한 명의 남미인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는 매우 경멸받는 공화국의 거주자로, 그의 조상들은 독립 전쟁의 위대한 전투 중 하나에서 싸웠으며, 그는 뉴욕의 진정한 산업 대장과 같은 추진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여러 성공적인 산업 기업을 추진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사냥개와 함께 사냥하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승마와 같은 스포츠를 즐긴다. 그와 뉴욕 사람의 차이점은 그가 뉴욕 사람이 하나만 말하는 곳에서 3-4개의 언어를 말하고, 뉴욕 사람이 적은 휴일을 가지는 곳에서 1년에 많은 휴일을 가질 만큼 충분히 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는 뛰어난 젊은 변호사로 음식이 좋고, 매너가 세련되며, 대화가 훌륭하고, 지적 즐거움이 어디서나 주어지는 것만큼 날카로운 저녁 파티를 주최한다. 그 역시 4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그는 자신의 나이 또래의 평범한 뉴욕 변호사를 다양한 주제에 대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능력에서 압도할 뿐만 아니라 재치 있고 화려한 대화 솜씨로 능가했다. 나는 또 다른 유명한 역사학자를 알고 있는데, 그는 여러 학술 단체의 회원이기도 한 유명한 미국 사서에 의해 북미와 남미를 통틀어 “가장 학구적이고 생산적인” 서지학자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적인 규칙의 예외일 뿐이다.
우리가 남미인들을 가까이서 볼 때 그들의 일부 태도와 관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반세기 전 유럽 비평가들이 우리의 태도와 관습을 싫어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남미인들이 우리의 태도와 관습을 싫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 장에서, 그리고 사실 이 책 전체에서 나는 남미의 친절한 친구들을 불쾌하게 할 만큼 솔직하고 비판적으로 이야기했음을 고백한다. 그들은 후한 환대로 나에게 많은 신세를 지게 했지만, 불쾌하더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실이 없으면 신뢰를 가질 수 없다. 나는 항상 사실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노력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전체 그림을 더 명확하고 뚜렷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되는 호의적이거나 비호의적인 것을 숨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이미 많은 공식 선전물에 휩싸여 있지 않다면, 모든 남미 공화국들이 가진 놀라운 천연 자원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스터”나 홍보 담당자들이 진보를 방해하는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광고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견 없는 여행자가 놀라운 천연 자원보다는 현존하는 인간적 핸디캡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는 것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는 불쾌한 과제지만,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모든 것을 장밋빛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비용으로 진실을 발견하도록 내버려 두는 작가들을 참을 수 없다. 또한 나는 선정적인 효과를 위해 불쾌한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정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미국과 남미 공화국들 간의 더 가깝고 더 지적인 관계를 열렬히 지지하는 편견 있는 관찰자라는 점은 인정하겠다. 나는 국제적 우정이 지속되려면 현재 상황과 인종적 경향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진실을 굳게 믿는다.
“볼티모어” 사건, 209.
대나무 파이프, 361.
볼리비아 국립 은행, 145.
반델리에, Ad. F. 교수, 218, 226, 227, 233, 334.
은행 및 금융업, 145;
아레키파, 217;
아르헨티나, 39-40;
브라질, 31-32;
라파스, 237;
투피사, 88.
페루식 연회, 331, 337, 356.
바버, 토마스, 252.
보리 짚, 84, 159, 284, 366.
바로스 아라나, 디에고, 191.
바르톨로, 135, 252.
비즐리, J. B., ix.
맥주, 335, 372.
쿠스코의 거지 장터, 264.
베고니아, 290, 297, 326.
벨그라노, 48, 67.
베니, 계곡, 239, 240.
서지학자, 391.
당구, 119, 166.
새, 110, 175, 202.
비스카차, 246.
블랑코 강, 286.
“맹인의 안내자”. 엘 라사리요 참조.
보고타, 35, 47, 196, 223.
볼라, 315.
볼리바르, 시몬 장군, 50, 52, 118, 144.
볼리비아, 49, 56, 57, 73, 79, 83, 및 여러 곳.
볼리비아 철도, ix.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 등반과 탐험, 249.
볼리비아 군대, 89, 104.
볼리비아 세관, 85.
볼리비아 정부, 79, 92.
볼리비아 국립 박물관, 252.
볼리비아 지폐, 114.
볼리비아 의사, 116.
봄본, 341.
휴 드 보넬리, 200.
