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刺靑 by 다니자키 준이치로 谷崎潤一郞著

팔만대장경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은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고전 문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생성형 AI 기술인 LLM의 발전으로 팔만대장경 프로젝트가 가능해졌습니다. LLM은 거의 전문가 수준의 매끄러운 번역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 누구나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Anthropic의 Claude-3.5 Sonnet Google의 Gemini-1.5 Pro와 Gemini-1.5 Flash, 그리고 Microsoft의 Text 분석 기술을 MAIDEPOT의 AI 자동 융복합 기능으로 결합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사용된 도구와 프롬프트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 PDF 300페이지 번역 전문가 수준의 초벌 번역"

물론 LLM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특성상 일부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고전 서적을 번역하여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날 것의 상태로 프로젝트의 양과 질과 높이는 일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번역 또는 편집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contact@maidepot.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정보: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한 일본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단편 소설 문신 번역본입니다. ‘문신’은 아름다움과 고통의 관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번역 시 고려사항:

  1. 탐미적인 분위기를 살려 유려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번역해야 합니다.
  2. 각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여 당시의 어투를 적절히 반영해야 합니다.
  3. ‘-했다’와 같이 짧게 끝나는 문장으로 번역하여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를 유지해야 합니다.
  4. 일본어 특유의 뉘앙스를 살리면서도 한국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해야 합니다.
  5.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여 독자들에게 생소한 일본 문화에 대한 주석을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6.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단어나 표현의 경우,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예: 刺靑 – 문신, 駕籠舁 – 가마꾼)

문신:

  • 淸吉 (세이키치) : 젊고 재능 있는 문신 장인.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과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가학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냉소적인 말투를 사용합니다.
  • (이름 없는) 소녀 : 세이키치의 뮤즈가 되는 16-17세 소녀. 순수하지만 세이키치의 영향으로 잔혹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소년:

  • 萩原榮一 (하기와라 에이이치) : 소년. 부유한 집안의 아이인 신이치와의 만남을 계기로 잔혹한 놀이에 빠져듭니다.
  • 塙信一 (하나와 신이치) : 부유한 집안의 아이. 나약해 보이지만 잔혹하고 지배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오만하고 명령적인 말투를 사용합니다.
  • (이름 없는) 하녀 : 신이치의 유모. 아이들의 잔혹한 행동을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 (이름 없는) 마부의 아들 : 센키치. 학교의 불량배 두목이지만 신이치에게 복종하며 괴롭힘을 당합니다.
  • 光子 (미츠코) : 신이치의 누나. 처음에는 동생에게 반항하지만 결국 굴복하고 괴롭힘에 동참합니다.

기린:

  • 孔子 (공자) : 노나라의 성인. 위나라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 子路 (자로) : 공자의 제자. 활발하고 용감한 성격입니다.
  • 顔淵 (안연) : 공자의 제자. 사려 깊고 진지한 성격입니다.
  • 曾參 (증삼) : 공자의 제자. 성실하고 온화한 성격입니다.
  • 樊遲 (번지) : 공자의 제자이자 마부. 정직하고 순박한 성격입니다.
  • 子貢 (자공) : 공자의 제자. 언변이 뛰어나고 재치 있는 성격입니다.
  • 林類 (임류) : 노자의 제자.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던지고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 靈公 (영공) : 위나라의 군주. 아름다운 남자를 총애하고 쾌락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습니다.
  • 南子 (남자) : 영공의 부인. 미모와 권력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교활하고 잔인한 성격입니다.
  • 雍渠 (옹거) : 남자인의 측근 환관.
  • 王孫賈 (왕손가) : 위나라의 장군.
  • 中叔圉 (중숙어) : 영공의 명을 받아 공자를 맞이하는 현명한 신하.
  • 宋朝 (송조) : 남자의 정부. 송나라의 공자입니다.

모든 중요 용어 번역어:

  • 刺靑: 문신
  • 幇間: 재담꾼 – 일본 에도 시대에 술자리나 연회에서 손님의 비위를 맞추며 재담, 노래, 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남성.
  • 華魁: 오이란 – 에도 시대 유곽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진 유녀.
  • 草雙紙: 쿠사조시 – 에도 시대에 유행한 그림책.
  • 馬道: 우마미치 – 가마가 다니는 길.
  • 吉原: 요시와라 –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유곽.
  • 辰巳: 타츠미 – 에도 시대의 유곽.
  • 博徒: 바쿠토 – 도박꾼.
  • 鳶: 토비 – 에도 시대의 소방수 겸 건축 노동자.
  • 町人: 초닌 – 에도 시대의 상인 계급.
  • 侍: 사무라이
  • 入墨: 이레즈미 – 문신.
  • 刺靑會: 문신 모임
  • 淺草: 아사쿠사 – 에도(현재 도쿄)의 번화가.
  • 松島町: 마츠시마초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達摩金: 다루마킨 – 문신 장인.
  • 唐草權太: 카라쿠사 곤타 – 문신 장인.
  • 豊國國貞: 토요쿠니 쿠니사다 – 우키요에 화가.
  • 浮世繪師: 우키요에 화가 – 에도 시대에 서민들의 풍속을 그린 목판화를 제작한 화가.
  • 浮世繪: 우키요에 – 에도 시대에 유행한 풍속화.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습니다.
  • 江戶兒: 에도 사람
  • 深川: 후카가와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料理屋: 요리야 – 에도 시대의 고급 음식점.
  • 平淸: 히라세이 – 후카가와에 있던 요리야.
  • 佐賀町: 사가초 – 후카가와에 있던 지명.
  • 寓居: 임시 거처.
  • 房楊枝: 후사요지 – 솔처럼 생긴 이쑤시개.
  • 錆竹: 녹슨 대나무.
  • 濡椽: 젖은 툇마루.
  • 萬年靑: 오모토 – 상록 다년초 식물.
  • 建仁寺: 켄닌지 – 교토에 있는 선종 사찰.
  • 袖垣: 소데가키 – 낮은 울타리.
  • 唄女: 하오리 – 요시와라의 유녀.
  • 親方: 오야카타 – 장인, 사장 등을 높여 부르는 말.
  • 鬱金: 울금 – 생강과의 여러해살이풀.
  • 風呂敷: 보자기
  • 岩井杜若: 이와이 토쟈쿠 – 에도 시대의 가부키 배우.
  • 似顏繪: 초상화.
  • 大川: 오오카와 – 스미다 강의 별칭.
  • 暴君: 폭군.
  • 紂王: 주왕 –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
  • 寵妃: 총희 – 왕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
  • 末喜: 달기 – 주왕의 총희.
  • 瑠璃珊瑚: 청금석과 산호.
  • 金冠: 금관.
  • 羅綾: 비단.
  • 裳裾: 치맛자락.
  • 銅柱: 구리 기둥.
  • 犧牲: 희생.
  • 朱刺: 붉은색 문신.
  • ぼかしぼり: ぼかし 문신 – 색을 흐리게 하여 표현하는 문신 기법.
  • 肥料: 비료.
  • 櫻: 벚꽃.
  • 幹: 나무줄기.
  • 累々: 여러 개가 겹쳐 있는 모양.
  • 屍骸: 시체.
  • 凱歌: 개선가.
  • 膽: 담력.
  • 眉一: 눈썹 하나.
  • 和蘭醫: 네덜란드 의사.
  • 麻酔劑: 마취제.
  • 壜: 병.
  • 埃及: 이집트.
  • ピラミツト: 피라미드.
  • スフインクス: 스핑크스.
  • 眞紅: 진홍색.
  • 燒酎: 소주.
  • 琉球朱: 류큐 주 – 오키나와에서 생산되는 붉은색 안료.
  • 蠟燭: 양초.
  • 女郎蜘蛛: 무당거미.
  • 土州: 토사 – 현재의 코치현.
  • 麒麟: 기린
  • 享保: 교호 –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연호.
  • 廣南國: 광남국 – 베트남 남부에 있었던 옛 나라.
  • 山王祭禮: 산노 마츠리 – 도쿄 히에 신사의 제례.
  • 麹町貝塚: 코지마치 카이즈카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湟端: 호리바타 – 해자 가장자리.
  • 隼町: 하야부사초 – 현재 도쿄의 지명.
  • 山王神輿: 산노 신사의 신輿(미코시) – 신을 모시는 가마.
  • 與力: 요리키 – 에도 막부의 하급 관리.
  • 同心: 도신 – 에도 막부의 하급 관리.
  • 鳶: 토비 – 에도 시대의 소방수 겸 건축 노동자.
  • 鄭成功: 정성공 – 명나라의 유신.
  • 高砂島: 타카사고 섬 – 현재의 대만.
  • 半藏御門: 한조몬 – 에도 성의 문.
  • 暹羅: 샴 – 현재의 태국.
  • 鄭大成: 정대성 – 광남국에서 코끼리를 데려온 인물.
  • 和唐內: 일본과 중국의 사이.
  • 高砂島: 타카사고 섬 – 현재의 대만.
  • 陰間: 카게마 – 에도 시대에 남색 상대로 길러진 소년.
  • 平河天神: 히라카와 텐진 – 에도에 있던 신사.
  • 普賢菩薩: 보현보살.
  • 文珠菩薩: 문수보살.
  • きさ: 코끼리의 옛 이름.
  • 象潟町: 키사가타초 – 현재의 아키타현에 있는 지명.
  • 西施: 서시 – 중국 춘추 시대의 미녀.
  • 芭蕉翁: 마츠오 바쇼 – 에도 시대의 하이쿠 시인.
  • 院: 인 – 천황을 높여 부르는 말.
  • 將軍樣: 쇼군.
  • 潭數潭綿: 담수담면 – 광남국 사람 코끼리 조련사의 이름.
  • 鳶口: 토비구치 – 갈고리 형태의 도구.
  • 御製: 천황이 지은 시가.
  • 御歌: 천황이 지은 시가.
  • 九重: 천황이 사는 궁궐.
  • 詠象詩: 코끼리를 읊은 시.
  • 團十郞: 이치카와 단쥬로 – 에도 시대의 가부키 배우.
  • 神武天皇: 진무 천황 – 일본의 초대 천황.
  • ひよつとこ: 히요코 – 병아리.
  • 太神樂: 큰 북을 치며 추는 춤.
  • 源之丞: 겐노죠 – 히라카와 텐진의 카게마.
  • 道成寺: 도조지 – 가부키의 유명한 연극.
  • はねつかへり: 하네츠카에리 – 가부키에서 어린 소녀 역을 맡는 젊은 여성 배우.
  • 八代樣: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 辨財天: 벤자이텐 – 칠복신 중 하나. 음악, 예술, 지혜의 여신.
  • 大多福: 오타후쿠 – 복스럽고 둥근 얼굴을 가진 여성.
  • 松葉町: 마츠바초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眞言宗: 진언종 – 밀교의 한 종파.
  • 新堀: 신보리 – 에도(현재 도쿄)의 운하.
  • 菊屋橋: 키쿠야바시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다리.
  • 澁谷: 시부야 – 현재 도쿄의 지명.
  • 大久保: 오오쿠보 – 현재 도쿄의 지명.
  • 澱: 웅덩이.
  • 小網町: 코아미초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小舟町: 코후나초 – 에도(현재 도쿄)의 지명.
  • 荷足: 짐을 싣는 다리.
  • 八幡樣: 하치만 – 무사의 수호신.
  • 社殿: 신사의 본전.
  • 観音堂: 칸논도 – 관음보살을 모신 불당.
  • 仲店: 나카미세 – 아사쿠사 센소지의 참배길에 있는 상점가.
  • 左衞門橋: 사에몬바시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다리.
  • 市村座: 이치무라자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가부키 극장.
  • 柳盛座: 류세이자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가부키 극장.
  • 永代橋: 에이타이바시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다리.
  • 八丁堀: 핫초보리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운하.
  • 越前堀: 에치젠보리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운하.
  • 三味線堀: 샤미센보리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운하.
  • 山谷堀: 산야보리 – 에도(현재 도쿄)에 있던 운하.
  • 六區: 로쿠쿠 – 에도(현재 도쿄)의 번화가.
  • 庫裡: 절의 살림집.
  • 禁厭: 금기.
  • 呪咀: 저주.
  • 眞言: 진언 – 불교의 주문.
  • 須彌山圖: 수미산 그림.
  • 涅槃像: 열반상 – 부처가 열반에 든 모습을 표현한 불상.
  • 佛畫: 불화.
  • The Sign of Four: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품.
  • Murder as one of the Fine Arts: 토마스 드 퀸시의 에세이.
  • アラビアン,ナイト: 아라비안나이트.
  • 仏蘭西物: 프랑스 것.
  • Sexuology: 성 과학.
  • 地獄: 지옥.
  • 極樂: 극락.
  • 白檀: 백단향.
  • 沈香: 침향.
  • 羅漢: 나한 – 깨달음을 얻은 불교 수행자.
  • 比丘: 비구 – 남자 승려.
  • 比丘尼: 비구니 – 여자 승려.
  • 優婆塞: 우바새 – 남자 불교 신자.
  • 優婆夷: 우바이 – 여자 불교 신자.
  • 象: 코끼리.
  • 獅子: 사자.
  • 麒麟: 기린.
  • 三友館: 산유칸 – 아사쿠사에 있던 극장.
  • 貴賓席: 귀빈석.
  • 土耳古卷: 터키 담배.
  • M.C.C.: 담배 브랜드.
  • 紳士: 신사.
  • 辨天小僧: 벤텐 코조 – 가부키의 등장인물. 의적.
  • 信西: 신제이 – 헤이안 시대 말기의 승려이자 정치가.
  • 少納言: 쇼나곤 – 헤이안 시대의 관직.
  • 入道: 승려.
  • 師光: 모로미츠 – 신제이의 낭당.
  • 師淸: 모로키요 – 신제이의 낭당.
  • 成景: 나리카게 – 신제이의 낭당.
  • 淸實: 키요자네 – 신제이의 낭당.
  • 出雲前司光泰: 이즈모노젠지 미츠야스 – 신제이를 토벌한 무사.
  • 平治: 헤이지 – 일본의 연호.
  • 信賴: 노부요리 –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 義朝: 요시토모 –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 山城: 야마시로 – 현재의 교토부.
  • 近江: 오우미 – 현재의 시가현.
  • 信樂山: 시가라키 산.
  • 大道寺: 다이도지.
  • 右衞門督: 우에몬노카미 – 헤이안 시대의 관직.
  • 左馬頭: 사마노카미 – 헤이안 시대의 관직.
  • 大貳殿: 다이니 – 다이죠 다이진(태정대신)을 줄여 부르는 말.
  • 熊野權現: 쿠마노 곤겐 – 쿠마노 신사의 신.
  • 通憲: 미치노리 – 신제이의 속명.
  • 大伯星: 금성.
  • 保元: 호겐 – 일본의 연호.
  • 鴨河原: 카모가와 강변.
  • 南都: 난토 – 나라의 별칭.
  • 法名: 불교에서 죽은 사람에게 주는 이름.
  • 西光: 사이코 – 모로미츠의 법명.
  • 西淸: 사이세이 – 모로키요의 법명.
  • 西景: 사이케이 – 나리카게의 법명.
  • 西實: 사이지츠 – 키요자네의 법명.

문신 – 다니자키 준이치로 저

문신

그것은 아직 사람들이 ‘어리석음’이라는 귀한 덕을 지니고 있어 세상이 지금처럼 격렬하게 삐걱거리지 않던 시절이었다. 영주님과 도련님의 평온한 얼굴이 흐려지지 않도록, 궁녀와 오이란의 웃음거리가 마르지 않도록 수다를 떠는 재담꾼 같은 직업이 당당히 존재할 수 있었을 만큼, 세상이 느긋했던 시절이었다. 여자 정구, 여자 자라이야, 여자 나루카미 – 당시의 연극이나 쿠사조시에서도 아름다운 자는 강자였고, 추한 자는 약자였다. 모두 아름다워지려고 애쓴 끝에, 타고난 몸에 물감을 주입하기에 이르렀다. 강렬하거나 화려한 선과 색이 그 시절 사람들의 피부에서 춤췄다.

우마미치를 다니는 손님들은 멋진 문신이 있는 가마꾼을 골라 탔다. 요시와라와 타츠미의 여인들도 아름다운 문신을 한 남자에게 반했다. 바쿠토와 토비는 물론이고 초닌에서 드물게는 사무라이까지도 이레즈미를 했다. 때때로 료고쿠에서 열리는 문신 모임에서는 참가자들이 저마다 피부를 두드리며 기발한 도안을 자랑하고 평가했다.

세이키치라는 젊은 문신 장인이 있었다. 아사쿠사의 차리분, 마츠시마초의 야츠헤이, 콘콘지로에게도 뒤지지 않는 명수라고 칭송받아, 수십 명의 사람들의 피부가 그의 붓 아래에서 비단 천으로 펼쳐졌다. 문신 모임에서 호평을 받는 문신의 대부분은 그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다루마킨은 그라데이션 문신이 특기라고 했고, 카라쿠사 곤타는 붉은 문신의 명수라고 칭송받았으며, 세이키치는 또한 기발한 구도와 요염한 붓놀림으로 이름을 알렸다.

원래 토요쿠니 쿠니사다의 화풍을 동경하여 우키요에 화가로 생계를 꾸려갔던 만큼, 문신 장인으로 전락한 후에도 세이키치에게는 역시 화가다운 양심과 예리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피부와 골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그의 문신을 얻을 수 없었다. 혹시 그려달라고 해도 모든 구도와 비용을 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했고, 그 위에 견디기 힘든 바늘 끝의 고통을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참아내야 했다.

이 젊은 문신 장인의 마음속에는 남모를 쾌락과 숙원이 숨어 있었다. 그가 사람들의 살갗을 바늘로 찌를 때, 선홍빛으로 피를 머금고 부풀어 오르는 살의 아픔을 견디지 못해 대부분의 남자들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 신음 소리가 거셀수록 그는 이상하게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유쾌함을 느꼈다. 문신 중에서도 특히 아프다고 하는 붉은색 문신, ぼかし 문신 – 그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더욱 즐겼다. 하루 평균 오륙백 번의 바늘에 찔리고, 색감을 좋게 하기 위해 목욕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반죽음이 된 채로 세이키치의 발밑에 쓰러져 한동안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 비참한 모습을 세이키치는 언제나 차갑게 바라보며,

“아마 많이 아프시겠죠.”

라고 말하면서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의지가 약한 남자 같은 경우, 마치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입을 일그러뜨리고 이를 악물며 히이히이 비명을 지르는 일이 있으면, 그는,

“당신도 에도 사람이잖아요. 참으세요. – 이 세이키치의 바늘은 아주 아프다고요.”

이렇게 말하고, 눈물이 고이는 남자의 얼굴을 곁눈질로 보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문신을 새겼다. 또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 이를 악물고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견디고 있으면,

“흠, 당신은 겉모습과 달리 꽤 강한 사람이군요. – 하지만 보세요, 이제 곧 아파오기 시작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될 겁니다.”

라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오랜 숙원은 빛나는 미녀의 살갗을 얻어 그곳에 자신의 영혼을 새겨 넣는 것이었다. 그 여자의 자질과 용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문이 있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피부만으로는 그는 좀처럼 만족할 수 없었다. 에도 전체의 화려한 거리에서 이름을 날린 여자라는 여자를 조사해 봐도, 그의 기분에 맞는 맛과 분위기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3년 4년을 헛되이 동경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그 소원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4년 만의 여름 어느 저녁, 그는 후카가와의 요리야 히라세이 앞을 지나다 우연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마의 발 밑으로 새하얀 여자의 맨발이 삐죽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리한 그의 눈에는 사람의 발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 그 여자의 발은 그에게 귀중한 살덩어리의 보석이었다.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 새끼발가락으로 끝나는 섬세한 다섯 개의 발가락의 정돈된 모양, 에노시마 해변에서 잡히는 엷은 홍색 조개에도 뒤지지 않는 발톱의 색채, 구슬 같은 발꿈치의 둥근 맛, 맑은 바위틈 물이 끊임없이 발밑을 씻어내는 듯한 피부의 윤기. 이 발이야말로 장차 남자의 생혈에 살찌고 굵어져 남자의 시체를 짓밟을 발이었다. 이 발을 가진 여자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여자 중의 여자일 것이라 여겨졌다. 세이키치는 뛰는 가슴을 누르며 그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 가마의 뒤를 쫓아갔지만, 두세 정 가자 그 그림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세이키치의 동경이 격렬한 사랑으로 변해 그 해도 저물고, 5년째 봄도 반쯤 늙어가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는 후카가와 사가초의 임시 거처에서 후사요지를 물고 있으면서 녹슨 대나무의 젖은 툇마루에 오모토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원의 뒷문을 방문하는 기색이 있더니 켄닌지의 소데가키 그늘에서 전혀 본 적 없는 어린 소녀가 들어왔다.

그것은 세이키치가 단골인 타츠미의 하오리가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언니가 이 하오리를 오야카타에게 직접 전해 드리고, 안감에 무언가 그림 모양을 그려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하셨어요…”

소녀는 울금색 보자기를 풀어 그 안에서 이와이 토쟈쿠의 초상화가 그려진 상자에 싸인 여자 하오리와 한 통의 편지를 꺼냈다.

그 편지에는 하오리의 일을 거듭 부탁한 끝에, 심부름온 소녀는 머지않아 제 여동생으로 객석에 나갈 예정이니 저를 잊지 마시고 이 아이도 잘 돌봐 달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낯선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그럼 너는 최근에 이쪽으로 온 거냐.”

세이키치는 딸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겨우 열여섯, 열일곱 정도로 보였지만, 그 딸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을 유곽에서 보내며 수십 명의 남자들의 영혼을 농락한 중년 여인처럼 무섭도록 정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라 전체의 죄와 재물이 흘러들어오는 도시 한가운데서, 수십 년 전부터 태어나고 죽어간 아름다운 많은 남녀의 꿈들에서 태어날 법한 용모였다.

“네가 작년 6월쯤에 히라세이에서 가마를 타고 돌아온 적이 있었지?”

이렇게 물으며 세이키치는 딸을 툇마루에 앉히고, 비고 돗자리 위에 놓인 정교한 맨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네, 그때쯤이라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셨으니까 히라세이에도 자주 갔었어요.”

딸은 이상한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꼭 5년이 되었군.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네 발은 기억이 난다. –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니 잠시 올라와서 쉬다 가거라.”

세이키치는 이렇게 말하며 돌아가려는 딸의 손을 잡고 오오카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객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서 큰 폭의 두루마리 그림 두 개를 꺼내 우선 그중 하나를 딸 앞에 펼쳐 보였다.

그것은 옛날의 폭군 주왕의 총희 달기를 그린 그림이었다. 청금석과 산호를 박은 금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나른한 몸을 난간에 기대어, 비단 치맛자락을 계단 중간에 휘날리며, 오른손에 큰 술잔을 기울이면서 지금 막 뜰 앞에서 처형되려는 희생자인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비의 모습이라든지, 구리 기둥에 사지가 쇠사슬로 묶인 채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며 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남자의 안색이라든지, 이런 종류의 화제에 흔히 빠지기 쉬운 속됨을 벗어나 섬뜩할 정도로 교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딸은 잠시 이 기괴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모르는 사이에 그 눈동자는 빛나고 입술은 떨렸다. 이상하게도 그 얼굴은 점점 비의 얼굴과 닮아갔다. 딸은 그곳에 숨겨진 진정한 ‘자신’을 발견했다.

“이 그림에는 네 마음이 비쳐 있다.”

세이키치는 이렇게 말하며 즐거운 듯이 웃으면서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째서 이런 무서운 것을 저에게 보여주시는 거예요?”

딸은 창백해진 이마를 들어 말했다.

“이 그림의 여자가 바로 너다. 이 여자의 피가 네 몸에 섞여 있을 거야.”

그는 다시 다른 하나의 그림을 펼쳤다.

그것은 ‘비료’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화면 중앙에 젊은 여자가 벚나무 줄기에 몸을 기대어 발치에 어지럽게 쌓인 수십 구의 남자 시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개선가를 부르는 새떼, 여자의 눈동자에 넘치는 억누를 수 없는 자부심과 기쁨의 빛. 그것은 전쟁 후의 광경인가, 아니면 화원의 봄 풍경인가. 그것을 본 소녀는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찾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이건 네 미래를 그림으로 나타낸 거야. 여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너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지.”

이렇게 말하며 세이키치는 소녀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화면 속 여자를 가리켰다.

“제발 그 그림을 치워주세요.”

소녀는 무서운 유혹을 피하듯 화면에 등을 돌리고 다다미 위에 엎드렸다. 이내 다시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 고백할게요. 저는 선생님이 짐작하신 대로 그 그림 속 여자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용서해주시고 그걸 치워주세요.”

“그렇게 비겁한 소리 하지 말고 이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봐. 지금은 무서워하겠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이렇게 말하는 세이키치의 얼굴에는 평소의 악의적인 웃음이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고개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 저고리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 동안 엎드린 채로 있었다.

“선생님, 제발 저를 돌려보내주세요. 선생님 곁에 있는 게 무서워요.”

소녀는 이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널 멋진 미인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이렇게 말하며 세이키치는 무심코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품에는 어느새 네덜란드 의사에게서 받은 마취제 병이 숨겨져 있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강면을 비추고 여덟 장 다다미방은 불타는 듯 밝았다. 수면에서 반사되는 빛이 무심히 잠든 소녀의 얼굴과 미닫이 종이에 금빛 물결무늬를 그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방의 칸막이를 꼭 닫고 문신 도구를 손에 든 세이키치는 잠시 황홀한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여자의 묘한 아름다움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그 움직이지 않는 얼굴을 마주하고 십 년, 백 년을 이 방에서 정좌해도 싫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장엄한 이집트의 천지를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장식했듯이, 세이키치는 순결한 인간의 피부를 자신의 사랑으로 채색하려 했다.

그는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약지, 엄지 사이에 끼운 붓을 소녀의 등에 누이고 그 위에서 오른손으로 바늘을 찔러 갔다. 젊은 문신 장인의 영혼은 먹물 속에 녹아 피부에 스며들었다. 소주에 섞어 새겨 넣는 류큐 주의 한 방울 한 방울은 그의 생명의 방울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자신의 영혼의 색을 보았다.

어느새 정오가 지나 평화로운 봄날은 서서히 저물어갔지만, 세이키치의 손은 조금도 쉬지 않았고 소녀의 잠도 깨지 않았다. 소녀의 귀가가 늦어 걱정되어 마중 나갔던 상자 가게 주인은 “그 아이는 이미 혼자 돌아갔어요.”라는 말을 듣고 되돌아갔다. 달이 맞은편 토사 저택 위로 떠오르고 꿈같은 빛이 강변 일대의 집들의 방에 흘러들 무렵에도 문신은 아직 절반도 완성되지 않았고, 세이키치는 열심히 양초의 심지를 돋우고 있었다.

한 점의 색을 주입하는 것조차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늘을 찌르고 빼는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마음이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늘 자국은 점점 거대한 무당거미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고, 다시 밤이 새하얗게 밝아올 무렵에는 이 기묘한 마성의 동물이 여덟 개의 다리를 뻗으며 등 전체에 웅크리고 있었다.

봄밤은 오르내리는 강배의 노 소리에 밝아오고, 새벽바람을 안고 내려가는 흰 돛배 꼭대기에서 엷어지기 시작하는 안개 속에 나카스, 하코자키, 레이간지마의 집들의 기와가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세이키치는 마침내 붓을 내려놓고 소녀의 등에 새겨진 거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문신이야말로 그의 생명의 전부였다. 그 작업을 마친 후의 그의 마음은 공허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낮고 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기 위해 문신 속에 내 영혼을 새겼다. 이제부터 일본 전국에 너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예전처럼 겁 많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남자는 네 발 아래 흙먼지가 될 것이다…”

그 말이 통했는지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여자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소녀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무겁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에 거미줄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아프겠지. 네 몸을 거미가 휘감고 있으니까.”

그 말에 소녀는 가늘게 뜬 눈을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 눈동자는 저녁 달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 어서 제 등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세요. 당신의 생명을 얻은 대가로 저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졌겠죠.”

소녀의 말은 꿈결 같았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힘이 깃들어 있었다.

“자, 이제부터 욕실에 가서 색을 올리는 거야. 조금 괴로울 테지만 잠깐만 참아.”

세이키치는 소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아름다워지기만 한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어요.”

소녀는 몸속의 아픔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아, 물이 스며들어 괴로워요… 선생님, 제발 저를 버려두고 2층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이런 비참한 모습을 남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요.”

소녀는 목욕을 마친 몸을 닦을 새도 없이, 세이키치의 손을 뿌리치고 세숫대야로 몸을 던졌다. 격렬한 고통에 신음하며 악몽에 시달리는 듯했다. 미친 듯한 머리카락이 뺨에 흩어졌다. 여자의 뒤에는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새하얀 발바닥 두 개가 그 표면에 비치고 있었다.

