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은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고전 문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생성형 AI 기술인 LLM의 발전으로 팔만대장경 프로젝트가 가능해졌습니다. LLM은 거의 전문가 수준의 매끄러운 번역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 누구나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OpenAI 의 GPT-4o, Anthropic의 Claude-3.5 Sonnet Google의 Gemini-1.5 Pro와 Gemini-1.5 Flash, Stable Diffusion 의 Stable Image Ultra 및 Microsoft의 Text 분석 기술을 MAIDEPOT의 AI 자동 융복합 기능으로 결합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사용된 도구와 프롬프트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 PDF 300페이지 번역 전문가 수준의 초벌 번역"
물론 LLM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특성상 일부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고전 서적을 번역하여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날 것의 상태로 프로젝트의 양과 질과 높이는 일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번역 또는 편집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contact@maidepot.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정보: 이 텍스트는 1922년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이 쓴 “잉카 랜드(INCA LAND)”라는 책의 서문과 1~18장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빙엄은 4차례에 걸친 페루 탐험을 통해 잉카 문명과 그들의 땅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정보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푸나(Coropuna) 산 등반,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 호수 탐사, 잉카의 마지막 수도였던 우이티코스(Uiticos)와 빌카밤바(Vilcabamba) 유적 발굴 과정, 그리고 마추픽추(Machu Picchu) 발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빙엄은 탐험 중 겪었던 어려움과 흥미로운 에피소드, 그리고 잉카 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번역 시 고려사항:
- 1920년대 미국 영어를 현대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번역해야 합니다.
- 지명, 인명, 고유명사 등은 한국어로 음차하되,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원어를 병기합니다. (예: 코로푸나(Coropuna))
- 잉카 문명과 관련된 전문 용어는 정확하게 번역하고, 필요한 경우 각주를 통해 추가 설명을 제공합니다.
- 빙엄의 탐험 과정과 감상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서술 방식과 어조를 유지합니다.
- 탐험 중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자연스러운 구어체로 번역합니다.
- 단순 서술의 경우 ‘-했다’와 같이 짧게 끝나는 문체를 사용합니다.
- 책의 서문, 본문, 용어집 등 각 부분의 문체를 구분하여 번역합니다.
모든 등장인물 정보:
-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저자 – 탐험에 대한 열정과 잉카 문명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 학자. 객관적인 정보 전달과 주관적인 감상을 섞어 서술하는 스타일.
- 클래런스 헤이(Clarence L. Hay): 1909년 탐험 동료 –
- 해리 워드 푸트(Harry Ward Foote): 1911년 탐험 동료, 예일대 교수 – 탐험 준비와 식량 조달에 꼼꼼한 성격.
- 아이제이아 보먼(Isaiah Bowman): 1911년 탐험 동료, 예일대 교수 – 지질학 및 지형학 전문가.
- 윌리엄 어빙(William G. Erving): 1911년 탐험 동료, 의사 –
- 카이 헨드릭슨(Kai Hendriksen): 1911년 탐험 동료, 측량사 –
- H. L. 터커(H. L. Tucker): 1911년 탐험 동료 – 등반 전문가. 코로푸나 등반 계획 및 실행 담당.
- 폴 라니우스(Paul B. Lanius): 1911년 탐험 동료 –
- 허버트 그레고리(Herbert E. Gregory): 1912년 탐험 동료, 예일대 교수 –
- 조지 이튼(George F. Eaton): 1912년 탐험 동료, 예일대 피바디 박물관 골학 큐레이터 –
- 루터 넬슨(Luther T. Nelson): 1912년 탐험 동료, 의사 –
- 앨버트 범스테드(Albert H. Bumstead): 1912년 탐험 동료, 측량 기사 –
- E. C. 어디스(E. C. Erdis): 1912년, 1915년 탐험 동료 –
- 케네스 힐드(Kenneth C. Heald): 1912년 탐험 동료 – 콜로라도에서 공학 교육을 받음.
-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 1912년 탐험 동료 –
- 폴 베스터(Paul Bestor): 1912년 탐험 동료 –
- 오스굿 하디(Osgood Hardy): 1912년, 1915년 탐험 동료 –
- 조셉 리틀(Joseph Little): 1912년 탐험 동료 –
- 데이빗 포드(David E. Ford): 1915년 탐험 동료 –
- O. F. 쿡(O. F. Cook): 1915년 탐험 동료 –
- 에드먼드 헬러(Edmund Heller): 1915년 탐험 동료 –
- E. L. 앤더슨(E. L. Anderson): 1915년 탐험 동료 –
- 클래런스 메이나드(Clarence F. Maynard): 1915년 탐험 동료 –
- J. J. 해즈브룩(J. J. Hasbrouck): 1915년 탐험 동료 –
- 제프리 모킬(Geoffrey W. Morkill): 1915년 탐험 동료 –
- G. 브루스 길버트(G. Bruce Gilbert): 1915년 탐험 동료 –
- 카시미르 왓킨스(Casimir Watkins): 영국인 박물학자 – 코로푸나 등반 시 베이스캠프 담당.
- F. 힝클리(F. Hinckley): 하버드 천문대 직원 –
- 가마라(Gamarra): 병장, 인디오 – 용감하지만 술에 약한 면모를 보임.
- 파블로 테하다(Pablo Tejada): 아리에로 – 코로푸나 등반 시 짐꾼 역할을 맡은 노새 몰이꾼. 노새에 대한 애정과 낯선 지역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보여줌.
- 알레한드로 코엘로(Alejandro Coello): 콘데수요스(Condesuyos) 국립학교 교장 –
- 파스토르(Pastór): 콘데수요스 지역 의사 –
- 베나비데스(Benavides): 콘데수요스 지역 행정 장관 – 친절하고 호의적인 성격.
- 비스카라(Viscarra): 코타우아시(Cotahuasi) 지역 행정 장관 – 친절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인물.
- 윌리엄 모킬(William L. Morkill): 페루 기업인 – 페루 과학 연구를 후원하는 인물.
- 체사레 로멜리니(Cesare Lomellini): 쿠스코(Cuzco) 지역 사업가 –
- 블랑쉬 톰킨스(Blanche Peberdy Tompkins): 비서 –
- 메리 레이놀즈(Mary G. Reynolds): 비서 –
- 알프레드 미첼(Alfred Mitchell) 부인: –
- 리차르도 차라하(Ricardo Charaja): 케추아어 조수 –
- 기세케(Giesecke): 쿠스코 대학교 총장 –
- 아길라르(Aguilar): 쿠스코 대학교 교수 –
- 판코르보(Pancorbo): 빌카밤바 지역 농장주 –
- 멜초르 아르테아가(Melchor Arteaga): 만도르 팜파(Mandor Pampa) 농장 임차인 –
- 카라스코(Carrasco): 경사 –
- 페드로 두케(Pedro Duque): 산타 아나(Santa Ana) 농장주 –
- 에바리스토 모그로베호(Evaristo Mogrovejo): 루크마(Lucma) 마을 행정 장관 –
- 피오 모그로베호(Pio Mogrovejo): 에바리스토의 형제 –
- 로페즈 토레스(Lopez Torres): 고무 채취꾼 –
- 사베드라(Saavedra): 콘세르비다요크(Conservidayoc) 지역 농장주 –
- 구즈만(Guzman): 팜파코나스(Pampaconas) 마을 주민, 짐꾼 –
- 리차르테(Richarte): 마추픽추 인근 농부 –
- 알바레즈(Alvarez): 마추픽추 인근 농부 –
- 키스피 쿠시(Quispi Cusi): 빌카밤바 마을의 나이 많은 인디오 –
모든 중요 용어 번역어:
- INCA LAND: 잉카 랜드 –
- Hiram Bingham: 하이럼 빙엄 –
- Apurimac: 아푸리막 강 –
- the “great speaker”: “위대한 이야기꾼” – 아푸리막 강의 별칭.
- Cuzco: 쿠스코 –
- Inca: 잉카 –
- Choqquequirau: 초케키라우 –
- Urubamba: 우루밤바 강 –
- Manco: 망코 –
- Pizarro: 피사로 –
- Cordillera: 코르디예라 산맥 –
- Andes: 안데스 산맥 –
- Coropuna: 코로푸나 –
- Arequipa: 아레키파 –
- Aconcagua: 아콩카과 –
- Sihuas: 시우아스 –
- Majes: 마헤스 –
- Conservidayoc: 콘세르비다요크 –
- médanos: 메다노스 – 초승달 모양의 사구.
- arrieros: 아리에로 – 노새 몰이꾼.
- soroche: 소로체 – 고산병.
- aguardiente: 아구아르디엔테 –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주.
- Castilla: 카스티야 –
- Condesuyos: 콘데수요스 –
- chuño: 추뇨 – 얼린 감자.
- Cieza de Leon: 시에사 데 레온 –
- Calvario: 칼바리오 –
- aneroid: 아네로이드 기압계 –
- Watkins: 왓킨스 –
- Topographer Hendriksen: 측량사 헨드릭슨 –
- Pampa Colorada: 팜파 콜로라다 – 붉은 사막.
- Solimana: 솔리마나 –
- Cotahuasi: 코타우아시 –
- Antabamba: 안타밤바 –
- Chumpillo: 춤필료 –
- Rio Arma: 아르마 강 –
- vicuñas: 비쿠냐 –
- andenes: 안데네스 – 계단식 밭.
- Colegio Nacional: 국립 학교 –
- rocas jeroglificos: 로카스 헤로글리피코스 – 그림 문자 바위.
- coca: 코카 – 코카인을 추출하는 관목.
- Quichua: 케추아어 –
- Appalachian Mountain Club: 애팔래치아 산악 클럽 –
- crampons: 크램폰 –
- pemmican: 페미컨 –
- Kola chocolate: 콜라 초콜릿 –
- Plasmon biscuit: 플라스몬 비스킷 –
- Silver’s self-heating “messtins”: 실버의 자체 발열 “메스틴” –
- Alpine glow: 알펜글로우 –
- Parinacochas: 파리나코차스 –
- Flamingo Lake: 플라밍고 호수 –
- Royal Geographical Society: 영국 왕립 지리학회 –
- bathymetric survey: 수심 측량 –
- William Miller: 윌리엄 밀러 –
- Titicaca: 티티카카 호수 –
- Lampa: 람파 –
- Ajochiucha: 아호치우차 –
- alpacas: 알파카 –
- guanaco: 과나코 –
- llama: 야마 –
- Chichipampa: 치치팜파 –
- Huancahuanca: 우안카우안카 –
- Sarasara: 사라사라 –
- Colcabamba: 콜카밤바 –
- Finca Rodadero: 로다데로 농장 –
- Puyusca: 푸유스카 –
- Incahuasi: 잉카우아시 –
- Nasca: 나스카 –
- cists: 시스트 – 돌로 만든 관.
- obsidian: 흑요석 –
- tutu potato: 투투 감자 –
- oca: 오카 –
- añu: 아뉴 –
- ullucu: 울루쿠 –
- viscachas: 비스카차 –
- Maraicasa: 마라이카사 –
- Sondor: 손도르 –
- Caraveli: 카라벨리 –
- eucalyptus: 유칼립투스 –
- Callanga: 칼랑가 –
- boba: 보바 – 독사의 일종.
- Andaray: 안다라이 –
- Rio Grande: 리오 그란데 –
- Puno: 푸노 –
- totoras: 토토라 –
- balsa: 발사 – 갈대로 만든 배.
- Aymaras: 아이마라 족 –
- Tiahuanaco: 티아우아나코 –
- Cordillera Real: 코르디예라 레알 산맥 –
- Sorata: 소라타 –
- Koati: 코아티 섬 –
- Copacabana: 코파카바나 –
- Chola: 촐라 –
- aniline dyes: 아닐린 염료 –
- Santa Rosa: 산타 로사 –
- Cordillera Vilcanota: 빌카노타 산맥 –
- suncca:
- Araranca: 아라란카 –
- Ucayali: 우카얄리 강 –
- Amazon: 아마존 강 –
- Titu Yupanqui: 티투 유팡키 –
- Amautas: 아마우타 – 잉카 이전 페루 고지대를 다스린 통치자.
- Tampu-tocco: 탐푸토코 –
- Paccaritampu: 파카리탐푸 –
- slings: 슬링 –
- ichu grass: 이추 풀 –
- cañihua: 카니우아 –
- quinoa: 키누아 –
- Occobamba: 오코밤바 –
- Sicuani: 시쿠아니 –
- Racche: 라체 –
- Viracocha: 비라코차 –
- Huatanay: 우아타나이 강 –
- Lucre: 루크레 –
- Oropesa: 오로페사 –
- Angostura: 앙고스투라 –
- Rumiccolca: 루미콜카 –
- Piquillacta: 피키야크타 –
- Pisac: 피삭 –
- Yucay: 유카이 –
- Muyna: 무이나 –
- Tipon: 티폰 –
- Quispicanchi: 키스피칸치 –
- Kkaira: 카이라 –
- Picol: 피콜 –
- San Geronimo: 산 헤로니모 –
- Saylla: 사이야 –
- Huanacaurai: 우아나카우라이 –
- Pachatucsa: 파차투크사 –
- Soiroccocha: 소이로코차 –
- Pucará: 푸카라 – 요새.
- Lkalla Chaca: 야카야 차카 –
- Tampu Machai: 탐푸 마차이 –
- Cachimayo: 카치마요 –
- Las Salinas: 라스 살리나스 –
- Rumihuasi: 루미우아시 –
- Chunchullumayo: 춘출루마요 –
- Ayahuaycco: 아야우아 이코 –
- Peabody Museum: 피바디 박물관 –
- Pleistocene: 플라이스토세 –
- Lake Morkill: 모킬 호수 –
- Colcampata: 콜캄파타 –
- Sacsahuaman: 삭사우아만 –
- Tullumayu: 툴루마유 –
- Huaccoto: 우아코토 –
- La Merced: 라 메르세드 –
- San Francisco: 산 프란시스코 –
- Hotel Central: 호텔 센트럴 –
- Anta: 안타 –
- Huaracondo: 우아라콘도 –
- Maras: 마라스 –
- Chincheros: 친체로스 –
- Ttica-Ttica: 티카티카 –
- Sencca: 센카 –
- Orejones: 오레호네스 –
- Don Alonzo Enriques de Guzman: 돈 알론소 엔리케스 데 구스만 –
- Ollantaytambo: 오얀타이탐보 –
- Uilcapampa: 우일카팜파 –
- Veronica: 베로니카 –
- Salcantay: 살칸타이 –
- Soray: 소라이 –
- Panta: 판타 –
- Panticalla: 판티칼라 –
- Sir Paul Rycaut: 폴 라이카우트 경 –
- Villadiego: 빌라디에고 –
- arquebus: 아르케부스 –
- Ayacucho: 아야쿠초 –
- Father Calancha: 칼란차 신부 –
- Gomez Perez: 고메스 페레스 –
- Diego Mendez: 디에고 멘데스 –
- New Laws: 신법 –
- Beatrix Coya: 베아트리스 코야 공주 –
- John Sierra: 존 시에라 –
- Friar Melchior: 멜키오르 수사 –
- John Betanzos: 존 베탄소스 –
- Atahualpa: 아타우알파 –
- Chuquichaca: 추키차카 –
- Yucay: 유카이 –
- Titu Cusi Yupanqui: 티투 쿠시 유팡키 –
- Tupac Amaru: 투팍 아마루 –
- Friar Marcos Garcia: 마르코스 가르시아 수사 –
- Puquiura: 푸키우라 –
- Friar Diego Ortiz: 디에고 오르티스 수사 –
- Huarancalla: 우아란칼라 –
- Chuquipalpa: 추키팔파 –
- Yurac Rumi: 유락 루미 –
- Don Francisco de Toledo: 돈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
- Tilano de Anaya: 틸라노 데 아나야 –
- Martin Hurtado: 마르틴 우르타도 –
- Hualpa: 우알파 –
- Simaponte: 시마폰테 –
- Mañaries: 마냐리에스 –
- Momori: 모모리 –
- Viticos: 비티코스 –
- Vitcos: 비트코스 –
- Pitcos: 피트코스 –
- Biticos: 비티코스 –
- Vilcabamba: 빌카밤바 –
- de Laet: 드 래 –
- Mercator: 메르카토르 –
- Nuremberg: 뉘른베르크 –
- Pincos: 핀코스 –
- Picos: 피코스 –
- Los Viticos: 로스 비티코스 –
- Les Viticos: 레 비티코스 –
- Raimondi: 라이몬디 –
- Paz Soldan: 파스 솔단 –
- Don Carlos Romero: 돈 카를로스 로메로 –
- Huayna Picchu: 와이나 픽추 –
- Matcho Picchu: 마초 픽추 –
- Charles Wiener: 샤를 비에너 –
- William C. Farrabee: 윌리엄 C. 패러비 –
- Convencion: 콘벤시온 –
- San Miguel: 산 미겔 –
- Pancorbo: 판코르보 –
- Lomellini: 로멜리니 –
- Harvard Anthropological Expedition: 하버드 인류학 탐험 –
- tesoro: 테소로 – 보물.
- Plaza of San Francisco: 산 프란시스코 광장 –
- Cuzceños: 쿠스케뇨 – 쿠스코 시민.
- La Raya: 라 라야 –
- Araranca: 아라란카 –
- Vilcanota: 빌카노타 –
- Ausangate: 아우상가테 –
- Collas: 콜라 족 –
- Titu Truaman Quicho: 티투 트루아만 키초 –
- Tupac Cauri: 투팍 카우리 –
- Pachacuti VII: 파차쿠티 7세 –
- quipus: 키푸 –
- Pachacuti Yamqui Salcamayhua: 파차쿠티 얌키 살카마이우아 –
- Manco Ccapac: 망코 카팍 –
- Huayna Capac: 와이나 카팍 –
- Sayri Tupac: 사이리 투팍 –
- Titu Cusi: 티투 쿠시 –
- Don Christoval de Albornoz: 돈 크리스토발 데 알보르노스 –
- Precentor: 성가대 지휘자 –
- Guay-napucará: 와이나푸카라 –
- Prince Philipe Quispetutio: 필리페 키스페투티오 왕자 –
- Rosaspata: 로사스파타 –
- Uncapampa: 웅카팜파 –
- Los Andenes: 로스 안데네스 –
- ñusta Isppana:
- Chuquipalta: 추키팔타 –
- Ungacacha: 웅가카차 –
- Yungas: 융가스 –
- Ccllumayu: 셀루마유 –
- Colpani: 콜파니 –
- Lucumayo: 루쿠마요 –
- Chauillay: 차우이야이 –
- Quillabamba: 키야밤바 –
- Lucma: 루크마 –
- Pio Mogrovejo: 피오 모그로베호 –
- Idma: 이드마 –
- Incahuaracana: 잉카우아라카나 –
- Tincochaca: 틴코차카 –
- San Francisco de la Victoria de Vilcabamba: 산 프란시스코 데 라 빅토리아 데 빌카밤바 –
- Onccoy: 온코이 –
- Don Luis de Velasco: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 –
- Conservidayoc: 콘세르비다요크 –
- Espiritu Pampa: 에스피리투 팜파 –
- Pampaconas: 팜파코나스 –
- Banbaconas: 밤바코나스 –
- Cosireni: 코시레니 –
- San Fernando: 산 페르난도 –
- Vista Alegre: 비스타 알레그레 –
- mato-palo: 마토팔로 –
- Pacaypata: 파카이파타 –
- Jesús Maria: 헤수스 마리아 –
- chancaca: 찬카카 –
- pava de la montaña: 파바 데 라 몬타냐 –
- Pichanguerras: 피찬게라스 –
- Campa: 캄파 –
- Eromboni: 에롬보니 –
- Comberciato: 콤베르시아토 –
- red howler: 붉은고함원숭이 –
- spider monkey: 거미원숭이 –
- woolly monkey: 양털원숭이 –
- Intihuatana: 인티우아타나 – 해시계.
잉카 랜드
페루 고지대 탐험기
하이럼 빙엄 지음
1922년
도표
“뭔가 숨겨져 있다. 가서 찾아라. 산맥 너머로 가서 보아라–
산맥 뒤에 잃어버린 것이 있다. 잃어버렸지만 너를 기다리고 있다. 가라!”
키플링: “탐험가”
이 책을
영감을 준 뮤즈
일곱 아들의 작은 어머니에게
애정을 담아 바칩니다
서문
다음 페이지들은 네 차례에 걸친 페루 내륙 여행과 잉카와 그들의 땅을 다룬 초기 문헌들의 미로를 탐험한 결과물의 일부를 담고 있다. 내 여행은 남부 페루의 일부만을 다뤘지만, 서반구에서 인간이 집을 짓거나 텐트를 친 거의 모든 고도—해수면에서 6,615미터까지—를 오르며 다양한 기후를 경험하게 했다. 나는 눈이 많이 내리고 기온이 낮은 황량한 안데스 고개를 넘었고, 세계에서 가장 덥고 습한 지역인 아마존 분지의 울창한 정글로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을 통과했다. 잉카는 극단적인 대조의 땅에 살았다. 시우아스와 마헤스의 사막만큼 식물이 없는 사막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콘세르비다요크의 울창한 열대 계곡만큼 식물이 풍부한 곳도 없다. 잉카 랜드에서는 몇 시간 만에 빙하에서 나무고사리로 이동할 수 있다. 마지막 잉카에 관한 동시대 연대기의 미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역사가도 사실에서 공상으로, 정확한 관찰에서 괴상한 상상으로 더 빠르게 넘어가지 않으며, 어떤 작가도 더 자주 중요한 세부사항을 생략하거나 모순된 진술을 하지 않는다. 잉카의 이야기는 여전히 의심과 모순의 미로 속에 있다.
19세기 탐험가의 멋진 삽화에 담긴 신비와 로맨스가 나를 처음으로 아푸리막과 우루밤바 사이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지역, 때로는 “잉카의 요람”이라 불리는 곳으로 이끌었다. 내 사진들이 그런 예술가의 상상력 넘치는 연필 그림과 경쟁할 순 없지만, 그래도 미래의 여행자들이 잉카의 땅으로 더 깊이 들어가 연대기에 언급된 찾기 힘든 장소들을 확인하는 매력적인 게임에 참여하도록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이야기의 일부는 이미 하퍼스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렸으며, 편집자들에게 그 자료를 현재 형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참고문헌을 보면 예일대학교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의 페루 탐험 결과로 50편 이상의 논문과 단행본이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보고서들은 아직 준비 중이다. 내 관찰은 부분적으로 이 단행본들과 이전 여행자들의 글을 연구한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동료들이 만든 지도와 메모에 기반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페루 사진 – 이제 11,000장이 넘는 네거티브를 보유한 컬렉션 – 을 연구한 결과다. 또 다른 정보원은 동료 탐험가들과의 빈번한 회의였다. 대규모 탐험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서로 다른 교육을 받은 마음들이 같은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여행에서 내 동행자들은 1909년에는 클래런스 L. 헤이였고, 1911년에는 아이제이아 보먼, 해리 워드 푸트 교수, 윌리엄 G. 어빙 박사, 카이 헨드릭슨, H. L. 터커, 폴 B. 라니우스였다. 1912년에는 허버트 E. 그레고리 교수, 조지 F. 이튼 박사, 루터 T. 넬슨 박사, 앨버트 H. 범스테드, E. C. 어디스, 케네스 C. 힐드, 로버트 스티븐슨, 폴 베스터, 오스굿 하디, 조셉 리틀이 동행했다. 1915년에는 데이빗 E. 포드 박사, O. F. 쿡, 에드먼드 헬러, E. C. 어디스, E. L. 앤더슨, 클래런스 F. 메이나드, J. J. 해즈브룩, 오스굿 하디, 제프리 W. 모킬, G. 브루스 길버트가 함께했다. 항상 편안하거나 안전하지만은 않았던 이 모험에 함께한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다음 페이지에서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의 작업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왜 그것이 간과되었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미 준비 중인 다른 책에서, 특히 마추픽추와 그 주변을 더 자세히 다루고 싶은 책에서 결국 여기서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또한 도움을 얻기 가장 어려운 시기에 관대한 지원을 제안해 준 에드워드 S. 하크니스 씨, 열정적이고 관대한 지원을 해준 길버트 그로스브너 씨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 가장 중요한 공식적 도움을 준 미국의 태프트 대통령과 페루의 레기아 대통령, W. R. 그레이스 & 컴퍼니와 페루 기업의 윌리엄 L. 모킬 씨, L. S. 블레이스델 씨의 열정적이고 끊임없는 협력, 체사레 로멜리니 씨, 페드로 두케 씨와 그들의 아들들, 예일대학교의 프레데릭 B. 존슨 씨의 많은 실질적인 친절, 블랑쉬 페버디 톰킨스 부인과 메리 G. 레이놀즈 양의 귀중한 비서 지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작지 않게, 이 책을 쓸 수 있게 해준 알프레드 미첼 부인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한다.
하이럼 빙엄
예일대학교
1922년 10월 1일
목차
I. 사막을 건너다 1
II. 코로푸나 등반 23
III. 파리나코차스로 50
IV. 플라밍고 호수 74
V. 티티카카 95
VI. 빌카노타 지방과 페루 고산 주민들 110
VII. 우아타나이 계곡 133
VIII. 남아메리카 최고(最古)의 도시 157
IX. 마지막 네 명의 잉카 170
X. 마지막 잉카 수도를 찾아서 198
XI. 탐색 계속 217
XII. 우이티코스 요새와 태양의 집 241
XIII. 빌카밤바 255
XIV. 콘세르비다요크 266
XV. 유령의 팜파 292
XVI. 초기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 탐푸토코 이야기 306
XVII. 마추픽추 314
XVIII. 마추픽추의 기원 326
용어집 341
예일대학교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의 페루 탐험대 참고문헌 345
색인 353
도판 목록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가서 찾아라. 산맥 너머를 가서 보라.”
권두화
남부 페루 약도 1
북서쪽에서 본 코로푸나 산 12
남쪽에서 본 코로푸나 산 24
해발 5,270m의 코로푸나 베이스 캠프 32
H. L. 터커 촬영
코로푸나 경사면 해발 5,620m에서의 캠핑 32
H. L. 터커 촬영
코로푸나 등반 중 자주 하는 휴식 중 하나 42
H. L. 터커 촬영
정상 캠프 42
H. L. 터커 촬영
코타우아시의 부지사와 그의 군사 보좌관, 그리고 터커, 헨드릭슨, 보먼, 빙엄이 지역 양탄자 직조 산업을 살펴보는 모습 60
C. 왓킨스 촬영
콜타 근처 치치팜파의 잉카 창고 66
H. L. 터커 촬영
파리나코차스 호수의 플라밍고와 사라사라 산 78
카라벨리 근처 산길에서의 터커 씨 90
추키밤바의 메인 스트리트 90
H. L. 터커 촬영
푸노의 티티카카 호수 발사 98
코아티 섬의 계단식 감실 98
산타 로사의 인디오 알칼데들 114
시쿠아니 광장의 토착 약사들 114
라 라야 고개 근처에서 담요 날실 놓기 120
라 라야에서 감자 밭 갈기 120
라체의 비라코차 신전 유적 128
1912년 페루 탐험대의 경로 지도 132
루크레 분지, 무이나 호수, 그리고 피키야크타의 도시 성벽 136
삭사우아만: 하단 계단식 벽 상세 140
루미콜카 수로 유적 140
우아타나이 계곡, 쿠스코, 그리고 아야우아이코 협곡 150
페루 지도와 쿠스코 전경 158
1578년 안트베르펜 출판 “세계의 거울”에서
쿠스코의 예수회 성당 탑과 수도원, 대학 테니스 코트 162
쿠스코와 우이티코스 사이의 빙하 170
우루밤바 협곡: 잉카들이 우일카팜파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이유 176
사이리 투팍의 마지막 거처 유카이 186
핀코스와 안데스 산맥을 보여주는 1599년 뉘른베르크 지도의 일부 198
1915년 페루 탐험대의 경로 지도 202
베로니카 산과 살라푼코, 우일카팜파로 가는 관문 206
그로브너 빙하와 살칸타이 산 210
마추픽추 근처 마키나와 만도르 팜파 사이의 길 214
우아드키냐 220
우아드키냐 근처 유락 루미 유적 225
A. H. 범스테드가 그린 평면도와 입면도
빌카밤바 계곡의 푸큐라와 로사스파타 언덕 238
로사스파타의 긴 궁전 주 출입구 242
E. C. 어디스 촬영
로사스파타 유적의 또 다른 출입구 242
유락 루미의 북동쪽 면 246
뉴스타 이스파나의 태양신전 유적 평면도 248
R. H. 범스테드 작성
뉴스타 이스파나의 조각된 좌석과 플랫폼 250
큰 흰 바위 아래 샘물 근처의 일곱 좌석 중 두 개 250
A. H. 범스테드 촬영
뉴스타 이스파나 256
잉카 유적에 대해 증언하는 키스피 쿠시 268
H. W. 푸트 촬영
팜파코나스 강을 건너는 우리의 짐꾼들 중 한 명 268
H. W. 푸트 촬영
사베드라와 그의 잉카 도자기 288
에스피리투 팜파의 잉카 박공 288
에스피리투 팜파 정글의 잉카 유적 294
H. W. 푸트 촬영
에스피리투 팜파의 캄파 족 남성들 302
H. L. 터커 촬영
에스피리투 팜파의 캄파 족 여성과 아이들 302
H. L. 터커 촬영
파카리탐푸 근처의 푸마 우르코 306
파카리탐푸 근처 마우칼락타의 최고의 잉카 벽 312
파카리탐푸 근처 푸마 우르코의 동굴들 312
마추픽추 동굴 내부의 플래시 촬영 320
마추픽추의 동굴 위 신전; 저자가 탐푸토코의 추정 위치로 제안 320
마추픽추 주 신전의 세부 324
마추픽추 삼창 신전 외부의 세부 324
마추픽추의 세 창문이 있는 석조 벽 328
협곡들이 넓게 벌어지며 우일카팜파(Uilcapampa)의 화강암 요새, 잉카 랜드의 왕관을 드러낸다 338
달리 명시되지 않은 한 모든 삽화는 저자의 사진임.
그림
남부 페루 약도.
잉카 랜드
제1장
사막을 건너며
볼리비아의 한 친절한 친구가 E. 조지 스키어(E. George Squier)의 “페루. 잉카의 땅에서의 여행과 탐험”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을 내게 건넸다. 그 책에는 아푸리막 계곡의 경이로운 사진이 있었다. 전경에는 절벽 면의 터널에서 시작해 “위대한 이야기꾼”의 소용돌이치는 물 위로 높이 매달린 섬세한 현수교가 있었다. 멀리 거대한 산들 위로 웅장한 눈 덮인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아푸리막을 보고 그 다리를 건너는 짜릿함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리마까지 육로 여행을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 나는 잉카 제국의 고대 수도인 쿠스코(Cuzco)로 갔고, 그곳에서 페루 당국이 새롭게 재발견된 잉카 유적을 방문하라고 권했다. “남미를 가로질러” 독자들이 기억하겠지만, 이 유적은 초케키라우(Choqquequirau)로, 아푸리막의 거센 급류 위 수천 피트 정글로 덮인 능선 꼭대기에 있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누가 원래 이곳에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었다. 지사는 이 유적이 망코 잉카(Manco Inca)와 그의 아들들이 페루의 스페인 정복자 피사로(Pizarro)와 그 일행을 피해 아푸리막과 우루밤바 강(Urubamba) 사이의 안데스 산맥(Andes)으로 도피했을 때의 거처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클래런스 L. 헤이(Clarence L. Hay)와 함께 초케키라우의 언덕에 있을 때 구름이 간간이 걷히면서 눈 덮인 산들이 아른거리며 보였다. 산맥 뒤편에 미지의 영역이 있는 것 같았고, 그곳에는 큰 가능성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안내인들은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했다. 책에서도 별로 찾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망코의 수도가 그곳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몇 달 후에도 미지의 영역에 대한 매력이 내 생각을 초케키라우와 그 너머로 이끌었다. 키플링의 “탐험가”의 말을 빌리자면:
“…양심만큼이나 나쁜 목소리가 끝없이 변주를 하며
밤낮으로 반복되는 영원한 속삭임을 들려주었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가서 찾아라. 산맥 너머를 보아라 –
산맥 너머에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 잃어버린 채 너를 기다리고 있다. 가라!’”
내 불안을 더하기 위해 그 다음 여름에 나는 막 출간된 반델리에(Bandelier)의 “티티카카와 코아티(Titicaca and Koati)”를 읽었다. 흥미로운 각주 중 하나에 이런 놀라운 말이 있었다. “페루 해안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들의 정확한 고도를 측정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 아레키파(Arequipa) 주의 페루 해안 산맥에 있는 코로푸나(Coropuna)가 대륙의 최고봉일 가능성이 있다. 해발 23,000피트가 넘는 반면, 아콩카과[서반구 최고봉으로 인정받는]는 해발 22,763피트(6940미터)에 불과하다.” 그의 추정은 페루 남부 철도의 토목 기사들이 철도의 한 구간을 기준으로 삼아 측량한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 글을 읽었을 때의 내 감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10년 넘게 남미 역사와 지리를 공부해왔지만 코로푸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지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라이몬디(Raimondi)의 대축척 페루 지도 중 한 장에서 마침내 “코로푸나–6,949m”를 찾았다. 아콩카과보다 9미터나 더 높았다! 아레키파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 그리니치 서경 73도 근처였다.
73도 경선이 아마존 분지에서 태평양까지 페루를 가로지르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초케키라우 근처를 지나고 실제로 나를 유혹해왔던 “산맥 너머”의 땅을 가로질러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일치는 흥미진진했다. 그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싶은 욕구가 이제 코로푸나가 정말로 미대륙 최고봉인지 확인하고 싶은 유혹으로 더욱 강해졌다. 그 후 우루밤바 강의 카누 항해 가능한 최상류에서 태평양의 조수 한계선까지 73도 경선을 따라 페루의 지리학적 정찰을 목적으로 하는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우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의 성공은 큰 부분 해리 W. 푸트(Harry W. Foote) 교수와 내가 함께 고안한 ‘단위 식량 상자’라는 장치 덕분이었다. 우리 아이디어의 목적은 두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필요로 하는 모든 식량을 하나의 상자에 담아 소규모 현장 팀의 식량 조달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상자들은 탐험대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에게도 매우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우리 장비의 이 특징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가장 좋은 식량 상자는 두 사람이 8일 동안 먹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식단을 제공했고, 아침과 저녁은 영양가 있는 조리된 식사로, 점심은 가볍고 조리하지 않은 음식으로 구성되었다. 탐험대원들이 식량 상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식단에 변화를 주도록 의도했는데, 남부 페루에서는 주로 감자, 옥수수, 달걀, 양고기, 빵이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상자에는 슬라이스 베이컨, 통조림 소고기, 로스트 비프, 닭고기, 연어, 으깬 귀리, 우유, 치즈, 커피, 설탕, 쌀, 군용 빵, 소금, 단 초콜릿, 각종 잼, 피클, 건조 과일과 채소가 들어 있었다. 잼, 건조 과일, 수프, 건조 채소의 종류를 다양하게 함으로써 균형 잡힌 식단의 특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남부 안데스의 열악한 운송 여건 때문에 프랑스산 완두콩, 구운 콩, 통조림 과일 등 수분 함량이 높은 식품은 아무리 맛있고 바람직하더라도 제외해야 했다. 식품 외에도 각 상자에 세탁 비누 한 장, 식기 수건 2야드, 점심 도시락과 표본 수집에 사용할 빈 면 주머니 3개를 넣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우리 상자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식품은 압연 귀리였는데, 이미 부분적으로 조리되어 있어 쌀을 제대로 삶을 수 없는 고지대에서도 쉽게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설탕의 적정량을 맞추는 것은 어려웠다. 현장 시즌 초기에는 1인당 하루 3분의 1파운드라는 할당량이 과도해 보여 비판을 받았다. 한 달 후에는 그 할당량이 너무 적어서 보충해야 했다.
아레키파는 모두가 알다시피 하버드 천문대 관측소의 본거지이지만, 동시에 큰 노새로도 유명하다. 불행히도 최근 “노새 트러스트”가 형성되었는데 – 미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나는 만족스러운 협상을 하기 어려웠다. 2주간의 줄다리기 끝에 테하다 형제들이 나타났다. 두 아리에로, 즉 노새 몰이꾼이 우리의 제안을 들어볼 의향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2개월 동안 11마리의 짐 노새를 제공하고, 우리가 원하는 곳 어디든 함께 가주면 천 솔(500달러 금화)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루 평균 7리그[2] 이상 이동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간단해 보이지만, 아레키파의 우리 친구들이 이 훌륭한 아리에로들을 설득하여 이 거래로 영원히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납득시키는 데는 끝없는 논쟁과 설득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노새를 소유하고 있고, 우리와 코로푸나 산 사이에 있는 사막을 건너는 큰 위험을 알고 있으며, 낯선 길을 여행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노새 몰이꾼처럼 그들은 익숙하지 않은 지역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길의 상상 속 위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과장했다. 결국 그들이 제안된 계약을 수락하도록 설득한 논리는 첫 주가 지나면 짐이 훨씬 줄어들어 항상 최소 두 마리의 짐 노새가 자유로울 것이라는 나의 약속이었다. 테하다 형제들은 짐 동물들이 등에 상처를 입거나 절뚝거리게 될 가능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약속을 일종의 안전 요소로 여겼다. 절뚝거리는 노새는 짐을 실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달 말까지 모든 준비가 끝났다. H. C. 파커 교수의 1910년 매킨리 산 탐험대의 일원이자 눈과 얼음 등반의 세부 사항에 정통한 H. L. 터커 씨에게 적절한 장비를 확보하도록 요청했었고, 이제 그에게 코로푸나 실제 등반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일을 맡겼다. 산에서 이룬 성공은 주로 터커 씨의 기술과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우리에게는 스위스 가이드가 없었고, 원래는 탐험대의 다른 두 명에게 등반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는 73도 자오선을 따라 지질학적, 지형학적 횡단면을 만들고 안데스에서 가장 높은 고개 중 하나(17,633피트)를 넘는 일의 긴급성 때문에 측량팀이 11월 1일 전에 코로푸나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연됐다. 흐린 계절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들의 협력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지 않아 보였다. 따라서 나는 아레키파에서 영국인 박물학자 카시미르 왓킨스 씨와 하버드 천문대의 F. 힝클리 씨의 도움을 받았다. 힝클리 씨는 엘 미스티(19,120피트)를 두 번이나 등반한 경험이 있어 우리와 함께 정상에 오르고, 왓킨스 씨는 최근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한 터라 베이스캠프를 담당하기로 했다.
아레키파의 지사는 친절하게도 가마라 상병의 모습으로 군사 호위를 제공했다. 그는 평균 이상의 키에 평균을 훨씬 웃도는 용기를 가진 순수 혈통의 인디오로,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기마 헌병대의 일원으로서 가마라는 몇 달 전 코타우아시 주도에 주둔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보초 근무 중일 때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혁명가들의 무리가 정부 건물들을 습격했다. 가마라는 제 자리를 지켰고, 그들이 그를 지나치려 할 때 군중의 지도자를 쏘았다. 군중은 흩어졌다. 감사한 지사는 그를 상병으로 승진시키고, 그 지역에서 더 이상 그의 생명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아레키파로 전출시켰다. 하지만 그는 거의 모든 그의 인종처럼 술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아레키파의 기마 경찰 대장이 지사의 명령으로 사막을 건너는 여정에 우리의 호위를 제공하라고 했을 때 가마라를 우리에게 배정한 것을 기쁘게 여겼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용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의 습관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가마라는 우리가 코타우아시로 갈 계획이라는 것을 몰랐다. 만약 그가 이것을 알았고, 또 코로푸나 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시련을 의심했다면, 아마도 그는 빠져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앞서가고 있다.
10월 2일, 터커, 힝클리, 가마라 상병과 나는 아레키파를 떠났다. 왓킨스는 일주일 후에 따라왔다. 여정의 첫 단계는 아레키파에서 비토르까지 기차로 30마일을 가는 것이었다. 아리에로들도 화물을 보냈다. 식량 상자 외에도 우리는 텐트, 얼음 도끼, 스노슈, 기압계, 온도계, 경위의, 섬유 케이스, 강철 상자, 더플백, 접이식 보트를 가져갔다. 우리의 짐 노새 대열은 전날 아레키파를 출발했어야 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거의 같은 시간에 비토르에 도착하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여정의 첫날에 아리에로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초라한 작은 기차역 근처에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인근 팜파를 돌아다니며 대 해안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승달 모양의 모래 언덕인 메다노스를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대 열대 우림에 대해 많이 읽는다.
남아메리카의 정글과 거의 통과할 수 없는 숲을 생각하면, 북쪽 에콰도르에서 남쪽 칠레 중심부까지 이어지는 서해안이 거대한 사막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다. 이 사막은 간간이 오아시스나 계곡으로 끊어지는데, 이 계곡들의 강은 안데스 산맥의 녹은 눈에서 발원해 곳곳에서 관개 용도로 물길이 돌려진다. 페루의 수도 리마는 이런 오아시스 중 가장 큰 곳 중 하나에 위치해 있다. 페루 해안 도시들은 습한 안개에 자주 휩싸이지만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의 원인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대서양과 아마존 분지의 수증기를 머금고 있다가 안데스 산맥 동쪽 사면에서 빠르게 냉각되어 이 수분을 몬타냐에 떨어뜨린다. 바람이 거대한 코르디예라 산맥을 넘을 때쯤이면 남은 비는 전혀 없다. 반대로 따뜻한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운 훔볼트 해류 위의 찬 지역을 만나게 되는데, 이 해류는 남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다. 이 차가운 지대가 서풍에서 수분을 짜내어, 따뜻한 육지에 도달할 때쯤에는 상대습도가 낮아진다. 물론 어떤 해에는 해안 산맥 경사면에 수분이 너무 많이 떨어져 언덕 측면이 꽃으로 덮이는 달도 있지만, 이런 초목은 오래 가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있는 거대한 사막 팜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지역의 다른 팜파와 마찬가지로, 평평한 지표면은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모래는 바람에 의해 밀려 다니다가 마침내 초승달 모양의 사구로 쌓인다. 이 메다노스는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사막의 밤에 부는 주된 바람은 시원한 산비탈에서 바다 쪽으로 불어오는 비교적 온화한 바람이다. 이 바람은 가벼운 모래 입자들을 규칙적인 사구 형태로 밀어내어 언덕 아래로 굴러가게 하고 무거운 입자들은 뒤에 남긴다. 낮에는 이 현상이 역전된다. 정오로 갈수록 열기가 증가하면서 과열된 팜파에서 급격히 상승하는 뜨거운 공기의 기류가 만든 진공을 채우기 위해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몰아친다. 이른 오후가 되면 이 바람은 높은 속도에 도달해 모래를 구름처럼 휘날린다. 이제 무거운 모래 입자들도 언덕 위로 밀어올릴 만큼 강해진다. 바람은 가장 무거운 입자들을 사구의 기저 주변으로 쓸어 양쪽에 뾰족한 능선으로 쌓아 올린다. 밤에는 무거운 물질이 정지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 가벼운 입자들이 언덕 아래로 굴러내리지만, 다음날 오후의 돌풍이 불 때 전체 질량이 다시 천천히 언덕 위로 이동한다. 그 결과로 아름다운 초승달 모양의 메다노가 만들어진다.
오후 5시경 우리의 노새들이 – 쿠스코 근처에서 구할 수 있었던 것들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무리였다 – 먼지 나는 작은 광장으로 힘차게 들어왔다. 짐을 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비토르 오아시스를 향해 떠난 것은 거의 7시가 다 되어서였다. 고원을 떠나 어두운 협곡으로 내려가는 먼지 나는 길에 들어섰을 때 북서쪽 지평선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것이 눈에 띄었다. 코로푸나였다! 오후 9시 직전에 우리는 작은 우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노새들의 짐을 내렸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깨끗한 돌바닥이 있는 헛간을 찾았는데, 거기에 침대를 설치했지만 밤새 지나가는 대상들 때문에 여러 번 깨어났다. 그들은 낮의 사막 열기를 피하려 했다.
비토르 오아시스의 경계는 관개 수로가 지나가는 등고선이다. 식물이 서서히 줄어들지 않는다. 사막은 충격적인 충돌과 함께 시작된다. 한쪽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원의 밝고 풍성한 녹음이 있고, 다른 쪽에는 모래 사막의 절대적인 벌거숭이 모습이 있다. 오아시스 안에는 물이 풍부하다. 많은 물이 낭비된다. 포도주 생산자들은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을 받는다. 실제로 더 많은 땅을 경작할 수 있다. 주요 어려움은 생산물을 외부 세계로 수출할 수 있는 항구의 부족, 오아시스와 철도 사이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짐승 대상의 비싼 운송 체계, 그리고 자본의 부족이다. 그렇지 않다면 관개 시스템을 지금은 비어 있는 비옥한 화산토 지역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45분 동안 꾸준히 올라가자 계곡의 북쪽 가장자리에 도달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북서쪽으로 75마일 떨어진 곳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코로푸나(Coropuna)의 눈 덮인 봉우리를 보았다. 우리의 전망은 짧았는데,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른 협곡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협곡을 건너 시우아스 팜파로 올라갔다. 우리의 바로 주변에는 흥미로운 것이 거의 없었지만, 멀리 코로푸나가 있었고, 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오르기 위한 가능한 경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힝클리 씨의 노새가 또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노새가 길 바로 앞에서 힘차게 달려와 뒷발로 차더니 힝클리를 다시 모래 위로 내던졌다. 기압계와 카메라, 접시들이 모두 흩어졌다. 불행히도 이번에는 그의 발이 등자에 걸려 고삐를 잡은 채로 한동안 끌려갔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노새가 달아나지 못하게 잡으려 했지만, 강한 발길질에 손을 놓치고 기절했다. 우리는 즉시 작은 ‘머머리’ 텐트를 뜨겁고 모래투성이인 사막 바닥에 설치하고 불운한 천문학자에게 응급처치를 했다. 새 신발을 신은 사나운 노새의 날카로운 발굽이 힝클리의 다리에 큰 혈관을 열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상처는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산을 오르기에는 너무 깊었다. 가마라의 도움으로 힝클리는 그날 밤 아레키파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강제 출발은 자신의 코로푸나 등반 희망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빙하에 도달했을 때 필요한 세 명의 로프 팀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물론 병장이 있긴 했지만, 그가 갈까? 인디오들은 눈 덮인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텐트를 싸서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오후 4시경 거대한 협곡 바닥에 있는 또 다른 아름다운 정원인 시우아스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리에로들과 함께 야외에서 캠핑해야 했을 텐데, 마침 본당 신부가 우리를 포도나무로 덮인 정자의 시원한 그늘에서 쉬도록 초대했다. 그는 친절하게 케이크와 달콤한 현지 와인을 대접하며 우리에게 원하는 만큼 머물라고 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마헤스 사막은 아마도 이 지역에서 가장 넓고 뜨겁고 황량할 것이다. 우리의 아리에로들은 낮 시간에 그곳을 건너기를 꺼려했다. 그들은 물과 물 사이의 거리가 45마일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저녁 식사 후까지 친절한 주인의 환대를 즐겼다.
이 오아시스 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서 집을 단순히 햇빛과 바람을 막는 정도로만 지었다. 집들은 큰 강바닥이나 관개 수로 둑을 따라 자라는 갈대로 만들어졌다. 지붕은 갈대 사이 공간을 햇볕에 말린 진흙으로 채웠다. 집 옆면에 회반죽을 할 필요가 없어서 바람이 자유롭게 통하게 하고 틈새로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달빛 아래 안장을 매었다. 천천히 계곡을 빠져나와 밤새도록 꾸준히 사막을 가로질러 달렸다. 달이 질 무렵 우리는 언덕 지대에 들어섰고, 일출 때 거대한 모래언덕 무리 한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했다. 이는 마헤스 팜파를 가로질러 불어온 수백 개의 메다노스(médanos)가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쌓인 결과였다. 사막 수준에서 깊이 1마일, 너비 2마일의 거대한 협곡이 보이는 지점까지 천천히 내려가는 데 3시간이 걸렸다. 가파른 측면은 다양한 색의 바위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은 건기에도 깊어서 건널 수 없는 빠른 마헤스 강이 흐르는 밝은 녹색 오아시스다. 범람원의 상당 부분은 경작되지 않은 채로 있어 건기에는 접근하기 힘들고 우기에는 강이 불어나면 불가능한 야생 정글을 이루고 있다. 거대한 모래 언덕과 무성한 식물 사이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계곡 반대편 가장자리 위로 보이는 코로푸나의 길고 반짝이는 하얀 덩어리였다. 이제 훨씬 더 크게 보였다.
아침 8시경, 우리가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피타스(또는 세로 콜로라도)라는 곳에서 조잡한 그림문자로 뒤덮인 거대한 화산암 바위를 발견했다. 주변을 더 살펴본 결과 이런 바위가 약 100개 있었고, 각각에 조잡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바위 근처에서 집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지역을 여러 번 지나간 테하다 형제들이나 이 지역 원주민 중 누구도 이 독특한 그림문자 바위 모음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림들은 재규어, 새, 사람, 닥스훈트 같은 개들을 표현했다. 이는 세심한 연구가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로카스 헤로글리피코스’라고 여기서 불리는 이 바위들을 조사하는 흥미와 흥분은 우리가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그래서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서둘러 매우 흔들리는 임시 다리를 건너 마헤스 강을 건넜다. 이 다리는 건기에만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현재로서는 홍수를 견딜 수 있는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코리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루를 보냈는데, 수많은 모기 때문에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날 우리는 계곡 서쪽을 따라 짧게 달려 카스티야 주의 수도인 아플라오 마을에 도착했다.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마헤스’라고 부르지만, 라이몬디의 지도에는 그 이름이 강과 인근 사막에만 적용되어 있다. 1865년 그의 방문 당시에는 질병으로 악명 높았다. 지금은 더 건강해 보인다. 카스티야의 부지사는 전보로 우리의 도착을 통보받아 우리를 훌륭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마헤스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유난히 사업 감각이 뛰어난 것 같았다. 한 가게 주인은 미국 신발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그 이름을 우리가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발음했다. 스페인어에는 ‘W’가 없고 ‘a’, ‘l’, ‘k’가 연속해서 나오는 경우가 없다. 그가 마지막 음절을 강하게 강조하며 “발럭오페어”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가 잘 알려진 브랜드 이름을 즉시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 똑같이 당황했다.
마헤스에서 우리는 아레키파의 공장으로 보내지는 면화, 짐승의 사료로 매우 귀중한 알팔파, 아구아르디엔테 또는 백랍을 만드는 사탕수수, 그리고 포도를 관찰했다. 마헤스의 포도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며, 일부
칼바리오 언덕에서 우리는 25마일 떨어진 목적지, 흰 눈으로 뒤덮인 코로푸나(Coropuna) 산의 장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서쪽의 잘려 나간 봉우리가 그 이름을 딴 봉우리였다. 코로는 “꼭대기가 잘린”, 푸나는 “차갑고 눈 덮인 고지”를 뜻하는 케추아어다. 그 봉우리는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보였고, 동쪽의 모든 봉우리보다 높아 보였다. 하지만 평평한 돔 모양의 봉우리 뒤로 북쪽 봉우리가 살짝 보였다. 터커는 우리가 오르기로 한 서쪽 봉우리보다 북쪽 봉우리가 더 높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현지 안내인을 구할 수 없었고, 정상에 오르는 최선의 경로와 방법에 대해 가장 터무니없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결국 산 기슭까지 가는 방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을 고용했고, 더 적절한 말이 없어 그를 “안내인”이라고 불렀다. 페루의 봄은 한창이었고 날씨는 좋았으며 맑았다. 하지만 며칠 전 산에 큰 눈보라가 내렸던 것 같았다. 여름이 평소보다 일찍 오는 것 같아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고,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등산 장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고도 측정 기구는 브루클린의 헨리 J. 그린이 제작한 특수 산악용 수은 기압계였다. 이 기압계는 12,000피트 이상에서나 예상되는 기압만 측정할 수 있었다. 워싱턴의 카네기 연구소 지구자기학부에서 빌린 하이프소미터와 그린이 특별히 제작한 온도계, 힝클리의 노새가 거칠게 다뤘음에도 여전히 잘 작동하는 하버드 천문대에서 빌린 대형 수은 기압계, 그리고 그린의 슬링 건습계도 있었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깨지기 쉬운 수은 기압계가 망가질 경우를 대비한 아네로이드 기압계였다. 6개월 전 나는 유명한 런던의 기구 제작자인 J. 힉스에게 편지를 써서 코로푸나의 예상 고도보다 5,000피트 높은 고도까지 측정할 수 있는 대형 “왓킨스” 아네로이드 기압계 두 개를 특별히 주문했다. 그의 답장은 받지 못했고, 아레키파의 누구도 그 기압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내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레이스 브라더스가 런던에서 포장해준 특별 주문 “산악식량” 상자를 추키밤바에서 열어보고 나서야 우리는 페미컨과 자체 발열 스튜 통조림 옆에 귀중한 두 개의 아네로이드 기압계를 발견했다. 각각 큰 알람시계만 한 크기였다. 이 두 개의 새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있어 우리는 정상에 도달하면 밴델리어가 옳았는지, 그리고 이곳이 정말 아메리카 대륙의 정상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우리는 73도 자오선을 따라 측량 중인 측량사 헨드릭슨이 코로푸나를 삼각측량하기를 기다렸다. 내가 산에 오르는 주된 이유는 헨드릭슨이 삼각측량을 더 정확히 할 수 있도록 정상 근처에 신호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 진짜 목적은 모든 알피니스트들이 느끼는 “처녀봉 정복”의 만족감을 누리는 것이었다.
