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만대장경 프로젝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하여 팔만대장경을 편찬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팔만대장경은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고전 문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자 합니다.
생성형 AI 기술인 LLM의 발전으로 팔만대장경 프로젝트가 가능해졌습니다. LLM은 거의 전문가 수준의 매끄러운 번역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한국어 사용자 누구나 고전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OpenAI 의 GPT-4o, Anthropic의 Claude-3.5 Sonnet Google의 Gemini-1.5 Pro와 Gemini-1.5 Flash, Stable Diffusion 의 Stable Image Ultra 및 Microsoft의 Text 분석 기술을 MAIDEPOT의 AI 자동 융복합 기능으로 결합하여 활용하였습니다. 번역에 사용된 도구와 프롬프트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링크: PDF 300페이지 번역 전문가 수준의 초벌 번역"
물론 LLM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생성형 AI의 특성상 일부 어색하거나 틀린 번역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고전 서적을 번역하여 지식의 문턱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날 것의 상태로 프로젝트의 양과 질과 높이는 일에 여러분들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프로젝트에 번역 또는 편집으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contact@maidepot.com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원문 정보: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 군주론(The Prince)의 영어 번역본.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과 군주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역사적 사례와 인물들을 분석하여 군주에게 필요한 자질과 통치 전략을 제시한다. 장르는 정치 철학 에세이이며, 문체는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번역 시 고려사항:
- 16세기 이탈리아의 역사 및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 마키아벨리 특유의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를 살려 번역해야 한다.
- 현대 한국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 구조를 다듬어야 한다.
- 등장인물의 이름은 일관된 한글 표기로 통일해야 한다.
- 정치, 군사 관련 용어는 현대 한국어에서 사용되는 적절한 용어로 번역해야 한다.
-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번역해야 한다.
- 단순 서술의 경우, ‘-했다.’와 같이 짧게 끝나는 문체로 번역해야 한다.
- 대화나 편지는 인물의 특성을 고려하고 예시에 나오는 번역을 참고해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등장인물 정보:
- Nicolo Machiavelli: 니콜로 마키아벨리 – 군주론의 저자.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분석하고 군주가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을 제시한다.
- Lorenzo Di Piero De’ Medici: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 – 군주론의 헌정 대상.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통치자.
- Cesare Borgia: 체사레 보르자 (발렌티노 공작) –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잔인하지만 능력 있는 군주. 마키아벨리가 새로운 군주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인물.
- Louis XII: 루이 12세 – 프랑스의 왕으로 이탈리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 마키아벨리는 그의 실수를 분석하여 군주가 피해야 할 행동을 제시한다.
- Alexander VI: 알렉산데르 6세 –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으로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
- Ferdinand of Aragon: 페르난도 데 아라곤 – 스페인의 왕으로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확장. 마키아벨리는 그의 위선적인 면모를 비판한다.
- Julius II: 율리우스 2세 – 교황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꿈꾸며 프랑스를 몰아냄.
- Francesco Sforza: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 밀라노 공작으로 용병隊長 출신. 능력과 노력으로 권력을 얻은 인물.
- Agathocles: 아가토클레스 – 시칠리아의 군주로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획득.
- Oliverotto da Fermo: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 페르모의 군주로 잔인한 방법으로 권력을 획득.
- Giovanni Fogliani: 조반니 폴리아니 – 올리베로토의 삼촌으로 그에게 살해당함.
- Pagolo Vitelli: 파올로 비텔리 – 콘도티에리로 올리베로토에게 군사 훈련을 시킴.
- Vitellozzo Vitelli: 비텔로초 비텔리 – 파올로의 형제로 콘도티에리.
- Ramiro d’Orco: 라미로 도르코 – 체사레 보르자가 로마냐 지방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잔인한 관리.
- Fra Girolamo Savonarola: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피렌체의 종교 개혁가. 무력이 없어 실패한 예시로 언급됨.
- Nabis: 나비스 – 스파르타의 군주. 백성의 지지를 얻어 로마에 맞서 싸움.
- Giorgio Scali: 조르조 스칼리 – 피렌체의 정치가. 민중의 지지를 잃고 실패한 예시로 언급됨.
- Annibale Bentivogli: 안니발레 벤티볼리오 – 볼로냐의 군주. 칸네스키 가문에 의해 살해당함.
- Giovanni Bentivogli: 조반니 벤티볼리오 – 안니발레의 손자로 볼로냐를 통치.
- Pandolfo Petrucci: 판돌포 페트루치 – 시에나의 군주.
- Antonio da Venafro: 안토니오 다 베나프로 – 판돌포의 유능한 신하.
- Maximilian: 막시밀리안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비밀스럽고 우유부단하여 실패한 군주의 예시로 언급됨.
- Fra Luca: 프라 루카 – 막시밀리안 황제의 신하.
- Uguccione della Faggiuola: 우구초네 델라 파졸라 – 아레초 출신으로 피사의 군주가 됨.
- Giorgio degli Opizi: 조르조 델리 오피치 – 루카의 궬프 당 지도자. 카스트루초와 대립.
- Pagolo Guinigi: 파올로 귀니지 – 프란체스코 귀니지의 아들. 카스트루초의 후계자.
- Pier Agnolo Micheli: 피에르 안놀로 미켈리 – 루카의 유력 인사. 살해당함.
- Neri: 네리 – 우구초네의 아들. 루카의 총독.
- Gaddo della Gherardesca: 가도 델라 게라르데스카 – 피사의 백작. 우구초네를 몰아내고 피사의 군주가 됨.
- Frederick of Bavaria: 프리드리히 폰 바이에른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Matteo Guidi: 마테오 귀디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Nardo Scolari: 나르도 스콜라리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Lapo Uberti: 라포 우베르티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Gerozzo Nardi: 제로초 나르디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Piero Buonaccorsi: 피에로 부오나코르시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Matteo Visconti: 마테오 비스콘티 – 밀라노의 군주.
- Stefano di Poggio: 스테파노 디 포조 – 포조 가문의 일원. 반란을 중재하려다 카스트루초에게 살해당함.
- Bastiano di Possente: 바스티아노 디 포센테 – 피스토이아의 비안키 당 지도자.
- Jacopo da Gia: 야코포 다 지아 – 피스토이아의 네리 당 지도자.
- Baldo Cecchi: 발도 체키 – 피스토이아 출신의 궬프 당 추방자.
- Jacopo Baldini: 야코포 발디니 – 피스토이아 출신의 궬프 당 추방자.
- Enrico: 엔리코 – 로마의 독일인 총독.
- Benedetto Lanfranchi: 베네데토 란프란키 – 피사의 유력 인사. 카스트루초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다 처형당함.
- Bonifacio Cerchi: 보니파치오 체르키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Giovanni Guidi: 조반니 귀디 –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 당 추방자.
- Ruberto: 루베르토 – 나폴리의 왕.
- Carlo: 카를로 – 루베르토의 아들.
- Michelagnolo Falconi: 미켈란젤로 팔코니 – 피렌체의 장관.
- Taddeo degli Albizzi: 타데오 델리 알비치 – 피렌체의 장관.
- Tommaso Lupacci: 토마소 루파치 – 피렌체 시민. 카스트루초에게 매수되어 성문을 열려다 처형당함.
- Lambertuccio Frescobaldi: 람베르투초 프레스코발디 – 피렌체 시민. 카스트루초에게 매수되어 성문을 열려다 처형당함.
- Taddeo Bernardi: 타데오 베르나르디 – 루카의 부유한 시민.
- Fra Lazerone: 프라 라체로네 – 수도사.
- Uguccione della Faggiuola: 우구초네 델라 파졸라 – 아레초 출신으로 피사의 군주가 됨.
모든 중요 용어 번역어:
- principality: 군주국
- republic: 공화국
- mercenaries: 용병
- auxiliaries: 지원군
- mixed soldiery: 혼성 군대
- condottieri: 콘도티에리(이탈리아 용병隊長)
- fortune: 운명 (또는 행운)
- virtue: 덕 (또는 능력)
- liberality: 관대함
- meanness: 인색함
- clemency: 자비
- cruelty: 잔인함
- faith: 신뢰 (또는 믿음)
- senate: 원로원
- factions: 파벌
- The Romagna: 로마냐 (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
- The Val di Chiana: 발디키아나 (이탈리아의 계곡)
- Arezzo: 아레초 (이탈리아 도시)
- Imola: 이몰라 (이탈리아 도시)
- Bologna: 볼로냐 (이탈리아 도시)
- Magione: 마조네 (이탈리아 도시)
- Perugia: 페루자 (이탈리아 도시)
- Siena: 시에나 (이탈리아 도시)
- Urbino: 우르비노 (이탈리아 도시)
- Fossombrone: 포솜브로네 (이탈리아 도시)
- Sinigalia: 시니갈리아 (이탈리아 도시)
- Fano: 파노 (이탈리아 도시)
- The Metauro: 메타우로 강 (이탈리아 강)
- La Marca: 라 마르카 (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
- Pieve: 피에베 (이탈리아 도시)
- Lucca: 루카 (이탈리아 도시)
- Ghibellines: 기벨린(황제파)
- Guelphs: 궬프(교황파)
- Pavia: 파비아 (이탈리아 도시)
- Visconti: 비스콘티 (밀라노를 다스린 가문)
- Pisa: 피사 (이탈리아 도시)
- Pistoia: 피스토이아 (이탈리아 도시)
- Montecatini: 몬테카티니 (이탈리아 도시)
- Montecarlo: 몬테카를로 (이탈리아 도시)
- Pescia: 페시아 (이탈리아 도시)
- Val di Nievole: 발디니에볼레 (이탈리아의 계곡)
- Lunigiana: 루니지아나 (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
- Pontremoli: 폰트레몰리 (이탈리아 도시)
- Frederick: 프리드리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 Piacenza: 피아첸차 (이탈리아 도시)
- Valdarno: 발다르노 (이탈리아의 계곡)
- Fucecchio: 푸체키오 (이탈리아 도시)
- San Miniato: 산 미니아토 (이탈리아 도시)
- Serravalle: 세라발레 (이탈리아 도시)
- Prato: 프라토 (이탈리아 도시)
- Peretola: 페레톨라 (이탈리아 도시)
- Empoli: 엠폴리 (이탈리아 도시)
- Lastra: 라스트라 (이탈리아 도시)
- Signa: 시냐 (이탈리아 도시)
- Montelupo: 몬텔루포 (이탈리아 도시)
- Gusciana: 구스치아나 강 (이탈리아 강)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대화 혹은 편지의 번역 예시.
- 카스트루초: “내가 만약 운명이 나의 성공이 약속했던 영광으로 이끄는 도중에 나를 앗아갈 줄 알았더라면, 덜 노력했을 것이고, 더 작은 국가라도 적어도 적과 위험이 적은 상태로 너에게 남겼을 것이다. 나는 루카와 피사의 통치에 만족했을 것이고 피스토이아를 정복하거나 피렌체를 그토록 많은 모욕으로 화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 파올로 귀니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과 그의 모든 재산을 제게 맡기셨고, 당신께 보여드려야 할 사랑으로 저를 키우셨고, 그 보살핌으로 재산을 늘려주셨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
W. K. 매리엇 역
목차
서문
청년기 1-25세—1469-94
관직 25-43세—1494-1512
문학 활동과 사망 43-58세—1512-27
인물과 그의 작품
헌정사
군주론
제1장 군주국의 종류와 획득 방법
제2장 세습 군주국에 관하여
제3장 복합 군주국에 관하여
제4장 알렉산더가 정복한 다리우스의 왕국이 알렉산더 사후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
제5장 정복 이전에 자체 법률로 통치되던 도시나 군주국을 통치하는 방법
제6장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획득한 신생 군주국에 관하여
제7장 타인의 무력이나 행운으로 획득한 신생 군주국에 관하여
제8장 악행으로 군주국을 획득한 자들에 관하여
제9장 시민 군주국에 관하여
제10장 모든 군주국의 힘을 측정하는 방법
제11장 교회 군주국에 관하여
제12장 군대의 종류와 용병에 관하여
제13장 보조군, 혼성군, 자국군에 관하여
제14장 군주의 군사에 관한 의무
제15장 군주가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이유
제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관하여
제17장 잔인함과 자비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제18장 군주가 신의를 지키는 방법
제19장 경멸과 증오를 피하는 방법
제20장 요새와 군주가 자주 사용하는 여러 방책들이 유용한가 해로운가?
제21장 군주가 명성을 얻는 방법
제22장 군주의 비서관에 관하여
제23장 아첨꾼을 피하는 방법
제24장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영토를 잃은 이유
제25장 운명이 인간사에 미치는 영향과 이에 대처하는 방법
제26장 이탈리아를 야만인들로부터 해방시키라는 권고
발렌티노 공작이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시뇨르 파골로, 그리고 오르시니 가문의 그라비나 공작을 살해할 때 사용한 방법에 대한 설명
루카의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1469년 5월 3일 피렌체 출생. 1494년부터 1512년까지 피렌체에서 여러 유럽 궁정으로의 외교 임무를 포함한 공직을 맡았다. 1512년 피렌체에서 투옥되었고, 이후 추방되어 산 카시아노로 돌아왔다. 1527년 6월 22일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서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의 법률가 베르나르도 디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그의 아내 바르톨롬메아 디 스테파노 넬리의 둘째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그의 청년기는 로렌초 데 메디치 일 마니피코의 통치 아래 이탈리아 강국으로서 피렌체의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였다. 1494년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몰락했고, 마키아벨리는 같은 해 공직에 입문했다. 마키아벨리의 공직 생활 동안 피렌체는 1512년까지 공화국 정부 하에서 자유를 누렸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마키아벨리는 공직을 잃었다. 메디치 가문은 1512년부터 1527년까지 피렌체를 다시 통치했고, 이 시기는 마키아벨리의 문학 활동이 활발해지고 영향력이 커진 때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이 다시 추방된 지 몇 주 후인 1527년 6월 22일, 58세의 나이로 공직에 복귀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청년기 — 1-25세—1469-94
마키아벨리의 청년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당시 피렌체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어 그의 초기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피렌체는 열정적이고 엄격한 사보나롤라와 화려함을 사랑하는 로렌초, 두 가지 상반된 인물의 영향을 받은 도시였다. 사보나롤라는 한때 피렌체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큰 힘을 행사했지만, 젊은 마키아벨리에게 미친 영향은 미미했을 것이다. 그는 군주론에서 사보나롤라를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의 예시로 언급하며 비판했다. 반면 로렌초가 살아있던 시절 메디치 가문의 화려한 통치는 마키아벨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저술에서 자주 이를 언급했고, 군주론을 로렌초의 손자에게 헌정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역사에서 자신의 청년기를 함께 보낸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선조들보다 복장과 생활 방식에서 더 자유로웠고, 다른 종류의 방탕함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썼다. 그들은 게으름과 도박, 여자에 시간과 돈을 허비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잘 차려입고 재치 있고 날카롭게 말하는 것이었으며, 남을 가장 교묘하게 비방하는 자가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아들 귀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젊은이들이 왜 공부할 기회를 이용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청년 시절이 그렇게 보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의 편지를 받았소. 그 편지는 내게 큰 기쁨을 주었소. 특히 당신이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말해주어서 더욱 그렇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을 거요. 만약 하느님께서 당신과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당신이 맡은 바를 다할 의지가 있다면 나는 당신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오.” 그러고 나서 새로운 후원자에 대해 쓰며 그는 계속했다. “이것은 당신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오. 이제 병을 핑계로 삼을 수 없으니 문학과 음악을 공부하는 데 힘쓰시오. 내가 가진 작은 기술로도 얼마나 명예를 얻는지 당신도 보고 있을 것이오. 그러니 내 아들이여, 만약 당신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자신에게 성공과 명예를 가져오고 싶다면, 옳은 일을 하고 공부하시오. 당신이 스스로를 돕는다면 다른 이들도 당신을 도울 것이오.”
직책 – 25세-43세 – 1494-1512
마키아벨리 인생의 두 번째 시기는 자유 피렌체 공화국을 위해 일하며 보냈다. 이 공화국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1494년 메디치 가문이 추방된 후부터 1512년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번영했다. 그는 4년간 공직에서 일한 후 제2 관청의 서기관이자 비서로 임명되었고, 자유와 평화의 10인 위원회에 속했다. 우리는 여기서 마키아벨리의 삶의 사건들을 다룰 때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된다. 이 시기 동안 그는 공화국의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우리는 그의 저작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법령, 기록, 파견 보고서를 지침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당대의 정치인들과 군인들과 거래한 내용을 간단히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활동을 잘 보여줄 수 있으며, 그가 군주론에서 예시와 인물로 삼은 경험과 인물들의 출처를 제공한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1499년 군주론에서 “나의 포를리 부인”으로 언급된 카테리나 스포르차에게 파견된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과 운명으로부터 요새에 의지하는 것보다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훨씬 낫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매우 주목할 만한 원칙이며, 그는 이를 군주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강조했다.
1500년에 그는 피사와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루이 12세로부터 조건을 얻기 위해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이 왕은 이탈리아에서의 일 처리에서 군주론에 요약된 국가 통치의 다섯 가지 주요 오류를 범했고, 결과적으로 쫓겨났다. 또한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지지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결혼 파기를 요구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그런 약속들은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군주들의 신의에 관해 자신이 쓴 내용을 참조하라고 말하게 했다.
마키아벨리의 공적 생활은 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발렌티노 공작)의 야심에서 비롯된 사건들로 가득 찼고, 이 인물들은 군주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마키아벨리는 자신들이 점령한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는 찬탈자들을 위해 공작의 행동을 예로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체사레 보르자의 행동 방식보다 더 나은 교훈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일부 비평가들은 체사레를 군주론의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군주론에서 공작은 사실상 다른 이들의 운에 편승해 올라갔다가 그들과 함께 몰락한 인물의 전형으로 인용된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라면 취할 법한 모든 조치를 취했지만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에는 대비하지 못했으며, 자신의 모든 능력이 그를 구해내지 못하자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비정상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외쳤다.
1503년 비오 3세가 사망하자 마키아벨리는 그의 후계자 선출을 지켜보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체사레 보르자가 속아 넘어가 추기경단이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율리우스 2세)를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보았다. 줄리아노는 공작을 가장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 선출에 대해 논평하면서, 새로운 호의가 위대한 인물들로 하여금 옛 상처를 잊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율리우스는 체사레를 파멸시킬 때까지 쉬지 않았다.
1506년 마키아벨리는 바로 율리우스 2세에게 파견되었다. 당시 교황은 볼로냐 원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주로 자신의 충동적인 성격 덕분에 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다른 많은 모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키아벨리는 교황 율리우스와 관련하여 운명과 여성의 유사성에 대해 도덕적 교훈을 이끌어내며, 신중한 사람보다는 대담한 사람이 둘 다를 얻고 유지할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1507년 프랑스, 스페인, 독일이 통제했고 오늘날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는 이탈리아 국가들의 변화무쌍한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 사건들과 그 속의 세 위대한 행위자들이 마키아벨리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고, 그 군주의 성격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이미 언급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아라곤의 페르난도를 종교의 탈을 쓰고 위대한 일을 이룬 인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자비, 신의, 인간성, 성실성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그런 동기에 영향을 받았다면 파멸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황제 막시밀리안은 당대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성격을 묘사했다. 하지만 1507-8년 그의 궁정에 사신으로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많은 실패의 비밀을 밝혀냈다. 그는 막시밀리안을 비밀스럽고 성격이 강하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인적 요소를 무시했고,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기를 절대 고집하지 않았다.
마키아벨리 관직 생활의 남은 시간은 이미 언급한 세 개의 유럽 강대국과 교황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1508년에 맺은 캄브레 동맹에서 비롯된 사건들로 가득 찼다. 이 결과는 바일라 전투에서 달성되었고, 베네치아는 하루 만에 800년 동안 얻은 모든 것을 잃었다. 피렌체는 이 사건들 동안 어려운 역할을 해야 했다. 공화국의 전체 정책이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교황과 프랑스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1511년 율리우스 2세가 마침내 프랑스에 대항하는 신성 동맹을 결성하고 스위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인들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을 때, 피렌체는 그들의 자비에 놓이게 되었다.
교황의 요구에 굴복해야 했고, 그 조건 중 하나는 메디치 가문의 복귀였다. 1512년 9월 1일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로 돌아오고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마키아벨리와 그의 동료들은 해임되었다. 이로써 그의 공직 생활은 끝이 났고, 앞서 보았듯이 그는 다시 관직을 얻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문학과 죽음 – 43-58세 – 1512-27년
메디치 가문이 돌아오자 마키아벨리는 몇 주 동안 새로운 피렌체의 지배자들 밑에서 관직을 유지하길 헛되이 바랐지만, 1512년 11월 7일자 칙령으로 해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미수에 그친 음모에 연루된 혐의로 고발당해 투옥되었고 고문을 당했다. 새로운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가 그의 석방을 주선했고, 그는 피렌체 근교의 산 카샤노에 있는 작은 농장으로 은퇴해 문학에 전념했다. 1513년 12월 13일자로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시기의 삶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묘사를 남겼는데, 이는 그가 ‘군주론’을 집필한 방법과 동기를 밝혀준다. 가족 및 이웃들과의 일상적인 활동을 묘사한 후 그는 이렇게 썼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서재로 들어갑니다. 입구에서 먼지와 흙으로 뒤덮인 농부 옷을 벗고 고귀한 궁정 복장으로 갈아입습니다. 이렇게 적절히 차려입고 나서 고대의 위인들의 궁정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맞아주고 나는 오직 나만을 위한 음식을 먹습니다. 거기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행동 이유를 묻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들은 자비롭게 내게 대답해줍니다. 4시간 동안 나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모든 걱정을 잊으며 가난도 두렵지 않고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온전히 그 위대한 사람들에 빠져듭니다. 단테가 말했듯이 ‘잘 간직된 지식에서 앎이 오나니, 그렇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하리라.’ 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을 기록했고 ‘군주국에 관하여’라는 작은 책을 썼습니다. 거기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한 바를 최대한 쏟아냈습니다. 군주국이란 무엇인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어떻게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 왜 상실하는지를 논의했습니다. 제 생각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면 이것도 마음에 들 것입니다. 특히 새로운 군주에게는 환영받을 만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줄리아노 각하에게 헌정합니다. 필리포 카사베키오가 이를 보았는데, 그가 책의 내용과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를 보완하고 다듬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우리에게 전해진 형태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집필 과정에서 다양한 정신적 영향을 받았고, 제목과 헌정 대상이 바뀌었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결국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카사베키오와 함께 이 책을 후원자에게 보낼지 아니면 직접 전달할지 논의했지만, 로렌초가 이를 받았거나 심지어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는 확실히 마키아벨리에게 어떤 직책도 주지 않았다. 마키아벨리 생전에 표절되기는 했지만, ‘군주론’은 그에 의해 출판된 적이 없으며 그 원문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작은 것에 관해 말하자면, 읽어보면 내가 15년 동안 정치학을 연구하며 잠을 자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다른 이들의 희생으로 경험을 쌓은 사람의 봉사를 받고 싶어 해야 합니다. 내 충성심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신의를 지켜왔기에 지금 와서 그것을 어기는 법을 배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충실하고 정직했던 사람은 본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내 가난이 내 정직함의 증거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티투스 리비우스 첫 10권에 관한 논설을 시작했는데, 이는 ‘군주론’과 함께 읽어야 한다. 이 작품들과 몇 편의 소품들이 1518년까지 그를 바쁘게 했고, 그해에 그는 제노바에 있는 몇몇 피렌체 상인들의 일을 돌보는 작은 임무를 맡았다. 1519년 피렌체의 메디치 통치자들이 시민들에게 약간의 정치적 양보를 하자 마키아벨리와 다른 이들은 대평의회를 복원하는 새로운 헌법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구실로 그것은 공포되지 않았다.
1520년 피렌체 상인들은 다시 마키아벨리에게 루카와의 갈등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해는 주로 그가 피렌체 문학계로 재입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매우 인기 있었고, 또한 ‘전쟁술’을 집필했다. 같은 해에 그는 추기경 데 메디치의 주선으로 피렌체의 역사를 쓰라는 의뢰를 받았고, 이 작업은 1525년까지 그를 바쁘게 했다. 한 옛 작가의 말처럼 “실직한 유능한 정치가는 거대한 고래처럼 빈 통을 가지고 놀지 않으면 배를 뒤집으려 할 것”이기에, 그의 대중적 인기 회복이 메디치 가문으로 하여금 그에게 이 일을 맡기게 했을 수도 있다.
피렌체의 역사가 완성되자 마키아벨리는 이를 로마로 가져가 자신의 후원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바쳤다. 줄리아노는 그 사이 클레멘트 7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어 있었다. 1513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막 권력을 되찾았을 때 마키아벨리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군주론’을 썼듯이, 1525년에는 가문의 몰락이 임박했을 때 가문의 수장에게 피렌체의 역사를 헌정했다는 점은 다소 주목할 만하다. 그해 파비아 전투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지배가 무너졌고, 프랑수아 1세는 그의 큰 경쟁자인 카를 5세의 손에 포로가 되었다. 이어서 로마가 약탈당했고, 그 소식을 들은 피렌체의 민중당이 메디치 가문의 멍에를 벗어던져 그들을 다시 한 번 추방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때 피렌체에 없었지만 서둘러 돌아왔고, ‘자유와 평화의 10인 위원회’의 서기 자리를 다시 얻기를 희망했다. 불행히도 그는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병에 걸렸고, 1527년 6월 22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인물과 그의 작품들
마키아벨리의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지만, 현대 피렌체는 산타 크로체에 가장 유명한 아들들과 나란히 웅장한 위령비를 세웠다. 이는 다른 나라들이 그의 작품에서 무엇을 발견했든, 이탈리아는 그의 작품에서 이탈리아 통일의 이념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르네상스의 씨앗을 발견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의 이름이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의미를 갖게 된 것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이러한 불길한 명성이 암시하는 그의 교리에 대한 가혹한 해석은 그의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최근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그를 더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덕분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시야를 사로잡았던 ‘불경한 마법사’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키아벨리는 분명 뛰어난 관찰력과 예리함, 그리고 근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하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정치에서 강제로 물러난 뒤 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자신을 성공한 정치가이자 작가라는 특별한 조합의 전형으로 내세우지 않았고, 동시대 사람들도 그를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대사 임무와 정치적 직책에서 평범한 성과만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카테리나 스포르차에게 속았고, 루이 12세에게 무시당했으며, 체사레 보르자에게 위압당했다. 그의 여러 대사 임무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피렌체를 요새화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으며, 그가 모집한 군대는 비겁함으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그는 겁이 많고 시류에 영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많은 은혜를 베푼 소데리니의 곁에 나타나는 것을 꺼렸는데, 이는 자신이 위험에 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는 의심스러웠고, 줄리아노는 그를 고용하기보다는 ‘피렌체의 역사’를 쓰도록 하여 그의 진정한 재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성격의 문학적 측면에서만 우리는 약점이나 실패를 찾아볼 수 없다.
거의 4세기의 세월이 『군주론』에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들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고 흥미롭다. 이는 그것들이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영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관은 마키아벨리 동시대인들의 윤리관이다. 하지만 유럽의 정부들이 도덕적 힘보다는 물질적 힘에 의존하는 한, 그의 윤리관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언급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은 마키아벨리가 그것들을 통치와 행동의 이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된다.
여전히 일부 유럽과 동양의 정치가들에게 행동 원칙을 제공하는 국가의 격언들을 제외하고, 『군주론』에는 매 순간 증명될 수 있는 진실들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알렉산데르 6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단순함과 탐욕의 희생양이 된다. 종교의 외투는 여전히 마키아벨리가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성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 악덕들을 감추고 있다. 사람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보려 하다가 파멸한다. 정치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방법이 없다. 신중함은 가장 위험이 적은 방법을 선택하는 데 있다. 그리고 더 높은 차원으로 넘어가면, 마키아벨리는 범죄가 제국을 얻을 수는 있지만 영광을 얻지는 못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필요한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며, 국가의 무기는 싸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신성해진다.