서점, 168, 178-79, 191.
브라질, 1장과 2장, 42, 및 여러 곳.
브라질, 무역, 10, 14, 20, 24-28.
볼리비아의 영국 기업, 165.
금작화, 286.
브라이스, 제임스 각하, 233.
페스트, 210, 214.
부에노스아이레스, 30-45, 60, 72, 73, 및 여러 곳;
외국 무역, 68;
역사, 46-51.
부에노스아이레스-로사리오 철도, ix, 61, 69.
불리물루스, 342.
사업 방식, 384.
카세레스 중위, vii, 289, 293, 298, 303, 305, 345.
카치마요, 140.
카치파스카나, 224.
가스파르 마우로 카초, 348.
카초라, 297.
선인장, 77, 86, 95, 341, 364.
카이사, 112.
칼라마, 173.
칼란차 신부, 322.
칼데라, 177, 202.
칼레라, 140.
카야오, 109.
카마초 장군, 138.
카마르고, 100.
카라카라, 151.
카라카스, 35.
에콰도르의 카라족, 273.
카니발 풍선, 355.
카니발 시즌, 346, 350-353, 360-363.
캐롤라인 제도, 206, 275.
국립 조폐국, 129.
카스텔노, 143.
카스티야 대통령, 320.
카스티요, 296, 298, 305.
소, 37, 38, 152, 334, 364.
만코 카팍, 322.
세바다. 보리짚 참조.
중앙아메리카, 42.
세로 데 파스코, 3, 373, 374.
차차니 산, 217.
차코, 70, 78, 131, 139, 165.
페르민 차일레, 109, 164, 및 여러 곳.
차야바마, 285.
차야파타, 145, 158, 162, 163, 172.
차요마, 150.
로페스 차베스, ix.
체카쿠페, 254, 256.
보고타의 치브차족, 232.
치차, 134, 153, 246, 347, 350, 354, 361, 372.
치체리아, 134, 256.
라파스의 어린이 주일, 233.
칠레, 40, 42, 51, 57, 58, 179, 181, 330, 및 여러 곳.
칠레와 브라질, 185.
칠레와 페루, 357.
칠레와 페루 기술자, 125.
칠레인의 성격, 204.
칠레의 환대, 187.
칠레 해군, 200.
칠레인, 124.
오늘날의 칠레인, 358.
친차 제도, 204.
친체로스, 335-341.
키니네 식물, 146.
초콜릿, 147, 156.
촐라, 235.
초케키라우, 291-323.
초롤케, 100.
추쿠이토, 334.
출파, 164.
춘차족, 318.
추뇨, 110.
추페, 111, 126, 128, 350.
추키사카, 143.
신티, 100.
마리아노 시스네로스, 320.
토목 기술자, 242, 270-71, 369, 375, 387.
클라우실리아, 342.
석탄층, 369.
코카, 107, 126, 127, 153, 235, 248.
코차밤바, 170, 248.
토마스 코크런 던도널드 백작, 51, 200.
닭싸움, 213.
카카오, 14, 107.
커피, 21, 23, 24.
볼리비아의 동전과 화폐는 88페소, 128페소, 238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은 25레알이었습니다.
페루는 145솔, 146솔, 213솔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30페소였습니다.
콜롬비아는 147페소, 378페소였습니다.
콜파우아요는 345페소였습니다.
콜케차카는 157페소, 165페소였습니다.
통상. 무역 참조.
발파라이소의 영국 상사는 199페소였습니다.
칠레의 상업 번영은 199페소였습니다.
외판원은 9페소였습니다.
콘도르는 305페소였습니다.
콘도르칸키는 346페소, 353페소였습니다.
“페루 정복”–프레스콧, 205페소.
포토시의 수도원은 129페소였습니다.
마틴 콘웨이 경은 249페소였습니다.
코냑은 355페소였습니다.
제임스 쿡 선장은 276페소였습니다.
코파카바나는 226페소, 227페소였습니다.
구리 광석은 205페소였습니다.
구리 제련소는 370페소였습니다.
코킴보는 177페소, 201-02페소였습니다.
코라코라는 235페소였습니다.
코라푸나. 코로푸나 참조.
코르코바도는 21페소였습니다.
코르디예라 데 로스 프라일레스는 163-64페소였습니다.
코르디예라 레알은 248페소였습니다.
포토시의 옥수수는 128페소였습니다.