눈밭이 끝나고 빙하가 시작되는 경계를 알아보기란 불가능했다. 다섯 개의 뚜렷한 봉우리 중 중앙에 있는 봉우리가 아마도 가장 낮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른쪽 즉 동쪽 끝에 있는 두 봉우리가 그 다음으로 높았다. 서쪽 끝에 있는 절단된 돔 형태의 정상은 매끄럽고 풍화되지 않은 측면을 가지고 있어 산의 나머지 부분보다 후기 화산 시기에 속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가장 높은 봉우리인 것 같았다.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바위로 덮인 경사면이 바로 눈까지 이어졌다. 바위 무더기가 많지 않은 눈밭이 거대한 눈 덮인 돔 기저의 안부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돔의 동쪽 경사면 자체는 가파르긴 해도 정상까지 끊김 없이 이어졌다. 일단 눈선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아이젠이나 설피의 도움을 받아 심각한 어려움 없이 산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와 첫 번째 눈 덮인 경사면 사이에는 20마일이 넘는 화산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깊은 협곡과 가파른 계곡, 그리고 매우 거친 아아 용암이 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안내인”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코타우아시(Cotahuasi) 도로를 벗어나 용암류를 피해 고원의 완만한 경사를 천천히 올라갔다. 경사가 가팔라지자 노새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노새들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걸어서 앞서 나갔다. 짧은 오르막을 올라가자 놀랍게도 우리 앞에 1500피트 깊이의 가파른 벽으로 둘러싸인 협곡이 나타났다. 협곡은 산과 우리 사이를 가로질러 더 높은 경사면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노새들이 쉰 후 안내인은 산을 향해 곧장 가는 대신 왼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가 코로푸나(Coropuna) 산기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협곡에 오두막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버려진 곳, 무인지경, 황무지.” 그가 그곳을 묘사한 말이었다. 그가 거기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선생님.” 다행히도 우리는 협곡 가장자리에서 작은 개울 근처에 두세 개의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능한 한 빨리 눈선에 도달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우리는 그토록 잘 알고 있는 “안내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 힘으로 길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협곡 가장자리의 고도는 16,000피트였다. 노새들은 고산병으로 인한 심각한 고통의 징후를 보였다. 아리에로들이 큰 소리로 불평하기 시작했지만, 노새들의 귀에 구멍을 뚫어 피를 빼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소로체에는 사혈이 좋다는 이론이었다. 겁 많은 아리에로들이 협곡 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자 초록빛 목초지를 발견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안내인”의 한심한 무지를 비웃기까지 했다. 곧 오두막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오두막 근처에는 과묵한 인디오 여인이 있었는데, 우리가 선불로 지불하려 하고 은화를 제안했음에도 연료나 사료를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텐트를 치고 그녀의 우리 돌담을 모닥불 방풍막으로 이용했다. 평화가 찾아오고 우리가 무해하다는 것이 완전히 분명해지자 오두막 문 하나가 열리고 인디오 남자가 나타났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그가 사라진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일행 중 가마라 병장의 반짝이는 제복 단추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황야의 구석진 곳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한 그는 죄책감이 있었거나, 헌병을 보고 즉시 숨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가능성 있는 이유는 법정 복무 기간을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징집 파티의 방문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의 아내가 우리가 그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의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우리는 인디오들이 몇 마리의 야마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짚과 야마 배설물로 불을 지펴 조악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추뇨로 만든 죽을 먹고 살았다. 해발 14,000피트에서는 감자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인디오들의 이웃으로는 빙하 쪽으로 800미터 더 올라간 곳에 사는 외로운 노인 한 명과 계곡 아래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작은 가족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이웃들이 방문을 왔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남자들을 설득하여 노새가 멈춰야 할 지점부터 짐을 나르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단호하고 확고하게 거절했다. 남자 중 한 명은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았지만, 조용하고 얌전한 그의 아내가 그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격렬한 비난의 폭풍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산이 “그를 잡아먹을 것”이며 때가 되기 전에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다면 그냥 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가장 신중한 초기 연대기 작가 중 한 명인 시에사 데 레온(1550)은 코로푸나(Coropuna)에서는 “악마”가 평소보다 “더 자유롭게” 말한다고 전한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비밀스러운 이유 때문에, 악마들이 그곳에서 눈에 보이게 돌아다니며 인디오들이 그들을 보고 매우 두려워한다고 한다. 나는 또한 이 악마들이 인디오의 모습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났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말이 많은 주부가 유명한 코로푸나의 “악마”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평소보다 “더 자유롭게” 말했다. 아니면 그녀는 코로푸나의 “악마”들이 이제 “기독교인의 모습으로” 인디오들에게 나타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디오들은 코로푸나 정상에 아름다운 꽃, 맛있는 과일, 화려한 깃털을 가진 앵무새, 큰부리새, 심지어 원숭이까지 있는 따뜻하고 즐거운 낙원이 있다고 말했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는 길에 이 매력적인 곳에서 쉬어간다고 한다. 대부분의 눈 덮인 산 근처에 사는 원시인들처럼, 그들은 위협적인 봉우리와 그곳에서 내려오는 것 같은 눈보라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인디오들은 산꼭대기에 사는 악마들을 달래기 위해 그들의 거처에 대한 매력적인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이웃 마을인 팜파콜카(Pampacolca)에서 위대한 탐험가 라이몬디(Raimondi)가 1865년에 “문명 세계에서 추방되어 원시적인 관습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발견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우상을 코로푸나의 경사면으로 가져가 그들을 제물로 바칠 것입니다.” 분명히 그 산은 여전히 근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이 지역 노동자들의 통상적인 임금의 10배나 되는 전례 없는 높은 임금을 선불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중한 코카 잎과 매우 갖고 싶어하는 “화주”, 좀처럼 볼 수 없는 담배, 그리고 페루 고산지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탐내는 다른 좋은 물건들을 추가로 제안했지만, 산의 공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설맹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병 중 하나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가 자유롭게 제공한 짙은 색 선글라스, 따뜻한 옷, 등유 스토브, 그리고 충분한 좋은 음식의 이점은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에서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코엘로 교수는 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케추아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예비 짐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탐험대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페루 신사들이 항상 짐을 나르는 것을 극도로 품위 없고 부적절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논쟁했다. 나는 한 산악 도시의 가장 활동적이고 효율적인 사업가 중 한 명인 매우 존경받는 신사가 연필보다 조금 더 큰 말린 미장착 사진을 들고 가야 했을 때 짐꾼, 즉 인디오 짐꾼을 불러 그것을 대신 들고 가게 한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코엘로 교수는 자신의 몫 이상을 기꺼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우리도 몽블랑보다 수천 피트나 더 높은 고도의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등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디오들과의 논쟁은 길고 장황했으며 돈과 물건에 대한 제안은 점점 더 후해졌다.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 우리는 결국 코로푸나로 운반되는 모든 보급품과 장비를 우리 어깨에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저녁 계곡 근처 우리 캠프에서 볼 수 있었던 절단된 돔의 꼭대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밋빛 알프스의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공기는 매우 차가웠고 근처의 개울은 얼어붙었다. 밤사이 헌병의 노새가 향수병에 걸려 코엘로의 말과 함께 사라졌다. 가마라는 도망친 동물들을 찾으러 보내졌고 가능한 한 빨리 우리를 따라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짐꾼이나 짐을 나르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테하다 형제를 설득해 그들의 짐 노새를 눈까지 데려가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이를 거부했다. 돈 파블로는 노새들이 이미 노새가 가야 할 곳보다 훨씬 더 멀리 갔다고 말했다. 터커는 정찰을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그는 협곡에서 라마 목초지로 이어지는 산의 낮은 경사면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보고했다. 아리에로들은 그의 관찰의 정확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길고 격렬한 논쟁 끝에 그들은 좋은 길이 있는 곳까지는 가겠다고 동의했고, 그 이상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가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우리가 직접 짊어지기 전에 짐을 가능한 한 높이 올려놓는 문제일 뿐이었다. 아리에로들이 짐을 매우 느리고 마지못해 꾸리긴 했지만, 짐의 양은 이제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안장, 일반 보급품, 그리고 산에서 2주 동안 머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것을 뒤에 남기고 출발했다.
우리는 짐을 실은 노새보다 쉽게 더 빨리 걸을 수 있었고, 아리에로들의 끊임없는 불평을 듣지 않으려면 충분히 앞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꽤 좋은 라마 길을 따라 한 시간 정도 그리 힘들지 않게 올라간 후, 테하다 형제는 목초지 가장자리에서 멈춰 서서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똑같이 큰 소리로 앞으로 오라고 대답했고, 그들은 30분 더 천천히 지그재그로 거친 검은 화산 모래 경사면을 올라왔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노새의 짐을 내리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짐을 풀기까지 했다. 계약서의 문구가 이행되었는지, 그리고 노새들이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만큼” 갔는지에 대해 격렬하고 신랄한 논쟁을 시작하기 위해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들이 한 시간 더 올라간다면 30솔 – 15달러의 보너스를 제안했고, 그들이 가지 않으면 온갖 종류의 일로 위협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짐을 다시 조정하고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고도는 이제 약 16,000피트였지만, 가파른 작은 오르막 앞에서 아리에로들은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우리가 모래와 바위를 타고 내려가 그들을 막기 전에 두 마리의 노새 짐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이제 위협과 간청은 소용이 없었다.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적 문서뿐이었다! 그들은 눈선까지 올라가려는 이 어리석은 시도로 인해 노새가 죽을 경우, 죽은 노새 한 마리당 200솔의 금화를 지불하겠다는 “서면” 계약을 요구했다. 더욱이 그들이 정오까지 또는 눈에 막힐 때까지 계속 등반한다면 50솔의 보너스를 지불하기로 동의해야 했다. 이 문서는 코엘로 교수가 오래된 화산의 클링커 같은 잔해 사이에 있는 용암 바위에 앉아 적절히 작성했고, 정식으로 서명되고 봉인되었다. 시간에 대해 분쟁이 없도록 내 최고의 크로노미터를 파블로 테하다에게 정오까지 들고 가도록 건네주었다. 노새들의 짐을 다시 싣고 다시 등반이 시작되었다. 곧 노새들은 거대한 용암 바위와 잔해 모래로 덮인 가파른 경사면에서 꽤 험난한 여정을 겪었다. 우리는 매 순간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아리에로들은 유리한 거래를 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그것을 이행하려 했다. 다행히도 노새들은 정오 15분 전에 눈선에 도달했다. 테하다 형제는 짐을 내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보너스를 요구했으며, 10일 후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산비탈을 따라 사라졌다.
우리는 오후를 베이스캠프 설치에 보냈다. 우리에게는 세 개의 텐트가 있었다. 런던의 에징턴이 만든 높이가 약 4피트인 매우 가볍고 작은 벽 텐트인 “머머리”, 바닥이 꿰매진 7피트 x 7피트 크기의 보통 무게의 일반 벽 텐트, 그리고 데이비드 애버크롬비가 만들었지만 터커 씨가 설계한 개량된 피라미드형 텐트 – 파커 교수가 매킨리 산에서 사용한 것과 유사한 텐트였다. 터커의 텐트는 두 개의 개구부가 있었다. 하나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작은 환기구로, 폭풍 시 조절 가능한 캡으로 닫을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출입구로 사용되는 타원형 개구부였다. 이 개구부는 주름끈으로 원하는 만큼 닫을 수 있었다. 7피트 x 7피트 크기의 무거운 방수 바닥이 피라미드 밑단에 봉제되어 있어, 바닥을 지면이나 눈에 단단히 고정한 후에는 가이 로프 없이 단일 폴만으로도 텐트를 세울 수 있었다. 터커의 텐트는 운반이 쉽고 한 사람이 쉽게 설치할 수 있으며, 환기가 잘 되면서도 어떤 날씨에서도 네 사람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우리는 벽 텐트는 베이스에 두고 피라미드형 텐트만 등반에 가져가기로 했다. 우리는 관측을 하는 동안 사용하기 위해 ‘머머리’ 텐트를 산 정상까지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베이스 캠프의 고도는 17,300피트였다. 처음에는 식욕도 좋고 고산병도 없어서 놀랍고 기뻤다. 벽 텐트에서 100야드도 안 되는 곳에 눈 녹은 물로 생긴 작은 주간 개울이 있었다. 요리나 세탁을 위해 물을 뜨러 갈 때마다 맥박이 놀랍도록 빠르게 뛰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 정상 맥박은 70이다. 이 고도에서 평지를 100피트 천천히 걸은 후에는 120으로 올랐다. 잠시 앉아 있으면 100으로 떨어졌다. 점차 우리의 안녕감은 사라지고 권태감과 전반적인 무력감이 뒤따랐다. 멋진 일몰이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아프고 추워서 즐길 수 없었다. 그날 밤 모두 잠을 설쳤고 두통도 있었다. 강한 바람이 산을 휘감아 돌며 우리 텐트 두 개를 날려버릴 듯했다. 우리가 누워서 언제 이 허술한 캔버스 피난처에 버림받을지 궁금해하며 잠 못 이루고 있을 때, 코로푸나가 우리에게 더 높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정당한 경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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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0피트 고도의 코로푸나 베이스 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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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푸나 경사면 18,450피트에서의 캠핑
아침 식사로 우리는 페미컨, 건빵, 완두콩 수프, 차를 마셨다. 우리 모두 차에 설탕을 많이 넣어 마시고 싶어 했고 많은 양을 마셨다. 매킨리 산에서의 경험으로 터커는 특별히 북극 탐험가들을 위해 준비된 음식인 페미컨의 장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코엘로와 가마라, 그리고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맛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처음 접하면 그다지 맛있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물개 기름조차도 ‘소 크림만큼 맛있다’고 여겨지는 북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때는 틀림없이 가치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 없이도 충분히 잘 해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베이스에서 1주일간의 어떤 불운한 일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연료와 보급품을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안데스 고산 등반에 대한 기록들은 새로운 봉우리를 정복하기 전에 식량과 따뜻함, 피난처로 돌아가야만 했던 탐험가들의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에콰도르의 윔퍼, 볼리비아의 마틴 콘웨이,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피츠제럴드와 같은 용감한 등반가들이 강풍, 갑작스러운 폭설, 그리고 고산병으로 인한 약화로 자주 실망했던 것을 기억한다. 무거운 짐을 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오직 예상치 못한 사건이 결국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키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었다.
터커는 그와 코엘로가 하루 동안 50파운드를 운반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산 중턱에 식량과 연료의 비축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엉망이 된 텐트들을 다시 세우고 다른 잡일을 하도록 남겨두고, 그들은 각각 25파운드 정도의 짐을 싸고 출발했다. 내게는 그들의 산 중턱 진행이 엄청나게 느리게 보였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그들의 빈번한 멈춤은 우스워 보였다. 나중에 나는 고산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등반하지 않는 사람이 동정심을 갖기가 뱃멀미를 하는 사람에 대해 선원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전 동안 나는 기압계를 설치하고 일련의 관측을 수행했다. 두 개의 새 산악용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정확히 같은 수치를 나타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 다음 다음 날 우리의 짐에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산 위로 가져갈 화물의 모든 단위를 무게를 재야 했다. 우리는 프리머스 버너가 달린 작은 등유 스토브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식량은 몇 달 전에 이 등반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것으로, 8 1/4파운드 들이 깡통에 든 페미컨, 1/2파운드 들이 깡통에 든 콜라 초콜릿, 1파운드 들이 깡통에 든 씨 없는 건포도, 4파운드 들이 깡통에 든 각설탕, 6 1/2파운드 들이 깡통에 든 건빵, 잼, 건조 완두콩 수프 스틱, 플라스몬 비스킷, 차, 그리고 아이리시 스튜, 소고기 아 라 모드 등이 들어있는 실버의 자체 발열 ‘메스틴’ 몇 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마라 병장이 하루 동안 나타났다. 그는 협곡 아래로 12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노새를 찾았다. 그는 코로푸나 등반 전망을 즐기지 않았지만, 우리가 그를 위해 준비한 따뜻한 옷을 보고 산 정상에서 5개의 금화 보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의무를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터커와 코엘로는 오후 중반에 돌아와 첫 번째 등반 구간에 심각한 어려움은 없어 보이며 베이스 캠프에서 약 2000피트 위의 눈밭에 비축소가 설치되었다고 보고했다. 터커는 이제 내일을 위한 우리의 짐을 할당하고 솜씨 좋게 텀프라인과 하네스를 준비했다.
하루 종일 지속된 특이한 두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약간의 식욕이 있었다. 저녁 식사는 건포도를 넣은 페미컨 푸딩, 건빵, 완두콩 수프로 구성되었고, 모두 먹을 수 있었지만 즐기지는 못했다. 그날 밤 우리는 더 잘 잤는데, 한 가지 이유는 전날 밤만큼 바람이 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계속 좋았다. 워킨스가 하루 이틀 내에 아레키파(Arequipa)에서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우리는 그를 기다리거나 초여름 폭설을 만날 위험을 더 이상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익숙하지 않은 등에 50파운드의 짐을 조정한 후 약 9시에 캠프를 떠났다. 우리는 애팔래치아 산악 클럽(Appalachian Mountain Club) 회원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크램폰이나 아이젠, 두꺼운 스코틀랜드식 벙어리장갑, 털모자, 짙은 청색 선글라스, 그리고 아주 두꺼운 옷이 필요했다. 체르마트 박물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페루 북부 안데스의 우아스카란(Huascarán)을 등반했던 스위스 가이드들이 그 고지대의 깊은 눈 때문에 평생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동상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각자 4겹의 두꺼운 양말과 2-3겹의 두꺼운 내복을 착용하라고 지시했다. 코엘로 교수와 가마라 병장은 크고 무거운 장화를 신었다. 나는 양모 각반과 방한화를 신었다. 터커는 펠트 슬리퍼와 고무 판초 조각으로 자신이 아주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샌들을 즉석에서 만들었다. 우리 앞에 암벽 등반이 없을 것 같아서, 알피니스트들이 익숙한 무거운 철못 박힌 등산화 대신 크램폰에 의존하기로 했다.
눈은 오후 1시경까지 아주 단단했다. 3시경에는 너무 무르러져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짐을 가득 짊어진 채로 완만한 경사도 20걸음 이상 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평평한 눈밭에서는 쉬기 전에 25-30걸음을 걸었다. 매번 걸음을 끝낼 때마다 이것이 우리가 내딛는 마지막 걸음이 될 것 같았다. 심하게 헐떡이며, 믿기 힘들 정도로 피곤하고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우리는 멈춰 서서 다시 25걸음을 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얼음 도끼에 기대어 있곤 했다.
숨을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우리는 크레바스 망이 있는 빙하에 도착했다. 크레바스는 너무 넓지 않았고 대부분 눈다리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로프로 연결되어 있었고, 가끔 누군가 넘어지긴 했지만 로프에 큰 무리가 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크레바스가 전혀 없는 거대한 눈밭이 나왔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의 하루는 단순히 끝없는 일련의 걸음들이었다. 25걸음을 걷고 쉬는 것을 4-5번 반복한 다음 35걸음을 걷고 눈 위에 누워서 더 오래 쉬었다. 우리는 오후 2시 30분경까지 계속 전진했고, 그때 급격히 녹는 눈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해발 약 18,450피트에서 터커 텐트를 꽤 평평한 눈밭에 설치했다. 우리는 두 개의 큰 아네로이드 기압계가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불안하게 알아차렸다. 해가 지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오후 5시 30분에 온도계는 화씨 22도를 가리켰다. 밤 동안 최저 온도계는 화씨 9도를 기록했다. 우리는 북동쪽에서 상당한 수의 번개 번쩍임을 목격했다. 천둥은 동반되지 않았지만 우리를 상당히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11월의 폭풍이 예상보다 일찍 올까 봐 걱정했다. 우리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텐트 문을 닫았다. 텐트 꼭대기에 있는 환기 장치 덕분에 우리는 어느 정도 숨을 쉴 수 있었다. 고산 등반가들은 가끔 급성 소로체(soroche)의 증상 중 하나로 백일해처럼 아주 짜증나는 기침이 나타나며, 이는 종종 메스꺼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우리는 17,000피트에서 이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이제 고통스럽게 눈에 띄기 시작했고, 인디오들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어지는 날과 밤, 특히 밤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계속해서 서로를 기침으로 깨웠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거의 식욕이 없었고, 의욕도 없었으며, 불쾌감과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짐을 짊어지고 턱끈을 조이고 전날보다 조금 더 힘든 같은 지루한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전 7시 30분에 캠프를 떠나 정오쯤 해발 약 20,000피트에 도착했다. 이곳은 거대한 절단된 봉우리와 산맥의 나머지 부분 사이에 있는 안부에서 1마일 이내의 눈밭이었다. 여기서 하루 더 등반하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네로이드 기압계는 이제 500피트 이상 차이가 났다. 나는 텐트를 치는 일을 맡았고, 다른 사람들은 물품을 가지러 은닉처로 돌아갔다. 우리가 처음에 터커와 코엘로가 가져온 것보다 두 배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그들의 은닉처를 지나쳤다. 동료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완전히 휴식을 취한 상태여서 그들이 거의 평평한 눈밭을 달팽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캠프에서 100야드 이내에 있을 때 네 번이나 쉬어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 중 누구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차가 간절히 필요했을 뿐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눈을 녹여 차 한 주전자를 만들어 아침에 첫 번째로 데울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또 다시 아주 나쁜 밤을 보냈다. 온도계는 화씨 7도를 기록했지만, 추위로 고통받지는 않았다. 사실, 7 x 7 텐트 바닥에 네 명의 남자를 밀어 넣으면 서로 가까이 붙어 자야 해서 따뜻해진다. 게다가 각자 오리털 침낭, 담요, 그리고 많은 두꺼운 옷과 스웨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소로체로 고통받았다. 격렬한 기침이 자주 우리를 괴롭혔다. 우리 중 누구도 많이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가끔 맥박을 재며 시간을 보냈는데, 맥박이 120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움직이면 135까지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다. 실제 등반 중에는 어디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있는 한, 맥박은 4일 4밤 동안 12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10월 15일 아침 우리는 3시에 일어났다. 따뜻하고 단 차가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주전자는 텐트에 걸어두었는데도 완전히 얼어 있었다. 해동하는 데 한 시간이 걸렸고 차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겨우 따뜻해졌을 때 나는 비좁은 텐트에서 어색한 움직임을 하다가 주전자를 발로 차서 엎질렀다! 더 짜증나는 상황에서 이보다 더 잘 참은 적이 없었다. 내 서투른 사고에 대해 비난이나 분노의 말 한마디 없었지만, 가마라 병장은 텐트의 아래쪽에 누워 있어서 더 춥지만 (다소 더 건조한) 바깥 날씨로 서둘러 피신해야 했다. 내 서툰 실수로 출발이 거의 한 시간 지연되었다. 더 많은 얼어붙은 눈을 녹이고 차를 다시 만드는 동안 우리는 완두콩 수프와 아이리시 스튜를 데웠다. 터커와 나는 조금 먹을 수 있었다. 코엘로와 가마라는 차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6,000미터 지점에 터커 텐트를 남겨두고 대부분의 장비와 식량도 함께 두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가져가기로 했다. 그것들은 폴대와 말뚝이 달린 머머리 텐트, 산악용 수은 기압계, 두 개의 왓킨스 아네로이드 기압계, 고도계, 자이스 쌍안경 한 쌍, 3A 코닥 카메라 두 대, 필름 여섯 통, 슬링 건습계, 프리즘 나침반과 경사계, 스탠리 포켓 수준기, 24미터짜리 적색 산악 로프, 얼음 도끼 세 개, 2미터짜리 깃대, 성조기와 예일 깃발이었다. 폭풍우에 대비하기 위해 실버의 자체 발열식 아이리쉬 스튜와 모의 거북 수프 통조림 네 개, 초콜릿 한 덩어리, 건빵 여덟 개, 주머니에 넣은 건포도와 각설탕도 가져갔다. 우리의 짐은 각각 9킬로그램 정도였다.
다행히 날씨는 계속 맑았고 바람도 거의 없었다. 전날 오후에는 무릎 위까지 빠질 정도로 눈이 부드러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우리는 오전 5시에 출발했다. 아직 어두웠다. 왼쪽으로 코로푸나(Coropuna)의 거대한 돔이 우뚝 솟아 있었고, 거대한 빙하 때문에 직접 공략할 수 없었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먼저 주 능선의 안부를 넘어야 했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끊김 없는 경사면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진행은 가벼운 짐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안부에 도달했을 때 고통스러운 놀라움이 있었다. 우리 북쪽으로 거대한 눈 덮인 원뿔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처음에 추키밤바 칼바리오에서 봤던 봉우리였다. 이제 보니 우리가 오르려는 돔보다 실제로 더 높아 보였다! 80마일 떨어진 시우아스 사막에서 볼 때는 분명히 돔이 가장 높은 지점으로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헛될 수도 있고 결국 이 북쪽 봉우리가 더 높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직면하면서도 우리의 임무를 고수했다. 우리는 둘 다 할 만한 힘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수면 부족, 고산병, 식욕 부진이 빠르게 우리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마지막 경사면의 경사도는 30도였다. 눈 신발이 훌륭하게 작동하지 않았다면 얼음 도끼로 계속해서 계단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가장 가파른 부분에서는 실제로 12~15개의 계단을 만들어야 했다. 터커가 로프의 맨 앞에 있었고, 나는 두 번째, 코엘로가 세 번째, 가마라가 맨 뒤에 있었다. 우리는 매우 즐겁지 않은 일행이었다. 고도가 우리의 모든 야망을 앗아가고 있었다. 설탕 한 덩어리가 가라앉는 기분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탕의 탄소가 시스템에 흡수되어 꺼져가는 신체의 불을 되살리는 속도가 놀라웠다. 한 덩어리로 몇 분 동안 새로운 힘과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설탕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는 없었지만,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한 시간 한 시간이 흘러가고, 쉬었다 올랐다를 반복하며 정상처럼 보이는 곳에 도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분명히 북쪽의 적에 비해 높지 않았다. 바로 그때 터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머지 우리는 숨이 너무 차서 왜 그가 힘을 낭비하며 소리치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마침내 우리가 고통스럽게 정상처럼 보이는 곳의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기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우리 앞에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90미터 더 높은 또 다른 경사면이 있었다. 우리의 약해진 상태에서 90미터를 더 올라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 내내 그 짜증 나는 북쪽 봉우리를 걱정하며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결국 우리가 북쪽 봉우리보다 높은 곳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 놓인 또 다른 90미터는 분명히 그 짜증 나는 북쪽 봉우리의 최고점보다 우리를 더 높이 데려다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터커의 외침을 이해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의 외침에 힘차게 화답할 만큼 기운이 넘치지는 않았다.
희미한 미소와 새로운 용기로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평소처럼 25걸음마다 얼음 도끼에 기대어 쉬었다. 마침내 11시 30분, 6,000미터 캠프를 떠난 지 6시간 30분 만에 우리는 코로푸나(Coropuna)의 정상에 도달했다. 우리가 다가갈 때 터커는 비록 이 위대한 산의 첫 등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매우 기뻐했지만, 멈춰 서서 미소를 지으며 내가 먼저 가도록 예의 바르게 손짓했다. 탐험대의 책임자가 실제로 정상에 먼저 도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기꺼이 하려 한 희생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려면, 그가 탐험대에 참여하게 된 주된 이유가 등산에 대한 열정과 코로푸나를 자신의 승리 목록에 추가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나를 먼저 가게 하려는 그의 친절함에 크게 감사했지만, 나는 그와 나란히 올라가는 것으로만 동의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정상에 도달했고,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평양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매우 흐릿했다.
아버지는 열렬한 등산가였는데, 등반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특히 정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장관에서 오는 만족감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의 열정으로 인해 한번은 겨울에 태평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하와이의 마우나케아에 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오아후와 마우이의 산들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게 하고 그런 노력을 들여 얻을 수 있는 경치를 감상할 줄 알도록 가르쳤다. 하지만 지금 나는 코로푸나 정상에서의 경치에 전혀 관심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고, 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목표를 달성했다는 만족감도 우리를 기쁘게 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심하게 우울해졌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가마라만 보너스를 요구하며 금화를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쉰 후 우리는 관측을 시작했다. 내가 메고 있던 아네로이드 기압계의 줄을 풀었는데, 놀랍게도 바늘이 해발 21,525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터커의 아네로이드는 1,000피트 이상 높은 22,550피트를 나타냈지만, 이 역시 라이몬디의 추정치인 22,775피트에 미치지 못했고 반델리어의 “23,000피트”보다 훨씬 낮았다. 이는 큰 실망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아네로이드가 아콩카과 산의 고도인 22,763피트를 넘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 발견으로 우리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17,000피트까지는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던 아네로이드들이 이제는 명백히 신뢰할 수 없게 된 사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위안을 얻었다. 우리는 두 기계 모두 부정확할 수 있고, 실제로 그랬듯이 둘 다 낮게 읽고 있을 수 있다고 희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북쪽 봉우리는 우리보다 낮아 보였다. 이 점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터커는 우리가 가져온 비등점 측정기 나무 상자를 꺼내 눈 위에 놓고 스탠리 포켓 수준기로 조심스럽게 수평을 맞춘 다음 북쪽 봉우리를 향해 들여다보았다. 그는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차례로 눈 위에 누워 들여다보았다. 괜찮았다. 우리는 적어도 그 짜증 나는 봉우리보다 250피트는 높았다.
우리는 또한 코로푸나(Coropuna) 동쪽 봉우리보다 450피트 높았고, 시야에 있는 다른 어떤 산보다 1,000피트 높았다. 어쨌든 당장은 더 이상 힘든 등반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빠르게 소진되는 체력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한 후 우리는 작은 머머리 텐트를 설치하고, 수은 기압계용 삼각대를 세우고, 비등점 온도계와 그 장치를 준비한 다음, 코닥과 노트북의 도움을 받아 다음 4시간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관측을 하기 시작했다. 2시에 우리는 수은 기압계를 읽었는데, 같은 시간에 베이스캠프의 왓킨스와 아레키파 천문대의 하버드 천문학자들이 측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압계는 텐트 그늘에 설치된 삼각대에 매달려 있었다. 해수면에서 종종 31인치를 가리키는 수은은 이제 13.838인치를 가리켰다. 기압계의 온도계 온도는 정확히 화씨 32도였다. 동시에 텐트 안에서 우리는 물을 끓여 비등점 측정기로 측정했다. 물은 해수면에서 화씨 212도에서 끓는다. 여기서는 화씨 174도에서 끓었다. 측정을 마친 후 우리는 비등점 측정기를 위해 데운 물을 탐욕스럽게 마셨다. 우리는 5배나 더 마실 수 있을 만큼 목이 말랐다. 우리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몇 개의 건포도와 설탕, 초콜릿을 제외하고는 식량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관측을 마친 후, 우리는 작은 텐트를 최대한 단단히 고정하고 주변에 눈을 쌓은 다음 정상에 남겨두었다. 먼저 애팔래치아 산악 클럽의 황동 기록 실린더를 텐트 안에 넣었는데, 그 안에는 예일 대학 깃발과 당시 페루 지도, 그리고 등반에 관한 두 가지 간단한 진술을 봉인해 두었다. 성조기는 9피트 길이의 막대기에 매달아 둥근 지붕의 북서쪽 가장자리에 꽂아 두었는데, 그곳에서 코타우아시로 가는 길에서 볼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카시미르 왓킨스 씨가, 2주 후에는 아이제이아 보먼 박사가 그것을 보았다. 3주 후 헨드릭슨 수석 측량사가 측량을 하러 왔을 때는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심한 폭풍우로 인해 쓰러져 눈에 파묻혔을 것이다.
우리는 3시에 정상을 떠나 2시간 15분 후에 20,000피트 캠프에 도착했다. 안부까지 내려가는 첫 부분에서 우리는 활강을 시도했다. 그러다 경사가 가팔라져서 너무 빠른 속도가 나서 불편해졌고, 결국 우리는 더 느린 이동 방식에 만족해야 했다. 그날 밤에는 바람이 거의 없었다. 등산가들은 지나치게 강한 바람보다 더 무서운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진전을 방해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보급품을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 우리의 심한 고산병이 긴 폭풍우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을지, 또는 식량을 사용할 만큼의 식욕을 남겨주었을지는 의문이다. 고도에 적응하긴 하지만, 우리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서반구에서는 아무도 20,000피트에서 야영을 하거나 코로푸나 정상만큼 높은 곳에 텐트를 친 적이 없었다. 고산병의 심각성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며, 고도만으로 완전히 결정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등반을 해낼 만큼의 힘이 있었는데도 우리가 그렇게 약하고 아팠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그날 밤, 우리는 매우 지쳤지만 아무도 많이 자지 못했다. 격렬한 백일해 같은 기침이 계속되었고 아침에 우리 모두 다시 메스꺼움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 기분이 나빠서 거의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고도를 낮추기로 결정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보급품의 일부를 뒤에 남겼다. 9시 20분에 캠프를 떠났다. 18분 후, 쉬지 않고 물품 보관소에 도착해 남은 몇 가지를 주웠다. 많은 것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짐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크레바스를 지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마라만 실제로 빠졌고 그는 쉽게 다시 끌어올려졌다. 정오쯤 희미한 환호 소리가 들렸고, 마침내 우리는
산 아래쪽 멀리 움직이는 점들이 보였다. 외부 세계에서 온 누군가를 다시 보는 것이 꽤나 기이한 느낌이었다. 목이 메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앞장서던 터커는 나중에 내게 말하길, 당시 자신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 ‘점들’은 왓킨스와 한 인디오 소년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로프나 크램폰 없이 안전한 곳까지 올라와 우리의 짐을 일부 덜어주었다. 베이스캠프에는 12시 30분에 도착했다. 돌아온 후 터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든 짐의 무게를 재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나는 터커가 우리 중 누군가가 쓰러질까 봐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61파운드를, 가마라는 64파운드를 짊어졌고, 나와 코엘로에게는 각각 31파운드만 주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아이스 크리퍼, 도끼, 로프의 무게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 날 우리 모두는 매우 피곤하고 졸렸다. 사실 나는 무기력증에 거의 압도될 지경이었다. 손을 들어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었다. 태양이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태웠다. 입술은 고통스럽게 부어올랐고, 우리는 기침을 하고 쌕쌕거렸다. 노새들을 위해 더 낮은 고도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곧바로 캠프를 철수하고 짐을 꾸렸다. 침낭과 담요를 등에 짊어지고 인디오들의 오두막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즉시 우리의 불편함은 사라졌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마치 해수면으로 돌아온 것처럼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답답한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파이크스 피크 정상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리는 숨이 차지 않고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성가신 ‘백일해’ 증상도 사라졌고, 식욕도 돌아왔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눈과 태양의 영향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등반 중에 나는 매우 목이 말랐고 어리석게도 상당량의 눈을 먹었다. 그 결과 내 혀는 지금 매우 민감해져서 소다 비스킷 조각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느껴졌다. 병장 가마라는 눈 안경을 항상 제자리에 두기를 꺼려했고 자주 벗어 눈을 쉬게 하려 했는데, 이제 부분적인 설맹 증상을 앓고 있었다. 우리 나머지는 눈의 염증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이틀 동안 우리는 쉬고 기다렸다. 그리고 코로푸나(Coropuna)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고 기뻐하는 미소 짓는 아리에로들이 우리의 노새들과 함께 도착했다. 테하다 형제들은 우리를 열렬히 포옹하고 즉시 눈선으로 올라가 짐을 가지러 갔다. 다음 날 우리는 추키밤바로 돌아왔다.
11월에 측량사 헨드릭슨이 측량을 완료했고, 코로푸나의 위도가 남위 15도 31분, 경도가 그리니치 서경 72도 42분 40초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해발 고도를 21,703피트로 계산했다. 우리가 정상에서 측정한 수은 기압계 수치를 아레키파에서 동시에 측정한 수치와 비교한 결과도 거의 같은 수치를 보여주었다. 두 측정값의 차이는 60피트도 되지 않았다. 코로푸나가 반델리어의 추정치보다 1,300피트 낮고 남미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1,000피트 낮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북미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1,000피트 더 높았다. 우리는 정상에 처음 도달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기뻤지만, 모두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겨울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눈으로 덮여 있었다. 페루의 왕들은 이 신전을 방문해 선물과 제물을 바쳤다. … [보물 사냥꾼들은] 이 신전에 바쳐진 선물 중 많은 양의 은과 금, 보석들이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묻혀 있다고 확신한다. 인디오들은 우상과 제사장들, 그리고 그것을 모시는 처녀들을 위해 쓰이는 또 다른 거액을 숨겼다. 하지만 많은 눈 때문에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그것들이 숨겨진 곳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신전은 많은 양떼와 농장, 그리고 인디오 하인들을 소유했다.” 지금은 아무도 이곳에 살지 않지만, 많은 양떼와 야마가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고대의 창고와 묘지를 보았다. 그날 밤 우리는 극심한 추위에 시달렸고, 코로푸나의 눈밭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우리 텐트의 벽을 격렬하게 흔들어 잠을 설쳤다.
다음날 우리는 코로푸나의 녹은 눈에서 물을 공급받는 두 개의 작은 오아시스를 지나갔다. 이곳에는 이탄과 작고 비틀어진 나무들이 풍부했는데, 추키밤바는 이곳에서 연료의 일부를 공급받는다. 우리는 코로푸나의 낮은 봉우리들을 천천히 돌아 용암 덩어리와 화산재로 이루어진 황량한 사막 황야인 붉은 사막, 즉 팜파 콜로라다로 들어갔다. 대부분 해발 4,500에서 4,800미터 사이에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깊이 600미터의 아르마 강 협곡과 접해있다. 우리는 그곳에 야영을 하고 더 편안한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시 협곡 반대편으로 올라가 솔리마나 산의 동쪽 경사면을 따라 이동했다. 곧 길은 갑자기 왼쪽으로 꺾어져 우리의 오랜 친구 코로푸나에서 멀어졌다.
우리는 이 산이 얼마나 오래전에 활화산이었는지 궁금했다. 오늘날 이곳에서 200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남쪽에는 엘 미스티와 우비나스 같은 활화산들이 있어 간혹 연기를 내뿜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넓은 지역을 화산재로 뒤덮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때 코로푸나의 거대한 평평한 봉우리가 고대 불의 마지막 일렁임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보먼 박사는 이 지역의 거대한 용암과 화산재 축적물의 대부분이 마지막 빙하기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인접한 협곡에서 일어난 엄청난 침식과 빙하기의 거대한 하천들이 드러낸 수많은 용암류로 이루어진 지층들이 모두 이러한 결론을 가리킨다.
내가 탄 안장 노새는 무리와 가까이 있을 때만 얌전한 고집 센 짐승이었다. 그녀에게는 대열의 친구들 곁에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뜻이었다. 내가 기록을 하느라 고삐를 당기면 매우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빙글 돌아 날뛰고 발길질을 했다. 반대로 동료들보다 앞서가게 하려고 아무리 박차를 가하고 튼튼한 채찍으로 때려도 소용없었다. 이날 아침 나는 우리 짐 대열이 코로푸나(Coropuna)에서 곧장 멀어지며 꾸준히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꼭 사진에 담고 싶었다. 내 노새가 앞으로 달리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말에서 내려 빠르게 다가오는 동물들보다 200야드 정도 앞서 뛰어가 그들이 나에게 도달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했다. 우리는 이제 해발 4,800미터에 있었다. 놀랍게도 기쁘게도 여기서 달리는 것이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쉽다는 걸 알았다. 내 폐와 심장이 매우 희박한 공기에 잘 적응했던 것이다. 코로푸나에 오르기 전 이와 비슷한 고도에서 200야드를 뛰려 했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해발 4,500미터에서 200야드를 뛰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고대 안데네스를 조사해 보면 이것들이 단순히 정교하게 쌓은 돌담 뒤에 언덕의 흙을 긁어모아 만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담장 뒤쪽 공간은 먼저 거친 돌, 점토, 자갈로 채웠다. 그 다음 작은 돌, 조약돌, 자갈을 깔아 지하수를 배수할 수 있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18인치 정도 깊이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흙을 덮었다. 그 결과 집약 농업에 가장 적합한 밭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엄청난 노력을 들여 상대적으로 작은 결과를 얻은 것은 믿기 힘들 정도다. 필요가 매우 컸음이 틀림없다. 많은 경우 계단식 밭의 너비는 불과 몇 피트에 불과했지만 길이는 수백 야드에 달했다. 보통 계곡의 자연스러운 윤곽을 따랐다. 때로는 너비가 200야드, 길이가 4분의 1마일에 달하기도 했다. 오늘날 이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 보리, 알팔파가 재배되고 있다.
코타우아시(Cotahuasi) 자체는 계곡 바닥에 위치해 있으며, 페루에서 가장 향기롭고 값비싼 와인을 구입할 수 있는 즐거운 곳이다. 기후가 쾌적해 많은 지주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의 영지는 주로 주변 고원의 황량한 고지대에 있어 목동들이 야마, 양, 알파카 떼를 돌보고 있다.
우리는 부지사인 비스카라 씨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그의 집에 묵도록 초대받았다. 그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니었고, 강력하고 멀리 떨어진 중앙 정부의 가시적인 대표자로서 그의 지방 사람들 중 일부에게 그리 인기가 없었다. 코타우아시 같은 지방 도시 주민 중 리마에 가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아마도 리마 정부 구성원 중 코타우아시에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양측 간에 공감대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페루 여행의 어려움이 너무 커서 여가 여행을 하기는 힘들었다. 아레키파 지사의 추천서와 우리에 앞서 보내진 전보 덕분에 우리는 정부의 친구로 알려져 있어서 부지사에게 환영을 두 배로 받았다. 천성이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며 평균 이상의 교육과 지성을 갖춘 비스카라 씨는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매우 예의 바르고 환대해 주었다. 우리를 위해 그는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엘리후 루트의 사진을 가져왔고 커다란 성조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깊이 감사했지만 깃발에 별이 36개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미국에 대한 우정의 표시로 우리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어느 날 부지사가 그의 개인 이발사를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터커 씨와 나는 이발소를 본 지 한참 되었다. 파리나코차스에서는 이발소를 찾을 가능성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발사가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가 장전된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의 엄중한 감시 하에 있는 지역 감옥의 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의 죄목을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살인자처럼 보였다. 그가 말할 수 없이 더럽고 기름진 헝겊에서 오래된 머리 깎는 기계를 꺼냈을 때, 나는 그의 시술을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지사가 너무나 친절했고 ‘이발소’의 불편함에 대해 너무나 사과했기에 용감하게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녹슨 머리 깎는 기계로 머리를 다듬는 것은 불쾌했지만, 죄수가 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목 정맥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마침내 고문의 시간이 끝나고 죄수는 깊은 인사와 함께 사례금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경찰이 그를 안전하게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동정심도 느꼈다.
우리는 보우먼 박사와 측량사 헨드릭슨과 거의 동시에 코타우아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73도 자오선을 따라 답사를 하면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제 가장 힘든 부분은 지나갔다. 그들의 보급품이 바닥났기 때문에 우리가 아레키파에서 가져온 보급품이 두 배로 반가웠다. 왓킨스 씨는 헨드릭슨 씨를 돕도록 배정되었고 며칠 후 보우먼 박사는 사막의 지질학과 지리를 연구하기 위해 남쪽으로 출발했다. 그는 호위병으로 가마라 병장을 데리고 갔는데, 그는 적들의 음모에서 벗어나게 되어 매우 기뻐했다. 우리가 방문하기 몇 달 전에 일어난 혁명 폭동 때 코타우아시 병영과 감옥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이 가마라였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부지사는 보우먼 박사와 함께 마을 밖으로 나갔다. 가마라를 위해 그들은 새벽 3시에 집을 나섰고 우리의 관대한 주인은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타고 가기로 동의했다. 보우먼 박사는 그의 중요한 저서인 “남부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4시에 우리는 조용히 준비를 마쳤다. 소리 없이 문을 열고 작은 행렬을 이루어 칠흑같이 어두운 마을 거리를 서둘러 지나갔다. 병사가 소총을 안장에 걸치고 맨 앞에 탔고, 바로 뒤에는 부지사와 나 자신이 탔다. 짐 노새들은 맨 뒤에 있었다. 거의 거리 끝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불꽃 세례가 앞으로 날아왔다. 순간 병사는 노새에 박차를 가하며 옆 거리로 돌았다. 부지사는 말을 세게 뒤로 당기며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속삭였다. “맙소사, 누구지?”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불 그만 피워! 그만 피우라고!”
모든 소동의 원인은 열심히 일하는 초라한 재봉사였다. 이 불경스러운 시간에 일어나 급한 손님의 옷을 다림질하려던 재봉사였다. 그는 살아있는 숯이 든 오래된 다리미를 들고 있었고, 그 위로 열심히 입김을 불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불꽃이 튀었던 것이다! 회개하는 재봉사와 그의 낡은 다리미가 그 시간에 그토록 무시무시한 흥분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올리버 웬델 홈즈를 흥미롭게 했을 것이다. 그는 이 그림 같은 도구를 언급하기를 좋아했고, 아마도 “코타우아시 병사를 놀라게 한 거위: 고대 로마 병사들을 깨운 거위와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언급과 함께”라는 제목의 적절한 에세이를 썼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우리는 산악 목초지 지역에 들어섰다. 때때로 습지와 눈 녹은 물의 작은 웅덩이를 지나쳤다. 그중 하나에서 돌아서서 큰 코타우아시(Cotahuasi) 협곡을 가로질러 솔리마나(Solimana)의 빙하와 눈 덮인 코로푸나(Coropuna)를 바라보았는데,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로 갈수록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었다. 해발 16,500피트에서 우리는 바위와 모래로 덮인 거대한 불모의 고원을 가로질렀다. 살아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호수를 만났지만, 그것은 파리나코차스가 아니었다. 고원에서는 몹시 추웠다. 가끔 나는 말에서 내려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노새 옆에서 조깅을 했다. 다시 한 번 코로푸나에서의 경험 덕분에 어떤 불편함이나 고산병 증상도 겪지 않고 400-500야드를 꾸준히 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후에 우리는 람파(Lampa)를 향해 고원에서 내려가기 시작했고 아호치우차(Ajochiucha)의 목초지에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비와 눈으로 물을 공급받는 이추 풀과 다른 작은 식물들이 큰 양, 야마, 알파카 떼의 먹이가 되고 있었다. 그들의 주인들은 경작된 계곡에 살지만, 인디오 양치기들은 고원의 폭풍과 살을 에는 바람을 견뎌야 했다.
알파카는 보통 겁이 많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마도 갈증 때문에 작은 습지의 상류에서 물 구멍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멈춰 서서 내가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것을 허락했다. 알파카의 양모는 세계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 중 하나다. 그러나 영리한 상인들이 알파카 양모로 만든 직물이 매우 인기 있다는 것을 알고 오래전에 그 이름을 훨씬 저렴한 직물에 붙였기 때문에, 상업용 “알파카”는 코트 안감, 우산, 얇고 따뜻한 날씨용 코트에 사용되는 면과 양모로 만든 표면이 단단한 직물이다. 이것은 보통 검은색으로 염색되어 있고 꽤 저렴하다. 오늘날 시장에 나오는 진짜 알파카 양모는 그렇게 불리지 않는다. 길고 비단 같으며 양모보다 더 곧은 알파카 털은 강하고 섬유가 작으며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며 탄력있다. 이것은 아름답고 편안한 직물로 짜여질 수 있다. 겨울용으로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많은 비단같이 부드럽고 솜털 같은 니트 의류들이 “비쿠냐”, “낙타 털” 등으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알파카로 만들어진다.
알파카는 그 사촌인 야마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초기 페루인들이 신세계의 낙타 중 가장 큰 야생 과나코(guanaco)를 길들여 만들어냈을 것이다. 과나코는 여전히 야생 상태로 존재하며 항상
알파카와 야마는 매우 다양한 색상을 지니고 있다. 야마의 털은 너무 거칠어서 옷감으로 짜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원주민들은 이를 이용해 두꺼운 담요를 만들어 사용한다. 짐을 나르는 동물로 길러진 야마는 낯선 사람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어서 우리의 말이나 소처럼 낯선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 알파카는 더 좋고 귀한 먹이인 짧고 부드러운 풀과 충분한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장 멀고 높은 산지의 목초지에서 살며, 털을 깎을 때만 다루어지고 평화로운 목동들 외에는 거의 아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을 매우 경계한다. 하지만 먼 친척인 비쿠냐만큼 겁이 많지는 않다. 내가 처음 알파카를 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마치 우리 장난감 가게의 ‘털 옷을 입은 강아지’ 같아 보였다. 목 부분은 눈까지, 다리는 보이지 않는 바퀴까지 털로 덮여 있었다! 이 긴 다리를 가진 동물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들은 바퀴 달린 장난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소처럼 달릴 수 있다.
야마는 머리, 목, 다리에 털이 훨씬 적어서 다른 방식으로 우스꽝스럽다. 그의 표정은 극도로 거만하고 오만하다. 그는 보통 자신이 우리 근처에 있는 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상황 때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지나친 오만함 때문에 그는 머리를 높이 들고 목을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데, 이 때문에 같은 종류의 다른 야마들과 함께 목 주변에 하나의 밧줄을 둘러 우리에 가둘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격은 10달러에 불과하다.
아호치우차의 목초지에는 많은 암컷 야마와 알파카, 그리고 그들의 새끼들이 있었다. 목동들조차 대부분 아이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돌보는 동물들보다도 더 겁이 많았다. 그들은 바위와 관목 뒤에 몰래 숨어 우리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오후 5시경, 건조한 고원 지대에서 우리는 알려진 가장 큰 잉카 창고 중 하나인 치치팜파(Chichipampa)의 유적을 발견했다. 이는 옛날 자비로운 독재자들이 안데스를 통치하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처럼 기근에 대비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는 흥미로운 유물이었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가까운 곳에 인구가 많은 계곡들이 있다.
다음 날 아침 캠프를 떠나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람파 계곡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이 지역의 특징적인 1마일 깊이의 협곡 중 하나였다. 우리의 짐을 실은 노새들은 콜타라는 흙빛 인디오 마을을 내려다보는 나선형 길을 따라 내려가며 투덜거리고 신음했다. 콜타는 100채 이상의 오두막이 다소 흩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여기서도 코타우아시 계곡에서처럼 수백 개의 고대 계단식 밭이 협곡 양쪽으로 수천 피트까지 뻗어 있었다. 많은 계단식 밭이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콜타 근처의 것들은 여전히 옥수수, 감자, 보리를 재배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경작되지 않은 지역은 선인장, 가시덤불, 반건조 지역의 꼬부라진 왜소한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 자체에는 호주산 유칼립투스 나무가 6그루 있었다. 이 유쾌하고 매우 성공적인 이주식물은 페루의 중심부뿐만 아니라 콜롬비아의 안데스 산맥과 캘리포니아, 하와이 제도의 새로운 산림 보호구역에서도 볼 수 있다.
콜타에는 기와 지붕을 얹은 2층집이 몇 채 있다. 그 중 일부는 2층에 개방형 베란다가 있어 이곳의 기후가 때때로 쾌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집들의 벽은 햇볕에 말린 아도베 벽돌로 지어졌고, 대다수의 작은 초가집들도 마찬가지다. 거리의 불규칙한 배치와 마을 안팎의 많은 계단식 밭을 보면, 콜타가 16세기 스페인 정복 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페루 마을들이 그렇다. 리마와 아레키파 같은 도시들이 주목할 만한 예외다. 콜타를 떠나 돌출된 능선 기슭을 돌아 나가자 우안카우안카라는 큰 건조한 협곡이 나타났다. 안내인은 우리가 파리나코차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두 개의 협곡을 건너 멀지 않은 곳에 사라사라라는 만년설로 덮인 봉우리가 있었다.
람파는 우안카우안카 협곡의 주요 마을로, 강에서 1000피트 이상 높이의 거대한 자연 자갈과 충적토 단구 위에 위치해 있다. 단구의 일부는 관개되어 경작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열정적인 농부들은 관개 시스템을 확장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고원의 더 넓은 부분을 경작할 수 있게 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사실 새로운 관개 계획은 실제로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지금쯤은 오래 전에 완료되었을 것이다. 람파에서의 우리 접대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우리의 뛰어난 아리에로인 테하다 형제들이 “제복을 입은 사람들” 없이 여행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코타우아시의 부지사에게 그의 소수의 헌병 중 한 명을 우리와 함께 보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실수였을 것이다. 광산 탐사나 대규모 수입 및 위탁 회사를 대표하는 것과 같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또는 실제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노새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이해할 수 없고 과학적 탐구를 위한 탐험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예외 없이 거의 모든 남미 정부는 가부장적이며, 시민들은 모든 과학적, 경제적, 사회적 연구와 관련된 모든 조치가 정부에 의해 수행되고 국고에서 비용을 지불할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의 주도성은 장려되지 않는다. 페루에서의 이전 모든 탐험 중에 나는 너무나 쉬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대통령 레기아 정부의 호의로 제공된 항상 존재하는 헌병이 얼마나 자주 의심을 잠재우고 우리에게 따뜻한 환영을 확보해 주었는지를 잊었을 뿐만 아니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순찰대 없이 깔끔한 작은 람파 마을에 들어서자 극도의 의심과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쓸린 거리와 새로 회칠한 집들, 그리고 전반적인 번영과 진취적인 분위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의 행정 장관은 붉은 기와를 얹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그 안뜰과 회랑은 아마도 200년은 되어 보였다. 그는 정부로부터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라고 강요했다. 다행히도 우리의 아리에로들은 람파에서는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평판 좋은 고위 계층의 사람들이어서 일시적으로 그의 의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여정의 진짜 목적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리가 정의를 피해 도망치는 도망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여긴 매우 의심 많은 시의원들의 승인을 받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우리가 파리나코차스 호수로 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의심을 더했다. 람파가 유명한 직조공들의 고장이라는 것 같다. 그들은 이 지역의 수많은 양과 알파카, 비쿠냐의 털을 이용해 고급 판초와 담요를 만드는데, 이는 이 지역뿐 아니라 아레키파에서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것들은 세상의 외딴 지역에서 흔히 그렇듯이 매년 열리는 큰 장터에서 거래된다. 수백 마일을 여행해 온 상인들이 외부 세계의 공산품들을 가져와 이 외딴 마을들의 고급 상품들과 교환하려고 모여든다. 이 지역의 큰 장터는 수많은 세대 동안 파리나코차스 호숫가에서 열려왔다. 모두가 장터에 가고 싶어 한다. 친구들을 만나고 즐기고 흥청망청 노는 기회이자 우리나라의 큰 카운티 페어와 같은 것이다. 이 연례 장터 주간을 제외하면 파리나코차스 분지는 우리의 페어 그라운드처럼 황량하고 텅 비어 있어서 장터용 건물들 외에는 거의 집을 볼 수 없다. 적절한 시기에 파리나코차스에 가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칭찬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누군가가 일 년 중 다른 51주 동안 파리나코차스에 가고 싶어 하는지는 이 마을의 유력 인사들의 이해와 상상력을 완전히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시의원들”에게는 우리의 버려진 페어 그라운드에서 캠핑하고 싶어 하는 유랑 집시들의 기이한 행동과 같은 것이었다.
테하다 형제들은 마을에서 밤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마도 계약에 따라 노새 먹이 비용이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었고 마을에서는 사료 값이 항상 시골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게 다행이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마을의 험담꾼들이 행정 장관을 설득해 우리를 체포하게 했을 테니까. 그러나 행정 장관은 친절하고 환대해 주었으며, 그의 안뜰에서 수직기로 직조하고 있던 한 인디오 여인을 사진 찍으려 할 때 그녀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꽤 재미있어했다. 그녀는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수직기의 한쪽 끝은 그녀의 허리에 묶여 있고 다른 쪽 끝은 유칼립투스 나무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손으로 눈과 입을 가리고 우리의 이상한 행동에 당황해 거의 울 뻔했다. 페루의 인디오 여성들은 변함없이 극도로 수줍어하고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며 오직 관찰과 주목을 피하고 싶어 할 뿐이다. 그러나 행정 장관 가족의 여성들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로, 사진 찍히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행한 자매의 곤경을 보고 부적절하고 동정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람파를 떠난 후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최고의 도로를 만났다. 그 우수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아름다운 마을 사람들의 진취성과 에너지 덕분이었다. 마을을 깨끗하고 정돈되게 유지하고 새로운 관개 시설을 건설하는 드문 행동을 하는 시민들이라면 그들이 주로 가고 싶어 하는 방향, 즉 해안 쪽으로 가는 편안한 도로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우안카우안카 계곡을 올라가면서 우리는 계곡 측면이나 람파 마을을 일으킨 충적 평원에서 고대 농업용 계단식 밭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 자체는 현대에 지어진 것 같았다. 코타와 그 주변 계곡에 이렇게 많은 흔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왜 이렇게 적은지, 아니 전혀 없는지 의아했다. 잉카인들이 이 지역에 이렇게 넓은 충적 평원이라는 훌륭한 농업 기회를 놓쳤을 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이 땅의 우수성과 상대적인 평탄함 때문에 고대 사람들의 생각에는 인공 계단식 밭이 불필요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스페인 정복 직전까지 해안 부족 중 하나가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 우안카우안카의 깊은 협곡은 두 개의 매우 다른 지역을 나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계단식 밭이 빽빽한 코타에서 계단식 밭이 없는 람파로 오니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생각하고 추측하게 만들었다. 잉카의 정복 이전, 스페인 정복 직전의 초기 페루에는 고원에 살던 부족들과 태평양 해안에 살던 부족들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도자기는 디자인과 장식에서 가능한 한 다르고, 도시와 신전의 건축 양식도 완전히 다르다. 평지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서 산악 지대 사람들만큼 계단식 밭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아마도 이 충적 평원에는 해안 민족의 잔재가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굴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안카우안카 계곡을 벗어나 능선을 넘자마자 더 많은 인공 계단식 밭이 보였다. 넓고 깊은 계곡 너머로 이제 상대적으로 가까워진 사라사라 산의 죽은 화산 원뿔이 보였다. 산 정상 근처의 협곡과 골짜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우리 길은 파라카와 콜카밤바 마을 근처로 지나갔는데, 후자는 코타와 매우 비슷했다. 초가집들이 흩어져 있고 주변에 수백 개의 계단식 밭이 있었다. 계곡 경사면의 식생은 간헐적인 비가 내린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라카 근처에서는 오래된 석축 계단식 밭에서 자라는 보리와 밀밭을 지나쳤다. 모든 면에서 상당히 많은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다.