정부가 사회의 기본 원칙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국민에게 고취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도덕적 힘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마키아벨리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주장이다. 『군주론』은 이 ‘고상한 주장’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항상 자신이 발견한 그대로의 인간이나 정부에 대해서만 쓰기를 고집했고, 그는 그의 작품이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도록 하는 기술과 통찰력으로 썼다. 하지만 『군주론』에 단순히 예술적이거나 역사적인 관심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여전히 국가들과 통치자들이 서로와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따르는 위대한 원칙들을 다루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군주론』을 번역하면서 나의 목표는 현대의 문체와 표현 관념에 맞춘 유창한 의역보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원문의 정확한 문자적 번역을 이루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결코 유창한 말재주꾼이 아니었다. 그가 글을 쓴 조건은 그로 하여금 모든 단어를 신중히 고려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주제는 고상했고, 내용은 무거웠으며, 문체는 고귀하게 단순하고 진지했다. 누가 사물을 분류하고, 정의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그보다 더 간결했겠는가? 『군주론』에서는 진실로 모든 단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단어의 위치에 대해서도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국인에게 이러한 논문의 번역은 어떤 면에서 비교적 쉬운 과제였다. 당시 영어의 천재성이 이탈리아어의 천재성과 더 유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국인에게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마키아벨리가 로마 원로원이 그리스의 약소국들에 대해 채택한 정책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intrattenere’라는 단어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인이라면 정확히 ‘교제하다(entertain)’로 번역했을 것이고, 모든 동시대 독자들은 “로마가 그들의 힘을 증강시키지 않고 아이톨리아인들과 아카이아인들을 교제했다(entertained)”라고 말하는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표현은 구식이고 모호하며, 심지어 무의미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로마가 아이톨리아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등으로 말해야 하며, 한 단어의 일을 하기 위해 네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나는 의미에 대한 절대적인 충실성과 일관되는 한에서 이탈리아어의 간결함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그 결과로 때때로 거친 표현이 생긴다면, 나는 독자가 저자의 의미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그 의미로 이어지는 길의 거친 면을 간과하기를 바랄 뿐이다.
다음은 마키아벨리의 작품 목록이다:
주요 작품. 『피사에 관한 담론』, 1499년; 『반란을 일으킨 발디키아나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에 관하여』, 1502년; 『발렌티노 공작이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등을 죽이는 데 사용한 방법에 관하여』, 1502년; 『자금 조달에 관한 담론』, 1502년; 『제1 십년사』(3행시 시), 1506년; 『독일의 상황에 대한 초상』, 1508-12년; 『제2 십년사』, 1509년; 『프랑스의 상황에 대한 초상』
프랑스, 1510년; 티토 리비오의 첫 10권에 관한 논설, 3권, 1512-17년; 군주론, 1513년; 안드리아, 테렌티우스의 희극을 번역, 1513년(?); 만드라골라, 5막의 산문 희극, 운문 서문 포함, 1513년; 언어에 관하여(대화), 1514년; 클리치아, 산문 희극, 1515년(?); 벨페고르 대악마(소설), 1515년; 황금 당나귀(3행 연구의 시), 1517년; 전쟁의 기술에 관하여, 1519-20년; 피렌체 국가 개혁에 관한 논설, 1520년; 루카 시의 사정 요약, 1520년; 루카의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1520년; 피렌체사, 8권, 1521-25년; 역사의 단편들, 1525년.
다른 시들로는 소네트, 칸초네, 8행시, 그리고 사육제 노래가 있다.
판본들. 알도, 베네치아, 1546년; 델라 테르티나, 1550년; 캄비아지, 피렌체, 6권, 1782-85년; 데이 클라시치, 밀라노, 10권 1813년; 실베스트리, 9권, 1820-22년; 파세리니, 판파니, 밀라네시, 6권만 출판됨, 1873-77년.
소품집들. F. L. 폴리도리 편집, 1852년; 가족 서한집, E. 알비시 편집, 1883년, 2판, 하나는 삭제본; 기고문, G. 카네스트리니 편집, 1857년; F.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들, A. 리돌피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의 의도에 관한 생각들’ 참조; D. 페라라,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적 서신’, 1929년.
헌정사
위대한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군주의 총애를 얻으려는 이들은 대개 자신들이 가장 귀중히 여기거나 군주가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흔히 말, 무기, 금직물, 보석, 그리고 그와 비슷한 장식품들을 군주의 위엄에 걸맞게 바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당신의 위엄 앞에 나의 헌신을 보여드릴 만한 것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현대의 사건들을 오랫동안 경험하고 고대를 끊임없이 연구하여 얻은 위인들의 행적에 대한 지식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거나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은 없었다. 이를 오랜 시간 부지런히 숙고하여 이제 작은 책자로 만들어 당신의 위엄에게 보낸다.
비록 이 작품이 당신의 관심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자비로움 덕분에 이 책이 받아들여질 것이라 크게 믿는다. 내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고난과 위험을 겪으며 배운 모든 것을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선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는 과장되거나 화려한 말들로 꾸미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장식하는 데 사용하는 그 어떤 외적인 매력이나 장식도 넣지 않았다. 나는 이 작품이 그 어떤 명예도 받지 않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오직 주제의 진실성과 중요성만으로 인정받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낮고 보잘것없는 신분의 사람이 군주들의 일을 논하고 결정하려 드는 것을 건방지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산과 높은 곳의 본질을 관찰하기 위해 평지에 서고, 평원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높은 산에 오르는 것처럼, 백성들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군주가 되어야 하고, 군주들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대하신 당신께서는 내가 보내는 이 작은 선물을 그 정신으로 받아주시기 바란다. 만약 당신께서 이를 주의 깊게 읽고 숙고하신다면, 운명과 당신의 다른 자질들이 약속하는 위대함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마음을 알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께서 그 위대함의 정상에서 때때로 이 낮은 곳으로 눈을 돌려주신다면, 내가 얼마나 부당하게 지속적이고 가혹한 운명의 횡포를 겪고 있는지 보실 수 있을 것이다.
군주론
제1장
군주국의 종류와 획득 방법에 대하여
인간을 지배해 온, 그리고 지배하고 있는 모든 국가와 권력은 공화국이거나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은 세습 군주국으로 그 가문이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군주국이다.
새로운 군주국은 완전히 새로운 것일 수도 있고(프란체스코 스포르차에게 밀라노가 그러했듯이), 아니면 군주가 획득한 세습 국가에 부속된 지역일 수도 있다(스페인 왕의 나폴리 왕국이 그러했듯이).
이렇게 획득한 영토들은 군주 아래에서 살아온 곳이거나 자유롭게 살아온 곳이다. 그리고 이들은 군주 자신의 무력으로, 또는 타인의 무력으로, 아니면 운명이나 능력으로 획득된다.
제2장
세습 군주국에 관하여
공화국에 대한 모든 논의는 생략하겠다. 다른 곳에서 이미 길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오직 군주국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순서를 따라 이러한 군주국들이 어떻게 통치되고 유지되는지 논의할 것이다.
나는 먼저 세습 군주국, 즉 그 군주의 가문에 오랫동안 익숙해진 국가들은 새로운 군주국들보다 유지하기가 덜 어렵다고 말하겠다. 평범한 능력의 군주라도 조상들의 관습을 벗어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한다면 자신의 국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특별히 강력하고 과도한 힘에 의해 빼앗기지 않는 한 그렇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빼앗긴다 해도, 찬탈자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언제든 그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는 페라라 공작이 있다. 그는 1484년 베네치아인들의 공격이나 1510년 교황 율리우스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영토가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세습 군주는 공격하거나 불만을 살 이유가 적고 그럴 필요성도 적기 때문에, 더 사랑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특별히 사악한 악덕으로 미움을 사지 않는 한, 그의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그의 통치의 오래됨과 지속성으로 인해 변화를 일으키는 기억과 동기가 사라지게 된다.
상실되었습니다. 변화 하나가 언제나 다른 변화를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3장
혼합 군주국에 관하여
그러나 어려움은 새로운 군주국에서 발생합니다. 우선,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복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일부분인 경우, 변화는 주로 모든 새로운 군주국에 내재된 어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기를 바라며 기꺼이 통치자를 바꾸고, 이러한 희망은 그들로 하여금 현 통치자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게 만듭니다. 여기서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경험을 통해 그들이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다른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필연성에 따른 것인데, 이는 새로운 군주가 항상 그에게 복종한 자들에게 군대를 주둔시키고 새로 획득한 영토에 가해야 하는 무한한 다른 고난들로 부담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그 군주국을 점령하면서 해를 끼친 모든 이들을 적으로 만들게 되고,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친구들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방식으로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얽매여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비록 군사력이 매우 강할지라도, 한 지방에 들어갈 때는 항상 그 지역 주민들의 호의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의 루이 12세 왕은 밀라노를 신속하게 점령했고, 또 신속하게 잃었습니다. 그를 처음 쫓아내는 데에는 로도비코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들이 미래의 이익에 대한 희망이 배반당했음을 깨닫고 새 군주의 학대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지방을 두 번째로 정복한 후에는 그렇게 쉽게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사실입니다. 군주는 반란의 기회를 이용하여 주저 없이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의심스러운 자들을 제거하며, 가장 취약한 곳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프랑스가 밀라노를 처음 잃게 하는 데는 로도비코 공작이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잃게 하려면 전 세계를 그에 대항하게 만들고, 그의 군대를 격파하여 이탈리아에서 쫓아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원인들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는 프랑스로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빼앗겼습니다. 첫 번째에 대한 일반적인 이유는 이미 논의되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유를 언급하고, 프랑스 왕이 가졌던 자원과 그의 상황에 있는 누구라도 프랑스 왕보다 더 안전하게 정복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 가졌을 자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복된 영토가 정복자에 의해 오래된 국가에 추가될 때, 그것들이 같은 국가와 언어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같은 경우라면, 특히 그들이 자치에 익숙하지 않을 때 더 쉽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다스리던 군주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두 민족이 다른 면에서는 옛 상태를 유지하고 관습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평화롭게 함께 살 것입니다. 브리타뉴, 부르고뉴, 가스코뉴, 노르망디가 오랫동안 프랑스에 속해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관습은 비슷하여 사람들은 쉽게 서로 어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병합한 자가 그들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두 가지 사항만 명심하면 됩니다. 하나는 그들의 이전 군주의 가문이 멸망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법이나 세금이 변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은 옛 군주국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 관습, 법이 다른 국가에서 영토를 획득할 때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들을 유지하려면 행운과 큰 노력이 필요하며, 가장 크고 실질적인 도움 중 하나는 정복자가 그곳에 가서 거주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지위를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터키인이 그리스에서 한 것처럼 말이다. 그가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다른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가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장에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는 대로 볼 수 있고 신속히 해결할 수 있지만, 멀리 있으면 문제가 커졌을 때만 알게 되고 그때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나라는 당신의 관리들에 의해 약탈당하지 않는다. 신하들은 군주에게 즉각적으로 호소할 수 있어 만족한다. 따라서 그들은 선하고자 한다면 그를 더 사랑할 이유가 있고, 그렇지 않고자 한다면 그를 더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외부에서 그 국가를 공격하려는 자는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군주가 그곳에 거주하는 한 가장 큰 어려움 없이는 그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
다른 더 나은 방법은 한두 곳에 식민지를 보내는 것이다. 이는 그 국가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렇게 하거나 아니면 그곳에 많은 기병과 보병을 주둔시켜야 한다. 군주는 식민지에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그는 거의 또는 전혀 비용을 들이지 않고 그들을 보내고 그곳에 유지할 수 있으며, 새 주민들에게 땅과 집을 주기 위해 빼앗긴 소수의 시민들만 해를 끼친다. 그가 해를 끼친 사람들은 가난하고 흩어져 있어 그를 해칠 수 없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조용히 있을 수 있고, 동시에 빼앗긴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까 봐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식민지는 비용이 들지 않고, 더 충실하며, 덜 해를 끼친다. 그리고 해를 입은 사람들은, 앞서 말했듯이, 가난하고 흩어져 있어 해를 끼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사람들은 가벼운 상처는 복수할 수 있지만 심각한 상처는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가하는 해는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그러나 식민지 대신 군대를 그곳에 주둔시키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어 국가의 모든 수입을 수비대에 소비해야 하므로 획득이 손실로 바뀐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다. 전체 국가가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주둔군이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면서 모든 사람이 고난을 겪게 되고 모두 적대적이 되고, 그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해를 입힐 수 있는 적이 된다. 따라서 모든 이유에서, 이러한 수비대는 식민지가 유용한 만큼 쓸모없다.
또한, 위와 같은 차이가 있는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는 자신을 덜 강력한 이웃들의 수장이자 보호자로 만들고, 그들 중 더 강력한 자들을 약화시켜야 한다. 또한 자신만큼 강력한 외국인이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과도한 야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해 그런 자가 초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로마인들은 아이톨리아인들에 의해 그리스로 초대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을 들인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그들은 그 나라 주민들에 의해 초대되었다. 그리고 일의 통상적인 진행 과정은 강력한 외국인이 한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속국들이 그에게 끌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지배 세력에 대해 느끼는 증오심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속국들에 관해서는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신속히 그가 획득한 국가로 집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들이 너무 많은 힘과 권위를 얻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신의 군대와 그들의 호의로 더 강력한 자들을 쉽게 억누를 수 있어, 그 나라에서 완전한 주인으로 남을 수 있다. 이 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자는 곧 자신이 획득한 것을 잃을 것이며, 그것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끝없는 어려움과 문제에 직면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합병한 나라들에서 이러한 조치들을 엄격히 준수했다. 식민지를 보냈고 약소국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들의 힘을 키우지는 않았다. 강력한 국가들은 억눌렀고, 어떤 강력한 외국 세력도 권위를 얻지 못하게 했다. 그리스는 이에 대한 좋은 예시다. 아카이아인들과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우호적으로 유지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은 굴복했으며, 안티오쿠스는 추방되었다. 하지만 아카이아인들과 아이톨리아인들의 공로가 그들의 세력을 키울 권한을 얻게 하지는 못했고, 필리포스의 설득도 로마인들이 그를 먼저 굴복시키지 않고 친구가 되게 하지 못했으며, 안티오쿠스의 영향력도 그가 그 나라에서 어떤 지배권을 유지하도록 합의하게 하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경우들에서 모든 현명한 군주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들은 현재의 문제뿐만 아니라 미래의 문제도 고려해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그것들에 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견되었을 때는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치료법은 더 이상 시기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병이 치유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열병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질병 초기에는 치료하기 쉽지만 발견하기 어렵고, 시간이 지나 초기에 발견되거나 치료되지 않으면 발견하기 쉽지만 치료하기 어려워진다. 국가의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발생하는 악을 예견했을 때(이는 오직 현명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다), 그것들은 신속히 바로잡을 수 있다. 하지만 예견하지 못해 자라나도록 허용되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해결책이 없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문제를 예견하고 즉시 대처했으며, 심지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것이 커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은 피할 수 없고, 단지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미룰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은 필리포스와 안티오쿠스와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그들은 둘 다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 시대의 현명한 자들의 입에서 늘 나오는 말, ‘시간의 혜택을 누리자’라는 말도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용기와 신중함의 혜택을 누렸다. 시간은 모든 것을 앞으로 몰아가고,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나쁜 것뿐만 아니라 좋은 것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트라테네레’라는 단어에 대한 서문의 설명을 참조하라.
그러나 프랑스로 눈을 돌려 그녀가 언급된 일들 중 어떤 것을 했는지 살펴보자. 나는 루이[3](샤를[4]이 아닌)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그의 행동을 더 잘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가장 오랫동안 점령했다. 그리고 그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과 정반대의 일을 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루이 12세, 프랑스 왕, “국민의 아버지”, 1462년 출생, 1515년 사망.
[4] 샤를 8세, 프랑스 왕, 1470년 출생, 1498년 사망.
루이 왕은 베네치아인들의 야심에 의해 이탈리아로 끌려왔다. 그들은 그의 개입으로 롬바르디아 주의 절반을 얻고자 했다. 나는 왕이 취한 행동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탈리아에 발판을 마련하기를 원했고, 그곳에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샤를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문이 그에게 닫혀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얻을 수 있는 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일들에서 몇 가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계획은 매우 빠르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롬바르디아를 획득하자마자 샤를이 잃은 권위를 즉시 되찾았다. 제노바가 항복했고, 피렌체인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만투아 후작, 페라라 공작, 벤티볼리 가문, 포를리의 귀부인, 파엔차, 페사로, 리미니, 카메리노, 피옴비노의 영주들, 루카인들, 피사인들, 시에나인들, 모두가 그의 친구가 되기 위해 접근했다. 그제서야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이 취한 행동의 무모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롬바르디아의 두 도시를 확보하기 위해 왕을 이탈리아의 3분의 2의 주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왕이 위에서 언급한 규칙들을 준수하고 모든 친구들을 안전하고 보호받는 상태로 유지했다면, 얼마나 쉽게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라. 비록 그들이 많았지만 약하고 겁이 많았으며, 일부는 교회를, 일부는 베네치아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그와 함께 서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그는 여전히 강력한 자들에 대해 쉽게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정반대의 일을 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가 로마냐를 점령하는 것을 도왔다. 이 행동으로 자신을 약화시키고, 친구들을 잃고, 자신을 지지했던 자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교회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세속적 권력을 영적 권력에 더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더욱 높였다. 그는 이러한 근본적인 실수를 저지른 후 이를 계속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알렉산데르의 야심을 저지하고 그가 토스카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이탈리아로 올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강화하고 친구들을 잃은 것만으로도 부족했던 듯, 그는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고 싶어 스페인 왕과 이를 분할했다. 이탈리아의 최고 중재자였던 그는 동맹국을 끌어들여 그 나라의 야심가들과 자국의 불만족스러운 자들이 피신할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는 왕국에 자신의 연금 수령자를 왕으로 남겨둘 수 있었음에도 그를 쫓아내고 루이를 차례로 몰아낼 수 있는 자를 들여왔다.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실로 자연스럽고 흔한 것이며, 사람들은 할 수 있을 때 항상 그렇게 한다. 이에 대해 그들은 비난받기보다는 칭찬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음에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려 할 때, 그것은 어리석음이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프랑스가 자국의 군대로 나폴리를 공격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럴 수 없었다면 나폴리를 분할해서는 안 됐다. 베네치아인들과 함께 롬바르디아를 분할한 것은 이탈리아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구실로 정당화될 수 있었지만, 이번 분할은 그러한 필요성이라는 구실도 없어 비난받아 마땅했다.
따라서 루이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소국들을 멸망시켰고, 이탈리아의 강대국 중 하나의 힘을 증대시켰으며, 외국 세력을 끌어들였고, 그 나라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식민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러한 실수들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를 해칠 만큼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베네치아인들로부터 그들의 영토를 빼앗는 여섯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교회를 강화하지 않았고 스페인을 이탈리아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베네치아인들을 약화시키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상 그들의 몰락에 동의해서는 안 됐다. 그들이 강력했다면 다른 이들이 롬바르디아를 노리는 것을 항상 막아줬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이 그곳의 주인이 되지 않는 한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다른 이들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서 빼앗아 베네치아인들에게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양쪽 모두에 맞서는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루이 왕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로마냐를 알렉산데르에게, 왕국을 스페인에 양도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단지 자신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연기될 뿐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가 왕이 교황에게 한 약속, 즉 그의 이혼을 허락하고 루앙에 추기경 모자를 수여하는 대가로 이 사업을 돕겠다는 약속을 들어 변명한다면, 나는 후에 군주들의 신의와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해 쓸 내용으로 대답하겠다.
따라서 루이 왕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지켜야 할 조건들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아 롬바르디아를 잃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매우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낭트에서 루앙과 이야기를 나눴다. 발렌티노(일반적으로 체사레 보르자, 교황 알렉산데르의 아들로 불리는)가 로마냐를 점령했을 때, 루앙 추기경이 내게 이탈리아인들은 전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자, 나는 프랑스인들이 국가 운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가 그렇게 강대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교회와 스페인의 강대함은 프랑스에 의해 초래되었으며, 프랑스의 몰락 역시 그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결코 또는 거의 실패하지 않는 일반적인 규칙을 이끌어낼 수 있다. 즉, 다른 이를 강력하게 만든 자는 스스로를 망치는 것이다. 그 우세함은 교활함이나 힘에 의해 초래되었을 것이며, 이 둘 모두 권력의 자리에 오른 자에게 의심받기 때문이다.
제4장
다리우스의 왕국이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후 알렉산더의 사후에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이유
새로 획득한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람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고려할 때, 알렉산더 대왕이 불과 몇 년 만에 아시아의 주인이 되고 그것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따라서 전 제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음에도), 그의 후계자들이 스스로의 야심에서 비롯된 어려움 외에는 다른 어려움 없이 그 제국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기록에 남아 있는 군주국들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통치되고 있음을 답변으로 제시한다. 하나는 군주와 그의 호의와 허락으로 왕국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신하들에 의해 통치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와 군주의 은혜가 아닌 혈통의 오래됨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는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와 신하들을 가지고 있으며, 신하들은 그들을 주군으로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애착을 가진다. 군주와 그의 신하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들에서는 군주가 더 큰 권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 나라 전체에서 그보다 우월한 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다른 이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대신이나 관리에 대한 것일 뿐이며, 그들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갖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이 두 정부 형태의 예는 터키인과 프랑스 왕이다. 터키의 전체 군주국은 한 명의 주군에 의해 통치되고, 나머지는 그의 신하들이다. 그는 왕국을 산자크로 나누어 그곳에 다양한 관리들을 보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들을 교체하고 변경한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오래된 귀족들의 무리 가운데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신하들에 의해 인정받고 사랑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왕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이를 빼앗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두 국가를 고려해보면, 터키의 국가를 장악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있지만, 일단 정복하면 유지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투르크의 왕국을 정복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이유는 찬탈자가 왕국의 제후들을 불러들일 수 없고, 군주 주변의 반란에 의해 자신의 계획에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한 것이다. 그의 신하들은 모두 노예이자 속박된 자들이기 때문에 매우 어렵게 매수될 수 있고, 그들이 매수되었다 하더라도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적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백성들을 끌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르크를 공격하는 자는 그가 단결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하며, 다른 이들의 반란보다는 자신의 힘에 더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투르크가 정복되어 전장에서 패배하여 군대를 재건할 수 없게 되면, 이 군주의 가문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 가문이 멸망하면 두려워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복자가 승리하기 전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듯이, 승리한 후에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프랑스와 같이 통치되는 왕국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왕국의 어떤 귀족을 매수함으로써 쉽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불만을 품은 자들과 변화를 원하는 자들을 항상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이유로 국가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고 승리를 쉽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이후에 그곳을 유지하려고 하면 무한한 어려움에 부딪힌다. 이는 당신을 도운 자들로부터도, 당신이 짓밟은 자들로부터도 비롯된다. 군주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아 있는 귀족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당신에 맞서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들을 만족시키거나 멸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기회를 가져다주면 그 국가는 잃게 된다.
이제 다리우스의 정부 성격을 고려해보면, 그것이 투르크의 왕국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먼저 그를 전장에서 물리치고 나서 그의 나라를 빼앗기만 하면 되었다. 이 승리 후 다리우스가 살해되자,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알렉산더에게 국가가 안전하게 남았다. 그의 후계자들이 단결했다면 그들은 안전하고 편안하게 그것을 즐겼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일으킨 것을 제외하고는 왕국에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와 같이 구성된 국가들을 그러한 평온함으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스페인, 프랑스, 그리스에서 로마인들에 대한 빈번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이 국가들에 많은 군주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이 지속되는 한 로마인들은 항상 불안정한 지배를 했다. 그러나 제국의 힘과 오랜 지속으로 그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자 로마인들은 안전한 소유자가 되었다. 이후 그들끼리 싸울 때, 각자는 자신이 그곳에서 가진 권위에 따라 국가의 자신의 편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전 군주의 가문이 멸망하자 로마인들 외에는 아무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것들을 기억한다면 알렉산더가 아시아 제국을 쉽게 유지한 것이나 피루스와 다른 많은 이들이 정복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에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복자의 능력의 부족이나 풍부함 때문이 아니라, 정복된 국가의 균일성의 부족 때문이다.
제5장
정복되기 전에 자체 법률 하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도시나 군주국들을 통치하는 방법에 관하여
언급한 대로 획득된 국가들이 자체 법률 하에서 자유롭게 살아온 경우, 그것들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이고, 둘째는 직접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들이 자체 법률 하에서 살도록 허용하되 조공을 거두고 그 안에 당신에게 우호적인 과두정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정부는 군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의 우정과 이익 없이는 존립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최선을 다해 지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에 익숙한 도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그 도시의 시민들을 통해 더 쉽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인과 로마인이 있다. 스파르타인은 아테네와 테베를 점령하고 과두정을 세웠지만 결국 잃었다. 로마인은 카푸아, 카르타고, 누만티아를 유지하기 위해 파괴했고 잃지 않았다. 로마인은 스파르타인이 그리스를 유지했던 것처럼 그리스를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리스를 자유롭게 하고 법률을 허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나라의 많은 도시를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을 안전하게 유지할 다른 방법은 파괴하는 것 외에는 없다. 자유에 익숙한 도시의 주인이 된 자가 그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그 도시에 의해 파괴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반란 시 그들은 항상 자유와 고대의 특권을 집결점으로 삼는데, 이는 시간이나 혜택으로도 결코 잊히지 않는다. 무엇을 하거나 대비하든 그들이 분열되거나 흩어지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그 이름이나 특권을 잊지 않고 모든 기회에 즉시 그것들로 집결한다. 피사가 플로렌스인들에 의해 100년 동안 속박 상태로 유지된 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도시나 나라들이 군주 아래에서 살아온 경우, 그의 가문이 멸망하면 그들은 한편으로는 복종에 익숙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옛 군주를 잃어 자신들 중에서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동의할 수 없고 스스로를 통치할 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무기를 들기까지 매우 느리고, 군주는 그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더 많은 생명력, 더 큰 증오, 더 많은 복수심이 있어 그들이 이전의 자유에 대한 기억을 쉬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들을 파괴하거나 그곳에 거주하는 것이다.
제6장
자신의 무기와 능력으로 획득한 새로운 군주국에 관하여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군주와 국가의 가장 뛰어난 예를 들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말라. 사람들은 거의 항상 다른 이들이 밟아온 길을 걸으며 모방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따르지만, 다른 이들의 길을 완전히 지키거나 그들이 모방하는 자들의 능력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항상 위대한 사람들이 밟은 길을 따라야 하며, 최고의 사람들을 모방해야 한다. 그의 능력이 그들과 동등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것의 향기를 풍길 것이다. 그는 숙련된 궁수들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들은 목표가 너무 멀다고 생각하면 활의 조준점을 목표보다 훨씬 위로 맞춘다. 이는 자신들의 화살이 그렇게 높이 날아가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높이 조준함으로써 훨씬 멀리 있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현명한 궁수들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과녁을 맞히려 할 때, 자신의 활 힘의 한계를 알기에 과녁보다 훨씬 높게 겨냥한다. 이는 힘이나 화살로 그렇게 높은 곳까지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높이 겨냥함으로써 원하는 과녁을 맞히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에서 새 군주가 있을 때, 그 국가를 지키는 데 어려움이 더 많거나 적은 것은 국가를 획득한 사람의 능력이 더 많거나 적음에 따른다고 말한다. 이제 개인의 지위에서 군주가 되는 것은 능력이나 운을 전제로 하므로,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어느 정도 많은 어려움을 완화할 것이다. 그럼에도 운에 가장 적게 의존한 사람이 가장 강하게 자리 잡는다. 더욱이 군주가 다른 국가가 없어 그곳에 직접 거주해야 할 때 상황이 더 쉬워진다.
그러나 운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군주가 된 이들에 대해 말하자면,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와 같은 이들이 가장 뛰어난 예라고 말한다. 모세에 대해서는 그가 단순히 신의 뜻을 실행한 사람이었기에 논의할 수 없지만, 그는 신과 대화할 자격이 있는 은총을 받았다는 점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하지만 키루스와 왕국을 획득하거나 세운 다른 이들을 고려할 때, 모두가 존경받을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특정한 행위와 행동을 고려하면, 그들이 모세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모세에게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의 행동과 삶을 검토해보면, 그들이 운에 빚진 것은 기회 외에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회는 그들에게 가장 적합해 보이는 형태로 만들 재료를 가져다주었다. 그 기회 없이는 그들의 정신력이 소멸되었을 것이고, 그 능력 없이는 기회가 헛되이 왔을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이집트인들에 의해 노예화되고 억압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발견한 것은 필요했다. 그래야 그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따르도록 할 수 있었다. 로물루스가 알바에 머물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야 했던 것은 필요했다. 그래야 그가 로마의 왕이 되고 조국의 건국자가 될 수 있었다. 키루스가 페르시아인들이 메디아인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메디아인들이 오랜 평화로 유약해진 것을 발견한 것은 필요했다. 테세우스가 아테네인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의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들이 그 사람들을 행운아로 만들었고, 그들의 뛰어난 능력이 그 기회를 인식하게 해 그들의 조국이 고귀해지고 유명해졌다.