볶은 옥수수는 254페소, 371페소였습니다.
골판지 철판은 70페소였습니다.
코스모스는 326페소였습니다.
케추아족 의상은 262페소였습니다.
코타가이타는 100-2페소였습니다.
목화는 14페소였습니다.
코바동가는 53페소였습니다.
“황금의 요람”, 319페소.
크레보는 139페소였습니다.
미국인에 대한 비평은 379페소, 387페소였습니다.
크루세로 알토는 224페소였습니다.
쿠추 인헤니오는 112페소였습니다.
쿠라우아시는 289페소였습니다.
칠레의 통화는 199페소였습니다.
페루의 통화는 213솔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세관은 31페소였습니다.
볼리비아는 88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은 7레알, 9레알, 20레알, 21레알이었습니다.
페루는 212솔이었습니다.
쿠스코는 205페소, 233페소, 251페소, 255페소, 258-282페소, 309페소, 318페소였습니다.
해발은 272미터였습니다.
대학은 268페소, 269페소였습니다.
쿠스코와 리마는 288페소였습니다.
달 박사는 342페소였습니다.
다시푸스 벨루로수스는 234페소였습니다.
남미의 치과의사들은 270페소였습니다.
데사과데로 강은 164페소, 246페소였습니다.
아레키파 사막은 215페소였습니다.
찰스 디킨스는 380페소, 385페소였습니다.
포토시 은광 발견은 121페소였습니다.
열대 질병은 387페소였습니다.
은식기는 147페소였습니다.
딕슨 교수, 롤랜드 B.는 323페소였습니다.
수크레의 인형들은 147페소였습니다.
“돈 마리아노”는 293페소, 301페소였습니다.
일체형 문은 249페소, 251페소였습니다.
포토시의 약국은 127페소였습니다.
카니발의 북은 361페소였습니다.
건기는 84페소였습니다. 우기 참조.
오리는 227페소였습니다.
뒤랑 박사는 220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의 네덜란드인들은 5-6페소였습니다.
아레키파의 지진은 216페소였습니다.
이스터 섬은 276페소였습니다.
에콰도르는 57페소, 339페소였습니다.
남미 젊은이들의 교육은 269페소였습니다.
전차는 182페소였습니다.
전기 철도는 370페소였습니다.
라파스의 전기 철도는 230페소였습니다.
“엘 라사리요”는 60페소, 111페소, 170페소였습니다.
산티아고의 “엘제비어” 출판사는 190페소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영국인들은 31-33페소, 43-44페소, 47-48페소, 62페소, 64페소였습니다.
볼리비아는 124페소, 239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은 4레알, 8레알, 20레알, 23-26레알이었습니다.
칠레는 179페소, 193페소, 199-200페소였습니다.
에스카라는 100페소, 104페소였습니다.
에스타르카는 86페소였습니다.
에스테로 파티뇨는 139페소였습니다.
라 에스트레야는 287페소였습니다.
유칼립투스 나무는 61페소였습니다.
미술 전시회는 192페소였습니다.
“아마존 계곡 탐험”–기본, 288페소.
브라질 국립 박람회는 16페소, 19-20페소였습니다.
에어, W. S.는 viii페소였습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54페소였습니다.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7세는 48페소였습니다.
페르민. 차일레 참조.
고사리는 151페소였습니다.
핀카스는 141페소였습니다.
산티아고의 자원 소방대원들은 188페소였습니다.
불꽃놀이는 338페소였습니다.
물고기는 175페소였습니다.
아이마라 플루트는 234페소였습니다.
접이식 침대는 218페소였습니다.
잉카 요새는 273페소였습니다.
잉카 요새는 274페소, 286페소, 310페소였습니다.
화석은 369페소였습니다.
프랑코, A. 씨는 ix페소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프랑스인들은 61페소였습니다.
볼리비아는 124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은 4레알, 17레알, 20레알, 31레알, 61레알이었습니다.
남미는 124페소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과일은 73페소였습니다.
볼리비아는 246페소였습니다.
모피는 199페소였습니다.
잉카 가옥의 박공은 309페소, 313페소였습니다.
도박은 235-36페소였습니다.
가르시아, 마르코스는 322페소였습니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259페소, 275페소였습니다.
가스텔루, 돈 후안은 321페소였습니다.
가우초는 67페소, 72페소였습니다.
제라늄은 151페소였습니다.
독일계 미국인들은 167페소였습니다.