그들의 조상들이 정성껏 일궈놓은 밭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땅을 다 사용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최근에 경작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수백 개의 계단식 밭을 발견했다. 아마도 휴경 중인 것 같았다.
우리 아리에로들은 작은 마을들을 피해 로다데로 농장 근처 길가에 야영지를 선택했다. 결국 편안한 텐트와 좋은 음식, 숙련된 아리에로들이 있다면 해발 3,600m나 4,000m의 깨끗하고 탁 트인 야외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인디오 마을의 냄새와 소음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밀밭을 지나 푸유스카 마을을 지났다. 이곳은 또 다른 큰 인디오 마을로, 경작 가능한 최상의 땅을 농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바위산 어깨 위에 짚으로 지붕을 얹은 어도비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마을은 샘이 많은 얕은 계곡에 있었다. 코타우아시를 떠난 이후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막과 가파른 벽으로 된 협곡은 이제 우리 뒤로 멀어진 것 같았다. 여기는 완만한 경사의 언덕들이 있는 지역으로, 계단식 밭이 덮여 있었고 온대 지역의 곡물이 쉽게 자라는 것 같았다. 마침내 곡식 밭을 떠나 계곡 상류의 낮은 산맥에 있는 얕은 분지를 올라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20마일이 넘는 크기의 거대한 고원 분지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분지 중앙에는 큰 타원형 호수가 있었다. 호수의 가장자리는 분홍색이었다. 호수 대부분의 물은 짙은 청색이었지만, 해안 근처의 물은 분홍색, 연한 연어색이었다. 무엇이 그런 기묘한 색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플라밍고 말고는 없었다. 수없이 많은 플라밍고들이 있었다. 마침내 파리나코차스를 발견한 것이다!
제4장
플라밍고 호수
파리나코차스 분지는 해발 3,500m에서 3,600m 사이에 있다. 아레키파에서 북서쪽으로 240km, 쿠스코에서 남서쪽으로 270km 떨어져 있으며, 꽤 많은 강우량을 누리고 있다. 호수는 샘과 작은 개울들로 물이 공급된다. 과거 지질 시대에는 호수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고, 푸유스카 마을 근처에서 유출구가 있었다. 현재 파리나코차스에는 눈에 보이는 유출구가 없다. 푸유스카로 올라오는 계곡에서 우리가 본 큰 샘들이 이 호수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우리는 호수 가장자리 바로 옆에서 수많은 작은 샘들을 발견했다. 이들은 대개 주변 평원보다 90cm에서 120cm 정도 높은 습지 언덕에 있었는데, 아마도 미네랄 퇴적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해안선보다 훨씬 위에 아주 오래된 해변 표시들이 있었다. 현지인들은 우리에게 우기에는 호수 수위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진다고 말했지만, 최근에 지금보다 30cm 이상 높았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cm만 수위가 상승해도 호수의 면적은 상당히 늘어날 것이다.
클레멘츠 마컴 경이 제안한 “파리나코차스 호수의 수심 측량”을 위해 뉴헤이븐에서 준비를 할 때, 우리는 지리학 문헌에서 호수의 깊이가 3m인지 3,000m인지에 대한 어떤 표시도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300m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로 했다. 조지 바셋의 친절한 도움으로 나는 낚시꾼들 사이에서 “24 thread”로 알려진 튼튼한 낚싯줄 300m를 구했다. 이것을 다루기 편하도록 큰 나무 릴에 감았다. 추키밤바에 있는 동안 왓킨스는 이 무거운 줄에 166개의 흰색과 빨간색 천 표시를 1.8m 간격으로 넣느라 몇 시간 동안 고생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결과를 빨리 파악할 수 있게 했다.
호수 북쪽 해안의 낮은 반도에 도착한 터커와 나는 캠프를 설치하고, 우리 노새들을 푸유스카로 보내 먹이를 구해오게 했다. 그리고 수심 측정 작업을 위해 노새 등에 실어 그토록 먼 거리를 가져온 아크메 접이식 보트를 조립했다. “아크메”는 우리가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지만 조립하기 쉬웠다. 매우 가벼워서 수심이 아주 얕은 호숫가에서도 띄울 수 있었고, 견고성은 오후 늦게 강한 바람이 악독한 작은 “파도”를 일으켰을 때 매우 고마웠다. 현지인들이 말하기를 어떤 종류의 배로도 항해한 적이 없다는 수면 위로 노를 저어 나가면서 수심 측정을 시작했다. 티티카카 호수는 270m가 넘는 깊이다. 파리나코차스 호수가 300m를 넘는다면 짜증 날 것이다. 내가 가져온 줄이 더 없기 때문이다. 270m만 되어도 측정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호수는 180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해안에서 8km 떨어진 곳에서 측정을 하면서 나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큰 릴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추를 물 속으로 던졌다. 릴이 한두 바퀴 돌더니 멈췄다. 뭔가 잘못됐다. 줄이 풀리지 않았다. 릴이 걸린 걸까? 아니다, 장치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바닥이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조지 바셋이 최고로 튼튼한 24 thread 줄 300m를 한 릴에 감느라 들인 수고가 무색해졌다! 왓킨스가 166개의 “길이 표시”를 꼼꼼히 넣은 노고도 허사가 되었다! 호수 바닥은 내 배 밑에서 겨우 1.2m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호수의 길이 29km를 따라 열심히 노를 저어 오가고, 27km 너비를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며 3-4일 동안 고생한 끝에, 나는 왓킨스의 첫 번째 표시를 적시는 데도 실패했다! 수백 번의 측정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도 1.5m 이상의 수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우기에 왔다면 적어도 하나의 표시는 적실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때(1911년 11월) 호수의 최대 수심은 1.4m였다. 이 작은 지리적 지식에 기여했다는 만족감은, 정작 주목할 만한 수역을 발견하지 못한 실망감에 묻혀버렸다.
이렇게 긴 호수가 어떻게 그렇게 얕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내 감정은 호놀룰루와 펄 하버 사이에 있는 붉은 언덕들 중 하나 근처의 염호가 “바닥이 없다”고 원주민들이 보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군함 선장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진정되었다. 그는 배의 무거운 보트 하나를 해안에서 여러 마일 떨어진 내륙의 염호까지 엄청난 힘과 노동력을 들여 옮기도록 명령했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준 그 선장은, 소년 시절의 이야기에는 얼마나 많은 측심줄을 가져갔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 “바닥없는” 물웅덩이가 15피트보다 깊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했다.
파리나코차스의 깊이에 실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접이식 보트를 가져온 것에 대해 매우 기뻤다. 그 보트 덕분에 호수의 얕은 물을 먹이터로 이용하는 수많은 새들 사이를 조용히 떠다닐 수 있었다. 분홍 플라밍고, 흰 갈매기, 작은 “잠수새”, 큰 검은 오리, 도요새, 검은 황새, 청둥오리, 큰 거위 등이 있었다. 호숫가에는 땅올빼미와 딱따구리가 있었다. 원주민들이 이 물웅덩이를 “파리나코차스”(Parina = “플라밍고”, cochas = “호수”)라고 이름 지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플라밍고는 여기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다른 모든 새들을 압도할 정도로 많고, 앞서 말했듯이 실제로 호수의 얕은 물을 분홍색으로 보이게 한다. 다행히도 그들은 깃털을 위해 사냥당하지 않았고 겁이 많지 않았다. 보트에 2일 동안 익숙해진 후에는 내가 20야드까지 접근해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 황량한 회색과 갈색의 땅에서 그 색채는 눈을 즐겁게 했다. 머리는 하얗고, 부리는 검은색이며, 목은 흰색에서 연어색으로 변한다. 등은 분홍빛 흰색이고, 가슴은 흰색이며, 꼬리는 연어색이다. 날개는 앞쪽이 연어색이지만 끝과 아랫부분은 검은색이다. 물속에 서 있거나 걸어다닐 때 전체적으로 분홍색과 흰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에서 날아오를 때는 날개 아랫부분의 검은색이 두드러져 날아다니는 플라밍고 무리가 검은색과 흰색의 놀라운 대비를 이룬다. 비행할 때 플라밍고는 고개를 꾸준히 앞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밧줄 같은 목은 날개를 천천히 움직이면서 물결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착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몸체는 불규칙적으로 추진되는 반면, 머리는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움직이고 그 차이는 목의 물결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플라밍고는 보면 재미있는 새다. 거만한 로마인의 코처럼 생긴 부리와 긴 밧줄 같은 목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부리고 꼬는 모습은 마치 수심 측량의 실망스러움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듯했다. 쉰 목소리로 “뭐지”, “뭐지”하고 우는 소리는 측심 작업에 대한 깊은 공감을 표현하는 것처럼 들렸다. 밝은 달빛이 비추던 어느 날 밤, 플라밍고들은 매우 시끄러웠고 계속해서 매우 쉰 목소리로 “뭐지”라고 외쳤다. 분명히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답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그들이 모두 조용한 만에 서서 머리를 날개 밑에 묻고 깊이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전 동안 물이 잔잔할 때 그들은 호수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오후에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나면 해안 가까이로 들어왔지만 좀처럼 물에서 나오지 않았다.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의 광활한 얕은 물은 그들에게 훌륭하고 넓은 먹이터를 제공했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다. 분명히 그들은 여기서 번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수천 수만 마리의 새들이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오래된 것이나 새로운 것이나 플라밍고 둥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어떤 진취적인 생물학 탐험가에게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공할 것이다. 아마도 프랭크 채프먼(Frank Chapman)이 언젠가 그것을 해결할 것이다.
플라밍고 다음으로 많은 것은 아름다운 흰 갈매기(혹은 제비갈매기?)였는데, 이 안데스 호수에서 해발 11,500피트에 있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들은 보통 수백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플라밍고가 가지 않는 호수의 더 깊은 부분에는 작은 검은 잠수새들이 많았다. 잠수새들은 매우 빠르고 영리했으며, 진정한 개인주의자로서 홀로 활동하며 물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오래 헤엄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큰 검은 오리들은 플라밍고보다 훨씬 더 대담했고 카누에 매우 가까이 다가와 헤엄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놀라면 엄청난 속도로 물 위를 질주하며 날개와 발을 모두 사용해 도망갔다. 이 오리들은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작은 잠수새만큼이나 흔했다. 호수에는 여기저기 작은 섬들이 있었는데, 각각 버려진 둥지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황새나 오리의 것일 것이다. 첫 번째 캠프 근처의 낮은 개울 둑에는 딱따구리가 만든 구멍들이 있었다. 이 나라에서 딱따구리들은 나무와 전신주를 헛되이 찾는다.
때때로 해안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내 보트가 물속에 허리까지 잠겨 고요히 서서 맛있는 수초를 먹고 있는 거대한 물소를 놀라게 하곤 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머리와 목을 수면 아래로 깊이 담가야 했다.
내가 물집을 만들고 물소와 플라밍고를 놀라게 하는 동안, 터커(Tucker) 씨는 파리나코차스 분지를 삼각측량하여 이 지역의 첫 정확한 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경위의를 들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종종 작은 땅올빼미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들은 엄숙하고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만이 그의 활동을 의심과 반감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내 일의 일부는 삼각측량이 가능한 한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잘 둥근 언덕들의 눈에 띄는 지점에 돌을 쌓아 신호 기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밤중에 이 신호 기지 중 일부가 사라지곤 했다. 이는 이 근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미신적인 양치기들이 그들의 영역에 이상한 신들이 세워지는 것을 거부하고 철거한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목초지가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호수의 옛 바닥이었던 평평한 땅에서 그들의 양과 소 수백 마리가 먹이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파리나코차스 분지의 언덕들은 나무가 없고 약간의 목초지를 제공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부서진 바위로 덮여 있었다. 풀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이 나라에 들어온 양들의 퇴화된 후손들에 의해 짧게 뜯겨 있었다. 그들은 크기가 작고 대부분 흰색이었지만 검은 양들도 많았다. 우리는 여기서 양 한 마리의 가치가 약 50센트라고 들었다.
파리나코차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 우리는 양치기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러나 이틀 후 호기심이 서서히 수줍음을 이겼고, 젊은 양치기 소년 소녀들의 무리가 점차 양떼를 우리 캠프 가까이로 데려와 이 이상한 방문객들을 몰래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막에 살면서
실제로 호수의 위협적인 물 위에서 움직이며, 기묘한 마법으로 날마다 삼각대 위의 반짝이는 유리 눈을 올리고 내리며 바쁘게 일했다. 여자들은 두꺼운 재질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치마는 무릎에서 발목 중간까지 내려왔다. 모자 대신 손으로 짠 작은 다채로운 숄을 머리에 뾰족한 모자 모양으로 접어 쓰고 목과 어깨를 햇볕과 바람으로부터 보호했다. 각 여성은 손 물레로 바쁘게 실을 잣고 있었지만, 아기와 그 용품, 담요를 머리에 걸쳐진 끈이 달린 해먹이나 슬링에 담아 운반했다. 이 슬링 가방들은 부드러운 양모로 깔끔하게 짜여 있었고 매력적인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자들과 소년들은 맨발이었다. 소년들은 현지에서 제작된 오래된 펠트 모자와 그들에게 너무 큰 코트와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고원 분지의 한쪽 끝에 우아한 원뿔 모양의 사라사라 산(Sarasara)이 솟아 있었다. 이른 아침 호수의 유리 같은 물에 비친 눈 덮인 봉우리의 모습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사라사라 산은 한때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화산 원뿔은 눈과 얼음에 의해 날카롭게 침식되었다. 더 높은 고도와 그에 따른 더 넓은 설원이 있던 시절에는 녹은 눈이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를 훨씬 더 큰 수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밤에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호수 가장자리 근처에서 우리의 최저 온도계는 밤에 화씨 22도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호숫가에는 아주 얇은 얼음막만 있었고, 가장 얕은 만을 제외하고는 호숫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얼음이 보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 해안 가까이에서 수면 아래 10인치 지점의 수온은 화씨 61도였고, 더 먼 곳에서는 3-4도 더 높았다. 정오 무렵 해안에서 반 마일 떨어진 곳의 수온은 화씨 67.5도였다. 정오 직후 해안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얕은 물을 휘저으며 냉각시켰다. 곧 수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뜨거운 태양이 거의 머리 바로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 2시 30분경에는 65도로 떨어졌다.
호수의 물은 염분이 있었지만, 우리는 호숫가 근처에서 담수 개울가에 캠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해안 근처에서 채취한 물 샘플을 뉴헤이븐으로 가져와 셰필드 과학 학교의 조지 S. 제이미슨 박사가 분석했다. 그는 물에 실리카, 인산철, 탄산마그네슘, 탄산칼슘, 황산칼슘, 질산칼륨, 황산칼륨, 붕산나트륨, 황산나트륨, 그리고 상당량의 염화나트륨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파리나코차스의 물은 대서양이나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보다 더 많은 탄산염과 칼륨을 함유하고 있다. 전형적인 ‘염수’의 염도와 비교하면, 파리나코차스 호수의 염도는 중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며, 코코노르 호수보다는 많고 대서양보다는 적으며, 그레이트 솔트 레이크 염도의 20분의 1에 불과하다.
능선 꼭대기에는 15미터 너비의 고대 도로 유적이 있었는데, 돌무더기 사이로 난 넓은 풀밭 길이었다. 이 도로는 포장된 흔적도, 최근에 사용된 흔적도 없었다. 이 도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넓은 계곡을 향해 능선을 가로질러 나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계단식 밭과 경작지가 있었다. 나스카(Nasca)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아마도 돌들을 주워 양쪽에 쌓아둔 것은 야마 떼를 돌밭 능선 위로 몰고 갈 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야마는 아주 낮은 벽이라도 넘어가기를 꺼린다. 풀이 자란 도로는 분명 거만한 짐승들이 계속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언덕 여러 곳에서 크고 작은 원형 바위 구조물과 임시 대피소의 윤곽을 볼 수 있었다. 이것들은 목동들이 이 고도(해발 3,600미터)에서 갑자기 몰아치는 눈과 우박 폭풍을 피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대피소들은 매우 허술한 상태였다. 거친 화산암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원형 구조물의 직경은 2.4미터에서 7.6미터까지 다양했다. 대부분은 최근에 사용된 흔적이 전혀 없었다. 작은 벽들은 작은 원형 오두막의 기초였을 것이다. 더 큰 벽들은 아마도 알파카와 야마를 밤에 가두고 늑대나 코요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우리였을 것이다. 나는 이 유적들의 연대에 대해 꽤 의문이 들었다. 이것들이 역사 시대의 목동 정착지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벽의 모양과 크기로 볼 때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대피소들은 잉카 시대의 목동들이 지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 서쪽 언덕에 있는 것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스카(Nasca)는 북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잉카 이전 문화 중 가장 예술적인 문화 중 하나의 중심지였다. 매우 섬세한 도자기로 유명하다.
어느 날 더 높은 능선 중 하나를 넘다가 나는 갑자기 평소보다 큰 야생 비쿠냐 무리를 만났다. 100마리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상대적인 두려움 없음 또한 파리나코차스의 외딴 곳과 이곳에서 사냥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쿠냐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종종 가죽을 위해 사냥된다. 그들의 비단 같은 털은 알파카보다도 더 부드럽다. 그들 가죽의 더 털이 많은 부분을 함께 꿰매어 금갈색의 부드러운 에이더다운처럼 부드러운 이불을 만든다.
터커 씨가 호수 삼각측량을 마친 후 나는 아리에로들에게 가장 짧은 귀로를 찾으라고 말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아레키파”라고 중얼거리고는 남쪽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곧 마라이카사 계곡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남쪽으로 멀리 있는 언덕들 중 하나 너머로 코로푸나(Coropuna)의 작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라이카사 계곡은 잘 정착되어 있었고 많은 곡식 밭이 보였지만 계단식 밭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주변 언덕들은 부드럽고 잘 둥글려져 있었으며 계곡 바닥에는 많은 충적토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통과해 지나갔고 어두워진 후 손도르에 도착했다. 이곳은 매우 의심 많고 비호의적인 가축 몰이꾼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어둠 속에서 돈 파블로가 잘 지어진 짚 지붕 오두막 주인들에게 간청했고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말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피난처도 주기를 꺼려해서 우리는 오두막들 중 하나의 바로 앞에 있는 매우 바위가 많고 더러운 우리에 텐트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돼지, 개, 소들이 밤새 우리를 귀찮게 했다. 우리가 날이 밝기 전에 도착했다면 다른 환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목동들은 단지 산악인들과 황야 사람들이 낮에 도착하지 않고 분명히 보이고 완전히 논의될 수 없을 때 오는 사람들에 대한 관습적인 적대감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꽤 최근의 용암류를 지나쳤고 또한 바람과 모래 침식으로 인한 많은 기묘한 바위 형태들을 주목했다. 우리는 이제 방목지대를 떠나 다시 사막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우리는 1.6km 깊이의 카라벨리 협곡의 가장자리에 도착했고 우리 눈은 풍부한 녹색 오아시스를 보고 기뻐했다. 이는 협곡의 황량한 벽과 강렬한 대조를 이루었다. 우리가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갈 때 우리는 많은 아름다운 나무 선인장 표본을 지나쳤다. 가파른 내리막길 끝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정착지에서
매우 넓은 강을 건너야 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도강해야만 했다. 테하다 형제 중 누구도 이곳에 와본 적이 없어서 강의 수심과 위험을 알지 못했다. 다행히 파블로는 강둑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 사는 쓸쓸한 사람을 찾아냈고, 그는 안전한 길을 알려주었다. 흥분되는 2시간 후 우리는 마침내 원하는 강둑에 도착했다. 동물들과 사람들은 높고 건조한 사막을 떠나 카라벨리의 오아시스로 들어가게 되어 기뻐했다. 푸른 알팔파 밭, 그늘진 무화과나무, 키 큰 유칼립투스가 있었다. 공기는 풍부한 식물의 냄새로 가득했고 더 시원하고 상쾌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카라벨리에서 현대적인 영국 기업인 “라 빅토리아” 금광을 발견했다. 관리자인 프레인 씨와 캠프의 동료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멋진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해안 사막에서 두 달을 보낸 후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녁 시간 동안 우리는 프레인 씨가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고원을 가로질러 기계를 운반하는 데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들었다. 우리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석영 분쇄기의 큰 부품 하나를 노새로 운반하는 비용이 1등급 짐 노새 한 마리의 가격과 맞먹었다. 사실 단 이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등은 사막 고원을 넘어 4000피트 고도까지 500파운드나 되는 기계 부품을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노새들은 해안에서 협곡 가장자리까지 기계를 운반했지만, 어떤 노새도 카라벨리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을 운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절벽 가장자리에 윈들라스를 설치하고 도르래를 이용해 기계를 한 조각씩 내렸다. 이것이 이 용감한 엔지니어들이 겪어야 했던 장애물 중 하나였다. 기계를 설계한 사람이 이런 바위 계단 같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짐 노새와 함께 여행해 본 적이 있었다면 주물을 훨씬 작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미 내륙으로 물건을 배송하는 사람들이 짐 동물이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무게를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놀랍도록 많다. 짐 동물이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무게는 150파운드를 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힘이 센 노새라도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길에서 300파운드가 넘는 짐을 지고 며칠 동안 걷는 것은 불가능하다. 짐 한 덩어리가 200파운드를 넘으면 동물의 등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짐이 흔들려 불쌍한 노새를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노새 몰이꾼에게 큰 불편과 끊임없는 걱정을 안겨준다. 실용적인 면에서 개별 단위의 무게는 약 75파운드가 좋다. 이 정도 무게라면 아리에로들이 안데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르막과 내리막길에서 하루 종일 짐을 싣고 내리고 다시 싣는 작업을 하기가 더 쉽다. 게다가 75파운드짜리 짐 한 덩어리는 사람이나 야마가 들기에 적당하고, 두 덩어리는 당나귀에게, 세 덩어리는 평균적인 노새에게 적당하다. 필요하다면 튼튼한 노새에 네 덩어리를 실을 수도 있다.
친절한 광산 기술자들은 우리에게 “라 빅토리아”에 더 오래 머물 것을 권했지만, 우리는 서둘러 떠나야 했다. 카라벨리(Caraveli)의 기분 좋은 그늘진 나무들을 떠나 우리는 거칠고 황량한 자갈과 용암 바위로 된 언덕을 올라 협곡을 벗어났다. 언덕 꼭대기 근처에서 지름이 8피트인 작은 원형 또는 타원형 오두막의 잔해를 발견하고 놀랐다. 무려 50개 정도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이 근처에는 물이 없었다. 주변에는 초록색 식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한때 마을이 있었다. 이곳은 파리나코차스(Parinacochas) 분지 남쪽 경사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였다.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길 중에서 가장 험한 길 중 하나였다. 때로는 거대한 용암 덩어리 무더기 사이를 지나는 험한 바위 길에 불과했다. 더 큰 바위 몇 개에는 그림 문자가 있었다. 그것들은 뱀과 태양, 사람과 동물들을 나타냈다.
얼마 후 우리는 칼랑가(Callanga)의 리오 그란데(Rio Grande) 계곡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해안 사막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유적지 사이에 천막을 쳤다. 유적은 100에이커의 면적을 차지했고, 집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지금은 황폐한 지역에서 이렇게 매우 큰 대도시를 발견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칼랑가의 전체적인 모습은 우리나라 남서부의 큰 유적지 군들을 놀랍도록 연상시켰다. 잉카 기원을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는 계단식 밭이 없었다. 이렇게 큰 인구가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 또는 어떻게 살았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벽은 조밀한 자갈로 대충 쌓아 올리고 진흙과 모래로 회반죽을 발랐다. 대부분의 회반죽은 떨어져 나갔다. 일부 집에는 한쪽 끝에 좌석이나 작은 침대 플랫폼이 지어져 있었다. 다른 집들에는 문이나 창문이 없는 2~3개의 작은 방이 있었는데, 아마도 창고였을 것이다. 우리는 자갈로 안을 댄 여러 개의 매장용 석관을 발견했다. 어떤 것은 사각형이었고, 다른 것은 둥근 모양이었다. 한 집에서는 “지하실 계단” 아래에서 지하실이나 무덤을 발견했다. 입구는 단일 석재 인방으로 덮여 있었다. 이 무덤을 조사하다가 터커 씨는 보바(boba)에게 물릴 뻔했다. 보바는 거의 3피트 길이의 독사로, 사나운 입과 방울뱀처럼 긴 송곳니, 그리고 눈에 띄게 얼룩덜룩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한 곳에는 높이가 10피트도 안 되는 낮은 피라미드가 있었다. 꼭대기로 이어지는 조악한 돌계단이 있었다.
유적 사이에서 우리는 부드럽고 매우 다공성인 용암으로 거칠게 조각된 여러 개의 깨진 석기를 발견했다. 그릇들은 깨끗하게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아마도 페인트를 갈기 위해 사용된 작은 석제 절구와 깨진 석제 전투 곤봉, 그리고 아마도 옥수수를 갈기 위해 사용된 깨진 석제 절구와 절구공이를 발견했다. 1.5피트 길이의 돌 2개는 대충 둥글게 만들어졌고, 더 평평한 면의 중간에 얕은 홈이 있었는데, 어부들이 큰 그물을 누르는 데 사용하는 추와 비슷했지만, 10배는 더 컸다. 아마도 폭풍 속에서 지붕을 묶어두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지면에는 몇 개의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너무 풍화되어 원래 장식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발굴을 하지 않았다. 칼랑가는 흥미로운 발굴 현장을 제공한다.
고고학 조사를 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고, 예기치 않게 마주쳤으며, 조사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죽은 도시의 한복판에서 첫날 밤을 보낸 후 우리는 비록 완전히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곳에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티디 시모어 교수가 고대 그리스 유적을 연구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는 벼룩들이 평소에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우리의 다음 정착지는 안다라이(Andaray)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의 초가집들은 대부분 진흙을 발라 만든 돌로 지어졌다. 그 근처에서 우리는 노새를 끌고 가는 두 남자를 만났는데, 그들은 노새를 마을에 팔러 가는 중이었고 싸게 팔 의향이 있다고 했다. 테하다 형제들은 좋은 동물을 싸게 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록 상황이 의심스러웠지만 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금화 6개를 빌려 새 노새를 짐 운반용 동물 떼에 추가했다. 하지만 추키밤바에 도착해서야 그들이 도둑들로부터 노새를 구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리에로들이 도난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난당한 노새의 주인은 노새를 되찾는 대가로 아무것도 지불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거래와 금화를 모두 잃고 말았다. 우리는 추키밤바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우리의 친구인 베나비데스 부지사와 함께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레키파로 가는 잘 알려진 길을 택했다. 우리는 오후에 마헤스 계곡을 떠났고, 전과 마찬가지로 밤에 사막을 건넜다.
새벽 3시경, 약 12시간 동안 어둠과 고요 속에서 노새들의 발걸음 소리와 모래 위를 걷는 소리만 들으며, 가끔 별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초승달 모양의 사구만 보며 꾸준히 걸어온 후, 동쪽 지평선이 희미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달은 이미 오래 전에 졌다. 이것이 새벽의 시작일까? 해돋이는 적어도 2시간은 더 남아있었다. 열대 지방에서는 해가 뜨기 전 새벽이 짧다. “새벽이 천둥처럼 밝아온다.” 분명 달이 다시 뜨는 것은 아닐 테고! 급속도로 밝아지는 동쪽 하늘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우리가 지켜보며 놀라워하는 동안, 순수한 흰 빛은 점점 더 밝아져 갔고, 마침내 우리는 눈부신 광체가 장엄하게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 소리쳤다. 태양도 달도 아닌 찬란한 광채가 우리를 비추었다. 그것은 샛별이었다. 그날 비너스는 순수한 아름다움과 “신성하고 매혹적인 황홀경”에서 내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났다. 아시아의 사막에서 종종 이런 광경을 보았던 위대한 동방의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신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쳤다.”
그럼에도 포스난스키 씨는 티티카카 호수가 한때 안데스 산맥이 솟아오르며 바다에서 분리된 염호였다고 믿는다. 호수의 물고기가 해양종이 아니라 담수종이라는 사실은 그를 망설이게 하지 않는다. 포스난스키 씨는 티티카카 어부가 준 작은 말린 해마에 자신의 믿음을 걸고 있다. 그는 안데스의 거의 모든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원시 약재 판매상들이 자주 판매하는 말린 해양 생물 표본들을 포함해 신비로운 물건들을 판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포스난스키 씨의 해마는 아마도 특별히 장사 수완이 좋은 상인이 바다에서 가져온 것일 것이다. 안데스에서 불가사리가 흔하고 해마가 실제로 라파스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티티카카 호수에서 엄밀히 해양 동물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호수에는 두세 종류의 식용 담수어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리마 근처 리막 강에서 발견되는 종이다. 잉카인들이 무거운 짐을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나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들이 의도적으로 리막 강의 바람직한 담수어를 티티카카 호수로 옮겼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560년 쿠스코(Cuzco)에 살았던 폴로 데 온데가르도는 잉카인들이 특별 주자를 통해 바다에서 신선한 생선을 가져왔다고 말하며, “그들의 키푸에는 300리그가 넘는 거리인 툼베스에서 물고기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물고기가 든 물 항아리를 옮기는 것은 잉카인들에게 전혀 심각한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아이디어가 그들에게 바람직해 보였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도 포스난스키 씨만큼이나 틀릴 수 있다! 어쨌든 티아우아나코의 고대 도시를 실제로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내해에 대한 로맨틱한 이야기들은 존중하는 회의론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티아우아나코는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 남쪽 끝에 있으며, 잉카 이전 문명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페루나 볼리비아 고원의 다른 선사 시대 유적과 달리 여기에는 조각된 일석상들이 있다. 풍화와 파괴 행위로 인해 손상되었지만,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옷을 입은 인간 형상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와 긴 튜닉이 저부조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부 디자인은 분명 여기에 묘사된 신이나 족장의 지위, 업적, 특성을 상징하지만 문자는 아니다. 조각상들은 뻣뻣하고 인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이 전혀 없다. 아마도 고대 예술가들은 인체를 연구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안데스 마을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따뜻한 기후의 원시 부족들처럼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고원 주민들은 항상 두껍게 옷을 입고 다닌다. 낮이나 밤이나 마찬가지다. 기후 때문에 옷의 양과 두께로 편안함을 추구하다 보니, 신체 노출에 대해 과도한 수치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따뜻한 남태평양의 모래사장에 사는 사람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잉카의 조각가와 도공들은 인체를 모티프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티아우아나코는 잉카 이전 시대지만, 여기서도 조각상들은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은 조각가의 작업을 쉽게 하려고 옷을 입힌 것이 아니다. 그의 조각 솜씨를 보면 관찰력이 뛰어나고 진정한 예술적 감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나체’에 대한 금기가 그에게는 너무 강했던 것 같다.
티티카카 호수의 36개 섬 중 일부는 페루에, 다른 일부는 볼리비아에 속한다. 후자에 속하는 두 개의 섬인 티티카카와 코아티는 잉카 시대에 특별히 숭배받았다. 이 섬들은 인공 계단식 밭으로 뒤덮여 있으며,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인디오 농부들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두 섬 모두에는 중요한 잉카 건축물의 유적이 있다. 티티카카 섬에서 나는 두 개의 동굴을 보여줬는데, 인디오들은 그곳에서 태양과 달이 창조될 때 나왔다고 말한다. 이 동굴들은 사람이 똑바로 서기에는 너무 작지만, 천체의 크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밝은 원반들이 폭 8피트의 동굴에서 나왔다고 믿는 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다. 이 신화는 아마도 호수 서쪽 해안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 너머로 해나 달이 뜨는 것을 자주 보면서 생겨났을 것이다. 섬을 가로지르는 고대 도로에서 내 원주민 안내인은 “태양과 달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이는 침식으로 인해 생긴 두 개의 특이한 흔적으로, 20-30피트 키의 거인들의 발자국과 희미하게 닮았다.
오늘날 아이마라족으로 알려진 원주민들은 부지런하고 꽤 명랑해 보인다. 반델리에가 그의 저서 ‘티티카카와 코아티 섬’에서 묘사한 이 인디오들의 타락과 불친절한 성격은 1915년 내가 짧게 방문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했던 것처럼 몇 달 동안 인디오들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의 고대 예배 장소를 파헤치고, 미신적인 편견을 건드리며,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비와 가뭄의 적절한 균형을 무너뜨렸다면, 나 역시 그가 겪었던 것과 같은 무례하고 거친 대우를 받았을 수도 있다. 티티카카의 원주민들의 태도를 판단할 때는 그들이 매우 힘든 기후와 환경 조건에서 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년 중 몇 달 동안은 모든 것이 말라붙고 메마른다. 희박한 공기를 통과하는 열대의 강렬한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어 빈약한 식물들을 시들게 한다. 그러다 폭우가 쏟아진다. 나는 티티카카 호수에서의 첫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증기선이 비 폭풍을 만났을 때 그 결과로 생긴 홍수는 실제로 갑판을 뚫고 들어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폭우는 농부들이 힘들게 모은 밭이나 정원의 흙을 씻어내린다. 낮에는 태양이 매우 뜨겁지만 햇빛과 그늘의 온도 차이가 극심하다. 게다가 밤에 부는 바람은 매우 습하고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연료는 극도로 부족해 요리용으로 겨우 충분할 뿐이며 난방용은 전혀 없다.
음식을 구하기도 어렵다. 해발 12,500피트에서는 몇 가지 작물만 재배할 수 있다. 보리를 조금 키우지만 토양에 질소가 부족하다. 주요 작물은 쓴맛이 나는 흰 감자로, 이를 얼렸다가 말린 것이 맛없는 추뇨가 되어 가난한 가정의 주식이 된다. 태평양 연안 섬에서 구아노를 가져오던 잉카 시대의 체계는 오래전에 폐지됐다. 현대식 비료를 살 돈도 없다. 결과적으로 수확량이 적다. 티티카카 섬에서 나는 옥수수를 수확한 후 알맹이를 떼어내고 말리는 원주민 여성들을 보았는데, 옥수수 길이가 1인치에서 3인치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이 미니어처 옥수수는 60일 만에 익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좋은 토양과 비료가 있다면 크기와 생산성이 두 배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인디오들은 항상 자연의 힘에 휘둘린다고 느낀다. 긴 우기나 가뭄은 극심한 기아와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볼리비아나 페루 고원 주민이 자주 음울하고 우울해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사모아인들이 행복하고 환대하며 명랑하다고 칭찬해서도 안 된다. 그 행운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언제나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바다와, 맛있는 음식을 항상 얻을 수 있는 나무들, 그리고 돈 들이지 않고 시원한 음료를 얻을 수 있는 코코넛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환경에서 누가 명랑해지지 않겠는가?
코아티 섬의 주요 건물들은 섬 동쪽의 작은 만에 조성된 인공 테라스 위에 지어졌다. 작은 광장의 세 면을 둘러싼 건물들은 네 번째 면은 열려 있어 호수와 눈 덮인 코르디예라 레알 산맥의 멋진 전망을 제공한다. 이 산맥은 200마일 길이에 걸쳐 어느 곳도 17,000피트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 웅장한 눈 덮인 봉우리들의 산맥은 21,520피트 높이의 소라타(Sorata) 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양과 달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가장 정교한 종교 의식을 위해 신성한 섬들을 찾았을 때, 장엄한 눈 산 위로 떠오르는 천체들의 모습과 호수의 반짝이는 물에 반사된 그 영광스러운 광경은 정말 숭고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때 이 작은 광장은 정말 볼 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화려하게 장식된 잉카인들을 상상해보라. 그들의 얼굴은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 아침의 딸”의 색채로 빛나고, 그들의 의식적인 대열이 뒤편의 높고 장식된 건물 벽을 배경으로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통치자들과 고위 사제들은 큰 계단식 벽감 앞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밝은 색을 좋아하고, 정교한 직물을 만들 수 있으며, 옷에 금박을 입힌 장식품과 원반을 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대의 의식을 참으로 화려하게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성스러운 구역 바로 바깥에 있는 “환전상”들의 테이블에는 무언가를 주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진짜 돈벌이꾼들이 있다. 속임수 도박꾼들과 3장 카드 몬테 사기꾼들이 활발히 장사를 하며 순진한 원주민이나 의심 없는 외국인을 속일 준비를 하고 있다. 운영자들은 누더기 판초를 입고 깊은 속셈을 품을 능력이 없어 보이지만, 그들은 모든 속임수를 알고 있다! 축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다양한 아이마라 비밀 결사 단체들의 존재인데, 그 회원들은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원시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특이한 의상을 입고 있다. 각 단체는 고유의 제복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반짝이와 무늬 있는 새틴, 주석 박, 금박과 은박, 화려한 직물, 은색 바탕에 반짝이는 색유리 보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금색 별이 달린 화려한 견장, 착용자의 머리 위로 18인치나 곧게 솟은 여러 색깔의 염색된 “타조” 깃털, 화려한 리본, 프릴이 달린 보디스, 부풀어 오른 소매, 찢어진 바지 등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이한 의상 중 일부는 실제로 16세기를 연상시킨다. 착용자들은 플루트, 호루라기, 심벌즈, 플래절릿, 작은 북, 딸랑이 또는 기타 소음 발생 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동이다. 현란한 인간 만화경이 한 다스의 재즈 밴드를 훨씬 능가하는 악마 같은 소음과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를 동반한다. 이는 풀려난 혼돈이며, 광란과 혼란의 장면이다.
한 그룹의 구성원들은 여성 천사로 분장했는데, 머리에는 최대한 많은 수의 높고 물결치는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달 수 있도록 꽉 조인 터번을 쓰고 있었다. 등에는 어린이 무대극의 나비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날개를 달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색안경을 착용했다. 그들은 광장을 엄숙하게 행진하며 대나무 플래절릿을 연주했지만, 그들의 애처로운 곡조는 큰 베이스 드럼과 요란한 트럼펫 소리에 묻혀 버렸다. 소용돌이치는 군중 속의 한 구석에서는 버밍엄이나 맨체스터에서 온 값싼 장신구로 가장 야한 방식으로 장식한 평온한 표정의 아이마라인이 동볼리비아의 작은 대나무 관으로 매력적으로 만든 시골 풍의 시링크스나 팬 파이프로 우울한 곡조를 차분히 연주하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는 일요일 오후에는 의상이 사라지고 투우 놀이가 벌어진다. 광장 모퉁이에는 튼튼한 임시 장벽이 세워지고, 집주인들은 문을 걸어 잠근다. 네덜란드식 용기로 무장한 수백 명의 쾌락 추구자들로 구성된 난폭한 군중이 싸움을 위해 모인다. 모두가 소가 그들을 향해 돌진하기로 마음먹으면 사방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투우가 아니다. 창으로 소를 미치게 하는 피카도르도 없고, 작살 창을 든 반데리예로도 없으며, 미친 듯이 지친 소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된 빛나는 검을 든 영웅적인 마타도르도 없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재미와 장난이다. 물론 소는 자랑스러운 소년들이나 술 취한 아이마라인들에 의해 적절히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은 막대기로 소를 찌르고 소의 얼굴 앞에서 밝은 색 판초를 흔들어 소가 괴롭히는 자들을 쫓아가게 만들고 일부 구경꾼들을 엄청나게 흩어지게 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낸다. 한 마리가 지치면 다른 소가 나온다. 소가 부상을 입거나 심각하게 다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실제로 피해를 줄 것 같아 보이는 유일한 동물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는 군중 속으로 무작정 돌진할 생각이 없었다. 광장을 빽빽하게 둘러싼 구경꾼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특정한 적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광장을 가로지르는 모든 사람을 미친 듯이 쫓아갔다. 소동 중에 다섯 여섯 마리의 황소가 풀려났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모두가 신나게 즐겼다.
이것이 코파카바나의 광경이다. 비즈니스와 즐거움, 이교도와 기독교, 스페인과 티티카카가 뒤섞인 모습이다. 소란은 귀에 거슬리지만, 깃털과 치마, 견장, 고글을 착용한 진중한 산악 목동들이 볼록한 입술로 대나무 피리를 힘차게 불어대는 모습은 긴 여행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제6장
빌카노타 지방과 페루 고산지대 주민들
티티카카 분지의 최북단에는 빌카노타 산맥의 풀이 우거진 구릉이 있다. 이곳에서 큰 알파카 무리들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초를 뜯어먹으며 살아간다. 산타 로사가 주요 도시다. 이곳에 양모 구매자들이 모여들어 경매에 참가한다. 알파카 털의 높은 가격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산타 로사에서는 수작업 직조기로 뛰어난 담요를 만든다. 남부 페루에서 무게와 질감으로 유명하다. 해발고도가 파이크스 피크 정상과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산타 로사의 땅딸막한 주민들은 건강하고 활기차며 활동적이다. 우리가 고용한 최고의 케추아어 조수인 리차르도 차라하가 산타 로사 출신이다. 거의 모든 시민이 순수한 인디오 혈통이다. 그들은 많은 훌륭한 야마를 소유하고 있다. 목초지가 풍부해 인디오들은 야마를 잘 돌본다. 그들은 무리에 개인적으로 애착을 갖고 개체를 팔려 하지 않는다. 한번은 쿠스코 지인을 통해 예일 박물관에 보낼 좋은 야마의 가죽과 뼈대를 구하려 했다. 내 친구는 유창한 케추아어를 구사하며 호감을 얻고 있었다. 그는 좋은 값을 제시하고 여러 야마 주인들에게서 그들의 “낙타” 한 마리의 가죽과 뼈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마도 야마를 죽이는 것을 불길하게 여겼고, 마침 죽은 야마도 없었던 것 같다. 야마는 결코 주인에 대한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반면 나는 야마가 주인을 발로 차거나 물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야마는 콜럼버스 이전 남북아메리카에서 알려진 유일한 짐승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잉카 랜드 전역에서 야마를 발견했다. 거친 발바닥이 달린 작은 두 발가락 덕분에 민첩한 산악 노새조차 다니기 힘든 거칠고 가파른 경사도 쉽게 다닐 수 있다. 야마는 불쾌한 애완동물이라는 평판이 있다. 상당한 거리까지 자극성 있는 침을 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바넘 서커스가 마을에 왔다. 동물원에는 12마리의 야마가 있었는데, 거만한 표정과 무해해 보이는 외모, 작은 체구 때문에 – 어깨 높이가 3피트밖에 되지 않는다 – 몇몇 꼬마들이 괴롭히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야마들이 보복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들의 조준은 정확했고 결과는 황급히 도망가게 만들었다. 괴롭힌 아이들은 울면서 눈을 비비며 집으로 달려가 얼굴을 씻어야 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페루 고산지대에서 보낸 2년 동안 야마가 사람을 그렇게 공격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반면 1915년 산타 로사에 있을 때 누군가가 기르는 비쿠냐가 있었는데, 20피트 이내로 접근하는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곧바로 재채기를 했다. 과학적 호기심으로 다가갈 때조차 그랬다. 비쿠냐는 가장 작은 아메리카 “낙타”지만, 긴 가느다란 목과 작은 머리, 긴 다리와 작은 몸에 긴 깃털 같은 털이 달려 있어 낙타보다는 타조처럼 보인다.
산타 로사의 교회 마당에는 수세기 동안 존경과 숭배의 대상으로 조심스럽게 보존해온 두세 그루의 비틀어진 나무가 있다. 일부 여행자들은 14,000피트가 수목한계선 위라고 생각했지만, 산타 로사에 이 나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안데스에서 “수목한계선”이라는 말은 잘못 사용된 것 같다. 쿡 씨는 해안 사막을 제외한 페루 고원 전체가 한때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믿는다. 인간이 처음 안데스에 왔을 때, 바위 절벽과 눈밭, 빙하를 제외한 모든 곳이 숲으로 덮여 있었다. 현재 많은 지역이 완전히 나무가 없지만, 쿡 씨는 가장 높은 고도에서도 빛, 열, 습도 조건이 나무 성장에 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토양의 비옥도도 충분하다. 그의 이론은 내가 발견한 몇몇 고립된 숲 지대로 잘 뒷받침된다. 특히 소이로코차 산 경사면의 한 숲은 범스테드 씨가 해발 15,000피트 이상이라고 정확히 측정했다. 이 숲은 바위 절벽과 낭떠러지로 인해 사람이 사는 계곡에서 차단되어 있어 연료로 사용할 수 없었다. 페루 고원에서는 경작 가능한 땅에 원시림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다. 일부 고산 계곡의 버려진 농경 계단에서는 토종 나무로 어느 정도 자연 재조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나무들은 많은 다른 종과 과에 속하지만, 쿡 씨는 그들 모두가 이런 놀라운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잘라내도 그루터기에서 쉽게 싹이 나고 반복적인 가지치기를 견딜 수 있다. 이는 페루의 원시림이 오래 전에 연료를 위해 벌채되거나 농업을 위해 불태워졌다는 놀라운 증거다.
산타 로사 나무 근처에는 높은 종탑이 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종 네다섯 개가 각각의 창문에 매달려 있는 그림 같은 종탑을 보면 강한 매력을 느낀다. 일요일 아침에 이 종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게” 울리거나, 사실은 금이 가서 모두 동시에 울릴 때는 전혀 다르다. 그 결과 발생하는 요란한 소리는 잊을 수 없다. 중국인들은 악마를 쫓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로드 프레더릭 해밀턴이 광저우의 관행에 대해 말했듯이, “가장 고집 센 악마조차도 철저히 견디기 힘든” 소음임이 분명하다. 미국과 영국의 교회 종은 보통 달콤한 음색으로 예배에 오라고 초대하거나, 축제 행사를 알리는 기쁜 종소리를 울린다. 남부 페루의 종에는 초대나 기쁨이 전혀 없다. 가끔 쿠스코의 큰 종처럼 깊고 달콤한 음색의 종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종은 마지막 성사가 집행될 때 울린다.
죽어가는 기독교인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이 세상의 종지기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가능한 한 가장 큰 소음과 소란을 피우는 것 같다. 인기 있는 성인의 날에는 폭죽, 공중 폭탄, 그리고 다른 소음 제조 장치들이 동원되어 다시 한 번 중국의 민속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이는 건강한 모든 아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소음 만들기 취향일 뿐일 것이다.
일요일 오후 산타 로사의 광장은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휴일 나들이객들로 가득 찼는데,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치차를 자유롭게 마시고 있었다. 치차는 보통 익은 옥수수로 만든 순한 토속주다. 군중은 놀랍도록 명랑하고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즐거워했다. 그들에게 일요일은 진정한 휴식, 오락, 사교의 날이다. 평일에는 대부분, 심지어 작은 소년들까지도 산타 로사에 번영을 가져다주는 양털을 생산하는 양떼를 지키며 산 목초지로 떠난다. 때때로 일요일 오후에 산악 인디오들이 치차에 취해 호기심 많은 이방인들의 존재에 화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 산타 로사의 선량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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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로사의 인디오 알칼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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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쿠아니 광장의 토착 약재상들
물론 광장에 두 줄로 앉아 있는 달걀, 감자, 고추, 그리고 여러 토착 채소를 파는 여성 상인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남자들과 소년들은 열심히 앞으로 몰려들어 내 노력에 매우 흥미를 보였다. 일부 인디오 알칼데들, 즉 마을이나 부족 구역의 책임 있는 관리로 매년 선출되는 지방 판사들은 매우 도움이 되었고, 큰 은장식 지팡이를 든 채로 시장의 수줍고 꺼리는 여성들을 겁에 질리고 불쾌해하는 맨발의 무리로 카메라 앞에 세우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고원 지대의 관습대로 꽉 끼는 보디스, 두꺼운 모직 치마, 그리고 풍성한 속치마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는 수직기로 짠 두꺼운 모직 숄을 핀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가역성 ‘팬케이크’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짚으로 만들어졌고 우천 시에는 거친 모직물로, 맑은 날에는 금박과 벨벳으로 덮여 있었다. 지역 관습에 따라 술과 술 장식이 양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첫 번째 잉카가 각 마을의 복장을 다르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관리들이 인디오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친절한 신부, 군수, 그리고 알칼데들의 합동 노력으로 겨우 매우 마지못해하는 여성 12명을 카메라 앞에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매우 웅변적이었다. 일부는 매우 분노했고, 다른 이들은 어리석거나 거만한 표정을 지었으며, 두세 명은 다음에 어떤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는 듯이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한 명도 즐거워하거나 농담으로 여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의 모든 남성 지인들이 취한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 사실, 일부 남성들은 사진 찍히기를 너무나 원해서 우리를 따라다니며 모든 그룹의 가장자리에서 포즈를 취했다.
남자와 소년들은 모두 귀덮개가 달린 뜨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는 낮이나 밤이나 거의 벗지 않았다. 그 위에는 큰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고, 앞이 올라가 있어 거칠게 생긴 착용자들에게 대담한 모습을 주었다. 어깨에는 밝은 줄무늬로 장식된 두꺼운 모직 판초를 걸치고 있었다. 바지는 무릎과 발목 사이에서 갑자기 끝나는데, 이는 고원의 긴 이슬 풀밭을 걷는 목동들에게 편리한 스타일이다. 이 ‘하이워터’ 바지는 보통 관습대로 샌들을 신으면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일요일이라 부유한 남자들은 모두 유럽식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이는 바지 밑단에 닿지 않아 특이한 효과를 냈고, 유행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마을의 번영은 또한 주름진 철판 지붕으로도 나타났다. 짚이나 기와보다 훨씬 덜 그림 같지만, 관리가 덜 필요하고 비가 올 때 더 큰 만족감을 준다. 또한 서까래에 단단히 고정할 수 있다. 이 바람이 세게 부는 고원에서 우리는 종종 짚 지붕이 집 위로 지나가는 밧줄과 지붕에 놓인 무게추로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때때로 박공의 꼭대기에는 십자가, 작은 깃발, 또는 동물의 두개골이 고정되어 있는데, 아마도 악마의 눈을 피하거나 행운을 가져오기 위한 것 같다. 말발굽은 수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말 두개골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티티카카 분지의 가장자리에 라 라야(La Raya)가 있다. 분수령이 너무 평평해서 특정 빗방울이 결국 티티카카 호수로 갈지 아니면 대서양으로 갈지 거의 말하기 불가능하다. 아라란카(Araranca) 기차역 근처의 샘에서 나오는 물은 확실히 북쪽으로 흐른다. 이 샘은 우루밤바(Urubamba) 강의 원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우루밤바 강은 우카얄리(Ucayali) 강의 중요한 지류이자 아마존(Amazon) 강의 지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모험적인 강연자인 블랭크 대위의 영화 엔터테인먼트 “아마존의 발원지에서 하구까지”에서처럼 “아마존의 발원지”로 언급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정글”에서의 야생동물 사진 대부분이 파라의 동물원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고, 그의 카누 여행의 흥미진진한 비극들이 실제로 쿠스코에서 일주일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친근한 산타아나 아시엔다 근처에서 연출된 것을 고려하면, 이 특정 작은 샘에 그렇게 거창한 제목을 붙인 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루밤바 강은 강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상류 부분은 때때로 빌카노타(Vilcanota)라고 불리는데, 이 용어는 이 지역의 호수와 눈 덮인 코르디예라(Cordillera) 봉우리들에도 적용된다. 하류 부분은 잉카들에 의해 우일카(Uilca) 또는 우일카마유(Uilcamayo)라고 불렸다.
라 라야의 분수령 근처에서 나는 흥미로운 벽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수세기 전에 쿠스코의 잉카들을 티티카카 분지의 호전적인 콜라(Collas) 족들로부터 분리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일부 장소에서는 방목지 소유주들에 의해 보수되어 왔지만, 대부분은 계곡을 가로질러 그리고 인접한 경사면을 따라 빌카노타 코르디예라의 절벽까지 희미하게 추적될 수 있을 뿐이다. 거친 돌로 지어졌다. 역사적인 벽 근처에는 고대 주택의 유적이 있는데, 아마도 한때 잉카 수비대가 점령했을 것이다. 유적 중에서 정교하게 다듬은 돌이나 세심한 석공 기술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급하게 세워진
이 방어벽은 로마의 북부 브리튼 장벽이나 만리장성과 같은 영구적인 시설이 아니라 단일 군사 작전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통에 따르면 티티카카 분지 사람들과 우루밤바 및 쿠스코 계곡 사람들 사이에 전쟁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그런 전쟁의 유물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잉카 시대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 초기 역사가 중 한 명인 몬테시노스는 잉카 이전 페루 통치자인 아마우타(Amautas) 62대 파차쿠티 6세 티투 유팡키(Titu Yupanqui)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차쿠티 6세 시대에 (서기 800년경) 남쪽과 동쪽에서 거대한 야만인 군대가 몰려와 도시와 마을을 파괴하고 들판을 황폐화했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한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 야만인들의 이동이었다. 이 전쟁 동안 이전 20세기에 걸쳐 많은 노력 끝에 세워진 고대 문명이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파차쿠티 6세는 전투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인 성향의 통치자로, 농업에 큰 업적을 남긴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점쟁이들과 사제들에 의해 놀라게 되었고, 그들은 그에게 많은 불길한 징조들을 알렸다. 그들은 그에게 군사적 준비태세를 갖추라고 조언하는 대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그는 장군들에게 전략적 요충지를 요새화하고 방어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침략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왔을 수 있다. 그들은 아마도 대초원의 산림 지역이 점차 고갈되고 경작할 수 없는 초원이 확산되면서 생긴 기아와 기근에 의해 자극받았을 것이다. 몬테시노스에 따르면 당시 고원 지대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농작물을 위한 경작지를 찾고 있었고 “거인 종족”(아마도 파타고니아인이나 아라우카니아인)으로부터 도망쳐 왔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 평원과 습지, 정글을 지나왔다. 원주민들의 대대적인 재배치가 진행 중이었음이 분명하다. 이 무리들이 지나간 지역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저지할 만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 파차쿠티 6세는 군대의 대부분을 라 라야 고개 근처에 집결시키고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몬테시노스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라 라야 근처의 이 벽은 1100년 전쯤 “전략적 요충지를 요새화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수들에 의해 지어졌을 수 있다.
티티카카 분지에서 우루밤바 분지의 중요 도시와 마을로 가는 관문이었던 라 라야 고개는 분명 상황의 핵심이었다. 파차쿠티 6세가 이 벽 뒤에 군대를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병사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원 목동들에게 가장 친숙한 무기인 투석구를 사용했다. 하지만 침략자들은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는데, 이는 더 효과적이고 빠르며 보기 어렵고 피하기 힘든 무기였다. 파차쿠티 6세가 황금 가마에 실려 전장을 돌며 병사들을 격려하던 중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군대는 패배했다. 몬테시노스는 5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그들은 부상자들을 뒤에 남겨둔 채 “탐푸토코”라는 건강에 좋은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에는 동굴이 있어 통치자의 소중한 시신을 숨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저자들은 이곳이 흥미로운 조각된 바위 아래에 동굴이 있는 파카리탐푸라고 믿는다. 오늘날 페루에는 탐푸토코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진 곳이 없다. 존재하는 유적들 중 하나를 초기 스페인 작가들의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 현대 이름을 가진 것과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내 페루 탐험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으며, 이는 다음 장들에서 설명될 것이다.