어제와는 전혀 달라진 여자의 태도에 세이키치는 놀랐지만, 말한 대로 2층에서 기다렸다. 30분쯤 지나 여자는 젖은 머리를 양 어깨에 늘어뜨리고 몸단장을 마치고 올라왔다. 고통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밝은 눈썹이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그림은 문신과 함께 너에게 주는 거니까, 그걸 가지고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세이키치는 두루마리를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선생님, 저는 이제 지금까지처럼 소심한 마음을 깨끗이 버려버렸어요. – 당신은 제 거름이 되셨네요.”

여자는 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빛냈다. 그 눈동자에는 ‘비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에는 개선가가 울리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그 문신을 한 번 더 보여줘.”

세이키치는 말했다.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벗었다. 아침 햇살이 문신 위로 비추자 여자의 등은 찬란히 빛났다.


기린

봉이여, 봉이여, 무슨 덕이 쇠하였는가.

지나간 자는 간하지 못하고, 올 자는 아직 쫓을 수 있네. 이미, 이미, 지금의 정치하는 자 위태롭도다.

서기 기원전 493년. 좌구명, 맹가, 사마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노나라 정공이 13년째 교외 제사를 지낸 봄 초에 공자는 몇몇 제자들을 수레 좌우에 따르게 하고, 그의 고향인 노나라에서 전도의 길에 올랐다.

사수의 강가에는 향초가 푸르게 싹을 틔웠고, 방산, 니구, 오봉의 정상에 쌓인 눈은 녹았지만, 사막의 모래를 움켜쥐고 오는 흉노 같은 북풍은 여전히 매서운 겨울의 흔적을 불어보냈다. 활기찬 자로는 자색 담비 가죽옷을 휘날리며 일행의 선두에 섰다. 사려 깊은 눈빛의 안연과 성실해 보이는 풍채의 증삼이 삼신을 신고 그 뒤를 따랐다. 정직한 마부 번지는 네 마리 말의 재갈을 잡으며 때때로 수레 위 공자의 노안을 훔쳐보고는 가련한 방랑의 스승 신세에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 일행이 마침내 노나라 국경에 이르자 모두가 아쉬운 듯 고향을 돌아보았으나, 지나온 길은 귀산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공자는 거문고를 들고,

“내 노를 바라보고자 하나,

귀산이 이를 가렸구나.

손에 도끼가 없으니,

귀산을 어찌하리오.”

하고 노래하며 쇠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로부터 또 북쪽으로 사흘쯤 여행을 계속하자, 넓은 들판에서 평온하고 걱정 없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사슴 가죽옷에 삼띠를 두른 노인이 밭두렁에서 이삭을 줍다가 부르는 노래였다.

“유야, 너는 저 노래가 어떻게 들리느냐?”

공자가 자로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 노인의 노래에서는 선생님의 노래 같은 슬픈 울림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나는 작은 새처럼 자유로운 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다. 저 사람이야말로 옛 노자의 제자지. 임류라고 하는데, 이미 백 살은 되었을 거다. 저렇게 봄이 오면 밭에 나와 매년 노래를 부르며 이삭을 줍고 있다. 누군가 저기 가서 이야기를 해보는 게 좋겠다.”

이렇게 말하자, 제자 중 한 명인 자공이 밭두렁으로 달려가 노인을 맞이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이삭을 줍고 계시는데, 후회되는 점은 없으십니까?”

하지만 노인은 돌아보지도 않고 열심히 이삭을 주우며 한 걸음 한 걸음 노래를 부르며 멈추지 않았다. 자공이 여전히 그의 뒤를 쫓아가 소리를 치자, 노인은 마침내 노래를 멈추고 자공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후,

“내게 무슨 후회가 있겠나.”

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어릴 때 행실을 갈고 닦지 않으셨고, 장성해서는 시세를 다투지 않으셨으며, 늙어서는 처자식도 없이 이제 곧 죽음이 가까워졌는데, 무엇을 즐거워하며 이삭을 줍고 노래를 부르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며,

“나의 즐거움이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근심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릴 때 학문에 힘쓰지 않고, 장성해서는 시류를 좇지 않았으며, 늙어서는 처자식도 없이 이제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장수를 바라고 죽음을 슬퍼하는데, 선생님은 어찌하여 죽음을 즐거워하실 수 있습니까?”

자공이 거듭 물었다.

“죽음과 삶은 한 번 갔다가 한 번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서 죽는 것은 저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삶을 구하려 애쓰는 것이 미혹됨임을 알고 있다. 지금 죽는 것도 예전에 태어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공은 그 뜻을 알 수 없었지만, 돌아와 스승께 고하자,

“꽤나 말솜씨 좋은 노인이지만, 아직 도를 얻어 지극히 이르지는 못한 자로 보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며칠 동안 긴 여정을 계속하여 기수의 흐름을 건넜다. 부자가 쓴 검은 천의 관은 먼지로 뒤덮였고, 여우 가죽옷은 비바람에 색이 바랬다.

“노나라에서 공구라는 성인이 왔다. 그 사람이 우리의 포악한 군주와 비에게 행복한 가르침과 현명한 정치를 전해줄 것이다.”

위나라의 도읍에 들어서자 길거리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일행의 수레를 가리켰다. 그들의 얼굴은 굶주림과 피로로 야위었고, 집집마다 벽은 탄식과 슬픔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나라의 아름다운 꽃은 궁궐의 비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옮겨 심어졌고, 살찐 돼지는 비의 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올려 보내졌다. 따스한 봄날이 잿빛의 쇠락한 거리를 헛되이 비추었다. 그리고 도읍 중앙의 언덕 위에는 오색 무지개를 수놓은 듯한 궁전이 피에 배부른 맹수처럼 시체 같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궁전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맹수가 울부짖는 것처럼 나라의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유야, 너는 저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

공자가 다시 자로에게 물었다.

“저 종소리는 하늘에 호소하는 듯한 선생님의 허망한 곡조와도 다르고, 하늘에 맡긴 듯한 자유로운 임류의 노래와도 달라, 하늘에 등을 돌린 환락을 찬미하는 무서운 뜻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것은 옛날 위나라의 양공이 나라의 재물과 백성들의 땀을 다 짜내어 만들게 한 임종이라는 종이지. 그 종이 울릴 때면 어원의 숲에서 숲으로 메아리치며 저렇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는 거야. 또한 폭정에 시달린 사람들의 저주와 눈물이 봉해져 있어서 저렇게 무서운 소리를 내는 거지.”

공자가 이렇게 가르쳤다.

위나라의 군주인 영공은 나라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영대의 난간 가까이에 운모로 만든 병풍과 마노로 만든 의자를 가져오게 하고, 푸른 구름 같은 옷을 입고 흰 무지개 같은 치맛자락을 늘어뜨린 부인 남자와 함께 향기 높은 술을 서로 따르며 깊은 안개 속에 잠든 들과 산의 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 맑은 빛이 샘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민가에서는 아름다운 꽃 색도 보이지 않고 즐거운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일까.”

공이 이렇게 말하며 의아한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이 나라의 백성들이 우리 공의 인덕과 우리 부인의 미모를 찬양하느라 아름다운 꽃이 있으면 모조리 바쳐서 궁전 정원의 담장에 옮겨 심고, 나라 안의 작은 새들까지 한 마리도 남김없이 꽃향기를 그리워하며 정원 주위에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군주 곁에 공손히 서 있던 환관 옹거가 대답했다. 그때 쓸쓸한 거리의 고요함을 깨고 영대 아래를 지나는 공자의 수레 바퀴에서 옥방울 소리가 짤랑짤랑 울렸다.

“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자는 누구일까. 저 사람의 이마는 요임금을 닮았고, 저 사람의 눈은 순임금을 닮았네. 저 사람의 목은 고요를 닮았고, 어깨는 자산을 닮았으며, 허리 아래는 우임금에 3촌 정도 못 미치는구나.”

이것 또한 곁에서 시중들던 장군 왕손가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하지만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장군, 그대는 물정에 밝으니 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내게 가르쳐 주는 게 좋겠소.”

이렇게 말하며 남자 부인은 장군을 돌아보고 달려가는 수레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제가 젊었을 때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주나라의 사관을 지낸 노담이라는 사내 외에는 그토록 훌륭한 용모의 남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고국의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전도의 길에 오른 노나라의 성인 공자일 것입니다. 그 사내가 태어났을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고, 하늘에서 화악의 소리가 들렸으며, 신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사내는 소의 입술과 호랑이의 손바닥, 거북이의 등을 가졌고, 키가 9척 6촌이며, 문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그 사내가 틀림없습니다.”

왕손가가 이렇게 설명했다.

“그 공자라는 성인은 사람들에게 어떤 술법을 가르치는 자요?”

영공은 손에 든 술잔을 비우고 장군에게 물었다.

“성인이란 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주로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며, 천하를 평정하는 정치의 도를 여러 나라의 군주들에게 전수한다고 합니다.”

장군이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세상의 미색을 찾아 남자를 얻었소. 또 사방의 재보를 모아 이 궁전을 지었소. 이제는 천하에 패권을 외치고, 이 부인과 궁전에 걸맞은 권위를 갖고 싶소. 어떻게든 그 성인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천하를 평정하는 술법을 배우고 싶소.”

공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부인의 입술을 엿보았다. 평소 공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그 자신의 말이 아니라 남자 부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세상의 불가사의라는 것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 슬픈 얼굴을 한 남자가 진정한 성인이라면, 저에게 여러 가지 불가사의를 보여줄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부인은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를 들어 멀리 떠나가는 수레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공자 일행이 북궁 앞에 다다랐을 때, 현명한 상을 가진 한 관리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사마(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채찍질하며, 수레의 오른쪽 자리를 비워두고 공손히 일행을 맞이했다.

“저는 영공의 명을 받아 선생님을 맞이하러 온 중숙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이번에 전도의 길에 오르신 일은 사방의 나라들에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긴 여정에 선생님의 옥 같은 마차 덮개는 바람에 헤어지고, 수레의 멍에에서는 탁한 소리가 울립니다. 원컨대 이 새 수레로 갈아타시고, 궁전에 행차하시어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선왕의 도를 우리 군주께 가르쳐 주소서. 선생님의 피로를 풀어드리고자 서포의 남쪽에 수정같이 맑은 온천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목을 적시고자 어원의 동산에 향기로운 유자와 귤이 달콤한 즙을 머금고 열려 있습니다. 선생님의 혀를 달래고자 원유의 우리 안에 살진 멧돼지와 곰, 표범, 소, 양이 부드러운 배를 안고 잠들어 있습니다. 원컨대 두 달이나 세 달, 일 년이나 십 년이라도 이 나라에 수레를 멈추시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흐린 마음을 밝히고 눈먼 눈을 열어주소서.”

중숙어는 수레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했다.

“저는 화려한 궁궐을 가진 왕자의 부귀보다는 삼왕의 도를 사모하는 군주의 진심을 바랍니다. 만승의 자리도 걸주의 사치를 위해서는 부족하고, 백 리의 나라도 요순의 정치를 펼치기에 좁지 않습니다. 영공께서 진정으로 천하의 재앙을 없애고 백성의 행복을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이 나라의 흙에 제 뼈를 묻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윽고 일행은 안내를 받아 궁궐 깊숙이 들어갔다. 검은 신발이 먼지 하나 없는 숫돌 같은 바닥에 딸각딸각 울렸다.

“여인의 손으로 치마를 지을 수 있네.”

라고 목소리를 맞춰 노래하며 많은 궁녀들이 북 소리 높이 비단을 짜고 있는 직조실 앞도 지나갔다. 솜처럼 활짝 핀 복숭아 숲 그늘에서는 원유의 소가 느릿하게 울부짖는 소리도 들렸다.

영공은 현인 중숙어의 조언을 듣고 부인을 비롯한 모든 여인을 멀리하고, 환락의 술이 배인 입술을 씻어내고, 의관을 바로 하여 공자를 한 방에 맞아들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여 천하에 왕이 되는 길을 물었다.

그러나 성인은 남의 나라를 해치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백성의 피를 짜내고 재산을 빼앗는 부에 관해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보다도, 산업보다도, 무엇보다 도덕이 귀중함을 엄숙히 말했다. 힘으로 여러 나라를 굴복시키는 패자의 길과, 인으로써 천하를 품는 왕자의 길의 구별을 알려주었다.

“공이 진정으로 왕자의 덕을 사모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사로운 욕심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이었다.

그 날부터 영공의 마음을 좌우하는 것은 부인의 말이 아니라 성인의 말이었다. 아침에는 묘당에 참석하여 올바른 정치의 길을 공자에게 물었고, 저녁에는 영대에 올라 천문과 사계절의 운행을 공자에게 배웠으며, 부인의 침소를 찾는 밤이라곤 없었다. 비단을 짜는 베틀의 북 소리는 육예를 배우는 관리들의 활시위 소리, 말발굽 소리, 피리 소리로 바뀌었다. 어느 날, 공은 아침 일찍 홀로 영대에 올라 나라 안을 바라보니, 들과 산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지저귀고, 민가에는 고운 꽃이 피어 있었으며, 백성들은 밭에 나가 공의 덕을 찬양하며 노래를 부르면서 농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의 눈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왜 그렇게 울고 계십니까?”

그때 문득 이런 목소리가 들리며, 영혼을 빼앗을 듯한 달콤한 향기가 공의 코를 자극했다. 그것은 남자 부인이 입에 물고 있는 계설향과, 늘 옷에 뿌리고 있는 서역의 향료인 장미수의 냄새였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미부인의 몸에서 나는 향기의 마력은 무참하게도 옥 같은 공의 마음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으려 했다.

“제발 당신의 그 신비한 눈으로 내 눈동자를 노려보지 마세요. 그 부드러운 팔로 내 몸을 묶지 마세요. 나는 성인에게서 죄악을 이기는 길을 배웠지만, 아직 아름다운 것의 힘을 막는 방법은 모르니까요.”

영공은 부인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을 돌렸다.

“아, 그 공구라는 남자는 어느새 당신을 내 손에서 빼앗아 버렸군요. 제가 예전부터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입술은 격렬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부인에게는 이 나라에 시집오기 전부터 송나라 공자인 송조라는 정부가 있었다. 부인의 분노는 남편의 애정이 식은 것보다도 남편의 마음을 지배하는 힘을 잃은 것에 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오늘부터 나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너를 사랑하겠다. 지금까지 나는 노예가 주인을 섬기듯, 인간이 신을 숭배하듯 너를 사랑했다. 내 나라를 바치고, 내 부를 바치고, 내 백성을 바치고, 내 목숨을 바쳐 네 기쁨을 사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일이었다. 하지만 성인의 말씀으로 그보다 더 고귀한 일이 있음을 알았다. 지금까지는 네 육체의 아름다움이 나에게 최상의 힘이었다. 하지만 성인의 마음의 울림은 네 육체보다 더 강한 힘을 내게 주었다.”

이 용감한 결심을 말하는 동안 공은 모르는 사이에 이마를 들고 어깨를 펴며 화가 난 부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당신은 결코 제 말에 거역할 만큼 강한 분이 아니에요. 당신은 정말 가련한 사람이에요. 세상에 자신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만큼 가련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는 당신을 곧 공자의 손아귀에서 되찾아올 수 있어요. 당신의 혀는 방금 훌륭한 말을 했으면서도 당신의 눈동자는 이미 황홀히 제 얼굴에 쏟아지고 있지 않나요? 저는 모든 남자의 영혼을 빼앗을 술수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곧 저 공구라는 성인마저도 제 포로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부인은 자랑스럽게 미소 지으며 공을 흘끗 보고는 옷자락 소리 거칠게 영대를 떠났다.

그날까지 평정을 유지하고 있던 공의 마음에는 이미 두 가지 힘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 위나라에 오는 사방의 군자들은 무엇보다도 반드시 저에게 알현을 청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성인은 예를 중히 여기는 자라고 들었는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환관 옹거가 부인의 뜻을 전했을 때 겸양한 성인은 그것을 거역할 수 없었다.

공자는 일행의 제자들과 함께 남자의 궁전에 나아가 북면해 머리를 조아렸다. 남쪽을 향한 금수 장막 안에는 겨우 부인의 수놓은 신발이 어렴풋이 보였다. 부인이 고개를 숙여 일행의 예에 답할 때 목걸이의 보요와 팔찌의 영락 구슬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위나라를 찾아온 이들은 누구나 ‘부인의 이마는 달기를 닮았고, 부인의 눈은 보희를 닮았다’고 말하며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진정한 성인이라면 삼왕오제의 옛날부터 저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세상에 있었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남자는 휘장을 걷어 올리며 밝게 웃으며 일행을 가까이 불렀다. 봉황 관을 쓰고 황금 비녀와 대모 비녀를 꽂은 채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남자의 웃는 얼굴은 태양이 빛나는 듯했다.

“저는 높은 덕을 지닌 사람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저는 세상의 신기하고 진귀한 것들을 모아두고 있습니다. 제 창고에는 대굴의 금도 있고 수극의 옥도 있습니다. 제 정원에는 루구의 거북이도 있고 곤륜의 학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성인이 태어날 때 나타난다는 기린이란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인의 가슴에 있다는 일곱 개의 구멍도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진정한 성인이라면 저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표정을 바꾸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신기하고 진귀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배운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알고 있고, 또 알아야 할 것들뿐입니다.”

부인은 더욱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제 얼굴을 보고 제 목소리를 들은 남자들은 찌푸린 눈썹을 펴고 흐린 표정을 밝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님은 어째서 계속 그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계신 건가요? 저는 슬픈 얼굴이 모두 추하게 보입니다. 저는 송나라의 송조라는 젊은이를 알고 있는데, 그 남자는 선생님 같은 고귀한 이마는 없지만 대신 봄날의 하늘 같은 맑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제 측근인 옹거라는 환관이 있는데, 그 남자는 선생님 같은 엄숙한 목소리는 없지만 대신 봄날의 새 같은 가벼운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진정한 성인이라면 풍부한 마음에 걸맞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지금 선생님의 얼굴에서 근심의 구름을 걷어내고 고뇌의 그림자를 닦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좌우의 측근들을 돌아보며 한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저는 여러 가지 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향기를 고민하는 가슴에 들이마시면 사람들은 오로지 아름다운 환상의 나라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 금관을 쓰고 연꽃 띠를 두른 일곱 명의 여관이 일곱 개의 향로를 들고 성인의 주위를 둘러쌌다.

부인은 향합을 열어 여러 가지 향을 하나씩 향로에 던졌다. 일곱 줄기의 무거운 연기가 금수 휘장을 타고 조용히 올라갔다. 어떤 것은 노랗고, 어떤 것은 보라색이며, 어떤 것은 하얀 백단향의 연기였다. 그 연기에는 남쪽 바다 밑바닥의 수백 년에 걸친 신기한 꿈이 담겨 있었다. 열두 종류의 울금향은 봄 안개에 키워진 향초의 정수가 응결된 것이었다. 대석구의 못에 사는 용의 침을 반죽한 용연향의 향기와, 교주에서 나는 밀향수의 뿌리로 만든 침향의 기운은 사람의 마음을 멀리 달콤한 상상의 나라로 이끄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성인의 얼굴의 그늘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부인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요. 저는 여러 가지 술과 잔을 가지고 있답니다. 향의 연기가 선생님의 쓰라린 영혼에 달콤한 즙을 머금게 한 것처럼, 술의 한 방울 한 방울이 선생님의 엄숙한 몸에 편안한 안락을 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동안 은관을 쓰고 포도 띠를 맨 일곱 명의 여관이 여러 가지 술과 잔을 공손히 탁자 위로 날랐다.

부인은 하나씩 진귀한 잔에 술을 따라 일행에게 권했다. 그 맛의 묘한 작용은 사람들에게 바른 것의 가치를 경멸하고 아름다운 것의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다. 푸른 빛을 발하며 맑고 투명한 벽옥 잔에 담긴 술은 인간이 맛본 적 없는 하늘의 환희를 전하는 감로와 같았다. 종이처럼 얇은 청옥색 자단 잔에 차가운 술을 부으면 잠시 후 부글부글 끓어올라 슬픈 사람의 창자까지도 태웠다. 남해의 새우 머리로 만든 새우어두 잔은 성난 듯 붉은 수척의 수염을 뻗고, 파도의 물보라 같은 금은을 박아 넣었다. 하지만 성인의 미간의 찌푸림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부인은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어요. 저는 여러 가지 새와 짐승의 고기를 가지고 있답니다. 향의 연기에 영혼의 고뇌를 씻어내고, 술의 힘으로 몸의 긴장을 풀어낸 사람은 풍성한 음식을 혀에 길러야 해요.”

그러한 말 아래, 주관을 쓰고 채소 줄기로 만든 띠를 두른 일곱 명의 여관은 여러 가지 새와 짐승의 고기를 접시에 담아 탁자 위로 날랐다.

부인은 또 그 접시들을 하나씩 한 줄로 권했다. 그 중에는 검은 표범의 태아도 있었다. 단혈의 새끼도 있었다. 곤산룡의 포와 봉수의 발도 있었다. 그 달콤한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물 때는 사람의 마음에 모든 선과 악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성인의 얼굴의 흐림은 걷히지 않았다.

부인은 세 번 다정하게 웃고는,

“아,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훌륭해지고, 선생님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저 신묘한 향기를 맡고, 저 매운 술을 맛보고, 저 농후한 고기를 먹은 사람은 범인들이 꿈도 못 꾸는, 강하고, 격렬하고, 아름다운 황당한 세계에 살아, 이 세상의 근심과 번뇌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의 눈앞에 그 세계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가까이 모신 환관을 돌아보며 방 정면을 가득 채운 장막 뒤를 가리켰다. 깊은 주름을 접어 묵직하게 늘어진 비단 휘장이 중앙에서 둘로 갈라져 좌우로 열렸다.

장막 너머는 정원으로 향한 계단이었다. 계단 아래, 향초가 푸르게 돋아난 땅 위에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때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때로는 땅에 엎드려 뛰어오르듯, 싸우듯 온갖 모양을 한 모습들이 셀 수 없이 구르고 겹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굵게, 어떤 때는 가늘게 애처롭고 섬뜩한 외침과 지저귐이 들렸다. 어떤 이는 활짝 핀 모란처럼 붉게 물들고, 어떤 이는 다친 비둘기처럼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반은 이 나라의 엄격한 법률을 어겼기에, 반은 이 부인의 눈의 자극거리가 되기 위해 혹형을 받는 죄인들의 무리였다. 한 사람도 옷을 걸친 자도, 온전한 살갗을 가진 자도 없었다. 그 중에는 부인의 악덕을 입에 올렸다는 이유로 화로에 얼굴이 불태워지고, 목에 길다란 형구를 끼워 귀를 꿰뚫린 남자들도 있었다. 영공의 마음을 끌었다는 이유로 부인의 질투를 사 코가 잘리고 양 발이 잘린 채 쇠사슬에 묶인 미녀도 있었다. 그 광경을 황홀히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시인처럼 아름답고 철인처럼 엄숙했다.

“저는 때때로 영공과 함께 수레를 타고 이 도성의 거리를 지나곤 했다. 그리고 만약 영공이 연민 어린 눈빛으로 지나가는 여인에게 흘긋 눈길을 주면, 모두 붙잡아 그런 운명을 안겨주었다. 저는 오늘도 공과 선생님을 모시고 도성의 시내를 다녀보고 싶다. 그 죄인들을 보신다면 선생님도 제 마음에 거스르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부인의 말에는 사람을 억누르는 듯한 위력이 숨어 있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잔인한 말을 하는 것이 이 부인의 습관이었다.

서기 기원전 493년 봄 어느 날, 황하와 기수 사이의 상허 땅, 위나라 도성 거리를 네 필의 말이 끄는 두 대의 수레가 달렸다. 두 명의 시녀가 양산을 들고 좌우에 서 있었고, 많은 문관과 여관을 거느린 첫 번째 수레에는 위나라의 영공과 환관 옹거, 그리고 자사 포사의 마음을 품은 남자 부인이 탔다. 여러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두 번째 수레에는 요순의 마음을 품은 주의 시골 성인 공자가 앉아 있었다.

“아, 저 성인의 덕도 저 부인의 포학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오늘부터 또 저 부인의 말이 이 위나라의 법률이 되겠지.”

“저 성인은 얼마나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가. 저 부인은 얼마나 오만한 기색을 하고 있는가. 하지만 오늘처럼 부인의 얼굴이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다.”

길거리에 모여 선 서민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며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우러러보았다.

그날 저녁, 부인은 유독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밤이 깊도록 자신의 침소의 비단 요에 몸을 뉘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살금살금 신발 소리가 나더니 문을 톡톡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아, 드디어 당신이 돌아왔군요. 당신은 다시, 그리고 영원히 제 품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부인은 두 팔을 벌려 긴 소매 안에 영공을 안았다. 술기운에 붉어진 그 유연한 팔은 풀어지지 않는 속박처럼 영공의 몸을 껴안았다.

“나는 당신을 미워해. 당신은 무서운 여자야. 당신은 나를 망치는 악마야.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도 당신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어.”

영공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부인의 눈은 악의 자부심에 빛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공자의 일행은 조나라를 향해 다시 전도의 길에 올랐다.

“내가 아직 덕을 좋아하기를 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는 자를 보지 못했노라.”

이것이 위나라를 떠날 때의 성인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말은 그 고귀한 논어라는 책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년

이제 20년 정도 전의 일이다. 내가 겨우 열 살쯤 되었을 때, 카키가라초 2초메의 집에서 수이텐구 뒤에 있는 아리마 학교에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벚꽃이 피고 하늘이 흐릿하며 닌교초 거리의 감색 천막에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어, 정처 없는 꿈같은 어린 마음에도 어쩐지 봄이 느껴지는 화창한 계절이었다.

어느 따스한 날의 일이었다. 졸음이 오는 듯한 오후 수업이 끝나고 먹물 묻은 손에 주판을 들고 학교 문을 나서려는데,

“하기와라의 에이짱.”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뒤에서 달려와 따라붙는 자가 있었다. 그 아이는 같은 반의 하나와 신이치라고 해서 입학했을 때부터 지금 4학년이 될 때까지 유모를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는 유명한 겁쟁이로, 누구나 약골이니 울보니 하며 험담을 해서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는 도련님이었다.

“무슨 일이니?”

이상하게도 신이치가 말을 걸어온 것을 이상하게 여겨, 나는 그 아이와 유모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늘 우리 집에 와서 같이 놀자. 우리 집 정원에서 이나리 신사 축제가 있거든.”

붉은 끈으로 묶은 듯한 입술에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신이치는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했다. 항상 혼자 있어 시무룩해 하던 아이가 이렇게 뜻밖의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는 조금 당황해서 상대방의 얼굴을 읽으려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에는 약골이니 뭐니 하며 욕을 하고 괴롭혔던 것 같은데 이렇게 눈앞에 두고 보니 역시 명문가의 자제답게 기품 있고 아름다운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비단으로 짠 통소매에 하카타 헌상의 띠를 두르고, 황색 팔자 무늬 하오리를 입고 새하얀 버선에 우레다치를 신은 모습이 하얀 참외 같은 얼굴과 잘 어울려, 새삼 품위에 감동받은 듯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저, 하기와라 도련님, 우리 도련님과 함께 놀아주시지 않겠어요? 실은 오늘 저희가 축제를 하는데요, 되도록 얌전하고 귀여운 친구를 초대해 오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하셔서요. 그래서 도련님이 당신을 초대하신 거예요. 어떠세요, 와 주시겠어요? 아니면 싫으신가요?”

유모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속으로 으쓱해졌지만,

“그럼 일단 집에 가서 말씀드리고 놀러 갈게.”

“음, 그렇군요.”라고 일부러 착한 척하며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당신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어머님께 제가 직접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으로 함께 가시죠.”

“응, 좋아. 네 집은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혼자서도 갈 수 있어.”

“그렇습니까. 그럼 꼭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돌아가실 때는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 집에 말씀해 두고 오세요.”

“아, 그럼 안녕히.”

이렇게 말하고 나는 아이 쪽을 향해 정겹게 인사를 했지만, 신이치는 여느 때처럼 품위 있는 표정을 짓고 미소 한 번 짓지 않은 채 그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늘부터 저 멋진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평소 놀이 친구인 가발집 고키치나 뱃사공 테츠코 같은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눈에 띄는 줄무늬 학교 옷을 평상복인 노란 하치죠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엄마, 놀러 갔다 올게요.”

라고 말하며 게다를 신은 채 현관에 대고 외치고는 그대로 하나와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리마 학교 앞에서 곧장 나카노하시 다리를 건너 하마초의 오카다 담장을 따라 나카즈에 가까운 강변 길로 나온 곳은 어딘지 쓸쓸하고 조용한 한 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신오하시 다리 입구에서 조금 앞쪽 오른편에 유명한 경단 가게와 센베이 가게가 있었고, 그 맞은편 모퉁이에 긴 담장을 두르고 위압적인 철창 문이 있는 집이 하나와의 집이었다. 앞을 지나가면 울창한 저택 안의 나무들 사이로 일본식 건물의 기와지붕이 은회색으로 빛나고, 그 뒤로 서양식 건물의 붉은 벽돌이 어렴풋이 보여 과연 부자가 사는 듯한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그날은 정말 집안에 무슨 축제라도 있는 듯 명랑한 바보 춤 북소리가 담장 밖으로 새어 나왔고, 활짝 열린 옆길의 뒷문으로는 이 근처에 사는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줄지어 정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정문 옆 문지기 방에 가서 신이치를 불러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왠지 무서운 기분이 들어 그 아이들과 같이 뒷문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 얼마나 큰 저택일까.”