이러한 사람들처럼 용맹한 방법으로 군주가 된 이들은 군주국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쉽게 유지한다. 그들이 획득하는 데 겪는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정부와 그 안전을 확립하기 위해 도입해야 하는 새로운 규칙과 방법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질서를 도입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수행하기에 더 위험하며, 성공이 더 불확실한 것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혁신가는 옛 조건 하에서 잘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삼고, 새로운 조건 하에서 잘 살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미지근한 옹호자들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담함은 부분적으로 반대자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데, 반대자들은 법을 자기 편에 두고 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불신에서 비롯되는데, 사람들은 새로운 것들을 오랜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쉽게 믿지 않는다. 따라서 적대적인 사람들이 공격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당파적으로 공격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미지근하게 방어한다. 그 결과 군주는 그들과 함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를 철저히 논의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혁신가들이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의존해야 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즉, 그들의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힘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그들은 항상 실패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를 의지하고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거의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무장한 예언자들은 정복했고, 무장하지 않은 이들은 파괴되었다. 언급된 이유들 외에도, 사람들의 본성은 변덕스러워서 그들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그 설득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힘으로 그들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모세, 키루스, 테세우스, 로물루스가 무장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헌법을 오래 강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프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게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 그는 대중이 더 이상 그를 믿지 않게 되자마자 새로운 질서와 함께 몰락했다. 그는 믿는 자들을 굳건하게 지키거나 불신자들을 믿게 만들 수단이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업을 완수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의 모든 위험은 상승 과정에 있지만, 능력으로 그것들을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극복하고 그들의 성공을 시기하던 이들이 제거되면, 그들은 존경받기 시작할 것이고, 그 후에는 강력하고, 안전하며, 존경받고, 행복해질 것이다.
이 위대한 예시들에 더 작은 예시를 하나 추가하고 싶다. 여전히 그것들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고, 나는 이것이 이와 같은 모든 종류의 예시를 대신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시라쿠사의 히에로다. 이 사람은 평민의 지위에서 시라쿠사의 군주가 되었고, 운에 빚진 것은 기회뿐이었다. 시라쿠사인들이 억압받고 있을 때 그를 그들의 대장으로 선출했고, 후에 그는 그들의 군주가 되는 보상을 받았다. 그는 평민으로서도 매우 능력이 있어서, 그에 대해 쓴 사람은 그가 왕국만 없었을 뿐 왕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은 옛 군대를 폐지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으며, 옛 동맹을 포기하고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그는 자신의 군인들과 동맹국들을 가졌기에, 그러한 기초 위에 어떤 건물이라도 세울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획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지하는 데는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1] 히에로 2세, 기원전 307년경 출생, 기원전 216년 사망.
제7장
타인의 무력이나 행운으로 획득한 새로운 군주국에 관하여
평민에서 군주가 된 이들 중 오직 행운으로 된 이들은 상승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만, 정상을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올라가는 길에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 그들은 날아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상에 오르면,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돈이나 권력자의 총애로 어떤 지위를 얻은 자들이 그렇다. 그리스의 여러 도시, 특히 이오니아와 헬레스폰트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그러했다. 다리우스가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위해 이들 도시에 군주를 세웠다. 또한 병사들의 부패로 인해 평민에서 황제가 된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을 높여준 사람의 호의와 운에 의지할 뿐이다. 이 두 가지는 매우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 그들은 그 자리에 필요한 지식도 없다. 항상 평민으로 살아왔기에 뛰어난 가치와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통치 방법을 알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게다가 그들은 우호적이고 충실한 군대를 유지할 수 없어 그 지위를 지킬 수 없다.
갑자기 일어난 국가는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급속히 태어나고 성장하여, 그 기반과 관계를 확고히 할 시간이 없어 첫 폭풍에 무너진다. 예외는 갑자기 군주가 된 자들이 매우 유능하여, 운이 그들의 품에 던져준 것을 즉시 지킬 준비가 되어 있고, 군주가 되기 전에 다른 이들이 놓은 기반을 나중에 스스로 놓을 수 있는 경우뿐이다.
이 두 가지 방법, 즉 능력이나 운으로 군주가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기억하는 두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이들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와 체사레 보르자다. 프란체스코는 적절한 수단과 뛰어난 능력으로 평민에서 밀라노 공작이 되었고, 천 가지 걱정으로 얻은 것을 약간의 노력으로 유지했다. 반면 체사레 보르자는 민중이 발렌티노 공작이라 부른 인물로, 아버지의 세력으로 국가를 얻었지만 그 세력이 쇠퇴하자 잃고 말았다. 그는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해야 할 모든 조치를 취하고 다른 이들의 무력과 운으로 얻은 국가에 자신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위에서 말했듯이, 처음부터 기반을 닦지 않은 사람도 나중에 뛰어난 능력으로 기반을 닦을 수 있지만, 그것은 건축가에게 고통스럽고 건물에 위험할 것이다. 따라서 공작이 취한 모든 조치를 살펴보면, 그가 미래 권력의 견고한 기반을 닦았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군주에게 그의 행동보다 더 나은 교훈을 줄 수 없기에 이를 논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조치가 효과가 없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운명의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악의 때문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인 공작을 높이려 했지만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첫째, 교회의 국가가 아닌 곳에서 그를 군주로 만들 방법을 보지 못했다. 교회를 강탈하려 했지만 밀라노 공작과 베네치아인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파엔차와 리미니는 이미 베네치아의 보호 아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이탈리아의 무력, 특히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세력이 교황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하는 자들, 즉 오르시니와 콜론나 가문과 그 추종자들의 손에 있음을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상황을 뒤엎고 세력들을 혼란에 빠뜨려 그들의 국가 일부를 안전하게 지배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 그는 베네치아인들이 다른 이유로 프랑스를 이탈리아로 다시 불러들이려 함을 알았다. 그는 이를 반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루이 왕의 이전 결혼을 무효화함으로써 더 쉽게 만들었다. 따라서 왕은 베네치아인들의 도움과 알렉산더의 동의로 이탈리아에 들어왔다. 그가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교황은 로마냐 공격을 위해 그로부터 병사들을 얻었고, 왕의 명성으로 로마냐를 점령했다.
공작은 로마냐를 획득하고 콜론나 가문을 물리쳤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려 할 때 두 가지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하나는 그의 군대가 충성스럽지 않아 보였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선의였다. 즉, 그는 사용하던 오르시니 군대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것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왕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르시니에 대해서는 파엔차를 점령하고 볼로냐를 공격했을 때 그들이 매우 꺼리며 공격에 나섰음을 보고 경고를 받았다. 왕에 대해서는 우르비노 공국을 점령한 후 토스카나를 공격했을 때 왕이 그 작전을 중단시킨 것을 통해 그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공작은 더 이상 다른 이들의 무기와 운에 의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공작과 교회의 세력 확장이 자신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한 귀족들은 페루자의 마조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로 인해 우르비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냐에서 소요가 발생했으며, 공작에게 끝없는 위험이 닥쳤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했다. 권력을 회복한 후, 프랑스나 다른 외세에 의존하여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는 계략을 꾸몄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데 능했기에, 시뇨르 파올로의 중재를 통해 오르시니 가문과 화해했다. 공작은 파올로에게 돈과 의복, 말을 주며 각별히 신경 썼다. 오르시니 가문의 단순함으로 인해 그들은 시니갈리아에서 공작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자신의 친구로 만든 공작은 권력의 기반을 충분히 다졌다. 그는 로마냐와 우르비노 공국 전체를 장악했고, 백성들이 번영을 누리기 시작하자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고 다른 이들이 본받을 만하므로, 나는 이를 생략하지 않겠다.
체사레 보르자는 로마냐를 점령했을 때, 그곳은 약한 군주들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들은 백성을 다스리기보다는 약탈했고, 단합보다는 분열을 조장했다. 그 결과 로마냐는 강도와 다툼, 온갖 폭력으로 가득 찼다. 체사레는 평화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되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좋은 통치자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라미로 도르코를 임명했다. 라미로는 신속하고 잔인한 사람이었고, 체사레는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라미로는 짧은 시간 안에 큰 성공을 거두며 평화와 단결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체사레는 그러한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라미로가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냐에 최고의 의장 아래 재판소를 설립했고, 모든 도시는 그곳에 변호인을 두었다. 체사레는 과거의 엄격함이 자신에 대한 증오를 일으켰음을 알았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그들을 완전히 얻기 위해 어떤 잔인한 행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닌 라미로의 타고난 엄격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를 구실로 그는 라미로를 체포하여 어느 날 아침 처형하고 체세나의 광장에 그의 시신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놓았다. 옆에는 칼과 피 묻은 칼이 놓여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백성들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체사레가 이제 충분히 강력해졌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장함으로써 당장의 위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해졌으며, 정복을 계속하고자 할 때 그를 해칠 수 있는 인근의 세력들을 크게 제압했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프랑스를 고려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너무 늦게 깨달은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자신을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새로운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프랑스가 가에타를 포위하고 있는 스페인을 상대로 나폴리 왕국을 향해 원정을 떠날 때 그들과 타협했다. 그의 의도는 스페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었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살아있었다면 이를 빠르게 달성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현재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첫째, 새로운 교황이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알렉산데르가 준 것을 빼앗으려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네 가지 방법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첫째, 그가 빼앗은 영주들의 가문을 멸족시켜 교황에게 구실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둘째, 로마의 모든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그들의 도움으로 교황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셋째, 추기경단을 최대한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넷째, 교황이 죽기 전에 충분한 권력을 획득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첫 번째 공격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데르가 죽었을 때, 그는 이 네 가지 중 세 가지를 이루어냈다. 그는 손에 잡을 수 있는 만큼의 영주들을 죽였고 거의 모두가 도망쳤다. 그는 로마의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추기경단에서 가장 큰 세력을 얻었다.
새로운 정복에 관해서는 그는 토스카나의 주인이 되려 했다. 그는 이미 페루자와 피옴비노를 소유하고 있었고 피사는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프랑스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프랑스인들은 이미 스페인에 의해 나폴리 왕국에서 쫓겨났고, 이로 인해 양측 모두 그의 호의를 사야 했다). 그래서 그는 피사를 공격했다. 이후 루카와 시에나는 즉시 항복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피렌체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면 피렌체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는 알렉산데르가 사망한 해에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권력과 명성을 얻어 혼자서도 버틸 수 있었고, 더 이상 운이나 타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에만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는 처음 칼을 뽑은 지 5년 만에 죽었다. 그는 로마냐 주만 공고히 한 채 체사레를 남겨두었고, 나머지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두 개의 강력한 적대 군대 사이에 있었고,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체사레에게는 그러한 대담함과 능력이 있었고, 그는 사람들을 얻거나 잃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가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쌓은 기반은 너무나 견고해서 만약 그의 등 뒤에 그 군대들이 없었다면, 또는 그가 건강했다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것이다. 그의 기반이 얼마나 튼튼했는지는 로마냐가 한 달 이상 그를 기다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로마에서 그는 반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안전했다. 발리오니, 비텔리, 오르시니 가문이 로마에 올 수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해칠 수 없었다. 그는 원하는 사람을 교황으로 만들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 선출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알렉산데르가 죽었을 때 그가 건강했다면, 모든 것이 그에게 달랐을 것이다.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된 날, 그는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 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았고 모든 것에 대비책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단,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죽음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있었을 것이다.
[5] 알렉산데르 6세는 1503년 8월 18일 열병으로 사망했다.
[6] 율리우스 2세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의 추기경이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로, 1443년에 태어나 1513년에 사망했다.
공작의 모든 행동을 돌이켜 볼 때, 나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말했듯이, 그를 운명이나 타인의 무력으로 정부에 오른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로 제시해야 할 것 같다. 그는 고상한 정신과 원대한 목표를 가졌기에 그의 행동을 달리 할 수 없었고, 오직 알렉산데르의 짧은 생애와 그 자신의 병이 그의 계획을 좌절시켰을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군주국에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친구를 얻고, 무력이나 사기로 승리하고, 백성들의 사랑과 두려움을 얻고, 군인들의 추종과 존경을 받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힘이나 이유가 있는 자들을 제거하고, 낡은 질서를 새것으로 바꾸고, 엄격하면서도 은혜롭고, 관대하면서도 후한 사람이 되고, 충성스럽지 않은 군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고, 왕들과 군주들과의 우정을 유지하여 그들이 열성적으로 도와주고 조심스럽게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사람의 행동보다 더 생생한 예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비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율리우스 2세의 선출이다. 그는 이 점에서 나쁜 선택을 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교황을 선출할 수 없었기에 다른 이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것을 막았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해를 끼쳤거나 교황이 되면 그를 두려워할 만한 이유가 있는 추기경의 선출에 절대 동의해서는 안 됐다.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증오로 인해 해를 끼친다. 그가 해를 끼친 이들 중에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콜론나, 산 조르조, 아스카니오가 있었다. [7] 나머지는 교황이 되면 그를 두려워해야 했는데, 루앙과 스페인 사람들은 제외였다. 후자는 혈연관계와 의무 때문에, 전자는 그의 영향력과 프랑스 왕국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따라서 공작은 무엇보다도 스페인 사람을 교황으로 만들었어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루앙에 동의하고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에는 동의하지 말았어야 했다. 새로운 혜택이 위대한 인물들로 하여금 오래된 상처를 잊게 할 것이라고 믿는 자는 속는 것이다. 따라서 공작은 선택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이것이 그의 최후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7] 산 조르조는 라파엘로 리아리오다. 아스카니오는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다.
제8장
사악함으로 군주국을 얻은 자들에 관하여
한 군주가 사적인 신분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설 수 있는데, 이 둘 중 어느 것도 전적으로 운이나 재능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내가 이것들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공화국에 대해 논할 때 더 상세히 다룰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방법들은 사악하거나 불법적인 수단으로 군주국에 오르는 것이거나, 동료 시민들의 호의로 평민이 그의 조국의 군주가 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두 가지 예로 설명될 것이다. 하나는 고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의 것이다. 이 주제에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이 두 예가 그것들을 따라야 할 사람들에게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칠리아인 아가토클레스[1]는 사적인 신분에서뿐만 아니라 낮고 비천한 위치에서 시라쿠사의 왕이 되었다. 이 사람은 도공의 아들로, 그의 운명의 모든 변화 속에서 항상 불명예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불명예를 매우 뛰어난 정신력과 체력으로 동반했다. 그는 군사 직업에 헌신하여 그 계급을 통해 시라쿠사의 총독이 되었다. 그 위치에 자리잡은 후, 그는 다른 이들의 동의로 그에게 허락된 것을 폭력으로 탈취하여 스스로를 군주로 만들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시칠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싸우고 있던 카르타고인 아밀카르와 합의에 이르렀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마치 공화국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려는 것처럼 시라쿠사의 시민들과 원로원을 소집했다. 그리고 정해진 신호에 따라 병사들이 모든 원로들과 가장 부유한 시민들을 죽였다. 그들이 죽자, 그는 아무런 시민의 소요 없이 그 도시의 군주국을 장악하고 유지했다. 그는 카르타고인들에게 두 번이나 패배하고 결국 포위되었지만, 자신의 도시를 방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병사들을 방어에 남겨두고 다른 이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공격했으며, 짧은 시간 안에 시라쿠사의 포위를 풀었다. 카르타고인들은 극도의 궁지에 몰려 아가토클레스와 화해하고, 시칠리아를 그에게 남겨두고 아프리카의 소유에 만족해야 했다.
[1] 시칠리아의 아가토클레스, 기원전 361년 출생, 기원전 289년 사망.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과 재능을 고려하는 사람은 운에 돌릴 수 있는 것을 거의 또는 전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위에서 보여진 대로 어느 누구의 호의도 아닌, 군사 직업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여 탁월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단계들은 그가 천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겪으며 얻은 것이며, 이후 많은 위험한 모험을 겪으며 대담하게 유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 시민들을 살해하고, 친구들을 속이고, 신의도, 자비도, 종교도 없는 것을 재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한 방법들은 제국을 얻을 수는 있지만 영광은 얻지 못한다. 아가토클레스가 위험에 뛰어들고 빠져나오는 용기와 고난을 견디고 극복하는 그의 위대한 정신을 고려한다면, 왜 그가 가장 뛰어난 장군들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만적인 잔인함과 무한한 사악함을 동반한 비인간성은 그가 가장 뛰어난 사람들 중 하나로 칭송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이룬 것은 운이나 재능 어느 쪽에도 돌릴 수 없다.
<제목> 제6장: 개인의 능력과 운명에 관하여 <제목>
우리 시대에, 알렉산데르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는 여러 해 전에 고아가 되어 그의 외삼촌인 조반니 폴리아니에 의해 양육되었고, 젊은 시절 초기에 파올로 비텔리 밑에서 싸우도록 보내졌다. 그의 훈련을 받아 군사 직업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파올로가 죽은 후, 그는 그의 형제 비텔로초 밑에서 싸웠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지혜와 강건한 몸과 정신으로 그 직업에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 밑에서 복무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는 페르모의 일부 시민들과 비텔레스키 가문의 도움을 받아 페르모를 장악하기로 결심했다. 그 시민들에게는 조국의 자유보다 예속이 더 소중했다. 그래서 그는 조반니 폴리아니에게 편지를 썼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으니 그와 그의 도시를 방문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유산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다. 비록 명예 외에는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에게 자신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품위 있게 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100명의 기병과 친구들, 수행원들을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는 조반니에게 페르모 시민들이 자신을 품위 있게 맞이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그를 키워준 조반니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조반니는 조카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않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페르모 시민들이 올리베로토를 품위 있게 맞이하도록 했고, 자신의 집에 그를 묵게 했다. 며칠을 보내며 사악한 계획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한 후, 올리베로토는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거기에 조반니 폴리아니와 페르모의 유력 인사들을 초대했다. 음식과 이런 연회에서 통상적으로 있는 다른 여흥이 끝나자, 올리베로토는 교묘하게 교황 알렉산데르와 그의 아들 체사레,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시작했다. 조반니와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답하자 그는 즉시 일어나 그런 문제는 더 사적인 장소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조반니와 다른 시민들이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병사들이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조반니와 다른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 살인이 끝난 후 올리베로토는 말을 타고 마을을 오르내리며 성의 주요 관리를 포위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군주로 하는 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모든 불만 세력을 제거하고 새로운 민간 및 군사 제도로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그 결과 그가 군주 자리를 차지한 지 1년 만에 페르모 시에서 안전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의 파멸은 아가토클레스의 경우처럼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앞서 언급했듯이 체사레 보르자에게 속아 오르시니와 비텔리와 함께 시니갈리아에서 체포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이 부친 살해를 저지른 지 1년 만에 그는 자신이 용기와 악덕의 지도자로 삼았던 비텔로초와 함께 교살당했다.
어떤 이들은 아가토클레스와 그와 같은 자들이 무한한 배신과 잔인함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오랫동안 자국에서 안전하게 살며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자국민의 음모를 당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많은 다른 이들은 잔인함으로 인해 평화로운 시기에도 국가를 유지하지 못했고, 하물며 전쟁의 불확실한 시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이것이 잔혹함을 잘못 사용하거나 올바르게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만약 악에 대해 좋게 말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사용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번에 가해지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며, 그 후에는 지속되지 않고 가능한 한 신민들의 이익으로 전환되는 것들이다. 잘못 사용된 것들은 처음에는 적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나는 것들이다. 첫 번째 방식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신이나 인간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자신의 통치를 완화할 수 있다. 아가토클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국가를 장악할 때 찬탈자는 가해야 할 모든 잔혹행위를 면밀히 검토하고 한 번에 모두 행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매일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동요시키지 않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은혜를 베풀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 두려움이나 나쁜 조언으로 다르게 행동하는 자는 항상 칼을 손에 들고 있어야 한다. 그는 신하들을 신뢰할 수 없고, 신하들도 계속되는 새로운 피해로 인해 그에게 애착을 가질 수 없다. 피해는 한 번에 가해져야 한다. 그래야 덜 맛보고 덜 해롭다. 은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그 맛이 오래 지속된다.
무엇보다 군주는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나 나쁜 일로 인해 변화하지 않도록 백성들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필요한 시기가 혼란스러운 때라면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엔 너무 늦다. 온건한 조치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강요된 것으로 여겨져 아무도 그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9장 시민 군주국에 관하여
다른 관점으로 넘어가서, 한 유력 시민이 악행이나 참을 수 없는 폭력이 아닌 동료 시민들의 호의로 자국의 군주가 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이를 시민 군주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천재성이나 운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교묘한 책략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군주국이 인민의 호의나 귀족의 호의로 얻어진다고 말한다. 모든 도시에서 이 두 가지 상반된 세력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귀족에 의해 지배되거나 억압받기를 원하지 않고, 귀족은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욕망에서 도시에는 세 가지 결과 중 하나가 생겨난다. 즉 군주국이나 자치 정부, 또는 무정부 상태다.
군주국은 인민이나 귀족에 의해 만들어진다. 둘 중 하나가 기회를 갖는 대로 말이다. 귀족은 인민에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자신들 중 한 명의 명성을 높이기 시작하고 그를 군주로 만든다. 그의 그늘 아래에서 자신들의 야망을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인민도 귀족에 맞설 수 없음을 알고 자신들 중 한 명의 명성을 높이고 그를 군주로 만든다. 그의 권위로 보호받기 위해서다. 귀족의 도움으로 주권을 얻는 자는 백성의 도움으로 군주가 된 사람보다 더 어렵게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다. 후자는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 그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거나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백성의 호의로 권력을 얻은 사람은 혼자 있게 되며, 주위에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정한 방법으로,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귀족들을 만족시킬 수 없지만, 백성들은 만족시킬 수 있다. 백성들의 목적이 귀족들의 목적보다 더 정당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압제하기를 원하지만, 백성들은 단지 압제받지 않기를 원할 뿐이다. 또한 군주는 적대적인 백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반면 귀족들로부터는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들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적대적인 백성으로부터 군주가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그들에게 버림받는 것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귀족들로부터는 버림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에게 대항하여 일어날 것도 두려워해야 한다. 귀족들은 이런 일에 더 통찰력 있고 교활하여, 항상 시간을 두고 자신을 구하고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에게서 호의를 얻으려 한다. 더욱이 군주는 항상 같은 백성과 함께 살아야 하지만, 같은 귀족들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는 매일 귀족들을 만들거나 파멸시킬 수 있고, 그의 마음대로 권위를 주거나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귀족들을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자신의 행동 방식을 당신의 운명에 완전히 묶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자신을 완전히 묶고 탐욕스럽지 않은 이들은 존경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자신을 묶지 않는 이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 그들이 소심함과 타고난 용기 부족으로 이렇게 하지 않는 경우, 당신은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좋은 조언을 주는 이들을 말이다. 그래서 번영할 때는 그들을 존중하고, 역경에 처했을 때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야심 때문에 자신을 묶지 않을 때, 이는 그들이 당신보다 자신을 더 생각한다는 표시다. 군주는 이런 이들을 경계해야 하며, 공공연한 적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경에 처했을 때 그들은 항상 그를 파멸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호의로 군주가 된 사람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이는 쉽게 할 수 있다. 백성들은 단지 그에게 압제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의 의지와 반대로 귀족의 호의로 군주가 된 사람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해야 하며, 이 역시 쉽게 할 수 있다. 그가 백성을 보호하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악을 기대했던 자로부터 선을 받을 때 그 은인에게 더욱 강하게 묶이게 된다. 따라서 백성은 그들의 호의로 군주가 됐을 때보다 더 빨리 그에게 헌신하게 된다. 군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백성의 애정을 얻을 수 있지만, 이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기 때문에 고정된 규칙을 제시할 수 없어 생략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군주에게는 백성의 우호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역경 속에서 안전할 수 없다.
나비스, 스파르타의 군주는 온 그리스와 승리한 로마 군대의 공격을 견뎌냈다. 그는 자신의 조국과 권력을 지켜냈다. 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백성이 적대적이었다면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백성 위에 세운 자는 진흙 위에 세운다”라는 진부한 격언으로 이 주장을 비난하지 말라. 이는 일반 시민이 그곳에 기반을 두고 적이나 관리에게 압제받을 때 백성이 그를 해방시켜줄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때 사실이다. 이런 경우 그는 자주 실망하게 될 것이다. 로마의 그라키 형제나 피렌체의 조르조 스칼리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말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자리를 잡은 군주, 즉 명령할 수 있고 용기 있는 사람, 역경에 굴하지 않고 다른 자질도 갖추고 있으며, 결의와 활력으로 모든 백성의 사기를 북돋우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백성에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기반을 잘 다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 나비스, 스파르타의 폭군, 기원전 195년 플라미니누스 지휘 하의 로마 군대에 의해 정복됨. 기원전 192년 살해됨.
[2] 조르조 스칼리. 이 사건은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 제3권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군주국들은 시민 정부에서 절대 정부로 넘어갈 때 위험에 처한다. 이런 군주들은 직접 통치하거나 관리를 통해 통치한다. 후자의 경우 그들의 정부는 더 약하고 불안정하다. 이는 전적으로 관직에 오른 시민들의 선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히 혼란한 시기에 음모나 공개적인 반항을 통해 매우 쉽게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군주는 혼란 속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없다. 시민들과 신하들은 관리로부터 명령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어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의심스러운 시기에는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할 것이다. 이런 군주는 평화로운 시기에 관찰한 것에 의존할 수 없다. 그때는 시민들이 국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모두가 그와 동의한다. 그들은 모두 약속하고, 죽음이 멀리 있을 때는 모두 그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한다. 하지만 혼란한 시기, 국가가 시민을 필요로 할 때, 그는 극소수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실험은 더욱 위험한데, 단 한 번만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어떤 상황에서든 시민들이 항상 국가와 그를 필요로 하도록 하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항상 그들이 충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10장
모든 군주국의 힘을 측정하는 방법에 관하여
이러한 군주국들의 성격을 검토할 때 다른 점도 고려해야 한다. 즉, 군주가 필요할 때 자신의 자원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아니면 항상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한지를 말이다. 이를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나는 자신의 자원으로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이들을 풍부한 인력이나 돈으로 공격해오는 누구와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충분한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는 적과 맞서 싸울 수 없어 성벽 뒤에 숨어 방어해야 하는 자들은 언제나 다른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경우는 이미 논의했지만,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군주들에게 도시에 식량을 비축하고 요새화하도록 권하는 것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절대 시골을 방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도시를 잘 요새화하고 위에서 언급했고 앞으로도 반복해서 말할 방식으로 신하들의 다른 문제들을 잘 처리한 군주는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고서는 결코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를 잘 요새화하고 백성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자를 공격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독일의 도시들은 완전히 자유롭고, 주변에 약간의 영토만을 소유하며, 그들이 원할 때만 황제에게 복종한다. 그들은 주변의 어떤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적절한 해자와 성벽을 갖추고 충분한 포병을 보유하고 있으며, 항상 1년 동안 먹고 마시고 불을 피울 수 있는 충분한 물자를 공공 창고에 비축해 두기 때문에 공격하면 지루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한다. 이 외에도 시민들을 평온하게 유지하고 국가에 손실을 주지 않기 위해, 그들은 항상 도시의 생명력과 힘이 되는 노동을 통해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방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시민들의 생계를 지원한다. 그들은 또한 군사 훈련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지지하기 위한 많은 법령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강한 도시를 가진 군주가 미움받지 않았다면 공격받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 공격한다 해도 수치스럽게 물러날 뿐이다. 또한 이 세상의 일은 매우 변화무쌍하여 1년 내내 군대를 현장에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누군가가 “시민들이 도시 밖에 재산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불타는 것을 본다면 인내하지 못할 것이며, 긴 포위 기간과 자기 이익 때문에 군주를 잊게 될 것”이라고 반박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강력하고 용기 있는 군주라면 한편으로는 고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신하들에게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의 잔혹함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며, 너무 대담해 보이는 신하들을 교묘하게 제어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모두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적은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시민들의 마음이 아직 뜨겁고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시골을 불태우고 파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더욱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식으면 피해는 이미 일어났고, 손실은 발생했으며, 더 이상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군주와 더욱 단결하게 된다. 그들의 집이 불타고 재산이 파괴된 것이 군주를 위해서였기 때문에 군주가 그들에게 의무를 지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사람의 본성은 받은 은혜만큼이나 베푼 은혜에 의해 구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잘 고려해 보면, 현명한 군주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민들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가 시민들을 지지하고 방어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제11장
교회 군주국에 관하여
이제 교회 군주국에 대해 말하는 것만 남았다. 이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얻기 전에 모든 어려움이 있다. 그것들은 능력이나 행운으로 얻어지지만, 그 둘 없이도 유지될 수 있다. 그것들은 종교의 오래된 제도에 의해 유지되며, 이는 매우 강력하고 특별해서 군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든 상관없이 그들의 군주국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오직 이 군주들만이 국가를 가지고 있지만 방어하지 않으며, 신하들을 가지고 있지만 통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국가들은 방어되지 않아도 빼앗기지 않고, 신하들은 통치되지 않아도 개의치 않으며, 그들을 배반하려는 생각이나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러한 군주국들만이 안전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힘에 의해 지탱되므로, 나는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고양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논하는 것은 오만하고 무모한 사람의 행동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교회가 어떻게 그토록 큰 세속적 권력을 얻게 되었는지 물어본다면, 알렉산데르 이전의 이탈리아 군주들(군주라 불리는 자들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귀족과 영주까지도)이 세속적 권력을 매우 경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프랑스 왕이 그 앞에서 떨고 있고, 교회가 그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고 베네치아인들을 파멸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분명함에도, 이를 어느 정도 기억 속에 되살리는 것이 불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프랑스의 샤를 왕이 이탈리아로 넘어오기 전, 이 나라는 교황, 베네치아인들,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피렌체인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 군주들에게는 두 가지 주요한 걱정거리가 있었다. 하나는 외국인이 무력으로 이탈리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 중 누구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장 걱정되는 대상은 교황과 베네치아인들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페라라를 방어할 때처럼 다른 모든 이들의 연합이 필요했다. 교황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귀족들을 이용했다. 이들은 오르시니와 콜론네시 두 파벌로 나뉘어 항상 분쟁의 구실을 가지고 있었고, 교황의 눈앞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어 교황권을 약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때때로 시스투스와 같은 용기 있는 교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운이나 지혜로도 이러한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교황의 짧은 재임 기간도 약점의 원인이 된다. 교황의 평균 재임 기간인 10년 동안, 그는 어려움을 겪어 파벌 중 하나를 거의 무너뜨릴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한 교황이 콜론네시 가문을 거의 파괴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교황이 나타나 오르시니 가문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그들의 반대파를 지원하지만, 오르시니 가문을 무너뜨릴 시간은 없다. 이것이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그다지 존중받지 못했던 이유이다.