라 라야의 감자밭
담요를 위한 경사 놓기: 라 라야 고개 근처에서
라 라야 분수령 근처에서 우리는 양과 알파카의 큰 무리, 수많은 우리, 그리고 목동들의 짚으로 지붕을 얹은 오두막들을 보았다. 케추아 여성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땅에 박힌 말뚝에 고정된 수직 직기에서 숄, 허리띠, 판초, 담요 등의 직물을 만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가축을 돌보거나 길을 걸을 때도 항상 실을 감거나 잣고 있다. 남자들과 나이 든 아이들도 때때로 이런 일을 한다. 6-7세가 되면 목동으로 쓰이는 어린 아이들은 가축을 지키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일부는 에어데일만 한 크기의 긴 털을 가진 순카 목양견을 데리고 있었지만, 이 개들은 매우 겁이 많고 짖기만 하고 뒤로 물러나는 편이었다. 순카와 다른 두 종류의 개들이 잉카에 의해 길들여졌다고 한다. 그 중 어느 것도 내 충실한 에어데일 “체커스”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들은 “체커스”가 영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에 항상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케추아어 외에 다른 말을 알아듣는 개를 본 적이 없었다!
라 라야 근처의 언덕에서 쿡 씨, 길버트 씨와 나는 해발 14,500피트에 있는 건강한 감자밭을 방문했는데, 이는 감자의 기록적인 고도였다. 이 근처의 높은 경사지에서 감자밭을 갈거나 삽질할 때, 인디언들은 약 15피트 간격으로 “이랑”을 내어 밭을 정사각형으로 나누는 것이 관례다. 케추아인들은 동이 틀 무렵 일을 시작한다. 인공 조명이 없고 새벽 전 추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아내들은 오전 10시 전에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않는다. 이때 음식은 뚜껑이 있는 토기에 담아 집에서 가져오거나 남자들이 일하는 곳 근처의 야외에서 요리된다.
우리는 한 열성적인 지주가 20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감자밭을 “갈고” 있는 것을 감독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유럽식 옷을 입고 분명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으로 보였으며 철도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현대식 농기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인디언들이 조상들의 도구 외에 다른 것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밭을 “가는” 과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수세기 동안, 아마도 스페인 정복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었다. 남자들은 일제히 긴 열을 지어 서서, 각자 발판이 묶인 원시적인 삽 또는 “발 쟁기”를 들고 있었다. 신호에 맞춰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어나가 잔디에 삽을 꽂았다. 각 남자 쌍 앞에는 소녀나 여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뒤집힌 잔디를 돌리는 것이었다.
흙덩이를 손으로 뒤집었다. 남자들은 판초를 벗어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했지만, 여자들은 평소처럼 완전히 옷을 입은 채였다. 정숙함 때문에 심지어 어깨에 무거운 숄을 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작업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공동체 활동의 즐거운 접촉으로 노동이 가벼워졌다. 모두가 열심히 일했다. 작업자들 사이에 행렬을 따라잡으려는 강한 욕구가 있는 듯했다. 뒤처진 사람들은 선의의 놀림을 받았다. 공동체 작업은 때로 즐거울 수 있다. 강한 지휘자가 필요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말이다. ‘보스’는 바로 거기 있었다. 이런 관행은 독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절대 맞지 않을 것이다.
잉카 지배 시대 동안 개인의 노력을 위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사유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정부 소유였다. 수확한 곡물은 사제들과 잉카, 귀족들이 가져갔다. 사람들은 우리처럼 불행하지 않았다. 혼자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모든 것이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밭을 경작하거나 수확할 때가 되면, 노동자들은 잉카의 명령에 따라 대규모 가족 집단으로 밭으로 나갔다. 그들은 마을 가십과 합창 노래로 농사일의 고된 노동을 견뎌냈고, 정기적인 휴식 시간에는 많은 양의 치차를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마음을 즐겁게 했다.
공동체 작업의 습관은 여전히 안데스 지역에서 볼 수 있다. 20명이 넘는 인디오들이 거대한 밀이나 보리 다발을 운반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나는 12쌍의 황소가 서로 몇 야드 떨어진 평행선상에서 동시에 넓은 밭의 작은 부분을 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지주들이 자주 리마에 가고, 때로는 파리와 뉴욕에도 가서 현대 발명품을 구입하지만, 밭은 여전히 3세기 전 정복자들이 도입한 방식대로 경작되고 있다. 그들은 최초의 역축과 고대 지중해의 원시적인 뾰족한 쟁기를 가져왔다.
라 라야의 농작물은 감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럽인들, 심지어 리마에 사는 사람들조차 거의 모르는 카니우아라는 또 다른 식용 식물이 있다. 우리가 4월에 방문했을 때, 카니우아는 수확 중이었다. 카니우아를 타작하는 바닥은 땅에 펼쳐진 큰 담요였다. 줄기를 담요 위에 놓고 도리깨질을 하는데, 담요가 작은 회색 씨앗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막아준다. 전 과정에서 유럽 출신의 것은 아무것도 사용되지 않으며, 아마도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해발 14,000피트에서 자라는 키누아와 보리도 보았다. 키누아는 또 다른 종류의 명아주이다. 종종 3~4피트 높이까지 자라며, 여러 품종이 있다. 흰 씨앗 품종은 삶은 후 오트밀과 꽤 비슷하다. 쿡 씨는 맛과 식감 모두에서 실제로 스코틀랜드산 오트밀보다 키누아를 더 선호했다. 씨앗은 조리 후에도 형태를 유지하며 “오트밀처럼 점액질로 보이지 않는다.” 키누아의 다른 품종들은 쓴맛이 있어 여러 번 삶아야 하며, 물을 자주 갈아줘야 한다. 자라는 키누아는 매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잎이 다양한 색을 띤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광범위한 경작의 증거, 고대와 현대 모두 꾸준히 증가했다. 수많은 오래된 테라스를 볼 수 있었다. 밀밭이 많았는데, 일부는 산비탈 높은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를 템포랄이라고 부르는데, 가파른 경사 때문에 경작이나 재배에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농부는 운에 맡겨 약간의 노력으로 어떤 종류의 작물을 얻기를 기대한다. 4월 14일, 시쿠아니 바로 위에서 우리는 하바스 콩을 수확하고 말린 줄기를 작은 더미로 쌓아 둔 밭을 보았다. 오카가 자라는 평원인 오코밤바에서 우리는 지금 막 익어가는 그 유용한 괴경의 밭을 발견했다. 근처에는 수확기 동안 야간 경비원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작은 짚으로 지붕을 덮은 대피소가 있었다.
우리가 길가에서 만난 페루 고산지대 사람들은 티티카카 분지나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타 로사 사람들과도 다른 특징과 태도, 의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전형적인 케추아인들이었다. 평화로운 농부들로, 대개 안데스에서 태곳적부터 사용되어 온 작은 손 물레로 양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오두막은 아도베로 지어졌고, 지붕은 거친 풀로 덮여 있었다.
케추아인들의 피부색은 갈색이다. 머리카락은 곧고 검은색이다. 흰머리는 좀처럼 볼 수 없다. 특정 지역의 남성들 사이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땋는 것이 관습이다. 수염은 드물거나 없다. 대머리는 매우 드물다. 치아는 우리보다 더 오래 가는 것 같다. 안데스 전역에서 잘 보존된 치아를 볼 수 있었는데, 설탕 플랜테이션에서는 예외였다. 그곳에서는 덩어리에서 떼어 먹거나 볶은 옥수수와 섞어 여행용 식량으로 먹는 조악한 흑설탕을 마음껏 즐길 기회가 있었다.
케추아인의 얼굴은 넓고 짧다. 그 너비는 거의 에스키모와 같다. 주근깨는 흔하지 않으며, 관찰된 몇몇 경우에서 얼굴과 팔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많은 비율의 인디오들이 천연두 흉터가 있으며 “의료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에 사는 결과를 보여준다. 의무적인 예방접종은 없다.
뚱뚱한 케추아인을 거의 볼 수 없다. 이것이 인종적 특성인지 아니면 그들의 식단에 지방을 생성하는 음식이 부족해서인지 말하기 어렵다. 페루 고산지대 사람은 야마를 최대한 활용했지만, 그 가는 다리와 약한 등을 80~100파운드 이상의 짐을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발달시키지는 못했다. 따라서 정말 무거운 짐을 운반하려면 자신에게 의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페리스 박사에 따르면 그의 팔은 빈약하게 발달했지만, 어깨는 더 넓고, 등 근육은 더 강하며, 종아리 근육은 다른 어떤 인종보다도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케추아인들은 악수를 좋아한다. 방문객이 그룹에 합류할 때 거의 항상 차례로 각 사람과 부드러운 의식을 행한다. 이것이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도입된 것인지 아니면 선사 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악수는 대학 학년 초에 익숙한 열렬한 악수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사실 케추아인의 악수는 매우 시원찮고 정성이 없다. 케추아인들의 악력을 역량계로 테스트했을 때, 우리 외과 의사들은 전완 근육이 잘 발달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케추아어와 최대 악력은 양성 모두에서 약했으며, 남성의 평균은 좌식 생활을 하는 미국 백인 성인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알레스 흐르들리츠카 박사는 북미와 남미의 원주민 인종이 동일한 계통이라고 믿는다. 북미와 남미의 다양한 부족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용모의 큰 차이는 아마도 지난 1만 년 또는 2만 년 동안의 환경적 역사 때문일 것이다. 미국 자연사 박물관의 프랭크 채프먼은 흥미로운 생물학적 사실을 지적했다.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추운 지역 해수면에서 발견되는 동물과 조류들이 페루의 해수면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기후가 유사한 아주 높은 고도에서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루 남부의 추운 고지대에 사는 주민들이 해발 9,000피트에서 14,000피트 사이의 마을과 도시에 살면서 티에라 델 푸에고, 알래스카, 래브라도의 해수면에 사는 사람들과 매우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페리스 박사는 래브라도 에스키모인과 케추아인이 “미 대륙에서 가장 잘 알려진 두 단신 인종”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질문과 관찰을 통해 알 수 있는 한, 케추아인의 약 4분의 1은 자녀가 없다.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평균 자녀 수는 3~4명이다. 대가족은 흔하지 않지만, 우리는 대개 한 가정의 생존 자녀가 태어난 자녀의 절반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다.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어떻게 자라는지 보면 놀랍다.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기침과 기관지 질환이 매우 흔하다. 사실, 고원 지대에서 가장 흔한 질병은 목과 폐 질환이다. 폐렴이 가장 심각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현지 질병이다. 정말 무서운 병이다. 공기의 희박함과 산소의 상대적 부족으로 인해 해발 8,000피트에서는 대개 치명적이며 11,000피트에서는 항상 치명적이다. 환자들은 흔히 24시간 만에 사망한다. 결핵도 꽤 흔한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원 주민들의 생활 습관 때문이다. 그들은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밀폐된 오두막에서 자는 것을 꺼린다. 따뜻한 계곡에서는 주민들이 짚과 갈대로 만든 통풍이 잘되는 오두막을 사용하기 때문에 결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보건 위원회’도 없고, 사람들은 위생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없다. 물 공급이 너무 자주 오염되어 사람들은 가능한 한 물을 마시지 않는 법을 배웠다. 대신 수프를 많이 먹는다.
시쿠아니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라체(Racche)라는 곳에 스키어가 설명한 소위 비라코차(Viracocha) 신전의 인상적인 유적이 있다. 라체는 처음 보기에 9~10개의 높은 아도비 기둥이 40~50피트 높이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신전의 중앙 벽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벽에는 큰 문들이 뚫려 있고 문 사이의 공간에는 위쪽이 아래쪽보다 좁은 벽감들이 있다. 문기둥에는 빗장을 걸 수 있는 작은 구멍들이 있다. 거대한 벽의 기초는 약 5피트 두께로 석조이다. 돌들은 아름답게 다듬어졌고, 직사각형은 아니지만 대략 사각형으로 잘려 있으며, 매우 정교하게 맞물려 있어 매우 튼튼한 기초를 만들고 있다. 표면이 매우 매력적이지만, 이상하게도 건축자들이 석조를 보이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명백하다. 이 표면은 한때 점토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건축자들은 벽이 완전히 아도비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지만, 만약 거대한 점토 벽이 지면에 닿아 있었다면 홍수와 침식으로 인해 무너질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단단하게 지어진 석조 기초 위에 안전하게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벽은 완전히 수직이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또한 벽이 서쪽 면에서 덜 풍화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우세하거나 가장 강한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다.
유적의 흥미로운 특징은 약 20피트 높이의 원형 기둥이다. 이는 잉카 건축에서 매우 드문 경우다. 이 기둥 역시 석조 기초 위에 아도비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하나의 기둥만 서 있다. 스키어의 시대에는 다른 기둥들의 흔적도 볼 수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 기둥들의 이중 열이 지붕의 들보와 가로대를 지탱했을 것이다. 들보의 한쪽 끝은 원형 기둥 위에 놓이고 다른 쪽 끝은 주벽에 박혔을 것이다. 들보가 벽으로 들어가는 구멍에는 석조 인방이 있다.
거대한 신전 유적 근처에는 내가 아는 한 독특한 다른 건물들의 유적도 있다. 벽감으로 장식된 칸막이 벽의 기초는 정교하게 쌓은 잘린 돌로 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아도비로, 상부 3분의 1은 거칠고 다듬지 않은 돌로 되어 있다. 지금은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는 고운 점토나 석고로 덮여 있었다. 여러
라체의 주요 볼거리는 높이가 15미터에 달하는 사원의 거대한 흙벽이다. 그것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지만 예상대로다. 놀라운 점은 지붕이나 보호 덮개 없이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햇볕에 말린 진흙이 최소 500년 동안 폭우를 견뎌냈다는 것이다. 단단한 목재로 만들어진 인방들은 벽에 부분적으로 박혀 있었지만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흙벽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원 근처의 샘물에 석회가 포함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점토에 특별히 끈끈한 성질을 부여하여 풍화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천연 석회질 시멘트를 충분히 제공했을 수 있다. 매년 12월부터 3월까지의 우기에도 불구하고 이 특별한 흙벽이 이렇게 노출된 위치에서 수세기 동안 날씨를 견딜 수 있게 한 요인들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이 사원이 위대한 신 비라코차를 숭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되어 왔다. 비라코차는 고대 만신전의 주피터나 제우스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원시 부족이 이곳의 수호신, 즉 그들에게 이 귀중한 점토를 준 신을 위해 사원을 지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인근 마을의 주요 산업은 여전히 도자기 제조다. 안데스 산맥에서 도자기용으로 이보다 더 좋은 점토는 발견되지 않았다.
선사 시대의 도공들이 감사의 마음에서라기보다는 불운을 피하고 도자기 굽는 데 좋은 운을 얻고자 수호신을 달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잉카인들의 최고급 도자기가 매우 섬세한 질감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도자기 전문가들은 점토를 구울 때 결과가 불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도자기 제작에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보장하고 가능한 한 많은 행운을 얻기 위해 이 사원을 세웠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고대 사원 근처에 두 개의 탑이 있는 작은 현대식 교회가 있다. 교회 마당은 도자기를 굽는 데 인기 있는 장소인 것 같다. 현대의 도공들이 고대 도공들이 비라코차의 거대한 사원을 사용했던 것처럼 교회에서 도자기 굽기의 성공을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의 벽은 부분적으로 흙벽돌로, 부분적으로는 유적에서 가져온 다듬은 돌로 만들어졌다.
멀지 않은 곳에 비교적 최근의 선사 시대 용암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이 고대 도공들이 귀중한 재료를 얻었던 점토층 일부를 파괴했을 가능성이 있다. 화산의 신의 분노로 용암 흐름을 보냈던 그의 화를 달래기 위해 사원이 세워졌을 수도 있다. 도자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비라코차(Viracocha) 잉카가 이 사원을 짓는 데 책임이 있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조상 숭배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의 기억을 숭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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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페루 탐험대의 루트 지도
제7장
우아타나이 계곡
우아타나이 계곡은 우루밤바 강의 많은 지류 계곡 중 하나다. 다른 계곡들과 다른 점은 고대 페루인들의 식량 작물 재배에 유리한 기후 조건을 가진 경작지가 더 많다는 것이다. 160제곱마일 미만으로 추정되는 면적을 가진 이곳은 남아메리카가 본 가장 위대한 제국의 심장부였다. 지금도 여전히 집중적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이 지역 페루 인구의 상당 부분이 살고 있다. 우아타나이 강 자체는 때로는 자연스럽게 계곡을 흐르지만, 다른 때는 홍수와 침식으로부터 농지를 지키려는 선사 시대 농부들이 신중하게 지은 석벽 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후는 온화하다. 극심한 추위는 없다. 건기인 6월과 7월에는 저지대에서 물이 얼고, 해발 4,000미터 이상에서는 연중 어느 날 밤에나 서리가 내릴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기후는 춥지도 덥지도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옥한 계곡은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군인들에게 분배되었고, 그들은 대농장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의 노동력도 받았다. 이 방식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때때로 마을을 오가는 길에서 부유한 지주들을 만날 수 있다. 안데스에서 가장 믿을 만한 승용 동물은 본질적으로 노새지만, 이 지주들은 보통 더 크고 빠르며 온순하고 보폭이 좋은 말을 선호한다. 우아타나이 계곡의 신사들은 깊게 파인 안장을 선호하며, 그 위에 두꺼운 양가죽이나 모피 매트를 깐다. 유행하는 등자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은 띠로 장식된 나무로 만들어졌다. 도로의 가파름 때문에 안장 뒤 띠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며, 보통 중세 마구를 연상시키는 작은 장식들이 달린 넓고 돋을새김된 패널로 장식되어 있다. 고삐는 보통 정교하게 땋은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은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종종 말이 기질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돋을새김된 가죽 눈가리개가 달려 있다. 이 눈가리개는 양쪽 눈을 완전히 가릴 수 있어서 말을 묶어두는 말뚝보다 말을 가만히 서 있게 하는 데 더 유용하다.
우아타나이 강 계곡은 루크레, 오로페사, 쿠스코의 세 분지로 나뉜다. 오로페사 근처의 현무암 절벽은 루크레 분지와 오로페사 분지를 나눈다. 앙고스투라, 즉 “협곡”의 고개는 오로페사 분지와 쿠스코 분지 사이의 자연적인 관문이다. 각 분지에는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 루크레 분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적은 루미콜카와 피키야크타다.
계곡의 가장 동쪽 끝, 빌카노타로 가는 고개 정상에 루미콜카(“돌 창고”)라고 불리는 고대 관문이 있다. 이것은 쿠스코의 추장들을 빌카노타의 추장들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잉카의 요새였다고 흔히 여겨진다. 지금은 현지에서 “요새”로 불린다. 벽의 대부분은 거친 돌을 진흙으로 쌓아 잘 지어졌지만, 관문의 양쪽 면은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정교하게 다듬은 안산암으로 만들어졌다. 고산 지대가 정복되기 전에 어떤 위대한 추장이 거친 벽을 쌓았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소군주들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고, 나중에 잉카 중 한 명이 우아타나이 계곡과 빌카노타 계곡 사이에 더 이상 요새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벽의 일부를 허물고 멋진 관문을 지었다. 석재의 표면은 여러 개의 거친 돌출부나 작은 혹을 제외하고는 잘 마감되어 있다. 이것들은 아마도 고대 석공들이 작은 쇠지렛대로 석재를 최종적으로 조정할 때 더 나은 파지력을 얻기 위해 사용했을 것이다. 석공들은 벽이 완성된 후 이 돌출부들을 제거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마추픽추의 미완성 구조물 중 하나에서 나는 비슷한 돌출부들을 발견했다. “돌 창고”라는 이름은 아마도 원래 지금은 폐허가 된 인근 건물에 붙여졌을 것이다.
루미콜카 위 바위 언덕에는 고대 계단식 밭과 몇몇 건물터가 남아 있다. 루미콜카에서 멀지 않은 피키야크타 산 경사면에는 피키야크타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도시 유적이 있다. 많은 집들의 벽이 유난히 높다. 도시 밖으로 남북으로 뻗은 높은 벽은 분명 빌카노타 계곡에서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다른 방향은 경사가 너무 가파르기 때문에 벽이 필요하지 않았다. 벽들은 피키야크타 산 경사면을 덮고 있는 용암 암석 조각들로 지어졌다. 유적에는 선인장과 가시덤불이 자라고 있지만 화산토는 주변 마을 농부들의 관심을 끌 만큼 비옥하다. 도시 위 경사면은 여전히 넓게 경작되고 있지만 계단식은 아니다. 밀과 보리가 주요 작물이다.
고대 페루 유적을 식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예로, 지금 루미콜카라고 불리는 관문이 스키어의 “페루”에는 “피키야크타”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할 만하다. 반면에 “거의 1제곱마일을 빽빽하게 덮고 있는” 대규모 도시 유적은 스키어에 의해 “위대한 잉카 도시 무이나”라고 불리는데, 이 이름은 또한 루크레 분지 바닥에 있는 작은 호수에도 적용된다. 스키어가 라체에서 오는 길을 따라왔을 때 그는 먼저 피키야크타 산을 보고, 그다음 관문을, 그다음 무이나 호수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 유적을 보았다. 각각의 경우에 그가 물어본 사람들은 가장 눈에 띄고 해가 없는 자연 현상의 이름을 유적에 적용한 것 같다. 내 경험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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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 분지, 무이나 호수, 그리고 피키야크타의 도시 벽
쿠스코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자 이 지역에 전원 주택을 가지고 있어 이 지역에 매우 익숙한 아길라르 박사가 나를 다른 방향에서 이 고대 도시로 데려왔다. 그에게서 도시 유적이 피키야크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이름은 또한 유적의 동쪽에 있고 그 위로 1200피트 높이 솟아 있는 산에도 적용된다. 아길라르 박사는 오로페사 근처에 산다. 오로페사에서 오면 피키야크타 산이 눈에 띄는 지점이고 도시 유적과 일직선상에 있다. 따라서 이 방향에서 보는 사람들이 호수보다는 산의 이름을 유적에 붙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산이 유적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수도 있다. 피키는 “벼룩”을 의미하고 야크타는 “마을, 도시, 국가, 지역 또는 영토”를 의미한다. 이곳이 “벼룩의 영토”였을까, 아니면 “벼룩 마을”이었을까? 그리고 잉카 시대에는 무엇이라고 불렸을까? 옛 이름이 불길하다고 여겨져 버려졌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가 여기에서 아주 큰 마을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사실이다. 아마도 잉카 이전 시대의 것으로, 오래전에 버려졌다. 수많은 집과 여러 개의 구역이 정규적인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고, 거리들이 직각으로 교차하며, 전체적으로 중요한 마을인 오얀타이탐보보다 상당히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동쪽으로 빌카노타 건너편에 아우상가테 산으로 정점을 이루는 험준한 산악 지역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피키야크타는 인구가 밀집한 지역의 한가운데 있다. 북쪽으로는 인구가 많은 피삭과 유카이 계곡이 있고, 남쪽으로는 수많은 마을이 있는 중요한 빌카노타 계곡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인구 밀도가 높은 우아타나이 계곡과 페루 고원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쿠스코 자체가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피키야크타에서 20마일 반경 내에 살고 있으며,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이곳은 접근하기 매우 쉽고 철도에서 1마일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곳은 “버려졌고 – 사막이고 – 무인지경”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곳에는 한때 매우 중요한 대도시가 있었다. 버려진 이유는 흐르는 물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피키야크타 산이 우아타나이 강과 빌카노타 강 위로 2000피트 솟아 있는 길이가 거의 5마일, 폭이 2마일에 이르는 큰 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개울이나 시내, 샘이 없다. 이곳은 화성암, 용암, 안산암, 현무암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사화산이다.
어떻게 피키야크타처럼 큰 도시가 흐르는 물이 없는 산 경사면에 세워질 수 있었을까? 그 시절 이후로 기후가 그렇게 많이 변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주변 지역이 여전히 페루 남부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일 수 있을까? 가장 가까운 물에서 400피트 위에 있는 고원에 사람들과 야마의 등에 매 방울의 물을 옮기는 힘든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면 그렇게 큰 도시가 세워지고 사람이 살 수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장소보다 물 공급이 더 나은 곳이 근처에 없었다면 아마도 주민들이 전적으로 물 나르는 사람들에 의존해야 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반대로, 6마일 반경 내에 흐르는 물이 있는 비어 있는 장소가 반 다스 정도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그 답이 보통 요새로 여겨지는 루미콜카의 유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키어는 이 “요새”가 “첫 번째 잉카의 지배 영역의 남쪽 경계”였다고 말한다. “요새는 한쪽에서 산에서, 다른 쪽에서 높은 바위 절벽까지 뻗어 있다. 이곳은 대중적으로 ‘엘 아쿠에덕토’라고 불리는데, 아마도 수로와의 어떤 상상의 유사성 때문일 것이다.”
수로 – 하지만 그 명칭은 분명히 잘못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벽의 단면이 “양쪽에서 단계적으로 또는 계단식으로 줄어든다”는 점이 “다른 위치에 있었다면 방어 공사나 요새의 가설과 모순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벽 꼭대기가 전체적으로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양쪽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높이가 낮아지고 그에 비례해 두께도 줄어든다”는 점을 주목했는데, 이는 수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지의 전통을 반영한 원주민 명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마저 외면했다. 내가 보기에 루미콜카 유적이 요새가 아니라 어떤 강력한 추장이 피키야크타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지은 고대 수로의 잔해임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지역의 지형을 연구해보면 루크레 마을 남서쪽에서 발원해 현대 직물 공장의 동력원으로 쓰이는 강물을 이용해 그런 수로를 만들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발 3,260m에서 모아진 물은 루크레 분지 남쪽 경사면을 따라 쉽게 9.6km를 흘러 루미콜카 산을 돌아 옛 길을 가로질러 이 수로를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발 약 3,230m 지점에서 말이다. 이렇게 하면 피키야크타의 일부 거리로 물을 흘려보내 고대 도시에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미콜카의 경사면에는 많은 고대 계단식 밭이 있다. 그 상한선은 대략 그런 수로가 지나갔어야 할 등고선과 일치한다. 실제로 언덕 중턱에 수로가 지나간 듯한 뚜렷한 흔적이 있다. 루크레 뒤편 계곡에도 옛 수로의 희미한 흔적들이 있다. 그러나 언덕에서는 상당한 침식이 일어났고, 수로가 수세기 동안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므로 흔적의 일부가 사라졌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이런 이론의 가능성을 철저히 조사할 수 없었던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피키야크타의 주민들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물을 공급받았는지, 그리고 왜 도시가 버려졌는지를 밝히는 일은 앞으로 운 좋은 연구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삭사우아만: 아래 계단식 벽의 세부
루미콜카 수로 유적
그때까지 나는 피키야크타가 잉카 이전 도시의 유적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추장들과 주민들은 루크레 분지와 그 지류들을 경작했다. 그들은 쿠스코 사람들과는 별개의 정치 집단이었다. 아마도 잉카였을 쿠스코의 통치자가 마침내 충분한 힘을 얻어 루크레 분지 사람들을 정복했고, 피키야크타를 지어 살았던 부족들을 그의 영토 먼 곳으로 이주시켰을 것이다. 이는 잉카 역사에 잘 알려진 식민화 체제였다. 피키야크타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이 떠난 후에는 이 지역의 후대 거주자들이 그 부지를 다시 점유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수로는 폐허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장소가 불길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라 쉽게 믿을 수 있다.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고 유행에 뒤떨어진 디자인의 집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충분한 물이 있었다면 그 높은 벽들을 재건축된 도시에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루크레 분지의 유적들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오로페사 분지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키스피칸치 마을보다 수백 미터 위에 있는 잘 관리되고 물이 풍부한 계곡인 티폰이다. 그곳에는 특징적인 잉카 건축 양식의 잘 지어진 집들이 있는데, 대칭적으로 배열된 많은 벽감과 돌 인방이 있다. 대부분의 집 벽은 진흙으로 쌓은 거친 돌로 되어 있다. 티폰은 아마도 오로페사 분지의 주요 추장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마을과 남쪽의 언덕들이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좋은데, 오늘날 그 언덕들은 밀과 보리 밭으로 뒤덮여 있다. 티폰에는 잘 만들어진 잘 다듬은 돌 분수가 있다. 일부 계단식 밭은 매우 잘 지어져 있어서 거칠게 다듬은 돌 블록들이 빽빽하게 맞물려 있다. 한 계단식 밭에서 다른 계단식 밭으로의 접근은 각 계단식 밭 면에서 튀어나온 단일 결속석으로 만든 계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어디에서도 이보다 더 잘 지어진 계단식 밭 벽을 보기 힘들다. 계단식 밭은 여전히 키스피칸치 사람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다. 지금은 티폰에 사는 사람이 없지만, 어린 양치기 소년들과 염소치기들이 그 주변을 자주 찾는다. 농부들은 가장 큰 밭이 있는 계곡 바닥에 사는 것이 500피트를 올라가 좁은 계곡에 있는 오래된 건물들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편리하다. 이제는 안전 문제로 인해 평지보다 이곳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유적을 조사하고 잉카 문양이 있는 매력적인 도기 파편들을 몇 개 파내는 동안, 나와 동행한 쿠스코 대학교의 히에세케 총장은 아길라르 박사와 함께 티폰 위의 산을 올라가 정상 근처에 요새가 있다고 보고했다. 오로페사에서의 내 체류는 키스피칸치와 오로페사 사이에 있는 아길라르 박사의 농장에서 보낸 매우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의 농장에서는 계곡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오로페사 분지에서 현대 마을인 산 헤로니모 근처의 앙고스투라 사암 절벽 사이의 틈을 통과하면 쿠스코 분지로 들어간다. 우아타나이 강 남쪽 기슭의 경사면에는 앙고스투라를 지나자마자 20개 이상의 박공지붕 집 유적이 있는데, 이는 특징적인 잉카 건축 양식이다. 고대 건물들에는 진흙으로 쌓은 작은 돌로 된 벽에 문, 창문, 벽감이 있으며, 인방은 이제는 썩어 없어진 나무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 유적의 이름을 물었을 때 사이야라고 들었지만, 그것은 우아타나이 강을 따라 4.8km 아래 오로페사 분지에 있는 현대 마을의 이름이다. 옛 사이야에는 현재 물 공급이 없다. 그곳은 카이라라는 개울에서 멀지 않으며, 3.3km보다 짧은 수로를 3,350m 등고선을 따라 끌어오면 쉽게 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마치 처음에는 경사면에 지어졌다가 비교적 안전하고 고립된 지역을 위해 언덕에 지어진 건물들은 나중에 잉카가 고원 지역에 평화를 가져온 후 계곡 바닥의 큰 도로 근처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점을 누리기 위해 버려졌다. 다른 설명도 있을 수 있다. 쿡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손에 의한 쿠스코 분지의 삼림 벌채와 계단식 경작을 하지 않은 경사지에서의 현대적 경작 방식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침식이 발생했다. 우기에는 산사태가 자주 일어난다.
사이야 맞은편에 피콜 산이 있는데, 그 쌍둥이 봉우리는 분지 북쪽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그 경사면에서 흘러내린 퇴적물로 인해 산 헤로니모 마을 북쪽에 거대한 자갈 부채꼴 지형이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그레고리 교수는 이 부채꼴 지형을 가로지르는 하천들이 지금도 “부채꼴의 꼭대기에서 아래쪽 가장자리로 자갈을 운반하면서” 고대의 밭들을 매몰시키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우아타나이 강이 앙고스투라 협곡 사이에 갇혀 지류들이 운반해 오는 퇴적물을 빨리 제거하지 못해 쿠스코 분지의 아래쪽 끝이 메워지고 있다. 만약 옛 사이야가 오로페사의 공격으로부터 쿠스코를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요새였다면, 잉카의 통치가 안데스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버려졌을 것이다. 반면 사이야를 건설한 사람들이 농부였고, 증가된 침식으로 인한 퇴적작용으로 쿠스코 분지 아래쪽이 메워지면서 이 부지를 버리고 경작 가능한 땅 근처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이 고대 가옥들에 살던 농부들이 언덕 아래의 아름다운 밭들이 피콜 산의 가파른 경사면에서 폭우 후 쏟아져 내린 엄청난 양의 자갈에 며칠 혹은 몇 시간 만에 덮이는 것을 얼마나 절망적으로 바라보았을지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재앙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사실 언제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추가 조사를 통해 산 헤로니모 스페인 마을이 세워질 때 버려졌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농업 전문가들이 삼림 벌채, 증가된 침식, 퇴적되는 자갈 둑이 사람들을 사이야에서 내몰았을 것이라는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밀과 보리를 수확한 뒤 남은 그루터기 밭에서 양들이 먹이를 뜯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양들은 마르고 다리가 길었으며, 수양 중 많은 수가 네 개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분명 수세기 동안의 근친교배와 새로운 우수 품종 도입을 통한 원래 품종 개량의 실패 때문이었다.
마차이는 “물이 끓어오르는 방식”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가 언급하는 다음 우아카, 즉 성지는 탐푸 마차이 자체로, “그가 결혼하러 갔을 때 머물렀던 잉카 유팡키의 집”이다. 이곳은 안데스를 넘는 길 근처 언덕에 있었다. 여기서는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쳤다.
이곳 유적의 석조 공사는 매우 뛰어난 특징을 보이는데, 석재를 매우 정교하게 맞추어 놓아 종교적 기원을 가진 장소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케추아어 macchini는 “씻다” 또는 “큰 목이 좁은 주전자를 헹구다”라는 뜻이다. 아마도 탐푸 마차이에서는 왕실이나 사제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의례적으로 정화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몰리나에 따르면 이곳이 쿠스코의 모든 젊은이들이 11월의 대축제에서 기사로 임명된 후 21일째 되는 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왔던 곳일 가능성이 있다. 그 후 그들은 도시로 돌아가 친척들로부터 훈계를 들었다. “제물을 바치는 각 친척은 젊은이를 채찍질하고 설교를 했는데, 태양과 잉카에게 결코 반역자가 되지 말고 조상들의 용기와 기개를 본받으라고 권고했다.”
탐푸 마차이는 산 세바스티안 마을 근처에서 우아타나이 강과 합류하는 작은 개울인 야카야 차카 위의 작은 절벽에 위치해 있다. 야카야 차카가 우아타나이에 도달하기 전에 카치마요와 합류하는데, 카치마요는 소금 함량이 매우 높아 대규모 제염 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피사로 형제들은 원주민들이 계단식 경작을 통해 카치마요 계곡을 소금 생산지로 만든 것을 보고 이곳을 라스 살리나스, 즉 “소금 구덩이”라고 불렀다. 프레스콧은 1539년 4월 26일 이곳에서 피사로와 알마그로 세력 간에 벌어진 대전투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두 지도자는 페루 정복을 위해 처음에는 연합했지만 영토 분할 문제로 다투게 되었다. 소금 생산지 근처에는 많은 잉카 벽과 니치가 있는 건물 유적이 있는데, 이를 루미우아시, 즉 “돌집”이라고 부른다. 우아타나이 계곡의 많은 샘물에 염분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 측량 기사들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는데, 그들은 자주 식수로 부적합하고 차를 망치는 짠물이 있는 지역에서 야영해야 했다.
쿠스코 분지는 분명히 한때 호수였다. 그레고리 교수에 따르면 “그 수면은 현재의 산 세바스티안과 산 헤로니모 위치보다 훨씬 높았다.” 이 호수는 초기 플라이스토세 시대에 최대 규모에 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수수, 하바스콩, 키누아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비옥한 퇴적토는 언제나 농부들을 끌어들였고 지금도 집중적으로 경작되고 있다. 이 호수는 페루에서의 과학 연구에 헌신적인 친구인 윌리엄 L. 모킬의 이름을 따 “모킬 호수”라고 명명되었는데,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의 페루 탐험을 이만큼 진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빙하기 이전 시기에 모킬 호수의 수위는 변동이 있었다. 때때로 호숫가 일부가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태양이 진흙을 말리고 갈라지게 할 만큼 오랫동안 노출되었다. 마스토돈이 호숫가에서 풀을 뜯어 먹었다. “모킬 호수는 빙하기 전체 또는 거의 전체 기간 동안 존재했을 것이다.” 결국 우아타나이 강이 사이야 근처의 사암 언덕을 깎아내고 앙고스투라 협곡을 형성하면서 배수가 이루어졌다.
쿠스코 시 아래쪽 우아타나이 강 둑에는 오늘날 사라진 모킬 호수의 층상 퇴적층이 있으며, 여기에는 많은 화석 조개가 포함되어 있다. 그 위에는 더 최근의 홍수와 산사태로 인한 자갈층이 있는데, 여기서 토기 조각과 뼈를 발견할 수 있다. 우아타나이의 주요 지류 중 하나는 춘출루마요로, 이 강은 쿠스코 시의 남쪽 3분의 1을 도심에서 분리한다. 강둑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지금도 정원과 식량 작물 재배에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 환대하는 캐나다 선교사들이 쾌적한 선교소를 두고 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의 청결함이 돋보이는 진정한 오아시스이다.
1911년 7월 어느 날 아침, 푸트 교수와 어빙 외과의와 함께 춘출루마요(Chunchullumayo)의 지류인 아야우아이코(Ayahuaycco) 협곡을 산책하던 중, 작은 협곡의 층상 자갈 제방에서 최근의 침식으로 드러난 여러 개의 뼈와 토기 조각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최근의 침식으로 고대의 재 무덩이도 드러났음을 알 수 있었다. 쿠스코(Cuzco) 쪽으로 거칠게 다듬은 돌을 어느 정도 꼼꼼히 맞춰 쌓은 석벽 단면이 보였는데, 처음에는 협곡의 더 이상의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벽 위로 그 표면과 같은 높이의 지층이 층상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 벽이 자갈 퇴적층보다 먼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50피트 위쪽으로 협곡을 따라가니 자갈 제방 아래에서 또 다른 벽 부분이 보였다. 제방 위에는 경작지가 있었다! 30분 동안 단단한 자갈을 파내보니 밭 아래에도 더 많은 벽이 있었다. 후에 보먼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이 벽은 두께가 약 3피트, 높이가 9피트로, 양쪽 면을 거칠게 다듬은 돌로 꼼꼼히 쌓고 그 사이를 잡석으로 채웠는데, 이는 쿠스코 시 서부의 일부 오래된 건물 기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조 기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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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타나이(Huatanay) 계곡, 쿠스코, 아야우아이코 협곡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인간이 만든 이 벽이 6-8피트 두께의 단단한 수성 자갈층에 완전히 덮여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며칠 후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하던 중 더욱 흥미진진한 것을 발견했다. 협곡을 따라 2분의 1마일 더 올라가니 새로 만든 도로가 단단하고 수직인 자갈 제방 가까이로 지나고 있었다. 도로에서 5피트 위에 자갈 사이에 박힌 작은 돌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인간의 대퇴골 끝이었다. 그것은 그 위로 70-80피트 거의 수직으로 솟은 자갈 제방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잉카 랜드의 심장부에서 인간의 뼈가 75피트 깊이의 자갈층 아래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했지만, 나는 1911년 탐험대의 지질학자이자 자연학자인 보먼 박사와 푸트 교수를 아야우아이코 계곡으로 데려올 때까지 그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대퇴골을 발굴했고 그 뒤에서 여러 개의 다른 뼈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매우 부서지기 쉬웠다. 대퇴골은 자체 무게의 4인치 이상을 지탱할 수 없었고 자갈을 일부 제거한 후 부러졌다. 자갈 자체는 약간 습했지만 뼈는 건조하고 가루 같았으며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뼈들은 호텔 센트럴(Hotel Central)로 옮겨져 조심스럽게 사진 촬영되었고, 녹인 바셀린에 담근 후 솜에 싸서 결국 뉴헤이븐으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피바디 박물관(Peabody Museum)의 골학 큐레이터인 조지 F. 이튼 박사가 검사했다. 한편 보먼 박사는 아야우아이코의 단단한 자갈층이 빙하 기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튼 박사가 처음 뼈 조각들을 검사했을 때, 그는 그 중에서 말의 뼈를 발견하고 놀랐다. 불행히도 7월 11일 우리가 발굴한 모든 조각들의 쿠스코에서 찍은 사진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이 특정 뼈는 보이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보먼 박사는 7월 11일 우리의 발굴 지점 옆 절벽에서 한두 개의 뼈를 더 파냈고 이를 원래 뼈들에 추가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말 뼈는 그가 뼈들을 포장할 때 추가한 것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걱정하지 않았고, 자갈층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퍼셔론 종마의 뼈를 발견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척추동물 유해의 연대가 “잠정적으로 2만에서 4만 년 전으로 추정될 수 있다”고 말했고, 주변 지역의 지질학에 대한 추가 연구가 이뤄질 때까지 이 견해를 유지했다. 매장된 벽에 대한 논문에서 보먼 박사는 “이 벽은 잉카 이전 시대의 것이며, 그것을 덮고 있는 충적층과의 관계로 볼 때 벽이 묻혀 있는 경사면이 형성되기 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현재 알려진 쿠스코 분지의 가장 초기 건축 유형을 나타낸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튼 박사의 뼈 연구 결과, 8개는 최소 3명의 인간 뼈 조각이었고, 4개는 야마 뼈 조각, 1개는 개의 뼈, 3개는 “소과 동물의 유해”였다. 인간의 유해는 “모든 중요한 점에서” 현대 케추아인의 뼈와 일치했다. 야마와 개는 모두 잉카 시대나 심지어 더 최근의 것일 수 있었지만, 소과 동물의 유해는 상당한 어려움을 제시했다. 3개의 조각은 “골격에서 가장 특징이 적은 부분들”에서 온 것이었다.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첫 번째 갈비뼈 조각으로, 멸종된 들소의 첫 번째 갈비뼈와 유사했다. 이 조각이 미국의 가축에서는 볼 수 없는, 들소에게 특징적인 형태를 가진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이튼 박사는 “여기서 어떤 들소 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시된다”고 말했지만, “소수의 개체에서 얻은 첫 번째 갈비뼈의 특징만으로 들소를 가축과 구별하는 것은 보수적인 방법과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먼 박사는 척추동물 유해의 연대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굳건히 지지했지만, 그들의 지질학적 관계에 대한 보고서에서 자신의 주장의 약점이 소과 동물의 유해가 현대 소의 뼈와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과 “뼈가 발견된 절벽이 더 젊은 자갈로 덮여 있을 수 있고, 뼈들이 부분적인 계곡 충전의 후기에 퇴적된 자갈 베니어에서 발견되었을 가능성”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의 빙하기 인류에 대한 보고는 캘리포니아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널리 떨어진 곳에서 나왔다. 그러나 신중한 조사 결과 인간 유해의 연대가 확실히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항상 의문시되었다. 골격 증거의 단편적인 특성, 인간 골격 부분의 특징에서 큰 연대를 확실히 도출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보먼 박사가 제시한 뼈를 포함한 자갈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후대의 것일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1912년에 더 완전하고 철저한 조사를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의혹을 해소하고 회의론을 일소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했다. 나는 아마도 잘못되게 쿠스코 분지의 지질학에 대한 추가 연구가 보먼 박사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번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는 일부 지질학자들이 예상한 바였다. 만약 그것이 그의 원래 결론을 확인하게 된다면 같은 회의론자들이 계속해서 회의적일 가능성이 있고 그가 자신의 이전 의견을 뒷받침하려 한다고 말할 것 같았다. 따라서 나는 다른 지질학자를 데려와 우아타나이 계곡에 대한 철저한 지질학적 연구를 통해 독립적인 증언을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그의 결론이 확인된다면 큰 무게가 실릴 것이다. 나는 보먼 박사의 동료인 그레고리 교수에게 필요한 연구를 수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수석 측량사 앨버트 H. 범스테드의 지휘 하에 우아타나이 계곡의 매우 정확한 지도가 준비되었다. 페루를 볼 기회가 없었던 이튼 박사는 우리와 동행하여 현대 페루 소의 뼈와 발견될 수 있는 다른 골격 유해를 연구해 달라고 초대받았다.
게다가 1911년에 우리가 뼈를 꺼낸 정확한 지점에서 아야우아이코 언덕 측면으로 터널을 파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콜로라도에서 공학 교육을 받은 K. C. 힐드에게 그것을 감독해 달라고 요청했다. 힐드는 11피트 길이에 단면 4.5 x 3피트 크기의 터널을 단단한 자갈 덩어리 속으로 팠다. 그는 목재 지지대를 사용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자갈이 너무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어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뼈나 인공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거친 자갈만 있었고, 이는 균일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명확한 층화의 증거는 없었다. 뼈들은 분명히 더 오래된 단단한 자갈 덩어리의 가장자리에 있는 산사태에 있었던 것 같다.
그레고리 교수는 쿠스코 분지에 대한 연구에서 아야우아이코 자갈 제방이 “지난 몇 세기 동안” 반복적으로 매몰되고 재발굴되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일부 자갈 단구의 주기적인 파괴와 재건축이 “심지어 지난 100년 이내에도”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따라서 더 이상
아야우아이코 계곡에서 발견한 뼈나 벽은 쿠스코 자갈층과 관련이 있다. “쿠스코 자갈층은 플라이스토세 후기에 가장 넓게 퍼지고 두꺼워졌다고 여겨지지만,” 그 위와 옆에 더 최근의 퇴적물이 쌓였다. “주변 경사면에서 흘러내린 표면 세척물은 기후 변화에 따라 양과 특성이 결정되었으며, 빙하기 이후 계속 쌓여왔고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후 크게 증가했다.” “지질학적 자료로 볼 때 쿠스코 자갈층에서 발견된 인간 유골의 연대는 수백 년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들소”는 어떻게 된 걸까? 쿠스코에 도착한 직후 이튼 박사는 공공 시장에서 판매되는 소의 사체에서 첫 번째 갈비뼈를 조사했다. 그는 즉시 “들소”가 페루의 가축 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안데스 지역의 생활 조건과 희박한 공기에서 호흡 근육의 활동이 증가한 것과 연관 있을 수 있는데, 가축들이 때때로 들소에서 관찰되는 형태와 비슷한 첫 번째 갈비뼈를 발달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들소”와 “쿠스코인”의 슬픈 최후가 맞이했다. 한때 나는 그들이 4만 년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200년 정도 되었다고 믿는다. 케추아어로 아야우아이코는 “죽은 사람들의 계곡” 또는 “죽은 사람의 협곡”을 의미한다. 불과 3세대 전에 쿠스코에서 전염병 희생자들을 매장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8장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쿠스코는 스키어가 방문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실 “남아메리카 횡단”에서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을 발표한 이후로도 상당히 변했다. 물론 곳곳에서 여전히 고대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의 증거도 있다. 전화, 전기, 전차, 그리고 “영화관”이 자리 잡았다. 거리는 더 깨끗해졌다. 현대 여행자가 일부 상황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다면, 고대 쿠스코 사람들의 많은 업적이 아직 그의 나라에서도 재현되지 않았고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현대 쿠스코는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1911년 누녜스 지사는 대성당 앞의 큰 광장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콘크리트 보도와 화려한 꽃밭이 시장과 오래된 자갈 포장을 대체하여 광장을 시민들이 즐거운 저녁에 즐겨 찾는 산책로로 만들었다.
현재 주요 시장은 산 프란시스코 광장이다. 온갖 종류의 가판대로 가득 차 있다. 인디오들이 사용하는 거의 모든 식료품과 도구를 여기서 살 수 있다. 특히 이른 아침에 물건을 사고팔고 언쟁하고 재잘거리는 인디오들로 붐비는 이곳은 색다른 풍경과 이국적인 풍습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 끝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쿠스코의 소매상인들은 업종별로 모이는 아주 오래된 관습을 따른다. 한 거리에는 모자 판매상들이 있고, 다른 거리에는 코카를 파는 상인들이 있다. 양장점과 양복점은 대부분 20개가 넘는 어두운 작은 상점들이 있는 긴 아케이드에 모여 있다. 빛은 전면 출입구에서만 들어오는 것 같다. 입주자들은 미국산 재봉틀을 작동하는 사람들로, 주문 제작 의류를 만들 뿐만 아니라 항상 표준 크기와 패턴의 대량 생산품도 갖추고 있다. 또 다른 아케이드에는 arrieros의 눈과 지갑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전문으로 하는 상점들이 있다. 가장 좋은 노새에게 사악한 눈을 막아주는 화려하게 장식된 고삐, 코카나 다른 귀중품을 넣는 가죽 배낭, 천으로 만든 배꼽 띠와 가죽 고삐, 노새를 묶는 것보다는 다이아몬드 매듭을 묶는 데 더 적합한 생가죽 올가미, 긴 여정의 지루한 시간을 달래줄 피리, 출발할 때 수호성인 앞에서 태울 촛불 등 그의 직업에 필요한 모든 도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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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지도와 쿠스코 전경
1578년 안트베르펜에서 출판된 “Speculum Orbis Terrarum”에서 발췌.
쿠스코 거리를 가득 메운 그림 같은 케추아인들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100명의 인디오를 대상으로 체질 인류학적 측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넬슨 의사가 호텔 센트럴에 실험실을 차렸다. 그의 피실험자들은 순수한 케추아인만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친절한 경찰관들이 거리에서 붙잡아온 마지못한 희생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인디오들은 분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시간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작은 은화를 받고 기뻐하고 놀라워했다.
넬슨 박사의 피실험자 중 많은 수가 쿠스코를 고향이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안타, 우아라콘도, 마라스와 같은 비교적 작은 마을 출신이 쿠스코 시 자체 출신보다 더 많았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첫째, 경찰관들은 더 순순히 응할 먼 마을 출신 낯선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선호했을 수 있다. 둘째, 도시 사람들은 아마도 상점에서 장사를 하거나 광장에서 물건을 지키느라 바빠서 경찰관들이 방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쿠스코 주민들이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이 두세 명밖에 없는 외딴 마을 출신들보다 더 혼혈이라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게다가 도시에 오래 살면서 유럽식 복장에 더 익숙해진 사람들보다는 도시 유행을 따르지 않는 시골에서 일시적으로 온 독특한 차림의 인디오들에게 경찰관들의 시선이 더 쉽게 갔을 수도 있다. 1870년 스키어에 따르면 쿠스코 인구의 8분의 7이 여전히 순수한 인디오였다. 오늘날에도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순수한 원주민 혈통으로 보인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외곽 마을에서 온 방문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쿠스코는 안데스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의 메카이다.
아마도 시민들의 상당 부분이 스페인과 케추아 혼혈일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유럽 여성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거의 모두가 원주민 아내를 맞이했다. 스페인 인종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온 다양한 민족들이 놀랍도록 혼합된 것이어서 아프리카, 켈트족, 이베리아인, 로마인, 고트족, 카르타고인, 베르베르인, 무어인의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스페인인들은 북유럽의 앵글로색슨족이나 튜턴족에 비해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혼혈에 거부감이 훨씬 적었다. 스페인인과 원주민의 통혼은 수세기 동안 이어졌고, 그 결과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일부 저자들은 쿠스코에 한때 20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원시적인 교통 수단으로는 그렇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1559년에는 몬테시노스에 따르면 쿠스코에 단 2만 명의 원주민만 있었다.
쿠스코의 매력 중 하나는 옛것과 새것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철로 위를 달리는 전차가 잉카 시대의 벽을 지나 옷을 잘 차려입은 쿠스케뇨들을 역으로 실어 나른다. 운전사는 브레이크를 아무리 세게 밟아도 조용하고 거만한 야마 무리가 작은 감자 자루를 쿠스코 시장으로 가져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현대식 라 메르세드 수도원은 고대 잉카 건축물에서 가져온 돌로 지어졌다. 6-7세기 전 잉카 석공의 손을 떠난 돌에 쿠스코 최대 영화관을 광고하는 게시판이 붙어 있다. 2015년 7월 2일, 공연은 벨기에 적십자를 위한 자선 공연이었다! 이 광고판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화려한 술 장식이 달린 니트 모자와 정교한 귀덮개, 넓은 술 장식이 달린 밝은 색 판초를 입은 관습을 보여주는 안데스 산악 마을 출신 소년들이었다. 이 전통 의상은 유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디자인이다. 이 그림 같은 방문객들 옆에는 줄무늬 저지, 천 모자, 영국식 코트와 바지를 입은 맨발의 쿠스코 소년이 서 있었다.
400년 전 스페인 정복자들이 지은 집 벽에 전기 전선이 고정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벽은 다시 정복 이전 수세기 전 잉카 석공들이 쌓은 거대한 석조 기초 위에 서 있다. 한 곳에서는 전화선이 아름다운 석조 외관을 가진 옛 예수회 교회의 전경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 교회는 지금 쿠스코 대학의 일부다. 이 교회는 피콜 산의 쌍봉우리 근처에 있는 우아코토 채석장에서 가져온 붉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그레고리 교수는 이 우아코토 현무암이 부드럽고 균일한 질감을 가져 16세기 교회 건축가들이 원하던 정교한 석조 작업에 특히 적합하다고 말했다. 잉카인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한 조면암에 비해 이 현무암은 풍화가 훨씬 빠르다. 풍화된 부분의 짙은 붉은 색은 예수회 교회에 매우 오래된 느낌을 준다. 예일 대학이 설립되기 훨씬 전에 학식 있는 예수회 교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울렸던 대학 안뜰은 최근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테니스 코트로 바뀌었고, 지금은 기세케 총장이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는 고대의 격언을 가르치며 학생들의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다.
현대 쿠스코는 인구 2만 명의 도시다. 페루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지방의 정치적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1911년에는 단 하나의 병원만 있었다. 도시 서쪽에 있는 이 준공립 비종파 기관은 가장 큰 묘지 바로 옆에 있었다. 사실 다른 모든 것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묘지와 너무 가까워서, 환자들이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흥미로운 것은 장례식 화환과 가장 눈에 띄는 기념비뿐이었다. 건물에는 큰 안뜰과 열린 회랑이 있어 야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들에게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어빙 외과 의사의 방문 당시, 그는 모든 환자가 창문이 작고 거의 항상 닫혀 있고 덧문이 쳐진 병실에 수용되어 있어 공기가 탁하고 빛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최대한의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찾고 환자들이 야외에 앉도록 권장하며 심지어 침대를 현관으로 옮기는 미국의 병동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상주 의사가 없었다. 병원 전체에 걸쳐 모든 것을 최대한 어둡게 유지하려는 극단적인 주의를 기울여, 햇빛과 신선한 공기의 해로운 영향에 대한 고대 산악 전통을 따랐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병원은 사망률이 높고 지역 평판이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이 지방 유일의 병원이었다. 쿠스코 밖에서 우리가 방문한 모든 마을에서는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시설이 자택 외에는 전혀 없었다. 더 큰 마을에는 일반적인 약을 구할 수 있는 가게가 있지만, 대다수의 마을과 村에서는 현대 의약품을 구입할 수 없었다. 대학 총장 기세케가 학생들에게 축구와 테니스를 하라고 독려하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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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교회의 탑과 대학의 회랑 및 테니스 코트, 쿠스코
대학을 내려다보는 언덕 경사면에는 콜캄파타(Colcampata)의 흥미로운 계단식 밭이 있다. 1571년, 잉카 티투 쿠시(Titu Cusi)의 사촌인 카를로스 잉카가 이곳에 살았다. 티투 쿠시는 스페인 정복 후 코르디예라 우일카팜파(Cordillera Vilcabamba)의 오지에서 불안한 존재를 유지했던 토착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콜캄파타의 정원에는 페루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잉카 석조 작품 중 하나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이것이 훌륭한 궁전의 유일한 남은 부분인지, 아니면 티투 쿠시의 사촌을 위해 적절한 거처를 지으려는 쇠퇴하는 왕조의 마지막 노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것은 쿠스코(Cuzco)의 주요 사업가인 체사레 로멜리니(Cesare Lomellini)가 신중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상인 왕자로, 은행가이자 가죽 및 기타 지역 생산품의 수출업자이며, 연필에서 설탕 공장, 목재, 모자, 사탕, 하드웨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상품을 수입하는 사업가다. 그는 또한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가구와 잉카의 아름다운 도자기를 수집하는 애호가이기도 하다. 더욱이 그는 항상 우리 탐험대를 돕기 위해 바쁜 사업에서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는 자주 우리를 시골 영지 소유주들과 연결시켜 주거나 소개장을 써 주어 우리의 길을 쉽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우리 장비를 보관할 창고를 제공하고, 신뢰할 수 있는 노새 몰이꾼을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현지 구매 시 우리가 사기 당하지 않도록 했다.