독일의 사업 방식은 96페소, 388페소였습니다.
오루로 독일 클럽은 166페소였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독일인들은 43-62페소였습니다.
브라질은 4레알, 7레알, 20레알, 27레알, 31레알이었습니다.
칠레는 193페소였습니다.
염소는 70페소, 75페소, 97페소, 110페소였습니다.
친체로스의 주지사는 335페소였습니다.
우안카라마는 328페소였습니다.
키누아는 351페소였습니다.
탈라베라는 333페소, 335페소였습니다.
탐비요는 343페소, 344페소였습니다.
이스쿠차카는 368페소였습니다.
그레이스 앤 컴퍼니, W. R.은 viii페소, ix페소, 231페소였습니다.
그란 차코. 차코 참조.
포도, 110.
맷돌, 308.
과망가, 350-51.
과나이, 239.
구아노, 203-4.
과키, 252, 254.
구에메스 장군, 72.
기니피그, 84, 110, 143, 160.
기타, 156, 234.
갈매기, 160.
우박, 158, 345.
수직기, 134.
한나, 레아, ix, 203.
마구, 285.
하프, 347, 361.
아레키파의 하버드 천문대, 216.
모자, 146, 263.
헤이, 클래런스, ix, 257, 300, 302.
여성의 머리 장식, 350.
헬리오트로프, 286.
허포드, 올리버, 127.
히스패닉 인종, 53-56.
남미 역사학자, 391.
호프, 존 피어스, ix, 251.
경마, 36.
말, 37, 110, 152, 326.
볼리비아의 환대, 231.
아레키파의 호텔, 217;
아야쿠초, 347;
부에노스아이레스, 34;
차야파타, 217;
쿠스코, 261;
우안카요, 371, 373;
후후이, 72-74;
라파스, 231;
라 키아카, 78;
리마, 376;
모옌도, 214;
몬테비데오, 29;
오루로, 166;
페르남부쿠, 8;
포토시, 115, 125;
리우데자네이루, 18;
산티아고, 182;
남미, 380;
수크레, 142;
투피사, 89-90.
우아드키냐, 320.
우안카라마, 327.
우안카벨리카, 369.
우안카요, 369-372.
우안차카, 164.
우안타, 362-63.
우아로콘도, 284.
우아르파 강, 363.
우아타나이 강, 257-58.
우마우아카, 77.
습도, 70, 306.
허천, 돈 산티아고, ix, 80.
허친슨, 링컨, 28, 388.
아이스크림, 331.
이글하트, D. S., ix.
일로, 210.
일체형 석상, 249.
잉카 제국, 318, 258.
잉카 궁전, 261.
잉카 도로, 283.
잉카 로카, 259.
잉카 계단, 312.
잉카 석조, 259.
잉카 회반죽, 310, 311.
탐보, 149.
“잉카의 왕좌,” 278.
화병, 279.
비라코차, 276.
잉카, 84, 130, 206, 291, 307-323, 357, 그리고 여러 곳.
잉카우아시, 탐보밤바 근처, 318.
포토시의 제련소, 124.
이키케, 201, 202, 205.
노란 붓꽃, 288.
관개, 77, 84, 100, 110, 343.
“티티카카와 코아티 섬들,” 334.
이슬라이, 211.
아르헨티나의 이탈리아인들, 31-34, 45, 67, 72;
브라질의 이탈리아인들, 4, 20.
이타파리카, 11.
쿠스코의 감옥, 267.
라파스의 감옥, 238.
토기 항아리, 315.
하우하, 373; 하우하 계곡, 371.
예수회 교회, 265;
아레키파의 예수회 교회, 218;
포토시의 예수회 교회, 126.
예수회 신부들, 332.
부에노스아이레스 자키 클럽, 35.
존슨, 랭킨, ix, 249.
“조르날 두 코메르시오,” 22.
후후이, 69, 72-74.
훌리아카, 225, 254.
후라멘토, 72.
카리카리 전장, 132.
커컴 씨, 372.
코아티, 226.
코로푸나 산, 218.
쿠사이에 섬, 206, 275.
“라 코로나” 사건, 187, 208.
“라 에스트레야,” 287, 320.
“라 글로리에타,” 141.
라하 탐보, 113.
“라 나시온,” 34.
란타나, 286.
라파스, 145, 170, 228-240.
라플라타, 143.
라플라타 국립대학교, 38.