그 후 알렉산데르 6세가 등장했는데,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교황들 중에서 돈과 무력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발렌티노 공작을 도구로 삼아, 위에서 언급한 모든 행동을 통해 교황의 위대함을 이루어냈다. 비록 그의 의도는 교회가 아닌 공작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일은 교회의 위대함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인들의 침입 이유를 앞서 공작의 행동에 대해 논의한 바와 같이 그는 이 모든 일을 초래했다. 그의 의도는 교회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작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가 한 일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위대함에 기여했다. 그의 죽음과 공작의 몰락 이후 교회는 그의 모든 노력의 상속자가 되었다.
이후 교황 율리우스가 등장했고, 그는 교회가 강력해지고 로마냐 전체를 소유하며, 로마 귀족들이 무력화되고, 알렉산데르의 처벌로 인해 파벌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한 알렉산데르 시대 이전에는 결코 행해지지 않았던 방식으로 돈을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알았다. 율리우스는 이러한 것들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개선했고, 볼로냐를 얻고 베네치아인들을 몰아내며 프랑스인들을 이탈리아에서 쫓아내려고 했다. 이 모든 사업은 그에게 번창했고, 그가 모든 것을 교회를 강화하기 위해 했지 어떤 개인을 위해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의 명성을 높였다. 그는 또한 오르시니와 콜로네시 파벌을 그가 발견한 범위 내에 가두어 두었다. 그들 사이에 소란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가지를 확고히 했다. 하나는 그들을 두렵게 한 교회의 위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자신의 추기경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것인데, 이는 그들 사이에 무질서를 일으켰다. 이러한 파벌들이 자신들의 추기경을 가질 때마다 그들은 오래 평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추기경들이 로마 안팎에서 파벌을 조장하고, 귀족들은 그들을 지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위 성직자들의 야심에서 귀족들 사이의 무질서와 소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교황 레오 성하께서는 교황청을 가장 강력한 상태로 발견했고, 다른 이들이 무력으로 그것을 위대하게 만들었다면, 그가 자신의 선함과 무한한 다른 덕목들로 그것을 더욱 위대하고 존경받게 만들 것이라고 희망된다.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 데 메디치였다.
제12장
군대의 종류와 용병에 관하여
지금까지 처음에 논의하기로 제안했던 군주국의 특성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고, 어느 정도 그것들이 좋거나 나쁜 이유를 고려했으며, 많은 이들이 그것들을 획득하고 유지하려고 했던 방법을 보여주었다. 이제 각각에 속하는 공격과 방어 수단을 일반적으로 논의하는 일이 남았다.
우리는 앞서 군주가 기초를 잘 다지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그는 몰락할 것이다. 모든 국가의 주요 기초는 새로운 국가든 오래된 국가든 복합적인 국가든 좋은 법과 좋은 무기다. 국가가 잘 무장되지 않으면 좋은 법이 있을 수 없고, 그들이 잘 무장된 곳에는 좋은 법이 있다는 것이 따른다. 나는 법을 논의에서 제외하고 무기에 대해 말하겠다.
따라서 나는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는 무기는 자신의 것이거나, 용병이거나, 지원군이거나, 혼성군이라고 말한다. 용병과 지원군은 쓸모없고 위험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무기에 기반하여 자신의 국가를 유지한다면, 그는 결코 견고하거나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열되어 있고, 야심차며, 규율이 없고, 신실하지 않으며, 친구들 앞에서는 용감하고 적 앞에서는 비겁하다. 그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에 대한 충실함도 없으며, 파멸은 공격이 있을 때까지만 연기된다. 평화 시에는 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전쟁 시에는 적에 의해 약탈당한다. 사실, 그들이 전장을 유지하는 이유나 매력은 약간의 봉급뿐인데, 이는 그들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게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당신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당신의 군인이 되기를 충분히 원하지만, 전쟁이 오면 그들은 도망가거나 적에게서 달아난다. 이것을 증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몰락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용병에 모든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전에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용감하게 보이고 나타났지만, 외국인들이 왔을 때 그들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샤를 왕이 백묵을 들고 이탈리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 우리의 죄가 그 원인이라고 말한 사람은 진실을 말했지만, 그가 상상한 죄가 아니라 내가 말한 죄였다. 그리고 그것이 군주들의 죄였기 때문에, 군주들 또한 그 벌을 받았다.
“백묵을 들고”는 알렉산데르 6세의 재치 있는 말 중 하나로,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얼마나 쉽게 점령했는지를 의미한다. 그의 병사들을 위한 숙소를 표시하기 위해 백묵만 있으면 충분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베이컨 경의 “헨리 7세의 역사”를 참조하라: “샤를 왕은 나폴리 왕국을 정복했다가 다시 잃었는데, 이는 일종의 꿈같은 행운이었다. 그는 저항 없이 이탈리아 전체를 통과했다. 그래서 교황 알렉산데르가 자주 말하곤 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프랑스인들은 싸우기 위해 칼을 들고 이탈리아에 온 것이 아니라, 숙소를 표시하기 위해 백묵을 들고 왔다고.”
나는 이러한 무기들의 불행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용병 대장들은 능력 있는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다. 만약 그들이 능력 있다면, 당신은 그들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위대함을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 즉 그들의 주인을 억압하거나 당신의 의도와 반대되는 다른 이들을 억압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장이 능력이 없다면, 당신은 보통의 방식으로 파멸될 것이다.
그리고 무장한 자가 용병이든 아니든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된다면, 나는 무기를 사용해야 할 때 군주나 공화국은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군주는 직접 가서 대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공화국은 자국민을 보내야 하며, 보내진 사람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를 소환해야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법으로 그를 붙들어 두어 지휘권을 떠나지 않게 해야 한다. 경험은 군주들과 공화국들이 단독으로 가장 큰 진전을 이루고, 용병들은 피해만 입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국의 무기로 무장한 공화국을 한 시민의 지배 하에 두는 것은 외국의 무기로 무장한 공화국을 그렇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로마와 스파르타는 수세기 동안 무장하고 자유로웠다. 스위스인들은 완전히 무장하고 매우 자유롭다.
고대의 용병의 예로, 카르타고인들이 있다. 그들은 첫 번째 로마 전쟁 후 자신들의 용병 군인들에 의해 억압당했다. 비록 카르타고인들이 자국민을 대장으로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파미논다스가 사망한 후 테베인들은 마케도니아의 필립을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승리한 뒤에 그들의 자유를 빼앗았다.
필리포 공작이 사망하자 밀라노인들은 베네치아인들을 상대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고용했다. 그는 카라바조에서 적을 격파한 뒤 자신의 주인인 밀라노인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적과 동맹을 맺었다. 그의 아버지 스포르차는 나폴리의 조안나 여왕에게 고용되었다가 그녀를 보호하지 않고 떠났고, 그 결과 그녀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아라곤 왕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인들과 피렌체인들이 이전에 이런 군대로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그들의 군대장들이 군주가 되지 않고 그들을 보호했다면, 나는 이 경우 피렌체인들이 운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두려워할 만한 유능한 군대장들 중 일부는 정복하지 않았고, 일부는 반대에 부딪혔으며, 다른 이들은 야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정복하지 않은 이는 조반니 아쿠토였고, 그가 정복하지 않았기에 그의 충성심은 증명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복했다면 피렌체인들이 그의 처분에 맡겨졌을 것이라는 점을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스포르차는 항상 브라체스키와 대립했기에 그들은 서로를 견제했다. 프란체스코는 야심을 롬바르디아로 돌렸고, 브라초는 교회와 나폴리 왕국을 상대로 했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일을 살펴보자. 피렌체인들은 파올로 비텔리를 군대장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으로 평범한 신분에서 최고의 명성에 이르렀다. 만약 이 사람이 피사를 점령했다면, 피렌체인들이 그와 함께 있어야 했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적의 군인이 되면 그들은 저항할 수단이 없었고, 그를 붙들고 있으면 그에게 복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들이 자신들의 사람들을 전쟁에 보냈을 때는 무장한 귀족들과 평민들이 용감하게 싸웠기에 안전하고 영광스럽게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육지에서의 전쟁을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육지에서 싸우기 시작하자 이러한 미덕을 버리고 이탈리아의 관습을 따랐다. 그들이 육지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을 때는 영토가 많지 않았고 명성이 컸기 때문에 군대장들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카르미뇰라의 경우처럼 이 실수를 경험했다. 그를 매우 용맹한 사람으로 여겼기에 (그의 지휘 아래 밀라노 공작을 물리쳤다) 한편으로는 그가 전쟁에 미온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지휘 아래서는 더 이상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 두려워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를 보내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획득한 것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 자신들을 지키려고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들은 베르가모의 바르톨로메오, 산 세베리노의 로베르토, 피틸리아노 백작 등을 군대장으로 두었는데, 이들 밑에서는 이익이 아닌 손실을 두려워해야 했다. 이는 나중에 바일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한 번의 전투에서 800년 동안 많은 고난 끝에 획득한 것을 모두 잃어버렸다. 이런 군대에서는 정복이 느리게, 오래 지연되고 미미하게 이루어지지만, 손실은 갑작스럽고 놀라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2] 1448년 9월 15일 카라바조 전투.
[3] 나폴리의 조안나 2세,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의 미망인.
[4] 조반니 아쿠토. 본명은 존 호크우드 경인 영국 기사. 그는 프랑스에서의 영국 전쟁에 참전했고 에드워드 3세에 의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군대를 모아 이탈리아로 갔다. 이들은 유명한 ‘백색 부대’가 되었다. 그는 많은 전쟁에 참여했고 1394년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그는 1320년경 에섹스 주의 시블 헤딩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 도니아와 결혼했다.
[5] 카르미뇰라. 프란체스코 부소네, 1390년경 카르마놀라에서 출생, 1432년 5월 5일 베네치아에서 처형되었다.
[6] 베르가모의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1457년 사망. 산 세베리노의 로베르토; 1487년 오스트리아의 지기스문트 공작을 상대로 베네치아를 위해 싸우다 사망. “이탈리아 최고의 군대장” – 마키아벨리. 피틸리아노 백작; 니콜로 오르시니, 1442년 출생, 1510년 사망.
[7] 1509년 바일라 전투.
이 예시들로 이탈리아에 이르렀으니, 이탈리아가 오랫동안 용병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에 그들에 대해 더 진지하게 논의하고자 한다. 그들의 등장과 발전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에 맞서기 위한 더 나은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 최근 이탈리아에서 배척되었고, 교황이 더 많은 세속적 권력을 얻었으며, 이탈리아가 더 많은 국가로 분할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많은 대도시들이 이전에 황제의 비호를 받아 그들을 억압하던 귀족들에 맞서 무기를 들었고, 교회는 세속적 권력에서 권위를 얻기 위해 그들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군주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는 부분적으로 교회와 공화국의 수중에 들어갔고, 교회는 무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제들로, 공화국은 무기에 익숙하지 않은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둘 다 외국인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군대에 명성을 안겨준 첫 번째 인물은 로마냐 출신의 알베리코 다 코니오였다. 이 사람의 학교에서 브라초와 스포르차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은 당대 이탈리아의 중재자들이었다. 이들 이후로 지금까지 이탈리아의 군대를 지휘한 모든 다른 군대장들이 있었다. 그들 모든 용기의 결과는 이탈리아가 샤를에 의해 침략당하고, 루이에 의해 약탈당하고, 페르디난도에 의해 황폐화되고, 스위스인들에 의해 모욕당한 것이었다. 그들을 이끈 원칙은 먼저 보병의 신용을 낮춰 자신들의 신용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한 이유는 영토 없이 급여로만 생활했기 때문에 많은 병사를 지원할 수 없었고, 소수의 보병으로는 권위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병을 사용하게 되었고, 적당한 수의 기병으로 그들은 유지되고 존경받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2만 명의 군인으로 이루어진 군대에서 2천 명의 보병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은 이외에도 자신들과 병사들의 피로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모든 술책을 사용했다. 전투 중에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몸값 없이 석방했다. 야간에 도시를 공격하지 않았고, 도시의 수비대도 야간에 야영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야영지 주위에 목책이나 참호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군사 규칙에 의해 허용되었고, 앞서 말했듯이 피로와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를 노예 상태와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8] 알베리코 다 코니오. 로마냐의 쿠니오 백작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 그는 완전히 이탈리아 군인들로 구성된 유명한 ‘성 조지 부대’의 지도자였다. 그는 1409년에 사망했다.
제13장
보조군, 혼성군, 자군에 관하여
보조군은 다른 쓸모없는 군대로, 군주가 자신의 군대를 불러들여 원조하고 방어하기 위해 고용될 때 사용된다. 율리우스 교황이 최근에 한 것처럼 말이다. 그는 페라라를 공격하는 전쟁에서 용병들의 열악한 성과를 보고 보조군으로 전향하여 스페인 왕 페르디난드와 병력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군대는 그 자체로는 유용하고 좋을 수 있지만, 그들을 부르는 사람에게는 항상 불리하다. 패배하면 망하고, 승리하면 그들의 포로가 되기 때문이다.
[1] 페르디난드 5세(아라곤과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드 2세,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3세), 별명 ‘카톨릭 왕’, 1452년 출생, 1516년 사망.
고대 역사에 이러한 예가 많이 있지만, 나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최근 사례를 간과하고 싶지 않다. 그 위험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페라라를 얻고자 하여 완전히 외국인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하지만 그의 행운으로 제3의 사건이 일어나 그의 무모한 선택의 결과를 피할 수 있었다. 그의 보조군이 라벤나에서 패배하고 스위스인들이 일어나 정복자들을 몰아냈을 때(그와 다른 모든 이의 예상을 벗어나) 그는 적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적들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보조군의 포로도 되지 않았다. 다른 무기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피렌체인들은 완전히 무장하지 않은 채 피사를 점령하기 위해 1만 명의 프랑스군을 보냈고, 이로 인해 그들은 어느 때보다 더 큰 위험에 처했다.
콘스탄티노플 황제는 이웃들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에 1만 명의 터키인을 보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자 떠나려 하지 않았고, 이것이 그리스가 이교도들의 노예가 되는 시작이었다.
[2] 요안네스 칸타쿠제누스, 1300년 출생, 1383년 사망.
그러므로 정복할 의도가 없는 자는 용병을 사용하지 마라. 용병은 훨씬 더 위험하다. 용병과 함께하면 파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용병은 모두 단결되어 있고, 다른 이에게 복종한다. 반면 용병은 승리했을 때 당신을 해치려면 더 많은 시간과 더 나은 기회가 필요하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며, 당신이 찾아 고용한 자들이고, 당신이 그들의 우두머리로 임명한 제3자는 단번에 충분한 권위를 갖고 당신을 해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용병에게는 비겁함이 가장 위험하고, 지원군에게는 용맹함이 위험하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항상 이러한 군대를 피하고 자신의 군대를 사용했다. 그는 다른 이의 무기로 승리하는 것을 진정한 승리로 여기지 않았기에, 차라리 자신의 군대와 함께 패배하는 것을 원했다.
나는 체사레 보르자와 그의 행동을 인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 이 공작은 지원군을 데리고 로마냐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직 프랑스 군인들만 데려갔고, 그들과 함께 이몰라와 포를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러한 군대가 신뢰할 만하지 않다고 여겨 용병으로 전향했고, 오르시니와 비텔리를 고용했다. 그러나 그들을 다루면서 의심스럽고, 충실하지 않으며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병사들로 전환했다. 이 군대들 간의 차이는 공작이 프랑스군을 데리고 있을 때, 오르시니와 비텔리를 데리고 있을 때, 그리고 자신의 군인들에게 의지할 때의 평판 차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모두가 그가 자신의 군대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보았을 때 그의 평판은 계속 높아졌다.
나는 이탈리아의 최근 사례를 넘어가려 하지 않았지만, 내가 위에서 언급한 시라쿠사의 히에로를 빼놓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은, 내가 말했듯이, 시라쿠사인들에 의해 군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곧 우리의 이탈리아 콘도티에리와 같은 용병 군대가 쓸모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그들을 유지할 수도, 보낼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모두 토막 내게 했고, 이후 외국인이 아닌 자신의 군대로 전쟁을 했다.
나는 또한 이 주제에 적용할 수 있는 구약의 한 예를 상기시키고 싶다. 다윗은 블레셋의 챔피언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사울에게 자청했고, 사울은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자신의 무기로 그를 무장시켰다. 다윗은 그것을 등에 메자마자 거부하며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고, 자신의 물매와 칼로 적과 맞서고 싶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다른 이의 무기는 등에서 떨어지거나, 무겁게 짓누르거나, 꽉 조인다.
샤를 7세[3], 루이 11세[4]의 아버지는 행운과 용기로 프랑스를 영국인들로부터 해방시킨 후, 자신의 군대로 무장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의 왕국에 기병과 보병에 관한 법령을 제정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루이 왕은 보병을 폐지하고 스위스인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실수는 다른 실수들과 함께 현재 그 왕국에 위험의 원인이 되고 있다. 스위스인들의 명성을 높임으로써 그는 자신의 군대의 가치를 완전히 떨어뜨렸다. 그는 보병을 완전히 없애버렸고, 그의 기병을 다른 이들에게 종속시켰다. 그들이 스위스인들과 함께 싸우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들 없이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스위스인들과 맞설 수 없게 되었고
스위스 용병에 맞설 수 있었고, 스위스 용병 없이는 다른 이들에게 잘 대항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이렇게 용병과 자국민을 혼합한 군대가 되었는데, 이는 용병이나 지원군만으로 이루어진 군대보다는 훨씬 낫지만 자국의 군대보다는 크게 열등하다. 이 예는 그것을 증명한다. 샤를의 법령이 확대되거나 유지되었다면 프랑스 왕국은 정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
[3] 프랑스의 샤를 7세, 별명 “승리자”, 1403년 출생, 1461년 사망.
[4] 루이 11세, 위 인물의 아들, 1423년 출생, 1483년 사망.
그러나 인간의 얕은 지혜는 처음에 좋아 보이는 일에 뛰어들 때 그 속에 숨겨진 독을 알아채지 못한다. 내가 위에서 말한 폐결핵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군주국을 다스리는 자가 재앙이 닥치기 전에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현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력은 소수에게만 주어진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재앙을 살펴보면, 그것이 고트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부터 로마 제국의 활력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일으켰던 모든 용기가 다른 이들에게로 옮겨갔다.
[5] “지난밤 군비 축소 토론에서 많은 연설자들이 영국 제국이 존속하는 조건에 대해 매우 한심할 정도로 무지한 것 같았다. 발푸어 씨가 로마 제국이 군사적 의무의 무게에 눌려 몰락했다는 주장에 대해 ‘완전히 비역사적’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로마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모든 시민이 국가를 위해 싸울 의무를 인정했지만, 이 의무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자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 팰 멜 가제트, 1906년 5월 15일.
따라서 나는 어떤 군주국도 자체 군대 없이는 안전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오히려 그것은 전적으로 운에 좌우되며, 역경 속에서 그것을 지킬 용기가 없다. 현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힘에 기초하지 않은 명성이나 권력만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은 없다는 의견과 판단을 내려왔다. 자국의 군대는 신하, 시민, 또는 종속민으로 구성된 것이다. 다른 모든 군대는 용병이거나 지원군이다. 자국의 군대를 준비하는 방법은 내가 제안한 규칙들을 숙고하고,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과 많은 공화국과 군주들이 어떻게 무장하고 조직했는지를 고려한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규칙들을 전적으로 따른다.
제14장
군주가 전쟁의 기술에 관해 고려해야 할 것
군주는 전쟁과 그 규율과 훈련 외에 다른 목적이나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며, 다른 어떤 것도 연구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통치자에게 속하는 유일한 기술이며,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태어날 때부터 군주였던 자들을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종종 평민의 지위에서 그 계급으로 오르게 한다. 반대로 군주들이 무기보다 안락을 더 생각했을 때 그들의 국가를 잃은 것을 볼 수 있다. 국가를 잃게 되는 첫 번째 원인은 이 기술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국가를 얻게 해주는 것은 이 기술의 달인이 되는 것이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무예에 능했기에 평민에서 밀라노 공작이 되었고, 그의 아들들은 무기의 고난과 괴로움을 피하다가 공작에서 평민이 되었다.
무장하지 않음으로써 오는 다른 악들 중에서도, 그것은 당신을 경멸받게 만든다. 이것은 군주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수치 중 하나다. 무장한 자와 무장하지 않은 자 사이에는 균형이 없기 때문이다. 무장한 자가 무장하지 않은 자에게 기꺼이 복종하거나, 무장하지 않은 자가 무장한 종복들 사이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한쪽에는 경멸이, 다른 쪽에는 의심이 있어 그들이 잘 협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의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주는 이미 언급한 다른 불행들 외에도, 그의 병사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고 그들을 신뢰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이 전쟁이라는 주제를 생각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되며, 평화 시에는 전쟁 시보다 더 그 연습에 전념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행동으로, 다른 하나는 연구로 한다.
행동에 관해서는,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병사들을 잘 조직하고 훈련시켜야 하며, 끊임없이 사냥을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는 신체를 고난에 익숙하게 하고, 지형의 특성을 배우며, 산이 어떻게 솟아오르고, 계곡이 어떻게 펼쳐지며, 평원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 강과 습지의 성질을 이해하게 된다. 이 모든 것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지식은 두 가지 면에서 유용하다. 첫째, 그는 자신의 나라를 알게 되어 더 잘 방어할 수 있다. 둘째, 이 지역에 대한 지식과 관찰을 통해 앞으로 연구해야 할 다른 지역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토스카나의 언덕, 계곡, 평원, 강과 습지는 다른 나라의 그것들과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어서, 한 나라의 지형을 알면 쉽게 다른 나라의 지형도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기술이 부족한 군주는 지휘관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 기술은 적을 기습하고, 숙영지를 선택하고, 군대를 인솔하고, 전투를 배열하고, 유리하게 도시를 공격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아카이아인의 군주 필로포에멘은 평화 시에도 전쟁의 규칙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작가들이 칭찬한다. 그는 시골에서 친구들과 있을 때 자주 멈추어 그들과 이렇게 토론했다. “적이 저 언덕 위에 있고 우리가 여기 군대와 함께 있다면 누가 유리할까? 어떻게 대열을 유지하면서 그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 좋을까? 우리가 후퇴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가면서 군대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그들에게 제시했다. 그들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토론으로 인해 전쟁 중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 수 없었다.
필로포이멘, “그리스인들의 마지막”은 기원전 252년에 태어나 기원전 183년에 죽었다.
하지만 지성을 훈련하기 위해 군주는 역사를 읽고, 위대한 인물들의 행동을 연구하여 그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들의 승리와 패배의 원인을 살펴보아 후자를 피하고 전자를 모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인물이 했던 것처럼 자신보다 앞서 칭송받고 유명했던 사람을 본보기로 삼아, 그의 업적과 행동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아킬레우스를, 카이사르가 알렉산더를, 스키피오가 키루스를 모방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생애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 그 후에 스키피오의 생애에서 그 모방이 그의 영광이었음을 인식할 것이며, 순결, 친절, 인간성, 관대함에 있어 스키피오가 크세노폰이 키루스에 대해 쓴 것들을 따랐음을 알게 될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이와 같은 규칙들을 준수해야 하며, 평화로운 시기에도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되고, 근면함으로 자원을 늘려 역경이 닥쳤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운명이 변할 때 그녀의 타격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제15장
사람들, 특히 군주들이 칭찬받거나 비난받는 것들에 관하여
이제 군주가 신하와 친구들을 대하는 행동 규칙이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볼 차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이 주제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주제넘은 행동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특히 이를 논의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방식과 다르게 접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의도는 이해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것을 쓰는 것이므로, 상상의 것보다는 사실의 진실을 따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았거나 보지 못한 공화국과 군주국을 그려냈는데, 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살아가야 할 방식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무시하고 하고 있는 일만 고집하는 사람은 보존보다는 파멸에 이르기 때문이다. 덕성의 주장에 전적으로 부합하려는 사람은 너무나 많은 악 속에서 곧 파멸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는 법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군주에 관한 상상의 것들은 제쳐두고 실제적인 것들을 논의하면서, 나는 모든 사람들이 언급될 때, 특히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군주들은 칭찬이나 비난을 받게 하는 특정한 자질들로 주목받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사람은 관대하다고 여겨지고, 다른 사람은 인색하다고 여겨진다. 토스카나 용어를 사용하면 (우리 언어에서 탐욕스러운 사람은 여전히 강탈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인 반면, 우리는 자신의 것을 너무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인색하다고 부른다.) 한 사람은 관대하고, 다른 사람은 탐욕스럽다. 한 사람은 잔인하고, 다른 사람은 자비롭다. 한 사람은 신의가 없고, 다른 사람은 충실하다. 한 사람은 여성적이고 비겁하며, 다른 사람은 용감하고 대담하다. 한 사람은 친절하고, 다른 사람은 오만하다. 한 사람은 음란하고, 다른 사람은 순결하다. 한 사람은 진실하고, 다른 사람은 교활하다. 한 사람은 강인하고, 다른 사람은 유약하다. 한 사람은 진지하고, 다른 사람은 경박하다. 한 사람은 종교적이고, 다른 사람은 불신자이며, 등등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군주가 위에서 언급한 좋은 자질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칭찬받을 만하다고 고백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거나 관찰할 수 없으므로, 그가 자신의 국가를 잃게 할 악덕들의 비난을 피하는 방법을 알만큼 충분히 신중해야 한다. 또한 가능하다면 그것을 잃게 하지 않을 악덕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더 적은 주저함으로 그것들에 자신을 맡길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는 국가를 구하기 어려운 악덕들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신중하게 고려하면, 덕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따르면 그의 파멸이 될 수 있고, 반면에 악덕처럼 보이는 다른 것이 따르면 그에게 안전과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6장
관대함과 인색함에 관하여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특성들 중 첫 번째부터 시작하여, 나는 관대하다고 평판이 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평판을 얻지 못하는 방식으로 행사된 관대함은 당신을 해친다. 왜냐하면 정직하게 그리고 행사되어야 하는 방식대로 행사한다면, 그것이 알려지지 않을 수 있고, 당신은 그 반대의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서 관대한 이름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화려함의 속성도 피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성향의 군주는 그러한 행위에 모든 재산을 소비하게 될 것이고, 결국 관대한 이름을 유지하고 싶다면 자신의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고, 세금을 매기며, 돈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그를 신하들에게 미움받게 만들 것이며, 가난해짐에 따라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관대함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소수에게만 보상했기 때문에, 그는 첫 번째 어려움에 영향을 받고 첫 번째 위험에 빠지게 된다. 이를 인식하고 물러나고자 한다면, 그는 즉시 인색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는 이 관대함의 덕을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만약 그가 현명하다면 인색하다는 평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그의 절약으로 수입이 충분해져 자신을 모든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도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어 관대한 사람보다 더 존경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빼앗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함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들은 무수히 많고, 주지 않는 소수에게는 인색함을 행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색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위대한 일들을 보지 못했다. 나머지는 실패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관대함의 평판으로 교황직에 오르는 데 도움을 받았지만, 그 후에는 프랑스 왕과 전쟁을 할 때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에게 특별한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여러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그의 오랜 절약으로 추가 비용을 충당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스페인 왕은 관대하다고 평판이 났다면 그렇게 많은 사업을 시작하거나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인색하다는 평판을 별로 개의치 않아야 한다. 자신의 백성을 약탈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으며, 가난하고 비굴해지지 않고, 탐욕스럽게 되지 않는 한 말이다. 이는 그가 통치할 수 있게 해주는 악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저는 관대함으로 제국을 얻었고, 많은 이들이 관대함으로, 또 관대하다고 여겨짐으로써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이미 군주이거나 군주가 되는 과정에 있다. 전자의 경우 이러한 관대함은 위험하고, 후자의 경우 관대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시저는 로마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고자 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후 살아남아 지출을 줄이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통치를 파괴했을 것이다.