이런 생각으로 나는 표주박 모양의 연못 가장자리 잔디밭에 서서 넓디넓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치카노부가 그린 치요다의 대오라는 세 폭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물길과 가산, 눈구경용 등롱, 도자기 학, 세척용 돌 등이 주문 제작한 듯 배치되어 있었다. 물가의 긴 돌에서 여러 개의 디딤돌이 길게 이어져 있고, 저 멀리에 어떤 저택 같은 건물이 보였다. 신이치가 저기에 있는 걸까 생각하자 오늘은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많은 아이들이 양탄자 같은 푸른 잔디 위를 밟으며 따뜻하고 평화로운 날씨 속에서 놀고 있었다. 보니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 한쪽 구석의 이나리 신사에서 뒤쪽 문까지 한 칸 걸러 행등이 늘어서 있고, 대접용 감주와 오뎅, 팥죽 등의 노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여흥으로 열린 가구라와 어린이 씨름 주변에는 사람들이 산처럼 모여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왔건만 별 소득도 없이 서글퍼져 나는 목적 없이 그 주변을 걸어 다녔다.

“형, 자 감주 마시러 오세요. 돈은 안 받아요.”

감주 가게 앞에 오자 빨간 허리띠를 맨 하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지만,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곳을 지나쳤다. 곧 오뎅 가게 앞에 오자 또,

“형, 자 오뎅 먹으러 오세요. 돈이 없어도 줄게요.”

라고 대머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싫어, 싫어.”

나는 서글픈 목소리를 내며 체념한 듯 뒷문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감색 법피를 입은 술 냄새 나는 남자가 어디선가 나타나,

“형, 넌 아직 과자를 안 받았지? 돌아갈 거면 과자 받고 가. 자, 이걸 가지고 저기 저택의 아주머니한테 가면 과자를 줄 테니까 빨리 받아 와.”

이렇게 말하며 새빨갛게 물들인 과자 티켓을 건네주었다. 나는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지만, 혹시 저택 쪽으로 가면 신이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말대로 티켓을 받아 다시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드는 하녀에게 발견되어,

“도련님, 잘 오셨어요.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자, 이쪽으로 오세요. 이런 천한 아이들과 어울려 노시면 안 됩니다.”

라며 친절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눈물이 글썽거려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바닥이 높고 아이들의 키 정도 되는 툇마루를 따라 정원으로 돌출된 넓은 방의 그늘로 돌아가자, 열 평 정도 되는 안뜰에 싸리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방 앞으로 나왔다.

“도련님, 친구분이 오셨어요.”

청닥나무 숲 아래에서 여종이 소리쳤다. 맞은편 미닫이문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신이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툇마루로 뛰어나왔다. 저 겁쟁이가 어디서 이런 힘찬 목소리가 나오는 건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이 부신 듯 화려하게 차려입은 친구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부타에 문양이 있는 예복에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은 툇마루 가득 비치는 맑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검은 나나코 하오리 천이 은모래처럼 반짝였다.

친구에게 이끌려 들어간 곳은 여덟 장 정도의 작고 깔끔한 방이었다. 떡과자 상자 바닥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향기가 방 안에 떠다녔고, 푹신한 여덟 장의 방석이 두 개 기다리는 듯 깔려 있었다. 곧 차와 과자, 팥밥에 입가심 음식을 올린 옻칠 쟁반이 들어왔다.

“도련님, 어머님께서 친구분과 사이좋게 이것들을 드시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오늘은 좋은 옷을 입고 계시니 너무 장난치지 마시고 얌전히 놀으세요.”

여종은 머뭇거리는 나에게 팥밥과 금단을 권하고 옆방으로 물러갔다.

조용하고 햇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미닫이 문지에 툇마루 앞 목련 그림자가 비치고, 저 멀리 정원에서 텐, 텐, 텐 하고 신악 북소리가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먼 신비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짱, 넌 항상 이 방에 있니?”

“아니, 여긴 사실 누나 방이야. 저기 누나의 재미있는 장난감이 많이 있는데, 보여줄까?”

이렇게 말하며 신이치는 벽장 안에서 나라 인형의 시쇼, 나무 조각 세공의 조와 우바, 교토의 게시 인형, 후시미 인형, 이즈쿠라 인형 등을 우리 주위에 예쁘게 늘어놓고, 여러 가지 남녀 모습을 한 쿠비닝교를 두 장 정도의 다다미 눈에 수없이 꽂아 보여주었다. 우리 둘은 방석에 엎드려 수염을 기르거나 눈을 부라리고 있는 정교한 인형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듯 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상상했다.

“여기에 그림책도 많이 있어.”

신이치는 다시 옷장에서 반시로와 기쿠노조의 초상화가 가득 들어있는 쿠사조시를 끄집어내어 여러 가지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를 목판 인쇄의 극채색이 광택도 바래지 않고 선명하게 향기를 내뿜고 있는 미노가미 표지를 열자, 곰팡이 냄새가 나는 보풀이 일어난 종이 위에 구 막부 시대의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이 생생한 이목구비에서 섬세한 손발의 손끝까지 마치 움직여 나올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마침 이 저택 같은 궁전의 뒤뜰에서 많은 시녀들과 함께 공주가 반딧불을 쫓고 있는가 하면, 쓸쓸한 다리 옆에서 깊은 삿갓을 쓴 사무라이가 하인의 목을 베어 시체의 품에서 빼앗은 편지함의 편지를 달빛에 비추어 읽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검은 옷에 복면을 한 악당이 침실로 숨어 들어가 곤히 자고 있는 표고버섯 모양 머리의 여자의 목에 이불 위로 칼을 찔러 넣고 있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등잔불빛이 희미한 한 방 안에서 농염한 잠옷 차림의 여자가 피 묻은 면도칼을 입에 물고 허공을 붙잡은 채 발밑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죽은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꼴 좋군.”이라고 말하면서 서 있었다. 신이치도 나도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기괴한 살인의 광경이었다. 안구가 튀어나온 시체의 얼굴이라든가, 허리에서 아래만 남아 서 있는 사람이라든가, 새카만 혈흔이 구름처럼 얼룩져 있는 이상한 그림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머, 또 신짱이 남의 물건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네.”

이렇게 말하며 유젠 무늬의 후리소데를 입은 열세 네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미닫이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이마가 좁고 눈매와 입매가 또렷한 얼굴에 어린아이다운 분노를 담고 서서 동생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신이치는 한 순간 움츠러들어 창백해질 것 같았지만 뜻밖에도,

“뭐라고 하는 거야. 장난 같은 거 치지 않았어. 친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잖아.”

신이치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누나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림책을 넘겼다.

“장난치지 않고 뭐야. 안 된다고 했잖아.”

누나는 재빨리 달려와 신이치가 보고 있던 책을 빼앗으려 했지만, 신이치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표지와 뒷면을 양쪽에서 잡아당기며 제본된 부분이 찢어질 듯했다. 잠시 그렇게 서로 노려보다가,

“누나는 인색해! 이제 빌리지 않을 거야.”

신이치는 갑자기 책을 내던지고 손에 잡히는 나라 인형을 누나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인형은 빗나가 도코노마의 벽에 부딪혔다.

“봐봐, 이렇게 장난치잖아. 또 날 때리려고 하는 거지? 좋아, 때리고 싶으면 실컷 때려. 저번에도 네 덕분에 이렇게 멍이 들어서 아직도 안 없어졌잖아. 이걸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일러바치겠어. 기억해 둬.”

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원망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치리멘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새하얀 오른쪽 다리의 정강이에 난 멍 자국을 보여줬다. 무릎 근처에서 장딴지로 이어지는 부위에, 혈관이 파랗게 비치는 얇고 부드러운 피부 위로 보라색 반점이 번진 듯 아프게 물들어 있었다.

“일러바치고 싶으면 맘대로 해. 구두쇠, 구두쇠.”

신이치는 인형을 발로 마구 짓밟으며 말했다.

“정원에 가서 놀자.”

그는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누나는 울고 있을까?”

밖으로 나오자 마음이 좀 아프고 슬퍼져서 나는 물었다.

“울어도 상관없어. 매일 싸워서 울리게 할 거야. 누나도 첩의 자식이니까.”

신이치는 이런 건방진 말을 하며 서양관과 일본관 사이에 있는 케야키와 쿠누기 나무의 그늘로 걸어갔다. 그곳은 무성한 고목들의 가지가 빽빽하게 햇빛을 가려 축축한 땅에는 이끼가 깔려 있었고, 어둡고 서늘한 기운이 두 사람의 목덜미로 스며드는 듯했다. 아마도 옛 우물의 흔적일 것이다. 연못인지 웅덩이인지 모를 흐린 물웅덩이가 있었고, 수초가 녹청처럼 떠 있었다. 둘은 그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축축한 흙 냄새를 맡으며 멍하니 발을 뻗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게 뭘까?”

나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건 누나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거야.”

“피아노가 뭐야?”

“오르간 같은 거래. 누나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외국 여자가 매일 저 서양관에 와서 누나한테 가르쳐주고 있어.”

신이치는 서양관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살색 천이 드리워진 창문 안에서 계속 새어 나오는 신비로운 소리… 어떤 때는 숲 속 깊은 곳에서 요괴가 웃는 메아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동화에 나오는 난쟁이들이 여럿이 모여 춤추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수천 개의 가는 상상의 실로 어린 머릿속에 미묘한 꿈을 짜 넣어가는 신비로운 소리는 마치 이 옛 연못 밑바닥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연주 소리가 멎을 무렵, 나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황홀감의 여운을 마음에 끌어안으며 저 창문에서 외국인이나 언니들이 얼굴을 내밀지 않을까 하고 기대에 부풀어 2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신짱, 너는 거기 놀러 가지 않니?”

“아, 장난치면 안 된다고 엄마가 아무래도 올려보내 주지 않아. 언젠가 몰래 가보려고 했더니 자물쇠가 잠겨 있어서 도저히 열 수가 없었어.”

신이치도 나와 같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2층을 올려다보았다.

“도련님, 셋이서 뭐라도 해서 놀까요?”

문득 이런 소리가 나더니 뒤에서 달려온 자가 있었다. 그것은 같은 아리마 학교의 1-2학년 위인 학생으로, 이름은 몰라도 매일같이 나이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유명한 악동 대장이라 얼굴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런 곳에 왔을까 하고 의아해하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니, 그 아이는 신이치에게 ‘센키치 센키치’라고 반말로 부르면서도 ‘도련님 도련님’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하나와 집 마부의 아들이었는데, 그때 나는 맹수 조련사 샤리네의 미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신이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셋이서 도둑놀이 하자. 내랑 에이짱이 순경 할 테니까 너는 도둑 해.”

“해도 좋지만 지난번처럼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요. 도련님은 줄로 묶고 코딱지를 붙이고 그러잖아요.”

이 대화를 듣고 나는 더욱 놀랐지만, 귀여운 소녀 같은 신이치가 거칠고 곰 같은 센키치를 묶어 괴롭히는 광경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제로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신이치와 나는 순경이 되어 연못 주변과 숲 사이를 누비며 도둑인 센키치를 쫓아다녔지만, 이쪽은 둘이어도 상대는 나이가 많아서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겨우 서양관 뒤편 담장 모퉁이에 있는 물건 보관 창고까지 몰아넣었다.

둘은 서로 눈짓하며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센키치는 어디에 숨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절임이나 누룩된장, 간장통 등의 숨 막힐 듯한 오래된 냄새가 어두컴컴한 창고 안에 가득 차 있었고, 노래기들이 거미줄 투성이의 천장 밑이나 통 주변을 기어다니는 모습이 어린 것들에게 무언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장난을 부추기는 듯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킥킥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들보에 매달린 보관 바구니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센키치의 얼굴이 나타났다.

“야, 내려와. 내려오지 않으면 혼난다.”

신이치는 아래에서 고함을 지르며 나와 함께 빗자루로 센키치의 얼굴을 찌르려 했다.

“자, 이리 와봐. 누구든 가까이 오면 오줌을 갈겨버릴 거야.”

센키치가 바구니 위에서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신이치는 조심스레 바구니 바로 아래로 돌아가 손에 잡히는 대나무 막대기로 바구니 틈새로 센키치의 엉덩이며 발바닥이며 가리지 않고 찌르기 시작했다.

“자, 이래도 안 내려올 거야?”

“아야, 아파. 네, 네, 이제 내려갈 테니까 용서해 주세요.”

비명을 지르며 사과하면서 아픈 관절을 부여잡고 내려오는 센키치의 가슴팍을 붙잡고,

“어디서 뭘 훔쳤는지 솔직히 자백해.”

“자, 센키치, 어서 말해 봐.” 신이치가 되는대로 심문을 시작했다. 센키치는 시로키야에서 옷감 다섯 필을 훔쳤다느니, 닌벤에서 가츠오부시를 훔쳤다느니, 일본은행에서 지폐를 속였다느니 하며 거짓말이지만 건방진 말을 했다.

“음, 그래? 대단한 놈이구나. 또 나쁜 짓 한 거 없어? 사람 죽인 적은 없나?”

“네, 있습니다. 쿠마가이 둑에서 안마사를 죽이고 50량짜리 지갑을 훔쳤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요시와라에 갔습니다.”

무대 극이나 들여다보는 장치에서 들은 것인지 아주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그 외에도 사람을 더 죽였겠지. 좋아, 좋아, 말하지 마. 말하지 않으면 고문을 가하겠어.”

“이게 전부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신이치는 손을 모아 비는 듯한 모습을 외면한 채 재빨리 센키치가 매고 있던 더러운 연한 노란색 당 치맨 허리띠를 풀어 뒤로 묶고 남은 끈으로 두 발목까지 능숙하게 묶었다. 그러고 나서 센키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뺨을 꼬집고 눈꺼풀을 뒤집어 눈알을 드러나게 하고 귓불이나 입술 끝을 잡고 흔들어보는 등 가부키의 어린 배우나 게이샤의 손처럼 가냘픈 푸르스름한 손가락이 교활하게 움직여 거칠고 검고 보기 흉하게 살찐 센키치의 얼굴 근육을 고무처럼 재미있게 늘였다 줄였다 했다. 그것에도 싫증이 나자,

“잠깐, 잠깐. 너는 죄인이니까 이마에 문신을 새겨주마.”

이렇게 말하며 그곳에 있던 숯 자루에서 사쿠라 숯 덩어리를 꺼내 침을 뱉고 센키치의 이마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센키치는 엉망이 되어 무너져 내릴 듯한 얼굴을 기이하게 일그러뜨리며 흐느껴 울고 있었지만 마침내 그런 기력마저 잃고 상대방의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평소 학교에서는 바보처럼 강해 보이던 불량배 두목이 신이치 때문에 볼품없는 꼴이 되어 괴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종의 이상한 쾌감에 사로잡혔지만, 내일 학교에서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신이치와 함께 장난을 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허리띠를 풀어주자 센키치는 원망스러운 듯 신이치의 얼굴을 흘겨보며 힘없이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아무리 말을 걸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팔을 잡아 일으키려 해도 다시 축 늘어져 쓰러졌다. 둘 다 조금 걱정이 되어 상태를 살피며 말없이 서 있었다.

“야, 무슨 일 있어?”

신이치가 짓궂게 멱살을 잡아 뒤집어 보니 어느새 센키치는 우는 척하며 더러워진 얼굴을 긴 소매로 반쯤 닦아내고 있었다. 그 우스운 모습에,

“와하하하”

셋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이번엔 다른 걸로 놀자.”

“도련님, 이제 난폭한 짓은 그만두세요. 봐요, 이렇게 심하게 자국이 났잖아요.”

보니 센키치의 손목에는 묶였던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내가 늑대가 될 테니까 너희 둘은 여행자가 되는 거야. 그러다가 마지막에 둘 다 늑대한테 잡아먹히는 거지.”

신이치가 또 이런 말을 꺼내서 나는 소름이 돋았지만 센키치가

“그렇게 해요.”

라고 말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나와 센키치가 여행자 역할을 맡고 이 물건 창고가 절이라고 치고 야숙을 하고 있으면 한밤중쯤 신이치 늑대가 습격해 와서 문 밖에서 자꾸 짖기 시작한다. 마침내 늑대는 문을 물어뜯고 절 안으로 기어 들어와 개 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한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두 여행자를 쫓아다닌다. 신이치가 너무 진지하게 하고 있어서 잡히면 어떤 꼴을 당할지 나는 진심으로 조금 무서워져서 히죽히죽 불안한 웃음을 지으며 실제로 필사적으로 자루 위나 멍석 뒤를 도망쳤다.

“야 센키치, 넌 이제 다리를 물렸으니까 걸으면 안 돼.”

늑대는 이렇게 말하며 여행자 한 명을 당 모퉁이로 몰아붙이고는 몸 위로 뛰어올라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센키치는 배우가 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눈을 부라리고 입을 일그러뜨리며 갖가지 몸짓을 능숙하게 연기했다. 마침내 목젖을 물어뜯겼고 죽음을 앞둔 비명을 마지막으로 손발의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며 허공을 움켜쥐다가 퍽 하고 쓰러졌다.

이제 내 차례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긴장되어 서둘러 통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늑대가 옷자락을 물고 무서운 힘으로 아래에서 잡아당겼다. 나는 창백해져서 통을 꽉 붙잡아보았지만 늑대의 기세에 기가 죽어 ‘아, 이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겠구나.’라고 체념의 눈을 감는 순간 끌어내려졌다. 마룻바닥에 뒤로 넘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신이치가 폭풍처럼 내 목을 덮쳐 목젖을 물어뜯었다.

“자, 이제 둘 다 시체가 됐으니까 뭘 당해도 움직이면 안 돼. 이제부터 뼈까지 갉아먹어 줄 거야.”

신이치가 이렇게 말하자 두 사람 모두 흐트러진 채 대자로 마룻바닥에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는 온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고 옷자락이 젖혀진 곳으로 차가운 바람이 허벅지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들어왔다. 한쪽으로 뻗은 오른손 중지 끝이 센키치의 머리카락에 살짝 닿아있는 것을 느꼈다.

“이놈이 더 살이 쪄서 맛있어 보이니까 이놈부터 먹어야겠어.”

신이치는 무척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센키치의 몸 위로 기어올랐다.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돼요.”

센키치는 반쯤 눈을 뜨고 작은 목소리로 호소하듯 속삭였다.

“그렇게 심하게 하지 않을 테니까 움직이지 마.”

신이치는 우물우물 혀를 크게 움직이며 머리부터 얼굴, 몸통부터 배, 양팔에서 허벅지와 정강이까지 씹어대며 흙 묻은 짚신 그대로 눈과 코 위에서도 가슴 위에서도 마음대로 밟아대서 센키치는 또다시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자, 이제부터 엉덩이 살이다.”

이윽고 센키치는 엎드려 눕혀졌고 엉덩이가 들춰진 것 같더니 락교를 두 개 나란히 놓은 것처럼 허리 아래가 벗겨져 쑥 드러났다. 걷어 올린 옷자락을 시체의 머리에 덮어씌우고 등에 올라탄 신이치는 또다시 우물우물 씹어댔지만 센키치는 어떤 일을 당해도 꾹 참고 있었다. 추운 모양인지 여기저기 돋은 엉덩이 살이 곤약처럼 떨고 있었다.

이제 나도 곧 그와 같은 꼴을 당하게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센키치처럼 심하게 당하지는 않겠지 싶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이치가 내 가슴 위에 올라타더니 우선 코끝부터 먹기 시작했다. 내 귀에는 카이키누 하오리 안감이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코에는 옷에서 나는 장뇌 향이 퍼져 나갔다. 부드러운 하부타에 뺨이 살짝 쓰다듬어졌고, 가슴과 배에는 신이치의 따뜻한 몸의 무게가 실렸다. 촉촉한 입술과 매끄러운 혀끝이 간지럽게 핥아 가는 기괴한 감각은 두려움을 지워버리고 매혹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나는 즐거움을 느꼈다. 갑자기 내 얼굴은 왼쪽 귀밑털에서 오른쪽 뺨까지 거칠게 밟혔다. 그 아래에 있는 코와 입술은 짚신 밑창의 흙과 마찰했지만, 나는 그것조차 즐거운 것으로 느꼈다. 어느새 마음도 몸도 완전히 신이치의 꼭두각시가 되어 기뻐하게 되었다.

이윽고 나도 엎드려졌고 치마가 벗겨졌다. 허리부터 아래를 핥아 먹혔다. 신이치는 두 구의 시체가 벗겨진 엉덩이를 토간에 나란히 쓰러뜨려 놓은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까의 여중이 헛간 문간에 나타나 나와 센키치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아이고, 도련님이 여기 계셨군요. 아니, 옷을 엉망으로 만들고 뭘 하고 계신 거예요. 왜 또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만 노시는 걸까요. 센짱, 네가 나빠. 정말.”

여중은 무서운 눈빛으로 꾸짖으면서 진흙 발자국이 찍힌 센키치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직 밟힌 얼굴의 자국이 따끔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자, 이제 목욕물이 데워졌으니 적당히 놀다 들어가세요. 안 그러면 어머님께 혼나실 거예요. 하기와라 도련님도 들어오세요. 이제 늦었으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여중은 나에게만은 상냥하게 대했지만,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데려다 주지 않아도 돼.”

나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

문까지 배웅해 준 세 사람에게,

“잘 가.”

말하고 밖으로 나가니 어느새 거리는 푸른 저녁 안개에 싸여 있었고, 강가 거리에는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이상한 나라에서 갑자기 사람 사는 곳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늘 있었던 일을 꿈처럼 회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이치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제멋대로인 행동은 하루 만에 완전히 내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가보니 어제 그렇게 심한 꼴을 당했던 센키치는 여전히 많은 불량배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반면 신이치는 또 평소처럼 의기소침해져서 하녀와 함께 작아진 채 운동장 구석에서 쪼그리고 있는 게 안쓰러웠다.

“신짱, 뭐 하고 놀지 않을래?”

라고 우연히 내가 말을 걸어봐도,

“으응.”

이라고 말하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불쾌한 듯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로부터 4-5일이 지난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신이치의 하녀가 또 나를 불러 세우더니,

“오늘은 아가씨의 히나마츠리 인형이 진열되어 있으니 놀러 오세요.”

라고 말하며 나를 초대했다.

그날은 정문으로 들어가 문지기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 옆에 있는 좁은 격자문을 열자 곧바로 센키치가 뛰어나와 복도를 따라 중이층의 열 평 방으로 안내했다. 신이치와 누나 미츠코는 히나단 앞에 엎드려 콩튀김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 둘이 들어오자 갑자기 킥킥 웃기 시작했다. 또 무슨 못된 장난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

“도련님, 뭐 재밌는 일이라도 있나요?”

라고 센키치가 불안한 듯 남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융단을 깐 바닥의 히나단에는 아사쿠사 관음당 같은 자색 지붕이 솟아 있고, 내리사마를 비롯해 다섯 명의 궁녀들이 전상에 늘어서 있었다. 우콘의 벚나무와 사콘의 귤나무 아래에는 세 명의 술꾼 지친들이 술을 데우고 있었다. 그 다음 단에는 촛대며 상이며 치아 염색 도구며, 당초무늬의 금 뿌림 그림을 한 귀여운 조도품들이 이번에 누나의 방에 있었던 여러 인형들과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나는 히나단 앞에 서서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살짝 신이치가 다가와,

“지금 말이야, 센키치를 백주로 취하게 만들 거야.”

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파다닥 센키치 쪽으로 달려가,

“야 센키치, 이제부터 넷이서 술자리를 하자.”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네 사람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콩 볶은 것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것 참 훌륭한 술이군요.”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하며 모두를 웃게 하면서, 센키치는 술잔을 쥐는 듯한 손짓으로 찻잔에서 소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곧 취할 거라고 생각하니 우스워서 가슴이 들썩거렸고, 누나 미츠코는 가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센키치가 취할 무렵에는 함께 상대를 해준 다른 세 사람도 슬슬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아랫배 쪽에서 뜨거운 술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살짝 땀이 배어 나왔다. 머리 위가 이상하게 저리고, 방바닥이 배 밑바닥처럼 위아래좌우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도련님, 저는 취했어요. 모두들 얼굴이 새빨개졌지 않나요? 한번 일어나서 걸어볼까요?”

센키치는 일어나서 팔을 크게 흔들며 방 안을 걷기 시작했지만, 곧 발걸음이 휘청거리더니 넘어지는 바람에 도코바시라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세 사람이 와하하 터져 웃자,

“아야, 아야.”

하며 머리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당사자도 우스워서 참을 수 없어 콧소리를 내며 킥킥 웃고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도 센키치를 따라 일어나 걷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다가 웃고, 깔깔거리며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에잇, 아 기분 좋다. 나 취했어, 이 자식아.”

센키치가 엉덩이를 걷어 올리고 어깨에 야자오를 만들어 직공 흉내를 내며 걸어가자, 신이치도 나도, 마지막에는 미츠코까지 엉덩이를 걷어 올리고 어깨에 주먹을 꽂고 마치 오쟈키치상 같은 모습으로,

“이 자식아, 난 취했다고.”

하며 방 안을 비틀비틀 돌아다니다 웃으며 넘어졌다.

“아, 도련님 도련님, 여우놀이 할까요?”

센키치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나와 센키치, 두 시골뜨기가 여우 퇴치하러 나갔다가 도리어 여우로 변한 미츠코에게 속아 넘어가 산산조각이 난 상황이었다. 거기에 사무라이 신이치가 지나가다 두 사람을 구해주고 여우를 퇴치해 줄 것이라는 줄거리였다. 아직 취해 있던 세 사람은 곧바로 찬성하고 연극을 시작했다.

먼저 센키치와 내가 이마에 수건을 두르고 엉덩이를 걷어 올린 채, 각자 털이개를 휘두르며,

“이 근처에 나쁜 여우가 나와서 장난을 치니까, 오늘은 반드시 퇴치해야겠어.”

하고 말하며 등장했다. 맞은편에서 미츠코 여우가 나타나,

“저기요, 당신들을 대접해 드릴 테니 저와 함께 오시지 않겠어요?”

하고 말하며 퐁 하고 두 사람의 어깨를 치자, 갑자기 나도 센키치도 홀린 듯이 되어 버렸다.

“이야, 이게 정말 대단한 미인이로구나.”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미츠코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너희 둘 다 속고 있어. 똥을 진수성찬인 줄 알고 먹고 있는 거라고.”

미츠코는 참을 수 없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자신의 입으로 뜯어낸 팥떡이며 발로 마구 짓밟은 메밀만쥬, 콧물로 반죽한 볶은 콩 등을 더럽다는 듯이 접시 위에 높이 쌓아 우리 앞에 늘어놓았다.

“이건 오줌으로 만든 술이야. 자, 먹어봐.”

하며 백주에 가래와 침을 뱉어 넣어 두 사람에게 권했다.

“아, 맛있어. 정말 맛있어.”

혀를 차며 나도 센키치도 맛있다는 듯이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웠지만, 백주와 볶은 콩은 이상하게 짠맛이 났다.

“이제부터 내가 삼현을 연주해줄 테니 너희 둘은 접시를 쓰고 춤을 춰.”

미츠코가 먼지털이를 삼현 대신 들고 “자, 자”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둘은 과자 접시를 머리에 얹고 “요이키타, 요이야사” 하며 발을 구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곳에 도착한 사무라이 신이치가 갑자기 여우의 정체를 알아챘다.

“짐승 주제에 사람을 속이다니 천하에 무도한 놈이로구나. 흥, 묶어서 죽여버리겠다.”

“앗, 신짱 난폭한 짓을 하면 안 돼.”

승부욕 강한 미츠코는 지기 싫어 신이치와 맞붙어 싸우며 말괄량이 본성을 드러내고 고집스럽게 좀처럼 항복하지 않았다.

“센키치, 이 여우를 묶을 테니 네 허리띠를 빌려줘. 그리고 날뛰지 못하게 둘이서 이놈의 다리를 잡고 있어.”

나는 얼마 전에 본 쿠사조시에 나온 하타모토 젊은 사무라이가 부하들과 힘을 합쳐 미인을 유괴하는 삽화를 떠올리며, 센키치와 함께 유젠 치마 자락 위로 두 다리를 꽉 붙잡았다. 그 사이 신이치는 간신히 미츠코의 뒷손을 묶어 올려 마침내 툇마루 난간에 묶어놓았다.

“에이짱, 이놈의 허리띠를 풀어서 재갈을 물려.”

“알았어.”

하고 나는 즉시 미츠코의 뒤로 가서 울금 치리멘 허리띠를 풀고, 새로 올린 당인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목덜미의 기름진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귀를 스치며 턱 부근을 두 바퀴 정도 감은 뒤 힘껏 조였더니 치리멘이 볼록한 뺨살에 파고들어 미츠코는 킨카쿠지의 유키히메처럼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했다.

“자, 이번엔 거꾸로 너를 똥공격해주마.”