“라 프렌사,” 34, 338.
라 키아카, 69, 78, 82, 172.
라 라야, 255.
라 세레나, 202, 281, 341, 355.
라틴 아메리카 과학 회의, 183.
라우타로, 357.
라반데, E. 드, 320.
남미의 변호사들, 270, 390.
레기아, A. B., 페루 대통령, viii, 294, 331, 376.
렐레, 275.
레온, 75.
레온, 마르셀리노, 319.
레토나 가문, 325.
페루의 자유당, 221.
리마, 35, 47, 49, 51, 56, 73, 196, 369, 376, 378.
리마리호, 200, 201, 210.
리마탐보, 286.
리니에르스, 47.
리르카이 계곡, 365, 367.
리스본, 14.
리비추코, 160.
도마뱀, 157, 202.
야마 몰이꾼, 156.
야마, 77, 110, 113, 115, 133, 149, 155-161, 255, 326, 331, 367.
포토시의 야마, 117, 126.
메뚜기, 61, 70, 325.
롬바르디 포플러, 332.
로멜리니, C. 씨, 263, 279.
로스 네케스, 346.
로또, 236.
루핀, 297, 326.
맥, 94, 101.
마차, 158.
마켄나 비쿠냐, B., 191.
마드레 데 디오스 강, 240.
마젤란 해협, 179.
마이마라, 76.
마이포, 51.
옥수수, 110.
말라리아, 341.
마모레 강, 139.
마나우스, 240.
망코 카팍, 263, 279.
만타로 강, 368-371.
“마냐나” 습관, 382.
마르카스, 364.
마르카바예, 370.
마크햄 경, 클레멘츠, 146, 267, 276.
“마틴 처즐위트,” 383, 386.
마르티넬리, 돈 페데리코, 325.
마탄, 71.
마타라, 345.
5월 25일, 46-48.
메다노스, 215.
산티아고 의과대학, 168.
약품, 127.
메디나, 호세 토리비오, 189-190.
메히아, 215.
멘도사, 51.
외국 상품, 326.
메리노, 루이스 대위, ix.
“멕시코의 길,” 372.
멕시코, 41, 42.
멕시코호, 174.
칠레 육군사관학교, 194.
연유, 153.
밀러, 윌리엄 장군, 117, 355.
미모사 나무, 71, 72, 95, 300, 341, 364.
포토시의 광부들, 122.
구리 광산, 173.
세로 데 파스코의 광산, 373.
금광, 173;
은광, 157, 164, 169, 173;
주석 광산, 123, 169.
포토시의 조폐국, 129.
미스티, 217.
미첼, J. A., 383.
미트레 바르톨로메, 191.
모그로베호 피오, 320.
모호, 84.
모옌도, 175, 210-214.
모예파타, 286, 320.
수도원, 129;
도미니코 수도원, 259;
프란시스코 수도원, 219, 220, 265.
모노밤바, 335.
먼로 독트린, 42-43.
“먼로 궁,” 19.
몬테스, 볼리비아 대통령, 242, 287.
몬테비데오, 29, 30.
몬트, 칠레 대통령 페드로, viii, 194.
모로모로, 150.
모제스 교수, 버나드, 183.
모기, 341.
고산병, 113, 165.
노새, 110, 134, 149, 281, 326, 342, 360, 372, 그리고 여러 곳.
“승리의 벽,” 321.
나폴레옹, 48.
볼리비아 국립은행, 88.
프란시스코 아르곤다뇨 국립은행, 88.
뉴욕 내셔널 시티 은행, 242.
남미의 흑인들, 13.
칠리우아의 만년설, 331.
리우의 신문, 22;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문, 34;
투피사의 신문, 90.
뉴욕 헤럴드, 338-340.
니치, 잉카, 310, 311.
닉테로이, 16.
질산염 협회, 203.
칠레 질산염, 173, 202-205.
“북미인들”, 40-43, 381.
아르헨티나 북중부 철도, 69.
노트르담 대학교, 130.
노보아, C. A., ix.
누녜스, J. J., vii, 290.
오아후, 341.
오크로스, 344.
오쿠리, 152.
오도 호텔, 182.
오드리스콜 씨, 75.
올린다, 5.
오야네타 장군, 108.
오얀타이탐보, 284, 309, 318.
오야웨 화산, 172.
“오 파이스”, 22.
오렌지, 326.
오로페사, 258.