“많은 군주들이 군대를 이끌고 위대한 일을 해냈으며, 매우 관대한 것으로 여겨졌다.” 누군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군주는 자신의 것, 백성의 것, 아니면 다른 이들의 것을 쓴다. 첫 번째 경우에는 절약해야 하고, 두 번째 경우에는 관대함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약탈, 약탈, 강탈로 군대를 지원하며 나아가는 군주에게는 이러한 관대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것도 아니고 당신의 백성의 것도 아닌 것은 마음껏 줄 수 있다. 키루스, 시저, 알렉산더가 그랬듯이 말이다. 다른 이들의 것을 낭비해도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높여준다. 당신 자신의 것을 낭비하는 것만이 당신을 해칠 뿐이다.
관대함만큼 빠르게 소비되는 것은 없다. 당신이 그것을 행사하는 동안에도 그렇게 할 능력을 잃어 가난해지거나 멸시를 받게 된다. 아니면 가난을 피하려다 탐욕스럽고 증오받게 된다. 군주는 무엇보다도 멸시와 증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대함은 당신을 그 둘로 이끈다. 따라서 증오 없는 비난을 가져오는 인색한 평판을 갖는 것이 관대함의 평판을 얻으려다 탐욕의 이름을 얻어 증오와 함께 비난을 받는 것보다 현명하다.
제17장
잔인함과 자비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지에 대하여
이제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자질들로 넘어가서, 나는 모든 군주가 자비롭다고 여겨지기를 바라고 잔인하다고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자비를 오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하다고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잔인함은 로마냐를 화해시키고, 통일시키고, 평화와 충성으로 회복시켰다. 이를 올바르게 고려한다면, 그가 잔인하다는 평판을 피하기 위해 피스토이아가 파괴되도록 허용한 피렌체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비로웠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단결시키고 충성스럽게 유지하는 한, 잔인하다는 비난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더 자비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자비로 인해 무질서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살인이나 강도가 뒤따르는 것을 허용하는 사람들보다 말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전체 백성을 해치는 반면, 군주에 의한 처형은 개인만을 해치기 때문이다.
모든 군주 중에서도 새로운 군주는 잔인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새로운 국가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질은 디도의 입을 통해 그녀의 통치의 비인간성을 변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상황과 새로운 왕국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게 하고,
멀리 경계를 지키도록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고 행동하는 데 신중해야 하며, 스스로 두려움을 보여서는 안 되고, 신중함과 인간성을 가지고 절제된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과도한 자신감이 그를 부주의하게 만들거나 과도한 불신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로부터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사랑받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아니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나은가? 둘 다 바라는 것이 좋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한 사람 안에 이 둘을 통합하기 어렵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은망덕하고, 변덕스럽고, 거짓되고, 겁쟁이며, 탐욕스럽다. 당신이 성공하는 한 그들은 완전히 당신의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위험이 멀리 있을 때 당신에게 피와 재산, 생명, 자식을 바칠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다가오면 그들은 돌아선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에 의지하여 다른 대비를 소홀히 한 군주는 파멸한다. 왜냐하면 돈으로 얻은 우정은 비록 획득할 수는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위대함이나 고귀한 마음이 아니라 지불로 얻은 우정을 깨뜨리는 데 덜 망설이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두려워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데 더 큰 망설임이 있다. 사랑은 인간의 비열함 때문에 모든 기회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깨지는 의무의 연결로 유지되지만, 두려움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처벌에 대한 공포로 당신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는 사랑을 얻지 못하더라도 증오를 피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증오받지 않는 한 두려워하는 것을 매우 잘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시민과 신하의 재산과 여자를 멀리하는 한 항상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야 할 때는 적절한 정당화와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의 재산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재산의 상실을 더 빨리 잊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산을 빼앗을 구실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한 번 약탈로 살기 시작한 사람은 항상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을 구실을 찾을 것이다. 반면에 생명을 빼앗을 이유는 찾기가 더 어렵고 더 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군주가 군대와 함께 있고 수많은 병사들을 통제하고 있을 때는 잔인하다는 평판을 무시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코 군대를 단결시키거나 그 의무를 다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한니발의 놀라운 업적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해외에서 전쟁을 치렀음에도 군대 내부나 왕에 대한 불만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의 비인간적인 잔혹함 때문이었다. 그의 무한한 용기와 함께 이 잔혹함으로 인해 병사들은 그를 경외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 잔혹함 없이는 다른 덕목만으로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근시안적인 저술가들은 한편으로는 그의 업적을 칭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주요 원인을 비난한다. 그의 다른 덕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스키피오의 사례로 증명할 수 있다. 그는 당대뿐 아니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스페인에서 그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그의 지나친 관용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군율과 맞지 않는 자유를 병사들에게 허용했다. 이에 대해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에서 그를 꾸짖으며 로마 군대의 타락자라고 불렀다. 스키피오의 부관이 로크리인들을 약탈했지만, 그는 이를 응징하지 않았고 부관의 무례함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온화한 성격 때문이었다. 원로원의 한 의원은 그를 변호하며 말했다. “실수하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바로잡는 법을 아는 사람이 더 많다.” 만약 그가 계속 지휘권을 가졌다면, 이런 성향으로 인해 결국 스키피오의 명성과 영광이 실추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로원의 통제 아래 있었기에 이런 해로운 특성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영광에 기여했다.
두려움을 받느냐 사랑을 받느냐의 문제로 돌아가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사랑하지만 군주의 의지대로 두려워한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타인이 아닌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 그는 오직 증오를 피하는 데에만 주력해야 한다.
제18장
군주가 신의를 지키는 방법에 관하여
“이 장은 마키아벨리의 저작 중 어느 부분보다도 더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버드, “군주론”, 297쪽.
군주가 신의를 지키고 정직하게 살며 교활하지 않게 사는 것이 얼마나 칭찬할 만한 일인지는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험상 위대한 일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교활함으로 사람들의 지성을 속이는 법을 알았으며, 결국 자신의 말을 신뢰한 이들을 이겼다. 당신은 두 가지 싸움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법에 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의한 것이다. 첫 번째 방식은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고, 두 번째 방식은 짐승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방식만으로는 종종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두 번째 방식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주는 짐승과 인간을 모두 활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고대 작가들이 군주들에게 비유적으로 가르친 바이다. 그들은 아킬레스와 많은 고대의 군주들이 켄타우로스 케이론에게 맡겨져 그의 훈육을 받았다고 묘사한다. 이는 오직 군주가 반은 짐승이고 반은 인간인 스승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군주는 두 가지 본성을 모두 활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불가피하게 짐승의 본성을 채택해야 할 때, 여우와 사자를 선택해야 한다. 사자는 함정을 피할 수 없고, 여우는 늑대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정을 발견하려면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쫓아내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사자에만 의존하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 그리고 신의를 지키게 된 이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신의를 지킬 수 없고, 지켜서도 안 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선하다면 이 교훈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하고 당신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기에, 당신도 그들에게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 군주에게는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변명할 정당한 이유가 언제나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현대의 무수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군주들의 배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조약과 약속이 무효화되고 소용없게 되었는지 보여줄 수 있다. 여우를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 가장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잘 위장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위대한 위선자이자 기만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당면한 필요에 굴복하기 쉽기 때문에, 속이려는 자는 항상 속아 넘어갈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한 예를 침묵으로 넘길 수 없다. 알렉산데르 6세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외의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희생양을 찾았다. 주장할 때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더 큰 맹세로 무언가를 확언하고도 그것을 덜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기만은 항상 그의 바람대로 성공했다. 그는 인간의 이런 면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내가 열거한 모든 좋은 자질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것들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들을 가지고 항상 지키는 것은 해롭지만,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유용하다. 자비롭고, 신실하고, 인간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직해 보이는 것이 좋다. 그러면서도 필요하다면 그 반대로 행동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줄 아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당신은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군주, 특히 새로운 군주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 종종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신의, 우정, 인간성, 종교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필요에 따라
운명과 상황의 변화가 강요하는 대로 적절히 바꿀 준비가 된 마음을 가지되, 앞서 말했듯이 가능하다면 선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불가피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야 한다.
[4] “신의에 반하는” 또는 “신뢰”, “contro alla fede”, 그리고 다음 단락의 “tutto fede”, “전적으로 신실한”이라는 구절이다. 이 두 구절 “contro alla fede”와 “tutto fede”가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출판된 테스티나 판에서 생략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fede”라는 단어에 부여된 의미가 여기서 번역된 “신의”와 “신실함”이 아니라 “신앙”, 즉 가톨릭 신조였을 수 있다. “religione”이라는 단어는 테스티나 판의 본문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신념을 구분 없이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음을 주목하라. 위그노 이단을 지칭하는 데 불가피하게 사용된 “the religion”이라는 구절이 그 증거다. 사우스는 그의 설교 9번, 69페이지, 1843년 판에서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 무리의 위대한 후원자이자 지도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정치 계획에서 이것을 주요 원칙으로 제시했다. ‘종교의 외양은 정치인에게 도움이 되지만, 종교의 실체는 해롭고 위험하다.’”
이러한 이유로 군주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자질로 가득 차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그가 전적으로 자비롭고, 신실하며, 인간적이고, 정직하며, 종교적으로 보여야 한다. 이 마지막 자질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 더 많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을 볼 수 있지만, 당신과 접촉하는 사람은 소수다. 모든 사람이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는 알지만, 당신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소수의 사람들도 국가의 위엄을 방패삼아 다수의 의견에 맞서지 못한다. 모든 사람의 행동, 특히 군주의 행동에서는 도전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므로, 결과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국가를 정복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 수단은 항상 정직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은 항상 사물의 겉모습과 결과에 현혹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대중밖에 없다. 소수의 사람들은 다수가 의지할 곳이 없을 때만 자리를 잡는다.
현재의 한 군주[5]는 이름을 밝히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만, 평화와 신의 외에는 아무것도 설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둘 모두에 가장 적대적이며, 만약 그가 이를 지켰다면 여러 번 명성과 왕국을 잃었을 것이다.
[5] 아라곤의 페르난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당시에는 여기서 페르난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분명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버드의 “일 프린치페”, 308페이지.
제19장
경멸과 증오를 피하는 것에 대하여
이제 위에서 언급한 특성들에 관해서, 나는 더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머지는 이러한 일반론 아래에서 간략히 논의하고자 한다. 군주는 앞서 부분적으로 말한 바와 같이, 그를 증오하거나 경멸하게 만드는 것들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고려해야 한다. 그가 이에 성공할 때마다 그의 역할을 다한 것이며, 다른 비난들에 대해서는 어떤 위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그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은 탐욕스러운 것과 신민들의 재산과 여자를 침해하는 것이다. 이 둘 모두를 삼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재산이나 명예가 건드려지지 않는 한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러면 그는 소수의 야심가들과만 맞서면 되는데,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쉽게 제어할 수 있다.
변덕스럽고, 경박하며, 나약하고, 비겁하며, 우유부단한 것으로 여겨지면 그를 경멸하게 만든다. 군주는 이 모든 것을 바위를 피하듯 피해야 한다. 그는 행동에서 위대함, 용기, 중후함, 강인함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민들과의 사적인 거래에서는 그의 판단이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며, 누구도 그를 속이거나 그를 둘러싸고 농간을 부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못하도록 그러한 평판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인상을 주는 군주는 높이 평가받으며, 높이 평가받는 사람은 쉽게 음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며 백성들에게 존경받는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면, 그를 공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군주는 두 가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하나는 내부로부터의 두려움으로 신민들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로부터의 두려움으로 외국 세력 때문이다. 후자로부터는 잘 무장하고 좋은 동맹을 가짐으로써 방어할 수 있다. 그가 잘 무장하면 좋은 친구들을 가질 것이고, 외부가 평온하다면 내부도 항상 평온할 것이다. 음모에 의해 이미 교란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외부 상황이 교란되더라도, 그가 준비를 잘하고 내가 말한 대로 살았다면, 절망하지 않는 한 모든 공격을 견뎌낼 것이다. 내가 말했듯이 스파르타의 나비스가 그랬다.
그러나 외부 상황이 교란될 때 신민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은밀히 음모를 꾸미는 것만을 두려워하면 된다. 군주는 증오와 경멸을 피하고 백성들을 만족시킴으로써 이로부터 쉽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이는 위에서 길게 말했듯이 그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장 필요한 일이다. 음모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 중 하나는 백성들에게 미움과 경멸을 받지 않는 것이다. 군주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항상 그를 제거함으로써 백성들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음모자가 백성들을 화나게 할 것이라고만 예상할 수 있다면, 그는 그런 행동을 할 용기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음모자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보여주듯이 많은 음모가 있었지만 성공한 것은 거의 없다.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혼자 행동할 수 없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 중에서만 동료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불만을 품은 사람에게 마음을 열자마자 당신은 그에게 만족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한 것이다. 당신을 고발함으로써 그는 모든 이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이득이 확실하고 다른 쪽에서는 의심스럽고 위험이 가득하다면, 그는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니고서는
군주와 신뢰를 유지할 친구나 철저히 적대적인 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음모자의 입장에서는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이 두려움, 질투, 처벌의 위협뿐이다. 반면 군주의 입장에서는 군주권의 위엄, 법, 친구들의 보호, 그리고 국가가 그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대중의 호의까지 있다면, 누군가가 음모를 꾸밀 만큼 무모할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음모자는 계획 실행 전에 두려워해야 하지만, 이 경우에는 범죄 이후에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 일로 인해 백성들이 적이 되어 탈출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 끝없는 예시를 들 수 있겠지만, 우리 아버지 세대의 기억에 있는 한 가지 예만 들겠다. 볼로냐의 군주였던 메세르 안니발레 벤티볼리오(현 안니발레의 할아버지)는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민 칸네스키 가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살해 직후 사람들이 일어나 모든 칸네스키 가족을 살해했다. 이는 당시 볼로냐에서 벤티볼리 가문이 누리던 대중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그 호의는 매우 커서 안니발레의 사후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볼로냐 사람들은 피렌체에 벤티볼리 가문의 일원이 한 명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를 데려와 도시의 통치를 맡겼다. 그는 메세르 조반니가 정상적으로 통치 연령에 이를 때까지 도시를 다스렸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군주가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면 음모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성들이 적대적이고 증오한다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잘 정돈된 국가와 현명한 군주들은 귀족들을 절망에 빠뜨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고, 백성들을 만족시키고 기쁘게 하려 노력했다. 이는 군주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잘 정돈되고 통치된 왕국 중 하나는 프랑스다. 그곳에는 왕의 자유와 안전에 기여하는 많은 좋은 제도가 있다. 그중 첫 번째는 의회와 그 권위다. 왜냐하면 이 왕국을 세운 사람은 귀족의 야심과 대담함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릴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귀족에 대한 백성들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증오를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왕의 특별한 관심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귀족들에게 백성을 편애한다는 비난과 백성들에게 귀족을 편애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중재자를 세웠다. 이 중재자는 왕에 대한 비난 없이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돕는 역할을 했다. 이보다 더 나은 혹은 더 현명한 제도나 왕과 왕국의 안전을 위한 더 큰 원천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군주는 비난받을 만한 일은 다른 이들의 관리에 맡기고, 은혜를 베푸는 일은 자신의 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군주가 귀족들을 아껴야 하지만,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을 정도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로마 황제들의 삶과 죽음
로마 황제들의 삶과 죽음을 살펴본 사람들에게는 많은 황제들이 내 의견과 반대되는 예시로 보일 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고귀하게 살며 위대한 정신적 자질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잃거나 그들에 대해 음모를 꾸민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론에 답하고자 나는 몇몇 황제들의 성격을 되짚어보고, 그들의 몰락 원인이 내가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겠다. 동시에 나는 그 시대의 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할 만한 것들만 제시하겠다.
철학자 마르쿠스부터 막시미누스까지 제국을 계승한 모든 황제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들은 마르쿠스와 그의 아들 코모두스, 페르티낙스, 율리아누스, 세베루스와 그의 아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마크리누스, 헬리오가발루스, 알렉산더, 그리고 막시미누스였다.
먼저 주목할 점은 다른 군주국에서는 귀족의 야심과 백성의 무례함만 상대하면 되지만, 로마 황제들은 군인들의 잔인함과 탐욕이라는 세 번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여서 많은 이들의 파멸을 초래했다. 군인들과 백성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그래서 겸손한 군주를 좋아했다. 반면 군인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대담하고 잔인하며 탐욕스러운 군주를 원했다. 그들은 군주가 이러한 성격을 백성들에게 발휘하기를 바랐는데, 이는 자신들이 이중의 봉급을 받고 자신들의 탐욕과 잔인함을 발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해 태생이나 교육으로 큰 권위를 갖지 못한 황제들은 항상 전복되었다. 그들 대부분, 특히 새로 황제가 된 이들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성향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군인들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기울었으며,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군주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선 모든 이에게 미움받는 것을 피해야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가장 강력한 집단의 미움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따라서 경험 부족으로 특별한 호의가 필요했던 황제들은 백성들보다는 군인들에게 더 쉽게 충성했다. 이는 그들이 군인들에 대한 권위를 유지할 줄 아는지 여부에 따라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르쿠스, 페르티낙스, 알렉산더는 모두 검소한 삶을 살았고, 정의를 사랑했으며, 잔인함의 적이었고, 인간적이며 자비로웠음에도 마르쿠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마르쿠스만이 영예롭게 살다가 죽었는데, 이는 그가 세습으로 제위를 계승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군인들이나 백성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 그 후 그는 많은 덕목을 갖추어 존경받았고, 살아있는 동안 두 계층을 모두 제자리에 두었으며, 미움을 받거나 경멸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티낙스는 군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황제가 되었다. 군인들은 코모두스 치하에서 방종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페르티낙스가 그들에게 요구한 정직한 삶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증오를 받게 되었고, 여기에 그의 노령에 대한 경멸까지 더해져 통치 초기에 전복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증오는 선행으로도 악행으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말했듯이,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지키고자 할 때 종종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다. 백성이든 군인이든 귀족이든,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이 부패했을 때, 그들의 변덕에 따르고 그들을 만족시켜야 하며, 그때는 선행이 해가 될 수 있다.
이제 알렉산더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어서 그에 관한 다른 칭찬들 중에서도 14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명령으로 아무도 재판 없이 처형되지 않았다는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약하고 어머니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여겨져 경멸을 받았고, 군대가 그에 대해 음모를 꾸며 그를 살해했다.
이제 코모두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막시미누스와 같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들을 살펴보자. 그들은 모두 잔인하고 탐욕스러웠다. 그들은 군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백성들에게 온갖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세베루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세베루스는 매우 큰 용기가 있어서 군인들의 우정을 유지하면서도 백성들을 억압했음에도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그의 용기는 군인들과 백성들의 눈에 매우 존경스러웠다. 백성들은 놀라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혔고 군인들은 존경심과 만족감을 느꼈다. 이 사람의 행동이 새로운 군주로서 위대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어떻게 여우와 사자의 본성을 잘 모방했는지를 간단히 보여주고 싶다. 앞서 말했듯이 군주는 이러한 본성들을 모방할 필요가 있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나태함을 알고 있던 그는 자신이 대장으로 있던 슬라보니아의 군대를 설득하여 로마로 가서 프라이토리안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페르티낙스의 죽음을 복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 구실로, 황위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군대를 로마로 진군시켰고, 그가 출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전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로마에 도착하자 원로원은 두려움에 빠져 그를 황제로 선출하고 율리아누스를 살해했다. 이후 세베루스에게는 제국 전체를 장악하고자 할 때 두 가지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아시아에 있었는데, 거기서 아시아 군대의 수장인 니게르가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했다. 다른 하나는 서방에 있었는데, 거기에는 알비누스가 있었고 그 역시 황위를 열망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긴 그는 니게르를 공격하고 알비누스를 속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알비누스에게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출되었으니 그 지위를 그와 나누고 싶다고 편지를 썼고, 그에게 카이사르의 칭호를 보냈다. 더욱이 원로원이 알비누스를 그의 동료로 삼았다고 했다. 알비누스는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니게르를 정복하고 죽이고 동방의 문제들을 해결한 후, 로마로 돌아와 원로원에 알비누스가 그가 베푼 은혜를 거의 인정하지 않고 배신으로 그를 살해하려 했다고 불평했다. 이런 배은망덕함 때문에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그 후 그는 프랑스에서 알비누스를 찾아가 그의 통치권과 생명을 빼앗았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가 매우 용감한 사자이자 매우 교활한 여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받았고 군대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다. 그가 새로운 인물임에도 제국을 그토록 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의 최고의 명성이 그를 항상 보호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의 폭력 때문에 그에 대해 품을 수 있었던 증오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안토니누스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고, 백성들의 눈에 존경받고 군인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매우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쟁에 능했고, 모든 피로를 잘 견뎌냈으며, 모든 섬세한 음식과 다른 사치품들을 경멸했는데, 이것이 그를 군대에 사랑받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잔인함과 포악함은 너무나 크고 전례 없는 것이어서, 수많은 개인 살인 후에 로마 시민들의 대다수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는 온 세상에 미움을 받게 되었고,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결국 한 백인대장에 의해 군대 한가운데서 살해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죽음, 즉 결연하고 절망적인 용기로 의도적으로 가해지는 죽음은 군주들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죽음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는 그런 죽음을 덜 두려워할 수 있다. 그런 죽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국가를 위해 고용하거나 주변에 두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상해를 가하지 않도록 주의하면 된다. 안토니누스는 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그 백인대장의 형제를 모욕적으로 살해했고, 또한 그를 매일 위협했지만 여전히 그의 근위대에 두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모한 일이었고, 황제의 파멸로 이어졌다.
이제 코모두스로 넘어가보자. 그는 마르쿠스의 아들로서 제국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쉬웠어야 했다. 그는 단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기만 하면 백성과 군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잔인하고 야만적이어서 군인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을 타락시키는 데 전념했다. 이는 백성들을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지 않고 종종 극장에 내려가 검투사들과 겨루는 등 제국의 위엄에 어울리지 않는 천한 일들을 했다. 그 결과 그는 군인들에게 경멸을 받게 되었고, 한 쪽에서는 미움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경멸을 받아 결국 음모의 대상이 되어 살해되었다.
이제 막시미누스의 성격에 대해 논의해보자. 그는 매우 호전적인 사람이었고, 군대는 알렉산더의 나약함에 염증을 느껴
내가 앞서 언급한 사람들이 그를 살해하고 막시미누스를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오래 통치하지 못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는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그가 트라키아 출신의 양치기였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큰 수치로 여겨졌다. 둘째, 그는 즉위 후 로마로 가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미뤘다. 또한 그는 로마와 제국 전역에서 자신의 대리인들을 통해 많은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극도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고, 이로 인해 전 세계가 그의 비천한 출신에 분노하고 그의 야만성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먼저 아프리카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로마의 원로원과 모든 시민들, 그리고 이탈리아 전역이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그의 군대까지 가세했다. 아퀼레이아를 포위하고 점령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군대는 그의 잔혹함에 염증을 느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항하는 것을 보고 그를 덜 두려워하게 되었고, 결국 그를 살해했다.
나는 헬리오가발루스, 마크리누스, 율리아누스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완전히 경멸할 만한 인물들이어서 신속히 제거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논의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군주들은 군인들에게 과도한 만족을 주는 어려움을 훨씬 덜 겪고 있다.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만, 그것은 곧 끝난다. 이 군주들 중 누구도 로마 제국의 군대처럼 지방의 통치와 행정에 노련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때는 군인들보다 백성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필요했지만, 지금은 터키인과 술탄을 제외한 모든 군주들에게 군인들보다 백성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위의 내용에서 나는 터키인을 제외했는데, 그는 항상 주변에 12,000명의 보병과 15,000명의 기병을 두고 있어 왕국의 안전과 힘이 이들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에 대한 모든 고려를 제쳐두고 이들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술탄의 왕국도 비슷하다. 완전히 군인들의 손아귀에 있어 다시 한 번 백성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술탄의 국가는 다른 모든 군주국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기독교 교황청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세습 군주국이나 새로 형성된 군주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옛 군주의 자녀들이 상속자가 아니라, 권위를 가진 자들에 의해 그 자리에 선출된 사람이 군주가 되고 자녀들은 단순한 귀족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래된 관습이기 때문에 새로운 군주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 새로운 군주국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이 여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군주는 새롭지만 국가의 구조는 오래되었고, 그를 세습 군주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논의 주제로 돌아가서, 나는 이를 고려해 볼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에서 언급한 황제들에게 증오나 경멸이 치명적이었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 중 일부는 한 가지 방식으로, 다른 일부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지만, 각 방식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페르티낙스와 알렉산더는 새로운 군주였기 때문에 군주국을 물려받은 마르쿠스를 모방하는 것은 무용하고 위험했다. 마찬가지로 카라칼라, 콤모두스, 막시미누스가 세베루스를 모방하는 것은 완전히 파괴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만한 충분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군주국의 군주는 마르쿠스의 행동을 모방할 수 없고, 다시 말해 세베루스의 행동을 따를 필요도 없지만, 그는 세베루스로부터 자신의 국가를 세우는 데 필요한 부분을, 그리고 마르쿠스로부터 이미 안정되고 굳건한 국가를 유지하는 데 적절하고 영광스러운 부분을 취해야 한다.
제20장
요새와 군주들이 종종 의지하는 많은 다른 것들은 이롭거나 해로운가?
- 일부 군주들은 국가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무장을 해제했다. 다른 이들은 피지배 도시들을 파벌로 분열시켰다. 또 다른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했다. 어떤 이들은 통치 초기에 불신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다. 일부는 요새를 건설했고, 어떤 이들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파괴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려면 결정을 내려야 할 국가의 세부 사항을 알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말하겠다.
- 새로운 군주가 백성의 무장을 해제한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무장 해제된 것을 발견했을 때 항상 그들을 무장시켰다. 왜냐하면 무장시킴으로써 그 무기들이 당신의 것이 되고, 불신받던 자들이 충실해지며, 충실했던 자들은 그대로 유지되고, 백성들은 당신의 지지자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백성을 무장시킬 수는 없지만, 무장시킨 자들에게 혜택을 줄 때 다른 이들을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이러한 차별적 대우를 그들이 이해하게 되면, 전자는 당신에게 의존하게 되고 후자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맡은 자들이 가장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당신을 용서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들의 무장을 해제할 때, 당신은 그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즉시 그들을 화나게 하는데, 이는 비겁함이나 충성심 부족 때문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것이든 당신에 대한 증오를 낳는다. 그리고 당신이 무장 해제된 상태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용병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들의 성격은 이미 보여주었다. 설사 그들이 훌륭하다 해도 강력한 적과 불신하는 백성들로부터 당신을 방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했듯이, 새로운 군주국의 새로운 군주는 항상 무기를 분배했다. 역사는 그러한 예로 가득하다. 그러나 군주가 새로운 국가를 획득하여 그것을 자신의 옛 국가에 속주로 추가할 때는 그 국가의 사람들을 무장 해제해야 한다. 단, 그 국가를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은 예외다. 그리고 이들도 시간과 기회가 지나면 나약하고 여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모든 무장한 사람들이 당신의 옛 국가에서 당신 근처에 살던 당신 자신의 군인들이 되도록 일을 관리해야 한다.
- 우리 선조들과 현명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은 피스토이아는 파벌로, 피사는 요새로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그들은 그들의 피지배 도시들 중 일부에서 분쟁을 조장했다. 속국들을 더 쉽게 소유하기 위해 그곳에 파벌을 조성했다. 이는 이탈리아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던 당시에는 괜찮았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파벌이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이 분열된 도시를 공격하면 빠르게 패배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약한 쪽 파벌이 항상 외부 세력을 도울 것이고 다른 쪽은 저항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이러한 이유로 속국 도시들에 궬프와 기벨린 파벌을 조장했다고 본다. 그들은 결코 유혈사태를 허용하지 않았지만, 시민들이 분열로 인해 단결하지 못하도록 이러한 분쟁을 키웠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이는 나중에 예상과 다르게 되었다. 바일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 파벌이 즉시 용기를 내어 국가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들은 군주의 약점을 드러낸다. 강력한 군주국에서는 이런 파벌이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법들은 신하들을 더 쉽게 다스리기 위해 평화 시에만 유용하지만, 전쟁이 오면 이 정책의 허점이 드러난다.