신이치가 떡과자를 닥치는 대로 입에 물고는 펫펫 뱉어 미츠코의 얼굴에 퍼부었다. 순식간에 그토록 아름답던 설희의 용모가 나병환자나 피부병 환자처럼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 되어갔다. 그 재미에 나와 센키치도 결국 동참하게 되었다.

“이 자식, 아까 우리에게 더러운 걸 먹이더니.”

이렇게 말하며 신이치와 함께 펫펫 뱉기 시작했지만, 점차 힘이 빠져 결국에는 이마든 뺨이든 가리지 않고 온갖 곳에 떡과자 조각을 문질러 붙이고 팥소를 으깨고 대복 껍질을 문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미츠코의 얼굴을 골고루 더럽혀버렸다. 눈코 입도 분간할 수 없는 새카만 괴물이 일본식 올림머리를 하고 화려한 기모노 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백물어나 요괴대전에 나올 법했다. 미츠코는 이제 저항할 기운도 없어진 듯 무엇을 당해도 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이번만은 목숨을 살려주지. 앞으로 사람을 속이거나 하면 죽여버릴 거야.”

잠시 후 신이치가 재갈과 묶은 것을 풀어주자 미츠코는 휙 일어나더니 갑자기 미닫이 밖으로, 복도를 후다닥 달아났다.

“도련님, 누나가 화가 나서 일러바치러 갔어요.”

이제 와서 큰일 났다는 듯이 센키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일러봤자 상관없어. 여자 주제에 건방져서 매일 싸워서 괴롭혀 주는 거야.”

신이치가 허세를 부리며 으스대고 있는데 이번에는 슬그머니 미닫이가 열리더니 미츠코가 얼굴을 깨끗이 씻고 돌아왔다. 팥과 함께 분까지 씻어 내린 듯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청아하고 맑은, 윤기 나는 옥 같은 피부가 한층 더 빛나 보였다.

또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려나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들키면 창피할 것 같아서 살짝 욕실에 가서 씻고 왔어. 정말 너희들 너무했어.”

미츠코는 부드럽게 원망을 늘어놓을 뿐 오히려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러자 신이치가 기세를 몰아,

“이번엔 내가 인간이 되고 셋이서 개가 되는 건 어때? 내가 과자 같은 걸 던져주면 모두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그걸 먹는 거야. 어때, 좋지?”

라고 말했다.

“좋아요. 합시다. 자, 개가 됐어요. 멍멍, 멍멍.”

센키치가 곧바로 네 발로 기어 방 안을 힘차게 뛰어다녔다. 그 뒤를 이어 나도 달려나가자 미츠코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암캐야.”

라며 우리들 사이로 끼어들어 여기저기를 기어 다녔다.

“자, 찡찡. … 기다려 기다려.”

세 사람은 마음대로 재주를 부리게 되었다.

“자, 됐다!”

하고 말하면 서로 먼저 과자가 있는 쪽으로 뛰어들어갔다.

“아, 좋은 일이 있다. 기다려, 기다려.”

이렇게 말하며 신이치는 방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홍색 치렴천으로 만든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진짜 친[狆] 두 마리를 데리고 와서 우리 무리에 합류시켰다. 그리고는 먹다 남은 팥소나 코딱지, 침이 묻은 만두 같은 것들을 다다미 위에 흩뿌렸다. 개와 친들은 서로 다투어 먹이 위로 몰려들어 이빨을 드러내고 혀를 내밀며 한 개의 떡과자를 서로 물고 당기거나 어떨 때는 서로의 코끝을 핥기도 했다.

과자를 다 먹어치운 친들은 신이치의 손가락 끝이나 발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세 사람도 지지 않으려는 듯 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아, 간지러워, 간지러워.”

신이치는 난간에 걸터앉아 새하얗고 부드러운 발바닥을 번갈아 가며 우리의 코끝에 내밀었다.

“인간의 발은 짜고 신 맛이 나는 거야. 깨끗한 사람은 발가락 손톱 모양까지 예쁘게 생겼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열심히 다섯 개의 발가락 사이를 핥았다.

친들은 점점 더 장난을 치기 시작해 뒤로 넘어져 네 발을 허공에서 춤추게 하고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신이치도 재미있어하며 발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거나 배를 문질러 주는 등 여러 가지 장난을 쳤다. 나도 그 흉내를 내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부타에 같은 발바닥은 친과 똑같이 볼을 밟거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눈알 위를 뒤꿈치로 눌렸을 때와 발바닥으로 입술을 막혔을 때는 조금 괴로웠다.

그렇게 놀다가 그날도 저녁때까지 놀고 돌아갔다. 그 다음날부터는 거의 매일 하나와의 집을 찾아가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밤낮으로 신이치와 미츠코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점점 익숙해질수록 신이치의 제멋대로는 더욱 심해졌고, 나도 완전히 센키치와 같은 부하가 되어 놀 때마다 반드시 맞거나 묶이게 되었다. 이상한 일은 그 고집 센 누나마저도 여우 퇴치 이후 완전히 항복해버려 신이치는 물론 나와 센키치에게도 거역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때때로 세 사람 곁에 와서는,

“여우놀이 하지 않을래?”

라며 오히려 괴롭힘 당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기색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신이치는 매주 일요일마다 아사쿠사나 닌교초의 장난감 가게에 가서 갑옷과 칼을 사 와서는 곧바로 그것을 휘둘렀다. 미츠코도 나도 센키치도 몸에 멍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점점 연극 소재도 바닥나 예의 물건 창고라든가 욕실이라든가 뒷마당 쪽을 무대로 삼아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며 난폭한 놀이에 빠졌다. 나와 센키치가 미츠코를 목 졸라 죽이고 돈을 훔치면 신이치가 누나의 원수라며 우리 둘을 죽이고 목을 베어버리기도 했다. 신이치와 내가 두 악한이 되어 아가씨인 미츠코와 하인인 센키치를 독살하고 시체를 강에 던져 넣기도 했다. 언제나 가장 싫은 역할을 맡아 심한 꼴을 당한 것은 미츠코였다. 마지막에는 분과 물감을 몸에 바르고 죽은 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몸부림쳤다. 어떤 때는 신이치가 진짜 작은 칼을 가지고 와서,

“이걸로 조금만 잘라볼까? 응, 살짝이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야.”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세 사람은 얌전히 발밑에 쓰러져

“그렇게 심하게 자르면 싫어.”

라고 하면서 마치 수술이라도 받는 것처럼 꾹 참으며 겁에 질린 듯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색을 바라보고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어깨나 무릎을 조금 잘라보게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매일 밤 어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갈 때 그 상처 자국을 발견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런 식의 놀이가 대략 한 달 정도 계속된 어느 날의 일이었다. 평소와 같이 하나와의 집에 갔더니 신이치는 치과에 갔다고 해서 집에 없었고, 센키치가 혼자 무료해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미츠는?”

“지금 피아노 레슨 받고 있어. 아가씨가 계신 서양관 쪽으로 가볼까?”

이렇게 말하며 센키치는 나를 저 큰 나무 그늘의 옛 연못 쪽으로 데려갔다. 나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잊고 오래된 상수리나무 뿌리에 앉은 채 2층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음악 소리에 넋을 잃고 귀를 기울였다.

이 저택을 처음 방문한 날, 역시 옛 연못가에서 신이치와 함께 들은 신비로운 소리… 때로는 숲속 깊은 곳의 요마가 웃는 메아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동화에 나오는 난쟁이들이 많이 모여 춤추는 것 같기도 한 수천 가닥의 미세한 상상의 비단실로 어린 머리에 미묘한 꿈을 짜 넣어가는 신비로운 소리가 오늘도 그때와 같이 2층 창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센, 너도 저기 올라가 본 적 없어?”

연주가 멎자 나는 또다시 참기 어려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센키치에게 물었다.

“아, 아가씨와 청소부 도라 씨 말고는 잘 올라가지 않는다네. 나뿐만 아니라 도련님도 모르지.”

“안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도련님 아버님이 양행하셔서 사 오신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있다고 해. 언젠가 도라 씨에게 몰래 보여 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하며 절대 들어주지 않더군. – 이제 연습이 끝났어. 에이 군, 네가 아가씨를 불러보지 그래.”

두 사람은 목소리를 맞춰 외쳤다.

“미츠야, 놀자.”

“아가씨, 놀지 않으실래요?”

이렇게 2층을 향해 소리쳐 보았지만,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대답은 없었다. 지금까지 들리던 그 음악은 사람 없는 방에서 피아노란 것이 저절로 움직여 미묘한 울림을 냈던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할 수 없으니 둘이서 놀자.”

나도 센키치 혼자가 상대로는 평소처럼 떠들 수도 없고 흥이 빠져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미츠코가 어느새 거기 와 서 있었다.

“아까 우리가 불렀을 때 왜 대답하지 않았어?”

나는 돌아서서 나무라듯 쏘아보았다.

“어디서 나를 불렀어?”

“네가 지금 서양관에서 연습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소리쳤는데 안 들렸어?”

“나 서양관 같은 데 있지 않았어. 거기엔 아무도 못 올라가잖아.”

“그래도 방금 피아노 치고 있었잖아.”

“몰라. 다른 사람이겠지.”

센키치는 처음부터 상황을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아가씨, 거짓말해도 다 알고 있어요. 자, 에이 군이랑 저를 거기에 몰래 데려가 주세요. 또 고집 부리고 거짓말할 건가요? 실토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겠어요.”

하고 히죽히죽 불길하게 웃으며 곧바로 미츠코의 손목을 꼬집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이구 센키치, 제발 용서해 줘. 거짓말 아니라니까.”

미츠코는 빌 듯한 몸짓을 했지만, 별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비틀린 채로 몸을 뒤틀며 있었다. 가냘픈 팔의 창백한 살결이 튼튼한 쇠 같은 손가락에 꽉 붙들려 있었고, 두 소년의 혈색 좋은 대조는 내 마음을 유혹하는 듯했다.

“미츠야, 실토하지 않으면 고문에 처할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른 쪽 손목도 비틀어 올렸다. 허리띠를 풀어 연못 가 목곽나무 줄기에 묶고,

“자, 이래도 할 거냐, 이래도 할 거냐.”

하고 둘이서 여전히 꼬집고 간지럽히며 정신없이 괴롭혔다.

“아가씨, 이제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더 심한 꼴을 당할 거예요. 지금 빨리 실토해 버리세요.”

센키치는 미츠코의 가슴을 붙잡고 양손으로 목을 꽉 조르며 말했다.

“자, 점점 괴로워지지?”

이렇게 말하면서 미츠코가 눈을 희번덕거리는 것을 보고 웃었다. 얼마 후 이번에는 나무에서 풀어 바닥에 엎어놓고는,

“이건 인간의 툇마루입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무릎 위에, 센키치는 얼굴 위에 엉덩이를 올리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미츠코의 몸을 엉덩이로 밟고 눌렀다.

“센키치, 이제 자백할 테니까 용서해줘.”

미츠코는 센키치의 엉덩이에 입이 막힌 채 벌레 숨 같은 가는 목소리로 자비를 구했다.

“그럼 꼭 자백하겠죠? 역시 아까는 서양관에 있었던 거죠?”

허리를 들어 조금 손을 느슨하게 하며 센키치가 심문했다.

“응, 네가 또 데려가자고 할 것 같아서 거짓말했어. 너희들을 데려가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듣고 센키치는 눈을 부라리며 위협하듯 말했다.

“좋아요, 데려가지 않을 테니. 자, 또 괴로워질 거예요.”

“아야, 아야. 그럼 데려갈게. 데려가 줄 테니까 이제 용서해줘. 대신 낮에는 들킬 테니까 저녁에 해줘. 응, 그러면 살짝 토라조의 방에서 열쇠를 가져와서 열어줄게. 에이짱도 가고 싶으면 저녁에 놀러 오지 않을래?”

마침내 항복한 듯해서 둘은 여전히 바닥에 누른 채 저녁 약속을 상의했다. 마침 4월 5일이었는데, 나는 수이텐구 축제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집을 뛰쳐나와 어두워질 무렵 정문에서 서양관 현관으로 몰래 들어가 미츠코가 열쇠를 훔쳐 센키치와 함께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다만 내가 시간에 늦을 경우 둘은 먼저 들어가 2층 계단을 다 올라간 곳에서 오른쪽 두 번째 방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좋아, 그렇게 정했으니 용서해 줄게요. 자 일어나세요.”

하고 센키치는 겨우 손을 놓았다.

“아, 괴로웠어. 센키치한테 엉덩이 깔리면 숨도 못 쉬겠어. 머리 밑에 큰 돌이 있어서 아팠어.”

옷의 먼지를 털고 일어난 미츠코는 몸의 여기저기를 문지르며 상기된 듯 볼과 눈동자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런데 2층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일단 집으로 돌아가려고 헤어질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에이짱, 놀라면 안 돼. 재미있는 게 잔뜩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며 미츠코는 웃으면서 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밖으로 나가니 벌써 인형정 통り의 노점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검술 구경거리의 조개 나팔 소리가 황혼의 하늘에 울려 퍼지고, 아리마 님의 저택 앞은 사람들로 시커멓게 붐볐다. 약장수가 여자의 자궁을 보여주는 인형을 가리키며 뭔가 목소리를 높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언제나 즐겨보던 75좌의 가구라도, 네코하치의 마술도, 나가이 쇼스케의 거합도 오늘은 전혀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저녁 식사도 대충 먹었다.

“연날에 다녀올게.”

라고 말하고 다시 뛰쳐나간 것은 아마 7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물기 어린 푸른 밤 공기에 연날의 불빛이 녹아들어, 킨세이로의 2층 객실에는 춤추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비쳐 보였다. 코메야마치의 젊은이들과 니초메의 유곽 여자들, 그리고 온갖 남녀가 양쪽으로 줄지어 오가며 지금이 가장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시간이었다. 나카노하시를 건너 어둡고 적막한 하마초 거리에서 뒤를 돌아보니, 옅게 흐린 검은 하늘이 뿌옇게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느새 나는 하나하의 집 앞에 서서 산더미처럼 검게 솟은 높은 지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하시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조용히 어둠을 실어 불어왔고, 예의 그 상수리나무 큰 가지의 잎들이 어디선가 하늘 중간에서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냈다. 살며시 담장 안을 들여다보니 문지기 방의 불빛이 문틈으로 세로로 가는 선을 그으며 새어 나올 뿐, 안채 쪽은 완전히 빗장이 내려져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마물처럼 깊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었다. 정문 옆에 있는 통용문의 차가운 쇠창살에 양손을 대고 어둠 속으로 밀어 넣듯이 하자 무거운 문짝이 끼익 하고 삐걱거리며 순순히 움직였다. 나는 게다가 철거덕거리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이며, 스스로 자신의 바쁜 숨소리와 고조된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면서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는 서양관의 유리문을 응시하며 걸어갔다.

차츰차츰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팔손이나무 잎과 느티나무 가지, 춘일등과 같은 것들이 소년의 마음을 겁먹게 하는 자세로 작은 눈동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화강암 계단에 주저앉아 찬 공기가 스며드는 가운데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고 기다렸지만, 두 사람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머리 위를 뒤덮은 듯한 공포가 온몸을 벌벌 떨게 하고 이가 달달 떨렸다. 아, 이런 무서운 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신님, 저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거나 몰래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정신없이 중얼거리며 손을 모았다.

완전히 후회하고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일어섰는데, 문득 현관 유리문 너머로 작은 촛불 빛 같은 것이 보였다.

“어? 둘 다 먼저 들어갔나?”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또다시 호기심의 노예가 되어 앞뒤 분별도 없이 손잡이에 손을 대고 돌리니 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예상대로 정면의 나선계단 꼭대기에 – 아마도 미츠코가 나를 위해 놓고 간 것일 테다. 반쯤 타서 촛농이 흘러내리는 손잡이 촛대가 3척 사방에 아슴아슴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나와 함께 밖에서 공기가 흘러들어오자 불꽃이 흔들리며 바니시를 칠한 난간의 그림자가 부르르 떨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발소리를 죽여 도둑처럼 계단을 다 올라갔지만, 2층 복도는 더욱 캄캄했다.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기척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약속했던 두 번째 오른쪽 문 – 그쪽으로 더듬어 가 귀를 기울여 보아도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반은 공포, 반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는 상체를 기대어 문을 밀어보았다.

갑자기 밝은 빛이 눈을 찔러 어지러워하며 눈을 깜빡였다. 요괴의 정체라도 알아내려는 듯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중앙에 매달린 큰 램프의 새우색 갓이 5색 렌즈로 장식되어 방 윗부분을 어슴푸레하게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된 의자나 탁자, 거울 등 여러 장식품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짙은 홍색 깔개의 부드러움이 봄풀밭을 밟는 듯 버선을 신은 내 발바닥을 기쁘게 했다.

“미츠 짱.”

부르려고 해도 사방의 적막함이 죽은 듯이 입술을 누르고 혀를 굳게 해 소리를 낼 용기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방의 왼쪽 구석에 다음 방으로 통하는 출구가 있었고, 무거운 비단 휘장이 깊은 주름을 만들며 나이아가라 폭포를 연상시키듯 우두둑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밀치고 옆방의 모습을 엿보려 했지만 휘장 너머가 캄캄해 손이 움츠러들었다. 그때 난로 선반 위의 탁상시계가 갑자기 매미처럼 지지 하고 속삭이더니 곧 쨍그랑 하고 울리며 킹콩켕 하는 기묘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신호로 미츠코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휘장 쪽을 한눈에 주시했지만, 2-3분 사이에 음악도 그쳐버리고 방은 다시 원래의 정적을 되찾았다. 비단의 주름은 한 줄기도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늘어져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내 눈동자가 왼쪽 벽에 걸린 유화 초상화에 머물렀다. 나도 모르게 그 액자 앞으로 다가가 램프 그림자로 어둑해진 서양 소녀의 반신상을 올려다보았다. 두꺼운 금색 액자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화면 속에 무거운 짙은 갈색 공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가슴은 짙은 남색 옷으로 가리고 벗은 어깨와 팔에는 금과 보석 팔찌를 장식한 긴 머리의 여인이 꿈꾸는 듯 까만 눈동자를 크게 뜨고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떠오른 순백의 피부색, 고귀한 콧날에서 입술, 턱, 양 볼로 이어지는 신성하고 아름답게 정돈된 단아한 윤곽. 이것이 동화에 나오는 천사라는 것일까 생각하며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문득 액자에서 3척쯤 아래 벽에 붙은 원탁 위에 뱀 장식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은 또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두 번 정도 똬리를 틀고 고사리처럼 고개를 든 자세와 미끈거리는 청대장의 비늘 색깔이 무척이나 사실적이었다. 볼수록 감탄이 절로 나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나는 “어?” 하고 생각하며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 눈을 크게 떴다. 착각인지 뱀이 정말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파충류 특유의 극히 느린,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느릿한 태도로 분명히 목을 전후좌우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온몸에 물을 끼얹은 듯 서늘해져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이 굳어버렸다.

그때 비단 커튼 주름 사이에서 유화에 그려진 그대로의 소녀 얼굴이 또 하나 슬그머니 나타났다. 얼굴은 잠시 히죽히죽 웃더니 비단 커튼이 둘로 갈라져 어깨를 미끄러지듯 내리며 뒤에서 하나로 합쳐지자 소녀는 온몸을 드러내고 거기에 서 있었다.

겨우 무릎까지 닿는 짧은 짙은 남색 치맛자락 아래로는 버선도 신지 않은 석고상 같은 맨발에 살구색 실내화를 신고, 넘실거리듯 쏟아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양 어깨로 흘러내리게 하고, 유화 속 그대로의 팔찌와 목걸이를 하고, 가슴에서 허리 주변까지 피부를 바싹 조이는 옷 아래로 유연한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에이짱…”

그때, 모란꽃잎을 문 듯한 붉은 입술을 떨던 한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의 유화가 미츠코의 초상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 아까부터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이렇게 말하며, 미츠코는 위협하듯 조금씩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내 마음을 간지럽혔고, 눈앞에 붉은 안개가 어른거렸다.

“미츠 짱 혼자야?”

나는 구원을 청하는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왜 오늘 밤에 한해 양복을 입고 있는지, 캄캄한 옆방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직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목구멍에 걸려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센키치를 만나게 해줄 테니, 나와 함께 이쪽으로 와.”

미츠코에게 손목을 잡혀 갑자기 덜덜 떨기 시작하며,

“저 뱀은 정말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어 나는 물었다.

“움직이고 있지 않잖아. 저기 봐.”

이렇게 말하며 미츠코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보니 확실히 아까는 분명 움직이고 있던 그 뱀이 지금은 꼼짝 않고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 걸 보고 있지 말고, 나와 함께 이쪽으로 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츠코의 손바닥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듯, 가볍게 내 팔을 잡고 섬뜩한 방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은 무거운 비단 휘장 속으로 빠져든 것 같더니 어느새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이 짱, 센키치를 만나게 해줄까?”

“아, 어디 있어?”

“지금 양초를 켜면 알 수 있으니 기다려. – 그보다 네게 재미있는 걸 보여줄게.”

미츠코는 내 손목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가, 이내 방 정면의 어둠 속에서 피슉피슉 섬뜩한 소리를 내며 가는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수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유성처럼 달리고, 파도처럼 일렁이고, 원을 그리고, 십자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때, 재밌지? 뭐든 다 그릴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츠코가 다시 내 곁으로 걸어온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보이던 빛줄기는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저건 뭐야?”

“외국산 성냥으로 벽을 긁은 거야. 어둠 속이라면 뭘 긁어도 불이 나와. 에이 짱의 옷을 긁어볼까?”

“그만해, 위험해.”

나는 깜짝 놀라 도망치려 했다.

“괜찮아, 봐.”

미츠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기모노 앞섶을 잡아당겨 성냥을 켰다. 비단 위로 반딧불이가 기어가듯 푸른 빛이 번쩍였다. ‘하기하라’라는 가타카나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가 잠시 사라지지 않았다.

“자, 이제 불을 켜고 센키치를 만나게 해주지.”

성냥이 불꽃을 튀기며 타올랐다. 미츠코의 손에서 밀랍 성냥이 타들어가자 곧 방 가운데에 놓인 촛불에 불이 옮겨붙었다.

양초 불빛이 희미하게 실내를 비추었다. 온갖 물건과 장식품의 검은 그림자가 요괴들이 날뛰는 듯한 모습으로 사방의 벽에 길게 드리워졌다.

“여기 센키치가 있어.”

미츠코는 촛불 아래를 가리켰다. 보니 촛대라고 생각했던 것은 센키치였다. 그는 손발이 묶인 채 양 어깨를 벗고 이마에 촛불을 얹은 채 누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얼굴이든 머리든 새의 똥처럼 녹아내린 밀랍이 흘러내려 두 눈을 가리고 입술을 막아 턱 끝에서 뚝뚝 떨어져 무릎 위에 고였다. 7부쯤 타버린 양초 불꽃에 이제 속눈썹이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그는 바라문의 수행자처럼 가부좌를 틀고 주먹을 뒤로 묶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츠코와 내가 그 앞에 서자, 센키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밀랍으로 굳은 얼굴 근육을 움찔거리며 겨우 반쯤 눈을 떴다. 원망스러운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무거운 듯 괴로운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봐, 너도 나도 평소에 아가씨를 너무 괴롭혔기 때문에 오늘 밤엔 복수를 당하는 거야. 나는 이미 완전히 아가씨에게 항복해버렸어. 너도 빨리 사과하지 않으면 혹독한 꼴을 당할 거야…”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밀랍은 거리낌 없이 지렁이가 기어가듯 이마에서 속눈썹으로 흘러내렸다. 센키치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에이짱, 이제부터는 신짱 말은 듣지 말고 내 부하가 되지 않을래? 싫다고 하면 저기 있는 인형처럼 네 몸에 뱀을 몇 마리든 감아줄 거야.”

미츠코는 계속 불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금박 글씨가 새겨진 서양 책들로 가득 찬 책장 위의 석고상을 가리켰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이마를 들어 눈을 부릅뜨고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았다. 근육질의 거대한 나체상이 뱀에 감겨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옆에는 푸른 뱀들이 두세 마리 조용히 똬리를 틀고 향로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공포감에 앞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할 거지?”

나는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아까 센키치와 함께 나를 연단 대신 삼았으니, 이번에는 네가 촛대 대신이 될 차례야.”

미츠코는 순식간에 내 팔을 뒤로 묶어 센키치 옆에 가부좌를 틀게 하고 두 발목을 단단히 묶었다.

“촛불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똑바로 누워.”

그녀는 내 이마 한가운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안간힘을 다해 불을 붙들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동안 눈물보다 더 뜨거운 밀랍이 미간을 타고 줄줄 흘러내려 눈과 입을 막아버렸다. 얇은 눈꺼풀 너머로 촛불이 깜빡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안구 주위가 붉게 흐려졌다. 미츠코의 강한 향수 냄새가 비처럼 얼굴에 내려앉았다.

“둘 다 그렇게 가만히 있어. 조금만 더 참아. 지금 재미있는 걸 들려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미츠코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조용한 옆방에서 갑자기 신비로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은쟁반 위를 동글동글 구르는 우박 소리 같기도 하고, 계곡의 맑은 물이 이끼 위로 졸졸 흐르는 소리 같기도 한 신비로운 음색이 마치 다른 세상의 소리처럼 내 귀에 들려왔다. 이마의 촛불이 많이 짧아진 듯했다. 뜨거운 땀이 밀랍과 섞여 뚝뚝 흘러내렸다. 옆에 앉아 있는 센키치를 흘끗 보니 얼굴 전체에 우동 가루 같은 하얀 덩어리가 2-3분 두께로 달라붙어 불룩 솟아오른 채 우엉 튀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치 ‘떠돌이 삼현’이라는 이야기 속 인물들처럼 우리 둘은 미묘한 음악 소리에 황홀히 귀를 기울인 채 눈꺼풀 안쪽의 밝은 세상을 응시하며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나도 센키치도 미츠코 앞에서는 고양이처럼 얌전해졌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 때때로 신이치가 누나의 말을 거역하려 들면 그를 붙잡아 제압했다. 아무 설명 없이 묶거나 때렸다. 그토록 오만했던 신이치도 점차 누나의 부하가 되어갔다. 집에서도 학교에서처럼 완전히 비굴한 겁쟁이로 변해버렸다.

세 사람은 마치 새롭고 신기한 놀이 방법을 발견한 듯 즐거워하며 미츠코의 명령에 복종했다. “의자가 되어라.”라고 하면 즉시 네 발로 기어 등을 돌렸고, “분수가 되어라.”라고 하면 곧바로 머리를 숙이고 입을 벌렸다. 점점 미츠코는 기세등등해져 세 사람을 노예처럼 부렸다. 목욕 후 발톱을 깎게 하거나 콧속 청소를 시키거나 소변을 마시게 했다. 늘 우리를 곁에 두고 이 나라의 여왕이 된 듯 행세했다.

서양관에는 그 뒤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청대장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재담꾼

러일전쟁이 막 포츠머스 조약으로 끝나고 국력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여러 사업이 속속 일어나던 때였다. 새 화족도 생기고 성금도 생기고 세상 전체가 뭔가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던 1907년 4월 중순의 일이었다.

마침 무카이지마의 제방은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맑고 화창한 일요일 오전부터 아사쿠사행 전차와 증기선은 만원이었다. 군중이 개미처럼 줄지어 건너가는 아즈마바시 너머로 야호마츠에서 멀리 코토토이의 정박소 부근까지 따스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강 건너 코마츠노미야 별장을 비롯해 하시바, 이마도, 하나카와도의 거리들까지 희뿌연 남색 빛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 뒤로 공원의 12층 탑이 수증기가 많은 숨 막히는 듯한 감청색 하늘에 아련히 서 있었다.

센주 쪽에서 짙은 안개를 뚫고 흘러오는 스미다 강은 코마츠시마 모퉁이를 돌아 거대한 대하의 모습을 드러냈다. 양안의 물은 봄기운에 취한 듯 나른하게 햇살에 반짝이며 아즈마바시 아래로 흘러갔다. 강면은 부풀어 오른 듯 여유로운 파도가 느릿느릿 일렁였고, 이불처럼 부드러운 물 위로 여러 척의 배가 떠 있었다. 때때로 산야보리 입구를 떠나는 나룻배가 상류와 하류의 배들 사이를 가로질러 갑판에 넘칠 듯한 사람들을 제방 위로 실어 날랐다.

그날 아침 10시경, 칸다가와 하구를 지나 카메세이로우 석벽 그늘에서 큰 강 한가운데로 노를 저어 나온 꽃놀이 배가 있었다. 홍백 줄무늬 차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큰 전마선에 다이치의 호우칸 게이샤들을 태우고, 배의 중앙에는 당시 카부토초에서 성금의 이름을 떨치던 사카키바라라는 주식 중개인이 다섯 여섯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배 안의 남녀를 둘러보며 연신 큰 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의 붉은 얼굴에는 이미 3할의 취기가 돌고 있었다. 중류에 떠 있는 배가 토다 백작의 저택 담장과 나란히 지나갈 무렵, 차양 안에서 현가의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 경쾌한 울림은 오오카와의 물결을 흔들어 햐쿠폰구이와 다이치의 강변을 덮쳐왔다. 료고쿠바시 위나 혼조 아사쿠사의 강변 도로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목을 빼고 이 흥겨운 광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 안의 모습은 육지에서 손에 잡힐 듯이 훤히 보였고, 때때로 요염한 여인의 말소리까지 강면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실려 새어 나왔다.