오로야, 369, 371, 374.
오루로, 79, 80, 162, 164-172, 241, 245, 248.
—- 기후, 166.
—- 인구, 170.
오루로-안토파가스타 노선, 79, 173.
파차카막, 252, 312.
파차차카, 325.
태평양 증기 항해 회사, 174.
종교화, 252.
파호날, 343.
이슬라이 팜파, 215.
팜파 탐보, 138.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62-66.
팜파스 강, 341, 370.
범미 철도, 76, 369;
과학 회의, 183;
연합, viii.
판 데 수크레, 248.
파라과이, 50, 139.
파라과이 강, 139.
파라모, 329, 335, 345, 367.
파라나 강, 63, 139.
파로디 형제, 343.
앵무새, 284, 288.
파타고니아, 63.
파우카라, 366.
파우카르탐보, 318.
파스 솔단, 322.
복숭아, 219.
배, 246.
완두콩, 219.
페데르네이라스 대령, A. de, ix.
페르남부쿠, 3-10, 14.
페루, 42, 49-52, 57, 211-224, 254-378, 그리고 수시로.
상부 페루, 73, 86, 143, 144.
페루 공사, ix.
페루 기술자들, 125.
케추아족의 치마, 147.
볼리비아의 의사들, 168;
남미의 의사들, 270.
피아노, 287.
돼지, 110, 152.
필코마요 강, 78, 100, 137, 139, 140.
필스브리 박사, H. A., 342.
핀코스 강, 329.
오리건 소나무, 242.
피노 토란소, 아르투로, ix.
피삭, 310, 318.
피사구아, 205.
피스쿨코, 150.
피사로, 106, 259, 280, 351, 358;
추종자들, viii, 260;
유해, 377.
플라타, 후안 마누엘 리바스, 320.
자두, 219.
폐렴, 167.
폴로, 203.
판초, 327, 372.
비쿠냐 판초, 234, 333.
폰고라 강, 352.
포오포 호수, 161, 164.
팝콘, 354.
포플러 나무, 332.
돼지고기, 371.
포르테뇨스, 34, 그리고 수시로.
브라질의 포르투갈인들, 5, 7, 8, 20, 46.
포스테, 99, 104, 149, 그리고 수시로.
마부, 104, 136, 137, 149, 159.
감자, 110; 포토시의 감자, 128.
포토시, 73, 79, 92, 100, 112, 115-133, 169, 233, 252, 338;
세로, 115, 120;
라파스 및 페루 광업 협회, 61;
역참, 109.
도기, 308, 312, 316.
프레스콧의 “페루 정복사”, 205.
가격, 산투스에서, 2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3;
몬테비데오에서, 30;
투피사에서, 89.
글로리에타의 왕자와 공주, 141.
감옥. 교도소 참조.
원통형 돌 돌출부, 313.
푸카라 강, 255, 371.
푸쿠유라, 322.
풀케, 372.
푸니야, 149.
푸노, 112, 225, 254.
푼타, 371.
푸키우라, 283.
“사랑이 죽을 때”, 287.
케브라초, 70-71.
케브라다 온다, 138.
케추아 의복, 128.
케추아어, 266.
케추아족, 84, 86, 95, 98, 104-108, 124, 130, 153-54,
232, 255, 267, 268, 277, 287, 317, 348, 357.
키노아, 100, 110.
킨타 노르말, 192.
키누아, 351, 352.
키르베, 104, 108, 109.
철도, 아르헨티나에서, 32, 61-79;
볼리비아에서, 79-80, 164-65, 170-74, 225, 227, 230, 241, 249, 252;
브라질에서, 8, 9, 21, 23;
칠레에서, 170-74, 178, 179, 205, 208;
페루에서, 206, 211, 215, 216, 224-25, 254-58, 370, 372-76;
우루과이에서, 30.
라이몬디, 321, 322.
우기, 볼리비아에서, 84, 87, 138, 240;
페루에서, 282.
레시페(페르남부쿠), 4-10.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242.
남미의 식당들, 380.
혁명, 68, 222.
리오 베브리베, 7.
리우데자네이루, 16-22.
라플라타 강, 31, 37, 46, 56, 160.
리오 피에드라스, 71.
폭동, 387.
리바스, 라파엘, 109.
알토 강, 240.
로다데로, 278.
로드리게스, J. C. 박사, 22.
로메로, 카를로스 A., 323.