- 의심할 여지없이 군주들은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장애물을 극복할 때 위대해진다. 따라서 운명은 특히 새로운 군주를 위대하게 만들고자 할 때, 세습 군주보다 명성을 얻을 필요성이 더 큰 그에게 적들을 일으켜 그를 대적하게 한다. 이는 그가 그들을 극복할 기회를 갖고, 그들을 통해 더 높이 오르게 하기 위함이다. 마치 적들이 세운 사다리를 통해 오르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많은 이들은 현명한 군주라면 기회가 있을 때 교묘하게 자신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제압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질 수 있도록 말이다.
- 군주들, 특히 새로운 군주들은 통치 초기에 불신했던 사람들에게서 통치 초기에 신뢰했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충성심과 도움을 받았다. 시에나의 군주 판돌포 페트루치는 다른 이들보다 처음에 불신했던 사람들을 통해 더 잘 통치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말할 수 없다. 개인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것만 말하겠다. 군주국 초기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탱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들은 항상 가장 쉽게 얻을 수 있고 충성스럽게 군주를 섬길 것이다. 그들은 군주가 자신들에 대해 가졌던 나쁜 인상을 행동으로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항상 그들로부터 너무 안전하게 섬기다가 그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 이 문제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나는 비밀스러운 호의로 새로운 국가를 획득한 군주에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의 동기를 잘 고려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정이 아니라 단지 이전 정부에 대한 불만족이라면, 그는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그들을 친구로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와 현대의 사례들에서 이에 대한 이유를 잘 살펴보면, 우리는 이전 정부 하에서 만족했던 사람들, 즉 그의 적이었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불만을 품고 그를 지지하며 권력을 잡도록 격려했던 사람들보다 군주에게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군주들이 자신의 국가를 더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는 것은 관례였다. 이는 그들을 공격하려는 자들에게 굴레와 재갈 역할을 하고, 첫 공격에서 피난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 시스템을 칭찬한다. 과거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메세르 니콜로 비텔리가 치타 디 카스텔로에서 그 주를 지키기 위해 두 개의 요새를 파괴한 것을 보았다. 우르비노 공작 귀도 우발도는 체사레 보르자에 의해 쫓겨났다가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을 때, 그 지방의 모든 요새를 기초부터 파괴했고 그것들이 없으면 영지를 잃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볼로냐로 돌아온 벤티볼리 가문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요새는 상황에 따라 유용하거나 그렇지 않다. 한 방면으로 도움이 된다면 다른 방면으로는 해를 끼친다. 이 문제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백성보다 외국인을 더 두려워하는 군주는 요새를 지어야 하지만, 외국인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하는 군주는 요새를 그대로 두어야 한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지은 밀라노 성은 스포르차 가문에 다른 어떤 국가의 문제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가장 좋은 요새는 백성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이다. 요새를 가지고 있더라도 백성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것들이 당신을 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 대항해 무기를 든 백성을 돕는 외국인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요새들이 포를리 백작 부인을 제외하고는 어떤 군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남편인 지롤라모 백작이 살해되었을 때, 그녀는 그 수단으로 민중의 공격을 견디고 밀라노의 지원을 기다려 자신의 국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상황은 외국인이 백성을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체사레 보르자가 그녀를 공격했을 때, 그리고 적대적인 백성이 외국인과 동맹을 맺었을 때 요새는 그녀에게 거의 가치가 없었다. 따라서 그때나 그 이전이나 백성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이 요새를 가지는 것보다 그녀에게 더 안전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나는 요새를 짓는 사람과 짓지 않는 사람 모두를 칭찬할 것이다. 그리고 요새를 신뢰하여 백성에게 미움받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비난할 것이다.
[1] 캐서린 스포르차, 갈레아초 스포르차와 루크레치아 란드리아니의 딸로 1463년에 태어나 1509년에 사망했다. 마키아벨리가 1499년에 사절로 보내진 것은 바로 이 포를리 백작 부인에게였다. 포르투나티가 백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임명을 알린다. “저는 그들이 누구를 보내고 언제 보낼지 알아보기 위해 시뇨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포르투나티는 편지를 썼다. “그들은 저에게 니콜로 마키아벨리, 학식 있는 젊은 피렌체 귀족이자 비서관을 보낸다고 말했습니다.”
“열 명의 군주에게 즉시 떠나라.”라고 말했다. 참조: “캐서린 스포르차”, 파솔리니 백작 저, P. 실베스터 역, 1898.
제21장
군주가 명성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군주를 가장 존경받게 만드는 것은 위대한 사업과 훌륭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현 스페인 국왕이 있다. 그는 거의 새로운 군주라 할 수 있다. 그는 명성과 영광으로 보잘것없는 왕에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업적을 살펴보면 모두 위대하고 일부는 비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통치 초기에 그는 그라나다를 공격했고, 이 사업이 그의 영토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용히, 방해받을 염려 없이 이를 수행했다. 그는 카스티야의 귀족들의 마음을 전쟁에 집중시켜 어떤 혁신도 예상하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런 수단으로 그가 그들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얻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교회와 국민의 돈으로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긴 전쟁으로 이후 그를 돋보이게 한 군사적 기술의 기초를 다졌다. 더욱이 항상 종교를 구실로 삼아 더 큰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경건한 잔인함으로 모어인들을 추방하고 그의 왕국을 정화하는 데 전념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희귀한 예는 없을 것이다. 같은 구실로 그는 아프리카를 공격했고, 이탈리아로 내려갔으며, 마침내 프랑스를 공격했다. 이렇게 그의 업적과 계획은 항상 위대했고,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하고 그 결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의 행동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그에 대항해 꾸준히 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또한, 밀라노의 메세르 베르나보에 대해 전해지는 것과 같이, 민간인이 어떤 비범한 일을 했을 때 그를 보상하거나 처벌하는 특별한 방법을 취하는 것도 군주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군주는 무엇보다도 모든 행동에서 위대하고 탁월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군주는 또한 진정한 친구이거나 확실한 적일 때 존경받는다. 즉, 어떤 유보 없이 한 편을 들어 다른 편에 대항하여 선언할 때 그렇다. 이 방침은 항상 중립을 지키는 것보다 유리할 것이다. 강력한 이웃 두 나라가 싸우게 되면, 그들은 한 나라가 승리할 경우 당신이 그를 두려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당신이 선언하고 열심히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항상 더 유리할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 당신이 선언하지 않으면 항상 승자의 먹이가 될 것이고, 패자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그렇게 될 것이며, 당신은 제시할 이유도, 보호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할 것도 없을 것이다. 승자는 시련의 시기에 도움을 주지 않을 의심스러운 친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패자는 당신이 기꺼이 칼을 들고 그의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안티오쿠스는 로마인들을 쫓아내기 위해 아이톨리아인들의 요청으로 그리스에 들어갔다. 그는 로마인들의 친구인 아카이아인들에게 사신을 보내 중립을 지키도록 권고했고, 다른 한편으로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무기를 들 것을 촉구했다. 이 문제는 아카이아인들의 의회에서 논의되었고, 거기서 안티오쿠스의 사절은 그들에게 중립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로마 사절은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의 국가가 우리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낫고 유리하다는 주장에 대해, 이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여러분은 호의나 고려 없이 승자의 전리품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따라서 항상 당신의 친구가 아닌 사람은 당신의 중립을 요구할 것이고, 당신의 친구인 사람은 당신에게 무기를 들고 선언할 것을 간청할 것이다. 우유부단한 군주들은 현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중립의 길을 따르고, 대개 파멸한다. 그러나 군주가 한 편을 들어 용감하게 선언할 때, 만약 그가 동맹을 맺은 편이 승리한다면, 비록 승자가 강력하고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승자에게 빚을 지고 있고 우정의 유대가 형성된다. 사람들은 결코 당신을 억압함으로써 배은망덕의 기념비가 될 만큼 뻔뻔하지 않다. 결국 승리는 결코 승자가 특히 정의에 대해 어느 정도 고려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동맹을 맺은 편이 패배한다면, 당신은 그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당신을 도울 수 있으며, 당신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운명의 동반자가 된다.
두 번째 경우, 싸우는 사람들의 성격이 누가 승리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때,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 사람의 도움으로 다른 사람의 파멸을 돕게 되는데, 그가 현명했다면 그를 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하면, 당신의 도움으로 승리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는 당신의 재량에 달려 있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군주는 다른 사람을 공격할 목적으로 자신보다 더 강력한 사람과 동맹을 맺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필요에 의해 강요되지 않는 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승리하면 당신은 그의 재량에 달려 있게 되고, 군주들은 가능한 한 누군가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밀라노 공작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으로 인해 그들의 파멸이 초래되었지만, 이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황과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 롬바르디아를 공격했을 때 피렌체인들에게 일어났듯이, 피할 수 없을 때는 위의 이유로 군주는 한 편을 들어야 한다.
어떤 정부도 완전히 안전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매우 의심스러운 길을 택해야 한다고 예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일에서 한 가지 문제를 피하려다 다른 문제에 빠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중함은 문제의 성격을 구별하고 덜 해로운 악을 선택하는 데 있다.
군주는 또한 능력의 후원자로 자신을 보여주고 모든 예술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 동시에 그는 시민들이 평화롭게 그들의 직업을 수행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상업과
농업과 다른 모든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재산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에 소유물을 개선하는 것을 꺼리거나 세금을 두려워해 상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군주는 이러한 일들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도시나 국가를 영예롭게 하려는 사람에게 포상을 해야 한다.
또한 군주는 1년 중 적절한 시기에 축제와 볼거리로 백성들을 즐겁게 해야 한다. 모든 도시가 길드나 조합으로 나뉘어 있으므로, 그는 이러한 단체들을 존중하고 때때로 그들과 교류하며 예의와 관대함의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지위의 위엄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된다.
[1] “길드나 조합”, “in arti o in tribu.” “Arti”는 수공업이나 상업 길드를 의미한다. 플로리오의 설명을 참조: “Arte… 도시나 법인 마을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전체 집단.” 플로렌스의 길드에 대해서는 에지컴 스탈리의 저서(Methuen, 1906)에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다. 비슷한 성격의 기관인 “아르텔”이 오늘날 러시아에 존재한다. 맥켄지 월리스의 “러시아”(1905년판) 참조: “아들들은… 작업 기간 동안 항상 아르텔의 구성원이었다. 일부 대도시에는 훨씬 더 복잡한 형태의 아르텔이 있다. 이는 상당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으며 개별 구성원의 행위에 대해 금전적 책임을 지는 영구적인 조직이다.” “아르텔”이라는 단어는 외견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에일머 모드가 확신하듯이 “ars”나 “arte”와는 관련이 없다. 그 어원은 “맹세로 자신을 묶다”를 의미하는 동사 “rotisya”의 어근이며, 현재 “연대”를 의미하는 “rota”의 다른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두 단어 모두 맹세로 결속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기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Tribu”는 아마도 공통의 혈통으로 결합된 씨족 집단을 의미하며, 결혼으로 연결된 개인들도 포함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말로는 “종파” 또는 “씨족”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제22장
군주의 비서관에 관하여
신하의 선택은 군주에게 매우 중요하며, 그들의 능력 여부는 군주의 분별력에 달려 있다. 군주와 그의 지성에 대한 첫인상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들이 유능하고 충실하다면 군주는 항상 현명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유능한 사람을 알아보고 그들을 충실하게 유지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군주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없다. 그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는 그들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에나의 군주 판돌포 페트루치의 신하인 안토니오 다 베나프로를 아는 사람 중 누구도 베나프로를 신하로 둔 판돌포를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지성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스스로 이해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이해한 것을 평가하는 능력이며, 세 번째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설명으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가장 뛰어나고, 두 번째가 좋으며, 세 번째는 쓸모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판돌포가 첫 번째 부류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두 번째 부류였을 것이다. 누군가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말하고 행동할 때 분별할 수 있다면, 비록 스스로 발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신하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아볼 수 있고, 하나는 칭찬하고 다른 하나는 바로잡을 수 있다. 그래서 신하는 그를 속이려는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정직하게 유지된다.
그러나 군주가 신하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는 데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신하가 자신의 이익을 당신의 이익보다 더 생각하고 모든 일에서 내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볼 때, 그런 사람은 결코 좋은 신하가 될 수 없을 것이며, 당신은 결코 그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국가를 맡은 사람은 결코 자신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항상 그의 군주만을 생각해야 하고, 군주와 관련 없는 일에는 절대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한편 신하를 정직하게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그를 연구해야 하며, 그를 존중하고, 부유하게 만들고, 은혜를 베풀고, 명예와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동시에 그가 혼자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많은 명예가 더 많은 것을 바라게 하거나, 많은 재물이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거나, 많은 책임이 변화를 두려워하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신하와 군주가 서로에 대해 이렇게 처신한다면 서로를 신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과는 항상 어느 한쪽이나 양쪽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제23장
아첨꾼을 피하는 방법
나는 이 주제의 중요한 부분을 빼놓고 싶지 않다. 이는 군주들이 매우 주의하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피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그것은 아첨꾼에 관한 것으로, 궁정은 이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너무나 자만하고 어떤 면에서 그것들에 대해 속고 있어서 이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어렵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면 경멸받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당신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하는 것 외에는 아첨꾼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되면, 당신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든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제3의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서 현명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에게만 진실을 말할 자유를 주되, 그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그리고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에 대해 그들에게 질문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그 후에 자신의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 조언자들과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는 자신을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 즉, 각자가 더 자유롭게 말할수록 더 선호받을 것임을 알게 해야 한다. 이들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결정된 일을 추진하며, 결심한 바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첨꾼들에 의해 전복되거나, 다양한 의견들로 인해 너무 자주 변화하여 경멸을 받게 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현대의 예를 들고 싶다. 현 황제 막시밀리안의 참모인 프라 루카는 그의 폐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지만, 그 어떤 일에서도 자신의 방식대로 하지 못한다. 이는 앞서 말한 것과는 반대되는 방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황제는 비밀스러운 사람이어서 자신의 계획을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알리지 않고, 그에 대한 의견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그것이 드러나고 알려지게 되어, 즉시 그의 주변 사람들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그는 유연한 성격이라 계획에서 벗어나게 된다. 따라서 그가 하루에 한 일을 다음날 되돌리게 되고, 아무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누구도 그의 결정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1] 막시밀리안 1세는 1459년에 태어나 1519년에 사망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처음에 샤를 르 테메레르의 딸인 마리와 결혼했고, 그녀의 사망 후 비앙카 스포르차와 결혼하여 이탈리아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군주는 항상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오직 그가 원할 때만 해야 하며 다른 이들이 원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요청하지 않은 조언을 제공하려는 모든 이를 단호히 말려야 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며, 그가 물어본 것들에 대해 인내심 있게 경청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의 분노를 느끼게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이들이 군주가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훌륭한 조언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속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공리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현명하지 않은 군주는 결코 좋은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그가 매우 신중한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자신의 일을 맡긴 경우는 예외이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그가 잘 통치될 수 있겠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통치자는 곧 그의 국가를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지 않은 군주가 한 명 이상의 조언자로부터 조언을 구한다면, 그는 결코 통일된 조언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통합해야 할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조언자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할 것이고, 군주는 그들을 통제하거나 그들의 속내를 꿰뚫어 볼 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달리 찾아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강제에 의해 정직하게 유지되지 않는 한 항상 당신에게 거짓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조언은 어디에서 오든 군주의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군주의 지혜가 좋은 조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제24장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왜 그들의 국가를 잃었는가
앞서 제시한 제안들을 주의 깊게 지킨다면, 새로운 군주가 잘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고, 그를 즉시 더 안전하고 확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그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군주의 행동은 세습 군주의 행동보다 더 자세히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이 능력 있다고 여겨질 때,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 고대의 혈통보다 훨씬 더 강하게 묶는다. 사람들은 과거보다 현재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가 좋다고 느낄 때 그것을 즐기고 더 이상을 찾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군주가 다른 면에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면 그를 최대한 옹호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군주국을 세우고, 그것을 좋은 법, 좋은 군대, 좋은 동맹, 그리고 좋은 모범으로 장식하고 강화한다면 그에게 이중의 영광이 될 것이다. 반면에 군주로 태어났으면서 지혜의 부족으로 국가를 잃는다면 그에게 이중의 수치가 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국가를 잃은 군주들, 예를 들어 나폴리 왕, 밀라노 공작 등을 살펴보면, 첫째로 앞서 길게 논의된 원인들로 인해 군대와 관련된 공통적인 결함이 있었다. 다음으로, 그들 중 일부는 백성들의 적대감을 샀거나,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귀족들을 안심시키지 못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함이 없다면 야전군을 유지할 만한 충분한 힘을 가진 국가는 잃을 수 없다.
마케도니아의 필립(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아니라 티투스 퀸티우스에게 정복당한 필립)은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의 위대함에 비해 영토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전쟁을 좋아하고 백성들을 끌어들이고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을 알았기에 여러 해 동안 적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일부 도시의 지배권을 잃긴 했지만 그래도 왕국은 지켜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군주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소유했던 그들의 군주국을 잃은 것에 대해 운을 탓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나태함을 탓하게 하라. 평화로운 시기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평온한 때에 폭풍에 대비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흔한 결점이다). 나중에 악시가 닥쳤을 때 그들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들이 정복자들의 오만함에 싫증 나 자신들을 다시 부를 것이라고 희망했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는 좋을 수 있지만, 그것에 의존하여 다른 모든 대책을 소홀히 한 것은 매우 나쁜 일이다. 당신은 결코 넘어지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누군가가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난다 해도 당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원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의 용기에 의존하는 것만이 신뢰할 수 있고, 확실하며, 지속 가능하다.
제25장
인간사에 운명이 미치는 영향과 그에 맞서는 방법
세상사가 운명과 신에 의해 지배되어 인간이 지혜로 그것을 지도할 수 없고 심지어 도울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도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고 운에 맡겨야 한다고 우리에게 믿게 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우리 시대에 더욱 신뢰를 얻고 있다. 매일 모든 인간의 추측을 넘어서는 큰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이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어느 정도 그들의 의견에 기울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없애지 않기 위해, 나는 운명이 우리 행동의 절반의 중재자이지만, 나머지 절반이나 그보다 조금 덜한 정도는 우리가 지배할 수 있게 한다고 믿는다.
[1]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운명의 왕이 이 비참한 우주의 사업의 4분의 3을 처리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소렐의 “동방 문제”
나는 운명을 범람하는 강물에 비유한다. 홍수가 나면 평원을 범람하여 나무와 건물들을 쓸어가고, 이곳저곳의 토양을 쓸어간다. 모든 것이 그 앞에서 도망치고, 모든 것이 그 힘에 굴복한다.
그러나 그 성질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방어와 장벽을 마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물이 다시 불어나더라도 수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게 하고, 그 힘이 너무 억제되지 않거나 위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운명도 마찬가지다. 운명은 용기가 그에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그 힘을 보여주고, 장벽과 방어가 그를 제어하기 위해 세워지지 않은 곳으로 그 힘을 돌린다.
이탈리아를 살펴보면, 그곳이 이러한 변화의 중심지이며 그 변화에 추진력을 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가 장벽도 없고 방어도 없는 개방된 나라임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독일, 스페인, 프랑스처럼 적절한 용기로 방어되었다면, 이 침략은 지금과 같은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으로 운명에 대한 저항에 관해 일반적으로 할 말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늘 행복해 보이던 군주가 내일 몰락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그의 성향이나 성격의 변화 없이 일어난다. 이는 첫째로 이미 길게 논의된 원인들, 즉 운명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군주는 운명이 바뀌면 몰락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또한 시대의 정신에 따라 행동을 이끄는 자는 성공할 것이며, 행동이 시대와 맞지 않는 자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목표로 하는 영광과 부를 향한 일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곳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은 신중하게, 다른 사람은 서둘러서, 한 사람은 힘으로, 다른 사람은 기술로, 한 사람은 인내로, 다른 사람은 그 반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각자 다른 방법으로 목표에 도달한다. 두 신중한 사람 중 한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고 다른 사람은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행동 방식을 가진 두 사람이 똑같이 성공하는데, 한 사람은 신중하고 다른 사람은 성급하다.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방법이 시대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여부에서 비롯된다. 이는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다르게 일하는 두 사람이 같은 효과를 내고, 비슷하게 일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또한 국가의 변화가 일어난다. 신중과 인내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시대와 일이 그의 통치 방식에 맞게 수렴되면 그의 운은 만들어진다. 그러나 시대와 일이 변하면, 그가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는 몰락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이 그를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또한 한 가지 방식으로 행동하여 항상 번영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는 것이 좋다고 설득되지 않기 때문에, 변화에 자신을 맞출 줄 아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 모험적이 되어야 할 때 그렇게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는 몰락한다. 그러나 그가 시대에 맞춰 행동을 바꿨다면 운명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모든 일에 성급하게 행동했다. 그의 행동 방식은 시대와 상황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 조반니 벤티볼리오가 아직 살아있을 때 볼로냐에 대한 그의 첫 번째 원정을 생각해보라. 베네치아인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았고, 스페인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프랑스 왕과 원정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의 대담함과 활력으로 직접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움직임은 스페인과 베네치아인들을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 후자는 두려움 때문에, 전자는 나폴리 왕국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랬다. 한편, 그는 프랑스 왕을 그의 뒤를 따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왕은 교황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베네치아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교황을 친구로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그의 성급한 행동으로 다른 어떤 교황도 단순한 인간의 지혜로는 해내지 못했을 일을 해냈다. 만약 그가 로마에서 기다리며 모든 계획을 세우고 모든 것을 확정한 후에 떠났다면, 다른 어떤 교황도 그랬을 것처럼,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왕은 천 가지 구실을 대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천 가지 두려움을 제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다른 행동들은 모두 비슷했고 모두 성공했기에 그대로 두겠다. 그의 짧은 생애로 인해 그는 반대의 경험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면, 그의 몰락이 뒤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자연이 그를 이끄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운명이 변하기 쉽고 인류가 그들의 방식을 고수하는 한, 둘이 일치할 때 사람들은 성공하지만 둘이 불일치할 때는 실패한다고 결론 내린다. 내 견해로는 신중한 것보다 모험적인 것이 낫다. 운명은 여자이고, 그녀를 복종시키려면 그녀를 때리고 학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 차갑게 일하는 사람들보다 모험적인 사람들에게 정복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항상 여자답게 젊은 남자들의 연인이다. 그들이 덜 신중하고, 더 격렬하며, 더 대담하게 그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26장
야만인들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라는 권고
위의 담론의 주제를 신중히 고려하고, 현재의 시대가 새로운 군주에게 유리한지, 그리고 현명하고 덕망 있는 자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영예를 안겨주고 이로움을 줄 새로운 질서를 도입할 기회를 줄 요소들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보니, 새로운 군주에게 유리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일치하여 나는 현재보다 더 적합한 시기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모세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되어야 했고, 키루스의 위대한 영혼을 발견하기 위해 페르시아인들이 메디아인들에 의해 압제받아야 했으며, 테세우스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아테네인들이 흩어져야 했다면, 현재 이탈리아의 정신의 미덕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가 지금의 극단적인 상태로 축소되어야 했다. 히브리인들보다 더 노예화되고,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압제받으며, 아테네인들보다 더 흩어지고, 우두머리도 없고, 질서도 없이, 패배당하고, 약탈당하고, 찢기고, 짓밟혀 모든 종류의 황폐화를 견뎌야 했다.
비록 최근 한 사람이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신이 보내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전성기에 운명이 그를 거부했음이 밝혀졌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생기를 잃은 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롬바르디아의 약탈과 약탈, 왕국과 투스카니의 사기와 과세를 종식시키며, 오랫동안 곪아온 상처를 씻어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탈리아가 이러한 잘못과 야만적인 무례함으로부터 구원해줄 사람을 보내달라고 신에게 간청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누군가가 깃발을 들어올리기만 한다면 그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당신의 훌륭한 가문보다 더 큰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이 없다. 당신의 가문은 용기와 행운을 갖추고 있으며, 신과 현재 수장인 교회의 총애를 받고 있어 이 구원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언급한 사람들의 행동과 삶을 되새겨본다면 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위대하고 놀라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었고, 각자가 현재보다 더 큰 기회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업이 이것보다 더 정의롭거나 쉽지도 않았고, 신이 그들에게 더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우리에게는 큰 정의가 있다. 필요한 전쟁은 정당하고, 무기를 들 수밖에 없을 때 그 무기는 신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가장 큰 의지가 있으며, 의지가 큰 곳에서는 당신이 내가 주목하라고 한 사람들을 따르기만 한다면 어려움이 클 수 없다. 게다가 신의 길이 얼마나 놀랍게 드러났는지 보라. 바다가 갈라지고, 구름이 길을 인도했으며,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고, 만나가 내렸다. 모든 것이 당신의 위대함에 기여했다. 당신은 나머지를 해야 한다. 신은 모든 것을 하려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자유의지와 우리에게 속한 영광의 몫을 빼앗지 않으신다.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인들 중 누구도 당신의 훌륭한 가문에 기대되는 모든 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혁명과 전쟁에서 군사적 덕목이 항상 소진된 것처럼 보였던 이유는 옛 질서가 좋지 않았고, 우리 중 누구도 새로운 질서를 찾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떠오른 사람이 새로운 법과 질서를 수립하는 것만큼 그를 영예롭게 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것들이 잘 확립되고 위엄 있을 때, 그는 존경과 찬사를 받을 것이며, 이탈리아에는 모든 형태로 이를 사용할 기회가 부족하지 않다.
여기에는 사지에 큰 용기가 있지만 머리에는 부족하다. 결투와 일대일 전투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탈리아인들이 힘과 기술, 기지에서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군대가 되면 비교가 되지 않는데, 이는 전적으로 지도자들의 무능함 때문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아는 것처럼 보이며, 지금까지 용기나 행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두드러져 다른 이들이 그에게 굴복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많은 전투에서 순수한 이탈리아 군대는 항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한 첫 번째 증거는 타로 전투이며, 그 후 알레산드리아, 카푸아, 제노바, 바일라, 볼로냐, 메스트리 전투가 있다.
따라서 당신의 훌륭한 가문이 자신들의 조국을 구원한 이 주목할 만한 사람들을 따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모든 기업의 진정한 기초로서 자체 군대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더 충실하고 진실하며 더 나은 군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개인으로는 좋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군주에 의해 지휘되고, 그에 의해 존경받으며, 그의 비용으로 유지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함께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용기로 외국인들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이러한 군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위스와 스페인 보병이 매우 무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둘 다 결함이 있어 제3의 질서가 그들에 맞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군은 기병을 견딜 수 없고, 스위스군은 근접 전투에서 만나는 보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거에도 볼 수 있었고 앞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스페인군은 프랑스 기병을 견딜 수 없고, 스위스군은 스페인 보병에 의해 패배한다. 비록 후자에 대한 완전한 증거는 보여줄 수 없지만, 라벤나 전투에서 그 증거가 있었다. 스페인 보병이 스위스와 같은 전술을 따르는 독일 대대와 대면했을 때, 스페인군은 민첩한 몸놀림과 방패의 도움으로 독일군의 창 아래로 들어가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기병이 돌진해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보병의 결함을 알고 있으므로, 기병을 견디고 보병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보병을 창설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무기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고, 기존의 것을 변형하면 된다. 이러한 종류의 개선이 새로운 군주에게 명성과 권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이탈리아가 마침내 그녀의 구원자를 볼 수 있게 하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외국의 강탈로 너무나 고통받은 모든 지방에서 그가 어떤 사랑으로 맞이될지, 어떤 복수의 갈증으로, 어떤 변함없는 믿음으로, 어떤 헌신으로, 어떤 눈물로 맞이될지 표현할 수 없다. 어떤 문이 그에게 닫힐 것인가? 누가 그에게 복종을 거부할 것인가? 어떤 질투가 그를 방해할 것인가? 어떤 이탈리아인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이 야만적인 지배는 역겹다. 그러므로 당신의 훌륭한 가문이 모든 정의로운 사업을 수행하는 그 용기와 희망으로 이 임무를 맡아, 그 깃발 아래에서 우리의 조국이 고귀해지고, 그 후원 아래에서
페트라르카의 격언을 검증했다:
덕은 분노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움터에 나서리라, 그 전투는 짧으리니:
고대의 용맹은
이탈리아인의 가슴 속에 아직 죽지 않았노라.
덕은 분노에 맞서 싸움을 시작할 것이며,
그 싸움은 곧 끝이 날 것이니:
옛 로마의 용기는 죽지 않았고,
이탈리아인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노라.