배가 요코아미가시에 닿을 무렵, 갑자기 뱃머리에 기괴한 목각인형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삼현을 반주 삼아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을 그린 커다란 풍선에 가느다란 종이 주머니로 목을 만들어 머리부터 뒤집어쓴 것 같았다. 본인의 얼굴은 주머니 속에 완전히 가려졌고, 화려한 유젠 무늬의 기모노를 입고 흰 버선을 신고 있었다. 춤을 출 때마다 홍색 소매 사이로 남자다운 굵직한 손목이 드러났고, 마디가 굵은 갈색 다섯 손가락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풍선 여자의 목은 바람을 따라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녔다. 때로는 강가의 집 처마를 엿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배의 선장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육지에서는 눈을 크게 뜨고 구경꾼들이 손뼉을 치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배는 우마야바시 쪽으로 다가왔다.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 있었고, 노란 얼굴들이 줄지어 서서 점점 가까워지는 배 안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목각인형의 얼굴 윤곽이 공중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울고 있는 듯, 웃고 있는 듯, 잠들어 있는 듯한 묘한 표정에 구경꾼들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배가 다리 그늘로 들어가자 목은 수위가 높아진 수면에서 구경꾼들의 얼굴 가까이로 미끄러지듯 난간에 살짝 스치더니 배에 이끌려 구부러졌다. 다리 밑을 나른하게 기어가다 이번에는 저쪽 푸른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코마가타도 앞에 이르자 이미 아즈마바시의 행인들이 멀리서 이를 알아보고 개선하는 군대를 맞이하듯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배 안에서도 잘 보였다. 거기서도 우마야바시와 같은 희극을 연기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마침내 무코지마에 도착했다. 한층 늘어난 샤미센 소리는 점점 더 활기를 띠었다. 마치 소가 바보 축제의 소리에 촉발되어 꽃수레를 끌듯이, 배도 활기찬 음악의 힘에 밀려 천천히 수면을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오카와 강을 좁다 하며 저어 나온 수많은 꽃놀이 배와 붉고 파란 작은 깃발을 흔들며 보트를 응원하는 학생들을 시작으로, 양안의 군중은 그저 멍하니 이 기이한 광대선의 진로를 바라보았다. 로쿠로쿠비의 춤은 점점 더 멋지고 유연해졌고, 풍선은 강바람에 나부끼며 때로는 증기선의 흰 연기를 뚫고 지나가고, 때로는 높이 날아올라 마츠치야마를 내려다보며 구경꾼들에게 아양을 떠는 듯한 추태를 부리며 강 위의 인기를 한 몸에 모았다. 코토토이 근처에서 제방에서 멀어져 더 상류로 올라갔지만, 그래도 나카노 우에한에서 오오쿠라씨의 별장 부근을 배회하는 제방 위의 사람들은 멀리 강줄기의 하늘 쪽으로 유령 같은 로쿠로쿠비의 머리를 바라보며 “뭘까?” “뭘까?”라고 말하면서 일제히 그 행방을 지켜보았다.

방자한 행동으로 제방을 산산이 시끄럽게 한 배는 이윽고 카게츠 카단의 선창에 밧줄을 매고, 우르르 한 무리가 정원의 잔디밭으로 밀려 올라갔다.

“야, 수고했어, 수고했어.”

일행의 주인과 게이샤들에게 둘러싸여 박수갈채 속에 로쿠로쿠비 남자는 종이 봉지를 벗고 불타오르는 듯한 빨간 반에리의 틈새로 검은 빡빡머리에 애교 넘치는 얼굴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강변을 바꾸어 또 한바탕 놀이라며, 거기서도 다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주인을 비롯한 많은 남녀가 잔디밭 위를 어지럽게 뛰어다니며 춤추고 뛰어다니며 눈가리개니 술래잡기니 끼악끼악 하는 소란이다.

예의 그 남자는 후리소데 차림 그대로 흰 버선에 홍색 끈의 아사우라를 꿰차고 비틀거리는 술 취한 걸음으로 게이샤의 뒤를 쫓아가거나 쫓기거나 하고 있었다. 특히 그 남자가 술래가 되었을 때의 시끌벅적함과 활기참은 더욱 심해져서, 이미 눈가리개용 수건을 얼굴에 대는 순간부터 주인도 게이샤도 배를 잡고 손뼉을 치며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었다. 빨간 치맛자락 밑으로 종아리를 드러내며,

“기쿠짱, 기쿠짱. 자, 잡았다.”

“라든지” 하면서 어딘가 녹슨 듯한 예인답게 쉰 목소리를 내며, 여자의 소매를 스치고 나무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어지럽게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움직임이 격렬하고 빠른 것과는 달리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둔한 면이 있어 쉽게 사람을 잡을 수 없었다.

모두들 웃음을 참으며 살금살금 남자의 뒤로 다가갔다.

“여기 있어요.”

하고 갑자기 귓가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어떠냐, 어떠냐” 하고 등을 톡 치며 도망쳤다. 주인이 귓불을 잡아당기며 꼬집자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일부러 과장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 얼굴이 또 어쩐지 사랑스러워 누구든 그 남자의 머리를 때리거나 코끝을 잡아당기는 등 살짝 놀리고 싶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열다섯 살 정도의 말괄량이 견습 게이샤가 뒤로 돌아가 양손으로 발을 들어올려 멋지게 데굴데굴 잔디 위를 굴렀다. 와 하는 웃음소리 속에서 다시 벌떡 일어나 “누구야, 이 노인네를 괴롭히는 게?” 하고 눈을 가린 채 큰 입을 벌리고 소리치며 ‘유라상’처럼 두 팔을 벌리고 걸어 나갔다.

이 남자는 호칸인 산페이라고 하는데, 원래 카부토초의 주식 중개인이었다. 그때부터 지금의 일을 해보고 싶어 못 견뎌 했고, 결국 4-5년 전에 야나기바시의 태고모치 제자로 들어가 한바탕 변한 독특한 기질 덕에 금세 단골을 만들어 지금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꽤 괜찮은 자리를 잡았다.

“사쿠라이(이 남자의 성이다)놈도 한가한 녀석이지. 주식 같은 걸 하고 있는 것보다 저쪽이 성에 맞아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지금은 꽤 수입도 있는 것 같고, 결국 녀석은 행운아야.”

라고 예전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가끔 이런 얘기를 했다. 청일 전쟁 때는 카이운바시 근처에 꽤 큰 중개점을 차려 사원 4-5명을 고용했고, 사카키바라 주인과도 동료 사이였지만, 그때부터

“저 남자랑 놀면 좌석이 시끄럽고 재밌어.”

그는 유흥을 함께 하는 친구들에게 환영받고 술자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노래도 잘하고 이야기도 잘해서 자신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거만한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훌륭한 주인 자격이라는 신분을 잊고 때로는 품위 있는 남자라는 것까지 잊은 채 오로지 친구들과 게이샤들에게 칭찬받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화려한 전등 아래에서 술에 취한 얼굴을 반짝이며 “에헤헤헤” 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재치 있는 농담을 멈출 줄 모르고 지껄일 때가 그의 전성기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흔드는 모습이 죄가 없어 보였다. 그야말로 향락의 진수를 깨달은 자로, 마치 쾌락의 화신 같았다. 게이샤들에게도 누가 손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위를 맞추고 중매를 섰다. 처음에는 “저 얼간이 놈”이라며 속으로 불쾌해하거나 싫어했지만 점차 그의 성격을 알게 되어 별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걸 즐기는 호인이라는 걸 알게 되어 “사쿠라이 씨” “사쿠라이 씨”하며 친근하게 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요하게 여겨지면서도 아무리 돈이 많고 호사를 누려도 그에게 아첨하거나 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인님”이라고도 “당신”이라고도 부르지 않고 “사쿠라이 씨” “사쿠라이 씨”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다른 손님보다 한 단계 낮은 사람처럼 대하면서도 그것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존경의 마음이나 연모의 정을 결코 사람들에게 일으키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사람들에게 따뜻한 경멸의 마음이나 연민의 정을 가지고 친근하게 여겨지고 귀여움을 받는 성격이었다. 아마도 거지라 해도 그에게 인사를 할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 아무리 바보 취급을 당해도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쁘게 느꼈다. 돈만 있으면 반드시 친구들을 불러 낭비하러 나가 연회를 주관했다. 연회가 있거나 친구들에게 불려가는 일이 있으면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참지 못하고 완전히 맥을 못 추고 기분 좋게 나가버렸다.

“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라며 연회가 끝날 때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면 그는 뻔뻔하게 양손을 짚고

“네, 저에게도 축의금을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게이샤가 농담으로 손님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아아, 좋아좋아, 이걸 가져가.”

라며 종이를 둥글게 말아 던져주면

“네,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두세 번 꾸벅 인사를 하고 종이 뭉치를 부채 위에 올려놓았다.

“여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 조금만 더 던져주세요. 이제 겨우 2전만 더 있으면 됩니다. 부모와 자식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역시 도쿄 손님들은 약자를 돕고 강자를 꺾는…”

하고 축제날 마술사의 말투로 베라베라 지껄였다.

이런 한심한 남자도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아내로 삼지도 않고 끌어들이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그의 막된 성격은 더욱 심해져서,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열심히 북을 치고 남편다운 권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뭐든 갖고 싶다는 것은 마음대로 사주고,

“당신,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고 턱으로 부리는 대로 예예 하며 말을 듣고 있는 무기력함. 때로는 술버릇 나쁜 여자에게 바보자식이라고 불리며 머리를 맞기도 했다. 여자가 있는 동안은 찻집 모임도 대개 거절해 버리고, 매일 밤 친구들과 점원들을 이층 방에 모아 아내의 삼현육각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큰 소동을 벌였다. 한 번은 자신의 여자를 친구에게 뺏긴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여러 가지로 여자의 기분을 맞추고 바람둥이에게 옷감을 사주거나 둘을 데리고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여자와 그 남자를 방의 상석에 앉히고 예전처럼 자신이 북을 치며 완전히 둘의 도구가 되어 기뻐했다. 나중에는 때때로 돈을 주고 배우를 사게 한다는 조건으로 게이샤를 집에 들인 적도 있었다. 남자들끼리의 체면치레나 질투로 인한 화 같은 감정은 그 남자에게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 대신 또 굉장히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이어서, 사랑에 빠져 정신없이 아첨하다가도 금세 열기가 식어버리고 수도 없이 아내를 바꿨다. 본래 그에게 반한 여자는 없었기에, 기운이 있는 동안 최대한 짜내고 좋은 때에 스스로 나가 버렸다. 이런 식으로 점원들에게도 전혀 위신이 없어서 때때로 큰 구멍이 나기도 하고 장사도 소홀해져서 얼마 안 가 가게는 망해 버렸다.

그 후 그는 중개인이 되거나 손님을 끄는 일을 하면서 사람 얼굴만 보면,

“두고 보세요. 제일 번성하게 해 보이겠습니다.”

등의 허풍을 떨고 있었다. 조금은 상냥하고 눈치도 있어서 때로는 돈벌이도 있었지만, 항상 여자에게 당하고 연중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빚으로 목이 돌아가지 않게 되자,

“당분간 저를 써보세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옛 친구인 사카키바라의 가게로 들어갔다.

한때 게이샤였던 그는, 비록 지금은 점원으로 전락했지만, 그 삶의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가끔 그는 분주한 영업장 책상을 바라보며, 요염한 여자의 목소리와 경쾌한 샤미센 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낮부터 들떠서 속으로 하우타를 흥얼거렸다. 결국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어떻게든 돈을 빌려 주인 몰래 놀러 나갔다.

“저 녀석도 나름 귀여운 놈이야.”

처음 두세 번은 깨끗이 돈을 내준 사람들도, 너무 자주 찾아오자 결국 화를 내며 말했다.

“사쿠라이, 너 정말 한심하구나. 게으른 건 도저히 손 쓸 방법이 없어. 예전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또 돈 빌리러 오면 혼쭐을 내줘야겠어.”

하지만 막상 마주하면, 그의 어딘가 가련해 보이는 모습에 화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에 갚을 테니 오늘은 봐줘. 응?”

이렇게 말하며 돈을 요구했지만,

“제발 빌려줘. 금방 갚을 테니까 괜찮아. 부탁이야! 정말 부탁이라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그의 모습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굴복했다.

주인인 사카키바라도 보다 못해,

“내가 가끔 데려가 줄 테니 남에게 너무 폐 끼치지 마.”

라고 말하며, 세 번 중 한 번 정도는 단골 대기소에 데려갔다. 그때만큼은 그는 딴 사람처럼 열심히 일하며 충성을 다했다. 장사 걱정으로 울적할 때면, 사쿠라이와 술을 마시며 그의 죄 없는 얼굴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큰 위로였다. 그래서 주인은 자주 그를 데리고 갔다. 결국 그는 점원이라기보다 대기소에서 노는 게 주가 되었다. 낮에는 하루 종일 가게에서 빈둥거리며,

“나는 사카키바라 상점의 내(内)게이샤야.”

라며 농담을 던졌다.

사카키바라에게는 카타기 집안에서 데려온 아내와 15, 16살 된 딸을 비롯해 두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아내를 비롯해 여자 하인들까지 모두 사쿠라이를 귀여워했고, “사쿠라이 씨, 맛있는 게 있으니 부엌에서 한 잔 하세요.”라며 그를 불러 재밌는 농담을 듣고 싶어했다.

“당신처럼 태평하다면 가난해도 괴롭지 않겠네. 평생 웃으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제일 행복한 거지.”

아내의 말에 그는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화를 내본 적이 없어요. 역시 방탕한 생활을 한 덕분이지요.”

그리고 한 시간 정도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때로는 작은 목소리로 녹슨 목구멍을 울렸다. 단가, 도키와즈, 기요모토, 무엇이든 한 번쯤은 배웠기에, 스스로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취해 입으로 삼현을 흉내 내며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누구나 그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항상 유행가를 제일 먼저 외워와서는,

“아가씨, 재밌는 노래를 가르쳐 드릴까요?”

라고 하며 안쪽으로 들어가 알렸다. 가부키자의 연극이 바뀔 때마다 두세 번 서서 구경을 가서 금방 시칸이나 야오자오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왔다. 어쩌다 보면 화장실 안이나 길거리 한복판에서 눈을 부릅뜨거나 목을 흔들며 열심히 성대모사 연습에 몰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심할 때면 늘 입술로 작은 노래를 부르거나 흉내를 내거나, 혼자서 들떠 있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음악과 낭독에 대단한 취미가 있었다. 시바의 아타고시타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기억력도 좋았다. 하지만 재담꾼 같은 기질은 이미 그때부터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처럼 친구들에게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매일 밤처럼 요세에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는 낭독가에 대해 일종의 동정심, 오히려 동경심까지 품고 있었다. 우선 늘어진 차림으로 고좌에 올라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에, 매번 찾아뵙습니다만, 어쨌든 이, 나리들의 실수는 술과 여자 때문이지요. 특히 부인들의 세력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천암암의 석문 시절부터 ‘여자가 아니면 밤이 밝지 않는 나라’라고들 하지요…”

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말끝의 맛, 왠지 정감 있는 말투는 지껄이고 있는 본인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여자아이들을 웃게 만들고, 때때로 애교 넘치는 눈빛으로 손님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근감이 있어서, 그는 이럴 때 가장 강하게 ‘인간 사회의 따뜻함’을 느꼈다.

“아, 이런, 이런.”

쾌활한 삼현육각 소리에 맞춰 도도이츠, 산사가리, 오츠에 등이 멋진 곡조로 불려지면, 어린 나이에도 그의 체내에 숨어 있던 방탕의 피가 솟구쳐 올랐다. 마치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암시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오가는 길에 자주 청원 스승의 집 창문 아래에 서서 넋을 잃고 듣곤 했다. 밤에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신내의 유랑 소리가 들리면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금세 책을 엎어놓고 취한 듯이 되었다.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누군가의 권유로 기생을 불렀는데, 예쁜 여자들이 눈앞에 줄지어 앉고 평소 동경하던 좌부의 삼현육각을 꺼내자 그는 술잔을 든 채 감격에 겨워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런 식이었으니 예능에 능숙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를 전문 재담꾼으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사카키바라 주인의 발상이었다.

“네가 언제까지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어서야 되겠나. 내가 한번 주선해 줄 테니 재담꾼이 되는 게 어떠냐. 공짜로 술집에서 술 마시고 그 위에 축의금까지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장사는 없을 거야. 너 같은 게으름뱅이가 설 자리로는 딱이지.”

이렇게 말해 그도 곧바로 그 기분이 들어 주인의 주선으로 마침내 야나기바시의 재담꾼에게 제자로 들어갔다. 산페이라는 이름은 그때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다.

“사쿠라이가 재담꾼이 됐다고? 과연 인간에게 쓸모없는 건 없는 법이지.”

카부토초의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전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참이라고는 하지만 재주도 있고 좌석 기술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재담꾼이 되기 전부터 미치광이 소문이 자자했던 남자인지라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다.

어느 날이었다. 사카키바라 주인이 대기실 2층에서 기생 다섯 여섯 명을 불러 모아 최면술 연습이라며 하나씩 걸어보았다. 견습 기생 한 명만 약간 흔들렸을 뿐 다른 이들은 도무지 잠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산페이가 갑자기 소름이 돋은 듯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주인님, 저는 최면술이 대단히 싫어요. 그만두세요. 뭔가 남이 걸리는 걸 보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져요.”

그 말투는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어쩐지 걸어 달라는 듯했다.

“좋은 걸 들었군. 그럼 너를 한번 걸어주지. 자, 이미 걸렸다. 그래, 점점 졸려온다.”

주인이 그렇게 말하며 산페이를 노려보자 산페이는 안색을 바꾸며

“아, 정말이지, 정말. 그것만은 안 돼요.”

하고 도망가려는 것을 주인이 뒤에서 쫓아가 산페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세 번 쓰다듬었다.

“자, 이번엔 정말 걸렸다. 이젠 끝이다. 도망쳐봐야 소용없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산페이의 목덜미가 축 늘어지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인은 장난삼아 여러 가지 암시를 주었다. “슬프겠지.”라고 하면 산페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엉엉 울었다. “분하겠지.”라고 하면 얼굴이 새빨개지며 화를 냈다. 술이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삼현선이라고 하면서 빗자루를 안겼다. 그럴 때마다 다른 기생들은 끼득끼득 웃어댔다. 이윽고 주인은 산페이의 코앞에서 갑자기 자신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산페이, 이 사향 냄새가 좋지?”

그리고는 엄청난 소리를 냈다.

“그렇군요, 이건 정말 좋은 향이군요. 아, 좋은 냄새야.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아요.”

산페이는 정말 기분 좋은 듯이 냄새를 맡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자, 이제 됐으니 용서해 주자.”

주인이 산페이의 귓가에서 손뼉을 치자 산페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결국 걸려버렸군. 그렇게 무서운 건 없었어요. 제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요?”

그렇게 말하며 겨우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러자 장난기 많은 우메키치라는 게이샤가 다가와 산페이에게 말했다.

“산페이 씨라면 나도 걸릴 수 있어요. 자, 이제 걸렸어! 자, 점점 졸려오지?”

그리고는 방 안을 도망다니는 산페이를 쫓아다니다가 목덜미를 잡자마자

“봐, 이제 끝이야. 자, 완전히 걸려버렸네.”

하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산페이는 다시 축 늘어져서 입을 벌린 채 우메키치의 어깨에 무기력하게 기대버렸다.

이번에는 우메키치가 관음님이라며 자신을 절하게 하거나 큰 지진이라며 겁먹게 했다. 그때마다 표정이 풍부한 산페이의 얼굴이 천변만화하는 모습이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 후로는 사카키바라 주인과 우메키치에게 한 번만 노려봐도 곧바로 걸려서 축 늘어졌다. 어느 날 밤, 우메키치가 손님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야나기바시 다리 끝에서 산페이를 스쳐 지나가며

“산페이 씨, 자!”

하고 노려보자 산페이는

“음”

하고 말하더니 길 한가운데 뒤로 넘어져 버렸다.

산페이는 이 정도로 해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싶은 병이 있었다. 하지만 꽤 잘 조절하는 데다 너무나 뻔뻔스러워서 사람들은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기를, 산페이는 매길에게 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쉽게 최면에 걸릴 리가 없다고들 했다. 사실 산페이는 매길 같은 천방지축인, 남자를 남자로 여기지도 않는 듯한 도도한 여자가 좋았다. 처음 최면에 걸려 산산조각이 난 그날 밤부터, 그는 완전히 매길의 기질에 반해버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언가 해보려고 슬쩍슬쩍 내비쳐 보았지만, 매길은 완전히 바보 취급하며 아예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기분 좋을 때를 노려 한두 마디 놀려댔지만, 매길은 곧바로 장난기 가득한 아이 같은 무구한 눈빛을 하고는

“그런 말 하면 또 걸어드릴 거예요.”

라고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중요한 고백은 제쳐두고 얼른 구부러져 쓰러졌다.

결국 그는 참을 수 없어 사카키바라 주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정말 장사치답지 않고, 참으로 비겁한 짓입니다만, 단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주인님의 위광으로 어떻게든 승낙을 받아주십시오.”

라고 부탁했다.

“좋아, 만사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큰 배에 올라탄 기분으로 있어.”

라고 주인은 또 산페이를 장난감으로 삼으려는 심산이 있어 곧바로 승낙하고, 그날 저녁 일찍 단골 요정에 매길을 불러 산페이의 이야기를 한 뒤에,

“좀 죄송스럽지만, 오늘 밤 네가 그자를 여기로 불러 겉으로만 기쁘게 해준 다음, 중요한 부분은 최면술로 속여주는 게 어떻겠니. 나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볼 테니, 그자를 알몸으로 만들어 마음대로 재주를 부리게 해봐.”

라는 상담을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불쌍해요.”

라고 역시 매길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나중에 들통나더라도 화를 낼 만한 남자도 아니고, 재미있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자, 밤이 되자 매길의 편지를 들고 인력거꾼이 산페이의 집으로 마중을 갔다. “오늘 밤은 나 혼자니까 꼭 놀러 와요.”라는 내용에 산페이는 두근두근 기뻐하며, 틀림없이 주인이 입을 열어 어느 정도 낚아챘을 거라 생각하고, 평소보다 한층 더 옷차림을 가다듬어 멋쟁이 행세를 하며 요정으로 향했다.

“자, 자, 좀 더 이쪽으로 와요. 정말 산페이 씨, 오늘 밤은 나 혼자니까 불편한 생각 말고 편하게 쉬세요.”

라고 매길은 방석을 권하고 술을 따르며 산페이를 굴복시키려 했다. 산페이는 조금 당황해서 어색하게 있었지만, 점점 술이 돌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매짱 같은 남자다운 여자, 난 정말 좋아해.”

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슬슬 물을 붓기 시작했다. 단나를 비롯해 두세 명의 기생이 중이층의 미닫이문에서 난간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우메키치는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아부의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저기요, 산페이 씨. 그렇게 저를 좋아한다면 뭔가 증거를 보여주세요.”

“증거라니, 난감하군요. 정말이지 가슴을 갈라 보여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그럼 최면술에 걸려서 진실을 고백해보세요. 자,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걸려보세요.”

우메키치가 이런 말을 꺼냈다.

“아니, 그것만은 사양하겠소.”

산페이도 오늘만큼은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상황에 따라서는

“사실 그 최면술도 당신에게 반한 약점 때문에 꾸민 연극이었어요.”

이렇게 고백할 생각이었지만,

“자, 이미 걸렸어요. 그래요.”

갑자기 우메키치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이 산페이를 쏘아보자, 다시 한번 그 여자에게 무시당하고 싶은 욕망이 앞섰다. 이 중요한 순간에도 그는 다시 한번 축 늘어져 버렸다.

“우메 짱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어요.”라든가, “우메 짱이 죽으라면 지금이라도 죽겠어요.”라든가, 그는 묻는 대로 온갖 말을 쏟아냈다.

이제 잠들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한 단나와 기생들도 방으로 들어와 산페이 주위를 에워쌌다. 우메키치의 장난을 보며 그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산페이는 이 광경을 보고 놀랐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런 잔혹한 짓을 당하는 것이 즐거웠기에,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라도 시키는 대로 했다.

“여기는 당신과 나 둘뿐이니까 주저하지 마세요. 자, 겉옷을 벗으세요.”

그러자 산페이는 검은 치리멘 안감에 밤벚꽃 무늬가 있는 무소하오리를 스르륵 벗었다. 그리고 남색 모란 무늬 슈친 허리띠를 풀고, 붉은 다이묘 오메시를 벗었다. 등에 천둥신을 그리고 옷자락에 붉은 번개를 염색한 흰 치리멘 나가주반 한 벌만 남기고, 온갖 화려한 의상을 한 벌 한 벌 벗어 마침내 알몸이 되었다. 그러나 산페이에게는 우메키치의 잔인한 말이 기쁘고 또 기뻐서 참을 수 없었다. 끝내는 여자가 주는 암시대로 입에 담기 힘든 일까지 했다.

산페이를 실컷 가지고 논 우메키치는 그를 충분히 잠들게 한 뒤 모두와 함께 그곳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우메키치에게 깨워졌을 때 산페이는 눈을 뜨고 베갯맡에 앉아 있는 잠옷 차림의 여자의 얼굴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여자의 베개와 옷가지들이 그 근처에 흩어져 있었다. 마치 산페이를 속이려는 듯 일부러 그렇게 놓아둔 듯했다.

“나는 방금 일어나서 세수하고 왔어. 정말 당신은 잘도 자네. 그러니 틀림없이 내세가 좋을 거야.”

우메키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메 짱이 이렇게 예뻐해 주시니 내세가 좋을 게 틀림없지요. 평소의 기도가 통한 거예요. 저는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말하며 산페이는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다 갑자기 허둥지둥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세간의 입방아가 시끄러울 테니, 오늘은 조금 일찍 실례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헤헤, 이 바람둥이 같으니!”

그는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나가버렸다.

“산페이, 지난번 일은 어떻게 됐나?”

며칠 뒤 사카키바라의 주인이 물었다.

“네, 덕분에 잘 해결했습니다. 뭐, 부딪쳐 보니 별 것 아니더군요. 기개가 있다느니 승부욕이 있다느니 해도 여자는 역시 여자더군요. 전혀, 정신력도 뭐도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기쁜 듯한 태도로 말했다.

“자네도 제법 바람둥이군.”

이렇게 말하며 놀리자,

“에헤헤헤”

산페이는 천박한 전문가다운 웃음을 지으며 부채로 이마를 툭 쳤다.

비밀

그 무렵 나는 어떤 변덕스러운 생각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화려한 분위기를 멀리하고, 여러 관계로 교제를 계속해 오던 남녀들의 권내에서 몰래 빠져나오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아사쿠사의 마츠바초 부근에 진언종 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겨우 그곳의 승려 숙소 한 칸을 빌리게 되었다.

신보리의 도랑을 따라 키쿠야바시에서 문적의 뒤편을 곧장 가면, 12층 탑 아래쪽의 복잡하게 얽힌 음란한 마을 한가운데 그 절이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집어 놓은 듯이 그 일대에 퍼져 있는 빈민가의 한쪽에, 주황색 흙담 벽이 길게 이어져 있어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고 중후한 쓸쓸한 느낌을 주는 구조였다.

나는 처음부터 시부야나 오오쿠보 같은 교외로 숨어들기보다는 오히려 시내 어딘가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신비로운 쇠락한 장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물살 빠른 계곡에 여기저기 고인 물웅덩이가 생기듯이, 아래町의 번잡한 거리와 거리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도, 극히 특별한 경우나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좀처럼 지나다니지 않는 듯한 조용한 한 구역이 없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또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

나는 꽤나 여행을 좋아해서 교토와 센다이는 물론이고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걸어다녔다. 하지만 아직 이 도쿄의 거리 안에, 닌교초에서 태어나 20년 넘게 살고 있는 도쿄의 거리 안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 없는 길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아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

그리고 대도시의 아래町에 벌집처럼 얽혀 있는 크고 작은 수많은 거리 중에서 내가 다녀본 곳과 가보지 않은 곳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잠깐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 열한 두 살쯤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후카가와의 하치만사마에 갔을 때,

“이제부터 배를 건너 후유기의 고메이치에서 유명한 소바를 대접해 주마.”