노새와 짐꾼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귀중한 조언을 해주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한마디로 우리가 가장 바람직하고 대우 좋은 고객인 것처럼 자신을 완전히 우리의 처분에 맡겼다. 사실 그는 우리에게 보여준 많은 호의에 대해 어떤 보상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탐험의 성공에 너무나 중요한 요소여서 모든 탐험 애호가들이 그를 감사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의 콜캄파타 저택 위에는 삭사우아만(Sacsahuaman) 언덕이 있다. 그 언덕을 오를 수는 있지만, 이 고도 11,900피트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을 정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명한 “요새”에 도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쿠스코를 네 부분으로 나누는 세 개의 운하화된 개울 중 가장 동쪽에 있는 “힘없는 개울” 툴루마유(Tullumayu)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 둑을 따라 가다 보면 먼저 가죽 공장을 지나고, 그 다음 가파른 협곡을 조금 올라가면 옛 방앗간의 유적을 만난다. 돌로 만든 수로와 인접한 유적들은 오늘날 쿠스코 사람들에 의해 흔히 잉카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내게는 잉카의 석조 작업으로 보이지 않는다. 잉카인들은 바퀴의 기계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력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수로를 자세히 조사해보면 잉카 석조에서는 볼 수 없는 납 시멘트의 흔적이 발견된다.
개울을 조금 더 올라가면 거대한 거석 문을 지나 놀라운 회청색의 거대한 삭사우아만 성벽 앞에 서게 된다. 이는 “남미를 가로질러”에서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고대 건축가들은 언덕을 가로질러 두 개의 깊은 협곡 사이에 3분의 1마일에 걸쳐 하나 위에 하나씩 세 개의 거대한 테라스를 만들었다. “요새”의 가장 낮은 테라스는 거대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많은 것들이 10톤이 넘고 일부는 20톤이 넘지만 모두 가장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나는 삭사우아만을 여러 번 방문했다. 매번 방문할 때마다 압도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벽들을 처음 보는 미신적인 인디오에게는 신들이 지은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삭사우아만에서 북동쪽으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식물로 부분적으로 덮인 몇 개의 작은 인공 언덕이 있다. 이들은 “요새”를 위해 여기서 채석된 큰 석회암 블록에서 나온 회청색 암석 조각들로만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암석 조각들은 나중에 많은 노력을 들여 삭사우아만으로 운반되었다. 이들은 수많은 채석공들의 노동을 대표한다. 현대에도 증기 드릴, 폭발물, 강철 도구, 경량 철도를 사용해도 이 언덕들은 주목할 만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계 장치들이 고대 석공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이 돌 조각 산들이 돌 도구로 만들어졌으며 모두 수작업으로 채석장에서 운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상력이 무색해진다.
삭사우아만의 유적은 엄청난 인력뿐만 아니라 놀라운 정부 조직을 보여준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채석장에서 돌을 떼어내고, 필요한 모양으로 다듬고, 험한 지형을 몇 마일이나 이동시켜 복잡하게 조립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농업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지도자들이 막대한 인구의 노동을 조직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갖추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들은 전쟁 훈련이나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건설 작업은 엄청난 노력, 끝없는 시간, 헌신적인 기술을 요구했다. 그러한 자질은 강력한 군주라도 국민 대다수, 특히 농부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발휘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존 평원으로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심스럽게 쌓은 돌로 된 계단식 밭에 의존하여 기근과 굶주림을 피하는 법을 배웠다. 삭사우아만이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소망에 따라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삭사우아만과 같은 거대한 규모의 계단식 밭, 즉 생명을 주는 음식을 상징하는 돌로 된 계단식 밭을 처음 가르쳐준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이것이 요새로서의 가능성보다 삭사우아만 건설에 투입된 막대한 노동력의 더욱 가능성 있는 목적으로 보인다. 쿠스코 뒤편 언덕 꼭대기를 공격하려는 적에 맞서 같은 수준의 방어를 위해 훨씬 더 작은 돌로 훨씬 짧은 시간에, 훨씬 적은 노동과 노력으로 건설할 수 있었다.
수천 명의 개인의 노동을 통제하고 그들을 농업이나 전략적인 결과가 명확한 비용에 비해 전혀 맞지 않는 비생산적인 사업에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그러한 힘의 과시는 위대한 군인의 최고의 허영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반면에 고대 페루인들은 전쟁적이기보다는 종교적이었고, 큰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태양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삭사우아만은 계단식 밭에서 자라는 작물을 풍성하게 해주는 신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쁘게 하려는 욕망 때문이었을까? 스페인 정복자들, 전사들 자신과 20세대에 걸친 전투 민족의 후손들이 유럽 요새의 돌출부에 익숙했던 그들이 삭사우아만을 요새로 보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에게 그 돌출부의 군사적 용도는 너무나 분명했다. 그 돌출부와 후퇴각의 가치는 그들의 십자군 조상들이 최근에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간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높고 튼튼한 벽의 높이와 강도는 당시 군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삭사우아만이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대포에도 사실상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잉카 전쟁과 피사로의 쿠스코 점령 이후의 전쟁에서 삭사우아만은 반복적으로 요새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화약이나 대포의 사용을 알지 못했던 페루인들이 유럽의 요새들이 너무나 익숙했던 그런 포위 공격을 견디기 위해 삭사우아만을 건설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아마도 스페인 사람들에게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본 유럽인들이 삭사우아만을 요새로 여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여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된 적이 거의 없었다. 신성한 도시 쿠스코가 계곡을 올라오는 침입자들에 의해 공격받을 가능성이 더 높았거나, 심지어 서쪽의 완만한 경사면을 통해, 또는 수세기 동안 주요 통로였던 북쪽의 고개를 통해 공격받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는 사실은
삭사우아만이 중앙 안데스의 주요 도로의 일부로 사용되었던 것 같은데, 이것이 삭사우아만을 본질적으로 요새로 여긴 작가들을 곤란하게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삭사우아만이 한때 우기가 끝날 때 태양 숭배자들이 춘분을 축하하고 하지에 태양이 ‘가장 북쪽’에서 돌아오기를 기도하기 위해 모이던 장소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 엄청난 건설 비용이 삭사우아만이 군사적 목적보다는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삭사우아만은 강력한 요새라기보다는 고대 신전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제 쿠스코 북쪽에서의 나의 탐험을 설명하기 위해, 페루의 일부를 통치했던 마지막 네 명의 잉카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 독자의 주의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제9장
마지막 네 명의 잉카
프레스콧의 매력적인 고전 “페루 정복”을 읽은 독자들은 피사로가 금 그릇으로 방 하나를 채워 운명을 피하려 했던 잉카 아타우알파를 죽인 후, 스페인의 지시에 따라 통치할 토착 왕자를 잉카의 왕좌에 앉히기로 결정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위대한 잉카 와이나 카팍의 아들이자 왕조의 창시자인 망코 카팍의 이름을 따서 망코라 불린 젊은 왕자가 가장 적합한 대리인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능력과 기개가 있는 젊은이였다. 1534년 적절한 의식과 함께 그를 취임시켰는데, 그 야만적인 화려함은 이 장난을 더욱 가련하게 만들 뿐이었고, 그의 자연스러운 야망을 거의 만족시키지 못했다. 예상대로 그는 구속 아래에서 고통받았고, 가능한 한 빨리 세심한 보호자들에게서 탈출하여 충실한 케추아인들의 군대를 일으켰다. 그 후 쿠스코 포위가 이어졌는데, 이에 참여했던 돈 알론소 엔리케스 데 구스만은 이를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잔인한 전쟁”이라고 간단히 묘사했다. 1536년 피사로의 동료 알마그로가 쿠스코를 구출했을 때, 망코가 조상들의 고대 수도를 되찾을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자 잉카는 오얀타이탐보로 후퇴했다. 우루밤바 강변에 위치한 오얀타이탐보에서 망코는 결연한 저항을 했지만, 피사로의 기마 기병들이 너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잉카의 추종자들은 선조들의 웅장한 석조 건물, 요새, 곡물 창고, 궁전, 공중 정원의 존재에 의해 최선을 다하도록 고무되었지만, 결국 후퇴해야 했다. 그들은 북쪽으로 도망쳐 눈 덮인 고개를 넘어 우일카팜파의 요새로 무사히 탈출했는데, 이곳은 진정한 미국의 스위스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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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와 우이티코스 사이의 빙하
망코를 쫓으려 했던 스페인인들은 그의 위치가 사실상 난공불락임을 알게 되었다. 우일카팜파의 요새는 자연이 가장 깊은 기분에 있을 때 만든 거대한 천연 요새로, 위험한 급류를 건너거나 유럽의 가장 높은 봉우리보다 더 높은 좁은 협곡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비교적 낮은 알프스 고개를 통해 군대를 이끄는 것도 위험했는데, 피사로는 잉카 망코를 따라 판티칼라 고개를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판티칼라 고개 자체가 몽블랑 정상보다 높은 눈 덮인 황무지였다. 페루 안데스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눈 덮인 봉우리가 많지 않다. 근처에는 베로니카 산(해발 19,342피트)의 날카롭고 얼어붙은 봉우리가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웅장한 만년설 봉우리인 살칸타이산(해발 20,565피트)이 있다. 살칸타이 근처에는 소라이산(19,435피트)의 뾰족한 바늘이 있고, 그 서쪽으로는 판타(18,590피트)와 소이로코차(18,197피트)가 있다. 이 산들의 어깨에는 이름 없는 빙하와 작은 계곡들이 있는데, 이곳들은 거의 대담한 탐광자나 호기심 많은 탐험가 외에는 본 적이 없는 곳들이다. 이 계곡들은 여행자가 우박과 눈보라의 강력한 폭풍에 습격당할 가능성이 있는 고개를 통해서만 갈 수 있다. 우기에는 우일카팜파의 큰 부분이 절대적으로 통과할 수 없다. 건기에도 수송의 어려움은 매우 크다. 가장 발이 튼튼한 노새도 때로는 사람의 도움 없이는 길을 이용할 수 없었다. 잉카 망코에게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1550년에 페루 전쟁에 대한 생생한 설명을 쓴 정복자 시에사 데 레온은 망코가 “다양한 지역에서 모은 많은 양의 보물과… 많은 양의 양모로 된 고급 의복, 섬세한 질감과 매우 아름답고 화려한 것들”을 가지고 갔다고 말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한 나라의 통치자가 풍부한 “보물” 없이 여행한다는 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망코가 많은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갔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장식용 외에는 귀금속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고, 그것들은 적의 탐욕만 자극했을 것이다. 그의 백성들은 결코 금이나 은으로 보수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노동은 그의 당연한 몫이었고, 그들 자신의 작물을 재배하고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만큼만 할당되었다. 사실 그들의 생명은 그의 손에 있었고, 수세기 동안의 관습과 습관이 그들을 위대한 수장의 충실한 추종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망코가 실제로 아름다운 직물과 유용한 다른 모든 것들을 가져갔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우이티코스에서 망코는 적의 무장 세력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후의 혜택도 누릴 수 있었고, 옥수수, 감자, 고구마, 온대 및 아열대 지역의 과일이 쉽게 자라는 물이 풍부한 지역에 있었다. 이곳을 기지로 삼아 그는 자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스페인인들을 공격하러 나갔다. 그의 습격은 대개 성공적이었다. 그가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산악 요새에서 튀어나와 아푸리막 강을 헤엄치거나 원시적인 뗏목을 타고 건너 페루의 주요 도로인 쿠스코와 리마 사이의 대로에 도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 길을 따라 업무상 여행하는 관리들과 상인들은 그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망코는 이러한 습격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페루에 행한 일에 대해 스페인인들에게 달콤한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했다. 시에사 데 레온이 망코의 태도를 정당화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스페인 사람들은 실제로 “그의 유산을 빼앗고, 그를 조국에서 쫓아내어 추방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망코가 이렇게 은신처를 확보하고 이를 적들을 괴롭히는 거점으로 삼는 데 성공하자, 쿠스코의 많은 오레호네스가 그를 따랐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 족장들을 오레호네스, 즉 “큰 귀”라고 불렀다. 그들의 귓불이 큰 금귀고리를 달기 위해 인위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망코가 우일카팜파의 오지로 물러난 지 3년 후인 1539년, 쿠스코에서 가르실라소 잉카 데 라 베가가 태어났다. 그는 잉카 공주와 정복자 중 한 명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가르실라소는 어린 시절 자신의 왕족 친척의 활동에 대해 들었다. 그는 소년 시절 페루를 떠나 스페인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유럽에서 40년을 보낸 후 그는 기억을 더듬어 “왕실 논평”을 썼다. 이는 그의 인디언 조상들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어린 시절 좋지 않은 소문을 자주 들었을 잉카 망코에 대해 그는 변명조로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망코 잉카 시대에 그의 신하들이 도로에서 여러 건의 강도 행위를 저질렀지만, 그들은 스페인 상인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존중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자유롭게 보내주었고 그들의 상품과 물건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디언들의 가축(야마와 알파카)은 약탈했다. 이는 그 지방에서 사육된 것이었다… 잉카는 산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가축이 없었다. 그곳에는 호랑이와 사자, 그리고 25~30피트 길이의 뱀과 다른 독충들만 살고 있었다.” (나는 폴 라이카우트 경의 번역본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는 1688년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가르실라소는 망코의 병사들이 “인디언들이 가진 음식만을 가져갔다”고 말한다. 잉카는 이를 보통 자신의 것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 제국의 주인인 사람이 자신의 자연적이고 필요한 부양을 위해 그만큼의 몫을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합리적인 변명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망코가 스페인 상인들을 존중했고 그들의 “상품과 물건”을 약탈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한다. 후에 보겠지만, 우리는 망코의 궁전에서 유럽산 금속 물품들을 발견했는데, 이는 망코의 약탈자들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가르실라소가 프레스콧에 의해 자주 인용되긴 했지만, 그가 16살 때 페루를 떠났고 그의 생각이 스페인에서의 긴 생활과 그가 글을 쓴 백인 유럽인들에 의해 경멸받는 갈색 인종인 어머니 민족의 미덕을 칭송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구스만은 이 시기 망코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한 전쟁 방식과 무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인디언들에게 투구, 방패, 갑옷과 같은 방어용 무기는 없었지만 “창, 화살, 곤봉, 도끼, 할버드, 투창, 그리고 투석기를 사용했고, 아일라스(볼라스)라고 부르는 또 다른 무기도 사용했다. 이는 가죽에 꿰매진 세 개의 둥근 돌로, 각각 1큐빗 길이의 줄에 매달려 있다. 그들은 이것을 말에게 던져 다리를 묶는다. 때로는 이런 식으로 사람의 팔을 몸통에 묶기도 한다. 이 인디언들은 이 무기를 사용하는 데 매우 능숙해서 사냥 중에 사슴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주요 무기는 투석기다… 그들은 이것으로 거대한 돌을 너무나 강력하게 던져서 말을 죽일 수 있다. 사실, 그 효과는 아르케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이렇게 투석기로 던져진 돌이 30보 거리에서 사람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두 조각으로 부러뜨리는 것을 보았다.”
망코의 습격이 마침내 너무 성가시게 되자 피사로는 잉카를 공격하기 위해 쿠스코에서 빌라디에고 대위 휘하의 소규모 부대를 보냈다. 빌라디에고 대위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인디언들을 상대로 하는 중요한 무기는 기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힘과 화기의 효능을 확신하고 있었고, “가족과 함께 여행하며 풍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된” 족장을 상대로 한 성공적인 습격의 전리품을 즐기고 싶어 했다. 그는 열심히 전진했고, 높은 계곡을 지나 산 중의 한 협곡으로 나아갔다. 아마도 판티칼라 고개였을 것이다. 여기서 힘든 행군으로 지치고 고도(16,000피트)의 영향으로 고통받던 그의 병사들은 잉카의 매복에 걸렸다. 잉카는 “80명 조금 넘는 인디언”의 소규모 부대와 함께 “28명 또는 30명이었던 기독교인들을 공격해 빌라디에고 대위와 그의 모든 병사를 2~3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였다.” 코르디예라 우일카팜파의 고개를 넘어본 사람이라면 이 군사 원정이 실패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날카로운 눈을 가진 인디언들이 적절한 감시 지점에 배치되어 17세기의 무거운 머스킷을 든 지친 병사들의 소규모 부대를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바위들로 보호받고 투석기를 위한 자연스러운 탄환이 풍부한 바위투성이 고개에서 “말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돌을 던질 수 있는” 80명의 케추아 인들이 빌라디에고 대위의 작은 부대가 그들의 둔한 무기를 발사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자 그대로 돌로 쳐죽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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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밤바 협곡
우일카팜파에서 잉카들의 안전을 보장한 이유.
도망자들은 쿠스코로 돌아와 그들의 불행을 보고했다. 이 패배의 중요성은 피사로가 페루를 정복한 군대의 규모가 200명 미만으로, 빌라디에고 대위의 전멸한 부대보다 몇 배 더 컸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그 중요성은 동시대 스페인 작가들이 과장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망코의 군대를 “80명 조금 넘는 인디언”으로 기술했다는 사실로 더욱 증가한다. 아마 그 수는 그보다도 적었을 것이다. 잉카의 군대가 수천 명으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자신이 이제 이렇게 스페인 군대의 위신에 타격을 준 이 젊은 잉카를 벌하기 위해 병사들과 함께 서둘러 출발했지만, “이 시도 역시 실패했다.” 잉카는 우일카팜파의 강과 산을 넘어 물러났기 때문이다.
우이티코스에서 망코는 시에사 데 레온에 따르면 자신의 적들의 머리를 보여주며 추종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정확성을 위해 말하자면, 창끝에 적의 머리를 전시하는 관습은 유럽의 것이었지 페루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마존 정글의 일부 야만 인디오들은 때때로 적을 참수하고 두개골의 뼈를 제거한 뒤 축소된 두피와 얼굴을 말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적의 두피를 처리한 것처럼 용맹의 표시로 착용하기도 한다. 그러한 관습은 중부 페루의 평화를 사랑하는 잉카 농부들 사이에서는 자리 잡지 못했다. 당시 망코와 함께 있던 스페인 사람들 중 누구도 빌라디에고 대장의 불행한 부하들의 시체에 대한 그러한 모욕을 보고하지 않았다. 아마도 정복자들은 망코가 비슷한 상황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했을 법한 일을 했다고 추측했을 것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우이티코스(Uiticos) 침투에 실패한 후, 그의 동생 곤살로는 “잉카를 추격하여 그의 일부 고개와 다리를 점령했지만” 산악 미로로 침투하는 데는 실패했다. 빌라디에고 대장보다 덜 무모했기에 그는 망코와 실제 충돌하지는 않았다. 젊은 잉카를 제압하거나 쿠스코에서 리마로 가는 여행객들에 대한 그의 습격을 막지 못하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함께 있던 왕실 관리들의 동의를 얻어” 편리한 지점에 아야쿠초 시를 건설하여 여행객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몬테시노스에 따르면 망코는 아야쿠초의 선량한 주민들에게 꽤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망코의 아내 중 한 명을 다른 인디오들과 함께 포로로 잡아 옷을 벗기고 채찍질한 뒤 화살로 쏴 죽였다.”
망코의 통치 하에 우이티코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1639년에 “도덕화된 연대기” 또는 “페루에서의 어거스틴회 선교 활동에 대한 경건한 설명”을 출판한 칼란차 신부는 잉카 망코가 “동쪽과 남쪽으로 200리그 이상에 걸쳐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디오들이 다양한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관례적인 수도원의 열정과 적절한 종교적 열정으로 칼란차 신부는 잉카가 스페인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온 세례받은 인디오들에게 새로운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고 더 이상 옛 잉카 “우상들”을 숭배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고문했다고 비난한다. 이 이야기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도망쳐 온 인디오들이 결코 세례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음은 틀림없다.
가혹한 주인들로부터 도망친 인디오들 외에도 1542년에는 고메스 페레스, 디에고 멘데스와 알마그로를 지지하는 다른 여섯 명의 스페인 도망자들이 우일카팜파에 왔는데, 칼란차는 이들을 “망코의 호의를 받을 만한 악당들”이라고 말한다. 정복자들의 내전으로 인해 피사로 일당으로부터 도망쳐야 했던 그들은 우이티코스에서 환영받게 되어 기뻐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들은 게임을 하고 잉카에게 체커와 체스, 그리고 잔디밭 볼링과 퀴터를 가르쳤다. 몬테시노스는 그들이 또한 그에게 말 타기와 아르케부스 사용법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들은 게임을 매우 진지하게 여겼고 때때로 격렬한 다툼이 일어났는데,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그 중 하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망코를 통해 부왕령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계속 정보를 받았다. “험준하고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잉카는 그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모든 “혁명”에 대해 철저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1544년에 우이티코스에 도달한 가장 흥미진진한 소식은 첫 번째 스페인 부왕의 도착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선한 라스 카사스 주교의 노력의 결과인 신법을 가져왔다. 신법은 무엇보다도 왕실의 모든 관리들이 인디오 농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하며 강제 개인 노역을 완전히 폐지한다고 규정했다. 정복자들에게 주어진 레파르티미엔토는 그들의 상속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왕에게 귀속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신법은 스페인 왕실이 인디오들에게 친절하기를 원하며 피사로 일당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제공했다. 이는 망코에게 좋은 소식이었고 도망자들에게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그들은 잉카에게 새 부왕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앞에 나타나 왕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설득했다. 스페인 도망자들은 잉카에게 이 방법을 통해 언젠가는 그의 제국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는 적어도 그 중 가장 좋은 부분을.” 잉카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부왕에게 보내도록 설득한 그들의 목적은 그들 자신이 “과거에 대한 용서와” 스페인령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마치 자신들로부터인 것처럼” 썼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고메스 페레스는 작은 무리의 적극적인 리더로 보이며, 잉카와 도망자들의 편지를 전달할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잉카가 그의 하인과 경호원 역할을 하도록 지시한 12명의 인디오들을 동반하여 그는 우일카팜파를 떠나 부왕에게 편지를 전달했고 그에게 “잉카의 상태와 조건,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봉사하려는 실제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부왕은 기쁘게 소식을 받아들였고, 요청한 대로 모든 범죄에 대해 완전하고 충분한 용서를 내렸다. 그리고 잉카에 대해서는 많은 애정과 존경의 표현을 했으며, 진정으로 잉카의 이익이 전쟁과 평화 모두에서 그에게 유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만족스러운 답변과 함께 고메스 페레스는 잉카와 그의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도망자들은 소식에 기뻐하며 왕과 조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들의 우이티코스 출발은 가르실라소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비극적인 사고로 인해 막혔다.
잉카는 스페인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자신도 즐기기 위해 볼링장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어느 날 고메스 페레스와 볼링을 하다가 던지기의 거리에 대해 다툼이 생겼는데, 이는 그들 사이에 자주 일어나곤 했다. 이 페레스는 성격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판단력이나 이해력이 없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일로도 잉카와 다투고 도발하곤 했다. … 더 이상 그의 무례함을 참을 수 없게 된 잉카는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페레스는 열기와 분노 속에서 자신의 안전이나 동료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리고 잉카의 머리를 그릇으로 세게 내리쳐 그를 쓰러뜨렸다. [그는 3일 후에 사망했다.] 이에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왕의 죽음에 격분하여 고메스와 스페인인들에 대항해 뭉쳤다. 스페인인들은 한 집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지키며 칼로 방어했다. 인디언들은 그 집에 불을 질렀고, 스페인인들은 더위를 견디지 못해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거기서 인디언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화살로 쏘아 모두 죽였다. 그 후 인디언들은 분노와 광기에 차서 그들의 관습대로 시체를 날로 먹거나 태워 재를 강에 뿌려 흔적을 없애려 했다. 하지만 의논 끝에 시체들을 들판에 던져 독수리와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것이 시신에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과 수치라고 여겼다. 가르실라소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나는 그 무모하고 머리가 비정상적인 바보의 전례 없는 광기에 대해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추장들과 귀족들로부터 아주 정확히 들었다. 그들이 내 어머니와 부모님께 눈물을 흘리며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들었다.” 이 비극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들은 모두 한 스페인인이 잉카를 살해했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1545년, 매력적이고 활기찬 인물의 통치가 갑작스럽게 끝났다. 망코는 세 어린 아들 사이리 투팍, 티투 쿠시, 투팍 아마루를 남겼다. 사이리 투팍은 아직 성년에 이르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이어 잉카가 되어 섭정의 도움을 받아 10년 동안 스페인 이웃들을 방해하거나 그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통치했다. 단, 몬테시노스가 1555년 아반카이 근처의 다리를 불태우려 했다는 언급이 사실이라면 예외다. 몬테시노스는 이상하게도 이 시도를 10년 전에 사망한 잉카 망코의 소행으로 돌리고 있다. 1555년 리마에 새로운 부왕이 왔는데, 그는 어린 사이리 투팍이 손이 닿지 않는 우일카팜파의 오지에 살기보다는 가까이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부왕은 현명하게도 쿠스코에 살고 있던 잉카의 고모 베아트리스 코야 공주를 통해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녀는 이 제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왕족의 일원인 전령을 인디언 하인들과 함께 우이티코스로 파견했다. 여정은 위험했다. 다리들은 무너져 있었고 험악한 길들은 거의 지나갈 수 없었다. 사이리 투팍의 섭정들은 전령이 우일카팜파에 들어와 부왕의 초대를 전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 초대가 표면상으로 보이는 것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비록 친척이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방문객을 인질로 잡아두고 자신들의 전령을 쿠스코로 보내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또한 더 신뢰할 수 있는 사촌인 존 시에라를 이 일을 처리하러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 모든 일에 시간이 걸렸다.
얼굴에서 드러났다.”
사이리 투팍은 이제 잉카 주권의 상징인 신성한 붉은 술을 받았다. 그는 왕실 혈통의 공주와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세례를 받은 후, 쿠스코에서 북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있는 아름다운 유카이 계곡에 거처를 마련했으며 다시는 우이티코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딸은 결국 가르시아 대위와 결혼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다. 사이리 투팍은 1560년에 사망했고, 두 명의 형제를 남겼다. 큰형 티투 쿠시 유팡키는 서자였고, 동생 투팍 아마루는 그의 정당한 후계자였지만 경험이 없는 젊은이였다.
우이티코스의 왕좌는 티투 쿠시가 차지했다. 새로운 잉카는 사이리 투팍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했고, 스페인 사람들이 더 악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복동생과 함께 조용히 우일카팜파에 머물렀다.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첫 방문객은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였다. 그는 우이티코스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고, 잉카에게 가위 한 쌍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는 티투 쿠시를 쿠스코로 데려가려는 시도에 실패했다. 시간이 흘러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인 마르코스 가르시아 수사가 찾아왔다. 그는 사이리 투팍 사망 6년 후 “적당한 부와 큰 강들, 그리고 늘 있는 비”가 있는 거친 우일카팜파 지역에 들어갔다. 칼란차 신부에 따르면 그곳의 “숲이 우거진 산들은 장관”이었다. 마르코스 수사는 힘든 여정을 겪었다. 다리는 무너져 있었고, 도로는 파괴되어 있었으며, 고개는 막혀 있었다. 우일카팜파에서 가끔 쿠스코에 나타나는 몇 안 되는 원주민들은 수사가 그곳에 도착하려면 “새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선교 활동에서 보여준 용기와 끈기로, 마르코스 수사는 마침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이티코스에 도착했다.
선교 연대기 작가는 티투 쿠시가 그를 보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고, 화를 내며 맞이했다고 말한다. 스페인 사람이 자신의 은신처에 침입한 것이 그를 걱정시켰다. 게다가 잉카는 누군가가 자신의 “우상 숭배”를 비난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티투 쿠시 자신의 이야기를 마르코스 수사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칼란차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쨌든 마르코스 수사는 당시 잉카의 많은 백성들이 살고 있던 푸키우라라는 곳에 작은 교회를 지었다. “그는 들판과 산에 십자가를 세웠는데, 이것들이 악마를 쫓아내는 데 가장 좋은 것들이었다.” 그는 “잉카의 추장들과 주요 추종자들로부터 많은 모욕을 당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악마를 기쁘게 하려고 그랬고, 다른 이들은 잉카에게 아첨하려고 그랬으며, 많은 이들은 그의 설교를 싫어해서 그랬다. 그는 설교에서 그들의 악행을 꾸짖고 개종자들 사이에서 네 명 또는 여섯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혐오했다. 그래서 그들은 음식으로 그를 괴롭혔고, 그로 하여금 쿠스코에 식량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만들었다. 수도원에서 그에게 건빵을 보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가장 맛있는 연회였다.”
1년쯤 지나 또 다른 아우구스티노회 선교사인 디에고 오르티스 수사가 혼자 쿠스코를 떠나 우일카팜파로 향했다. 그는 길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잉카의 은신처에 도착해 마르코스 수사와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잉카는 새로운 설교자를 보고 그리 기뻐하지 않았지만, 잉카는… 디에고 수사가 그를 괴롭히거나 꾸짖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입국을 허가했다. 그래서 잉카는 그에게 허가를 내렸다. 그들은 우아란칼라 마을을 선택했는데, 이곳은 인구가 많고 다른 작은 마을들과 촌락들 사이에 잘 위치해 있었다.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까지는 이틀이나 사흘 거리였다. 마르코스 수사를 푸키우라에 남겨두고 디에고 수사는 새로운 터전으로 갔고, 짧은 시간 안에 교회와 자신의 집, 그리고 병원을 지었다. 이 모든 건물들은 짧은 시간에 지어진 초라한 건물들이었다.” 그는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고, 치유와 가르침을 하며 돌아다니면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잉카 숭배의 중심지에 더 가까이 있으면서, 의사로서의 기술도 없고 재치도 없었던 마르코스 수사보다 더 쉬운 시간을 보냈다.
칼란차 신부는 잉카의 주요 신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비트코스[또는 우이티코스] 근처의 추키팔파라는 마을에 태양의 신전이 있고, 그 안에 물이 흐르는 샘 위에 하얀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악마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 우상 숭배자들에게 경배를 받았다. 이것이 그 숲이 우거진 산들의 주요 모차데로였다. ‘모차데로’라는 단어는 원주민들이 그들의 예배 장소에 붙이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들이 신성한 입맞춤 의식을 행하는 유일한 장소이다. 그들의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이 부분의 기원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엄숙히 부인하며 그분께 말씀드릴 때 혐오하는 바로 그 관행이다. ‘주님, 제가 만약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거나 밝은 달이 빛날 때 맹인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마음으로 기뻐하고 손을 뻗어 태양에 입맞춤을 던졌다면, 저는 이 모든 벌과 더 큰 짐까지도 받아 마땅했을 것입니다.’ 이는 참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매우 중대한 불의이다.”
이처럼 교회의 연대기 작가는 페루에서 행해진 천체 숭배의 특정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으며 모하메드와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도 이를 비난했다. 이 “가장 깊은 복종과 경의를 표하는” 의식은 잉카 티투 쿠시 통치 시기에 우이티코스(Uiticos) 근처의 추키팔파(Chuquipalpa)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칼란차는 계속해서 말한다. “앞서 언급한 태양의 신전에 있는 이 하얀 돌, 즉 유락 루미[케추아어로 ‘하얀 바위’를 의미함]라고 불리는 곳에는 한 군단을 이끄는 악마가 있다. 그와 그의 군단들은 인디오 우상 숭배자들에게 큰 친절을 보이지만,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큰 공포를 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입맞춤으로 그들을 숭배하지 않는 세례 받은 자들을 끔찍한 잔인함으로 학대하며, 많은 인디오들이 이 악마들이 주는 끔찍한 공포 때문에 죽었다.”
어느 날, 잉카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주요 추장들과 고문들이 우이티코스를 떠나 그들의 일부 외딴 거주지를 방문하러 갔을 때, 토지 대신에 프라이 마르코스와 프라이 디에고는 이 특정한 악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샘 위에 있는 큰 흰 바위” 근처에 있었다. 두 수사는 모든 개종자들을 푸키우라(Puquiura)의 교회나 인근 광장으로 모이게 하고, 각자 장작 한 단씩을 가져와 그들을 괴롭혔던 이 악마를 불태워버리라고 요청했다. 정해진 날에 “헤아릴 수 없는 군중”이 모였다. 개종한 인디오들은 친구들을 죽이고 자신들에게 상처를 입힌 이 악마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의심하는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싶어 했고, 잉카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신이 기독교인들의 신을 물리치는 것을 보러 왔다. 나머지 사람들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그저 흥분된 광경을 보러 왔다. 그들은 푸키우라를 출발해 “우이티코스 근처 추키팔파 마을에 있는 태양신전”으로 행진했다. 신성한 울타리에 도착한 수사들은 십자가를 세우고 기도를 외웠다. 그들은 샘과 흰 바위, 태양신전을 둘러싸고 장작을 높이 쌓았다. 그런 다음 그곳을 정화한 후, 그들은 경멸을 보이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저속한 이름으로 악마를 부르며 결코 이 지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부르며 그들은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가련한 악마는 분노에 차 울부짖으며 도망쳤고, 산들이 흔들렸다.”
두 명의 외로운 수사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주요 신전을 이렇게 모독하는 데는 놀라운 용기가 필요했다. 친구들과 떨어져 있고 스페인 부왕의 보호에서 멀리 떨어진 이 외딴 계곡에서 그들이 주인들의 종교에 이런 모욕을 가하는 행위를 감행했다는 것은 거의 믿기 힘들다. 물론 잉카 티투 쿠시가 이 소식을 듣자 크게 화를 냈다. 그의 어머니는 격노했다. 그들은 즉시 푸키우라로 돌아왔다. 추장들은 “수사들을 죽여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했고, 프라이 디에고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질병 치료 기술은 인디오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잉카 자신도 태양신전 공격에 대해 그를 처벌하지 못했다. 그러나 계획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고 인디오들의 호감을 얻지 못한 프라이 마르코스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칼란차에 따르면 그는 돌에 맞아 그 지방에서 쫓겨났고 잉카는 그가 다시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특히 열병이 만연한 저지대 정글에서 온 인디오들에게 사랑받던 프라이 디에고는 머물도록 허락받았고, 결국 티투 쿠시의 신뢰받는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어느 날 로메로라는 이름의 스페인인이 금을 찾아 모험을 떠나다 산골짜기로 들어오는 것이 발견되었고, 그곳에 어떤 광물이 있는지 보기 위해 잉카로부터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다. 그는 너무 성공적이었다. 언덕들 사이에서 금과 은이 발견되었고 그는 자신의 행운에 열광적인 기쁨을 보였다. 잉카는 그의 보고가 다른 이들이 우일카팜파(Uilcapampa)로 들어오도록 부추길까 봐 두려워 프라이 디에고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불운한 탐광자를 처형했다. 외국인들은 우일카팜파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1570년, 티투 쿠시가 우이티코스의 잉카 왕좌에 오른 지 10년이 지나 새로운 스페인 부왕이 쿠스코(Cuzco)에 왔다. 불행히도 잉카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군인이자 행정가인 돈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가 지나치게 편견이 많고, 편협하며,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게다가 필립 2세와 그의 인디아 위원회는 잉카를 우이티코스에서 빼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 35년 동안 스페인 정복자들은 우일카팜파 지방에 살고 있는 인디오들의 복종을 얻지 못한 채 쿠스코와 페루의 주요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티투 쿠시가 항상 스페인 당국의 접근이 가능한 곳에서 살도록 설득할 수 있다면 톨레도에게는 큰 성과가 될 것이었다.
이어진 우기 동안, 유난히 흥겨운 파티 후에 잉카는 비에 젖어 오한을 느끼고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 사이 부왕은 잉카가 좋아하는 쿠스코 군인인 틸라노 데 아나야를 골라 티투 쿠시를 쿠스코로 오도록 설득하려 했다. 틸라노는 오얀타이탐보와 추키차카 다리를 통해 가도록 지시받았다. 운은 그를 외면했다. 티투 쿠시의 병세는 매우 심각했다. 그의 의사인 프라이 디에고는 평소의 치료법을 처방했다. 불행히도 수사의 모든 기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왕실 환자는 사망했다. 티투 쿠시의 어머니와 그녀의 조언자들은 “치료법”이 잉카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여겼다. 불쌍한 수사는 “잉카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해야 했다.
망코의 셋째 아들인 투팍 아마루는 우이티코스 근처 태양의 처녀들의 신전에서 놀이 친구로 자라 이제 행복하게 결혼한 상태였다. 그가 작은 왕국을 다스리도록 선택되었다. 그의 이마에는 주권의 상징인 진홍색 술이 장식되었지만, 그의 강력한 서자 형제의 질투심 때문에 군인으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는 짧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될 운명이었다. 젊은 잉카의 조언자들은 부왕의 사절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7명의 전사를 보내 그를 길에서 만나게 했다. 틸라노가 추키차카 다리에서 밤을 보내려 하고 있을 때 그는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부왕은 프라이 디에고의 순교와 동시에 자신의 대사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페인 지배의 심장부에 타격이 가해졌다. 하늘의 섭정과 필립 2세의 부왕 대리인들이 불가침이 아니라면 누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 종려 주일에 활기찬 톨레도는 그의 평의회에 둘러싸여 불운한 젊은 투팍 아마루와 전쟁을 벌이고 그를 체포한 군인에게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평의회는 “그 젊은 후계자에 의해 그 제국에서 많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게다가,” 가르실라소는 말한다. “잉카를 감금함으로써 이전 왕들에 속했던 모든 보물과 함께 그들이 만든 황금 사슬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와이나 카팍은 그들의 축제 중 중요하고 엄숙한 날에 자신이 입을 것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더욱이 “황금 사슬과 남은 보물은 정복 권리에 따라 그의 가톨릭 폐하의 소유였다”! 변명은 필요 없었다. 잉카 족은 멸절되어야 했다.
원정대는 두 부대로 나뉘었다. 한 부대는 리마탐보를 거쳐 쿠라우아시로 보내져 잉카가 아푸리막 강을 건너 그의 아버지 망코가 약탈 원정 때 사용했던 경로로 탈출하려 할 경우에 대비했다. 다른 부대는 마르틴 우르타도 장군과 가르시아 대위의 지휘 하에 쿠스코에서 유카이와 오얀타이탐보를 거쳐 행군했다. 그들은 35년 전 빌라디에고 대위의 부대가 판티칼라 고개에서 만나 전멸했던 것보다 더 운이 좋았다. 그때는 활동적인 잉카 망코 시대였다. 이제 이 중요한 고개를 지키는 군대는 없었다. 그들은 루쿠마요 강을 따라 내려가 우루밤바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러 추키차카 다리에 도착했다.
좁은 현수교는 원주민 섬유로 만들어졌고 중간이 깊게 처져 있었으며 우루밤바 강 협곡 위에서 위협적으로 흔들려 한 번에 한 사람만 건널 수 있었다. 급류가 너무 깊어 도하할 수 없었다. 카누도 없었다. 대부분의 나무가 단단해서 뗏목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우루밤바 강 건너편에는 젊은 투팍 아마루가 고문관들, 추장들, 병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피사로 시대에 우일카팜파로 들어가려 했던 첫 적대 세력은 망코에 의해 결코 이곳까지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막내아들 투팍 아마루는 이런 일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추장들과 귀족들은 고개를 방어하지 못했고, 이제 그들은 추키차카 다리를 파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분명 한 번에 한 명의 스페인 병사를 상대하고 좁고 흔들리는 구조물을 건너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았다. 우르타도 장군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그는 잉카의 미숙한 군대가 잘 알지 못하는 가벼운 산악 포 한두 문을 가져왔다. 이 지점에서 계곡 양쪽은 강에서 가파르게 솟아올랐고 대포 발사로 인한 울림은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대포와 아르케부스에서 몇 발의 포화가 발사되자 인디오들은 사방으로 도망쳤고 다리는 무방비 상태로 남겨졌다.
사이리 투팍의 딸과 결혼한 가르시아 대위가 잉카를 추격하도록 명령받았다. 그의 부하들은 “오르막길이 좁고 오른쪽에는 숲이, 왼쪽에는 깊은 협곡이 있는” 길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가르시아는 평소의 스페인식 용맹함으로 부대의 선두에서 행군했다. 갑자기 빽빽한 숲에서 투팍 아마루의 도주를 보호하려던 우알파라는 잉카 추장이 튀어나와 가르시아를 붙잡고 칼을 뽑지 못하게 한 채 절벽 아래로 던지려 했다. 대위의 목숨은 바로 뒤에서 그의 칼을 들고 따라오던 충실한 인디오 하인에 의해 구해졌다. 하인은 “큰 재주와 생기로” 칼집에서 칼을 뽑아 우알파를 죽이고 주인의 목숨을 구했다.
가르시아는 여러 전투를 치르고 몇몇 요새를 점령해 많은 포로를 잡았다. 그들로부터 잉카가 “시마폰테 계곡 안쪽으로 갔으며, 전투적이고 우호적인 부족인 마냐리에스 인디오들의 땅으로 도망가고 있다는 것과, 그를 구출하고 탈출시키기 위해 발사와 카누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글의 위험이나 강의 급류에도 굴하지 않고 가르시아는 마침내 다섯 척의 뗏목을 만들어 일부 병사들을 태웠다. 그는 직접 그들과 동행하며 급류를 내려갔고, 여러 번 수영으로 목숨을 구하며 마침내 모모리라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잉카는 그들이 접근한다는 것을 알고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가르시아는 그와 그의 부하들이 이미 맨발이 되고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계속 뒤를 쫓았다. 그들은 마침내 잉카를 생포했다. 가실라소는 투팍 아마루가 “저항할 사람들이 없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나 소동이 없다고 생각해 잡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그 산에서 굶어 죽거나 그 큰 강에서 익사하느니 차라리 스페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렇게 잉카를 붙잡고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인디오 남녀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중에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 한 딸이 있었다. 그들은 승리의 기세로 쿠스코로 돌아왔다. 부왕은 그 불쌍한 왕자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곳으로 갔다.” 모의 재판이 열렸다. 포로로 잡힌 추장들은 악마적인 잔인함으로 고문당해 죽었다. 투팍 아마루의 아내는 그의 눈앞에서 짓밟혔다. 그 자신의 목이 잘려 쿠스코 광장의 장대 위에 놓였다. 그의 어린 아들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이렇게 미국이 본 가장 현명한 인디언 통치자들의 후손인 마지막 잉카가 죽었다.
마지막 네 명의 잉카들에 대한 간략한 요약
1534년. 잉카 망코가 선조들의 왕위에 오른다.
1536년. 망코가 쿠스코에서 우이티코스와 우일카팜파로 도망간다.
1542년. “신법” 공포.
1545년. 망코 살해 및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팍 즉위.
1555년. 사이리 투팍이 쿠스코와 유카이로 간다.
1560년. 사이리 투팍 사망. 그의 이복 동생 티투 쿠시가 잉카가 된다.
1566년. 마르코스 수사가 우이티코스에 도착한다. 푸키우라에 정착한다.
1566년. 디에고 수사가 그에게 합류한다.
1568-9년 (?). 그들이 추키팔파의 유락 루미에 있는 태양의 집을 불태운다.
1571년. 티투 쿠시가 사망한다. 디에고 수사가 순교한다. 투팍 아마루가 잉카가 된다.
1572년. 마르틴 우르타도 장군과 가르시아 데 로욜라 대위의 원정. 투팍 아마루 처형.
제10장
마지막 잉카 수도를 찾아서
앞 장에서 설명한 사건들은 대부분…
일부는 우이티코스와 우일카팜파에서 올란타이탐보에서 북서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은 프레스콧이 “안데스의 외딴 요새”라고 부른 곳으로, 스페인 부왕의 쿠스코 궁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현대 페루 지도에서는 우이티코스를 찾아볼 수 없지만, 몇몇 오래된 지도에는 나와 있다. 1625년 드 래의 페루 지도에는 “비티코스”가 리마 북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빌카밤바에서 북서쪽으로 560km 떨어진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이 오류는 메르카토르를 포함한 후대의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1740년경까지 복사되었다. 그 후 “비티코스”는 모든 페루 지도에서 사라졌다. 지도 제작자들은 그 지역에 그런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 위치는 약 300년 전에 잊혀졌다. 1599년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된 지도에는 “쿠스코” 서쪽의 작은 “안데스” 산맥에 “핀코스”가 나와 있다. 이것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 채택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1739년의 팔리스 지도에는 거의 같은 위치에 “피코스”가 표시되어 있다. 18세기 지도 제작자들 중 “비티코스”를 표시한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부족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로스 비티코스” 또는 “레 비티코스”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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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9년 뉘른베르크 지도의 일부, 핀코스와 안데스 산맥을 보여줌
페루의 가장 큰 공식 지도인 라이몬디(Raimondi)의 작품에는 우이티코스(Uiticos)나 비티코스(Viticos), 비트코스(Vitcos), 피트코스(Pitcos), 비티코스(Biticos) 등 다양한 철자로 된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이몬디는 페루를 가로지르며 일생을 보낸 놀라운 탐험가였다. 우이티코스가 “비티코스”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케추아어에는 V 발음이 없다. 하지만 초기 스페인 작가들은 대문자 U를 대문자 V와 똑같이 썼다. 공식 문서와 편지에서 우이티코스는 비티코스가 되었다.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는 공식 낭독자들은 자연스럽게 U 발음 대신 V 발음을 사용했다. V와 P는 쉽게 B가 된다. 그래서 우이티코스는 비티코스가 되고 우일카팜파(Uilcapampa)는 빌카밤바(Vilcabamba)가 되었다.
라이몬디의 놀라운 에너지 덕분에 그는 이전에 누구도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가기 어려울 페루의 외딴 마을들까지 탐험할 수 있었다. 그는 자연적 장애물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1865년 그는 우일카팜파의 중심부 깊숙이 들어갔지만 우이티코스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초케키라우(Choqquequirau) 유적이 마지막 잉카의 거주지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이 견해는 1834년 프랑스 탐험가 사르티게 백작(Count of Sartiges)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그는 망코(Manco)의 맏아들 사이리 투팍(Sayri Tupac)이 유카이(Yucay)에 살러 갔을 때 초케키라우가 버려졌다고 믿었다. 라이몬디의 견해는 1877년 파스 솔단(Paz Soldan)을 포함한 주요 페루 지리학자들과 1909년 내가 초케키라우를 방문했을 당시의 누녜스 지사(Governor Nuñez)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다. 유일한 반대자는 학식 있는 페루 역사가 돈 카를로스 로메로(Don Carlos Romero)였다. 그는 마지막 잉카 수도가 다른 곳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빌카밤바와 우루밤바(Urubamba)라고 불리는 강 계곡에서 우이티코스를 찾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연대기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고 오랫동안 잃어버린 잉카 수도의 위치를 확립할 지리적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 1911년 예일 페루 탐험대(Yale Peruvian Expedition)의 과제가 될 것이었다.
우루밤바 계곡에 아직 설명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유적이 있다는 것은 쿠스코(Cuzco)의 몇몇 사람들, 대부분 콘벤시온(Convencion) 주에 큰 농장을 가진 부유한 농장주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한 사람은 매년 산타 아나(Santa Ana)에 가서 산 미겔(San Miguel) 다리 근처에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고 말해준 노새 몰이꾼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국민들이 과장하는 경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거의 믿지 않았고, 어깨를 으쓱하며 20번이나 그 다리를 건넜지만 그 문제를 조사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빌카밤바 계곡에 농장이 있는 판코르보(Pancorbo)라는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농장 위 계곡에 유적이 있다는 모호한 소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특히 푸키우라(Puquiura) 근처에서 말이다. 만약 그의 이야기가 사실로 판명된다면, 이곳이 바로 프라이 마르코스(Friar Marcos)가 “우일카팜파 지방(Uilcapampa district)”에 첫 번째 교회를 세운 바로 그 푸키우라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곳은 우이티코스 “근처”에 있었고, 추키팔파(Chuquipalpa)라는 마을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태양신전의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 유적에는 “샘 위의 흰 바위(white rock above a spring)”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친절한 농장주들이나 그들이 묻는 친구들 중 누구도 우이티코스나 추키팔파라는 곳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들이 들었던 유적을 본 적이 없었다.
로멜리니(Lomellini)의 친구 중 한 명인 수다스러운 노인은 쿠스코 지역에서 광산 탐사를 하며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냈는데, 그는 와이나 픽추(Huayna Picchu)라는 곳에서 “초케키라우보다 더 좋은” 유적을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초케키라우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나 자주 “실현되지 않는” 광산에 대해 과도하게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보고는 샤를 비에너(Charles Wiener)라는 프랑스 탐험가의 보고와 유사했다. 비에너는 1875년경 안데스를 방랑하던 중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와이나픽추 또는 마초픽추(Matcho Picchu)”라고 불리는 곳에 우루밤바 계곡 아래쪽에 좋은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계곡을 내려가 이 유적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그의 텍스트에 따르면 그는 판티칼라(Panticalla) 고개를 넘어 루쿠마요(Lucumayo) 강을 따라 차우이야이(Chauillay) 다리까지 내려갔고, 하류 우루밤바를 방문한 후 같은 경로로 돌아왔다. 그는 계곡의 상세한 지도를 출판했다. 그는 한 봉우리에 “와이나픽추, 고도 1815m”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른 봉우리에는 “마초픽추, 고도 1720m”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잉카 유적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오얀타이탐보에 대해 여러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는 마추픽추에 도달하지 못했고 우루밤바나 빌카밤바 계곡에서 중요한 유적을 찾지 못했다. 우리가 더 성공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들려온 소문이 “실현될”까?
위너가 열렬히 듣던 것만큼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시대 이후, 물론 페루 정부가 실제로 마추픽추(Machu Picchu)를 지나는 도로를 완공했다. 반면, 윌리엄 C. 패러비 박사가 이끄는 하버드 인류학 탐험대가 최근 이 도로를 다녀갔지만 중요한 유적지를 보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야만인을 찾고 있었지 유적을 찾는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추픽추가 “초케키라우보다 훌륭하다면” 왜 아무도 그들에게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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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페루 탐험대
쿠스코의 대부분의 친구들에게 초케키라우보다 훌륭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 “황금 요람”을 “최근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보다 절반만큼도 좋은 것은 없다고 우리에게 장담했다. 그들은 심지어 우리가 비밀리에 그곳으로 돌아가 매장된 보물을 찾으려 한다고 추측했다! 부인해도 소용없었다. 운 좋은 “찾기”로 재산을 모은 조상을 둔 사람들에게, 그리고 어떤 운 좋은 발굴자가 발견할 엄청난 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이야기로 자란 사람들에게, 테소로 – 보물, 재물, 부 – 의 문제는 항상 대화의 주제였다. 심지어 쿠스코의 지사조차도 내가 발견을 위한 열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초케키라우에서 큰 부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그리고 내가 매우 높은 봉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탐험대 대원들이 경비 이상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내게 푸트 교수가 자신의 곤충 컬렉션을 최소 1만 달러에 팔 것이라고 은밀히 말했다! 페루인들은 정부나 철도 회사, 광산 회사에 고용되지 않은 사람이 과학적 작업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심지어 쿠스코 역사학회에서도 우리의 작업이 오해받고 의심받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우루밤바 계곡, 또는 예전에 불렸던 우일카마유는 쿠스코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갈 수 있다. 유카이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는 도시에서 북서쪽으로, 위대한 안데스 고속도로를 따라 센카 산의 경사면을 지나간다. 티카티카(해발 3,600m)에서 도로는 쿠스코 분지 서쪽 끝의 가장 낮은 고개를 넘는다. 쿠스코 시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진정한 인디오들은 모두 계곡을 떠나든 들어오든 잠시 멈춰 서서 동쪽을 향해 도시를 바라보며 모자를 벗고 기도를 중얼거린다. 지금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성모 마리아여” 또는 가톨릭 교회의 다른 익숙한 기도문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습은 의심할 여지 없이 첫 스페인 선교사들의 도착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아마도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던 고대의 습관의 잔재일 것이다. 정복 직전의 수세기 동안 쿠스코 시는 교회와 국가의 수장인 신성한 개인인 잉카 자신의 거주지였다. 그의 거주지가 보이는 곳에서 경배의 행위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는 차례로 같은 지점에서 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같은 습관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나는 수백 명의 여행자들이 이 지점을 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유럽인의 복장을 한 백인이나 혼혈인임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 누구도 기도하거나 경의를 표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반면에, 원주민 복장을 하고 자신을 백인이 아닌 인디오로 여긴다는 것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잠시 멈춰 서서 고대 도시를 바라보며 모자를 벗고 짧은 기도를 했다.
티카티카를 떠나 우리는 몇 리그를 북쪽으로 가서 친체로스 마을을 지나갔다. 이곳에는 오래된 잉카 벽이 있다. 마침내 우리는 경이로운 유카이 계곡의 가장자리에 도착했다. 계곡 바닥에는 고대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우루밤바 강에서 구출한 넓은 평평한 테라스가 있다. 계곡 양쪽의 가파른 경사면에는 좁은 테라스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그 중 일부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그 위에는 “템포랄레스”, 경작지가 있는데, 이는 너무나 가파른 경사면에 있어서 경작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더 높이 올라가면 구름 위로 솟아오른 뾰족한 눈 덮인 봉우리들이 있다. 전체적으로 대조적이고 웅장한 비율의 놀라운 그림을 제공한다. 유카이에는 한때 잉카 망코의 장남인 사이리 투팍이 살았는데, 그는 부왕의 초청을 받아 스페인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3년을 살았고 1560년에 조기에 사망했는데, 그 상황으로 인해 그의 형제인 티투 쿠시와 투팍 아마루는 우이티코스에서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현대 주도인 우루밤바에서 밤을 보냈다. 이곳은 풍부한 물 공급, 즐거운 기후, 풍성한 과일로 인해 오늘날 페루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해발 3,300m의 쿠스코는 매력적인 주변 환경을 갖기에는 너무 높지만, 600m 더 낮은 우루밤바 계곡에는 눈을 즐겁게 하고 원예가를 기쁘게 하는 모든 것이 있다.
원예가를 언급하니 그들의 적들이 생각난다. 우루(Uru)는 케추아어로 애벌레나 유충을 의미하고, 팜파(Pampa)는 평지를 뜻한다. 우루밤바(Urubamba)는 “애벌레나 유충이 있는 평지”다. 곤충이 풍부한 따뜻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다면 그렇게 명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벌레와 유충이 번성하는 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그러한 상황에 주목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계곡은 아마도 나비와 나방이 더 흔한 따뜻한 지역으로 내려가던 고원 거주자들에 의해 이름 지어졌을 것이다. 그 유명한 애벌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루밤바의 정원에는 장미, 백합, 그리고 다른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다. 복숭아, 배, 사과를 키우는 과수원도 있다. 쿠스코 시장을 위해 맛있는 딸기를 재배하는 밭도 있다. 분명히 애벌레들이 모든 것을 다 먹지는 않는 것 같다.