에드워드 데이크르, 1640년.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
발렌티노 공작이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시뇨르 파올로, 그리고 그라비나 공작 오르시니를 살해할 때 사용한 방법에 대한 설명
발렌티노 공작은 롬바르디아에서 돌아왔다. 그는 아레초와 발디키아나의 다른 도시들의 반란에 관해 피렌체 사람들이 그에 대해 제기한 중상을 프랑스 국왕 앞에서 해명하기 위해 그곳에 갔었다. 그는 이몰라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볼로냐의 폭군 조반니 벤티볼리오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려 했다. 그는 그 도시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로마냐 공국의 수도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비텔리와 오르시니 및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공작이 너무 강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볼로냐를 장악한 후 이탈리아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되기 위해 그들을 파멸시키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에 페루자 지역의 마조네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거기에는 추기경, 파올로, 그라비나 공작 오르시니, 비텔로초 비텔리,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 페루자의 폭군 잔파골로 발리오니, 그리고 시에나의 군주 판돌포 페트루치가 보낸 메세르 안토니오 다 베나프로가 참석했다. 여기서 그들은 공작의 힘과 용기, 그리고 그의 야망을 억제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파멸될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벤티볼리를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고, 피렌체 사람들을 설득하여 공동의 적에 맞서 연합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 한 편에는 도움을, 다른 편에는 그들과 연합하도록 격려했다. 이 회의는 즉시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졌고, 공작 아래에서 불만을 품고 있던 자들, 그 중에서도 우르비노의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킬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하는 가운데, 우르비노의 몇몇 사람들이 공작을 위해 지키고 있던 산 레오 요새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곳을 점령했다. 성주가 요새를 강화하고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있었다. 음모자들은 이를 지켜보다가 요새로 운반되던 몇 개의 들보가 다리 위에 있어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리를 들어올릴 수 없게 되자, 그 기회를 틈타 다리로 뛰어올라 그곳에서 요새로 들어갔다. 이 점령이 이루어지자 전 국가가 반란을 일으키고 옛 공작을 소환했다. 그들은 이 일에 용기를 얻었는데, 요새의 점령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조네에서의 회의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회의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우르비노에서의 반란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즉시 병력을 모아 그 지역에 남아있는 공작의 도시들을 점령하려 했다. 그들은 다시 피렌체에 사신을 보내 공동의 불씨를 없애는 데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험이 줄어들었으니 다른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비텔리와 오르시니를 증오했기 때문에, 동맹을 맺기는커녕 그들의 서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보내 공작에게 적들에 맞서 피신처와 도움을 제공했다. 공작은 이몰라에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의 군사들이 즉시 적에게 넘어갔고, 그는 무장 해제된 채 전쟁이 문 앞에 닥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 사람들의 제안으로 용기를 얻은 그는 남은 소수의 병사들과 싸우기 전에 시간을 벌며 화해를 위해 협상하고 지원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지원을 얻었다. 프랑스 국왕에게 병력을 요청했고, 기병대로 전환할 수 있는 보병과 기사들을 모집했다. 그는 모두에게 돈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적들은 그에게 접근해 포솜브로네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공작의 병사들과 만나 오르시니와 비텔리의 도움으로 그들을 물리쳤다. 이 일이 일어나자 공작은 즉시 화해 제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완벽한 위장술의 대가였기에 반란군들에게 자신은 이미 얻은 것을 각자가 가지기를 바란다는 것, 자신에게는 군주의 칭호만으로 충분하고 다른 이들이 군주국을 가져도 좋다는 것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공작은 이 일에 매우 성공해서 그들은 시뇨르 파올로를 화해 협상을 위해 그에게 보냈고, 그들의 군대를 멈추게 했다. 그러나 공작은 준비를 멈추지 않았고, 기병과 보병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준비가 다른 이들에게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군대를 로마냐의 각 지역으로 나누어 보냈다. 한편 500명의 프랑스 창기병도 그에게 도착했다. 그는 적들에 대해 공개적인 전쟁으로 복수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을 속이는 것이 더 안전하고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화해 작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공작은 그들과 평화를 체결했고, 이전의 약속들을 확인했다. 그는 즉시 4천 두카티를 주었고, 벤티볼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조반니와 동맹을 맺었다. 더욱이 그는 그들이 원하지 않는 한 직접 그의 앞에 오도록 강요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면에 그들은 우르비노 공국과 그들이 점령한 다른 지역들을 그에게 반환하고, 모든 원정에서 그를 섬기며, 그의 허락 없이 누구와도 전쟁을 하거나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화해가 완료되자 우르비노의 공작 귀도 우발도는 다시 베네치아로 도망갔다. 그는 먼저 자신의 영지에 있는 모든 요새들을 파괴했다. 그는 백성들을 믿었기에 자신이 방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요새들이 적들에게 점령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적들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렌티노 공작은 이 협정을 마무리하고 로마냐 전역에 병사들을 배치한 뒤, 11월 말 프랑스 기병대와 함께 이몰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체세나로 이동했고, 체세나에 머무르면서 우르비노 공국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던 비텔리와 오르시니의 사절들과 다음 원정에 대한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자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가 파견되어 공작이 토스카나를 공격할 의향이 있다면 자신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공작이 원하지 않는다면 시니갈리아를 포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공작은 토스카나와 전쟁을 벌여 피렌체와 적대 관계가 되는 것은 원치 않지만, 시니갈리아를 공격하는 것은 매우 기꺼이 하겠다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는 항복했지만, 요새는 성주가 공작 본인 외에는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공작에게 그곳으로 와달라고 간청했다. 이는 공작에게 좋은 기회로 보였다. 그들의 초대로 가는 것이니 자신의 의지로 가는 것이 아니어서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더욱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매형인 캉달 몽시뇨르의 지휘 아래 있는 100명의 창기병을 제외하고 롬바르디아에 있던 모든 프랑스 기병대를 떠나보냈다. 그는 12월 중순경 체세나를 떠나 파노로 갔고, 최대한의 교활함과 영리함으로 비텔리와 오르시니를 설득해 시니갈리아에서 그를 기다리게 했다. 그는 그들에게 불응하면 화해의 진실성과 영속성에 의문을 던질 것이며, 자신은 친구들의 무기와 조언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비텔로초는 매우 고집을 부렸다. 그의 형제의 죽음이 그에게 군주를 모욕하고 나서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선물과 약속으로 매수한 파올로 오르시니에 의해 설득되어 그는 기다리기로 동의했다.
이에 공작은 1502년 12월 30일로 예정된 파노 출발에 앞서 가장 신뢰하는 추종자 8명에게 자신의 계획을 전달했다. 그중에는 돈 미켈레와 나중에 추기경이 된 에우나 몬시뇨르가 있었다. 그는 비텔로초, 파올로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올리베로토가 도착하는 대로 그의 추종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그들을 한 명씩 맡아 시니갈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접대하도록 명령했다. 그들은 공작의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그곳에서 체포될 예정이었다.
그 후 공작은 모든 기병대와 보병대에게 새벽에 파노에서 5마일 떨어진 메타우로 강에 집결하여 그를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병력은 2천 명 이상의 기병과 1만 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2월 마지막 날 메타우로 강에서 병사들과 함께 있었고, 약 200명의 기병대를 먼저 보낸 뒤 보병을 전진시켰다. 그는 나머지 기병대와 함께 그들을 동행했다.
파노와 시니갈리아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 위치한 라 마르카의 두 도시로, 서로 15마일 떨어져 있다. 따라서 시니갈리아로 향하는 사람은 오른편에 산이 있고, 그 산기슭은 어떤 곳에서는 바다와 맞닿아 있다. 시니갈리아는 산기슭에서 활 쏘는 거리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고, 해안에서는 약 1마일 떨어져 있다. 도시의 맞은편에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은 파노를 향한 대로를 마주보는 성벽 부분을 적시고 있다. 따라서 시니갈리아에 접근하는 사람은 산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강에 도착한다. 그 강을 따라 왼쪽으로 활 쏘는 거리만큼 가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도착한다. 그때 그는 시니갈리아로 들어가는 문과 거의 마주하게 되는데, 이 문은 직선이 아니라 비스듬히 나 있다. 이 문 앞에는 광장이 있고, 강둑이 그 한쪽을 이룬다.
비텔리와 오르시니는 공작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고 그를 직접 맞이하기 위해 자신들의 병력을 시니갈리아에서 6마일 떨어진 여러 성에 보냈다. 이는 공작의 병사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시니갈리아에 오직 올리베로토와 그의 부대만을 남겼는데, 이는 1천 명의 보병과 15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앞서 언급한 교외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렇게 준비가 되자 발렌티노 공작은 시니갈리아를 향해 출발했다. 기병대 선두가 다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리를 건너지 않고 일부는 강 쪽으로, 다른 일부는 들판 쪽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보병이 멈추지 않고 도시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비텔로초, 파올로, 그리고 그라비나 공작 오르시니는 노새를 타고 소수의 기병을 거느리고 공작에게 향했다. 비텔로초는 무장하지 않은 채 녹색 안감이 덧대진 망토를 입고 있었다. 마치 곧 닥칠 죽음을 예감한 듯 매우 낙담한 모습이었다. 이는 그의 능력과 과거의 행운을 고려할 때 다소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시니갈리아에서 공작을 만나러 가기 위해 부하들과 작별할 때, 마치 마지막 이별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집과 운명을 부하 대장들에게 맡겼고, 조카들에게는 집안의 운이 아닌 선조들의 덕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세 사람은 공작 앞에 나와 공손히 인사를 했고, 공작은 그들을 호의적으로 맞이했다. 그들은 곧바로 그들을 감시하도록 임명된 사람들 사이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공작은 자신의 부대와 함께 시니갈리아에 남아 있던 올리베로토가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올리베로토는 강가 근처 자신의 숙소 앞 광장에서 부하들을 정렬시키고 훈련시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은 올리베로토를 맡은 돈 미켈레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올리베로토가 도망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돈 미켈레는 말을 타고 가서 올리베로토와 합류했다. 그는 올리베로토에게 부하들을 숙소 밖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공작의 부하들이 그 숙소들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그들을 숙소로 보내고 자신이 공작을 맞이하러 가라고 조언했다. 올리베로토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공작 앞에 나갔다. 공작은 그를 보자 불렀고, 올리베로토는 인사를 한 뒤 다른 이들과 합류했다.
일행 전체가 시니갈리아에 들어가 공작의 숙소에서 말에서 내린 뒤 공작과 함께 은밀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공작은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런 다음 말에 올라 올리베로토와 오르시니의 부하들의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올리베로토의 부하들은 가까이 있어 빠르게 처리되었지만, 오르시니와 비텔리의 부하들은 멀리 있었고 주인들의 파멸을 예감하여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그들은 오르시니 가문과 비텔리 가문의 용맹과 규율을 염두에 두고 함께 뭉쳐 적대적인 지역 세력에 맞서 싸워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공작의 병사들은 올리베로토의 부하들을 약탈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니갈리아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공작이 그들 중 일부를 죽여 이 만행을 진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완전히 약탈했을 것이다. 밤이 되고 소동이 잠잠해지자 공작은 비텔로초와 올리베로토를 죽일 준비를 했다. 그는 그들을 방으로 데려가 교살하게 했다. 둘 다 과거의 삶에 어울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비텔로초는 교황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를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올리베로토는 비굴하게 굴며 공작에 대한 모든 해를 비텔로초의 탓으로 돌렸다. 파올로와 그라비나 공작 오르시니는 교황이 추기경 오르시니, 피렌체 대주교, 메세르 야코포 다 산타 크로체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로마에서 들을 때까지 살려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1502년 1월 18일, 피에베 성에서 그들도 같은 방식으로 교살되었다.
루카의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저술하여
그의 친구들인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루이지 알라만니에게 보냄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 1284-1328
사랑하는 자노비와 루이지여, 이 문제를 고찰한 이들에게는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동시대인들을 뛰어넘은 모든 사람들, 혹은 그들 중 대다수가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출신이거나 운명에 의해 어떤 끔찍한 방식으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 놀라운 일로 보인다. 그들은 야수의 자비에 노출되거나 너무나 비천한 부모를 두어 부끄러움에 스스로를 제우스나 다른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지루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고, 그런 이야기들은 읽는 이들에게 특별히 교훈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인물들의 비천한 시작이 일어나는 이유가 운명이 세상에 그들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지혜에는 조금만 빚졌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운명은 지혜가 그들의 경력에 실제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을 때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따라서 모든 성공은 운명에 귀속되어야 한다. 루카의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는 위대한 일을 행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태어난 도시를 기준으로 볼 때 그러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이들처럼, 그는 태생적으로 행운이 없었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 역사의 과정이 보여줄 것이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나는 그에게서 용기와 운의 징후를 발견했고, 이는 그를 사람들의 위대한 본보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당신들이 고귀한 행동을 가장 즐기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 당신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스트라카니 가문은 과거 루카의 귀족 가문 중 하나였지만, 내가 이야기하는 시대에는 다소 몰락했다. 세상이 그렇듯이 말이다. 이 가문에 안토니오라는 아들이 태어났고, 그는 루카의 산 미켈레 수도회 사제가 되어 메세르 안토니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에게는 유일한 누이가 있었는데, 부오나코르소 체나미와 결혼했지만 부오나코르소가 죽자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오빠와 함께 살기로 했다. 메세르 안토니오의 집 뒤에는 포도밭이 있었고,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여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세르 안토니오의 누이 마돈나 디아노라는 평소처럼 저녁 식사용 허브를 따러 포도밭에 갔다. 그녀는 포도나무 잎 사이에서 약간의 잎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을 들었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서 포도나무 잎에 싸인 채 어머니를 부르며 울고 있는 듯한 아기의 손과 얼굴을 보았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채로, 하지만 연민으로 가득 차서 그녀는 아기를 들어 집으로 가져갔다. 그곳에서 아기를 씻기고 깨끗한 옷을 입혔다. 그리고 메세르 안토니오가 귀가했을 때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듣고 아기를 보고는 누이만큼이나 놀라고 연민을 느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했고, 그가 사제이고 그녀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 결국 아기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유모를 구해 마치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사랑으로 키웠다. 그들은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카스트루초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스트루초는 매우 잘생겼고 재치와 분별력의 증거를 보였으며, 메세르 안토니오가 가르친 교훈을 또래보다 빠르게 배웠다. 메세르 안토니오는 그를 사제로 만들려고 했고, 때가 되면 그를 자신의 성직 계급과 다른 혜택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의 모든 가르침은 이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카스트루초의 성격이 사제직과는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스트루초가 14세가 되자 그는 메세르 안토니오와 마돈나 디아노라의 꾸짖음에 덜 신경 쓰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 서적 읽기를 그만두고 무기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돌아섰다. 그는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과 다른 소년들과 달리기, 뛰기, 씨름하는 것을 가장 즐겼다. 모든 운동에서 그는 용기와 체력에서 동료들을 크게 앞섰다.
그가 책을 들추는 일이 있더라도 전쟁과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다룬 책만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 메세르 안토니오는 이 모든 것을 괴로움과 슬픔으로 지켜봤다.
루카 시에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의 귀니지 가문 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군인으로, 부와 체력, 용맹에서 루카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능가했다. 그는 종종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의 지휘 아래 싸웠고, 기벨린으로서 루카에서 그 당파의 소중한 지도자였다. 이 신사는 루카에 거주하면서 대부분의 아침과 저녁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포데스타의 발코니 아래에 모이곤 했다. 이 발코니는 루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인 산 미켈레 광장 꼭대기에 있었다. 그는 종종 카스트루초가 앞서 언급한 놀이에 다른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카스트루초가 다른 소년들을 훨씬 능가하고 그들에 대해 왕족과 같은 권위를 행사하며, 아이들이 그를 사랑하고 복종하는 것을 보고, 메세르 프란체스코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다. 카스트루초의 양육 환경에 대해 알게 된 그는 그를 더욱 가까이 두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 날 그를 불러 신사의 집에서 살면서 말 타기와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울지, 아니면 사제의 집에서 미사와 교회 의식만 배울지 묻자, 메세르 프란체스코는 카스트루초가 말과 무기에 대해 듣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스트루초는 침묵을 지키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지만, 메세르 프란체스코의 격려로 말을 하게 되자 주인님이 허락한다면 사제 공부를 그만두고 군인의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메세르 프란체스코를 기쁘게 했고, 그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메세르 안토니오의 동의를 얻어냈다. 메세르 안토니오는 소년의 성격을 알고 있었고 그를 오래 붙잡아둘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카스트루초는 사제인 메세르 안토니오의 집에서 군인인 메세르 프란체스코 귀니지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진정한 신사와 연관 짓는 모든 덕목과 태도를 보여주었다. 우선 그는 뛰어난 기수였고, 가장 사나운 말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모든 창술 시합과 토너먼트에서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했고, 힘과 기교를 요하는 모든 운동에서 탁월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인 것은 그의 행동이나 말로 다른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게 하는 그의 기품 있는 겸손함이었다. 그는 위대한 사람들에게 공손했고, 동등한 이들에게 겸손했으며, 하층민들에게 예의 바르게 대했다. 이러한 자질들로 인해 그는 귀니지 가문뿐만 아니라 루카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되었다.
카스트루초가 18세가 되었을 때, 기벨린 당이 파비아에서 궬프 당에 의해 추방되자 메세르 프란체스코는 비스콘티 가문에 의해 기벨린 당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다. 카스트루초도 그의 군대를 지휘하며 함께 갔다. 카스트루초는 이 원정에서 자신의 신중함과 용기를 충분히 증명했고, 다른 어떤 대장보다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이름과 명성은 파비아뿐만 아니라 롬바르디아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카스트루초는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루카로 돌아왔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친구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즈음 메세르 프란체스코가 13세 된 파올로라는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카스트루초를 아들의 후견인이자 재산 관리인으로 지명했다. 프란체스코는 죽기 전에 카스트루초를 불러 자신이 항상 그에게 보여준 호의를 파올로에게도 보여주기를 부탁했다. 아버지에게 갚지 못한 감사를 아들에게 보답해 달라고 간청했다. 프란체스코가 죽자 카스트루초는 파올로의 통치자이자 후견인이 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권력과 지위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루카에서 이전의 보편적인 호의 대신 그에 대한 일종의 시기심을 낳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가 폭군의 야심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선두에 선 사람은 궬프 당의 수장인 조르조 델리 오피치였다. 이 사람은 메세르 프란체스코가 죽은 후 루카의 최고 인물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카스트루초가 이미 보여준 큰 능력과 통치자의 지위로 인해 자신의 기회를 빼앗겼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카스트루초의 지위를 박탈할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다.
카스트루초는 처음에는 이를 무시했지만, 나중에는 메세르 조르조가 나폴리 왕 루베르토의 대리인과 그를 루카에서 추방하도록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걱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피사의 영주는 아레초 출신의 우구초네 델라 파졸라였다. 그는 처음에는 대장으로 선출되었다가 나중에 그들의 영주가 되었다. 루카에서 추방된 일부 기벨린 당원들이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카스트루초는 우구초네의 도움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는 계획을 위해 그들과 연락을 취했다. 카스트루초는 또한 오피치 가문의 권위를 견디지 못하는 루카의 친구들도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였다. 따라야 할 계획을 정한 후, 카스트루초는 조심스럽게 오네스티의 탑을 요새화하고 필요할 경우 며칠간 포위를 견딜 수 있도록 보급품과 전쟁 물자를 채웠다. 우구초네와 약속한 날 밤이 되자, 우구초네는 산과 피사 사이의 평원을 많은 병력으로 점령했고, 신호가 주어졌다. 우구초네는 발견되지 않고 산 피에로 문에 접근하여 성문의 격자를 불태웠다. 카스트루초는 도시 안에서 큰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고 자신의 편에서 문을 강제로 열었다. 우구초네는 부하들과 함께 진입하여 도시를 휩쓸고 메세르 조르조와 그의 모든 가족, 그리고 많은 친구와 지지자들을 죽였다. 총독은 쫓겨났고, 정부는 우구초네의 뜻에 따라 개편되었다. 이는 도시에 해를 끼쳤는데, 당시 100개가 넘는 가문이 추방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도망친 사람들 중 일부는 피렌체로, 일부는 피스토이아로 갔다. 피스토이아는 궬프당의 본거지였고, 이러한 이유로 우구초네와 루카인들에게 가장 적대적이 되었다.
이제 피렌체인들과 다른 궬프당 세력들은 기벨린들이 토스카나에서 너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추방된 궬프당 세력들을 루카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발디니에볼레에 대군을 집결시키고 몬테카티니를 점령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루카로 자유롭게 진출하기 위해 몬테카를로로 진군했다. 이에 우구초네는 피사와 루카의 군대를 모았고, 롬바르디아에서 데려온 많은 독일 기병대와 함께 피렌체군 진영을 향해 진군했다. 피렌체군은 적의 등장에 몬테카를로에서 철수하여 몬테카티니와 페시아 사이에 진을 쳤다. 우구초네는 이제 몬테카를로 근처에 진을 치고 적과 약 2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양측 기병대 사이에 작은 충돌이 매일 벌어졌다. 우구초네의 병으로 인해 피사인들과 루카인들은 적과의 전투를 연기했다. 우구초네는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느끼고 치료를 위해 몬테카를로로 갔으며, 군대의 지휘권을 카스트루초에게 맡겼다. 이러한 변화는 궬프당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들은 적군이 지휘관을 잃어 우두머리를 잃었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 있었다. 카스트루초는 이를 관찰하고 이러한 믿음을 부추기기 위해 며칠을 보냈다. 그는 또한 두려움의 징후를 보이며 진영의 보급품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에 궬프당은 이러한 두려움의 징후를 더 많이 볼수록 더욱 오만해졌고, 매일 카스트루초의 군대 앞에서 전투 대형으로 나섰다. 곧 카스트루초는 적이 충분히 대담해졌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전술을 파악한 후 그들과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먼저 병사들에게 격려의 말을 몇 마디 건넸고, 그의 명령에 따르기만 한다면 승리가 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카스트루초는 적이 전열의 중앙에 모든 최정예 병력을 배치하고 군대의 양 날개에는 덜 신뢰할 만한 병사들을 배치한 것을 주목했다. 그는 정반대로 양 측면에 가장 용감한 병사들을 배치하고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병사들은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이러한 전투 대형을 갖추고 그는 전열에서 나와 빠르게 적군의 시야에 들어왔다. 적군은 평소와 같이 오만하게 그에게 도전하러 나왔다. 그는 중앙 부대에게 천천히 행군하라고 명령하고 양 날개의 부대를 신속하게 전진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이 적과 접촉했을 때 양군의 날개만 교전에 들어갔고 중앙 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전열의 이 두 부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술로 카스트루초의 가장 용감한 병사들이 적군의 약한 부분과 맞서게 되었고, 적군의 가장 효율적인 병사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피렌체인들은 자신들과 맞서 있는 병력과 싸울 수 없었고, 자신들의 측면 부대를 지원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카스트루초는 큰 어려움 없이 양 측면에서 적을 패주시켰고, 중앙 부대는 자신들의 용맹을 보일 기회도 없이 공격에 노출되자 도주했다. 패배는 완전했고 인명 손실도 매우 컸다. 1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토스카나의 궬프당의 많은 장교와 기사들, 그리고 그들을 돕기 위해 온 많은 왕족들도 포함되었다. 그 중에는 루베르토 왕의 형제인 피에로와 그의 조카 카를로, 그리고 타란토의 영주 필리포가 있었다. 카스트루초 측의 손실은 300명을 넘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우구초네의 아들 프란체스코가 있었다. 그는 젊고 무모하여 첫 번째 공격에서 사망했다.
이 승리로 카스트루초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우구초네는 그를 질투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구초네는 이 승리가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고, 그 기회는 루카에서 명성과 능력이 뛰어난 피에르 안놀로 미켈리가 죽으면서 찾아왔다. 살인범은 카스트루초의 집으로 도망쳐 숨었다. 대장의 병사들이 살인자를 체포하려고 갔지만 카스트루초가 막아서자 살인범은 도망쳤다. 이 사건은 당시 피사에 있던 우구초네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카스트루초를 처벌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루카의 총독인 아들 네리를 불러 연회에서 카스트루초를 체포해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카스트루초는 위험을 전혀 느끼지 않고 총독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는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지만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네리는 민중의 분노를 두려워해서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 그는 아버지의 의도를 더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우구초네는 아들의 망설임과 비겁함을 저주하며 즉시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피사에서 루카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바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사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대리인을 죽이고 가도 델라 게라르데스카 백작을 그들의 영주로 삼았다. 우구초네는 루카에 도착하기 전에 피사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지만,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루카인들이 피사의 예를 따라 그에게 문을 닫아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카인들은 피사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우구초네가 그들의 도시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루초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사적인 모임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광장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후 그들은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들고 우구초네에게 가서 카스트루초를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우구초네는 더 나쁜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그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이에 카스트루초는 친구들을 모아 민중의 도움을 받아 우구초네를 공격했다. 우구초네는 도주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타고 도망쳤다.
친구들과 함께 롬바르디아로, 스칼라 영주들에게 갔고 그곳에서 가난하게 죽었다.
하지만 카스트루초는 죄수에서 루카의 거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친구들과 국민들에게 매우 신중하게 행동했고, 그 결과 그들은 그를 1년 동안 군대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이를 얻은 후 전쟁에서 명성을 얻고자, 그는 우구초네가 떠난 후 반란을 일으킨 많은 도시들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조약을 맺은 피사인들의 도움을 받아 세레차나로 진군했다.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그는 요새를 지었는데, 이는 오늘날 제레차넬로라고 불린다. 2개월 만에 카스트루초는 그 도시를 점령했다. 그 포위 공격에서 얻은 명성으로, 그는 빠르게 마사, 카라라, 라벤차를 점령했고 짧은 시간 안에 루니지아나 전역을 휩쓸었다. 롬바르디아에서 루니지아나로 이어지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는 폰트레몰리를 포위하고 그곳의 영주인 메세르 아나스타지오 팔라비치니의 손에서 빼앗았다. 이 승리 후 그는 루카로 돌아왔고 모든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제 카스트루초는 더 이상 자신을 군주로 만드는 것을 미루는 것이 신중하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는 파치노 델 포조, 푸치넬로 달 포르티코, 프란체스코 보칸사키, 체코 귀니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루카의 영주로 만들었다. 그들은 모두 그가 매수한 자들이었다. 그 후 그는 국민들에 의해 엄숙하고 신중하게 군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왕인 바이에른의 프리드리히가 황제의 왕관을 쓰기 위해 이탈리아에 왔다. 카스트루초는 그와 친구가 되기 위해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를 맞이했다. 카스트루초는 루카에 파올로 귀니지를 대리인으로 남겼는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 때문에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카스트루초는 프리드리히에게 큰 영예로 맞이해졌고, 많은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투스카니의 황제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피사인들은 그들이 피사에서 쫓아낸 가도 델라 게라르데스카를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들은 프리드리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리드리히는 카스트루초를 피사의 영주로 임명했고, 피사인들은 궬프당, 특히 피렌체인들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그를 그들의 영주로 받아들였다.
프리드리히는 로마에 총독을 임명하여 이탈리아 일을 감시하게 한 후 독일로 돌아갔다. 황제를 따르는 모든 투스카니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당원들은 카스트루초에게 도움과 조언을 구했고, 모두 그의 도움으로 자국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를 자국의 통치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이 추방자들 중에는 마테오 귀디, 나르도 스콜라리, 라포 우베르티, 제로초 나르디, 피에로 부오나코르시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피렌체 출신의 기벨린당 추방자들이었다. 카스트루초는 이 사람들과 자신의 군대의 도움으로 투스카니 전체의 주인이 되려는 비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영향력을 얻기 위해, 그는 밀라노의 군주인 메세르 마테오 비스콘티와 동맹을 맺고 그를 위해 도시와 지방의 군대를 조직했다. 루카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지방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무장시키고 대장과 깃발 아래 사람들을 등록시켰다. 그래서 그는 피사에서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외에도 2만 명의 병사를 빠르게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가 이러한 군대와 동맹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을 때, 메세르 마테오 비스콘티가 피아첸차의 궬프당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피렌체 군대와 루베르토 왕의 도움을 받아 기벨린당을 쫓아냈다. 메세르 마테오는 카스트루초에게 피렌체인들의 영토를 침략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그들이 본국에서 공격을 받으면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카스트루초는 발다르노를 침략하여 푸체키오와 산 미니아토를 점령했고, 그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피렌체인들은 투스카니에 겨우 도착한 군대를 소환했고, 카스트루초는 다른 필요에 의해 루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카 시에는 포조 가문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매우 강력해서 카스트루초를 높이 올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주의 지위까지 올려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다른 가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카스트루초를 루카에서 쫓아내려 했다. 그들은 어느 날 아침 기회를 잡았고, 무장을 하고 카스트루초가 질서 유지를 위해 남겨둔 부관을 공격해 죽였다. 그들은 국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평화로운 노인인 스테파노 디 포조가 개입하여 권위로 그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그는 카스트루초와 중재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를 든 것만큼이나 어리석게 무기를 내려놓았다. 카스트루초는 루카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 즉시 파올로 귀니지를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기병대를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그는 반란이 끝난 것을 발견했지만, 도시 전체에 가장 유리한 위치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스테파노는 카스트루초가 자신에게 매우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의 젊음, 이전의 우정, 그리고 카스트루초가 그들 집안에 빚진 의무를 이유로 들었다. 이에 카스트루초는 정중하게 대답하며 스테파노에게 안심하라고 요청했다. 그는 소동이 끝난 것을 알게 되어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스테파노에게 가족을 데려오라고 권했고, 자신에게 관용과 관대함을 보일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신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스테파노와 카스트루초의 말을 믿고 그들은 항복했고, 스테파노와 함께 즉시 감옥에 던져져 처형되었다. 한편 피렌체인들은 산 미니아토를 되찾았고, 이에 카스트루초는 평화를 맺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카에서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피렌체인들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그들은 전쟁에 지쳐 있고 전쟁 비용을 줄이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2년 동안의 조약이 체결되었고, 양측은 각자 정복한 영토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카스트루초는 이 문제에서 벗어나 루카의 일에 주의를 돌렸다. 그는 방금 벗어난 위험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구실과 이유로 야심을 품고 군주 자리를 노릴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는 그들 중 누구도 남기지 않고 국가와 재산을 빼앗았고, 그의 손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도 빼앗았다. 그는 경험상 그들 중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안전을 위해 그가 죽이거나 국가에서 쫓아낸 사람들의 탑돌로 루카에 요새를 세웠다.