이렇게 말씀하시며 아버지는 나를 경내의 본전 뒤쪽으로 데리고 갔던 적이 있다. 거기에는 고아미초나 고부나초 근처의 해자와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폭이 좁고 둑이 낮으며 물이 가득 차오른 강이 빽빽이 들어선 양안의 집들 처마와 처마를 밀어내듯이 어둡고 나른하게 흐르고 있었다. 작은 나룻배는 강폭보다 길어 보이는 화물선이나 전마선이 여러 척 세로로 늘어서 있는 사이를 누비며 두세 번 바닥을 찌르듯 물살을 가르며 왕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여러 번 하치만사마에 참배를 갔지만, 아직 한 번도 경내의 뒤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정면의 도리이 쪽에서 본전만 참배했을 뿐, 아마도 파노라마 그림처럼 앞면만 있고 뒷면은 없는, 막다른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이런 강과 나루터가 보이고, 그 너머로 넓은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광경을 보니, 왠지 교토나 오사카보다도 더 도쿄에서 동떨어진, 꿈속에서 자주 마주치곤 하는 세계처럼 여겨졌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아사쿠사의 관음당 바로 뒤에 어떤 마을이 있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나카미세 거리에서 거대한 붉은 법당의 지붕을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그 외의 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이 넓어짐에 따라 지인의 집을 방문하거나 꽃구경을 가는 등 도쿄 시내를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어릴 적 경험했던 것 같은 신비로운 별세계와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별세계야말로 몸을 숨기기에 가장 좋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녀 보니, 볼수록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구역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아사쿠사바시와 이즈미바시는 몇 번이나 건넜지만, 그 사이에 있는 사에몬바시는 한 번도 건넌 적이 없었다. 니초마치의 이치무라자에 갈 때는 항상 전차길에서 소바 가게 모퉁이를 우회전했지만, 그 극장 앞을 곧장 지나 류세이자 쪽으로 나가는 짧은 거리는 한 번도 밟아본 기억이 없었다. 옛 에이타이바시의 오른쪽 강변 입구에서 왼쪽 방향의 강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외에도 핫초보리, 에치젠보리, 샤미센보리, 산야보리 주변에는 아직도 모르는 곳이 많았다.

마츠바초의 절 근처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마을이었다. 로쿠쿠와 요시와라를 코앞에 두고 횡단 골목을 하나 돌아간 곳에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구역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무이의 친구였던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평범한 ‘도쿄’라는 놈을 따돌리고, 조용히 그 소란을 방관하면서 몰래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은둔을 한 목적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무렵 나의 신경은 날이 무뎌진 줄톱처럼 예민한 모서리가 완전히 무뎌져서, 꽤나 짙고 자극적인 것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세한 감수성의 작용을 요구하는 일류의 예술이나 일류의 요리를 음미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시타마치의 정수라 불리는 다야의 요리사에게 감탄해 보거나, 니자에몬이나 간지로의 기교를 감상해 보거나, 모든 흔해빠진 도시의 환락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다. 관성 때문에 재미도 없는 게으른 생활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져서, 완전히 구태를 벗어난, 호기심 많은, 인위적인 생활 방식을 찾아보고 싶었다.

보통의 자극에 익숙해진 신경을 벌벌 떨게 할 만한, 무언가 이상하고 기괴한 것은 없을까. 현실과 동떨어진 야만적이고 황당무계한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내 영혼은 멀리 바빌론이나 아시리아의 고대 전설의 세계를 헤매거나, 코난 도일이나 루이카의 탐정 소설을 상상하거나, 광선이 맹렬한 열대 지방의 초토와 녹야를 그리워하거나, 장난꾸러기 소년 시절의 엉뚱한 장난을 동경했다.

번화한 세상에서 갑자기 은둔하여 행동을 그저 헛되이 비밀스럽게 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종의 미스테리한, 로맨틱한 색채를 자신의 생활에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밀이라는 것의 재미를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맛보고 있었다. 숨바꼭질, 보물찾기, 오차보즈 같은 놀이―특히 그것이 어두운 밤, 어슴푸레한 창고나 관음 개산 전에서 행해질 때의 재미는, 주로 그 사이에 ‘비밀’이라는 이상한 기분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 숨바꼭질과 같은 기분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아래 마을의 어슴푸레한 곳에 몸을 숨겼다. 그 절의 종파가 ‘비밀’이나 ‘금기’, ‘저주’ 같은 것과 인연이 깊은 진언종이라는 것도 내 호기심을 자극하고 망상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방은 새로 지은 절의 살림집의 일부로, 남쪽을 향한 8다다미 크기의 방이었다. 햇볕에 그을려 약간 갈색을 띤 다다미가 오히려 보기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낮이 되면 온화한 가을 햇살이 마치 환등기처럼 툇마루의 미닫이에 붉게 비추어 실내는 큰 등불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친숙했던 철학이나 예술에 관한 서류를 모두 책장에 치워버리고, 마술이나 최면술, 탐정 소설, 화학, 해부학 같은 기이한 이야기와 삽화가 가득한 책들을 마치 볕에 말리듯 방 안 여기저기에 펼쳐 놓고 누워서 손에 닿는 대로 펼쳐 보며 탐독했다. 그 중에는 코난 도일의 『네 개의 서명』이나 드 퀸시의 『예술로서의 살인』,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동화에서부터 프랑스산 이상한 성과학 책들도 섞여 있었다.

이곳의 주지가 비장하고 있던 지옥과 극락도를 비롯해 수미산도나 열반상 등 여러 가지 오래된 불화를 억지로 부탁해서 마치 학교 교무실에 걸려 있는 지도처럼 가리지 않고 방의 사면에 걸어 보았다. 도코노마의 향로에서는 항상 보랏빛 향 연기가 똑바로 조용히 피어올라 밝고 따뜻한 실내를 향기롭게 했다. 나는 때때로 키쿠야바시 근처의 가게에 가서 백단향이나 침향을 사와서는 그것을 태웠다.

날씨 좋은 날, 반짝반짝 빛나는 한낮의 광선이 가득 미닫이에 비칠 때의 실내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장관을 이루었다. 화려한 색채의 옛 그림들, 나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코끼리, 사자, 기린 등이 사면의 화폭 속에서 풍부한 빛 속으로 헤엄쳐 나왔다. 다다미 위에 내던져진 무수한 책들에서는 잔인한 살해, 마취, 마약, 요녀, 종교 – 온갖 잡다한 꼭두각시들이 향 연기에 녹아들어 자욱하게 감도는 가운데, 2다다미 정도의 붉은 담요를 깔고 멍청하니 야만인 같은 눈동자를 부릅뜨고 누운 채로 나는 매일매일 환각을 가슴에 그렸다.

밤 9시경, 절의 사람들이 대개 잠들고 나면 위스키 병을 마시고 술에 취한 뒤 멋대로 툇마루의 빗장을 열고 묘지의 생울타리를 넘어 산책을 나갔다. 되도록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매일 밤 옷차림을 바꾸어 공원의 인파 속을 빠져나가거나 고물상이나 헌책방 앞을 뒤적거리고 다녔다. 볼가리개에 당목 반纏을 걸치고 잘 닦은 맨발에 손톱 연지를 발라 설피를 신기도 했다. 금테 안경에 이중으로 접은 깃을 세워 나가기도 했다. 가짜 수염, 점, 흉터 등으로 얼굴을 바꾸는 것을 재미있어했지만, 어느 날 밤 샤미센보리의 고물상에서 남색 바탕에 크고 작은 우박 무늬를 흰색으로 흩뿌린 여자 겹옷이 눈에 띄자 갑자기 그것을 입어보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의복이나 옷감에 대해 단순히 색상이 좋다거나 무늬가 멋지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고 예민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 옷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아름다운 비단을 보거나 만질 때면 왠지 떨리고 싶어져서, 마치 연인의 살결을 바라보는 듯한 쾌감의 절정에 이르는 일이 잦았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메시나 치리멘을 세상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차려입을 수 있는 여자의 처지를 질투하기까지 했다.

그 고물상 가게에 축 늘어져 생생하게 걸려 있는 고몬치리멘 겹옷 – 그 촉촉하고 무겁고 차가운 천이 끈적이듯 육체를 감쌀 때의 기분 좋은 느낌을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전율했다. 그 옷을 입고 여자의 모습으로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한시도 지체 없이 그것을 사고 싶어졌고, 덧붙여 유젠 긴 속옷과 검은 치리멘 하오리까지 골랐다.

체격이 큰 여자가 입었던 것으로 보여, 작은 체구의 나에게는 딱 맞았다. 밤이 깊어 절 안이 고요해진 시간, 나는 몰래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노란 피부 콧등에 우선 크림 분을 두껍게 바르자 순간 모습이 약간 그로테스크해 보였지만, 진한 하얀 크림을 얼굴 전체에 골고루 펴 바르니 생각보다 잘 발랐다. 차갑고 달콤한 향기의 이슬이 모공으로 스며드는 피부의 기쁨은 특별했다. 연지와 분을 바를수록 석고상처럼 하얗기만 하던 내 얼굴이 생기 넘치는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재미. 문사나 화가의 예술보다 배우나 게이샤, 일반 여자들이 매일 자신의 몸을 재료 삼아 시도하는 화장의 기교가 훨씬 더 흥미롭다는 것을 알았다.

긴 속옷, 목도리, 치마, 그리고 사각거리는 붉은 안감의 소매 – 내 몸은 평범한 여자의 피부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감촉을 느꼈다. 목덜미에서 손목까지 하얗게 칠하고 은행나무 모양의 가발 위에 고소즈킨을 쓴 뒤, 과감히 밤거리로 섞여들어갔다.

흐린 날씨의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센조쿠마치, 기요스미초, 류센지마치 – 그 일대의 배수로가 많은 적막한 거리를 잠시 배회해 보았지만, 순경도 지나가는 사람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얇은 껍질을 한 장 붙인 듯 바싹 마른 얼굴 위로 밤바람이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입가를 가린 두건 천이 숨 때문에 따뜻하게 젖어, 걸을 때마다 긴 치마 자락이 장난스럽게 다리에 휘감겼다. 명치에서 갈비뼈까지 단단히 조이는 두꺼운 오비와 골반을 묶는 끈 때문에, 내 몸의 혈관에는 자연스레 여자 같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남자다운 기분이나 자세는 점점 사라져 갔다.

유젠 소매 그늘에서 분을 바른 손을 내밀어 보니, 강하고 튼튼한 선이 어둠 속에서 사라지고 하얗고 보드랍게 떠올랐다. 나는 자신의 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손을 실제로 가진 여자라는 존재가 부럽게 느껴졌다. 가부키의 벤텐 코조처럼 이런 모습으로 온갖 죄를 저지른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탐정 소설이나 범죄 소설의 독자들을 늘 기쁘게 하는 ‘비밀’과 ‘의혹’의 기분을 희미하게 느끼며, 나는 점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원의 로쿠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살인이나 강도, 아니면 뭔가 아주 잔인한 악행을 저지른 사람처럼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다.

12층 앞에서 연못가를 따라 오페라관 모퉁이로 나오자, 일루미네이션과 아크등의 빛이 진한 화장을 한 내 얼굴에 반짝반짝 비쳐 옷의 색깔과 무늬가 선명히 보였다. 토키와자 앞에 왔을 때, 맞은편 사진관 현관의 큰 거울에 북적거리는 군중 속에 섞여 완벽하게 여자로 변장한 내 모습이 비쳤다.

듬뿍 발라 붙인 분 아래에 ‘남자’라는 비밀이 모두 감춰져, 눈빛도 입술 모양도 여자처럼 움직이고 여자처럼 웃으려 한다. 달콤한 향수 냄새와 속삭이는 듯한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며 내 앞뒤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여자들도 모두 나를 동류로 여겨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여자들 중에는 내 우아한 얼굴 모습과 고풍스러운 옷차림을 부러워하는 듯 보는 이도 있었다.

늘 보던 공원의 밤 소란도 ‘비밀’을 가진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봐도 처음 접하는 것처럼 신기하고 기묘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전등 빛을 속여 농염한 화장과 치마의 옷차림 아래 자신을 숨기면서, ‘비밀’의 장막을 한 겹 사이에 두고 바라보기 때문에 아마도 평범한 현실이 꿈같은 불가사의한 색채를 띠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매일 밤처럼 이런 분장을 계속하여, 때로는 미야토좌의 입석이나 활동사진 구경꾼들 사이로 태연하게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다. 절에 돌아오는 것은 거의 12시 무렵이었지만, 방에 올라가면 곧바로 공기 램프를 켜고 지친 몸의 옷차림도 풀지 않은 채 모포 위에 꼴사납게 누워, 아쉬운 듯이 화려한 기모노의 색을 바라보거나 소매를 살랑살랑 흔들어보곤 했다. 벗겨지기 시작한 백분이 거칠고 늘어진 볼의 피부에 배어있는 것을 거울에 비추어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퇴폐한 쾌감이 오래된 포도주의 취기처럼 영혼을 자극했다. 지옥과 극락의 그림을 배경으로, 화려한 속옷 차림 그대로 유녀처럼 나른하게 이불 위에 엎드려, 예의 기괴한 서적의 페이지를 밤늦도록 넘기기도 했다. 점차 분장도 능숙해지고 대담해져서, 호기심 어린 연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단도나 마취약 같은 것을 띠 사이에 끼워 넣고 외출하기도 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범죄에 따라다니는 아름답고 로맨틱한 향기만을 충분히 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어느 저녁의 일이었다. 나는 뜻밖에도 기이한 인연으로 더욱 기괴하고,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며, 더욱 신비로운 사건의 실마리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위스키를 마시고 산유칸 2층 귀빈석에 자리 잡았다. 아마도 밤 10시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붐비는 객석은 안개 같은 탁한 공기로 가득했고, 검고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군중의 미지근한 숨결이 얼굴의 백분을 썩게 할 듯이 떠돌았다. 어둠 속에서 삐걱거리며 눈부시게 펼쳐지는 영화의 광선이 눈동자를 찌를 때마다 취한 머리는 터질 듯이 아팠다. 때때로 영화가 꺼지고 갑자기 전등이 켜지면, 계곡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처럼 아래층 군중의 머리 위로 떠다니는 담배 연기 사이로, 나는 깊숙이 눌러쓴 고조즈킨의 그늘에서 객석에 가득 찬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구식 두건 차림을 신기한 듯 엿보는 남자들이나, 멋진 차림새의 색조를 탐내듯 훔쳐보는 여자들이 많은 것을, 속으로 은근히 득의양양해하고 있었다. 구경꾼 여자들 중에서, 차림새의 이상한 점에서, 몸가짐의 요염한 점에서, 더 나아가 용모의 점에서도, 나만큼 사람들의 눈에 띈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귀빈석의 내 옆자리가 언제부터인가 채워졌는지 잘 모르겠지만, 두세 번째로 다시 전등이 켜졌을 때, 내 왼쪽에 남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알아챘다.

여자는 스물두세 살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스물여섯, 스물일곱쯤 되었을 것이다. 머리를 세 갈래로 땋아 올리고, 온몸을 하늘색 망토로 감싸고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질 듯한 선명하고 아름다운 얼굴만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었다. 게이샤인지 아가씨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옆에 있는 신사의 태도로 보아 결코 정숙한 아내는 아닌 듯했다.

“…마침내 체포되었군…”

여자는 작은 목소리로 스크린에 나타난 자막을 읽었다. 터키 담배 M.C.C.의 향 짙은 연기를 내 얼굴에 뿜으며, 손가락에 끼고 있는 보석보다도 날카롭게 빛나는 큰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내 쪽으로 향했다.

화려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목소리의 노래 선생 같은 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내가 2-3년 전 상하이로 여행할 때 배 안에서 우연히 잠깐 관계를 맺었던 T양이었다.

여자는 그 당시에도 상인인지 일반인인지 구별이 안 가는 태도와 옷차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에서 동행했던 남자와 오늘 밤의 남자는 풍채나 용모가 완전히 달랐지만, 아마도 이 두 남자 사이를 연결하는 수많은 남자들이 T양의 과거 생애를 사슬처럼 관통하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여인이 항상 한 남자에서 다른 남자로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종류의 여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2년 전 배에서 친해졌을 때, 둘은 여러 사정으로 본명도 밝히지 않고, 처지나 주소도 알리지 않은 채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사랑에 빠진 여자를 적당히 속이고, 몰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후 태평양 위의 꿈속의 여자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때는 약간 통통하게 살이 쪘던 여자가 신성할 정도로 야위어 깔끔해졌고, 긴 속눈썹의 촉촉하고 둥근 눈이 닦은 듯이 맑아져 남자를 남자로도 여기지 않는 듯한 늠름한 위엄마저 갖추고 있었다. 만지는 것에 붉은 피가 번질 것 같았던 생생한 입술과 귓불이 숨을 듯한 긴 머리카락만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코는 전보다 조금 험상궂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여자가 과연 나를 알아차렸을까.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불이 켜지자 남자와 속삭이며 장난치는 모습은 옆에 있는 나를 평범한 여자로 무시하고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 여자 옆에 있으면 지금까지 자랑스러워했던 내 분장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정이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요녀의 매력에 기가 눌려 기교를 다한 화장과 차림새도 추하고 천박한 괴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성스러움이나 아름다운 용모에서도 나는 도저히 그 여자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고, 달 앞의 별처럼 덧없이 시들어버릴 뿐이었다.

몽롱하게 자욱한 객석의 더러운 공기 속에서 흐림 없는 선명한 윤곽을 뚜렷이 떠올리며, 망토 그림자에서 물고기처럼 유연한 손을 반짝이며 헤엄치는 화려함. 남자와 대화하는 동안에도 가끔 꿈결 같은 눈동자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눈썹을 찌푸리며 군중을 내려다보거나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미소 짓거나 할 때마다 완전히 다른 표정이 넘쳐흘렀다. 어떤 의미도 선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크고 검은 눈동자는 객석의 두 개의 보석처럼 멀리 계단 아래 구석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의 모든 도구가 단순히 물건을 보거나 냄새 맡거나 듣거나 말하는 기관으로서는 너무나 여운이 풍부해서, 인간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남자의 마음을 유혹하는 달콤한 먹이였다.

이제 객석의 시선은 하나도 내게로 향하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 인기를 빼앗아간 그 여자의 미모에 대해 질투와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때는 내가 가지고 놀다 마음대로 버렸던 여자의 용모의 매력에 순식간에 빛을 잃고 밟혀 가는 억울함. 혹시 여자는 나를 알아보고 있으면서 일부러 비꼬는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미모를 부러워하는 질투심이 가슴속에서 점점 연모의 감정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여자로서의 경쟁에서 패배한 나는 이제 한 번 더 남자로서 그 여자를 정복하고 승리를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억누를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혀 유연한 여자의 몸을 갑자기 확 움켜쥐고 흔들어보고 싶어졌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오늘 밤 오랜만에 당신을 보고, 나는 다시 당신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소. 한 번 더 나와 악수할 마음이 없으십니까? 내일 밤에도 이 자리에 와서 나를 기다려 주실 마음이 없으십니까? 나는 내 주소를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소. 그저 바라건대 내일 이맘때 이 자리에 와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어둠 속에서 나는 허리띠 사이에서 반지와 연필을 꺼내 이런 낙서를 하고 몰래 여자의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상대방의 모습을 살폈다.

밤 11시경, 활동사진이 끝날 때까지 여자는 조용히 구경하고 있었다.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우르르 장외로 쏟아져 나올 때의 혼잡 속에서, 여자는 다시 한 번 내 귀에 대고,

“…마침내 체포되었군요…”

라고 속삭이며, 전보다 더 자신감 있고 대담한 응시를 내 얼굴에 잠시 던지고는, 곧 남자와 함께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체포되었군요…”

여자는 어느새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섬뜩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일 저녁에 순순히 나타날까? 예전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상대방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하고 함부로 나섰다가 도리어 약점을 잡히지는 않을까, 온갖 불안과 의혹에 휩싸인 채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겉옷을 벗고 긴 속옷 차림이 되려고 할 때, 두건 안에서 네모나게 접힌 작은 종이 조각이 떨어졌다.

“Mr. S. K.”

라고 쓰인 잉크 자국을 투과해 보니 옥양목처럼 빛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 여자의 필체였다. 구경하는 동안 한두 번 화장실에 갔던 것 같았는데, 이미 그 사이에 답장을 써서 몰래 내 옷깃 사이에 넣어둔 모양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에 그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비록 차림새를 바꾸셨어도 3년 동안 꿈에서조차 잊지 못한 그 모습을 어찌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두건을 쓴 여인이 그대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변함없이 호기심 많은 그대의 모습이 우스워집니다. 저를 만나고 싶다 하시는 것도 아마 이 호기심 때문이겠지요. 망설여지긴 하지만 너무나 기쁜 마음에 이런저런 분별력도 사라져 그저 말씀대로 내일 밤 꼭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제게 약간의 사정이 있고 생각할 것도 있어, 9시부터 9시 반 사이에 카미나리몬까지 와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보낸 마부가 반드시 그대를 찾아 제 집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그대가 주소를 숨기신 것처럼 저도 현재 거처를 알려드리지 않을 작정이라, 마차에서 그대의 눈을 가리고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것을 승낙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그대를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어가며 어느새 탐정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이상한 호기심과 공포가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여자가 자신의 성벽을 파악하고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저녁은 굉장한 폭우였다. 나는 완전히 옷차림을 바꾸어 대섬 위에 고무 외투를 걸치고, 주루룩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섰다. 신보리의 도랑이 길 전체에 넘쳐 나는 버선을 품에 넣었지만, 흠뻑 젖은 맨발이 집 행렬의 등불에 비쳐 반짝거렸다. 엄청난 빗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음 속에 모든 것이 묻혀, 평소 북적이는 히로코지 거리도 대부분 빗장을 걸어 잠갔고, 두세 명의 치마를 걷어 올린 남자들이 패주한 병사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전차가 가끔 레일 위에 고인 물을 튀기며 지나갈 뿐, 곳곳의 전신주와 광고판 불빛이 자욱한 빗속 공기를 어렴풋이 밝힐 뿐이었다.

외투에서, 손목에서, 팔꿈치 근처까지 물범벅이 되어 간신히 카미나리몬에 도착했다.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아크등의 빛을 통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어두운 구석에 숨어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며 잠시 서 있자 이윽고 아즈마바시 쪽의 어둠에서 붉은 등불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해 철커덕거리며 전차 선로 위를 질주해 오던 낡은 인력거가 내 앞에서 멈췄다.

“나리님, 타시지요.”

깊은 만쥬 모자와 비옷을 입은 인력거꾼의 목소리가 차축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 속에 사라지는가 싶더니 남자는 갑자기 내 뒤로 돌아와 하부타에 천을 재빨리 내 양 눈 위에 두어 번 감아 관자놀이 피부가 뒤틀릴 정도로 강하게 조였다.

“자, 타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남자의 거친 손이 나를 잡아 허둥지둥 인력거 위에 태웠다.

눅눅한 냄새가 나는 포장 위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내 옆에는 여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분 냄새와 따뜻한 체온이 포장 안에 김이 서리듯 가득 찼다.

채찍을 든 인력거는 방향을 헷갈리게 하려는 듯 한 곳을 두세 번 빙빙 돌아 달리기 시작했지만,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꺾이더니 어느새 미로 속을 헤매는 듯했다. 가끔 전차길로 나오기도 하고 작은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인력거에 흔들렸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여자는 물론 T양일 터였지만, 묵묵히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내 눈가리개가 엄격히 지켜지는지 감독하기 위해 동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남의 감독 없이도 결코 이 눈가리개를 벗을 생각이 없었다. 바다에서 알게 된 꿈같은 여자, 큰비 내리는 밤 포장 속, 밤의 도시의 비밀, 맹목, 침묵 –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완전한 신비의 안개 속에 나를 던져 넣어버렸다.

이윽고 여자는 굳게 다문 내 입술을 벌려 입 안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었다.

한 시간쯤 지나 겨우 인력거가 멈췄다. 다시 거친 남자의 손이 나를 이끌며 좁아 보이는 골목을 두세 칸 가더니 뒷문 같은 것을 끼익 열고 집 안으로 데려갔다.

눈을 가린 채로 혼자 방에 남겨졌다. 잠시 앉아 있으니 곧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말없이 인어처럼 몸을 움직여 다가와 내 무릎 위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두 팔을 내 목에 두르고 하부타에 매듭을 살며시 풀었다.

방은 8칸 정도 되는 크기였다. 건축이나 장식이 꽤 훌륭했고 목재도 잘 선별한 듯했지만, 마치 이 여자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대기실인지 첩의 집인지 상류층의 엄격한 주거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쪽 툇마루 밖에는 울창한 정원이 있고 그 너머로는 판자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다. 이 정도의 전망으로는 이 집이 도쿄의 어느 지역에 있는지 대략적인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잘 와주셨어요.”

이렇게 말하며 여자는 방 중앙에 있는 사각형 자단 탁자에 몸을 기대고 하얀 두 팔을 마치 두 마리 생물처럼 늘어뜨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깃이 달린 차분한 줄무늬 오메시에 하라아와세 오비를 매고 은행나무 모양으로 머리를 묶은 모습이 어젯밤과 너무나 다른 분위기여서 나는 우선 놀랐다.

“당신은 오늘 밤 제가 이렇게 차려입은 걸 이상하게 여기시겠죠. 하지만 남에게 신분을 알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매일 옷차림을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탁자 위에 엎어져 있던 유리잔을 일으켜 포도주를 따르며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얌전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기억해 주셨네요. 상하이에서 헤어진 뒤로 여러 남자와 고생도 해봤지만, 이상하게 당신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이번에야말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신분도 처지도 알 수 없는 꿈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계속 함께 해주세요.”

여자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먼 나라의 노래 가락처럼 애절하게 내 가슴에 울렸다. 어젯밤처럼 화려하고 승기 넘치며 영리해 보이던 여자가 어떻게 이런 우울하고 순종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마치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내 앞에 영혼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꿈속의 여인”, “비밀의 여인”. 아련하고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랑의 모험의 재미에 빠져, 나는 그 후로 매일 밤 여자를 찾아갔다. 밤 2시경까지 즐기다가 또 눈가리개를 하고 카미나리몬까지 돌려보내졌다. 한 달도 두 달도 서로의 거처도 모르고 이름도 모른 채 만나고 있었다.

여자의 처지나 집을 알아내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이상한 호기심에서 내가 탄 인력거가 과연 도쿄의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인지, 지금 내가 눈을 가린 채 지나가고 있는 곳이 아사쿠사에서 어느 쪽인지, 그것만은 꼭 알고 싶어졌다. 30분이나 1시간, 때로는 1시간 반이나 덜컹거리며 시내를 달린 후 멈추는 여자의 집은, 의외로 카미나리몬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밤 인력거에 흔들리며 여기일까 저기일까 하고 마음속으로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이 눈가리개를 풀어줘.”

하고 인력거 위에서 여자에게 졸랐다.

“안 돼요, 안 돼요.”

하고 여자는 당황해서 내 양손을 꽉 잡고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제발 그런 제멋대로 행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 길은 제 비밀이에요.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당신은 저를 버릴지도 몰라요.”

“어째서 내가 너를 버리겠어.”

“그렇게 되면 저는 더 이상 ‘꿈속의 여인’이 아니게 돼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는 것보다 ‘꿈속의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온갖 말로 달래 보았지만 여자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보여드리죠… 하지만 잠깐만이에요.”

여자는 한숨을 쉬듯 말하고 힘없이 눈가리개 천을 벗기며,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하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답게 맑게 갠 하늘빛은 이상하게 어두워져 별들이 가득 반짝이고, 하얀 안개 같은 은하수가 끝에서 끝까지 흐르고 있었다. 좁은 도로 양쪽에는 상점들이 처마를 나란히 하고 있었고, 등불 빛이 활기차게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꽤 번화한 거리인 것 같은데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인력거는 계속 그 거리를 달려 곧 한두 블록 앞 모퉁이 정면에 세이비도라고 크게 쓴 도장집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인력거 위에서 멀리서 간판 옆에 쓰인 작은 글씨의 주소를 들여다보려 하자 여자는 갑자기 눈치챘는지,

“앗!”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내 눈을 가렸다.

번화한 상점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이었다. 막다른 곳에 도장 가게 간판이 보이는 거리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지금까지 지나온 적 없는 길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것 같은 수수께끼의 세계 느낌에 나는 다시 이끌렸다.

“당신, 저 간판의 글자를 읽으셨나요?”

“아니, 읽지 못했어. 도대체 여긴 어디인지 나로선 전혀 모르겠어. 나는 당신의 생활에 대해서는 3년 전 태평양 파도 위에서의 일밖에 모르네. 나는 당신에게 유혹당해 뭔가 먼 바다 건너 환상의 나라로 끌려온 것 같아.”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여자는 깊은 슬픔이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발 그런 마음으로 계속 있어 주세요. 환상의 나라에 사는 꿈속의 여자라고 생각해 주세요. 이제 두 번 다시 오늘 밤처럼 제멋대로 굴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그 후 한동안 나는 그날 밤 여자가 보여준 이상한 거리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등불이 환하게 밝힌 번화한 좁은 골목 끝에 보였던 도장 가게의 간판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그 마을의 소재를 찾아내려고 고심한 끝에, 나는 겨우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오랜 세월 동안 매일같이 동승하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동안, 가미나리몬에서 인력거가 빙빙 한 곳을 도는 횟수나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도는 회수까지 자연스럽게 일정해져서, 나는 어느새 그 요령을 익혀버렸다. 어느 날 아침, 나는 가미나리몬 모퉁이에 서서 눈을 감은 채 두세 번 빙빙 돌고 난 뒤, 이쯤이겠다 싶을 때 인력거와 비슷한 속도로 한쪽으로 달려나가 보았다. 그저 대충 시간을 가늠해 여기저기 골목을 꺾고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바로 이 근처라고 생각되는 곳에 예상대로 다리도 있고 전차길도 있어서 확실히 이 길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길은 처음에 가미나리몬에서 공원 외곽을 돌아 센조쿠마치로 나와 류센지마치의 좁은 길을 우에노 쪽으로 올라갔다가, 쿠루마자카시타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오카치마치 거리를 7-8정 정도 가다가 이내 또 왼쪽으로 꺾기 시작한다. 나는 거기서 갑자기 이전의 골목과 마주쳤다.