다음날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서 우리는 오래전 카스텔노(Castelnau), 마르쿠(Marcou), 위너(Wiener), 스키어(Squier)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낭만적인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 도착했다. 마르쿠의 그림이 상상의 산물이고 스키어의 그림이 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매력을 잃지 않았다. 여기에도 우루밤바에서처럼 꽃 정원과 잘 경작된 녹색 들판이 있다. 시냇물은 버드나무와 포플러 나무 그늘에 흐른다. 그 위로 눈 덮인 봉우리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웅장한 절벽들이 있었다. 마을 자체는 한때 고대 공국의 수도였는데, 그 역사는 신비에 싸여 있다. 기묘한 박공 지붕의 건물, 창고, “감옥” 또는 “수도원”의 유적이 마을 위 접근하기 거의 불가능한 바위 절벽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래쪽으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은 테라스들이 있어 여전히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있었다. 이 테라스들은 사라진 종족의 에너지와 기술을 보여주는 기념물로 앞으로도 수 세기 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요새”는 작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가파른 절벽과 높은 벽, 그리고 공중 정원으로 둘러싸여 접근하기 어려웠다. 수 세기 전, 이 계곡의 비옥한 들판을 경작하던 부족이 야만적인 이웃들을 두려워하며 살았을 때, 이 언덕은 그들이 피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다. 당시에는 요새화되었을 수도 있다. 잉카의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세기가 흘렀고, 잉카의 주된 관심사는 평화로운 농업 증진이었기에 이 요새는 왕실 정원이 되었을 것이다. 언덕 정상에 일렬로 놓인 15~20톤 무게의 붉은 화강암 거석 6개는 수 마일 떨어진 채석장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정성을 들여 운반되었다. 이것들은 아마도 유능한 통치자의 위엄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바위들을 채석장에서 캐내어 계곡 바닥에서 언덕 정상까지 경사로를 따라 운반할 만큼 충분한 수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식량도 공급해야 했다. 이런 기념물을 세우는 것은 500명의 인디오들을 일반적인 농업 직업에서 빼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행정가였음이 틀림없다. 그의 백성들에게 이 웅장한 거석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의 적들에게는 그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었다.
1895년경 강변 도로가 완공되기 전에는 쿠스코에서 우루밤바 강 하류로 가는 여행자들에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1571년 가르시아 대위, 1835년 밀러 장군, 1842년 카스텔노, 1875년 비에너가 지나간 판티칼라 고개를 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1834년 사르티게스 백작과 1865년 라이몬디가 지나간 살칸타이 산과 소라이 산 사이의 고개를 지나 살칸타이 강을 따라 우아드키냐로 가는 길이었다. 이 두 길은 모두 살칸타이 산과 베로니카 산 사이의 고원과 피리 마을과 우아드키냐 마을 사이의 저지대를 피했다. 이 지역은 1911년 남부 페루의 지리 문헌에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우리는 어느 고개도 이용하지 않고 우루밤바 강 도로를 따라 곧장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 길은 우리를 매혹적인 지역으로 안내했다.
피리에서 2리그 지점인 살라푼코에서 도로는 험준한 절벽 기슭을 따라 이어졌다. 이는 우일카팜파를 주변의 편암, 역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고원보다 더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 화강암 산괴의 시작이었다. 살라푼코는 고대 지방의 자연스러운 관문이었지만, 수세기 동안 자연과 인간의 노력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우루밤바 강은 화강암 산맥을 통과하며 너무 위험해서 통과할 수 없는 급류와 엄청난 노력과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오를 수 있는 절벽을 형성했다. 한때는 강 근처로 오솔길이 있었을 것이다. 인디안들은 절벽 면을 따라 기어 다니며 때로는 매달린 덩굴을 이용해 한 돌출부에서 다른 돌출부로 이동하며 계곡 아래의 충적토 테라스에 도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길은 요새 위의 절벽을 따라 갔을 수 있는데, 우리는 여러 접근 불가능한 장소에서 좁고 불규칙한 돌출부 위에 지어진 벽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농업용 테라스를 지지하기에는 너무 좁고 불규칙했다. 절벽을 더 험준하게 만들기 위해 지어졌을 수 있다. 아마도 옛 길의 기초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 고대 길들을 방어하기 위해 선사 시대 인간이 절벽 아래 강가에 작지만 강력한 요새를 지었음을 발견했다. 이 유적은 현재 살라푼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살라=유적; 푼코=관문. 유명한 삭사우아만을 본떠 만들어졌고 그것과 유사한 대형 석재의 불규칙한 특성과 방어자들이 벽을 성공적으로 오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해주는 돌출부와 후퇴부 때문에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토론토이 계곡 입구를 지배하고 있는 살라푼코는 어떤 고대 추장이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물을 징수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지어졌을 수 있다. 나의 첫 인상은 이 요새가 온화한 기후대의 끝에 위치해 아마존의 열대 우림에서 올라오는 야만적인 적들로부터 우루밤바와 오얀타이탐보 계곡을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살라푼코는
우일카팜파의 요새는 오얀타이탐보 방향에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전초 기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강력하게 건설되고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이 요새를 상당한 규모의 군대에 맞서 쉽게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래쪽 강변의 토론토이 농장에서 공급품이 현재의 정부 도로보다 앞선 길을 따라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살라푼코는 망코 잉카가 우이티코스에 자리를 잡고 우일카팜파를 통치할 때 그의 군대가 점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종류의 거석 건축물을 지었을 리는 거의 없다. 피사로의 군사들에 맞서 요새를 지키려 하기보다는 좁은 길들을 파괴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게다가 그 스타일과 특징으로 볼 때 쿠스코와 오얀타이탐보의 잘 알려진 거석 구조물들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살라푼코가 오얀타이탐보에 대항하는 방어 시설로 지어졌다는 것이 더욱 특이한 일로 여겨지게 한다. 이곳을 한때 쿠스코를 점령했다가 나중에 이 아래 협곡들에서 은신처를 찾은 사람들이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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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브너 빙하와 살칸타이 산
우리가 처음 살라푼코를 방문했을 때 이 계곡 아래쪽에서는 거석 유적이 보고된 적이 없었다. 잉카 망코가 건설할 힘과 시간을 가졌던 비교적 최근의 구조물들을 찾는 중에 우리가 훨씬 더 오래된 과거의 유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우리는 살라푼코 같은 요새가 우일카팜파를 오얀타이탐보와 쿠스코에 대항해 방어하기 위해 지어졌을 가능성을 설명할 만한 충분한 유적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이 잘 알려진 잉카 도시들을 아마존 정글의 야만인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라푼코를 지나 화강암 절벽과 낭떠러지를 따라가자 매우 흥미로운 지역에 들어섰다. 고대 계단식 밭의 규모, 길이와 높이, 수많은 잉카 유적의 존재, 깊고 좁은 계곡들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위로 솟아 있는 눈 덮인 산들의 웅장함에 놀라고 매료되었다. 강 건너 큰테 근처의 일련의 계단식 밭 꼭대기에서 우리는 파탈락타(pata = 높이 또는 계단; llacta = 마을 또는 도시)라는 매우 중요한 잉카 마을의 광대한 유적을 보았다. 이곳은 라이몬디나 파스 솔단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에너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방문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연대기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었다. 1915년에 우리는 이곳에서 수개월 동안 발굴 작업을 하고 유적의 성격을 파악했다. 다른 책에서 이 지역의 고대 유적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현재로서는 파탈락타 근처의 탐사에서 “샘 위의 흰 바위”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주변의 지명들 중 어느 것도 우이티코스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 정체성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건물들의 대칭성, 벽감, 석재 지붕 못, 막대 구멍, 눈 결속 등의 건축적 특징들은 잉카 기원임을 보여준다. 이 마을들과 촌락들이 언제 번성했는지, 누가 지었는지, 왜 버려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주변에 사는 인디언들은 그 역사에 대해 무지하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있던 커다란 쇠바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바퀴들은 하류 계곡의 설탕 농장으로 운반되다가 중도에 포기되어 정글에서 녹슬어가고 있는 “기계”의 일부였다. 먹을 것이 거의 없었고, 야영할 만한 곳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큰 화강암 절벽 면에 깎아 만든 매우 험난한 길을 계속 나아갔다. 절벽의 일부가 강으로 무너져 내려 길이 끊어진 곳이 있었는데, 그 부분은 허술해 보이는 시골풍의 다리로 보수되어 있었다. 그 다리는 거친 통나무와 나뭇가지, 갈대를 묶어 만든 받침대 위에 흙과 자갈을 몇 인치 쌓아 만든 것이었다. 조심성 많은 짐 노새들이 조심스럽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 보였다. “기계”가 그곳에 멈춰 서서 그 계곡 일부의 이름이 된 것도 당연했다.
이 깊은 협곡에서는 해가 일찍 진다. 양쪽 벽면의 높이가 1마일이 훨씬 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2~3에이커 정도 되는 작은 모래 평지를 지날 때는 거의 어두워져 있었다. 이런 가파른 산악 지형에서는 이 정도 크기의 범람원도 팜파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에 사는 사람들이 이 만도르 팜파라 불리는 작은 범람원을 본다면, 누군가 농담을 하거나 그 단어를 심하게 잘못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팜파란 지구의 곡률 때문이 아니라면 기차가 250마일을 직선으로 달릴 수 있고 언덕 하나 보이지 않는 끝없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곡의 고대 주민들에게는 평지가 너무나 귀해서 옥수수 두 줄을 더 심을 수 있도록 높은 돌담을 쌓아 계단식 밭을 만들 정도였다. 그래서 협곡 바닥의 작은 자연 휴식처도 팜파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는 허술한 풀 지붕의 오두막을 지나 좁은 공터로 들어가 우루밤바 강변의 모래사장에 야영을 차렸다. 우리 맞은편 거대한 화강암 바위 너머로는 울창한 정글로 뒤덮인 가파른 산이 있었다. 야영지로는 이상적인 장소였다. 도로와 가깝지만 한적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만도르 팜파 토지를 임대해 사용하는 오두막 주인 멜초르 아르테아가의 의심을 샀다. 그는 우리가 왜 그의 오두막에 머물지 않고 강가에 야영을 하는지 의아해했다. 우리의 헌병 카라스코 상사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아르테아가는 우리가 잉카의 건축 유적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근처에 매우 좋은 유적들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맞은편 와이나 픽추라는 산 정상과 마추 픽추라는 능선에 훌륭한 유적들이 있다고 했다. 이곳들은 찰스 비에너가 1875년 오얀타이탐보에서 들었지만 가보지 못했던 바로 그 장소들이었다. 다음 날 내가 겪은 경험은 이후 장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여기서는 와이나 픽추의 유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마추 픽추의 유적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 독자들에게 익숙한 것으로, 안데스에서 발견된 어떤 유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로웠다는 점만 언급하겠다.
강 위로 2천 피트 높이의 좁은 능선에 자리 잡은 마추 픽추의 놀라운 성채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곳이 가르시아 대위의 원정대원이었던 노병 발타사르 데 오캄포가 언급했던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잉카 투팍 아마루는 우일카팜파 지방의 상당 부분이 내려다보이는 매우 높은 산 위에 있는 피트코스(Pitcos) [우이티코스] 요새에 있었다. 그곳에는 넓은 평지가 있었고, 매우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큰 기술과 예술로 지어져 있었다. 모든 출입구의 상인방, 주요 건물과 일반 건물 모두가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픽추”가 “피트코스”의 현대식 변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마추 픽추의 신전과 궁전을 짓는 데 사용된 흰 화강암은 쉽게 대리석으로 오인될 수 있다. 그러나 오캄포의 묘사를 마추 픽추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은 문의 상인방과 벽 자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칼란차가 말한 “우이티코스 근처의 샘 위에 있는 흰 바위”도 이 근처에는 없다. 이 지역에는 푸쿠유라도 없다. 사실 우루밤바 협곡은 우이티코스의 지리적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마추 픽추는 비할 데 없이 흥미로운 유적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망코의 마지막 수도를 나타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아직 망코의 궁전을 찾지 못했다.
그는 코로 그 가루를 들이마시고 나서 한동안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팔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조용히 있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이는 분명 진정한 신이나 그가 신이라고 여기는 존재에게 드리는 기도였다. 그러자 모두가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할 때처럼 대답했고, 이는 큰 목소리나 소리로 이루어졌다. 그 후 그들은 감사를 표하고 그에게 찬사를 보냈으며, 그의 자비를 간청하고 그가 본 것을 그들에게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의 환상을 그들에게 묘사했는데, 세미[영혼들]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좋은 시기나 그 반대의 시기, 아이들의 탄생이나 죽음, 또는 이웃들과의 분쟁 등을 예언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취중에 혼란스러워진 상상력에 떠오를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분명히 사제들과 점쟁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일카를 처음 발견하고 그들의 주문에 사용했던 장소는 중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강의 잉카 이름이 우일카-마유: “우일카 강”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강가의 나무들이 자라는 팜파는 아마도 우일카 팜파라는 이름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곳이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면, 주변 지역도 그 이름을 따라 우일카팜파라고 불렸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지방 이름의 가장 가능성 있는 유래다. 어쨌든 쿠스코와 오얀타이탐보의 주민들이 이 귀중한 마약을 찾아 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마추픽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첫 번째 나무들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마추픽추의 유적은 나중에 조사하기로 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우루밤바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산 미겔 다리를 건너고 현대 페루인으로는 처음으로 마추픽추의 화강암 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리사라가의 집을 지나 우아드키냐의 사탕수수 밭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제 온대 지역을 떠나 열대 지역에 들어섰다.
우아드키냐에서 우리는 농장 주인인 카르멘 바르가스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행운을 얻었다. 그들은 비가 오는 겨울 동안에는 쿠스코에서 지내지만, 여름이 좋은 날씨를 가져오면 우아드키냐로 와서 한가로운 시골 생활을 즐긴다. 그들은 우리를 환영해 주었는데, 세계 곳곳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볼 수 있는 여행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환대뿐만 아니라 우리의 탐험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카르멘 부인의 농장은 200평방마일이 넘는 면적을 차지한다. 우아드키냐는 고대의 가부장적 제도의 훌륭한 예다. 페루의 다른 지역에서 이 농장에서 일하러 오는 인디오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권과 임금을 누린다. 이 농장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카르멘 부인을 그녀가 받을 만한 애정 어린 존경심으로 대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그녀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 이 제도는 인디오들의 정신적, 도덕적, 물질적 복지가 레파르티미엔토 또는 할당된 영토의 영주들에게 위탁되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아드키냐는 한때 예수회 소유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심고 제분소를 세웠다. 18세기 말 스페인 식민지에서 추방된 후, 우아드키냐는 한 페루인에 의해 구입되었다. 이곳은 처음으로 1834년 초케키라우로 가는 길에 여기서 몇 주를 머물렀던 사르티게스 백작에 의해 지리학 문헌에 소개되었다. 그는 우아드키냐의 소유주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자신의 영지에 지구 4대륙의 모든 생산물을 가진 유일한 지주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지의 다양한 지역에서 그는 양모, 가죽, 말털, 감자, 밀, 옥수수, 설탕, 커피, 초콜릿, 코카, 많은 은을 함유한 납 광산, 그리고 금 사금을 가지고 있다. 진정 왕족의 영지다.
우리의 새 친구들은 내가 가져온 칼란차의 “연대기” 중 마지막 잉카 수도의 위치에 관한 단락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우이티코스(Uiticos)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농장에서 가장 지적인 소작인들을 불러 질문하도록 했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믿을 만한 감독관인 건장한 메스티소였는데, 그는 우루밤바 강을 따라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셀루마유라는 작은 계곡에 카르멘 부인의 인디오들이 본 “중요한 유적”이 있다고 말했다. 살칸타이 계곡의 한 능선에 유락 루미(유락 = “흰색”; 루미 = “돌”)라고 불리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그의 일꾼들이 장작을 구하러 나무를 베다가 매우 흥미로운 유적을 발견했다는 그의 진술은 더욱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것에 대해 흥분했는데, 내가 칼란차의 “연대기”에서 복사해 온 단락들 중에는 “우이티코스 근처”에 “앞서 언급한 태양의 집의 흰 돌이 있는데 이를 유락 루미라고 부른다”는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스트들은 이곳이 틀림없이 그곳일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이 근처에서 다른 유락 루미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독관은 꼼꼼히 질문을 받고 그는 유적을 한두 번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루밤바 계곡에 가서 오얀타이탐보의 거대한 유적을 보았으며, 유락 루미에서 본 것이 “오얀타이탐보의 것만큼 좋았다”고 했다. 이는 목격자가 한 명확한 진술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잉카들이 예배를 드렸다는 흥미로운 바위를 곧 보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관리인은 그곳으로 가는 길이 현재 통행할 수 없지만, 소수의 인디오들이 일주일도 안 되어 길을 열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주인들은 우리가 보여준 마추픽추 사진에 흥분하여 이제 자신들의 땅에서 더 좋은 유적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우리를 위해 유락 루미로 가는 길을 정리하라고 즉시 명령했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세뇨라 카르멘의 아들인 농장 관리인이 다른 “중요한 유적”이 발견된 셀루마유로 우리를 직접 안내하겠다고 제안했다. 새 길을 뚫을 필요 없이 몇 시간 안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믿고 우리는 텐트나 침대가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해 야영 장비를 두고 우루밤바 남쪽의 작은 계곡으로 그를 따라갔다. 셀루마유는 작은 숲 속 빈터에 있는 두 채의 오두막이었다. 모든 방향으로 울창한 숲이 우거진 경사지가 있었다. 관리인은 두 명의 인디오 소작농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울창한 정글로 들어가 하루 종일 지치도록 유적을 헛되이 찾아다녔다. 그날 밤 관리인은 우아드키냐로 돌아갔지만, 푸트 교수와 나는 셀루마유에 남아 다음 날 더 열심히 수색하기로 했다. 우리는 인디오 주인들과 20마리의 살찐 쿠이(기니피그)와 함께 작은 초가집에서 지냈다. 쿠이는 셀루마유의 주요 육류 공급원이었다. 오두막은 거친 나뭇가지로 지어져 신선한 공기가 충분히 들어와 편안한 환기가 되었다. 작고 단단한 인디오들의 필요에 맞춰 만든 원시적인 나뭇가지 침대 덕분에 호기심 많은 쿠이들에게 뒤덮이지 않을 수 있었지만, 우아드키냐에 두고 온 우리의 접이식 침대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안내인들은 숲속에서 몇 개의 돌무더기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것은 선사 시대의 어떤 원시 부족이 지었을 타원형이나 원형 오두막의 기초였다.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더 이상의 유적은 찾을 수 없었고, 우리는 셀루마유에서 3일을 보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번째 실망이었다.
우아드키냐로 돌아오자 유락 루미로 가는 길이 “하루 이틀 안에” 준비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동안 우리 주인들은 푸트 교수의 곤충 수집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름 모를 전갈을 가져와 집 뒤편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오렌지 과수원이 “거미의 천국”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의 말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곧바로 열정적인 거미 사냥에 나섰다. 이 우아드키냐 거미들을 하버드 대학교 비교동물학 박물관에서 연구했을 때, 챔벌린 박사는 그 중에서 과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4개의 새로운 속과 19종의 대표 종을 발견했다. 공로상으로 그는 푸트 교수의 이름을 전갈에 붙였다!
마침내 유락 루미(Yurac Rumi)로 가는 길이 완성되었다고 보고받았다. 관리인이 방금 다시 방문하여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보다 낫다”고 선언한 그 유적을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발견의 자부심으로 그가 그 중요성을 과장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보게 될 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벽을 둘러싼 울창한 숲을 치우는 데 몇 시간을 보낸 후 이 유락 루미가 작은 직사각형 잉카 창고 하나의 유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건축을 위한 노력은 전혀 없었다. 벽은 점토를 바른 거친 다듬지 않은 돌로 지어졌다. 건물에는 출입구가 없었지만 작은 창문 몇 개와 집 아래로 이어지는 환기구가 있었다. 창문과 지하 통로로 이어지는 작은 구멍의 상인방은 돌로 만들어졌다. 햇빛이 잘 드는 북쪽이나 양 끝에는 창문이 없었지만 남쪽에 4개의 창문이 있어 옥수수나 감자, 또는 여기에 안전하게 보관된 다른 식량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잉카는 인구 밀집 지역뿐만 아니라 주요 도로의 전략적 지점에도 광범위한 공공 창고 시스템을 유지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락 루미는 살칸타이(Salcantay)와 우아드키냐(Uadquinia) 계곡 사이의 능선 꼭대기에 있으며, 아마도 우일카팜파(Uilcapampa) 지방을 가로지르는 고대 도로 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지만, 관리인이 그랬듯이 이를 오얀타이탐보와 비교하는 것은 별장을 궁전에 비유하거나 쥐를 코끼리에 비유하는 것과 같았다. 두 장소를 실제로 본 사람이 잠시라도 하나가 “다른 것만큼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관리인이 훈련된 관찰자가 아니었고 잉카 건물에 대한 관심도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얀타이탐보의 유적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인상적이어서 가장 무심한 여행자도 그것에 감명을 받고 현지인들 자신도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한다. 관리인의 부정확함의 진짜 이유는 아마도 상대방을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질문자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하는 것은 페루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성이다. 어쨌든 지난 며칠 동안의 교훈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리사라가(Lisaraga)의 발견에 대한 회의론이 만연했던 이유를 이해했다. 마추픽추(Machu Picchu)에 대해 쿠스코(Cuzco)에 떠돌았던 간헐적인 이야기들이 쿠스코 대학의 잉카 문명 유적 방문에 관심이 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거나 조사를 유발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자국민들의 과장 습관과 사실을 정확히 보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우리는 아직 우이티코스(Uiticos)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세뇨라 카르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콜파니(Colpani) 다리를 건너 우루밤바(Urubamba)를 건넜다.
루쿠마요(Lucumayo)와 판티칼라(Panticalla)에서 오는 길을 지나 우루밤바 계곡을 따라 내려가 빌카밤바(Vilcabamba) 강과 만나는 차우이야이(Chauillay) 마을에 도착했다. 두 강은 모두 좁은 협곡을 지나 아래쪽 계곡으로 굉음을 내며 흘러갔다. 차우이야이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멋진 다리가 있었다. 원주민들은 그 다리를 추키차카(Chuquichaca)라고 불렀다. 식물 섬유로 만든 거대한 케이블로 된 옛 현수교의 좁은 통로는 이제 강철과 철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곳에서 1572년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Francisco de Toledo) 부왕이 보낸 군대가 마르틴 우르타도(Martin Hurtado) 장군과 가르시아(Garcia) 대위의 지휘 하에 젊은 잉카의 군대와 맞섰다. 투팍 아마루(Tupac Amaru)의 군대는 짧은 교전 후 패배했고 다리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가르시아 대위는 유명한 곤살로 피사로(Gonzalo Pizarro)가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본 결과 가르시아 대위의 동료인 발타사르 데 오캄포(Baltasar de Ocampo)가 추키차카 다리를 점령한 것이 “왕군에게 작지 않은 중요성을 지닌 조치였다”고 한 말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다리를 재건해야 했다면 스페인군에게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가르시아의 발자취를 따라 빌카밤바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이 지방에서 가장 현명하고 유능한 인물로 알려진 산타 아나(Santa Ana) 농장 주인 페드로 두케(Pedro Duque)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우리의 탐색에 무엇보다 중요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추키차카 다리를 떠나 우루밤바 강을 따라 계속 내려갔다. 강은 열대 과수원과 푸른 사탕수수 밭이 펼쳐진 넓고 비옥한 계곡을 구불구불 흘렀다. 우리는 바나나와 오렌지 숲, 흔들리는 녹색 사탕수수 밭, 부유한 농장주들의 환대가 넘치는 저택, 그리고 이 열대의 “에덴 동산”에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은 인디오들의 오두막을 지나쳤다. 날씨가 덥고 갈증이 나서 큰 오렌지 나무 근처에서 멈추고 인디오 주인에게 10센트어치를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은화를 건네자 그녀는 50개가 넘는 오렌지가 든 자루를 끌어냈다. 우리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만큼만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너무나 놀라고 실망한 듯해서 결국 안장 가방까지 채워야 했다.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우루밤바 강을 건너는 멋진 강철 다리를 건넜고, 번창하는 작은 마을인 주도 키야밤바(Quillabamba)에 도착했다. 주요 거리에는 상품으로 가득 찬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이곳이 페루 고무 산지로 가는 주요 관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1911년 당시 고무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특히 활기찼다. 키야밤바를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가자 예수회가 세운 유명한 산타 아나(Santa Ana) 사탕수수 농장의 긴 회랑이 나타났다. 샤를 비에너(Charles Wiener) 시대 이후 이 길을 지나간 모든 탐험가들이 이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천 가지 우정의 표시”로 환영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환영받았다. 정부 관리들의 귀한 도움과 개인들의 너그러운 환대를 여러 번 받았지만, 산타 아나에서의 환영은 특히 기뻤다.
페드로 두케(Pedro Duque)는 우리가 들어가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대해 가능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콜롬비아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페루에 살았던 그는 옛날 신사였다. 농장 관리와 경제적 발전뿐만 아니라 외부 세계의 지적 흐름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역사-지리 연구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우이티코스(Uiticos)라는 이름은 그에게 생소했지만, 스페인 연대기에서 발췌한 내용을 함께 읽어본 후 그는 우리가 그곳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 우리를 도왔다. 산타 아나는 적도에서 남쪽으로 13도 미만에 위치해 있다. 해발 고도는 고작 2000피트였다. “겨울” 밤은 시원했지만 한낮의 더위는 매우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인은 매우 열정적이어서, 그의 노력 덕분에 이 지역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주민들이 대농장 저택에서 열린 회의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4명의 잉카가 피신했던 마을과 계곡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로페즈 토레스(Lopez Torres) 씨가 살아 있었다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누구보다도 광산과 고무를 많이 탐사했고, 한번은 정글에서 잉카 유적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우이티코스와 추키팔파(Chuquipalpa), 그리고 연대기에 언급된 대부분의 장소에 대해 페드로의 친구들 중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꽤 실망스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 가장 큰 행운으로 페드로의 또 다른 친구인 빌카밤바 계곡의 루크마(Lucma) 마을 부지사 에바리스토 모그로베호(Evaristo Mogrovejo)가 산타 아나에 도착했다. 그의 형제 피오 모그로베호(Pio Mogrovejo)는 1884년 초케키라우(Choqquequirau)에서 묻힌 보물을 찾았던 열정적인 페루인들의 일행 중 한 명이었고 그곳 벽에 이름을 새겼다. 에바리스토 모그로베호는 묻힌 보물을 찾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 파드레 칼란차(Father Calancha)와 가르시아 대위 시대의 사람들이 언급한 장소의 유적을 찾으려는 우리의 욕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루크마에서 모그로베호를 처음 만났다면 그는 의심의 눈초리로 우리를 대하고 우리의 탐색을 전혀 돕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직속 상관인 콘벤시온(Convencion) 주 부지사가 키야밤바 근처 산타 아나에 살고 있었고 페드로의 친구였다. 부지사는 쿠스코(Cuzco) 지사로부터 우리의 사업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에 따라 모그로베호에게 고대 유적을 찾고 역사적 관심이 있는 장소를 확인하는 데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모그로베호는 콘세르비다요크(Conservidayoc)의 야만적인 황야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고 결국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산타 아나에서의 회의 결과에 매우 만족했지만, 우아한 주인의 환대와 매력적인 대화를 떠나기가 아쉬웠다. 우리는 루크마로 바로 가기로 결정했다. 우루밤바 강 남서쪽 도로를 택하고
코카와 아구아르디엔테(aguardiente)의 귀중한 화물을 실은 짐승들이 산타 아나에서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와 쿠스코로 가는 길을 따랐다. 페드로의 열정 덕분에 우리는 훌륭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안데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늦게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일찍 출발했다.
우리는 원래 울창한 숲이었지만 오래전에 개간되어 지금은 관목과 2차 식생으로 덮인 지역을 지나갔다. 길가에서 바위 아래쪽에 붙어있는 많은 수의 육지 달팽이를 발견했다. 하와이 제도에서 자란 나는 어릴 때 고산 계곡의 나무를 선호하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연체동물을 수집하느라 너무 많은 토요일을 보냈기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모으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달팽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건기는 그들의 휴식기인 것 같았다. 몇 주 후 푸트(Foote) 교수와 나는 마라스(Maras)를 지나갔는데, 작은 관목에 붙어 있는 수천 마리의 육지 달팽이를 보고 흥미로워했다. 대부분 흰색이었고 조용히 잠자는 것 같았다. 그들은 휴식 장소에 꽉 달라붙어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촘촘히 모여 있어서 관목의 줄기가 유령같은 모습을 띠었다.
우리의 현재 목표는 빌카밤바 강 계곡이었다. 우리가 알아낸 바로는 오직 한 명의 탐험가만이 우리보다 앞서 갔었다. 바로 저명한 과학자 라이몬디였다. 그의 빌카밤바 지도는 꽤 정확했다. 그는 이곳에 광산과 광물이 있다고 보고했지만, 마라크뇨크(“맷돌을 가진 장소”)의 “버려진 탐푸” 외에는 어떤 유적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발타사르 데 오캄포와 가르시아 대위의 다른 동시대인들의 이야기로 보아 우리가 지금 우이티코스 계곡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우리는 상당한 불확실성을 안고 탐험을 계속했다. 우리가 의심스러워한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방문 전까지 돈 카를로스 로메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페루 역사학자들과 지리학자들은 잉카 망코가 피사로로부터 도망쳤을 때 아푸리막 계곡의 초케키라우에 거주지를 정했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초케키라우라는 말은 “황금의 요람”을 의미하며, 이는 망코가 쿠스코에서 많은 금 도구와 보물을 가지고 도망쳐 새로운 수도에 보관했다는 전설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라이몬디는 망코가 “우일카팜파로 은퇴했다”는 것을 알고 현재의 빌카밤바와 푸키우라 마을을 모두 방문했지만 어떤 유적도 보지 못했다. 그는 초케키라우가 망코의 피난처라고 확신했는데, 이는 푸키우라에서 “2-3일 여정”이라는 칼란차의 요구 조건을 충족할 만큼 푸키우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팔타이밤바의 설탕 농장 주인이 최근에 강둑을 따라 새 길을 만들어 짐승들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게 했다. 그 길의 상당 부분은 단단한 바위 절벽 면을 깎아내어 만들어야 했고, 일부 구간에서는 작은 터널들로 절벽을 뚫고 지나갔다. 내 헌병은 이 길을 놓치고 절벽 위로 난 가파른 옛 길을 택했다. 오캄포가 가르시아 대위의 원정에 대한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오르막길은 좁았고 오른쪽에는 숲이, 왼쪽에는 깊은 협곡이 있었다.” 우리는 해질 무렵 팔타이밤바에 도착했다. 주인인 호세 S. 판코르보는 부재중이었고, 산 미겔 강 정글에 있는 고무 농장 일을 보고 있었다. 팔타이밤바 농장은 빌카밤바 하류 계곡의 최고의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주요 도로에서 벗어나 있어 방문객이 드물었고 우리의 도착은 상당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우리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은 아니었다. 쿠스코에서 푸키우라 근처에서 유적을 발견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확신을 준 사람이 바로 판코르보였고, 그는 관리인에게 우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지시했었다. 우리는 그날 저녁 농장 관리인과 그의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이 지역의 유적에 대해 들은 바가 거의 없었지만, 산타 아나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를 되풀이했다. 정글 어딘가에 “잉카 도시”가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곳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데 동의했고, 그들 중 누구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아침에 관리인은 우리에게 계곡 위쪽의 다음 집으로 가는 안내인을 제공했고, 그 집의 사람이 우리를 다음 집으로 안내하도록 하는 식으로 계속 이어지게 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농장의 소작인들이었고, 자신들에게는 상당한 불편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지시를 따랐다.
팔타이밤바 위쪽의 빌카밤바 계곡은 매우 아름답다. 양쪽에 울창한 정글과 짙은 녹색 잎으로 덮인 높은 산들이 있어, 물결치는 사탕수수 밭의 밝은 녹색과 대조를 이룬다. 계곡은 가파르고 길은 매우 구불구불하며, 7월에도 빌카밤바 급류의 포효가 크게 들린다. 2월 우기에는 어떨지 우리는 상상만 할 수 있었다. 팔타이밤바에서 약 2리그 위쪽, 라이몬디가 “마라크뇨크”라고 부른 “버려진 탐푸” 근처에서 우리는 지금은 우아야라 또는 “오야라”라고 불리는 오래된 석벽 유적을 발견했다. 나는 이것이 오캄포가 언급한 이 지역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 유적이라고 믿는다. 오캄포는 투팍 아마루 군대의 도망자들이 “오야라 계곡으로 돌아와” “큰 마을에 정착했고 스페인인들의 도시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이 도시는 강 근처의 넓은 평원에 세워졌고 기후가 훌륭했다. 강에서 수로를 끌어와 도시에 물을 공급했는데, 물 맛이 매우 좋았다.” 이곳의 물은 정말 훌륭하며, 쿠스코 분지의 어느 물보다 훨씬 좋다. 강 근처의 평지에는 팔타이밤바 농장의 마지막 사탕수수 밭들이 있다. “오야라”는 계곡 위쪽에서 금광이 발견된 후 버려졌고, 스페인 “도시”는 지금 빌카밤바라고 불리는 마을로 옮겨졌다.
우리의 다음 정착지는 루크마였는데, 부지사 모그로베호의 고향이었다. 루크마 마을은 약 30채의 짚으로 지붕을 얹은 오두막들이 불규칙하게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은 산 미겔 계곡의 고무 농장으로 가는 관문 중 하나인 고개 근처에 위치해 있어 적당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여기에는
“휴식의 집” 두 채와 상점 두 곳이 있었는데, 이 지역에서는 유일했다. 면직물과 설탕, 통조림, 양초를 살 수 있었다. 마을 뒤쪽 작은 언덕 위에는 그림 같은 종탑과 오래되고 약간 허름한 작은 교회가 있었다. 평지는 거의 없었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상당한 농사가 가능했다. 광범위한 계단식 경작의 흔적은 없었다. 주요 작물은 옥수수와 알팔파인 것 같았다. 에바리스토 모그로베호는 중요 인사들의 집이 모여 있는 작은 광장에 살았다. 그는 산타 아나에서 이드마를 거쳐 막 돌아왔는데, 우리가 온 길보다 훨씬 더 나쁜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 길을 이용하면 팔타이밤바를 지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팔타이밤바의 주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팔타이밤바의 문에서 여행자들에게 일어났던 불운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 이야기들은 유럽의 봉건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당시 지방 영주들은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부과하곤 했다.
우리는 모그로베호에게 그가 우리를 데려가는 유적지마다 감사의 표시로 1솔(페루 은화)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만약 그 장소에 특별히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면 두 배를 주겠다고 했다. 이는 그의 사업 본능을 자극했다. 그는 알칼데들과 정보를 잘 아는 다른 인디오들을 소환해 인터뷰하게 했다. 그들은 이 근처에 “많은 유적”이 있다고 말했다! 실용적인 사람인 모그로베호는 지금까지 유적에 관심이 없었다. 이제 그는 고대 유적지로 돈을 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관인 키야밤바의 부지사의 명령을 전례 없는 열정으로 수행함으로써 공적을 쌓을 기회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음 날 우리는 루크마 뒤쪽 능선 꼭대기까지 계곡을 따라 안내를 받았다. 이 능선은 상류 빌카밤바와 하류 빌카밤바를 나눈다. 사방으로 산들이 우리보다 수천 피트 높이 솟아 있었다. 곳곳에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주로 구름선 위쪽이었다. 거기서는 매일 습기가 식물의 생장을 돕는다. 완만한 경사의 숲 중 일부에서는 최근의 개간 흔적이 계곡 주민들의 진취성을 보여주었다. 한 시간 정도 등반한 후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잉카 건축물의 유적에 도착했다. 그것은 인공 테라스 위에 있었는데, 팔타이밤바와 추키차카 다리 쪽으로 멀리 내려다보는 멋진 전망을 제공했고, 반대쪽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가르시아 대장의 동시대인들은 투팍 아마루를 포로로 잡기 전에 폭풍처럼 습격해 점령해야 했던 여러 요새나 푸카라에 대해 말한다. 이곳은 아마도 그 “요새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의 전략적 위치와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점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적은 “피트코스의 요새”나 “샘 위의 흰 바위” 근처의 “태양의 집”과는 맞지 않았다. 이곳은 잉카우아라카나라고 불린다. “잉카가 슬링으로 쏘는 곳”이라는 뜻이다.
잉카우아라카나는 두 개의 전형적인 잉카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70 x 20피트 크기의 2개 방이고, 다른 하나는 150 x 11피트의 매우 길고 좁은 건물이다. 점토로 쌓은 다듬지 않은 돌로 된 벽은 특별히 잘 지어지지 않았고 여러 면에서 초케키라우의 유적과 비슷했다. 주요 건물의 방들은 창문이 없지만, 각각 3개의 정면 문이 있고 양쪽에 4-5개의 벽감이 있었다. 길고 좁은 건물은 3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고 여러 개의 정면 문이 있었다. 200명의 인디오 병사들이 이 집들에서 특별히 붐비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음 날 루크마를 떠나 빌카밤바 강을 건넜고 곧 계곡을 따라 위쪽으로 끊김 없는 전망을 얻었다. 높고 꼭대기가 평평한 언덕이 보였는데, 그 꼭대기는 부분적으로 나무와 덤불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고 경사면은 가파르고 바위투성이였다. 우리는 그 언덕의 이름이 “로사스파타”라고 들었다. 이는 현대의 혼종어로, 파타는 케추아어로 “언덕”을 뜻하고 로사스는 스페인어로 “장미들”을 의미한다. 모그로베호는 그의 인디오들이 “장미의 언덕”에 더 많은 유적이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언덕 기슭, 강 건너편에 푸키우라(Puquiura) 마을이 있다. 라이몬디(Raimondi)가 1865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초라한 예배당이 있는 보잘것없는 촌락”에 불과했다. 오늘날 이곳은 더 번창했다. 큰 공립학교가 있어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도 아이들이 온다. 학교가 너무 붐벼서 날씨가 좋으면 아이들은 밖에서 벤치에 앉아 공부한다. 남자아이들은 모두 맨발이고, 여자아이들은 높은 부츠를 신는다. 한번은 그들이 지리 수업을 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 지역 전체에서 최초의 학교가 이곳에 있었는지 여부는 교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1566년 마르코스 수사가 온 곳이 바로 이 “푸키우라”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라이몬디가 경멸했던 “초라한 예배당”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곳이 마르코스 수사의 “푸키우라”라면, 우이티코스(Uiticos)가 근처에 있어야 한다. 그와 디에고 수사가 그들의 유명한 개종자 행렬과 함께 “푸키우라”에서 태양의 집과 우이티코스 “근처에 있는” “흰 바위”까지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우리는 발 다리를 이용해 빌카밤바(Vilcabamba)를 건넜고, 곧바로 잉카 시대의 것이 아닌 오래된 유적을 발견했다. 조사 결과 그것은 상당한 규모로 금을 함유한 석영을 분쇄하기 위한 매우 조잡한 스페인식 분쇄기의 흔적인 것 같았다. 아마도 이곳이 오캄포가 언급한 장소일 것이다. 그는 잉카 티투 쿠시(Titu Cusi)가 자신의 친구 디에고 수사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했다고 말한다. 그 예배당은 “내 집과 내 땅에 있으며, 푸키우라 광산 지구에 있고 쿠스코(Cuzco) 대성당의 전 선창자였던 돈 크리스토발 데 알보르노스(Don Christoval de Albornoz)의 광석 분쇄기 근처에 있다”고 한다.
도표
빌카밤바 계곡의 푸키우라와 로사스파타(Rosaspata) 언덕
분쇄기의 맷돌 중 하나는 지름이 5피트이고 두께가 1피트가 넘었다. 그것은 거대한 평평한 흰 화강암 바위 옆에 놓여 있었는데, 그 바위는 맷돌이 천천히 중공 안에서 회전할 수 있도록 파여 있었다. 또한 매우 큰 인디오식 절구와 공이가 있었는데, 이를 작동시키려면 네 명의 남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절구는 단순히 지면에서 몇 인치 돌출된 큰 바위의 위쪽을 파낸 것이었다. 지름이 4피트인 공이는 잉카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특징적인 흔들 돌 모양이었다.
시간이 오래되어 기억할 수 없는 고원 인디언들의 옥수수나 감자를 으깨는 데 사용되었다. 이 지역에서 다른 스페인의 석영 분쇄 공장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돈 크리스토발 데 알보르노스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제분소 근처에서 틴코차카(Tincochaca) 강이 남동쪽에서 빌카밤바 강과 합류한다. 나는 이 강을 건너 발판다리를 통해 모그로베호(Mogrovejo)를 따라 로사스파타 남쪽 언덕의 안부에 있는 오래되고 매우 황폐한 구조물로 갔다. 그들은 그곳을 웅카팜파(Uncapampa), 또는 잉카팜파(Incapampa)라고 불렀다. 이곳은 아마도 1571년 가르시아 대위와 그의 부하들이 공격한 요새 중 하나일 것이다. 유적은 길이 166피트, 너비 33피트의 단일 건물을 나타낸다. 건물에 칸막이가 있었다면 오래전에 사라졌다. 전면에는 6개의 출입구가 있었고, 끝이나 뒷벽에는 출입구가 없었다. 유적은 루크마(Lucma) 근처의 잉카우아라카나(Incahuaracana)와 비슷했다. 벽은 원래 점토를 바른 거친 돌로 지어졌다. 전체적인 마감은 극도로 거칠었다. 건물 한쪽 끝에 있는 몇 개의 벽감은 불규칙했고, 폭이 약 2피트,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컸다. 아직 남아 있는 건물의 한 모퉁이는 높이가 약 10피트였다. 200명의 잉카 병사들도 이곳에서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웅카팜파를 떠나 안내자들을 따라 나는 능선을 올라가 서쪽을 따라 로사스파타 정상으로 향했다. 무성한 초목에 덮인 원시적인 특성의 유적들을 지나면서 나는 곧 산 정상 근처의 아름다운 팜파에 도착했다. 여기서 보이는 전망은 “우일카팜파(Uilcapampa) 지방의 큰 부분”을 조망한다. 사방으로 매우 광활하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눈 덮인 산들이, 동쪽과 서쪽으로는 깊고 초목이 우거진 계곡들이 있다. 게다가 팜파의 북쪽에는 광활한 평지가 있고 “매우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큰 기술과 예술로 세워져 있으며, 모든 문의 인방, 주요한 것과 일반적인 것 모두”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마침내 우리는 오캄포의 “피트코스(Pitcos) 요새” 묘사의 대부분 요건을 충족하는 장소를 찾았다. 물론 “대리석”은 아니었고 문의 인방도 우리가 생각하는 “조각”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름답게 마감되어 있었고, 흰 화강암은 쉽게 대리석으로 착각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근처에서 칼란차(Calancha)가 말한 우이티코스 “근처”에 있다는 태양신전을 찾을 수 있다면 모든 의심은 사라질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틴코차카에서 모그로베호의 인디언 친구 오두막에 머물렀다. 우리는 평소처럼 질문을 했다. 자주 반복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들었을 때 우리의 기분을 상상해 보라. 그는 인근 계곡에 샘물 위에 큰 하얀 바위가 있다고 말했다! 만약 그의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우리의 우이티코스 탐색은 끝난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것을 매우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제12장
우이티코스 요새와 태양 신전
부왕 톨레도가 35년 동안 스페인의 최고 권력에 저항했던 잉카의 마지막 요새를 정복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투팍 아마루를 생포하는 군인에게 연간 천 달러의 연금을 제안했다. 가르시아 대위는 그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받지 못했다. “내일”의 습관은 이미 필립 2세 시대에 강했다. 그래서 용감한 대위는 필립의 인디아 왕실 평의회에 증언 모음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투팍 아마루에 대한 원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그의 진술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진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잉카들이 요새화한 주요 요새인 와이나푸카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잉카 티투 쿠시의 아들인 필리페 키스페투티오 왕자가 그의 대장들과 병사들과 함께 방어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은 험준한 절벽과 정글로 둘러싸인 높은 고지대에 있어 올라가기가 매우 위험하고 거의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언급한 병사들과 함께 올라가 요새를 점령했지만, 오직 최대한의 노력과 위험을 무릅쓰고서야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일카팜파 지방을 정복했습니다.” 부왕 자신도 와이나푸카라의 고지를 점령한 것은 “1572년 성 세례 요한의 날에” 가르시아 대위의 기술과 용기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장미의 언덕”은 실제로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높은 고지대”이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쪽은 열성적인 공격자들에게 발판을 주지 않도록 매우 신중하게 지어진 훌륭하고 긴 벽으로 보호되어 있다. 웅카팜파의 병영은 그 쪽으로의 공격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덕은 모든 면이 가파르고 소수의 병력으로도 매우 쉽게 방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의심할 여지 없이 “거의 난공불락”이었다. 이것이 가르시아 대위가 가장 기억할 만한 특징이었을 것이다.
백색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지어졌다. 주요 출입구와 일반 출입구의 상인방도 모두 백색 화강암 단일 블록으로 되어 있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8피트나 되었다. 출입구는 우일카팜파의 다른 어떤 유적보다도 뛰어났다. 마추픽추를 제외하면 말이다. 이는 이곳 근처에 살면서 그 모습에 익숙해질 시간이 충분했던 오캄포가 언급한 내용을 입증해준다. 안타깝게도 건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아직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뒷문은 연속된 담을 만들기 위해 돌로 메워져 있었다. 다른 벽들도 경작지에 가축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유적에서 가져온 돌로 쌓아올려져 있었다. 로사스파타는 추운 목초지대와 온대 기후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었다. 추운 목초지대에서는 뿌리작물과 정제된 명아주과 식물이 자라고, 온대 기후에서는 옥수수가 번성한다. 긴 궁전 맞은편 언덕 남쪽에는 단일 구조물의 유적이 있었다. 길이 78피트, 너비 35피트로, 양쪽에 문이 있었지만 벽감이나 정교한 세공의 흔적은 없었다. 아마도 병사들의 막사였을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팜파”는 곤살로 피사로의 분노를 피해 도망쳐 잉카 망코에게 피신한 스페인 난민들이 볼링과 고리던지기 게임을 즐겼던 장소였을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선수 중 한 명이 화를 내고 왕족인 주인을 살해했던 그 치명적인 게임이 벌어졌을 것이다.
1915년 우리 발굴 작업에서는 거친 토기 조각들과 몇 개의 잉카 물레 추, 청동 숄핀, 그리고 다수의 유럽산 철제품이 출토되었다. 철제품들은 심하게 녹슬어 있었는데, 말발굽 못, 버클, 가위 한 쌍, 몇 개의 안장이나 고삐 장식품, 그리고 세 개의 입 하프가 있었다. 처음에는 현대 페루인들이 한때 여기 살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언덕 위까지 모든 물을 길어 날라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게다가 유럽산 유물이 있다고 해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첫째, 우리는 망코가 쿠스코와 리마를 오가는 스페인 여행자들을 습격하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스페인 고삐를 아주 쉽게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음악 기구들은 난민들의 것이었을 수 있다. 그들은 우울한 소리를 내며 망명 생활을 달래고 싶어했을 것이다. 셋째, 잉카의 수행원들은 아마도 쿠스코의 스페인 시장을 방문했을 것이고, 그곳에는 때때로 상당한 양의 유럽산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티투 쿠시에게 가위 두 쌍을 선물로 가져갔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우일카팜파 지방의 다른 중요 유적지 발굴에서 이런 유럽산 유물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유적들이 스페인 정복 이전에 버려졌거나, 아니면 그런 보물을 축적할 수단이 없는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오캄포가 1572년 투팍 아마루가 점령하고 있던 요새에 대해 묘사한 덕분에 이곳이 마지막 잉카의 궁전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형제들인 티투 쿠시와 사이리 투팍, 그리고 그의 아버지 망코의 수도이기도 했을까? 망코의 우이티코스를 식별할 수 있는 세부 사항이 얼마나 적은지 놀랍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고 있다. 그가 쿠스코를 떠나 “안데스 산맥의 먼 요새”로 피신했을 때, 피사로의 군대에는 시에사 데 레온이라는 스페인 병사가 있었다. 그는 흥미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하는 재능이 있었고, 가능한 한 많은 왕족들을 인터뷰하려고 노력했다. 망코에게는 13명의 형제가 있었다. 시에사 데 레온은 망코 자신과 그의 아들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매우 실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이티코스 지방으로 물러났는데, 그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외딴 곳으로 안데스 산맥의 큰 코르디예라 너머에 있다.”라고 한다.
망코 살해의 결과로 죽은 스페인 난민들은 글쓰기를 몰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은 그의 거처를 식별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티투 쿠시는 명확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지만, 그의 영적 조언자가 된 마르코스 수사와 디에고 수사의 활동은 칼란차에 의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칼란차가 “우이티코스 근처 추키팔파라는 마을에 태양의 신전이 있고, 그 안에 샘 위에 흰 돌이 있다”고 언급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안내인은 로사스파타 언덕 근처에 그런 곳이 있다고 말했다.
“장미의 언덕”에 대한 첫 번째 조사를 한 다음날, 나는 유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벌기 위해 유적을 찾는 데 열중한 성급한 모그로베호를 따라 언덕 북동쪽으로 넘어가 로스 안데네스(“계단식 밭”) 계곡으로 갔다. 그곳에는 정말로 커다란 백색 화강암 바위가 있었다. 윗면이 평평했고 북쪽에는 조각된 좌석이나 플랫폼이 있었다. 서쪽에는 여러 개의 벽감이 있는 동굴을 덮고 있었다. 이 동굴은 한쪽이 벽으로 막혀 있었다. 모그로베호와 인디오 안내인이 근처에 마난티알 데 아구아(“물의 샘”)가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매우 흥미롭게 느꼈다. 하지만 조사해보니 그 “샘”은 작은 관개용 수로의 일부에 불과했다. (마난티알은 “샘”을 의미하지만 “흐르는 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위는 “물 위에” 있지 않았다. 이것이 분명 잉카들이 부족의 시조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와카, 즉 신성한 바위 중 하나였고 따라서 조상 숭배의 중요한 부속물이었지만, 우리가 찾고 있던 유락 루미는 아니었다.
그림
유락 루미의 북동쪽 면
바위와 아마도 그 관리 사제의 집이었을 유적을 뒤로 하고, 우리는 작은 수로를 따라 많은 수의 매우 정교하게 지어진 농업용 계단식 밭을 지나갔다. 이는 마추픽추를 떠난 이후 처음 본 것이었고 이 계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안데네스가 매우 드물고 이것들이 특히 주목할 만했기 때문에 이 계곡은 그것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아마도 망코의 지시 하에 지어졌을 것이다. 그 근처에는 여러 개의 조각된 바위, 와카들이 있었다. 하나에는 인티우아타나, 즉 해시계 돌기가 있었다.
바위 위에 자리를 만들었다. 또 다른 바위는 안장 모양으로 깎였다. 계속해서 울창한 숲을 지나 작은 시냇물을 따라가다 보니, 갑자기 뉴스타 이스파나(Ñusta Isppana)라고 불리는 탁 트인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샘물 위로 거대한 하얀 바위가 있었다. 우리의 안내자가 우리를 속이지 않았다. 나무 아래에는 잉카 신전의 유적이 있었고, 거대한 화강암 바위를 부분적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바위의 한쪽 끝은 흐르는 작은 물웅덩이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 지역의 현재 이름이 추키팔타(Chuquipalta)라는 것을 알게 되자 기쁨은 더욱 커졌다.
1911년 8월 9일 오후 늦게 처음 이 놀라운 성지를 보았다.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언덕들이 사방으로 솟아 있었다. 오두막 하나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소리도 거의 없었다. 고대 종교의 신비한 의식을 행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다. 거대한 바위와 그 아래 어두운 웅덩이의 놀라운 모습은 이곳이 예배 장소였음을 증명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곳이 “그 숲이 우거진 산들의 주요 모차데로(Mochatero)”였다. 이곳은 아직도 인근 인디오들에게 신성시되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티투 쿠시(Titu Cusi) 시대에 잉카 사제들이 동쪽을 향해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손을 그쪽으로 뻗어” “입맞춤을 던졌던” “가장 깊은 체념과 경의의 의식”이 행해졌던 장소를 찾았다. 화려한 의식복을 입은 태양 사제들이 바위의 가장 가파른 쪽 가장자리에 서서, 이른 아침의 장밋빛 빛에 얼굴을 밝히며, 위대한 신이 동쪽 언덕 위로 나타나 그들의 경배를 받을 순간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태양이 떠오르면 그들은 인사하며 외쳤다. “오 태양이여! 평화와 안전 속에 있는 당신이여, 우리에게 빛을 비추소서. 우리를 병으로부터 지켜주시고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소서. 오 태양이여! 쿠스코(Cuzco)와 탐푸(Tampu)가 있으라고 말씀하신 당신이여, 이 자녀들이 다른 모든 민족을 정복하게 하소서. 우리는 당신의 자녀들인 잉카들이 항상 정복자가 되기를 간청합니다. 당신이 그들을 이를 위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위 남쪽에는 여러 개의 큰 플랫폼과 4~5개의 작은 좌석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플랫폼을 깎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가장자리는 거의 정사각형이고 수평이며 직선이다. 바위 동쪽은 샘 위로 돌출되어 있다. 물 바로 위에 두 개의 좌석이 새겨져 있다. 북쪽에는 좌석이 없다. 물가 근처에 계단이 새겨져 있는데, 3개짜리 한 세트와 7개짜리 다른 세트가 있다. 그 위로 바위가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깎여 매우 대담한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10개의 돌출된 정사각형 돌이 있는데, 보통 인티우아타나(Intihuatana) 또는 “태양이 묶이는 곳”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다. 7개가 한 줄로 있고, 하나는 다른 6개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나머지 3개는 7개 위에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돌들이 바위의 북동쪽 면에 있어 떠오르는 태양에 노출되고 일출 때 인상적인 그림자를 만든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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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 이스파나의 조각된 좌석과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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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하얀 바위 아래 샘물 근처의 7개 좌석 중 2개
우리의 발굴에서는 어떤 유물도 나오지 않았고, 출처가 불확실한 매우 거친 오래된 도기 파편 몇 개만 발견했다. 바위 아래 흐르는 물은 맑았고 샘물처럼 보였지만, 거대한 바위 북동쪽에 인접한 늪을 배수했을 때 샘이 조금 더 높은 언덕에 있고 물이 어두운 웅덩이를 통해 흐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작은 웅덩이 가장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돌 배수로가 사실은 7~8개의 매우 정교한 돌 좌석 열의 뒷면 상단인 것으로 밝혀졌다.