루스벨트 대통령, 331.
루트, 엘리후, viii, 183.
로사리오, 31, 63.
장미, 151, 337.
로우, 레오 S., viii, 183.
오우비도르 거리, 19.
고무, 24.
유적, 115, 121, 250, 272, 291, 307, 그리고 여러 곳.
루이스 데 로스 야노스, 70.
루레나바케, 239.
삭사이우아만, 206, 263, 272-279.
살타, 72.
샐비아, 290.
사마네스, 호세 베니그노, 320.
산 안토니오 항, 240.
초승달 모양의 모래 언덕, 215.
사암, 366.
산 헤로니모, 258, 329.
산 마르틴, 호세 데, 50-52, 155, 200.
산 페드로, 227.
산 세바스티안, 258.
산타페, 66.
산타 루시아, 181.
산티아고, 칠레, 35, 47, 180-196, 386.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66.
산토 도밍고 수도원, 258.
산투스, 22-23.
상파울루, 21, 23, 25.
사파야우가, 371.
사라코차, 224.
사르간타이 산, 290, 304, 320.
사르미엔토, 66.
사로팔카, 110.
사르티게스, 외젠 드, 319.
쉐퍼, J. 루이스, viii.
슈미트, 에밀리오, 338-340.
실업 학교, 192.
포토시 광산학교, 130.
공립학교, 97, 154.
슈셔트, 찰스 교수, 369.
남미의 스코틀랜드인, 4.
바다사자, 175, 202.
숄핀, 294.
양, 37, 75, 137, 161, 334, 364, 366.
육지 조개, 341.
셰퍼드, 윌리엄 R., 183.
시쿠아니, 255.
낮잠, 326.
은. 광산 참조.
은세공인, 147.
케추아 여성들의 노래, 354.
두개골, 316.
두개골 변형, 246, 317.
점판암, 313.
진눈깨비, 345.
라마 털로 만든 새총, 156.
천연두, 210, 214;
리우에서, 18.
볼리비아의 제련소, 112, 115, 124.
스미스, 에밀리오, 338-340.
스미스, 헌팅턴 주니어, ix, 61, 257.
스미스, U. S. 그랜트, ix.
눈, 112, 335, 345, 367.
스나이더, A. G., ix.
소라타, 239.
소라이 산, 304, 320.
소로체, 113, 143, 165, 376.
소토마요르, 192.
남미인들의 특성, 52;
남미인들의 태도, 379, 391.
스페인, 53-55.
스페인군, 67, 144, 354.
남미의 스페인인, 12, 29, 33, 45-52, 61, 67.
스파이어 앤 컴퍼니, 242.
물레, 312.
“침 뱉기”, 383.
스포츠, 214.
스키어, E. G., 251, 259, 261, 342.
역마차, 83.
증기선, 대서양, 3, 6, 10, 17, 26, 29-31, 44;
칠레, 200-203;
티티카카 호, 227;
서해안, 175-177.
칠레인 승무원, 176.
원통형 돌 블록, 311.
돌 깎기 게임, 278.
수코태시, 347.
수크레 시, 108, 112, 133, 142-148, 158, 248.
수크레, A. J. 장군, 52, 108, 144, 325, 341, 352, 354.
설탕, 5, 9, 14, 156, 290.
사탕수수, 66, 286, 290, 295, 325, 343.
수이파차, 85.
유황 온천, 111, 134.
고구마, 302.
타블라차카, 368.
타크나, 187, 206-209, 330.
탈라베라, 330, 334.
탈카우아노, 178.
탐비요, 346.
탐보 강, 215.
탐보밤바, 318.
탐보, 99, 149.
타라코 반도, 226.
타리하, 86.
차, 125.
테하다, 호세 마리아 데, 319.
기온, 98, 113, 143, 178, 366.
템플, 에드먼드, 61, 76, 144, 228.
태양신전, 258.
인디언 부관, 284.
테니스, 203.
계단식 밭, 110, 307, 313, 315.
직물, 252.
극장, 34-35.
톰슨, 회계 담당관, 276.
티아우아나코, 228, 249-253.
오리건에서 온 침목, 225.
티그레 강, 62.
주석. 광산 참조.
티키나 해협, 227.
티티카카 섬, 226, 334.
티티카카 호, 86, 164, 224-227, 249, 310.
담배, 14.
고대 무덤, 164, 246, 315.
“통키노이즈”, 287.