과연 정면에 도장 가게 간판이 보인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비밀이 숨어있는 바위굴의 깊은 곳을 살펴보듯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막다른 골목으로 나가보니 뜻밖에도 그곳은 매일 밤 노점이 들어서는 시타야 타케초 거리의 연장선이었다. 언젠가 작은 무늬의 치리멘을 산 고물상의 가게도 바로 5-6칸 앞에 보였다. 이상한 골목은 샤미센보리와 나카오카치마치 거리를 가로질러 연결하는 도로였는데, 내가 지금까지 그곳을 지나간 기억이 없었다. 나를 산산이 괴롭힌 세이비도의 간판 앞에 서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찬란한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꿈같은 신비한 공기에 둘러싸인 채, 붉은 등불을 밝히고 있는 밤의 정취와는 전혀 다르게, 가을 햇살이 강렬히 내리쬐는 가운데 말라버린 초라한 집들을 보니 갑자기 실망감이 밀려와 흥이 깨졌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개가 길거리의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듯이, 나는 다시 그곳에서 방향을 잡아 달려나갔다.

길은 다시 아사쿠사 구로 들어섰다. 코지마초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스가바시 부근에서 전차 길을 건너 다이치가시를 야나기바시 쪽으로 돌았다. 마침내 료고쿠의 히로코지에 도착했다. 여자가 어떻게 방향을 감추려고 큰 우회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야겐보리, 히사마츠초, 하마초를 지나 카키하마바시를 건넌 곳에서 갑자기 앞이 흐릿해졌다.

여자의 집은 이 근처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쯤 그 부근 좁은 골목을 여러 번 들락거렸다.

마침 도료곤겐 맞은편, 빽빽이 들어선 집들 사이 처마 틈을 가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작은 길을 발견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여자의 집이 그 안쪽에 숨어 있음을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른쪽 두세 번째 집, 깨끗이 씻어낸 판자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층집 난간에서 소나무 잎 사이로 여자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지 못하게 조롱하는 듯한 눈동자를 들어 이층을 올려다보니, 여자는 미소 한 번 짓지 않고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인 척하는 듯했다. 그 용모는 밤의 느낌과는 달랐다. 단 한 번, 남자의 청을 허락해 눈가리개 천을 느슨하게 한 것뿐인데, 비밀이 드러난 후회와 실의의 감정이 보는 사이에 얼굴에 나타나더니, 이내 조용히 장지문 그림자로 사라져 버렸다.

여자는 요시노라는 그 근방에서 재산이 있는 과부였다. 그 도장 가게의 간판과 마찬가지로, 모든 수수께끼는 풀려 버렸다. 나는 그 뒤로 그 여자를 버렸다.

이삼일이 지나고 나서, 갑자기 나는 절을 철수하고 다바타 쪽으로 이사했다. 내 마음은 점점 ‘비밀’ 같은 미지근하고 담백한 쾌감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짙은 색채의 피투성이 환희를 찾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희곡 코끼리

등장인물

교호 13년 광남국에서 막부에 바친 수코끼리 한 마리. 그리고 당시 에도의 민중.

1막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이에야스의 해내 통일로부터 약 100년, 정성공의 타카사고 섬 점령으로부터 약 70년이 지난 교호 어느 해 6월 15일, 산노 축제 아침의 코지마치 카이즈카(현재 하야부사초 부근)의 해자 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해자를 따라 길가에 지금 막 산노 신여의 행차를 뵙고자 하는 무사와 서민의 노소 남녀가 가득 줄지어 앉아, 분주히 부채와 단선을 사용하며 땀을 닦아가며 자주 목을 빼고 위쪽을 바라본다. 요리키, 도신, 토비들이 구경꾼들 앞을 이리저리 다니며 행렬의 통로를 경호한다. 군중 뒤로 해자를 사이에 두고 멀리 치요다 성벽이 보인다. 시각은 오전 6시경. 하늘은 맑다.

요리키: 아, 이봐, 이봐. 모두들 그렇게 앞으로 나서면 안 돼. 이제 곧 신여가 지나가신다.

토비: (두 팔을 벌려 구경꾼을 뒤로 밀며) 자, 너희들은 한 칸 정도 더 뒤로 물러나. 이러다간 행차 길이 막혀 버린다고.

직인 1: 이 더위에 앞뒤로 밀리니 견딜 수가 없군. 어쨌든 근래 보기 드문 호화로운 인파야.

직인 2: 그럴 수밖에. 모두들 신여보다는 코끼리 수레를 끄는 모습을 보려는 거지.

직인 1: 잠깐 한조몬 쪽을 봐. 완전히 까마귀 떼같이 새카맣잖아.

재담꾼 풍의 남자: “나리, 어떠십니까. 코끼리의 인기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산노 신사의 신주(미코시)가 아무리 고마워도 매년 똑같은 걸 반복해서는 시작도 못하니, 코끼리를 들여와 분위기를 띄우다니 기발한 생각입니다.”

마을 주민의 주인: “정말 그렇구나. 코끼리도 머나먼 일본까지 와서 보람이 있다고 할 만하군.”

마을 주민의 은거자: “그렇습니다. 외국에서는 별로 신기하게 여기지도 않겠지요. 무엇이든 샴이라는 나라에서는 국왕의 공주부터 하층민의 여자 아이들까지 소나 말처럼 부려먹는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재담꾼 풍의 남자: “그렇군요, 그런 건가요.”

마을 주민의 은거자: “어쨌든 코끼리가 수레를 끄는 모습은 볼 만할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담한 일을 하는군요. 오래 살다 보면 온갖 신기한 일을 다 보게 됩니다.”

마을 주민의 아내: “그런 짐승이 대체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요?”

마을 주민의 주인: “아마도 당나라나 천축국 쪽에서 왔겠지.”

재담꾼 풍의 남자: “남만 쪽일 겁니다.”

마을 주민의 은거자: “아니, 샴에서 왔다니까.”

마을 주민의 젊은 주인: “노인네들이나 여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져서 안 되겠어. 저건 광남국에서 정대성이라는 사람이 배에 실어 가져온 거야.”

직인 풍의 남자: “잠깐 여쭤보겠습니다만, 그 광남국이라는 데는 어느 쪽에 있습니까?”

재담꾼 풍의 남자: “광남이라고 하니 남쪽 어디겠지요.”

마을 주민의 젊은 주인: “당나라와 천축국 사이에 있는 나라로, 일 년 내내 봄이 계속되고 여름과 겨울이 없는 곳이라더군.”

아이를 업은 소년: “우리도 그런 따뜻한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마을 주민의 은거자: “아니야, 역시 우리나라만큼 좋은 곳은 없을 거야.”

직인 풍의 남자 둘: “광남국이라니, 강의에도 잘 안 나오는 나라군.”

마을 주민의 은거자: “천축과 당나라 사이에 있다면 틀림없이 샴국의 다른 이름일 거야.”

마을 주민의 젊은 주인: “아니요, 샴과는 다릅니다. 정대성이라는 이름이 당나라 사람 같으니 분명 당나라의 속국일 겁니다.”

마을 주민의 점원: “그런데 천축의 속국이라는 얘기도 있더군요.”

깃발 든 젊은 무사: “자네들의 무식함에 정말 곤란하군. 데려온 사람은 복건의 정대성이지만, 나라는 천축의 속국이야.”

직인 풍의 남자 하나: “허, 또 모르는 나라가 나왔군요. 복건이란 데는 어디에 있습니까?”

깃발 든 젊은 무사: “그래, 아마 당나라 근처일 거야.”

직인 풍의 남자 둘: “그럼 당나라의 속국입니까?”

[하타모토의 젊은 사무라이]: 그 근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출가한 승려]. 후쿠켄은 와토나이가 정벌한 타카사고 섬 맞은편 모로코시 땅이다. 천축에서 온 짐승을 당인이 데려왔다.

[재담꾼 풍의 남자]. 뭔가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군요.

[구경꾼 일동]. 아하하하하.

[도신]. 이봐, 좀 조용히 해.

[유녀 중 하나]. 그나저나 이제 곧 지나갈 것 같아.

[다방 여자 중 하나]. 정말 그래. 이제 곧 해가 높아지면 더워서 견딜 수 없을 거야.

[노는 사람]. 더위보다는 햇볕에 타는 게 더 걱정될 거야.

[동료 풍의 남자]. 정말 덥군. 축제 날씨로는 좋지만, 구경꾼들은 힘들어.

[노는 사람]. 두목, 이제 행렬이 저쪽으로 출발했나요?

[토비]. 방금 출발했습니다. 마침 니시오 님 저택 앞을 지나가실 시간입니다.

[동료 풍의 남자]. 그럼 아직 30분은 더 기다려야겠군.

[유녀 중 둘]. 어머,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해?

[동료 풍의 남자]. 그래. 매년 다이묘와 하타모토 일행이 나가다초 거리를 따라 관람석을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행렬의 수레와 가마를 세워 구경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거든.

[다방 여자 중 둘]. 무사들이란 참 제멋대로네. 서민들의 불편은 신경도 안 쓰고 수레를 멈춰 세워 구경하다니.

[유녀 중 하나]. 그 정도면 평소에 다방이나 극장 단속을 그렇게 엄하게 하지 말아야지.

[동료 풍의 남자]. 쉿. 너무 큰 소리 내지 마. 관리들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

[하이쿠 명인]. 이제 곧 선발대가 보여도 될 텐데요. 코끼리란 게 발이 느린 짐승인가 봅니다.

[마을 은퇴자]. 몸집이 무척 크다고 하니, 일본인들은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 거예요.

[하이쿠 명인].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대국의 짐승은 다르군요. 키가 3미터는 넘는다고 하니까요.

[마을 은퇴자]. 꽃수레도 꽤 크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겠어요. 어쩌면 코끼리가 웃고 있을지도 모르죠.

[아이를 업은 소년]. 코끼리는 뭘 먹고 살까요?

[마을 의사]. 만두와 대나무 잎을 준다고 하더군. ― 그리고 아주 천한 이야기지만, 코끼리 똥은 매독 치료제가 된다네.

[재담꾼 풍의 남자]. 헤에.

[마을 의사]. 그리고 저 상아가 대단한 물건이지. 상아세공을 하면 아주 비싼 물건이 된다네.

[하이쿠 명인]. 상아에 똥까지 쓸모가 있다니, 정말 유용한 짐승이군요.

마을 의사: “대남은 총신에 지혜가 돌기 어렵다고 합니다만, 코끼리는 크면서도 아주 영리하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상경에서 돌아온 사람 말로는, 서경에서 천자님께서 어람하실 때 그 코끼리가 앞발을 접고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대신 사람들이 너무 바보 취급하면 긴 코로 휘감아 올려서 한 번에 목 졸라 죽인다고 하더군요.”

아이를 업은 동자: “그럼 곰이나 호랑이보다 강한 건가요?”

마을 의사: “응, 실제로 싸우면 강할 거야. 이것도 서경에서 본 사람 얘긴데, 담수담면이라는 광남인 코끼리 조련사가 도끼 날을 코끼리 등에 꽂아 넣고 쫓아다녀도 전혀 아파하는 기색이 없더라고 해. 그러니 곰이나 호랑이는 발톱도 못 세울 거야.”

하이쿠 종장: “하지만 사자는 못 당할 거예요.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고 하잖아요.”

마을 의사: “아니, 사자도 못 당할 거야.”

마을 은거자: “그런 짐승을 서툰 일본인이 다루는 건 위험한 일이군요. 조만간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마을 아낙: “저희 딸이 춤추는 아가씨가 돼서 무대에 올랐는데, 괜찮을까요?”

마을 주인: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도 꽃수레를 끌고 있는데, 코로 휘감기지는 않겠죠?”

마을 은거자: “걱정되시는군요. 아이들은 성급해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출가 승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예로부터 코끼리는 보현보살의 탈 것이 될 정도로 고마운 짐승이지요.”

마을 점원: “사자는 문수보살의 부하지만, 보현보살의 탈 것이 되는 걸 보면 코끼리는 여자의 엉덩이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하이쿠 종장: “그렇군요. 속담에도 ‘여자의 검은 머리에는 큰 코끼리도 묶인다’고 하잖아요.”

직인 차림의 남자 1: “그런데 이번 코끼리는 수컷인가요, 암컷인가요?”

마을 의사: “나가사키까지는 암수 한 쌍으로 왔는데, 암컷은 거기서 죽고 수컷만 살아남았다네.”

어릿광대 풍의 남자: “그럼 짐승이지만 죽은 아내가 그리울 테지.”

마을 은거자: “수컷이라면 더더욱 여자의 엉덩이를 노릴 테고요.”

마을 의사: 여자는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쥐는 무척 싫어하는 모양이더군요. 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인이 그 짐승을 데려왔을 때는 쥐를 철망 상자에 넣어 먹이로 주었답니다. 그러자 그 녀석, 쥐가 망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겁을 먹고는 네 발로 상자를 꽉 밟고 서서 온통 그쪽에만 신경 쓰고 있더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놈이 수영을 잘해서 바다로 뛰어들어 광남으로 돌아가 버릴 거라나 봐요.

마을 주인: 아무리 코끼리라도 천축까지 바다를 헤엄쳐 갈 수는 없겠지요.

마을 젊은 주인: 아니, 몸집이 크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마을 의사: 서경의 천자님께서 코끼리를 어열하셨을 때의 어제 어가를 아십니까?

하이카이의 종장: 틀림없이 “때가 되면 남의 나라 짐승도 오늘 구중궁궐에서 보니 기쁘구나”라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원의 어가는 “신기하게도 도읍에 온 기린의 당과 대화, 지나온 들과 산은 얼마나 먼 길이었을까”라고 하셨습니다.

마을 집 수습: 종장님, 그 ‘기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이카이의 종장: 코끼리의 일본 이름이겠지요.

마을 젊은 주인: 기사가타 마을이라고도 하니까요.

하이카이의 종장: 바쇼 옹의 구절에도 “기사가타의 비에 서시가 졸고 있는 꽃”이라는 게 있습니다.

마을 집 은거: 서경에서는 천자님께서 노래를 지으시고, 오늘은 또 장군님께서 보시고, 코끼리도 행운아로군요.

하이카이의 종장: 상방에서는 이미 영상시라는, 코끼리에 관한 시가를 모은 것이 출판되었습니다.

마을 젊은 주인: 에도에서도 점차 단주로가 코끼리에 관한 광대극을 만들겠죠.

마을 집 은거: 이제부터 한동안 세간이 코끼리 이야기로 가득하겠군요.

이때, 위쪽 멀리서 삼현육각, 피리, 북, 박자목 소리가 들렸다.

탕녀 중 하나가 “어머나, 슬슬 행렬이 오고 있네요.”라고 말했다.

아이를 업은 동자가 “자, 도련님. 이제 곧입니다. – 모두 아이들이 있으니 그렇게 밀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아이고, 정말 사양하겠소. 나를 거기에 끼워 넣지 말아주시오.”라고 들렸다.

동료 풍의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누구야, 누구야, 함부로 밀고 오면 위험하잖아.”라고 소리쳤다.

동심이 “이봐, 시끄럽게 하지 마라.”라고 꾸짖었다.

토비가 양손으로 구경꾼들을 뒤로 밀며 “당신들은 아무리 말해도 앞으로 나오는군. 모두 더 뒤로 물러서, 물러서.”라고 외쳤다.

군중 속에서 “그렇게 밀치면 해자에 빠질 거야!”라는 소리가 들렸다.

요리키가 “아, 초닌들이여! 토대 위로 올라가면 안 됩니다.”라고 소리쳤다.

초닌집 은거자가 군중에 밀려 비틀거리며 “코끼리를 보는 것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이군요.”라고 중얼거렸다.

소녀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아야, 아파요. 모두 밀지 말아주세요!”라고 들렸다.

놀이꾼이 “어이어이, 어디선가 여자가 고통스러워 울고 있군. 그렇게 매력 없는 소리를 낼 바에야 구경 오지 말지.”라고 비웃었다.

유녀 둘이 “아이구, 난폭하네요, 이 사람. 방금 손질한 머리가 엉망이 되겠어요.”라고 걱정했다.

놀이꾼이 “그런 소리할 때가 아니야. 애초에 여자애들이 이런 때 나서는 게 잘못됐어.”라고 핀잔을 주었다.

다방 여종업원 둘이 “여자라도 새로운 건 보고 싶잖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친구 같은 남자가 “어쨌든 이번 코끼리를 보지 않으면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다방 여종업원 하나가 “저기, 벌써 저쪽에 보이기 시작했어.”라고 알렸다.

토비가 “자, 행렬의 선두가 오셨습니다. 모두 소란스러워하면 안 됩니다.”라고 명령했다.

구경꾼들은 조용히 서서 선두 행렬을 맞이했다. 돌봉, 사스마타, 맹근을 든 도신 세 명이 맨 앞에 나아갔다. 도신 다섯 명이 붉은 창을 들고 요리키 세 명이 사자를 앞뒤로 따랐다. 이어서 사자를 앞뒤로 따르는 도신 두 명을 좌우로 거느린 와카토 두 열, 조리토리 한 열, 창 한 열, 하사미바코 한 열, 합라카고 한 열, 마지막으로 다시 돌봉, 사스마타, 맹근을 든 도신 세 명, 붉은 창을 든 도신 다섯 명, 사자, 사카키 순서로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행진했다.

선두 행렬이 완전히 지나간 후, 다시 위쪽에서 후미 행렬의 대열이 히에 신사의 신여를 앞세워 돌봉, 사스마타, 맹근 한 열, 붉은 창 다섯 본 사자 한 열, 요리키 세 명 한 열, 네 열로 나아갔다. 도신 두 명이 사자 두 마리를 좌우로, 와카토 두 열, 말 한 열, 하사미바코 한 열, 합라카고 한 열, 세로로 늘어서고 돌봉, 사스마타, 맹근, 붉은 창 다섯 본을 후미로 아래로 걸어갔다.

구경꾼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합장하거나 큰절을 하거나 박수를 치며 신여를 예배했다.

아이를 업은 소년이 “도련님, 신여가 지나가면 이제 코끼리가 옵니다.”라고 말했다.

마을 노파가 “여러분, 그렇게 신여를 소홀히 하면 벌 받아요.”라고 꾸짖었다.

아이를 업은 소년이 “재미있는 건 역시 재미있군.”이라고 말했다.

마을 노파가 “그 재미있는 코끼리와 가마가 보인다는 것도 결국 산노 신사의 덕분이지요.”라고 말했다.

나이 든 무사가 “어느 시대든 신위의 행차 같은 것은 역시 신성하고 고마운 일이지.”라고 말했다.

마을 은거자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신위를 뵈면 왠지 모르게 고마워서 눈물이 나옵니다.”라고 말했다.

나이 든 무사가 “그런 마음가짐은 요즘 젊은이들에겐 때묻은 손톱만큼도 없지.”라고 탄식했다.

악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방 여종업원 하나가 “어머, 어떻게 된 걸까. 꽃수레는 안 보이고 가마만 잔뜩 오는 걸.”이라고 의아해했다.

친구 같은 남자가 “대장, 코끼리는 어떻게 됐나?”라고 물었다.

토비가 “꽃수레는 뒤로 밀렸습니다. 가마만은 춤추는 아가씨들이 지친다고 해서 지름길로 가도 된다는 허락이 났습니다. 아마 한조몬 밖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장인 풍의 남자 하나가 “관청에서도 춤추는 아가씨들에겐 배려가 있군.”이라고 말했다.

장인 풍의 남자 둘이 “쇼군님은 어디서 구경하시는 거요?”라고 물었다.

토비가 “아마 한조몬 안 야라이 밖까지 행렬이 들어간다니까, 거기서 구경하실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이쿠 선생이 “많이 가까워졌군요. 맨 앞 가마가 나이토 님 앞에서 멈췄습니다.”라고 말했다.

상인 점원이 “뒤의 가마들도 다 멈춘 것 같아요. 또 저기서 시간을 끌겠죠.”라고 말했다.

마을 은거자가 손을 가리키며 “뭔가 춤추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호인 풍의 남자가 “저건 여우춤일 겁니다. 야스나 광란의 소작사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상가 도련님이 “그 다음은 칼춤이군.”이라고 말했다.

호인 풍의 남자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을 은거자가 “야스나 역을 하는 건 누구일까요?”라고 물었다.

상인 점원이 “겐노죠라는 히라카와 텐진의 카게마라더군요.”라고 대답했다.

나이 든 무사가 “카게마가 신위의 행차를 따르고 상감 앞에 나타나다니, 세상이 말세가 됐군.”이라고 한탄했다.

젊은 하토모가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는 요즘 유행하지 않습니다.”라고 핀잔을 주었다.

마을 의사가 “남자든 여자든 미인은 그 자체로 미덕이라오.”라고 말했다.

아이를 업은 소년이 “저봐,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번엔 정말 올 거야.”라고 말했다.

가마가 군중에게 더욱 가까워지는 기색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좋아! 겐노죠! 일본 제일이야!”라고 외쳤다.

승려가 “과연, 겐노죠라는 사람은 꽤나 미소년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

시골 무사가 “분부하신 대로, 천하에 드문 멋진 카게마입니다. 귀족도 꽤나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군요. 오늘 밤쯤 히라카와 텐진에 동행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유흥꾼이 “아가씨들, 뭐라도 한마디 해주시지. 겐노죠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잖아.”라고 말했다.

유녀 하나가 “오코마 씨. 네가 뭐라도 말해봐. 틀림없이 그 아이가 좋아할 거야.”라고 말했다.

유녀 둘이 “그건 사람을 잘못 봤네. 함부로 말하면 누군가에게 혼날 텐데.”라고 말렸다.

다방 여급 하나가 “하지만 정말 저렇게 보면 반할 만한 아이네.”라고 말했다.

다방 여급 둘이 “사람 많고 더운데 그만 연애 타령 좀 해.”라고 말했다.

네 여자가 함께 웃었다.

위쪽에서 동일한 유카타를 입고 머리띠와 요시와라 모자 등을 쓰고 시부 우치와를 든 젊은이들이 십오륙 세의 미소년을 태우고 춤추는 가마를 끌며 나왔다. 노래하는 삼현 연주자들이 뒤를 따랐다. 무대 조금 아래쪽에 멈추어 춤을 추었다. 군중 속에서 우박처럼 박수가 쏟아졌다. 소년은 춤을 마치고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했다. 가마의 난간에 기대어 부채로 땀을 닦으며 유녀와 다방 여급들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요염하게 웃었다.

이어서 제2의 가마가 등장했다. 조금 위쪽에 멈춰 소년 소녀로 분장한 반사쿠, 산자, 게이세이 세 사람이 나비처럼 어지럽게 춤추며 사야아테를 연기했다. 다시 군중의 박수 속에 두 가마 모두 아래쪽으로 끌려갔다.

[여기서 들여쓰기 끝]

[여기서 행 바꾸고 천부터 1자 들여쓰기]

마치야의 은거자. 어쨌든 아이들치고는 모두 잘하는군요.

하이카이 종장. 정말 그렇습니다. 앞으로 배우라도 되면 대단한 평판을 얻겠지요.

마치야의 은거자. 저 게이세이로 분장한 아이는 진짜 여자애입니까?

마치 의사. 저건 코지마치 3초메에 사는 나가우타 선생님의 딸로, 소문난 하네츠카에리입니다.

노년의 무사. 평민의 딸이 카게마 따위와 함께 기예를 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야.

마치야의 은거자. 요즘 아가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들 앞에 나서는데, 좋지 않은 일이지요.

노년의 무사. 그렇지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저 연극이나 노래판 같은 것부터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네. 노가쿠라는 정말 훌륭한 것이 있는데, 남자가 여자처럼 분을 바르고 게이세이나 유녀의 동작을 연기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가. 이러다가는 세상이 점점 더 나약해질 게야. 한심한 일이야.

천가의 은거. “이것만큼은 관청의 위세로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요.”

노년의 무사. “하치다이 님은 근검과 상무를 중시하신 분이라 자주 서민들의 분에 넘치는 사치를 금하셨다더군. 하지만 오늘의 형편을 보면 윗분의 뜻이 아랫사람들에겐 잘 전해지지 않는 것 같네.”

천가의 은거. “코끼리를 핑계 삼아 여러 가지 악행이 유행하는 모양입니다.”

노년의 무사. “아무래도 이국의 네 발 달린 짐승을 성 안으로 들이는 것이 노인들에겐 이해가 가지 않네. 외국 것이라면 무턱대고 귀하게 여기는 건 경솔한 짓이지. 지나친 것은 오히려 미치지 못한 것만 못하다고 하잖나. 코끼리처럼 덩치만 큰 짐승은 오히려 민첩한 움직임이 불가능해 별로 쓸모가 없다네. 일본엔 소와 말이란 귀중한 짐승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하지.”

기삿집 젊은 무사. “그런 말씀을 하시는 당신은 왜 구경하러 오셨소?”

노년의 무사. “아니, 나는 히에 신사의 신여를 뵈러 왔다네. 코끼리는 그저 그 길에 구경하는 것뿐이야.”

남자의 목소리. “누구야, 누구야. 구태의연한 소리를 하는 놈은 무사건 뭐건 때려죽여버려!”

노년의 무사.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며) “무사에게 무례한 놈이군.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어서 이리 나와봐.”

천가의 은거. “그만 참으세요. 아무래도 축제라 기분이 들떠 있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다시 악기와 북, 박자 맞추는 소리가 울렸다.

직인 차림의 남자1. “가마가 줄지어 오는군.”

직인 차림의 남자2. “저건 어느 동네 것일까?”

천가의 점원. “맨 앞에 있는 건 고지마치 2초메의 칠복신일 거예요.”

천가의 젊은 주인. “그 다음은 3초메의 천인 하고로모야.”

노년의 무사. “그것도 역시 카게마인가?”

마을 의사. “아니오, 저건 모두 동네 무용수들입니다.”

하이카이 종장. “요즘은 아마추어들이 배우들 흉내를 잘 내는군요.”

천가의 은거. “야마노테도 시타마치에 뒤지지 않습니다.”

친구 같은 남자. “아무래도 2초메의 칠복신 중 벤자이텐과 3초메의 천인 하고로모가 미모를 겨루는 모양이야.”

놀이꾼. “둘 다 동네의 미인이니까.”

유녀1. “저 둘은 여자도 반할 정도야.”

유녀2. “바람둥이라 남자만으론 부족한가 봐.”

차야 여자 1: 아마 재작년 축제 때 히라카와초의 옷가게 딸이 야타이에서 도조지를 춤췄었지. 그때 어떤 대명의 영주님 눈에 들어서 지금은 훌륭한 첩이 되었다더라.

나카마풍의 남자: 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처녀들은 얄밉게도 화장을 진하게 하고 고귀한 분들의 눈에 들려고만 하잖아.

차야 여자 2: 이번에도 처녀들의 부모들이 꽤나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놀이꾼: 부모들뿐만 아니라 마을의 젊은이들 모두가 침을 흘리며 야타이를 끌고 있다고.

유녀 1: 그 처녀에게 반한 부잣집 도련님들이 5-6명이나 젊은이들 사이에 섞여 끌고 있다더라.

나카마풍의 남자: 어젯밤에도 처녀 일로 2초메와 3초메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릴 뻔했다고.

유녀 2: 코끼리도 저런 무리가 따라다니면 기분 좋겠지.

장인 풍의 남자 1: 저기 왔다. 어떠냐, 보지 않겠나. 예쁜 여자로구나.

장인 풍의 남자 2: 과연, 이쪽이 신령님보다 훨씬 더 영험할 것 같군.

카미테에서 ‘칠복신’과 ‘천인 하고로모’의 야타이가 꽃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소녀들을 싣고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끌려오고 있었다.

요리키: (야타이에 붙어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이봐, 시간이 많이 늦었잖아.

젊은이 1: 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여기저기 저택에서 춤을 청하셔서 그만 늦어졌습니다.

도신: 꽃수레는 아직 오지 않았나?

젊은이 2: 네, 곧 옵니다. 저기 뒤에 보이고 있습니다.

도신: 그렇다면 여기서는 더 이상 춤출 필요 없으니 빨리 한조몬 밖으로 가거라.

젊은이들 일동: 알겠습니다.

젊은이들이 박자를 맞추며 흥겹게 떠들면서 두 개의 야타이를 시모테로 끌고 갔다.

마치야의 아내: 정말 귀여운 춤꾼이구나.

마치야의 딸: 그러게요. 용모가 좋은 아이는 행복하죠.

마치야의 아내: 쇼군님이 보신다고 하니 얼마나 기쁠까.

마치야의 하녀: 정말 부럽지 않으세요? 내년에는 아가씨도 나가세요.