좌석이 놓인 대(臺)와 좌석 자체는 잘 맞춰진 3~4개의 큰 바위로 만들어졌다. 일부 좌석은 돌출된 바위 아래 검은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이 연못이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좌석들은 아마도 제사장이나 주술사들만 사용했을 것이다. 점을 치기에 훌륭한 장소였을 것이다. 악마들이 “포효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고대 우일카팜파(Uilcapampa) 지역에서 수행한 모든 탐험에서도 “물이 솟는 하얀 바위”와 그 주변에 있는 가능한 “태양의 집” 유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첫째, 누스타 이스파나(Ñusta Isppana)가 칼란차(Calancha) 신부가 말한 유락 루미다(Yurac Rumi)다. 오늘날의 추키팔타(Chuquipalpa)가 그가 추키팔파(Chuquipalpa)라고 언급한 곳이다. 둘째, 이 성지 “근처에” 있었던 우이티코스(Uiticos)는 한때 틴코차카(Tincochaca)와 루크마(Lucma) 사이에 있는 현재의 빌카밤바(Vilcabamba) 계곡의 이름이었다. 이것이 망코(Manco)와 동시대 인물인 시에사 데 레온(Cieza de Leon)이 말한 “비티코스(Viticos)”다. 그는 망코가 피사로(Pizarro)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비티코스 지방으로 후퇴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여러 곳에서 모은 많은 보물과 함께 부인들과 수행원을 데리고 비티코스에 도착한 망코 잉카 왕은 가장 견고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고, 거기서 여러 번 여러 방향으로 출정하여 평온했던 지역들을 교란시켰으며 잔인한 적으로 여겼던 스페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해를 끼쳤다.” 셋째, 시에사가 말한 “가장 견고한 곳”, 가르시아(Garcia)가 말한 와이나푸카(Waynapuca)라는 로사스파타(Rosaspata)였다. 오캄포(Ocampo)는 이곳을 “피트코스(Pitcos)의 요새”라고 언급하며 “웅장한 건물이 있는 평평한 공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두 종류의 문이 있었고 두 종류 모두 하얀 돌로 된 문설주가 있었다는 것이다. 넷째, 빌카밤바 강 계곡에 있는 현대의 마을 푸쿠라(Pucara)가 라이몬디(Raimondi)가 추정했듯이 칼란차 신부의 푸키우라(Puquiura), 이 지역 최초의 선교 교회가 있던 곳이다. 그는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의 무의미함에 실망했지만 말이다. 이미 언급된 틴코차카의 옛 석영 분쇄 공장 유적, “태양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 종교 행렬에 적합한 거리, 그리고 요새 근처에 있는 푸쿠라의 위치 등이 모두 이 결론의 정확성을 뒷받침한다.
마지막으로, 칼란차 신부는 오르티스 수사가 티투 쿠시로부터 우일카팜파에 두 번째 선교 기지를 세울 허가를 받은 후 “많은 다른 작은 마을과 촌락들 사이에 위치한 인구가 많고 잘 자리 잡은 우아란칼라 마을”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까지는 2~3일 거리였다. 푸키우라에 마르코스 수사를 남겨두고 디에고 수사는 새로운 거처로 갔고 짧은 시간 안에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 “우아란칼라”는 없고 그에 대한 전설도 없지만, 해발 약 3,000m의 온대 지역에 있는 마필로라는 아름다운 계곡에 우아란칼케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잉카들이 익숙했던 작물을 재배할 수 있고, 야마와 알파카가 번성할 수 있는 목초지 근처에 있다. 이 계곡은 인구가 많고 많은 작은 마을과 촌락들이 있다. 게다가 우아란칼케는 푸쿠라에서 2~3일 거리에 있으며 이 지역 원주민들이 현재 아야쿠초로 가는 데 사용하는 길에 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망코가 스페인 상단을 습격할 때 사용했던 경로였다. 마필로 강은 팜파스 강 근처에서 아푸리막 강으로 흘러든다. 팜파스 강을 따라 올라가면 1909년 헤이씨와 내가 쿠스코에서 리마로 가는 길에 건넜던 봄봄과 오크로스 사이의 중요한 다리가 있다. 피사로가 세운 아야쿠초 시는 이 다리에서 하루 거리에 있다. 스페인 상단이 이 지점에서 팜파스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망코의 약탈 원정대가 마필로 강을 따라 우아란칼케를 지나 우이티코스에서 갑자기 행군하여 그들에게 도달하기 쉬웠다. 이곳이 아마도 칼란차의 “연대기”에 나오는 “우아란칼라”일 것이다. 그는 아푸리막 강을 건너기 위해 뗏목이나 카누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매우 넓고 깊다. 우아란칼케와 루크마 사이의 계곡에서 망코는 아푸리막 강과 그 웅장한 협곡으로 인해 중부 페루와 단절되었다. 이 협곡은 많은 곳에서 깊이가 2마일이 넘는다. 그는 살칸타이, 소라이 및 인접한 능선의 험준한 눈밭과 빙하로 인해 쿠스코에서 단절되었다. 이 지역은 쿠스코에서 불과 80km 떨어져 있지만 자주 모든 고갯길이 완전히 눈으로 막힌다. 최근 몇 년 동안에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산악 지방에서 망코는 스페인 적들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기후와 추종자들을 위한 풍부한 식량을 찾을 수 있었다. 현대 푸쿠라 마을 주변의 외딴 지역이 한때 우이티코스라고 불렸다는 점을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부지 변경은 주 하나님과 그의 폐하를 위한 봉사, 그리고 왕실 세금의 증가와 해당 도시 주민들에게 유익할 것으로 보였다. 조항들과 이유들을 검토한 후,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부왕]는 도시를 현재 세워진 곳으로 옮길 수 있는 허가를 내렸고, 우일카팜파의 승리의 산 프란시스코 시라는 원래 명칭과 칭호를 갖도록 명령했다. 이 부지 변경으로 나 발타사르 데 오캄포는 주 하나님과 그의 폐하께 큰 봉사를 했다. 나의 관심과 근면, 그리고 간청을 통해 아주 좋은 교회가 주 예배당과 큰 문들과 함께 건설되었다. 우리는 벽이 두껍고 견고하며 잘 버팀목이 되어 있고, 문들이 유난히 크며 전체적으로 “관심과 근면, 그리고 간청”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스페인인들이 이 땅을 처음 발견했을 때 가축 떼를 발견한 온코이”라고 불렸다. 현대 빌카밤바는 가축 떼에 적합한 풀이 무성한 경사지에 있다. 더 가파른 경사지에서는 여전히 감자가 재배되지만, 계곡 자체는 오늘날 거의 전적으로 목초지로 사용된다. 우리는 잉카들이 라마와 알파카를 방목했을 곳에서 말과 소, 양이 풍부한 것을 보았다. 근처 바위 절벽에는 오캄포 시대에 시작된 광산의 흔적이 있다. 이곳이 온코이였다는 데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행정관 집에서 로사스파타 언덕에 한때 잉카가 살았다고 인정한 노인을 만났다. 이 지역의 지적인 농장주들의 호의나 정부 관리들의 관례적인 도움을 통해 인터뷰한 수십 명의 사람들 중 이 인디오만이 그러한 인정을 했다. 그조차도 “우이티코스”나 그 변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우리가 정말로 망코와 그의 아들들의 나라에 있다면, 왜 아무도 그 이름에 익숙하지 않을까?
아마도 결국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고원 지대의 인디오들은 이제 너무 오랫동안 그들의 통치자들에 의해 방치되고, 구매할 수 있는 모든 술을 마시고 코카 잎을 지속적으로 씹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모든 코카인을 동화할 수 있도록 허용됨으로써 야만화되어 인종적 자존심을 거의 또는 완전히 잃어버렸다. 정복된 인종의 혈통뿐만 아니라 정복의 스페인 병사들의 혈통을 추적하는 페루의 주요 현대 도시의 교육받은 메스티소들이 잉카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토착 조상들의 놀라운 문명의 유적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빌카밤바는 쿠스코 시에 사는 사람들조차 대부분에게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마지막 네 명의 잉카의 수도가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기후, 대규모 인구를 지탱할 수 있는 충분한 천연 자원, 그리고 안데스의 대부분 지역보다 교통이 더 어렵지 않은 도로가 있는 지역에 있었다면, 가르시아 대장 시대부터 현재까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메스티소들이 그곳을 차지했을 것이고, 그들은 고대 잉카 수도의 이름과 그와 관련된 전통을 보존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오캄포와 그의 친구들을 끌어들였던 광산이 “고갈되거나” 16세기의 원시적인 도구로는 더 이상 적절한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된 후, 스페인 사람들은 그 먼 지역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푸키우라를 쿠스코 및 문명과 연결하는 거친 길들은 기껏해야 위험하고 어려웠다. 그들은 안데스의 “도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도 일 년 중 상당 기간 동안 실제로 통행이 불가능했다.
우아드키냐와 산타아나 사이에서 사탕수수와 코카를 재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살칸타이와 베로니카 산 근처의 고개를 넘는 어려운 운송에도 불구하고 몇몇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하부 우루밤바 계곡에 살게 했지만, 상부 빌카밤바 계곡을 방문하거나 그곳에 거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판코르보가 루크마로 가는 길을 열기 전까지 푸키우라는 접근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투팍 아마루와 현대 탐험가들의 도착 사이에 9세대의 인디오들이 우일카팜파 지방에서 살고 죽었다. 망코와 그의 아들들 시대에 “장미 언덕”에 지어진 거대한 석조 건물들은 황폐해지도록 방치되었다.
그들의 지붕은 썩어 사라졌다. 한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은 점점 더 적은 토착민들에게만 알려지게 되었다. 인디언들 스스로도 스페인 지주들에게 다양한 요새와 궁전의 이야기를 들려줄 의욕이 없었고, 후자 역시 그런 이야기를 들을 관심이 없었다. 19세기에 들어 역사와 지리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누구도 망코의 수도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빌카밤바에 처음으로 들어간 과학자 라이몬디가 푸키우라에 도착했을 때, 마을 맞은편 언덕 위에 한때 마지막 잉카들이 살았고 그들의 궁전 유적이 여전히 나무와 덩굴에 뒤덮인 채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1598년의 스페인 문서에는 첫 번째 “산 프란시스코 데 라 빅토리아 데 빌카밤바” 마을이 “비티코스 계곡”에 있었다고 한다. 마을의 긴 이름은 빌카밤바로 줄어들었다. 그 후 옆을 흐르는 강도 빌카밤바라 불리게 되어 라이몬디의 지도에 그렇게 표시되었다. 우이티코스는 오래전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게다가 우리가 고지대 목초지에서 야마나 알파카는 보지 못하고 오직 유럽에서 들어온 가축들만 본 것으로 보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지역이 인디언들에 의해 버려졌음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만약 인디언들이 잉카 시대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 계곡들에 살았다면 적어도 몇 마리의 토착 아메리카 낙타과 동물들을 발견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단독으로는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을 수도 있지만, 우이티코스에 대한 전통이 사라진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이 지역에 상당히 오랫동안 중요한 사람들이 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식민지 시대 역사가들은 첫 스페인 정착민들의 광산 작업으로 인해 적어도 백만 명의 인디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전한다. 매우 잔인한 초기 스페인 광부들과 보물 추구자들의 행위로 인해 역사가들이 언급한 그 불행한 이들의 비극적인 죽음의 상당 부분이, 홍역, 수두, 천연두와 같은 일반적인 유럽의 전염병 도입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두 가지 원인이 모두 결과에 기여했을 것이다. 초기 식민지 시대에 인구가 엄청나게 줄어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은 인구는 당연히 우이티코스와 우일카팜파 계곡보다 덜 가혹하고 엄격한 생존 조건과 인간 교류가 있는 지역을 찾았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학자들과 여행자들은 반델리어와 같은 세심한 관찰자를 포함해,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의 안데스 지역 인구가 정복 당시와 비슷하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초기 식민지 광산의 쇠퇴와 그에 따른 열악한 생활 조건과 강제 노동의 사라짐, 또한 유럽 질병에 대한 부분적인 면역력 발달, 그리고 페루 독립 이후 더 편안한 생활 조건이 따라왔기 때문에, 고산지대 인디언들의 수가 증가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러한 증가와 함께 특정 지역의 인구 과밀 현상이 나타났다. 어려운 산길을 이용하더라도 덜 붐비는 지역을 찾으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는 고대 우일카팜파 지방과 같이 멀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점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금광이 더 이상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된 후, 그리고 고무에 대한 수요로 인해 백인들이 산 미겔 계곡을 차지하기 전까지, 푸키우라나 루크마 근처에는 300년 가까이 평범한 인디언 목동보다 더 우수한 교육이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현대 마을들의 어도비 집들은 꽤 현대적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지어졌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론은 우리가 많은 유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지역에 대해 페루에 널리 퍼져 있던 매우 적은 양의 정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지로 인해 페루의 지리학자들인 라이몬디와 파스 솔단은 아푸리막과 우루밤바 사이에서 보고된 유일한 유적인 초케키라우가 그곳으로 피신한 잉카들의 수도였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는 또한 로사스파타와 누스타 이스파나의 존재가 페루의 지리학자들과 역사가들, 심지어 인근 마을의 정부 관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는 우이티코스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카밤바라고 불렸던 모든 장소들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꽤 분명했다. 16세기 작가들의 글을 검토해 보면 그 이름을 가진 장소가 세 곳 있었을 수 있다. 하나는 칼란차가 “빌카밤바 비에호”(“옛”)라고 부른 곳, 또 하나는 오캄포도 그렇게 부른 곳,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세운 세 번째 장소, 즉 우리가 지금 있는 마을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칼란차의 마르코스 수사와 디에고 오르티스 수사의 시련과 순교에 대한 설명에 나온다. 연대기 작가는 수도사들이 이미 푸키우라에 종교 시설을 세운 후에 이 중요한 종교 중심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상당히 자세히 설명한다. 그들은 티투 쿠시에게 그곳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랫동안 그는 거절했다. 그곳의 위치는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종교적 요새로서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그들은 계속 요구했다. 마침내 그들의 집요한 요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든, 아니면 그 여정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든, 그는 그들의 요청에 응하고 여행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칼란차는 잉카 자신이 많은 대장들과 추장들과 함께 두 수사를 동행했다고 말하며, 푸키우라에서 매우 험하고 거친 길을 따라 그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잉카는 로마의 장군들처럼 이 임무에 익숙한 하인들이 편안하게 들고 가는 가마를 타고 가서 길의 특성 때문에 고통받지 않았다. 불운한 선교사들은 걸어가야만 했다. 젖은 바위투성이 길은 곧 그들의 신발을 망가뜨렸다. 길의 특히 나쁜 부분인 “웅가카차”에 이르렀을 때, 그 길은 한동안 물속으로 이어졌다. 수도사들은 물을 건너야만 했다. 물은 매우 차가웠다. 잉카와 그의 추장들은 수도사들이 수도복을 입은 채 물을 건너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내했다. “그곳의
“우일카팜파에 있는 우상숭배 대학교가 있는 가장 큰 도시였고, 거기에는 마법사들과 혐오스러운 것들의 스승들이 살았다.” 장소의 이름으로 판단하면, 우일카팜파의 마법사들과 주술사들은 아마도 우일카 씨앗으로 만든 고대의 강력한 코담배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3일간의 험난한 여정 끝에 수도사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나 티투 쿠시는 그들이 도시에 살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수도사들이 잉카와 그의 대장들, 사제들이 행하는 의식과 고대 의례를 목격하지 못하도록 도시 밖에 거처를 주라고 명령했다.
“빌카밤바 비에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고, 수도사들이 도시를 본 적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3주 동안 그곳 근처에 머물며 설교와 가르침을 계속했다. 머무는 동안 티투 쿠시는 그들을 이곳에 데려오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괴롭히며 복수했다. 그는 특히 그들이 독신 서약을 깨도록 만들고 싶어 했다. 칼란차에 따르면 티투 쿠시는 사제들 및 점쟁이들과 상의한 후, 가장 아름다운 인디오 여성들을 유혹자로 선택했는데, 그중에는 특별히 매력적인 융가스 여성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여성들이 “빌카밤바 비에호”의 “우상숭배 대학교”에 살았던 “태양의 처녀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잉카와 대제사장들의 명령을 받았고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빌카밤바 비에호”가 수도사들이 3주 동안 그 근처에 있으면서도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고 추키팔타의 흰 바위에서 했던 것처럼 그곳의 “혐오스러운 것들”을 설명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것도 분명하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칼란차의 이야기에서 “빌카밤바 비에호”라고 불린 이 빌카밤바가 지금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산의 경사면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오캄포가 “옛 것”이라고 부른 빌카밤바의 유적을 찾는 일을 계속해야 했다. 오캄포는 이를 투팍 아마루 체포 후 자신이 건설을 도운 스페인 마을과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고, 가르시아 대장과 그의 동료들은 전투 기록에서 단순히 빌카밤바라고 언급했다.
제14장
콘세르비다요크
돈 페드로 두케가 칼란차와 오캄포가 언급한 장소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을 때, “빌카밤바 비에호” 또는 옛 우일카팜파에 대한 언급은 그의 정보원 두 명에 의해 콘세르비다요크라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돈 페드로는 1902년에 고무나무를 찾아 정글을 많이 여행한 로페즈 토레스가 그곳에서 잉카 도시의 유적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돈 페드로의 모든 친구들은 콘세르비다요크가 가기 끔찍한 곳이라고 확신시켰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 중 그곳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만적인 인디오들이 살고 있어서 낯선 사람들이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팔타이밤바에 도착했을 때, 판코르보의 관리인은 우리가 들은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는 또한 사베드라라는 사람이 콘세르비다요크에 살고 있으며 분명 유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방문객을 받기를 매우 꺼린다고 말했다. 사베드라의 집을 찾기는 극도로 어려웠다. “최근에 그곳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곳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며칠 후, 푸트 교수와 내가 로사스파타 근처의 유적을 연구하고 있을 때, 판코르보가 산미겔 계곡에 있는 자신의 고무 농장에서 돌아오다가 루크마에서 우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를 찾아 우리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우리가 콘세르비다요크의 유적을 찾으려는 의도를 알고는 그 시도를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베드라가 “많은 인디오들을 통제하고 50명의 하인과 함께 호화롭게 살고 있는 매우 강력한 사람으로, 누구의 방문도 전혀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디오들은 “캄파 부족으로, 매우 야만적이고 극도로 사나웠다. 그들은 독화살을 사용하며 낯선 사람들에게 매우 적대적이다.” 사베드라의 기지 근처에 잉카 유적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인정하면서도, 판코르보는 여전히 우리가 그것들을 찾아보러 가서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간청했다.
이 무렵 우리의 호기심은 완전히 자극되었다. 우리는 정글에 사는 야만 부족들의 습관에 대한 소문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서비스가 고무 채취자들에게 큰 수요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심지어 인디오들이 판코르보를 위해 일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많은 것을 성취하기를 원하는 에너지 넘치고 야심 찬 사람이었고,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했다. 우리는 콘세르비다요크에 산미겔 고무 농장에서 도망친 인디오들이 있을 수 있다고 쉽게 믿을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판코르보의 목숨은 그들의 독화살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아마존 분지 전역에서 고무 채취자들의 요구로 인해 19세기 탐험가들이 무사히 방문했던 부족들이 너무나 야만적이고 복수심에 불타 모든 백인을 보자마자 죽이게 되었다.
푸트 교수와 나는 모든 측면에서 이 문제를 고려했다. 우리는 결국 콘세르비다요크에 잉카 유적이 있다는 구체적인 보고를 감안할 때 친절한 농장주의 조언을 따를 여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는 적어도 그곳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강력한 사베드라와 그의 야만적인 부하들의 적의를 자극하지 않도록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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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유적에 대해 증언하는 키스피 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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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파코나스 강을 건너는 우리의 짐꾼 중 한 명
빌카밤바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주지사인 콘도레는 그의 수석 보좌관과 상의한 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가장 현명한 인디오들을 소환했는데, 그중에는 키스피 쿠시라는 매우 그림 같은 노인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티투 쿠시 시대를 강하게 연상시켰다. 이것이 매우 엄숙한 자리이며 공식적인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그는 모자를 벗었지만 니트 모자는 벗지 않았고, 주변 지역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잉카 투팍 아마루가 한때 로사스파타에 살았다고 말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는 우일카팜파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관리자는 나이 든 사람이었지만, 콘세르비다요크 근처 산속에 유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른 인디오들도 콘도레가 질문을 했다. 몇몇은 콘세르비다요크의 유적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실제로 유적을 보거나 그 주변을 방문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 모두 사베드라의 농장이 “팜파코나스에서 최소 4일간 정글을 힘들게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어떤 지도에도 그런 이름의 마을은 나오지 않았지만, 16세기 문서에는 자주 언급되어 있었다. 1565년경 티투 쿠시를 만나러 온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는 밤바코나스라는 곳에서 티투 쿠시를 만났다고 한다. 그는 잉카가 정글 깊숙한 곳에서 그곳으로 왔다고 말하며, 그에게 앵무새와 땅콩 두 바구니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는 따뜻한 지역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라이몬디의 귀중한 지도 중 이 지역을 담은 대형 지도를 가져왔다. 또한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최근 발행한 남부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 지도도 있었는데, 이는 모든 가용 정보를 종합한 것이었다. 인디오들은 콘세르비다요크가 빌카밤바에서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라이몬디의 지도에는 마을 서쪽의 모든 강이 아푸리막 강의 짧은 지류로 남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는 콘세르비다요크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가 우아드키냐의 신뢰할 만한 관리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만큼이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 한 정보제공자는 잉카 도시를 ‘에스피리투 팜파’, 즉 ‘유령의 평원’이라고 불렀다. 유적이 ‘유령’으로 판명되지는 않을까? 카메라와 철제 줄자를 든 백인들이 도착하면 사라지지는 않을까?
빌카밤바에서는 아무도 유적을 본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5리그쯤 떨어진” 팜파코나스 마을에 콘세르비다요크에 실제로 가본 인디오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 보급품은 줄어들고 있었다. 루크마보다 가까운 곳에는 상점이 없었고, 원주민들에게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친절한 관리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즉시 콘세르비다요크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빌카밤바 계곡을 따라 하루 종일 힘들게 행군한 끝에, 푸트 교수는 평소처럼 능숙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즐겨 마시는 음료를 크게 한 잔씩 마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볼리비아 남부의 대평원을 말을 타고 횡단할 때, 나는 안데스 고원에서 달콤하고 뜨거운 차가 자극제이자 힘을 북돋우는 음료로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디오 아리에로들이 차를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보고 놀랐지만, 슬픈 경험을 통해 찬물보다 차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찬물은 종종 고산병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 뜨거운 차 한 모금을 마시자 경악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맛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표면에 작고 기름진 입자들이 떠 있었다. 더 조사해보니 그날 우리의 아리에로 중 한 명이 짐 꾸러미 위에 등유 통을 올려놓은 것을 알게 되었다. 통에서 새어 나온 등유가 식품 상자로 떨어졌고, 설탕이 든 천 주머니가 기름을 흡수한 것이었다. 보급품의 절반을 버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안데스에서 오래 일할수록 설탕이 더 필요해지고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구할 수가 없었다.
아푸리막 강 자체의 위치는 팜파스 강과 합류하는 지점 근처였다. 우리는 “위대한 이야기꾼”을 헤엄치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우리는 높은 봉우리와 빙하로 둘러싸인 높은 산간 고개 위에 있었다. 이 수수께끼는 1912년 범스테드가 아푸리막과 우루밤바가 누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30마일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마침내 풀렸다. 그의 측량으로 1911년 이전에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1,500평방마일에 달하는 미탐사 지역이 드러났다. 이곳은 남미에서 가장 큰 미기술 빙하 지대 중 하나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곳은 안데스의 주요 도시이자 3세기 이상 대학이 있던 쿠스코(Cuzco)에서 100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우일카팜파가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와 탐험을 거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망코가 자신의 피난처를 얼마나 현명하게 선택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곳은 실로 눈 덮인 봉우리, 미지의 빙하,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협곡의 미로였다.
서쪽을 바라보니 우리 앞에는 깊은 초록빛 계곡과 숲으로 뒤덮인 경사면의 광활한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지도를 보고 아푸리막 유역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팜파코나스의 계곡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팜파코나스는 코시레니의 지류로 우루밤바의 지류 중 하나였다. 우리가 본 것은 아푸리막 유역이 아니라 우루밤바로 흘러들어가는 또 다른 미탐사 지역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다만 콘도레의 말에 따르면 저 아래 몬타냐 어딘가에 사베드라와 그의 야만적인 인디언들의 은신처인 콘세르비다요크가 있다고 했다. 잉카인들이 자신들이 익숙한 기후와 음식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도시를 세웠을 리가 없어 보였다. “길”은 이제 너무나 험해서 우리의 발 디딜 곳 없는 노새들도 간신히 따라올 정도였다. 한번은 오래된 돌계단을 따라 길게 내려가야 해서 말에서 내려야 했다. 마침내 언덕을 돌아 외딴 작은 오두막이 산허리에 걸터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오두막 앞에는 여자 둘이 앉아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그들은 고베르나도르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일을 멈추고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 11시쯤이었고 콘도레와 그의 일행이 전날 밤 이후로 커피 한 잔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그들은 4~5마리의 꿀꿀거리는 쿠이(기니피그)를 잡았다. 보통 산악 인디언들의 오두막 흙바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쿠이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시적인 꼬챙이에 잘 구워지고 기름이 잘 발린 쿠이 구이의 맛있는 냄새가 우리의 식욕을 자극했다.
미국 동부에서는 기니피그를 애완동물이나 실험실 동물로만 여길 뿐, 음식으로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유명한 속담에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돼지고기”는 우리 부엌에 들어온 적이 없다. 이 “돼지”들이 매우 깨끗한 채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참고로 기니피그는 기니에서 온 것도 아니고 돼지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 엘리스 파커 버틀러의 주장과는 달리 말이다! 오히려 토끼나 벨기에산 토끼와 같은 과에 속하며, 수천 년 동안 페루 안데스에서 매우 귀중한 식량으로 여겨져 왔다. 야생종은 자연 서식지에서 쉽게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회갈색을 띤다. 인디언들의 오두막에서 볼 수 있는 가축화된 품종은 얼룩무늬, 검정색, 흰색, 황갈색 등 다양한 색을 띠는데, 수천 년 전 같은 민족에 의해 가축화된 야마만큼이나 서로 색깔이 다르다. 앵글로색슨의 “민속 방식”이 서머 교수의 말대로 우리가 긴 귀를 가진 토끼를 먹고 즐기는 것을 허용하지만, 우리는 짧은 귀를 가진 토끼는 선을 그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먹기 위해 사육되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그들의 연한 살을 맛본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볼리비아의 수도에서 호텔 주방의 재고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내가 매우 배고프지 않았다면 구운 기니피그가 얼마나 맛있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고기는 비둘기 고기와 비슷하다. 동물성 식품 공급이 적고, 닭은 알을 낳기 위해 소중히 여기며, 양은 고기보다는 양모 생산에 더 가치 있는 인디언들에게 버틀러의 주인공이 발견한 대로 “포유류 중 가장 다산”인 맛있는 기니피그는 특별한 행사를 위해 남겨두는 매우 귀중한 식품이다. 북미의 주부가 비상시를 대비해 몇 통의 정어리와 통조림을 준비해 두는 것처럼, 안데스의 자매들도 마찬가지로 살찐 작은 쿠이에 의존한다.
점심 식사 후 콘도레와 모그로베호는 광활한 구릉 지대를 나누어 각자 조용히 외딴 농가를 찾아다니며 짐꾼으로 고용할 사람들을 찾았다. 운 좋게 집주인을 집에서 만나거나 그의 작은 차크라에서 일하는 모습을 발견하면 그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평소 인디언 방식대로 악수를 하기 위해 다가오면, 그의 오른손 바닥에 은화 한 닢을 슬그머니 건네고 이제 그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고 알렸다. 가혹해 보이지만, 이것이 짐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잉카 시대에 인디언들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전혀 받지 않았다. 온정적인 정부가 그들이 적절히 먹고 입을 수 있도록 하고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거나 공식 창고에서 물품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식민지 시대에는 더 탐욕스럽고 덜 온정적인 정부가 이 고대 제도를 악용하여 그들의 노동이 고통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강요했다. 그 후 여러 세대 동안 무심한 지주들은 지역 당국의 지원을 받아 인디언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거나 약속과 임금 계약을 이행하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일을 강요했다. 농노들은 노동을 마친 후에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약속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일단 돈을 받으면 자신들의 관습과 법에 따라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운한 팜파코나스 인디언이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지만, 이 일이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바쁘다”, “농작물을 돌봐야 한다”, “가족이 자신 없이는 못 산다”, “여행할 식량이 부족하다”며 헛되이 변명했다. 콘도레와 모그로베호는 온갖 변명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짐꾼 여섯 명을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해가 지기 전에 우리는 팜파코나스 마을에 도착했다. 해발 3,000미터에 위치한 이 마을은 풀로 덮인 언덕 위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작은 오두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란시스코 데 톨레도 부왕의 군사 고문 중 한 명의 기록에는 팜파코나스를 “높고 추운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정확하다. 그러나 현재의 마을이 가르시아 시대 문서에 언급된 “잉카의 중요한 마을”인 팜파코나스인지는 의문이다. 이 주변에는 유적이 없다. 팜파코나스의 오두막들은 돌과 진흙으로 새로 지어졌고, 지붕은 풀로 덮여 있었다. 이곳에는 튼튼한 산악 인디오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관리나 다른 이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특별한 자유를 누리며, 숲의 가장자리에서 양을 기르고 감자를 재배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마을에 약간의 소동이 있었는데, 전날 밤 재규어나 퓨마가 숲에서 나와 마을의 조랑말 한 마리를 공격해 죽이고 끌고 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을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으로 선정된 구즈만이라는 튼튼하고 체격이 좋은 인디오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콘세르비다요크(Conservidayoc)로 가는 짐꾼 일행의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구즈만은 스페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었지만, 그것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내와 여섯 자녀와 함께 가장 좋은 오두막 중 하나에 살고 있었다. 한쪽 구석의 불은 자주 오두막을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웠다. 오두막은 매우 작았고 창문이 없었다. 한쪽 끝에는 다락이 있어 가족의 보물을 건조하게 보관하고 비교적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방문객들이 앉을 수 있도록 양가죽 더미가 마련되어 있었다. 벽에는 3-4개의 거친 벽감이 있어 선반과 탁자 대신 사용되었다. 잘 다져진 흙바닥은 축축했다. 잡종 개 세 마리와 벼룩이 득실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가 가족과 방문객들과 함께 좁은 공간을 나누어 쓰는 것을 환영받았다. 돼지 열두 마리가 살금살금 들어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꿀꿀거림을 숨기려 했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채찍을 든 소년에 의해 거세게 쫓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돌아왔고, 매번 이전과 같이 쫓겨나며 크게 꽥꽥거렸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즈만과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그는 콘세르비다요크에 가본 적이 있었고 에스피리투 팜파(Espiritu Pampa)에서 직접 유적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마침내 신화적인 ‘유령의 팜파’가 우리 마음속에서 현실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는 다른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이 와드키냐(Wadquiña) 근처에서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보다 더 훌륭한” 유적을 봤다고 말한 것을 상기하며 조심스러워했지만 말이다. 구즈만은 다른 인디오들만큼 콘세르비다요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중 한 명뿐이었다.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우리는 50센트를 주고 살찐 양 한 마리를 샀다. 구즈만은 즉시 여행을 위해 양을 도살했다. 8월이었고 건기의 중간이었지만, 오후 일찍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카라스코 병장이 우리 짐을 실은 동물들과 함께 어둠 속에 도착했지만, 구즈만의 집으로 가는 길을 놓치면서 노새 한 마리가 늪에 빠져 꺼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는 구즈만의 작은 오두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비교적 배수가 잘 되는 잔디밭에 작은 피라미드형 텐트를 치기로 했다. 저녁에 인디오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는 비를 맞으며 편안한 작은 텐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거기서 다양한 꿀꿀거림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없는 동안 큰 암퇘지와 살찐 새끼 돼지 여섯 마리가 구즈만의 난롯가에 편안히 정착하지 못하고 우리 텐트가 산비탈에서 가장 건조한 장소라고 판단했으며, 우리의 담요가 특히 매력적인 침대를 만든다고 결정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작은 문을 통해 원하는 만큼 빨리 나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비와 편안한 담요의 기억으로 인해 돼지들은 주기적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첫 번째 잠에 빠지려고 할 때, 구즈만이 환대의 뜻으로 끓인 수프 두 그릇을 보내왔다. 얼핏 보기에 그것은 다양한 크기의 흰 마카로니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우리 중 한 명이 특히 좋아하는 요리였다. 하얀 속이 빈 원통은 특별히 질겼고, 일반적인 마카로니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구즈만의 아내가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저녁 식사가 주로 양의 내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는 매우 춥고 우울한 밤 내내 쉬지 않고 내렸다. 우리의 텐트는 이전에 한 번도 젖은 적이 없었는데, 심하게 샜다. 바닥만이 완전히 방수가 되는 것 같았다. 날이 밝아올 때 우리는 물웅덩이 속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젖어 있었다. 게다가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상황을 논의하며 아침 식사로 무엇을 요리해야 할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 성실한 구즈만이 우리 목소리를 듣고 즉시 뜨거운 수프 두 그릇을 더 보내왔다. 이번에는 풍성한 옥수수, 콩, 감자 사이에서 양의 이빨과 턱뼈 조각들을 예기치 않게 발견했지만, 이전보다 더 환영받았다. 팜파코나스(Pampaconas)에서는 분명히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콘세르비다요크로 일찍 출발하고 싶었지만, 인디오들이 10일간의 여정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 구즈만의 아내와, 내 생각에 우리 다른 짐꾼들의 아내들도, 아침 내내 평평한 돌절구에 흔들리는 돌 절구공이로 추뇨(chuño, 얼린 감자)를 갈고 테라코타 올라에서 많은 양의 달콤한 옥수수를 볶거나 구웠다. 추뇨와 토스타도(tostado, 구운 옥수수), 양고기, 그리고 소량의 코카(coca) 잎만 있으면 인디오들은 완벽하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의 식량은 너무 적어서 나눠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인디오들이 오랫동안 익숙해진 음식만큼 그것들을 좋아했을지는 의문이다.
정오쯤,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인디오 짐꾼들이 도착했고 비도 조금 그쳐서 우리는 콘세르비다요크(Conservidayoc)를 향해 출발했다. 우리는 이날의 여정에는 노새를 이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첫 번째 목적지인 산 페르난도는 “7리그” 떨어져 있었고, 정글 깊숙이 있었다.
울창한 팜파코나스(Pampaconas) 계곡을 지나갔다. 마을을 떠나 구즈만의 오두막 뒤쪽 산을 올랐고, 위험하고 불안정한 길을 따라 능선을 걸었다. 비 때문에 길은 더 나빠졌다. 안장 노새들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거의 모든 구간을 걸어야 했다. 차가운 비와 안개 때문에 아래로 펼쳐진 깊은 협곡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이제 우리는 매우 가파른 지그재그 길을 따라 구름을 뚫고 4천 피트 아래의 뜨거운 열대 계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구름 아래에서 우리는 작은 버려진 숲 터를 발견했다. 그곳을 지나 작은 개울들을 건너며 매우 좁은 길을 따라갔다. 가파른 경사면에는 옥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또 다른 작은 숲 터와 극도로 원시적인 두 개의 작은 오두막에 도착했다. 오두막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단순한 피난처였다. 이곳이 산 페르난도였고, 노새길의 끝이었다. 6명의 짐꾼들이 들어갈 공간도 거의 없었다. 텐트를 칠 장소를 찾아 정리하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텐트 바닥은 7평방피트에 불과했지만, 정말로 평평한 땅은 전혀 없었다.
1911년 8월 13일 오후 8시 30분, 텐트 안 바닥에 누워 있을 때 지진을 느꼈다. 근처 피난처에 있던 인디오들도 지진을 느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연약한 구조물 밖으로 뛰쳐나와 큰 소동을 일으키며 ‘템블로르’가 일어났다고 소리쳤다. 그날 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작은 짚 지붕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다고 해도 그들은 위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산간 마을의 석조 벽과 붉은 기와 지붕에 익숙해져 있어서 매우 흥분했다. 나에게는 그 움직임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3-4초 동안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리며 8-10번 진동했다. 몇 주 후 우아드키냐(Huadquinia) 근처에서 우리는 우연히 콜파니(Colpani) 전신소에 들렀다. 전신기사는 8월 13일에 두 번의 지진을 느꼈다고 했다. 하나는 오후 5시경으로, 책상 위의 책들을 떨어뜨리고 남북 방향의 벽을 따라 서 있던 애자 상자를 넘어뜨렸다고 했다. 그는 내가 느낀 지진이 둘 중 약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밤새 비가 심하게 내렸지만, 우리 텐트는 이제 ‘건기’에 적응하고 있어서 더 편안했다. 게다가 해발 10,000피트에서 캠핑하는 것은 6,000피트에서 캠핑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 고도는 마추픽추 아래 산 미겔(San Miguel) 다리와 비슷한데, 온대 지역의 끝과 열대 지역의 시작점이다. 사탕수수, 고추, 바나나, 그라나디야가 옥수수, 호박, 고구마와 함께 자란다. 이런 것들은 팜파코나스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그 추운 지역에서 양과 흰 감자를 기르는 인디오들은 차크라 또는 작은 숲 터를 만들기 위해 산 페르난도에 온다. 여기서 만난 3-4명의 원주민들은 다음날 아침 은화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밤사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놋쇠 단추를 보고 놀랐다! 우리는 산 페르난도에서 노새를 팜파코나스로 돌려보내면서 헌병 한 명을 함께 보냈다. 우리의 짐꾼들은 각각 약 50파운드를 들 수 있었다.
30분 걸어가자 비스타 알레그레(Vista Alegre)라는 또 다른 작은 숲 터가 나왔다. 강 굽이에 있는 충적 선상지였다. 토양이 매우 비옥해 보였다. 차크라에서는 18피트 높이의 옥수수 줄기를 보았는데, 마토팔로(mato-palo) 또는 기생 무화과나무에 거의 완전히 둘러싸인 거대한 나무 옆에 있었다. 이 숲 터는 분명 이름값을 하는데, 초록빛 팜파코나스 계곡의 ‘멋진 전망’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맞은편에는 숲이 우거진 산이 가파르게 솟아올랐고, 정상은 1마일 위 구름 속에 가려져 있었다. 이 산을 우회하기 위해 강은 서쪽으로 흐르다가 점차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는 다시 혼란스러웠다. 라이몬디(Raimondi)의 지도에 따르면 강은 남쪽으로 흘러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짙은 정글로 들어갔고, 좁은 길은 짐꾼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바위 위를 기어오르고, 나뭇가지 아래로 지나가고, 미끄러운 작은 절벽을 따라가며, 흙이나 바위에 파인 계단을 밟으며, 심지어 개들도 도움 없이는 따라올 수 없는 길을 천천히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더위와 습기, 그리고 잦은 소나기 때문에 오후가 되어서야 파카이파타(Pacaypata)라는 또 다른 작은 숲 터에 도착했다. 강에서 거의 1,000피트 위 언덕 중턱에 있는 6피트 길이, 5피트 너비의 아주 작은 피난처에서 우리 일행은 밤을 보내기로 했다. 푸트(Foote) 교수와 나는 텐트를 칠 수 있도록 가파른 언덕에 선반을 파내야 했다.
다음날 아침, 노새 행렬의 변덕스러운 움직임에 얽매이지 않고 일찍 출발할 수 있었다. 팜파코나스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계곡을 가로질러 희미한 작은 길을 따라갔다. 몇 번의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지나야 했다. 짐꾼들은 더위에 지쳐 짐을 나르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두 번이나 원시적인 다리를 건너 강의 급류를 건넜다. 다리는 미끄러운 바위 위에 놓인 몇 개의 작은 통나무를 묶어 만든 것이었다.
오후 1시쯤 우리는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평지(해발 4500피트)에 도착했다. 양치식물, 덩굴, 엉킨 덤불로 가득해 몇 피트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구즈만은 우리에게 잠시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야만인들의 영토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베드라의 통치만 인정하고 모든 침입을 거부했다. 구즈만은 특별히 두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리 짐꾼 중 한 명을 앞서 보내 야만인들에게 우리가 우호적인 임무로 왔으며 고무 채취꾼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도망쳐 정글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야만인들의 도움 없이는 유적을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가도록 선택된 짐꾼은 그 임무를 즐기지 않았다. 짐을 뒤에 두고 매우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길을 따라 나아갔고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 흥미진진한 30분이 이어졌다. 우리는 야만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궁금해하며 기다렸고, 야만적인 사치 속에 앉아있다고 묘사되던 강력한 실력자 사베드라를 상상해보려 했다.
“50명의 하인들에 둘러싸여” 우리가 “유령의 팜파”에 있는 잉카 도시를 방문하고자 하는 욕망을 좌절시키라고 그의 부하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우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달려오는 사람의 소리에 놀랐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본능적으로 소총을 조금 더 꽉 잡았다. 그때 숲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호감 가는 젊은 페루인이 급히 달려나왔다. 그는 사베드라의 아들로,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환영 인사를 전하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급히 왔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니 우리를 해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독화살이 뚫을 수 없는 숲에서 날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짐을 챙겨 정글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숲은 점점 더 높아지고 깊어지고 어두워졌다. 마침내 앞쪽에서 햇빛이 보이더니 놀랍게도 푸르른 사탕수수밭이 펼쳐졌다. 사탕수수밭을 지나 몇 분 걸어가자 커다란 편안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사베드라 본인이 아주 소박하고 겸손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이보다 더 즐겁고 평화로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의 50명의 야만적인 하인들을 찾아 몰래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그의 선량한 인디오 아내와 세네 명의 어린 아이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가정부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야만인인 듯했다. 사베드라는 이곳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아서 “헤수스 마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사베드라가 자신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환영한다고 말하며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고 초대했을 때 우리의 감정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삶은 닭고기와 쌀, 달콤한 카사바(마니옥)로 차려진 풍성한 식사를 대접받았다. 사베드라는 유적을 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유적은 에스피리투 팜파에 있는 것 같았는데, 계곡 아래쪽으로 더 내려가야 했고 맨발의 야만인들만 다닐 수 있는 험한 길을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가려면 꽤 긴 거리를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야 할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리의 짐꾼들이 이 길을 정리하는 동안 푸트 교수는 나방과 나비 8종을 포함해 많은 곤충을 채집했다.
나는 사베드라의 농장을 둘러보았다. 수 세기 동안 휴경 상태였던 토양은 부식질이 풍부해 그가 압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탕수수를 생산했다. 이 외에도 바나나, 커피나무, 고구마, 담배, 땅콩을 재배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인디오를 통제하는 아주 강력한 족장” – 일종의 “푸 바”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개척자일 뿐이었다. 완전한 황무지에서, 이웃과 멀리 떨어져 울창한 숲과 몇몇 야만인들에 둘러싸여 그는 자신의 집을 세웠다. 그는 인디오 족장이 아니라 단지 개척자일 뿐이었다. 부드러운 말투에 활기찬 페루인으로, 손재주 있는 목수이자 기계공이었고 가장 훌륭한 유형의 겸손한 페루인이었다.
경작 가능한 토지가 부족해서 그는 찾을 수 있는 팜파를 경작해야 했다. 하나는 집 근처의 충적 선상지였고, 다른 하나는 강 근처의 자연 단구였다. 집 뒤에는 지붕이 있는 대피소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 작은 설탕 공장을 지었다. 한 쌍의 튼튼한 나무 롤러가 있었는데, 각각 거칠게 다듬은 목재로 만든 큰 소박한 바퀴로 돌릴 수 있었다. 바퀴는 나무 못으로 고정되고 가죽끈으로 묶여 있었으며, 손과 발로 작동했다. 사베드라는 콘세르비다요크로 짐승을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한된 힘과 활동적인 아들의 힘, 그리고 설탕이나 장신구, 기타 교역품을 위해 일하고 싶어 하는 야만인들의 불확실하고 불규칙적인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때때로 야만인들은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큰 삐걱거리는 바퀴를 타고 노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다른 때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공장 근처에는 사베드라가 즙을 끓이고 조악한 설탕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흥미로운 큰 항아리들이 있었다. 그는 정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항아리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것들은 잉카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네 개는 익숙한 아리발루스 유형이었다. 다른 하나는 밀접하게 연관된 형태로, 넓은 입구, 뾰족한 밑바닥, 어깨에 붙은 단일 음각의 관습화된 동물 머리 돌기, 그리고 중간선 아래에 수직으로 붙은 띠 모양의 손잡이가 있었다. 10갤런 이상을 담을 수 있는 이 거대한 항아리는 손잡이를 통과하고 돌기 주변을 감싸는 밧줄을 이용해 등과 어깨에 메고 운반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베드라는 집 근처에서 돌을 안쪽에 깔고 맨 위에 평평한 돌을 올린 병 모양의 무덤을 몇 개 발견했다고 말했다. 분명히 고대 무덤이었다. 뼈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 무덤의 뚜껑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위에는 얇은 은판이 덮여 있었다. 그는 또한 몇 개의 석기와 두세 개의 작은 청동 잉카 도끼를 발견했다.
사베드라는 집 아래 팜파에 무한한 노력을 들여 또 다른 설탕 공장을 지었다. 그가 두 개의 공장을 만드느라 고생한 것이 이상해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짐승이 없고 보통 자신과 아들의 등으로 익은 사탕수수를 공장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사탕수수가 자라는 동안 사탕수수밭 근처에 새 공장을 짓는 것이 익은 사탕수수를 무거운 다발로 언덕 위로 옮기는 것보다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녀들을 쿠스코(Cuzco)의 학교에 보내고 세금을 내기 위한 돈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말했다. 현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찬카카, 즉 조악한 갈색 설탕을 만들어 한 번에 50파운드씩 등에 지고 팜파코나스나 빌카밤바까지 3일간의 고된 도보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곳은 그의 작은 농장에서 6000-7000피트 위에 있었다. 그는 보통 그런 짐을 5솔, 즉 2달러 50센트에 팔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분명 힘들었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정글이 너무 빨리 자라고 강의 홍수가 그의 작은 소박한 다리들을 계속 쓸어가 버려 길을 열어두기가 매우 어렵다고 미소 지으며 인정했다. 그의 주된 유감은 최근의 혁명으로 인해 정부가 모든 총기를 압수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숲에서 신선한 고기를 얻는 데 필요한 유일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거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더러운 튜닉을 입고 있었다. 튜닉은 거칠게 짠 면 천 한 장으로 만들어졌고, 머리를 넣을 구멍이 가운데 있었다. 옆면은 팔을 넣을 구멍을 남기고 꿰매져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길고 헝클어져 엉켜 있었다. 그는 작고 움푹 들어간 눈, 야윈 볼, 두꺼운 입술, 그리고 큰 입을 가지고 있었다. 엄지발가락은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물건을 잡을 수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거친 섬유로 만든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고, 목에는 12개의 굵은 끈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나무를 오를 때 이 튼튼한 고리를 사용해 발목을 함께 묶어 발로 더 단단히 잡을 수 있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이 되자 두 명의 야만인이 더 들어왔다. 한 명은 젊은 기혼 남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어린 여동생이었다. 둘 다 심한 감기에 걸려 있었다. 사베드라는 그들이 캄파 족의 한 분파인 피찬게라스라고 말했다. 사베드라와 그의 아들은 그들의 언어를 조금 말할 수 있었는데, 우리의 익숙하지 않은 귀에는 낮은 으르렁거림, 숨소리, 목구멍 소리의 연속처럼 들렸다. 손짓으로 보충되었다. 남자들이 입은 긴 튜닉은 그들이 한 명 이상의 아내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냈다. 결혼하기 전에는 매우 허름한 옷차림을 했다. 한쪽 어깨에 걸친 몇 개의 누더기와 허리에 묶은 정도였다. 긴 튜닉은 추운 밤에 입기에 충분히 편안한 옷이었고, 그들의 유일한 옷이었지만, 정글에서의 이동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부분적으로 사냥으로 살아갔다. 우리는 이 피찬게라스가 아래 계곡의 고무 지역에서 도망쳐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고도 4500피트에서 불편할 정도로 추웠지만, 고무 농장에서의 농노 생활보다는 더 높은 계곡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선호했다.
사베드라는 자신의 농장 이름을 콘세르비다요크라고 지었다고 말했다. “해로운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아무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실력자의 거처였다.
제15장
유령의 팜파
이틀 뒤 우리는 사베드라의 아들과 우리 팜파코나스 인디언들이 개척한 길을 따라 콘세르비다요크를 떠나 에스피리투 팜파로 향했다. 우리는 계곡이 잘 내려다보이는 곶 근처의 수풀에서 나왔다. 특히 바로 아래에 있는 울창한 삼각주 지형이 잘 보였다. 그곳에는 두세 개의 작은 개간지와 에스피리투 팜파, 즉 “유령들의 팜파”에 사는 야만인들의 작은 타원형 오두막들이 있었다.
곶 꼭대기에는 작은 직사각형 건물의 유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잉카의 감시탑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에스피리투 팜파까지 우리 길은 폭 약 4피트, 길이 거의 1/3마일의 고대 돌 계단을 따라갔다. 계단은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어졌다. 아마도 곶 꼭대기에서 감시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던 병사들이 여가 시간에 만든 것일 수 있다. 우리는 폭우가 시작될 때 주요 개간지에 도착했다. 오두막들은 비어 있었다. 분명 그 거주자들은 우리가 오는 것을 보고 정글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초대 없이 야만인의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했지만, 폭우가 우리의 망설임을 압도했다. 오두막은 가파른 경사의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옆면은 작은 통나무를 땅에 박아 만들었고, 덩굴로 묶여 있었다. 바닥에는 작은 불이 타고 있었다. 불씨 근처에는 잉카 시대의 오래된 검은 올라 두 개가 있었다.
작은 밭에는 카사바, 코카, 고구마가 불에 탄 나무 그루터기 사이에서 무질서하게 자라고 있었다. 전형적인 밀파 농장이었다. 개간지에는 불규칙한 무리를 이루며 배치된 18-20개의 원형 집 유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로페즈 토레스가 보고한 “잉카 도시”인지 궁금했다. 유적들 사이에서 우리는 잉카 도자기 조각 몇 개를 주웠다. 건물에는 잉카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다. 하나는 직사각형이었고, 하나는 삽 모양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원형이었다. 건물들의 지름은 15-20피트였다. 각각 하나의 출입구만 있었다. 벽들은 무너져 있었지만, 주의 깊게 지어졌다는 증거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 야만인들이 아직 개간하지 않은 숲에서 우리는 다른 원형 벽들을 발견했다. 벽들은 아직 약 4피트 높이로 서 있었다. 야만인들이 우리 방문 이후 밀파 개간을 확장했다면, 쓰러지는 나무들이 이제 이 벽들을 망가뜨렸을 것이다. 고대 마을은 아마도 잉카에 충성을 맹세한 부족의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들의 건축 양식은 잉카인들이 직접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는 “유령들의 팜파”가 정말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는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이 삼각주 지형은 이 끔찍하게 가파른 언덕들의 나라에서 매우 귀중했을 것이다. 수세기 동안 간헐적으로 거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잉카 도시”가 아니었다.
우리는 잉카인들이 이곳에 살았는지 궁금해했다. 그때 갑자기 튼튼한 체격의 젊은 야만인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단단한 활과 긴 화살을 들고 있었고, 대나무로 만든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냥을 하던 중이었고 우리에게 자신이 잡은 새를 보여주었다. 곧이어 우리가 사베드라의 집에서 만났던 두 명의 성인 야만인들이 사시눈을 가진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긴 튜닉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유적지로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30분 동안 정글을 헤치고 나아가자 팜파코나스의 작은 지류 강둑에 있는 자연 평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을 에롬보니라고 불렀다. 우리는 그곳에서 여러 개의 오래된 인공 테라스와 길이 192피트, 너비 24피트의 긴 직사각형 건물의 거친 기초를 발견했다. 그 건물에는 24개의 문이 있었을 것이다. 앞면에 12개, 뒷면에 12개씩 각각 3.5피트 너비로 되어 있었다. 상인방은 보이지 않았다. 벽은 1피트 높이밖에 되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건축 자재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이 구조물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근처에는 3개의 돌 물받이가 있는 전형적인 잉카 분수가 있었다. 물 운반인들의 집합 장소에서 200야드 떨어진 곳에 덩굴과 빽빽한 수풀로 가려져 있어 어느 방향으로도 몇 피트 이상 볼 수 없는 곳에서, 야만인들은 우리에게 벽이 아직도 좋은 상태로 남아있는 돌집 무리의 유적을 보여주었다.
건물 중 하나는 한쪽 끝이 둥근 형태였다. 작은 팜파의 남쪽 끝에 홀로 서 있는 다른 건물은 문도 창문도 없었다. 그것은 직사각형이었다. 4~5개의 벽감은 독특하게 불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2피트 깊이로, 특이한 크기였다. 아마도 이곳은 창고였을 것이다. 팜파의 동쪽에는 길이 120피트, 너비 21피트의 구조물이 있었는데, 크기가 다른 5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벽은 거친 돌을 진흙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오얀타이탐보에 있는 일부 잉카 건물들처럼, 문의 상인방은 3~4개의 좁은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몇몇 방에는 벽감이 있었다. 팜파의 북쪽에는 또 다른 직사각형 건물이 있었다. 서쪽에는 돌로 만든 테라스의 가장자리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돌 물받이와 돌로 된 물통이 있는 부분적으로 둘러싸인 분수나 욕실이 있었다. 집들의 형태, 전반적인 배치, 벽감, 돌로 된 지붕 못, 상인방 등 모든 것이 잉카 건축자들의 작품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건물들에서 여러 개의 잉카 도기 조각을 주웠다.
똑같이 흥미롭고 매우 당혹스러운 것은 6개의 조악한 스페인식 지붕 타일이었다. 그것들은 붉은색으로 구워져 있었다.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조각들을 합쳐도 4제곱피트를 덮지 못할 정도였다. 마치 누군가가 실험을 해본 것처럼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아마도 쿠스코의 새로운 붉은 기와 지붕을 본 잉카인이 여기 정글에서 그것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해질 무렵 우리는 모두 에스피리투 팜파로 돌아왔다. 우리의 얼굴과 손, 옷은 정글에 의해 찢겨져 있었고, 발은 피곤하고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작업은 매우 만족스러웠고 우리는 좋은 밤의 휴식을 취할 준비를 했다. 아아, 우리는 실망할 운명이었다. 낮 동안 누군가가 8마리의 길들인 시끄러운 앵무새를 오두막으로 가져왔다. 게다가 우리의 야만인 조수들은 밤을 울부짖음과 북소리로 소란스럽게 만들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아마도 적대적인 인디언들이나 재규어의 방문을 막거나, 백인들이 가져온 악마를 쫓아내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틀림없이 근처 정글에 숨어 있을 그들의 가족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었다.
이 계곡에서 발견된 가장 특징적인 잉카 유적의 중요한 발견에 고무되어 우리는 탐험을 계속했다. 하지만 누구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개울 위에 조심스럽게 지어진 돌다리뿐이었다. 사베드라의 아들은 야만인들에게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들은 다른 유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에스피리투 팜파와 에롬보니 팜파의 돌 건물들은 누가 지었을까? 이곳이 칼란차 신부가 말한 “우상 숭배의 대학”이었을까? 그곳에는 “마법사이자 혐오의 스승들”이 살았고, 마르코스 수사와 디에고 수사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왔던 곳이었다. 이 길에 웅가카차라는 곳이 있어서 수도사들이 물을 건너야 했고, 그들이 물속에서 수도복을 다루는 방식으로 티투 쿠시를 즐겁게 했던 곳이 있었을까? 그들은 그것을 “험한 지역을 3일간 여행하는 거리”라고 불렀다. 칼란차 신부의 또 다른 언급은 푸키우라가 “빌카밤바에서 두 번의 긴 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에스피리투 팜파에서 푸키우라까지 5일이 걸렸지만, 짐을 지지 않고 필요에 의해 추진된 인디언들은 3일 만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다른 세부사항들을 이 지역에 맞출 수 있지만, 웅가카차라는 이름의 장소는 길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사제들과 처녀들(우상 숭배의 대학의 구성원들)이 망코와 함께 추운 쿠스코에서 도망쳐 와서 우일카팜파의 요새 어딘가에 정착했을 때, 그들이 에스피리투 팜파의 뜨거운 계곡에 살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기후 차이는 스코틀랜드와 이집트, 또는 뉴욕과 아바나의 차이만큼 크다. 그들은 에스피리투 팜파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지방의 다른 여러 곳, 특히 마추픽추에서 그들이 갈망하던 은둔과 안전을 쿠스코의 것과 더 비슷한 시원하고 상쾌한 기후와 함께, 그들이 익숙한 음식과 더 비슷한 것들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익숙해했던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칼란차는 “옛 빌카밤바”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고 말하는데, 이는 마추픽추나 심지어 초케키라우보다는 에스피리투 팜파에 더 적합한 표현이다.