카스트루초가 피렌체와 평화를 맺고 루카에서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동안,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피스토이아를 장악하면 피렌체에 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그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산악인들과 친분을 쌓았고, 피스토이아에서 양측이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도록 일을 조정했다. 피스토이아는 언제나 그랬듯이 비안키파와 네리파로 나뉘어 있었다. 비안키파의 수장은 바스티아노 디 포센테였고, 네리파의 수장은 야코포 다 지아였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카스트루초와 비밀리에 접촉했고, 서로를 도시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여러 차례의 위협 끝에, 둘은 결국 충돌했다. 야코포는 피렌체 쪽 성문을 요새화했고, 바스티아노는 루카 쪽 성문을 요새화했다. 둘 다 피렌체인들보다 카스트루초를 더 신뢰했는데, 카스트루초가 피렌체인들보다 전투 준비가 더 잘 되어 있고, 전투를 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둘 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스트루초는 둘 모두에게 약속했는데, 바스티아노에게는 직접 가겠다고 말했고, 야코포에게는 자신의 제자인 파올로 귀니지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약속한 시간에 그는 파올로를 피사를 통해 보냈고, 자신은 직접 피스토이아로 향했다. 자정에 둘은 도시 밖에서 만났고, 서로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두 지도자가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카스트루초의 신호에 따라 한 무리가 야코포 다 지아를 죽였고, 다른 무리가 바스티아노 디 포센테를 죽였다. 양측의 추종자들은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더 이상 저항 없이 피스토이아는 카스트루초의 손에 넘어갔고, 그는 시뇨리아를 궁궐에서 쫓아내고, 백성들에게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많은 약속을 하고, 그들의 오래된 빚을 탕감해주었다. 시골 사람들이 새로운 군주를 보기 위해 도시로 몰려들었고, 모두 희망으로 가득 차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이는 주로 그의 큰 용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무렵 로마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고 있어 생활비가 비싸졌기 때문이다. 독일인 총독 엔리코는 벌어진 일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살인과 소요가 매일 이어졌지만 그는 이를 멈추지 못했다. 이로 인해 엔리코는 로마인들이 나폴리의 왕 루베르토를 부를까 봐 매우 걱정했다. 루베르토가 독일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내고 교황을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스트루초보다 더 가까운 친구를 찾을 수 없었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로마로 와 달라고 간청했다. 카스트루초는 황제에게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로마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스트루초는 파올로 귀니지를 루카의 지휘관으로 남겨두고 600명의 기병과 함께 로마로 출발했다. 로마에서 엔리코는 그를 최고의 예우로 맞이했다. 짧은 시간 안에 카스트루초의 존재는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불어넣었고, 유혈 사태나 폭력 없이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는 주로 카스트루초가 피사 주변 지역에서 배로 대량의 곡물을 보냈기 때문에, 문제의 근원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의 지도자들 중 일부를 처벌하고, 다른 이들을 훈계했다. 그 후 엔리코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 이루어졌다. 카스트루초는 많은 영예를 받았고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이 직위는 최고의 위엄을 가지고 맡았는데, 카스트루초는 앞면에 “나는 신이 원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수놓아진 브로케이드 토가를 입었다. 뒷면에는 “신이 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피렌체 사람들은 카스트루초가 휴전 중에 피스토이아를 점령한 것에 대해 매우 분노했다. 그들은 그의 부재 중에 도시를 반란으로 유혹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했다. 그들은 이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렌체에 있는 추방된 피스토이아 사람들 중에는 발도 체키와 야코포 발디니가 있었는데, 둘 다 주도적이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피스토이아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했고, 피렌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밤에 도시에 들어갔다. 카스트루초의 관리들과 지지자들 중 일부를 쫓아내고 다른 이들을 죽인 후, 그들은 도시를 자유로운 상태로 되돌렸다.
이 소식은 카스트루초를 크게 화나게 했고, 엔리코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그는 급히 피스토이아로 향했다. 피렌체 사람들이 그의 귀환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을 알고 발디니에볼레 계곡에서 그들의 군대로 그를 가로막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의 피스토이아로 가는 길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궬프파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대군을 모아 피렌체 사람들은 피스토이아 영토로 들어갔다. 한편, 카스트루초는 군대와 함께 몬테카를로에 도착했다. 피렌체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들은 후, 그는 피스토이아 평원에서 그들과 맞서지 않고, 페시아 평원에서 기다리지도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는 가능한 한 세라발레 고개에서 과감하게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믿었다. 비록 피렌체 사람들이 3만 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고 그는 1만 2천 명밖에 없다는 정보를 들었지만 말이다. 그는 비록 자신의 능력과 부하들의 용기를 굳게 믿었지만, 적을 개활지에서 공격하는 것을 주저했다. 수적 열세로 압도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라발레는 페시아와 피스토이아 사이에 있는 성이었다. 발디니에볼레를 막고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정확히 고개에 있지는 않고 화살 한 발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개 자체는 좁고 가파른 곳도 있었지만 대체로 완만하게 오르막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좁았고, 특히 정상 부근 분수령에서는 20명이 나란히 서면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세라발레의 영주는 독일인 만프레드였다. 그는 카스트루초가 피스토이아의 영주가 되기 전부터 성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성은 루카와 피스토이아 양쪽에 속했지만 어느 쪽도 차지하지 않았다. 만프레드가 중립을 지키고 어느 쪽에도 의무를 지지 않는 한 그를 내쫓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와 성이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었기에 그는 항상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카스트루초는 바로 이곳에서 적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는 그의 소수 병력이 유리했고, 적의 큰 군대를 보고 전투 전에 겁먹을 염려도 없었다. 피렌체와의 이 분쟁이 일어나자마자 카스트루초는 이 성을 차지하면 엄청난 이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성에 거주하는 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는 피렌체군을 공격하기 전날 밤 400명의 병사를 성에 들여보내고 성주를 처형하도록 조치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카스트루초는 이제 피렌체군이 전쟁터를 피스토이아에서 발디니에볼레로 옮기려는 욕구를 계속 유지하도록 부추겨야 했다. 그래서 그는 몬테카를로에서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피렌체군은 서둘러 세라발레 아래에 진을 쳤고, 다음날 아침 언덕을 넘을 계획이었다. 한편 카스트루초는 밤중에 성을 점령했고, 몬테카를로에서 군대를 이동시켜 한밤중에 조용히 행군하여 세라발레 기슭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그와 피렌체군은 아침에 동시에 언덕 오르기를 시작했다. 카스트루초는 보병을 주요 도로로 보내고, 400명의 기병을 왼쪽 길을 따라 성 쪽으로 보냈다. 피렌체군은 400명의 기병을 본진 앞에 보냈는데, 카스트루초가 언덕을 점령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가 성을 점령한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피렌체 기병들이 언덕에 올랐을 때 카스트루초의 보병과 마주치자 완전히 놀라고 말았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면갑을 내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준비되지 않은 병사들이 준비된 병사들의 공격을 받은 셈이었고, 그들은 너무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간신히 버텼지만 몇몇은 빠져나갔다. 전투 소리가 아래의 피렌체 진영에 들리자 혼란에 빠졌다. 기병과 보병이 뒤엉켰고, 지휘관들은 좁은 길 때문에 병사들을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혼란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적의 보병과 교전 중이던 기병들은 불리한 위치 때문에 효과적인 방어를 하지 못한 채 흩어지거나 살해당했다. 비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용감히 저항했지만 말이다. 퇴각은 불가능했다. 양 옆으로는 산이 있었고, 앞에는 적이, 뒤에는 아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스트루초는 자신의 병사들이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격퇴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1,000명의 보병을 성 주변으로 보내 이전에 보낸 400명의 기병과 합류하여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너무나 맹렬하게 명령을 수행해서 피렌체군은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곧 완전히 퇴각했는데, 적의 용맹함보다는 불리한 위치 때문에 패배한 것이었다. 후미에 있던 이들은 피스토이아 쪽으로 돌아섰고 평원으로 흩어졌으며, 각자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했다. 패배는 완전했고 피해가 컸다. 많은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그 중에는 반디니 데이 로시, 프란체스코 브루넬레스키, 조반니 델라 토사 같은 피렌체 귀족들과 루베르토 왕이 궬프당을 돕기 위해 보낸 많은 토스카나인들과 나폴리인들이 있었다. 피스토이아인들은 이 패배 소식을 듣자마자 궬프당의 동조자들을 내쫓고 카스트루초에게 항복했다. 그는 프라토와 아르노 강 양쪽 평원의 모든 성을 점령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피렌체에서 2마일 떨어진 페레톨라 평원으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그는 여러 날 동안 그곳에 머물며 전리품을 나누고 연회와 놀이로 승리를 축하했다. 말 경주와 남녀 달리기 대회도 열었다. 또한 피렌체군의 패배를 기념하는 메달도 주조했다. 그는 피렌체의 일부 시민들을 매수하여 밤에 성문을 열게 하려 했지만 음모가 발각되어 참여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그 중에는 토마소 루파치와 람베르투초 프레스코발디가 있었다. 이 패배로 피렌체인들은 크게 불안해했고, 자유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나폴리의 루베르토 왕에게 사절을 보내 도시의 지배권을 넘겼다. 그는 궬프당의 유지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피렌체인들과 매년 200,000플로린의 조공을 받기로 합의하고 아들 카를로를 4,000명의 기병과 함께 피렌체로 보냈다.
얼마 후 피렌체인들은 카스트루초 군대의 압박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었다. 그가 피렌체 앞의 진지를 떠나 피사로 행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피사의 유력 인사 중 한 명인 베네데토 란프란키가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었다. 란프란키는 자신의 조국이 루카인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음모를 꾸며 요새를 점령하고 카스트루초의 지지자들을 죽이려 했다.
카스트루초를 쫓아내고 수비대를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비밀 유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인원 수가 적어야 하지만, 실행에는 소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란프란키는 음모에 더 많은 추종자를 구하다가 그 계획을 카스트루초에게 폭로한 사람을 만났다. 이 배신은 피사에서 추방 생활을 하던 두 명의 피렌체 추방자인 보니파치오 체르키와 조반니 귀디에 대한 심한 비난 없이는 넘어갈 수 없다. 이에 카스트루초는 베네데토를 체포해 처형하고 다른 많은 고귀한 시민들을 참수했으며 그들의 가족들을 추방했다. 이제 카스트루초는 피사와 피스토이아 모두가 완전히 적대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데 많은 생각과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피렌체인들에게 군대를 재조직하고 나폴리 왕의 아들 카를로가 오기를 기다릴 기회를 주었다. 카를로가 도착하자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3만 명이 넘는 보병과 1만 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군을 소집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모든 궬프당을 그들의 원조에 불렀다. 그들은 피스토이아와 피사 중 어느 곳을 먼저 공격할지 상의했고, 최근의 음모로 인해 성공 가능성이 더 높고 그들에게 더 유리할 것이라고 믿어 후자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피사를 획득하면 피스토이아의 항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믿었다.
1328년 5월 초, 피렌체인들은 이 군대를 움직여 신속히 라스트라, 시냐, 몬텔루포, 엠폴리를 점령한 뒤 산 미니아토로 나아갔다. 카스트루초는 피렌체인들이 그를 상대로 보내는 거대한 군대에 대해 들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운명이 토스카나의 제국을 그의 손에 넘겨줄 때가 왔다고 믿었다. 그는 적군이 피사나 세라발레에서보다 더 나은 싸움을 하거나 성공할 전망이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2만 명의 보병과 4천 명의 기병을 모았고, 이 군대와 함께 푸체키오로 갔다. 한편 파올로 귀니지를 5천 명의 보병과 함께 피사로 보냈다. 푸체키오는 아르노 강과 구스치아나 강 사이에 위치하고 주변 평원보다 약간 높이 있어 피사 지역의 어느 도시보다 강력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게다가 적군은 병력을 나누지 않고는 그곳의 식량 공급을 방해할 수 없었고, 루카나 피사 방향에서 접근할 수도 없었으며, 피사로 갈 수도 없었고, 불리한 상황에서가 아니면 카스트루초의 군대를 공격할 수도 없었다. 한 경우에는 그들이 카스트루초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와 파올로가 이끄는 다른 군대 사이에 놓이게 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적과 근접 전투를 벌이기 위해 아르노 강을 건너야 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시도였다. 카스트루초는 피렌체인들이 이 후자의 방법을 택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강둑에서 병사들을 물리고 푸체키오 성벽 아래에 배치했으며, 그들과 강 사이에 넓은 평야를 남겼다.
피렌체인들은 산 미니아토를 점령한 후 피사를 공격할지 아니면 카스트루초의 군대를 공격할지 결정하기 위해 전쟁 회의를 열었다. 두 방안의 어려움을 저울질한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아르노 강은 당시 얕아서 도보로 건널 수 있었지만, 물은 보병의 어깨와 기병의 안장까지 차올랐다. 1328년 6월 10일 아침, 피렌체인들은 다수의 기병과 1만 명의 보병을 앞세워 전투를 시작했다. 카스트루초는 행동 계획이 정해져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5천 명의 보병과 3천 명의 기병으로 피렌체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강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공격을 받았다. 또한 천 명의 경보병을 강둑 위로, 같은 수를 아르노 강 아래로 보냈다. 피렌체 보병들은 무기와 물 때문에 강둑을 오르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기병들은 소수가 건넌 후 강바닥을 헤쳐놓아 다른 이들의 강 건너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강바닥이 진흙으로 깊어 많은 말들이 기수와 함께 넘어졌고 많은 말들이 꼼짝 못하고 박혀 있었다. 피렌체 장수들은 병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보고 그들을 물러나게 하고 강 상류로 이동했다. 그들은 강바닥이 덜 위험하고 강둑이 상륙하기에 더 적합하기를 바랐다. 이 병사들은 카스트루초가 이미 앞서 보낸 군대에 의해 강둑에서 맞이했다. 그들은 가벼운 무장을 하고 방패와 투창을 들고 있었으며, 엄청난 함성과 함께 기병들의 얼굴과 몸에 투창을 던졌다. 말들은 소음과 부상에 놀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큰 혼란 속에서 서로를 짓밟았다.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카스트루초의 병사들과 적군 사이의 전투는 격렬하고 끔찍했다. 양측 모두 극도의 필사적인 상황에서 싸웠고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았다. 카스트루초의 병사들은 다른 이들을 강으로 몰아내려 싸웠고, 피렌체인들은 육지에 발을 디디고 뒤따라오는 다른 이들을 위해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물에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치열한 전투에서 그들은 장수들의 독려를 받았다. 카스트루초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들이 세라발레에서 이전에 정복했던 바로 그 적들이라고 소리쳤고, 피렌체인들은 서로를 꾸짖으며 소수에게 다수가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마침내 카스트루초는 전투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병사들과 적군 모두가 완전히 지쳤으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보고, 또 다른 보병 부대를 전진시켜 싸우고 있는 이들의 후방에 위치하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후자에게 후퇴하려는 듯이 대열을 벌리고 일부는 오른쪽으로, 다른 일부는 왼쪽으로 돌도록 명령했다. 이로 인해 생긴 공간을 피렌체인들이 즉시 이용하여 전장의 일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지친 병사들이 카스트루초의 예비군과 근접전을 벌이게 되자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 즉시 강으로 밀려났다. 양측의 기병은 아직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는데, 이는 카스트루초가 이 부대에서의 열세를 알고 지휘관들에게 단지
카스트루초는 보병을 물리치면 기병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기에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의 바람대로 되었다. 그는 피렌체 군대가 강을 건너 퇴각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보병에게 적의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창과 투창으로 공격했고, 아군의 기병과 합세하여 적을 맹렬히 공격해 곧 적을 패주시켰다. 피렌체 지휘관들은 기병이 강을 건너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보병을 강 하류로 보내 카스트루초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곳도 강둑이 험하고 이미 카스트루초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이 시도는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피렌체 군은 모든 전선에서 완패하여 겨우 3분의 1만이 도망쳤고, 카스트루초는 다시 한 번 영광을 얻었다. 많은 지휘관이 포로로 잡혔고, 나폴리 왕 루베르토의 아들 카를로와 피렌체의 장관 미켈란젤로 팔코니, 타데오 델리 알비치는 엠폴리로 도망쳤다. 전리품도 많았지만 사상자는 훨씬 더 많았다. 이런 전투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피렌체 군은 2만 231명이 전사했고, 카스트루초 군은 1,570명이 전사했다.
그러나 운명은 카스트루초의 영광을 시기하여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운명이 그의 생명을 보존해야 할 때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그가 오랫동안 추진해 온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 죽음만이 그를 멈출 수 있었다. 카스트루초는 하루 종일 전투의 한가운데 있었다. 전투가 끝났을 때, 그는 피곤하고 땀에 젖었지만 푸체키오 성문에 서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을 맞이하고 직접 감사를 표했다. 그는 또한 적이 패배를 만회하려는 시도를 경계했다. 그는 훌륭한 장군은 말에 가장 먼저 올라야 하고 가장 늦게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카스트루초는 아르노 강변에서 정오에 자주 부는 바람에 노출되었는데, 이 바람은 종종 매우 해롭다. 그는 이로 인해 감기에 걸렸지만 평소 이런 문제에 익숙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그날 밤 그는 고열에 시달렸고, 열은 급속도로 높아져 의사들은 치명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카스트루초는 파올로 귀니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만약 운명이 나의 성공이 약속했던 영광으로 이끄는 도중에 나를 앗아갈 줄 알았더라면, 덜 노력했을 것이고, 더 작은 국가라도 적어도 적과 위험이 적은 상태로 너에게 남겼을 것이다. 나는 루카와 피사의 통치에 만족했을 것이고 피스토이아를 정복하거나 피렌체를 그토록 많은 모욕으로 화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두 도시를 내 친구로 만들었을 것이고, 더 오래 살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더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며, 너에게 더 작지만 더 안전하고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를 좌우하려는 운명은 처음부터 이것을 인식할 만한 충분한 판단력을 내게 주지 않았고, 이를 극복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너는 많은 사람에게 들었겠지만, 나는 한 번도 숨기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소년 시절 네 아버지의 집에 들어왔는지, 모든 야심을 품은 영혼이 느껴야 할 그 모든 야망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으로서 어떻게 그에 의해 양육되고 그의 혈육인 것처럼 사랑받았는지, 그의 지도 아래 어떻게 용감해지고 네가 목격한 모든 운명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네 훌륭한 아버지가 죽을 때, 그는 너와 그의 모든 재산을 내게 맡겼고, 나는 내가 보여야 할 사랑으로 너를 키웠고, 내가 보여야 할 주의로 네 재산을 늘렸다. 그리고 네가 네 아버지가 남긴 재산뿐만 아니라 내 운과 능력으로 얻은 것까지 소유할 수 있도록,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네 아버지의 자식들에게 내가 빚진 감사의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나는 너에게 거대한 영지를 남기며, 이에 대해 나는 매우 만족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불안정하고 불안한 상태로 남기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너는 루카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네 통치에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또한 피사를 가지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본래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어서 때로는 복종할 수 있지만 항상 루카 출신의 통치를 경멸할 것이다. 피스토이아도 너에게 충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파벌로 갈라져 있고 최근 그들에게 가한 잔혹한 행위로 인해 네 가문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다. 너의 이웃인 피렌체 사람들은 우리에게 천 가지 방법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 죽음 소식을 토스카나 전체를 얻는 것보다 더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황제와 밀라노의 군주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그들은 멀리 있고 느리며, 그들의 도움은 오는 데 매우 오래 걸린다. 따라서 너는 네 자신의 능력과 내 용맹의 기억, 그리고 이번 최근의 승리가 가져다준 명성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네가 이를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피렌체 사람들과 협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큰 패배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전쟁이 나의 권력과 영광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지만, 너는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할 모든 이유가 있다. 그들과의 동맹은 너에게 이익과 안전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알고, 자신의 힘과 수단을 아는 것이다. 싸울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평화의 기술로 통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는 내 조언을 따라 행동하고, 이를 통해 내 일생의 노력과 위험이 얻은 것을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내가
내가 너에게 말한 것은 진실이다. 네가 나에게 두 배로 감사할 것이니, 내가 이 왕국을 네게 남겼고 그것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카스트루초 편에서 싸웠던 피사, 피스토이아, 루카 시민들이 그에게 왔다. 카스트루초는 그들에게 파올로를 추천하고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여 복종을 맹세하게 한 후 죽었다. 그는 자신을 알았던 사람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겼고, 그 시대 어떤 군주도 그만큼 헌신적으로 사랑받지 못했다. 그의 장례식은 모든 애도의 표시와 함께 거행되었고, 그는 루카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 묻혔다.
운명은 카스트루초에게 그랬던 것만큼 파올로 귀니지에게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카스트루초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올로는 피사를 잃었고, 그 다음에는 피스토이아를 잃었다. 겨우 루카만을 간신히 지켰다. 이 도시는 파올로의 고손자 시대까지 귀니지 가문의 손에 남아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된 바와 같이 카스트루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대인들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의 인물들과 비교해도 그러했다. 그는 평균 이상의 키에 완벽한 체형을 가졌다. 그는 우아한 외모를 지녔고, 사람들을 대할 때 매우 예의 바르게 대해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거의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머리카락은 붉은 기가 돌았고, 귀 위로 짧게 잘랐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모자를 쓰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매력적이었지만, 적들에게는 무서웠다. 그는 신하들에게 공정했고, 신실하지 않은 자들과는 거짓으로 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정복하고자 하는 이들은 사기로라도 이기려 했다. 그는 승리가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그것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곤 했다. 누구보다 위험에 맞서는 데 용감했고, 누구보다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데 신중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시도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신은 강한 자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약한 자는 항상 강한 자에 의해 벌을 받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대답할 때 예리하고 신랄했지만 예의 바르게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떤 관용도 기대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그렇게 하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날카롭게 말할 때 그가 조용히 들었던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있었다. 그는 자고새 한 마리에 1 두카트를 주게 했는데, 한 친구가 이를 꾸짖자 카스트루초는 “너라면 1페니 이상 주지 않았겠지.”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맞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1두카트가 훨씬 적은 돈이지.” 그를 경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에게 침을 뱉은 아첨꾼이 있었는데, 그 아첨꾼이 그에게 말했다. “어부들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잡기 위해 바닷물에 흠뻑 젖는 것을 감수합니다. 저는 고래를 잡기 위해 침에 젖는 것을 감수합니다.” 카스트루초는 이 말을 인내심 있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보상까지 했다. 한 사제가 그렇게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악덕이라고 말하자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것이 악덕이라면, 당신은 우리 성인들의 축제에서 그렇게 호화롭게 먹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 거리를 지나다가 그는 한 젊은 남자가 매춘굴에서 나오면서 카스트루초에게 들키자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나올 때가 아니라 들어갈 때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 친구가 그에게 매우 복잡하게 묶인 매듭을 풀어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보야, 묶는 데 그렇게 많은 수고를 들인 것을 내가 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나?” 자신을 철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항상 가장 좋은 것을 먹여줄 사람을 따라다니는 개와 같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오히려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집에 가는 의사와 같습니다.” 피사에서 리보르노로 배를 타고 가다가 카스트루초는 위험한 폭풍우에 크게 동요했고, 그와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비난하며 자신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카스트루초는 그것이 놀랍지 않다고 대답했는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그 가치만큼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평판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회에 갈 때 나무 조각 하나를 다른 것 위에 올려놓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것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아는 것이 더 낫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지 않고도 많이 마실 수 있다고 자랑하자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소도 그렇게 한다.” 카스트루초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한 소녀를 알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그를 비난하며 그가 여자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품위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가 그녀를 속였다.” 또한 매우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내가 쓰는 만큼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말을 듣자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내가 탐식가인 것보다 더 인색한 것이다.” 루카의 매우 부유하고 화려한 시민인 타데오 베르나르디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그의 집에 갔을 때, 타데오는 카스트루초를 비단으로 장식되고 아름다운 색채의 꽃과 나뭇잎 모양의 정교한 돌로 포장된 방으로 안내했다. 카스트루초는 입에 침을 모아 타데오에게 뱉었고, 그가 매우 당황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덜 모욕하기 위해 어디에 침을 뱉어야 할지 몰랐다.” 카이사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뜻이라면 나도 그렇게 죽고 싶다.” 어느 날 밤 많은 귀부인들이 모인 그의 귀족 중 한 사람의 집에 있을 때, 한 친구가 그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들과 춤을 추고 즐기는 것을 꾸짖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낮에는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밤에는 바보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카스트루초에게 부탁을 하러 왔는데, 그가 자신의 간청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렸다. 카스트루초가 그를 날카롭게 꾸짖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입니다. 당신은 귀가 발에 있으니까요.” 그러자 그는 두 배의 은혜를 받았다.
카스트루초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쉽다고 말하곤 했다. 내리막길이고 눈을 가린 채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불필요한 말을 많이 하며 부탁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부탁할 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보내시오.” 비슷한 사람이 긴 연설로 그를 지치게 하다가 마지막에 “아마도 제가 너무 오래 말해서 당신을 피곤하게 했을 겁니다”라고 말하자, 카스트루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이 한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으니까.” 그는 아름다운 아이였다가 나중에 멋진 남자가 된 사람에 대해 위험하다고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아내들을 남편들에게서 빼앗더니 이제는 아내들을 남편들로부터 빼앗기 때문이라고 했다. 웃는 질투심 많은 사람에게 그는 말했다. “당신이 성공해서 웃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이 불행해서 웃는 건가요?” 그가 아직 메세르 프란체스코 귀니지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 코를 한 대 때리게 해준다면 내가 무엇을 주면 될까요?” 카스트루초는 대답했다. “투구요.” 그를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도와준 루카의 한 시민을 처형한 뒤, 오랜 친구를 죽인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새로운 적을 죽였을 뿐이라고 했다. 카스트루초는 아내를 얻으려다 그만둔 사람들을 크게 칭찬했다. 그들은 마치 바다로 나가겠다고 말했다가 막상 때가 되면 거절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도자기나 유리 항아리를 살 때는 먼저 두드려보고 좋은지 확인하면서도 아내를 고를 때는 겉모습만 보고 만족한다는 사실이 늘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한번은 죽으면 어떤 방식으로 묻히고 싶은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해서요. 내가 죽고 나면 이 나라가 뒤집힐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수도사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프라 라체로네는 천국에 가고 우구초네 델라 파졸라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강을 지키려면 언제 식사를 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자라면 배고플 때 먹고, 가난하다면 먹을 수 있을 때 먹으시오.” 그의 신하 중 한 명이 가족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고 그는 말했다. “그가 당신에게 밥도 먹여주기를 신께 기도하겠소.” 어떤 사람의 집에 라틴어로 “신께서 이 집을 악인들로부터 지켜주시기를”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말했다. “주인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되겠군.” 한 거리를 지나다가 문이 아주 큰 작은 집을 보고 그는 말했다. “저 집은 문을 통해 날아갈 것 같군.” 그는 추방된 귀족들의 재산에 관해 나폴리 왕의 대사와 토론을 하다가 논쟁이 벌어졌고, 대사가 그에게 왕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카스트루초는 “당신의 왕은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라고 물었고, 좋은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왜 제가 좋은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의 재치 있고 의미심장한 말들을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도 그의 뛰어난 자질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44년을 살았고, 모든 면에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행운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불운의 기억도 가까이 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가 감옥에서 차고 있던 족쇄를 오늘날까지 그의 저택 탑에 걸어두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역경의 시기를 영원히 증언하고자 했다. 그의 생애는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이나 로마의 스키피오에 뒤지지 않았고, 같은 나이에 죽었다. 만약 운명이 그를 루카가 아닌 마케도니아나 로마에서 태어나게 했다면,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 둘을 모두 능가했을 것이다.