마치야의 딸: 나 같은 오타후쿠는 쇼군님이 웃으실 거야.

마치야의 하녀: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틀림없이 에도 전체의 남자들이 연정병에 걸릴 거예요.

하이카이의 종사. “코끼리도 볼만하겠지만, 춤 구경도 역시 버릴 수 없는 구경거리일 것이오.”

마치야의 은거. “그렇지요. 역시 우리나라의 풍속이 더 재미있는 점이 있지요. 코끼리 같은 건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유행하는 것이겠지요.”

꽃수레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북소리와 악기 소리, 키야리 소리가 파도가 무너지듯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서로 밀치며 앞줄로 나가려고 애썼다. 요리키, 도신, 토비들이 쉴 새 없이 손짓하며 군중을 제지했다.

“저기, 이번엔 정말 꽃수레가 틀림없어.” 나카마풍의 남자가 말했다.

“응, 그래 그래. 저기 온 게 코끼리 같아.” 놀이꾼이 맞장구를 쳤다.

“어이구, 꽤나 크구만. 마치 토장이 움직이는 것 같아.” 직인 체의 남자 하나가 감탄했다.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긴 코로구나. 땅을 핥고 있어.” 다른 직인 체의 남자가 거들었다.

“백상이라는 소문이었는데 뭔가, 검은 것 같군.” 마치야의 젊은 주인이 의아해했다.

“흑상이라는 것도 있겠죠.” 마치야의 점원이 대답했다.

“그럼 보현보살이 아니라 허공장보살인가요?” 호칸풍의 남자가 물었다.

“검은지 흰지 구별이 안 되는군요. 재 같은 애매한 색을 하고 있군요.” 마치야의 은거가 말했다.

코끼리가 진무천황의 꽃수레를 끌며, 많은 토비와 마을 청년들, 아이들에게 신나게 둘러싸여 상수로부터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야타이 위에는 바카와 히요토코 가면을 쓴 남자들이 다이카구라에 맞춰 춤을 추었다.

“과연, 이건 진기한 짐승이군요.” 하이카이의 종사가 감탄했다.

“저 코가 참 재미있군요.” 마치의 의사가 말했다.

“저 느릿한 걸음걸이가 재미있군요.” 하타모토의 젊은 사무라이가 덧붙였다.

“뭔가 몸집이 큰 데 비해 걸음이 느린 짐승이군.” 연로한 무사가 말했다.

“역시 불전에도 나오는 만큼, 보기에 고귀한 짐승이야.” 출가한 사람이 말했다.

“저 상아가 굉장하군요.” 마치야의 점원이 감탄했다.

“저 눈빛이 영리해 보이지 않나?” 마치야의 젊은 주인이 말했다.

“아무튼 묘하고, 진기하고, 기묘한 짐승이에요.” 호칸풍의 남자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코끼리가 꽃수레를 끌고 하수로 사라졌다. 군중이 와르르 무너지듯 꽃수레 뒤를 따라 떠들며 갔다. 은거와 연로한 무사 두 사람만이 무대에 남았다.

“하하하하하. 남자도 여자도 앞다투어 코끼리 뒤에 달라붙어 가버렸군요.” 마치야의 은거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 미친 것 같소그려.” 연로한 무사가 동의했다.

“뭔가 회색 바보 같은 거대한 짐승이었군요.” 마을집 은거자가 말했다.

“엄청 크기만 할 뿐이라 저 같은 사람은 도무지 알 수가 없소.” 노년의 무사가 대답했다.

“이제 한조문 근처까지 온 것 같습니다.” 마을집 은거자가 말했다.

“느리게 보여도 크기 때문에 의외로 걸음이 빠른 모양이오.” 노년의 무사가 말했다.

“진무 천황께서 코끼리에 끌려가신다는 것도 신기한 인연이군요.” 마을집 은거자가 말했다.

“역시 소에 끌게 하는 편이 보기 좋을 것 같소.” 노년의 무사가 말했다.

“저기 한조문 쪽을 보세요. 코끼리 몸이 문을 꽉 막아버렸습니다.” 마을집 은거자가 말했다.

“그렇군 – 어, 머리를 반쯤 문에 집어넣은 채 앞뒤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 같소.” 노년의 무사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북적거리며 큰 소동을 벌이고 있군요.” 마을집 은거자가 말했다.

“작은 문에 큰 짐승을 집어넣으려는 건 젊은이들의 무모함이지.” 노년의 무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마을집 은거자가 동의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잠시 침묵한 채 아래쪽을 향해 서 있었다. (막)

신제이

등장인물

소나곤 입도 신제이

모로미츠

모로키요 신제이의 낭당

나리카게

키요자네

이즈모 전사 미츠야스

미츠야스의 낭당 몇 명

때 헤이지 원년 12월, 노부요리와 요시토모의 모반이 있던 밤.

곳 야마시로와 오우미의 국경, 시가라키산 깊은 곳.

황폐한 산속 깊은 밤. 마른 잡초, 관목, 낙엽, 돌멩이 등이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널려 있고, 뒤쪽은 온통 대나무 숲으로 덮여 있다. 무대 중앙에 굵은 노송 한 그루가 높이 솟아 있고, 울창한 가지를 우산처럼 펼치고 있다. 가능한 한 무대 위아래를 높게 하여 흐린 겨울밤 하늘을 충분히 보여주고, 음울하고 어두운 희미한 빛으로 사방을 감싼다.

신제이는 70세가량으로, 삿갓을 쓰고 검은 법의를 걸친 채 소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의 오른쪽에 모로미츠와 키요자네, 왼쪽에 모로키요와 나리카게가 무장을 하고 웅크리고 있다. 이 주종 5인은 계속 무언가를 꺼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신제이) (지면을 뚫어지게 응시한 채, 주름진 목소리로) 모로미츠, 모로키요, 나리카게, 키요자네, 모두 여기에 있느냐?

(네 명의 낭당) 예, 여기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제이) 나는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다. 이제 세상의 물건을 볼 기력도 없어졌구나. 어떠냐, 하늘이 흐렸느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느냐?

(모로미츠) (다른 세 명의 낭당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석구석 흐려 있습니다.

(신제이)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냐?

(모로미츠) 그렇습니다.

(모로키요) 우리 주군, 어찌하여 그리 하늘의 별을 신경 쓰십니까?

(신제이) 저 불길한 별이 보이는 동안은 내가 눈을 뜰 용기가 없다. (말하면서 삿갓을 벗고,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제 꽤 밤이 깊었구나. 흐려 있어도 하늘에 달이 있는 듯 구름이 납처럼 빛나고 있다.

(나리카게) 달빛이 구름을 뚫고 제 이마를 차갑게 비추고 있습니다. 주변의 초목의 색이 수수께끼의 세계의 것처럼 보입니다.

(키요자네) 이것이 가을밤이라면 계곡물에 달이 비치고 짝을 그리워하는 사슴의 울음소리도 들렸겠지만, 겨울 한밤중에는 산도 초목도 죽은 것 같습니다.

(신제이) (몸을 떨며 두려운 듯이) 모두 잠시 조용히 있어 보아라. 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여 저 소리를 들어보아라. 너희들에게는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저 어딘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모로미츠) 저것은 아마도 밤바람이 뒤의 대나무 숲에 부딪치는 소리일 것입니다.

(신제이) 나에게는 어쩐지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리는데…

(모로키요) 이런 밤중에 이 산속으로 올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신제이) 아니,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다. 언제 어디서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 신제이의 목을 탐내는 자들이 많아, 산속이든 들판이든 초목을 헤치며 찾아다닐 것이다. 지금쯤 교토에서는 “신제이는 어디로 도망쳤나, 빨리 찾아내어 목을 베어라.”라고 겐지의 무사들이 떠들고 있을 것이다.

(나리카게) 그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학문이라 하고 기량이라 하고, 지금의 조정에 어깨를 나란히 할 자도 없는, 위세 있는 우리 주군을, 특히 주상의 총애가 뛰어나게 훌륭한 우리 주군의 목숨을, 겐지의 무사가 노리고 있다니 어찌된 영문입니까?

(신제이) 너희들에게는 그 자초지종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리카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키요자네) “저희들은 그저 당신의 명령대로 이곳까지 모시고 왔을 뿐입니다. 오늘 정오쯤, 우리 주군께서 갑자기 창백해지시더니 ‘도읍에 있으면 목숨이 위험하니 하루빨리 나를 어딘가 깊은 산속으로 데려가 숨겨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자세한 내막도 모른 채 급히 당신을 모시고 우선 다하라 깊숙한 곳에 있는 다이도지의 영지까지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결국 이런 산속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모로키요) “그때 주군의 모습이라니, 실례지만 마치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로미츠) “호겐 이래로 세상은 태평성대가 계속되어 겐페이의 무사들이 궁궐을 수호하고 조정의 위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우리 주군의 신변은 반석과 같이 안전할 터인데 어떤 사정이 있어 오늘 밤 같은 보기 흉한 짓을 하시는 것입니까.”

(신제이) “너희 같은 무학한 자들은 행복하구나.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내 학문과 재주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지금 와서 보니 오히려 어리석은 자가 부럽다. 나는 젊었을 때 당나라의 공자의 도를 배웠다. 그리고 겨우 1년 만에 그 오의를 깨달아 버렸다. 그 다음엔 노자의 도를 배웠다. 또 1년이 지나자 그 오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부처의 도를 배웠다. 이것도 1년 정도면 남김없이 배워 버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우주 간에 있는 모든 일을 알고자 했다. 천문이든 의술이든 음양오행의 도든 내가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별의 운행으로 세상의 유위전변을 점치는 것도, 사람의 상을 보고 그 사람의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눈에는 먼 미래의 일까지도 분명히 보인다. 세상이나 사람의 신상에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그 조짐이 나타나는 법인데, 내 눈에는 그것이 뚜렷이 보이게 되었다. 마침내는 자신의 슬픈 운명까지도 잘 보이게 되어 왔다. 그것이 내 불행이었던 거야.”

(모로키요) “그렇다면 최근에 그런 무서운 전조라도 나타난 것입니까?”

(신제이) “음, 내가 그것을 알아챈 것은 오늘 낮 무렵이었다. 인의 어소로 가는 도중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 한가운데 걸린 태양이 흰 무리를 둘러쓰고 있었다. 그것은 ‘백홍이 태양을 꿰뚫는다’고 하여, 시간을 놓치지 않고 조적이 도성에 일어나 국난을 일으킬 전조라네. 또한 때 아닌 대낮의 하늘에 대백성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지. 그것은 ‘대백이 경천을 침범한다’고 하여, 오늘 밤 중에 조정의 충신이 군주를 대신하여 목숨을 잃을 증거라네.”

(나리카게) “그 충신이라 하시는 분은 누구의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신제이) “그것은 바로 내 일이겠지. — 나는 그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옛날, 내가 아직 미치노리라는 속인이었을 때, 쿠마노 곤겐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어떤 점쟁이가 내 상을 보고 한 말이 있었지. ‘당신은 여러 방면에 뛰어난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장차 목이 검에 베여 시체가 들판에 버려질 상이 있소. 만약 출가라도 한다면 그 화를 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70세를 넘길 때까지 살아있다면 위험할 것이오.’라고 그 점쟁이가 말했다네. 나는 그때 곧바로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지. 그러자 무서운 일이 아닌가, 그 점쟁이가 말한 대로 검난의 상이 드러나 있었다. 그 후 나는 이렇게 머리를 둥글게 깎고 이름도 신제이로 바꾸었지만, 70의 고개는 이미 4-5년 전에 넘어버렸다.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도 내 목숨은 구할 수 없을 것 같구나. ……… 하지만, 나처럼 자신의 운명이 너무 뚜렷이 보이면, 사람은 겁쟁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지.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든 그 운명을 이겨내려고, 이겨내려고 하게 되는 법이야. 나는 70의 고개를 넘은 이후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네.”

(키요자네) “그렇다면 그 조적이라 하시는 이는 누구의 일입니까?”

(신제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노부요리와 요시토모 말일세. 그 둘은 평소부터 황공하게도 주상이나 인을 비롯해 나나 키요모리 등에게 많은 원한을 품고 있었지. 마침 지금 키요모리가 쿠마노에 참배하러 간 틈을 타 노부요리 놈이 어리석은 요시토모와 짜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틀림없이 지금쯤 그 둘이 주상이나 인을 어소에 가두어 두고, 나나 키요모리의 저택을 불태우고 있을 거야. 그리고 되는대로 높은 지위와 관직에 올라 둘이서 천하의 정치를 마음대로 요리하려 할 것이다.”

“무엇이라 하십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너희들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 진실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신뢰의 일에 대해서도 생각나는 게 있어. 언젠가 그 녀석이 근위대장의 자리를 요구했을 때, 천황께서 어찌하면 좋을지 나에게 물으셨지. 나는 그때 ‘절대 안 됩니다. 저런 자를 근위대장으로 삼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시면 그자가 더욱 거만해져서 모반이라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입니다.’라고 하며 당나라의 안록산의 예를 들어 만류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딱 들어맞았군. 내 판단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어.”

“비록 교토가 일시적으로 우에몬노카미(신뢰)와 사마노카미(요시토모)의 손에 떨어진다 해도, 예로부터 조정의 적이 번성한 전례가 없습니다. 기슈로 떠난 다이니도노(기요모리)께서 변란 소식을 듣고 돌아오시면, 불충한 무리들도 눈 깜짝할 사이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네가 방금 한 말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기요모리가 돌아오면 순식간에 멸망하여 그 둘의 목이 옥문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일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용감히 싸우고 있는 어리석은 요시토모가 나보다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이야말로 우리 군주의 학문의 효과가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몸에 닥칠 화를 미리 막아 이 산속에 몸을 숨기시고, 조정의 적에게 한 방 먹인 것은 통쾌한 일입니다. 지금쯤 혈안이 되어 당신의 행방을 찾고 있겠지요.”

“이제 이곳까지 도망쳐 왔으니 적의 눈에 띌 리는 없겠지요. 다이니도노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잠시 여기서 버티시면 괜찮을 것입니다.”

(신제이) “너희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내 평소의 학문이 쓸모있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 집요한 노부요리라는 자가 한 번의 수색으로 날 포기할 거라 생각하는가. 아아, 나도 어떻게든 그런 마음이 되고 싶구나. 어차피 죽을 바에야 죽는 순간까지 그런 마음으로 있고 싶은 것이다. 그 노부요리는 풀을 헤치고서라도 이 신제이를 찾아내지 않고는 멈추지 않을 자다. 지금쯤 겐지의 부하들이 횃불을 들고 교토 사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아까까지 숨어있던 다이도지의 영지에도 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이 산의 주변을 에워싸고 천천히 올라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 정, 두 정, 세 정, 점점 가까워져 이 뒤의 대나무 숲에 숨어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아, 나는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죽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저 두 사람의 목이 교수대에 걸리기 전에 먼저 내 목이 카모가와라에 전시될 것이다. ………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 알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아아, 나는 어떻게 해도 살아남지 못한다. ……… 어떻게 해도 ………”

(모로미츠) “저희 주군, 어찌 그러십니까. 마음을 단단히 잡으십시오. 천하에 울려 퍼진 쇼나곤 신제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신제이) “네가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운명 앞에 절을 하는 게 싫은 것이다. 비겁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넓디넓은 천하에 한 사람쯤은 그 어리석은 요시토모의 용기보다 이 신제이의 겁쟁이 짓이 더 귀한 것이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지. 나는 당나라에서도 천축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는 학자다. 큐슈의 옛날 나치산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다. ――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이 일본 땅에 자신을 밀어낼 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나는 그 문맹이면서도 용맹한 동쪽 오랑캐 요시토모에게 밀려났다. ‘늙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 수치를 당하는 일이 많다’는 말이 그대로였다. 이토록 나이를 먹고도 나는 왜 군주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일까. ―― 오오, 또 한층 추워졌구나.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내 몸은 이 추위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키요자네) “안타깝습니다.”

(모로미츠) 나의 군주여, 어찌하여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평소의 당신 기상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어리석은 자, 동쪽 오랑캐, 사마노카미 같은 –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마노카미 같은 강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힘을 다해 운명의 그물을 뚫고 나가십시오.

(흐린 하늘이 점점 맑아지고 닦아낸 듯이 맑아져 다섯 여섯 개의 별이 반짝이며 달빛이 땅 위를 비췄다. 다만 달은 무대 위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 어느새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자, 나의 군주여,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저 하늘의 별들을, 저 불길한 하늘의 별들을 이마를 들어 가슴을 펴고 자세히 보십시오.

(신제이) (조용히, 두려워하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별이 그것이군. 저기, 저 날카로운 달빛에도 굴하지 않고 반짝이는 저 별이 내 운명을 저주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 숲을 사각거리며 울렸다.) 저것은 역시 바람 소리인가, 이다음에 대나무 숲이 울릴 때는 겐지의 토벌대가 나타날 것이다.

(나리카게) 저희들은 아까부터의 말씀을 아직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겐지의 토벌대가 온다면 팔의 힘껏 베고 또 베어 우리 군주께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각오입니다.

(신제이) 흠, 아직도 너희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냐.

(키요자네) 누구도, 누구도 군주의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제이) 토벌대의 그림자가 보이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임을 깨달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설령 너희 넷이 힘껏 맞서더라도 이름난 겐지의 무사들이 열 명이나 스무 명이나 밀려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저 별을 보아라. 저 별을. 그것이 무엇보다도 증거다. 저 별의 빛이 사라지거나 내 목숨이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모로키요) 그렇다면 어쨌든 마음이 편안해지시도록 좀 더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남도 쪽으로 도망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신제이) 머리 위에 저 별이 노려보고 있는 한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나에겐 저 별을 하늘에서 쏘아 떨어뜨릴 힘이 없다. 저 별을 머리 위에서 끌어내릴 힘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저 별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구나.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듯 아래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저기에 목재와 괭이가 놓여 있구나. 아마도 나무꾼이 잊고 간 것이리라. 너희들, 그것을 여기로 가져오너라.

낭당들이 아래쪽에서 새로 깎은 4분 판자 네다섯 장과 괭이를 운반해 왔다.

(모로미츠) 나리님, 이를 어찌하시겠습니까?

(신제이) 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는 거다. 이 삼나무 그늘에 구멍을 파고 땅속에 몸을 묻은 뒤 대나무 마디로 숨을 통하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별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버텨 운명의 힘을 이겨내고 말겠다. 시간이 없다. 어서 그곳을 파주게.

낭당들이 삼나무 그늘을 파고 구멍 안을 널빤지로 둘러쌌다. 뒤쪽 대나무 숲에서 대나무 줄기를 잘라왔다.

(모로미츠) 분부대로 준비했습니다.

(신제이) 여러모로 수고가 많았다. 너희들의 마음씀씀이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이 구멍에 몸을 묻고 세상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겠다. 다시 햇빛을 볼 수 있게 된다면 너희들에게도 후하게 보답할 생각이다. 너희들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서둘러 이곳을 떠나 어느 산촌이든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다. 만약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교토에 남겨둔 처자들을 부탁한다.

(모로키요) 말씀하시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나리님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줄을 꼭 붙들고 놓지 마십시오.

(모로미츠) 나리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불길한 얘기지만 만에 하나 이것이 긴 이별이 될지도 모릅니다. 부디 그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훌륭한 최후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그때 저희가 돌아가신 나리님의 극락왕생을 빌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상투를 자르고 싶습니다. 모로키요도, 나리카게도, 키요자네도 다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모로키요, 나리카게, 키요자네) 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네 사람이 한꺼번에 상투를 잘랐다.

(모로미츠)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네 사람에게 부디 법명을 내려 주십시오.

(신제이) 음, 잘 말해주었다. 모로미츠…

(모로미츠) 네.

(신제이) 신제이의 한 글자를 따서 너의 법명은 사이코라 하겠다.

(모로미츠) 황공합니다.

(신제이) 모로키요, 너의 법명은 사이세이다.

(모로키요) 네.

(신제이) 나리카게는 사이케이, 키요자네는 사이지츠라 부르도록 하여라.

(모로키요, 나리카게, 키요자네) 황공합니다.

(모로미츠) 아무리 있어도 이별은 끝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일동 작별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신제이) “음.” (이렇게 말하며 구멍 가장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그곳에 서서 말없이 한동안 하늘의 별을 응시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별은 아직도 빛나고 있구나… 나는 이 구멍 안에서 숨이 다할 때까지 염불을 외우겠다…”

신제이가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낭당들이 대나무 줄기의 한쪽 끝을 땅속에 박고 다른 쪽 끝을 지상에 노출시켰다. 그들은 구멍 위를 판자로 덮어 막고 그 위에 흙을 돋웠다.

(사광)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낭당 네 사람이 구멍을 향해 엎드려 절을 했다.

(신제이의 목소리) (구멍 안에서) “사광, 사광.”

(사광) “네.” (기어가 대나무 끝에 귀를 댔다.)

(신제이의 목소리) “별은 아직도 빛나고 있느냐?”

(사광) “네, 아직 빛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네 사람이 일어나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청실) “아직 토벌대가 오지 않은 것 같군. 나는 자네가 말한 것이 정말일까 의심스러워.”

(성경) “나도 반신반의하고 있네.”

(사청) “만약 말씀하신 것이 맞지 않다면, 이런 소동을 벌인 게 어리석었군. 사광, 자네는 왜 갑자기 상투를 자르고 영원한 이별이니 하는 불길한 소리를 했나?”

(사광) “내가 보기에 자네의 목숨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어. 세상이 어지러워지든 말든, 인간이 저런 생각을 하거나 지껄이는 것은 곧 죽을 징조야.”

(성경) “불쾌한 소리 하지 말게.”

(사광) “불쾌하더라도 그건 사실이야.”

(청실) “그렇게 보면 정말로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군. 지금까지 자네가 말한 것 중에 틀린 적이 없었으니 말이야.”

(사청) “그렇다면 이런 곳에 꾸물거리고 있을 수는 없어. 어서 어디로든 도망가자.”

(성경)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해.”

네 사람이 아래쪽으로 퇴장했다. 산중에 그림자 하나 없고, 달빛이 서리처럼 땅을 비추며 적막했다. 다만 신제이가 구멍 안에서 외우는 끊임없는 염불 소리만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가냘프게 들렸다.

잠시 후, 위쪽, 아래쪽, 뒤편의 대나무숲 등 여러 곳에서 갑옷을 입은 병사 5-6명이 횃불을 들고 한두 명씩 나타났다. 출운 전사 미쓰야스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온 것이다. 병사들은 도적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서로 귓속말을 나누고 소곤거렸다.

(미쓰야스) 사람 목소리가 들린 것은 분명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부하 1) 네, 이 근처였습니다. 아직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부하 2) 저 목소리는 뭘 지껄이는 걸까.

(부하 3) 염불을 외는 것 같습니다.

(미쓰야스) 저 숲속 아닐까?

(부하 4) 숲속은 다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부하 5) 이상하군.

(부하 6) 정말 이상해.

(부하 1) 마치 땅속에서 들리는 것 같아.

(부하 2) 그래, 이건 미스터리야. 우리 발밑에서 소리가 나고 있어.

병사들은 자꾸 귀를 기울이며 땅을 살펴보다 삼나무 그늘에 모였다. 염불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미쓰야스는 대나무 끝을 가리키며 눈짓으로 파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알아듣고 재빨리 구멍을 팠다. 신제이는 스스로 단도를 옆구리에 찔렀으나 아직 죽지 않고 온몸이 선혈에 물든 채 어깨로 숨을 쉬며 끌려 나왔다. 병사들은 횃불을 신제이의 얼굴 위로 흔들었다.

(미쓰야스) 나는 신제이 법사의 얼굴을 모르는데, 아는 사람 없나?

(부하 1) 아무도 모릅니다.

(미쓰야스) 하지만 이 승려가 신제이임이 틀림없을 거다.

(부하 2) 아직 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어보면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미쓰야스) (신제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이봐, 자네가 신제이 법사지? 우에몬노카미 님의 명을 받아 출운 전사 미쓰야스가 자네를 체포하러 왔다. 자네는 세간의 평판과는 달리 어리석은 겁쟁이로군. 목숨이 아까워 구멍 속에 파묻혀 있다니, 얼마나 비겁한 놈인가.

(신제이) (미쓰야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헛소리하듯) 별은 아직도 빛나고 있는가…

미쓰야스는 문득 깨닫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이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해 새벽녘의 하늘에 샛별이 명멸했다. 먼 산촌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겨울 새벽의 어슴푸레한 여명 속에 막이 내렸다.

문신 ………………… 1-16

기린 ………………… 1-42

소년 ………………… 1-102

방간 ………………… 1-52

다음 차례 ··· 비밀 ···················· 1-60

윤문 결과

저희의 딸이

(뒤쪽에서,)

감사합니다.

나와 왔다.

(포장마차에 붙어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젊은이들의 둘

있겠습니까?

마주치세.

정대성의 루비에는 “테이다이세이”와 “테이타이세이”가 섞여 있으나, 그대로 두었다.

신제이

대도사.

저주받아

인내하시면

저주하다.

문자에 관한 보충

본문에서 “절”자로 표현된 글자는 원문에서는 “癤”의 병든 사람 변 안의 글자이다.

본문에서 “틈”자로 표현된 글자는 원문에서는 오른쪽 위의 “小”가 “少”이다.

문신

원문 삐걱거리며 (p. 3)

수정 삐걱거리며

원문 나약한 체격 (p. 14)

수정 나약한 체격

원문 혈사기 (p. 7)

수정 지사기

기린

원문 꼬도리 (p. 13)

수정 코토리

원문 그 남자의 목덜미에 (p. 14)

수정 그 남자의 목덜미는

원문 놀란 눈의 (p. 14)

수정 놀란 눈을

원문 훌륭은 용모 (p. 15)

수정 훌륭한 용모

원문 선생 (p. 18)

수정 선생

원문 오래 (p. 24)

수정 오래

원문 서로 다투고 있었다 (p. 27)

수정 서로 다투고 있었다

원문 거역할 수 없었다. (p. 28)

수정 거역할 수 없었다.

원문 보요우 (p. 28)

수정 호요우

원문 코우가히 (p. 29)

수정 코우가이

원문 알고 생각하지만 (p. 31)

수정 알고 있지만

원문 응고한 것이었다 (p. 33)

수정 응고한 것이었다

원문 머리로 (p. 34)

수정 머리로

원문 몸의 묶음을 (p. 35)

수정 몸의 묶음을

원문 이렇게 말을 마치자. (p. 36)

수정 이렇게 말을 마치자,

원문 숨어 있었다 (p. 39)

수정 숨어 있었다

원문 당신을 아쉬워하며 (p. 41)

수정 당신을 미워하며

소년

원문 물 (p. 11)

수정 물

원문 시작하다 (p. 30)

수정 시작하다

원문 고문 (p. 31)

수정 고문

원문 혈사기 (p. 37)

수정 지사기

원문 엉덩이 걷어올림 (p. 51)

수정 엉덩이 걷어올림

원문 참을 수 없게 (p. 53)

수정 참을 수 없게

원문 물고 있었다 (p. 56)

수정 물고 있었다

원문 몽중이 되어 (p. 73)

수정 몽중이 되어

원문 상기된 (p. 77)

수정 상기된

원문 삐걱거리며 (p. 80)

수정 삐걱거리며

원문 경연 (p. 85)

수정 경연

원문 우장 (p. 87)

수정 유장

원문 몽롱하게 (p. 93)

수정 몽롱하게

원문 이마 정중앙으로 (p. 97)

수정 이마 정중앙에

원문 우동가루 (p. 99)

수정 우동가루

재담꾼

원문 뱃사공의 머리 (p. 7)

수정 뱃사공의 머리

원문 주인님도 게이샤를 (p. 12)

수정 주인님도 게이샤도

원문 뛰어다니는 것입니까 (p. 12)

수정 뛰어다니는 것입니다만

원문 잔디 (p. 14)

수정 잔디

원문 편애 (p. 15)

수정 편애

원문 “여자가 아니면 밤이 새지 않는 나라” 등 (p. 31)

수정 “여자가 아니면 밤이 새지 않는 나라” 등이라고

원문 천변만화 (p. 39)

수정 천변만화

원문 장사 자루 (p. 42)

수정 장사 기질

원문 세토기와 (p. 47)

수정 세토기와

비밀

원문 흙담 (p. 4)

수정 흙담

원문 강 폭 (p. 7)

수정 강 폭

원문 그 밖에 (p. 9)

수정 그 밖에

원문 핫초보리 (p. 9)

수정 핫초보리

원문 찬미 (p. 11)

수정 찬미

원문 [힘들 력+근력 녹] 타 (p. 11)

수정 나태

원문 도회 (p. 12)

수정 도회

원문 프랑스 물건 (p. 14)

수정 프랑스 물건

원문 당선 (pp. 16-17)

수정 당선

원문 벗겨지기 시작했다 (p. 25)

수정 벗겨지기 시작했다

원문 삐걱거리면서 (p. 26)

수정 삐걱거리면서

원문 송연 (p. 36)

수정 송연

원문 비쇼비쇼 (p. 40)

수정 비쇼비쇼

원문 직설 (p. 40)

수정 직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