반면에 몬타냐에 있는 에스피리투 팜파가 가르시아 대장의 동료들이 빌카밤바라고 부른 곳의 요건을 충족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이곳을 마지막 잉카인 투팍 아마루가 우이티코스의 “젊은 요새”를 잃은 후 도망쳐 온 마을과 계곡이라고 말한다. 오캄포는 분명 자신의 수도인 스페인 빌카밤바 마을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어서 투팍의 피난처를 “옛 빌카밤바”라고 불렀다. 오캄포의 새로운 “빌카밤바”는 마르코스 수사와 디에고 수사가 이 지방에 살았을 때는 존재하지 않았다. 칼란차가 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연대기를 썼다면, “옛”이라는 표현은 에스피리투 팜파가 아니라 오캄포가 알고 있던 두 곳보다 더 오래된 빌카밤바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유적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지어졌어야 할 만한 종류가 아니라 후기 잉카 양식이다. 미완성 건물은 티투 쿠시 통치 후반기에 건설 중이었을 수 있다. 티투 쿠시는 로드리게스 데 피게로아를 팜파코나스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잉카는 분명히 몬타냐 아래쪽의 빌카밤바에서 왔고, 앞서 언급했듯이 로드리게스에게 앵무새 한 마리와 땅콩 두 바구니를 선물로 가져왔는데, 이는 지금도 콘세르비다요크에서 흔한 교역품이다. 에스피리투 팜파의 유적이 이 잉카의 가장 좋아하는 거처 중 하나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실상 그가 소년 시절을 보내고 1565년 로드리게스를 만나러 떠났던 바로 그 빌카밤바인 것 같다.
1572년 가르시아 대장이 빌카밤바에서 승리한 후 투팍 아마루를 추격했을 때, 잉카는 “시마폰테 계곡 쪽 내륙으로 … 호전적이고 우호적인 부족인 마냐리에스 인디언들의 땅으로 도망쳤고, 그곳에는 그를 구하고 도망갈 수 있게 해줄 발사와 카누가 대기하고 있었다.” 현재 이 지역에는 우리가 알아낸 바로는 시마폰테라는 이름의 계곡이 없다. 마냐리에스 인디언들은 우루밤바 강 하류에 살았다고 한다. 투팍 아마루는 그들의 땅에 가기 위해 에스피리투 팜파에서 팜파코나스 강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귀신들의 평원”에서 카누를 탈 수 있는 곳까지는 짧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를 탈출시켜준 친구들은 분명 카누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가르시아 대장은 투팍 아마루 추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글이나 강의 위험에 굴하지 않고 다섯 개의 뗏목을 만들어 일부 병사들을 태우고 자신도 함께 급류를 따라 내려갔다. 여러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수영으로 벗어나며 모모리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잉카가 그의 접근 소식을 듣고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르시아는 굴하지 않고 그를 뒤쫓았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이제 맨발로 걸어야 했고, 강에서 대부분의 식량을 잃어 먹을 것이 거의 없었지만 결국 투팍과 그의 친구들을 잡았다. 백인에게는 힘들고 잉카에게는 치명적이었던 끔찍한 추격의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나는 지금 팜파코나스 강을 따라 우루밤바 강과의 합류 지점까지 갈 수 없다는 게 매우 아쉬웠다. 팜파코나스 강이 시리알로나 코리베니로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었다. 보먼 박사의 카누꾼들은 이 두 강이 빌카밤바 산맥에서 발원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1915년 여름이 되어서야 우리는 팜파코나스가 실제로 코시레니의 한 지류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코시레니가 한때 “시마폰테”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콤베르시아토가 “모모리”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투팍 아마루와 가르시아 대장의 발자취를 다음으로 따라간 사람들은 헬러, 포드, 메이나드였다. 그들은 불쾌한 요소들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곤충들과 엄청난 양의 개미들에게 시달렸다. 나무 줄기에서 발견되는 작은 빨간 개미와 땅의 나뭇잎 사이에서 자주 보이는 약 2.5cm 길이의 큰 검은 개미였다. 빨간 개미에 물리면 15분 정도 따끔거리고 화끈거렸다. 검은 개미에 발을 물린 짐꾼 한 명은 몇 시간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발뿐만 아니라 다리와 엉덩이까지 영향을 받았다. 야만인들은 어부이자 사냥꾼이었다.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활과 화살로 사냥감을 죽였다. 페카리는 길목 근처에 야자잎으로 만든 은신처에서 쏘았다. 낚시는 별로 성과가 없었다. 인디언 셋이 밤새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는 약 1.8kg짜리 농어 한 마리뿐이었다.
기온이 너무 높아 양초를 쉽게 구부릴 수 있을 정도였다. 과도한 습도로 모든 가죽 제품에 푸른 곰팡이가 피었다. 파리와 모기 떼로 인해 전염성 정글 열병이 퍼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헬러는 우루밤바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 1리그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콤베르시아토 강에 도달했다. 콤베르시아토 강의 하류는 카누로 항해하기에 위험하다고 여겨지지 않지만, 계곡은 코시레니보다 훨씬 좁다. 강 폭은 약 45m이고 유량은 코시레니의 두 배다. 기후는 매우 힘들다. 밤에도 덥다. 곤충들이 들끓는다. 헬러는 “숲이 성가시지만 쏘지는 않는 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 얼굴에 집요하게 달라붙으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콤베르시아토 강둑에서 그는 여러 야만인 가족을 만났다. 모든 남자들이 열렬한 사냥꾼이자 어부였다. 그들의 무기는 작은 야자나무 목재로 만든 강력한 활과 갈대로 만들어 나선형으로 배열된 깃털로 마감한 긴 화살이었다.
원숭이가 풍부했다. 여섯 가지 다른 속의 표본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크고 붉은 짖는원숭이, 매우 기민하고 놀라면 놀라운 속도로 나뭇가지 사이를 날듯이 달아나는 거대한 검은 거미원숭이, 그리고 양털원숭이가 포함되었다.
검은색이며 매우 지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야만인들이 자주 길들이는데, 그들은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을 즐기지만 식량이 부족할 때는 먹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원숭이 고기는 이 인디오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음식으로, 당장 필요한 양 이상은 나무 불 위에서 훈제해 보관한다.”
코시레니에서 메이나드는 안내원 중 한 명이 나뭇잎으로 싼 꾸러미를 들고 있는 것을 봤다. 열어보니 40-50마리의 큰 무모 유충이나 애벌레가 들어 있었다. 그 남자는 결국 머리를 물어뜯고 몸통은 작은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유충은 야만인들에게 큰 별미라고 했다.
에스피리투 팜파에서 만난 캄파족은 하류 계곡에서 본 사람들과 매우 닮았다. 우리가 만난 모든 야만인은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맨발이었다. 그들은 정글의 그늘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샌들이나 신발은 미끄러운 작은 길을 다니기에 오히려 불편했을 뿐이다. 그들은 약 10년 동안 이 계곡에 낯선 사람이 들어온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처음에는 아내와 아이들을 잘 숨겼다. 나중에 헨드릭슨과 터커가 에스피리투 팜파의 천문학적 위치를 확인하러 왔을 때, 야만인들은 터커가 가족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허락했다. 아마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도망가 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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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리투 팜파의 캄파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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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피리투 팜파의 캄파 여자들과 아이들
모든 남자와 나이 든 소년들은 대나무로 만든 흰색 머리띠를 했다. 기혼 남성들은 얼굴에 페인트를 칠했고, 그중 한 명은 캄파족 특유의 입술 장식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 중 일부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두 명의 아내는 남자들처럼 긴 튜닉을 입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정말 야만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고 페인트를 칠했다. 그녀는 머리띠를 하지 않았고 가장 좋은 튜닉을 입었으며, 씨앗과 화려한 깃털을 가진 작은 새의 가죽으로 만든 아름다운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는 무한한 노력과 적지 않은 화살을 요구했을 예술 작품이었다. 모든 여성은 어깨에 걸친 작은 해먹에 아기를 안고 있었다. 6살도 안 되어 보이는 한 어린 소녀는 등에 2살짜리 아이를 해먹에 넣어 머리에 턱끈을 걸어 메고 있었다. 정글 인디오들은 거의 항상 턱끈을 사용해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내들 중 한 명은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얗고 스페인 조상이 있었을 것 같았다. 가장 야만적으로 보이는 여자는 매우 허술하게 옷을 입고 있었고, 씨앗 목걸이와 흰색 입술 장식을 하고 있었으며, 허리에 몇 개의 누더기를 묶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아이들은 벌거벗었다. 아름다운 목걸이를 한 여자의 아이들은 오래된 튜닉 조각을 입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분명 엄마의 총애를 받는 아이로 새 가죽과 원숭이 이빨로 만든 목걸이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투팍 아마루가 빌카밤바에서 도망쳤을 때 피신했다. 그가 아마존 인디언들이 즐기지만 고산지대 사람들은 먹지 않는 원숭이 고기 같은 음식을 먹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가르실라소는 투팍 아마루가 “굶어 죽느니 차라리 스페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고 말한다. 그의 인디오 동맹군들은 원숭이가 풍부한 지역에서 완벽하게 잘 살았다. 그들이 투팍에게 익숙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면 가르시아 대장이 잉카를 포획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조사 결과는 이 계곡이 마지막 잉카들의 영역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짐꾼들은 팜파코나스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원숭이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었지만, 야만인들을 두려워했고 그들이 언젠가 강력한 활과 긴 화살로 무엇을 할지 불안해했다.
콘세르비다요크에서 사베드라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위해 설탕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단단한 나무 통나무 옆면을 따라 일렬로 파낸 긴 사각형 틀에 시럽을 부었다. 그의 아들은 몇몇 틀에 잘 볶은 땅콩 한 줌씩을 넣었다. 결과물은 우리가 귀환 여정에서 크게 즐긴 과자나 ‘비상 식량’이었다.
산 페르난도에서 짐을 실은 노새들을 만났다. 다음날 계속되는 폭우 속에서 팜파코나스의 추운 고지대로 올라갔다. 우리는 땀에 흠뻑 젖고 비에 흠뻑 젖었다. 마을 위로 눈이 내렸다. 이가 덜덜 떨렸다. 푸트 교수는 즉시 구즈만 부인의 불을 징발해 우리의 주전자를 올렸다. 구즈만의 오두막에 이보다 더 비참하고 춥고 젖고 지친 일행이 도착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확실히 그 뜨겁고 달콤한 차만큼 맛있는 것은 없었다.
페루 고대 유물에 대한 연구가 최근 하버드 대학의 P. A. 민스에 의해 핵루이트 협회를 위해 번역되었는데, 그는 우리에게 파차쿠티 6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을 가지고 “탐푸토코”로 도망쳤다고 전한다. 역사가에 따르면 이곳은 동굴이 있는 “건강한 장소”로, 그들은 그 동굴에 아마우타의 시신을 숨겼다. 그들의 도시 중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쿠스코는 약탈당했다. 고대 제국 전체에 걸쳐 전반적인 무정부 상태가 만연했다. 평화와 풍요의 좋은 시절은 침략자들 앞에서 사라졌다. 옛 제국의 영광은 파괴되어 수세기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이러한 암흑기는 게르만 민족의 이주와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의 중세 시대와 유사했다. 페루는 수많은 작은 독립 단위로 분열되었다. 각 지역은 자체적으로 통치자를 선출하고 이웃을 약탈했다. 이의 영향은 고립된 안데스 계곡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작은 요새들의 유적에서 여전히 볼 수 있다.
몬테시노스는 아마우타들에게 가장 충성스러웠던 이들의 수가 적어 적들에게 성공적으로 맞서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 중 일부, 아마도 주요 사제들과 현명한 자들, 그리고 옛 정권의 지도자들이 “탐푸토코”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우타들의 기억을 간직하며 살았고,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방식으로 살아 독립 지도자들 또는 “강도 귀족들”의 폭정과 만연한 혼란과 무질서를 피해 안전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조금씩 끌어들였다. 그들은 새로운 수도에서 티티 트루아만 키초를 왕으로 선출했다.
옛 정권의 생존자들은 탐푸토코에서의 삶을 즐겼는데, 그곳에는 지진이나 역병, 떨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명이 그들의 새로운 젊은 왕 티티 트루아만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그가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은 그를 매우 신성한 장소, 즉 파차쿠티 6세의 시신을 숨긴 동굴에 묻을 수 있었다.
운명은 새로운 왕국의 설립자들에게 친절했다. 그들은 방해받지 않는 훌륭한 피난처를 선택했다. 탐푸토코의 왕과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수세기 동안 기록할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여러 왕들이 위대한 아마우타들이 통치했던 고대 쿠스코에 자리를 잡고 싶어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야망을 포기해야 했다.
탐푸토코의 가장 계몽된 통치자 중 한 명은 투팍 카우리 또는 파차쿠티 7세라 불리는 왕이었다. 그의 시대에 사람들은 나무 잎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고원의 여러 지역에 사신을 보내 부족들에게 우상과 동물 숭배를 중단하고, 아마우타들의 몰락 이후 생겨난 악습을 그만두고, 조상들의 방식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했다. 그는 거의 격려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대사들은 살해되었고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개혁 시도의 실패에 실망하고 그 원인을 알고 싶어 한 투팍 카우리는 점쟁이들로부터 신들을 가장 불쾌하게 한 것은 글쓰기의 발명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사형의 벌로 누구든 글쓰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명령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 고대인들은 다시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키푸, 즉 끈과 매듭을 사용했다. 신들이 달래졌다고 여겨졌고, 모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누구도 페루인들이 인종으로서 가장 중대한 발걸음을 내딛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기이하고 흥미로운 전통은 스페인 정복 수세기 전에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시각적 증거가 없다. 회의론자들은 이를 잉카 혈통을 가진 이들의 허영심에 호소하기 위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모계 조상들을 유럽인들이 존경하기를 바라며 그에 맞춰 책을 쓴 혼혈 가르실라소가 아닌, 순수 스페인 혈통의 신중한 조사관 몬테시노스의 글에 나온다. 사실, 섬너의 “민속습관”을 연구한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진실해 보인다. 어떤 젊은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똑똑해서 매끄럽고 넓은 잎에 긁어 표기하는 상형문자 체계를 개발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탐푸토코의 보수적인 사제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신입 사제들에게 구두로 전해진 귀중한 비밀들이 공공의 것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발명은 너무나 유용해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 후 매우 불운한 사건이 일어났다. 대사들이 살해되고 왕의 계획이 실패했다. 새로 발견된 상형문자가 그 책임을 지게 된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지 않았겠는가? 결과적으로 탐푸토코의 왕은 사제들의 선동으로 이 새로운 것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것의 유용성은 아직 확고히 자리 잡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불편했다. 잎들은 시들고, 말라 갈라지거나 날아가 버려 글들이 사라졌다. 새로운 발명이 조금 더 오래 존속했다면 누군가가 바위에 상형문자를 긁어 새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들과 사제들은 공물과 세금의 중요한 기록을 키푸로 충분히 잘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각 끈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인 이들의 “직업”이 보장되었다. 결국 몬테시노스의 이야기에는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다. 스페인 역사 자체만 봐도 왕실의 편협함과 사제들의 편협함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종종 짓밟고 위대한 국가들이 중요한 진보를 이루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카리탐푸 근처 마우칼락타의 최고의 잉카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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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카리탐푸 근처 푸마 우르코의 동굴들
탐푸토코에 대해 스페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쿠스코에서 남쪽으로 8~10마일 떨어진 파카리탐푸라는 작은 마을에 있거나 그 근처에 있다고 들었다. 그 주변에는 유적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을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마일 떨어진 마우칼락타라는 잉카 마을의 유적이다. 그 근처에서 나는 여러 개의 바위와 큰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 언덕을 발견했는데, 그중 하나의 표면은 플랫폼과 두 마리의 잠자는 퓨마로 조각되어 있다. 이곳을 푸마 우르코라고 부른다. 바위 아래에는 몇 개의 동굴이 있다. 최근에 정치적 망명자들이 사용했다고 들었다. 동굴과 파카리탐푸 근처 유적의 특징에는 초기 스페인 사람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색채를 더할 만한 것들이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푸토코는 쿠스코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고 그쪽에서 오는 공격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더 잘 방어되는 곳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파차쿠티 6세의 무너진 군대의 남은 병사들이 그곳에 피신하여 남쪽에서 온 호전적인 침략자들 앞에서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었을까? 몇 명의 사람들은 푸마 우르코의 동굴에 숨을 수 있었겠지만, 파카리탐푸는 자연적인 요새가 아니다. 주변 지역은 접근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와 쿠스코 분지 사이에는 절벽이 없다. 아마우타의 수도를 점령한 침략군에 대항할 만한 자연적인 방어물이 없다. 게다가, 탐푸는 “임시 거처” 또는 “여관” 또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개량된 땅” 또는 “농장”을 의미한다. 토코는 “창문”을 의미한다. 파카리탐푸 근처 마우칼락타에 오래된 여관이 있지만, 건물에는 “창문 여관” 또는 “창문으로 유명한 임시 거처” (또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이라는 이름을 정당화할 만한 창문이 없다. 살카마이우아가 묘사한 망코 카팍의 출생지 기념물인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석조 벽”에 해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탐푸토코”라는 단어는 내가 찾아본 어떤 지도에도 나오지 않으며, 파스 솔단이 편찬한 방대한 페루 지명 사전에도 없다.
7월 24일 아침은 차가운 이슬비와 함께 밝아왔다. 아르테아가는 떨며 오두막에 머물고 싶어 했다. 유적을 보여주면 후하게 보상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망설이며 비 오는 날 오르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일당의 3-4배인 1솔을 주겠다고 하자 마침내 우리를 안내하기로 동의했다. 아무도 특별히 흥미로운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카라스코 하사와 함께 10시에 출발해 상류로 얼마간 갔다. 가는 길에 최근에 죽은 독사를 보았다. 이 지역은 ‘독사’의 서식지로 악명 높다. 노란 독사 또는 창살뱀으로 알려진 매우 독성이 강한 뱀으로, 먹이를 쫓을 때 상당한 거리를 뛸 수 있다. 나중에 우리 노새 두 마리가 뱀에 물려 죽었다.
45분 정도 걸은 후 안내인은 본 길에서 벗어나 정글을 지나 강가로 내려갔다. 여기에는 원시적인 ‘다리’가 있었는데, 강의 가장 좁은 곳에서 포효하는 급류를 가로질러 두 개의 큰 바위 사이를 연결했다. 다리는 6개의 매우 가는 통나무로 만들어졌고, 일부는 바위 사이의 거리를 다 가로지르지 못해 덩굴로 이어 묶어놓았다. 아르테아가와 카라스코는 신발을 벗고 발가락으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건넜다. 급류에 빠지면 즉시 화강암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15cm씩 건넜다. 반대편에 도착한 후에도 상류에서 폭우라도 내리면 이 ‘다리’는 어떻게 될지 걱정되었다. 밤사이 비가 조금 내렸고, 강물이 불어 다리는 이미 거품이 이는 급류에 위협받고 있었다. 비가 조금만 더 내려도 다리가 완전히 떠내려갈 것 같았다. 낮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나면 매우 곤란할 것이다. 실제로 며칠 후 그런 일이 일어났고, 다음 탐험대가 이곳에서 강을 건너려 했을 때는 가는 통나무 하나만 남아있었다.
강을 떠나 울창한 정글을 뚫고 가파른 경사면 아래에 도착했다. 1시간 20분 동안 힘든 등반을 했다. 대부분의 거리를 네 발로 기어 올랐고, 때로는 손끝으로 매달려야 했다. 여기저기에 거칠게 다듬은 작은 나무 줄기로 만든 원시적인 사다리가 있어 통과하기 힘든 절벽을 올라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다른 곳에서는 미끄러운 풀로 덮인 경사면에서 손잡이나 발판을 찾기 힘들었다. 안내인은 이곳에 뱀이 많다고 말했다. 습도가 높고 더위가 심했으며, 우리는 체력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작은 풀 지붕의 오두막에 도착했다. 우리의 예상치 못한 도착에 즐거워하는 친절한 인디오들이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 담긴 물통으로 우리를 환영했다. 그리고 쿠마라라고 부르는 삶은 고구마를 내놓았다. 쿡 씨가 지적한 대로 이는 폴리네시아어 쿠말라와 동일한 케추아어다.
시원한 쉼터에서 협곡의 멋진 전망 외에 볼 수 있는 것은 작은 풀 오두막 두 채와 몇 개의 고대 석조 계단식 밭뿐이었다. 리차르테와 알바레스라는 두 명의 친절한 인디오 농부가 이 독수리 둥지 같은 곳을 집으로 삼았다. 그들은 여기에 작물을 재배할 계단식 밭이 충분하고 원치 않는 방문객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했지만, 카라스코 하사를 통해 ‘조금 더 가면’ 유적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그런 정보가 믿을 만한지 알 수 없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각주를 모든 전언에 달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크게 흥분하지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더위는 여전히 심했고, 인디오의 샘물은 시원하고 맛있었으며, 내가 도착하자마자 부드러운 양모 판초로 덮어준 소박한 나무 의자는 매우 편안해 보였다. 게다가 전망이 정말 매혹적이었다. 아래로 우루밤바의 하얀 급류까지 거대한 녹색 절벽이 떨어졌다. 바로 앞 계곡 북쪽으로는 600m 높이의 거대한 화강암 절벽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와이나 픽추의 외로운 봉우리가 보였고, 주변은 접근 불가능해 보이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이 바위 절벽이었다. 그 너머로 구름 낀 산들이 우리보다 수천 피트 위로 솟아있었다.
인디오들은 외부 세계로 가는 길이 두 개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이미 경험한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어렵다고 했다. 능선 반대편 바위 절벽 아래로 난 위험한 길이었다. 우기에 우리가 건넌 다리를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들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들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다.
건물들이었다. 한때 성채로 작은 개울을 끌어들였던 고대 수로는 오래전에 숲 속으로 사라졌고, 위쪽 계단식 밭에서 쓸려 내려온 흙으로 메워졌다. 그래서 인디오들은 이제 폐허의 보호를 포기하고 자신들이 설계한 초라한 초가집에서 샘물 근처에서 사는 편리함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석재로 만든 계단식 밭과 올란타이탐보(Ollantaytambo)와 토론토이 사이 길에서 여러 곳에서 마주쳤던 두세 채의 석조 가옥 폐허 외에는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거라는 기대 없이, 마침내 시원한 그늘의 아담한 오두막을 떠나 능선을 더 올라가 작은 곶을 돌았다. 아르테아가는 “여기 한 번 와본 적이 있다”며 오두막에서 리차르테와 알바레즈와 함께 쉬면서 수다를 떨기로 했다. 그들은 어린 소년을 안내자로 나와 함께 보냈다.
우리가 곶을 돌자마자 석조 건축물의 특성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각각 길이가 200야드, 높이가 10피트인 아름답게 축조된 계단식 밭들이 최근에 인디오들에 의해 정글에서 구출되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대형 나무들을 베어 태워 개간했다. 이 계단식 밭들을 지나 손대지 않은 숲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아름다운 화강암 가옥들의 미로에 들어섰다! 그것들은 나무와 이끼, 수세기의 성장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짙은 그늘 속에서 대나무 숲과 얽힌 덩굴 사이로 여기저기 하얀 화강암 벽돌로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정교하게 맞춰진 벽들이 보였다. 창문이 있는 건물들이 자주 있었다. 적어도 여기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창문이 두드러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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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의 동굴 내부를 손전등으로 비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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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탐푸토코의 추정 위치로 제안한 마추픽추의 동굴 위 신전
조각된 바위 아래에서 어린 소년이 나에게 아름답게 다듬어진 돌로 안을 댄 동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분명히 왕실 묘소로 의도된 것이었다. 이 특별한 바위 위에 반원형 건물이 지어졌다. 벽은 바위의 자연스러운 굴곡을 따랐고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석공 기술의 예 중 하나로 바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순수한 흰색 화강암의 정교하게 맞춰진 벽돌로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벽은, 특히 고운 결을 위해 선별된 것으로 대가의 작품이었다. 벽의 내부 표면에는 벽감과 사각형 돌못이 있었다. 외부 표면은 완벽하게 단순하고 장식이 없었다. 특히 큰 벽돌로 된 아래쪽 부분은 견고해 보였다. 위쪽으로 갈수록 크기가 줄어드는 상단 부분은 구조물에 우아함과 섬세함을 더했다. 흐르는 듯한 선, 벽돌의 대칭적 배열, 그리고 점진적인 단의 배열이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효과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구세계의 대리석 신전보다 더 부드럽고 더 즐거운 것이었다. 모르타르가 없어서 돌 사이에 추한 틈이 없었다. 마치 함께 자란 것 같았다.
이 순수하고 장식 없는 표면의 포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은 내 생각에 직선자, 수준기, 또는 직각자를 모르는 석공장의 눈 아래에서 지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정밀 도구가 없어서 눈에 의존해야 했다. 그는 좋은 눈, 예술적인 눈, 대칭과 형태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기계적이고 수학적 정확성의 거칠음을 전혀 받지 않았다. 겉보기에 직사각형인 블록들은 실제로는 직사각형이 아니다. 겉보기에 직선인 단의 선들은 실제로는 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서 직선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벽과 그 옆의 동굴 위 반원형 신전이 쿠스코(Cuzco)의 유명한 태양신전의 최고의 석공 기술만큼이나 뛰어난 것을 보았다. 놀라움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큰 화강암 블록으로 만든 멋진 큰 계단을 올라갔고, 인디오들이 작은 채소밭을 가꾸고 있는 평지를 따라 걸어가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여기에는 내가 페루에서 본 것 중 가장 뛰어난 두 건물의 폐허가 있었다. 그것들은 아름다운 결의 흰 화강암 블록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벽에는 사이클롭스 크기의 벽돌, 즉 길이가 10피트이고 사람보다 높은 벽돌이 있었다. 그 광경에 나는 숨이 막혔다.
각 건물에는 벽이 세 개뿐이었고 공터 쪽으로 완전히 열려 있었다. 주 신전에는 각 끝에 다섯 개씩, 뒷벽에 일곱 개의 아름답게 만들어진 벽감이 높이 있었다. 끝 벽에는 일곱 단의 벽돌이 있었다. 일곱 개의 뒤쪽 벽감 아래에는 14피트 길이의 직사각형 블록이 있었는데, 아마도 제단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지붕이 있었던 것 같지 않았다. 아름답게 매끄러운 맨 위 단의 벽돌은 덮이지 않도록 의도된 것 같았다.
다른 신전은 평지의 동쪽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세 창문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이웃 건물과 마찬가지로 잉카 유적 중에서 독특했다. 성채를 내려다보는 동쪽 벽은 세 개의 눈에 띄게 큰 창문을 위한 거대한 돌 틀이었다. 이 창문들은 분명히 실용적 목적으로는 너무 컸지만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매우 주의 깊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의식용 건물이었다. 내가 아는 한 페루의 다른 어디에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석조 벽”으로 눈에 띄는 비슷한 구조물은 없다.
이 유적들은 위치한 산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다. 만약 이곳이 쿠스코나 올란타이탐보처럼 끊임없이 사람이 살았다면, 마추픽추는 고대 이름을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버려져 있던 동안 그 이름은 사라졌다. 조사 결과 이곳은 기본적으로 요새화된 장소, 자연적인 방어 시설로 보호된 외딴 요새였다. 사람들이 안데스에서 가장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기 위해 이곳을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진행된 발굴과 1912년의 정리 작업(이는 후속 권에서 설명될 것이다)은 이곳이 우일카팜파의 주요 장소였음을 보여주었다.
1911년 7월의 비 오는 날, 카라스코 경사와 내가 처음 마추픽추를 본 모습만으로도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가장 특별하고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인디오들이 옥수수밭을 위해 능선을 부분적으로 정리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이 빽빽한 정글 식생 아래에 있었다. 일부 벽은 실제로 지름이 10~12인치나 되는 나무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확히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헨드릭슨을 돕고 있던 터커 씨와 강 아래로 내려갔던 라니우스 씨를 찾는 대로
보우만 박사와 함께 우루밤바에서 유적의 지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코로푸나 등반을 위해 터커가 10월 1일까지는 아레키파에 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리차르테와 알바레즈의 열정적인 도움으로 측량사들은 내 예상보다 더 좋은 성과를 냈다. 유적에 머무른 10일 동안 터커가 나중에 지도를 만들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했고, 이 지도는 내가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 유적지의 중요성과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더 잘 보여주었다.
광산 탐사자를 제외하고는 쿠스코의 누구도 마추픽추 유적을 본 적이 없었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얼마나 놀라운 장소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매년 2000피트 아래 협곡을 따라 난 도로를 지나는 우루밤바 계곡 저지대의 농장주들 중 누구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쿠스코에서 3일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이 요새가 여행자들에 의해 이렇게 오랫동안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정복자들이 이 놀라운 장소를 본 적이 있다면 분명 언급했을 텐데, 마추픽추 유적을 명확히 언급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처음 본 시기는 불확실하다. 1834년 사르티게스 백작이 우아드키냐에 있을 때 유적을 찾고 있었지만, 가까이 있었음에도 이곳에 대해 듣지 못했다. 가장 훌륭한 건물 중 하나의 벽에 있는 조잡한 낙서를 통해 1902년 산 미겔 다리 바로 아래 땅의 임차인인 리사라가가 유적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현지 기록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보다 훨씬 전에 마추픽추를 방문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1875년 프랑스 탐험가 샤를 비에너가 오얀타이탐보에서 “와이나 픽추 또는 마초 픽추”에 유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토론토이 협곡을 지나는 도로가 없었고 판티칼라 고개와 루쿠마요 계곡을 통해 멀리 우회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경로는 그를 마추픽추에서 25마일 아래 추키차카 다리의 우루밤바 강으로 데려갔다.
1890년이 되어서야 페루 정부는 우루밤바 저지대를 개척하는 진취적인 농장주들의 요구를 인식하고 강을 따라 대협곡을 통과하는 노새길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우아드키냐, 마라누라, 산타 아나에서 생산되는 귀중한 코카와 아구아르디엔테를 라이몬디, 드 사르티게스 등이 생생하게 묘사한 베로니카 산과 살칸타이 산의 위험한 눈 덮인 고개를 넘지 않고도 더 빠르고 저렴하게 쿠스코로 운반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도로는 매우 비쌌고, 건설에 수년이 걸렸으며, 여전히 잦은 보수가 필요했다. 사실 오늘날에도 엄청난 눈사태가 발생한 후에는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통행이 중단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 도로 덕분에 멜초르 아르테아가는 만도르 팜파의 경작 가능한 땅 근처에 오두막을 지어 가족을 위한 식량을 재배하고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간단한 숙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 새 도로 덕분에 리차르테, 알바레즈와 그들의 진취적인 친구들이 이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 들어와 수세기 동안 묵혀 있던 마추픽추의 고대 계단식 밭을 경작할 기회를 얻었고, 절벽을 넘는 통행 가능한 길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우리가 유적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새 도로 덕분에 1911년 우리는 오얀타이탐보와 우아드키냐 사이의 처녀지를 탐험할 수 있었고, 잉카인들이나 그 선조들이 한때 이곳 안데스의 외딴 요새에 살았으며 스페인의 페루 정복 이후 발견된 어떤 것보다 더 흥미롭고 광범위한 고대 문명의 석조 증거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연대기 작가들이 전통적인 탐푸토코의 위치로 지목한 곳은 앞서 언급했듯이 쿠스코에서 남서쪽으로 약 9마일 떨어진 파카리탐푸다. 파카리탐푸에는 흥미로운 유적과 동굴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동굴 입구가 셋 이상이고 건물에는 창문이 없다. 반면 마추픽추의 건물들은 페루의 다른 중요 유적들보다 훨씬 더 많은 창문을 가지고 있다. 파카리탐푸의 기후는 대부분의 고산 지역과 마찬가지로 창문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혹독하다. 마추픽추의 기후는 온화해서 창문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쾌적했다.
내가 아는 한, 페루에는 여기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례적 성격의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석조 벽”이 있는 유적이 마추픽추를 제외하고는 없다. 성채 내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인 세 창문의 신전이 파차쿠티 얌키 살카마이우아가 언급한 건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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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의 세 창문이 있는 석조 벽
이 이론의 주요 난점은 올긴의 표준 케추아어 사전에서 토코의 첫 번째 의미는 “벤타나” 또는 “창문”이지만, 마르캄의 개정된 케추아어 사전(1908)에서 이 중요한 단어의 유일한 의미로 “창문”을 제시하는 반면, 올긴이 제시한 토코의 두 번째 의미는 “벽에 설치된 찬장”인 “알라세나”라는 점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가 잉카 집 유적에서 니치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서 클레멘츠 마르캄의 살카마이우아 원고 번역본에 있는 그림들은 조악하지만 창문보다는 니치의 인상을 준다. 탐푸토코가 니치로 유명한 탐푸를 의미하는가? 파카리탐푸에는 특별히 뛰어난 니치가 없는 것 같다. 반면 마추픽추에는 “왕실 영묘”라고 불리는 동굴에서 특히 아름다운 니치들을 포함해 많은 매우 아름다운 니치들이 있다. 사실, 거의 모든 뛰어난 잉카 유적들에는 훌륭한 니치가 있다. 니치가 잉카 건축의 매우 흔한 특징이었기 때문에, 서 클레멘츠가 살카마이우아를 번역한 대로 탐푸토코를 “세 개의 구멍이나 창문이 있는 언덕”이라고 번역한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든 마추픽추가 파카리탐푸보다 이야기에 훨씬 더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초기 저자들이 모두 탐푸토코가 파카리탐푸에 있었다고 반복해서 말한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설령 파카리탐푸 주변의 실제 유적이 요구 조건에 맞지 않더라도 말이다.
토레도가 마지막 잉카를 처형했을 때 실시한 법적 조사 기록이 없었다면 파카리탐푸를 탐푸토코의 위치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쿠스코 근처의 중요한 소금 산지인 라스 살리나스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인 15명의 인디오들은 심문을 받았을 때, 첫 번째 잉카인 망코 카팍이 그들의 땅을 점령했을 때 탐푸토코에서 왔다는 전통을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일치된 증언을 했다. 그들은 첫 번째 잉카가 파카리탐푸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말했을 것 같다. 게다가 첫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태어난 인디오들을 대상으로 1570년에 실시된 더 오래된 법적 조사의 증언도 있다. 92세의 족장은 망코 카팍이 토코라고 불리는 동굴에서 나왔으며, 그 동굴 근처 마을의 영주였다고 증언했다. 증인들 중 누구도 망코 카팍이 파카리탐푸에서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동시대 역사가들이 믿었듯이 이곳이 실제로 원래의 탐푸토코였다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은 이유를 상상하기 어렵다. 연대기 작가들은 망코 카팍이 태어나고 쿠스코를 정복하러 온 곳으로 파카리탐푸 근처의 흥미로운 동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선서한 증인들은 왜 그토록 말을 아꼈을까? 그들이 탐푸토코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곳을 잊어버렸을 리는 거의 없다. 그들의 말을 아낀 것은 실제 위치가 성공적으로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일까? 망코 카팍의 고향은 파차쿠티 6세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을 가지고 옛 정권이 무너진 후 도망쳐 온, 매우 은밀하고 신성한 장소인 그 탐푸토코였다. 그들은 그것이 피사로 시대에 젊은 잉카 망코가 쿠스코에서 도망쳐 온 안데스의 같은 요새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것이 그들이 말을 아낀 이유였을까?
여기서 아마우타의 현명한 잔존자들은 결국 큰 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엄청난 자연적 장애물에 직면하여 고대의 기술을 활용해 토양에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아마존 정글의 야만인들과 고원의 적들 사이에 갇혀 그들은 수 세대 동안 국경 전쟁을 수행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살았던 온화한 기후와 마을과 도시에서 몇 시간 오르내리며 다양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에 힘입어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계를 넘어 폭발하고 풍요로운 쿠스코 계곡으로 돌아가 고대 침략자들의 후손들을 무너뜨리고 쿠스코를 수도로 하는 잉카 제국을 건설한 강인하고 활기찬 부족이 되었다.
첫 번째 잉카인 망코 카팍이 쿠스코에 정착한 후, 그가 조상들을 기리는 아름다운 신전을 지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상 숭배는 잉카들에게 흔한 일이었고, 세 개의 창문 신전을 건설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잉카들이 힘을 키우고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쿠스코 아마우타의 고대 제국으로 그들의 지배를 확장함에 따라, 미신적인 존경심이 그들로 하여금 쿠스코 시 자체에 주요 신전과 궁전을 세우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더 이상 탐푸토코의 요새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곳은 아마도 버려졌고, 쿠스코는 성장했으며 잉카 제국은 번성했다.
잉카들의 힘이 커짐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중 하나는 그들의 조상을 티티카카 호수의 섬들로 거슬러 올라갔다. 결국 망코 카팍의 출생지의 정확한 위치는 일반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물론 사제들과 잉카의 가장 신성한 비밀을 보존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 피사로와 편견에 사로잡힌 정복자들이 왔다. 토착 족장들은 고대 종교의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구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금과 은을 탐냈다. 그러나 잉카들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은 이미지와 도구가 아니라 태양의 성스러운 처녀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베스타 처녀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위대한 태양신을 섬기도록 훈련받았다. 식량 작물을 결실로 이끌고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태양이 필요한 농경민의 관점에서 볼 때, 제물로 그를 달래고 그의 미소 띤 얼굴의 좋은 영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그가 오는 것을 지연하거나 구름 뒤에 숨어 있으면, 옥수수에 곰팡이가 생기고 이삭이 제대로 익지 않을 것이다. 수확 후 그가 평소의 밝기로 빛나지 않으면, 옥수수 이삭을 제대로 말려 다음 해까지 보관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태양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기근과 기아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딸들은 그의 봉사에 바쳐졌고, “처녀들”로서 신전에 살며 사제들과 통치자들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페루에서는 오래 전에 인신 제물이 중단되었고, 이 소녀들의 봉헌으로 대체되었다. 쿠스코에 있던 태양의 처녀들 중 일부는 잡혔다. 다른 이들은 탈출해 망코를 따라 우일카팜파의 접근 불가능한 협곡으로 들어갔다.
칼란차 신부가 이 지역에서 첫 두 선교사들의 시련을 전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잉카에게 “빌카밤바 비에호”에 있는 “우상 숭배의 대학”을 방문하게 해달라고 촉구했다. 그곳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마추픽추는 그 요구 사항을 훌륭히 충족시킨다. 여기서 잉카 티투 쿠시가 성스러운 도시의 독특한 신전들과 놀라운 궁전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게 하면서 3주 동안 그 지역에 수도사들을 머물게 하는 것은 매우 쉬웠을 것이다. 티투 쿠시가 마르코스 수사와 디에고 수사를 산미겔 근처 인티우아타나 마을로 데려가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은 마추픽추 절벽 아래에 있다. 하위 우루밤바 계곡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20년 동안 매년 산미겔 다리를 건너면서도 그들 위의 능선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수사들은 “빌카밤바 비에호”의 건축적 특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채 산기슭의 오두막에 머물렀을 수 있으며, 결국 칼란차가 보고한 대로 친구들에게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푸키우라에서 시작된 어려운 여정이 “3일”이 걸렸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튼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마추픽추의 마지막 거주자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우리가 마추픽추 주변 지역에서 발견한 매장 동굴에서는 남성의 두개골 비율이 매우 높다. 소위 “천공된” 두개골이 많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의 것으로 보이는데, 잉카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곤봉이나 투석기로 두개골이 으스러진 것 같다. 우리는 25개 미만의 두개골을 발견한 경우가 없었으며, 그중에는 항상 몇 개의 “천공된” 표본이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추픽추에서의 발굴 결과는 놀랍다. 매장 동굴에서 164개의 두개골이 발견되었지만, 단 하나도 “천공”되지 않았다. 그중
이튼 박사가 정확히 성별을 판별할 수 있었던 135구의 해골 중 109구가 여성이었다. 게다가 가장 훌륭한 유물들이 여성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사 유형의 강건한 남성을 대표하는 해골은 마추픽추의 매장 동굴에서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튼 박사가 밝혀낸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일부 여성 해골이 해안 지역 출신의 개인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는 티투 쿠시가 고산지대의 아름다운 여성들뿐만 아니라 융가스, 즉 “따뜻한 계곡” 부족 출신의 여성들로도 수도사들을 유혹했다는 칼란차의 진술과 일치한다. “따뜻한 계곡”은 고무 생산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클레멘츠 마크햄 경은 해안의 오아시스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새퍼드가 지적했듯이,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사제들과 주술사들이 최면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했던 마약성 코담배와 함께 사용되는 “코담배 흡입관”이 있었다. 이 가루는 잉카인들이 우일카 또는 빌카라고 불렀던 나무의 씨앗으로 만들어졌는데, 11장에서 언급했듯이 이 유적 근처에서 자란다. 이는 마추픽추가 칼란차가 말한 “빌카밤바”와 동일하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마추픽추의 유적이 “우상 숭배의 대학이 있는 가장 큰 도시”라는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푸키우라에서 3일 거리 내에 있는 중요한 종교 중심지이자 해골이 주로 여성인 다른 중요한 장소의 유적을 누군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칼란차가 말한 “빌카밤바 비에호”였고 에스피리투 팜파가 오캄포가 말한 “빌카밤바 비에호”였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티투 쿠시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마르코스 수사가 훌륭한 스페인어로 쓴 마지막 잉카들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에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 망코가 쿠스코에서 도망쳐 처음에 “그 지방의 모든 중심지인 빌카밤바”로 갔다고 말한다.
“페루 연대기”에서 몬테시노스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망코가 자신과 평화를 원한다고 생각하여 매우 훌륭한 조랑말과 그것을 돌볼 물라토를 선물로 보내 잉카를 기쁘게 하려 했다고 말한다. 사자에게 보상하는 대신 잉카는 사람과 짐승을 모두 죽였다. 피사로는 이 소식을 듣고 잉카의 가장 좋아하는 아내를 잔인하게 학대하고 처형함으로써 망코에게 복수했다. 그녀는 수행원들에게 “죽으면 유해를 바구니에 담아 유카이[또는 우루밤바] 강에 떠내려 보내 물살이 남편인 잉카에게 가져다주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당시 망코가 이 강 근처에 있다고 믿었음이 틀림없다. 마추픽추는 이 강변에 있다. 에스피리투 팜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망코가 결국 우이티코스에 정착하여 어느 정도 자신의 왕가의 운명을 회복했음을 보았다. 비옥한 계곡들에 둘러싸여 있고 스페인인들이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데 사용해야 했던 대로에서 너무 멀지 않아 그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마추픽추에 있었다면 스페인 상단을 약탈하거나 추종자들에게 경작지를 공급하는 데 그렇게 편리한 위치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추픽추의 요새가 한때 잉카인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들에 의해 훨씬 오래된 도시의 유적 위에 부분적으로 지어졌다는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도자기의 상당 부분이 의심할 여지없이 마지막 잉카들이 사용한 소위 쿠스코 양식이다. 더 최근의 건물들은 후기 잉카들이 지었다고 하는 티티카카 호수의 섬에 있는 구조물들과 닮았다. 또한 1537년경 망코가 지은 우이티코스의 로사스파타 요새와도 닮았다. 게다가 이 유적들은 옛 우일카팜파 지방의 산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티투 쿠시가 자연스럽게 “지방의 수도”라고 말할 만한 장소를 나타낸다. 에스피리투 팜파는 전체 지방에 이름을 줄 만큼 중요하고 “가장 큰 도시”라고 언급될 만한 장소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마추픽추의 접근하기 어렵고 잊혀진 요새가 피사로 시대에 쿠스코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한 태양의 처녀들을 위해 망코가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 선택한 장소였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망코는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을 위해 많은 새 건물을 짓고 일부 오래된 건물들을 보수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일생을 보냈고, 정복자들에게 그들의 신성한 피난처의 비밀을 누설할 인디오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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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랜드의 왕관, 우일카팜파의 화강암 요새를 보여주는 넓게 열린 협곡들: 마추픽추
마추픽추의 고지대에서 태양 숭배가 실제로 언제 중단되었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 존재의 비밀이 그토록 잘 지켜졌다는 것은 안데스 역사의 기적 중 하나다. “탐푸토코”와 “빌카밤바 비에호”와의 동일성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1875년 찰스 비에너가 그것에 대해 들을 때까지 마추픽추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없다.
언젠가 우리는 16세기나 17세기 문서 중 하나에서 에너지 넘치는 부왕 톨레도(Don Francisco de Toledo)나 그의 동시대인이 이 놀라운 요새를 알고 방문했음을 나타내는 언급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에사 데 레온(Cieza de Leon)과 폴로 데 온데가르도(Polo de Ondegardo) 같은 작가들은 잉카의 모든 성지에 대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하여 우리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많은 장소의 이름을 제공한다. 그들 중에서 우리는 결국 마추픽추의 신전들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스페인 군인, 사제 또는 다른 연대기 작가들 중 누군가가 이 요새를 보았다면 그 주요 건물들을 분명한 용어로 묘사했을 것 같다.
이 흥미로운 문제에 더 많은 빛을 비출 수 있을 때까지, 마추픽추에서 우리가 첫 번째 잉카인 망코 카팍(Manco Ccapac)의 출생지인 탐푸토코(Tampu-tocco)의 유적과 마지막 잉카들의 성스러운 도시의 유적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분명 이 화강암 요새는 그 뛰어난 아름다움과 주변 환경의 형용할 수 없는 매력으로 인해 우리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마추픽추는 매우 흥미로운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서기 800년경 남방에서 온 침략자들을 피해 마지막 남은 구 정권의 피난처로 선택되었고, 새로운 왕국의 수도가 되어 남아메리카가 본 가장 주목할 만한 가문을 탄생시켰다. 1300년경 쿠스코(Cuzco)가 다시 한 번 페루 제국의 수도로 화려하게 부상하자 버려졌다가, 1534년 또 다른 외국 침략자 – 이번에는 유럽에서 – 가 고대 종교의 모든 흔적을 없애려는 열망을 가지고 도착했을 때 다시 한 번 은신처로 찾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이곳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가장 인도적인 종교의 여사제인 태양의 처녀들의 집이자 피난처가 되었다. 여기 놀라운 웅장함을 지닌 협곡에 숨겨져 자연과 인공의 보호를 받으며, 이 헌신된 여성들은 자손도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점차 사라져갔다. 다만 석조 벽과 유물들만이 남았고, 이는 다른 책에서 설명될 것이다. 그들이 누구였든, 미래의 역사가들이 이 유적지에 어떤 이름을 최종적으로 부여하든 간에, 나는 이것만은 확신한다. 마추픽추의 화강암 요새, 잉카 랜드(INCA LAND)의 왕관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의 절벽 꼭대기에 있는 이야기는 그 어떤 로맨스도 능가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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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아메리칸 저널 오브 사이언스』, XXXIV, 128-132, 1912년 8월. 삽화.
허버트 E. 그레고리:
쿠스코의 자갈. 『아메리칸 저널 오브 사이언스』, XXXVI, No. 211, 15-29, 1913년 7월. 삽화, 지도.
라파스 협곡. 『위와 동일』, XXXVI, 141-150, 1913년 8월. 삽화.
티티카카, 태양의 섬에 대한 지리학적 개요. 『아메리칸 지리학회 회보』, XLV, 561-575, 1913년 8월. 4개의 도판, 지도.
티티카카 섬과 인접 지역에 대한 지질학적 개요. 『아메리칸 저널 오브 사이언스』, XXXVI, No. 213, 187-213, 1913년 9월. 삽화, 지도.
아유스밤바 화석층에 대한 지질학적 탐사. 『위와 동일』, XXXVII, No. 218, 125-140, 1914년 2월. 삽화, 지도.
로다데로; 특이한 양상의 단층면. 『위와 동일』, XXXVII, No. 220, 289-298, 1914년 4월. 삽화.
쿠스코 계곡에 대한 지질학적 탐사. 『위와 동일』, XLI, No. 241, 1-100, 1916년 1월. 삽화, 지도.
오스굿 하디:
쿠스코와 아푸리막. 『아메리칸 지리학회 회보』, XLVI, No. 7, 500-512, 1914. 삽화, 지도.
쿠스코 주의 원주민들. 『아메리칸 인류학자』, XXI, 1-27, 1919년 1-3월. 9개의 도판.
클레멘츠 마컴 경:
빙엄의 빌카밤바 탐험. 『지리학 저널』, XXXVIII, No. 6, 590-591, 1911년 12월. 1개의 도판.
C. H. 매슈슨:
마추픽추에서 발견된 고대 페루 청동기에 대한 금속학적 기술. 『아메리칸 저널 오브 사이언스』, XL, No. 240, 525-602, 1915년 12월. 삽화, 도판.
P. R. 마이어스:
1911년 예일 페루 탐험대의 결과 – 벌목과 맵시벌상과에 대한 추가.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XLVII, 361-362, 1914.
S. A. 로워:
1911년 예일 페루 탐험대의 결과 – 벌목상과와 구멍벌상과.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XLIV, 439-454, 1913.
레온하르트 스테이네거:
1911년 예일 페루 탐험대의 결과. 양서류와 파충류.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XLV, 541-547, 1913.
올드필드 토마스:
1915년 페루 탐험 중 에드먼드 헬러가 수집한 포유류에 대한 보고서.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LVIII, 217-249, 1920. 2개의 도판.
H. L. 비어렉:
1911년 예일 페루 탐험대의 결과. 벌목-맵시벌상과. 『미국 국립박물관 회보』, XLIV, 469-470, 1913.
R. S. 윌리엄스:
페루의 이끼류. 『토리 식물학 클럽 회보』, XLIII, 323-334, 1916년 6월. 4개의 도판.
주석
[1] 많은 사람들이 마추픽추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어봤다. 케추아어 단어는 가능한 한 쓰여진 대로 발음해야 한다. 이것들은 음성 표기를 시도한 것이다. 스페인 작가가 시도한 경우, 그는 항상 ‘uilca’와 같은 단어 앞에 묵음 ‘h’를 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윌카’로 발음된다. 단어 중간에 있는 ‘h’는 항상 발음된다. 마추픽추는 ‘마체우 픽체우’로 발음된다. 우이티코스는 ‘위티코스’로 발음된다. 우일카팜파는 ‘윌카팜파’로 발음된다. 쿠스코는 ‘쿠스코’로 발음된다.
[2] 리그는 보통 3마일 1/3 정도인데, 실제로는 평균적인 노새가 한 시간 동안 걸을 수 있는 거리다.
[3] 17세기의 성직자 변호사인 페르난도 몬테시노스는 1629년경 그 유명한 친촌 백작의 수행원으로 페루에 간 것으로 보인다. 친촌 백작의 부인은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페루 수피 또는 키니네를 사용하여 치료되었고, 이 약을 유럽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이 사실은 신키나 속의 식물학적 이름에 기념되어 있다. 몬테시노스는 교육을 잘 받았고 역사 연구에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페루를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잉카 역사서는 서문에서 망쳐졌는데, 정통 변호사에게서 예상할 수 있듯이 페루가 노아의 증손자인 오필의 지도 아래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페루 고고학 분야의 영국 최고 학자인 고 클레멘츠 마컴 경은 그의 진술에 상당한 신뢰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선사 시대 페루에 대한 기록은 최근 하버드 대학의 필립 A. 민스가 학회를 위해 편집했다.
[4]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은 잉카와 다른 망명자 중 한 명인 디에고 멘데스 사이의 체스 게임을 두고 벌어진 다툼이었다는 것이다. 멘데스는 화를 내며 잉카를 개라고 불렀다. 손님의 말투와 언사에 화가 난 잉카는 그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러자 디에고 멘데스는 단검을 뽑아 그를 죽였다. 가르실라소가 정보원들로부터 얻은 것과는 전혀 다른 설명이 망코의 아들 티투 쿠시가 사건 20년 후에 마르코스 수사에게 구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에 나온다. 나는 클레멘츠 마컴 경의 번역을 인용한다:
“이 스페인 사람들이 비티코스라는 마을에서 내 아버지와 몇 년을 함께 지낸 후, 어느 날 그들은 매우 친근하게 내 아버지와 쿼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내 아버지와 당시 소년이었던 나만 있었다. 반바라는 인디오 여자가 스페인 사람들이 잉카를 죽이려 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내 아버지는 평소처럼 그들과 놀고 있었다. 이 게임에서 내 아버지가 쿼이트를 던지려고 들어올리는 순간, 그들은 모두 칼과 단검, 그리고 몇 개의 검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내 아버지는 자신이 부상당했음을 느끼고
그는 자신을 방어하려 했지만 혼자였고 무기도 없었다. 반면 그들은 완전히 무장한 일곱 명이었다. 그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졌고, 그들은 그를 죽은 것으로 여겼다. 나는 어린 소년이었고, 아버지가 그렇게 대우받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격렬하게 나를 향해 돌아섰고, 나 또한 죽일 뻔한 창을 던졌다. 나는 겁에 질려 덤불 사이로 도망쳤다. 그들은 나를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잉카를 죽였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때 리마치 유팡키 대장이 일부 안티스 족과 함께 도착했고, 곧바로 그들을 추격했다. 그들이 험한 길을 따라 멀리 가기도 전에 잡혀 말에서 끌려 내려졌다. 그들은 모두 매우 잔인한 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불에 태워졌다. 아버지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3일 동안 살아있었다.
몬테시노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또 다른 버전을 제시한다. 그것은 티투 쿠시의 것과 더 비슷하다.
[5] 케추아어 무차(mucha)에서 파생된 스페인어이다. “키스”를 의미한다. 무차니(Muchani)는 “경배하다, 존경하다, 손에 키스하다”를 의미한다.
[6] 우이티코스(Uiticos)는 아마도 “멀리 물러나다”를 의미하는 우이티쿠니(Uiticuni)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7] “남미를 가로질러”에 설명되어 있다.
[8] 1915년 탐험에서 헬러 씨는 12종의 새로운 포유류를 포획했지만, 올드필드 토마스 씨의 말에 따르면 “모든 신종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유대목이다…. 이 과의 구성원들은 이전에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헬러 씨의 발견으로 캥거루과의 최근 서식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
[9] 새포드 씨는 “코호바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논문(워싱턴 과학 아카데미 저널, 1916년 9월 19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프타데니아 페레그리나 또는 ‘나무 담배’와 관련된 가장 놀라운 사실은 … 그것의 환각 효과의 원인이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분기된 관 중 하나가 “제조 초기 단계”에서 마추픽추에서 발견되었다.
[10] 17장과 18장의 삽화를 참조하라.
[11] 역사적 우일카팜파가 지리적으로 현대의 빌카밤바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강과 그 발원지에 있는 옛 스페인 마을에 적용되는 이름을 구분하기 위해 강과 마을에는 공식적으로 올바른 철자인 빌카밤바를 사용하고, 잉카 망코의 동시대 역사에서 언급된 장소에는 음성학적 철자인 우일카팜파를 사용할 것이다.
[12] 당시 “안데스”라는 용어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안티스라고 불리는 부족이 살았던 쿠스코 북쪽의 높은 산맥에만 적용되었다. 그들의 이름이 이 산맥에 붙여졌다. 그 절정은 살칸타이 산이었다.
[13] 티투 쿠시는 망코의 서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왕족이 아니었고 아마도 따뜻한 계곡 출신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