토로팔카, 111.
토토라, 99.
장난감, 아이마라, 234;
독일, 372.
무역과 상업, 10, 14, 20, 24-28, 38-39, 46, 127, 그리고 여러 곳.
무역로, 49, 60, 73, 93, 239-240, 280.
트란카파타 강, 289.
운송의 어려움, 387.
보물 사냥꾼, 250, 292, 308, 321.
트레스 크루세스, 77.
투쿠만, 66-69, 73.
투쿠만 특급, 64.
투무슬라 강, 108.
툰하, 148.
투팍 아마루, 106, 266.
투피사, 79-80, 87-92, 100, 172, 338.
우카얄리, 297.
미국과 페루, 209, 337.
우키아, 77.
우리베, 우리베 장군, 195.
우루밤바, 284-85, 320.
우루과이, 29-30.
우루미요시, 366.
우스파야타 고개, 51, 57.
우유니, 80, 92, 100, 172.
바카 데 카스트로, 351.
발파라이소, 178, 179, 198-201.
바르가스, 모이세스, ix.
벨라르데, 돈 리노, 218.
베네수엘라, 56, 57, 70, 378.
벤티야, 228.
비아치, 241-42, 248.
비쿠냐 판초, 234, 327.
비쿠냐, 159, 160, 172, 246.
빌카밤바, 322.
빌카노타 산맥, 255.
빌카노타 강, 256, 257.
빌카푸히오, 162.
비야손, 볼리비아 대통령, viii.
포도원, 181.
비라코차, 276, 310, 351.
“태양의 처녀들”, 314.
비스카차니, 246.
볼칸, 75-76.
폰 츄디, 250.
임금, 243.
칠레, 볼리비아, 페루 간의 전쟁, 173, 206.
석제 전투 곤봉, 346.
독립 전쟁. ‘독립 전쟁’ 참조.
독립 전쟁, viii, 46-58, 67, 86, 89, 100, 162, 200, 273, 353.
워터리, 미 해군 함정, 206.
폭포, 288, 299.
수력, 370.
회전 추, 312.
회오리바람, 70.
위너, 찰스, 318, 320.
윌슨, 찰스 L., ix.
바람, 주된, 77.
포도주, 181.
양모, 30.
야바리, 225, 254.
황열병, 214.
“네, 선생님”, 382.
이야냐, 325.
요탈라, 112, 140.
이스쿠차카, 367-68.
유아트퀴니아, 320.
유카에스 강, 352.
수리타, 284-85.
리버사이드 출판사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미국
각주:
[1] 1910년 8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칠레에 큰 손실이었다.
[2]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의 토마스 바버는 이것들이 일반적으로 다시푸스 벨루로수스라고 내게 말했다. 많은 흥미로운 아이마라 장난감과 직물의 컬러 도판은 스튀벨의 ‘남아메리카 민족의 문화와 산업’에서 찾을 수 있다.
[3] 톰슨 경리의 이스터 섬 방문 보고서에는 삭사이우아만과 놀랄 만큼 유사한 벽의 도면과 사진이 있다. 돌과 돌 사이의 특이한 밀착, 돌의 크기와 줄눈에 시멘트가 없는 점이 동일하다. 쿡의 ‘1772-1775년 세계 일주 항해'(런던, 1777년)도 참조.
[4] E. G. 스키어, ‘페루’, 503쪽.
[5] ‘페루와 볼리비아’, 293-5쪽.
[6] 라이몬디, ‘페루’, 2권, 161쪽.
[7] “하이람 빙엄 박사가 페루에서 수집한 일부 육지 껍데기에 대하여”;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xxxviii. 177-182. 껍데기는 “불리물루스의 다양한 종과 변종, 그리고 클라우실리아 한 종”을 포함했다. 후자는 H. A. 필스브리 박사가 기술했다.
교정자가 수정한 오타:
76쪽: It it to be hoped => It is to be hoped
121쪽: the sevententh century => the seventeenth century
171쪽: When the Antogafasta => When the Antofagasta
191쪽: late Bartolome Mitré => late Bartolome Mitre
206쪽: port been devasted by earthquakes => port been devastated by earthquakes
214쪽: More deaths occuring => More deaths occurring
278쪽: Futhermore, they were => Furthermore, they were
335쪽: surmouted an exceedingly bleak plateau => surmounted an exceedingly bleak plateau
369쪽: in this vicintiy => in this vici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